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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목차
“해방촌은 이웃이 좋아서 달동네야”
- 신흥시장 국수집 일성상회 박일성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살고 있는 인생에 대한 만족이죠.”
- 신흥시장 수선집 임광해
“이 일을 가르쳐주고 싶은데 배우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안타까워요”
- 거성미싱 황성우
“사람들이랑 얘기하는 재미에 그나마 매일 시장에 나와 있는거야”
- 신흥시장 제수가게 이춘경
짧은 인터뷰들
- 이정옥, 주혜인, 박희남, 주태원
해방촌 신흥시장 안내도
후기

-1-
일성상회 박일성

“해방촌은 이웃이 좋아서 달동네야”
- 신흥시장 국수집 일성상회 박일성

<신흥시장에서 일성상회라는 국수 가게를 하고 있는 박일성(72)님.>

해방촌은 타지인들의 땅이다. 사상과 종교 문제로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전
쟁 후 삶의 터전을 잃고 무조건 서울로, 서울로 온 사람들, 돈과 일자리를 구하
기 위해 모여든 지방민들이 해방촌의 주민이 되었다. 객지에 나오면 외롭고 비
빌 언덕이 필요한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인가보다. 특히나 해방촌에서는,
무수한 사조직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지금도 서로를 연결하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1960년대부터 해방촌에 살았던 신흥시장의 박일성님에게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박일성님은 신흥시장에서 국수를 직접 만들어 파는 일을 50년
가까이 해오고 있었다. “작은 아버지가 여기서 국수장사했어. 장사하다가 힘들
다고 올라오라고 그러더라고. 먹고 살기 위해 올라왔지. 그때는 어려운 때니까
-2-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없으면 다 국수 먹고 그랬다고. 밥먹으려면 쌀이 비싸니까. 그때는 장사가 잘
됐지. 먹는 장사는 잘 됐어.”
“이 동네가 모임이 많아 단체모임. 여기도 향
우회가 있어. 경상 향우회, 전라도 향우회, 충
청향우회, 강원도 향우회 이렇게 있지.” 이야
기를 들어보니 향우회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
다.
“789라는게 있어. 47년,48년,49년 출생자 모
임. 한 2,30명은 돼. 그 세대가 돈 잘 벌었
거든. 그리고 남산 친목회, 먹는 친목회,
달동네. 명칭이 여러 가지 많아 이동네에.
유관단체도 많아. 새마을. 부녀회. 바르게
살기. 체육회, 자율방범 같은 거. 난 새마

<박일성님이 직접 만든 국수>

을하고 자율방범하고 체육회하고 청소년육성회 4개만 하지만 그거 보다 더
하는 사람도 있어. 동회도 10개 가까이 되고, 모임도 대여섯 개 되게 나가
는.”
각 향우회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축구 대회도 한다고 한다. “향우회 조기축구 5
개 단체가 운동장 빌려갖고 일년에 한번씩 시합하잖아. 그런게 있어. 강원,전라
도, 경상도, 충청도, 이북 이렇게 5팀이 매월 5월말에 정기축구친선대회를 해.”
“단체가 엄청 많아. 여기만큼 잘 되는 데가 없어. 그러니까 (소식들을) 다 알
지. 잔치 한 번 하면, 누가 돌아가셨다 하면 그 길로 사람이 엄청 많이 모여.
남들 가면 품앗이니까 나도 가고. 딴 데는 사람이 없어 걱정인데 여긴 한번
가면 3,400명 이상은 보통 모인다니까.”
박일성님의 경우 유관단체들 외에도 달동네라는 모임을 하고 있었다. “달동네
-3-
일성상회 박일성

는 그냥 동네 친목모임이야. 그냥 만
나서 밥 먹고 술 먹고 하는거지.” 하
지만 그냥 동네친목모임 치고는 무려
1988년부터 지금까지 쓴 장부가 있
다.
“해방촌은 이웃이 좋아서 달동네야.
식당에 앉아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
뒷통수만 봐도 누구인지 다 알 수 있
<박일성님이 88년도부터 참여하고 있는 친

어. 앉아 있다가 서로 불러 갖고 숟

목모임 ‘달동네’ 장부.>

가락 하나 놔주면. 항상 그냥 못 가.
늘 식사하고 얘기하고.”

결국 말은 사용하기 나름이다. 한때 해방촌과 해방촌 사람들의 가난을 ‘달동네’
라 부르던 걸 모임 이름으로 쓰면서, 오히려 ‘이웃이 좋아서 달동네’라 한다.
누군가는 해방촌이 더 이상 달동네가 아니라고 한다. 그때의 가난에서 벗어났
다는 의미일 테다. 하지만 해방촌은 여전히 달동네다. 여전히 서울의 높은 곳에
서 달이 잘 보이니 달동네이고, 여전히 이웃이 좋아서 달동네다.

<50년이 넘은 나무 돈통은 박일성
님이 처음 가게 시작할 때부터 갖
고 있었던 것으로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준다.>
-4-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살고 있는 인생에 대한 만족이죠.”
- 신흥시장 수선집 임광해

<신흥시장 어두운 골목쪽을 바라보고 앉아 수선집을 운영하고 계시는 임광해님>

처음 해방촌에 와서 신흥시장 안에 몇 개 안되는 가게를 돌아보며 상인분들에
게 인사할 때부터 유난히 눈에 띠는 한 분이 계셨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언
제나 볼 수 있게 시장 길을 보고 앉아서 수선을 하시는 여성분이었다. 시장 상
인들과 눈마주치기 어려워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 때 쉽게 눈마
주치며 인사드릴 수 있었던 그에게 인터뷰를 제일 먼저 요청하는 건 그래서 어
찌 보면 당연한 절차였다. 복숭아를 사들고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미싱을 돌리
-5-
수선집 임광해

고 있는 그를 찾아뵈었다.

농사지은 쌀 팔아 막내딸 양재학원 보내주신 어머니
1945년생. 올해로 69세이신 임광해님. 땅끝마을 해남에서 태어났다. 칠 남매에
다섯째인 막내였는데 어머니는 막내딸을 중학교까지 공부시켰다. 그리고 두메
산골에서 지은 쌀을 이고지고 광주로 가 팔아서 60년대 초 광주에 있는 노라노
양재학원에 그를 입학시켰다. 당시는 의상학과가 없어 최고라 불리웠고 서울과
몇몇 대도시에만 있었다는 노라노 양재학원. 광주에서 홀로 자취하면 힘들까봐
기숙사까지 넣어줬던 어머니였다.
“당시에도 어렴풋하게나마 내가 직업관이라는 게 있었어요. 여자가 할 수 있
는 일이잖아. 끝까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렇게 노라노 양재학원을 나온 그는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가 양재 수업을 하
게 된다. 당시 ‘상록수’라고 문맹을 타파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문맹타파교
육이 실시되고 있었다고. 그래서 해남군에서 광해님에게 양재학원을 해보지 않
겠냐고 연락이 왔고 고향으로 돌아와 방학중인 학교 빈교실을 빌려 양재학원을
시작했다. 농번기인 겨울 3개월을 이용해 기본적인 봉제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었다.

66년도에 올라온 해방촌. 슬레이트 지붕 아래 봉제노동자들 넘쳐나
그렇게 해남에서 양재기술을 가르치시던 광해님이 서울에 올라온 건 66년. 시
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기 힘들 것이라 판단한 어머니가 서울로 중신을 넣었고
결혼하면서 서울로 올라와 해방촌에서 살게 되었다. 해방촌에 어떤 연고도 없
었지만 집을 구하다보니 이 동네가 가장 쌌기 때문에 여기에 집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동자동에서 살다가 해방촌으로 옮겼다. 처음 살던 곳은 지금의
남산 3호 터널근처. 당시는 터널이 없었고 야산이었다. 거기서 흘러내려오는 물
-6-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로 빨래하고 살았다. 동자동과 당시 해방촌은 모두 슬레이트 지붕에 판자촌이
었다. 허리를 굽혀 기어들어가야했다. 당시 먹고 살기 바빴던 그에게 이런 풍경
은 별로 낯선 것이 아니었다. 서울은 응당 이런 곳이려니 하고 생각했다 한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판잣집은 대부분 봉제공장을 하고 있었다. 들어갈때는 기
어들어가야 할 정도로 문이 낮았지만 일단 들어가면 공장을 돌릴 수 있을 정도
로 넓었다고 한다. 봉제공장들은 다 이북에서 넘어오신 분들이 운영하고 있었
고 그 밑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신 분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북에서 오신 분들은 어떻게 공장을 차리신 걸까?
“처음에는 기계 한 대 놓고 천을 짜가지고 마누라랑 둘이 너는 미싱해, 이러
면서 밤새도록 만들어갖고 팔았겠지. 그러면 그 수입으로 실 사고 . 그담에
또 만들어 팔고. 처음에 3장 갖고 갔던 게 5장, 10장 늘어나서 인원을 쓰게
되니까 공장이 커지고. 또 공장주 밑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나가서 다시 공장
을 차리고 그래서 여기가 그렇게 봉제공장이 많았던거야”
주변에 이렇게 봉제공장과 봉제노동자가 많았지만 광해님이 바로 일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남편이 벌어다준 돈으로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남편의 출판업이 망하면서 바뀌게 된다. 67년 결혼해서 13년 후인 80년도부터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처음 한 두 번 사람들이 한복치마 같은 걸 가지고
와 원피스를 만들어 달라 치맛단을 고쳐달라 해서 고쳐주다보니 제법 그것이
재택근무로 자리를 잡게 됐다. 양장점을 차리거나 봉제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
기에는 애 셋을 데리고 하기가 벅찼으므로 그렇게 집에서 수선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남편은 그 후 사우디아라비아로 건설일을 하러 갔는데 딱히 기술
이 있었던 게 아니라 고생을 많이 하면서도 돈을 많이 버시진 못하셨다고. 하
지만 국내에 들어와서도 일을 제대로 찾지 못해 또다시 출국하시길 반복하시다
가 병을 얻으셨다. 그래서 가정의 주수입원은 이제 수선일이 됐다.

봉제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했던 신흥시장의 흥망성쇠
-7-
수선집 임광해

한때 평화시장, 남대문시장 스웨터에 80%를 차지할 정도로 봉제산업의 꽃을 피
웠던 해방촌. 그리고 그 봉제공장들은 대부분 신흥시장 안에 있거나 신흥시장
주변에 있었다. 봉제공장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혹은 그 이상 일했으며 퇴근
길에 신흥시장에 들려 장을 봤다. 지금은 밖의 사람들에 의해 도깨비 시장이라
불리며 침침하고 어두워 침체된 신흥
시장. 그때는 점포 앞 노상에도 사람
들이 다 판을 깔고 장사할 정도로 북
적거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봉제공장
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누구는 값싼 중국산의 수입때문이라
고도 했지만 광해님은 공장하던 사람
들의 이민과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도
손에 꼽았다. 이북에서 내려오신 분들
은 주로 아르헨티나와 미국으로 이민
을 갔다. 여기서 가지 못하는 고향(이
북). 외국으로 가면 좀더 자유롭게 왕
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다들
그 나라에 정착해 잘 살고 있다고 했
다.

<신흥시장 2층에서 바라본 신흥시장. 슬레
이트 지붕에 쌓여있는 지하구조라 시장내
부가 어둡다>

또 다른 사람들은 청계천이나 낙성대,
신당동 등으로 지역을 옮겨갔다. 봉제공장 미싱사 한 명에 주로 밑시다 등등해
서 5명 이상의 부속 노동자가 함께 일하는데 그 많은 인원들이 사라졌으니 신
흥시장의 상권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고. 가내수공업을 하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마트가 들어서고, 외부 지역으로 출퇴근하는 인구가 늘면서 사람들은
신흥시장을 더 이상 찾지 않게 됐다고. 그래서인지 신흥시장 내부는 슬레이트
지붕으로 햇빛마저 안들어오다보니 더욱 음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래서인
지 내부에 빈 가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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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이 곳이 싸다고 해도 어쨌든 들어오면 가게세를 내야하는데 가게세 내는 만
큼 장사가 되지 않잖아. 그러니 여기가 침체될 수밖에”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현재 일에 만족하는 것.
80년도부터 시작된 수선일은 93년 신흥시장안으로 방이 딸린 가게를 구하면서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남편이 사망한 후 옮겨왔고 그 집에서 2남 1녀
세 아이를 키워냈다. 지금 자식들은 모두 독립했고 이제 그 집에서 광해님은
혼자 사시면서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 한때는 의상학과 학생들이 와서 옷만드
는 과제를 부탁할 정도로 광해님은 근방에서 소문난 수선전문가이다. 그래서
신흥시장은 침체됐지만 수선집을 운영하기에 부족함은 없으시다고 했다. 인터
뷰가 시작하면서 수선가게에 손님들이 세 명 들리셨는데 모두 단골이셨다. 고
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에게는 “저번에 엄마가 맡기고 남은 돈이 있으니 그걸
로 대신 하마” 라고 하셨고, 시간 날 때 수선해주면 된다며 2주간의 기한을 주
신 할아버지께는 “그렇게 시간을 많이 주면 내가 한없이 늘어진다”며 농을 하
기도 하셨다.
이제 일을 놓고 좀 쉬고 싶지는 않으실까? “아직 쉬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내
몸이 더 이상 일을 못하면 알아서 쉬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때까지는 계속
일을 하고 싶어요” 그러는 와중에 시장상인 분이 오셔서 김치담그는 법을 물어
보고 간다. 내가 동네북이라고 웃으시는 광해님. 그래도 혼자 일사며 사시는 게
외롭지 않냐고 계속 여쭤보는 질문자에게 웃으시며 평소 생각을 말씀해주셨다.
“사람들하고 이렇게 왕래하고 얘기하고 사니 외롭지 않아요. 가장 중요한 것
은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것이죠. 나는 자기 일이 있으니 거기서 만족
하며 살고 있고. 그리고 어울려 사는 게 중요하지. 여기 노인네들이 많이 사
는데 그 분들에겐 노임비도 싸게 받아요. 그 사람들은 1,2천원이 크거든. 하
지만 학생(질문한 인터뷰어를 가르키며)이 오면 좀 더 받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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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성미싱 황성우

“이 일을 가르쳐주고 싶은데 배우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안타까워요”
- 거성미싱 황성우님

봉제공장 성업덕에 배운 미싱일
해방촌 오거리에 자로 잡은 ‘거성미싱’은 개그맨 ‘거성’ 박명수가 떠오르면서 처
음에는 앗 재밌는 간판이다라고 막연하게 생각한 가게였다. 하지만 항상 가게
앞에 옛날 미싱들이 나와있고 그걸 고치는 분을 보면서 대체 이 미싱가게를 이
용하는 사람이 누구일까라는 궁금증이 앞섰다. 그래서 인사하면 환하게 웃으며
평소에 받아주시는 황성우님을 찾아뵀다.
-10-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강원도 철원출생. 3.8선이북이라 가보지 못하는 곳이다. 북에서 교장선생님이었
던 아버지는 사상문제로 고문을 당하다가 노동당사에서 처형당하고 그 불안 속
에 북에서 계속 살 수 없었던 황성우님 가족은 1.4후퇴때 해방촌으로 피난을
오게 된다. 처음에 피난올 때는 후암동 빈집에서 살다가 주인이 전쟁끝나고 돌
아와 나가라고 해서 지금의 해방촌 오거리로 오게 됐다. 어머니가 떡장사, 국수
장사로 6남매를 키우셨다. 미싱 일 고치게 된 건 둘째 형이 종로 ‘파고다 미싱’
에서 일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당시 봉제공장이 성업이어서 형은 돈을 많이 벌
어 형제들 결혼도 시킬 정도였다. 그 형 때문에 일을 배워 가게를 시작한 게
벌써 48년이나 된 것이다.

다만 요즘은 해방촌 내 미싱수리보다는 외부 출장

을 훨씬 더 많이 나간다. 그렇게 된 이유는 경쟁때문인데 해방촌오거리에 미싱
가게가 또 들어서자 해방촌내에서만 일을 해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졌기 때문
이다. 그래서 시작한 출장은 이제 경상남도까지 갈만큼 전국을 누비게 됐다. 한
번 신용은 영원한 신용이라는 생각으로 누가 부르던 달려가 최선을 다해 미싱
을 고치신다고 한다.

담배말이에서 스웨터공장으로 바뀐 해방촌 경제
처음부터 해방촌에 봉제일이 성행한 건 아니었다. 처음에 해방촌에 성행한 건
담배말이었다.
”이북에서 피난온 피난민들이 처음에 돈벌려고 담배말이 사업을 하거든. 당
시 전매청 담배보다 싸고 질이 좋아 인기가 많았지. 그래서 얼마나 동네 전
체가 담배에 매달렸는지 담배냄새가 동네에 진동을 했어. 그렇게 담배산업이
잘 되니 국가에서 가만둘 리가 없지. 단속이 대대적으로 나왔어. 그래서 결
국 사람들이 담배사업을 못하고 스웨터로 생업을 바꾼거야 “
담배말이와 스웨터를 만드는 것은 둘 다 일손이 많이 필요한 노동력 집약 사업
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가진 게 몸뚱이 뿐인 해방촌 사람들에게 잘 어울리는
-11-
거성미싱 황성우

일이었다. 스웨터를 만드는 게 초기 자본과 기술이 더 필요해 담배말이 사업이
성행했던 것이지만, 박정희 정부에 들어와 집중단속을 하자 자연스레 봉제공장
으로 주 사업이 옮겨가게 되었다.
봉제공장이 많아지니 미싱사가 외부에서 많이 들어왔고 서로 일을 배웠다. 지
금 얼마 안남아있는 봉제공장들은 그때 일을 배운 사람들인 것이다.
하지만 봉제공장은 점차 사양산업이 된다.
“자재값은 올라가는데 이 일을 하는 사람의 임금은 올라가지 않으니 일을 배
우려는 사람이 없고, 중국이 싸다는 이유로 중국 물건에 의존하게 되거나 중
국으로 공장을 옮기니 한국의 봉제공장은 일이 없어 문을 닫게 되는 거지.”
황성우님은 자신이 30~40년동안 배운 일을 누군가 배우기만 하겠다면 2~3년
동안 가르치고 퇴직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배울 사람이 도통 없다고 안타까워
하셨다.

-12-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사람들이랑 얘기하는 재미에 그나마 매일
시장에 나와 있는거야”
- 신흥시장 제수가게 이춘경님

신흥시장안에서 신흥상회라고 제사음식과 제기 등을 파는 이춘경님을 만났다.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4살 때 북에서 피난 내려와 대구에서 살다가 8살부터
해방촌에서 살기 시작했다. 전쟁당시 아버지가 피난길에 총살당하고 큰형님도
입대한 다음날 전사하셔서 어머니가 봉제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시며 가족들을
건사했다. 74년도에 신흥시장 아래쪽에서 만화가게를 시작으로 하여 채소와 과
일, 건어물 등을 팔았다. 90년대 초반에 지금 가게 자리로 옮겨와서 장사를 계
속했고 현재는 해방촌 사람들을 신흥시장에서 만나는데 만족하고 계신다고 한
다.

-13-
신흥시장 이춘경

평안북도 선천 지역 사람들이 선점한 해방촌

굴같은 신흥시장 안에 들어서면 시장 가운데쯤 아주 작은 평상이 있다. 거기서
항상 두 분의 어르신들이 얘기를 나누는 걸 볼 수 있는데 평남상회 주인인 000
씨와 신흥상회 주인인 이춘경씨다. 두 분이 어찌나 얘기를 재밌게 나누시는지
얘기에 끼어들 수가 없어 말을 걸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해방촌에서 사신지 60
년이 되셨다는 이춘경(68)님을 만나 해방촌과 신흥시장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6.25 전쟁이 난 당시 이춘경님 나이 4세. 따로 결혼을 해서 살고 계셨던 큰형님
에게 연락할 새도 없이 피난을 떠났다. 전쟁 나자 바로 입대한 둘째 형님은 입
대 다음날 전사한다. 아버지는 피난 가던 길에 마포에서 잡혀 반동분자라는 이
름으로 총살당한다. 이 불행이 한 번에 몰아쳤다. 하지만 어린 나이라 몰랐다.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대구 등을 거쳐 해방촌에 온 게 8살. 당시 해방촌은 평안
북도 선천지역 군수가 이승만대통령에게 허락을 받아 예전 정일학원자리 (현재
신흥교회 맞은편)에 부락을 이룬다. 이 부근이 산언덕배기인 이 땅에서 그나마
제일 평평한 자리였다고.
그래서 이 지역은 같은 평안북도 사람도 들어올 수 없었고 평안북도 선천지역
사람들만 들어와 살 수 있었다. 이것이 해방촌 선천군민회의 시초가 된다. 당시
누구는 큰 집, 누구는 작은 집 이런 구분은 없었고 일률적으로 5평 7홉의 땅을
배분받았다. 거기서 춘경님은 지금의 후암초등학교를 다닌다. 전쟁으로 인해 동
급생이라고는 하지만 나이차가 많이 났고 또래를 찾기 힘들었다. 학교 끝나면
남산에 밥 지을 나무 주우러 다녔고 까만 손을 씻기도 힘들었다. 그러다가 숭
실중학교 졸업과 군대 제대 이후 해방촌에 사는 여성을 만나 결혼을 하고 해방
촌 신흥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하게 된다.

매형과 건설업자인 친구가 합작으로 만든 신흥시장 건축물
-14-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맨처음 시작은 신흥시장 아랫길 가게였다. 당시 TV 한 대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는 만화가게가 시초였다. 신흥시장 안으로 들어와 지금의 현재 자리에서 10
여미터 떨어진 곳에서 다시 만화가게를 시작한 게 74년. 만화가게를 2년여 하
다가 채소, 과일, 건어물로 품목을 확대했다.
마침 새 건물로 새단장을 한 신흥시장 공사도 품목 확대와 매출 향상에 큰 몫
을 했다. 하꼬방이었던 신흥시장 자리를 매형이 전부 매입해 소위 불알친구인
건설업자 친구와 손잡고 슬레이트 지붕과 지금의 방과 가게자리가 붙어있는 사
각형의 건물을 지었다.
“당시 전 재산 24만원으로 채소를 사와 팔았는데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하루만에 다 팔고 27만원이 되더라고. 당시 3만원 이득은 지금
의 30만원을 넘는 것이지. 그래서 다시 그 돈을 밑천 삼아 품목을 채소에서
과일, 그리고 건어물로 늘렸어. 당시 여기가 얼마나 장사가 잘 됐냐하면 사
람들의 인파 때문에 걷기가 힘들 정도였지. 천원 짜리는 세기도 귀찮을 정도
였다니까”
눈 코 뜰 새 없이 물건 떼러 다니느냐고 애들 셋이 어떻게 커가는지도 모르는
세월이었다. 하지만 막상 건물을 지은 매형은 돈을 다 받지 못했다. 일단 상인
들이 들어와 물건을 팔고 생활하면서 가게세를 후불로 내기로 했으나 말도 없
이 이사가버리거나 야반도주하기 일쑤였다. 결국 매형과 그 친구는 사이가 소
원해졌다고.

이제 사람들과 매일 얘기나누는 기쁨으로 가게에 나와
그렇게 사람들로 북적이던 신흥시장은 90년대 초부터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는
다. 그 많던 봉제공장이 사라진 게 첫 번째 이유. 한 공장안에 보통 한 기계에
16명의 재봉노동자가 속해 있었었는데 공장은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있는 공장
안에는 기계가 들어섰다. 사람들은 해방촌을 떠나갔고 동네 유일한 시장 주변
에는 하나 둘 마트가 들어섰다. 남산 주변 기슭에 살던 사람들도 재개발 계획
-15-
신흥시장 이춘경

<이제는 발길이 드문 신흥시장 내부>

으로 인해 하나 둘 봉천동이나 목동으로 떠나갔다. 10여미터를 이동해 현재 가
게자리로 와 제수용품을 판 게 90년대 초반. 소위 무속인들이 제수용품을 사가
던 것도 이제 끊겼다. 하루 매출은 1천원에도 미치지 않는다.
“(가게 식료품 물건들을 가리키며) 이 거 사람들이 다 매일 먹는 음식들이잖
아. 근데도 전혀 팔리지가 않아. 다들 마트에 가지 이제 이 시장에 사람은
오지 않아”
그래도 이 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 때문이다. 선배들, 후배들과의 모
임이 많고 어디가도 ‘막내’로 통한다. 이젠 나이도 있고 다른 데 가 장사한다
한들 그리 나아질 거 같지 않다. 오랜 사람들과 예전 추억들과 일상을 나누면
서 살고 싶을 뿐이다. 신흥시장은 이제 사랑방이고 만남의 광장이다. 오늘도 여
전히 그는 평남상회 000씨와 얘기를 나누며 평상에 앉아 있다.

-16-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짧은 인터뷰들
- 이정옥, 주혜인, 박희남, 주태원

<이정옥>
“우리 세대가 고생 많이 했지. 2차 세계대전에, 6.25에. 내가 15살에 6.25가 터졌
어. 흥남부두에서 배타고 5일동안 부산으로 갔는데 피난민이 너무 많아 제주도
로 갔지”
"해방촌 맨 첨에 들어왔을 때 아버지랑 산에 나물캐다가 10리길 나가서 팔았어.
서른부터는 평화시장가서 아동복 팔았어"
"당시 신흥 시장은 골목이 발 디딜 틈이 없었어. 서민적인 시장이고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와서 물건을 샀어. 그 때가 그리워"
-17-
짧은 인터뷰들

<주혜인, 박희남>
"이태원에서 보세옷 장사를 할 때 아들이 고생 많이 했어요. 우리 아들이 돈
벌려면 남 등쳐야 하는데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하더라고."
"황해도에서 피난와서 해방촌에서 살았어요. 땅을 불하받기 전에 시어머니는
땅을 넓히려고 뒷 산 흙을 팠고 시아버지는 이러다 걸린다고 흙을 다시 덮곤
했지"
"예전엔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로 빨래하곤 했어요. 나중에 전기와 수도가 들
어와서 신청했는데 수도는 남편 몰래 신청했지. 일일히 그런 걸 남편에게 얘기
하고 살 수가 있나"

-18-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주태원>
"강원도 태백에서 열일곱에 구로에서 핸드백 만드는 일 하다가 해방촌에 옷만
드는 일 배우러 왔어요. 그 후에 아이론(옷 다림질) 공장을 두 군데 차렸어요"
"25년동안 운영한 공장은 두 번 사기를 당하면서 접었어요. 일본에서 돈이 안들
어왔다고 하면서 한국본사에서 돈을 안줬어요. 당시 일본도 경기가 안좋았어요.
본사도 부도나고"
"이제는 중국에서 수입한 거랑 국내에서 폐업당한 옷가게 옷을 가져와서 인터
넷에 팔면서 여기 신흥시장에서 같이 팔 수 있게 가게를 차린 거에요. 주로 레
깅스를 팔지만 그외 옷들도 팔아요 저렴하니 와서 많이 구경하세요"

-19-
신흥시장 안내도

-20-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21-
후기

후기
신택리지 마을 조사는 원래 자신이 사는 동네에 배정되는게 원칙이었다. 그래
서 막연히 내가 사는 도봉구 마을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해방촌으로 배정
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2009년부터 수유너머에서 함께 공부하기 위
해 해방촌을 자주 다녔고 해방촌에 관심도 많았으나 멀어서 일부러 관심밖으로
밀어두고 있었는데 막상 조사마을로 선정되자 이것은 운명? 이라는 생각이 들
었던 것이다.
팀이 꾸려진 후 해방촌팀은 마을조사를 시작하면서 각자 자신이 관심있는 주제
로 조사목표를 정하기로 했다. 나는 해방촌사람들과 많이 만나고 싶다는 생각
에 막연히 '해방촌 사람들 만나기'로 정하고 마을 어르신들, 청년들, 빈집사람들
등등을 다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나의 욕심이었다. 그러다가 우리
의 거점인 빈연구소에서 가까운 신흥시장이 눈에 들어왔고 거기서 계속 머물면
서 장사하시는 분들의 얘기를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인터뷰 관련
일을 해본 적이 있어서 인터뷰를 웬만큼 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으나 이미 인
터뷰 대상이 섭외돼 인터뷰를 하는 것과 처음 봐서 서로 낯선 동네 분들을 인
터뷰하는 건 매우 다른 일이라는 걸 조사 첫 날 알게 됐다.
매일 신흥시장을 돌면서 얼굴 익히기부터 시작했는데 이렇게 인사만 하다보면
뭐가 달라질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하지만 날마다 얼굴을 보여드리면서 인
사를 받아주시는 모습들이 달라지시고 먼저 말을 걸어주시기도 하면서 점차 심
리적 부담감을 덜 수 있었다. 그리고 인터뷰를 한 분씩 해나갈 수 있었다. 하지
만 그 분들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한 두번에 듣고 정리한다는 것은 내 능력의
한계이자 욕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한계를 인정하고 그냥 있는 그
-22-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대로, 부족한 바를 인정하며 그 분들의 이야기를 내놓는다.
작년에 혼자 독립했을 때 밤마다 무서워했었다. 나는 혼자 살기에 적합하지 않
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해방촌에서 마을 조사를 하면서 마
을분들 하나 둘 얼굴을 익히게되니, 해방촌 오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대부분 익히게 되니 이 동네에서 혼자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것이
야 말로 마을커뮤니티의 시작이 아닐까.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잔소리를 퍼부은 나를 항상 받아준 해방촌 팀원들과 묵묵
히 지켜봐 준 지음과 마을이라는 게 어느 한 계층만 중심이 되서는 구성될 수
없다는 걸 알려준 해방촌 사람들에게 나의 사랑을 보낸다. 그리고 이 부족한
글을 부끄러움의 밑천으로 삼고 더 나아가고 싶다.
- 곰자 2013.10.03

-23-
후기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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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일성상회 박일성 “해방촌은 이웃이 좋아서 달동네야” - 신흥시장 국수집 일성상회 박일성 <신흥시장에서 일성상회라는 국수 가게를 하고 있는 박일성(72)님.> 해방촌은 타지인들의 땅이다. 사상과 종교 문제로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전 쟁 후 삶의 터전을 잃고 무조건 서울로, 서울로 온 사람들, 돈과 일자리를 구하 기 위해 모여든 지방민들이 해방촌의 주민이 되었다. 객지에 나오면 외롭고 비 빌 언덕이 필요한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인가보다. 특히나 해방촌에서는, 무수한 사조직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지금도 서로를 연결하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1960년대부터 해방촌에 살았던 신흥시장의 박일성님에게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박일성님은 신흥시장에서 국수를 직접 만들어 파는 일을 50년 가까이 해오고 있었다. “작은 아버지가 여기서 국수장사했어. 장사하다가 힘들 다고 올라오라고 그러더라고. 먹고 살기 위해 올라왔지. 그때는 어려운 때니까 -2-
  • 3.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없으면 다 국수 먹고 그랬다고. 밥먹으려면 쌀이 비싸니까. 그때는 장사가 잘 됐지. 먹는 장사는 잘 됐어.” “이 동네가 모임이 많아 단체모임. 여기도 향 우회가 있어. 경상 향우회, 전라도 향우회, 충 청향우회, 강원도 향우회 이렇게 있지.” 이야 기를 들어보니 향우회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 다. “789라는게 있어. 47년,48년,49년 출생자 모 임. 한 2,30명은 돼. 그 세대가 돈 잘 벌었 거든. 그리고 남산 친목회, 먹는 친목회, 달동네. 명칭이 여러 가지 많아 이동네에. 유관단체도 많아. 새마을. 부녀회. 바르게 살기. 체육회, 자율방범 같은 거. 난 새마 <박일성님이 직접 만든 국수> 을하고 자율방범하고 체육회하고 청소년육성회 4개만 하지만 그거 보다 더 하는 사람도 있어. 동회도 10개 가까이 되고, 모임도 대여섯 개 되게 나가 는.” 각 향우회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축구 대회도 한다고 한다. “향우회 조기축구 5 개 단체가 운동장 빌려갖고 일년에 한번씩 시합하잖아. 그런게 있어. 강원,전라 도, 경상도, 충청도, 이북 이렇게 5팀이 매월 5월말에 정기축구친선대회를 해.” “단체가 엄청 많아. 여기만큼 잘 되는 데가 없어. 그러니까 (소식들을) 다 알 지. 잔치 한 번 하면, 누가 돌아가셨다 하면 그 길로 사람이 엄청 많이 모여. 남들 가면 품앗이니까 나도 가고. 딴 데는 사람이 없어 걱정인데 여긴 한번 가면 3,400명 이상은 보통 모인다니까.” 박일성님의 경우 유관단체들 외에도 달동네라는 모임을 하고 있었다. “달동네 -3-
  • 4. 일성상회 박일성 는 그냥 동네 친목모임이야. 그냥 만 나서 밥 먹고 술 먹고 하는거지.” 하 지만 그냥 동네친목모임 치고는 무려 1988년부터 지금까지 쓴 장부가 있 다. “해방촌은 이웃이 좋아서 달동네야. 식당에 앉아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 뒷통수만 봐도 누구인지 다 알 수 있 <박일성님이 88년도부터 참여하고 있는 친 어. 앉아 있다가 서로 불러 갖고 숟 목모임 ‘달동네’ 장부.> 가락 하나 놔주면. 항상 그냥 못 가. 늘 식사하고 얘기하고.” 결국 말은 사용하기 나름이다. 한때 해방촌과 해방촌 사람들의 가난을 ‘달동네’ 라 부르던 걸 모임 이름으로 쓰면서, 오히려 ‘이웃이 좋아서 달동네’라 한다. 누군가는 해방촌이 더 이상 달동네가 아니라고 한다. 그때의 가난에서 벗어났 다는 의미일 테다. 하지만 해방촌은 여전히 달동네다. 여전히 서울의 높은 곳에 서 달이 잘 보이니 달동네이고, 여전히 이웃이 좋아서 달동네다. <50년이 넘은 나무 돈통은 박일성 님이 처음 가게 시작할 때부터 갖 고 있었던 것으로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준다.> -4-
  • 5.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살고 있는 인생에 대한 만족이죠.” - 신흥시장 수선집 임광해 <신흥시장 어두운 골목쪽을 바라보고 앉아 수선집을 운영하고 계시는 임광해님> 처음 해방촌에 와서 신흥시장 안에 몇 개 안되는 가게를 돌아보며 상인분들에 게 인사할 때부터 유난히 눈에 띠는 한 분이 계셨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언 제나 볼 수 있게 시장 길을 보고 앉아서 수선을 하시는 여성분이었다. 시장 상 인들과 눈마주치기 어려워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 때 쉽게 눈마 주치며 인사드릴 수 있었던 그에게 인터뷰를 제일 먼저 요청하는 건 그래서 어 찌 보면 당연한 절차였다. 복숭아를 사들고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미싱을 돌리 -5-
  • 6. 수선집 임광해 고 있는 그를 찾아뵈었다. 농사지은 쌀 팔아 막내딸 양재학원 보내주신 어머니 1945년생. 올해로 69세이신 임광해님. 땅끝마을 해남에서 태어났다. 칠 남매에 다섯째인 막내였는데 어머니는 막내딸을 중학교까지 공부시켰다. 그리고 두메 산골에서 지은 쌀을 이고지고 광주로 가 팔아서 60년대 초 광주에 있는 노라노 양재학원에 그를 입학시켰다. 당시는 의상학과가 없어 최고라 불리웠고 서울과 몇몇 대도시에만 있었다는 노라노 양재학원. 광주에서 홀로 자취하면 힘들까봐 기숙사까지 넣어줬던 어머니였다. “당시에도 어렴풋하게나마 내가 직업관이라는 게 있었어요. 여자가 할 수 있 는 일이잖아. 끝까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렇게 노라노 양재학원을 나온 그는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가 양재 수업을 하 게 된다. 당시 ‘상록수’라고 문맹을 타파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문맹타파교 육이 실시되고 있었다고. 그래서 해남군에서 광해님에게 양재학원을 해보지 않 겠냐고 연락이 왔고 고향으로 돌아와 방학중인 학교 빈교실을 빌려 양재학원을 시작했다. 농번기인 겨울 3개월을 이용해 기본적인 봉제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었다. 66년도에 올라온 해방촌. 슬레이트 지붕 아래 봉제노동자들 넘쳐나 그렇게 해남에서 양재기술을 가르치시던 광해님이 서울에 올라온 건 66년. 시 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기 힘들 것이라 판단한 어머니가 서울로 중신을 넣었고 결혼하면서 서울로 올라와 해방촌에서 살게 되었다. 해방촌에 어떤 연고도 없 었지만 집을 구하다보니 이 동네가 가장 쌌기 때문에 여기에 집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동자동에서 살다가 해방촌으로 옮겼다. 처음 살던 곳은 지금의 남산 3호 터널근처. 당시는 터널이 없었고 야산이었다. 거기서 흘러내려오는 물 -6-
  • 7.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로 빨래하고 살았다. 동자동과 당시 해방촌은 모두 슬레이트 지붕에 판자촌이 었다. 허리를 굽혀 기어들어가야했다. 당시 먹고 살기 바빴던 그에게 이런 풍경 은 별로 낯선 것이 아니었다. 서울은 응당 이런 곳이려니 하고 생각했다 한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판잣집은 대부분 봉제공장을 하고 있었다. 들어갈때는 기 어들어가야 할 정도로 문이 낮았지만 일단 들어가면 공장을 돌릴 수 있을 정도 로 넓었다고 한다. 봉제공장들은 다 이북에서 넘어오신 분들이 운영하고 있었 고 그 밑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신 분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북에서 오신 분들은 어떻게 공장을 차리신 걸까? “처음에는 기계 한 대 놓고 천을 짜가지고 마누라랑 둘이 너는 미싱해, 이러 면서 밤새도록 만들어갖고 팔았겠지. 그러면 그 수입으로 실 사고 . 그담에 또 만들어 팔고. 처음에 3장 갖고 갔던 게 5장, 10장 늘어나서 인원을 쓰게 되니까 공장이 커지고. 또 공장주 밑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나가서 다시 공장 을 차리고 그래서 여기가 그렇게 봉제공장이 많았던거야” 주변에 이렇게 봉제공장과 봉제노동자가 많았지만 광해님이 바로 일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남편이 벌어다준 돈으로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남편의 출판업이 망하면서 바뀌게 된다. 67년 결혼해서 13년 후인 80년도부터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처음 한 두 번 사람들이 한복치마 같은 걸 가지고 와 원피스를 만들어 달라 치맛단을 고쳐달라 해서 고쳐주다보니 제법 그것이 재택근무로 자리를 잡게 됐다. 양장점을 차리거나 봉제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 기에는 애 셋을 데리고 하기가 벅찼으므로 그렇게 집에서 수선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남편은 그 후 사우디아라비아로 건설일을 하러 갔는데 딱히 기술 이 있었던 게 아니라 고생을 많이 하면서도 돈을 많이 버시진 못하셨다고. 하 지만 국내에 들어와서도 일을 제대로 찾지 못해 또다시 출국하시길 반복하시다 가 병을 얻으셨다. 그래서 가정의 주수입원은 이제 수선일이 됐다. 봉제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했던 신흥시장의 흥망성쇠 -7-
  • 8. 수선집 임광해 한때 평화시장, 남대문시장 스웨터에 80%를 차지할 정도로 봉제산업의 꽃을 피 웠던 해방촌. 그리고 그 봉제공장들은 대부분 신흥시장 안에 있거나 신흥시장 주변에 있었다. 봉제공장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혹은 그 이상 일했으며 퇴근 길에 신흥시장에 들려 장을 봤다. 지금은 밖의 사람들에 의해 도깨비 시장이라 불리며 침침하고 어두워 침체된 신흥 시장. 그때는 점포 앞 노상에도 사람 들이 다 판을 깔고 장사할 정도로 북 적거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봉제공장 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누구는 값싼 중국산의 수입때문이라 고도 했지만 광해님은 공장하던 사람 들의 이민과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도 손에 꼽았다. 이북에서 내려오신 분들 은 주로 아르헨티나와 미국으로 이민 을 갔다. 여기서 가지 못하는 고향(이 북). 외국으로 가면 좀더 자유롭게 왕 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다들 그 나라에 정착해 잘 살고 있다고 했 다. <신흥시장 2층에서 바라본 신흥시장. 슬레 이트 지붕에 쌓여있는 지하구조라 시장내 부가 어둡다> 또 다른 사람들은 청계천이나 낙성대, 신당동 등으로 지역을 옮겨갔다. 봉제공장 미싱사 한 명에 주로 밑시다 등등해 서 5명 이상의 부속 노동자가 함께 일하는데 그 많은 인원들이 사라졌으니 신 흥시장의 상권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고. 가내수공업을 하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마트가 들어서고, 외부 지역으로 출퇴근하는 인구가 늘면서 사람들은 신흥시장을 더 이상 찾지 않게 됐다고. 그래서인지 신흥시장 내부는 슬레이트 지붕으로 햇빛마저 안들어오다보니 더욱 음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래서인 지 내부에 빈 가게가 많다. -8-
  • 9.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이 곳이 싸다고 해도 어쨌든 들어오면 가게세를 내야하는데 가게세 내는 만 큼 장사가 되지 않잖아. 그러니 여기가 침체될 수밖에”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현재 일에 만족하는 것. 80년도부터 시작된 수선일은 93년 신흥시장안으로 방이 딸린 가게를 구하면서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남편이 사망한 후 옮겨왔고 그 집에서 2남 1녀 세 아이를 키워냈다. 지금 자식들은 모두 독립했고 이제 그 집에서 광해님은 혼자 사시면서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 한때는 의상학과 학생들이 와서 옷만드 는 과제를 부탁할 정도로 광해님은 근방에서 소문난 수선전문가이다. 그래서 신흥시장은 침체됐지만 수선집을 운영하기에 부족함은 없으시다고 했다. 인터 뷰가 시작하면서 수선가게에 손님들이 세 명 들리셨는데 모두 단골이셨다. 고 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에게는 “저번에 엄마가 맡기고 남은 돈이 있으니 그걸 로 대신 하마” 라고 하셨고, 시간 날 때 수선해주면 된다며 2주간의 기한을 주 신 할아버지께는 “그렇게 시간을 많이 주면 내가 한없이 늘어진다”며 농을 하 기도 하셨다. 이제 일을 놓고 좀 쉬고 싶지는 않으실까? “아직 쉬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내 몸이 더 이상 일을 못하면 알아서 쉬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때까지는 계속 일을 하고 싶어요” 그러는 와중에 시장상인 분이 오셔서 김치담그는 법을 물어 보고 간다. 내가 동네북이라고 웃으시는 광해님. 그래도 혼자 일사며 사시는 게 외롭지 않냐고 계속 여쭤보는 질문자에게 웃으시며 평소 생각을 말씀해주셨다. “사람들하고 이렇게 왕래하고 얘기하고 사니 외롭지 않아요. 가장 중요한 것 은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것이죠. 나는 자기 일이 있으니 거기서 만족 하며 살고 있고. 그리고 어울려 사는 게 중요하지. 여기 노인네들이 많이 사 는데 그 분들에겐 노임비도 싸게 받아요. 그 사람들은 1,2천원이 크거든. 하 지만 학생(질문한 인터뷰어를 가르키며)이 오면 좀 더 받을거야” -9-
  • 10. 거성미싱 황성우 “이 일을 가르쳐주고 싶은데 배우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안타까워요” - 거성미싱 황성우님 봉제공장 성업덕에 배운 미싱일 해방촌 오거리에 자로 잡은 ‘거성미싱’은 개그맨 ‘거성’ 박명수가 떠오르면서 처 음에는 앗 재밌는 간판이다라고 막연하게 생각한 가게였다. 하지만 항상 가게 앞에 옛날 미싱들이 나와있고 그걸 고치는 분을 보면서 대체 이 미싱가게를 이 용하는 사람이 누구일까라는 궁금증이 앞섰다. 그래서 인사하면 환하게 웃으며 평소에 받아주시는 황성우님을 찾아뵀다. -10-
  • 11.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강원도 철원출생. 3.8선이북이라 가보지 못하는 곳이다. 북에서 교장선생님이었 던 아버지는 사상문제로 고문을 당하다가 노동당사에서 처형당하고 그 불안 속 에 북에서 계속 살 수 없었던 황성우님 가족은 1.4후퇴때 해방촌으로 피난을 오게 된다. 처음에 피난올 때는 후암동 빈집에서 살다가 주인이 전쟁끝나고 돌 아와 나가라고 해서 지금의 해방촌 오거리로 오게 됐다. 어머니가 떡장사, 국수 장사로 6남매를 키우셨다. 미싱 일 고치게 된 건 둘째 형이 종로 ‘파고다 미싱’ 에서 일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당시 봉제공장이 성업이어서 형은 돈을 많이 벌 어 형제들 결혼도 시킬 정도였다. 그 형 때문에 일을 배워 가게를 시작한 게 벌써 48년이나 된 것이다. 다만 요즘은 해방촌 내 미싱수리보다는 외부 출장 을 훨씬 더 많이 나간다. 그렇게 된 이유는 경쟁때문인데 해방촌오거리에 미싱 가게가 또 들어서자 해방촌내에서만 일을 해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졌기 때문 이다. 그래서 시작한 출장은 이제 경상남도까지 갈만큼 전국을 누비게 됐다. 한 번 신용은 영원한 신용이라는 생각으로 누가 부르던 달려가 최선을 다해 미싱 을 고치신다고 한다. 담배말이에서 스웨터공장으로 바뀐 해방촌 경제 처음부터 해방촌에 봉제일이 성행한 건 아니었다. 처음에 해방촌에 성행한 건 담배말이었다. ”이북에서 피난온 피난민들이 처음에 돈벌려고 담배말이 사업을 하거든. 당 시 전매청 담배보다 싸고 질이 좋아 인기가 많았지. 그래서 얼마나 동네 전 체가 담배에 매달렸는지 담배냄새가 동네에 진동을 했어. 그렇게 담배산업이 잘 되니 국가에서 가만둘 리가 없지. 단속이 대대적으로 나왔어. 그래서 결 국 사람들이 담배사업을 못하고 스웨터로 생업을 바꾼거야 “ 담배말이와 스웨터를 만드는 것은 둘 다 일손이 많이 필요한 노동력 집약 사업 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가진 게 몸뚱이 뿐인 해방촌 사람들에게 잘 어울리는 -11-
  • 12. 거성미싱 황성우 일이었다. 스웨터를 만드는 게 초기 자본과 기술이 더 필요해 담배말이 사업이 성행했던 것이지만, 박정희 정부에 들어와 집중단속을 하자 자연스레 봉제공장 으로 주 사업이 옮겨가게 되었다. 봉제공장이 많아지니 미싱사가 외부에서 많이 들어왔고 서로 일을 배웠다. 지 금 얼마 안남아있는 봉제공장들은 그때 일을 배운 사람들인 것이다. 하지만 봉제공장은 점차 사양산업이 된다. “자재값은 올라가는데 이 일을 하는 사람의 임금은 올라가지 않으니 일을 배 우려는 사람이 없고, 중국이 싸다는 이유로 중국 물건에 의존하게 되거나 중 국으로 공장을 옮기니 한국의 봉제공장은 일이 없어 문을 닫게 되는 거지.” 황성우님은 자신이 30~40년동안 배운 일을 누군가 배우기만 하겠다면 2~3년 동안 가르치고 퇴직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배울 사람이 도통 없다고 안타까워 하셨다. -12-
  • 13.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사람들이랑 얘기하는 재미에 그나마 매일 시장에 나와 있는거야” - 신흥시장 제수가게 이춘경님 신흥시장안에서 신흥상회라고 제사음식과 제기 등을 파는 이춘경님을 만났다.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4살 때 북에서 피난 내려와 대구에서 살다가 8살부터 해방촌에서 살기 시작했다. 전쟁당시 아버지가 피난길에 총살당하고 큰형님도 입대한 다음날 전사하셔서 어머니가 봉제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시며 가족들을 건사했다. 74년도에 신흥시장 아래쪽에서 만화가게를 시작으로 하여 채소와 과 일, 건어물 등을 팔았다. 90년대 초반에 지금 가게 자리로 옮겨와서 장사를 계 속했고 현재는 해방촌 사람들을 신흥시장에서 만나는데 만족하고 계신다고 한 다. -13-
  • 14. 신흥시장 이춘경 평안북도 선천 지역 사람들이 선점한 해방촌 굴같은 신흥시장 안에 들어서면 시장 가운데쯤 아주 작은 평상이 있다. 거기서 항상 두 분의 어르신들이 얘기를 나누는 걸 볼 수 있는데 평남상회 주인인 000 씨와 신흥상회 주인인 이춘경씨다. 두 분이 어찌나 얘기를 재밌게 나누시는지 얘기에 끼어들 수가 없어 말을 걸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해방촌에서 사신지 60 년이 되셨다는 이춘경(68)님을 만나 해방촌과 신흥시장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6.25 전쟁이 난 당시 이춘경님 나이 4세. 따로 결혼을 해서 살고 계셨던 큰형님 에게 연락할 새도 없이 피난을 떠났다. 전쟁 나자 바로 입대한 둘째 형님은 입 대 다음날 전사한다. 아버지는 피난 가던 길에 마포에서 잡혀 반동분자라는 이 름으로 총살당한다. 이 불행이 한 번에 몰아쳤다. 하지만 어린 나이라 몰랐다.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대구 등을 거쳐 해방촌에 온 게 8살. 당시 해방촌은 평안 북도 선천지역 군수가 이승만대통령에게 허락을 받아 예전 정일학원자리 (현재 신흥교회 맞은편)에 부락을 이룬다. 이 부근이 산언덕배기인 이 땅에서 그나마 제일 평평한 자리였다고. 그래서 이 지역은 같은 평안북도 사람도 들어올 수 없었고 평안북도 선천지역 사람들만 들어와 살 수 있었다. 이것이 해방촌 선천군민회의 시초가 된다. 당시 누구는 큰 집, 누구는 작은 집 이런 구분은 없었고 일률적으로 5평 7홉의 땅을 배분받았다. 거기서 춘경님은 지금의 후암초등학교를 다닌다. 전쟁으로 인해 동 급생이라고는 하지만 나이차가 많이 났고 또래를 찾기 힘들었다. 학교 끝나면 남산에 밥 지을 나무 주우러 다녔고 까만 손을 씻기도 힘들었다. 그러다가 숭 실중학교 졸업과 군대 제대 이후 해방촌에 사는 여성을 만나 결혼을 하고 해방 촌 신흥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하게 된다. 매형과 건설업자인 친구가 합작으로 만든 신흥시장 건축물 -14-
  • 15.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맨처음 시작은 신흥시장 아랫길 가게였다. 당시 TV 한 대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는 만화가게가 시초였다. 신흥시장 안으로 들어와 지금의 현재 자리에서 10 여미터 떨어진 곳에서 다시 만화가게를 시작한 게 74년. 만화가게를 2년여 하 다가 채소, 과일, 건어물로 품목을 확대했다. 마침 새 건물로 새단장을 한 신흥시장 공사도 품목 확대와 매출 향상에 큰 몫 을 했다. 하꼬방이었던 신흥시장 자리를 매형이 전부 매입해 소위 불알친구인 건설업자 친구와 손잡고 슬레이트 지붕과 지금의 방과 가게자리가 붙어있는 사 각형의 건물을 지었다. “당시 전 재산 24만원으로 채소를 사와 팔았는데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하루만에 다 팔고 27만원이 되더라고. 당시 3만원 이득은 지금 의 30만원을 넘는 것이지. 그래서 다시 그 돈을 밑천 삼아 품목을 채소에서 과일, 그리고 건어물로 늘렸어. 당시 여기가 얼마나 장사가 잘 됐냐하면 사 람들의 인파 때문에 걷기가 힘들 정도였지. 천원 짜리는 세기도 귀찮을 정도 였다니까” 눈 코 뜰 새 없이 물건 떼러 다니느냐고 애들 셋이 어떻게 커가는지도 모르는 세월이었다. 하지만 막상 건물을 지은 매형은 돈을 다 받지 못했다. 일단 상인 들이 들어와 물건을 팔고 생활하면서 가게세를 후불로 내기로 했으나 말도 없 이 이사가버리거나 야반도주하기 일쑤였다. 결국 매형과 그 친구는 사이가 소 원해졌다고. 이제 사람들과 매일 얘기나누는 기쁨으로 가게에 나와 그렇게 사람들로 북적이던 신흥시장은 90년대 초부터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는 다. 그 많던 봉제공장이 사라진 게 첫 번째 이유. 한 공장안에 보통 한 기계에 16명의 재봉노동자가 속해 있었었는데 공장은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있는 공장 안에는 기계가 들어섰다. 사람들은 해방촌을 떠나갔고 동네 유일한 시장 주변 에는 하나 둘 마트가 들어섰다. 남산 주변 기슭에 살던 사람들도 재개발 계획 -15-
  • 16. 신흥시장 이춘경 <이제는 발길이 드문 신흥시장 내부> 으로 인해 하나 둘 봉천동이나 목동으로 떠나갔다. 10여미터를 이동해 현재 가 게자리로 와 제수용품을 판 게 90년대 초반. 소위 무속인들이 제수용품을 사가 던 것도 이제 끊겼다. 하루 매출은 1천원에도 미치지 않는다. “(가게 식료품 물건들을 가리키며) 이 거 사람들이 다 매일 먹는 음식들이잖 아. 근데도 전혀 팔리지가 않아. 다들 마트에 가지 이제 이 시장에 사람은 오지 않아” 그래도 이 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 때문이다. 선배들, 후배들과의 모 임이 많고 어디가도 ‘막내’로 통한다. 이젠 나이도 있고 다른 데 가 장사한다 한들 그리 나아질 거 같지 않다. 오랜 사람들과 예전 추억들과 일상을 나누면 서 살고 싶을 뿐이다. 신흥시장은 이제 사랑방이고 만남의 광장이다. 오늘도 여 전히 그는 평남상회 000씨와 얘기를 나누며 평상에 앉아 있다. -16-
  • 17.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짧은 인터뷰들 - 이정옥, 주혜인, 박희남, 주태원 <이정옥> “우리 세대가 고생 많이 했지. 2차 세계대전에, 6.25에. 내가 15살에 6.25가 터졌 어. 흥남부두에서 배타고 5일동안 부산으로 갔는데 피난민이 너무 많아 제주도 로 갔지” "해방촌 맨 첨에 들어왔을 때 아버지랑 산에 나물캐다가 10리길 나가서 팔았어. 서른부터는 평화시장가서 아동복 팔았어" "당시 신흥 시장은 골목이 발 디딜 틈이 없었어. 서민적인 시장이고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와서 물건을 샀어. 그 때가 그리워" -17-
  • 18. 짧은 인터뷰들 <주혜인, 박희남> "이태원에서 보세옷 장사를 할 때 아들이 고생 많이 했어요. 우리 아들이 돈 벌려면 남 등쳐야 하는데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하더라고." "황해도에서 피난와서 해방촌에서 살았어요. 땅을 불하받기 전에 시어머니는 땅을 넓히려고 뒷 산 흙을 팠고 시아버지는 이러다 걸린다고 흙을 다시 덮곤 했지" "예전엔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로 빨래하곤 했어요. 나중에 전기와 수도가 들 어와서 신청했는데 수도는 남편 몰래 신청했지. 일일히 그런 걸 남편에게 얘기 하고 살 수가 있나" -18-
  • 19.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주태원> "강원도 태백에서 열일곱에 구로에서 핸드백 만드는 일 하다가 해방촌에 옷만 드는 일 배우러 왔어요. 그 후에 아이론(옷 다림질) 공장을 두 군데 차렸어요" "25년동안 운영한 공장은 두 번 사기를 당하면서 접었어요. 일본에서 돈이 안들 어왔다고 하면서 한국본사에서 돈을 안줬어요. 당시 일본도 경기가 안좋았어요. 본사도 부도나고" "이제는 중국에서 수입한 거랑 국내에서 폐업당한 옷가게 옷을 가져와서 인터 넷에 팔면서 여기 신흥시장에서 같이 팔 수 있게 가게를 차린 거에요. 주로 레 깅스를 팔지만 그외 옷들도 팔아요 저렴하니 와서 많이 구경하세요" -19-
  • 21.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21-
  • 22. 후기 후기 신택리지 마을 조사는 원래 자신이 사는 동네에 배정되는게 원칙이었다. 그래 서 막연히 내가 사는 도봉구 마을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해방촌으로 배정 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2009년부터 수유너머에서 함께 공부하기 위 해 해방촌을 자주 다녔고 해방촌에 관심도 많았으나 멀어서 일부러 관심밖으로 밀어두고 있었는데 막상 조사마을로 선정되자 이것은 운명? 이라는 생각이 들 었던 것이다. 팀이 꾸려진 후 해방촌팀은 마을조사를 시작하면서 각자 자신이 관심있는 주제 로 조사목표를 정하기로 했다. 나는 해방촌사람들과 많이 만나고 싶다는 생각 에 막연히 '해방촌 사람들 만나기'로 정하고 마을 어르신들, 청년들, 빈집사람들 등등을 다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나의 욕심이었다. 그러다가 우리 의 거점인 빈연구소에서 가까운 신흥시장이 눈에 들어왔고 거기서 계속 머물면 서 장사하시는 분들의 얘기를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인터뷰 관련 일을 해본 적이 있어서 인터뷰를 웬만큼 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으나 이미 인 터뷰 대상이 섭외돼 인터뷰를 하는 것과 처음 봐서 서로 낯선 동네 분들을 인 터뷰하는 건 매우 다른 일이라는 걸 조사 첫 날 알게 됐다. 매일 신흥시장을 돌면서 얼굴 익히기부터 시작했는데 이렇게 인사만 하다보면 뭐가 달라질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하지만 날마다 얼굴을 보여드리면서 인 사를 받아주시는 모습들이 달라지시고 먼저 말을 걸어주시기도 하면서 점차 심 리적 부담감을 덜 수 있었다. 그리고 인터뷰를 한 분씩 해나갈 수 있었다. 하지 만 그 분들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한 두번에 듣고 정리한다는 것은 내 능력의 한계이자 욕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한계를 인정하고 그냥 있는 그 -22-
  • 23. 곰자가 만난 해방촌 사람들 대로, 부족한 바를 인정하며 그 분들의 이야기를 내놓는다. 작년에 혼자 독립했을 때 밤마다 무서워했었다. 나는 혼자 살기에 적합하지 않 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해방촌에서 마을 조사를 하면서 마 을분들 하나 둘 얼굴을 익히게되니, 해방촌 오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대부분 익히게 되니 이 동네에서 혼자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것이 야 말로 마을커뮤니티의 시작이 아닐까.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잔소리를 퍼부은 나를 항상 받아준 해방촌 팀원들과 묵묵 히 지켜봐 준 지음과 마을이라는 게 어느 한 계층만 중심이 되서는 구성될 수 없다는 걸 알려준 해방촌 사람들에게 나의 사랑을 보낸다. 그리고 이 부족한 글을 부끄러움의 밑천으로 삼고 더 나아가고 싶다. - 곰자 2013.10.03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