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deShare a Scribd company logo
1 of 156
Download to read offline
1   2
목차



                             0화 ‘뜬금없이 시작된 High Tension’     2p
DR 하이텐션!!                    1화 ‘대책없이 굴러온 Big Stons’        7p
 Drama Radio HighTension!!   2화 ‘돌아오지 않는 High Return’       84p
                             3화 ‘죽기보다 힘든 Club Activity’     170p
      글쓴이: 가람해무              4화 ‘일상은 마치 Silent Syllable’    240p
                             5화 ‘끝나기 전까지는 Never End'       305p




           3                                  4
“제군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눈앞에 닥친 이 위기를 넘
                             기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시작부터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이건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 고립된 채 압도적인 규모의 적과 난전을 앞둔
                             소대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물론 아니다.
                             그들이 모인 곳은 미술실의 일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
                             뿐인 부실이고, 중앙에 놓인 탁자도 책걸상을 대여섯 개
                             붙여 만든 것에 불과하다.
0화 ‘뜬금없이 시작된 High Tension’   “즐거운 일, 괴로운 일도 참 많이 있었습니다만, 그것도
           프롤로그              이제 오늘로 마지막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부는!”
                             소년은 두 손을 책상 위에 턱 하니 올려놓은 채, 자신을
                             향한 학생들의 시선을 하나하나 맞추며 말을 잇는다.
                             “……사실상 폐부될 테니까요.”
                             “하아.”
                             학생들이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결론이 그 쪽이였던 거에요?”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거네.”
                             "솔직히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지만.”
                             그렇다. 서두가 제법 거창하고 희망찬 늬앙스였지만 결국
                             이건 폐부 선언, 아니 통고일 뿐이다. 대한민국에 널리고
            5                                 6
널린 고등학교 중 한 곳에서 벌어지는, 어떤 부의 시작과    습이다.
그 끝을 알리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나만 아니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건데, 미안해…….”
물론 자신들이 활동하고 있는 부가 하루아침에 폐부되는      “아뇨! 이건 전~혀 선배 잘못이 아니라고요!”
심정이야 테러리스트의 음모를 막지 못하고 도심          그 모습에 주먹을 쥐고 분연히 몸을 일으킨 소녀는 신가
한가운데에서 핵폭탄을 터트리도록 용인해 버린           인.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가 그녀의 과격한 움직임을
특수대원들의 심정과 어떤 의미에서는 크게 다를 바        따라 마치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교복 차림의 남녀 다섯      “선배! 기운 좀 내세요! 이깟 부가 망한다고 뭐 지구가 끝
명으로는 그런 숙연한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으니까.       장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뭐, 그렇게 되어버렸으니, 본인도 매우 유감입니다.”     “……그건 너무 포지티브한 것 같은데.”
탁자 앞에 홀로 서 있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그는 금발    “긍정적인 게 뭐 어떤가요!”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이질적인 모습이었는데, 정작       신가인은 홍미나의 날카로운 지적에도 불구하고 팔을 크
이목구비는 동양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게 펼쳐 힘차게 흔드는 시늉을 했다.
“뭐야, 그 태도는. 부가 망했다는 선언을 한 부장 주제에   “긍정적인 건 좋은 거잖아요? 뭐라고 할까요, 이건 쇼트케
지나치게 뻔뻔한 거 아니야? 좀 더 책임감을 가지라구!”    이크 위의 딸기 같은 거라고요!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고
그런 그를 향해 쏘아붙인 소녀는 2학년의 홍미나.        별 거 아니지만 실제로는 별 거란 말이에요!”
흰색 머리끈으로 질끈 묶은 평범한 포니테일에 다른 학생     “나도 가인이 말에 동의해.”
들보다 머리 하나는 작아 보이는 체구였으나, 당당한 태도    침착한 어조로 그녀의 주장에 찬성한 건 작은 키에 안경
때문인지 존재감 하나만은 부실에서 단연 돋보인다.        을 쓴 소심한 인상의 소년이었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 사
“정말 미안해……이건 모두 나 때문이야.”            이로 반쯤 뜬 눈이 몇 번 깜박거리는가 싶더니,
홍미나의 반대편에 앉은 채 연신 사과를 반복하고 있는      “지금은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라고 봐.”
짧은 머리카락의 소녀는 3학년의 윤미영.             남궁현은 읽고 있는 책을 툭 덮으며 말을 이었다.
부실 내에서도 눈에 띄게 큰 키에 남자처럼 짦은 머리카     “부장도 지금까지 꽤 애써왔고, 우리 역시 할 수 있는 건
락을 한 그녀는,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풀이 잔뜩 죽은 모   다 해본 거잖아. 그 결과가 폐부인 건 좀 아쉽지만.”
               7                                    8
그 말에 부실 내의 모두는 조용해졌다.             조금 더 먼 곳에서부터 이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자.
김영민 역시 아까 전부터 두 손바닥을 책상에 댄 채 바닥   이것은 대한민국의 어느 한 고등학교를 무대로 한 혈기
만 내려다보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현은,      왕성한 소년 소녀들의 작은 반란극이자, 당연한 현실에 저
“부장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항하는 겁없는 이들의 청춘군상극이기도 하다.
“나는…….                            이른바 학교를 무대로 벌어지는 혁명이자 반란이다. 앞뒤
김영민은 언젠가 그 질문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었던 것처    재놓지 않고 마구 덤벼들어 부 이름도 하이텐션이다.
럼 곧장 입을 열었지만, 이내 말문이 막혔다. 우스갯소리   그럼 DR은 대체 무엇의 약자냐고?
처럼 폐부라는 말을 꺼내긴 했지만 결국 마지막 결정을     그에 대한, 그것과 관련된 여러 가지 설명을 하기 위해서
내려야 하는 건 부장인 그인 것이다.              는 먼저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DR 하이텐션
“……그러니까.”                         부가 만들어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바로 그 사건부터
이윽고 김영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기다리고 있던 모두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의 시선,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모습과 마주했다.     그러니까, 어디 보자.
창 밖으로 보이는 어둠이 깔린 운동장.             그건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일 전, 봄을 완벽하게 쫓아
환하게 불이 켜진 채 늘어서 있는 수많은 교실들.       낸 겨울이 강적인 여름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달아나며 한
학교의 담을 따라 운동하고 있는 사람들.            바탕 튀긴 비로 짜증나던 6월 초의 일이었다.
언덕을 넘어 한참 아래에 위치한 도시의 무수한 빛.
이제 내일이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같은 풍경을 공유하던
정든 부실을 떠나 일상의 교실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무익한 파병이었다. 잘못된 쪽의 함정 카드였다. 초록색을
놔두고 빨간 선을 자를 걸 그랬다라고 부르짖기엔, 이미
장롱 구석에 선로라도 깔린 것처럼 굴러들어가 보이지도
않는 500원짜리 동전처럼 돌이킬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                                 10
구우우우우우-
                          여객기 한 대가 하얀 구름을 뿜어내며 날고 있는 하늘 아
                          래, 정장 차림에 금발머리를 한 소년이 서 있었다.
                          그의 앞에 보이는 웅장한 학교는 ‘명문고등학교’ 전국에서
                          도 명문대 진학률이 가장 높기로 유명한 곳이다. 더불어
                          명문고 명문고 하지만 실제로 이 학교 이름은 밝을 명 자
                          에 글월 문 자를 써서 ‘명문(明文)’ 고등학교다.
                          넒은 운동장으로 이어지는 입구에서, 소년은 수많은 창문
1화 ‘대책없이 굴러온 Big Stons’   으로부터 쏟아지는 시선으로 선텐이라도 할 기세였다.
     소년! 바다를 넘어서 오다!


                          “미안하지만, 김영민 군. 그건 우리 쪽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처음부터 뭔가 오해한 것이 아닙니까?”
                          지금 말하고 있는 자는 단정한 블라우스 차림을 한 중년
                          의 여성으로서, 이름은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 여기서는 일
                          단 ‘이사장’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기로 하자.
                          그녀는 대한민국에서도 최고의 시설을 가지고 있다는 명
                          문고등학교의 이사장답게, 흠잡을 데 없는 고급 마호가니
                          탁자를 참호로 삼은 채 다짜고짜 이사장실로 쳐들어 온
                          이 당돌한 학생을 마주했다.
                          “아니요. 이건 횡포입니다! 완전 사기입니다! 그렇게밖엔
           11                             12
들리지 않습니다! 애초에 제가 이 학교에 무엇 때문에 들    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만 그런 게 아니지요.”
어왔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모든 고등학교라니…….”
“이 곳이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명문 고등학교니까요.”      “학생은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캐나다에서 장기간 유학
그야말로 수월하고 타당한 결론이다.                했었지요? 하지만 이젠 영구 귀국했으니 한국에서 고등학
하지만 이사장의 눈앞에 서 있는 금발머리에 푸른 눈동자     교를 졸업해야 할 테고, 대학교도 가야지요.”
의 소년, 김영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겁니까?”
“특례 입학을 허가해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그건 어디까    상대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교장
지나 제 꿈을 펼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꿈을 펼치면 되잖아요? 졸업할 때까지 3년 간    “그런데 김영민 학생. 어제 소개했던 문예부에는 가지 않
학비 전액 지급이라는 파격적인 조건, 당신의 수상 경력을    았습니까? 혼자 자율학습을 멋대로 빠지는 것은 교칙상
높이 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허가할 수 없지만, 문예부 소속이라면 정식으로 자율학습
번뜩이는 뿔테 안경 너머로 바라보면서 천연덕스럽게 말      대신에 부 활동을 할 수 있을 텐데요.”
을 잇는 이사장의 모습에, 김영민은 두 팔을 펼친 과장된    “그야 물론 말씀하신 즉시 달려가보았습니다만!”
포즈로 목소리를 높였다.                      김영민은 그 때의 기억이 나는 모양인지 바득바득 이를
“하지만 전혀 펼칠 수 없다고요! 이런 곳에서는……11시    갈기 시작했는데, 으르렁거리는 것이 마치 금방이라도 상
까지 책만 죽어라 들여다봐야 하다니, 그래서야 제 꿈을     대에게 송곳니를 드러낼 기세였다.
이루기 위한 시간이 전혀 없단 말입니다!”
그들의 대치를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짓는 바람에, 이사장과 김영민 모두 그를    소년이 문예부에 처음 들어가 인터뷰했을 때의 광경을 한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럽게 주의가 이쪽으로 쏠린 것    번 떠올려 보도록 하자.
을 깨달은 그는 느긋하게 입을 연다.               정규 수업을 마친 뒤 부리나케 문예부실로 뛰어들어온 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학생은 뭔가 잘못 알고 있군요.   영민은, 그곳에서 교장의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문예부의
한국에 있는 고등학교는 모두 본교와 같이 야간자율학습      여 부장과 마주할 수 있었다.
                13                                  14
그 장면에서 순순히 부 가입 신청서를 냈다면 모든 일은      그 말을 들은 문예부원들은 다들 뜨거운 햇볕에 널린 오
깔끔하게 풀리고 앞으로의 고생도 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징어마냥 부실 여기저기서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김영민의
“이딴 게 무슨 문예부입니까!”                   과격한 주장에는 홍미나도 심기가 뒤틀린 모양인지, 의자
문예부장의 부 설명을 들은 김영민의 첫 감상은 그러했다.     에 앉은 채로 상대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적진에 들어가 항복 문서에 조인하려던 패장이 갑작스럽       “부, 불……아니, 분석과 평론은 창작의 기본. 쓰기 위해
게 ‘우리 군은 최강이다! 항복은 개나 줘버려라!’ 라고 깽   선 먼저 쓰는 것에 대해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는데?”
판을 부리는 장면이 연상된다면, 그보다 더 난장판인 상황     날카로운 눈썹 하나가 묘하게 이그러져 있는 채였지만, 과
을 떠올려 보도록 하자.                       연 상대의 난폭한 언동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
게다가 상대는 여학생임에도 불구하고 가차없는 이 태도       여주지 않는 것이 한 부의 책임자다운 면모다.
가 또 김영민의 안하무인격인 태도를 한층 더 빛나게 만      “글은 머리로 생각하면서 쓰는 게 아닙니다!”
드는 요인이었다.                           김영민은 돌연 검지를 들어올리더니 척 하고 그녀를 향했
“하아? 너, 뭐야. 시비거는 거야?”               다. 본의 아니게 모두의 시선이 그 끝을 향해 집중된다.
건방진 후배 대응하는 매뉴얼을 사전에 탐독한 게 아닌가      “자신의 가슴으로, 하트로 쓰는 겁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의심될 정도로 차분하게 대응하는 이 여학생의 이름은 홍      그 크기에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정
미나. 더불어 2학년, 문예부의 부장. 상대가 불이라면 그    신력으로 불태워야 하는 겁니다!”
녀는 액체질소에 버금가는 냉정함을 지닌 듯했다.          정론이라면 정론이겠거니와, 열의에 불타는 김영민의 삿대
“모집 기간도 아닌데 받아줬더니만, 뭐가 불만인데?”       질하는 기세가 지나친 게 문제였다.
“시험에 나올 만한 고전 따위나 분석하는 게 무슨 문예부     “이이익…….”
입니까? 그건 문학부, 아니 시험 대비부입니다! 시의 운율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홍미나는 지금까지 참았던 분노
이나 형식. 숨겨진 의미 따위를 공부해서 도대체 뭘 하자     를 한 번에 폭발시켰다.
는 겁니까? 그거야말로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거나 다름     ““당장 나가!”
없는 거 아닙니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홍미나는 소년을 밀쳐내다시피 입
“뜨허억!”                              구로 쫓아내며 외친다.
                15                                  16
“너 같은 녀석은 절-대로 안 받을 거니까!”          소년의 즉답을 들은 교장이 이사장을 바라보며 인자한
“흥, 저도 이런 멸치 머리 같은 부에는 있고 싶지 않습니   웃음을, 어디까지나 실실 흘리고 있다. 이런 녀석을 대체
다. 동태 눈알은 영양분이라도 있지만, 여러분은…….”     어디서 주워왔느냐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 있는 이 금발머리의 소년은 그
그 짦은 시간 동안 주먹과 발을 이용한 몇 번의 난투가     불량한 태도와는 달리 의외로 전도유망한 인재라는 것을
있었지만 김영민이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체격을 이용해       이사장은 잘 알고 있었다.
기적적으로 전탄 방어했다는 사실은 굳이 열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물론 가드가 한 번이라도 뚫렸다면 그대로
기어나가야 했을 정도로 아슬아슬했지만.              비록 수상하진 못했지만 김영민은 외국 문학계에서
아무튼 서로에게 최악의 인상을 안겨준 그것 하나만큼은      알아주는 황금문학상 영화 시나리오 부분 최연소 후보에
분명하다고 이 자리에서 당당히 서술할 수 있겠다.        오른 적이 있었다.
                                   한글과 영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여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이며, 심지어 설레발치기 좋아하는
“그야말로 저질러 버렸다는 느낌이로군요.”            일부 언론에서는 그가 장래 노벨문학상 후보로 선정될
김영민의 설명을 들은 이사장은 다짜고짜 한숨을 쉬더니,     가능성이 높다고 할 정도이니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할
이내 미간을 한 손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것이다..
“게다가……그건 거의 성희롱에 가깝지 않습니까?”        처음에 김영민이 영구귀국을 목적으로 한국에 입국했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설명을 요구합니다.”     때는 스타도 아닌데 공항에 취재진들이 찾아올
“그럴 의도가 없다는 것이 더 질이 나빠요. 자신이 깨닫지   정도였으나, 사실 소년의 유명세는 거기까지였고 그
못하고 있다는 거니까……. 김영민 군. 캐나다 유학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시절에는 친구가 몇 명이나 있었죠?”               후보에 한 번 오른 이후론 별다른 창작 활동이나 수상
“글을 쓰는 데 친구 따윈 필요 없습니다. 창작이라는 것은   경력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헐리우드의 유명한
기본적으로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니까요.”
                  17                                18
극본가인 아버지의 후광을 받은 도련님에 지나지         “하지만 김영민 학생. 문예부가 자네에게 맞지 않더라도,
않는다는 상반된 혹평도 틀림없이 존재했으니까.         형식적으로 가입한 뒤에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해도 되는
                                  것 아닌가? 교칙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만.”
                                  “아니요. 저는 문제가 있습니다.”
“흔치 않은 포트폴리오에요. 가능성에 투자하는 거죠.”    교장의 말을 들은 김영민은 단호하게 반박했다.
"이사장님 생각은 알겠습니다만, 외국 생활을 하던 학생이   “그런 거짓 활동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예부원인데
본교의 엄격한 규율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지."       문예부의 활동을 하지 않는다니, 그래선 이중 스파이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본교의 명성에 조금이라도    다름없지 않습니까? 저는 스파이가 아닙니다!”
도움이 된다면 지구 반대편에서도 데려올 거니까요."      “묘한 부분에서 성실한 학생이로군.”
김영민의 특례 입학이 결정된 후로 교장이 의문을        교장 선생님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영민은 그저 손을 들어
제기했을 때, 이사장의 대답은 실로 명쾌했다. 분명      금발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넘겼을 뿐이었는데, 그 동작
그녀라면 모국에서 반출된 대량살상무기라도 본교의        하나하나에도 고집이 잔뜩 묻어나오는 듯했다.
명성만 올리는데 쓰일 수 있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정말이지 하는 수 없군요.”
사용하서라도 확보했겠지.                     이사장은 소년의 불만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즉, 다른 명문고에 대한 견제와 최소한의 억지력 확보는    모양인지, 팔짱을 낀 채로 목소리를 높인다.
이사장이 항상 주장하는 전국 최고의 독보적인 명문고를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문예부 가입이
위해 필수불가결한 절차였다. 그런 피나는 노력 끝에      싫다면 당신이 이 곳에서 원하는 부를 스스로 만들어
오늘의 명문고등학교가 존재하게 된 것이니만큼, 교장도     보는 것으로, 그거라면 불만은 없겠죠."
그 결정에 더 이상 반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교장과 영민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조건이었던 것이다.
                                  "이사장님!"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19                                  20
이사장은 앉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난 교장을 향해          않았지만 존재해야 할 목적 하나만은 분명했던 DR 하이텐
괜찮다는 것처럼 손을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션 부의 시작이었다.
"교장 선생님. 부 설립에 대한 본교의 규칙이 어떻게
되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음, 다섯 명 이상의 부원과 부 및 개개인의 활동 신청서.   그렇게 되어 애초에 부라는 것이 몇 개 존재하지도 않던
그에 대한 학생회의 승인이 필요하지요. 말로 하자면야       명문고등학교에 뜬금없이 또 하나의 신생 부가 뚝딱 설립
매우 간단한 절차입니다만, 생각보다……"              되었던 것인데, 문제는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그 정도 설명이면 충분합니다. 영민 군?"            것이었다.
“말씀하시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마음에 맞는 부원들을 모집한 뒤에
이사장의 분위기가 방금 전과는 달리 무뚝뚝해진 것을 깨      부 설립 신청을 하니까 이런 일이 없었겠지만, 처음부터
달은 김영민은 반사적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그 순간 그     신생 부의 부장이자 유일한 부원으로 시작한데다 거의 10
녀의 뒤에 있는 큰 창문으로 비치는 강한 햇살 때문에 소     년 만에 고국에 발을 디딘 김영민은 안타깝게도 학교에서
년은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이사장의    의 인맥이 동네 뒷산에 묻혀 있는 산삼을 우연히 발견했
목소리는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귓가에 들어왔다.           더니 실은 산삼도 아니고 인삼도 아닌 돌연변이였더라 정
“부로서 존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인 5명의 부원, 그    도로 현저히 낮았던 것이다.
리고 한달 후에 있을 학예회까지 부활동의 성과를 보여줄      소년이 명문고등학교에 입학한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
것. 그게 가능하다면 영민군이 설립한 부는 앞으로도 존속     일까? 아니, 오히려 현실은 그 반대였다. 처음 등교했을
시키겠습니다. 한마디로 방과 후에는 학생 마음대로 부활      때 선도부장과 정면으로 격돌한 것은 학생들 사이에서 두
동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죠. 하지만 한달 후에도 이 조건    고두고 회자될 정도였으니까.
을 만족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불만 없이 부를 폐쇄하고
문예부원으로서 활동하는 것으로, 어떻습니까?”
어쩌고 자시고도 없었다.                       만약 당신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불량한 학생을 잡아내
바로 이것이 당시에는 아직 이름도 활동 분야도 정해지지      기 위한 선도부 소속의 부장이고, 185센티의 우월한 키와
                21                                22
덩치를 자랑하며, 지금은 등교하는 학생들로 한창 번잡한     “염색 금지라고요? 제 머리는 자연 금발입니다. 그렇다면
새벽의 교문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자.            검은색으로 염색하는 것이 오히려 본교의 교칙에 위배되
그런 당신의 눈앞에 처음 보는 소년이 그것도 틀림없이      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만?”
제대로 된 명문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데, 햇살에 빛나    “너 이 자식……사람을 바보취급 하는 것도 정도껏 해! 한
는 금발머리에 푸른 눈까지 한 도전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국인이 자연 금발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올려다보고 있다면 뭐라고 말을 붙일 것인가?           “당신에게는 일일히 설명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군요. 여
“헤, 해브 어 나이스 데이?”                  기 책임자는 누굽니까? 책임자를 불러 오세요.”
“송구스럽습니다만, 기분이 그리 좋지 못합니다.”        “채, 책임자라니. 학교가 무슨 레스토랑인 줄 알아? 이게
무표정한 모습으로 대답하는 소년을 바라보는 선도부장의      지금 나랑 장난 치자는 거야 뭐야!”
인상이, 마치 손님을 떠나 보내고 닫히는 자동문마냥 신속    격분한 선도부장이 주먹을 들어올린 바로 그 순간,
하게 찌푸려지기 시작한다.                     “잠깐!”
“……내 마지막 남은 자긍심을 돌려줘.”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 동작을 아슬아슬하게
“한국의 로우 개그, 무척 어렵군요.”              정지시켰다. 얼굴이 벌개진 선도부장과 여전히 무표정인
“이놈이 끝까지……그럼 이해하기 쉽게 가르쳐 주지!”      김영민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을 향한다.
선도부장은 소년의 명찰 색깔을 보며 인상을 팍 쓰더니.     “너희들 뭐 하는 짓이야? 학교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정문
다짜고짜 손을 뻗어 상대의 머리카락을 쥐어올렸다.        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둘 다 부끄러운 줄 알아!”
“1학년 주제에 대체 꼬라지가 이게 뭐야? 요란한 염색에    포니테일을 휘날리며 빠른 보폭으로 다가온 것은 다름아
다 컬러 렌즈까지……우리 학교는 염색 금지다! 심지어 새    닌 홍미나였다. 선도부장은 그녀가 누군지 알아챘는지, 곤
치조차도 허락하지 않아! 몇 학년 몇 반이냐?”         란하다는 표정으로 김영민을 향해 턱짓을 해 보였다.
그 소란에 등교하던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그 둘을 향해     “하지만 미나야. 이 녀석 꼴을 보고도 말릴 생각은 아니겠
쏠렸으나, 정작 당사자들은 그런 분위기를 전혀 신경쓰지     지? 이건 내 선도부 2년 경력에 처음 보는 꼴이라고! 너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은 상대의 덩치에 전혀   도 선도부장까지 해봤으니 무슨 뜻인지 알잖아?”
굴하지 않은 채 선도부장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던 것이다.     그들 바로 옆까지 걸어온 홍미나는 김영민을 한 번 흘끔
                 23                               24
쳐다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저런     없을 정도입니다. 가정 교육을 판타지로 배웠습니까?”
꼴을 하고 있다면 누가 봐도 황당하겠지. 선도부장이 그렇     그 순간 선도부장과 홍미나는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게 생각한 순간, 그녀는 예상치 못한 말을 내뱉었다.       버릇이 없는 건 너잖아!
”이 녀석 말이 맞을 거야.”                    이 사건은 김영민의 등교 첫 날 벌어졌던 사소한 충돌 중
“그럼 그렇지……아니, 뭐라고?”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뭐, 그와는 그 날 밤에 문예부실에
“이사장님이 며칠 전에 캐나다에서 귀국자녀가 온다고 했      서 최악의 형태로 한 번 더 마주치게 되지만, 결과는 이미
거든. 한국어가 능숙하다더니, 그게 정말인가 보네?”       여러분들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거, 거짓말이야!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의 소년 따위가 현
실에 있을 수 있겠냐! 미소년이 아니라도 대 쇼크!”       그 일이 있고 나서 불과 이틀 만에 또 다시 정문 앞에서
지금에 와서는 새삼스러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홍미나는 단어 그대로 땅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의미불명의 리액션까지 취하며 경악       이 꺼져라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하는 선도부장을 뒤로 한 채, 홍미나는 환한 미소와 함     참고로 그때와 다른 점은 김영민이 공격이고 선도부장이
께 소년을 향해 말을 걸었다.                    방어라는 상황의 차이 정도인데, 이건 절대 논쟁 외에 다
“저기저기, 얘. 너 이름 김영민……이었던가, 맞지? 이 누   른 의미에서의 공수가 아니니 주의하기 바란다.
나는 홍미나라고 하는데, 2학년의 문예부장을 맡고 있고,     “어째서 안된다는 겁니까? 부 홍보 전단지일 뿐인데.”
아마 앞으로 너와는…….”                      “글쎄, 뭐든 간에 그런 종이쪼가리는는 정문에 못 붙이는
마치 잔잔한 호수를 연상케 하는 눈동자에 그녀의 호기심      것이 교칙으로 정해져 있다니까? 그런 건 알림판에 붙이
어린 얼굴이 비친다. 소년은 작은 입술을 천천히, 그러나     면 되잖아!”
단호하게 움직여 대답했다.                      “싫습니다. 알림판 따위 누가 본다고.”
“불청객에게 가르쳐 줄 이름 따윈 없습니다.”           “규칙은 규칙이다!”
“에엑?”                               “현대 사회에서는 저투자 고수익이 기본인 겁니다. 고등학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끼어들다니 버릇이 없어도 정도가      교 2학년이나 되면서 어떻게 그런 것도 모릅니까?”
있어야죠. 이건 뭐 같은 동방예의지국에 있다고 믿을 수      “아니아니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거든요.”
                   25                               26
명백한 조롱을 담은 상대의 대꾸에 김영민의 안색이 새파     선도부장의 안색이 마치 동그랑땡이 급속 해동되는 것마
래지기 시작한다. 소년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한 손으    냥 돌아오더니, 그의 우락부락한 얼굴에 눈물이 맺힌다.
로 입을 막더니 선도부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준 거야?”
“갑자기 왜 존댓말입니까? 덩치 산만한 남자가 존댓말 쓰    “그렇습니다.”
니 기분 매우 나쁩니다. 앞으로 주의해 주세요.”        “너, 사실 좋은 놈이었구나!”
조롱이 통하지 않았다.                       덩치 큰 선도부장이 어울리지 않게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조롱에 조롱으로 대응한 것일지도 모르겠지     그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홍미나의 안색은, 마치 늪에
만, 이 소년이라면 오히려 진심일 것 같다. 양쪽 모두 선   빠진 채 겨우 몸만 건지고 기슭으로 빠져나왔더니 본넷부
도부장의 속을 뒤집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터 서서히 침수되고 있는 고급 스포츠카를 바라보는 주인
“너, 너 이 자식…….”                     의 그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스팀을 마구 내뿜는 밥솥마냥 혼자서 씩씩거리고 있던 선     ‘우와……위로 받은 여자애도 아닌데!’
도부장은,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홍미나를 발견하     그러나 김영민은 이성을 잃은 선도부장이 자신을 껴안기
고는 일말의 기대를 담아 힘차게 손을 흔든다.          바로 직전에 홍보지를 척 하고 두 손으로 펼쳐 보였다.
‘도와줘!’ 이 자식이 또 아침부터 시비를 걸고 있어!’    “정문에 붙일 수 없다면, 당신 배에 붙이겠습니다.”
‘미안, 나도 감당 못해.’                    “그래! 아니, 뭐?”
홍미나는 맞붙은 두 손을 합장하는 시늉을 해 보인다. 그    김영민은 주변을 둘러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잇는다.
의미를 깨닫고 도움을 요청하던 모습 그대로 하얗게 불타     “생각 같아선 학교 명패 위에 붙이고 싶지만, 이곳도 상대
버린 선도부장을 향해, 김영민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적으로 제법 잘 보이는 곳이니까 괜찮겠죠. 또 당신이라면
“권력의 시녀란 정말이지 가엽기 그지없군요. 위쪽에서 하    학생들의 시선이 신속하게 아래쪽으로 내려올 테니.”
라는 대로 해야만 하니. 하지만 저도 상대를 궁지에 빠트    “…….”
려서까지 억지로 밀어붙이는 어린애는 아닙니다. 정문에      다른 의미로 굳어버린 선도부장의 배에 부 홍보 전단지를
홍보지를 붙이는 건 포기하겠습니다. 규칙을 지키는 것이     댄 김영민은 곧장 작업을 개시했다.
당신의 역할, 그 끈기에는 감동했습니다.”            한 손을 뻗어 위쪽을 고정하고 반대쪽 편에 테이프를 붙
                  27                               28
인다. 그러면서도 불평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소년의 말은    넓혀 달리기 시작했다. 선도부장의 곁을 지나친 순간, 그
끊임없이 이어졌다.                         는 굳은 모습 그대로 겨우 입술을 움직인다.
“숨쉬지 마세요. 종이가 찌그러지니까요. 거시기 부분이     “보, 복수를…….”
불필요하게 튀어나와 있군요. 아, 그렇군요. 테이프 자르    “맡겨줘! 편안히 성불해라!”
는 김에 이것도 같이 자르면 평평하니까 홍보지 내용이      아직 안죽었어! 라고 외치는 선도부장을 뒤로 한 채 홍미
더 잘 보일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나는 김영민의 뒤를 쫓아 달렸다. 어째서냐고? 흔해빠진
“…….”                              사랑이나 복수와는 관계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읏차,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작업이 끝났군요. 이 전단
지는 학생들 등교가 끝나면 필히 소각하세요. 뭣하면 당신
도 같이 소각되어도 상관없습니다만.”               “그래서, 제 시간을 낭비할 만한 이유는요?”
김영민은 선도부장의 배에 붙여 놓은 부 홍보지를 손바닥     본관으로 향하는 몇 가지 길 중에서도 가장 사람이 없는
으로 툭툭 쳐서 제대로 붙어 있는지 확인하고는,         건물 옆의 작은 샛길. 넝쿨이 무성하게 걸린 아치형의 철
“방금 그건 가벼운 농담이에요. 협력 감사합니다. 일이 잘   제 프레임 아래에 서 있던 김영민의 첫 마디는, 없던 호의
풀리면 나중에 커피라도 한 잔 사도록 하죠.”          조차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라는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내뱉으며 유유히 선도부장의      “지금부터는 매점에 들릴 예정이란 말입니다. 섭취하지 못
곁을 떠나갔는데, 그 뒷모습은 정말로 홀가분해 보였다.     한 모닝커피의 원한은 무시무시하지요.”
“…….”                              걷다가 상체만 돌려 뒤를 돌아본 포즈를 여전히 유지하고
남겨진 것은 만화가가 채색을 잊어버린 듯한 선도부장의      있었는데, 별 일 아니면 그대로 가던 길 갈 기세다.
모습과, 어째서인지 그와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듯 애써    “너, 너 말야…….”
외면하는 수많은 학생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    홍미나는 두 팔을 허벅지에 댄 채 잠시 숨을 고르더니 천
고 있을 뿐인 홍미나 정도일까.                  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검지 끝을 소년을
“참! 이럴 때가 아니지.”                    향해 척 하고 치켜세운다.
그녀는 결심한 듯 성큼성큼 발을 내딛더니, 이내 보폭을     “뭐야, 그 건방진 태도는! 아까 그 녀석은 겉으로는 3학년
                  29                                30
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은 2학년이라고! 외국물 좀      다. 당신, 아니. 선배에게 추궁당할 이유는 없는데요.”
먹으면 선배 대접은 신경도 안 쓴다 이거야?”           “조건은?”
“……이거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그럼 선배. 이쯤에서 제     “……조건이라뇨?”
시간을 낭비한 것에 대한 변명이라도 듣고 싶은데요.”       “이사장이 부 설립을 대가로 제시한 조건 말이야!”
이 녀석에게 예의에 대한 태클은 틀림없이 불필요한 시간      김영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을 뿐, 평소처럼 그녀의
낭비를 야기할 것이라는 직감이 든다. 홍미나는 상대의 표     질문에 곧장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멀뚱히 쳐다보는
정에서 그 사실을 읽어낸 것처럼 맥없이 손을 내렸다.       것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모양인지, 한참 후에야 ‘……이
“방금 그 전단지는 도대체 뭐야?”                 사장이 제시한 조건은’ 하고 운을 떼었다.
”부 홍보지입니다. ‘진짜만을 위한 당신의 부’ 가 모토죠.   “다섯 명의 부원과 함께 한 달 후의 학예회까지 부 활동
더불어 여기서의 가짜는 그쪽을 의미합니다. 이슈를 끌기      의 성과를 보일 것. 뭐, 이쯤이야 간단하죠.”
위해 대결 구도를 좀 넣어봤는데 어떻습니까?”           “포기해.”
“허락도 없이 문예부를 정체불명의 집단과 묶지 말아줘.      홍미나의 단언을 들은 김영민은 그녀를 향해 완전히 몸을
그보다 너, 진짜로 부를 만들 생각인 거야?”           돌렸는데, 그림자 때문인지 소년의 푸른 눈동자가 마치 심
“두 말하면 지저귐이죠.”                      해처럼 짙은 색을 띤다.
“도대체 무슨 활동을 하는 부인데?”                ”전국에서도 가장 빡세다는 명문고의 이사장이야. 그 독한
“그런 건 부원을 모집한 후에 생각해 볼까 하는데요.”      여자가 부 활동 같은 걸 잘도 인정해 주겠다. 게다가 이런
천연덕스러운 소년의 대답을 들은 홍미나는 기가 막힌 듯      정체도 모를 부에 누가 들어가려고 하겠어?”
입을 벌렸다. 무슨 부인지도 결정이 안 되었는데 냅다 홍     “ 이사장씩이나 되는 위치에 있는 자가 스스로 약속한 걸
보부터 하다니, 이 녀석은 얼마나 성질이 급한 거야?       뒤집을 리 없습니다. 게다가 겨우 네 명만 더 모으면 되는
“……그런 건 왜 물어봅니까?”                   걸 왜 포기해야 하죠? 발언의 저의가 의심되는군요.”
김영민은 그녀의 심정 변화를 눈치챈 모양이다.           천연덕스러운 소년의 대꾸를 들으며, 홍미나는 자신의 입
“스파이입니까? 방해 공작입니까? 아쉽게도 부 설립은 어     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초조하다는 증거다.
제 이사장님과 교장 선생님에게 정식으로 인가 받았습니       그에게는 분명 그렇게 보일지도 몰라.
                 31                                 32
전 학년 합쳐 천 명 가량의 재학생을 보유하고 있는 명문    “뭘 무서워합니까? 저는 마음에 안 든다고 무작정 타인을
고등학교. 학생 수만 놓고 보자면 그 중 네 다섯 정도는    때릴 만큼 난폭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오해받아
산술적으로도 극히 일부에 불과할 터.               상처 입은 제 하트는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아.                    “으, 으흠! 누가 무서워했다고 그래!”
그 사실을 홍미나는 잘 알고 있었다.               홍미나는 그제야 자세를 바로 한 채 헛기침을 했다.
“이 학교에서의 부 활동 사실은 부모에게 바로 통지가 돼.   “아까 전에도 교문에서 아무 관계도 없는 애한테 한바탕
명문고 학생이 부에 가입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      독설을 해 놓고선, 네가 그런 말을 할 주제가 되니?”
줄 알아?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나아! 지금이라면 아직 다른   “남의 하트 따위는 부서지든지 말든지.”
학생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테니 쪽팔리지도 않…….”      “우와아아…….”
김영민이 대답 대신에 쯧 하고 혀를 차는 바람에, 홍미나    “그것보다 선배. 넥타이.”
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인 채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평   김영민은, 문득 두 손을 들어 목을 만지는 시늉을 해 보였
소의 괄괄한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다.               다. 영문을 모른 채 아래쪽을 내려다 본 홍미나는 자신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붉은색 넥타이가 약간 헐거워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던 발소리는, 불과 몇    “그거 끝까지 제대로 올리세요. 보기 싫으니까.”
미터를 앞두고 갑작스럽게 멈추었다.                “쓰, 쓸데없는 참견이야!”
“선배는 해내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런 겁니다.”
그 말을 들은 홍미나가 힐끔 고개를 들어 보니, 놀랍게도    홍미나는 김영민이 무성의하게 오른손을 한 번 들어 보이
소년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까 전의 살벌한 기세와는     고는 본관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뭔
너무나도 딴판이라 보는 이가 어리둥절해질 정도다.        가 충고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결국 아무
“선배는 전국에서도 가장 빡세다는 이곳에서 문예부의 부     도 듣지 못할 말을 홀로 중얼거리는데 그친다.
장을 맡고 있잖아요? 그러니 불가능한 건 아니겠죠.”      “그렇게 쉽진 않을 거야…….”
김영민은 상대가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두     그녀는 곧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손을 들어올리며 억울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33                                 34
있다면 벌써 제가 처리했으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
금발벽안의 전학생이 부원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문은 점         “설마, 부원을 모집하고 있는 게 아니었어?”
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뒷걸음질로 부실을 나가려던 영민의 움직임이 일순간 정
퍼져 나갔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은 이를 단지 따분한 학창       지했다. 바닥을 향하던 시선이 다시 창가 쪽으로 향한다.
생활의 작은 유희 정도로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여전히 정체불명의 손님은 책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별 관계도 없던 선도부장의 자존심까지 도매로 팔아넘기         “부 가입 희망자? 하지만 신청서는 들어온 것이 없는데
면서 시작한 홍보전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체불명의 부에        요? 방금 전에도 교무실에서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만.”
흥미를 보이는 학생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가입하려고 했는데 부실에 아무도 없어서, 기다리고 있었
확실히 거기까지라면 홍미나가 예상한 그대로였으나, 다만        던 것뿐이야. 부 활동 신청서는 어디서 받는지 몰라서.”
관심이 ‘거의 없었다.’ 였지, ‘전혀 없었다.’ 는 아니었다.   “교무실에서 받는데요.”
                                      “난 거기가 싫어.”
                                      상대는 그렇게 말하면서 짦게 한숨을 쉬고는, 읽고 있던
“어라?”                                 책을 마침내 조용히 닫았다. 그리고는 영민을 향해 고개를
저녁 시간도 끝나고 부실의 문을 열고 들어선 김영민은,        든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은 묘하게 이지적
해질녁 창가 근처에 놓인 파이프 의자에 앉아 있던 누군        인 분위기를 풍겼다.
가의 모습을 발견했다.                          “미안하지만, 이 부실엔 신청서 없어?”
하얗게 빛나는 손에 들려 있는 책 한권, 한쪽 눈을 덮을       “예비용으로 몇 장 정도는…….”
정도로 긴 갈색의 머리카락.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은 무       “그럼 좀 부탁해. 필기구는 가지고 있어.”
릎에 펼쳐 놓은 책의 내용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김영민은 상대의 요청에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품 속에서
영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신청서 한 장을 꺼내어 책상 위에 척 하고 올려놓았다.
“들어올 부실을 착각한 모양이군요. 이거 실례.”           “실례입니다만,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아, 인터
“착각한 게 아니야.”                          뷰나 면접 같은 건 아닙니다. 개인적인 질문인데요.”
“그럼 도둑인가요? 이런 허름한 부실에 훔쳐갈 만한 게        첫 번째 가입자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타날 거라고는 생
                35                                    36
각지도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어디서 무얼 하고     은 기념지로 지정하고 보다 큰 곳으로 부실을 이전하는
있다가 이제 나타났냐면서 불평을 하고 싶은 걸까?        계획을 세워 봤습니다! 대강당은 어떻습니까?”
어느 쪽도 아니었다.                        김영민은 부실 입구와 창문 사이를 마치 웨이포인트가 찍
“혹시 당신…….”                         힌 마린마냥 횡단하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댔지만,
영민의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남궁현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일 뿐이다.
“게이입니까?”                           “이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야. 애초에 이 학교는 부
상대는 창 밖에서 들어오는 빛 때문에 붉은 빛을 발하는     활동이 극도로 위축되어 있으니까. 다른 고등학교와 비교
듯한 안경을 한 손으로 밀어올리며 대답한다.           하더라도 특히 그 정도가 더 심해.”
“난 게이(gay)가 아니야. 가이(guy)지.”        “에이, 천명 중에 넷, 아니 세 명만 더 구하면 되는데요.”
                                   “천 명이 아니야. 3학년은 학업 때문에 부 활동을 못하게
                                   되어 있으니 많이 봐줘도 오백 명 정도밖에 안 돼.”
그 소년의 이름은 남궁현이라고 했다.               김영민은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남궁현을 바라보았지만,
성은 남궁. 이름은 현.                      그는 여전히 입부서류에 시선을 두고 있는 상태였다.
입고 있는 남학생 교복만 아니면 영락없이 여자인지 구분     김영민은 흥이 깨졌는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할 수가 없는 중성적인 얼굴이다.                 “오백명이면 아직 많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겉으로 보이는 행동조차 조신해서, 사실 단지 소심    “그 외에도 이 부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더 있어.”
한 것일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영민에게 있어 그런 건 아    남궁현은 김영민이 운동장 쪽으로 열린 창문을 향해 다가
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신입부원이 들어왔다는 것.      가는 것을 곁눈질로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이야, 이 페이스대로라면 내일 다섯 명 정도는 충분히 얻   “우선 명문고의 이사장은 기본적으로 부활동을 장려하지
을 수 있겠군요! 그 이상 모이면 솔직히 이 부실이 너무    않아. 오히려 그 반대. 너는 가장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비좁아지니까 사양할 수밖에 없네요. 정말 미안해서 뭐라     사람에게 선전포고한 것과 마찬가지야. 이게 두 번째.”
고 말하고 돌려보내야 할지! 물론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    “헹! 그런 거, 이 몸은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지하기 위해, 정식으로 부를 인정받으면 이 구질구질한 곳    김영민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실려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37                               38
불어왔다.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남궁현은 다     쪽이 불리한 것은 뻔한 이야기다.
시 입부서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을 잇는다.         “아까 전부터 말하는 것이, 아무래도 당신은 페이스오프한
“너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정작 이 학교의 다    홍미나 본인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분장해서 저
른 학생들은 그렇지 않을걸. 애초에 전학생인 너에게 선심    를 속이려고 하다니, 도대체 어느 정도로 사람이 치사한
쓰듯이 부 설립을 허락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겁니까? 하지만 나의 이 매의 눈은 벗어날 순 없어! 얌전
“그야! 내가……천재 작가라서?”                 히 그 가면을 내던지세요!”
그렇게 말하며 자신만만하게 몸을 돌린 김영민은, 정작 상    “가면 아니야! 아파! 아프니까 꼬집지마! 하으!”
대가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호오, 확실히 이 질감은 가면은 아니지만, 분명히 페이스
있자 입을 삐쭉 내민다.                      오프란 영화에서는 얼굴가죽을 누군가와 바꿔치기한 거였
“치잇. 그 이유가 뭔지나 들어보죠.”              죠. 그게 맞나? 어쨌든 불독처럼 양 볼이 늘려져서 평생
“이사장은 너의 부가 존속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 학   결혼도 못하기 전에 얼른 자백하는 게 좋을 겁니다!”
교 학생들 대부분이 ‘신생부? 얼마 못 가 폐부할 그런 곳   “홍미나? 2학년 홍미나? 그 애가 뭐 어쨌다는 거야! 무슨
에 왜 가?’ 라고 생각할걸. 그리고 또 하나는.”       말인지 모르겠어! 전혀 모르겠다구! 아파!”
김영민이 순간 몸을 돌리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옪겨 순식    “호오, 제법 잘 버티고 있지만, 이건 어떻습니까?”
간에 상대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제 둘 사이에는 붙여 놓    김영민은 볼을 늘리는 것이 통하지 않자 이제는 다른 방
은 두 개의 책상 정도의 간격뿐이다.               법을 시도한다. 두 손을 뻗어 허리를 마구 간지르는 바람
“무, 무슨 일이야?”                       에 남궁현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마구 웃어댔다.
남궁현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서 있던 김영민이 갑자     ”으햐햐햐햐! 숨 넘어! 숨 넘어가! 그만! 그만해! 용서해
기 두 손을 뻗어 상대의 볼을 꽉 움켜쥔다.           줘! 착각, 흐앙! 착각하고 있는 거야! 너 착각하고 있다고!
“이게 무, 무순 쥣이야!”                    내 어디가 그 애랑 닮았다는 거얏!”
본의 아니게 웃는 표정이 되어버린 남궁현이 새빨갛게 상     “굳이 말하자면 그 존재감 약한 가슴입니다!”
기된 표정으로 허우적거리기 시작했지만, 명백히 김영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실 문이 쾅 하고 열린다.
쪽이 덩치가 더 큰데다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볼을 잡힌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정신 사나워서 도저히 부
                  39                                 40
활동을 할 수가 없잖아! 도대체 혼자 있으면서…….”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문 벽에 기대었다.
그곳에는 상대를 향해 표효하듯이 포니테일을 치켜세운        “뭐, 둘이서 소꿉놀이하는 건 아무래도 좋지만, 지금처럼
홍미나가 서 있었다. 더불어 김영민은 남궁현에게 간지럼      시끄럽게 떠들지만은 말아줘. 옆반에 실례잖아?”
을 태우기 위해 책상 위를 반 이상 넘어가 있는 상태. 그    “아니 선배는 남의 부실에 쳐들어 와서 도대체 무슨 실례
모습을 보던 홍미나의 눈이 조금씩 가늘어진다.           의 말씀을 하는 겁니까! 부실은 부원의 사유지이자 완전면
“무슨 미친 짓을 하나 했더니…….”                책지대! 게다가 이건 엄연히 친목 활동의 일환…….”
“아니? 페이스오프가 아니라 더블이었습니까!”           “친목은 무슨 얼어죽을! 남자 둘이서 쎄쎄쎄라도 하게?”
김영민은 책상 위로 축 늘어져 버린 남궁현을 남겨둔 채      김영민은 홍미나의 반박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쪽을 향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다.     그녀의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이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소리야. 너 그것보다, 이런 취미가 있었니?”       “하, 하하. 그러니까 제 말은.”
일단 홍미나의 한 수.                        어느 정도로 임팩트가 있었냐 하면, 복도에 깔린 어둠이
“들어오자마자 못볼 걸 봤네. 그래서, 저 애는 몇 학년 몇   그녀의 등 뒤에서 솟아올라, 마치 생명체처럼 스물스물 부
반에서 납치해 온 건데? 아무리 부원 모집이 절망적이라      실 안으로 침투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고는 하지만, 범죄는 좀 지나친 거 아니야?”           “……한 번만 봐주세요.”
“범죄라니요!”                            “흥! 문예부가 이 구질구질한 부실의 바로 옆에 있다는 사
김영민 역시 기다렸다는 듯 바로 맞받아친다.            실을, 네놈은 죽어서도 절대 잊지 않는 게 좋아.”
“그런 남들에게 오해받을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세요. 무     홍미나는 지옥이 있다면 그곳에서도 가장 깊은 불구덩이
엇을 숨기랴, 그는 이곳에 가입한 신입부원 1호입니다!”     속에서 들려올 법한 어조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더니, 한
“신입부원이라니, 진짜야?”                     걸음 뒤로 물러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홍미나가 남궁현을 향해 물었지만 그는 여전히 책상에 엎      “내가 항상 벽 뒤에서 지켜볼 테니까 말이지…….”
드린 채 하아하아- 하고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다.        김영민은 마지막까지 보이던 그녀의 손가락이 어둠 속으
“흐으응……이런 정체도 모를 부에 가입하는 사람이 벌써      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진 후에야 겨우 후 하고 숨을 내뱉
생길 줄이야, 정말이지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을 수 있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41                                 42
“아까 그 사람, 정말 무서웠죠?                 올랐다! 매력이 1 올랐다! 카리스마가 1 올랐…….”
“너도 참 운이 없네. 입학한 지 이틀 만에 그 괄괄하기로   [너 임마 시끄러웟!]
소문난 홍미나 선배를 적으로 돌리다니, 이 정도의 안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까칠한 홍미나의 목소리가 벽 너머
플래그라면 혹시 나는 저주 받은 부에 들어온 걸까.”      에서 난입하는 바람에, 흠칫 놀란 김영민은 그 자세 그대
“안티 플라그요? 그건 치약 이름입니까?”            로 굳어 버렸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부장의 꼴사나운
“전문용어야. 너는 몰라도 돼.”                 모습을 감상하던 남궁현이 이윽고 입을 연다.
남궁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입부 희망서 쪽에 내용을     “카리스마가 10 하락했습니다. 예이.”
채워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김영민은 아무도 방해하    “……그건 무슨 처절한 패널티인가요.”
지 않는 상황임을 깨닫고 다시 입을 연다.            층간 소음, 아니 벽간 소음의 주범인 김영민은 삶의 희망
“나와 그녀는 부실이 가까우니 지리적으로는 분명히 이웃     을 몇 초만에 완전연소시킨 것처럼 비틀거리더니, 의자에
사촌이지요. 그러니까 ‘내 앞마당에는 안돼!' 라는 플랜카   앉자마자 고압가스로 충전된 인형마냥 활기를 되찾는다.
드를 사이좋게 걸 수 있는 사이라고 할까요!”          “근데 무슨 문제점이 있다고 했죠?”
“지리적으로는, 인가. 부장이 그걸로 됬다면야.”        “미안, 이야기 흐름을 전혀 못 따라가겠어.”
남궁현은 그렇게 대답하며 입부 희망서를 내밀었다.        “그 왜 아까 이사장을 적으로 돌렸다던가. 그 외에도 부원
“자, 입부 서류. 다 썼으니까 확인해 봐.”          을 모집하는데 문제가 더 있다고 그랬잖습니까?”
“이야, 이거 부장이란 호칭을 직접 제 귀로 들으니까 제법   남궁현은 그제야 아- 하는 탄성을 흘린다.
멜랑콜리한데요?”                          “둘, 아니 세 번째였던가. 홍보 부족이야.”
쑥쓰럽다는 듯이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입부 서류를 건네      “홍보 부족이라고요?”
받은 김영민은, 서류를 쥔 손을 허공으로 힘차게 들어올리    “내가 이 부의 존재를 어떻게 깨달았는지 알아?”
고는 다른 손을 허리에 대는 기묘한 자세를 취했다.       김영민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드디어 이 몸의 부장 레벨이 1 상승했습니다!”        “그야 두말할 것도 없이 제가 오늘 아침 선도부장 배에
“그건 갑자기 무슨 게임인데.”                  붙여놓았던 부원 모집 홍보지 때문이겠지요.”
“예이! 부장 김영민은 신입부원을 획득했습니다! 의지가 1   “너 그런 짓도 했었어? 오늘 선도부장 안보이던데……”
                43                                 44
“칫, 도망갔나.”                         “어, 그럴 리가요? 분명히 접착제로 단단히 고정…….”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김영민을 향해 남궁현은 신입생      “학생회에서 발견하자마자 바로 뜯어냈겠지. 이 학교에 있
에게 당했으니 무리도 아니지, 라고 답한다. 선도부장이라    는 부는 모두 이사장의 통제 아래에 놓여 있어. 그렇지 않
면 나름 권한과 명예가 있는 자리니까.              더라도 무단 홍보라면 충분히 문제가 되겠지만.”
“솔직히 당해준 것 자체가 미스터리야.”             김영민은 그런건가! 하고 적잖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
“잠깐,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알고 가입한 겁니까? 설마   다.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고 눈을 동그랗게 뜬 것이, 마치
보험 삼아 2미터짜리 알림판에 빈틈없이 붙여놓았던 홍보     짐 캐리의 과장스러운 연기를 보는 듯하다.
지가 눈에 띄었던 것은 아니겠죠?”                “이 학교엔 네 편이 그렇게 많지 않아. 네번째 문제.”
선도부장을 향해 ‘알림판 따위’ 라고 쏘아붙였던 것에 비    “크으, 설마 예비 수단마저 간단히 무력화될 줄이야…….”
하면 놀라울 만큼 완벽한 일처리다.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이며 나지막하게 신음하던 김영민은
그러나 남궁현은 ‘그건 너무 지나쳤어’ 라고 대꾸했다.     문득 행동을 멈추고는 입을 연다.
“확실히 알림판은 정문 현관에 있어. 지나가면서 볼 수밖    “잠깐, 그렇다면 오늘 한 모든 홍보는 실패했다는 건데,
에 없는 위치지. 그런데 너, 알림판을 사용하는데 사전에    당신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알고 여길 찾아온 거죠?”
학생회의 승인을 받긴 한 거야?                  “너, 그걸 여태까지 몰랐던 거야?”
“승인이요?”                            무릎 위에 펼쳐 놓은 책에서 시선을 들어올린 남궁현은,
이해가 잘 안되는지 고개를 갸웃하는 김영민.           부장 김영민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뇨. 공공 시설을 사용하는 것에 승인이 필요하다면, 설   “나, 너하고 같은 반인데.”
마 학생회에 보호세 같은 걸 내야 하는 건가요?”
“학생회에 대한 네 인식은 잘 알겠어.”
남궁현은 가로 폭만 해도 2미터가 넘는 알림판에 덕지덕     명문고등학교 1학년 5반의 교실 안.
지 붙어 있는 부 홍보지를 연상하는지 미간을 좁혔다. 그    평소 같았으면 피곤에 쩔은 학생들이 힘없이 늘어져 있을
정도라면 학생회에도 상당히 이슈거리였을 것이다.         아침조회 시간이었으나, 오늘만은 어쩐 일인지 다들 눈을
“내가 등교했을 땐, 알림판은 텅 비어 있었어.”        반짝이며 교단 쪽으로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45                                     46
“…….”                              “나참, 자기 소개를 컨닝 페이퍼로 하는 녀석이 어딨어.”
오직 구석에 앉아 있는 남궁현만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     “뭐 어떻습니까? 기합 좀 넣어서 자기 소개를 해보려고
었다. 어쩌면 뜬구름을 보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했는데, 일단은 제 마음만이라도 받아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새로 전학 온 친구를 소개하도록 하지.”       담임 선생님의 심드렁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아무렇게 대
눈가의 다크서클이 끝을 모를 정도로 깊게 패인 흰색 남     답한 김영민은, 종이를 구깃구깃 접어 주머니에 넣더니 교
방 차림의 후즐근한 남자가 교단에 기댄 채 입을 열었다.    실 안을 가볍게 훑어보는 시늉을 했다.
33살의 반품남이라는 특이사항이 붙어 있는 이 반의 담임    “자, 그럼. 혹시 질문 있으십니까?”
선생님이다.                             남자들은 노골적으로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고, 몇몇 여
“외국에서 온 귀국자녀를 반갑게 맞이하길 바란다. 교환학    학생들은 얼굴을 붉히며 애써 시선을 피한다.
생이 아니라 엄연히 국적도 우리와 같으니 유의하도록.”     그러나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전학생이 자기 반으로 전
말을 마친 담임 선생님이 교단을 내려가 옆에 서고, 그 자   학 왔다는 이 상황을 대한민국에서 몇 명이나 경험할 수
리에 전학생이 뚜벅뚜벅 걸어 올라왔다.              있을까? 그만큼 희귀한 일을 두고 침묵은 금이라는 금언
“여러분 반갑습니다. 김영민이라고 합니다.”           을 실행할 만한 학생은 적어도 이 반엔 없었다.
교단 앞에 선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년은 다짜고    “저기저기, 있잖아?”
짜 유창한 한국어를 사용해 자기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먼저 스타트를 끊은 건 단발머리의 여학생이다.
“아버지를 따라 외국에서 6년간 거주하다 며칠 전 귀국했    “너, 우리와 나이도 같을 텐데 왜 존댓말을 하는 거야?”
습니다. 이곳 명문고에서 여러분과 같이 학창 생활을 할     김영민은 상쾌한 미소와 함께 그 질문에 대답했다.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에 또.”   “아버지 때문에 늘 집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
김영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년은 그 대목에서 잠시 말     서 듣다시피 한국어는 제법 유창합니다만, 대신 존칭 표현
을 더듬더니, 결국 교단 위에 펼쳐 놓았던 종이를 들여다    에는 좀 약합니다. 만약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니까 존댓말
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에 대해서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이 부분은 이해가 잘 안되네요. 내가 썼지만 것 참 도저   “그럼 나도 질문이 하나 있는데!”
히 뭐라고 쓴 건지 모르겠네. 그냥 질문으로 넘어가죠.”    남학생 한 명이 손을 번쩍 들며 입을 연다.
                 47                                48
“정확히 외국 어디서 살다 온거야? 학교는?”         “더 이상 제가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유일한
“미국 캘리포니아의 로스엔젤레스입니다. 학교는 근교에     혈육이었던 아버지가 한달 전에 사망하셨거든요. 그는 헐
있는 헌팅턴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리우드의 유명한 각본가 중 한 명이었죠. 비록 맨스 차이
“헤에, 허, 헌팅턴 미들 스쿨이란 말이지. 명문이네~”   니즈 극장에 발바닥을 새기진 못했지만요.”
“모르면서 아는 척 하지 마.”                 말을 끝낸 김영민은 이내 환하게 웃었다.
옆에 있는 여학생이 질문한 남학생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또 다른 질문은 없습니까?”
것을 본 김영민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소년은 진심인 것 같았지만, 그런 말을 듣고도 태연하게
“더불어 집은 비버리힐즈에 있었습니다. 이야, 거긴 정말   질문할 만한 배짱을 가진 학생은 그 자리에 없었다.
좋은 곳이었죠. 태평양이 바로 눈앞에 있거든요.”
전학생의 입에서 친숙한 단어가 나오자 학생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바뀌기 시작한다.                   분명히 그 때만 하더라도 같은 반 학생들의 뇌리에 김영
“오! 비버리힐즈! 나 거기 알아!”              민의 첫 인상은, 어쩐지 좀 불행한 과거를 지녔지만 씩씩
“모르는 게 바보 아냐? 헐리우드의 유명 연예인들이 살고   하고 예의를 잘 지키는 그야말로 ‘금발벽안의 전학생’ 이
있는 부자 동네잖아. 영화에서도 엄청 많이 나오는데.”    라는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점심
“대단하다! 그런 곳에 살던 사람은 처음 봤어!”       시간에 호출을 받아 교장실로 불려 갔다 온 뒤부터는 미
모두가 시기 어린 감탄사를 장황하게 늘어놓던 와중에, 떠   간에 주름이 하나씩 느는가 싶더니, 야간자율학습을 시작
들썩한 교실 분위기와는 마치 바다 위의 섬처럼 단절된     한 후에는 멋대로 어디론가 사라지질 않나, 30분 후에 돌
분위기를 풍기고 있던 남궁현이 손을 들었다.          아온 그의 인상은 그야말로 지옥에 떨어진 천사의 그것을
“그런데 왜 한국으로 돌아온 거야?”              보는 듯해서 같은 반 학생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어이, 그런 질문은 좀…….”                 창가에 붙어 있던 자기 책상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가방을
“괜찮습니다.”                          집어든 김영민을 향해 자율 학습을 지도 중이던 담임이
김영민은 도중에 끼어들려는 담임 선생님을 한 손으로 제    ‘어디 가냐?’ 라고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갑니다.’ 라
지하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고 대답한 것은 혹시 전설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49                                50
그 모든 게 전학한 첫 날에 있었던 일이었다.          “마지막 문제는. 이름도 없고 홍보도 부족한 이 부가, 대
                                   체 무슨 활동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는 거야.”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아, 그게 당신이었군요?”                    여전히 드러누운 채 천진난만하게 대꾸하는 김영민의 모
김영민은 주먹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탁 치는가 싶더니, 이    습에는 남궁현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듯 하다.
내 머쓱한 웃음과 함께 혀를 살짝 내밀어 보였다.        “어라? 그러고 보니, 는 무슨. 자세가 글렀잖아. 부까지
“이것 참 동양인의 얼굴은 도통 구별이 안돼서.”        만들어 놓고 뭐하는 거야.”
“외국인인 척 하지 마. 이 하프 외국인.”           그는 실내화를 살짝 들어올리는가 싶더니 상대의 볼을 자
“에이, 농담이었어요. 사실 부 활동 문제 때문에 고민이    근자근 밟기 시작했다. 덕분에 김영민은 예상치 못한 공격
많아서, 그쪽에 신경 쓸 여력이 전혀 없었네요. 오죽하면    에 무방비로 공격을 허용하고 만다.
반에서 이름을 아는 게 당신뿐이겠어요? 남근현씨.”       “이, 이건 아까 전의 복수입니까? 부장의 존엄한 얼굴에
“남궁현이다. 사람 이름을 음란하게 부르지 마.”        발을 함부로 놀리다니요! 저는 발 받침대가 아니라고요!”
“아, 제가 그랬었나요?”                     “책상 밑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나쁜 거야. 내가 여자였다
김영민은 실실 웃으며 그의 바로 옆 자리에 앉았다. 그리    면 성희롱으로 고소해도 최소 두 번은 할 수 있어.”
고는 의자에 깊숙히 몸을 기대는가 싶더니, 천장을 올려다    “그럼 입장을 반대로 바꾸죠!”
본 채 말을 잇는다.                        “바꿀까보냐.”
“이야, 좋네요. 동료가 있다는 것은 역시 든든하죠! 동료   둘이서 그렇게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부실 문이 덜컹 열리
모집은 역시 마왕을 때려잡기 위한 필수코스거든요?”       며 홍미나가 고개를 살짝 내민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는.”                   “아까 내가 좀 심했던 것 같아서, 과자를 좀 가져왔는데
“아직도 뭔가가 더 있었던 겁니까!”               괜찮다면 둘이서…….”
김영민은 그 외침만을 남기고는 의자에서 미끄러져 슬라      홍미나는 과자 봉지를 들고 있는 자세 그대로 멈췄다.
임처럼 책상 아래로 축 늘어져 버렸다. 책에서 눈을 뗀 남   그도 그럴 것이, 한 쪽을 발로 밟고 있고 다른 쪽은 밟히
궁현은 바닥에 누워 있는 소년을 내려다본다.           고 있으니 대체 무슨 플레이냐고 태클을 걸어도 위화감이
                  51                                 52
없을 듯했지만, 그녀는 단지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뭐 이제 됬어요. 이름 같은 건 알아서 정하세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홍미나는 종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헤에. 짧은 시간에 문제점을 잘 짚어냈네. 그것보다 문제   “너, 글을 쓰고 싶다면서 문예부를 박차고 나갔잖아. 그럼
점이 너무 많아서 총체적 난국이라고 느껴질 정도야.”      부를 만든 것도 당연히 그런 목적이었던 거 아니었어?”
의자에 앉은 채 남궁현이 정리한 문서를 읽어보던 홍미나     “……그야 물론 그렇긴 해요. 하지만 말이죠? 글을 쓴다는
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건 어디까지나 혼자서 활동하는 거니까요. 부원을 모집해
“뭐 확실히 홍보 부족도 문제지만, 그 전에 부 이름이라던   봐야 제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 같고, 왠지 싫달까.”
가 무슨 활동을 할지부터 결정해야 홍보 효과가 극대화되     남궁현과 홍미나는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겠지. 일단 부 설립 목적은 뭐야?”               “배불렀네.”
“음. 목적이라…….”                       “배불렀어.”
잠시 고민하던 김영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홍미나는 상대가 반박할 시간을 주지 않고 말을 잇는다.
“가령 예를 들어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던가, 그런 식으로    “그러니까 너는 글을 쓸 시간을 가지고 싶지만 부원 모두
세계 평화를 위한 김영민의 부는 어떻습니까?”          가 활동을 해야 제대로 된 부 활동이라는 거지? 그러면
“기각. 짝퉁 같잖아.”                      문예부처럼 부원들끼리 문집이라도 내보는 건 어때.”
남궁현과 홍미나는 어째서! 라고 부르짖는 김영민을 단칼     김영민은 그녀의 말을 일축한다.
에 무시하더니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건 문예부 일이죠.”
“무엇보다 터무니없어.”                      “그것도 그렇네…….”
“한마디로 제대로 된 이유가 없다는 거지 뭐.”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홍미나도 더 말을 잇지 못했
“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해.”                   다. 애초에 그에게 가장 적합한 부는 문예부였음에도 불구
말이 이리 저리 튕길 때마다 소년의 안색이 더더욱 나빠     하고 새로운 부를 만든 것부터가 문제가 아닐까.
지더니, 결국 입을 삐쭉 내민 채 책상 위에 엎드린다. 마   “게다가 부 활동 결과를 학예회에서 공개하기로 이사장과
치 풀 죽은 개처럼 두 팔을 쭉 편 자세였다.          약속했으니까요. 이제 한 달도 채 안 남았어요.”
                53                                  54
“시작부터 이런 난관이라니, 역시 이사장이 부 설립을 허   남궁현은 잠시 그렇게 운을 떼는가 싶더니,
가한 것도 괜한 배짱이 아니었던 것 모양이네.”        “그렇다면 라디오 드라마는 어때?”
“……그러면 이런 건 어떨까.”                 다짜고짜 의견을 제시한다.
그 때 남궁현이 살짝 손을 들었기 때문에 김영민은 반사    “라디오…….”
적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홍미나 역시    “드라마?”
고개를 위로 올린다.                       남궁현의 말을 들은 둘은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금방
“부장은 글을 쓸 수 있으면서도 모두가 그 일에 어떤 식   와닫지 않는 듯 그렇게 중얼거려 보았다.
으로든지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거잖아?”        “라디오에서 성우들이 하는, 뭐 그런 거 말이야?”
“……그렇죠?”                          홍미나의 물음에 남궁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김영민이 홍미나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그런 걸 왜 자신에   “라디오 드라마라면 촬영 준비에 시간을 빼앗기지도 않고,
게 묻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러는 동안에도    무대나 소품 없이도 부실에서 녹음을 모두 끝낼 수 있어.
남궁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소리로만 진행하니까 밤낮을 신경쓸 필요도 없고.”
“처음에는 영화 시나리오도 생각해 봤는데, 부 활동 시간   “라디오 드라마라…….”
이나 기자재의 한계 때문에 영화는 좀 힘들다고 봐.”     김영민의 표정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한다.
“영화라! 그 분야는 저도 자신이 있는데 아쉽네요.”     “이야, 그런 수가 있었네요!”
김영민은 관심이 있는 주제가 나오자 눈을 반짝이며 상체    상대의 반응이 좋은 것을 본 남궁현이 말을 이었다.
를 일으켰는데, 홍미나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    “게다가 라디오 드라마는 영화와 달리 일인 다역도 가능
“보고 있자니 도대체 누가 부장인지 모르겠네.”        해. 물론 우리로서는 쓸 수 없는 카드겠지만.”
“그는 차장으로서의 책무를 제대로 해 주고 있지요.”     “과연! 라디오 드라마라 이거죠? 호오.”
“……나 차장이었어?”                      부원 다섯 명 이상이 부의 유지에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부원 두 명이 각각 부장과 차장이라니, 터무니없는 권력    남궁현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의 설명을 들은 김영민
인플레다. 부활동이 아니라 회사라면 망할지도 모르겠다.    의 눈은 쉴새없이 반짝였는데, 라디오 드라마를 녹음하는
“어쨌든, 지금 한 가지 대안이 떠올랐는데…….”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55                                  56
“나 참…….”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하긴 하지만 이름은 정해지지 않은
홍미나는 여전히 탐탁치 않은 듯 말끝을 흐린다.          부’ 라면 곤란하다. 반드시 수상하다고 생각될 것이다.
“라디오 드라마 제작부라니, 그런 건 보통 학교가 아니라     그래서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들은 흥미를 잃은 홍미
인터넷 동호회에서나 하는 거 아냐?”                나가 자리를 뜨자마자 지루한 논의를 진행한 끝에, 마침내
“그건 그렇긴 하지만…….”                     김영민이 유력한 부 명칭을 하나 떠올렸던 것이다.
상대의 지적을 받은 남궁현이 머뭇거리자, 그 모습을 보고     “……그런 이유로 DR 하이텐션’ 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보
있던 김영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친다.           았는데, 어떤가요. 어감이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애초에 이사장의 조건엔 그런 제한     “DR 하이텐션?”
도 없었고, 또 라디오 드라마라면 영화보다 뭔가 소설 쪽     남궁현은 김영민이 제안한 부 이름이 언뜻 이해가 되지
에 가까운 느낌이라서 오히려 마음에 드는데요?”          않는 모양인지, 방금 들은 단어를 다시 읽어 본다.
주먹을 꽉 쥔 손이 책상 위에 올려졌고, 그의 푸른 눈은     “하이텐션이라는 단어가 붙은 건 뭐 부장만 봐도 잘 알겠
묘한 흥분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만, 앞의 DR이라는 건 뭐야. 닥터 하이텐션?”
“갑시다! 이걸로 가자고요!”                    “노노노. 드라마 라디오(Drama Radio)의 약자입니다.”
“와아~”                               “그치만 보통은 라디오 드라마라고 하는데.”
홍미나는 남궁현을 향해 무성의한 박수를 쳐 보였다.        "그럼 약자가 이상해지잖아요!”
“축하해. 너희 부장이 네 제안이 마음에 든다는데? 뭐, 이   “약자가? 어디가.”
걸로 정체불명의 부에서는 간신히 벗어났네.”            “RD 하이텐션이라니요!”
남궁현은 그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김영민은 답답하다는 듯이 책상 위를 쾅쾅 두들겼다.
                                    “RD는 무슨 research and development의 약자라도 되는
                                    겁니까? 하이텐션 같은 걸 연구 개발하는 집단이라니, 수
그녀의 말대로 ‘정체불명의 부’ 에서 ‘라디오 드라마 제작    상하기 짝이 없잖아요!”
부’로 격상되긴 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는 뭔가가 부족했다.    “나는 부장의 하이한 머릿속이 더 수상한데.”
정식 부 명칭조차 정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남궁현은 대꾸한 것 치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57                                   58
“뭐 좋아. 최종 결정은 어디까지나 부장의 몫이고, DR이라   뎅을 입 안에 털어넣더니, 우걱우걱 씹으며 말을 이었다.
는 약자는 개인적으로는 나도 꽤 마음에 드니까.”         “우리에겡 몬가 확실한 홍보 슈당이 핀요하다고요!”
“그렇죠? 뭔가 일을 저지를 것 같은 이름이죠?”         “입에 넣고 말하지마.”
“저지르면 안되지…….”                       “실례. 그러니까 우리에겐 뭔가 확실한 홍보 수단이.”
무슨 테러리스트나 과격 무장 단체도 아닌데. 남궁현은 짤     “같은 말 반복하지마.”
막한 한숨을 흘리는가 싶더니 말을 잇는다.             점심 시간의 남궁현은 상당히 저기압인 모양이었다. 그는
“오늘은 이 정도만 하고 체력을 아끼는 게 좋을거야. 내일    미간을 좁힌 채 식판의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더니, 그 끝
부터는 부를 홍보할 수단을 찾아봐야 할 테니까.”         을 김영민을 향해 척 하고 뻗었다.
“그럼 부명은 DR 하이텐션으로 결정된 거죠?”          “그 포크는 어디서 가지고 온 거야? 양식도 아닌데.”
“응.”                                “아, 이거요? 저기 식당 아줌마에게 빌렸습니다! 저는 포
“굳! 드디어 시작이로군요!”                    크가 편하거든요. 젓가락질은 좀 서툴러서. 하하하핫.”
기합이 잔뜩 들어간 김영민이 주먹을 허공으로 내지르며       남궁현은 오른손 검지를 입에 대며 쉿 소리를 내었다. 그
기세 좋게 외쳤는데, 그는 벌써부터 눈앞에 산적한 모든      모습을 본 김영민은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박이다가, 이윽
문제를 눈깜짝할 사이에 일소해 버린 것처럼 보였다.        고 구내 식당의 배식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시끄럽다고 그랬지!]                        “…….”
홍미나가 벽을 쾅쾅 내려치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어필한       하얀 요리사 복을 걸치고 천을 머리에 두건처럼 질끈 감
뒤엔 꼬리를 만 개처럼 교실 구석에 처박혀 있었지만.       은 여자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두건 아래로 나온 갈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한 줄로 길게 땋은 모습이다.
                                    “아줌마라니…….”
다음날 아침.                             남궁현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구러니까 줴가 말하코 싶운 권!”                 “우리 학교 영양사는 나이가 스물여섯밖에 안 되고 정식
반짝이는 은색의 포크가 남궁현의 눈앞에서 이리저리 흔       교직원이니까 적으로 삼지 않는 게 좋아. 게다가 별명이
들린다. 김영민은 포크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는 오     명문고의 춘리거든.”
                59                                  60
“스, 스트리트 파이터의? 그렇게 강력한가요?”         “……그래요. 저 죄 많은 남자에요.”
“아니, 허벅지만. 아무도 그녀의 가동 한계를 체크한 적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김영민이 탁자 위에 반쯤 엎드린
없어. 뭐 질량과 근육의 가속도를 생각해 볼 때, 저 다리   채, 김치를 말 그대로 포크로 분해하기 시작했다.
에 걷어차이면 무시무시한 타격을 받을 게 뻔하지만.”      그 때 옆에서 누군가가 불쑥 말을 건다.
남궁현의 진지한 대답을 들은 김영민은 한참 동안이나 경     “저기. 영민 군이지?”
이로운 눈빛으로 영양사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금    어느새 탁자 옆에 다가와 있던 여학생이 김영민을 향해
방 흥미를 잃고 자신 앞의 반찬으로 시선을 돌린다.       두 손을 내밀었는데, 그 끝엔 휴대폰이 쥐어져 있는 상태
“어제도 말했지만 반칙은 안돼.”                 였다.
먼저 주의를 환기시킨 건 남궁현이었다.              “그렇습니다만?”
“부 홍보 수단에 반칙을 사용하면 필연적으로 학생회를      “저, 이거 좀…….”
무시하는 행위가 돼. 적이 많아지면 힘들어. 부장의 행동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올린 김영민은, 그녀의 모습
을 볼 때 선도부는 이미 틀렸다고 봐야겠지만.”         을 보고는 알았다는 듯 상대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무슨 그런 섭섭한 이야기를!”                  삑, 삑삑. 삑.
의외로 김영민은 정색하듯이 고개를 저었다.            김영민이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있는 것을 본 여학
“그는 이미 제 절친한 동료나 다름없습니다. 그 쓸모없는    생의 얼굴이 이내 붉어졌다. 소년은 마침내 번호 입력이
몸뚱아리로 홍보판 노릇을 해 준 것만 봐도 그렇죠.”      다 끝났는지 휴대폰을 다시 상대에게 건네준다.
“그래서 적이라는 거야.”                     “자. 여기요.”
누가 홍보판 노릇을 하고 싶겠어? 남궁현의 예리한 지적     “감사합니다! 그, 그럼 이만!”
에는 김영민도 더 할 말이 없는 듯 머뭇거리더니,        “잠깐! 당신 전화번호도 주고 가야죠!”
“그, 그럼 홍미나는 어떻습니까? 그녀는 우리 부실 이웃이   김영민은 휴대폰을 럭비공마냥 쥐어들고 구내 식당을 달
기도 하고, 또 어젯밤엔 조언도 했으니 동맹 아닙니까?”    려나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외쳤지만, 그건 오
“그건 애초에 시끄럽다며 태클을 걸려고 온 거였지.”      히려 상대의 퇴장속도를 더 가속시켰을 뿐이다. 잡는 것을
여전히 칼 같은 반박이었다.                    포기한 김영민이 이내 제자리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61                                62
“나 참. 이 번이 열 번째던가요? 이상하군요. 이 학교는   “너도 너야! 그렇게 마구잡이로 전화번호를 뿌리면 사람들
비상연락망을 학생들끼리 일일이 교환해야만 하는 겁니       이 오해하잖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까?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연락을 하려고 그러는 건지.”    비상연락망을 공유하는 것이 오해받을 행동이었다니! 남궁
“ 걱정할 것 없어. 만약 이 사실을 그녀들이 알게 된다면   현은 김영민이 혼란스러워하는 포인트를 잘 알고 었었지
네가 사고의 당사자가 될 거라고 확신하니까.”          만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으응? 그건 무슨 의미인가요. 설명을 요구합니다!”      남궁현은 대신 홍미나를 바라보며 말문을 연다.
김영민이 언제나 그랬듯 당당하게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      “선배.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죠?”
고 있는데, 머리위로 또 다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아, 그랬었지. 이 바보 색골에게 전달할 게 좀 있어서.”
다. 소년은 이제는 귀찮다는 듯 거의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김영민이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인다.
상대를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그럼 그 바보 색골을 찾아갈 것이지! 왜 엄한 사람을 갈
“또입니까? 이번에는 당신 전화번호부터 받아야겠군요. 아    굽니까! 당신이 이래도 동방예의지국 시민입니까?”
니면 정작 제가 위험할 때에 연락을 할 수가…….”       “저 바보 색골은 뭐래.”
“왜 내가 너한테 전화번호를 줘야 하는데?”           홍미나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흥 하고 코웃음을 치
“어라?”                              더니, 품 속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어 보였다.
예상치 못한 대꾸에 김영민이 그 쪽을 바라보니, 거기엔     “자, 여기.”
홍미나가 두 팔을 허리에 댄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상   “이건 뭐죠? 입부 신청이라면 특별히 당신에 한해서 거절
대가 누구인지 알아챈 김영민은 히익 하는 비명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 그랬다간 제 자리가 위험해진다고요!”
의자를 덜컹거릴 정도로 재빠르게 물러섰다.            “잔말 말고 받아! 그런 거 아니니까.”
“누구는 인기가 많아서 좋겠네?”                 김영민은 홍미나가 거의 면전에 붙여버릴 기세로 들이대
홍미나는 마치 먹이감을 눈앞에 둔 뱀처럼 차가운 태도를     는 종이를 겨우 뺏고는 내용을 읽어본다.
고수하며 입을 열었다.                       “……금일 오후 7시부터 학생회 임원 회의?”
“나 참. 외국인이라면 다들 헤벌레 해서는, 꼴불견이야.”   “그래. 너도 그 라디오 뭐시기……부의 부장이니까 임원인
“에엥? 무슨 이야기인지요?”                   거잖아? 원래 정규 회의는 매주 금요일인데, 특별한 안건
               63                                   64
이 있을 때엔 이렇게 비정기적으로도 열려.”          것저것 고민하지 말고 뛰어들라는 이야기겠지만, 결국 뭘
“흐으응~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마실지 선택 버튼조차 누르지 못한 김영민은 그저 자판기
김영민의 반문에 홍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 머리를 턱 처박은 채 주욱 미끄러질 뿐이었다.
“이번 회의, 너희 부 때문에 열리는 거야.”         “으으, 저, 이래뵈도 꽤 낯을 가린단 말이에요…….”
                                  “처음 보는 사람 몸에다가 정체불명의 전단지를 붙일 정
                                  도의 남자가 낯을 가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딸칵.                               “숨도 안 쉬고 단언하다니. 그야 그 때는 눈앞의 이 고릴
점심 시간이 끝난 교내 뒷편의 자그마한 정원. 김영민과    라가 내 인생과 연관될 일이 달리 뭐가 있겠어? 정도의
남궁현은 나무 그늘에 가려진 자판기 앞에 서 있었다.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도록 해. 부장.”            “그럼 인과응보네.”
남궁현은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자판기 배출구로 나온     남궁현은 캔커피를 입에 댄 그대로 다른 손을 뻗어 콜라
캔커피를 집어들기 위해 몸을 숙이며 말을 잇는다.       선택 버튼을 눌렀다. 덜컹 하고 자판기 아래로 캔이 떨어
“어차피 우리에게 필요한 홍보 수단을 승인하는 것도 학    지는 소리가 들리자 김영민은 헉 하고 신음을 토한다.
생회의 일이니까. 언젠가는 한 번쯤 부딪쳐야만 해.”     “무슨 짓을! 콜라는 당분이 많단 말입니다!”
“하지만 말이죠?”                        “당분은 스트레스에 좋아. 일시적이고 중독성이 있지만.”
그 옆에 서 있던 김영민은 무슨 음료수를 선택할 것인지    “저를 거대 자본의 노예로 만들 속셈입니까!”
고민하는 것처럼 턱을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우린 시간의 노예야. 점심시간이 곧 끝나니까.”
“저는 학생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상대의 취   못 먹니, 환불을 하니 마니 등의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미라던가 좋아하는 거라던가, 심지어 부장들이 여잔지 남    결국 김영민은 콜라캔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자인지조차도 감이 안 오니까 곤란하네요.”           “시간이 없으니 학생부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할게.”
“그런 생각 할 시간 없어. 저녁은 금방 올 테니까.”    그들의 주위로 학생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이룬 채 지나치
남궁현은 들고 있던 캔커피를 홀짝거리며 마치 남 일 보    는 모습들이 보인다. 그 둘은 학교 안뜰에서 벗어나 운동
듯이 대꾸했다. 어차피 그런 거 알아볼 시간도 없으니 이   장 쪽으로 향하는 정원 통로로 올라섰다.
               65                                66
“학생회는 학교를 대표하는 학생들의 모임이야.”           “그래서, 우린 뭘 대표하는 겁니까?”
남궁현은 차장으로서 부장의 무지를 어느 정도 보완할 필       “……그건 부장이 찾아내야지.”
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듯,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은 딱히 대표하는 것이 없을 테니까, 라고 남궁현은
“우리 학교 학생부 같은 경우엔 대부분의 안건은 이사장       덧붙였다. 명문고등학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부의
에 의해 결정된 것을 통과시키는 정도니까, 별다른 힘은       탄생에 박수를 보낼 만큼 여유 있는 학생회가 아니라는
없지만 명목상의 권한은 있어. 학생회는 크게 학생회장과       것은 조금만 생각해도 유추할 수 있는 결론이다.
부회장, 그리고 하위 5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고.”         “아아~ 부장이란 제법 골치아픈 자리네요.”
“오호, 제법 잘 알고 계시네요.”                  “그 정도도 감수하지 않으려고?”
“……이 정도는 학교 홈페이지 검색으로도 나와. 각 부의      “뭐, 그것도 그렇긴 하네요.”
부장과 차장이 대표로 나와서 학생회 임원 회의에 참석해.      김영민은 운동장으로 내려가는 콘크리트 계단 위에서 걸
결국 총 12명의 대표가 학생회실에 모이는 거지.”         음을 멈췄다. 깔끔하게 정리된 넓은 운동장은 점심 시간임
“12명이라……제법 많은 거 아닙니까?”               에도 불구하고 텅 비어 있어서, 계단 위쪽의 혼잡함에 비
김영민은 콜라캔에서 입을 떼며 중얼거렸지만, 남궁현은        해서 상대적으로 황량해 보였다. 운동장 주변을 둘러보던
그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소년의 시선이 순간 멈추더니, 오 하고 말문을 연다.
“이 학교의 전체 학생수는 천 명이 넘어. 그들의 대표로      “여기 농구 코트가 제대로 되어 있네요. 마침 시간도 좀
12명이라면 오히려 적은 거지. 그만큼 중요한 자리. 거기     남았는데, 1대 1 농구라도 한 판 어떠신가요?”
에 부장과 내가 새로 들어간다면 모두 14명이 돼.”        “별로……. 지금 농구공도 없고.”
“오오오! 14명 중에 우리가 속해 있는 거군요! 그 말을 들   “뭐 농구공 정도라면 체육부실에 널려 있겠죠.”
으니 왠지 정체불명의 자신감이 팍팍 느껴지는데요!”         “우리 학교에는 체육부 없어. 몰랐어?”
“자신감이라니, 뭔가 그럴듯한 다른 표현은 없는 거야?”      남궁현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캔커피를 홀짝거렸다. 체육
“우월감이 느껴지는군요!”                       부가 없다는 말을 들은 김영민은 에엑? 하는 외침과 더불
김영민은 상대의 딴지를 단숨에 콜라를 들이킨 뒤의 거무       어 완전히 질려버린 듯한 표정을 짓는다.
튀튀한 미소로 제압하고는, 혀를 낼름거리며 말했다.         “우아……이건 좀 쇼크네요.”
                 67                                  68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Dr하이텐션!!

More Related Content

Viewers also liked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3기_FUN-D-REAM_탐방 계획서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3기_FUN-D-REAM_탐방 계획서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3기_FUN-D-REAM_탐방 계획서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3기_FUN-D-REAM_탐방 계획서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201209_월간 콘텐츠 시장동향_한국콘텐츠진흥원
201209_월간 콘텐츠 시장동향_한국콘텐츠진흥원201209_월간 콘텐츠 시장동향_한국콘텐츠진흥원
201209_월간 콘텐츠 시장동향_한국콘텐츠진흥원YOO SE KYUN
 
021유통의 이해(우송 교)[1]
021유통의 이해(우송 교)[1]021유통의 이해(우송 교)[1]
021유통의 이해(우송 교)[1]ByoungJin Choi
 
Microencapsulation of lemon oil by spray Drying and Application in Flavour Tea
Microencapsulation of lemon oil by spray Drying and Application in Flavour TeaMicroencapsulation of lemon oil by spray Drying and Application in Flavour Tea
Microencapsulation of lemon oil by spray Drying and Application in Flavour TeaAshish Gadhave
 
Milk Brands and Nutritive Values
Milk Brands and Nutritive ValuesMilk Brands and Nutritive Values
Milk Brands and Nutritive ValuesRohit Gothwal
 
1.2 δραστηριότητα
1.2 δραστηριότητα1.2 δραστηριότητα
1.2 δραστηριότηταmakrib
 
洋蔥 的妙用 預防骨質疏鬆
洋蔥 的妙用 預防骨質疏鬆洋蔥 的妙用 預防骨質疏鬆
洋蔥 的妙用 預防骨質疏鬆創意 禮品
 
HW 1800 (fi)
HW 1800 (fi)HW 1800 (fi)
HW 1800 (fi)Heatwork
 
Teknologi kumpulan (2) imtiaz
Teknologi kumpulan (2) imtiazTeknologi kumpulan (2) imtiaz
Teknologi kumpulan (2) imtiazHaniza Baharudin
 
土水博簡介New991129 (nx power lite)
土水博簡介New991129 (nx power lite)土水博簡介New991129 (nx power lite)
土水博簡介New991129 (nx power lite)宗誠 潘宗誠
 
靜 [兼容模式]
靜 [兼容模式]靜 [兼容模式]
靜 [兼容模式]ptyantai
 
2009 programma dettagliato - convegno della ausl di latina sul cro system
2009 programma dettagliato - convegno della ausl di latina sul cro system2009 programma dettagliato - convegno della ausl di latina sul cro system
2009 programma dettagliato - convegno della ausl di latina sul cro systemGUIDO MARIA FILIPPI
 
философия денег
философия денегфилософия денег
философия денегAnna Modlo
 
UNC Bedrijfspresentatie
UNC BedrijfspresentatieUNC Bedrijfspresentatie
UNC Bedrijfspresentatierosaliedegroot
 
用户体验的 要素 很好的资料
用户体验的 要素 很好的资料用户体验的 要素 很好的资料
用户体验的 要素 很好的资料grey0511
 
Melchiorre manuela 2010-11_esercizio_impress
Melchiorre manuela 2010-11_esercizio_impressMelchiorre manuela 2010-11_esercizio_impress
Melchiorre manuela 2010-11_esercizio_impress10071989
 

Viewers also liked (20)

Aurora
AuroraAurora
Aurora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3기_FUN-D-REAM_탐방 계획서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3기_FUN-D-REAM_탐방 계획서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3기_FUN-D-REAM_탐방 계획서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3기_FUN-D-REAM_탐방 계획서
 
201209_월간 콘텐츠 시장동향_한국콘텐츠진흥원
201209_월간 콘텐츠 시장동향_한국콘텐츠진흥원201209_월간 콘텐츠 시장동향_한국콘텐츠진흥원
201209_월간 콘텐츠 시장동향_한국콘텐츠진흥원
 
021유통의 이해(우송 교)[1]
021유통의 이해(우송 교)[1]021유통의 이해(우송 교)[1]
021유통의 이해(우송 교)[1]
 
Microencapsulation of lemon oil by spray Drying and Application in Flavour Tea
Microencapsulation of lemon oil by spray Drying and Application in Flavour TeaMicroencapsulation of lemon oil by spray Drying and Application in Flavour Tea
Microencapsulation of lemon oil by spray Drying and Application in Flavour Tea
 
Milk Brands and Nutritive Values
Milk Brands and Nutritive ValuesMilk Brands and Nutritive Values
Milk Brands and Nutritive Values
 
1.2 δραστηριότητα
1.2 δραστηριότητα1.2 δραστηριότητα
1.2 δραστηριότητα
 
洋蔥 的妙用 預防骨質疏鬆
洋蔥 的妙用 預防骨質疏鬆洋蔥 的妙用 預防骨質疏鬆
洋蔥 的妙用 預防骨質疏鬆
 
HW 1800 (fi)
HW 1800 (fi)HW 1800 (fi)
HW 1800 (fi)
 
Teknologi kumpulan (2) imtiaz
Teknologi kumpulan (2) imtiazTeknologi kumpulan (2) imtiaz
Teknologi kumpulan (2) imtiaz
 
土水博簡介New991129 (nx power lite)
土水博簡介New991129 (nx power lite)土水博簡介New991129 (nx power lite)
土水博簡介New991129 (nx power lite)
 
靜 [兼容模式]
靜 [兼容模式]靜 [兼容模式]
靜 [兼容模式]
 
חולון 2011
חולון 2011חולון 2011
חולון 2011
 
2009 programma dettagliato - convegno della ausl di latina sul cro system
2009 programma dettagliato - convegno della ausl di latina sul cro system2009 programma dettagliato - convegno della ausl di latina sul cro system
2009 programma dettagliato - convegno della ausl di latina sul cro system
 
философия денег
философия денегфилософия денег
философия денег
 
UNC Bedrijfspresentatie
UNC BedrijfspresentatieUNC Bedrijfspresentatie
UNC Bedrijfspresentatie
 
Designatelier: zine
Designatelier: zineDesignatelier: zine
Designatelier: zine
 
用户体验的 要素 很好的资料
用户体验的 要素 很好的资料用户体验的 要素 很好的资料
用户体验的 要素 很好的资料
 
Melchiorre manuela 2010-11_esercizio_impress
Melchiorre manuela 2010-11_esercizio_impressMelchiorre manuela 2010-11_esercizio_impress
Melchiorre manuela 2010-11_esercizio_impress
 
Barou
BarouBarou
Barou
 

Similar to Dr하이텐션!!

김순종 미디어디자인12
김순종 미디어디자인12김순종 미디어디자인12
김순종 미디어디자인12Sunjong Kim
 
김순종 미디어디자인12
김순종 미디어디자인12김순종 미디어디자인12
김순종 미디어디자인12Sunjong Kim
 
전혀 잉여롭지 않았던 그 날의 ‘잉력거’
전혀 잉여롭지 않았던 그 날의 ‘잉력거’전혀 잉여롭지 않았던 그 날의 ‘잉력거’
전혀 잉여롭지 않았던 그 날의 ‘잉력거’희진 이
 
[스티브김]꿈,희망,미래 3쇄
[스티브김]꿈,희망,미래 3쇄[스티브김]꿈,희망,미래 3쇄
[스티브김]꿈,희망,미래 3쇄THEDHF
 
2030lifezine jul final_spread
2030lifezine jul final_spread2030lifezine jul final_spread
2030lifezine jul final_spreadJennyKim186
 
청소년들의 멘토 스티브 김 아저씨의 꿈, 희망, 미래 Story
청소년들의 멘토 스티브 김 아저씨의 꿈, 희망, 미래 Story청소년들의 멘토 스티브 김 아저씨의 꿈, 희망, 미래 Story
청소년들의 멘토 스티브 김 아저씨의 꿈, 희망, 미래 StoryTHEDHF
 
2009 학진석학강좌 4강 근대를넘어다시사회를상상하다(최종)
2009 학진석학강좌 4강 근대를넘어다시사회를상상하다(최종)2009 학진석학강좌 4강 근대를넘어다시사회를상상하다(최종)
2009 학진석학강좌 4강 근대를넘어다시사회를상상하다(최종)hiiocks kim
 
학부모신문 253호 (20121005)
학부모신문 253호 (20121005)학부모신문 253호 (20121005)
학부모신문 253호 (20121005)은영 김
 

Similar to Dr하이텐션!! (9)

2 page
2 page 2 page
2 page
 
김순종 미디어디자인12
김순종 미디어디자인12김순종 미디어디자인12
김순종 미디어디자인12
 
김순종 미디어디자인12
김순종 미디어디자인12김순종 미디어디자인12
김순종 미디어디자인12
 
전혀 잉여롭지 않았던 그 날의 ‘잉력거’
전혀 잉여롭지 않았던 그 날의 ‘잉력거’전혀 잉여롭지 않았던 그 날의 ‘잉력거’
전혀 잉여롭지 않았던 그 날의 ‘잉력거’
 
[스티브김]꿈,희망,미래 3쇄
[스티브김]꿈,희망,미래 3쇄[스티브김]꿈,희망,미래 3쇄
[스티브김]꿈,희망,미래 3쇄
 
2030lifezine jul final_spread
2030lifezine jul final_spread2030lifezine jul final_spread
2030lifezine jul final_spread
 
청소년들의 멘토 스티브 김 아저씨의 꿈, 희망, 미래 Story
청소년들의 멘토 스티브 김 아저씨의 꿈, 희망, 미래 Story청소년들의 멘토 스티브 김 아저씨의 꿈, 희망, 미래 Story
청소년들의 멘토 스티브 김 아저씨의 꿈, 희망, 미래 Story
 
2009 학진석학강좌 4강 근대를넘어다시사회를상상하다(최종)
2009 학진석학강좌 4강 근대를넘어다시사회를상상하다(최종)2009 학진석학강좌 4강 근대를넘어다시사회를상상하다(최종)
2009 학진석학강좌 4강 근대를넘어다시사회를상상하다(최종)
 
학부모신문 253호 (20121005)
학부모신문 253호 (20121005)학부모신문 253호 (20121005)
학부모신문 253호 (20121005)
 

Dr하이텐션!!

  • 1. 1 2
  • 2. 목차 0화 ‘뜬금없이 시작된 High Tension’ 2p DR 하이텐션!! 1화 ‘대책없이 굴러온 Big Stons’ 7p Drama Radio HighTension!! 2화 ‘돌아오지 않는 High Return’ 84p 3화 ‘죽기보다 힘든 Club Activity’ 170p 글쓴이: 가람해무 4화 ‘일상은 마치 Silent Syllable’ 240p 5화 ‘끝나기 전까지는 Never End' 305p 3 4
  • 3. “제군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눈앞에 닥친 이 위기를 넘 기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시작부터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이건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 고립된 채 압도적인 규모의 적과 난전을 앞둔 소대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물론 아니다. 그들이 모인 곳은 미술실의 일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 뿐인 부실이고, 중앙에 놓인 탁자도 책걸상을 대여섯 개 붙여 만든 것에 불과하다. 0화 ‘뜬금없이 시작된 High Tension’ “즐거운 일, 괴로운 일도 참 많이 있었습니다만, 그것도 프롤로그 이제 오늘로 마지막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부는!” 소년은 두 손을 책상 위에 턱 하니 올려놓은 채, 자신을 향한 학생들의 시선을 하나하나 맞추며 말을 잇는다. “……사실상 폐부될 테니까요.” “하아.” 학생들이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결론이 그 쪽이였던 거에요?”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거네.” "솔직히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지만.” 그렇다. 서두가 제법 거창하고 희망찬 늬앙스였지만 결국 이건 폐부 선언, 아니 통고일 뿐이다. 대한민국에 널리고 5 6
  • 4. 널린 고등학교 중 한 곳에서 벌어지는, 어떤 부의 시작과 습이다. 그 끝을 알리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나만 아니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건데, 미안해…….” 물론 자신들이 활동하고 있는 부가 하루아침에 폐부되는 “아뇨! 이건 전~혀 선배 잘못이 아니라고요!” 심정이야 테러리스트의 음모를 막지 못하고 도심 그 모습에 주먹을 쥐고 분연히 몸을 일으킨 소녀는 신가 한가운데에서 핵폭탄을 터트리도록 용인해 버린 인.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가 그녀의 과격한 움직임을 특수대원들의 심정과 어떤 의미에서는 크게 다를 바 따라 마치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교복 차림의 남녀 다섯 “선배! 기운 좀 내세요! 이깟 부가 망한다고 뭐 지구가 끝 명으로는 그런 숙연한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으니까. 장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뭐, 그렇게 되어버렸으니, 본인도 매우 유감입니다.” “……그건 너무 포지티브한 것 같은데.” 탁자 앞에 홀로 서 있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그는 금발 “긍정적인 게 뭐 어떤가요!”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이질적인 모습이었는데, 정작 신가인은 홍미나의 날카로운 지적에도 불구하고 팔을 크 이목구비는 동양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게 펼쳐 힘차게 흔드는 시늉을 했다. “뭐야, 그 태도는. 부가 망했다는 선언을 한 부장 주제에 “긍정적인 건 좋은 거잖아요? 뭐라고 할까요, 이건 쇼트케 지나치게 뻔뻔한 거 아니야? 좀 더 책임감을 가지라구!” 이크 위의 딸기 같은 거라고요!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고 그런 그를 향해 쏘아붙인 소녀는 2학년의 홍미나. 별 거 아니지만 실제로는 별 거란 말이에요!” 흰색 머리끈으로 질끈 묶은 평범한 포니테일에 다른 학생 “나도 가인이 말에 동의해.” 들보다 머리 하나는 작아 보이는 체구였으나, 당당한 태도 침착한 어조로 그녀의 주장에 찬성한 건 작은 키에 안경 때문인지 존재감 하나만은 부실에서 단연 돋보인다. 을 쓴 소심한 인상의 소년이었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 사 “정말 미안해……이건 모두 나 때문이야.” 이로 반쯤 뜬 눈이 몇 번 깜박거리는가 싶더니, 홍미나의 반대편에 앉은 채 연신 사과를 반복하고 있는 “지금은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라고 봐.” 짧은 머리카락의 소녀는 3학년의 윤미영. 남궁현은 읽고 있는 책을 툭 덮으며 말을 이었다. 부실 내에서도 눈에 띄게 큰 키에 남자처럼 짦은 머리카 “부장도 지금까지 꽤 애써왔고, 우리 역시 할 수 있는 건 락을 한 그녀는,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풀이 잔뜩 죽은 모 다 해본 거잖아. 그 결과가 폐부인 건 좀 아쉽지만.” 7 8
  • 5. 그 말에 부실 내의 모두는 조용해졌다. 조금 더 먼 곳에서부터 이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자. 김영민 역시 아까 전부터 두 손바닥을 책상에 댄 채 바닥 이것은 대한민국의 어느 한 고등학교를 무대로 한 혈기 만 내려다보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현은, 왕성한 소년 소녀들의 작은 반란극이자, 당연한 현실에 저 “부장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항하는 겁없는 이들의 청춘군상극이기도 하다. “나는……. 이른바 학교를 무대로 벌어지는 혁명이자 반란이다. 앞뒤 김영민은 언젠가 그 질문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었던 것처 재놓지 않고 마구 덤벼들어 부 이름도 하이텐션이다. 럼 곧장 입을 열었지만, 이내 말문이 막혔다. 우스갯소리 그럼 DR은 대체 무엇의 약자냐고? 처럼 폐부라는 말을 꺼내긴 했지만 결국 마지막 결정을 그에 대한, 그것과 관련된 여러 가지 설명을 하기 위해서 내려야 하는 건 부장인 그인 것이다. 는 먼저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DR 하이텐션 “……그러니까.” 부가 만들어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바로 그 사건부터 이윽고 김영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기다리고 있던 모두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의 시선,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모습과 마주했다. 그러니까, 어디 보자. 창 밖으로 보이는 어둠이 깔린 운동장. 그건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일 전, 봄을 완벽하게 쫓아 환하게 불이 켜진 채 늘어서 있는 수많은 교실들. 낸 겨울이 강적인 여름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달아나며 한 학교의 담을 따라 운동하고 있는 사람들. 바탕 튀긴 비로 짜증나던 6월 초의 일이었다. 언덕을 넘어 한참 아래에 위치한 도시의 무수한 빛. 이제 내일이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같은 풍경을 공유하던 정든 부실을 떠나 일상의 교실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무익한 파병이었다. 잘못된 쪽의 함정 카드였다. 초록색을 놔두고 빨간 선을 자를 걸 그랬다라고 부르짖기엔, 이미 장롱 구석에 선로라도 깔린 것처럼 굴러들어가 보이지도 않는 500원짜리 동전처럼 돌이킬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 10
  • 6. 구우우우우우- 여객기 한 대가 하얀 구름을 뿜어내며 날고 있는 하늘 아 래, 정장 차림에 금발머리를 한 소년이 서 있었다. 그의 앞에 보이는 웅장한 학교는 ‘명문고등학교’ 전국에서 도 명문대 진학률이 가장 높기로 유명한 곳이다. 더불어 명문고 명문고 하지만 실제로 이 학교 이름은 밝을 명 자 에 글월 문 자를 써서 ‘명문(明文)’ 고등학교다. 넒은 운동장으로 이어지는 입구에서, 소년은 수많은 창문 1화 ‘대책없이 굴러온 Big Stons’ 으로부터 쏟아지는 시선으로 선텐이라도 할 기세였다. 소년! 바다를 넘어서 오다! “미안하지만, 김영민 군. 그건 우리 쪽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처음부터 뭔가 오해한 것이 아닙니까?” 지금 말하고 있는 자는 단정한 블라우스 차림을 한 중년 의 여성으로서, 이름은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 여기서는 일 단 ‘이사장’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기로 하자. 그녀는 대한민국에서도 최고의 시설을 가지고 있다는 명 문고등학교의 이사장답게, 흠잡을 데 없는 고급 마호가니 탁자를 참호로 삼은 채 다짜고짜 이사장실로 쳐들어 온 이 당돌한 학생을 마주했다. “아니요. 이건 횡포입니다! 완전 사기입니다! 그렇게밖엔 11 12
  • 7. 들리지 않습니다! 애초에 제가 이 학교에 무엇 때문에 들 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만 그런 게 아니지요.” 어왔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모든 고등학교라니…….” “이 곳이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명문 고등학교니까요.” “학생은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캐나다에서 장기간 유학 그야말로 수월하고 타당한 결론이다. 했었지요? 하지만 이젠 영구 귀국했으니 한국에서 고등학 하지만 이사장의 눈앞에 서 있는 금발머리에 푸른 눈동자 교를 졸업해야 할 테고, 대학교도 가야지요.” 의 소년, 김영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겁니까?” “특례 입학을 허가해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그건 어디까 상대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교장 지나 제 꿈을 펼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꿈을 펼치면 되잖아요? 졸업할 때까지 3년 간 “그런데 김영민 학생. 어제 소개했던 문예부에는 가지 않 학비 전액 지급이라는 파격적인 조건, 당신의 수상 경력을 았습니까? 혼자 자율학습을 멋대로 빠지는 것은 교칙상 높이 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허가할 수 없지만, 문예부 소속이라면 정식으로 자율학습 번뜩이는 뿔테 안경 너머로 바라보면서 천연덕스럽게 말 대신에 부 활동을 할 수 있을 텐데요.” 을 잇는 이사장의 모습에, 김영민은 두 팔을 펼친 과장된 “그야 물론 말씀하신 즉시 달려가보았습니다만!” 포즈로 목소리를 높였다. 김영민은 그 때의 기억이 나는 모양인지 바득바득 이를 “하지만 전혀 펼칠 수 없다고요! 이런 곳에서는……11시 갈기 시작했는데, 으르렁거리는 것이 마치 금방이라도 상 까지 책만 죽어라 들여다봐야 하다니, 그래서야 제 꿈을 대에게 송곳니를 드러낼 기세였다. 이루기 위한 시간이 전혀 없단 말입니다!” 그들의 대치를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짓는 바람에, 이사장과 김영민 모두 그를 소년이 문예부에 처음 들어가 인터뷰했을 때의 광경을 한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럽게 주의가 이쪽으로 쏠린 것 번 떠올려 보도록 하자. 을 깨달은 그는 느긋하게 입을 연다. 정규 수업을 마친 뒤 부리나케 문예부실로 뛰어들어온 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학생은 뭔가 잘못 알고 있군요. 영민은, 그곳에서 교장의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문예부의 한국에 있는 고등학교는 모두 본교와 같이 야간자율학습 여 부장과 마주할 수 있었다. 13 14
  • 8. 그 장면에서 순순히 부 가입 신청서를 냈다면 모든 일은 그 말을 들은 문예부원들은 다들 뜨거운 햇볕에 널린 오 깔끔하게 풀리고 앞으로의 고생도 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징어마냥 부실 여기저기서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김영민의 “이딴 게 무슨 문예부입니까!” 과격한 주장에는 홍미나도 심기가 뒤틀린 모양인지, 의자 문예부장의 부 설명을 들은 김영민의 첫 감상은 그러했다. 에 앉은 채로 상대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적진에 들어가 항복 문서에 조인하려던 패장이 갑작스럽 “부, 불……아니, 분석과 평론은 창작의 기본. 쓰기 위해 게 ‘우리 군은 최강이다! 항복은 개나 줘버려라!’ 라고 깽 선 먼저 쓰는 것에 대해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는데?” 판을 부리는 장면이 연상된다면, 그보다 더 난장판인 상황 날카로운 눈썹 하나가 묘하게 이그러져 있는 채였지만, 과 을 떠올려 보도록 하자. 연 상대의 난폭한 언동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 게다가 상대는 여학생임에도 불구하고 가차없는 이 태도 여주지 않는 것이 한 부의 책임자다운 면모다. 가 또 김영민의 안하무인격인 태도를 한층 더 빛나게 만 “글은 머리로 생각하면서 쓰는 게 아닙니다!” 드는 요인이었다. 김영민은 돌연 검지를 들어올리더니 척 하고 그녀를 향했 “하아? 너, 뭐야. 시비거는 거야?” 다. 본의 아니게 모두의 시선이 그 끝을 향해 집중된다. 건방진 후배 대응하는 매뉴얼을 사전에 탐독한 게 아닌가 “자신의 가슴으로, 하트로 쓰는 겁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의심될 정도로 차분하게 대응하는 이 여학생의 이름은 홍 그 크기에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정 미나. 더불어 2학년, 문예부의 부장. 상대가 불이라면 그 신력으로 불태워야 하는 겁니다!” 녀는 액체질소에 버금가는 냉정함을 지닌 듯했다. 정론이라면 정론이겠거니와, 열의에 불타는 김영민의 삿대 “모집 기간도 아닌데 받아줬더니만, 뭐가 불만인데?” 질하는 기세가 지나친 게 문제였다. “시험에 나올 만한 고전 따위나 분석하는 게 무슨 문예부 “이이익…….” 입니까? 그건 문학부, 아니 시험 대비부입니다! 시의 운율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홍미나는 지금까지 참았던 분노 이나 형식. 숨겨진 의미 따위를 공부해서 도대체 뭘 하자 를 한 번에 폭발시켰다. 는 겁니까? 그거야말로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거나 다름 ““당장 나가!” 없는 거 아닙니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홍미나는 소년을 밀쳐내다시피 입 “뜨허억!” 구로 쫓아내며 외친다. 15 16
  • 9. “너 같은 녀석은 절-대로 안 받을 거니까!” 소년의 즉답을 들은 교장이 이사장을 바라보며 인자한 “흥, 저도 이런 멸치 머리 같은 부에는 있고 싶지 않습니 웃음을, 어디까지나 실실 흘리고 있다. 이런 녀석을 대체 다. 동태 눈알은 영양분이라도 있지만, 여러분은…….” 어디서 주워왔느냐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 있는 이 금발머리의 소년은 그 그 짦은 시간 동안 주먹과 발을 이용한 몇 번의 난투가 불량한 태도와는 달리 의외로 전도유망한 인재라는 것을 있었지만 김영민이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체격을 이용해 이사장은 잘 알고 있었다. 기적적으로 전탄 방어했다는 사실은 굳이 열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물론 가드가 한 번이라도 뚫렸다면 그대로 기어나가야 했을 정도로 아슬아슬했지만. 비록 수상하진 못했지만 김영민은 외국 문학계에서 아무튼 서로에게 최악의 인상을 안겨준 그것 하나만큼은 알아주는 황금문학상 영화 시나리오 부분 최연소 후보에 분명하다고 이 자리에서 당당히 서술할 수 있겠다. 오른 적이 있었다. 한글과 영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여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이며, 심지어 설레발치기 좋아하는 “그야말로 저질러 버렸다는 느낌이로군요.” 일부 언론에서는 그가 장래 노벨문학상 후보로 선정될 김영민의 설명을 들은 이사장은 다짜고짜 한숨을 쉬더니, 가능성이 높다고 할 정도이니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할 이내 미간을 한 손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것이다.. “게다가……그건 거의 성희롱에 가깝지 않습니까?” 처음에 김영민이 영구귀국을 목적으로 한국에 입국했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설명을 요구합니다.” 때는 스타도 아닌데 공항에 취재진들이 찾아올 “그럴 의도가 없다는 것이 더 질이 나빠요. 자신이 깨닫지 정도였으나, 사실 소년의 유명세는 거기까지였고 그 못하고 있다는 거니까……. 김영민 군. 캐나다 유학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시절에는 친구가 몇 명이나 있었죠?” 후보에 한 번 오른 이후론 별다른 창작 활동이나 수상 “글을 쓰는 데 친구 따윈 필요 없습니다. 창작이라는 것은 경력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헐리우드의 유명한 기본적으로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니까요.” 17 18
  • 10. 극본가인 아버지의 후광을 받은 도련님에 지나지 “하지만 김영민 학생. 문예부가 자네에게 맞지 않더라도, 않는다는 상반된 혹평도 틀림없이 존재했으니까. 형식적으로 가입한 뒤에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해도 되는 것 아닌가? 교칙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만.” “아니요. 저는 문제가 있습니다.” “흔치 않은 포트폴리오에요. 가능성에 투자하는 거죠.” 교장의 말을 들은 김영민은 단호하게 반박했다. "이사장님 생각은 알겠습니다만, 외국 생활을 하던 학생이 “그런 거짓 활동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예부원인데 본교의 엄격한 규율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지." 문예부의 활동을 하지 않는다니, 그래선 이중 스파이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본교의 명성에 조금이라도 다름없지 않습니까? 저는 스파이가 아닙니다!” 도움이 된다면 지구 반대편에서도 데려올 거니까요." “묘한 부분에서 성실한 학생이로군.” 김영민의 특례 입학이 결정된 후로 교장이 의문을 교장 선생님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영민은 그저 손을 들어 제기했을 때, 이사장의 대답은 실로 명쾌했다. 분명 금발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넘겼을 뿐이었는데, 그 동작 그녀라면 모국에서 반출된 대량살상무기라도 본교의 하나하나에도 고집이 잔뜩 묻어나오는 듯했다. 명성만 올리는데 쓰일 수 있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정말이지 하는 수 없군요.” 사용하서라도 확보했겠지. 이사장은 소년의 불만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즉, 다른 명문고에 대한 견제와 최소한의 억지력 확보는 모양인지, 팔짱을 낀 채로 목소리를 높인다. 이사장이 항상 주장하는 전국 최고의 독보적인 명문고를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문예부 가입이 위해 필수불가결한 절차였다. 그런 피나는 노력 끝에 싫다면 당신이 이 곳에서 원하는 부를 스스로 만들어 오늘의 명문고등학교가 존재하게 된 것이니만큼, 교장도 보는 것으로, 그거라면 불만은 없겠죠." 그 결정에 더 이상 반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교장과 영민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조건이었던 것이다. "이사장님!"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19 20
  • 11. 이사장은 앉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난 교장을 향해 않았지만 존재해야 할 목적 하나만은 분명했던 DR 하이텐 괜찮다는 것처럼 손을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션 부의 시작이었다. "교장 선생님. 부 설립에 대한 본교의 규칙이 어떻게 되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음, 다섯 명 이상의 부원과 부 및 개개인의 활동 신청서. 그렇게 되어 애초에 부라는 것이 몇 개 존재하지도 않던 그에 대한 학생회의 승인이 필요하지요. 말로 하자면야 명문고등학교에 뜬금없이 또 하나의 신생 부가 뚝딱 설립 매우 간단한 절차입니다만, 생각보다……" 되었던 것인데, 문제는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그 정도 설명이면 충분합니다. 영민 군?" 것이었다. “말씀하시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마음에 맞는 부원들을 모집한 뒤에 이사장의 분위기가 방금 전과는 달리 무뚝뚝해진 것을 깨 부 설립 신청을 하니까 이런 일이 없었겠지만, 처음부터 달은 김영민은 반사적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그 순간 그 신생 부의 부장이자 유일한 부원으로 시작한데다 거의 10 녀의 뒤에 있는 큰 창문으로 비치는 강한 햇살 때문에 소 년 만에 고국에 발을 디딘 김영민은 안타깝게도 학교에서 년은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이사장의 의 인맥이 동네 뒷산에 묻혀 있는 산삼을 우연히 발견했 목소리는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귓가에 들어왔다. 더니 실은 산삼도 아니고 인삼도 아닌 돌연변이였더라 정 “부로서 존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인 5명의 부원, 그 도로 현저히 낮았던 것이다. 리고 한달 후에 있을 학예회까지 부활동의 성과를 보여줄 소년이 명문고등학교에 입학한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 것. 그게 가능하다면 영민군이 설립한 부는 앞으로도 존속 일까? 아니, 오히려 현실은 그 반대였다. 처음 등교했을 시키겠습니다. 한마디로 방과 후에는 학생 마음대로 부활 때 선도부장과 정면으로 격돌한 것은 학생들 사이에서 두 동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죠. 하지만 한달 후에도 이 조건 고두고 회자될 정도였으니까. 을 만족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불만 없이 부를 폐쇄하고 문예부원으로서 활동하는 것으로, 어떻습니까?” 어쩌고 자시고도 없었다. 만약 당신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불량한 학생을 잡아내 바로 이것이 당시에는 아직 이름도 활동 분야도 정해지지 기 위한 선도부 소속의 부장이고, 185센티의 우월한 키와 21 22
  • 12. 덩치를 자랑하며, 지금은 등교하는 학생들로 한창 번잡한 “염색 금지라고요? 제 머리는 자연 금발입니다. 그렇다면 새벽의 교문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자. 검은색으로 염색하는 것이 오히려 본교의 교칙에 위배되 그런 당신의 눈앞에 처음 보는 소년이 그것도 틀림없이 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만?” 제대로 된 명문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데, 햇살에 빛나 “너 이 자식……사람을 바보취급 하는 것도 정도껏 해! 한 는 금발머리에 푸른 눈까지 한 도전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국인이 자연 금발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올려다보고 있다면 뭐라고 말을 붙일 것인가? “당신에게는 일일히 설명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군요. 여 “헤, 해브 어 나이스 데이?” 기 책임자는 누굽니까? 책임자를 불러 오세요.” “송구스럽습니다만, 기분이 그리 좋지 못합니다.” “채, 책임자라니. 학교가 무슨 레스토랑인 줄 알아? 이게 무표정한 모습으로 대답하는 소년을 바라보는 선도부장의 지금 나랑 장난 치자는 거야 뭐야!” 인상이, 마치 손님을 떠나 보내고 닫히는 자동문마냥 신속 격분한 선도부장이 주먹을 들어올린 바로 그 순간, 하게 찌푸려지기 시작한다. “잠깐!” “……내 마지막 남은 자긍심을 돌려줘.”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 동작을 아슬아슬하게 “한국의 로우 개그, 무척 어렵군요.” 정지시켰다. 얼굴이 벌개진 선도부장과 여전히 무표정인 “이놈이 끝까지……그럼 이해하기 쉽게 가르쳐 주지!” 김영민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을 향한다. 선도부장은 소년의 명찰 색깔을 보며 인상을 팍 쓰더니. “너희들 뭐 하는 짓이야? 학교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정문 다짜고짜 손을 뻗어 상대의 머리카락을 쥐어올렸다. 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둘 다 부끄러운 줄 알아!” “1학년 주제에 대체 꼬라지가 이게 뭐야? 요란한 염색에 포니테일을 휘날리며 빠른 보폭으로 다가온 것은 다름아 다 컬러 렌즈까지……우리 학교는 염색 금지다! 심지어 새 닌 홍미나였다. 선도부장은 그녀가 누군지 알아챘는지, 곤 치조차도 허락하지 않아! 몇 학년 몇 반이냐?” 란하다는 표정으로 김영민을 향해 턱짓을 해 보였다. 그 소란에 등교하던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그 둘을 향해 “하지만 미나야. 이 녀석 꼴을 보고도 말릴 생각은 아니겠 쏠렸으나, 정작 당사자들은 그런 분위기를 전혀 신경쓰지 지? 이건 내 선도부 2년 경력에 처음 보는 꼴이라고! 너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은 상대의 덩치에 전혀 도 선도부장까지 해봤으니 무슨 뜻인지 알잖아?” 굴하지 않은 채 선도부장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던 것이다. 그들 바로 옆까지 걸어온 홍미나는 김영민을 한 번 흘끔 23 24
  • 13. 쳐다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저런 없을 정도입니다. 가정 교육을 판타지로 배웠습니까?” 꼴을 하고 있다면 누가 봐도 황당하겠지. 선도부장이 그렇 그 순간 선도부장과 홍미나는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게 생각한 순간, 그녀는 예상치 못한 말을 내뱉었다. 버릇이 없는 건 너잖아! ”이 녀석 말이 맞을 거야.” 이 사건은 김영민의 등교 첫 날 벌어졌던 사소한 충돌 중 “그럼 그렇지……아니, 뭐라고?”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뭐, 그와는 그 날 밤에 문예부실에 “이사장님이 며칠 전에 캐나다에서 귀국자녀가 온다고 했 서 최악의 형태로 한 번 더 마주치게 되지만, 결과는 이미 거든. 한국어가 능숙하다더니, 그게 정말인가 보네?” 여러분들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거, 거짓말이야!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의 소년 따위가 현 실에 있을 수 있겠냐! 미소년이 아니라도 대 쇼크!” 그 일이 있고 나서 불과 이틀 만에 또 다시 정문 앞에서 지금에 와서는 새삼스러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홍미나는 단어 그대로 땅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의미불명의 리액션까지 취하며 경악 이 꺼져라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하는 선도부장을 뒤로 한 채, 홍미나는 환한 미소와 함 참고로 그때와 다른 점은 김영민이 공격이고 선도부장이 께 소년을 향해 말을 걸었다. 방어라는 상황의 차이 정도인데, 이건 절대 논쟁 외에 다 “저기저기, 얘. 너 이름 김영민……이었던가, 맞지? 이 누 른 의미에서의 공수가 아니니 주의하기 바란다. 나는 홍미나라고 하는데, 2학년의 문예부장을 맡고 있고, “어째서 안된다는 겁니까? 부 홍보 전단지일 뿐인데.” 아마 앞으로 너와는…….” “글쎄, 뭐든 간에 그런 종이쪼가리는는 정문에 못 붙이는 마치 잔잔한 호수를 연상케 하는 눈동자에 그녀의 호기심 것이 교칙으로 정해져 있다니까? 그런 건 알림판에 붙이 어린 얼굴이 비친다. 소년은 작은 입술을 천천히, 그러나 면 되잖아!” 단호하게 움직여 대답했다. “싫습니다. 알림판 따위 누가 본다고.” “불청객에게 가르쳐 줄 이름 따윈 없습니다.” “규칙은 규칙이다!” “에엑?” “현대 사회에서는 저투자 고수익이 기본인 겁니다. 고등학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끼어들다니 버릇이 없어도 정도가 교 2학년이나 되면서 어떻게 그런 것도 모릅니까?” 있어야죠. 이건 뭐 같은 동방예의지국에 있다고 믿을 수 “아니아니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거든요.” 25 26
  • 14. 명백한 조롱을 담은 상대의 대꾸에 김영민의 안색이 새파 선도부장의 안색이 마치 동그랑땡이 급속 해동되는 것마 래지기 시작한다. 소년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한 손으 냥 돌아오더니, 그의 우락부락한 얼굴에 눈물이 맺힌다. 로 입을 막더니 선도부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준 거야?” “갑자기 왜 존댓말입니까? 덩치 산만한 남자가 존댓말 쓰 “그렇습니다.” 니 기분 매우 나쁩니다. 앞으로 주의해 주세요.” “너, 사실 좋은 놈이었구나!” 조롱이 통하지 않았다. 덩치 큰 선도부장이 어울리지 않게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조롱에 조롱으로 대응한 것일지도 모르겠지 그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홍미나의 안색은, 마치 늪에 만, 이 소년이라면 오히려 진심일 것 같다. 양쪽 모두 선 빠진 채 겨우 몸만 건지고 기슭으로 빠져나왔더니 본넷부 도부장의 속을 뒤집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터 서서히 침수되고 있는 고급 스포츠카를 바라보는 주인 “너, 너 이 자식…….” 의 그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스팀을 마구 내뿜는 밥솥마냥 혼자서 씩씩거리고 있던 선 ‘우와……위로 받은 여자애도 아닌데!’ 도부장은,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홍미나를 발견하 그러나 김영민은 이성을 잃은 선도부장이 자신을 껴안기 고는 일말의 기대를 담아 힘차게 손을 흔든다. 바로 직전에 홍보지를 척 하고 두 손으로 펼쳐 보였다. ‘도와줘!’ 이 자식이 또 아침부터 시비를 걸고 있어!’ “정문에 붙일 수 없다면, 당신 배에 붙이겠습니다.” ‘미안, 나도 감당 못해.’ “그래! 아니, 뭐?” 홍미나는 맞붙은 두 손을 합장하는 시늉을 해 보인다. 그 김영민은 주변을 둘러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잇는다. 의미를 깨닫고 도움을 요청하던 모습 그대로 하얗게 불타 “생각 같아선 학교 명패 위에 붙이고 싶지만, 이곳도 상대 버린 선도부장을 향해, 김영민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적으로 제법 잘 보이는 곳이니까 괜찮겠죠. 또 당신이라면 “권력의 시녀란 정말이지 가엽기 그지없군요. 위쪽에서 하 학생들의 시선이 신속하게 아래쪽으로 내려올 테니.” 라는 대로 해야만 하니. 하지만 저도 상대를 궁지에 빠트 “…….” 려서까지 억지로 밀어붙이는 어린애는 아닙니다. 정문에 다른 의미로 굳어버린 선도부장의 배에 부 홍보 전단지를 홍보지를 붙이는 건 포기하겠습니다. 규칙을 지키는 것이 댄 김영민은 곧장 작업을 개시했다. 당신의 역할, 그 끈기에는 감동했습니다.” 한 손을 뻗어 위쪽을 고정하고 반대쪽 편에 테이프를 붙 27 28
  • 15. 인다. 그러면서도 불평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소년의 말은 넓혀 달리기 시작했다. 선도부장의 곁을 지나친 순간, 그 끊임없이 이어졌다. 는 굳은 모습 그대로 겨우 입술을 움직인다. “숨쉬지 마세요. 종이가 찌그러지니까요. 거시기 부분이 “보, 복수를…….” 불필요하게 튀어나와 있군요. 아, 그렇군요. 테이프 자르 “맡겨줘! 편안히 성불해라!” 는 김에 이것도 같이 자르면 평평하니까 홍보지 내용이 아직 안죽었어! 라고 외치는 선도부장을 뒤로 한 채 홍미 더 잘 보일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나는 김영민의 뒤를 쫓아 달렸다. 어째서냐고? 흔해빠진 “…….” 사랑이나 복수와는 관계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읏차,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작업이 끝났군요. 이 전단 지는 학생들 등교가 끝나면 필히 소각하세요. 뭣하면 당신 도 같이 소각되어도 상관없습니다만.” “그래서, 제 시간을 낭비할 만한 이유는요?” 김영민은 선도부장의 배에 붙여 놓은 부 홍보지를 손바닥 본관으로 향하는 몇 가지 길 중에서도 가장 사람이 없는 으로 툭툭 쳐서 제대로 붙어 있는지 확인하고는, 건물 옆의 작은 샛길. 넝쿨이 무성하게 걸린 아치형의 철 “방금 그건 가벼운 농담이에요. 협력 감사합니다. 일이 잘 제 프레임 아래에 서 있던 김영민의 첫 마디는, 없던 호의 풀리면 나중에 커피라도 한 잔 사도록 하죠.” 조차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라는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내뱉으며 유유히 선도부장의 “지금부터는 매점에 들릴 예정이란 말입니다. 섭취하지 못 곁을 떠나갔는데, 그 뒷모습은 정말로 홀가분해 보였다. 한 모닝커피의 원한은 무시무시하지요.” “…….” 걷다가 상체만 돌려 뒤를 돌아본 포즈를 여전히 유지하고 남겨진 것은 만화가가 채색을 잊어버린 듯한 선도부장의 있었는데, 별 일 아니면 그대로 가던 길 갈 기세다. 모습과, 어째서인지 그와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듯 애써 “너, 너 말야…….” 외면하는 수많은 학생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 홍미나는 두 팔을 허벅지에 댄 채 잠시 숨을 고르더니 천 고 있을 뿐인 홍미나 정도일까. 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검지 끝을 소년을 “참! 이럴 때가 아니지.” 향해 척 하고 치켜세운다. 그녀는 결심한 듯 성큼성큼 발을 내딛더니, 이내 보폭을 “뭐야, 그 건방진 태도는! 아까 그 녀석은 겉으로는 3학년 29 30
  • 16. 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은 2학년이라고! 외국물 좀 다. 당신, 아니. 선배에게 추궁당할 이유는 없는데요.” 먹으면 선배 대접은 신경도 안 쓴다 이거야?” “조건은?” “……이거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그럼 선배. 이쯤에서 제 “……조건이라뇨?” 시간을 낭비한 것에 대한 변명이라도 듣고 싶은데요.” “이사장이 부 설립을 대가로 제시한 조건 말이야!” 이 녀석에게 예의에 대한 태클은 틀림없이 불필요한 시간 김영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을 뿐, 평소처럼 그녀의 낭비를 야기할 것이라는 직감이 든다. 홍미나는 상대의 표 질문에 곧장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멀뚱히 쳐다보는 정에서 그 사실을 읽어낸 것처럼 맥없이 손을 내렸다. 것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모양인지, 한참 후에야 ‘……이 “방금 그 전단지는 도대체 뭐야?” 사장이 제시한 조건은’ 하고 운을 떼었다. ”부 홍보지입니다. ‘진짜만을 위한 당신의 부’ 가 모토죠. “다섯 명의 부원과 함께 한 달 후의 학예회까지 부 활동 더불어 여기서의 가짜는 그쪽을 의미합니다. 이슈를 끌기 의 성과를 보일 것. 뭐, 이쯤이야 간단하죠.” 위해 대결 구도를 좀 넣어봤는데 어떻습니까?” “포기해.” “허락도 없이 문예부를 정체불명의 집단과 묶지 말아줘. 홍미나의 단언을 들은 김영민은 그녀를 향해 완전히 몸을 그보다 너, 진짜로 부를 만들 생각인 거야?” 돌렸는데, 그림자 때문인지 소년의 푸른 눈동자가 마치 심 “두 말하면 지저귐이죠.” 해처럼 짙은 색을 띤다. “도대체 무슨 활동을 하는 부인데?” ”전국에서도 가장 빡세다는 명문고의 이사장이야. 그 독한 “그런 건 부원을 모집한 후에 생각해 볼까 하는데요.” 여자가 부 활동 같은 걸 잘도 인정해 주겠다. 게다가 이런 천연덕스러운 소년의 대답을 들은 홍미나는 기가 막힌 듯 정체도 모를 부에 누가 들어가려고 하겠어?” 입을 벌렸다. 무슨 부인지도 결정이 안 되었는데 냅다 홍 “ 이사장씩이나 되는 위치에 있는 자가 스스로 약속한 걸 보부터 하다니, 이 녀석은 얼마나 성질이 급한 거야? 뒤집을 리 없습니다. 게다가 겨우 네 명만 더 모으면 되는 “……그런 건 왜 물어봅니까?” 걸 왜 포기해야 하죠? 발언의 저의가 의심되는군요.” 김영민은 그녀의 심정 변화를 눈치챈 모양이다. 천연덕스러운 소년의 대꾸를 들으며, 홍미나는 자신의 입 “스파이입니까? 방해 공작입니까? 아쉽게도 부 설립은 어 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초조하다는 증거다. 제 이사장님과 교장 선생님에게 정식으로 인가 받았습니 그에게는 분명 그렇게 보일지도 몰라. 31 32
  • 17. 전 학년 합쳐 천 명 가량의 재학생을 보유하고 있는 명문 “뭘 무서워합니까? 저는 마음에 안 든다고 무작정 타인을 고등학교. 학생 수만 놓고 보자면 그 중 네 다섯 정도는 때릴 만큼 난폭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오해받아 산술적으로도 극히 일부에 불과할 터. 상처 입은 제 하트는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아. “으, 으흠! 누가 무서워했다고 그래!” 그 사실을 홍미나는 잘 알고 있었다. 홍미나는 그제야 자세를 바로 한 채 헛기침을 했다. “이 학교에서의 부 활동 사실은 부모에게 바로 통지가 돼. “아까 전에도 교문에서 아무 관계도 없는 애한테 한바탕 명문고 학생이 부에 가입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 독설을 해 놓고선, 네가 그런 말을 할 주제가 되니?” 줄 알아?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나아! 지금이라면 아직 다른 “남의 하트 따위는 부서지든지 말든지.” 학생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테니 쪽팔리지도 않…….” “우와아아…….” 김영민이 대답 대신에 쯧 하고 혀를 차는 바람에, 홍미나 “그것보다 선배. 넥타이.” 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인 채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평 김영민은, 문득 두 손을 들어 목을 만지는 시늉을 해 보였 소의 괄괄한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다. 다. 영문을 모른 채 아래쪽을 내려다 본 홍미나는 자신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붉은색 넥타이가 약간 헐거워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던 발소리는, 불과 몇 “그거 끝까지 제대로 올리세요. 보기 싫으니까.” 미터를 앞두고 갑작스럽게 멈추었다. “쓰, 쓸데없는 참견이야!” “선배는 해내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런 겁니다.” 그 말을 들은 홍미나가 힐끔 고개를 들어 보니, 놀랍게도 홍미나는 김영민이 무성의하게 오른손을 한 번 들어 보이 소년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까 전의 살벌한 기세와는 고는 본관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뭔 너무나도 딴판이라 보는 이가 어리둥절해질 정도다. 가 충고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결국 아무 “선배는 전국에서도 가장 빡세다는 이곳에서 문예부의 부 도 듣지 못할 말을 홀로 중얼거리는데 그친다. 장을 맡고 있잖아요? 그러니 불가능한 건 아니겠죠.” “그렇게 쉽진 않을 거야…….” 김영민은 상대가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두 그녀는 곧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손을 들어올리며 억울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33 34
  • 18. 있다면 벌써 제가 처리했으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 금발벽안의 전학생이 부원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문은 점 “설마, 부원을 모집하고 있는 게 아니었어?” 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뒷걸음질로 부실을 나가려던 영민의 움직임이 일순간 정 퍼져 나갔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은 이를 단지 따분한 학창 지했다. 바닥을 향하던 시선이 다시 창가 쪽으로 향한다. 생활의 작은 유희 정도로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여전히 정체불명의 손님은 책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별 관계도 없던 선도부장의 자존심까지 도매로 팔아넘기 “부 가입 희망자? 하지만 신청서는 들어온 것이 없는데 면서 시작한 홍보전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체불명의 부에 요? 방금 전에도 교무실에서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만.” 흥미를 보이는 학생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가입하려고 했는데 부실에 아무도 없어서, 기다리고 있었 확실히 거기까지라면 홍미나가 예상한 그대로였으나, 다만 던 것뿐이야. 부 활동 신청서는 어디서 받는지 몰라서.” 관심이 ‘거의 없었다.’ 였지, ‘전혀 없었다.’ 는 아니었다. “교무실에서 받는데요.” “난 거기가 싫어.” 상대는 그렇게 말하면서 짦게 한숨을 쉬고는, 읽고 있던 “어라?” 책을 마침내 조용히 닫았다. 그리고는 영민을 향해 고개를 저녁 시간도 끝나고 부실의 문을 열고 들어선 김영민은, 든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은 묘하게 이지적 해질녁 창가 근처에 놓인 파이프 의자에 앉아 있던 누군 인 분위기를 풍겼다. 가의 모습을 발견했다. “미안하지만, 이 부실엔 신청서 없어?” 하얗게 빛나는 손에 들려 있는 책 한권, 한쪽 눈을 덮을 “예비용으로 몇 장 정도는…….” 정도로 긴 갈색의 머리카락.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은 무 “그럼 좀 부탁해. 필기구는 가지고 있어.” 릎에 펼쳐 놓은 책의 내용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김영민은 상대의 요청에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품 속에서 영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신청서 한 장을 꺼내어 책상 위에 척 하고 올려놓았다. “들어올 부실을 착각한 모양이군요. 이거 실례.” “실례입니다만,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아, 인터 “착각한 게 아니야.” 뷰나 면접 같은 건 아닙니다. 개인적인 질문인데요.” “그럼 도둑인가요? 이런 허름한 부실에 훔쳐갈 만한 게 첫 번째 가입자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타날 거라고는 생 35 36
  • 19. 각지도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어디서 무얼 하고 은 기념지로 지정하고 보다 큰 곳으로 부실을 이전하는 있다가 이제 나타났냐면서 불평을 하고 싶은 걸까? 계획을 세워 봤습니다! 대강당은 어떻습니까?” 어느 쪽도 아니었다. 김영민은 부실 입구와 창문 사이를 마치 웨이포인트가 찍 “혹시 당신…….” 힌 마린마냥 횡단하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댔지만, 영민의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남궁현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일 뿐이다. “게이입니까?” “이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야. 애초에 이 학교는 부 상대는 창 밖에서 들어오는 빛 때문에 붉은 빛을 발하는 활동이 극도로 위축되어 있으니까. 다른 고등학교와 비교 듯한 안경을 한 손으로 밀어올리며 대답한다. 하더라도 특히 그 정도가 더 심해.” “난 게이(gay)가 아니야. 가이(guy)지.” “에이, 천명 중에 넷, 아니 세 명만 더 구하면 되는데요.” “천 명이 아니야. 3학년은 학업 때문에 부 활동을 못하게 되어 있으니 많이 봐줘도 오백 명 정도밖에 안 돼.” 그 소년의 이름은 남궁현이라고 했다. 김영민은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남궁현을 바라보았지만, 성은 남궁. 이름은 현. 그는 여전히 입부서류에 시선을 두고 있는 상태였다. 입고 있는 남학생 교복만 아니면 영락없이 여자인지 구분 김영민은 흥이 깨졌는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할 수가 없는 중성적인 얼굴이다. “오백명이면 아직 많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겉으로 보이는 행동조차 조신해서, 사실 단지 소심 “그 외에도 이 부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더 있어.” 한 것일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영민에게 있어 그런 건 아 남궁현은 김영민이 운동장 쪽으로 열린 창문을 향해 다가 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신입부원이 들어왔다는 것. 가는 것을 곁눈질로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이야, 이 페이스대로라면 내일 다섯 명 정도는 충분히 얻 “우선 명문고의 이사장은 기본적으로 부활동을 장려하지 을 수 있겠군요! 그 이상 모이면 솔직히 이 부실이 너무 않아. 오히려 그 반대. 너는 가장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비좁아지니까 사양할 수밖에 없네요. 정말 미안해서 뭐라 사람에게 선전포고한 것과 마찬가지야. 이게 두 번째.” 고 말하고 돌려보내야 할지! 물론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 “헹! 그런 거, 이 몸은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지하기 위해, 정식으로 부를 인정받으면 이 구질구질한 곳 김영민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실려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37 38
  • 20. 불어왔다.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남궁현은 다 쪽이 불리한 것은 뻔한 이야기다. 시 입부서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을 잇는다. “아까 전부터 말하는 것이, 아무래도 당신은 페이스오프한 “너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정작 이 학교의 다 홍미나 본인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분장해서 저 른 학생들은 그렇지 않을걸. 애초에 전학생인 너에게 선심 를 속이려고 하다니, 도대체 어느 정도로 사람이 치사한 쓰듯이 부 설립을 허락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겁니까? 하지만 나의 이 매의 눈은 벗어날 순 없어! 얌전 “그야! 내가……천재 작가라서?” 히 그 가면을 내던지세요!” 그렇게 말하며 자신만만하게 몸을 돌린 김영민은, 정작 상 “가면 아니야! 아파! 아프니까 꼬집지마! 하으!” 대가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호오, 확실히 이 질감은 가면은 아니지만, 분명히 페이스 있자 입을 삐쭉 내민다. 오프란 영화에서는 얼굴가죽을 누군가와 바꿔치기한 거였 “치잇. 그 이유가 뭔지나 들어보죠.” 죠. 그게 맞나? 어쨌든 불독처럼 양 볼이 늘려져서 평생 “이사장은 너의 부가 존속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 학 결혼도 못하기 전에 얼른 자백하는 게 좋을 겁니다!” 교 학생들 대부분이 ‘신생부? 얼마 못 가 폐부할 그런 곳 “홍미나? 2학년 홍미나? 그 애가 뭐 어쨌다는 거야! 무슨 에 왜 가?’ 라고 생각할걸. 그리고 또 하나는.” 말인지 모르겠어! 전혀 모르겠다구! 아파!” 김영민이 순간 몸을 돌리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옪겨 순식 “호오, 제법 잘 버티고 있지만, 이건 어떻습니까?” 간에 상대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제 둘 사이에는 붙여 놓 김영민은 볼을 늘리는 것이 통하지 않자 이제는 다른 방 은 두 개의 책상 정도의 간격뿐이다. 법을 시도한다. 두 손을 뻗어 허리를 마구 간지르는 바람 “무, 무슨 일이야?” 에 남궁현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마구 웃어댔다. 남궁현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서 있던 김영민이 갑자 ”으햐햐햐햐! 숨 넘어! 숨 넘어가! 그만! 그만해! 용서해 기 두 손을 뻗어 상대의 볼을 꽉 움켜쥔다. 줘! 착각, 흐앙! 착각하고 있는 거야! 너 착각하고 있다고! “이게 무, 무순 쥣이야!” 내 어디가 그 애랑 닮았다는 거얏!” 본의 아니게 웃는 표정이 되어버린 남궁현이 새빨갛게 상 “굳이 말하자면 그 존재감 약한 가슴입니다!” 기된 표정으로 허우적거리기 시작했지만, 명백히 김영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실 문이 쾅 하고 열린다. 쪽이 덩치가 더 큰데다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볼을 잡힌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정신 사나워서 도저히 부 39 40
  • 21. 활동을 할 수가 없잖아! 도대체 혼자 있으면서…….”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문 벽에 기대었다. 그곳에는 상대를 향해 표효하듯이 포니테일을 치켜세운 “뭐, 둘이서 소꿉놀이하는 건 아무래도 좋지만, 지금처럼 홍미나가 서 있었다. 더불어 김영민은 남궁현에게 간지럼 시끄럽게 떠들지만은 말아줘. 옆반에 실례잖아?” 을 태우기 위해 책상 위를 반 이상 넘어가 있는 상태. 그 “아니 선배는 남의 부실에 쳐들어 와서 도대체 무슨 실례 모습을 보던 홍미나의 눈이 조금씩 가늘어진다. 의 말씀을 하는 겁니까! 부실은 부원의 사유지이자 완전면 “무슨 미친 짓을 하나 했더니…….” 책지대! 게다가 이건 엄연히 친목 활동의 일환…….” “아니? 페이스오프가 아니라 더블이었습니까!” “친목은 무슨 얼어죽을! 남자 둘이서 쎄쎄쎄라도 하게?” 김영민은 책상 위로 축 늘어져 버린 남궁현을 남겨둔 채 김영민은 홍미나의 반박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쪽을 향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다. 그녀의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이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소리야. 너 그것보다, 이런 취미가 있었니?” “하, 하하. 그러니까 제 말은.” 일단 홍미나의 한 수. 어느 정도로 임팩트가 있었냐 하면, 복도에 깔린 어둠이 “들어오자마자 못볼 걸 봤네. 그래서, 저 애는 몇 학년 몇 그녀의 등 뒤에서 솟아올라, 마치 생명체처럼 스물스물 부 반에서 납치해 온 건데? 아무리 부원 모집이 절망적이라 실 안으로 침투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고는 하지만, 범죄는 좀 지나친 거 아니야?” “……한 번만 봐주세요.” “범죄라니요!” “흥! 문예부가 이 구질구질한 부실의 바로 옆에 있다는 사 김영민 역시 기다렸다는 듯 바로 맞받아친다. 실을, 네놈은 죽어서도 절대 잊지 않는 게 좋아.” “그런 남들에게 오해받을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세요. 무 홍미나는 지옥이 있다면 그곳에서도 가장 깊은 불구덩이 엇을 숨기랴, 그는 이곳에 가입한 신입부원 1호입니다!” 속에서 들려올 법한 어조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더니, 한 “신입부원이라니, 진짜야?” 걸음 뒤로 물러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홍미나가 남궁현을 향해 물었지만 그는 여전히 책상에 엎 “내가 항상 벽 뒤에서 지켜볼 테니까 말이지…….” 드린 채 하아하아- 하고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다. 김영민은 마지막까지 보이던 그녀의 손가락이 어둠 속으 “흐으응……이런 정체도 모를 부에 가입하는 사람이 벌써 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진 후에야 겨우 후 하고 숨을 내뱉 생길 줄이야, 정말이지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을 수 있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41 42
  • 22. “아까 그 사람, 정말 무서웠죠? 올랐다! 매력이 1 올랐다! 카리스마가 1 올랐…….” “너도 참 운이 없네. 입학한 지 이틀 만에 그 괄괄하기로 [너 임마 시끄러웟!] 소문난 홍미나 선배를 적으로 돌리다니, 이 정도의 안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까칠한 홍미나의 목소리가 벽 너머 플래그라면 혹시 나는 저주 받은 부에 들어온 걸까.” 에서 난입하는 바람에, 흠칫 놀란 김영민은 그 자세 그대 “안티 플라그요? 그건 치약 이름입니까?” 로 굳어 버렸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부장의 꼴사나운 “전문용어야. 너는 몰라도 돼.” 모습을 감상하던 남궁현이 이윽고 입을 연다. 남궁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입부 희망서 쪽에 내용을 “카리스마가 10 하락했습니다. 예이.” 채워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김영민은 아무도 방해하 “……그건 무슨 처절한 패널티인가요.” 지 않는 상황임을 깨닫고 다시 입을 연다. 층간 소음, 아니 벽간 소음의 주범인 김영민은 삶의 희망 “나와 그녀는 부실이 가까우니 지리적으로는 분명히 이웃 을 몇 초만에 완전연소시킨 것처럼 비틀거리더니, 의자에 사촌이지요. 그러니까 ‘내 앞마당에는 안돼!' 라는 플랜카 앉자마자 고압가스로 충전된 인형마냥 활기를 되찾는다. 드를 사이좋게 걸 수 있는 사이라고 할까요!” “근데 무슨 문제점이 있다고 했죠?” “지리적으로는, 인가. 부장이 그걸로 됬다면야.” “미안, 이야기 흐름을 전혀 못 따라가겠어.” 남궁현은 그렇게 대답하며 입부 희망서를 내밀었다. “그 왜 아까 이사장을 적으로 돌렸다던가. 그 외에도 부원 “자, 입부 서류. 다 썼으니까 확인해 봐.” 을 모집하는데 문제가 더 있다고 그랬잖습니까?” “이야, 이거 부장이란 호칭을 직접 제 귀로 들으니까 제법 남궁현은 그제야 아- 하는 탄성을 흘린다. 멜랑콜리한데요?” “둘, 아니 세 번째였던가. 홍보 부족이야.” 쑥쓰럽다는 듯이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입부 서류를 건네 “홍보 부족이라고요?” 받은 김영민은, 서류를 쥔 손을 허공으로 힘차게 들어올리 “내가 이 부의 존재를 어떻게 깨달았는지 알아?” 고는 다른 손을 허리에 대는 기묘한 자세를 취했다. 김영민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드디어 이 몸의 부장 레벨이 1 상승했습니다!” “그야 두말할 것도 없이 제가 오늘 아침 선도부장 배에 “그건 갑자기 무슨 게임인데.” 붙여놓았던 부원 모집 홍보지 때문이겠지요.” “예이! 부장 김영민은 신입부원을 획득했습니다! 의지가 1 “너 그런 짓도 했었어? 오늘 선도부장 안보이던데……” 43 44
  • 23. “칫, 도망갔나.” “어, 그럴 리가요? 분명히 접착제로 단단히 고정…….”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김영민을 향해 남궁현은 신입생 “학생회에서 발견하자마자 바로 뜯어냈겠지. 이 학교에 있 에게 당했으니 무리도 아니지, 라고 답한다. 선도부장이라 는 부는 모두 이사장의 통제 아래에 놓여 있어. 그렇지 않 면 나름 권한과 명예가 있는 자리니까. 더라도 무단 홍보라면 충분히 문제가 되겠지만.” “솔직히 당해준 것 자체가 미스터리야.” 김영민은 그런건가! 하고 적잖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 “잠깐,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알고 가입한 겁니까? 설마 다.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고 눈을 동그랗게 뜬 것이, 마치 보험 삼아 2미터짜리 알림판에 빈틈없이 붙여놓았던 홍보 짐 캐리의 과장스러운 연기를 보는 듯하다. 지가 눈에 띄었던 것은 아니겠죠?” “이 학교엔 네 편이 그렇게 많지 않아. 네번째 문제.” 선도부장을 향해 ‘알림판 따위’ 라고 쏘아붙였던 것에 비 “크으, 설마 예비 수단마저 간단히 무력화될 줄이야…….” 하면 놀라울 만큼 완벽한 일처리다.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이며 나지막하게 신음하던 김영민은 그러나 남궁현은 ‘그건 너무 지나쳤어’ 라고 대꾸했다. 문득 행동을 멈추고는 입을 연다. “확실히 알림판은 정문 현관에 있어. 지나가면서 볼 수밖 “잠깐, 그렇다면 오늘 한 모든 홍보는 실패했다는 건데, 에 없는 위치지. 그런데 너, 알림판을 사용하는데 사전에 당신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알고 여길 찾아온 거죠?” 학생회의 승인을 받긴 한 거야? “너, 그걸 여태까지 몰랐던 거야?” “승인이요?” 무릎 위에 펼쳐 놓은 책에서 시선을 들어올린 남궁현은, 이해가 잘 안되는지 고개를 갸웃하는 김영민. 부장 김영민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뇨. 공공 시설을 사용하는 것에 승인이 필요하다면, 설 “나, 너하고 같은 반인데.” 마 학생회에 보호세 같은 걸 내야 하는 건가요?” “학생회에 대한 네 인식은 잘 알겠어.” 남궁현은 가로 폭만 해도 2미터가 넘는 알림판에 덕지덕 명문고등학교 1학년 5반의 교실 안. 지 붙어 있는 부 홍보지를 연상하는지 미간을 좁혔다. 그 평소 같았으면 피곤에 쩔은 학생들이 힘없이 늘어져 있을 정도라면 학생회에도 상당히 이슈거리였을 것이다. 아침조회 시간이었으나, 오늘만은 어쩐 일인지 다들 눈을 “내가 등교했을 땐, 알림판은 텅 비어 있었어.” 반짝이며 교단 쪽으로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45 46
  • 24. “…….” “나참, 자기 소개를 컨닝 페이퍼로 하는 녀석이 어딨어.” 오직 구석에 앉아 있는 남궁현만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 “뭐 어떻습니까? 기합 좀 넣어서 자기 소개를 해보려고 었다. 어쩌면 뜬구름을 보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했는데, 일단은 제 마음만이라도 받아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새로 전학 온 친구를 소개하도록 하지.” 담임 선생님의 심드렁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아무렇게 대 눈가의 다크서클이 끝을 모를 정도로 깊게 패인 흰색 남 답한 김영민은, 종이를 구깃구깃 접어 주머니에 넣더니 교 방 차림의 후즐근한 남자가 교단에 기댄 채 입을 열었다. 실 안을 가볍게 훑어보는 시늉을 했다. 33살의 반품남이라는 특이사항이 붙어 있는 이 반의 담임 “자, 그럼. 혹시 질문 있으십니까?” 선생님이다. 남자들은 노골적으로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고, 몇몇 여 “외국에서 온 귀국자녀를 반갑게 맞이하길 바란다. 교환학 학생들은 얼굴을 붉히며 애써 시선을 피한다. 생이 아니라 엄연히 국적도 우리와 같으니 유의하도록.” 그러나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전학생이 자기 반으로 전 말을 마친 담임 선생님이 교단을 내려가 옆에 서고, 그 자 학 왔다는 이 상황을 대한민국에서 몇 명이나 경험할 수 리에 전학생이 뚜벅뚜벅 걸어 올라왔다. 있을까? 그만큼 희귀한 일을 두고 침묵은 금이라는 금언 “여러분 반갑습니다. 김영민이라고 합니다.” 을 실행할 만한 학생은 적어도 이 반엔 없었다. 교단 앞에 선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년은 다짜고 “저기저기, 있잖아?” 짜 유창한 한국어를 사용해 자기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먼저 스타트를 끊은 건 단발머리의 여학생이다. “아버지를 따라 외국에서 6년간 거주하다 며칠 전 귀국했 “너, 우리와 나이도 같을 텐데 왜 존댓말을 하는 거야?” 습니다. 이곳 명문고에서 여러분과 같이 학창 생활을 할 김영민은 상쾌한 미소와 함께 그 질문에 대답했다.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에 또.” “아버지 때문에 늘 집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 김영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년은 그 대목에서 잠시 말 서 듣다시피 한국어는 제법 유창합니다만, 대신 존칭 표현 을 더듬더니, 결국 교단 위에 펼쳐 놓았던 종이를 들여다 에는 좀 약합니다. 만약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니까 존댓말 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에 대해서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이 부분은 이해가 잘 안되네요. 내가 썼지만 것 참 도저 “그럼 나도 질문이 하나 있는데!” 히 뭐라고 쓴 건지 모르겠네. 그냥 질문으로 넘어가죠.” 남학생 한 명이 손을 번쩍 들며 입을 연다. 47 48
  • 25. “정확히 외국 어디서 살다 온거야? 학교는?” “더 이상 제가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유일한 “미국 캘리포니아의 로스엔젤레스입니다. 학교는 근교에 혈육이었던 아버지가 한달 전에 사망하셨거든요. 그는 헐 있는 헌팅턴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리우드의 유명한 각본가 중 한 명이었죠. 비록 맨스 차이 “헤에, 허, 헌팅턴 미들 스쿨이란 말이지. 명문이네~” 니즈 극장에 발바닥을 새기진 못했지만요.” “모르면서 아는 척 하지 마.” 말을 끝낸 김영민은 이내 환하게 웃었다. 옆에 있는 여학생이 질문한 남학생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또 다른 질문은 없습니까?” 것을 본 김영민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소년은 진심인 것 같았지만, 그런 말을 듣고도 태연하게 “더불어 집은 비버리힐즈에 있었습니다. 이야, 거긴 정말 질문할 만한 배짱을 가진 학생은 그 자리에 없었다. 좋은 곳이었죠. 태평양이 바로 눈앞에 있거든요.” 전학생의 입에서 친숙한 단어가 나오자 학생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바뀌기 시작한다. 분명히 그 때만 하더라도 같은 반 학생들의 뇌리에 김영 “오! 비버리힐즈! 나 거기 알아!” 민의 첫 인상은, 어쩐지 좀 불행한 과거를 지녔지만 씩씩 “모르는 게 바보 아냐? 헐리우드의 유명 연예인들이 살고 하고 예의를 잘 지키는 그야말로 ‘금발벽안의 전학생’ 이 있는 부자 동네잖아. 영화에서도 엄청 많이 나오는데.” 라는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점심 “대단하다! 그런 곳에 살던 사람은 처음 봤어!” 시간에 호출을 받아 교장실로 불려 갔다 온 뒤부터는 미 모두가 시기 어린 감탄사를 장황하게 늘어놓던 와중에, 떠 간에 주름이 하나씩 느는가 싶더니, 야간자율학습을 시작 들썩한 교실 분위기와는 마치 바다 위의 섬처럼 단절된 한 후에는 멋대로 어디론가 사라지질 않나, 30분 후에 돌 분위기를 풍기고 있던 남궁현이 손을 들었다. 아온 그의 인상은 그야말로 지옥에 떨어진 천사의 그것을 “그런데 왜 한국으로 돌아온 거야?” 보는 듯해서 같은 반 학생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어이, 그런 질문은 좀…….” 창가에 붙어 있던 자기 책상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가방을 “괜찮습니다.” 집어든 김영민을 향해 자율 학습을 지도 중이던 담임이 김영민은 도중에 끼어들려는 담임 선생님을 한 손으로 제 ‘어디 가냐?’ 라고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갑니다.’ 라 지하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고 대답한 것은 혹시 전설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49 50
  • 26. 그 모든 게 전학한 첫 날에 있었던 일이었다. “마지막 문제는. 이름도 없고 홍보도 부족한 이 부가, 대 체 무슨 활동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는 거야.”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아, 그게 당신이었군요?” 여전히 드러누운 채 천진난만하게 대꾸하는 김영민의 모 김영민은 주먹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탁 치는가 싶더니, 이 습에는 남궁현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듯 하다. 내 머쓱한 웃음과 함께 혀를 살짝 내밀어 보였다. “어라? 그러고 보니, 는 무슨. 자세가 글렀잖아. 부까지 “이것 참 동양인의 얼굴은 도통 구별이 안돼서.” 만들어 놓고 뭐하는 거야.” “외국인인 척 하지 마. 이 하프 외국인.” 그는 실내화를 살짝 들어올리는가 싶더니 상대의 볼을 자 “에이, 농담이었어요. 사실 부 활동 문제 때문에 고민이 근자근 밟기 시작했다. 덕분에 김영민은 예상치 못한 공격 많아서, 그쪽에 신경 쓸 여력이 전혀 없었네요. 오죽하면 에 무방비로 공격을 허용하고 만다. 반에서 이름을 아는 게 당신뿐이겠어요? 남근현씨.” “이, 이건 아까 전의 복수입니까? 부장의 존엄한 얼굴에 “남궁현이다. 사람 이름을 음란하게 부르지 마.” 발을 함부로 놀리다니요! 저는 발 받침대가 아니라고요!” “아, 제가 그랬었나요?” “책상 밑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나쁜 거야. 내가 여자였다 김영민은 실실 웃으며 그의 바로 옆 자리에 앉았다. 그리 면 성희롱으로 고소해도 최소 두 번은 할 수 있어.” 고는 의자에 깊숙히 몸을 기대는가 싶더니, 천장을 올려다 “그럼 입장을 반대로 바꾸죠!” 본 채 말을 잇는다. “바꿀까보냐.” “이야, 좋네요. 동료가 있다는 것은 역시 든든하죠! 동료 둘이서 그렇게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부실 문이 덜컹 열리 모집은 역시 마왕을 때려잡기 위한 필수코스거든요?” 며 홍미나가 고개를 살짝 내민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는.” “아까 내가 좀 심했던 것 같아서, 과자를 좀 가져왔는데 “아직도 뭔가가 더 있었던 겁니까!” 괜찮다면 둘이서…….” 김영민은 그 외침만을 남기고는 의자에서 미끄러져 슬라 홍미나는 과자 봉지를 들고 있는 자세 그대로 멈췄다. 임처럼 책상 아래로 축 늘어져 버렸다. 책에서 눈을 뗀 남 그도 그럴 것이, 한 쪽을 발로 밟고 있고 다른 쪽은 밟히 궁현은 바닥에 누워 있는 소년을 내려다본다. 고 있으니 대체 무슨 플레이냐고 태클을 걸어도 위화감이 51 52
  • 27. 없을 듯했지만, 그녀는 단지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뭐 이제 됬어요. 이름 같은 건 알아서 정하세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홍미나는 종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헤에. 짧은 시간에 문제점을 잘 짚어냈네. 그것보다 문제 “너, 글을 쓰고 싶다면서 문예부를 박차고 나갔잖아. 그럼 점이 너무 많아서 총체적 난국이라고 느껴질 정도야.” 부를 만든 것도 당연히 그런 목적이었던 거 아니었어?” 의자에 앉은 채 남궁현이 정리한 문서를 읽어보던 홍미나 “……그야 물론 그렇긴 해요. 하지만 말이죠? 글을 쓴다는 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건 어디까지나 혼자서 활동하는 거니까요. 부원을 모집해 “뭐 확실히 홍보 부족도 문제지만, 그 전에 부 이름이라던 봐야 제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 같고, 왠지 싫달까.” 가 무슨 활동을 할지부터 결정해야 홍보 효과가 극대화되 남궁현과 홍미나는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겠지. 일단 부 설립 목적은 뭐야?” “배불렀네.” “음. 목적이라…….” “배불렀어.” 잠시 고민하던 김영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홍미나는 상대가 반박할 시간을 주지 않고 말을 잇는다. “가령 예를 들어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던가, 그런 식으로 “그러니까 너는 글을 쓸 시간을 가지고 싶지만 부원 모두 세계 평화를 위한 김영민의 부는 어떻습니까?” 가 활동을 해야 제대로 된 부 활동이라는 거지? 그러면 “기각. 짝퉁 같잖아.” 문예부처럼 부원들끼리 문집이라도 내보는 건 어때.” 남궁현과 홍미나는 어째서! 라고 부르짖는 김영민을 단칼 김영민은 그녀의 말을 일축한다. 에 무시하더니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건 문예부 일이죠.” “무엇보다 터무니없어.” “그것도 그렇네…….” “한마디로 제대로 된 이유가 없다는 거지 뭐.”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홍미나도 더 말을 잇지 못했 “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해.” 다. 애초에 그에게 가장 적합한 부는 문예부였음에도 불구 말이 이리 저리 튕길 때마다 소년의 안색이 더더욱 나빠 하고 새로운 부를 만든 것부터가 문제가 아닐까. 지더니, 결국 입을 삐쭉 내민 채 책상 위에 엎드린다. 마 “게다가 부 활동 결과를 학예회에서 공개하기로 이사장과 치 풀 죽은 개처럼 두 팔을 쭉 편 자세였다. 약속했으니까요. 이제 한 달도 채 안 남았어요.” 53 54
  • 28. “시작부터 이런 난관이라니, 역시 이사장이 부 설립을 허 남궁현은 잠시 그렇게 운을 떼는가 싶더니, 가한 것도 괜한 배짱이 아니었던 것 모양이네.” “그렇다면 라디오 드라마는 어때?” “……그러면 이런 건 어떨까.” 다짜고짜 의견을 제시한다. 그 때 남궁현이 살짝 손을 들었기 때문에 김영민은 반사 “라디오…….” 적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홍미나 역시 “드라마?” 고개를 위로 올린다. 남궁현의 말을 들은 둘은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금방 “부장은 글을 쓸 수 있으면서도 모두가 그 일에 어떤 식 와닫지 않는 듯 그렇게 중얼거려 보았다. 으로든지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거잖아?” “라디오에서 성우들이 하는, 뭐 그런 거 말이야?” “……그렇죠?” 홍미나의 물음에 남궁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김영민이 홍미나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그런 걸 왜 자신에 “라디오 드라마라면 촬영 준비에 시간을 빼앗기지도 않고, 게 묻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러는 동안에도 무대나 소품 없이도 부실에서 녹음을 모두 끝낼 수 있어. 남궁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소리로만 진행하니까 밤낮을 신경쓸 필요도 없고.” “처음에는 영화 시나리오도 생각해 봤는데, 부 활동 시간 “라디오 드라마라…….” 이나 기자재의 한계 때문에 영화는 좀 힘들다고 봐.” 김영민의 표정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한다. “영화라! 그 분야는 저도 자신이 있는데 아쉽네요.” “이야, 그런 수가 있었네요!” 김영민은 관심이 있는 주제가 나오자 눈을 반짝이며 상체 상대의 반응이 좋은 것을 본 남궁현이 말을 이었다. 를 일으켰는데, 홍미나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 “게다가 라디오 드라마는 영화와 달리 일인 다역도 가능 “보고 있자니 도대체 누가 부장인지 모르겠네.” 해. 물론 우리로서는 쓸 수 없는 카드겠지만.” “그는 차장으로서의 책무를 제대로 해 주고 있지요.” “과연! 라디오 드라마라 이거죠? 호오.” “……나 차장이었어?” 부원 다섯 명 이상이 부의 유지에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부원 두 명이 각각 부장과 차장이라니, 터무니없는 권력 남궁현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의 설명을 들은 김영민 인플레다. 부활동이 아니라 회사라면 망할지도 모르겠다. 의 눈은 쉴새없이 반짝였는데, 라디오 드라마를 녹음하는 “어쨌든, 지금 한 가지 대안이 떠올랐는데…….”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55 56
  • 29. “나 참…….”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하긴 하지만 이름은 정해지지 않은 홍미나는 여전히 탐탁치 않은 듯 말끝을 흐린다. 부’ 라면 곤란하다. 반드시 수상하다고 생각될 것이다. “라디오 드라마 제작부라니, 그런 건 보통 학교가 아니라 그래서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들은 흥미를 잃은 홍미 인터넷 동호회에서나 하는 거 아냐?” 나가 자리를 뜨자마자 지루한 논의를 진행한 끝에, 마침내 “그건 그렇긴 하지만…….” 김영민이 유력한 부 명칭을 하나 떠올렸던 것이다. 상대의 지적을 받은 남궁현이 머뭇거리자, 그 모습을 보고 “……그런 이유로 DR 하이텐션’ 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보 있던 김영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친다. 았는데, 어떤가요. 어감이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애초에 이사장의 조건엔 그런 제한 “DR 하이텐션?” 도 없었고, 또 라디오 드라마라면 영화보다 뭔가 소설 쪽 남궁현은 김영민이 제안한 부 이름이 언뜻 이해가 되지 에 가까운 느낌이라서 오히려 마음에 드는데요?” 않는 모양인지, 방금 들은 단어를 다시 읽어 본다. 주먹을 꽉 쥔 손이 책상 위에 올려졌고, 그의 푸른 눈은 “하이텐션이라는 단어가 붙은 건 뭐 부장만 봐도 잘 알겠 묘한 흥분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만, 앞의 DR이라는 건 뭐야. 닥터 하이텐션?” “갑시다! 이걸로 가자고요!” “노노노. 드라마 라디오(Drama Radio)의 약자입니다.” “와아~” “그치만 보통은 라디오 드라마라고 하는데.” 홍미나는 남궁현을 향해 무성의한 박수를 쳐 보였다. "그럼 약자가 이상해지잖아요!” “축하해. 너희 부장이 네 제안이 마음에 든다는데? 뭐, 이 “약자가? 어디가.” 걸로 정체불명의 부에서는 간신히 벗어났네.” “RD 하이텐션이라니요!” 남궁현은 그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김영민은 답답하다는 듯이 책상 위를 쾅쾅 두들겼다. “RD는 무슨 research and development의 약자라도 되는 겁니까? 하이텐션 같은 걸 연구 개발하는 집단이라니, 수 그녀의 말대로 ‘정체불명의 부’ 에서 ‘라디오 드라마 제작 상하기 짝이 없잖아요!” 부’로 격상되긴 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는 뭔가가 부족했다. “나는 부장의 하이한 머릿속이 더 수상한데.” 정식 부 명칭조차 정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남궁현은 대꾸한 것 치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57 58
  • 30. “뭐 좋아. 최종 결정은 어디까지나 부장의 몫이고, DR이라 뎅을 입 안에 털어넣더니, 우걱우걱 씹으며 말을 이었다. 는 약자는 개인적으로는 나도 꽤 마음에 드니까.” “우리에겡 몬가 확실한 홍보 슈당이 핀요하다고요!” “그렇죠? 뭔가 일을 저지를 것 같은 이름이죠?” “입에 넣고 말하지마.” “저지르면 안되지…….” “실례. 그러니까 우리에겐 뭔가 확실한 홍보 수단이.” 무슨 테러리스트나 과격 무장 단체도 아닌데. 남궁현은 짤 “같은 말 반복하지마.” 막한 한숨을 흘리는가 싶더니 말을 잇는다. 점심 시간의 남궁현은 상당히 저기압인 모양이었다. 그는 “오늘은 이 정도만 하고 체력을 아끼는 게 좋을거야. 내일 미간을 좁힌 채 식판의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더니, 그 끝 부터는 부를 홍보할 수단을 찾아봐야 할 테니까.” 을 김영민을 향해 척 하고 뻗었다. “그럼 부명은 DR 하이텐션으로 결정된 거죠?” “그 포크는 어디서 가지고 온 거야? 양식도 아닌데.” “응.” “아, 이거요? 저기 식당 아줌마에게 빌렸습니다! 저는 포 “굳! 드디어 시작이로군요!” 크가 편하거든요. 젓가락질은 좀 서툴러서. 하하하핫.” 기합이 잔뜩 들어간 김영민이 주먹을 허공으로 내지르며 남궁현은 오른손 검지를 입에 대며 쉿 소리를 내었다. 그 기세 좋게 외쳤는데, 그는 벌써부터 눈앞에 산적한 모든 모습을 본 김영민은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박이다가, 이윽 문제를 눈깜짝할 사이에 일소해 버린 것처럼 보였다. 고 구내 식당의 배식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시끄럽다고 그랬지!] “…….” 홍미나가 벽을 쾅쾅 내려치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어필한 하얀 요리사 복을 걸치고 천을 머리에 두건처럼 질끈 감 뒤엔 꼬리를 만 개처럼 교실 구석에 처박혀 있었지만. 은 여자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두건 아래로 나온 갈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한 줄로 길게 땋은 모습이다. “아줌마라니…….” 다음날 아침. 남궁현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구러니까 줴가 말하코 싶운 권!” “우리 학교 영양사는 나이가 스물여섯밖에 안 되고 정식 반짝이는 은색의 포크가 남궁현의 눈앞에서 이리저리 흔 교직원이니까 적으로 삼지 않는 게 좋아. 게다가 별명이 들린다. 김영민은 포크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는 오 명문고의 춘리거든.” 59 60
  • 31. “스, 스트리트 파이터의? 그렇게 강력한가요?” “……그래요. 저 죄 많은 남자에요.” “아니, 허벅지만. 아무도 그녀의 가동 한계를 체크한 적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김영민이 탁자 위에 반쯤 엎드린 없어. 뭐 질량과 근육의 가속도를 생각해 볼 때, 저 다리 채, 김치를 말 그대로 포크로 분해하기 시작했다. 에 걷어차이면 무시무시한 타격을 받을 게 뻔하지만.” 그 때 옆에서 누군가가 불쑥 말을 건다. 남궁현의 진지한 대답을 들은 김영민은 한참 동안이나 경 “저기. 영민 군이지?” 이로운 눈빛으로 영양사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금 어느새 탁자 옆에 다가와 있던 여학생이 김영민을 향해 방 흥미를 잃고 자신 앞의 반찬으로 시선을 돌린다. 두 손을 내밀었는데, 그 끝엔 휴대폰이 쥐어져 있는 상태 “어제도 말했지만 반칙은 안돼.” 였다. 먼저 주의를 환기시킨 건 남궁현이었다. “그렇습니다만?” “부 홍보 수단에 반칙을 사용하면 필연적으로 학생회를 “저, 이거 좀…….” 무시하는 행위가 돼. 적이 많아지면 힘들어. 부장의 행동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올린 김영민은, 그녀의 모습 을 볼 때 선도부는 이미 틀렸다고 봐야겠지만.” 을 보고는 알았다는 듯 상대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무슨 그런 섭섭한 이야기를!” 삑, 삑삑. 삑. 의외로 김영민은 정색하듯이 고개를 저었다. 김영민이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있는 것을 본 여학 “그는 이미 제 절친한 동료나 다름없습니다. 그 쓸모없는 생의 얼굴이 이내 붉어졌다. 소년은 마침내 번호 입력이 몸뚱아리로 홍보판 노릇을 해 준 것만 봐도 그렇죠.” 다 끝났는지 휴대폰을 다시 상대에게 건네준다. “그래서 적이라는 거야.” “자. 여기요.” 누가 홍보판 노릇을 하고 싶겠어? 남궁현의 예리한 지적 “감사합니다! 그, 그럼 이만!” 에는 김영민도 더 할 말이 없는 듯 머뭇거리더니, “잠깐! 당신 전화번호도 주고 가야죠!” “그, 그럼 홍미나는 어떻습니까? 그녀는 우리 부실 이웃이 김영민은 휴대폰을 럭비공마냥 쥐어들고 구내 식당을 달 기도 하고, 또 어젯밤엔 조언도 했으니 동맹 아닙니까?” 려나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외쳤지만, 그건 오 “그건 애초에 시끄럽다며 태클을 걸려고 온 거였지.” 히려 상대의 퇴장속도를 더 가속시켰을 뿐이다. 잡는 것을 여전히 칼 같은 반박이었다. 포기한 김영민이 이내 제자리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61 62
  • 32. “나 참. 이 번이 열 번째던가요? 이상하군요. 이 학교는 “너도 너야! 그렇게 마구잡이로 전화번호를 뿌리면 사람들 비상연락망을 학생들끼리 일일이 교환해야만 하는 겁니 이 오해하잖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까?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연락을 하려고 그러는 건지.” 비상연락망을 공유하는 것이 오해받을 행동이었다니! 남궁 “ 걱정할 것 없어. 만약 이 사실을 그녀들이 알게 된다면 현은 김영민이 혼란스러워하는 포인트를 잘 알고 었었지 네가 사고의 당사자가 될 거라고 확신하니까.” 만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으응? 그건 무슨 의미인가요. 설명을 요구합니다!” 남궁현은 대신 홍미나를 바라보며 말문을 연다. 김영민이 언제나 그랬듯 당당하게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 “선배.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죠?” 고 있는데, 머리위로 또 다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아, 그랬었지. 이 바보 색골에게 전달할 게 좀 있어서.” 다. 소년은 이제는 귀찮다는 듯 거의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김영민이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인다. 상대를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그럼 그 바보 색골을 찾아갈 것이지! 왜 엄한 사람을 갈 “또입니까? 이번에는 당신 전화번호부터 받아야겠군요. 아 굽니까! 당신이 이래도 동방예의지국 시민입니까?” 니면 정작 제가 위험할 때에 연락을 할 수가…….” “저 바보 색골은 뭐래.” “왜 내가 너한테 전화번호를 줘야 하는데?” 홍미나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흥 하고 코웃음을 치 “어라?” 더니, 품 속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어 보였다. 예상치 못한 대꾸에 김영민이 그 쪽을 바라보니, 거기엔 “자, 여기.” 홍미나가 두 팔을 허리에 댄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상 “이건 뭐죠? 입부 신청이라면 특별히 당신에 한해서 거절 대가 누구인지 알아챈 김영민은 히익 하는 비명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 그랬다간 제 자리가 위험해진다고요!” 의자를 덜컹거릴 정도로 재빠르게 물러섰다. “잔말 말고 받아! 그런 거 아니니까.” “누구는 인기가 많아서 좋겠네?” 김영민은 홍미나가 거의 면전에 붙여버릴 기세로 들이대 홍미나는 마치 먹이감을 눈앞에 둔 뱀처럼 차가운 태도를 는 종이를 겨우 뺏고는 내용을 읽어본다. 고수하며 입을 열었다. “……금일 오후 7시부터 학생회 임원 회의?” “나 참. 외국인이라면 다들 헤벌레 해서는, 꼴불견이야.” “그래. 너도 그 라디오 뭐시기……부의 부장이니까 임원인 “에엥? 무슨 이야기인지요?” 거잖아? 원래 정규 회의는 매주 금요일인데, 특별한 안건 63 64
  • 33. 이 있을 때엔 이렇게 비정기적으로도 열려.” 것저것 고민하지 말고 뛰어들라는 이야기겠지만, 결국 뭘 “흐으응~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마실지 선택 버튼조차 누르지 못한 김영민은 그저 자판기 김영민의 반문에 홍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 머리를 턱 처박은 채 주욱 미끄러질 뿐이었다. “이번 회의, 너희 부 때문에 열리는 거야.” “으으, 저, 이래뵈도 꽤 낯을 가린단 말이에요…….” “처음 보는 사람 몸에다가 정체불명의 전단지를 붙일 정 도의 남자가 낯을 가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딸칵. “숨도 안 쉬고 단언하다니. 그야 그 때는 눈앞의 이 고릴 점심 시간이 끝난 교내 뒷편의 자그마한 정원. 김영민과 라가 내 인생과 연관될 일이 달리 뭐가 있겠어? 정도의 남궁현은 나무 그늘에 가려진 자판기 앞에 서 있었다.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도록 해. 부장.” “그럼 인과응보네.” 남궁현은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자판기 배출구로 나온 남궁현은 캔커피를 입에 댄 그대로 다른 손을 뻗어 콜라 캔커피를 집어들기 위해 몸을 숙이며 말을 잇는다. 선택 버튼을 눌렀다. 덜컹 하고 자판기 아래로 캔이 떨어 “어차피 우리에게 필요한 홍보 수단을 승인하는 것도 학 지는 소리가 들리자 김영민은 헉 하고 신음을 토한다. 생회의 일이니까. 언젠가는 한 번쯤 부딪쳐야만 해.” “무슨 짓을! 콜라는 당분이 많단 말입니다!” “하지만 말이죠?” “당분은 스트레스에 좋아. 일시적이고 중독성이 있지만.” 그 옆에 서 있던 김영민은 무슨 음료수를 선택할 것인지 “저를 거대 자본의 노예로 만들 속셈입니까!” 고민하는 것처럼 턱을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우린 시간의 노예야. 점심시간이 곧 끝나니까.” “저는 학생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상대의 취 못 먹니, 환불을 하니 마니 등의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미라던가 좋아하는 거라던가, 심지어 부장들이 여잔지 남 결국 김영민은 콜라캔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자인지조차도 감이 안 오니까 곤란하네요.” “시간이 없으니 학생부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할게.” “그런 생각 할 시간 없어. 저녁은 금방 올 테니까.” 그들의 주위로 학생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이룬 채 지나치 남궁현은 들고 있던 캔커피를 홀짝거리며 마치 남 일 보 는 모습들이 보인다. 그 둘은 학교 안뜰에서 벗어나 운동 듯이 대꾸했다. 어차피 그런 거 알아볼 시간도 없으니 이 장 쪽으로 향하는 정원 통로로 올라섰다. 65 66
  • 34. “학생회는 학교를 대표하는 학생들의 모임이야.” “그래서, 우린 뭘 대표하는 겁니까?” 남궁현은 차장으로서 부장의 무지를 어느 정도 보완할 필 “……그건 부장이 찾아내야지.” 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듯,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은 딱히 대표하는 것이 없을 테니까, 라고 남궁현은 “우리 학교 학생부 같은 경우엔 대부분의 안건은 이사장 덧붙였다. 명문고등학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부의 에 의해 결정된 것을 통과시키는 정도니까, 별다른 힘은 탄생에 박수를 보낼 만큼 여유 있는 학생회가 아니라는 없지만 명목상의 권한은 있어. 학생회는 크게 학생회장과 것은 조금만 생각해도 유추할 수 있는 결론이다. 부회장, 그리고 하위 5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고.” “아아~ 부장이란 제법 골치아픈 자리네요.” “오호, 제법 잘 알고 계시네요.” “그 정도도 감수하지 않으려고?” “……이 정도는 학교 홈페이지 검색으로도 나와. 각 부의 “뭐, 그것도 그렇긴 하네요.” 부장과 차장이 대표로 나와서 학생회 임원 회의에 참석해. 김영민은 운동장으로 내려가는 콘크리트 계단 위에서 걸 결국 총 12명의 대표가 학생회실에 모이는 거지.” 음을 멈췄다. 깔끔하게 정리된 넓은 운동장은 점심 시간임 “12명이라……제법 많은 거 아닙니까?” 에도 불구하고 텅 비어 있어서, 계단 위쪽의 혼잡함에 비 김영민은 콜라캔에서 입을 떼며 중얼거렸지만, 남궁현은 해서 상대적으로 황량해 보였다. 운동장 주변을 둘러보던 그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소년의 시선이 순간 멈추더니, 오 하고 말문을 연다. “이 학교의 전체 학생수는 천 명이 넘어. 그들의 대표로 “여기 농구 코트가 제대로 되어 있네요. 마침 시간도 좀 12명이라면 오히려 적은 거지. 그만큼 중요한 자리. 거기 남았는데, 1대 1 농구라도 한 판 어떠신가요?” 에 부장과 내가 새로 들어간다면 모두 14명이 돼.” “별로……. 지금 농구공도 없고.” “오오오! 14명 중에 우리가 속해 있는 거군요! 그 말을 들 “뭐 농구공 정도라면 체육부실에 널려 있겠죠.” 으니 왠지 정체불명의 자신감이 팍팍 느껴지는데요!” “우리 학교에는 체육부 없어. 몰랐어?” “자신감이라니, 뭔가 그럴듯한 다른 표현은 없는 거야?” 남궁현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캔커피를 홀짝거렸다. 체육 “우월감이 느껴지는군요!” 부가 없다는 말을 들은 김영민은 에엑? 하는 외침과 더불 김영민은 상대의 딴지를 단숨에 콜라를 들이킨 뒤의 거무 어 완전히 질려버린 듯한 표정을 짓는다. 튀튀한 미소로 제압하고는, 혀를 낼름거리며 말했다. “우아……이건 좀 쇼크네요.” 67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