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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지역문화자원 발굴조사 황학동-서울중앙시장
격동의 반세기, 서울중앙시장상인 이야기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본 책자를 중구문화재단 ‘2015 지역문화자원 발굴조사’
<황학동-서울중앙시장> 사업의 최종결과물로 제출합니다.
※ 본 보고서는 연구진의 독립된 연구 결과물로서
연구진의 소견은 중구문화재단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격동의 반세기, 서울중앙시장상인 이야기
변화의 한 가운데에서
여 는 말 : 우 리 가 모 르 는 전 통 시 장 7
연구 범위 : 서울중앙시장 근현대의 삶 8
<1> 타임라인 : 개발과 경쟁의 시대 10
서울중앙시장 이름변천사
1941~2015 서울중앙시장 탄생부터 지금까지
(1)서울중앙시장의 탄생 : 사람이 많은 곳에 자연스레 시장이 자리 잡다
(2)1950~60년대 : 서울의 대표적인 양곡 도매시장으로
(3)1970~80년대 : 포장마차 음식재료의 성지로 변신하다
(4)1990~2000년대 : 서울 상권의 지각 변동, 격화되는 경쟁 속으로
(5)2010년대 : 기로에 선 서울중앙시장
서울중앙시장지도 : 판매 품목에 따른 9개 부서
<2> 상 인 들 : 생 존 과 신 뢰 의 현 장 36
닭·해물부/제일상회 “단골 관계는 물건을 사고파는 게 끝이 아니에요.”
보리밥부/장수보리밥 “동네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동네 사람꺼 팔아줘야 해요.”
청과부/인도상회, 충북상회 “남아있는 이 사람들이 이제는 가족이죠.”
중앙통/미성상회 “중앙시장 물건은 싸고 좋아. 근데 불편하니까.”
신당지하상가 회센터/광주수산 “옛날에는 이 통로가 다 생선가게들이었어요.”
미곡부/금성상회 “쌀가게에서 왜 동물사료를 파냐고?”
돈부산물부/돈부산물 협의회 “순대는 더 이상 서민음식이 아니에요.”
돈부산물부/호남상회 “지금은 진공포장하고 라벨 찍어서 팔고 있어요.”
<3> 풍경의 기록 : 2015년 봄의 어느 날 80
닫는 말 : 시장의 다양성은 사람으로부터 98
7
여는 말
우리가 모르는 전통시장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오후 여섯 시 무렵, 왠지 모르게 소란스러운 공간. 가격
흥정이 벌어지고 인정 많은 상인들이 덤으로 이것저것 더 얹어주는 정다운 공간.
그러나 지나가버린 과거의 공간. 대형마트에 익숙해진 대도시 사람들이 흔히 떠올
리는 전통시장의 이미지이다. 특히, 지금의 20~30대에게 전통시장이란 어머니 손을
붙들고 따라갔던 놀이터이지 생필품을 구하는 생활의 공간은 아닐 것이다.
지역 공동체의 삶과 문화가 녹아든 장소로서 서민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전
통시장이 붕괴한다는 위기감으로 현재 지자체에서는 다양한 진흥 정책을 펼치고
있다. 마트에 비해 불편한 것이 문제인가 하여 주차장 등 편의시설도 구축하고, 연
구 사업도 벌이고, 전통 시장 고유의 분위기를 살려 관광 활성화를 꾀하기도 하며,
시장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문화작업도 다년간 이곳저곳에서 진행되었다.
연구팀이 처음 연구에 착수했을 때 전통시장에 대해 품고 있던 생각도 이러한 범
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그러나 연구를 진행해가면서 의문이 들기 시작하
였다. 전통시장은 정말로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 멈추어 그 때의 생활사를 보존해
야 하는 ‘박제된’ 공간인 것일까? 더 이상 전통시장을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막연
하게 옛 공간이라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아직도 장사하고 있는 상인들과 들락거
리는 손님들에게 전통시장은 어떤 곳일까?
연구팀은 전통시장이라고 하면 어떠한 이미지를 떠올리는지 20~30대들에게 무작
위적으로 물어보기 시작했다. ‘서비스가 불편하다’, ‘오래됐다’ ‘지저분하다’, ‘따뜻하
다’, ‘춥다’, ‘싸다’, ‘오히려 비싸다’ 등 사람마다 답변이 달랐다. 그 중 가장 많은 답
변은 ‘모르겠다’였다. 또 다른 질문을 던져보았다. ‘전통시장이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대답했고, 그 이유에 대한 대부분의 답변 또한
‘모르겠다’였다. 어렴풋하게 답변한 이들이 전통시장을 나와는 상관없는 공간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대하고 연구팀은 실제 전통시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누가
살고 있는지 들여다보고자 하였다. 또한, ‘전통’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 그 공
간이 현대를 살아가는 각각의 개인들에게 어떻게 의미 있는 공간으로 다가갈 수
있을지 모색해 보고 싶었다.
8
연구 범위
서울중앙시장 근현대의 삶
중구 황학동에 있는 서울중앙시장은 젊은 사람들에게 그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나
이가 지긋한 어른들 사이에서는 서울 최대의 쌀 시장으로 통한다. 50년대 생성된
이 시장은 다양하고 오랜 역사적 맥락들이 존재하기에 중요한 생활사 연구 표본이
다.
본 연구에서 다루는 서울중앙시장의 범위는 옛 양곡도매시장과 6, 70년대의 야채
시장에서부터 지금의 중앙통·미곡부·보리밥부·돈부산물·닭(해물)·식자재·포목부·청과부
까지 8개 부서이다. 80년대 이전의 야채시장은 마장로가 개설되기 전 도로 주변에
있었던 불법노점상들이 모여 이룬 것으로 서울중앙시장과 분리해서 이야기해야 한
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80년대 이후 서울중앙시장이 야채시장의 전통성을 이어갔다
는 정황들이 많이 발견되어 조사 범위에 포함하였다. 반면, 서울중앙시장의 한 부서
인 ‘가구부’는 부득이 본 조사 범위에서 제외했다. 양곡시장이 축소된 자리에 생겨
나 급속도로 확장한 황학동 주방·가구 시장은 일정 부분 지금의 서울중앙시장의 행
정 범위와 겹치지만, 이미 별개의 시장으로 분리된 데다 주방·가구시장의 총 규모가
서울중앙시장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연구의 첫 번째 장에서는 <타임라인>은 서울중앙시장을 중심에 두고 시대에 따라
시장을 둘러싼 환경들이 어떻게 변화하였고, 그것이 시장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를 정리하였다. 옛 신문자료와 한국역사박물관의 ‘황학동’ 등 여러 문헌자료를 참고
해 기본적인 타임라인의 뼈대를 구축하고, 구술 인터뷰 내용 중 관련이 있는 짧은
대목들을 따 와 구체성을 입혔다.
두 번째 장 <상인들>은 서울중앙시장을 이루는 각 부서의 상인 중 한 명 이상을
선정하여 구술을 통해 시장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타임라인>이 시
장을 둘러싼 외부 환경 변화에 초점을 두었다면, <상인들>은 구술을 통해 시장 내
부의 삶을 들여다본다.
세 번째 장 <풍경의 기록>에서는 현재 서울중앙시장의 모습을 사진과 그에 대한
설명을 통해 다루었다. 키워드별로 정리된 내용을 통해 현재 서울중앙시장에서의
삶의 결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9
10
타임라인
개발과 경쟁의 시대
11
서울중앙시장은 서울 중심부 중구 황학동에 있는 전통 도·소매 시장이다. 8·15해방과
6·25전쟁의 혼란 속에서 황학동 지역에 자리 잡은 서울중앙시장은 한때 남대문·동대문 시
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으로 불리었을 만큼 오랜 역사와 큰 규모를 자랑한다.
1950~60년대에는 서울의 최대 양곡도매시장으로 기능하였으며,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서울의 포장마차를 비롯한 음식점들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도매 시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인근 지역 주민들의 생활용품을 공급하는 소매 시장의 역할까지 서울중앙시장
은 도·소매를 아우르는 서민을 위한 종합시장으로 자리하고 있다.
시장을 구성하는 총 9개 부서1)는 그 역사와 명성의 무게만큼 복잡한 시대적·상황적 맥락
위에서 각각의 고유한 색깔을 형성해 왔다. 이 장은 각 부서들의 탄생과 번성, 그리고 쇠
락을 시장을 둘러싼 시대적 환경 변화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기 위해 연대별로 작성되었
다.
1) 중앙통·보리밥부·돈부산물(정육포함)·닭(해물)·식자재·미곡부·가구부·포목부·청과부
12
서울중앙시장
이름 변천사
1941년, <성동공설시장>
일제시기인 1941년 6월 7일, '성동공설시장'이 '신당동
308-2번지'에 설립된 기록이 있음.
1946년, <성동시장>
1946년 5월 1일 '신당동 175번지'에 '성동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사설시장 형성.
1950년, <성동중앙시장>
1950년 10월 20일, '신당동 140-28번지'에 신당동시장조합이
설립되어 새로운 시장이 '성동중앙시장'의 명칭으로 설치.
1962년, <서울중앙시장>
사단법인 서울중앙시장 운영회 설립. 이외에도 신당중앙시장,
성동중앙시장 등과 혼용되어 사용됨.
1972년, <성동중앙시장>
시장명칭을 '성동중앙시장'으로 변경.
1995년, <서울중앙시장>
'서울중앙시장 운영회'라는 이름으로 시장 재조직.
2002년, <서울중앙시장>
'서울중앙시장'으로 명칭 확정.
13
1940~1960년대
대표 사건
서울중앙시장에
영향을 준 사건
서울중앙시장의 역사
1945
광복
1950
~1952
한국전쟁
1941
6월 7일,
'성동공설시장'이
'신당동
308-2번지'에
설립된 기록
서울 시민이
소비하던
양곡의 70%
이상을
성동시장의
양곡시장에서
유통
1950년대
즈음 지금의
마장로
자리에 노점
위주의
야채시장
조성
1946
5월 1일 '신당동
175번지'에
'성동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사설시장 형성
1949
성동사설시장
점포수, 서울에
있는 사설시장 중
가장 많은 309개로
조사
1950
‘성동시장’ 설립
신당동시장조합설
립 (223개 점포,
양곡시장 포함)
1954
성동시장 점포수
350개 조사
양곡관리법 제정 1955
중앙시장의
중앙통(남북도로)
형성
청계천 복개
공사 시작
1958
1962
서울중앙시장 개설
(700개 점포)
서울 내 시장
현대화 추진
정부에서 농협
직판장 설치하고
양곡판매사업
시작
1964
황학동까지
청개천 복개 완료
1966
서울중앙시장 내
노점 자진 철거
1967
서울중앙시장 도로
포장공사 완료
참고 : 서울역사박물관, 『황학동』 , 2014
14
1970~1980년대
대표 사건
서울중앙시장에
영향을 준 사건
서울중앙시장의 역사
1986
아시안게임
1988
서울올림픽
1971 성동지하상가 개장
정부미 방출
등으로
양곡도매시장
서서히 축소
마장로
개통으로
대다수 야채
노점상들
강제 철거
1980년대
중앙시장에서
돈부산물 등
포장마차
식재료 시작
1980년대
포목부
양품부
청과부
전성기
1972
서울중앙시장의
명칭을
‘성동중앙시장’으로
변경
1973
성동지하상가에
화재 발생
청계고가도로
공사 완료
1976
서초동
양곡도매시장
조성
1977
마장로 개통 1979
지하철 2호선
공사 완료
1983
제2마장교에서
신답사거리까지
마장로 연장
1987
서울올림픽으로
주방현대화사업
진행
양재동
양곡도매시장
개설
1988
참고 : 서울역사박물관, 『황학동』 , 2014
15
1990~2010년대
대표 사건
서울중앙시장에
영향을 준 사건
서울중앙시장의 역사
1997
외환위기
2002
한일월드컵
대형 할인마트
등장
1993
1990년대
포목‧양품부
골목에
보리밥
가게들이
생겨남
동대문
거평프레야,
밀리오레,
두산타워 개장
양곡매매업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변경
1995
서울중앙시장
운영회 재조직
1999
신당지하상가 전면
개보수
왕십리뉴타운
조성 사업 시작
2002
‘서울중앙시장’으로
명칭 확정
청계고가도로
폐쇄
청계천 복원 시작
2003
서울중앙시장
현대화 개선사업
시작
2004
청계천 복원 완료 2005
삼일아파트
자리에 ‘황학동
롯데캐슬
베네치아’ 건설
2008
2009
신당지하상가에
‘신당창작아케이드’
개관
‘두산 위브 더
제니스’ 완공
2014
2015
서울중앙시장
주차장 완공
참고 : 서울역사박물관, 『황학동』 , 2014
16
(1) 서울중앙시장의 탄생
사람이 많은 곳에 자연스레 시장이 자리 잡다
‘서울중앙시장’이 위치한 현재의 황학동은 조선 시대 중반까지만 해도 특정한 지명이 없
었던 지역이었다. 조선 시대, 광희문을 기준으로 도성 밖에 위치하던 이 지역은 대부분
논, 밭 그리고 공동묘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황학동이라는 지명이 명칭으로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일제강점기, 경성부의 도시화 계획의 목적으로 황학동 일
대가 경성부에 포함되면서, 일제는 황학동 일대의 지대 용도를 주거용지와 수공업 용지로
변경·개발하였다. 황학동 일대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당시 일제는
현재 ‘서울중앙시장’이 위치한 지역의 일부 또한 주택지로 개발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으
나 용도가 변경된 대지는 당시 일제의 전쟁 준비로 결국 개발이 진행되지 못한 채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해방과 한국전쟁이 끝이 난 후, 한국 정부가 우선으로 해결했던 과제는 폐허가 된 서울
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주택을 건설하고 보급하는 일도 함께 진행되었는데, 지금의
서울중앙시장이 위치한 지역도 이때 부흥주택 건설지구로 분류되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당시 만들어진 연립주택단지는 이후 남쪽의 서울중앙시장 영역이 북동쪽으로 확대되면서
점차 시장 영역으로 편입되어, 지금은 서울중앙시장 영역에 완전히 포함되어 있다.
서서히 인구가 늘어나 서울의 주 거주지역으로 자리 잡은 황학동과 신당동 주민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하는 시장의 생성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본 강점기였던 1941
년 6월 7일, ‘성동공설시장’이 ‘신당동 308-2번지’에 설립된 기록이 있다. 그리고 해방 직후
인 1946년 5월 1일에는 당시 ‘신당동 175번지’에 ‘성동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사설
시장이 들어섰다.2) 하지만 당시의 ‘성동시장’은 해방 후 이곳저곳에 제멋대로 생긴 소위
‘야미3)’시장으로 불리는 무허가시장이었다. 무허가시장임에도 허가시장만큼 규모를 유지하
던 ‘성동시장’은 시청 당국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4) 1949년, 서울시는 무허가시장들을
2) 서울역사박물관, 『황학동』 , 2014, p. 105
3) 야미(ヤミ) : 암거래를 뜻하는 일본말
4) 『경향신문』 1948년 9월 2일자, 「무서가시장범람 배후의 경찰믿고 방임」
17
철거하거나 기존의 인가시장으로 편입시켰다. 이듬해인 1950년 10월 20일, ‘신당동
140-28번지’에 신당동 시장조합이 설립되어 새로운 시장이 ‘성동중앙시장’의 명칭으로 설
치되었다. 조합장은 박홍주였으며 점포수는 223개였다. 이때 지금의 양곡시장도 함께 조성
된 것으로 보인다.5)
(사진1) 중앙시장 내부 골목들의 특징은 구부러지지 않고 일정한 폭으로 직선으로 쭉 뻗
어 있다는 점이다. 5, 60년대 지어진 오래된 건물들이 주를 이룸에도 이렇게 골목들이 직
선으로 뻗어있는 까닭은 시장 일대의 건물들이 해방 후 정부 주도하에 계획적으로 세워진
연립주택단지이기 때문이다. 본래 주택이었던 대부분의 건물들은 남쪽의 중앙시장(양곡시
장) 영역이 북동쪽으로 확대되면서 점차 시장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5) 서울역사박물관, 『황학동』 , 2014, p. 105
18
(2) 1950~60년대
서울의 대표적인 양곡 도매시장으로
서울 최대의 양곡 도매시장
1950년 새로 설치된 ‘성동중앙시장’은 양곡 거래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시장이었다. 한국
인에게 양곡은 어떤 생필품보다 중요한 거래 품목이었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양곡의 거래
욕구를 더욱 절실하게 했다. 양곡 거래 활성화로 ‘중앙시장’은 남대문, 동대문 시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한때는 서울시민의 쌀과 야채를 70%이상 도맡아 공
급했을 정도로6) 당시에는 지방에서 재배되어 서울로 올라왔던 쌀 대부분이 ‘성동중앙시
장’을 거쳐 갔다. 중앙시장의 대도매상들은 생산지의 수집상들이 쌀을 사모아 온 것을 위
탁판매해주고 중개료를 받아 이윤을 남겼다.7)
“그때는 황학동 시장 밖에 노점 쌀가게들도 있었어. 이 시장이 장모님 계실
때만 해도 쌀가게가 100개가 넘었어. 근데 지금은 다 없어지고 40개밖에 안
남았어. 왜냐. 그때는 황학동이 쌀가게인 줄 알고 다른 구에서도 찾아왔어.
여기로. 양곡시장이 여기만 있었으니까.
시골에서 쌀이 올라오면 석발기로 도정을 해서 팔았어. 그때가 좋을 때야. 그
때가 장사가 잘됐지. 그때는 시골에서 하주8)들이 물건 가지고 여기에 맡긴
다음 여관을 잡아놓고 자. 그 사람들이 여관에서 화투 치면서 돈 줄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물건 갖고 오면 한 이삼일이면 다 팔거든. 그 돈 줄 때까지
여관에서 자고 먹고 하는 거야.”
- 허수정(75, 금성상회)
서울 최대의 양곡 시장이었던 만큼 당시 서울의 미곡 시세 역시 중앙시장에서 결정되곤
6) 『경향신문』 1971년 12월 1일자, 「시장 어제 오늘 <7> 중앙시장 (上)」
7) 『경향신문』 1971년 12월 1일자, 「시장 어제 오늘 <7> 중앙시장 (上)」
8) 하주(荷主) :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꾸려 놓은 물건인 하물(荷物)의 주인을 일컫는
말. 일본식 표현.
19
했다. 지금은 쌀에 대한 이야기를 좀처럼 뉴스에서 찾아보기 힘들지만, 쌀값이 불안정했던
당시에는 쌀의 시세가 서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정보였기 때문에 일간지에서는 ‘성동중앙
시장’의 쌀값을 참고하여 쌀의 시세를 기재하곤 했다. 그 밖에도 일간지들은 정부 배출미
등 쌀 시세에 영향을 주는 사건에 대한 의견을 구할 때도 중앙시장의 양곡상인들의 말을
참고하곤 했다.9)
뚝섬, 천호동 및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야채가 서울로 들어오던 곳
당시 서울의 3대 시장으로 불리었던 남대문, 동대문 시장과 중앙시장의 차이점이 있다면,
다른 두 시장이 종합시장으로서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품목들을 전체적으로 다루었던
데 반해 중앙시장은 대부분의 점포가 미곡상과 야채상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서울
최대의 양곡 시장이었던 중앙시장은 양곡만큼이나 야채 역시 매우 활발하게 거래되었다고
한다. 야채의 경우 뚝섬, 천호동 및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반입되어 서울 시내 타 시장에
서 거래되기 전에 이 중앙시장을 경유했으며 실제 야채 시세가 여기에서 좌우될 정도였
다.10)
야채 도매시장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당시의 중앙시장은 김장시장으로도 유명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장은 가정마다 다음 한 해 동안 먹을 김치를 준비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그만큼 각 신문에서는 김장철이 되면 어느 곳에서 ‘김장시장’이 열리며, 어느 시장의 배추
값과 무값이 싼 지에 대한 정보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중앙시장은 50년대부터 김장시장이
열렸던 시장 중 한 곳으로 1970년대에는 용산·청량리와 함께 서울 시내 주요 김장시장의
하나로 부상했다. 야채를 하역하는 일을 독점하기 위해 조직된 폭력조직도 있었을 정도
로11) 야채 거래량이 많았던 중앙시장은 매년 김장철이 되면 배추와 무를 가득 채운 트럭
과 이를 사기 위해 찾아오는 소매상, 일반 손님들로 가득했다.12)
9) 『동아일보』 1955년 5월 27일자, 「쌀 만환대를 돌파」
10) 서울역사박물관, 『황학동』 , 2014, p. 70
11) 『동아일보』 1964년 7월 17일자, 「야채하역독점 획책 깡패들이 폭행까지」
12) 『경향신문』 1967년 11월 1일자, 「겨울시정(4) 김장」
20
(3) 1970~80년대
포장마차 음식재료의 성지로 변신하다
경제개발과 함께 진행된 서울시 토목공사
1960년대부터 서울시는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한 심각한 주택부족과 도로 등의 인프라
부족 문제를 겪게 된다. 박정희 정부는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 도심에 산재해있
던 불량주택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현대식 상가아파트를 건설했다. 또한, 교통문제를 해결
하기 위한 고가도로와 교량 건설 등의 토목공사도 함께 진행되었다. 지금의 ‘황학동 롯데
캐슬 베네치아’ 자리에 있었던 ‘삼일시민아파트’ 건설과 청계천 복개사업, 청계천 고가도로
건설도 이 당시에 이루어졌다.
시장 현대화와 성동지하상가
도심·부도심 정비를 목적으로 진행된 토목공사는 1970년대 들어 시장현대화로 이어졌다.
당시까지만 해도 서울 도심의 내로라하는 대부분 시장들은 소방도로와 소화시설은 물론
제대로 된 변소시설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서울시는 시장현대화계획을 세우고 1
백 70억 원의 민간자본을 유치해 도심에 있는 4개의 시장13)에10층 이상의 현대식 상가건
물을 세우고 변두리 시장엔 지하 1층, 지상 3층의 상가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14)
이 시기의 중앙시장 또한 민간자본 유치를 통한 시장 현대화사업과 지하철 건설사업과
맞물려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지금 중앙시장의 지하에 위치한 ‘신당지하상가’ 건설이 바로
그것이다. 1971년 ‘성동지하상가’라는 이름으로 건립된 이 지하상가는 소방도로 확보와 도
시 미화 등의 이유로 폭 8m의 길 위에 있던 800여 개의 지상의 노점들을 지하로 이전하
는 것을 목표로 건설되었다. 하지만 ‘성동지하상가’의 건설이 모든 상인의 환영을 받으며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몇몇 시장 노점상들은 지하상가에 들어서려면 1인당 10만 원 이상
13) 동대문시장, 대신시장, 남대문시장 등
14) 『매일경제』 1971년 2월 8일자, 「도심지 4시장을 고층화」
21
씩을 내라는 요구에 ‘돈이 없는 영세 상인들은 지하상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시장에서
쫓겨나게 됐다’며 공사를 못 하게 방해하기도 하였다.15) 이외에도 공사비 문제로 서울시와
시공업자 사이에 소송이 벌어지는 등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결국, 조성
된 800여 개의 점포 중 절반을 채우지 못한 채 개장한 ‘성동지하상가’는 이후에도 여러
문제에 휩싸였다. 1974년엔 큰 화재가 발생하여 점포 150여 개가 전소하고 1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16) 그리고 이에 대한 피해보상과 관련한 소송이 발생해 상가 복구가 지
체되기도 하였다.17)
전성기를 누렸던 양곡 도매시장의 축소
서울시의 시장현대화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서울 시내에서 양곡이 가장 많이 거
래되었던 중앙시장의 양곡 도매시장은 차츰 그 명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한때 하루 평균
1만여 가마의 쌀이 거래되기도 했던 양곡 도매시장은 1965년부터 정부가 쌀값을 통제하
기 위해 직접 정부미를 방출하고 나서부터 점차 시장의 규모가 축소되기 시작했다. 하루
에 2~3천 가마의 쌀을 취급하던 도매상들은 하루 10가마의 쌀을 파는 소매상으로 전락했
고18), 60여개의 미곡상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20여개 점포는 폐점하기에 이르렀다.19) 동
대문·남대문 시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중앙시장은 1970년대에 들
어 양곡 도매시장의 축소와 함께 조금씩 사양의 길로 들어섰다.
마장로 개통과 함께 사라진 야채상인들
신당동에서 황학동을 가로질러 마장동까지 이어지는 마장로가 개통되면서 중앙시장의 양
곡 도매상과 야채상들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마장로가 개통되기 전의 그곳은 수많은 야
채 노점상들이 진을 치고 있던 자리였다. 경제개발 5개년(1961년~1965년)을 필두로 도로·
주택·시장 등의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수많은 야채 노점상들이 골칫
거리였다. 노점상들과 노점을 철거하고자 하는 정부 사이에서 잦은 갈등이 일어났고,20) 결
15) 『경향신문』 1970년 11월 24일자, 「중앙시장 영세상인들 대책요구코」
16) 『동아일보』 1974년 1월 1일자, 「1명 소사 성동중앙시장에 불」
17) 『동아일보』 1975년 8월 27일자, 「불탄 성동지하상가 일관성없는 시장허가」
18) 『경향신문』 1971년 12월 1일자, 「시장 어제 오늘 <7> 중앙시장 (上)」
19) 『매일경제』 1969년 8월 30일자, 「시장순방(13) 중앙」
20) 『동아일보』 1962년 10월 19일자, 「19일 새벽 강체철거, 중앙시장 노점 상인 반대소
동」
22
국 1979년 마장로 개통으로 인해 많은 야채 노점상들이 쫓겨나거나 그 자리를 옮겼다. 마
장로 개통은 야채 노점상뿐 아니라 양곡 도매시장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79년 마장
로가 개통된 후에도 양곡 도매시장 구역은 대형트럭의 접근이 쉽지 않았으며 주차시설도
갖추어지지 않았다. 이런 조건으로 인해 대량물류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산지 직거래·포장
미 판매 등이 시작되자 양곡 도매시장의 거래 물량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21)
“옛날엔 배추도 많이 팔고 김장시장이 컸는데, 그게 없어졌어. 길가에 있었는
데. 고춧가루는 저기 안쪽에 있었고. 길가 마장로에 분포되어 있었지. 지금은
다 없어졌어. 아무래도 소비가 옛날하고 다르잖아. 지금은 마트가 많이 생겼
으니까. 지금 시장에는 야채가게가 별로 없잖아. 옛날에는 야채가게가 많았
지. 배추도 시골에서 다 절여서 오지.” 
- 진화자(58, 미성상회)
서울 지역 포장마차 음식재료의 성지가 되다
마장로 개통 후 1980년대부터 점점 축소되기 시작했던 야채 골목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바로 돈부산물이었다. 돈부산물이 중앙시장의 주요 품목으로 거래되기 시작한 가장 큰 이
유는 포장마차 제작소를 비롯한 주방가구를 제작·판매하는 곳이 인근 지역에 많았기 때문
으로 보인다. 서울시는 1960년대에 들어서부터 도심지 인구 과밀 현상이 새로운 사회 문
제로 두드러질 만큼 인구 비대화 현상을 겪었는데, 그중에서도 황학동은 서울 최대의 인
구밀집지대로 꼽혔다. 인구가 많은 만큼 중앙시장 주변을 비롯한 황학동 일대에는 밤마다
4, 50대의 포장마차가 줄지어 늘어설 정도였다고 한다.22) ‘서울 일대의 포장마차 음식재료
는 중앙시장에게서 나온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1980년대의 중앙시장은 돈부산물을 포함
한 닭, 해물 등 포장마차에서 판매하는 안줏거리의 음식재료들을 많이 판매했다. 마장로
개통으로 인해 마장동 축산물시장으로부터 돈부산물 재료를 공급받기 쉬웠다는 점도 이점
으로 작용했다.
최종무 :  처음에는 순대하고 편육을 많이 했지. 옛날 잔치 음식엔 편육이 꼭
들어갔어요. 편육이 없으면 잔치를 못할 정도로 중요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당시에 중앙시장에서 편육을 많이 했었어요. 옛날에는 곱창 같은 게 없었어
21) 서울역사박물관, 『황학동』 , 2014, p. 85
22) 『동아일보』 1983년 1월 10일자, 「서울특별시 이상비대증앓는 축소한국 <2> 인구증가
(上)」
23
요. 순대만 만들었지. 머릿고기랑 순대.  70년대부터 순대집이 많이 생겼나 그
래요. 제가 82년도에 (중앙시장에) 들어 왔는데, 그 당시에도 순대하고 편육
만드는 가게가 많았었어요. 그리고 옛날에는 포장마차가 많았죠. 주로 포장마
차에 납품을 많이 했죠. 
송찬경 : 옛날에 저 같은 경우에는 잘 될 때를 비교하면 보통 1500cc 승용차
있잖아요. 그걸 두 달 만에 현금으로 뺐으니까(샀으니까).  내 생활비 쓰고. 그
정도까지 됐었는데. 지금은 택도 없죠. 그때가 90년대.. IMF 전에.. 93년도 그
럴 때. 90년도 초반 그때까지만 해도 잘됐었죠. 지금은 뭐 (잘 안 되고 있죠.)
  - 최종무(63, 부산물협회 회장), 손찬경(50, 부산물협회 총무)
소매 위주였던 포목부와 양품부의 활약
쌀과 야채가 주를 이루긴 했지만, 1950년대부터 중앙시장은 일용잡화상에서 봉제, 의류,
청과, 생선 및 건어물까지 취급하는 종합시장이기도 하였다. 도매 비중이 높고 규모가 컸
던 쌀과 야채를 제외한 나머지 품목들은 주로 소매 위주로 거래되었다. 1970, 80년대 들
어서면서 양곡시장과 야채시장이 다소 축소되긴 하였으나, 중앙시장을 찾는 사람들은 여
전히 많았다. 황학동, 신당동, 약수동, 왕십리 등 시장 인근 지역의 많은 인구가 생필품을
사기 위해 중앙시장을 이용했고, 굳이 도매가 아니더라도 중앙시장의 쌀과 야채가 싸다고
소문이 난 탓에 천호동을 비롯한 서울 동북권 지역 사람들까지 이곳에서 장을 봤다고 한
다.
소매 위주의 점포 중에서도 특히 포목부와 양품부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포목부의 주요
상품이던 한복과 이불은 당시 신혼부부들의 필수 혼수품이었으며, 포목부와 미곡부 사이
에 있던 술집 (속칭 ‘방석집’) 아가씨들 또한 이곳에서 자주 한복을 맞추었다고 한다. 장사
가 잘되던 1970, 80년대에는 수선과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기술자를 따로 둘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 중앙시장의 포목부는 ‘광장시장’의 물건을 떼어다 팔곤 했는데, 당시에는 동대
문 의류시장이 도매만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일반인들은 중앙시장 포목·양품부에서 의류,
신발, 악세사리 등을 구입하곤 했다. 아동복 역시 매우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매년 설이
되면 중앙시장 포목·양품부 골목은 아동 한복을 사기 위한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다.
80년대는 지금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잘됐죠. 그때는 뭐 대단했죠. 천호동 이
쪽에서도 저쪽에 화양리 쪽이나 동북권 쪽에서도 여기 와서 장을 보곤 했어
요. 잠실 쪽이나 강 건너 사람들도 여기 와서 장을 엄청 많이 봤어요. 그 당
24
시에는 옷가게도 엄청 많았어요. 지금이야 관광객들 유치하려고 (동대문 시
장이) 낮에도 열리지만, 그때는 새벽에 열었다가 새벽에 닫고 가고 그랬어요.
도매만 하던 시절이니까. 근데 (중앙시장은) 소매를 위주로 한 거죠. 그때는
하여튼 장사 안 되는 데 없었어요. 사람 밀려다니고 그랬어요. 
- 윤재림(59, 장수보리밥)
한때 큰 도매시장이었던 청과부
중앙시장의 청과부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 역시 1970, 80년대였다. 지금은 청과부 골목에
남은 몇 집만이 소매로 장사를 하고 있는 수준이지만, 당시에는 꽤 큰 청과 도매시장이었
다고 한다. 매일 새벽마다 과일을 가득 담은 트럭이 지방에서 올라왔으며, 아침이면 서울
각 지역의 과일을 파는 소매점에서 과일을 사기 위해 중앙시장 청과부를 찾았다. 지금의
청과부 골목에서부터 황학동사무소까지 이어지는 길이 전부 과일가게였을 만큼 상당한 규
모를 자랑하던 중앙시장 청과부는 1990년대에 들어 약수동, 신당동, 황학동, 왕십리 등 중
앙시장 주변 지역의 재개발과 함께 들어선 아파트, 그리고 그 아파트와 함께 등장한 대형
마트 등의 영향으로 쇠락하기 시작했다.
신대화 : 도매도 많이 하고 세금도 많이 내고 그랬는데, 지금은 장사가 안되
니까 세금도 별로 못내. 나이 먹어서. 
단골손님 : 옛날엔 다 도매상이었어. 
강승복 : 낮 열두 시에 장사가 끝나는 집도 있었지. 트럭 가지고 와서 여기서
사서 돌아다니면서 팔고 그랬지. 자두도 시골에서 농사 진 거 따다가 경매해
가지고 들어오면 다 보내주고 그랬지. 집집마다 몇 채씩 들어왔어. 
강승복 : 옛날에는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요. 골목에. 차들이 새벽 한 시, 두
시. 열두 시부터.. (오기 시작했으니까)
신대화 : 새벽에 두, 세시에 물건이 막 들어오니까. 우리들은 새벽 두, 세시면
문 열어. 근데 지금은 그런 곳이 없어.
단골손님 : 옛날엔 그런 사람들이 직접 들어왔어 청량리같이. 가락동 시장같
이. 
강승복 : 우리도 김천에서 직접 오고. 제주도에서 귤이 수박이랑 다 들어왔었
어. 
- 강승복(57, 인도상회), 신대화(73, 충북상회), 단골손님
25
(4) 1990~2000년대
서울 상권의 지각 변동, 격화되는 경쟁 속으로
전통시장 상권의 큰 변화
서울 전체를 한두 시간 거리로 좁힌 지하철의 등장은 서울 전통시장 상권에 매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대문 밖에 있는 부도심 시장들은 지하철의 등장으로 도심 내의 거대 상
권과 부득이하게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실제로 서울역, 시청 앞, 종로,
을지로입구, 동대문, 서울운동장역 등 지하철역은 남대문·명동 지역 상권과 동대문 지역
상권에 사람을 더욱 몰리게 했다.23) 지하철 개통과 동시에 진행된 지역 주택 개발 역시
기존 시장 상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80년대부터 진행된 강남 주택개발은 자연스
럽게 강남 지역의 전통시장 개발로 이어졌고, 기존 강북 상권에 대항하는 강력한 상권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서울 상권의 지각변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던 1988년, 양재동에 양곡도매시장이 개설되었
다. 경부선, 구마선, 영동선 고속버스의 서울 기·종점인 서울고속터미널의 근처에 자리 잡
은 양재동 양곡도매시장은 양곡 유통에서 매우 유리한 입지였다. 양재동 양곡도매시장이
개설됨에 따라 중앙시장 양곡부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정부의 양곡정책, 백화점, 슈퍼
등 새로운 유통 업체들의 등장으로 점차 축소되고 있었던 중앙시장 양곡 도매시장은 이
사건을 계기로 급속하게 위축된다. 한때 서울시 전체 양곡의 70%를 공급했던 중앙시장의
양곡 도매상들은 중앙시장을 떠나거나, 가구점 등으로 전업하여 1992년에 남아있는 양곡
도매상은 50개에 불과했다.24)
23) 『매일경제』 1985년 2월 18일자, 「재래시장 개발따라 시장상권 “대이동” 현상」
24) 『매일경제』 1992년 10월 30일자, 「한때 한국최대 양곡 도매 신당동 중앙시장 “사양
길”」
26
아파트 재개발 열풍
80년대 진행되었던 불량주택을 개량할 목적으로 진행된 아파트 재개발 산업은 90년대에
이르러 급물살을 타게 된다. 80년대 이르러 도매시장보단 지역 소매시장으로서의 역할이
커진 중앙시장의 입장에서는 잇따라 이어지는 아파트 재개발 산업이 그리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성동구, 중구 지역 기존 주택에 사는 주민들이 중앙시장의 주 고객이었기 때문
이다. 아파트 재개발로 중앙시장 주변 지역의 주택 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고 고
층 아파트가 건설된 지역에는 자연스럽게 대형마트가 들어섰다.
“여기 이마트 청계천점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장사가) 너무 안 되는 거야. (...)
마트에서 일주일치 장을 다 보잖아. 배달까지 해주지. 아무래도 직장 다니는
엄마들은 집에 들어가는 길에 여기서(중앙시장)에서 사갖고 가기에는 무겁고
힘들지. 이런 것들이 점점 태가 나는 거지. (...) 아파트가 생기기 전에는 저기
청구동, 신설동에서도 다 왔지, 저쪽 약수동에서도 왔지. 여기 왕십리 뉴타운
개발되기 전에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도 다 여기(중앙시장) 다녔던 거야. (...)
나 시집올 때만해도 저런 아파트가 없었어. 다 주택이 있었어. 약수동도 주택
이여가지고 다 이리로 장을 보러 왔어. 명절 때 되면 어마어마했어. 이렇게
다니지도 못해. 틈새로 다녀야 했어. 사람 많아가지고. (...) 어디고 다 마찬가
지야. 재개발하면은 거기 주택 집에 살던 사람들이 없어지니까. 아파트 지으
니까. 거기 아파트 밑에 상가가 생기잖아.” - 강승복(57, 인도상회),
포목·양품부 자리가 보리밥부로 바뀌다
기존 의류도매상가로 기능하던 동대문 의류시장은 1990년대 들어 도매뿐 아니라 일반
소매 고객들에게도 그 문을 열기 시작했다. 쇼핑몰 ‘거평 프레야’(현 케레스타)를 시작으로
조성된 동대문 패션타운은 서울뿐 아니라 수도권에서도 옷을 사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붐볐다. 동대문과 가까운 곳의 위치했던 중앙시장의 포목, 양품부를 찾던 사람들 또한 자
연스럽게 중앙시장에서 동대문으로 발길을 옮겼고, 한때 중앙시장의 한구석을 차지하던
수많은 포목, 양품 가게들은 한둘씩 문을 닫아야만 했다. 기존 포목과 양품을 파는 가게들
로 가득했던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보리밥 가게였다. IMF 경제 위기로 가격이 싼 음식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보리밥을 찾는 손님들이 많아질수록 보리밥을 파는 가게는 늘어났고,
포목부로서 기능하던 중앙시장의 한 골목은 보리밥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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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예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현재의 한산한 포목부 골목
포장마차 노점의 감소
1990~2000년대 양곡과 야채 도매시장이 축소되고, 아파트 건설 등으로 소매 고객들이
줄어들고 있는 와중에도 중앙시장을 굳건히 지키고 있던 품목은 돈부산물로 대표되는 포
장마차 음식재료 도매 업체들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돈부산물·닭부산물·해물 등 포
장마차 음식재료의 성지로 자리 잡은 중앙시장 안의 도매 업체들도 2000년대에 들어 위
기를 맞게 된다. 첫 번째 위기는 바로 포장마차 노점상의 감소다. 1989년 4,325개소였던
서울시의 포장마차는 20여 년이 지난 2013년에는 869개소로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아래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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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서울시 노점상 추이
자료 : 서울시민청
프랜차이즈 업체의 위협
중앙시장 안의 음식재료 도매상들의 두 번째 위기는 자영업의 위기와 함께 찾아왔다. 경
기 악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한 소자본 외식업 자영업자의 몰락은 곧 중앙시장 식자재
도매상의 고객 감소로 이어졌다. 대신 프랜차이즈 창업이 증가했지만 식자재 도매상의 매
출과는 관계가 없었다. 프랜차이즈 업체의 경우, 식품 제조와 서비스에 필요한 식자재를
본사에서 직접 공급(유통)하기 때문이다.
“(경기가 안 좋아서) 물건이 덜 나가는 것도 그렇지만서도 일단은 옛날에 비해
서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까 마진이 별로 없어져요. 프랜차이즈 쪽들이 많아지
면서 힘들어졌죠. 프랜차이즈에서 이런 물품을 영업집에다 대줘요. 이런 일반
음식점들이 없어지는 대신에 프랜차이즈로 하는 음식점들이 많아지는 거예
요.“ - 박경선(46, 제일상회)
연도 포장마차 손수레 차량노점 좌 판 기 타 계
1989년
4,325
(21.3)
7,797
(38.4)
569
(0.4)
7,614
(37.5)
-
20,305
(100%)
2000년
1,809
(9.8)
6,037
(32.7)
1,900
(10.4)
8,718
(47.2)
-
18,464
(100%)
2013년
869
(9.8)
2,071
(23.5)
736
(8.3)
2,770
(31.4)
2,380
(27.0)
8,826
(100%)
29
(5) 2010년대
기로에 선 서울중앙시장
도소매 비율의 변화
해가 다르게 전통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현상은 서울중앙시장 상인들의 심각한
경제적 손실로 이어졌다. 그 중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임대료마저 감당하기 힘든 상인들은
장사를 접거나 서울중앙시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게를 옮겼다. 서울중앙시장을 찾는 사
람들이 줄어드는 현상은 상인들의 도소매 비율 또한 변화시켰다. 상인들의 말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울중앙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도매 위주의 상인들도 소
매 비중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시장 자체에 사람들이 없는 탓에 소매 판
매는 기대하기 힘든 수준이라고 한다. 도매 위주의 판매 중에서도 소매를 다루던 미곡부
와 돈부산물부의 상인들은 현재 소매는 거의 하지 않으며, 예전부터 도매로 거래를 해왔
던 사람들과 관계를 지속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한때 큰 규모
의 청과도매시장이었던 청과부 상인들은 현재 도매 판매는 거의 되지 않고, 소매만 간간
이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재 남아있는 청과부 상인들의 다수는 상가점포를 자가 소
유하고 있어 임대료를 따로 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중앙통 정문과 후문의 다른 분위기
주로 소매 위주의 상인들이 밀집한 중앙통은 하나의 품목을 취급하는 도매 위주 부서와
는 달리 여러 가지 품목의 상품들을 다양하게 취급하고 있다. 그렇기에 중앙통은 서울중
앙시장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시장 자체를 찾는 사람들이 줄
어들자 서울중앙시장의 정문과 후문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정문 쪽의 중앙통은 지하
철, 버스 등 교통편의시설이 잘 구비되어있어 여전히 소매고객이 많은 편인데 반해, 후문
쪽의 중앙통은 상대적으로 이용고객이 적어 한산해진 것이다. (사진3) 이러한 사정으로 현
재 중앙통의 상인들은 후문 쪽으로 갈수록 도매 비중이 높은 편이다.
30
(사진3) 같은 시각, 정문에서 바라본 중앙통의 모습과 후문에서 바라본 중앙통의 모습. 정문 쪽에 비
해 후문 쪽의 중앙통이 비교적 한산하다.
31
(사진6) 2015년 7월 완공된 서울중앙시장 공영주차장. 뒤로 두산위브더제니스가 보인다.
시장 내 주차장 건설에 상반된 상인들의 의견
2015년 7월, 서울중앙시장에도 주차장이 건설되었다. (사진7) 서울중앙시장 내 주차장에
대한 필요성은 상인들 사이에서 오래 전부터 이야기되던 바였다. 멀리서 찾아오거나 물건
을 다량으로 구입하는 손님은 자동차를 몰고 오는 편이 많은데, 시장 내 주차장이 없어
많은 불편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도매 비중이 높은 상인일수록 주차장 건설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상인들의 요구에 맞추어 최근 완공된 서울중앙시
장 주차장은 몇몇 상인들에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이 소식이 모두에게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주차 장 건설이 새로운 갈등을 야기
한 것이다. 바로 소방도로 확보 문제다. 오랜 전부터 서울중앙시장과 주방가구시장의 상
인들은 본인들의 점포 앞 도로까지 취급하는 상품들을 진열하곤 했었다. 그렇기에 상인들
과 구청 사이에 소방도로 확보 문제는 예전부터 존재해 왔다. 그런데 주차장이 건설된 후
이 문제가 더욱 가시화된 것이다. 최근 중구청에서는 서울중앙시장과 주방가구시장의 소
방도로 확보를 위해 상인들의 점포 밖 상품 진열을 제재하고 있으며, 이에 많은 상인들은
‘가뜩이나 장사가 안 되는데 상품진열도 못하게 하니 장사가 더 안 된다’며 불만을 토로
하고 있다. 소방도로 확보 문제는 보리밥부 골목 중앙에 있는 포장마차 노점들에게는 더
32
큰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포장마차 노점들이 골목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노점 철거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포장마차 노점상 상인들은 소방도로 확보 문제로 장사를 하지 못하
게 될까 우려하고 있다.
(사진8) 보리밥부 골목 중앙에 위치한 포장마차 노점들
전통시장 인근의 현대식 주상복합
지금의 서울중앙시장이 처한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미지는 바로 아래의 사진(사진
4)일 것이다. 국내 최대 규모의 양곡 도·소매시장’ 이라는 간판 문구가 무색할 정도로 축
소된 양곡시장 사이로 주상복합 아파트가 우뚝 서있다. 최근 황학동 주변에는 ‘두산 위브
더 제니스’ 외에도 왕십리뉴타운의 ‘텐즈힐 아파트’, ‘황학동 롯데캐슬 베네치아’ 등 여러
현대식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1980년대부터 진행된 아파트 개발 사업으로 인해
기존 고객을 상당수 잃은 서울중앙시장 상인들에게 시장 주변에 건설된 주상복합 아파트
는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특히 옛 삼일아파트를 헐고 지은 ‘황학동 롯데캐슬 베네
치아’ 저층부 상가에는 대형할인마트, 유명 커피숍, 찜질방 등이 입점해있어 서울중앙시장
을 어려움에 처하게 하고 있다. (사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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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양곡시장 사이로 우뚝 서있는 주상복합 아파트 ‘청계천 두산 위브 더 제니스’
(사진5) 황학동 롯데캐슬 베네치아’ 저층부 상가에는 대형할인마트, 유명 커피숍, 찜질방 등이 입점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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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
생존과 신뢰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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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60년이라는 시간동안 서울중앙시장은 시대적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해왔다. 그렇다면 역동적인 시장 안에서 상인들은 어떻게 살
아왔을까. 이 장에서는 전통시장을 구성하고 있는 상인들을 대상으로 거
래 습성, 전통시장 내의 인간관계, 외부 환경으로부터 불어 닥친 위기를
감지하고 대응하는 방식 등 삶의 굴곡과 버티는 힘에 관한 구술 작업을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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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해산물부
“단골 관계는 물건을 사고파는 게 끝이 아니에요.”
제일상회 박경선
인터뷰 일자 : 2015년 4월 7일
이름 : 박경선(46)
영업기간 : 15년
취급물품 : 해수산물(홍합, 꼬막, 멍게, 해삼 등 안주감 수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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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중앙시장에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이들은 아마도 음식재료 도매상들일
것이다. 포장마차를 비롯한 술을 파는 음식점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중앙시장 음식재료 도
매상들은 돈부산물·닭부산물·해수산물 등 다양한 품목을 취급하고 있다. 그 중 닭부산물과
같은 구역을 공유하고 있는 해수산물 가게는 시장의 성격에 맞게 다른 소매 시장의 해산
물 가게와는 달리 생선은 팔지 않고, 홍합, 꼬막, 멍게, 해삼 등 안줏감 해산물을 취급하고
있다.
포장마차 등 외식업 개인 자영업자에게 해산물을 판매하는 이들에게 어려움은 자영업의
위기와 함께 찾아왔다. 행정단속으로 인한 포장마차 점포수 감소 또한 중앙시장 음식재료
도매상들에게는 위기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반대급부로 늘어난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이들에게 새로운 위협이었다. 프랜차이즈 업체는 식품 제조와 서비스에 필요한 식자재를
본사에서 직접 공급(유통)하기 때문이다.
중앙시장에서 15년간 해수산물을 취급한 제일상회의 박경선(46)씨는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신뢰’라고 말한다. 단순히 상인과 손님 관계가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가는 파트너라는 생각으로 장사하지 않으면 버티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장사라는 게, 이것도 인맥이 중요해요.
“저희가 파는 게 다 안주용 해산물이잖아요. 대부분 술집이죠. 호프집 같은 데도 해물 같
은 게 다 있잖아요. 저희 집을 찾아오는 분들은 거의 다 단골이죠. 쭉 하시던 분들이 많
고. 15년 전부터 장사하신 분들은 거의 대부분 계속 쓰신다고 보면 돼요. 그러다가 없어지
고 또 새로 하신 분들은 계속 이어져 나오고 그러죠. 장사라는 게, 이것도 인맥이 중요해
요. 장사를 하시다가 그만 두시는 분들도 있잖아요. 근데 그 분들이 새로 시작하는 분들을
소개 시켜줘요. 그리고 그만 두신 분들이 다시 가게를 차리시게 되면 또 오고. 그러니까
사람하고 관계가 장사로 만났지만서도 인간적으로 친한 게 도움이 많이 되죠. 인맥이 상
당히 중요해요. 너무 직업적인 관계로만 맺으면 저희가 대하기도 힘들어서 인간적으로 다
가가려고 노력해요.”
단골 관계는 물건을 사고파는 게 끝이 아니에요. 정다운 것이 있죠.
“단골손님 중 가까운 가게는 저희가 일요일에 쉬니까 가서 술도 마시고 그래요. 그렇게 오
고가다 보면 어제 무슨 뭐 솔직한 이야기로 안 좋은 일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하면 저희
도 이야기하면서 위로도 주고 자식 결혼한다고 하면 좋다고 축하도 해주고 그런 식으로
되가는 거죠. 단지 물건만 딱 사가고 그러진 않아요. 정다운 게 있는 거죠. 사실상 장사를
하다보면 물건이 좋은 것도 있고 약간 품질이 떨어지는 것도 있을 수 있거든요. 그럴 땐
단골들한테 양해를 구하죠. 솔직히 말하는 거를 더 바래요. 항상 믿고 사실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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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재래시장 단골이 좋은 거예요. 마트에서는 그게 안 되죠. 그래서 신뢰가 가장 중
요한 거예요. 단골 중에 포장마차인데, 실내가 아니라 길거리 포장마차 하시는 분이거든요.
그 분은 정말 처음 시작해서 올해로 저희와 거래한지 약 20년 될 거예요. 그 때는 제가
누님 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관계를 맺고 있어요. 제가 (가게를) 차리
면서 그 분이 저한테 계속 쓰시는 거죠. 거기 애들 쪼그만 할 때 봤는데 지금은 다 장가가
고 벌써 그 정도 됐으니까.” 
한 5~6년 됐나? 그때부터 소매들이 많이 죽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예전엔 소매가 많이 됐었어요. 멀리서 오시는 분들도 많았었어요. 그전에 장사하시는 분
들도 멀리서 와서 사가지고 가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장사들도 안 되는 것도 있지만, 동네
마다 마트가 큰 게 있으니까. 거기에 해물 같은 것도 구비를 해놓으니까, 대부분 소매는
거기서 사고 그러시죠. 예전에는 수산물 파는 가게들이 더 많았어요. 지금보다 네 군데 정
도 많았어요. 근데 다들 안 되니까 그만 둔거죠. 이제는 거의 도매라고 봐야죠. 한 5~6년
됐나? 그때부터 소매들이 많이 죽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토요일이나 되어야 몇
분이 사가고 그러시죠.” 
닭부산물·해산물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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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수산’의 주요 취급 품목은 홍합, 꼬막, 멍게 등과 같은 안주감 해수산물이다.
입구 반대편에서 바라본 닭부산물·해산물부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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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차이즈들이 많아지고, 주 5일제 되고부터 힘들어졌죠.
“경기가 안 좋아져서 물건이 덜 나가는 것도 있지만, 그보단 옛날에 비해서 경쟁이 심해지
다 보니까 마진이 별로 없어져요. 프랜차이즈 쪽들이 많아지면서 힘들어졌죠. 프랜차이즈
에서 이런 물품(식재료)을 영업집에다 대줘요. 이런 일반 음식점들이 없어지는 대신에 프
랜차이즈로 하는 음식점들이 많아지는 거예요. 프랜차이즈 본사들이 유통까지 다 하니까
저희를 찾아오는 분들이 줄어든 거죠. 그리고 주 5일제 되고 나서부터 자영업이 많이 힘
들어 진 것 같아요. 주 5일제가 시행되고 나서부터 사무실 근처 있는 영업집은 장사가 안
돼요. 한 달에 4, 5일 장사를 못한다는 게 큰 거죠. 그때부터 자영업 하는 사람들이 힘들
어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희도 그걸 느끼고요. 왜냐면 토요일 장사를 하면 아무래도 금
요일 날 많이 가져가거든요. 못 팔아도 혹시나 하는 거죠. 근데 그 다음날 장사를 안 하니
까 오늘 다 파는 욕심보다 조금씩 떼 가는 거죠. 
일요일은 쉬어요. 애들하고 보내는 시간이 중요해서요.
“보통 새벽 5시에 나와서 가락동 시장을 가요. 거기서 시장 보고 여기 들어오면 7시 정도
돼요. 그러고 나서 애들 학교 보내고 그러면 8시 되죠. 집은 바로 근처니까. 그때부터 일
시작하는 거죠. 그때부터 물건 펴서 시작을 하는 거예요. 딱 정해져 있는 시간이 없어요.
저희가 있는 시간이 오픈 시간인거죠. 손님오시면 그때 되고 주문 오면 바로바로 적고. 배
달 가고. 배달은 시간 때가 딱 정해져 있어요. 보통 오후 1시에 배달가고, 갔다고 오면 2
시 반이나 3시 되고. 그 다음에 4시나 돼서 영업집 갔다 오면 5,6시 되고. 제가 직접 가는
게. 택배를 보내는 거는 매일 들어오는 게 아니라서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그 사람들 가는 시간에 맞춰주는 거예요. 그러다가 보통 저녁 7시쯤에 되면 문을 닫
죠. 익숙해져서 별로 안 힘들어요. 그리고 저희는 일요일은 쉬니까. 일요일은 주문 들어오
는 데가 몇 집 안돼요. 가게는 주문 들어올 때만 나와서 물건 맞춰주고 배달 해주죠. 애들
이 어리니까 애들하고 보내는 시간이 중요해서요. 열세 살, 열한 살 이거든요.”
시장 친목단체를 통해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애경사를 서로 챙겨요.
“시장 상인들끼리 모인 친목단체가 있어요. 상인연합회라고 하는데, 이 쪽 골목에 있는 약
마흔 개의 가게가 가입되어 있어요.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놀러가기도 해요. 애경사 서로
챙겨주고 그런 식이죠. 여기는 이쪽 골목 사람들 끼리 모인 거고, 다음 골목에는 다른 친
목단체들이 있죠. 친목단체가 시장에 여러 개 있어요. 저는 이쪽만 해당이 되니까 저는 여
기에만 가입이 되어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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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를 그만 뒀던 사람들이 잊지 않고 다시 찾아줄 때가 가장 기쁘죠.
“장사를 그만 뒀던 사람들이 나중에 다시 잊지 않고 찾아줄 때가 가장 기쁘죠. 장사를 그
만뒀다가 나중에 (다시 장사를 시작할 때) 저희를 기억하고 다시 찾아올 때가 그나마 가
장 기쁠 때에요. 그게 가장 기분이 좋아요.  그리고 장사 그만두셨지만 가끔가다 이 근처
들르셨다가 찾아와주시는 분들도 있고. ”
주차장이 생기면 손님들이 오시기에 편할 거라고 생각해요.
“주차장이 있으면 오시기에 편하지 않을까 싶어요. 왜냐하면 저희들도 손님들이 물건들을
사러 오시면 주차할 곳이 없으니까 애로사항을 하소연하거든요. 손님들은 사실상 주차비
도 아까우니까 오시기 전에 주문을 해주세요. 배달만 하는 게 아니라. 사러 오시는 분들도
다 영업집이에요. 그니까 그 사람들도 바쁘니까 못 들어오니까 물건 주문하면 저희가 오
시는 시간에 맞춰서 큰길에 나가서 물건 주고 돈 받고 하는 식이 사실상 상당히 많거든
요. 그런 분들은 보통 이 근처에서 영업을 하시는 분들이지만, 멀리서 오시는 분들도 있어
요. 서울 어디서든지 온다고 보면 돼요. 강남 뭐 이쪽도 많고.” 
현재 목표는 아무래도 현상유지 하는 거죠.
“목표는 아무래도 현상유지 하는 거죠. 아무래도 더 잘되지는 않을 것 같고.. 현실이 그렇
게 된 거죠. 그리고 해물 같은 건 또 비싸지니까. 이게 수산자원이 고갈되는 것 같아요.
한 해 한 해 틀려요. 들어오는 게 그리고 수입으로 대체가 많이 되니까. 수입 아니면 서민
들을 사실상 서민들은 힘들어요. 국산으로는 힘들어요. 수산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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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밥부
“동네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동네 사람꺼 팔아줘야 해요”
장수보리밥 윤재림
인터뷰 일자 : 2015년 4월 10일
이름 : 윤재림(59)
영업기간 : 20년
취급물품 : 보리밥 등 식사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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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식재료를 도·소매로 판매하고 있는 중앙시장 대부분의 상인들과는 달리 보리밥부
의 상인들은 거래 단계에서 다른 위치에 놓여 있다. 일반적인 중앙시장 상인들이 음식점
에 식자재를 판매한다면 보리밥 가게의 상인들은 반대로 식자재를 도매상으로부터 구입한
다. 장수보리밥의 윤재림(59)씨는 요리에 들어가는 모든 식재료들을 중앙시장의 다른 상인
들로부터 구입한다. ‘다른 시장에 가면 더 싸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같은 시
장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라’는 윤재림씨는 보리밥 장사를 하는 20년 동안 중앙시장 내
의 몇몇 상인들과 꾸준하게 단골 거래를 하고 있다. 보리밥이라는 음식소매업을 하고 있
지만 식재료 도매 거래에 있어서 ‘고객’의 입장에 서기도 하는 윤재림씨 역시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라고 말한다. 신뢰를 기반으로 한 가게에서 오랫동안 좋은 재료를
쓰려고 노력을 해야 좋은 입소문이 나고, 손님들도 그것을 알고 찾아온다는 것이다.
IMF 시절 만들어진 중앙시장 보리밥부
“장사한지 올해 만 20년 됐어요. 그전에는 옷 장사를 했었는데, 이 자리에서 장사를 하다
가 시작한지 1년 만에 IMF가 터졌어. 그래가지고 그때부터 경기가 안 좋아서 모든 경기가
완전 다운이 되니까. ‘이래선 안 되겠다, 음식장사를 한번 해보자’하고 한 게 보리밥장사를
하게 됐어요. 보리밥이라는 거 자체가 어떻게 보면 쉽게 생각해서 웰빙음식이잖아요, 웰
빙. 그래서 이 음식이면 괜찮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때는 마침 또 김밥천국이니 뭐
니 싼 음식들이 많이 유행할 때에요. 그래서 보리밥 골목이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우리가
보리밥 장사하기 전에 한 두 집인가 노점에서 하시던 분이 있었어요. 우리가 들어오면서
더 활성화됐지. 내가 하면서 보리밥 집들이 계속 늘어났어요. 제일 많을 때는 열세 집 정
도까지 있었죠. 보리밥부라고 형성된 것은 한 2002년도 월드컵 할 때쯤 그때 보리밥부로
알려진 것 같아요. 그러다가 돌아가신 분도 중간에 계시고 이참 저참 해서 그만두거나 이
사한 집도 있어서 지금은 여덟 집 정도 있어요. 사업이라는 게 다 잘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나마 여기 남아있는 사람들이 실력자들이지. 나름 다 노하우가 있고 실력이 있는 사람
들이 남은 거예요.” 
강 건너 사람들도 여기 와서 장을 많이 봤어요.
“총각 때부터 중앙시장에서 일 한지가 한 30년 됐는데, 80년대는 지금과 비교하면 엄청나
게 잘됐죠. 그때는 뭐 대단했죠. 천호동 이쪽에서도 저쪽에 화양리 쪽이나 동북권 쪽에서
도 여기 와서 장을 보곤 했어요. 잠실 쪽이나 강 건너 사람들도 여기 와서 장을 엄청 많
이 봤어요. 그 당시에는 옷가게도 엄청 많았어요. 여기가 원래 그 의류골목이었어요, 포목
골목. 저쪽에서부터 연결이 된 골목이었죠. 지금이야 관광객들 유치하려고 (동대문 시장이)
낮에도 열리지만, 그때는 새벽에 열었다가 새벽에 닫고 가고 그랬어요. 도매만 하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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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까. 근데 (중앙시장은) 소매를 위주로 한 거죠. 그때는 하여튼 장사 안 되는데 없었어
요. 사람 밀려다니고 그랬어요. 메이커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옷 장사가 잘 안되기 시작
했죠. 그러다가 IMF때 경기가 나빠지고 그러면서 이 골목이 다 음식으로 바뀌었죠. 보리
밥도 그러면서 생긴 거죠.”
옛 생각에 오랜만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뵈면 반갑죠.
“찾아오는 손님들은 우선 주위에 직장인들이나 상인들이 많이 오시죠. 외부에서도 많이 오
시고요. 보리밥골목이 한 20년 정도 되다보니까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오는 것 같아요.
여기에 왕십리 뉴타운이 생기기 전에는, 그리고 저기 금호동 넘어가는 산동네, 그쪽이 재
개발되기 전에는 진짜 장사가 잘됐어요. 거기 달동네는 한집에 세 가구, 네 가구 살았거든
요. 거기가 재개발되면서 동네를 떠난 사람들이 다시 찾아줄 때가 있어요. 옛날 생각나서
오시는 거죠. 연어처럼 향수를 느끼러 다시 오는 거죠. 그런 분들이 오시면 반갑죠. ‘어디
로 가서 사세요?’ 물어보면 오이도 가서 산다, 저기 부천 가서 산다, 그러면서 오시고. 벌
써 20년 되다보니까 그때 우리 참 젊었던 사람들이 이제 지팡이 짚고 오신 분도 있고 그
래요. 그러면서 옛날이야기 하는 거지. 옛날 중앙시장이 어쨌고 저쨌고 하면서.”
중앙통을 통해 들어가는 보리밥부 입구. 입구 간판에 의류전문이라고 적혀있지만, 골목 안 점포들은
대부분 음식장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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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 때 시장 상인들 모여서 시장 한 바퀴 돌고 그랬어요.
“여기서 장사하면서 제일 좋았던 기억은 2002년 월드컵 때에요. 그때 도로를 다 막아 놓
고 모여서 축구 응원을 했잖아요. 동네에서 떡 장사하는 사람은 떡 들고 나오고, 저는 수
박 들고 나오고 그랬죠. 8강전 때였나? 횡단보도에서 차 못 다니게 막고 절하고 그랬거든
요. 빨간 옷 입고 빈 깡통도 두드리고 시장 상인들 모여서 시장 한 바퀴 돌고 그랬었던
기억이 나네요. 되게 재밌었어요.”
저도 오랜 기간 동안 믿고 쓰는 단골이 정해져있죠.
“저도 단골이 정해져있죠. 야채도 십칠 년 한 집 거래했고. ‘푸른야채’. 쌀은 ‘금성상회’. 그
집도 거래한지도 한 이십 년 가까이 되요. 쌀이랑 보리쌀. 고기는 저 위에 가면 ‘충북정육
점’이라고 있어요. 거기는 처음부터 시작해서 이십 년 동안 여지껏 변하지 않고 한 집 거
래하고 있어요. 시작할 때부터  딱 정해놓고 했다고 보면 돼요. 다른 데 오고가고 없어요.
비싸면 ‘오늘 비싸다 야 그거 어떻게 잘못 됐나’ 이야기를 해서 고쳐가지고 수정하는 게
낫지. 그걸 내가 기분 나쁘다고 다른 데 돌아서면 마찬가지로 똑같은 마음이 생기니까 안
돼요. 불가분의 관계가 돼서 안돼요.” 
십 년은 넘어야 노하우가 생겨요.
“처음 시작할 때 뭐든지 애로사항이 있잖아요. 처음에 진짜 모르는 상황에서 음식장사 한
다고 잘하는 집 쫒아다지면서 먹어보기도 하고 했었는데, 그게 바로 실천이 되진 않잖아
요. 한 사,오 년 하니까 좀 편해졌어요. 내가 봤을 땐 식당도 한 십 년 넘어야 돼. 사 년
정도 버티면 그때부터는 좀 할 만하고요. 십 년이 넘어야 이제 노하우가 생겨서 그때부터
조금씩 돈이 이렇게 붙지. 내가 삼, 사 년 안에 대박친다는 사람들은 이해가 안돼요. 이게
요식시장이 어떻게 형성되어있냐면 창업은 많이 해요. 근데 맨 처음 일,이 년은 거의 같이
가요. 이 년 정도 되면 오십 프로 무너져. 한 사 년 되면 그나마 한 이십 프로 무너져. 결
과적으로 남는 건 이십 프로에서 이십오 프로 밖에 안 돼요. 그리고 이십 년 넘게 하는
사람들은 한 십 프로 될까? 백 집이면 열 집. 그 집들이 진짜 맛집으로 남아있는거야. 그
리고 자기가 음식을 개발하려고 해야지, 뭐 창업한다고 체인? 프랜차이즈? 내가 봤을 땐
절대 아니야. 하루에 십만 원 판다고 하더라도 내가 연구하고 느끼고 자꾸 해가지고 키워
가아죠. 십 년이 넘으면 자동적으로 바닥에 깔라는 게 있으니까 괜찮지. 그렇게 되면서 그
다음에 손님 다루는 방법도 알게 되고. 어떤 손님은 편하게 할 수도 있고, 어떤 손님은 존
칭을 써야 되고. 이런 노하우가 생기는 거야. 그게 경력이 좀 쌓여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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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노하우는 바로 신뢰예요.
“동네에서 장사를 하기 때문에 재료도 동네 사람들 꺼 팔아줘야 해요. 어디가 싸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사고 그러질 않아요. 동네 껄 팔아주고 연계관계가 돼야지, 서로 윈윈 해야지.
밖에가 좀 싸다고 해서 사가지고 와서 여기 와서 부를 일으키면 그것도 모순이 된 거에
요. 내가 사고방식이 틀렸는지도 몰라도 난 그래. 이왕이면 동네에서 싸든 비싸든 동네 꺼
팔아주고 그 친구들도 우리 집에 와서 밥 먹고 그러는 거죠. 예를 들면 우리 단골집이 우
리 집을 소개시켜주고 그럴 수 있는 거예요. 보통 내가 단골한 집들은 십오 년 다 넘어요.
그 사람들도 내가 오늘 뭐 샀으면 다음 날 뭐가 필요하다는 걸 대충 알고 있으니까. 그
정도면 끝난 거죠. 굳이 실물을 안 봐도 좋은 걸 보내주고. 신뢰가 그만큼 쌓이게 되는 거
예요. 무조건 물건도 좋은 걸 사려고 노력을 해야지, 싼 걸 사려고 노력하다 보면 내 자신
도 낮춰지는 거예요. 그래야 물건을 파는 사람도 ‘저 집은 좋은 거 쓰는구나. 그래 맞어,
이 사람 믿을만해.’ 이러면서 좋은 거를 주려고 애쓰고 그러죠. 그럼 사람들이 다른 손님
한테 ‘저 집이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거 쓰는 집인데, 이왕이면 거기 가.’ 이렇게 말하겠
지. 이거는 인생을 사는 노하우야. 내가 이 자리에서 장사를 해서가 아니라 다른 데서 똑
같은 일을 해도 똑같은 마인드를 가져야 돼. 나는 내가 뭐 예순 가까이 산 경험을 이야기
하는 거야. 장사를 하는 노력이라기보다는 경험이라고 보면 돼요.”
‘장수보리밥’은 밥을 짓는데 필요한 쌀과 보리를 약 이십 년간 ‘금성상회’에서 구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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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과부
“남아있는 이 사람들이 이제는 가족이죠.”
인도상회 강승복 / 충북상회 신대화 / 단골손님
인터뷰 일자 : 2015년 4월 22일
이름 : 강승복(57, 인도상회), 신대화(73, 충북상회), 단골손님
영업기간 : 충북상회(45년), 인도상회(50년)
취급물품 : 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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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과 야채가 싸기로 유명했지만, 중앙시장은 쌀, 야채 뿐 아니라 다양한 품목의 상품들이
갖춰져 있는 종합시장이기도 하였다. 그 중 청과부는 쌀과 야채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상
당한 규모의 도매시장이었다고 한다. 전성기라 할 수 있는 80년대 청과도매시장의 규모는
‘지금의 청과부 골목에서부터 황학동 동사무소까지 이어지는 구간 대부분이 과일가게였을
만큼 컸었다’고 청과부 상인들은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청과도매시장이라는 구역 간판 이
름이 무색할 만큼 겨우 다섯 집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한산한 청과부 골목을 지나가다 보면, 한 가게에 다섯 집의 과일 가게 사장님들
이 모여 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여기에 앉아있으면 다른 가게들이 다 보이기 때
문’이라고 말하는 다섯 과일 가게 사장님들은 그 자리에서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신다.
오랜 세월 동안 같은 공간에서 장사하며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어려움을 함께 견디고 있
는 이들은 ‘모두가 떠나고 남아있는 이 다섯 집 사람들이 이제는 가족 같다.’고 말한다.
황학동 동사무소 옆까지 쭉 과일가게들이 있었어요.
신대화 : 옛날 잘 됐을 때는 (이 골목에) 과일 트럭들이 많이 들어왔었어. 리어카 꾼도 많
이 왔지. 지금은 다 없어졌어.  
강승복 : 30년 전이지. 내가 시집온 게 30년 전이니까 한 80년대 일 거예요. 집집마다 과
일을 트럭채로 떼느라 바빴지.  90년대까지만 해도 장사가 괜찮았지. 한 15년 전만 해도
과일을 한 가득 실은 트럭이 들어왔어. 2000년도 들어서부터 하나하나 없어지기 시작하면
서 줄어 든거지. 나는 아버님, 어머님이 하신 거를 대를 이어서 하고 있지만, 다른 집들은
자손들이 안 이어받으니까. 우리는(인도상회) 한 50년 됐지. 아버님, 어머님이 이 뒤에서
건어물 장사한 것까지 치면 60년 넘었고.
단골손님 : 여기 장사하는 사람 다 싹 떠났어. 여기서 저 끄트머리까지. 저 위에 ‘로얄사우
나’ 까지 다 과일가게였어. 근데 지금은 다 없어졌어.  
강승복 : ‘로얄사우나’ 라고 하면 모르지, 이 양반들이. 지금은 없어졌는데. (황학동) 동사무
소 옆으로 쭉 과일가게들이 있었어요. 다 도매 가게였어요. 지금은 소매만 하다시피 하지
만.
단골손님 : 요새는 소매뿐이 안 돼. 
신대화 : 소매도 잘 안 돼.  
단골손님 : 도매는 어디로 가냐면 청량리나 가락동으로 가. 영등포나. 
신대화 : 도매상 하다가 차츰차츰 없어져서 다 이렇게 된 거야. 다 도매했었지. 지금은 안
팔리니까. 아예 없어. 한, 두 사람이라도 있으면 팔지. 그냥 다 소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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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잘 정도로 과일트럭이 많이 들어왔어요.
단골손님 : 옛날엔 다 도매상이었어. 
신대화 : 도매도 많이 하고 세금도 많이 내고 그랬는데, 지금은 장사가 안되니까 세금도
별로 못내.
강승복 : 다 도매상이어서 12시에 끝나는 집도 있었지. 거의 다 도매였지. 
단골손님 : 아침에 동네에서 와가지고 여기서 다 떼가. 
강승복 : 그리고 트럭 가지고 와서 여기서 사서 돌아다니면서 팔고 그랬지. 자두도 시골에
서 농사 진 거 따다가 또 경매해가지고 들어오면 다 보내주고 그랬지. 집집마다 몇 채씩
들어왔어. 
신대화 : 생산자들이 보내고, 장사꾼들이 보내고. 
강승복 : 옛날에는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요. 새벽에 골목에 차들이 많아서.  
신대화 : 새벽에 두, 세시에 물건이 막 들어오니까. 우리들은 새벽 두, 세시면 문 열어. 근
데 지금은 그런 곳이 없어.
단골손님 : 옛날엔 그런 사람들이 직접 들어왔어. 청량리같이, 가락동 시장같이. 
강승복 : 우리도 김천에서 직접 오고. 제주도에서 귤이 수박이랑 다 들어왔었어. 그러고 나
면 (소매상들이) 아침 네 시, 다섯 시에 나와서 새벽에 나와서 싣고 나가는 거지. 지네 동
네서 팔라고. 
한산한 청과부 골목. 현재 다섯 가게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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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아파트가 많이 건설되고 나서부터 시장에 사람이 줄었죠.
신대화 : 지금은 마트가 생겨가지고 다 없어졌지, 나이 먹어서 그만두고. 
강승복 : 여기 이마트 청계천점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장사가) 너무 안 되는 거야. 
신대화 : 우리도 장사가 안돼서 손을 놓은 정도지.
강승복 : 마트에서 일주일치 장을 다 보잖아. 배달까지 해주지. 아무래도 직장 다니는 엄마
들은 집에 들어가는 길에 여기서(중앙시장)에서 사갖고 가기에는 무겁고 힘들지. 이런 것
들이 점점 태가 나는 거지.
단골손님 : 옛날엔 여기 사람이 겁나게 많았어. 긍께 장사도 잘됐지.
강승복 : 아파트가 생기기 전에는 저기 청구동, 신설동에서도 다 왔지, 저쪽 약수동에서도
왔지. 여기 왕십리 뉴타운 개발되기 전에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도 다 여기(중앙시장) 다
녔던 거야.
신대화 : 지금 아파트 밑에도 마트 생기고 그러니까 안 오지. 
강승복 : 나 시집올 때만해도 저런 아파트가 없었어. 다 주택이 있었어. 약수동도 주택이여
가지고 다 이리로 장을 보러 왔어. 명절 때 되면 어마어마했어. 이렇게 다니지도 못해. 틈
새로 다녀야 했어. 사람 많아가지고.
신대화 : 사람이 많았어. 지금은 벌판이여. 벌판. 아파트 생기면서 마트 생기니까 이제 이
런 시장이 죽어가는 거야 재래시장이. 아파트 들어서면 무조건 마트가 들어서잖아. 
강승복 : 어디고 다 마찬가지야. 재개발하면은 거기 주택 집에 살던 사람들이 없어지니까.
아파트 지으니까. 거기 아파트 밑에 상가가 생기잖아. 그러니까 재래시장이 자꾸 죽고.
신대화 : 비싸도 마트에서 사 먹지. 여기로는 안와. 
단골손님 : 그래서 시방은 골목이 다 죽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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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시장 청과부 입구. ‘청과도매시장’이라고 적혀있지만, 현재는 소매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하고
있는 상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가족 같고 그래요.
신대화 : 지금 봐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30분 됐나? 근데 사람 한 명 없잖아. (웃
음) 
단골손님 : 나 왔잖아. 왜 사람이 없어.
(어머님은 자주 오세요?)
단골손님 : 난 여기서 살어. 날마다 하루에 한 번씩 오는데, 옛날에 친목계 했던 사람들 중
에 둘만 남았어. 
(어떤 친목계였어요?) 
단골손님 : 친목계 그냥. 나이 먹은 사람들끼리 한 거지. 과일 상회 친목계라고 하면 알아
줬어. 그래가지고 이제 둘만 남았어. 다 떴어, 그 많은 사람들이. 한 20명도 더 됐어. 근데
이제 둘 뿐이야. 이 집하고 저 집. 그래도 엔간히 했지. 다 떠나버렸어.
강승복 : 그러니까 세 안 내는 사람은 이렇게라도 버티고. 세내는 사람들은 이제 다 없어
지고 힘들어. 나도 물려받은 거라 세를 안내니까. 
단골손님 : 내가 봐도 지금은 이 집들 큰돈은 못 벌어. 옛날에는 박스떼기로 50개, 30개
막 실어나갔지. 조금 남겨도 많이 나갔잖아. 근데 여기는 소매한다고 썩으면 내버려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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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저 가봐 할머니 뱃가죽 같은 거 많지. 쭈글쭈글 겁나. (웃음)  
(아니 어떻게 슬픈 말을 그렇게 즐겁게 하세요?)
단골손님 : 재밌잖아, 재밌어. 옛날 거시기라. 
강승복 : 사람들이 없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식구 같고 그렇지. 누가 이렇게 밥 해먹고
그래. 옛날에는 다 각자 하고 그랬지. 
단골손님 : 경쟁 안 해. 이 사람들은. 
강승복 : 수십 년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니까 각자 나름대로 단골이 있었지. 근데 지금은
장사가 안 되고 그러니까 단골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딱히 없어. 보다가 어느 집이 싱
싱하다고 생각되면 마음에 드는 집에 가서 사는 겨. 
(그럼 평소에 자기 집 찾던 손님이 다른 집 가면 질투 나지 않으세요?) 
신대화 : 그런 거 없어. 여기는 다 한 집 같아. 
강승복 : 그렇지. 다 없어지고 하니까. 남아 있는 사람들이 가족 같고 그래. 손님 뺏고 그
런 건 없어.
신대화 : 아니 뭐. 다 벌어 먹고살라고 하는 건데 어떻게 다른 가게를 질투해. 그러면 안
좋아, 서로. 
(늘 이렇게 충북상회에 모여계신 이유는 뭔가요?)  
강승복 : 여기 앉으면 우리 가게 보이지, 저 가게도 보이지. 다른 데는 다른 가게를 볼 수
가 없잖아. 우리 가게(인도상회)에 있으면 저 쪽 집이 안 보여. 그러니까 여기에 다 모이게
되는 거지. 여기 앉아 있다가 우리 집에 손님이 오면 얼른 뛰어갔다 팔고, 또 여기로 오
지. 다 그런 거야 
신대화 : 이곳이 다 같이 모이기가 좋아.   
단골손님 : 여기는 라이벌 이면서도 식구기도 하고 그래. 시골분위기다, 그렇게 생각하면
돼. 친척들보다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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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통
“중앙시장 물건은 싸고 좋아. 근데 불편하니까.”
미성상회 전화자
인터뷰 일자 : 2015년 4월 7일
이름 : 전화자(58)
영업기간 : 27년
취급물품 : 식자재(참기름, 고춧가루, 소금, 양념 액젓 등 농수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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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통에 위치한 미성상회는 참기름, 액젓, 고춧가루, 각종 양념 등의 김장을 하거나 요
리를 할 때 필요한 농수산물 식자재를 주로 판매한다. 농수산물은 한 때 김장시장으로도
유명했던 옛 중앙시장의 주요 상품으로, 한때는 미성상회와 같이 농수산물 식자재 점포들
이 중앙시장 곳곳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27년 동안 중앙시장에서 농수산물을 판매하고 있는 미성상회의 전화자(58)씨는 ‘예전에는
김장 재료 등을 사기 위해 중앙시장을 찾아오는 소매 손님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소매 비
중이 줄고 도매 비중이 늘었다‘고 말한다. 중앙시장의 다른 구역에 비해 소매 비중이 높은
중앙통 임에도 불구하고 도매 비중이 높은 이유에 대해 전화자씨는 ’상대적으로 시장 입
구와 먼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입구 쪽에 위치한 점포들에 비해 소매 손님들이 많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시장 후문 쪽에 버스 정류장 등 교통 편의시설들이 생기길 희망했다.
나는 사장이고 우리 신랑은 회장이고.
“신랑이 시골에서 공무원을 했거든. 근데 비전이 없는 것 같애. 나는 서울서 학교를 다녀
가지고 거기서 결혼하고 일 년 살면서 서울로 가자고 그랬지. 그때 사촌언니가 저기서 해
물장사를 했었는데, 그 안에 있는 고춧가루가게가 비어있었어. 그래서 냉큼 들어왔지. 고
등학교 때 왔다 갔다 하면서 보고 얻어먹고 그러다가 결혼을 해서 시골로 갔는데, 서울로
생활하던 사람이다 보니까 시골 체질이 아닌 거야. 그래서 서울로 갑시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서울로 갈 것이고 딸을 낳으면 신랑이 원하는 대로 평택에서 장사한다고 그랬는
데, 아들을 둘 낳았지. 그래서 서울로 온 거지. 그래서 장사를 한지 이십칠 년이 됐어.” 
“신랑이랑 나, 둘이 같이 장사를 하는 거지. 나는 사장이고 우리 신랑은 회장이고. 혼자는
못해, 힘들어. 배달도 해야 하고. 나는 오전 일곱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신랑은 오전
여섯시 반에 열고. 신랑이 물건 챙기고 주문 오는 거 챙기고. 또 팔고. 지금은 배달 갔다
가 와서 지금은 운동 갔어. 교대로 하지. 이따 돌아오면 여섯 시 쯤 내가 충무아트홀로 운
동하러 가야지. 교대로. 소매를 많이 안하니까 일찍 닫아. 저기 시장 입구 쪽에는 늦게까
지 장사하는데, 여기 뒤쪽에는 손님이 일찍 끊겨.”
이십칠 년 장사의 노하우
“우리는 도매를 많이 하지. 소매로 팔기에는 지금 시중에 사람들이 많이 없잖아요. 유동인
구가 많이 없으니까. 소매도 하긴 해. 도매는 대부분 중간상인이나 음식점에 팔지. 냉면집,
중국집, 한식집, 뷔페집 다 되지. 양념이니까. 대부분 중구나 종로구 근처에서 장사하는 사
람들이 오지. 십 년 넘게 거래 한 분들도 많지. 냉면집 같은 데도 그렇고. 엄마가 냉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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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 딸한테까지 물려줬는데, 계속 우리랑 거래를 하고 있지. 창신동에 낙*냉면이라고 많
이들 알잖아, 창신초등학교 있는데. 거기는 거래한지 십 년 넘었어.” 
“참기름 같은 것은 고춧가루랑 원하면 지방도 다 보내지. 내가 이십칠 년 했다고 그랬잖
아. 서울에서 장사하다가 지방으로 내려간 사람도 있고. 또 이때 와서 사간 사람도 있고.
거래처에서 소개시켜준 사람도 있고. 여기서 장사를 오래 하다보니까 알고 찾아온 손님들
이 많지.” 
아무래도 소비가 옛날하고 다르잖아, 지금은 마트가 많이 생겼으니까.
“옛날엔 배추도 많이 팔고 김장시장이 컸는데, 그게 없어졌어. 길가에 있었는데. 고춧가루
는 저기 안쪽에 있었고. 길가 마장로에 분포되어 있었지. 지금은 다 없어졌어. 아무래도
소비가 옛날하고 다르잖아. 지금은 마트가 많이 생겼으니까. 지금 시장에는 야채가게가 별
로 없잖아. 옛날에는 야채가게가 많았지. 배추도 시골에서 다 절여서 오지.” 
“시기적으로 장사가 다 안 되니까, 아무래도 손님은 줄었지. 삽십 년 전에는 소매가 많았
었지. 그때는 마트가 그렇게 형성이 안 되어 있었으니까. 근데 지금은 마트가 많으니까. 
(요새 자영업들도 힘들다고 하는데, 많은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으면 도매도 타격을 입지
않나요?) 우리는 그럴 일이 없어. 노하우가 있어. 왜냐면 한 사람이 망하면 또 한 사람이
생겨. 손님이. 장사를 하다보면 우연치 않게 그렇게 오고. 또 안하던 사람도 다시 개업하
면 찾아오고.”
난 별로 힘든 건 모르겠어. 왜냐면 내 거니까.
“전통시장은 일단 춥지, 덥지, 근데 물건은 싸고 좋아. 근데 그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편
하니까 거기로(대형마트) 가는 거지. 조금 사도 비싼데, 중앙시장은 싸. 물건은 싸. 근데 불
편하니까. 그런 데는(대형마트) 아무래도 상품 진열을 잘 해놓으니까. 그래서 나는 중앙시
장이 안 춥고, 안 덥고, 그리고 주차장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버스가 시장 후문 쪽에
도 다녔으면 좋겠어. 시장 입구 쪽에는 있지만, 여기로 다니는 버스가 없잖아. 입구는 입
구고 여기는 후문 쪽이잖아. 일단은 버스가 있으면 더 많이 오지 않을까 싶어.” 
“글쎄 난 별로 힘든 건 모르겠어. 왜냐면 내 거니까. 세를 내도 내 거니까. 가게가 내 거니
까. 애들 잘 키우고 뭐. 그리고 우리는 여행을 많이 다니니까. 아저씨가 못하는 게 없어.
스쿠버니 스키니 뭐 별거 별 거 다 해가지고. 일요일은 쉬니까. 그니까 힘이 들어도 안 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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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지하상가 회센터
“옛날에는 이 통로가 다 생선가게들이었어요.”
광주수산 김정아
인터뷰 일자 : 2015년 4월 22일
이름 : 김정아(50)
영업기간 : 15년 (2대째, 어머니는 28년)
취급물품 : 회, 수산물 음식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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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장 바로 밑 지하에 위치하고 있는 신당지하상가는 서울시 상업적 목적으로 기획된
최초의 지하상가이다.25) 1971년, 새로운 시장의 형태로서 민간자본이 투입되어 만들어진
신당지하상가는 지상의 중앙시장의 연계 상권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몰리기도 했었
다. 하지만 백화점과 대형할인점이 경쟁에서 밀리는 등 크고 작은 사건으로 인해 신당지
하상가를 찾는 손님들은 점차 줄어들었고, 지금은 몇 점포만의 장사를 이어가고 있는 상
황이다.
신당지하상가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회 센터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장사를 이어
가고 있는 해수산물 소매 음식점들이 모여 구성되어 있다. 회 센터라는 이름처럼 주로 회
를 판매하고 있는 이곳 상점들의 주요 고객은 인근 지역의 직장인과 해외 관광객들이다.
하지만 지하라는 상대적으로 외진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과 인지도 부족으로 예전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지는 않은 실정이다.
최근 신당지하상가의 빈 점포들을 리모델링하여 만들어진 예술창작공간 ‘신당창작아케이
드’의 도움으로 간판, 벽화 등 환경미화적인 부분에서 많은 개선이 되었지만, 이곳의 상인
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회 센터를 방문하기를 원하고 있다.
옛날에는 이 통로가 다 생선가게들이었어요.
“저는 15년째고요. 지금 2대째 하고 있는 거예요. 어머니가 먼저 하시고. 어머니는 28년
하셨어요. 이 가게는 오래됐어요. 원래 이 자리는 아니고 좀 바뀌었어요. 원래 옛날에는
이 통로가 완전히 다 생선가게들이었어요. 저희 어머니도 여기서 생선가게를 하셨어요. 민
물고기 위주로 했죠. 붕어, 메기, 자라, 개구리.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음식을 팔게 된
거죠. 왜냐면 요즘에는 생선을 즐기는 음식문화가 회로 많이 바뀌었잖아요.”
서울시 최초로 상업적 목적으로 기획된 지하상가
“서울시에서 (상업적 목적으로 기획되어) 처음 땅 판 곳이 여기에요. 지하상가. 고속터미널
이나 명동보다 지하상가가 생긴 거는 여기가 더 먼저에요. 옛날에는 옷가게부터 시작해서
점포가 한 평씩 해가지고 다닥다닥 붙어있었어요. 바닥도 이런 바닥이 아니었고. 개조하면
서 가게 위치도 많이 바뀌고 그랬죠. 지하상가 저기 위쪽에 상파는 가게도 있고, 이불 가
게도 있죠? 그런 가게들이 옛날부터 있었던 가게에요. 조금씩 남아있는 거예요. 그러다 세
월이 지나면서 다 나가신 거죠. 여기도 횟집이 열 몇 개씩 있었는데, 지금은 열 집정도 돼
요.”
25) 서울의 지하상가는 1967년 서울시청 앞 을지로 1가에 있는 ‘새서울 지하상가’가 그
시초이나 이는 기존 방공호 용도로 건설된 공간을 상업용도로 변경한 것이다. 상업 목
적으로 기획되어 건설된 지하상가는 신당지하상가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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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 지하상가 공사한 후부터 사람들이 잘 안와요.
“여기가 중앙시장이 서울시 안에서도 가장 큰 시장이었어요. 가락시장 생기기 전부터 있었
으니까. 그리고 나중에 가락시장 생기고, 노량진수산시장 생기고. 그러는 바람에 여기가
작아졌죠. 저쪽에 주방기구 파는 곳이 많잖아요. 그 전에는 그런 게 없었어요. 80년대에는
야채가게, 막 도매로 새벽에 와가지고 물건 내리고 그랬었는데. 지금 세월이 많이 바뀌어
가지고. 골고루 여러 분야가 섞여 버린 거죠. 어쨌든 중앙시장이 잘 됐을 때는 여기 지하
상가도 장사가 잘 됐었어요. 우리 어머니가 할 때도 엄청 바빴죠. 그러다가 여기 지금 공
사를 한 15년 전에 했어요. 1년간 공사를 하다보니까 손님들 맥이 끊어진 거죠. 이제 안하
는 줄 알고 사람들이 안 오는 거예요. 홍보도 안 되고 하니까.”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와요.
“요즘은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와요. 요즘에 일본 사람들이 많이 나와요. 한 조에 두 팀
세 팀. 최근에도 어제도 일본 분들이 열 어섯 분 예약해서 드시고 가시고 갔어요. 여기 회
센타가 가족단위나 모임단위가 오셔서 식사하시기 좋아요. 왜냐하면 저렴하니까. 저렴하고
양도 많고.”
횟감을 제외한 모든 식품들은 다 중앙시장을 이용하죠.
“횟감은 다른 곳에서 따로 들어오지만, 야채 같은 경우는 위에 중앙시장을 많이 이용하죠.
오이나 당근 다 위에서 사와요. 생선을 제외한 다른 식품은요. 공산품 같은 것도 지상에서
쓰고. 나머지는 이런 회 종류는 외부 큰 데에서 들어와요.”
여기 회 센터가 있는지 주변에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요.
“이제는 여기 회 센터가 있는지 주변에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요. 홍보가 너무 안 되어있어
서. 상가는 오래됐지만, 이제는 상인이 별로 없으니까 아는 사람만 오는 거죠. 중앙시장
홍보를 해도 지상만 하지, 지하는 안하잖아요. 지상이랑 지하이랑 다르기 때문에. 시장번
영회가 지상에는 잘 되어있는데, 여기는 번영회도 없고 상인도 몇 명 안 남아 있으니까.
그런 면이 있어요. 회 센터 사람들이 모여서 이것저것 논의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단체도
없어요. 그래서 좀 아쉬워요. 그런 게 있으면 좋죠.”
신당창작아케이드가 있어서 고맙죠.
“아무래도 신당창작아케이드 구경하러 오시는 분들이 회 센터를 보시고 이런데도 있구나,
하시면서 식사도 하고 가실 때도 있고. 그러다보니까 구전으로 홍보가 조금씩 되죠.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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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에 그림 그려주고, 복도에 있는 그림도 다 신당창작아케이드에서 해주신 거죠. 신당창
작아케이드에서도 저희 홍보를 많이 해주시는 부분이 있어서 고맙죠.”
회 센터의 가게와 복도에 신당창작아케이드 작가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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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곡부
“쌀가게에서 왜 동물사료를 파냐고?”
금성상회 허수정
인터뷰 일자 : 2015년 4월 7일
이름 : 허수정(75)
영업기간 : 59년
취급물품 : 양곡(쌀. 보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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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서울에 들어오는 미곡의 70% 이상이 거래되었다고 하는 서울 최대 양곡 도매시장,
서울중앙시장 역사는 ‘쌀’로부터 시작되었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중앙시장은 곧 쌀 시장’을 의미할 만큼 쌀에 있어서 중앙시장은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시장이었다. 지방에서 수확된 미곡을 트럭에 가득 싣고 서울에 팔기 위해 올라온 하
주들, 싼값에 쌀을 구입한 후 동네에 되파는 지역 소매상들,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중앙시장 양곡 도매상 등 중앙시장은 그 명성만큼이나 쌀을 팔고 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정부의 미곡정책, 유통업의 발달 등으로 점차 그 중요도가 떨어지게 된
중앙시장 미곡부는 양곡 도매시장의 기능을 상실한 채 과거 영광의 흔적들만 남아 있는
상태다. 한때 100여 개에 달했던 미곡 도매상 중 현재 남아있는 가게는 10개 남짓. 그나
마 남아 있는 가게들도 오랜 단골 고객과 소매로 근근하게 장사를 이어가고 있는 수준이
다. 59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금성상회’의 허수정씨(75)는 과거 양곡 도매시장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는 몇 남지 않은 미곡상이다. 지금은 주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상대
로 장사하고 있다는 허수정씨는 젊은 사람들은 더 이상 이곳을 찾지 않는다며, ‘금성상회’
의 수명 역시 이곳을 기억하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끝난다고 얘기한다.
장모님이 여든 둘에 돌아가시면서 이 가게를 주고 가셨다고
“1956년 7월 1일부터 했어. 59년 된 가게야. 내가 처음부터 한 건 아니고, 우리 장모한테
인수받은 거야. 내가 2대째야. 지금 아들이 옆에서 하고 있는 거니까 3대째하고 있는 거
지. 나는 22년 됐어. 장모님이 여든 둘에 돌아가시면서 이 가게를 주고 가셨다고. 그래도
옛날 중앙시장이 어땠는지, 대략 알지. 장가를 27살에 갔으니까. 지금 내가 일흔다섯이니
까. 그때는 시골에서 쌀이 올라오면 석발기26)로 도정을 해서 팔았어. 그때가 좋을 때야.
그때가 장사가 잘됐지. 그때는 시골에서 하주들이 물건 가지고 여기에 맡긴 다음 여관을
잡아놓고 자. 그 사람들이 여관에서 화투치면서 돈 줄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물건 갖고
오면 한 이삼일이면 다 팔았거든. 그 돈 줄 때까지 여관에서 자고 먹고 하는 거야. 근데
지금은 기계가 좋아져가지고 쌀이 그냥 일 톤이 한 번에 들어가면 한 시간에 한 백 이십
킬로(KG)짜리가 백 개가 나와. 포장까지 되가지고. 이물질이 탁탁 튀어나와. 노란 거 빨간
거 돌이 다 골라져. 그니까 지금은 여기 석발기가 필요가 없어. 그래서 석발기 다 팔았어. 
지금은 옛날하고 틀려서 선금을 줘야지 쌀이 와. 그때는 황학동 시장 밖에도 노점 쌀가게
들이 있었어. 이 시장이 장모님 계실 때만 해도 쌀가게가 백 개가 넘었어. 근데 지금은 다
없어지고 사십 개밖에 안 남았어. 왜냐. 그때는 황학동이 쌀가게인 줄 알고 다른 구에서도
찾아왔어, 여기로. 양곡시장이 여기만 있었으니까. 지금은 가락동도 있고 그러잖아.”
26) 석발기 : 쌀 등 곡물에 섞여 있는 돌을 골라내는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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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외상을 많이 깔아가지고 장사했는데 지금은 줄 수가 없어
“손님이 절반은 줄었어. 금액도 줄고. (도소매를 합해서) 옛날에는 하루에 천만 원을 팔았
어. 요새는 오백만 원 밖에 못 팔아. 쌀이 몇 가마인데. 우리가 세무서에 신고한 게 6개월
에 십오억 그러는데. 단가가 비싸니까 매출액이 많을 수밖에 없지. 쌀은 싼데, 잡곡은 비
싸 이거. 이거 참깨 한 포에 육십오만 원이야. 그러니까 이거 열 개 쌓아놓으면 육백오십
만 원이야. 이십 개 쌓아놓으면 천삼백만 원이야.
“옛날에는 전자저울이 없었어. 1956년 창업할 때는 쌀이 팔십 킬로가 한 가마였는데, 시골
사람들은 옛날 구닥다리 저울 있잖아. 그 저울은 눈금이 둔해.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한
가마에 대충 구십 킬로를 넣어줬어. 그럼 쌀을 시골에서 싣고 오면 십 킬로가 남는단 말
이야. 이만 원어치가 더 오는 거야. 그러니까 마진이 남았지. 요새 쓰는 전자저울은 종잇
조각 하나만 올려놔도 정확히 단위가 올라간단 말이야. 지금은 이십 킬로짜리가 오면 이
십 킬로 될까 말까해. 넘치질 않아. 딱 걸리지 않을 만큼만 해. 또 옛날에는 외상을 많이
깔아가지고 장사했는데 지금은 줄 수가 없어. 하주들에게 외상으로 받아서 외상으로 주니
까 괜찮았는데. 지금은 미리 송금을 해줘야 돼. 목포에서 쌀 백 가마만 보내라. 그럼 목포
에다가 쌀값으로 천만 원을 보내야 돼. 그래야지 보내주지 그렇지 않으면 안 와. 그러니까
나도 팔 때 외상으로 못 주는 거지. 그래도 옛날부터 몇 십 년씩 거래했던 친구들은 할
수 없이 외상을 주지.” 
나이 많은 손님들이 죽으면 이 가게 더는 못해
“지금은 다른 구에 있는 사람들이 여기 오질 않아. 누가 오냐. 나이 많은 손님들. 칠십대
이상 된 사람들은 여길 알아서 꾸준히 찾아와. 그 사람들이 죽으면 이 가게는 더는 못해.
지금 대형마트에서는 전부 다 쌀을 소포장으로 팔잖아. 젊은 친구들이 구루마 끌고서 소
포장 된 거 쌀 사면서 얼만지도 몰라. 얼마인지 개념도 없어. 우리는 주로 나이 많은 사람
들이 단골손님이야. 그 사람들은 오로지 이 집만 찾아 와. 그분들이 돌아가시면 못한다는
이야기지. 이 근처에서 음식 장사하는 식당들도 우리 단골손님이지. 여기 홍*옥. 콩나물요
리 전문점이야, 그리고 그 전원주가 선전하는 거 있잖아. 든든하고 먹고 힘내라고 하는
거. 할*순대국. 또 이*돔 감자탕. 예전부터 우리랑 거래를 했으니까. 한 7년이고 10년 했으
니까. 그 사람들은 우리를 믿고 사가는 거지. 쌀만 사가. 다른 건 안 사가. 식당이니까. 홍*
옥 거기는 중앙시장 그 입구에 있어. 할*순대국도 여기 골목에 있는 거고. 가까운 데는 배
달비가 안 나가잖아. 내가 갖다 주면 되잖아. 내가 나이는 많지만. 내 오토바이가 있잖아.
그니까 가까운 데는 우리가 갖다 준다고.” 
65
미곡부는 별도의 양곡도매시장 입구 외에 중앙통을 통해서도 들어갈 수 있다
현재의 미곡부 거리. 과거 미곡상이 있던 자리앤 다른 업종의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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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반세기, 서울중앙시장상인 이야기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 1. 2015 지역문화자원 발굴조사 황학동-서울중앙시장 격동의 반세기, 서울중앙시장상인 이야기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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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본 책자를 중구문화재단 ‘2015 지역문화자원 발굴조사’ <황학동-서울중앙시장> 사업의 최종결과물로 제출합니다. ※ 본 보고서는 연구진의 독립된 연구 결과물로서 연구진의 소견은 중구문화재단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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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격동의 반세기, 서울중앙시장상인 이야기 변화의 한 가운데에서 여 는 말 : 우 리 가 모 르 는 전 통 시 장 7 연구 범위 : 서울중앙시장 근현대의 삶 8 <1> 타임라인 : 개발과 경쟁의 시대 10 서울중앙시장 이름변천사 1941~2015 서울중앙시장 탄생부터 지금까지 (1)서울중앙시장의 탄생 : 사람이 많은 곳에 자연스레 시장이 자리 잡다 (2)1950~60년대 : 서울의 대표적인 양곡 도매시장으로 (3)1970~80년대 : 포장마차 음식재료의 성지로 변신하다 (4)1990~2000년대 : 서울 상권의 지각 변동, 격화되는 경쟁 속으로 (5)2010년대 : 기로에 선 서울중앙시장 서울중앙시장지도 : 판매 품목에 따른 9개 부서 <2> 상 인 들 : 생 존 과 신 뢰 의 현 장 36 닭·해물부/제일상회 “단골 관계는 물건을 사고파는 게 끝이 아니에요.” 보리밥부/장수보리밥 “동네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동네 사람꺼 팔아줘야 해요.” 청과부/인도상회, 충북상회 “남아있는 이 사람들이 이제는 가족이죠.” 중앙통/미성상회 “중앙시장 물건은 싸고 좋아. 근데 불편하니까.” 신당지하상가 회센터/광주수산 “옛날에는 이 통로가 다 생선가게들이었어요.” 미곡부/금성상회 “쌀가게에서 왜 동물사료를 파냐고?” 돈부산물부/돈부산물 협의회 “순대는 더 이상 서민음식이 아니에요.” 돈부산물부/호남상회 “지금은 진공포장하고 라벨 찍어서 팔고 있어요.” <3> 풍경의 기록 : 2015년 봄의 어느 날 80 닫는 말 : 시장의 다양성은 사람으로부터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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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7 여는 말 우리가 모르는 전통시장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오후 여섯 시 무렵, 왠지 모르게 소란스러운 공간. 가격 흥정이 벌어지고 인정 많은 상인들이 덤으로 이것저것 더 얹어주는 정다운 공간. 그러나 지나가버린 과거의 공간. 대형마트에 익숙해진 대도시 사람들이 흔히 떠올 리는 전통시장의 이미지이다. 특히, 지금의 20~30대에게 전통시장이란 어머니 손을 붙들고 따라갔던 놀이터이지 생필품을 구하는 생활의 공간은 아닐 것이다. 지역 공동체의 삶과 문화가 녹아든 장소로서 서민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전 통시장이 붕괴한다는 위기감으로 현재 지자체에서는 다양한 진흥 정책을 펼치고 있다. 마트에 비해 불편한 것이 문제인가 하여 주차장 등 편의시설도 구축하고, 연 구 사업도 벌이고, 전통 시장 고유의 분위기를 살려 관광 활성화를 꾀하기도 하며, 시장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문화작업도 다년간 이곳저곳에서 진행되었다. 연구팀이 처음 연구에 착수했을 때 전통시장에 대해 품고 있던 생각도 이러한 범 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그러나 연구를 진행해가면서 의문이 들기 시작하 였다. 전통시장은 정말로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 멈추어 그 때의 생활사를 보존해 야 하는 ‘박제된’ 공간인 것일까? 더 이상 전통시장을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막연 하게 옛 공간이라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아직도 장사하고 있는 상인들과 들락거 리는 손님들에게 전통시장은 어떤 곳일까? 연구팀은 전통시장이라고 하면 어떠한 이미지를 떠올리는지 20~30대들에게 무작 위적으로 물어보기 시작했다. ‘서비스가 불편하다’, ‘오래됐다’ ‘지저분하다’, ‘따뜻하 다’, ‘춥다’, ‘싸다’, ‘오히려 비싸다’ 등 사람마다 답변이 달랐다. 그 중 가장 많은 답 변은 ‘모르겠다’였다. 또 다른 질문을 던져보았다. ‘전통시장이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대답했고, 그 이유에 대한 대부분의 답변 또한 ‘모르겠다’였다. 어렴풋하게 답변한 이들이 전통시장을 나와는 상관없는 공간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대하고 연구팀은 실제 전통시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누가 살고 있는지 들여다보고자 하였다. 또한, ‘전통’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 그 공 간이 현대를 살아가는 각각의 개인들에게 어떻게 의미 있는 공간으로 다가갈 수 있을지 모색해 보고 싶었다.
  • 8. 8 연구 범위 서울중앙시장 근현대의 삶 중구 황학동에 있는 서울중앙시장은 젊은 사람들에게 그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나 이가 지긋한 어른들 사이에서는 서울 최대의 쌀 시장으로 통한다. 50년대 생성된 이 시장은 다양하고 오랜 역사적 맥락들이 존재하기에 중요한 생활사 연구 표본이 다. 본 연구에서 다루는 서울중앙시장의 범위는 옛 양곡도매시장과 6, 70년대의 야채 시장에서부터 지금의 중앙통·미곡부·보리밥부·돈부산물·닭(해물)·식자재·포목부·청과부 까지 8개 부서이다. 80년대 이전의 야채시장은 마장로가 개설되기 전 도로 주변에 있었던 불법노점상들이 모여 이룬 것으로 서울중앙시장과 분리해서 이야기해야 한 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80년대 이후 서울중앙시장이 야채시장의 전통성을 이어갔다 는 정황들이 많이 발견되어 조사 범위에 포함하였다. 반면, 서울중앙시장의 한 부서 인 ‘가구부’는 부득이 본 조사 범위에서 제외했다. 양곡시장이 축소된 자리에 생겨 나 급속도로 확장한 황학동 주방·가구 시장은 일정 부분 지금의 서울중앙시장의 행 정 범위와 겹치지만, 이미 별개의 시장으로 분리된 데다 주방·가구시장의 총 규모가 서울중앙시장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연구의 첫 번째 장에서는 <타임라인>은 서울중앙시장을 중심에 두고 시대에 따라 시장을 둘러싼 환경들이 어떻게 변화하였고, 그것이 시장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를 정리하였다. 옛 신문자료와 한국역사박물관의 ‘황학동’ 등 여러 문헌자료를 참고 해 기본적인 타임라인의 뼈대를 구축하고, 구술 인터뷰 내용 중 관련이 있는 짧은 대목들을 따 와 구체성을 입혔다. 두 번째 장 <상인들>은 서울중앙시장을 이루는 각 부서의 상인 중 한 명 이상을 선정하여 구술을 통해 시장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타임라인>이 시 장을 둘러싼 외부 환경 변화에 초점을 두었다면, <상인들>은 구술을 통해 시장 내 부의 삶을 들여다본다. 세 번째 장 <풍경의 기록>에서는 현재 서울중앙시장의 모습을 사진과 그에 대한 설명을 통해 다루었다. 키워드별로 정리된 내용을 통해 현재 서울중앙시장에서의 삶의 결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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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 11 서울중앙시장은 서울 중심부 중구 황학동에 있는 전통 도·소매 시장이다. 8·15해방과 6·25전쟁의 혼란 속에서 황학동 지역에 자리 잡은 서울중앙시장은 한때 남대문·동대문 시 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으로 불리었을 만큼 오랜 역사와 큰 규모를 자랑한다. 1950~60년대에는 서울의 최대 양곡도매시장으로 기능하였으며,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서울의 포장마차를 비롯한 음식점들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도매 시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인근 지역 주민들의 생활용품을 공급하는 소매 시장의 역할까지 서울중앙시장 은 도·소매를 아우르는 서민을 위한 종합시장으로 자리하고 있다. 시장을 구성하는 총 9개 부서1)는 그 역사와 명성의 무게만큼 복잡한 시대적·상황적 맥락 위에서 각각의 고유한 색깔을 형성해 왔다. 이 장은 각 부서들의 탄생과 번성, 그리고 쇠 락을 시장을 둘러싼 시대적 환경 변화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기 위해 연대별로 작성되었 다. 1) 중앙통·보리밥부·돈부산물(정육포함)·닭(해물)·식자재·미곡부·가구부·포목부·청과부
  • 12. 12 서울중앙시장 이름 변천사 1941년, <성동공설시장> 일제시기인 1941년 6월 7일, '성동공설시장'이 '신당동 308-2번지'에 설립된 기록이 있음. 1946년, <성동시장> 1946년 5월 1일 '신당동 175번지'에 '성동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사설시장 형성. 1950년, <성동중앙시장> 1950년 10월 20일, '신당동 140-28번지'에 신당동시장조합이 설립되어 새로운 시장이 '성동중앙시장'의 명칭으로 설치. 1962년, <서울중앙시장> 사단법인 서울중앙시장 운영회 설립. 이외에도 신당중앙시장, 성동중앙시장 등과 혼용되어 사용됨. 1972년, <성동중앙시장> 시장명칭을 '성동중앙시장'으로 변경. 1995년, <서울중앙시장> '서울중앙시장 운영회'라는 이름으로 시장 재조직. 2002년, <서울중앙시장> '서울중앙시장'으로 명칭 확정.
  • 13. 13 1940~1960년대 대표 사건 서울중앙시장에 영향을 준 사건 서울중앙시장의 역사 1945 광복 1950 ~1952 한국전쟁 1941 6월 7일, '성동공설시장'이 '신당동 308-2번지'에 설립된 기록 서울 시민이 소비하던 양곡의 70% 이상을 성동시장의 양곡시장에서 유통 1950년대 즈음 지금의 마장로 자리에 노점 위주의 야채시장 조성 1946 5월 1일 '신당동 175번지'에 '성동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사설시장 형성 1949 성동사설시장 점포수, 서울에 있는 사설시장 중 가장 많은 309개로 조사 1950 ‘성동시장’ 설립 신당동시장조합설 립 (223개 점포, 양곡시장 포함) 1954 성동시장 점포수 350개 조사 양곡관리법 제정 1955 중앙시장의 중앙통(남북도로) 형성 청계천 복개 공사 시작 1958 1962 서울중앙시장 개설 (700개 점포) 서울 내 시장 현대화 추진 정부에서 농협 직판장 설치하고 양곡판매사업 시작 1964 황학동까지 청개천 복개 완료 1966 서울중앙시장 내 노점 자진 철거 1967 서울중앙시장 도로 포장공사 완료 참고 : 서울역사박물관, 『황학동』 , 2014
  • 14. 14 1970~1980년대 대표 사건 서울중앙시장에 영향을 준 사건 서울중앙시장의 역사 1986 아시안게임 1988 서울올림픽 1971 성동지하상가 개장 정부미 방출 등으로 양곡도매시장 서서히 축소 마장로 개통으로 대다수 야채 노점상들 강제 철거 1980년대 중앙시장에서 돈부산물 등 포장마차 식재료 시작 1980년대 포목부 양품부 청과부 전성기 1972 서울중앙시장의 명칭을 ‘성동중앙시장’으로 변경 1973 성동지하상가에 화재 발생 청계고가도로 공사 완료 1976 서초동 양곡도매시장 조성 1977 마장로 개통 1979 지하철 2호선 공사 완료 1983 제2마장교에서 신답사거리까지 마장로 연장 1987 서울올림픽으로 주방현대화사업 진행 양재동 양곡도매시장 개설 1988 참고 : 서울역사박물관, 『황학동』 , 2014
  • 15. 15 1990~2010년대 대표 사건 서울중앙시장에 영향을 준 사건 서울중앙시장의 역사 1997 외환위기 2002 한일월드컵 대형 할인마트 등장 1993 1990년대 포목‧양품부 골목에 보리밥 가게들이 생겨남 동대문 거평프레야, 밀리오레, 두산타워 개장 양곡매매업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변경 1995 서울중앙시장 운영회 재조직 1999 신당지하상가 전면 개보수 왕십리뉴타운 조성 사업 시작 2002 ‘서울중앙시장’으로 명칭 확정 청계고가도로 폐쇄 청계천 복원 시작 2003 서울중앙시장 현대화 개선사업 시작 2004 청계천 복원 완료 2005 삼일아파트 자리에 ‘황학동 롯데캐슬 베네치아’ 건설 2008 2009 신당지하상가에 ‘신당창작아케이드’ 개관 ‘두산 위브 더 제니스’ 완공 2014 2015 서울중앙시장 주차장 완공 참고 : 서울역사박물관, 『황학동』 , 2014
  • 16. 16 (1) 서울중앙시장의 탄생 사람이 많은 곳에 자연스레 시장이 자리 잡다 ‘서울중앙시장’이 위치한 현재의 황학동은 조선 시대 중반까지만 해도 특정한 지명이 없 었던 지역이었다. 조선 시대, 광희문을 기준으로 도성 밖에 위치하던 이 지역은 대부분 논, 밭 그리고 공동묘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황학동이라는 지명이 명칭으로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일제강점기, 경성부의 도시화 계획의 목적으로 황학동 일 대가 경성부에 포함되면서, 일제는 황학동 일대의 지대 용도를 주거용지와 수공업 용지로 변경·개발하였다. 황학동 일대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당시 일제는 현재 ‘서울중앙시장’이 위치한 지역의 일부 또한 주택지로 개발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으 나 용도가 변경된 대지는 당시 일제의 전쟁 준비로 결국 개발이 진행되지 못한 채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해방과 한국전쟁이 끝이 난 후, 한국 정부가 우선으로 해결했던 과제는 폐허가 된 서울 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주택을 건설하고 보급하는 일도 함께 진행되었는데, 지금의 서울중앙시장이 위치한 지역도 이때 부흥주택 건설지구로 분류되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당시 만들어진 연립주택단지는 이후 남쪽의 서울중앙시장 영역이 북동쪽으로 확대되면서 점차 시장 영역으로 편입되어, 지금은 서울중앙시장 영역에 완전히 포함되어 있다. 서서히 인구가 늘어나 서울의 주 거주지역으로 자리 잡은 황학동과 신당동 주민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하는 시장의 생성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본 강점기였던 1941 년 6월 7일, ‘성동공설시장’이 ‘신당동 308-2번지’에 설립된 기록이 있다. 그리고 해방 직후 인 1946년 5월 1일에는 당시 ‘신당동 175번지’에 ‘성동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사설 시장이 들어섰다.2) 하지만 당시의 ‘성동시장’은 해방 후 이곳저곳에 제멋대로 생긴 소위 ‘야미3)’시장으로 불리는 무허가시장이었다. 무허가시장임에도 허가시장만큼 규모를 유지하 던 ‘성동시장’은 시청 당국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4) 1949년, 서울시는 무허가시장들을 2) 서울역사박물관, 『황학동』 , 2014, p. 105 3) 야미(ヤミ) : 암거래를 뜻하는 일본말 4) 『경향신문』 1948년 9월 2일자, 「무서가시장범람 배후의 경찰믿고 방임」
  • 17. 17 철거하거나 기존의 인가시장으로 편입시켰다. 이듬해인 1950년 10월 20일, ‘신당동 140-28번지’에 신당동 시장조합이 설립되어 새로운 시장이 ‘성동중앙시장’의 명칭으로 설 치되었다. 조합장은 박홍주였으며 점포수는 223개였다. 이때 지금의 양곡시장도 함께 조성 된 것으로 보인다.5) (사진1) 중앙시장 내부 골목들의 특징은 구부러지지 않고 일정한 폭으로 직선으로 쭉 뻗 어 있다는 점이다. 5, 60년대 지어진 오래된 건물들이 주를 이룸에도 이렇게 골목들이 직 선으로 뻗어있는 까닭은 시장 일대의 건물들이 해방 후 정부 주도하에 계획적으로 세워진 연립주택단지이기 때문이다. 본래 주택이었던 대부분의 건물들은 남쪽의 중앙시장(양곡시 장) 영역이 북동쪽으로 확대되면서 점차 시장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5) 서울역사박물관, 『황학동』 , 2014, p. 105
  • 18. 18 (2) 1950~60년대 서울의 대표적인 양곡 도매시장으로 서울 최대의 양곡 도매시장 1950년 새로 설치된 ‘성동중앙시장’은 양곡 거래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시장이었다. 한국 인에게 양곡은 어떤 생필품보다 중요한 거래 품목이었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양곡의 거래 욕구를 더욱 절실하게 했다. 양곡 거래 활성화로 ‘중앙시장’은 남대문, 동대문 시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한때는 서울시민의 쌀과 야채를 70%이상 도맡아 공 급했을 정도로6) 당시에는 지방에서 재배되어 서울로 올라왔던 쌀 대부분이 ‘성동중앙시 장’을 거쳐 갔다. 중앙시장의 대도매상들은 생산지의 수집상들이 쌀을 사모아 온 것을 위 탁판매해주고 중개료를 받아 이윤을 남겼다.7) “그때는 황학동 시장 밖에 노점 쌀가게들도 있었어. 이 시장이 장모님 계실 때만 해도 쌀가게가 100개가 넘었어. 근데 지금은 다 없어지고 40개밖에 안 남았어. 왜냐. 그때는 황학동이 쌀가게인 줄 알고 다른 구에서도 찾아왔어. 여기로. 양곡시장이 여기만 있었으니까. 시골에서 쌀이 올라오면 석발기로 도정을 해서 팔았어. 그때가 좋을 때야. 그 때가 장사가 잘됐지. 그때는 시골에서 하주8)들이 물건 가지고 여기에 맡긴 다음 여관을 잡아놓고 자. 그 사람들이 여관에서 화투 치면서 돈 줄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물건 갖고 오면 한 이삼일이면 다 팔거든. 그 돈 줄 때까지 여관에서 자고 먹고 하는 거야.” - 허수정(75, 금성상회) 서울 최대의 양곡 시장이었던 만큼 당시 서울의 미곡 시세 역시 중앙시장에서 결정되곤 6) 『경향신문』 1971년 12월 1일자, 「시장 어제 오늘 <7> 중앙시장 (上)」 7) 『경향신문』 1971년 12월 1일자, 「시장 어제 오늘 <7> 중앙시장 (上)」 8) 하주(荷主) :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꾸려 놓은 물건인 하물(荷物)의 주인을 일컫는 말. 일본식 표현.
  • 19. 19 했다. 지금은 쌀에 대한 이야기를 좀처럼 뉴스에서 찾아보기 힘들지만, 쌀값이 불안정했던 당시에는 쌀의 시세가 서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정보였기 때문에 일간지에서는 ‘성동중앙 시장’의 쌀값을 참고하여 쌀의 시세를 기재하곤 했다. 그 밖에도 일간지들은 정부 배출미 등 쌀 시세에 영향을 주는 사건에 대한 의견을 구할 때도 중앙시장의 양곡상인들의 말을 참고하곤 했다.9) 뚝섬, 천호동 및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야채가 서울로 들어오던 곳 당시 서울의 3대 시장으로 불리었던 남대문, 동대문 시장과 중앙시장의 차이점이 있다면, 다른 두 시장이 종합시장으로서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품목들을 전체적으로 다루었던 데 반해 중앙시장은 대부분의 점포가 미곡상과 야채상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서울 최대의 양곡 시장이었던 중앙시장은 양곡만큼이나 야채 역시 매우 활발하게 거래되었다고 한다. 야채의 경우 뚝섬, 천호동 및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반입되어 서울 시내 타 시장에 서 거래되기 전에 이 중앙시장을 경유했으며 실제 야채 시세가 여기에서 좌우될 정도였 다.10) 야채 도매시장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당시의 중앙시장은 김장시장으로도 유명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장은 가정마다 다음 한 해 동안 먹을 김치를 준비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그만큼 각 신문에서는 김장철이 되면 어느 곳에서 ‘김장시장’이 열리며, 어느 시장의 배추 값과 무값이 싼 지에 대한 정보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중앙시장은 50년대부터 김장시장이 열렸던 시장 중 한 곳으로 1970년대에는 용산·청량리와 함께 서울 시내 주요 김장시장의 하나로 부상했다. 야채를 하역하는 일을 독점하기 위해 조직된 폭력조직도 있었을 정도 로11) 야채 거래량이 많았던 중앙시장은 매년 김장철이 되면 배추와 무를 가득 채운 트럭 과 이를 사기 위해 찾아오는 소매상, 일반 손님들로 가득했다.12) 9) 『동아일보』 1955년 5월 27일자, 「쌀 만환대를 돌파」 10) 서울역사박물관, 『황학동』 , 2014, p. 70 11) 『동아일보』 1964년 7월 17일자, 「야채하역독점 획책 깡패들이 폭행까지」 12) 『경향신문』 1967년 11월 1일자, 「겨울시정(4) 김장」
  • 20. 20 (3) 1970~80년대 포장마차 음식재료의 성지로 변신하다 경제개발과 함께 진행된 서울시 토목공사 1960년대부터 서울시는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한 심각한 주택부족과 도로 등의 인프라 부족 문제를 겪게 된다. 박정희 정부는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 도심에 산재해있 던 불량주택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현대식 상가아파트를 건설했다. 또한, 교통문제를 해결 하기 위한 고가도로와 교량 건설 등의 토목공사도 함께 진행되었다. 지금의 ‘황학동 롯데 캐슬 베네치아’ 자리에 있었던 ‘삼일시민아파트’ 건설과 청계천 복개사업, 청계천 고가도로 건설도 이 당시에 이루어졌다. 시장 현대화와 성동지하상가 도심·부도심 정비를 목적으로 진행된 토목공사는 1970년대 들어 시장현대화로 이어졌다. 당시까지만 해도 서울 도심의 내로라하는 대부분 시장들은 소방도로와 소화시설은 물론 제대로 된 변소시설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서울시는 시장현대화계획을 세우고 1 백 70억 원의 민간자본을 유치해 도심에 있는 4개의 시장13)에10층 이상의 현대식 상가건 물을 세우고 변두리 시장엔 지하 1층, 지상 3층의 상가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14) 이 시기의 중앙시장 또한 민간자본 유치를 통한 시장 현대화사업과 지하철 건설사업과 맞물려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지금 중앙시장의 지하에 위치한 ‘신당지하상가’ 건설이 바로 그것이다. 1971년 ‘성동지하상가’라는 이름으로 건립된 이 지하상가는 소방도로 확보와 도 시 미화 등의 이유로 폭 8m의 길 위에 있던 800여 개의 지상의 노점들을 지하로 이전하 는 것을 목표로 건설되었다. 하지만 ‘성동지하상가’의 건설이 모든 상인의 환영을 받으며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몇몇 시장 노점상들은 지하상가에 들어서려면 1인당 10만 원 이상 13) 동대문시장, 대신시장, 남대문시장 등 14) 『매일경제』 1971년 2월 8일자, 「도심지 4시장을 고층화」
  • 21. 21 씩을 내라는 요구에 ‘돈이 없는 영세 상인들은 지하상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시장에서 쫓겨나게 됐다’며 공사를 못 하게 방해하기도 하였다.15) 이외에도 공사비 문제로 서울시와 시공업자 사이에 소송이 벌어지는 등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결국, 조성 된 800여 개의 점포 중 절반을 채우지 못한 채 개장한 ‘성동지하상가’는 이후에도 여러 문제에 휩싸였다. 1974년엔 큰 화재가 발생하여 점포 150여 개가 전소하고 1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16) 그리고 이에 대한 피해보상과 관련한 소송이 발생해 상가 복구가 지 체되기도 하였다.17) 전성기를 누렸던 양곡 도매시장의 축소 서울시의 시장현대화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서울 시내에서 양곡이 가장 많이 거 래되었던 중앙시장의 양곡 도매시장은 차츰 그 명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한때 하루 평균 1만여 가마의 쌀이 거래되기도 했던 양곡 도매시장은 1965년부터 정부가 쌀값을 통제하 기 위해 직접 정부미를 방출하고 나서부터 점차 시장의 규모가 축소되기 시작했다. 하루 에 2~3천 가마의 쌀을 취급하던 도매상들은 하루 10가마의 쌀을 파는 소매상으로 전락했 고18), 60여개의 미곡상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20여개 점포는 폐점하기에 이르렀다.19) 동 대문·남대문 시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중앙시장은 1970년대에 들 어 양곡 도매시장의 축소와 함께 조금씩 사양의 길로 들어섰다. 마장로 개통과 함께 사라진 야채상인들 신당동에서 황학동을 가로질러 마장동까지 이어지는 마장로가 개통되면서 중앙시장의 양 곡 도매상과 야채상들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마장로가 개통되기 전의 그곳은 수많은 야 채 노점상들이 진을 치고 있던 자리였다. 경제개발 5개년(1961년~1965년)을 필두로 도로· 주택·시장 등의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수많은 야채 노점상들이 골칫 거리였다. 노점상들과 노점을 철거하고자 하는 정부 사이에서 잦은 갈등이 일어났고,20) 결 15) 『경향신문』 1970년 11월 24일자, 「중앙시장 영세상인들 대책요구코」 16) 『동아일보』 1974년 1월 1일자, 「1명 소사 성동중앙시장에 불」 17) 『동아일보』 1975년 8월 27일자, 「불탄 성동지하상가 일관성없는 시장허가」 18) 『경향신문』 1971년 12월 1일자, 「시장 어제 오늘 <7> 중앙시장 (上)」 19) 『매일경제』 1969년 8월 30일자, 「시장순방(13) 중앙」 20) 『동아일보』 1962년 10월 19일자, 「19일 새벽 강체철거, 중앙시장 노점 상인 반대소 동」
  • 22. 22 국 1979년 마장로 개통으로 인해 많은 야채 노점상들이 쫓겨나거나 그 자리를 옮겼다. 마 장로 개통은 야채 노점상뿐 아니라 양곡 도매시장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79년 마장 로가 개통된 후에도 양곡 도매시장 구역은 대형트럭의 접근이 쉽지 않았으며 주차시설도 갖추어지지 않았다. 이런 조건으로 인해 대량물류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산지 직거래·포장 미 판매 등이 시작되자 양곡 도매시장의 거래 물량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21) “옛날엔 배추도 많이 팔고 김장시장이 컸는데, 그게 없어졌어. 길가에 있었는 데. 고춧가루는 저기 안쪽에 있었고. 길가 마장로에 분포되어 있었지. 지금은 다 없어졌어. 아무래도 소비가 옛날하고 다르잖아. 지금은 마트가 많이 생겼 으니까. 지금 시장에는 야채가게가 별로 없잖아. 옛날에는 야채가게가 많았 지. 배추도 시골에서 다 절여서 오지.”  - 진화자(58, 미성상회) 서울 지역 포장마차 음식재료의 성지가 되다 마장로 개통 후 1980년대부터 점점 축소되기 시작했던 야채 골목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바로 돈부산물이었다. 돈부산물이 중앙시장의 주요 품목으로 거래되기 시작한 가장 큰 이 유는 포장마차 제작소를 비롯한 주방가구를 제작·판매하는 곳이 인근 지역에 많았기 때문 으로 보인다. 서울시는 1960년대에 들어서부터 도심지 인구 과밀 현상이 새로운 사회 문 제로 두드러질 만큼 인구 비대화 현상을 겪었는데, 그중에서도 황학동은 서울 최대의 인 구밀집지대로 꼽혔다. 인구가 많은 만큼 중앙시장 주변을 비롯한 황학동 일대에는 밤마다 4, 50대의 포장마차가 줄지어 늘어설 정도였다고 한다.22) ‘서울 일대의 포장마차 음식재료 는 중앙시장에게서 나온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1980년대의 중앙시장은 돈부산물을 포함 한 닭, 해물 등 포장마차에서 판매하는 안줏거리의 음식재료들을 많이 판매했다. 마장로 개통으로 인해 마장동 축산물시장으로부터 돈부산물 재료를 공급받기 쉬웠다는 점도 이점 으로 작용했다. 최종무 :  처음에는 순대하고 편육을 많이 했지. 옛날 잔치 음식엔 편육이 꼭 들어갔어요. 편육이 없으면 잔치를 못할 정도로 중요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당시에 중앙시장에서 편육을 많이 했었어요. 옛날에는 곱창 같은 게 없었어 21) 서울역사박물관, 『황학동』 , 2014, p. 85 22) 『동아일보』 1983년 1월 10일자, 「서울특별시 이상비대증앓는 축소한국 <2> 인구증가 (上)」
  • 23. 23 요. 순대만 만들었지. 머릿고기랑 순대.  70년대부터 순대집이 많이 생겼나 그 래요. 제가 82년도에 (중앙시장에) 들어 왔는데, 그 당시에도 순대하고 편육 만드는 가게가 많았었어요. 그리고 옛날에는 포장마차가 많았죠. 주로 포장마 차에 납품을 많이 했죠.  송찬경 : 옛날에 저 같은 경우에는 잘 될 때를 비교하면 보통 1500cc 승용차 있잖아요. 그걸 두 달 만에 현금으로 뺐으니까(샀으니까).  내 생활비 쓰고. 그 정도까지 됐었는데. 지금은 택도 없죠. 그때가 90년대.. IMF 전에.. 93년도 그 럴 때. 90년도 초반 그때까지만 해도 잘됐었죠. 지금은 뭐 (잘 안 되고 있죠.)   - 최종무(63, 부산물협회 회장), 손찬경(50, 부산물협회 총무) 소매 위주였던 포목부와 양품부의 활약 쌀과 야채가 주를 이루긴 했지만, 1950년대부터 중앙시장은 일용잡화상에서 봉제, 의류, 청과, 생선 및 건어물까지 취급하는 종합시장이기도 하였다. 도매 비중이 높고 규모가 컸 던 쌀과 야채를 제외한 나머지 품목들은 주로 소매 위주로 거래되었다. 1970, 80년대 들 어서면서 양곡시장과 야채시장이 다소 축소되긴 하였으나, 중앙시장을 찾는 사람들은 여 전히 많았다. 황학동, 신당동, 약수동, 왕십리 등 시장 인근 지역의 많은 인구가 생필품을 사기 위해 중앙시장을 이용했고, 굳이 도매가 아니더라도 중앙시장의 쌀과 야채가 싸다고 소문이 난 탓에 천호동을 비롯한 서울 동북권 지역 사람들까지 이곳에서 장을 봤다고 한 다. 소매 위주의 점포 중에서도 특히 포목부와 양품부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포목부의 주요 상품이던 한복과 이불은 당시 신혼부부들의 필수 혼수품이었으며, 포목부와 미곡부 사이 에 있던 술집 (속칭 ‘방석집’) 아가씨들 또한 이곳에서 자주 한복을 맞추었다고 한다. 장사 가 잘되던 1970, 80년대에는 수선과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기술자를 따로 둘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 중앙시장의 포목부는 ‘광장시장’의 물건을 떼어다 팔곤 했는데, 당시에는 동대 문 의류시장이 도매만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일반인들은 중앙시장 포목·양품부에서 의류, 신발, 악세사리 등을 구입하곤 했다. 아동복 역시 매우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매년 설이 되면 중앙시장 포목·양품부 골목은 아동 한복을 사기 위한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다. 80년대는 지금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잘됐죠. 그때는 뭐 대단했죠. 천호동 이 쪽에서도 저쪽에 화양리 쪽이나 동북권 쪽에서도 여기 와서 장을 보곤 했어 요. 잠실 쪽이나 강 건너 사람들도 여기 와서 장을 엄청 많이 봤어요. 그 당
  • 24. 24 시에는 옷가게도 엄청 많았어요. 지금이야 관광객들 유치하려고 (동대문 시 장이) 낮에도 열리지만, 그때는 새벽에 열었다가 새벽에 닫고 가고 그랬어요. 도매만 하던 시절이니까. 근데 (중앙시장은) 소매를 위주로 한 거죠. 그때는 하여튼 장사 안 되는 데 없었어요. 사람 밀려다니고 그랬어요.  - 윤재림(59, 장수보리밥) 한때 큰 도매시장이었던 청과부 중앙시장의 청과부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 역시 1970, 80년대였다. 지금은 청과부 골목에 남은 몇 집만이 소매로 장사를 하고 있는 수준이지만, 당시에는 꽤 큰 청과 도매시장이었 다고 한다. 매일 새벽마다 과일을 가득 담은 트럭이 지방에서 올라왔으며, 아침이면 서울 각 지역의 과일을 파는 소매점에서 과일을 사기 위해 중앙시장 청과부를 찾았다. 지금의 청과부 골목에서부터 황학동사무소까지 이어지는 길이 전부 과일가게였을 만큼 상당한 규 모를 자랑하던 중앙시장 청과부는 1990년대에 들어 약수동, 신당동, 황학동, 왕십리 등 중 앙시장 주변 지역의 재개발과 함께 들어선 아파트, 그리고 그 아파트와 함께 등장한 대형 마트 등의 영향으로 쇠락하기 시작했다. 신대화 : 도매도 많이 하고 세금도 많이 내고 그랬는데, 지금은 장사가 안되 니까 세금도 별로 못내. 나이 먹어서.  단골손님 : 옛날엔 다 도매상이었어.  강승복 : 낮 열두 시에 장사가 끝나는 집도 있었지. 트럭 가지고 와서 여기서 사서 돌아다니면서 팔고 그랬지. 자두도 시골에서 농사 진 거 따다가 경매해 가지고 들어오면 다 보내주고 그랬지. 집집마다 몇 채씩 들어왔어.  강승복 : 옛날에는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요. 골목에. 차들이 새벽 한 시, 두 시. 열두 시부터.. (오기 시작했으니까) 신대화 : 새벽에 두, 세시에 물건이 막 들어오니까. 우리들은 새벽 두, 세시면 문 열어. 근데 지금은 그런 곳이 없어. 단골손님 : 옛날엔 그런 사람들이 직접 들어왔어 청량리같이. 가락동 시장같 이.  강승복 : 우리도 김천에서 직접 오고. 제주도에서 귤이 수박이랑 다 들어왔었 어.  - 강승복(57, 인도상회), 신대화(73, 충북상회), 단골손님
  • 25. 25 (4) 1990~2000년대 서울 상권의 지각 변동, 격화되는 경쟁 속으로 전통시장 상권의 큰 변화 서울 전체를 한두 시간 거리로 좁힌 지하철의 등장은 서울 전통시장 상권에 매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대문 밖에 있는 부도심 시장들은 지하철의 등장으로 도심 내의 거대 상 권과 부득이하게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실제로 서울역, 시청 앞, 종로, 을지로입구, 동대문, 서울운동장역 등 지하철역은 남대문·명동 지역 상권과 동대문 지역 상권에 사람을 더욱 몰리게 했다.23) 지하철 개통과 동시에 진행된 지역 주택 개발 역시 기존 시장 상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80년대부터 진행된 강남 주택개발은 자연스 럽게 강남 지역의 전통시장 개발로 이어졌고, 기존 강북 상권에 대항하는 강력한 상권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서울 상권의 지각변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던 1988년, 양재동에 양곡도매시장이 개설되었 다. 경부선, 구마선, 영동선 고속버스의 서울 기·종점인 서울고속터미널의 근처에 자리 잡 은 양재동 양곡도매시장은 양곡 유통에서 매우 유리한 입지였다. 양재동 양곡도매시장이 개설됨에 따라 중앙시장 양곡부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정부의 양곡정책, 백화점, 슈퍼 등 새로운 유통 업체들의 등장으로 점차 축소되고 있었던 중앙시장 양곡 도매시장은 이 사건을 계기로 급속하게 위축된다. 한때 서울시 전체 양곡의 70%를 공급했던 중앙시장의 양곡 도매상들은 중앙시장을 떠나거나, 가구점 등으로 전업하여 1992년에 남아있는 양곡 도매상은 50개에 불과했다.24) 23) 『매일경제』 1985년 2월 18일자, 「재래시장 개발따라 시장상권 “대이동” 현상」 24) 『매일경제』 1992년 10월 30일자, 「한때 한국최대 양곡 도매 신당동 중앙시장 “사양 길”」
  • 26. 26 아파트 재개발 열풍 80년대 진행되었던 불량주택을 개량할 목적으로 진행된 아파트 재개발 산업은 90년대에 이르러 급물살을 타게 된다. 80년대 이르러 도매시장보단 지역 소매시장으로서의 역할이 커진 중앙시장의 입장에서는 잇따라 이어지는 아파트 재개발 산업이 그리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성동구, 중구 지역 기존 주택에 사는 주민들이 중앙시장의 주 고객이었기 때문 이다. 아파트 재개발로 중앙시장 주변 지역의 주택 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고 고 층 아파트가 건설된 지역에는 자연스럽게 대형마트가 들어섰다. “여기 이마트 청계천점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장사가) 너무 안 되는 거야. (...) 마트에서 일주일치 장을 다 보잖아. 배달까지 해주지. 아무래도 직장 다니는 엄마들은 집에 들어가는 길에 여기서(중앙시장)에서 사갖고 가기에는 무겁고 힘들지. 이런 것들이 점점 태가 나는 거지. (...) 아파트가 생기기 전에는 저기 청구동, 신설동에서도 다 왔지, 저쪽 약수동에서도 왔지. 여기 왕십리 뉴타운 개발되기 전에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도 다 여기(중앙시장) 다녔던 거야. (...) 나 시집올 때만해도 저런 아파트가 없었어. 다 주택이 있었어. 약수동도 주택 이여가지고 다 이리로 장을 보러 왔어. 명절 때 되면 어마어마했어. 이렇게 다니지도 못해. 틈새로 다녀야 했어. 사람 많아가지고. (...) 어디고 다 마찬가 지야. 재개발하면은 거기 주택 집에 살던 사람들이 없어지니까. 아파트 지으 니까. 거기 아파트 밑에 상가가 생기잖아.” - 강승복(57, 인도상회), 포목·양품부 자리가 보리밥부로 바뀌다 기존 의류도매상가로 기능하던 동대문 의류시장은 1990년대 들어 도매뿐 아니라 일반 소매 고객들에게도 그 문을 열기 시작했다. 쇼핑몰 ‘거평 프레야’(현 케레스타)를 시작으로 조성된 동대문 패션타운은 서울뿐 아니라 수도권에서도 옷을 사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붐볐다. 동대문과 가까운 곳의 위치했던 중앙시장의 포목, 양품부를 찾던 사람들 또한 자 연스럽게 중앙시장에서 동대문으로 발길을 옮겼고, 한때 중앙시장의 한구석을 차지하던 수많은 포목, 양품 가게들은 한둘씩 문을 닫아야만 했다. 기존 포목과 양품을 파는 가게들 로 가득했던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보리밥 가게였다. IMF 경제 위기로 가격이 싼 음식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보리밥을 찾는 손님들이 많아질수록 보리밥을 파는 가게는 늘어났고, 포목부로서 기능하던 중앙시장의 한 골목은 보리밥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27. 27 (사진2) 예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현재의 한산한 포목부 골목 포장마차 노점의 감소 1990~2000년대 양곡과 야채 도매시장이 축소되고, 아파트 건설 등으로 소매 고객들이 줄어들고 있는 와중에도 중앙시장을 굳건히 지키고 있던 품목은 돈부산물로 대표되는 포 장마차 음식재료 도매 업체들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돈부산물·닭부산물·해물 등 포 장마차 음식재료의 성지로 자리 잡은 중앙시장 안의 도매 업체들도 2000년대에 들어 위 기를 맞게 된다. 첫 번째 위기는 바로 포장마차 노점상의 감소다. 1989년 4,325개소였던 서울시의 포장마차는 20여 년이 지난 2013년에는 869개소로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아래 표)
  • 28. 28 (표) 서울시 노점상 추이 자료 : 서울시민청 프랜차이즈 업체의 위협 중앙시장 안의 음식재료 도매상들의 두 번째 위기는 자영업의 위기와 함께 찾아왔다. 경 기 악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한 소자본 외식업 자영업자의 몰락은 곧 중앙시장 식자재 도매상의 고객 감소로 이어졌다. 대신 프랜차이즈 창업이 증가했지만 식자재 도매상의 매 출과는 관계가 없었다. 프랜차이즈 업체의 경우, 식품 제조와 서비스에 필요한 식자재를 본사에서 직접 공급(유통)하기 때문이다. “(경기가 안 좋아서) 물건이 덜 나가는 것도 그렇지만서도 일단은 옛날에 비해 서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까 마진이 별로 없어져요. 프랜차이즈 쪽들이 많아지 면서 힘들어졌죠. 프랜차이즈에서 이런 물품을 영업집에다 대줘요. 이런 일반 음식점들이 없어지는 대신에 프랜차이즈로 하는 음식점들이 많아지는 거예 요.“ - 박경선(46, 제일상회) 연도 포장마차 손수레 차량노점 좌 판 기 타 계 1989년 4,325 (21.3) 7,797 (38.4) 569 (0.4) 7,614 (37.5) - 20,305 (100%) 2000년 1,809 (9.8) 6,037 (32.7) 1,900 (10.4) 8,718 (47.2) - 18,464 (100%) 2013년 869 (9.8) 2,071 (23.5) 736 (8.3) 2,770 (31.4) 2,380 (27.0) 8,826 (100%)
  • 29. 29 (5) 2010년대 기로에 선 서울중앙시장 도소매 비율의 변화 해가 다르게 전통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현상은 서울중앙시장 상인들의 심각한 경제적 손실로 이어졌다. 그 중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임대료마저 감당하기 힘든 상인들은 장사를 접거나 서울중앙시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게를 옮겼다. 서울중앙시장을 찾는 사 람들이 줄어드는 현상은 상인들의 도소매 비율 또한 변화시켰다. 상인들의 말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울중앙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도매 위주의 상인들도 소 매 비중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시장 자체에 사람들이 없는 탓에 소매 판 매는 기대하기 힘든 수준이라고 한다. 도매 위주의 판매 중에서도 소매를 다루던 미곡부 와 돈부산물부의 상인들은 현재 소매는 거의 하지 않으며, 예전부터 도매로 거래를 해왔 던 사람들과 관계를 지속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한때 큰 규모 의 청과도매시장이었던 청과부 상인들은 현재 도매 판매는 거의 되지 않고, 소매만 간간 이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재 남아있는 청과부 상인들의 다수는 상가점포를 자가 소 유하고 있어 임대료를 따로 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중앙통 정문과 후문의 다른 분위기 주로 소매 위주의 상인들이 밀집한 중앙통은 하나의 품목을 취급하는 도매 위주 부서와 는 달리 여러 가지 품목의 상품들을 다양하게 취급하고 있다. 그렇기에 중앙통은 서울중 앙시장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시장 자체를 찾는 사람들이 줄 어들자 서울중앙시장의 정문과 후문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정문 쪽의 중앙통은 지하 철, 버스 등 교통편의시설이 잘 구비되어있어 여전히 소매고객이 많은 편인데 반해, 후문 쪽의 중앙통은 상대적으로 이용고객이 적어 한산해진 것이다. (사진3) 이러한 사정으로 현 재 중앙통의 상인들은 후문 쪽으로 갈수록 도매 비중이 높은 편이다.
  • 30. 30 (사진3) 같은 시각, 정문에서 바라본 중앙통의 모습과 후문에서 바라본 중앙통의 모습. 정문 쪽에 비 해 후문 쪽의 중앙통이 비교적 한산하다.
  • 31. 31 (사진6) 2015년 7월 완공된 서울중앙시장 공영주차장. 뒤로 두산위브더제니스가 보인다. 시장 내 주차장 건설에 상반된 상인들의 의견 2015년 7월, 서울중앙시장에도 주차장이 건설되었다. (사진7) 서울중앙시장 내 주차장에 대한 필요성은 상인들 사이에서 오래 전부터 이야기되던 바였다. 멀리서 찾아오거나 물건 을 다량으로 구입하는 손님은 자동차를 몰고 오는 편이 많은데, 시장 내 주차장이 없어 많은 불편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도매 비중이 높은 상인일수록 주차장 건설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상인들의 요구에 맞추어 최근 완공된 서울중앙시 장 주차장은 몇몇 상인들에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이 소식이 모두에게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주차 장 건설이 새로운 갈등을 야기 한 것이다. 바로 소방도로 확보 문제다. 오랜 전부터 서울중앙시장과 주방가구시장의 상 인들은 본인들의 점포 앞 도로까지 취급하는 상품들을 진열하곤 했었다. 그렇기에 상인들 과 구청 사이에 소방도로 확보 문제는 예전부터 존재해 왔다. 그런데 주차장이 건설된 후 이 문제가 더욱 가시화된 것이다. 최근 중구청에서는 서울중앙시장과 주방가구시장의 소 방도로 확보를 위해 상인들의 점포 밖 상품 진열을 제재하고 있으며, 이에 많은 상인들은 ‘가뜩이나 장사가 안 되는데 상품진열도 못하게 하니 장사가 더 안 된다’며 불만을 토로 하고 있다. 소방도로 확보 문제는 보리밥부 골목 중앙에 있는 포장마차 노점들에게는 더
  • 32. 32 큰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포장마차 노점들이 골목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노점 철거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포장마차 노점상 상인들은 소방도로 확보 문제로 장사를 하지 못하 게 될까 우려하고 있다. (사진8) 보리밥부 골목 중앙에 위치한 포장마차 노점들 전통시장 인근의 현대식 주상복합 지금의 서울중앙시장이 처한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미지는 바로 아래의 사진(사진 4)일 것이다. 국내 최대 규모의 양곡 도·소매시장’ 이라는 간판 문구가 무색할 정도로 축 소된 양곡시장 사이로 주상복합 아파트가 우뚝 서있다. 최근 황학동 주변에는 ‘두산 위브 더 제니스’ 외에도 왕십리뉴타운의 ‘텐즈힐 아파트’, ‘황학동 롯데캐슬 베네치아’ 등 여러 현대식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1980년대부터 진행된 아파트 개발 사업으로 인해 기존 고객을 상당수 잃은 서울중앙시장 상인들에게 시장 주변에 건설된 주상복합 아파트 는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특히 옛 삼일아파트를 헐고 지은 ‘황학동 롯데캐슬 베네 치아’ 저층부 상가에는 대형할인마트, 유명 커피숍, 찜질방 등이 입점해있어 서울중앙시장 을 어려움에 처하게 하고 있다. (사진5)
  • 33. 33 (사진4) 양곡시장 사이로 우뚝 서있는 주상복합 아파트 ‘청계천 두산 위브 더 제니스’ (사진5) 황학동 롯데캐슬 베네치아’ 저층부 상가에는 대형할인마트, 유명 커피숍, 찜질방 등이 입점해 있다.
  • 34. 34
  • 35. 35
  • 37. 37 약 60년이라는 시간동안 서울중앙시장은 시대적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해왔다. 그렇다면 역동적인 시장 안에서 상인들은 어떻게 살 아왔을까. 이 장에서는 전통시장을 구성하고 있는 상인들을 대상으로 거 래 습성, 전통시장 내의 인간관계, 외부 환경으로부터 불어 닥친 위기를 감지하고 대응하는 방식 등 삶의 굴곡과 버티는 힘에 관한 구술 작업을 진행하였다.
  • 38. 38 닭·해산물부 “단골 관계는 물건을 사고파는 게 끝이 아니에요.” 제일상회 박경선 인터뷰 일자 : 2015년 4월 7일 이름 : 박경선(46) 영업기간 : 15년 취급물품 : 해수산물(홍합, 꼬막, 멍게, 해삼 등 안주감 수산물)
  • 39. 39 지금의 중앙시장에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이들은 아마도 음식재료 도매상들일 것이다. 포장마차를 비롯한 술을 파는 음식점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중앙시장 음식재료 도 매상들은 돈부산물·닭부산물·해수산물 등 다양한 품목을 취급하고 있다. 그 중 닭부산물과 같은 구역을 공유하고 있는 해수산물 가게는 시장의 성격에 맞게 다른 소매 시장의 해산 물 가게와는 달리 생선은 팔지 않고, 홍합, 꼬막, 멍게, 해삼 등 안줏감 해산물을 취급하고 있다. 포장마차 등 외식업 개인 자영업자에게 해산물을 판매하는 이들에게 어려움은 자영업의 위기와 함께 찾아왔다. 행정단속으로 인한 포장마차 점포수 감소 또한 중앙시장 음식재료 도매상들에게는 위기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반대급부로 늘어난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이들에게 새로운 위협이었다. 프랜차이즈 업체는 식품 제조와 서비스에 필요한 식자재를 본사에서 직접 공급(유통)하기 때문이다. 중앙시장에서 15년간 해수산물을 취급한 제일상회의 박경선(46)씨는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신뢰’라고 말한다. 단순히 상인과 손님 관계가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가는 파트너라는 생각으로 장사하지 않으면 버티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장사라는 게, 이것도 인맥이 중요해요. “저희가 파는 게 다 안주용 해산물이잖아요. 대부분 술집이죠. 호프집 같은 데도 해물 같 은 게 다 있잖아요. 저희 집을 찾아오는 분들은 거의 다 단골이죠. 쭉 하시던 분들이 많 고. 15년 전부터 장사하신 분들은 거의 대부분 계속 쓰신다고 보면 돼요. 그러다가 없어지 고 또 새로 하신 분들은 계속 이어져 나오고 그러죠. 장사라는 게, 이것도 인맥이 중요해 요. 장사를 하시다가 그만 두시는 분들도 있잖아요. 근데 그 분들이 새로 시작하는 분들을 소개 시켜줘요. 그리고 그만 두신 분들이 다시 가게를 차리시게 되면 또 오고. 그러니까 사람하고 관계가 장사로 만났지만서도 인간적으로 친한 게 도움이 많이 되죠. 인맥이 상 당히 중요해요. 너무 직업적인 관계로만 맺으면 저희가 대하기도 힘들어서 인간적으로 다 가가려고 노력해요.” 단골 관계는 물건을 사고파는 게 끝이 아니에요. 정다운 것이 있죠. “단골손님 중 가까운 가게는 저희가 일요일에 쉬니까 가서 술도 마시고 그래요. 그렇게 오 고가다 보면 어제 무슨 뭐 솔직한 이야기로 안 좋은 일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하면 저희 도 이야기하면서 위로도 주고 자식 결혼한다고 하면 좋다고 축하도 해주고 그런 식으로 되가는 거죠. 단지 물건만 딱 사가고 그러진 않아요. 정다운 게 있는 거죠. 사실상 장사를 하다보면 물건이 좋은 것도 있고 약간 품질이 떨어지는 것도 있을 수 있거든요. 그럴 땐 단골들한테 양해를 구하죠. 솔직히 말하는 거를 더 바래요. 항상 믿고 사실 수 있으니까.
  • 40. 40 그러니까 재래시장 단골이 좋은 거예요. 마트에서는 그게 안 되죠. 그래서 신뢰가 가장 중 요한 거예요. 단골 중에 포장마차인데, 실내가 아니라 길거리 포장마차 하시는 분이거든요. 그 분은 정말 처음 시작해서 올해로 저희와 거래한지 약 20년 될 거예요. 그 때는 제가 누님 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관계를 맺고 있어요. 제가 (가게를) 차리 면서 그 분이 저한테 계속 쓰시는 거죠. 거기 애들 쪼그만 할 때 봤는데 지금은 다 장가가 고 벌써 그 정도 됐으니까.”  한 5~6년 됐나? 그때부터 소매들이 많이 죽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예전엔 소매가 많이 됐었어요. 멀리서 오시는 분들도 많았었어요. 그전에 장사하시는 분 들도 멀리서 와서 사가지고 가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장사들도 안 되는 것도 있지만, 동네 마다 마트가 큰 게 있으니까. 거기에 해물 같은 것도 구비를 해놓으니까, 대부분 소매는 거기서 사고 그러시죠. 예전에는 수산물 파는 가게들이 더 많았어요. 지금보다 네 군데 정 도 많았어요. 근데 다들 안 되니까 그만 둔거죠. 이제는 거의 도매라고 봐야죠. 한 5~6년 됐나? 그때부터 소매들이 많이 죽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토요일이나 되어야 몇 분이 사가고 그러시죠.”  닭부산물·해산물부 입구
  • 41. 41 ‘제일수산’의 주요 취급 품목은 홍합, 꼬막, 멍게 등과 같은 안주감 해수산물이다. 입구 반대편에서 바라본 닭부산물·해산물부 골목
  • 42. 42 프랜차이즈들이 많아지고, 주 5일제 되고부터 힘들어졌죠. “경기가 안 좋아져서 물건이 덜 나가는 것도 있지만, 그보단 옛날에 비해서 경쟁이 심해지 다 보니까 마진이 별로 없어져요. 프랜차이즈 쪽들이 많아지면서 힘들어졌죠. 프랜차이즈 에서 이런 물품(식재료)을 영업집에다 대줘요. 이런 일반 음식점들이 없어지는 대신에 프 랜차이즈로 하는 음식점들이 많아지는 거예요. 프랜차이즈 본사들이 유통까지 다 하니까 저희를 찾아오는 분들이 줄어든 거죠. 그리고 주 5일제 되고 나서부터 자영업이 많이 힘 들어 진 것 같아요. 주 5일제가 시행되고 나서부터 사무실 근처 있는 영업집은 장사가 안 돼요. 한 달에 4, 5일 장사를 못한다는 게 큰 거죠. 그때부터 자영업 하는 사람들이 힘들 어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희도 그걸 느끼고요. 왜냐면 토요일 장사를 하면 아무래도 금 요일 날 많이 가져가거든요. 못 팔아도 혹시나 하는 거죠. 근데 그 다음날 장사를 안 하니 까 오늘 다 파는 욕심보다 조금씩 떼 가는 거죠.  일요일은 쉬어요. 애들하고 보내는 시간이 중요해서요. “보통 새벽 5시에 나와서 가락동 시장을 가요. 거기서 시장 보고 여기 들어오면 7시 정도 돼요. 그러고 나서 애들 학교 보내고 그러면 8시 되죠. 집은 바로 근처니까. 그때부터 일 시작하는 거죠. 그때부터 물건 펴서 시작을 하는 거예요. 딱 정해져 있는 시간이 없어요. 저희가 있는 시간이 오픈 시간인거죠. 손님오시면 그때 되고 주문 오면 바로바로 적고. 배 달 가고. 배달은 시간 때가 딱 정해져 있어요. 보통 오후 1시에 배달가고, 갔다고 오면 2 시 반이나 3시 되고. 그 다음에 4시나 돼서 영업집 갔다 오면 5,6시 되고. 제가 직접 가는 게. 택배를 보내는 거는 매일 들어오는 게 아니라서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그 사람들 가는 시간에 맞춰주는 거예요. 그러다가 보통 저녁 7시쯤에 되면 문을 닫 죠. 익숙해져서 별로 안 힘들어요. 그리고 저희는 일요일은 쉬니까. 일요일은 주문 들어오 는 데가 몇 집 안돼요. 가게는 주문 들어올 때만 나와서 물건 맞춰주고 배달 해주죠. 애들 이 어리니까 애들하고 보내는 시간이 중요해서요. 열세 살, 열한 살 이거든요.” 시장 친목단체를 통해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애경사를 서로 챙겨요. “시장 상인들끼리 모인 친목단체가 있어요. 상인연합회라고 하는데, 이 쪽 골목에 있는 약 마흔 개의 가게가 가입되어 있어요.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놀러가기도 해요. 애경사 서로 챙겨주고 그런 식이죠. 여기는 이쪽 골목 사람들 끼리 모인 거고, 다음 골목에는 다른 친 목단체들이 있죠. 친목단체가 시장에 여러 개 있어요. 저는 이쪽만 해당이 되니까 저는 여 기에만 가입이 되어있죠. 
  • 43. 43 장사를 그만 뒀던 사람들이 잊지 않고 다시 찾아줄 때가 가장 기쁘죠. “장사를 그만 뒀던 사람들이 나중에 다시 잊지 않고 찾아줄 때가 가장 기쁘죠. 장사를 그 만뒀다가 나중에 (다시 장사를 시작할 때) 저희를 기억하고 다시 찾아올 때가 그나마 가 장 기쁠 때에요. 그게 가장 기분이 좋아요.  그리고 장사 그만두셨지만 가끔가다 이 근처 들르셨다가 찾아와주시는 분들도 있고. ” 주차장이 생기면 손님들이 오시기에 편할 거라고 생각해요. “주차장이 있으면 오시기에 편하지 않을까 싶어요. 왜냐하면 저희들도 손님들이 물건들을 사러 오시면 주차할 곳이 없으니까 애로사항을 하소연하거든요. 손님들은 사실상 주차비 도 아까우니까 오시기 전에 주문을 해주세요. 배달만 하는 게 아니라. 사러 오시는 분들도 다 영업집이에요. 그니까 그 사람들도 바쁘니까 못 들어오니까 물건 주문하면 저희가 오 시는 시간에 맞춰서 큰길에 나가서 물건 주고 돈 받고 하는 식이 사실상 상당히 많거든 요. 그런 분들은 보통 이 근처에서 영업을 하시는 분들이지만, 멀리서 오시는 분들도 있어 요. 서울 어디서든지 온다고 보면 돼요. 강남 뭐 이쪽도 많고.”  현재 목표는 아무래도 현상유지 하는 거죠. “목표는 아무래도 현상유지 하는 거죠. 아무래도 더 잘되지는 않을 것 같고.. 현실이 그렇 게 된 거죠. 그리고 해물 같은 건 또 비싸지니까. 이게 수산자원이 고갈되는 것 같아요. 한 해 한 해 틀려요. 들어오는 게 그리고 수입으로 대체가 많이 되니까. 수입 아니면 서민 들을 사실상 서민들은 힘들어요. 국산으로는 힘들어요. 수산물은.”
  • 44. 44 보리밥부 “동네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동네 사람꺼 팔아줘야 해요” 장수보리밥 윤재림 인터뷰 일자 : 2015년 4월 10일 이름 : 윤재림(59) 영업기간 : 20년 취급물품 : 보리밥 등 식사류
  • 45. 45 다양한 식재료를 도·소매로 판매하고 있는 중앙시장 대부분의 상인들과는 달리 보리밥부 의 상인들은 거래 단계에서 다른 위치에 놓여 있다. 일반적인 중앙시장 상인들이 음식점 에 식자재를 판매한다면 보리밥 가게의 상인들은 반대로 식자재를 도매상으로부터 구입한 다. 장수보리밥의 윤재림(59)씨는 요리에 들어가는 모든 식재료들을 중앙시장의 다른 상인 들로부터 구입한다. ‘다른 시장에 가면 더 싸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같은 시 장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라’는 윤재림씨는 보리밥 장사를 하는 20년 동안 중앙시장 내 의 몇몇 상인들과 꾸준하게 단골 거래를 하고 있다. 보리밥이라는 음식소매업을 하고 있 지만 식재료 도매 거래에 있어서 ‘고객’의 입장에 서기도 하는 윤재림씨 역시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라고 말한다. 신뢰를 기반으로 한 가게에서 오랫동안 좋은 재료를 쓰려고 노력을 해야 좋은 입소문이 나고, 손님들도 그것을 알고 찾아온다는 것이다. IMF 시절 만들어진 중앙시장 보리밥부 “장사한지 올해 만 20년 됐어요. 그전에는 옷 장사를 했었는데, 이 자리에서 장사를 하다 가 시작한지 1년 만에 IMF가 터졌어. 그래가지고 그때부터 경기가 안 좋아서 모든 경기가 완전 다운이 되니까. ‘이래선 안 되겠다, 음식장사를 한번 해보자’하고 한 게 보리밥장사를 하게 됐어요. 보리밥이라는 거 자체가 어떻게 보면 쉽게 생각해서 웰빙음식이잖아요, 웰 빙. 그래서 이 음식이면 괜찮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때는 마침 또 김밥천국이니 뭐 니 싼 음식들이 많이 유행할 때에요. 그래서 보리밥 골목이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우리가 보리밥 장사하기 전에 한 두 집인가 노점에서 하시던 분이 있었어요. 우리가 들어오면서 더 활성화됐지. 내가 하면서 보리밥 집들이 계속 늘어났어요. 제일 많을 때는 열세 집 정 도까지 있었죠. 보리밥부라고 형성된 것은 한 2002년도 월드컵 할 때쯤 그때 보리밥부로 알려진 것 같아요. 그러다가 돌아가신 분도 중간에 계시고 이참 저참 해서 그만두거나 이 사한 집도 있어서 지금은 여덟 집 정도 있어요. 사업이라는 게 다 잘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나마 여기 남아있는 사람들이 실력자들이지. 나름 다 노하우가 있고 실력이 있는 사람 들이 남은 거예요.”  강 건너 사람들도 여기 와서 장을 많이 봤어요. “총각 때부터 중앙시장에서 일 한지가 한 30년 됐는데, 80년대는 지금과 비교하면 엄청나 게 잘됐죠. 그때는 뭐 대단했죠. 천호동 이쪽에서도 저쪽에 화양리 쪽이나 동북권 쪽에서 도 여기 와서 장을 보곤 했어요. 잠실 쪽이나 강 건너 사람들도 여기 와서 장을 엄청 많 이 봤어요. 그 당시에는 옷가게도 엄청 많았어요. 여기가 원래 그 의류골목이었어요, 포목 골목. 저쪽에서부터 연결이 된 골목이었죠. 지금이야 관광객들 유치하려고 (동대문 시장이) 낮에도 열리지만, 그때는 새벽에 열었다가 새벽에 닫고 가고 그랬어요. 도매만 하던 시절
  • 46. 46 이니까. 근데 (중앙시장은) 소매를 위주로 한 거죠. 그때는 하여튼 장사 안 되는데 없었어 요. 사람 밀려다니고 그랬어요. 메이커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옷 장사가 잘 안되기 시작 했죠. 그러다가 IMF때 경기가 나빠지고 그러면서 이 골목이 다 음식으로 바뀌었죠. 보리 밥도 그러면서 생긴 거죠.” 옛 생각에 오랜만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뵈면 반갑죠. “찾아오는 손님들은 우선 주위에 직장인들이나 상인들이 많이 오시죠. 외부에서도 많이 오 시고요. 보리밥골목이 한 20년 정도 되다보니까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오는 것 같아요. 여기에 왕십리 뉴타운이 생기기 전에는, 그리고 저기 금호동 넘어가는 산동네, 그쪽이 재 개발되기 전에는 진짜 장사가 잘됐어요. 거기 달동네는 한집에 세 가구, 네 가구 살았거든 요. 거기가 재개발되면서 동네를 떠난 사람들이 다시 찾아줄 때가 있어요. 옛날 생각나서 오시는 거죠. 연어처럼 향수를 느끼러 다시 오는 거죠. 그런 분들이 오시면 반갑죠. ‘어디 로 가서 사세요?’ 물어보면 오이도 가서 산다, 저기 부천 가서 산다, 그러면서 오시고. 벌 써 20년 되다보니까 그때 우리 참 젊었던 사람들이 이제 지팡이 짚고 오신 분도 있고 그 래요. 그러면서 옛날이야기 하는 거지. 옛날 중앙시장이 어쨌고 저쨌고 하면서.” 중앙통을 통해 들어가는 보리밥부 입구. 입구 간판에 의류전문이라고 적혀있지만, 골목 안 점포들은 대부분 음식장사를 하고 있다.
  • 47. 47 2002년 월드컵 때 시장 상인들 모여서 시장 한 바퀴 돌고 그랬어요. “여기서 장사하면서 제일 좋았던 기억은 2002년 월드컵 때에요. 그때 도로를 다 막아 놓 고 모여서 축구 응원을 했잖아요. 동네에서 떡 장사하는 사람은 떡 들고 나오고, 저는 수 박 들고 나오고 그랬죠. 8강전 때였나? 횡단보도에서 차 못 다니게 막고 절하고 그랬거든 요. 빨간 옷 입고 빈 깡통도 두드리고 시장 상인들 모여서 시장 한 바퀴 돌고 그랬었던 기억이 나네요. 되게 재밌었어요.” 저도 오랜 기간 동안 믿고 쓰는 단골이 정해져있죠. “저도 단골이 정해져있죠. 야채도 십칠 년 한 집 거래했고. ‘푸른야채’. 쌀은 ‘금성상회’. 그 집도 거래한지도 한 이십 년 가까이 되요. 쌀이랑 보리쌀. 고기는 저 위에 가면 ‘충북정육 점’이라고 있어요. 거기는 처음부터 시작해서 이십 년 동안 여지껏 변하지 않고 한 집 거 래하고 있어요. 시작할 때부터  딱 정해놓고 했다고 보면 돼요. 다른 데 오고가고 없어요. 비싸면 ‘오늘 비싸다 야 그거 어떻게 잘못 됐나’ 이야기를 해서 고쳐가지고 수정하는 게 낫지. 그걸 내가 기분 나쁘다고 다른 데 돌아서면 마찬가지로 똑같은 마음이 생기니까 안 돼요. 불가분의 관계가 돼서 안돼요.”  십 년은 넘어야 노하우가 생겨요. “처음 시작할 때 뭐든지 애로사항이 있잖아요. 처음에 진짜 모르는 상황에서 음식장사 한 다고 잘하는 집 쫒아다지면서 먹어보기도 하고 했었는데, 그게 바로 실천이 되진 않잖아 요. 한 사,오 년 하니까 좀 편해졌어요. 내가 봤을 땐 식당도 한 십 년 넘어야 돼. 사 년 정도 버티면 그때부터는 좀 할 만하고요. 십 년이 넘어야 이제 노하우가 생겨서 그때부터 조금씩 돈이 이렇게 붙지. 내가 삼, 사 년 안에 대박친다는 사람들은 이해가 안돼요. 이게 요식시장이 어떻게 형성되어있냐면 창업은 많이 해요. 근데 맨 처음 일,이 년은 거의 같이 가요. 이 년 정도 되면 오십 프로 무너져. 한 사 년 되면 그나마 한 이십 프로 무너져. 결 과적으로 남는 건 이십 프로에서 이십오 프로 밖에 안 돼요. 그리고 이십 년 넘게 하는 사람들은 한 십 프로 될까? 백 집이면 열 집. 그 집들이 진짜 맛집으로 남아있는거야. 그 리고 자기가 음식을 개발하려고 해야지, 뭐 창업한다고 체인? 프랜차이즈? 내가 봤을 땐 절대 아니야. 하루에 십만 원 판다고 하더라도 내가 연구하고 느끼고 자꾸 해가지고 키워 가아죠. 십 년이 넘으면 자동적으로 바닥에 깔라는 게 있으니까 괜찮지. 그렇게 되면서 그 다음에 손님 다루는 방법도 알게 되고. 어떤 손님은 편하게 할 수도 있고, 어떤 손님은 존 칭을 써야 되고. 이런 노하우가 생기는 거야. 그게 경력이 좀 쌓여야 돼.” 
  • 48. 48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노하우는 바로 신뢰예요. “동네에서 장사를 하기 때문에 재료도 동네 사람들 꺼 팔아줘야 해요. 어디가 싸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사고 그러질 않아요. 동네 껄 팔아주고 연계관계가 돼야지, 서로 윈윈 해야지. 밖에가 좀 싸다고 해서 사가지고 와서 여기 와서 부를 일으키면 그것도 모순이 된 거에 요. 내가 사고방식이 틀렸는지도 몰라도 난 그래. 이왕이면 동네에서 싸든 비싸든 동네 꺼 팔아주고 그 친구들도 우리 집에 와서 밥 먹고 그러는 거죠. 예를 들면 우리 단골집이 우 리 집을 소개시켜주고 그럴 수 있는 거예요. 보통 내가 단골한 집들은 십오 년 다 넘어요. 그 사람들도 내가 오늘 뭐 샀으면 다음 날 뭐가 필요하다는 걸 대충 알고 있으니까. 그 정도면 끝난 거죠. 굳이 실물을 안 봐도 좋은 걸 보내주고. 신뢰가 그만큼 쌓이게 되는 거 예요. 무조건 물건도 좋은 걸 사려고 노력을 해야지, 싼 걸 사려고 노력하다 보면 내 자신 도 낮춰지는 거예요. 그래야 물건을 파는 사람도 ‘저 집은 좋은 거 쓰는구나. 그래 맞어, 이 사람 믿을만해.’ 이러면서 좋은 거를 주려고 애쓰고 그러죠. 그럼 사람들이 다른 손님 한테 ‘저 집이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거 쓰는 집인데, 이왕이면 거기 가.’ 이렇게 말하겠 지. 이거는 인생을 사는 노하우야. 내가 이 자리에서 장사를 해서가 아니라 다른 데서 똑 같은 일을 해도 똑같은 마인드를 가져야 돼. 나는 내가 뭐 예순 가까이 산 경험을 이야기 하는 거야. 장사를 하는 노력이라기보다는 경험이라고 보면 돼요.” ‘장수보리밥’은 밥을 짓는데 필요한 쌀과 보리를 약 이십 년간 ‘금성상회’에서 구입하고 있다
  • 49. 49 청과부 “남아있는 이 사람들이 이제는 가족이죠.” 인도상회 강승복 / 충북상회 신대화 / 단골손님 인터뷰 일자 : 2015년 4월 22일 이름 : 강승복(57, 인도상회), 신대화(73, 충북상회), 단골손님 영업기간 : 충북상회(45년), 인도상회(50년) 취급물품 : 과일
  • 50. 50 쌀과 야채가 싸기로 유명했지만, 중앙시장은 쌀, 야채 뿐 아니라 다양한 품목의 상품들이 갖춰져 있는 종합시장이기도 하였다. 그 중 청과부는 쌀과 야채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상 당한 규모의 도매시장이었다고 한다. 전성기라 할 수 있는 80년대 청과도매시장의 규모는 ‘지금의 청과부 골목에서부터 황학동 동사무소까지 이어지는 구간 대부분이 과일가게였을 만큼 컸었다’고 청과부 상인들은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청과도매시장이라는 구역 간판 이 름이 무색할 만큼 겨우 다섯 집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한산한 청과부 골목을 지나가다 보면, 한 가게에 다섯 집의 과일 가게 사장님들 이 모여 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여기에 앉아있으면 다른 가게들이 다 보이기 때 문’이라고 말하는 다섯 과일 가게 사장님들은 그 자리에서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신다. 오랜 세월 동안 같은 공간에서 장사하며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어려움을 함께 견디고 있 는 이들은 ‘모두가 떠나고 남아있는 이 다섯 집 사람들이 이제는 가족 같다.’고 말한다. 황학동 동사무소 옆까지 쭉 과일가게들이 있었어요. 신대화 : 옛날 잘 됐을 때는 (이 골목에) 과일 트럭들이 많이 들어왔었어. 리어카 꾼도 많 이 왔지. 지금은 다 없어졌어.   강승복 : 30년 전이지. 내가 시집온 게 30년 전이니까 한 80년대 일 거예요. 집집마다 과 일을 트럭채로 떼느라 바빴지.  90년대까지만 해도 장사가 괜찮았지. 한 15년 전만 해도 과일을 한 가득 실은 트럭이 들어왔어. 2000년도 들어서부터 하나하나 없어지기 시작하면 서 줄어 든거지. 나는 아버님, 어머님이 하신 거를 대를 이어서 하고 있지만, 다른 집들은 자손들이 안 이어받으니까. 우리는(인도상회) 한 50년 됐지. 아버님, 어머님이 이 뒤에서 건어물 장사한 것까지 치면 60년 넘었고. 단골손님 : 여기 장사하는 사람 다 싹 떠났어. 여기서 저 끄트머리까지. 저 위에 ‘로얄사우 나’ 까지 다 과일가게였어. 근데 지금은 다 없어졌어.   강승복 : ‘로얄사우나’ 라고 하면 모르지, 이 양반들이. 지금은 없어졌는데. (황학동) 동사무 소 옆으로 쭉 과일가게들이 있었어요. 다 도매 가게였어요. 지금은 소매만 하다시피 하지 만. 단골손님 : 요새는 소매뿐이 안 돼.  신대화 : 소매도 잘 안 돼.   단골손님 : 도매는 어디로 가냐면 청량리나 가락동으로 가. 영등포나.  신대화 : 도매상 하다가 차츰차츰 없어져서 다 이렇게 된 거야. 다 도매했었지. 지금은 안 팔리니까. 아예 없어. 한, 두 사람이라도 있으면 팔지. 그냥 다 소매야. 
  • 51. 51 새벽에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잘 정도로 과일트럭이 많이 들어왔어요. 단골손님 : 옛날엔 다 도매상이었어.  신대화 : 도매도 많이 하고 세금도 많이 내고 그랬는데, 지금은 장사가 안되니까 세금도 별로 못내. 강승복 : 다 도매상이어서 12시에 끝나는 집도 있었지. 거의 다 도매였지.  단골손님 : 아침에 동네에서 와가지고 여기서 다 떼가.  강승복 : 그리고 트럭 가지고 와서 여기서 사서 돌아다니면서 팔고 그랬지. 자두도 시골에 서 농사 진 거 따다가 또 경매해가지고 들어오면 다 보내주고 그랬지. 집집마다 몇 채씩 들어왔어.  신대화 : 생산자들이 보내고, 장사꾼들이 보내고.  강승복 : 옛날에는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요. 새벽에 골목에 차들이 많아서.   신대화 : 새벽에 두, 세시에 물건이 막 들어오니까. 우리들은 새벽 두, 세시면 문 열어. 근 데 지금은 그런 곳이 없어. 단골손님 : 옛날엔 그런 사람들이 직접 들어왔어. 청량리같이, 가락동 시장같이.  강승복 : 우리도 김천에서 직접 오고. 제주도에서 귤이 수박이랑 다 들어왔었어. 그러고 나 면 (소매상들이) 아침 네 시, 다섯 시에 나와서 새벽에 나와서 싣고 나가는 거지. 지네 동 네서 팔라고.  한산한 청과부 골목. 현재 다섯 가게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 52. 52 주변에 아파트가 많이 건설되고 나서부터 시장에 사람이 줄었죠. 신대화 : 지금은 마트가 생겨가지고 다 없어졌지, 나이 먹어서 그만두고.  강승복 : 여기 이마트 청계천점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장사가) 너무 안 되는 거야.  신대화 : 우리도 장사가 안돼서 손을 놓은 정도지. 강승복 : 마트에서 일주일치 장을 다 보잖아. 배달까지 해주지. 아무래도 직장 다니는 엄마 들은 집에 들어가는 길에 여기서(중앙시장)에서 사갖고 가기에는 무겁고 힘들지. 이런 것 들이 점점 태가 나는 거지. 단골손님 : 옛날엔 여기 사람이 겁나게 많았어. 긍께 장사도 잘됐지. 강승복 : 아파트가 생기기 전에는 저기 청구동, 신설동에서도 다 왔지, 저쪽 약수동에서도 왔지. 여기 왕십리 뉴타운 개발되기 전에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도 다 여기(중앙시장) 다 녔던 거야. 신대화 : 지금 아파트 밑에도 마트 생기고 그러니까 안 오지.  강승복 : 나 시집올 때만해도 저런 아파트가 없었어. 다 주택이 있었어. 약수동도 주택이여 가지고 다 이리로 장을 보러 왔어. 명절 때 되면 어마어마했어. 이렇게 다니지도 못해. 틈 새로 다녀야 했어. 사람 많아가지고. 신대화 : 사람이 많았어. 지금은 벌판이여. 벌판. 아파트 생기면서 마트 생기니까 이제 이 런 시장이 죽어가는 거야 재래시장이. 아파트 들어서면 무조건 마트가 들어서잖아.  강승복 : 어디고 다 마찬가지야. 재개발하면은 거기 주택 집에 살던 사람들이 없어지니까. 아파트 지으니까. 거기 아파트 밑에 상가가 생기잖아. 그러니까 재래시장이 자꾸 죽고. 신대화 : 비싸도 마트에서 사 먹지. 여기로는 안와.  단골손님 : 그래서 시방은 골목이 다 죽었지. 
  • 53. 53 서울중앙시장 청과부 입구. ‘청과도매시장’이라고 적혀있지만, 현재는 소매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하고 있는 상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가족 같고 그래요. 신대화 : 지금 봐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30분 됐나? 근데 사람 한 명 없잖아. (웃 음)  단골손님 : 나 왔잖아. 왜 사람이 없어. (어머님은 자주 오세요?) 단골손님 : 난 여기서 살어. 날마다 하루에 한 번씩 오는데, 옛날에 친목계 했던 사람들 중 에 둘만 남았어.  (어떤 친목계였어요?)  단골손님 : 친목계 그냥. 나이 먹은 사람들끼리 한 거지. 과일 상회 친목계라고 하면 알아 줬어. 그래가지고 이제 둘만 남았어. 다 떴어, 그 많은 사람들이. 한 20명도 더 됐어. 근데 이제 둘 뿐이야. 이 집하고 저 집. 그래도 엔간히 했지. 다 떠나버렸어. 강승복 : 그러니까 세 안 내는 사람은 이렇게라도 버티고. 세내는 사람들은 이제 다 없어 지고 힘들어. 나도 물려받은 거라 세를 안내니까.  단골손님 : 내가 봐도 지금은 이 집들 큰돈은 못 벌어. 옛날에는 박스떼기로 50개, 30개 막 실어나갔지. 조금 남겨도 많이 나갔잖아. 근데 여기는 소매한다고 썩으면 내버려야 하
  • 54. 54 지. 저 가봐 할머니 뱃가죽 같은 거 많지. 쭈글쭈글 겁나. (웃음)   (아니 어떻게 슬픈 말을 그렇게 즐겁게 하세요?) 단골손님 : 재밌잖아, 재밌어. 옛날 거시기라.  강승복 : 사람들이 없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식구 같고 그렇지. 누가 이렇게 밥 해먹고 그래. 옛날에는 다 각자 하고 그랬지.  단골손님 : 경쟁 안 해. 이 사람들은.  강승복 : 수십 년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니까 각자 나름대로 단골이 있었지. 근데 지금은 장사가 안 되고 그러니까 단골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딱히 없어. 보다가 어느 집이 싱 싱하다고 생각되면 마음에 드는 집에 가서 사는 겨.  (그럼 평소에 자기 집 찾던 손님이 다른 집 가면 질투 나지 않으세요?)  신대화 : 그런 거 없어. 여기는 다 한 집 같아.  강승복 : 그렇지. 다 없어지고 하니까. 남아 있는 사람들이 가족 같고 그래. 손님 뺏고 그 런 건 없어. 신대화 : 아니 뭐. 다 벌어 먹고살라고 하는 건데 어떻게 다른 가게를 질투해. 그러면 안 좋아, 서로.  (늘 이렇게 충북상회에 모여계신 이유는 뭔가요?)   강승복 : 여기 앉으면 우리 가게 보이지, 저 가게도 보이지. 다른 데는 다른 가게를 볼 수 가 없잖아. 우리 가게(인도상회)에 있으면 저 쪽 집이 안 보여. 그러니까 여기에 다 모이게 되는 거지. 여기 앉아 있다가 우리 집에 손님이 오면 얼른 뛰어갔다 팔고, 또 여기로 오 지. 다 그런 거야  신대화 : 이곳이 다 같이 모이기가 좋아.    단골손님 : 여기는 라이벌 이면서도 식구기도 하고 그래. 시골분위기다, 그렇게 생각하면 돼. 친척들보다 나아.
  • 55. 55 중앙통 “중앙시장 물건은 싸고 좋아. 근데 불편하니까.” 미성상회 전화자 인터뷰 일자 : 2015년 4월 7일 이름 : 전화자(58) 영업기간 : 27년 취급물품 : 식자재(참기름, 고춧가루, 소금, 양념 액젓 등 농수산물)
  • 56. 56 중앙통에 위치한 미성상회는 참기름, 액젓, 고춧가루, 각종 양념 등의 김장을 하거나 요 리를 할 때 필요한 농수산물 식자재를 주로 판매한다. 농수산물은 한 때 김장시장으로도 유명했던 옛 중앙시장의 주요 상품으로, 한때는 미성상회와 같이 농수산물 식자재 점포들 이 중앙시장 곳곳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27년 동안 중앙시장에서 농수산물을 판매하고 있는 미성상회의 전화자(58)씨는 ‘예전에는 김장 재료 등을 사기 위해 중앙시장을 찾아오는 소매 손님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소매 비 중이 줄고 도매 비중이 늘었다‘고 말한다. 중앙시장의 다른 구역에 비해 소매 비중이 높은 중앙통 임에도 불구하고 도매 비중이 높은 이유에 대해 전화자씨는 ’상대적으로 시장 입 구와 먼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입구 쪽에 위치한 점포들에 비해 소매 손님들이 많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시장 후문 쪽에 버스 정류장 등 교통 편의시설들이 생기길 희망했다. 나는 사장이고 우리 신랑은 회장이고. “신랑이 시골에서 공무원을 했거든. 근데 비전이 없는 것 같애. 나는 서울서 학교를 다녀 가지고 거기서 결혼하고 일 년 살면서 서울로 가자고 그랬지. 그때 사촌언니가 저기서 해 물장사를 했었는데, 그 안에 있는 고춧가루가게가 비어있었어. 그래서 냉큼 들어왔지. 고 등학교 때 왔다 갔다 하면서 보고 얻어먹고 그러다가 결혼을 해서 시골로 갔는데, 서울로 생활하던 사람이다 보니까 시골 체질이 아닌 거야. 그래서 서울로 갑시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서울로 갈 것이고 딸을 낳으면 신랑이 원하는 대로 평택에서 장사한다고 그랬는 데, 아들을 둘 낳았지. 그래서 서울로 온 거지. 그래서 장사를 한지 이십칠 년이 됐어.”  “신랑이랑 나, 둘이 같이 장사를 하는 거지. 나는 사장이고 우리 신랑은 회장이고. 혼자는 못해, 힘들어. 배달도 해야 하고. 나는 오전 일곱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신랑은 오전 여섯시 반에 열고. 신랑이 물건 챙기고 주문 오는 거 챙기고. 또 팔고. 지금은 배달 갔다 가 와서 지금은 운동 갔어. 교대로 하지. 이따 돌아오면 여섯 시 쯤 내가 충무아트홀로 운 동하러 가야지. 교대로. 소매를 많이 안하니까 일찍 닫아. 저기 시장 입구 쪽에는 늦게까 지 장사하는데, 여기 뒤쪽에는 손님이 일찍 끊겨.” 이십칠 년 장사의 노하우 “우리는 도매를 많이 하지. 소매로 팔기에는 지금 시중에 사람들이 많이 없잖아요. 유동인 구가 많이 없으니까. 소매도 하긴 해. 도매는 대부분 중간상인이나 음식점에 팔지. 냉면집, 중국집, 한식집, 뷔페집 다 되지. 양념이니까. 대부분 중구나 종로구 근처에서 장사하는 사 람들이 오지. 십 년 넘게 거래 한 분들도 많지. 냉면집 같은 데도 그렇고. 엄마가 냉면 하
  • 57. 57 다가 딸한테까지 물려줬는데, 계속 우리랑 거래를 하고 있지. 창신동에 낙*냉면이라고 많 이들 알잖아, 창신초등학교 있는데. 거기는 거래한지 십 년 넘었어.”  “참기름 같은 것은 고춧가루랑 원하면 지방도 다 보내지. 내가 이십칠 년 했다고 그랬잖 아. 서울에서 장사하다가 지방으로 내려간 사람도 있고. 또 이때 와서 사간 사람도 있고. 거래처에서 소개시켜준 사람도 있고. 여기서 장사를 오래 하다보니까 알고 찾아온 손님들 이 많지.”  아무래도 소비가 옛날하고 다르잖아, 지금은 마트가 많이 생겼으니까. “옛날엔 배추도 많이 팔고 김장시장이 컸는데, 그게 없어졌어. 길가에 있었는데. 고춧가루 는 저기 안쪽에 있었고. 길가 마장로에 분포되어 있었지. 지금은 다 없어졌어. 아무래도 소비가 옛날하고 다르잖아. 지금은 마트가 많이 생겼으니까. 지금 시장에는 야채가게가 별 로 없잖아. 옛날에는 야채가게가 많았지. 배추도 시골에서 다 절여서 오지.”  “시기적으로 장사가 다 안 되니까, 아무래도 손님은 줄었지. 삽십 년 전에는 소매가 많았 었지. 그때는 마트가 그렇게 형성이 안 되어 있었으니까. 근데 지금은 마트가 많으니까.  (요새 자영업들도 힘들다고 하는데, 많은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으면 도매도 타격을 입지 않나요?) 우리는 그럴 일이 없어. 노하우가 있어. 왜냐면 한 사람이 망하면 또 한 사람이 생겨. 손님이. 장사를 하다보면 우연치 않게 그렇게 오고. 또 안하던 사람도 다시 개업하 면 찾아오고.” 난 별로 힘든 건 모르겠어. 왜냐면 내 거니까. “전통시장은 일단 춥지, 덥지, 근데 물건은 싸고 좋아. 근데 그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편 하니까 거기로(대형마트) 가는 거지. 조금 사도 비싼데, 중앙시장은 싸. 물건은 싸. 근데 불 편하니까. 그런 데는(대형마트) 아무래도 상품 진열을 잘 해놓으니까. 그래서 나는 중앙시 장이 안 춥고, 안 덥고, 그리고 주차장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버스가 시장 후문 쪽에 도 다녔으면 좋겠어. 시장 입구 쪽에는 있지만, 여기로 다니는 버스가 없잖아. 입구는 입 구고 여기는 후문 쪽이잖아. 일단은 버스가 있으면 더 많이 오지 않을까 싶어.”  “글쎄 난 별로 힘든 건 모르겠어. 왜냐면 내 거니까. 세를 내도 내 거니까. 가게가 내 거니 까. 애들 잘 키우고 뭐. 그리고 우리는 여행을 많이 다니니까. 아저씨가 못하는 게 없어. 스쿠버니 스키니 뭐 별거 별 거 다 해가지고. 일요일은 쉬니까. 그니까 힘이 들어도 안 들 어.” 
  • 58. 58 신당지하상가 회센터 “옛날에는 이 통로가 다 생선가게들이었어요.” 광주수산 김정아 인터뷰 일자 : 2015년 4월 22일 이름 : 김정아(50) 영업기간 : 15년 (2대째, 어머니는 28년) 취급물품 : 회, 수산물 음식 판매
  • 59. 59 중앙시장 바로 밑 지하에 위치하고 있는 신당지하상가는 서울시 상업적 목적으로 기획된 최초의 지하상가이다.25) 1971년, 새로운 시장의 형태로서 민간자본이 투입되어 만들어진 신당지하상가는 지상의 중앙시장의 연계 상권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몰리기도 했었 다. 하지만 백화점과 대형할인점이 경쟁에서 밀리는 등 크고 작은 사건으로 인해 신당지 하상가를 찾는 손님들은 점차 줄어들었고, 지금은 몇 점포만의 장사를 이어가고 있는 상 황이다. 신당지하상가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회 센터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장사를 이어 가고 있는 해수산물 소매 음식점들이 모여 구성되어 있다. 회 센터라는 이름처럼 주로 회 를 판매하고 있는 이곳 상점들의 주요 고객은 인근 지역의 직장인과 해외 관광객들이다. 하지만 지하라는 상대적으로 외진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과 인지도 부족으로 예전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지는 않은 실정이다. 최근 신당지하상가의 빈 점포들을 리모델링하여 만들어진 예술창작공간 ‘신당창작아케이 드’의 도움으로 간판, 벽화 등 환경미화적인 부분에서 많은 개선이 되었지만, 이곳의 상인 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회 센터를 방문하기를 원하고 있다. 옛날에는 이 통로가 다 생선가게들이었어요. “저는 15년째고요. 지금 2대째 하고 있는 거예요. 어머니가 먼저 하시고. 어머니는 28년 하셨어요. 이 가게는 오래됐어요. 원래 이 자리는 아니고 좀 바뀌었어요. 원래 옛날에는 이 통로가 완전히 다 생선가게들이었어요. 저희 어머니도 여기서 생선가게를 하셨어요. 민 물고기 위주로 했죠. 붕어, 메기, 자라, 개구리.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음식을 팔게 된 거죠. 왜냐면 요즘에는 생선을 즐기는 음식문화가 회로 많이 바뀌었잖아요.” 서울시 최초로 상업적 목적으로 기획된 지하상가 “서울시에서 (상업적 목적으로 기획되어) 처음 땅 판 곳이 여기에요. 지하상가. 고속터미널 이나 명동보다 지하상가가 생긴 거는 여기가 더 먼저에요. 옛날에는 옷가게부터 시작해서 점포가 한 평씩 해가지고 다닥다닥 붙어있었어요. 바닥도 이런 바닥이 아니었고. 개조하면 서 가게 위치도 많이 바뀌고 그랬죠. 지하상가 저기 위쪽에 상파는 가게도 있고, 이불 가 게도 있죠? 그런 가게들이 옛날부터 있었던 가게에요. 조금씩 남아있는 거예요. 그러다 세 월이 지나면서 다 나가신 거죠. 여기도 횟집이 열 몇 개씩 있었는데, 지금은 열 집정도 돼 요.” 25) 서울의 지하상가는 1967년 서울시청 앞 을지로 1가에 있는 ‘새서울 지하상가’가 그 시초이나 이는 기존 방공호 용도로 건설된 공간을 상업용도로 변경한 것이다. 상업 목 적으로 기획되어 건설된 지하상가는 신당지하상가가 처음이다.
  • 60. 60 1년간 지하상가 공사한 후부터 사람들이 잘 안와요. “여기가 중앙시장이 서울시 안에서도 가장 큰 시장이었어요. 가락시장 생기기 전부터 있었 으니까. 그리고 나중에 가락시장 생기고, 노량진수산시장 생기고. 그러는 바람에 여기가 작아졌죠. 저쪽에 주방기구 파는 곳이 많잖아요. 그 전에는 그런 게 없었어요. 80년대에는 야채가게, 막 도매로 새벽에 와가지고 물건 내리고 그랬었는데. 지금 세월이 많이 바뀌어 가지고. 골고루 여러 분야가 섞여 버린 거죠. 어쨌든 중앙시장이 잘 됐을 때는 여기 지하 상가도 장사가 잘 됐었어요. 우리 어머니가 할 때도 엄청 바빴죠. 그러다가 여기 지금 공 사를 한 15년 전에 했어요. 1년간 공사를 하다보니까 손님들 맥이 끊어진 거죠. 이제 안하 는 줄 알고 사람들이 안 오는 거예요. 홍보도 안 되고 하니까.”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와요. “요즘은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와요. 요즘에 일본 사람들이 많이 나와요. 한 조에 두 팀 세 팀. 최근에도 어제도 일본 분들이 열 어섯 분 예약해서 드시고 가시고 갔어요. 여기 회 센타가 가족단위나 모임단위가 오셔서 식사하시기 좋아요. 왜냐하면 저렴하니까. 저렴하고 양도 많고.” 횟감을 제외한 모든 식품들은 다 중앙시장을 이용하죠. “횟감은 다른 곳에서 따로 들어오지만, 야채 같은 경우는 위에 중앙시장을 많이 이용하죠. 오이나 당근 다 위에서 사와요. 생선을 제외한 다른 식품은요. 공산품 같은 것도 지상에서 쓰고. 나머지는 이런 회 종류는 외부 큰 데에서 들어와요.” 여기 회 센터가 있는지 주변에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요. “이제는 여기 회 센터가 있는지 주변에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요. 홍보가 너무 안 되어있어 서. 상가는 오래됐지만, 이제는 상인이 별로 없으니까 아는 사람만 오는 거죠. 중앙시장 홍보를 해도 지상만 하지, 지하는 안하잖아요. 지상이랑 지하이랑 다르기 때문에. 시장번 영회가 지상에는 잘 되어있는데, 여기는 번영회도 없고 상인도 몇 명 안 남아 있으니까. 그런 면이 있어요. 회 센터 사람들이 모여서 이것저것 논의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단체도 없어요. 그래서 좀 아쉬워요. 그런 게 있으면 좋죠.” 신당창작아케이드가 있어서 고맙죠. “아무래도 신당창작아케이드 구경하러 오시는 분들이 회 센터를 보시고 이런데도 있구나, 하시면서 식사도 하고 가실 때도 있고. 그러다보니까 구전으로 홍보가 조금씩 되죠. 여기
  • 61. 61 간판에 그림 그려주고, 복도에 있는 그림도 다 신당창작아케이드에서 해주신 거죠. 신당창 작아케이드에서도 저희 홍보를 많이 해주시는 부분이 있어서 고맙죠.” 회 센터의 가게와 복도에 신당창작아케이드 작가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 62. 62 미곡부 “쌀가게에서 왜 동물사료를 파냐고?” 금성상회 허수정 인터뷰 일자 : 2015년 4월 7일 이름 : 허수정(75) 영업기간 : 59년 취급물품 : 양곡(쌀. 보리 등)
  • 63. 63 한때 서울에 들어오는 미곡의 70% 이상이 거래되었다고 하는 서울 최대 양곡 도매시장, 서울중앙시장 역사는 ‘쌀’로부터 시작되었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중앙시장은 곧 쌀 시장’을 의미할 만큼 쌀에 있어서 중앙시장은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시장이었다. 지방에서 수확된 미곡을 트럭에 가득 싣고 서울에 팔기 위해 올라온 하 주들, 싼값에 쌀을 구입한 후 동네에 되파는 지역 소매상들,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중앙시장 양곡 도매상 등 중앙시장은 그 명성만큼이나 쌀을 팔고 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정부의 미곡정책, 유통업의 발달 등으로 점차 그 중요도가 떨어지게 된 중앙시장 미곡부는 양곡 도매시장의 기능을 상실한 채 과거 영광의 흔적들만 남아 있는 상태다. 한때 100여 개에 달했던 미곡 도매상 중 현재 남아있는 가게는 10개 남짓. 그나 마 남아 있는 가게들도 오랜 단골 고객과 소매로 근근하게 장사를 이어가고 있는 수준이 다. 59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금성상회’의 허수정씨(75)는 과거 양곡 도매시장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는 몇 남지 않은 미곡상이다. 지금은 주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상대 로 장사하고 있다는 허수정씨는 젊은 사람들은 더 이상 이곳을 찾지 않는다며, ‘금성상회’ 의 수명 역시 이곳을 기억하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끝난다고 얘기한다. 장모님이 여든 둘에 돌아가시면서 이 가게를 주고 가셨다고 “1956년 7월 1일부터 했어. 59년 된 가게야. 내가 처음부터 한 건 아니고, 우리 장모한테 인수받은 거야. 내가 2대째야. 지금 아들이 옆에서 하고 있는 거니까 3대째하고 있는 거 지. 나는 22년 됐어. 장모님이 여든 둘에 돌아가시면서 이 가게를 주고 가셨다고. 그래도 옛날 중앙시장이 어땠는지, 대략 알지. 장가를 27살에 갔으니까. 지금 내가 일흔다섯이니 까. 그때는 시골에서 쌀이 올라오면 석발기26)로 도정을 해서 팔았어. 그때가 좋을 때야. 그때가 장사가 잘됐지. 그때는 시골에서 하주들이 물건 가지고 여기에 맡긴 다음 여관을 잡아놓고 자. 그 사람들이 여관에서 화투치면서 돈 줄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물건 갖고 오면 한 이삼일이면 다 팔았거든. 그 돈 줄 때까지 여관에서 자고 먹고 하는 거야. 근데 지금은 기계가 좋아져가지고 쌀이 그냥 일 톤이 한 번에 들어가면 한 시간에 한 백 이십 킬로(KG)짜리가 백 개가 나와. 포장까지 되가지고. 이물질이 탁탁 튀어나와. 노란 거 빨간 거 돌이 다 골라져. 그니까 지금은 여기 석발기가 필요가 없어. 그래서 석발기 다 팔았어.  지금은 옛날하고 틀려서 선금을 줘야지 쌀이 와. 그때는 황학동 시장 밖에도 노점 쌀가게 들이 있었어. 이 시장이 장모님 계실 때만 해도 쌀가게가 백 개가 넘었어. 근데 지금은 다 없어지고 사십 개밖에 안 남았어. 왜냐. 그때는 황학동이 쌀가게인 줄 알고 다른 구에서도 찾아왔어, 여기로. 양곡시장이 여기만 있었으니까. 지금은 가락동도 있고 그러잖아.” 26) 석발기 : 쌀 등 곡물에 섞여 있는 돌을 골라내는 기계
  • 64. 64 옛날에는 외상을 많이 깔아가지고 장사했는데 지금은 줄 수가 없어 “손님이 절반은 줄었어. 금액도 줄고. (도소매를 합해서) 옛날에는 하루에 천만 원을 팔았 어. 요새는 오백만 원 밖에 못 팔아. 쌀이 몇 가마인데. 우리가 세무서에 신고한 게 6개월 에 십오억 그러는데. 단가가 비싸니까 매출액이 많을 수밖에 없지. 쌀은 싼데, 잡곡은 비 싸 이거. 이거 참깨 한 포에 육십오만 원이야. 그러니까 이거 열 개 쌓아놓으면 육백오십 만 원이야. 이십 개 쌓아놓으면 천삼백만 원이야. “옛날에는 전자저울이 없었어. 1956년 창업할 때는 쌀이 팔십 킬로가 한 가마였는데, 시골 사람들은 옛날 구닥다리 저울 있잖아. 그 저울은 눈금이 둔해.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한 가마에 대충 구십 킬로를 넣어줬어. 그럼 쌀을 시골에서 싣고 오면 십 킬로가 남는단 말 이야. 이만 원어치가 더 오는 거야. 그러니까 마진이 남았지. 요새 쓰는 전자저울은 종잇 조각 하나만 올려놔도 정확히 단위가 올라간단 말이야. 지금은 이십 킬로짜리가 오면 이 십 킬로 될까 말까해. 넘치질 않아. 딱 걸리지 않을 만큼만 해. 또 옛날에는 외상을 많이 깔아가지고 장사했는데 지금은 줄 수가 없어. 하주들에게 외상으로 받아서 외상으로 주니 까 괜찮았는데. 지금은 미리 송금을 해줘야 돼. 목포에서 쌀 백 가마만 보내라. 그럼 목포 에다가 쌀값으로 천만 원을 보내야 돼. 그래야지 보내주지 그렇지 않으면 안 와. 그러니까 나도 팔 때 외상으로 못 주는 거지. 그래도 옛날부터 몇 십 년씩 거래했던 친구들은 할 수 없이 외상을 주지.”  나이 많은 손님들이 죽으면 이 가게 더는 못해 “지금은 다른 구에 있는 사람들이 여기 오질 않아. 누가 오냐. 나이 많은 손님들. 칠십대 이상 된 사람들은 여길 알아서 꾸준히 찾아와. 그 사람들이 죽으면 이 가게는 더는 못해. 지금 대형마트에서는 전부 다 쌀을 소포장으로 팔잖아. 젊은 친구들이 구루마 끌고서 소 포장 된 거 쌀 사면서 얼만지도 몰라. 얼마인지 개념도 없어. 우리는 주로 나이 많은 사람 들이 단골손님이야. 그 사람들은 오로지 이 집만 찾아 와. 그분들이 돌아가시면 못한다는 이야기지. 이 근처에서 음식 장사하는 식당들도 우리 단골손님이지. 여기 홍*옥. 콩나물요 리 전문점이야, 그리고 그 전원주가 선전하는 거 있잖아. 든든하고 먹고 힘내라고 하는 거. 할*순대국. 또 이*돔 감자탕. 예전부터 우리랑 거래를 했으니까. 한 7년이고 10년 했으 니까. 그 사람들은 우리를 믿고 사가는 거지. 쌀만 사가. 다른 건 안 사가. 식당이니까. 홍* 옥 거기는 중앙시장 그 입구에 있어. 할*순대국도 여기 골목에 있는 거고. 가까운 데는 배 달비가 안 나가잖아. 내가 갖다 주면 되잖아. 내가 나이는 많지만. 내 오토바이가 있잖아. 그니까 가까운 데는 우리가 갖다 준다고.” 
  • 65. 65 미곡부는 별도의 양곡도매시장 입구 외에 중앙통을 통해서도 들어갈 수 있다 현재의 미곡부 거리. 과거 미곡상이 있던 자리앤 다른 업종의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