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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영규 이사 추모 좌담회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나눔의 리더십
대구관광서포터즈, 나의 꿈을 향해 가는 시간
제1기 대구관광서포터즈 팀원이 되면서...
눈처럼/차력사 김팔봉씨
유상종/이강순/하종성
회비안내>>
회비를 미납하신 회원께서는 동봉한 지로용지나 은행계좌로 조속히 납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구은행 031-05-003912-4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김 영 호
입회안내>>
국채보상기념사업회원을 모십니다.
애국애족의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에 뜻을 함께 하고자 하시는 분은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 회원에게는
각종 학술행사 및 연구회에 참여하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며, 각종 동호회에도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회비는
연 1만원 이상입니다.
가입을 희망하시는 분은 전화 053)745 - 6753으로 문의하시거나
홈페이지(www.gukchae.com)를 방문해서 회원가입을 해주시면 확인 후 바로 답변을 드립니다.
발 행 인 신동학
편집고문 박용규, 서상호
편집위원 엄창옥(위원장), 권오현, 남정원, 우웅택, 이용수, 전환길,
최경집, 최윤진, 황성하
발 행 처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 670(동인동 2가 42번지)
전화.053-745-6753 팩스.053-746-6753
www.gukchae.com E-mail.master@gukchae.com
기획제작 밝은사람들 053-652-5700
<꿈인가 생시인가, 하늘이 준 것인가
때가 온 것인가, 구름 안개 걷히는 것인가…
대한 광무 11년(1907년) 새봄의 제일 좋은 소식은
하늘에서 온 복음을 소리쳐 전하는 것이로다.
이 소식이 무슨 소식인고,
이 소식이 무슨 소식인고
이러한 좋은 소식을 우리는
급히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이오…
이 소식은 다름이 아니라
대구광문사 부회장 서상돈씨 등이
단연동맹한 호소식이로다.>
1907. 2. 25 자 황성신문 논설에서 따옴
국채보상운동
故 박영규 이사 추모 좌담회
북후정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나눔과 책임
나눔의 리더십
청년에게 길을 묻다
대구관광서포터즈, 나의 꿈을 향해 가는 시간
제1기 대구관광서포터즈 팀원이 되면서...
천둥문학
눈처럼
차력사 김팔봉씨
회원광장
명성황후 시해범은 일본정부
눈물로 호소해보는 환경학
근대 대구 물산업 역사를 되돌아보며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소식
04
11
15
18
23
27
42
김태일
전성실
강지은
채윤정
김윤현
엄창석
유상종
이강순
하종성
2014. 가을 제32호
나눔과 책임의
표지사진
결실과 수확의 계절 가을을 맞아 드높아진
가을 하늘을 바라본다.
산천을 수놓은 고운 단풍 틈으로 뾰족하고
좁은 가시 옷 속에서 함께 자라나기 위해
서로의 자리를 양보해가며 자라난 알밤이
영글어 꽉 찼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故 박영규 이사 추모 좌담회
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
Ⅰ
김 영 호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
참석
진행 기록
신 동 학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상임대표
서 상 호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감사
임 수 현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김 종 찬
대구 MBC 이사
이 춘 호
영남일보 기자
엄 창 옥
편집위원장
권 오 현
편집위원
엄창옥 : 오늘은 고 박영규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님을 회고하면서, 그분의 국채보상운동 재조
명에 바친 열정과 그분만의 따뜻한 인간미 그리고 지역사회에 미친 발자취에 관한 여러 에피
소드들을 듣고, 본 기념사업회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해보고자 추모 좌담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신동학 : 참석해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국채보상운동 정신이 대구지역에 뿌리를 내리는데 크게
기여해주신 고 박영규 이사님의 추모 좌담회가 우리 사업회의 앞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길 기
대하면서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영호 :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발전하는데 가장 잊을 수 없는 분이 박영규 이사님이라 할 수 있습
니다. 그분은 초대 상임부회장으로서 실질적인 일을 다 하셨습니다. 늘 잊지 않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국채보상운동 연구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한 분이시고, 상공회의소에서 낸‘국채
보상운동기념사’를 조항래 선생과 함께 주로 집필하셨고, 80년대 국채보상운동 심포지엄을
여는 데에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또 기념사업회가 2002년도에 만들어질 때에도
고생을 도맡아 하셨습니다. 우리로는 잊을 수 없는 분이라 이 추모 좌담회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김종찬 : 오늘 이 좌담회가 박영규 선배님 일이라고 하기에 열일 제쳐놓고 왔습니다. 저는 오늘 그분의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좀 드리고자 합니다. 선배님은『대구일보』가 1972년 3월 31일자로
문을 닫게 되면서 대구 MBC로 오셨습니다. 처음에는 혼자이시니 외로우셨겠지만, 대구 중앙
공원쪽의 골목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구수하게 말씀을 하신 기억들이 남아
있습니다. 책을 많이 읽으신 것 같아요. 박 선배님의 첫인상이 박식하다는 점입니다. 그분의
큰 자산은 넓은 인적 네트워크이지요. 무엇보다 그분은 돈 욕심 없는 소탈한 인간미가 있으셨다
생각됩니다. 사모님이 고생 많이 하셨을 겁니다.
임수현 : 제가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대구에
서 근무하는데 농협지도부 출입기
자로 박영규씨를 만났어요. 박영
규씨가『대구일보』가 폐간되기 전
에 경제부 출입을 했으니까요. 만
나면서 느꼈던 것이 저 양반이 나
이는 우리하고 비슷하지만 내가
배울게 많은 사람이구나 그런 생
천둥소리 5
각을 했어요.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지역사, 특히 대구역사에 매우 박식한 사람이구나 느꼈
습니다. 제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 이사가 된 것도 박영규 선생의 권유였습니다.
서상호 : 69년도인가, 70년도인가에 직물업계 출입을 같이 했어요. 직물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도 해야
했고, 그러니 자연히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박 선배는 경제부 고참이고 경제부 기자로서
선두 위치에 있으니까, 또 그때 대구경제의 기본이 바로 섬유였으니까, 그때 아마 아이디어를
얻거나 소명의식을 가지고 대구의 과거를 파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직물 같으면 직물
이야기만 하는게 아니고 직물과 관계되는 금융, 사업이야기까지 이론만 아는 게 아니라 주변을
더 많이 아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인간관계를 맺는 것도 능숙하셔서 휴먼 네트워크가 아주
넓고 누구든지 친한 분이었습니다.
엄창옥 : 언론에 계시면서 자료 부재를 강하게 느끼고, 그러다보니 지역사회를 천착하게 되고. 하면서
지역의 문화와 역사 그 속에 숨어 있던 국채보상운동을 발견해내셨군요.
이춘호 : 제가 언론생활을 하면서 마치 유성처럼 만난 분이 박영규 사장입니다. 95년 서울에서 정치부
기자를 마치고『대구일보』를 다시 오면서 대구라는 곳의 정신의 맥, 대구에 대한 제대로 된 어
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떤 연구서적은 뭘까? 이런 막연한 생각들을 하면서 찾아봤지만 별다른 답은 얻지 못했죠. 지
역의 인물들을 계속 탐구하는 과정에 제일 처음 만난 분은 사실 죽순문학회 회장이었던 윤장근
선생님입니다. 그 향토사의 흐름을 공부하면서 그때 박영규 사장님과 인연이 됐는데 사장님이
어느 날 장기연재를 시작한 거예요. 대구가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가를…. 그 북장로회 등장부터
연재를 해나가는데, 그때 박작대기(박중양) 이야기, 대구의 유곽문제, 북성로, 향촌동, 대구역
주변의 요정이야기. 단순히 요정이 많았다 이 정도만 되면 제가 놀라지 않았는데 그때 달성관,
무슨 관하면서 열 몇 개를 언급하신 거예요. 그 기사를 다시『대구일보』에 와 가지고 각색을
해서 40회인가 연재를 했어요. 제가 청수원 자리에 대한 부분을 중심으로 대구에 당시 유명했
던 요정의 역사를 정리하고 싶다 하니까 언제 한 번 나하고 술 한 잔 하자시면서 요정이야기를
한 번 해야 되겠네 하셨는데, 그러고서 이야기가 끝났어요. 그리고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집에
세 번인가 초대를 받았어요. 돌아가시기 전 한 달쯤 됐을 거예요. 저한테 자료를 다 보여주겠
다고 하면서 가지고 계신 자료를 꺼내들고 요정과 관련되는 것, 일제 강점기 때 여러 연구
자료를 막 보여주셔서 굉장히 충격 받았습니다.“내가 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가 대구에 기독
교와 카톨릭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이 초기역사를 정리하는 건데, 지금 성직자들로부터 요청을
받고 자료 모으고 있다”고 하신 이야기가 제가 마지막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모님으로
부터 운명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구에 관련된 자료는 이 기자가 가지고 가는 게
좋겠다 해서 그때 사과박스로 한 두 세 박스 정도 됐고, 그 중에 4분의 3은 일반서적 그런 책
들이 있었고 나머지는『다이큐모노가타리(大邱物語)』원본이 있었어요. 그걸 계기로 제가 대
구연구에 폭발력을 얻었고 대구 음식의 역사, 향토음식, 전통음식 쪽으로 들어와서 지금은 대
구 음식 전문기자로 방송도 출연하고 특강도 다니고 합니다. 그 출발의 물꼬를 터준 분이 박영
규 사장님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웃음이 매력적이셨고 구두가 흐린 날이 없었습니
다. 오뉴월 따글따글한 염천처럼 구두가 광이 나고 멋쟁이셨어요. 맥주를 아주 아름답게 매력적
으로 마시셨던, 손이 아주 선비 손처럼 예뻤던….
서상호 : 구두가 반짝반짝 하려면 사모님이 신경을 많이 쓰셔야 합니다.
이춘호 : 많이 썼지요. 영국 신사 같은 멋쟁이였어요.
임수현 : 내가 아는 박영규 선생은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화술도 대단히 좋았고 그 사람보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을 아직까지는 나는 못 느껴봤어요. 그 양반이 나한테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던 것
중에서 하나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 있어요. 우리 향토 야사집을 하나 만들자고 여러
차례 이야기하곤 했어요.
천둥소리 7
이춘호 : 박영규 사장님은 대구자료를 모으려고 헌책방을 서울부터 해서 부산까지 그렇게 많이 다녔는데
돈만 생기면 책방에 가서 책을 샀다고 하셨어요. 고서점을 다니면서 대구에 관련된 자료를
찾으려 했던 상당한 노력들이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국채보상운동 기록사를 적을 수 있었을
겁니다. 일제시대의 풍물상이 어떻게 됐나를 최초로 정확하게 사실에 근거해서 적은 시리즈물
이 박 사장님의 작품이죠. 책으로 묶어내도 족히 3,000쪽 정도 나올 정도로 엄청난 내용입니다.
제일 큰 게『대구일보』하고 거의 아마 20년 전에 적었던 낡은 어떤 스크랩북이 남아 있습니다.
대구 백년을 이야기한 것이지요. 그 정도로 방대하게 정리한 건 최초일거에요. 그러니깐 그것을
하기 위해 평생을 아마 자료를 모은 거예요.
서상호 : 박 선배가 평소 이야기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옮겨놓은 것은 혹시 없나요?
이춘호 : 네 그런 게 없어요. 막 흩어져 있어서 그걸 다 집대성 못하고 있어요. 국채보상운동 자료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만.
김영호 : 박영규 선생이『대구시보』라는 잡지에 오래 연재한 적이 있어요. 그분이 말한 연재한 야사 중에
국채보상운동과도 관련 있는 아주 재미있는 야사가 있어요. 대구부사로 부임해서 아주 청렴하게
근무하셨는데, 서울로 갈 때 대구 유지들이 무슨 솥을 부인에게 드렸다고 해요. 본인한테 알리면
안 받을 테니까 부인에게 줘서 서울로 가져가게 했어요. 서울에서 그걸 이 부사가 알고는 당장
내려 보내라고. 그래서 그 솥을 다시 대구로 내려 보냈대요. 그런데 대구에서는 그걸 가지고
종을 만들었다는 거죠. 국채보상운동 당시에 대구에서 모금 집합소가 카톨릭 신자 집이었는데,
그 집에 그 종을 매달아 놓고 종을 쳤다는 겁니다. 청렴한 종소리를 들으면서… 국채보상금을
모았다는 것이죠. 그 종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몇 사람 있어요. 그런데 글은 안 보입니다.
최근에 국채보상 모금 장부와 함께 나온 종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그 종과 비슷하다고 보이지만
이걸 공개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해요. 글이 없으면 내가 근거 없는 주장이 되니, 그 글을 찾으
려고 우리가 애를 많이 썼어요.
엄창옥 : 이러한 자료를 정리하는 작업이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로는 중요한 일입니다.
김영호 :『대구시보』를 정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종찬 : 대구시보는 대구시에서 기록물로 철해져있을 것으로 합니다. 정리하는 기회를 가져보도록
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합시다. 박 상무님이 MBC 보도국 부장으로 계시다가 TV편성국 부국장으로 가서 다큐를 많이
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자료가 보관되어 있고, 대구상공회의소 회보에도 대구경제사로 연재하신
적이 있습니다.
김영호 : 대구에서 누구보다도 앞서나가던 향토사학 연구자로서 많은 야사와 글을 쓰고 했지만 특히
가장 공들인 부분은 국채보상운동 역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이 참 너털웃음을 잘 웃었어요.
그러면서도 항상 깊은 고민을 감추고 있었어요. 항상 너털웃음으로 웃고 빙글빙글 웃고 멋쟁
이처럼 해도 가볍지 않은 깊은 맛을 가지고 있는 인품의 소유자였다는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엄창옥 : 박영규 선생님께서 열정을 가지고 향토사 자료 속에서 건져낸 매우 중요한 지역사가 국채보상
운동이고, 그것이 결실을 맺어서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이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국채보상
운동을 처음으로 싹을 틔우고 여기까지 왔는데, 당시 고 박영규 전 이사님과 여러분들이 다
마음을 많이 모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김영호 : 고 박영규 이사님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전의 대구시에 속한 국채보상기념위원회를 같이
했고, 서상돈상(賞)을 대주교님께 이야기 해 가지고 운영도 같이 했고, 그 다음에 국채보상운
동기념사업회를 전국적인 사단법인으로 만드는 작업도 같이 했고, 그야말로 고생을 같이 했
죠.『대한매일신보』에 나오는“앞으로 국권이 회복되면 서상돈을 태양처럼 높이 우리 민족이
받들어야 한다”는 그 말을 만날 때마다 인용했어요. 그때 대구에서 관광일번지가 될 제일
높은 탑을 하나 만들자고 그런 이야기를 아마 4~50번 들었어요. 그러니깐 꿈이죠. 염원이죠.
만날 때마다 강조하던 말씀이 이 기념관을 짓는 과정의 어려움 속에 많이 남았어요. 그걸 항상
기억하면서 기념관을 지었습니다.
엄창옥 :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속에 그 정신이 어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신동학 : 오늘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장시간 귀한 시간 내주셔서 좋은 말씀 해주
셔서 이렇게 기록에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영규 선생님이 하늘 위에서 우리를 볼 때
역시 모두 다 잘하는구나 칭찬을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엄창옥 : 아쉽지만 이것으로 좌담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천둥소리 9
출생_1938년 2월 11일
출생지_대구
사망_2003년 7월 12일
학력_1957년~1964년 경북대 사대 사회과 졸업
경력
1964년~1969년 대구일보 정경부 기자
1971년~1972년 대구일보 정경부 차장
1972년~1975년 대구 MBC 취재부 부장
1987년~1990년 대구 MBC 보도국 국장
1990년~1991년 대구 MBC 기획심의실 실장
1991년~1997년 대구 MBC 상무이사
1997년~세원 대표이사
1998년 8월~2000년 대구일보 대표이사 사장
~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상근부회장
상훈
경북문화상(언론부문) / 1977
저서/논문
대구상공회의소 70년사(공) / 1977
대구상공회의소 80년사 / 1987
국채보상운동사 / 대구상의 / 1997
고향
달구벌
대구의 향기
박영규(朴英圭)
1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선거운동 전략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갈라치기’전략이고 다른 하나는‘끌
어안기’전략이다. 갈라치기 전략이란 상대방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큰 쟁점을 던지면서
전선을 뜨겁게 만든 다음 자신의 지지자들을 강력하게 동원하고 그 힘을 가지고 전선을 밀고 나가서
다수파를 만든다는 것이다. 끌어안기 전략이란 전선을 뜨겁게 만들지 않고 상대방도 받아들일 수 있
는 수용성 높은 쟁점을 던지면서 차근차근 지지자들을 설득하여 기반을 확장함으로써 다수파를 만
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지켜본 우리나라의 선거운동은 대개 갈라치기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자신의 지지
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상대 진영을 격렬하게 비판해야 하고 아와 피아의 구분을 명확히 해야 한
다. 그러다 보면 사실이 아닌 비방과 흑색선전도 나오게 되고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도 다반
사로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선거의 후유증도 컸다. 후보자들은 물론 지지자들 사이까지 감정
의 골이 깊어져 선거가 끝난 후에도 반목을 계속하는 일이 잦았다. 사회통합을 위해서 선거를 하는
데 선거를 하고 나면 오히려 사회통합이 더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선거운동이 이렇게 진영 사이의 격렬한 배타적 대결이 된 것은 이분법적 흑백대결을 기반으로 한
냉전구도와 남북분단이 낳은 나쁜 정치적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권위주의 시대에 오래
동안 계속된 민주-반민주 대결이 만들어낸 정치문화 때문이라고 하겠다.
북후정
Ⅱ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김 태 일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01
천둥소리 11
그 결과 최근 어느 대통령도 국민통합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의 당선에
승복하지 못하는 세력에 의해 사소한 이유로 탄핵을 당해서 나라가 두 쪽이 났고, 이명박 대통령
은 취임 초기부터 끝날 때까지 격렬한 반대세력의 비토에 시달렸다. 박근혜 대통령도 통합적 리더
십을 보이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통합적 정치문화와 통합적 리더십을
갈구한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절반의 국민으로부터도 지지와 성원을 받을 수 있는 리더십은 불
가능한 것인가? 근자의 현실을 보면서 정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려다.
걱정스러운 현실에서 나는 한 가지 희망을 보았다. 지난 6.4지방선거에서 보여준 권영
진과 김부겸의 리더십이다. 내가 매일신문에 두 사람의 리더십에 대해 쓴 칼럼을 여기
에 옮겨본다.
나는 두 사람의 선거운동 전략을 보면서, 1996년 미국 대통령 후보 클린턴 캠프의 전략가 딕 모
리스가 이번 대구시장 선거를 보았다면 무릎을 쳤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권영진 후보나 김부겸
후보는 약속이나 한 듯 딕 모리스의 전략을 선거운동의 기조로 삼았기 때문이다.
딕 모리스의 전략은 한마디로‘중간층 끌어안기(triangulation)’다. 트라이앵귤레이션이라는
말을 그저‘중간층 끌어안기’로 번역하는 것은 적당치 않을지 모른다. 이 전략은 자기 진영과 상
대 진영의‘중간’을 껴안는 것이 아니라 두 진영의 꼭지점 위에 새로운 꼭지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다. 그것이 삼각도형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이름을 그렇게 붙인 모양이다.
선거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두 후보가 제시한 슬로건에 대해 시민들이 다소 어리둥절했던 것도
그 전략 때문이다. 보수 성향의 후보인 권영진은‘대구혁신’이라는 진보의 표상
을 내걸었고, 진보 성향의 후보인 김부겸은‘대구대박’이라는 보수의
가치를 제시했다.
깃발이 뒤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일
까? 나는 그것을 기존‘진영정치의 한
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김부
겸과 권영진의 몸부림이었다고
본다. 김부겸은 대구의 진보진영
이 이대로 가면 고립된 섬이 될 것
이라는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외로
운 정치실험을 시작했고, 권영진은
대구의 보수 진영이 이대로 가서는 큰
02
1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일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대구 정치를 시작했다. 트라이앵귤레이션의 배경이다.
김부겸과 권영진은 지역과 나라가 둘로 쪼개져 싸우는 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확신
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권영진은 선거운동 기간 내내 혁신, 변화, 소통이라는 진보 지향적
가치를 강조했고, 김부겸은 선거운동 기간 틈만 나면 책임, 능력, 신뢰라는 보수 지향적 가치를 외
쳤다.
트라이앵귤레이션 전략에 따라 권영진, 김부겸 캠프는 상대편 지지자들에게 익숙한‘수용적 이
슈’를 내걸며 지지를 확장해갔다. 권영진은 대구를 바꿀 다섯 개의 혁신과제를 내걸면서 젊은 층을
공략했고, 김부겸은 대통령과 협력하여 대구를 발전시키겠다는 안정감 있는 대안을 제시하며 나이
많은 층에 지지를 호소했다.
이 전략의 딜레마는 각각의 전통적 지지층으로부터 제기되는 비판이다. 권영진과 김부겸도 그랬
다.‘시민과 함께 대구를 바꾸겠다’고 줄기차게 주장한 권영진은 이 지역 보수 본진으로부터 협력
을 구하는데 애를 먹었다.‘박정희 대통령과 화해하겠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던 김부겸 역시 이 지
역 진보 본진으로부터 날카로운 추궁을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흔들리지 않았다.
김부겸과 권영진은 상생정치를 했다. 두 후보는 2004년 미국 대선에서 조지 부시 캠프의 전략가
칼로브가 썼던, 강력하고 민감한 이슈를 던지면서 뜨거운 전선을 만들고 지지자들을 강력하게 동
원해내는‘갈라치기’전략의 유혹을 끝까지 떨쳐냈다. 칼로브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지지
했던 김부겸은 가슴 아픈 패배에도 불구하고 박원순, 안희정과 함께 대권주자의 반열에 이름을 올
렸고, 당선자 권영진은 정당지지도에 턱걸이하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원희룡, 남경필과 함께 당당
한 개혁시장으로서 시선을 모으고 있다.
오른쪽의 권영진이 왼쪽으로, 왼쪽의 김부겸이 오른쪽으로 옮겨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동의의
기반’을 만들고자 했던 트라이앵귤레이션 전략은 기존 정당으로부터 지지가 부족한 권영진과 기존
정당의 사회적 기반이 약한 김부겸이 단순히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고안한 책술이라고 할 수도 있
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기 때문에 아름답다. 그것은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치철학과 성정의
표현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를 통해 김부겸은 합리적 진보의 지도자로서, 권영진은 성찰적 보수의
지도자로서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주었던 것 같다.
진영논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김부겸과 권영진은 앞으로 대구를 대한민국 새로운 정치의 중심으
로 만들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권영진과 김부겸이 곧 만나야한다고 생각한다. 김부겸이 축하
난을 보냈다고 하니 권영진이 화답할 차례다. 대구의 발전을 위해 두 사람이 손을 마주잡고 뛰는
통 큰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 두 진영의 꼭지점 위에 새로운 꼭지점을 만드는 진정한 트라이앵귤레
이션을 기대한다.
천둥소리 13
두 사람이 선거운동 전략에서 보인 리더십은 새로운 것이었다. 갈라치기를 통해 유
권자를 두 동강이 내고 자기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전략이 아니라 차곡차곡 자기 비
전을 제시하면서 유권자를 설득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리더십은 통합적이었
다. 이 두 사람의 리더십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리더십이라고 본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대
결, 독점, 갈등, 독선의 정치에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나눔과 배려, 상
생, 협력, 통합, 평화, 돌봄의 리더십을 희망하고 있다. 동원의 정치가 아니라 공감의 정치를 원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를 여성주의 리더십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20세기의 리더십이 동원과 선동,
대결의 리더십이며 그것은 남성중심의 리더십이라고 한다면 21세기의 리더십은 돌봄과 상생의
리더십이다. 경쟁보다는 협력이라는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되
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현실 정치가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문제만 해도 그렇다. 중요한 것은 공감이며 연민이다. 수사권, 기소권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러한 해법을 두고 서로를 이해시키고 납득시키는 자세가 문제다. 공감과 연
민은‘고통스럽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 자신을 놓아보는 상상력’이라고 했다. 그
러한 상상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힘든 교착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로 팽팽하게
대처하고 있고 실마리가 복잡하게 된 것은 해결의 대안 그 자체가 아니라 공감과 연민을 기초
로 한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야. 보수진보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의 정이며, 공감의 리더십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
탕으로 한 나눔, 배려, 돌봄, 협력, 상생, 평화의 가치를 가진 리더십이다. 지난 지방선거 과정
에서 우리 지역에서 나왔던 권영진, 김부겸이 그런 희망의 단초를 보였다. 자랑스러운 일이 아
닐 수 없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우리 지역에서 나왔다는 것
은 우리로서 행복한 일이다.
DAEGU
나눔
배려
돌봄협력
상생
평화
03
Newreadership
1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동네 도서관에서 우연히 책을 읽고 알게 된 일본의 유명한 NGO 단체인 Table for two의 홍보영상을
보면 나눔을 왜 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나눔은 타인이 불쌍하게 보이기 때문에 합니다. 보여지는 모습만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그
들의 생각이나 삶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물질적인 나눔을 주로 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눔은 불
쌍하니까 하는 것일까요?
영상을 보면 뚱뚱한 아저씨와 비쩍 마른 소년이 시소를 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소는 기울어져 있습니
다. 누구의 책임일까요?
아저씨가 먼저 말을 합니다.
“너가 너무 말라서 기울어져 있는 거야.”
소년은 말합니다.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기울어져 있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누구 때문에 기울어져 있는 걸까요? 시소가 기울어져 있는 건 자본의 불
균형을 의미합니다. 지구의 적도를 기준으로 북반구와 남반구가 있는데 지구 자본의 80%를 북반구가 소
유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20%를 남반구가 나눠가지기 때문에 남반구 국가는 아무리 일을 해도 부유해질
수 없습니다. 이런 책임을 북반구는 남반구의 전쟁과 게으름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사회구조적 모순을 개
인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아저씨는 또 이야기합니다.
“너는 자라서 커지지도 힘이 세지지도 않을 거야.”
전 성 실
나눔교육연구소 대표
나눔의 리더십
나눔과 책임
Ⅲ
천둥소리 15
소년도 말합니다.
“아저씨는 오래 살지 못 할 거예요.”
자본의 불균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게 식량문제입니다. 북반구는 식량생산이 넘쳐서 영양의 불균형으로
비만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고 남반구는 식량이 부족해 매해 기아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 잡으려면 누가 노력을 해야 할까요?
소년은 아무리 뛰어도 바로잡지 못합니다.
아저씨는 한 방에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바로 북반구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만 불균형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전지구의 사회구조의
변화라면 더 좋겠지만 자본의 속성상 아직은 어렵기 때문에 개인의 힘으로 조금은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
입니다.
나눔(기부)를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부는 상대방이 불쌍해서 하는 것도 있지만 상대방과의 불평등으
로 얻은 이익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나눔은 세상을 바꾸는 힘입니다.
이 힘으로 북반구는 비만을 해결하고 남반구는 기아를 해결합니다. 서로 이익이 되는 나눔이야말로 지
속 가능한 순환의 나눔인 것입니다.
지구가 아닌 마을로 눈을 돌리면 어떨까요? 마을의 리더가 되려면 무엇을 잘 해야 할까요? 단적으로 성
장과 분배라는 키워드를 던진다면 무엇을 잘 해야 할까요? 물론 둘 다 잘하는 것이 최고의 리더겠지만 둘
중에 하나를 잘해야 한다면 저는 분배를 고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조금 덜 성장하는 것은 함께 이해하고
견딜 수 있지만 분배의 정의가 무너지는 것은 누군가만 잘 살게 되는 불평등이 생기며 조직이 와해되기 때
문입니다. 리더는 일부만을 위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신뢰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집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처음에는 데려다가 우리 집에서 재운 다음 나중에는 집을 만들어줘서 자
기 집에서 잘 수 있도록 해주죠. 집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함께 도와서 집을 만들
어 주죠.”
“빅맨과 함께 돼지고기를 나누는 날엔 마을엔 잔칫날이 따로 없습니다. 풍족하진 않지만 모두가 함께
먹는 즐거움이 있죠. 많이 먹지 않아도 배부른 행복이 있는 곳. 상각부족 사람들은 이웃의 집 없고 가난
한 사람이 있는 것을 마을 전체의 수치로 여깁니다. 때문에 집이 없어 밖에서 떠돌고 밥을 굶고 가난한
자가 방치되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행복의 바탕에는 나눔으로서 존경을 받는 빅맨이 있기
때문입니다.”
SBS 다큐 최후의 제국 2부 슬픈 제국의 추장
1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그래서 리더는 나눔을 잘할 줄 알아야 합니다. 리더는 혼자 잘 살려고 되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함께 잘
살게 하려고 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리
더로서 신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도 상각부족과 같은 풍습들이 있었습니다. 동네의 가난한 이들에게 일 년에 한 번씩 곳
간을 열어 곡식을 나눠주기도 하고,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음식을 넉넉히 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마음껏 먹고 가도록 했으며, 끼니를 때우기 힘든 사람에겐 음식을 싸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눈에 띄게 뭔
가를 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잔치에 와서 먹고 싸갈 수 있도록 받는 사람을 배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공동체를 소중히 여겼던 것입니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마을의 생산구조인 농사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잘 살기 위한 자연스러운 행동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리더들에게 매우 아쉬운 부분입니다. 누군가를 이끈다는 것은 그들 위에 군림하거나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것입니다.
리더에게 있어 나눔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리더로서 나눔을 하는 이유는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함이
거나 내가 가진 게 많기 때문이 아니라 리더로서 구성원이 올바로 설 수 있게 만들기 위함이고 그들의 신
뢰를 얻기 위해 나누는 것입니다. 구성원 중 하나라도 올바로 서지 못하면 리더로서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
기 때문입니다. 리더에게 있어 나눔은 개인적인 행동이 아니라 사회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리더에게 있어서 나눔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천둥소리 17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청년에게 길을 묻다
Ⅳ
저는 계명대학교의 호텔관광학과에 진학하여 다양한 전공수업을 들으면서, 관광산업 관련 기획업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 전공수업 중‘관광자원론’과‘여행사경영론’의 프로젝트였던‘관광상품개
발’과제를 하면서, 저를 포함한 조원들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도출시킨 후, 그 아이디어들을 융합하여 실제
상품으로 기획하는 것이 재미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진로와 관련하여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한 끝에, 한국관광공사와 대구·경북 지자체의 문화·관광부서와 같이 지역 관광 발전을 위해 관광
관련 기획업무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방학 동안 저는 한국관광공사 대구경북협력지사에서 현장실습을 하면서, 관광 관련 다양한 기
관과 조직들의 역할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들이 하는 일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보고 배울 수 있었습
니다. 학교에서 과제를 통해 얻었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실습 중 직접 관광코스를 짜고, 여러 팸
투어 여행코스를 준비하면서,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실제 관광산업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게 되었고,
이 일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졌습니다.
저는 대구컨벤션관광뷰로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번‘대구관광서포터즈’활동을 통해,‘관광’이라는 공통
분모를 지닌 사람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배움을 얻고 있습니다. 서포터즈 조원들과 함께 대구도시민박 전략
세미나에 참여하여 대구컨벤션관광뷰로에서 일하고 계시는 분들과 대학 교수님들 그리고 여러 관광 관련
강 지 은
계명대학교 호텔관광학과 3학년
1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가 분들을 뵐 수가 있었습니다. 세미나 발표를 들으면서‘한옥형 게스트하우스’가 잠재력이 많은 숙박
업임을 배웠고 조원들과 다양한 의견을 나누며 유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최근 관광주간과 관련하여 실시
된 대구관광지 방문자들의 인식을 이해하기 위한 설문조사 경험을 통하여 잠재 관광객들의 여행 동기 및
만족도 이해를 위한 시장조사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현 관광지가 지닌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방
안을 도출하며, 관광객들의 관광욕구를 충족시키고 가치 있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시장조사가 반드
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서포터즈 활동을 통해 제가 모르고 있었던 것들을 배울 수 있
게 되어 기쁘고, 대구관광 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내 꿈을 향해 한 발짝 내딛게 하는
이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앞으로 약 한달 간, 낙동강·비슬산 권역의 스토리텔링을 통한 코스 기획
미션을 수행하는 동시에 계명대학교‘관광서포터즈 양성 과정’을 통해 체계적인 코스 개발 실무 교육을 이
수 시 성실하게 임하여 대학생의 시선에서 독특하고 신선한 신규 관광자원 발굴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실무자 연계 멘토-멘티 제도는 업무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구관광서포터즈’1기로서 제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천둥소리 19
첫째, 지난 현장실습 경험과 학교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이미 개발되어 있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관광자원을 활성화 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 그리고 새로운 트랜드에 맞춰 사람들이 원하는 다양한 체
험이 가능한 관광상품 개발을 위한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도록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자.
둘째, 함께 조를 이루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활동하며, 대구 시민들 및 잠재 관광객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하여 노력하는 서포터즈의 역할을 다 하는 사람이 되자.
셋째, 지지 않는 청춘인 실버세대들과 곧 실버세대로 진입하는 40~50대의 중년들을 위해 그들의 청춘을
되살릴 수 있는, 감성을 자극하는 스토리가 있는 신규 관광자원 발굴에 도움이 되자.
넷째, 한국관광공사 대구경북협력지사 페이스북 공식 페이지 관리를 했던 경험을 살려, 대구관광서포터즈
로서 대구관광지 홍보를 위해서 어떤 컨텐츠들이 필요한 지 고민하고, 내 개인 페이스북을 적극 활용하여
대구·경북 지역 관광홍보단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자.
저는 앞으로 주어질 서포터즈 미션 활동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될 제 모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서포터즈가 간절히 되고 싶었던 초심을 잃지 않고, 학교와 현장실습을 통해 배운 것들을 적극 활용하여 대구
관광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관광전문가로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청년에게 길을 묻다
Ⅳ
저는 중학교 때부터 관광외식사업이나 호텔관광컨벤션, 이벤트 기획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고자 대구관광고등학교로 진학하였습니다.
이번에 선생님을 통해서 관광서포터즈 운영 및 프로젝트 수행으로 대구 명품관광코스 내 숨은 관광,
문화자원 발굴 등으로 사업의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대구컨벤션관광뷰로에서 제1기 대구관광서포터즈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대표로 선발되었을 때는 소원하는 하나를 이루었다는
작은 쾌감마저 들었습니다.
이제 대구관광서포터즈로 활동한 지 두 달 정도밖에 안되었지만, 대구관광을 알리는데 앞장서는 관광서
포터즈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고등학생이지만 대부분 대학생 선배들과 함께
미션을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본격적인 관광자원 발굴 미션을 수행 전, 제1기 대구관광서포터즈 발대식, 대구도시민박 전략 세미나,
관광주간 이용실태 설문조사 및 현장답사 행사 등에 참가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관광서포터즈의 역할과 임
무수행에 필요한 자질과 자세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Colorful DAEGU’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대구가 대구만의 개성 있는 다양한 색을 낼 수 있도록 이번
관광서포터즈를 통해 대구에도 큰 발전이 있고 학생들에게도 많은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며,
채 윤 정
대구관광고등학교 1학년
천둥소리 21
앞으로 대구 제1기 관광서포터즈의 일원으로 대구를 대표하는 민간 외교관이라는 자세로 다음과 같이 임하
겠습니다.
첫째는, 대구관광서포터즈의 주요 역할인 여러 공식행사 활동을 통해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살아가는
정신을 배우겠습니다.
둘째로는, 대구의 관광자원 홍보 및 온라인 종합정보안내를 통한 관광 활성화를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안내자 임무를 다하겠습니다.
셋째는, 대구의 다양한 관광지를 답사할 뿐 아니라, 청소년 및 젊은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먹거리, 볼거리
등 관련 정보를 수집·분석하여 블로그와 SNS 등을 통해서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향후 미션 수행 및 관광서포터즈 공식행사 활동을 통해 풍부한 실무경험을 쌓아 관련 분야에
취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자기발전에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2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천둥문학
Ⅴ
몸뚱이 하나로
낮고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
세상을 하얗게 껴안을 수 있다면
삼동 혹한도 마다 않겠네
한 줄기 햇볕조차 들지 않는 언덕도
바람 불어 조용할 날 없는
얇고 마른 풀잎 위도
하물며
멀지 않아 녹고 말 청춘일지라도
•「사람의 문학」편집위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시집「들꽃을 엿듣다」외 다수
김 윤 현
Profile
천둥소리 23
차력사 김팔봉 씨를 만난 것은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였다.
강구 다리와 조금 떨어진 오일장 장터에서였다. 오일장은 빗자루, 대바구니, 철사, 뱀장어,
프라이팬 따위의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원근 각처에서 몰려드는 곳이다.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오일장을 어슬렁거리며 물건들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 있는
곳을 발견했는데, 거기서 만난 사람이 차력사 김팔봉 씨였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를 <김팔뚝>, 혹은 <팔뚝이>이라 불렀지만 나는 그가 우리들에게
끼친 무한한 감동을 기려서 본명 그대로 <김팔봉> 씨라고 부르겠다.
김팔봉 씨가 나타났을 즈음 나는 내 신체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을 느낄 때
였다. 나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또래들과 어울려서 수많은 신체적 실험에 몰두했다. 가령,
어제보다 돌을 얼마나 멀리 던질 수 있을까. 숨은 몇 분 몇 초 동안 참을 수가 있으며,
고추를 잡아당기면 몇 센티미터나 늘어날까. 그리고 우리들은 풍선을 사다가 한 번에
불어서 부풀어 오른 풍선의 크기를 보며 누가 허파가 큰지를 겨루었다.
그럴 때 차력사 김팔봉 씨가 우중충한 오일 장터 한 모퉁이에서 눈부시도록 흰 천막을
쳐놓고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종류의 신체적인 실험을 펼쳐보였던 것이었다. 처음
엄 창 석
2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천둥문학
Ⅴ
우리들은 약장수들이 하는 약은꾀라고 코웃음을 치는 실수를 범했지만 곧 그가 여느 약장
수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앞자리에 앉은 아이들을 내쫓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묘기를 아이들한테 보여주는 것을 즐거워하는 듯했다. 김팔봉 씨는
오일장이 서면 자주 왔는데 어른들도 그가 오기를 꽤나 기다리는 눈치였다.
“어이, 팔뚝이 오늘 와 있더나? 또 무슨 묘기를 보여줄랑가?”
오촌 아저씨는 나를 보고 물었다.
“우리도 지금 가보려구 해요.”
우리들은 구슬치기를 하다말고 오일장으로 뛰어갔다.
김팔봉 씨는 오일 전과 마찬가지로 눈부시게 흰 천막 아래서 심각한 표정으로 묘기를
펼치고 있었다. 그는 유리병을 깨뜨려 판자 위에 흩어놓고는 그 위를 맨발로 걸었다.
또한 차돌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알고 있는 우리들의 눈앞에서, 그는 주먹이 아니라
이마로 차돌을 두 동강 내버렸다. 하지만 우리를 가장 황홀경에 빠트린 묘기는 그의‘이빨’
에서 나왔다. 천막을 걷어 올리자 뒤에 세워놓은 트럭이 나타났는데, 그는 트럭 밑에
다 긴 쇠사슬을 걸었다. 우리들은 저 엄청난 팔뚝으로 트럭을 끌어당기려나 보다 싶어
긴장했다.
그런데 그는 쇠사슬 한쪽 끝을 수건으로 감싸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이빨로 쇠사슬을
무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천천히 뒷걸음을 치자 늘어진 쇠사슬이
처렁처렁 소리를 내며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팽팽한 쇠사슬을 손으로 팅팅
때려보고는 괴성을 토했다.
“우와, 트럭이 움직인다! ”
우리들은 비명을 질렀다. 노인들은 마치 자신의 이빨이 쇠사슬을 물은 채로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어 입술을 꼭 다무는 시늉이었다.
차력사 김팔봉은 우리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신체적인 실험이 얼마나 형편없는
수준인가를 알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김팔봉을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
었다. 우리는 그의 묘기를 보면서 어떤 위대한 육체적인 꿈을 떠올렸던 것 같
았다.
실제로 그랬다. 유리 조각 위로 걸어가는 김팔봉의 발
바닥 굳은살을 보면서 당시 올림픽 마라톤을 맨발로 뛰어
세계를 놀라게 했던‘맨발의 아베베’가 가소롭게 여겨졌다.
사자의 이빨이 아무리 힘이 센들 그
이빨로 트럭을 끌지는 못할 게 아
천둥소리 25
닌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우리가 무슨 일로 늦어 해가 설핏할 즈음에야 김팔봉을 찾아갔다. 그는 묘기를
마치고 짐을 꾸리고 있었다. 그는 반갑게 우리를 맞았지만 왠지 표정이 밝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더 이상 강구 오일장에 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모른 채, 빙 둘러서서 그가
이빨로 끌었던 어마어마하게 큰 트럭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감격에 떨었다.
그가 우리들에게 싱긋 웃음을 흘려주곤 차에 올랐다. 검은 연기를 뿜으며 차바퀴가
움직였다. 우리들은 트럭의 뒤를 쫓았다. 쿠당탕쿠당탕 하며 트럭은 흙길을 내달렸고
우리도 전속력으로 트럭을 따라갔다.
그는 금호 변전소 앞에서 차를 세웠다. 그제야 우리도 헉헉 대며 달리기를 멈추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우리들에게 사탕 하나씩을 나눠주고는 말없이 운전석에 올랐다. 그의
차가 먼지를 풍악처럼 일으키며 노을이 지는 강변도로로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사탕을
손에 들고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1961년 경북 영덕 생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슬픈 열대><황금색 발톱><어린 연금술사><비늘천장><빨간 염소들의 거리> 등
Profile
2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서론
1895년 일본은 명성황후의 시해사건(乙未事變)에 대해 시종일관 정부의 관여를 부인해 왔을 뿐
아니라 이 사건이 낭인(浪人)들에 의해서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범행으로 발뺌했다. 일본의 최초이자
최대의 역사 왜곡이라 할 수 있는‘을미사변’의 진실을 밝혀, 우리 국민의 역사 인식을 새로이 함과
아울러 이를 일본인들의 진실어린 반성을 일깨우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코자한다.
明成皇后명성황후
시해 주범은
일본 정부
회원광장
Ⅵ
유 상 종
전 대구과학대학교 지도교수
현 재향군인회 원로자문위원
천둥소리 27
1. 민 황후의 출자
명성황후는 철종 2년(1851년) 9월 25일에 경기도 여주군 근동면 섬락리(현 여주읍 능현리
250-2번지)에서 민치록(閔致걤)과 이씨 부인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자영, 본관은 여흥
(轝輿), 아버지는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중전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의 5세손이다.
황후의 생가는 1976년에 중수,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으며 생가에서 가까운 동
쪽에는 유형문화재 제41호인 명성황후 탄강구리비(明成皇后 誕降舊里碑)가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글씨는 고종의 친필로 그 뒷면에‘광무 8년 존경하여 절하고 울면서 쓴다(光武 八年 敬拜泣書)’라
새겨져 있다. 광무 8년은 명성황후 사후 9년째인 1904년이다. 황후는 8세에 부모를 여의고 의붓
오라비 민승호(閔升鎬)와 더불어 친척집에서 자라다가 16세 대인 고종 3년(1866년) 3월 6일에 왕
비로 간택되어 3월 20일 운형궁에서 왕비책봉의 가례를 올렸다.
2. 백수건달 대원군과‘개똥이’고종
고종(高宗)의 아버지 흥선군은 국태공(國太公)으로 정권을 장악하기 전까지는 백수건달 노릇을
하며 60여 년 동안이나 정권을 잡고 국권을 좌우하던 안동 김씨(安東金氏)로부터‘궁도령’이니
‘상가집 개’라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겉모습과 달리 속으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다. 당시 대왕대비 조씨를 은밀히 접근하며 영조(英組, 1724~1776)의 직계
혈통인 자기 가문이 왕위 계승의 전통성과 당위성을 설득했다. 1863년 12월 8일 철종(哲宗)이 재위
14년 만에 승하하자 조대비(趙大妃)는 옥새부터 챙긴 다음 곧바로 중신들을 불러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命複)으로 하여금 철종의 대통을 이어 보위에 오르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참으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조치였다. 연 날리기를 하며 놀던 대원군의 둘째인‘개똥이’가 갑자기 대궐로
불려가 임금 자리에 앉으니 그가 바로 26대 고종(高宗)이다.
3. 번개 작전으로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
대원군은 집권하자 평소
구상해온 국정쇄신책을
실행에 옮겼다. 가장 먼저
손댄 것은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청산이었으며, 두
번째는 서원(書院)의 철폐,
2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세 번째는 과감한 세제 개혁, 그 다음으로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관 때 소실돼 방치돼온 경복궁을 재건했다. 또한
쇄국정책을 시행하며 천주교를 박해함으로써 병인양요(丙寅洋
擾)와 신미양요 등을 자초했을 뿐 아니라 먼저 서양의 문물을 받아
들인 일본이 조선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으며 청나라와 러시아 외에
도 서구 열강들도 기회를 노리게 되었던 것이다.
4. 시아버지 대원군을 밀어낸 민황후
명성황후는 고종 3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한 살 아래인 고종은 왕비를 어렵게 여겼는지 후
궁을 찾는 날이 잦았으므로 황후는 독수공방하는 밤이 많았다. 그러나 밤늦도록 책들을 읽으며 무
료함을 달랬다. 전하는 말로는 민황후는 비교적 귀가 컸고 얼굴도 약간 검은 편이었다고 한다. 또
한 고종이 황후를 홀대한 것은 아버지 대원군이 민씨의 활달한 성품을 경계하며 멀리하라고 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황원갑「한국사를 바꾼 여인들」2004)
고종 10년(1873) 그의 나이 22세 때 황후는 고종에게 보령도 20을 넘겼으니 친정(親政)을 건의
하는 한편 대원군의 입궐 전용문까지 폐쇄해 버렸다. 또한 최익현을 시켜 두 번씩이나 대원군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서를 올렸다. 대원군은 당시 왕비를 갈아치울 수 있었지만 자신의 시대는 끝났
다고 생각, 그해 운영궁을 떠나 온양에서 휴양하다 양주 별장으로 은퇴했다.
5. 안동 김씨 보다 더한 민씨 세도정치
대원군을 내쫓고 정권을 잡은 뒤 명성황후가 벌인 일은 첫째로 민씨 일족의 요직 등용과 세자
책봉 다음으로 후궁들의 숙청이니 고종은 허수아비요 황후는 여왕이나 다름없었다. 뿐만 아니라
국고를 물 쓰듯 탕진했다. 세자 책봉을 받기 위해 청나라 고관들에게 뇌물을 바쳤고 밤마다 궁중
에서 연회를 베풀어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탐관오리가 횡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죽어가는 것은
압제와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들이었다. 그것이 고종 19년(1882) 6월 5일에 벌어진 임오군란이
었다.
봉미(俸米)관계로 분노한 군인들은 들고 일어나 무기고를 부수고 민씨 일파의 집도 부수는 한편
일본공사관도 습격했다. 3천여 명으로 불어난 군인과 백성들은 대궐로 몰려갔다. 이 난중에 황
후는 인정 많은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용케 대궐을 빠져나가 충주를 거쳐 장호원으로 피신하여
숨었다.
천둥소리 29
6. 임오군란 이어 갑신정변
대원군이 난을 수습하기 위해 대궐로 들어가 중전 민씨가 난 중에 죽었으므로 국상을 발표하고
10년 만에 재기의 기회를 잡았지만 그 기간은 한 달 남짓 밖에 지나지 않았다. 황후는 몰래 고종에게
자신의 생존을 알린 뒤 청국에 파병을 청토록 했다. 결국 오장경(吳長慶)이 지휘하는 청국군에 의
해 7월 13일 대원군은 납치되고, 청국으로 끌려가서 3년간 연금 생활을 했다. 8월 1일 서울로 돌
아온 황후는 50일 만에 고종과 재회했으며 이때부터 무자비한 복수극이 뒤따르면서 한층 더 청국
에 의지하니, 젊은 개혁파들이 들고 일어나 바로 김옥균과 박영효 등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가 일
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계기로 황후는 더욱 국정에 앞장섰으며 특히 외교일선에 나서서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흐른 고종 31년(1894) 3월, 전라도 정읍에서 전봉준(全琫準)이 이끄는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그 여파는 마침내 그해 6월에 시작된 청일전쟁(淸日戰爭)은 일본의 일방적
인 승리로 돌아가 이때부터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며 조선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
냈다.
7. 시해 주도자 이노우에(井上)
민황후는 시해를 주모한 자는 미우라(三浦悟걹)라고 알려져 있지만 미우라를 조선공사로 내보내
게 된 이면에는, 일본 외교문서에도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무력으로‘민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서는 문관 출신으로는 이 일을 해낼 수 없으니 박력 있고 용기 있
는 무관 출신으로는 이 일을 해낼 수 없으니 박력 있고
용기 있는 무관출신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일본 수상인 이또오(伊藤博
文) 이노우에(井上馨)가 구수
회의 끝에 천황(天皇)
의 재가를 실행한 것이
다.
(윤군본부「한국민조
사」1981) 특히 이노우
에는 내무대신으로부터
3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1894년 10월
15일 조선 특명
전권 공사로 부임했
던 일본 제일의 조선통
이었기에 현직 대신으로부터
국장급인 공사직을 자진해서 맡고
나선 저의가 바로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부임 후 대신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암탉이 울면 집안
이 망한다.”느니“모든 잘못은 왕비 때문”이라며 고종과 황후를 모욕했다. 따라서 황후는 친로(親걠)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8. 조선 강점 장애자로 일제가 참살
고종 32년(1895) 마침내 운명의 해가 되었다. 7월에‘칼잡이’미우라 고로(三浦悟걹),
(1846~1926)가 공사로 부임했다. 국왕에게 신임장을 제출한 뒤 뜻밖에도 참선승(굱禪僧)인양 일체
바깥출입을 않고 있었다. 그러나 황후 시해 두 달 전인 8월에 고종은“일본인들이 궁궐 내에서 못
된 짓을 하고 있다”며 미국인 타이(DYE)장군과 러시아 귀족인 사바찐(Sabatin)등 외국인 3명을
군내에 거주토록 했다.
훈계의 실행일은 1895년 8월 20일 새벽, 미우라는 검객, 낭인들, 그리고 일본인 장교가 훈련시
킨 훈련대 등 조·일 혼성부대와 대원군을 교여에 태우고 광화문을 거쳐 대궐로 쳐들어갔다.
대궐에서의 참상을 목격한 타이장군의 증언과 사바찐의 수기(手記, 조선일보 1995. 5. 10)를 통
해서 살펴본다.「폭도들은 새벽 5시 궁궐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총격으로 궁궐이 혼란에 빠
졌으며 내가 도주한 장소가 왕비의 거처 앞마당이었다.」(장경전, 일명 옥호루)
폭도들은 소리를 지르며 마당을 휘젓고 궁녀 10여 명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나와 왕비 있는 곳을
묻고 모른다면 그 자리에서 죽였다. 이때 한 구석에 숨어있던 몸집 작은 여인이 발견되어 왕비가
아니냐고 다그치자 아니라며 달아나다 낭인들이 그 뒤를 쫓아가 그녀를 넘어뜨리고 움직일 수 없
도록 가슴과 다리를 짓누른 후 칼로 찔러 살해했다. 몇 사람의 시녀가 끌려와서 여기 저기 나뒹굴
어져 있는 시체를 확인한 결과 시녀들의 통곡으로 왕비의 시체가 판명되자 시체를 홑이불로 싸서
숲속으로 가지고 가, 장작 위에 놓고 석유를 뿌려 불태웠다. 1895년 9월 26일의 참극이 바로 을
미(乙未)사변이다.
천둥소리 31
9. 명성황후의 죽음과 대한제국의 태동
국왕의 국장은 6개월을 넘기지 않는게 관례임에도 황후의 시해 2년 2개월이 지난 1897년 11월
22일에서야 치러진 것은, 국민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그 추진 세력을 결집시키려는 것이었다.
1897년 후반, 고종을 황제로 격상시키자는 운동이 급속화 되면서 미루어왔던 장례를 서거 2주기에
이르러서야 왕실에 대한 충성이 정점에 달했다. 마침내 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이 반포됐고
고종은 40일 후 장례를 치룬 것이다. 명성황후는 죽음으로써 殺身成仁했으며 이로써 명성황후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
일본 정부는 을미사변의 책임을 미우라에게 지워서 관련자 48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감금하는
한편 그들은 대원군이 협조를 요청한데도 원인이 있었다며 이노우에 주모를 숨기는데 총력을 기울
여왔으나 미우라 등은 1896년 1월 20일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전원 면소한 것은 속이 빤히 들여
다보이는 연극이었다.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렴치한 사건이다. 전시도
아닌 평화시에 다른 민족이 자신들의 군대의 비호 아래 왕궁에 무리를 지어 쳐들어와서 왕비를 시
해한 만행에 대해 시종일관 정부의 관여를 일본은 부인해 오고 있다.
최문형 교수도“강화도 조약 때부터 조선 문제에 대해 관여해
온 이노우에는 주한공사 임명과 함께 조선에 대한 전결권을
부여받은 일본 정부 당국자였다. 또한 사건 한 달 전에
17일간 미우라와 함께 서울에 머물면서 시해사건을
기획했다”고 밝혔듯이(「명상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2002)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 정
부에 의한 국가적 범죄임을 실증하는데 초점
을 맞추어야하며 명성황후 시해 11주년을
맞이하여 한·일 양국은 지난날의 불행
했던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
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3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수많은 관계로부터 자
유롭다 하지만, 실상은 얽매임 안에 서로를 견제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하다 하지 않을 것 같다.
인간은 생명을 부여 받은 후 맑고 깨끗함 안에서
살아갈 혜택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인간 스스로가 이를 부정해 버리거나
일상 속에서 소각해 버리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환경보전적 인간존중 의미로 이렇게
이야기를 해 본다.
이 강 순
(사)환경보전실천연합중앙회 회장
회원광장
Ⅵ
천둥소리 33
대학의 환경학과는 학술적으로 기술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쳐 오고 있지만, 어렵고 때로는 따분
해 졸업 후 전공을 살리는 것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이 현실이다 보니 교과과정 속에 남겨져
있어야 되고, 일상적 활동을 동반한 환경만이 우리 일반인들 주위를 맴돌고 있다고 볼 때 환경이
라는 두 글자의 울타리 속에 갇혀있는 속칭 환경활동가라 하는 필자는 솔직히 가식일지라도 눈물을
흘려야 될 것 같은 심정이다.
학술적 환경은 사회 전반에 녹아내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국가 전반의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고 하지만, 각 대학의 환경학과 전공 분야도 자리 매김을 하였다고 볼 수 있고 사실이 그
러한 것이 학생들의 입학율을 보면 더욱 명백해 진다. 하지만 이를 전공한 학생은 현재 무엇에 절
심함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까?
학문적 배출로 나온 전공 학생이나 가르친 교수가 사회 전반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수질,
토양, 대기오염 등에 얼마나 고민하고 걱정하며 현장을 스스로 뛰어나와 활동으로 자리매김한 환
경단체들에게 손을 내밀어 준 적이 얼마나 될까? 정화를 책임지라는 것은 아닐지라도 공동체적
책임을 느끼며 사회의 길잡이는 되어 주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해 본다.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현실 속에 있지 않나 싶다.
3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환경활동가 집단들의 반성을 저부터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라 생각하면서 지난 2월 중순경 환경
부 주관 한국환경단체협의회 대표자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모든 단체 대표자분들의 열정과 풍부하
신 환경지식을 바탕으로 활동하신다는 정서는 충분히 감지했지만, 그 당시의 느낌은 좋은 편이 못
되었다는 것이다.
어딘가 모르게 자신의 아집에 포위되어 있는 활동가들로 보였고, 몇 분의 활동가들은 솔직히 무
엇을 추구하기에 이토록 자기 아집만 내뱉는 것일까? 하는 의문 속에 그 가운데 내 자신을 반성해
보면서 슬프고 매우 답답한 마음 안에 눈물이 고였다는 것을 보게 되어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기억을 해보면서 이 글을 보실 협의회 대표 분들께서 저에게 어떤 질타를 하실지 모르겠으
나 필자는 그때의 심정을 표현한 것임을 이해해 주시리라 본다.
이 자리를 빌어 질타를 감수하면서 몇 가지 더 짚어 볼까 한다.
대한민국은 각종 단체공화국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다. 환경단체만 보더라도 대략 얼마
나 될까? 솔직히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환경부 등록 허가단체를 대략 200여 개 이상이라 보고
광역 시·도에 등록된 단체는 환경부 숫자보다 몇 배는 더 된다면 지방자치단체에 등록된 풀뿌리
단체는 얼마나 되며 등록하지 않고 열심히 활동하는 단체까지 열거한다면 수 천 개는 족히 될 것
으로 짐작해 본다.
솔직히 단체들이 너무 난립해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오늘날 환경단체들의 실체는 어떨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 다음과 같은
현실을 이해를 구하며 적어보았다.
- 단체는 어떤 전문성을 가졌을까? 지역민과 국민을 위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태생되었을까?
- 단체는 진실로 회원은 몇 명이나 있을까? 회원들은 어떤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을까?
- 단체는 때로는 보여주기식 행사와 지방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에 간섭을 일삼고 있지는
않는지, 단체의 집단적 과시적 힘으로 어떤 무리한 요구는 하고 있지 않는지?
이런 거북한 내용을 적시하여 무슨 말 하고 있냐는 핀잔들을 듣지는 않을까 하는 반문을 해 보
면서 제 스스로의 활동상을 반성하고 함께 고쳐 나가는 모습을 다 잡아 보는 의미로 이해해주실
것이라 본다.
오늘날 환경문제는 매우 복잡하면서 세분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학문적 분야는 몇 개
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현장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환경활동가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
천둥소리 35
이 현실이다.
환경선진국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들도 자국의 이익과 국민의 환경적 복지에 촉각을 세우며
많은 정책과 실천을 하고 있고 선진국의 좋은 자료들로 공부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의 실정은 어떤 점수를 받을까 깊은 반성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은 선진국 대열에 다가선 만큼 정부와 지방정부,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에
게만 맡길 수 있는 시대는 아닌 것 같다.
우리 국민들도 스스로 환경의식 변화가 절실히 요구되는 만큼 형식적인 변모보다 실천적 변화를
스스로 할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환경을 전공으로 사회에 보내기 위한 학문과 연구도 중요하지만 현실 속에 녹아드는
방법도 함께 고민하면서 사회에 배출시켰으면 한다.
방법으로는 학교 내 수많은 동아리가 있지만, 정녕 환경동아리는 찾아 볼 수 없다는데 우리는
문제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학교 안에서부터 환경 실천을 배우는 자세가 바르게 형성될 때 사회
속에 올바른 환경인으로 자리 매김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학교와 지역의 환경단체와의 유기
적 연대를 통한 진정한 환경활동가 또는 환경인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보는 것이다.
스스로 풀뿌리 환경단체를 구성한 단체들도 저를 포함하여 자성 속에“참환경운동”을 위한 지역
민과 국민들께 환경의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면서 고통분담적 밀착 활동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화활동을 통한 오염배출 현장을 시정과 고발운동도 더없이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각 단체의 특성에 맞게 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바라며 저희 단체처럼 꾸준히 교육
(시민환경대학)을 통한 환경기초지식과 함께 정화활동을 병행해 줄 때 스스로의 체험이 새롭게
발휘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대안을 제시해 보면서 눈물로 환경을 바르게 공부하자고 더 이상 호
소하는 일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3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옛 우리 조상의 생활상은 대부분 땅속에 묻힌 유적의 발굴을 통하여 엿볼 수 있는데 이 유적은 생활유
적과 무덤(墓)유적으로 크게 분류되고 있다. 먼저 대구 지역에서는 금호강과 만나는 신천, 동화천, 불로
천, 팔거천, 달서천과 낙동강과 만나는 진천천, 천내천 등 많은 세천변에 퇴적층을 이룬 비옥한 토양에
농사를 짓고 살아온 생활유적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물과 가까이한 조상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취락형태로서 도시가 형성되어 하천과 강이 오염되고
샘물이 고갈되면서, 병원성 미생물이 오염된 물을 통해 먹는 물로 전달되는 수인성 전염병인 장티푸스,
콜레라로 설사, 복통, 구토 등이 급속히 확산되어 목숨을 잃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에 1906년 11월에 처음 대구상수도 설치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였으며, 1911년 대구 인구는 28,240
명에 불과하였으나 이때 구체적인 설치계획을 수립하여 1914년 7월 1일에 가창계통의 상수도시설과 대봉
배수지 공사가 착공되자 계속적인 인구증가로 30,000명을 넘어서게 되었고 시가지 또한 본격적으로 형
성되게 되어 외형상으로는 큰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도 시민들의 급수문제는 여전히
하 종 성
대구광역시 행정동우회 사무처장
근대 대구물산업
역사를 되돌아보며
2015 대구·경북 세계물포럼을 계기로
물산업 허브도시로의 도약
회원광장
Ⅵ
천둥소리 37
우물물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18년
3월 31일 본 공사가 준공되
어, 급수구역은 대구 시가지
일원으로 하였으며, 급수인
구는 30,000명을 대상으로
하루 급수량을 2,800㎥으로
하였다.
그 후 인구가 급격히 증가
함에 따라 수요도 크게 증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수원지에서는 가끔 원수 부
족현상이 나타나는 등으로
1921년 말경부터는 수차례
단수소동이 빚어졌다. 그리
하여 급수인구33,000명에 1
일 약4,600㎥를 생산할 수
있는 급수시설 확장공사를 1924년 4월 23일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인 1925년 4월에 준공하였고, 그해 12
월 10일에 대봉 제2호 배수지를 완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확장공사에도 불구하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또 수원이 부족하게 되자 우선 응급조치로
당시 물맛이 좋기로 평판이 자자했던 대봉동 수
도산밑“배나무 샘”부근에 보조수원지 신설공
사를 시행하여 1933년 12월에 완공하여 이 보조
수원지에서 하루 평균 300㎥를 생산하여 보충
하였다.
이러한 귀중한 물은 생명의 원천으로서 우주
공간의 수천억 개 별중에 유일하게 물이 있는 곳
은 지구밖에 없다. 그리고 또 세계사를 통해 볼
때도 지역 간 국가 간에도 물로 인한 다툼과 분
쟁이 이어져 왔음을 볼 수 있다. 우리 인체(人體)
도 70%가 수분이며 그중 2%만 부족해도 통증과
대봉배수지(현. 대구상수도사업본부 / 자료 :’73대구시사(제2권))
1918년에 설치된 대봉배수지 전경으로 앞쪽으로 관리사무실이 보
인다. 배수지가 소재하여 이곳을 수도산이라 부르고 있다. 지금은
이러한 역사성을 찾아 이곳에 상수도사업본부 건물을 세웠다.
대봉배수지 축조공사 장면(현. 상수도사업본부에 위치함 / 자료 : 정성길)
1911년 인구 3만명에 급수인구 6천명을 기준으로 처음 상수도 설치계획을 수립하여
1914년 7월 1일에 착공하여 1918년 3월 31일에 준공하였다. 가창정수장 완속여과지 축
조공사와 대봉배수지 축조공사를 완료하여 급수방식은 가창면 오동의 취수정에서 자연유
하 방식으로 원수를 공급받아 가창정수장에서 정수하여 대봉배수지로 송수하여 1일
2,800㎥를 생산하였다. 그 후 수요량이 증가하여 1924년 4월 23일 ~ 1925년 4월로
확장공사를 마쳐 1일 4,600㎥를 생산하였다.
3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갈증을 호소하게 되고, 5%가 모자라면 환각증세가 나타나며, 12%가 빠져나가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지금도 70억명의 세계 인구 중에 매년 5억의 인구가 물부족으로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다. 이러한 물에
대한 대비가 없다면 2025년엔 30억 인구가 죽음을 맞게 되며, 2050년에는 세계 인구의 2/3가 고통을 직
면하게 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유엔보고에 의하면 전세계 국가별로 물사정에 대한 구분으로
⑴ 물기근 국가군으로 1인당 사용가능한 수자원량이 매년 1,000㎥ 미만으로 만성적인 물부족 국가로
서 국민보건을 저해하는 수준의 쿠웨이트, 바레인, 싱카포르, 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 등 서남아시아 및
북아프리카 지역이 되며
⑵ 물부족(스트레스) 국가군으로 1인당 매년 1,700㎥ 미만으로써 주기적인 물압박을 경험하는 국가로
서 인도, 파키스탄, 폴란드, 남아프리카, 덴마크, 한국 등이며
⑶ 물취약 국가군으로 1인당 매년 2,500㎥ 미만으로써 간헐적으로 물이 부족한 국가로서 이라크, 이
란, 중국, 수단, 영국, 독일이 해당되며
⑷ 물안정 국가군으로 1인당 매년 2,500㎥ 이상으로써 장래 물부족이 없는 국가로 노르웨이, 캐나다,
미국, 브라질,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나누고 있다.
여기서 우리나라는 연평균 강수량 1,277㎜로써 세계평균 807㎜의 1.6배이며 수자원 총량이 1,297억
㎥/년 이지만, 연강수의 2/3가 여름철에 집중되는 등 계절별, 지역별 편중이 매우 심하며, 높은 인구밀도
로 인해 1인당 연강수 총량은 2,629㎥로 세계 평균의 약1/6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사용가능한 수자원량을
생각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하겠다.
앞서 소개한 대구시 상수도의 역사는 여명기를 보내고 혼란기와 성장기를 거쳐 낙동강 수원확장공사와
함께 안정기를 맞게 되었다. 근대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대구의 물산업은 1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1918년 달성군 가창면 오동에 설치한 최초의 취수장의 취수탑
전경 자료, 상수도90년사
1918년 당시 가창정수장 전경(원형의 여과지와 침전지가 보인다)
현. 수성구 파동소재. 자료, 상수도90년사
청도를 지나 부산으로 이어지는 길
↓
천둥소리 39
지닌 곳으로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
하여 1918년 하루 2,800㎥의 수돗
물을 생산·공급했던 것이 현재는
하루 1,720,000㎥를 생산할 수 있
는 시설용량을 갖추게 되어 급수보
급률이 99.6%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양적인 증가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고도정수처리공정을 도
입하여 안전하고 질 좋은 수돗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급수
구역 곳곳에 가압설비와 배수지를
설치함으로써 고지대 급수지역에 관계없이 안정적이고 원활한 급수가 가능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대구시
의 상수도사업은 생산, 공급시설의 확충, 유수율 향상과 배수관망 구역화, 수돗물 수질의 안정성 확보, 수
남산동 주교관 경내 묘지 건너 현. 1918상수도본부가 위치하고 있는 수도산
(대봉배수지)이 보인다. (자료, 교구사 화보)
현. 가창정수장
1918년에 준공된 정수장이 지금까지 잘 보존 관리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 보호됨. 원형여과지엔 용두천(괟頭泉)이라 새긴 글씨가 선명
하다. 당시 가창에서 상동 중동을 거쳐 흘러내리는 하천을 용두방천이라 불렀다.
4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대봉배수지
돗물의 신뢰재고를 위한 행정혁신을 통한 시민만족도 향상, 적정시설용량 유지 등으로 가강 맛 좋은 물, 믿
고 마실 수 있는 물의 공급을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해 나갈 것이다.
이런 역사성에 발맞추어, 2015년 4월 대구에서 개최되는 제7차 세계물포럼 개최도시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지구촌의 최대 과제인 물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선도적 역할을 다하는 한편, 2,600억원의
경제적 편익과 2,500명의 고용창출을 기대하면서, 이를 대구의 새로운 성장 동력인 주력산업으로 생활용수의
재활용, 지하수개발, 계절적 편중된 호우에 대한 물비축방안, 빙하와 바닷물의 이용 등 다방면에 걸쳐 철저한
연구와 대책을 강구해 나감으로써 물산업의 허브도시로의 도약을 기필코 이룩해 나가야 할 것이다.
현. 대봉배수지 전경
천둥소리 41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소식
Ⅶ
(사)한국여성유권자 대구연맹 주최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패트롤맘 대구광역시부, (사)대구광역시
여성단체협의회의가 후원하는‘6.4지방선거 공명선거 및 매니페스토 캠페인’이 5월 16일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에서 열렸다. 이 캠페인은 대구시민들로 하여금 선거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이날 100여 명의 회원과 시민이 모여 바람직한 선거문화 정착을 위한 캠페인에
참여하였다.
6월 29일에는 (사)일하는 여성연합회가 개최한‘제7회 대구여성문화공연 한마당 경연대회’에 후원하여
건전한 여성문화 육성, 지역여성의 문화적 잠재력 향상, 여성문화를 선도할 여성 문화예술 인재의 발굴에
함께하였다. 대상(대구시장상)은 청운신협 두손모아 풍물단, 최우수상(대구예총상)은 한국춤교육원 고전
무용팀, 한국규젤벨리댄스컴퍼니 규젤벨리팀이 차지하였다.
지난 4월 25일 메세지팩토리(대표 노경민)와 원활한
체험프로그램의 운영, 시민들의 역사의식 고양을 위한 업
무협약식을 가졌다. 양 기관은「대구 독립운동 발자취를 따라
떠나는 시간여행자」체험프로그램의 원활한 진행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였다.
메세지팩토리는 가치를 지닌 메세지를 공유하려는 사람
들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소통할 수 있는 행사와
프로그램들을 기획하여 소통의 장을 생산하는 소셜기획사
로 감동콘서트, 청년봉GO, 100일 후 우체통 등을 기획하
고 운영하고 있다.
4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6월 8일, 8월 10일 대구지방보훈청과 도심RPG의 후원을 받아 메세지
팩토리와 공동으로 청소년 나라사랑 체험프로그램인‘대구 독립운동 발자취를 따라 떠나는 시간여행자’
를 운영했다. 효성여자고등학교 학생 86개팀(264명), 원화여자고등학교 학생 96개팀(288명)이 참여하여
지역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역사적 정체성과 지역사회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시
간이 되었다.
이 행사는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근대역사관, 광문사터, 이상화·서상돈 고택, 진골목, 북후정, 3·1운
동길 등 지역 항일운동과 관련된 장소를 방문해 미션을 수행하고 최종장소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내용으로 대학생 기획단 30여 명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다양한 미션을 통하여 재미와
함께 역사적 지식을 얻을 수 있게 구성된 프로그램이다.
8월 20일 오전11시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2014년
(사)국채보상운동기념
사업회 임시이사회를
열어 기 추진 상황과 향
후 추진계획을 보고하고
안건을 결의하였다.
이·감사 및 신입이사
에게 위촉장을 전달하는
시간도 가졌다.
천둥소리 43
4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사)대경늘푸른자원봉사단, (사)대구시각장애인연합회중구지회, 게이트볼협회, 국회의원 조원진,
대구광역시 여성청소년가족과, 대구광역시 보건정책과,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대구사회연
구소, 대구 생명의 숲, 대구은퇴자협동조합, 대전 동산초등학교, 대전한남대학교 역사탐험대, 동촌
중학교, 사회적기업활성화 대구네트워크, 삼토회, 연합연구회, 영양군읍 서부리, 인권운동연대, 중
구기동대 예비군, 중구시니어클럽, 중구장애인주간보호센터, 청년연합 36.5, 한남교육사랑, 한빛지
역아동센터
(사)어린이도서연구회경북지부, 50사단 501여단, 경동초등학교, 경명여자중학교, 경원고등학교,
경일여자중학교, 공무원교육원, 관음초등학교, 관천중학교,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달서
초등학교, 달서초등학교 4학년, 달성고등학교, 달성군학부모 문화유산해설사, 달성중학교, 대구경
북언론클럽 대경뿌리학교, 대구공업고등학교, 대구광역시 보건정책과, 대구광역시 여성청소년가족
과, 대구광역시 온라인셀링협동조합, 대구문화관광해설사회, 대구생명의 숲, 대구선명학교, 대구
시설관리공단, 대구여성가족재단, 대구외국어대학교, 대구은퇴자협동조합, 대진중학교, 동덕초등
학교, 동촌중학교, 만촌초등학교, 매곡초등학교, 매천고등학교, 매호중학교, 메세지팩토리, 북중학
교, 불로중학교, 삼덕초등학교, 삼덕초등학교 4-1, 삼덕초등학교 4-2, 삼성전자, 상원중학교, 성
당중학교, 성서고등학교, 수목원, 신기중학교 1학년, 어린이도서관 햇빛따라, 영남공업고등학교,
오성중학교 3학년, 유천포스코반올림문고, 자원봉사능력개발원, 죽전초등학교, 중앙도서관, 중앙
중학교, 질병관리본부, 청림초등학교, 평리초등학교, 한국청소년지원협의회, KDB산업은행
천둥소리 45
50사단 501여단, 가창초등학
교, 경덕여자고등학교, 구미고등
학교,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
사무소, 남산고등학교, 논공교
회, 달성고등학교, 담사신구,
대경뿌리학교, 대경학회, 대구공
업고등학교, 대구아이쿱소비자생
활협동조합, 대구통합건강증진지
원사업단, 대구학교도서관사서협
의회, 대구학교도서관사서협의
회, 대림중학교, 동덕초등학교,
동평중학교, 메세지팩토리, 범일
중학교, 본리초등학교, 성곡중학
교, 성당중학교, 성북초등학교,
성서중학교, 수정유치원, 안심중
학교, 영신중학교, 용산중학교,
용전초등학교, 울산 신일중학교,
월배중학교, 율하초등학교, 인권
운동연대, 인성유치원, 일성중학
교, 죽전중학교, 중리중학교,
하남초등학교
※ 단체 관람 문의 : 국채보상운동기념관 053)745-6753
㈜햇빛나들이, 강북중학교, 강제연행을생각하는 대구
광주실행위원회, 경북대학교, 경북대학교 환경공학과·
농업토목공학과, 경운초등학교, 경진초등학교, 경혜여
자중학교, 교동중학교, 그룹신도시건축사사무소, 김충
선연구회, 남도초등학교, 남산고등학교, 달서공업고등
학교, 대곡중학교, 대구경북소비자연맹, 대구경북언론
클럽 대경뿌리학교,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대구경북진
보연대, 대구경북학회, 대구공업고등학교, 대구광역시
건축주택과, 대구광역시 보건정책과, 대구광역시 안전
총괄과, 대구광역시 자치행정과, 대구광역시 정책기획
관실, 대구광역시문화관광해설사, 대구사람장애인자립
생활센터, 대구여성의전화, 대구여자고등학교, 대구중
학교, 대구초등학교 5학년, 대전세빛선교학교, 대평중학
교, 도원중학교, 동도중학교, 동변초등학교, 동부중학
교, 동부초등학교, 동화마을 어린이집, 메세지팩토리,
문성초등학교, 반야월초등학교, 복명초등학교, 복현초
등학교, 북부초등학교, 삼락회, 상인초등학교, 새벗도서
관, 성명여자중학교, 시각장애인협회, 시지중학교, 신명
여자중학교, 아이누리유치원, 영남공업고등학교, 영남
중학교, 운암고등학교, 월곡초등학교, 유천초등학교, 인
권운동연대, 입석중학교, 제일여자상업고등학교, 죽곡
초등학교, 중리초등학교, 통일시민대학연합회, 학남중
학교, Indonesia, LG디스플레이
(사)대구사진비엔날레조직위원회, (사)대한어머니회대구연합회, (사)전국주부교실대구시지부, 50
사단 501여단, 강동중학교, 경북대예방의학교실,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 관음어린이집,
구암중학교,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노변중학교, 달서숲해설단, 대건중학교, 대구 중구
시니어클럽, 대구경북소비자연맹, 대구경북진보연대, 대구경북학회, 대구공업고등학교, 대구광역
시 경제정책과, 대구대학교 부설 유치원, 대구시민센터, 대구시청 도시재생과, 대구시청 보건정책
과, 대구시청 자치행정과, 대구영남공업고등학교, 대구YMCA, 대중금속공업고등학교, 메시지팩토
리, 성광중학교, 시설관리공단 도시공원, 신기중학교, 신당중학교, 월암중학교, 인권운동연대, 통합
건강증진사업단, 팔달중학교, 프라임 어린이집, 학남고등학교, YCK국토대장정
4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을 한국근대사에 자리매김을 하신 故 박영규 이사님의 추모 좌담회를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소박하게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박영규 이사님의 추모를
위해 당시 근거리에서 함께 하셨던 여러분이 좌담회에 참석해주셔서 더 큰 보람 있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이제 남은 숙제는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본 기념사업화를 짊어지고 가야한
다는 생각을 하게 된 자리였습니다.
편집위원장 엄창옥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는 신채호선생님의 말씀처럼 천둥소리가 현재와
미래를 위한 길잡이가 되길 바래봅니다.
그래서 나눔과 배려 그리고 기부 활동 등을 통해 사회 양극화를 줄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위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기를......
편집위원 우웅택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 아름다운 글을 통해 아름다운 나눔이 온 누리에 아름답게 퍼지는 것이
인간의 아름다운 책임을 알고 생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나눔과 책임의 꽃임을 자각하고 그
속에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임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편집위원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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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故 박영규 이사 추모 좌담회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나눔의 리더십 대구관광서포터즈, 나의 꿈을 향해 가는 시간 제1기 대구관광서포터즈 팀원이 되면서... 눈처럼/차력사 김팔봉씨 유상종/이강순/하종성
  • 2. 회비안내>> 회비를 미납하신 회원께서는 동봉한 지로용지나 은행계좌로 조속히 납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구은행 031-05-003912-4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김 영 호 입회안내>> 국채보상기념사업회원을 모십니다. 애국애족의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에 뜻을 함께 하고자 하시는 분은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 회원에게는 각종 학술행사 및 연구회에 참여하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며, 각종 동호회에도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회비는 연 1만원 이상입니다. 가입을 희망하시는 분은 전화 053)745 - 6753으로 문의하시거나 홈페이지(www.gukchae.com)를 방문해서 회원가입을 해주시면 확인 후 바로 답변을 드립니다.
  • 3. 발 행 인 신동학 편집고문 박용규, 서상호 편집위원 엄창옥(위원장), 권오현, 남정원, 우웅택, 이용수, 전환길, 최경집, 최윤진, 황성하 발 행 처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 670(동인동 2가 42번지) 전화.053-745-6753 팩스.053-746-6753 www.gukchae.com E-mail.master@gukchae.com 기획제작 밝은사람들 053-652-5700 <꿈인가 생시인가, 하늘이 준 것인가 때가 온 것인가, 구름 안개 걷히는 것인가… 대한 광무 11년(1907년) 새봄의 제일 좋은 소식은 하늘에서 온 복음을 소리쳐 전하는 것이로다. 이 소식이 무슨 소식인고, 이 소식이 무슨 소식인고 이러한 좋은 소식을 우리는 급히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이오… 이 소식은 다름이 아니라 대구광문사 부회장 서상돈씨 등이 단연동맹한 호소식이로다.> 1907. 2. 25 자 황성신문 논설에서 따옴 국채보상운동 故 박영규 이사 추모 좌담회 북후정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나눔과 책임 나눔의 리더십 청년에게 길을 묻다 대구관광서포터즈, 나의 꿈을 향해 가는 시간 제1기 대구관광서포터즈 팀원이 되면서... 천둥문학 눈처럼 차력사 김팔봉씨 회원광장 명성황후 시해범은 일본정부 눈물로 호소해보는 환경학 근대 대구 물산업 역사를 되돌아보며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소식 04 11 15 18 23 27 42 김태일 전성실 강지은 채윤정 김윤현 엄창석 유상종 이강순 하종성 2014. 가을 제32호 나눔과 책임의 표지사진 결실과 수확의 계절 가을을 맞아 드높아진 가을 하늘을 바라본다. 산천을 수놓은 고운 단풍 틈으로 뾰족하고 좁은 가시 옷 속에서 함께 자라나기 위해 서로의 자리를 양보해가며 자라난 알밤이 영글어 꽉 찼다.
  • 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故 박영규 이사 추모 좌담회 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 Ⅰ 김 영 호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 참석 진행 기록 신 동 학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상임대표 서 상 호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감사 임 수 현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김 종 찬 대구 MBC 이사 이 춘 호 영남일보 기자 엄 창 옥 편집위원장 권 오 현 편집위원
  • 5. 엄창옥 : 오늘은 고 박영규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님을 회고하면서, 그분의 국채보상운동 재조 명에 바친 열정과 그분만의 따뜻한 인간미 그리고 지역사회에 미친 발자취에 관한 여러 에피 소드들을 듣고, 본 기념사업회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해보고자 추모 좌담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신동학 : 참석해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국채보상운동 정신이 대구지역에 뿌리를 내리는데 크게 기여해주신 고 박영규 이사님의 추모 좌담회가 우리 사업회의 앞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길 기 대하면서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영호 :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발전하는데 가장 잊을 수 없는 분이 박영규 이사님이라 할 수 있습 니다. 그분은 초대 상임부회장으로서 실질적인 일을 다 하셨습니다. 늘 잊지 않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국채보상운동 연구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한 분이시고, 상공회의소에서 낸‘국채 보상운동기념사’를 조항래 선생과 함께 주로 집필하셨고, 80년대 국채보상운동 심포지엄을 여는 데에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또 기념사업회가 2002년도에 만들어질 때에도 고생을 도맡아 하셨습니다. 우리로는 잊을 수 없는 분이라 이 추모 좌담회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김종찬 : 오늘 이 좌담회가 박영규 선배님 일이라고 하기에 열일 제쳐놓고 왔습니다. 저는 오늘 그분의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좀 드리고자 합니다. 선배님은『대구일보』가 1972년 3월 31일자로 문을 닫게 되면서 대구 MBC로 오셨습니다. 처음에는 혼자이시니 외로우셨겠지만, 대구 중앙 공원쪽의 골목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구수하게 말씀을 하신 기억들이 남아 있습니다. 책을 많이 읽으신 것 같아요. 박 선배님의 첫인상이 박식하다는 점입니다. 그분의 큰 자산은 넓은 인적 네트워크이지요. 무엇보다 그분은 돈 욕심 없는 소탈한 인간미가 있으셨다 생각됩니다. 사모님이 고생 많이 하셨을 겁니다. 임수현 : 제가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대구에 서 근무하는데 농협지도부 출입기 자로 박영규씨를 만났어요. 박영 규씨가『대구일보』가 폐간되기 전 에 경제부 출입을 했으니까요. 만 나면서 느꼈던 것이 저 양반이 나 이는 우리하고 비슷하지만 내가 배울게 많은 사람이구나 그런 생 천둥소리 5
  • 6. 각을 했어요.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지역사, 특히 대구역사에 매우 박식한 사람이구나 느꼈 습니다. 제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 이사가 된 것도 박영규 선생의 권유였습니다. 서상호 : 69년도인가, 70년도인가에 직물업계 출입을 같이 했어요. 직물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도 해야 했고, 그러니 자연히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박 선배는 경제부 고참이고 경제부 기자로서 선두 위치에 있으니까, 또 그때 대구경제의 기본이 바로 섬유였으니까, 그때 아마 아이디어를 얻거나 소명의식을 가지고 대구의 과거를 파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직물 같으면 직물 이야기만 하는게 아니고 직물과 관계되는 금융, 사업이야기까지 이론만 아는 게 아니라 주변을 더 많이 아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인간관계를 맺는 것도 능숙하셔서 휴먼 네트워크가 아주 넓고 누구든지 친한 분이었습니다. 엄창옥 : 언론에 계시면서 자료 부재를 강하게 느끼고, 그러다보니 지역사회를 천착하게 되고. 하면서 지역의 문화와 역사 그 속에 숨어 있던 국채보상운동을 발견해내셨군요. 이춘호 : 제가 언론생활을 하면서 마치 유성처럼 만난 분이 박영규 사장입니다. 95년 서울에서 정치부 기자를 마치고『대구일보』를 다시 오면서 대구라는 곳의 정신의 맥, 대구에 대한 제대로 된 어 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7. 떤 연구서적은 뭘까? 이런 막연한 생각들을 하면서 찾아봤지만 별다른 답은 얻지 못했죠. 지 역의 인물들을 계속 탐구하는 과정에 제일 처음 만난 분은 사실 죽순문학회 회장이었던 윤장근 선생님입니다. 그 향토사의 흐름을 공부하면서 그때 박영규 사장님과 인연이 됐는데 사장님이 어느 날 장기연재를 시작한 거예요. 대구가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가를…. 그 북장로회 등장부터 연재를 해나가는데, 그때 박작대기(박중양) 이야기, 대구의 유곽문제, 북성로, 향촌동, 대구역 주변의 요정이야기. 단순히 요정이 많았다 이 정도만 되면 제가 놀라지 않았는데 그때 달성관, 무슨 관하면서 열 몇 개를 언급하신 거예요. 그 기사를 다시『대구일보』에 와 가지고 각색을 해서 40회인가 연재를 했어요. 제가 청수원 자리에 대한 부분을 중심으로 대구에 당시 유명했 던 요정의 역사를 정리하고 싶다 하니까 언제 한 번 나하고 술 한 잔 하자시면서 요정이야기를 한 번 해야 되겠네 하셨는데, 그러고서 이야기가 끝났어요. 그리고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집에 세 번인가 초대를 받았어요. 돌아가시기 전 한 달쯤 됐을 거예요. 저한테 자료를 다 보여주겠 다고 하면서 가지고 계신 자료를 꺼내들고 요정과 관련되는 것, 일제 강점기 때 여러 연구 자료를 막 보여주셔서 굉장히 충격 받았습니다.“내가 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가 대구에 기독 교와 카톨릭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이 초기역사를 정리하는 건데, 지금 성직자들로부터 요청을 받고 자료 모으고 있다”고 하신 이야기가 제가 마지막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모님으로 부터 운명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구에 관련된 자료는 이 기자가 가지고 가는 게 좋겠다 해서 그때 사과박스로 한 두 세 박스 정도 됐고, 그 중에 4분의 3은 일반서적 그런 책 들이 있었고 나머지는『다이큐모노가타리(大邱物語)』원본이 있었어요. 그걸 계기로 제가 대 구연구에 폭발력을 얻었고 대구 음식의 역사, 향토음식, 전통음식 쪽으로 들어와서 지금은 대 구 음식 전문기자로 방송도 출연하고 특강도 다니고 합니다. 그 출발의 물꼬를 터준 분이 박영 규 사장님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웃음이 매력적이셨고 구두가 흐린 날이 없었습니 다. 오뉴월 따글따글한 염천처럼 구두가 광이 나고 멋쟁이셨어요. 맥주를 아주 아름답게 매력적 으로 마시셨던, 손이 아주 선비 손처럼 예뻤던…. 서상호 : 구두가 반짝반짝 하려면 사모님이 신경을 많이 쓰셔야 합니다. 이춘호 : 많이 썼지요. 영국 신사 같은 멋쟁이였어요. 임수현 : 내가 아는 박영규 선생은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화술도 대단히 좋았고 그 사람보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을 아직까지는 나는 못 느껴봤어요. 그 양반이 나한테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던 것 중에서 하나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 있어요. 우리 향토 야사집을 하나 만들자고 여러 차례 이야기하곤 했어요. 천둥소리 7
  • 8. 이춘호 : 박영규 사장님은 대구자료를 모으려고 헌책방을 서울부터 해서 부산까지 그렇게 많이 다녔는데 돈만 생기면 책방에 가서 책을 샀다고 하셨어요. 고서점을 다니면서 대구에 관련된 자료를 찾으려 했던 상당한 노력들이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국채보상운동 기록사를 적을 수 있었을 겁니다. 일제시대의 풍물상이 어떻게 됐나를 최초로 정확하게 사실에 근거해서 적은 시리즈물 이 박 사장님의 작품이죠. 책으로 묶어내도 족히 3,000쪽 정도 나올 정도로 엄청난 내용입니다. 제일 큰 게『대구일보』하고 거의 아마 20년 전에 적었던 낡은 어떤 스크랩북이 남아 있습니다. 대구 백년을 이야기한 것이지요. 그 정도로 방대하게 정리한 건 최초일거에요. 그러니깐 그것을 하기 위해 평생을 아마 자료를 모은 거예요. 서상호 : 박 선배가 평소 이야기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옮겨놓은 것은 혹시 없나요? 이춘호 : 네 그런 게 없어요. 막 흩어져 있어서 그걸 다 집대성 못하고 있어요. 국채보상운동 자료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만. 김영호 : 박영규 선생이『대구시보』라는 잡지에 오래 연재한 적이 있어요. 그분이 말한 연재한 야사 중에 국채보상운동과도 관련 있는 아주 재미있는 야사가 있어요. 대구부사로 부임해서 아주 청렴하게 근무하셨는데, 서울로 갈 때 대구 유지들이 무슨 솥을 부인에게 드렸다고 해요. 본인한테 알리면 안 받을 테니까 부인에게 줘서 서울로 가져가게 했어요. 서울에서 그걸 이 부사가 알고는 당장 내려 보내라고. 그래서 그 솥을 다시 대구로 내려 보냈대요. 그런데 대구에서는 그걸 가지고 종을 만들었다는 거죠. 국채보상운동 당시에 대구에서 모금 집합소가 카톨릭 신자 집이었는데, 그 집에 그 종을 매달아 놓고 종을 쳤다는 겁니다. 청렴한 종소리를 들으면서… 국채보상금을 모았다는 것이죠. 그 종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몇 사람 있어요. 그런데 글은 안 보입니다. 최근에 국채보상 모금 장부와 함께 나온 종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그 종과 비슷하다고 보이지만 이걸 공개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해요. 글이 없으면 내가 근거 없는 주장이 되니, 그 글을 찾으 려고 우리가 애를 많이 썼어요. 엄창옥 : 이러한 자료를 정리하는 작업이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로는 중요한 일입니다. 김영호 :『대구시보』를 정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종찬 : 대구시보는 대구시에서 기록물로 철해져있을 것으로 합니다. 정리하는 기회를 가져보도록 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9. 합시다. 박 상무님이 MBC 보도국 부장으로 계시다가 TV편성국 부국장으로 가서 다큐를 많이 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자료가 보관되어 있고, 대구상공회의소 회보에도 대구경제사로 연재하신 적이 있습니다. 김영호 : 대구에서 누구보다도 앞서나가던 향토사학 연구자로서 많은 야사와 글을 쓰고 했지만 특히 가장 공들인 부분은 국채보상운동 역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이 참 너털웃음을 잘 웃었어요. 그러면서도 항상 깊은 고민을 감추고 있었어요. 항상 너털웃음으로 웃고 빙글빙글 웃고 멋쟁 이처럼 해도 가볍지 않은 깊은 맛을 가지고 있는 인품의 소유자였다는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엄창옥 : 박영규 선생님께서 열정을 가지고 향토사 자료 속에서 건져낸 매우 중요한 지역사가 국채보상 운동이고, 그것이 결실을 맺어서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이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국채보상 운동을 처음으로 싹을 틔우고 여기까지 왔는데, 당시 고 박영규 전 이사님과 여러분들이 다 마음을 많이 모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김영호 : 고 박영규 이사님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전의 대구시에 속한 국채보상기념위원회를 같이 했고, 서상돈상(賞)을 대주교님께 이야기 해 가지고 운영도 같이 했고, 그 다음에 국채보상운 동기념사업회를 전국적인 사단법인으로 만드는 작업도 같이 했고, 그야말로 고생을 같이 했 죠.『대한매일신보』에 나오는“앞으로 국권이 회복되면 서상돈을 태양처럼 높이 우리 민족이 받들어야 한다”는 그 말을 만날 때마다 인용했어요. 그때 대구에서 관광일번지가 될 제일 높은 탑을 하나 만들자고 그런 이야기를 아마 4~50번 들었어요. 그러니깐 꿈이죠. 염원이죠. 만날 때마다 강조하던 말씀이 이 기념관을 짓는 과정의 어려움 속에 많이 남았어요. 그걸 항상 기억하면서 기념관을 지었습니다. 엄창옥 :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속에 그 정신이 어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신동학 : 오늘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장시간 귀한 시간 내주셔서 좋은 말씀 해주 셔서 이렇게 기록에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영규 선생님이 하늘 위에서 우리를 볼 때 역시 모두 다 잘하는구나 칭찬을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엄창옥 : 아쉽지만 이것으로 좌담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천둥소리 9
  • 10. 출생_1938년 2월 11일 출생지_대구 사망_2003년 7월 12일 학력_1957년~1964년 경북대 사대 사회과 졸업 경력 1964년~1969년 대구일보 정경부 기자 1971년~1972년 대구일보 정경부 차장 1972년~1975년 대구 MBC 취재부 부장 1987년~1990년 대구 MBC 보도국 국장 1990년~1991년 대구 MBC 기획심의실 실장 1991년~1997년 대구 MBC 상무이사 1997년~세원 대표이사 1998년 8월~2000년 대구일보 대표이사 사장 ~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상근부회장 상훈 경북문화상(언론부문) / 1977 저서/논문 대구상공회의소 70년사(공) / 1977 대구상공회의소 80년사 / 1987 국채보상운동사 / 대구상의 / 1997 고향 달구벌 대구의 향기 박영규(朴英圭) 1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11.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선거운동 전략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갈라치기’전략이고 다른 하나는‘끌 어안기’전략이다. 갈라치기 전략이란 상대방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큰 쟁점을 던지면서 전선을 뜨겁게 만든 다음 자신의 지지자들을 강력하게 동원하고 그 힘을 가지고 전선을 밀고 나가서 다수파를 만든다는 것이다. 끌어안기 전략이란 전선을 뜨겁게 만들지 않고 상대방도 받아들일 수 있 는 수용성 높은 쟁점을 던지면서 차근차근 지지자들을 설득하여 기반을 확장함으로써 다수파를 만 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지켜본 우리나라의 선거운동은 대개 갈라치기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자신의 지지 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상대 진영을 격렬하게 비판해야 하고 아와 피아의 구분을 명확히 해야 한 다. 그러다 보면 사실이 아닌 비방과 흑색선전도 나오게 되고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도 다반 사로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선거의 후유증도 컸다. 후보자들은 물론 지지자들 사이까지 감정 의 골이 깊어져 선거가 끝난 후에도 반목을 계속하는 일이 잦았다. 사회통합을 위해서 선거를 하는 데 선거를 하고 나면 오히려 사회통합이 더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선거운동이 이렇게 진영 사이의 격렬한 배타적 대결이 된 것은 이분법적 흑백대결을 기반으로 한 냉전구도와 남북분단이 낳은 나쁜 정치적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권위주의 시대에 오래 동안 계속된 민주-반민주 대결이 만들어낸 정치문화 때문이라고 하겠다. 북후정 Ⅱ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김 태 일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01 천둥소리 11
  • 12. 그 결과 최근 어느 대통령도 국민통합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의 당선에 승복하지 못하는 세력에 의해 사소한 이유로 탄핵을 당해서 나라가 두 쪽이 났고, 이명박 대통령 은 취임 초기부터 끝날 때까지 격렬한 반대세력의 비토에 시달렸다. 박근혜 대통령도 통합적 리더 십을 보이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통합적 정치문화와 통합적 리더십을 갈구한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절반의 국민으로부터도 지지와 성원을 받을 수 있는 리더십은 불 가능한 것인가? 근자의 현실을 보면서 정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려다. 걱정스러운 현실에서 나는 한 가지 희망을 보았다. 지난 6.4지방선거에서 보여준 권영 진과 김부겸의 리더십이다. 내가 매일신문에 두 사람의 리더십에 대해 쓴 칼럼을 여기 에 옮겨본다. 나는 두 사람의 선거운동 전략을 보면서, 1996년 미국 대통령 후보 클린턴 캠프의 전략가 딕 모 리스가 이번 대구시장 선거를 보았다면 무릎을 쳤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권영진 후보나 김부겸 후보는 약속이나 한 듯 딕 모리스의 전략을 선거운동의 기조로 삼았기 때문이다. 딕 모리스의 전략은 한마디로‘중간층 끌어안기(triangulation)’다. 트라이앵귤레이션이라는 말을 그저‘중간층 끌어안기’로 번역하는 것은 적당치 않을지 모른다. 이 전략은 자기 진영과 상 대 진영의‘중간’을 껴안는 것이 아니라 두 진영의 꼭지점 위에 새로운 꼭지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다. 그것이 삼각도형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이름을 그렇게 붙인 모양이다. 선거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두 후보가 제시한 슬로건에 대해 시민들이 다소 어리둥절했던 것도 그 전략 때문이다. 보수 성향의 후보인 권영진은‘대구혁신’이라는 진보의 표상 을 내걸었고, 진보 성향의 후보인 김부겸은‘대구대박’이라는 보수의 가치를 제시했다. 깃발이 뒤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일 까? 나는 그것을 기존‘진영정치의 한 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김부 겸과 권영진의 몸부림이었다고 본다. 김부겸은 대구의 진보진영 이 이대로 가면 고립된 섬이 될 것 이라는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외로 운 정치실험을 시작했고, 권영진은 대구의 보수 진영이 이대로 가서는 큰 02 1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13. 일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대구 정치를 시작했다. 트라이앵귤레이션의 배경이다. 김부겸과 권영진은 지역과 나라가 둘로 쪼개져 싸우는 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확신 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권영진은 선거운동 기간 내내 혁신, 변화, 소통이라는 진보 지향적 가치를 강조했고, 김부겸은 선거운동 기간 틈만 나면 책임, 능력, 신뢰라는 보수 지향적 가치를 외 쳤다. 트라이앵귤레이션 전략에 따라 권영진, 김부겸 캠프는 상대편 지지자들에게 익숙한‘수용적 이 슈’를 내걸며 지지를 확장해갔다. 권영진은 대구를 바꿀 다섯 개의 혁신과제를 내걸면서 젊은 층을 공략했고, 김부겸은 대통령과 협력하여 대구를 발전시키겠다는 안정감 있는 대안을 제시하며 나이 많은 층에 지지를 호소했다. 이 전략의 딜레마는 각각의 전통적 지지층으로부터 제기되는 비판이다. 권영진과 김부겸도 그랬 다.‘시민과 함께 대구를 바꾸겠다’고 줄기차게 주장한 권영진은 이 지역 보수 본진으로부터 협력 을 구하는데 애를 먹었다.‘박정희 대통령과 화해하겠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던 김부겸 역시 이 지 역 진보 본진으로부터 날카로운 추궁을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흔들리지 않았다. 김부겸과 권영진은 상생정치를 했다. 두 후보는 2004년 미국 대선에서 조지 부시 캠프의 전략가 칼로브가 썼던, 강력하고 민감한 이슈를 던지면서 뜨거운 전선을 만들고 지지자들을 강력하게 동 원해내는‘갈라치기’전략의 유혹을 끝까지 떨쳐냈다. 칼로브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지지 했던 김부겸은 가슴 아픈 패배에도 불구하고 박원순, 안희정과 함께 대권주자의 반열에 이름을 올 렸고, 당선자 권영진은 정당지지도에 턱걸이하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원희룡, 남경필과 함께 당당 한 개혁시장으로서 시선을 모으고 있다. 오른쪽의 권영진이 왼쪽으로, 왼쪽의 김부겸이 오른쪽으로 옮겨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동의의 기반’을 만들고자 했던 트라이앵귤레이션 전략은 기존 정당으로부터 지지가 부족한 권영진과 기존 정당의 사회적 기반이 약한 김부겸이 단순히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고안한 책술이라고 할 수도 있 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기 때문에 아름답다. 그것은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치철학과 성정의 표현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를 통해 김부겸은 합리적 진보의 지도자로서, 권영진은 성찰적 보수의 지도자로서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주었던 것 같다. 진영논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김부겸과 권영진은 앞으로 대구를 대한민국 새로운 정치의 중심으 로 만들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권영진과 김부겸이 곧 만나야한다고 생각한다. 김부겸이 축하 난을 보냈다고 하니 권영진이 화답할 차례다. 대구의 발전을 위해 두 사람이 손을 마주잡고 뛰는 통 큰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 두 진영의 꼭지점 위에 새로운 꼭지점을 만드는 진정한 트라이앵귤레 이션을 기대한다. 천둥소리 13
  • 14. 두 사람이 선거운동 전략에서 보인 리더십은 새로운 것이었다. 갈라치기를 통해 유 권자를 두 동강이 내고 자기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전략이 아니라 차곡차곡 자기 비 전을 제시하면서 유권자를 설득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리더십은 통합적이었 다. 이 두 사람의 리더십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리더십이라고 본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대 결, 독점, 갈등, 독선의 정치에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나눔과 배려, 상 생, 협력, 통합, 평화, 돌봄의 리더십을 희망하고 있다. 동원의 정치가 아니라 공감의 정치를 원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를 여성주의 리더십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20세기의 리더십이 동원과 선동, 대결의 리더십이며 그것은 남성중심의 리더십이라고 한다면 21세기의 리더십은 돌봄과 상생의 리더십이다. 경쟁보다는 협력이라는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되 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현실 정치가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문제만 해도 그렇다. 중요한 것은 공감이며 연민이다. 수사권, 기소권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러한 해법을 두고 서로를 이해시키고 납득시키는 자세가 문제다. 공감과 연 민은‘고통스럽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 자신을 놓아보는 상상력’이라고 했다. 그 러한 상상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힘든 교착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로 팽팽하게 대처하고 있고 실마리가 복잡하게 된 것은 해결의 대안 그 자체가 아니라 공감과 연민을 기초 로 한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야. 보수진보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의 정이며, 공감의 리더십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 탕으로 한 나눔, 배려, 돌봄, 협력, 상생, 평화의 가치를 가진 리더십이다. 지난 지방선거 과정 에서 우리 지역에서 나왔던 권영진, 김부겸이 그런 희망의 단초를 보였다. 자랑스러운 일이 아 닐 수 없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우리 지역에서 나왔다는 것 은 우리로서 행복한 일이다. DAEGU 나눔 배려 돌봄협력 상생 평화 03 Newreadership 1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15.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동네 도서관에서 우연히 책을 읽고 알게 된 일본의 유명한 NGO 단체인 Table for two의 홍보영상을 보면 나눔을 왜 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나눔은 타인이 불쌍하게 보이기 때문에 합니다. 보여지는 모습만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그 들의 생각이나 삶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물질적인 나눔을 주로 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눔은 불 쌍하니까 하는 것일까요? 영상을 보면 뚱뚱한 아저씨와 비쩍 마른 소년이 시소를 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소는 기울어져 있습니 다. 누구의 책임일까요? 아저씨가 먼저 말을 합니다. “너가 너무 말라서 기울어져 있는 거야.” 소년은 말합니다.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기울어져 있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누구 때문에 기울어져 있는 걸까요? 시소가 기울어져 있는 건 자본의 불 균형을 의미합니다. 지구의 적도를 기준으로 북반구와 남반구가 있는데 지구 자본의 80%를 북반구가 소 유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20%를 남반구가 나눠가지기 때문에 남반구 국가는 아무리 일을 해도 부유해질 수 없습니다. 이런 책임을 북반구는 남반구의 전쟁과 게으름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사회구조적 모순을 개 인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아저씨는 또 이야기합니다. “너는 자라서 커지지도 힘이 세지지도 않을 거야.” 전 성 실 나눔교육연구소 대표 나눔의 리더십 나눔과 책임 Ⅲ 천둥소리 15
  • 16. 소년도 말합니다. “아저씨는 오래 살지 못 할 거예요.” 자본의 불균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게 식량문제입니다. 북반구는 식량생산이 넘쳐서 영양의 불균형으로 비만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고 남반구는 식량이 부족해 매해 기아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 잡으려면 누가 노력을 해야 할까요? 소년은 아무리 뛰어도 바로잡지 못합니다. 아저씨는 한 방에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바로 북반구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만 불균형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전지구의 사회구조의 변화라면 더 좋겠지만 자본의 속성상 아직은 어렵기 때문에 개인의 힘으로 조금은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 입니다. 나눔(기부)를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부는 상대방이 불쌍해서 하는 것도 있지만 상대방과의 불평등으 로 얻은 이익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나눔은 세상을 바꾸는 힘입니다. 이 힘으로 북반구는 비만을 해결하고 남반구는 기아를 해결합니다. 서로 이익이 되는 나눔이야말로 지 속 가능한 순환의 나눔인 것입니다. 지구가 아닌 마을로 눈을 돌리면 어떨까요? 마을의 리더가 되려면 무엇을 잘 해야 할까요? 단적으로 성 장과 분배라는 키워드를 던진다면 무엇을 잘 해야 할까요? 물론 둘 다 잘하는 것이 최고의 리더겠지만 둘 중에 하나를 잘해야 한다면 저는 분배를 고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조금 덜 성장하는 것은 함께 이해하고 견딜 수 있지만 분배의 정의가 무너지는 것은 누군가만 잘 살게 되는 불평등이 생기며 조직이 와해되기 때 문입니다. 리더는 일부만을 위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신뢰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집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처음에는 데려다가 우리 집에서 재운 다음 나중에는 집을 만들어줘서 자 기 집에서 잘 수 있도록 해주죠. 집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함께 도와서 집을 만들 어 주죠.” “빅맨과 함께 돼지고기를 나누는 날엔 마을엔 잔칫날이 따로 없습니다. 풍족하진 않지만 모두가 함께 먹는 즐거움이 있죠. 많이 먹지 않아도 배부른 행복이 있는 곳. 상각부족 사람들은 이웃의 집 없고 가난 한 사람이 있는 것을 마을 전체의 수치로 여깁니다. 때문에 집이 없어 밖에서 떠돌고 밥을 굶고 가난한 자가 방치되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행복의 바탕에는 나눔으로서 존경을 받는 빅맨이 있기 때문입니다.” SBS 다큐 최후의 제국 2부 슬픈 제국의 추장 1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17. 그래서 리더는 나눔을 잘할 줄 알아야 합니다. 리더는 혼자 잘 살려고 되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함께 잘 살게 하려고 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리 더로서 신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도 상각부족과 같은 풍습들이 있었습니다. 동네의 가난한 이들에게 일 년에 한 번씩 곳 간을 열어 곡식을 나눠주기도 하고,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음식을 넉넉히 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마음껏 먹고 가도록 했으며, 끼니를 때우기 힘든 사람에겐 음식을 싸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눈에 띄게 뭔 가를 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잔치에 와서 먹고 싸갈 수 있도록 받는 사람을 배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공동체를 소중히 여겼던 것입니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마을의 생산구조인 농사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잘 살기 위한 자연스러운 행동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리더들에게 매우 아쉬운 부분입니다. 누군가를 이끈다는 것은 그들 위에 군림하거나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것입니다. 리더에게 있어 나눔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리더로서 나눔을 하는 이유는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함이 거나 내가 가진 게 많기 때문이 아니라 리더로서 구성원이 올바로 설 수 있게 만들기 위함이고 그들의 신 뢰를 얻기 위해 나누는 것입니다. 구성원 중 하나라도 올바로 서지 못하면 리더로서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 기 때문입니다. 리더에게 있어 나눔은 개인적인 행동이 아니라 사회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리더에게 있어서 나눔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천둥소리 17
  • 1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청년에게 길을 묻다 Ⅳ 저는 계명대학교의 호텔관광학과에 진학하여 다양한 전공수업을 들으면서, 관광산업 관련 기획업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 전공수업 중‘관광자원론’과‘여행사경영론’의 프로젝트였던‘관광상품개 발’과제를 하면서, 저를 포함한 조원들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도출시킨 후, 그 아이디어들을 융합하여 실제 상품으로 기획하는 것이 재미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진로와 관련하여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한 끝에, 한국관광공사와 대구·경북 지자체의 문화·관광부서와 같이 지역 관광 발전을 위해 관광 관련 기획업무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방학 동안 저는 한국관광공사 대구경북협력지사에서 현장실습을 하면서, 관광 관련 다양한 기 관과 조직들의 역할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들이 하는 일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보고 배울 수 있었습 니다. 학교에서 과제를 통해 얻었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실습 중 직접 관광코스를 짜고, 여러 팸 투어 여행코스를 준비하면서,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실제 관광산업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게 되었고, 이 일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졌습니다. 저는 대구컨벤션관광뷰로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번‘대구관광서포터즈’활동을 통해,‘관광’이라는 공통 분모를 지닌 사람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배움을 얻고 있습니다. 서포터즈 조원들과 함께 대구도시민박 전략 세미나에 참여하여 대구컨벤션관광뷰로에서 일하고 계시는 분들과 대학 교수님들 그리고 여러 관광 관련 강 지 은 계명대학교 호텔관광학과 3학년 1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19. 전문가 분들을 뵐 수가 있었습니다. 세미나 발표를 들으면서‘한옥형 게스트하우스’가 잠재력이 많은 숙박 업임을 배웠고 조원들과 다양한 의견을 나누며 유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최근 관광주간과 관련하여 실시 된 대구관광지 방문자들의 인식을 이해하기 위한 설문조사 경험을 통하여 잠재 관광객들의 여행 동기 및 만족도 이해를 위한 시장조사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현 관광지가 지닌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방 안을 도출하며, 관광객들의 관광욕구를 충족시키고 가치 있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시장조사가 반드 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서포터즈 활동을 통해 제가 모르고 있었던 것들을 배울 수 있 게 되어 기쁘고, 대구관광 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내 꿈을 향해 한 발짝 내딛게 하는 이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앞으로 약 한달 간, 낙동강·비슬산 권역의 스토리텔링을 통한 코스 기획 미션을 수행하는 동시에 계명대학교‘관광서포터즈 양성 과정’을 통해 체계적인 코스 개발 실무 교육을 이 수 시 성실하게 임하여 대학생의 시선에서 독특하고 신선한 신규 관광자원 발굴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실무자 연계 멘토-멘티 제도는 업무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구관광서포터즈’1기로서 제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천둥소리 19
  • 20. 첫째, 지난 현장실습 경험과 학교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이미 개발되어 있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관광자원을 활성화 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 그리고 새로운 트랜드에 맞춰 사람들이 원하는 다양한 체 험이 가능한 관광상품 개발을 위한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도록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자. 둘째, 함께 조를 이루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활동하며, 대구 시민들 및 잠재 관광객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하여 노력하는 서포터즈의 역할을 다 하는 사람이 되자. 셋째, 지지 않는 청춘인 실버세대들과 곧 실버세대로 진입하는 40~50대의 중년들을 위해 그들의 청춘을 되살릴 수 있는, 감성을 자극하는 스토리가 있는 신규 관광자원 발굴에 도움이 되자. 넷째, 한국관광공사 대구경북협력지사 페이스북 공식 페이지 관리를 했던 경험을 살려, 대구관광서포터즈 로서 대구관광지 홍보를 위해서 어떤 컨텐츠들이 필요한 지 고민하고, 내 개인 페이스북을 적극 활용하여 대구·경북 지역 관광홍보단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자. 저는 앞으로 주어질 서포터즈 미션 활동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될 제 모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서포터즈가 간절히 되고 싶었던 초심을 잃지 않고, 학교와 현장실습을 통해 배운 것들을 적극 활용하여 대구 관광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관광전문가로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21.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청년에게 길을 묻다 Ⅳ 저는 중학교 때부터 관광외식사업이나 호텔관광컨벤션, 이벤트 기획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고자 대구관광고등학교로 진학하였습니다. 이번에 선생님을 통해서 관광서포터즈 운영 및 프로젝트 수행으로 대구 명품관광코스 내 숨은 관광, 문화자원 발굴 등으로 사업의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대구컨벤션관광뷰로에서 제1기 대구관광서포터즈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대표로 선발되었을 때는 소원하는 하나를 이루었다는 작은 쾌감마저 들었습니다. 이제 대구관광서포터즈로 활동한 지 두 달 정도밖에 안되었지만, 대구관광을 알리는데 앞장서는 관광서 포터즈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고등학생이지만 대부분 대학생 선배들과 함께 미션을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본격적인 관광자원 발굴 미션을 수행 전, 제1기 대구관광서포터즈 발대식, 대구도시민박 전략 세미나, 관광주간 이용실태 설문조사 및 현장답사 행사 등에 참가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관광서포터즈의 역할과 임 무수행에 필요한 자질과 자세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Colorful DAEGU’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대구가 대구만의 개성 있는 다양한 색을 낼 수 있도록 이번 관광서포터즈를 통해 대구에도 큰 발전이 있고 학생들에게도 많은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며, 채 윤 정 대구관광고등학교 1학년 천둥소리 21
  • 22. 앞으로 대구 제1기 관광서포터즈의 일원으로 대구를 대표하는 민간 외교관이라는 자세로 다음과 같이 임하 겠습니다. 첫째는, 대구관광서포터즈의 주요 역할인 여러 공식행사 활동을 통해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살아가는 정신을 배우겠습니다. 둘째로는, 대구의 관광자원 홍보 및 온라인 종합정보안내를 통한 관광 활성화를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안내자 임무를 다하겠습니다. 셋째는, 대구의 다양한 관광지를 답사할 뿐 아니라, 청소년 및 젊은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먹거리, 볼거리 등 관련 정보를 수집·분석하여 블로그와 SNS 등을 통해서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향후 미션 수행 및 관광서포터즈 공식행사 활동을 통해 풍부한 실무경험을 쌓아 관련 분야에 취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자기발전에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2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23.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천둥문학 Ⅴ 몸뚱이 하나로 낮고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 세상을 하얗게 껴안을 수 있다면 삼동 혹한도 마다 않겠네 한 줄기 햇볕조차 들지 않는 언덕도 바람 불어 조용할 날 없는 얇고 마른 풀잎 위도 하물며 멀지 않아 녹고 말 청춘일지라도 •「사람의 문학」편집위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시집「들꽃을 엿듣다」외 다수 김 윤 현 Profile 천둥소리 23
  • 24. 차력사 김팔봉 씨를 만난 것은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였다. 강구 다리와 조금 떨어진 오일장 장터에서였다. 오일장은 빗자루, 대바구니, 철사, 뱀장어, 프라이팬 따위의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원근 각처에서 몰려드는 곳이다.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오일장을 어슬렁거리며 물건들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 있는 곳을 발견했는데, 거기서 만난 사람이 차력사 김팔봉 씨였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를 <김팔뚝>, 혹은 <팔뚝이>이라 불렀지만 나는 그가 우리들에게 끼친 무한한 감동을 기려서 본명 그대로 <김팔봉> 씨라고 부르겠다. 김팔봉 씨가 나타났을 즈음 나는 내 신체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을 느낄 때 였다. 나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또래들과 어울려서 수많은 신체적 실험에 몰두했다. 가령, 어제보다 돌을 얼마나 멀리 던질 수 있을까. 숨은 몇 분 몇 초 동안 참을 수가 있으며, 고추를 잡아당기면 몇 센티미터나 늘어날까. 그리고 우리들은 풍선을 사다가 한 번에 불어서 부풀어 오른 풍선의 크기를 보며 누가 허파가 큰지를 겨루었다. 그럴 때 차력사 김팔봉 씨가 우중충한 오일 장터 한 모퉁이에서 눈부시도록 흰 천막을 쳐놓고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종류의 신체적인 실험을 펼쳐보였던 것이었다. 처음 엄 창 석 2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천둥문학 Ⅴ
  • 25. 우리들은 약장수들이 하는 약은꾀라고 코웃음을 치는 실수를 범했지만 곧 그가 여느 약장 수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앞자리에 앉은 아이들을 내쫓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묘기를 아이들한테 보여주는 것을 즐거워하는 듯했다. 김팔봉 씨는 오일장이 서면 자주 왔는데 어른들도 그가 오기를 꽤나 기다리는 눈치였다. “어이, 팔뚝이 오늘 와 있더나? 또 무슨 묘기를 보여줄랑가?” 오촌 아저씨는 나를 보고 물었다. “우리도 지금 가보려구 해요.” 우리들은 구슬치기를 하다말고 오일장으로 뛰어갔다. 김팔봉 씨는 오일 전과 마찬가지로 눈부시게 흰 천막 아래서 심각한 표정으로 묘기를 펼치고 있었다. 그는 유리병을 깨뜨려 판자 위에 흩어놓고는 그 위를 맨발로 걸었다. 또한 차돌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알고 있는 우리들의 눈앞에서, 그는 주먹이 아니라 이마로 차돌을 두 동강 내버렸다. 하지만 우리를 가장 황홀경에 빠트린 묘기는 그의‘이빨’ 에서 나왔다. 천막을 걷어 올리자 뒤에 세워놓은 트럭이 나타났는데, 그는 트럭 밑에 다 긴 쇠사슬을 걸었다. 우리들은 저 엄청난 팔뚝으로 트럭을 끌어당기려나 보다 싶어 긴장했다. 그런데 그는 쇠사슬 한쪽 끝을 수건으로 감싸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이빨로 쇠사슬을 무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천천히 뒷걸음을 치자 늘어진 쇠사슬이 처렁처렁 소리를 내며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팽팽한 쇠사슬을 손으로 팅팅 때려보고는 괴성을 토했다. “우와, 트럭이 움직인다! ” 우리들은 비명을 질렀다. 노인들은 마치 자신의 이빨이 쇠사슬을 물은 채로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어 입술을 꼭 다무는 시늉이었다. 차력사 김팔봉은 우리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신체적인 실험이 얼마나 형편없는 수준인가를 알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김팔봉을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 었다. 우리는 그의 묘기를 보면서 어떤 위대한 육체적인 꿈을 떠올렸던 것 같 았다. 실제로 그랬다. 유리 조각 위로 걸어가는 김팔봉의 발 바닥 굳은살을 보면서 당시 올림픽 마라톤을 맨발로 뛰어 세계를 놀라게 했던‘맨발의 아베베’가 가소롭게 여겨졌다. 사자의 이빨이 아무리 힘이 센들 그 이빨로 트럭을 끌지는 못할 게 아 천둥소리 25
  • 26. 닌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우리가 무슨 일로 늦어 해가 설핏할 즈음에야 김팔봉을 찾아갔다. 그는 묘기를 마치고 짐을 꾸리고 있었다. 그는 반갑게 우리를 맞았지만 왠지 표정이 밝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더 이상 강구 오일장에 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모른 채, 빙 둘러서서 그가 이빨로 끌었던 어마어마하게 큰 트럭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감격에 떨었다. 그가 우리들에게 싱긋 웃음을 흘려주곤 차에 올랐다. 검은 연기를 뿜으며 차바퀴가 움직였다. 우리들은 트럭의 뒤를 쫓았다. 쿠당탕쿠당탕 하며 트럭은 흙길을 내달렸고 우리도 전속력으로 트럭을 따라갔다. 그는 금호 변전소 앞에서 차를 세웠다. 그제야 우리도 헉헉 대며 달리기를 멈추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우리들에게 사탕 하나씩을 나눠주고는 말없이 운전석에 올랐다. 그의 차가 먼지를 풍악처럼 일으키며 노을이 지는 강변도로로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사탕을 손에 들고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1961년 경북 영덕 생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슬픈 열대><황금색 발톱><어린 연금술사><비늘천장><빨간 염소들의 거리> 등 Profile 2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27.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서론 1895년 일본은 명성황후의 시해사건(乙未事變)에 대해 시종일관 정부의 관여를 부인해 왔을 뿐 아니라 이 사건이 낭인(浪人)들에 의해서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범행으로 발뺌했다. 일본의 최초이자 최대의 역사 왜곡이라 할 수 있는‘을미사변’의 진실을 밝혀, 우리 국민의 역사 인식을 새로이 함과 아울러 이를 일본인들의 진실어린 반성을 일깨우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코자한다. 明成皇后명성황후 시해 주범은 일본 정부 회원광장 Ⅵ 유 상 종 전 대구과학대학교 지도교수 현 재향군인회 원로자문위원 천둥소리 27
  • 28. 1. 민 황후의 출자 명성황후는 철종 2년(1851년) 9월 25일에 경기도 여주군 근동면 섬락리(현 여주읍 능현리 250-2번지)에서 민치록(閔致걤)과 이씨 부인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자영, 본관은 여흥 (轝輿), 아버지는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중전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의 5세손이다. 황후의 생가는 1976년에 중수,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으며 생가에서 가까운 동 쪽에는 유형문화재 제41호인 명성황후 탄강구리비(明成皇后 誕降舊里碑)가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글씨는 고종의 친필로 그 뒷면에‘광무 8년 존경하여 절하고 울면서 쓴다(光武 八年 敬拜泣書)’라 새겨져 있다. 광무 8년은 명성황후 사후 9년째인 1904년이다. 황후는 8세에 부모를 여의고 의붓 오라비 민승호(閔升鎬)와 더불어 친척집에서 자라다가 16세 대인 고종 3년(1866년) 3월 6일에 왕 비로 간택되어 3월 20일 운형궁에서 왕비책봉의 가례를 올렸다. 2. 백수건달 대원군과‘개똥이’고종 고종(高宗)의 아버지 흥선군은 국태공(國太公)으로 정권을 장악하기 전까지는 백수건달 노릇을 하며 60여 년 동안이나 정권을 잡고 국권을 좌우하던 안동 김씨(安東金氏)로부터‘궁도령’이니 ‘상가집 개’라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겉모습과 달리 속으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다. 당시 대왕대비 조씨를 은밀히 접근하며 영조(英組, 1724~1776)의 직계 혈통인 자기 가문이 왕위 계승의 전통성과 당위성을 설득했다. 1863년 12월 8일 철종(哲宗)이 재위 14년 만에 승하하자 조대비(趙大妃)는 옥새부터 챙긴 다음 곧바로 중신들을 불러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命複)으로 하여금 철종의 대통을 이어 보위에 오르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참으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조치였다. 연 날리기를 하며 놀던 대원군의 둘째인‘개똥이’가 갑자기 대궐로 불려가 임금 자리에 앉으니 그가 바로 26대 고종(高宗)이다. 3. 번개 작전으로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 대원군은 집권하자 평소 구상해온 국정쇄신책을 실행에 옮겼다. 가장 먼저 손댄 것은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청산이었으며, 두 번째는 서원(書院)의 철폐, 2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29. 세 번째는 과감한 세제 개혁, 그 다음으로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관 때 소실돼 방치돼온 경복궁을 재건했다. 또한 쇄국정책을 시행하며 천주교를 박해함으로써 병인양요(丙寅洋 擾)와 신미양요 등을 자초했을 뿐 아니라 먼저 서양의 문물을 받아 들인 일본이 조선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으며 청나라와 러시아 외에 도 서구 열강들도 기회를 노리게 되었던 것이다. 4. 시아버지 대원군을 밀어낸 민황후 명성황후는 고종 3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한 살 아래인 고종은 왕비를 어렵게 여겼는지 후 궁을 찾는 날이 잦았으므로 황후는 독수공방하는 밤이 많았다. 그러나 밤늦도록 책들을 읽으며 무 료함을 달랬다. 전하는 말로는 민황후는 비교적 귀가 컸고 얼굴도 약간 검은 편이었다고 한다. 또 한 고종이 황후를 홀대한 것은 아버지 대원군이 민씨의 활달한 성품을 경계하며 멀리하라고 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황원갑「한국사를 바꾼 여인들」2004) 고종 10년(1873) 그의 나이 22세 때 황후는 고종에게 보령도 20을 넘겼으니 친정(親政)을 건의 하는 한편 대원군의 입궐 전용문까지 폐쇄해 버렸다. 또한 최익현을 시켜 두 번씩이나 대원군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서를 올렸다. 대원군은 당시 왕비를 갈아치울 수 있었지만 자신의 시대는 끝났 다고 생각, 그해 운영궁을 떠나 온양에서 휴양하다 양주 별장으로 은퇴했다. 5. 안동 김씨 보다 더한 민씨 세도정치 대원군을 내쫓고 정권을 잡은 뒤 명성황후가 벌인 일은 첫째로 민씨 일족의 요직 등용과 세자 책봉 다음으로 후궁들의 숙청이니 고종은 허수아비요 황후는 여왕이나 다름없었다. 뿐만 아니라 국고를 물 쓰듯 탕진했다. 세자 책봉을 받기 위해 청나라 고관들에게 뇌물을 바쳤고 밤마다 궁중 에서 연회를 베풀어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탐관오리가 횡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죽어가는 것은 압제와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들이었다. 그것이 고종 19년(1882) 6월 5일에 벌어진 임오군란이 었다. 봉미(俸米)관계로 분노한 군인들은 들고 일어나 무기고를 부수고 민씨 일파의 집도 부수는 한편 일본공사관도 습격했다. 3천여 명으로 불어난 군인과 백성들은 대궐로 몰려갔다. 이 난중에 황 후는 인정 많은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용케 대궐을 빠져나가 충주를 거쳐 장호원으로 피신하여 숨었다. 천둥소리 29
  • 30. 6. 임오군란 이어 갑신정변 대원군이 난을 수습하기 위해 대궐로 들어가 중전 민씨가 난 중에 죽었으므로 국상을 발표하고 10년 만에 재기의 기회를 잡았지만 그 기간은 한 달 남짓 밖에 지나지 않았다. 황후는 몰래 고종에게 자신의 생존을 알린 뒤 청국에 파병을 청토록 했다. 결국 오장경(吳長慶)이 지휘하는 청국군에 의 해 7월 13일 대원군은 납치되고, 청국으로 끌려가서 3년간 연금 생활을 했다. 8월 1일 서울로 돌 아온 황후는 50일 만에 고종과 재회했으며 이때부터 무자비한 복수극이 뒤따르면서 한층 더 청국 에 의지하니, 젊은 개혁파들이 들고 일어나 바로 김옥균과 박영효 등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가 일 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계기로 황후는 더욱 국정에 앞장섰으며 특히 외교일선에 나서서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흐른 고종 31년(1894) 3월, 전라도 정읍에서 전봉준(全琫準)이 이끄는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그 여파는 마침내 그해 6월에 시작된 청일전쟁(淸日戰爭)은 일본의 일방적 인 승리로 돌아가 이때부터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며 조선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 냈다. 7. 시해 주도자 이노우에(井上) 민황후는 시해를 주모한 자는 미우라(三浦悟걹)라고 알려져 있지만 미우라를 조선공사로 내보내 게 된 이면에는, 일본 외교문서에도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무력으로‘민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서는 문관 출신으로는 이 일을 해낼 수 없으니 박력 있고 용기 있 는 무관 출신으로는 이 일을 해낼 수 없으니 박력 있고 용기 있는 무관출신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일본 수상인 이또오(伊藤博 文) 이노우에(井上馨)가 구수 회의 끝에 천황(天皇) 의 재가를 실행한 것이 다. (윤군본부「한국민조 사」1981) 특히 이노우 에는 내무대신으로부터 3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31. 1894년 10월 15일 조선 특명 전권 공사로 부임했 던 일본 제일의 조선통 이었기에 현직 대신으로부터 국장급인 공사직을 자진해서 맡고 나선 저의가 바로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부임 후 대신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암탉이 울면 집안 이 망한다.”느니“모든 잘못은 왕비 때문”이라며 고종과 황후를 모욕했다. 따라서 황후는 친로(親걠)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8. 조선 강점 장애자로 일제가 참살 고종 32년(1895) 마침내 운명의 해가 되었다. 7월에‘칼잡이’미우라 고로(三浦悟걹), (1846~1926)가 공사로 부임했다. 국왕에게 신임장을 제출한 뒤 뜻밖에도 참선승(굱禪僧)인양 일체 바깥출입을 않고 있었다. 그러나 황후 시해 두 달 전인 8월에 고종은“일본인들이 궁궐 내에서 못 된 짓을 하고 있다”며 미국인 타이(DYE)장군과 러시아 귀족인 사바찐(Sabatin)등 외국인 3명을 군내에 거주토록 했다. 훈계의 실행일은 1895년 8월 20일 새벽, 미우라는 검객, 낭인들, 그리고 일본인 장교가 훈련시 킨 훈련대 등 조·일 혼성부대와 대원군을 교여에 태우고 광화문을 거쳐 대궐로 쳐들어갔다. 대궐에서의 참상을 목격한 타이장군의 증언과 사바찐의 수기(手記, 조선일보 1995. 5. 10)를 통 해서 살펴본다.「폭도들은 새벽 5시 궁궐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총격으로 궁궐이 혼란에 빠 졌으며 내가 도주한 장소가 왕비의 거처 앞마당이었다.」(장경전, 일명 옥호루) 폭도들은 소리를 지르며 마당을 휘젓고 궁녀 10여 명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나와 왕비 있는 곳을 묻고 모른다면 그 자리에서 죽였다. 이때 한 구석에 숨어있던 몸집 작은 여인이 발견되어 왕비가 아니냐고 다그치자 아니라며 달아나다 낭인들이 그 뒤를 쫓아가 그녀를 넘어뜨리고 움직일 수 없 도록 가슴과 다리를 짓누른 후 칼로 찔러 살해했다. 몇 사람의 시녀가 끌려와서 여기 저기 나뒹굴 어져 있는 시체를 확인한 결과 시녀들의 통곡으로 왕비의 시체가 판명되자 시체를 홑이불로 싸서 숲속으로 가지고 가, 장작 위에 놓고 석유를 뿌려 불태웠다. 1895년 9월 26일의 참극이 바로 을 미(乙未)사변이다. 천둥소리 31
  • 32. 9. 명성황후의 죽음과 대한제국의 태동 국왕의 국장은 6개월을 넘기지 않는게 관례임에도 황후의 시해 2년 2개월이 지난 1897년 11월 22일에서야 치러진 것은, 국민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그 추진 세력을 결집시키려는 것이었다. 1897년 후반, 고종을 황제로 격상시키자는 운동이 급속화 되면서 미루어왔던 장례를 서거 2주기에 이르러서야 왕실에 대한 충성이 정점에 달했다. 마침내 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이 반포됐고 고종은 40일 후 장례를 치룬 것이다. 명성황후는 죽음으로써 殺身成仁했으며 이로써 명성황후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 일본 정부는 을미사변의 책임을 미우라에게 지워서 관련자 48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감금하는 한편 그들은 대원군이 협조를 요청한데도 원인이 있었다며 이노우에 주모를 숨기는데 총력을 기울 여왔으나 미우라 등은 1896년 1월 20일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전원 면소한 것은 속이 빤히 들여 다보이는 연극이었다.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렴치한 사건이다. 전시도 아닌 평화시에 다른 민족이 자신들의 군대의 비호 아래 왕궁에 무리를 지어 쳐들어와서 왕비를 시 해한 만행에 대해 시종일관 정부의 관여를 일본은 부인해 오고 있다. 최문형 교수도“강화도 조약 때부터 조선 문제에 대해 관여해 온 이노우에는 주한공사 임명과 함께 조선에 대한 전결권을 부여받은 일본 정부 당국자였다. 또한 사건 한 달 전에 17일간 미우라와 함께 서울에 머물면서 시해사건을 기획했다”고 밝혔듯이(「명상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2002)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 정 부에 의한 국가적 범죄임을 실증하는데 초점 을 맞추어야하며 명성황후 시해 11주년을 맞이하여 한·일 양국은 지난날의 불행 했던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 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3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33.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수많은 관계로부터 자 유롭다 하지만, 실상은 얽매임 안에 서로를 견제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하다 하지 않을 것 같다. 인간은 생명을 부여 받은 후 맑고 깨끗함 안에서 살아갈 혜택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인간 스스로가 이를 부정해 버리거나 일상 속에서 소각해 버리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환경보전적 인간존중 의미로 이렇게 이야기를 해 본다. 이 강 순 (사)환경보전실천연합중앙회 회장 회원광장 Ⅵ 천둥소리 33
  • 34. 대학의 환경학과는 학술적으로 기술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쳐 오고 있지만, 어렵고 때로는 따분 해 졸업 후 전공을 살리는 것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이 현실이다 보니 교과과정 속에 남겨져 있어야 되고, 일상적 활동을 동반한 환경만이 우리 일반인들 주위를 맴돌고 있다고 볼 때 환경이 라는 두 글자의 울타리 속에 갇혀있는 속칭 환경활동가라 하는 필자는 솔직히 가식일지라도 눈물을 흘려야 될 것 같은 심정이다. 학술적 환경은 사회 전반에 녹아내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국가 전반의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고 하지만, 각 대학의 환경학과 전공 분야도 자리 매김을 하였다고 볼 수 있고 사실이 그 러한 것이 학생들의 입학율을 보면 더욱 명백해 진다. 하지만 이를 전공한 학생은 현재 무엇에 절 심함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까? 학문적 배출로 나온 전공 학생이나 가르친 교수가 사회 전반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수질, 토양, 대기오염 등에 얼마나 고민하고 걱정하며 현장을 스스로 뛰어나와 활동으로 자리매김한 환 경단체들에게 손을 내밀어 준 적이 얼마나 될까? 정화를 책임지라는 것은 아닐지라도 공동체적 책임을 느끼며 사회의 길잡이는 되어 주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해 본다.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현실 속에 있지 않나 싶다. 3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35. 환경활동가 집단들의 반성을 저부터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라 생각하면서 지난 2월 중순경 환경 부 주관 한국환경단체협의회 대표자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모든 단체 대표자분들의 열정과 풍부하 신 환경지식을 바탕으로 활동하신다는 정서는 충분히 감지했지만, 그 당시의 느낌은 좋은 편이 못 되었다는 것이다. 어딘가 모르게 자신의 아집에 포위되어 있는 활동가들로 보였고, 몇 분의 활동가들은 솔직히 무 엇을 추구하기에 이토록 자기 아집만 내뱉는 것일까? 하는 의문 속에 그 가운데 내 자신을 반성해 보면서 슬프고 매우 답답한 마음 안에 눈물이 고였다는 것을 보게 되어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기억을 해보면서 이 글을 보실 협의회 대표 분들께서 저에게 어떤 질타를 하실지 모르겠으 나 필자는 그때의 심정을 표현한 것임을 이해해 주시리라 본다. 이 자리를 빌어 질타를 감수하면서 몇 가지 더 짚어 볼까 한다. 대한민국은 각종 단체공화국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다. 환경단체만 보더라도 대략 얼마 나 될까? 솔직히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환경부 등록 허가단체를 대략 200여 개 이상이라 보고 광역 시·도에 등록된 단체는 환경부 숫자보다 몇 배는 더 된다면 지방자치단체에 등록된 풀뿌리 단체는 얼마나 되며 등록하지 않고 열심히 활동하는 단체까지 열거한다면 수 천 개는 족히 될 것 으로 짐작해 본다. 솔직히 단체들이 너무 난립해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오늘날 환경단체들의 실체는 어떨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 다음과 같은 현실을 이해를 구하며 적어보았다. - 단체는 어떤 전문성을 가졌을까? 지역민과 국민을 위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태생되었을까? - 단체는 진실로 회원은 몇 명이나 있을까? 회원들은 어떤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을까? - 단체는 때로는 보여주기식 행사와 지방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에 간섭을 일삼고 있지는 않는지, 단체의 집단적 과시적 힘으로 어떤 무리한 요구는 하고 있지 않는지? 이런 거북한 내용을 적시하여 무슨 말 하고 있냐는 핀잔들을 듣지는 않을까 하는 반문을 해 보 면서 제 스스로의 활동상을 반성하고 함께 고쳐 나가는 모습을 다 잡아 보는 의미로 이해해주실 것이라 본다. 오늘날 환경문제는 매우 복잡하면서 세분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학문적 분야는 몇 개 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현장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환경활동가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 천둥소리 35
  • 36. 이 현실이다. 환경선진국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들도 자국의 이익과 국민의 환경적 복지에 촉각을 세우며 많은 정책과 실천을 하고 있고 선진국의 좋은 자료들로 공부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의 실정은 어떤 점수를 받을까 깊은 반성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은 선진국 대열에 다가선 만큼 정부와 지방정부,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에 게만 맡길 수 있는 시대는 아닌 것 같다. 우리 국민들도 스스로 환경의식 변화가 절실히 요구되는 만큼 형식적인 변모보다 실천적 변화를 스스로 할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환경을 전공으로 사회에 보내기 위한 학문과 연구도 중요하지만 현실 속에 녹아드는 방법도 함께 고민하면서 사회에 배출시켰으면 한다. 방법으로는 학교 내 수많은 동아리가 있지만, 정녕 환경동아리는 찾아 볼 수 없다는데 우리는 문제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학교 안에서부터 환경 실천을 배우는 자세가 바르게 형성될 때 사회 속에 올바른 환경인으로 자리 매김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학교와 지역의 환경단체와의 유기 적 연대를 통한 진정한 환경활동가 또는 환경인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보는 것이다. 스스로 풀뿌리 환경단체를 구성한 단체들도 저를 포함하여 자성 속에“참환경운동”을 위한 지역 민과 국민들께 환경의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면서 고통분담적 밀착 활동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화활동을 통한 오염배출 현장을 시정과 고발운동도 더없이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각 단체의 특성에 맞게 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바라며 저희 단체처럼 꾸준히 교육 (시민환경대학)을 통한 환경기초지식과 함께 정화활동을 병행해 줄 때 스스로의 체험이 새롭게 발휘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대안을 제시해 보면서 눈물로 환경을 바르게 공부하자고 더 이상 호 소하는 일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3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37.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옛 우리 조상의 생활상은 대부분 땅속에 묻힌 유적의 발굴을 통하여 엿볼 수 있는데 이 유적은 생활유 적과 무덤(墓)유적으로 크게 분류되고 있다. 먼저 대구 지역에서는 금호강과 만나는 신천, 동화천, 불로 천, 팔거천, 달서천과 낙동강과 만나는 진천천, 천내천 등 많은 세천변에 퇴적층을 이룬 비옥한 토양에 농사를 짓고 살아온 생활유적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물과 가까이한 조상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취락형태로서 도시가 형성되어 하천과 강이 오염되고 샘물이 고갈되면서, 병원성 미생물이 오염된 물을 통해 먹는 물로 전달되는 수인성 전염병인 장티푸스, 콜레라로 설사, 복통, 구토 등이 급속히 확산되어 목숨을 잃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에 1906년 11월에 처음 대구상수도 설치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였으며, 1911년 대구 인구는 28,240 명에 불과하였으나 이때 구체적인 설치계획을 수립하여 1914년 7월 1일에 가창계통의 상수도시설과 대봉 배수지 공사가 착공되자 계속적인 인구증가로 30,000명을 넘어서게 되었고 시가지 또한 본격적으로 형 성되게 되어 외형상으로는 큰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도 시민들의 급수문제는 여전히 하 종 성 대구광역시 행정동우회 사무처장 근대 대구물산업 역사를 되돌아보며 2015 대구·경북 세계물포럼을 계기로 물산업 허브도시로의 도약 회원광장 Ⅵ 천둥소리 37
  • 38. 우물물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18년 3월 31일 본 공사가 준공되 어, 급수구역은 대구 시가지 일원으로 하였으며, 급수인 구는 30,000명을 대상으로 하루 급수량을 2,800㎥으로 하였다. 그 후 인구가 급격히 증가 함에 따라 수요도 크게 증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수원지에서는 가끔 원수 부 족현상이 나타나는 등으로 1921년 말경부터는 수차례 단수소동이 빚어졌다. 그리 하여 급수인구33,000명에 1 일 약4,600㎥를 생산할 수 있는 급수시설 확장공사를 1924년 4월 23일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인 1925년 4월에 준공하였고, 그해 12 월 10일에 대봉 제2호 배수지를 완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확장공사에도 불구하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또 수원이 부족하게 되자 우선 응급조치로 당시 물맛이 좋기로 평판이 자자했던 대봉동 수 도산밑“배나무 샘”부근에 보조수원지 신설공 사를 시행하여 1933년 12월에 완공하여 이 보조 수원지에서 하루 평균 300㎥를 생산하여 보충 하였다. 이러한 귀중한 물은 생명의 원천으로서 우주 공간의 수천억 개 별중에 유일하게 물이 있는 곳 은 지구밖에 없다. 그리고 또 세계사를 통해 볼 때도 지역 간 국가 간에도 물로 인한 다툼과 분 쟁이 이어져 왔음을 볼 수 있다. 우리 인체(人體) 도 70%가 수분이며 그중 2%만 부족해도 통증과 대봉배수지(현. 대구상수도사업본부 / 자료 :’73대구시사(제2권)) 1918년에 설치된 대봉배수지 전경으로 앞쪽으로 관리사무실이 보 인다. 배수지가 소재하여 이곳을 수도산이라 부르고 있다. 지금은 이러한 역사성을 찾아 이곳에 상수도사업본부 건물을 세웠다. 대봉배수지 축조공사 장면(현. 상수도사업본부에 위치함 / 자료 : 정성길) 1911년 인구 3만명에 급수인구 6천명을 기준으로 처음 상수도 설치계획을 수립하여 1914년 7월 1일에 착공하여 1918년 3월 31일에 준공하였다. 가창정수장 완속여과지 축 조공사와 대봉배수지 축조공사를 완료하여 급수방식은 가창면 오동의 취수정에서 자연유 하 방식으로 원수를 공급받아 가창정수장에서 정수하여 대봉배수지로 송수하여 1일 2,800㎥를 생산하였다. 그 후 수요량이 증가하여 1924년 4월 23일 ~ 1925년 4월로 확장공사를 마쳐 1일 4,600㎥를 생산하였다. 3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39. 갈증을 호소하게 되고, 5%가 모자라면 환각증세가 나타나며, 12%가 빠져나가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지금도 70억명의 세계 인구 중에 매년 5억의 인구가 물부족으로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다. 이러한 물에 대한 대비가 없다면 2025년엔 30억 인구가 죽음을 맞게 되며, 2050년에는 세계 인구의 2/3가 고통을 직 면하게 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유엔보고에 의하면 전세계 국가별로 물사정에 대한 구분으로 ⑴ 물기근 국가군으로 1인당 사용가능한 수자원량이 매년 1,000㎥ 미만으로 만성적인 물부족 국가로 서 국민보건을 저해하는 수준의 쿠웨이트, 바레인, 싱카포르, 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 등 서남아시아 및 북아프리카 지역이 되며 ⑵ 물부족(스트레스) 국가군으로 1인당 매년 1,700㎥ 미만으로써 주기적인 물압박을 경험하는 국가로 서 인도, 파키스탄, 폴란드, 남아프리카, 덴마크, 한국 등이며 ⑶ 물취약 국가군으로 1인당 매년 2,500㎥ 미만으로써 간헐적으로 물이 부족한 국가로서 이라크, 이 란, 중국, 수단, 영국, 독일이 해당되며 ⑷ 물안정 국가군으로 1인당 매년 2,500㎥ 이상으로써 장래 물부족이 없는 국가로 노르웨이, 캐나다, 미국, 브라질,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나누고 있다. 여기서 우리나라는 연평균 강수량 1,277㎜로써 세계평균 807㎜의 1.6배이며 수자원 총량이 1,297억 ㎥/년 이지만, 연강수의 2/3가 여름철에 집중되는 등 계절별, 지역별 편중이 매우 심하며, 높은 인구밀도 로 인해 1인당 연강수 총량은 2,629㎥로 세계 평균의 약1/6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사용가능한 수자원량을 생각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하겠다. 앞서 소개한 대구시 상수도의 역사는 여명기를 보내고 혼란기와 성장기를 거쳐 낙동강 수원확장공사와 함께 안정기를 맞게 되었다. 근대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대구의 물산업은 1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1918년 달성군 가창면 오동에 설치한 최초의 취수장의 취수탑 전경 자료, 상수도90년사 1918년 당시 가창정수장 전경(원형의 여과지와 침전지가 보인다) 현. 수성구 파동소재. 자료, 상수도90년사 청도를 지나 부산으로 이어지는 길 ↓ 천둥소리 39
  • 40. 지닌 곳으로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 하여 1918년 하루 2,800㎥의 수돗 물을 생산·공급했던 것이 현재는 하루 1,720,000㎥를 생산할 수 있 는 시설용량을 갖추게 되어 급수보 급률이 99.6%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양적인 증가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고도정수처리공정을 도 입하여 안전하고 질 좋은 수돗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급수 구역 곳곳에 가압설비와 배수지를 설치함으로써 고지대 급수지역에 관계없이 안정적이고 원활한 급수가 가능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대구시 의 상수도사업은 생산, 공급시설의 확충, 유수율 향상과 배수관망 구역화, 수돗물 수질의 안정성 확보, 수 남산동 주교관 경내 묘지 건너 현. 1918상수도본부가 위치하고 있는 수도산 (대봉배수지)이 보인다. (자료, 교구사 화보) 현. 가창정수장 1918년에 준공된 정수장이 지금까지 잘 보존 관리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 보호됨. 원형여과지엔 용두천(괟頭泉)이라 새긴 글씨가 선명 하다. 당시 가창에서 상동 중동을 거쳐 흘러내리는 하천을 용두방천이라 불렀다. 4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대봉배수지
  • 41. 돗물의 신뢰재고를 위한 행정혁신을 통한 시민만족도 향상, 적정시설용량 유지 등으로 가강 맛 좋은 물, 믿 고 마실 수 있는 물의 공급을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해 나갈 것이다. 이런 역사성에 발맞추어, 2015년 4월 대구에서 개최되는 제7차 세계물포럼 개최도시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지구촌의 최대 과제인 물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선도적 역할을 다하는 한편, 2,600억원의 경제적 편익과 2,500명의 고용창출을 기대하면서, 이를 대구의 새로운 성장 동력인 주력산업으로 생활용수의 재활용, 지하수개발, 계절적 편중된 호우에 대한 물비축방안, 빙하와 바닷물의 이용 등 다방면에 걸쳐 철저한 연구와 대책을 강구해 나감으로써 물산업의 허브도시로의 도약을 기필코 이룩해 나가야 할 것이다. 현. 대봉배수지 전경 천둥소리 41
  • 4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소식 Ⅶ (사)한국여성유권자 대구연맹 주최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패트롤맘 대구광역시부, (사)대구광역시 여성단체협의회의가 후원하는‘6.4지방선거 공명선거 및 매니페스토 캠페인’이 5월 16일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에서 열렸다. 이 캠페인은 대구시민들로 하여금 선거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이날 100여 명의 회원과 시민이 모여 바람직한 선거문화 정착을 위한 캠페인에 참여하였다. 6월 29일에는 (사)일하는 여성연합회가 개최한‘제7회 대구여성문화공연 한마당 경연대회’에 후원하여 건전한 여성문화 육성, 지역여성의 문화적 잠재력 향상, 여성문화를 선도할 여성 문화예술 인재의 발굴에 함께하였다. 대상(대구시장상)은 청운신협 두손모아 풍물단, 최우수상(대구예총상)은 한국춤교육원 고전 무용팀, 한국규젤벨리댄스컴퍼니 규젤벨리팀이 차지하였다. 지난 4월 25일 메세지팩토리(대표 노경민)와 원활한 체험프로그램의 운영, 시민들의 역사의식 고양을 위한 업 무협약식을 가졌다. 양 기관은「대구 독립운동 발자취를 따라 떠나는 시간여행자」체험프로그램의 원활한 진행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였다. 메세지팩토리는 가치를 지닌 메세지를 공유하려는 사람 들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소통할 수 있는 행사와 프로그램들을 기획하여 소통의 장을 생산하는 소셜기획사 로 감동콘서트, 청년봉GO, 100일 후 우체통 등을 기획하 고 운영하고 있다. 4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43.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6월 8일, 8월 10일 대구지방보훈청과 도심RPG의 후원을 받아 메세지 팩토리와 공동으로 청소년 나라사랑 체험프로그램인‘대구 독립운동 발자취를 따라 떠나는 시간여행자’ 를 운영했다. 효성여자고등학교 학생 86개팀(264명), 원화여자고등학교 학생 96개팀(288명)이 참여하여 지역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역사적 정체성과 지역사회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시 간이 되었다. 이 행사는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근대역사관, 광문사터, 이상화·서상돈 고택, 진골목, 북후정, 3·1운 동길 등 지역 항일운동과 관련된 장소를 방문해 미션을 수행하고 최종장소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내용으로 대학생 기획단 30여 명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다양한 미션을 통하여 재미와 함께 역사적 지식을 얻을 수 있게 구성된 프로그램이다. 8월 20일 오전11시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2014년 (사)국채보상운동기념 사업회 임시이사회를 열어 기 추진 상황과 향 후 추진계획을 보고하고 안건을 결의하였다. 이·감사 및 신입이사 에게 위촉장을 전달하는 시간도 가졌다. 천둥소리 43
  • 44. 4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사)대경늘푸른자원봉사단, (사)대구시각장애인연합회중구지회, 게이트볼협회, 국회의원 조원진, 대구광역시 여성청소년가족과, 대구광역시 보건정책과,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대구사회연 구소, 대구 생명의 숲, 대구은퇴자협동조합, 대전 동산초등학교, 대전한남대학교 역사탐험대, 동촌 중학교, 사회적기업활성화 대구네트워크, 삼토회, 연합연구회, 영양군읍 서부리, 인권운동연대, 중 구기동대 예비군, 중구시니어클럽, 중구장애인주간보호센터, 청년연합 36.5, 한남교육사랑, 한빛지 역아동센터 (사)어린이도서연구회경북지부, 50사단 501여단, 경동초등학교, 경명여자중학교, 경원고등학교, 경일여자중학교, 공무원교육원, 관음초등학교, 관천중학교,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달서 초등학교, 달서초등학교 4학년, 달성고등학교, 달성군학부모 문화유산해설사, 달성중학교, 대구경 북언론클럽 대경뿌리학교, 대구공업고등학교, 대구광역시 보건정책과, 대구광역시 여성청소년가족 과, 대구광역시 온라인셀링협동조합, 대구문화관광해설사회, 대구생명의 숲, 대구선명학교, 대구 시설관리공단, 대구여성가족재단, 대구외국어대학교, 대구은퇴자협동조합, 대진중학교, 동덕초등 학교, 동촌중학교, 만촌초등학교, 매곡초등학교, 매천고등학교, 매호중학교, 메세지팩토리, 북중학 교, 불로중학교, 삼덕초등학교, 삼덕초등학교 4-1, 삼덕초등학교 4-2, 삼성전자, 상원중학교, 성 당중학교, 성서고등학교, 수목원, 신기중학교 1학년, 어린이도서관 햇빛따라, 영남공업고등학교, 오성중학교 3학년, 유천포스코반올림문고, 자원봉사능력개발원, 죽전초등학교, 중앙도서관, 중앙 중학교, 질병관리본부, 청림초등학교, 평리초등학교, 한국청소년지원협의회, KDB산업은행
  • 45. 천둥소리 45 50사단 501여단, 가창초등학 교, 경덕여자고등학교, 구미고등 학교,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 사무소, 남산고등학교, 논공교 회, 달성고등학교, 담사신구, 대경뿌리학교, 대경학회, 대구공 업고등학교, 대구아이쿱소비자생 활협동조합, 대구통합건강증진지 원사업단, 대구학교도서관사서협 의회, 대구학교도서관사서협의 회, 대림중학교, 동덕초등학교, 동평중학교, 메세지팩토리, 범일 중학교, 본리초등학교, 성곡중학 교, 성당중학교, 성북초등학교, 성서중학교, 수정유치원, 안심중 학교, 영신중학교, 용산중학교, 용전초등학교, 울산 신일중학교, 월배중학교, 율하초등학교, 인권 운동연대, 인성유치원, 일성중학 교, 죽전중학교, 중리중학교, 하남초등학교 ※ 단체 관람 문의 : 국채보상운동기념관 053)745-6753 ㈜햇빛나들이, 강북중학교, 강제연행을생각하는 대구 광주실행위원회, 경북대학교, 경북대학교 환경공학과· 농업토목공학과, 경운초등학교, 경진초등학교, 경혜여 자중학교, 교동중학교, 그룹신도시건축사사무소, 김충 선연구회, 남도초등학교, 남산고등학교, 달서공업고등 학교, 대곡중학교, 대구경북소비자연맹, 대구경북언론 클럽 대경뿌리학교,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대구경북진 보연대, 대구경북학회, 대구공업고등학교, 대구광역시 건축주택과, 대구광역시 보건정책과, 대구광역시 안전 총괄과, 대구광역시 자치행정과, 대구광역시 정책기획 관실, 대구광역시문화관광해설사, 대구사람장애인자립 생활센터, 대구여성의전화, 대구여자고등학교, 대구중 학교, 대구초등학교 5학년, 대전세빛선교학교, 대평중학 교, 도원중학교, 동도중학교, 동변초등학교, 동부중학 교, 동부초등학교, 동화마을 어린이집, 메세지팩토리, 문성초등학교, 반야월초등학교, 복명초등학교, 복현초 등학교, 북부초등학교, 삼락회, 상인초등학교, 새벗도서 관, 성명여자중학교, 시각장애인협회, 시지중학교, 신명 여자중학교, 아이누리유치원, 영남공업고등학교, 영남 중학교, 운암고등학교, 월곡초등학교, 유천초등학교, 인 권운동연대, 입석중학교, 제일여자상업고등학교, 죽곡 초등학교, 중리초등학교, 통일시민대학연합회, 학남중 학교, Indonesia, LG디스플레이 (사)대구사진비엔날레조직위원회, (사)대한어머니회대구연합회, (사)전국주부교실대구시지부, 50 사단 501여단, 강동중학교, 경북대예방의학교실,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 관음어린이집, 구암중학교,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노변중학교, 달서숲해설단, 대건중학교, 대구 중구 시니어클럽, 대구경북소비자연맹, 대구경북진보연대, 대구경북학회, 대구공업고등학교, 대구광역 시 경제정책과, 대구대학교 부설 유치원, 대구시민센터, 대구시청 도시재생과, 대구시청 보건정책 과, 대구시청 자치행정과, 대구영남공업고등학교, 대구YMCA, 대중금속공업고등학교, 메시지팩토 리, 성광중학교, 시설관리공단 도시공원, 신기중학교, 신당중학교, 월암중학교, 인권운동연대, 통합 건강증진사업단, 팔달중학교, 프라임 어린이집, 학남고등학교, YCK국토대장정
  • 46. 4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을 한국근대사에 자리매김을 하신 故 박영규 이사님의 추모 좌담회를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소박하게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박영규 이사님의 추모를 위해 당시 근거리에서 함께 하셨던 여러분이 좌담회에 참석해주셔서 더 큰 보람 있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이제 남은 숙제는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본 기념사업화를 짊어지고 가야한 다는 생각을 하게 된 자리였습니다. 편집위원장 엄창옥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는 신채호선생님의 말씀처럼 천둥소리가 현재와 미래를 위한 길잡이가 되길 바래봅니다. 그래서 나눔과 배려 그리고 기부 활동 등을 통해 사회 양극화를 줄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위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기를...... 편집위원 우웅택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 아름다운 글을 통해 아름다운 나눔이 온 누리에 아름답게 퍼지는 것이 인간의 아름다운 책임을 알고 생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나눔과 책임의 꽃임을 자각하고 그 속에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임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편집위원 이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