2. 뽀드득, 뽀드득... 지난 밤 수북이 쌓인 새하얀 눈길을 걷는다. 차가워진 공기를 들어 마시니
졸음이 싹 달아나면서 상쾌한 기분이 몰려든다.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출근 길을 서두르는 아
름씨는 문득 20년 전 엄마와 손을 잡고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며 걸었던 등교 길이 생각났다.
수많은 차들이 지나 간 후 더러워진 눈길을 조심스럽게 걷곤 했던 기억을 되새기면서, 이제는
더 이상 조심스러울 필요가 없는 새하얗고 깨끗한 눈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15년 전
저가 수소엔진 발명에 성공한 뷰티풀 펠로우 김다운씨의 사회적 환원이 없었더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덕분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수소엔진 차량 보급화 정책을 추진하였고 지금
은 대부분 차들에 수소엔진이 장착되어 있다. 환경과 경제성 두 가지를 해결한 공로를 인정 받
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아름다운 사회적기업가상’을 수상하게 된 김다운씨는 상금 전액을 전
국의 아름다운가게 업무용 차량 530대에 장착할 수 있는 수소엔진 제작비로 기증하는 아름다
운 선행을 하기도 하였다.
아름다운길 53번지에 위치한 아름다운가게 순환점은 아름씨 집에서 2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보통은 아침 9시에 집을 나선 후 천천히 길을 걸으며 일종의 산책을 하는 여유를 부리기
도 하지만 오늘은 월례회의가 열리는 지역본부로 출근해야 하기 때문에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도록 발걸음을 재촉한다.
순환점 활동천사 대표 박순례 할머니가 이미 도착하여 가게 차고 앞에 서 계신다.“천천히 걸
어. 그러다 넘어져.”라고 따듯한 말 한마디가 저 멀리 들려 온다.“가게 안에서 기다리지 추운데
왜 밖에 있어?”차가운 날씨에 코가 빨개진 박순례 할머니 얼굴을 보니 미안한 마음에 괜히 투
정 어린 말투이다. 아름씨가 아름다운가게 순환점 활동가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 중 하나는 어
릴 때부터 제 안방마냥 순환점을 드나 들었던 아름씨를 손녀처럼 귀여워 해주셨던 박순례 활
동천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물코초등학교 3학년 5반 교실에서 아름씨를 포함한 20명의 아
이들 앞에서 연두색 앞치마를 두르고 열정적으로 나눔교육을 하시던 박순례 활동천사와의 첫
만남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는 세월의 흔적인 주름이 얼굴 한 가득한 백발의 할머니로 아름
씨 앞에 서 있지만, 지난 반 세기를 나눔과 순환을 생활 속에서 몸소 실천해 오신‘박순례 활동
천사’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순환점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더욱이 새내기 활동가 아름씨의
든든한 멘토이기도 하다.
3. 아름씨는 서둘러 한 쪽 장갑을 벗고 연두색 잎사귀에 살포시 손을 대어 차 문을 연다. 아름씨
가“지역본부”라고 말하자 운전석 앞 알록달록한 릴라씨의“아름다운 아침입니다! 지금 바로 출
발합니다.”라는 경쾌한 인사와 함께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지난 토요일 순화점의 아름다운
길 나눔장터 수익금이 전국 곳곳의 아름다운길 나눔장터 중에서 최고를 기록했다는 자랑을 시
작으로 방글라데시 뷰티풀웍스가 지난 몇 년간 야심 차게 준비했던 업사이클링 가죽자켓이‘아
름다운 디자인상’을 수상한 기분 좋은 이야기, 네팔 1호 아름다운도서관의 주인공 럭시미씨가
네팔 최초 여성 교육부장관이 되었다는 깜짝 놀랄 소식까지, 아름씨는 박순례 할머니가 심심하
시지 않도록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 놓는다.
어느새 지역본부에 도착했다. 다행히 먼저 온 분들의 배려로 지하 10층까지 내려갈 필요 없
이 지하 1층 주차장에 빈 공간이 있어 그 곳에 차를 세울 수 있었다. 아름씨는 월례회의 시작 5
분전 간신히 도착함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박순례 활동천사를 모시고 지역본부 2층 대회의
장으로 향한다. 대회의장 중앙의 홀로그램은 이번 달에 출시된 지역 공익상품 중 하나인“예전
맛 그대로 육포”를 홍보하는 30여 년전 당시 활동했던 몇몇 선배들-지금은 사회 각 분야에서
왕성히 활발하고 있는 대표 사회적기업가들-의 엄지 손가락을 들며 추천하고 있는 모습을 만
들어 내고 있고, 이미 도착한 지역 모든 마을의 아름다운가게 활동가들과 활동천사 대표들이
지난 한 달간 있었던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오손도손 나누고 있다.
“1월 월례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아름다운가게 그물코처장님의 시작을 알리는 굵은 목소리
가 모든 이의 시선을 무대 스크린으로 향하게 한다. 오늘은 연말을 맞이하여 아름다운가게의
2043년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도약을 위한 2044년 10대 목표를 발표하는 것으로 시
작되었다. 한달 전 열린 꿈돋움 워크샵에 참가했던 전국 각지 아름다운가게 활동가들과 활동천
사들이 2박 3일간 열띤 토론과 사례 발표들을 통해 도출된 내용이었다.
“오늘은 특별히 네팔 히말라야산맥에서 30주년 기념하여 여행 중이신 53기 활동가분들과 영
상통화를 마지막으로 12월 월례회의를 마치겠습니다.”1시간의 월례회의가 끝날 즈음 아름씨
가 지난 몇 일간 손꼽아 기다렸던 순서가 드디어 찾아왔다. 3.., 2.., 1. 화면 가득 흰 눈으로 덮
인 히말라야산맥을 뒤로 손을 힘차게 흔들고 있는 8명의 아름다운가게 53기 활동가들이 보인
다. 아름씨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엄마의 모습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