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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왔다
ER IST WIEDER DA by Timur Vermes 
Copyright ⓒ 2012 by EICHBORN, A division of Bastei Luebbe Publishing Group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14 by The Korea Economic Daily & Business Publications, Inc. 
All rights reserved. 
This edition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EICHBORN through MOMO Agency, Seoul.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모모에이전시를 통해 
EICHBORN 사와의 독점계약으로 한국경제신문 ㈜한경BP에 있습니다. 
신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ER IST WIEDER DA 
티무르 베르메스 지음 | 송경은 옮김
다시 깨어나다 
독일 국민은 내게 가장 큰 기쁨을 주었다. 그동안 난 정말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냈다. 적이 혹시라 
도 사용할 가능성이 있는 시설을 없애려고 다리와 발전소, 
도로, 기차역까지 모조리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모든 공급 
시설을 없애야 한다고 분명하게 지시했다. 상수도시설, 전 
화시설, 생산수단, 공장, 작업장, 농가 등 인간이 만든 모든 
것, 모조리 다! 그게 내 생각이었다. 이럴 때는 신중하게 조 
치를 취해야 한다. 명령에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도록 해야 
하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략적, 전술적 지식이 부족한 
말단 병사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런 신문 
가판대까지 불을 질러야 해? 이 조그만 가판대까지도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야? 이까짓 것이 적에게 
넘어간들 뭐가 그렇게 심각하다고 말이야!” 
심각하다! 
적도 신문을 읽지 않는가 말이다! 적의 손에는 아무리 사소 
한 것도 넘겨주면 안 된다. 아무것도 안 된다 말이다.
난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한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파괴 
하라고. 집뿐 아니라 문, 심지어 문고리까지도. 하다못해 
나사도. 큰 나사만이 아니라 작은 것까지 모조리. 문짝에서 
나사를 돌려 빼낸 다음 다시 쓸 수 없도록 무자비하게 뒤틀 
어야 한다. 문짝 역시 떼어내 가루로 만들어야 한다. 톱밥 
이 될 때까지 말이다. 그러고 나서는 반드시 집 전체를 태 
워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적들이 드나들 테니까. 문 
은 사라졌지만 문이 있던 그 구멍으로 말이다. 고장 난 문 
고리와 뒤틀린 나사와 잿더미. 이런 것들을 발견하면 처칠 
의 표정이 볼 만하겠지. 이 모든 것이 전쟁이라는 잔인한 
작업의 당연스러운 결과다. 분명히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내 명령은 제대로 내려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독일 민족이 영국과 볼셰비즘, 제국주의와 싸워 위대한 
서사적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은 더는 부인할 수 없는 사 
실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사냥이나 수렵 같은 원시적인 단계로 계 
속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조차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상수도시설이나 다리, 도로도 몽땅 사라졌다. 문고리 
까지 말이다. 바로 이 모든 것이 내 명령에 따라 이뤄졌다. 
미국과 영국이 공습을 해서 상당한 수고를 덜어주었다. 그 
들이 내가 할 일을 대신해서 다 파괴해준 셈이다. 
사람들은 내가 할 일이 굉장히 많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서 
방에서는 미국을 타도하고 동방에서는 러시아에 맞서 저항 
하고, 전 세계의 수도가 될 게르마니안 도시도 세워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문고리는 독일군이 처치했어야 
했다. 그리고 특정한 민족을 더는 존재하지 못하게 만들었 
어야 했다. 
하지만 확신하건대 이 민족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건 어떤 면에서 이해할 수 없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나도 지금 살아 있다. 이 또한 이해하 
기 어려운 일이다.
01 
전진하라. 전진하라…. 갑자기 눈이 떠졌다. 가물가물하던 시야가 
조금씩 또렷해지면서 내가 보고 있는 게 구름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렇다, 나는 누워 있었던 것이다. 몸을 뒤척여보니 등짝이 딱딱한 
것이 맨바닥, 잔디보다 잡초가 더 많은 한데였다. 그걸 깨닫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지만, 온몸을 더 
듬어봐도 크게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따뜻한 날씨였다. 구름이 약간 끼긴 했지만 하늘은 선명한 파란 
색이었고, 이른 오후쯤인 듯했다. 4월치고는 너무나 따뜻하군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사방이 참 조용했다. 적군 비행기는 한 대도 안 
보였다. 대포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주변에 폭발음도 없었으며 방 
공 사이렌도 울리지 않았다. 여긴 마치 전쟁이라곤 없는 세상 같군. 
길 건너에 집이 한 채 보였다. 어떤 놈이 그랬는지 그 집 담벼락 
에 군데군데 낙서가 되어 있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되니츠● 
● 독일의 해군 총사령관으로 유보트 함대 창설자. 히틀러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할 정도로 신임했고 
67 
실제로 히틀러 사후 며칠간 총통직을 수행했으나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받아들였다.
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 있으니 그도 근방 어딘 
가에 있겠지. 하지만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개미 새끼 한 마리 보 
이지 않는다. 이곳은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공터인 것 같다. 내 제 
국에 이렇게 버려진 곳이 있다니, 이걸 당장….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독일제국 총통 관저도 아니고 지하벙커도 아 
닌 이곳에 말이다. 
평상시에 내가 이렇게 하늘이 보이는 땅바닥에서, 벽조차 둘러 
쳐지지 않은 곳에서 자는 일은 없다. 뭔가 이상하다. 간밤에 내가 
뭘 했지? 과음 같은 단어는 떠올릴 필요도 없다. 난 술을 입에도 안 
대는 사람이다. 기억나는 건, 에바와 소파 위 깃털방석에 앉아 있 
었다는 거다. 국정에 관련된 일은 잠시 놔두기로 하고 그냥 편안하 
게 앉아 있었지. 우린 특별한 일정 없이 쉬고 있었다. 식사하러 가 
거나 영화를 보러 갈 생각도 없었다. 하긴 독일제국의 수도 베를린 
에서 유흥 시설은 내 명령에 따라 이미 정리된 지 오래다. 며칠 후 
스탈린이 방문할 예정이라 했는데, 그는 아마 자기네 나라에서 늘 
하듯이 여기서도 영화관을 찾겠지. 하지만 그래 봤자 소용없다는 
얘기다. 어쨌든, 우린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나와 에바 둘 
이서 말이다. 그러다가 에바에게 내 옛날 권총을 보여줬다. 그다음 
어떻게 됐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두통 때문에 그렇기도 했다. 
암만 해봐도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자,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하 
기로 했다. 그동안 살면서 나는 관찰하고 판단하는 법을 익혔다. 때 
그가 돌아왔다
론 학자들이 사소하게 생각하거나 무시하는 아주 미미한 일까지도 
알아차리는 데 도가 텄다. 수년간 냉혹한 규율을 경험한 나다. 위기 
상황이 되면 냉혈한이 되고 생각을 더 많이 하고 더 예리해진다. 일 
을 할 땐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철저하면서도 감정이 없 
는 기계처럼. 
지금 내가 가진 정보를 체계적으로 요약해봤다. 나는 홀로 여기 
에 있다. 내 옆엔 쓰레기가 있고 무성한 잡초 위로 지푸라기가 날린 
다. 여기저기에 덤불이 있고 데이지와 민들레도 피어 있다. 나무 위 
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더니 지저귀기 시작했다. 그저 기분 좋은 
소리일 뿐이라고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겠지만, 아무리 작은 정보 
라도 허투루 할 수 없는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선 그것조차 어떤 맹 
수보다 더 큰 존재감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뒤쪽으로 웅 
덩이가 있는데, 그 옆에 내 모자가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내 이성 
은 쉼 없이 일을 했고, 혼란스러운 순간에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몸을 움직여보았다. 다리와 양손, 손가락도 움직여보았다. 
내 몸 어딘가에 부상을 입은 곳은 없어 보였다. 두통이 있는 것만 
제외하면 건강 상태는 완벽했고 심지어는 손 떨림 증상도 이제 거 
의 없어진 것 같았다.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제복, 정확히 군복 차 
림이었다. 좀 지저분하긴 했지만 못 봐줄 정도로 심하진 않았다. 흙 
투성이까지는 아니었으니까. 옷에는 과자인지 빵인지 모르겠지만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옷에서 휘발유 냄새 같은 게 심하게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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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가 드라이클리닝 세제를 너무 많이 쏟아부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여전히 에바는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참모 중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무슨 소리가 났다. 그렇게 먼 곳은 아닌 듯하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남자아이 몇이 시야에 나타났다. 하나가 축 
구공을 발로 차고 있는 걸로 보아 공터에서 축구를 하려는 것 같다. 
그들 중 히틀러 소년단 복장을 갖춘 아이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열댓 살쯤 됐을까? 시민군이라기엔 너무 어리니 아마도 청년단이리 
라.● 복무 중이어야 할 시간에 축구라? 아마 적군이 물러나 잠시 쉬 
기로 했나 보다. 난 군복에 묻은 부스러기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그때 나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거기 공 좀 차주세요!” 
“우와, 저 아저씨 뭐야? 무슨 코스프레 같은 거 하나 본데?” 
세 명의 나치 청년단원이 축구를 멈추고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 
로 내게 다가왔다. 당연한 일이다. 독일제국의 총통이 갑자기 자기 
들 앞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젊은이들, 이제 곧 성인이 될 이들에겐 
이런 일이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리라. 젊은이는 국가의 
● 제2차 세계대전 후반 나치 조직에는 청소년 조직 역시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10~14세의 소년은 
소년단 가입이 의무화되었고, 14~18세는 청년단이 되었으며 18세 이상은 군에 입대했다. 시민군 
은 정규 군대의 기준에 미달하는 성년이나 청년으로 조직된 인민군을 가리킨다. 
그가 돌아왔다
미래지! 
아이들이 내 쪽으로 우르르 몰려 왔다. 녀석들은 날 둘러싸더니 
내 복장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중 제일 덩치가 큰 아이가 
한 발 더 다가오며 말했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나치 경례도 없이 나한테 말을 걸다니, 나도 몰래 인상이 찌푸려 
졌다. 이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하, 그렇지. 격식조차 차리 
지 못할 정도로 경황이 없다는 얘기겠지. 아마 보통 때라면 이런 실 
수를 하지는 않을 거야. 
난 몸을 꼿꼿이 세웠지만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지라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군복을 똑바로 펴고 급한 대로 손으로 툭툭 때려 옷 
에 묻은 부스러기를 다 털어냈다. 그런 다음엔 헛기침을 한 번 하 
고, 대장처럼 보이는 그 아이에게 물었다. 
“보어만은 어디 있나?” 
“그 사람이 누군데요?” 
이해할 수 없었다. 
“보어만! 마틴 보어만 말이다!” 
“그런 사람 모르는데요.”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떻게 생겼는데요?” 
“제국의 총통 비서를 모른단 말이야? 제군들, 지금 무슨 생각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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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건가!” 
나의 호통에도 아이들은 덤덤하기만 하다. 보통 같으면 눈도 제 
대로 못 마주치고 벌벌 떨 텐데. 아니지, 애초에 이런 상황이 일어 
나질 않았겠지. 
어딘지 모르게 이곳은 현실성이 없다. 마치 내가 총통이 아닌 다 
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빨리 총통 관저로 가봐야겠 
다. 우선 길부터 찾아야 한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아무 특징이 
없는 땅이라 시내 어디쯤인지 알 길이 없다. 일단 도로를 찾아야겠 
다. 여전히 총성은 들려오지 않으니 적군이 상당히 먼 곳까지 퇴각 
한 모양이군. 큰길에 나가면 행인들도 있을 테고 오가는 마차라도 
불러 세워 탈 수 있겠지. 
아이들은 다시 축구를 하려는 것 같았다. 방향을 돌려 아까 그 
자리로 뛰어간다. 유니폼에 한 아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디다스 단원! 큰길은 어느 쪽이지?” 
그런데 정작 그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다른 아이 하나가 
공터 모서리쪽을 가리켰다. 그 녀석도 정중하게 그렇게 한 것은 아 
니고, 뛰어가면서 대충 가리키는 둥 마는 둥 했을 뿐이다. 나는 분 
통이 터졌다. 1933년부터 이 나라를 이끌어왔지만 군대가 이렇게 
개판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누군지도 못 알아본다면 모스크 
바로 가는 승리의 길은 어떻게 찾을 거냔 말이다. 정말이지 한심하 
기 이를 데 없다. 이 아이들에 대해서는 보어만한테 명령을 내려 강 
그가 돌아왔다
력히 조치하라고 해야겠다. 총통인 내가 일일이 이런 조무래기들 
의 군기까지 왈가왈부하는 건 격에 맞지도 않고 말이다. 
웅덩이 옆의 모자를 집어 들고 공터 모퉁이를 향했다. 공터가 끝 
나는 곳에 이르자 높은 벽 사이로 좁은 통로가 나왔다. 고양이 한 
마리가 소리도 없이 달려와 내 옆을 휙 지나갔다. 화려한 얼룩무늬 
털을 가진 고양이였지만 주인이 없는지 돌보지 않은 티가 났다. 몇 
걸음 더 가니 도로가 나왔다. 그런데 너무나도 이상한 풍경이라 눈 
이 휘둥그래졌다. 
한낮인데도 거리는 휘황찬란한 불빛과 깜빡거리는 간판들로 가 
득 차 있었다. 온갖 색깔의 불빛이 돌진해왔고 나는 엄폐물도 없이 
집중포화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어쩔 줄 모른 채 잠시 서 있었는데, 
다행히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기억에 시내의 마지막 모습은 먼지가 자욱하고 어디든 회색 
빛뿐이었다. 어떤 도시든 마찬가지로 폭격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폐허더미였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펼쳐진 모습에서는 그 비 
슷한 자국조차 찾을 수 없다. 말짱한 건물들이 줄을 지어 서 있고 
도로도 말끔했다. 더욱이 도로에는 수없이 많은, 정말 셀 수도 없는 
자동차들이 꼬리를 물고 오가고 있었다. 아니, 하룻밤 새에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마치 몇십 년이 지났고, 자동차 기술을 발 
전시키는 데만 온 나라가 매달린 듯한 모습이었다. 자동차들은 작 
지만 화려해지고 소음도 크지 않았으며, 덜덜거리지도 않고 매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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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운 도로를 부드럽게 달려갔다. 
집들도 깨끗하게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다. 색상이 다양해서 어 
렸을 때 가끔 보았던 사탕통 생각이 났다. 갑자기 좀 어지러웠다. 
도로 건너편에 낡은 벤치가 있었다. 낡은 무엇인가가 하나라도 있 
다는 점 때문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잠시 거기 앉아서 생각을 정리 
해야겠다. 
막 발걸음을 내딛는데 갑자기 끼익 하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이 양반아! 눈이 멀었어?” 
그게 나한테 하는 소리라는 걸 알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고개를 돌리니 내 바로 뒤에서 한 남자가 나한테 삿대질을 하고 있 
었다. 급정거를 한 듯 자전거를 붙들고 엉거주춤 선 채였다. 익숙한 
것이 또 하나 나타났다. 이 남자가 날 바라보는 분노에 찬 시선, 그 
게 날 안심시켜주었다. 아무렴, 지금은 전쟁 중 아닌가. 남자는 폭 
격 탓인지 심하게 망가져서 구멍이 숭숭 난 헬멧을 쓰고 있었다. 
“아니, 찻길을 그렇게 막 지나가면 어떡합니까?” 
“나는 단지…, 저기 의자에 가서 앉으려는 것뿐이오.” 
“앉을 게 아니라 누워야 할 것 같은데요. 그것도 영영!” 
남자는 그렇게 소리를 치고는 가던 길을 가버렸다. 피신하듯 벤 
치에 몸을 부린 나는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 젊은 남자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물론 나치 경례를 요구할 틈도 없었다. 지금 
그가 돌아왔다
모종의 훈련이 진행되고 있는 걸까.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훈련 
이란 게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 말이다. 중년 남자 하나가 내 앞을 
지나갔다. 그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했다. 꽤 
덩치가 큰 부인이 미래의 세계에서 튀어나온 듯한 유모차를 끌고 
지나간다. 나를 보고도 별 반응이 없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나는 벌떡 일어나 그 여자에게 다가갔다. 
“부인, 지금 당장 총통 관저로 가야 하는데 가장 빠른 길이 어디 
요?” 
“슈테판 랍 씬가요?” 
“뭐라고요?” 
“아니면 케르켈링 씨? 가만있자, 코미디가 아니면 길거리 토크 
쇼를 촬영하시는 중인가요?” 
이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난 여자의 팔을 움켜잡고 외쳤다. 
“정신 차리시오, 부인! 독일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잊었소? 지금 
은 전시 상황이란 말이오! 러시아군이 여기까지 쳐들어온다면 당 
신에게무슨짓을할지생각해봤소? 또당신딸한테는어떻고!‘ 오 
호라, 한창 피어오르는 독일 아가씨인걸’이러면서 음흉한 시선을 
던지겠지. 독일 국민의 존속과 순수한 독일인의 피, 인류의 생존이 
지금 위험에 처했소. 당신이 지금 독일제국의 총통에게 관저로 가 
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말이지!” 
놀라서 퍼뜩 정신을 차릴 거라고 기대했지만, 놀란 것은 도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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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였다. 그 멍청이 같은 여자는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면 
서 자기 팔을 휙 뺐다. 그러더니 머리 위에서 집게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는 동작을 반복했다. 이건 또 무슨 뜻인가. 여자는 그렇게 원을 
몇 바퀴 그리더니 유모차를 끌고 가버렸다. 
뭔가 잘못되었다.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다. 이곳에서 나를 군사 
령관으로, 제국의 최고 지도자로, 총통으로 대우하는 사람은 아무 
도 없다. 축구하던 아이들도, 자전거 타고 가던 남자도, 중년 남자 
도, 유모차를 끌고 가던 부인도 그랬다.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물론 어떤 훈련 프로그램도 아니고 말이다. 다시 질서를 잡으려면 
안보기관을 총동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벤치에 앉은 채 지금의 이 충격적인 상황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보았다. 난 수십 년을 독일, 그중에서도 이곳 베를린에서 
살았다. 그런데도 지금 모든 게 낯설게 느껴진다. 여기가 독일도 아 
니고 베를린도 아닌 걸까. 그럴 리가 없다. 전쟁 중에 내가 한가하 
게 다른 나라를 여행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상당 
히 오랫동안 실신해 있었던 걸까. 하나부터 열까지 알 수 없는 일들 
뿐이다. 
그때 벤치 밑에 뭔가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신문과 비슷한데 
좀 더 화려하고, 종이도 질이 좋아 보였다. 집어 들고 맨 앞장을 보 
니〈미디어 마켓〉이라고 쓰여 있다. 이런 인쇄물을 내가 허가해준 
적이 있던가? 아무튼 인쇄물에 대해서도 한바탕 정비를 해야겠다. 
그가 돌아왔다
그 안에 있는 내용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분노가 점 
점 더 솟구쳤다. 대체 어떤 인간이 이따위 내용을 퍼뜨리느라 국민 
의 귀한 자원을 펑펑 낭비하느냔 말이다. 어서 집무실로 달려가 독 
일제국 국민으로서의 정신무장을 대대적으로 실시해야만 하겠다. 
지금 나한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을 만한 뉴스다. 우리 당 기관 
지인〈민족의 관찰자〉나〈돌격〉이 있다면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신문 가판대가 있었다. 오후 내내 나는 무방비 
상태로 아무런 전략적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허둥댔다. 어서 신문 
을 읽고 상황을 파악한 다음, 최대한 서둘러서 관저로 가야 한다. 
제국 곳곳이 무질서로 가득 차 있는 데다, 사령부는 내가 없어졌다 
는 사실 때문에 비상이 걸렸겠지. 난 신문 가판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곳 역시 내가 알던 분위기는 아니었다. 전투 속보를 전하는 긴 
장감 같은 건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가판대를 둘러싸고 수 
없이 많은 알록달록한 인쇄물이 진열돼 있는데, 터키어로 된 것도 
네다섯 가지나 있었다. 이곳엔 분명 수많은 터키 사람이 왕래하는 
듯하다. 흠…. 아주 중요한 문제다. 우리가 같은 편으로 전쟁에 참 
가해달라고 굉장히 공을 들였음에도 터키는 끝내 중립으로 남지 
않았던가. 내가 부재중인 기간에 누군가가, 아마도 되니츠가 터키 
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나 보다. 독일과 터키가 동맹을 맺었다는 
것은 역시나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제 
제국의 전쟁 결과에 대해서는 한시름 놓았다. 오후 내내 그게 제일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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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걱정이었다. 그다음 일은, 내가 실신한 채로 얼마나 오래 있었 
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민족의 관찰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다 팔려서 없는 거겠 
지. 그 옆을 보니〈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이라는 신문이 
있었다. 처음 보는 신문이긴 하지만, 다른 신문들보다는 그래도 좀 
낯이 익은 듯했다. 신문 타이틀 서체가 내게 아주 친숙했다. 이것저 
것 보느라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난 제일 먼저 날짜부터 찾았다. 
거기엔 8월 30일이라 적혀 있었다. 8월이라고? 그럼 내가 넉 달 
이나 여기 누워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더 이상한 게 있었다. 연도가 2011년이다. 1945년에서 
자그마치 66년이나 지났다는 거다! 
난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봤다.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다. 급히 다른 신문도 들춰봤다. 〈베를리너차이퉁〉이란 신문, 분명 
히 독일어로 된 신문이었다. 
2011년. 
신문을 확 펼쳐서 다음 장을 보고, 그다음 장도 확인해보았다. 
2011년. 
숫자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 눈앞에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그러더니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오늘 자가 맞기는 한지 기사를 
읽어보려고 하는데 신문이 내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러고 
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가 돌아왔다
02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또 바닥에 누워 있었다. 이번엔 홀로 버려 
진 것 같진 않다. 누군가 내 이마에 젖은 수건을 얹어놓았다. 
“좀 어떠십니까?” 
마흔다섯 살 정도, 어쩌면 쉰이 좀 넘어 보이는 남자가 상체를 
기울여 기색을 살피면서 물었다. 체크무늬 남방에 노동자들이 입 
는 것 같은 허름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는 다짜고짜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오?” 
“음, 8월 29일이요. 아니, 잠시만요, 30일이네요.” 
“몇 년도?”긴장 탓인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 
나 앉자 젖은 물수건이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남자가 이마를 찡그리며 날 쳐다봤다. 
“그야 2011년이지요.”남자가 말하며 내 군복을 뚫어지라 바라 
봤다.“ 그럼몇년이라고생각하셨나요? 1945년이요?” 
난 적당한 대답을 찾으려 고심하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더 누워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남자가 말했다. “아니면 앉아 
계시든가요. 안에 의자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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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이렇게 쉴 시간이 없다고 말하려 했는데 내 다리가 여전 
히 심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남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밖 
에서 볼 때는 신문만 파는 줄 알았는데 길거리 매점인 것 같다. 이 
것저것 생필품이 상당히 있었다. 나한테 빈 의자를 가리키더니 남 
자는 의자에 앉아서 날 쳐다봤다. 가끔 그는 창문 쪽을 보곤 했는데 
네모난 구멍이 있는 걸로 보아 손님들이 오나 보는 듯했다. 
“물 한 모금 드릴까요? 초콜릿을 좀 드시겠어요? 아니면 뮈슬리 
바?” 
난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일어나 탄산수 한 병을 
가져와서는 컵에 따라 내 앞에 놓았다. 선반에서 네모난 막대기 같 
은 것도 꺼냈는데, 군인들이 먹는 비상식량처럼 생겼다. 포장이 알 
록달록하고 화려하다는 점이 좀 달랐다. 남자가 매끄러운 포장을 
벗겨 알맹이를 꺼내서는 내 손 위에 올려놨다. 곡물을 기계로 납작 
하게 눌러 만든 것 같은 모양이었다. 식량 부족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나 보다. 
“아침을 좀 더 든든히 드시는 게 좋을 텐데요.”남자가 말했다. 
“이 주변에서 촬영하시나 봐요?” 
“촬영…?” 
“다큐멘터리 아니면 영화겠지요. 이 동네에서는 끊임없이 뭔가 
를 찍잖아요.” 
“영화…?” 
그가 돌아왔다
“세상에, 선생님 지금 제정신이 아니신가 보군요.”남자가 웃으 
며 손으로 내 위아래를 가리켰다. “아니면 평소에도 그렇게 하고 
다니십니까?” 
난 고개를 숙여 내 차림새를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뭐가 이상한 
지 알 길이 없었다. 먼지가 좀 묻고 휘발유 냄새가 나긴 하지만 대 
체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렇소만.”말해놓고 보니 내 얼굴에 상처가 있어서 그러 
는가싶어그에게물었다.“ 혹시슈피겔●있습니까?” 
“그럼요.”남자가 말하고는 내 뒤쪽을 가리켰다. “저기요. 시사 
주간지들있는곳,〈 포쿠스〉옆에있습니다.” 
남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오렌지색 테를 두른 슈피겔(거울)이 
있었고 거기에 커다란 글씨로‘슈피겔’이라고 쓰여 있었다. 마치 그 
렇게 크게 쓰지 않으면 사람들이 못 알아보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난 일어나서 거울을 들여다봤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완벽해 
보였고 군복도 막 다림질을 한 듯 반듯했다. 아마도 매점 안 조명 
효과인 것 같았다. 
“표지사진 찍는 중이시군요?”남자가 물었다. “그 주간지에서 
요즘 3주에 한 번은 히틀러 이야기를 다루니까요. 제 생각에 선생 
님은 이제 더 노력하실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그대로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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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 독일을 대표하는 시사주간지 이름이기도 하다.
주 완벽해 보입니다.” 
“고맙소.”난 엉겁결에 이렇게 말했다. 
“아니, 정말입니다.”남자가 말했다. “저도〈몰락: 히틀러와 제3 
제국의 종말〉이라는 영화 봤습니다. 두 번 봤죠. 브루노 간츠가 히 
틀러 역을 했는데 연기를 잘했지요. 그렇지만 선생님 근처에도 못 
가겠는걸요.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랄까…. 아무튼 선생님이 
했으면 정말 좋았을 걸 그랬어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돼서 내가 물었다. “뭐가 좋았겠다는 
말이오?” 
“아, 선생님이 그 역에 더 어울린단 말이죠.” 
그러면서 남자는 오른손을 번쩍 들더니 팔을 쭉 뻗어 올렸다. 
아, 66년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치 경례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이다! 여하튼 내 정치적 영향이 그동안에 완전히 사라져버린 건 아 
니라는 신호였다. 
나도 힘차게 팔을 뻗어 경례에 답하고는 자못 흥분되어 말했다. 
“당신은 오늘 총통을 알아본 최초의 사람이오!” 
남자는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댔다. “세상에, 어쩜 저렇게 자연스 
러운지.” 
도대체 뭐가 우습다는 건가. 조금 전 나치 경례까지 올려붙였던 
남자가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내 행동을 코미디로 만들어버리다 
니, 불쾌하기도 하고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그가 돌아왔다
그러다 서서히 내가 처한 상황이 조금씩 인식되었다. 만일 이게 
꿈이 아니라면, 아니다, 꿈이라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다.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은 2011년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이곳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이고, 이 세계에서 나는 신기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론적 
으로 보면 나는 122살이어야 한다. 아니지, 인간이 그렇게 오래 살 
수는 없으니까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다. 풀 수 없는 수수 
께끼에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다른 연기도 하십니까?”남자가 또 말을 걸었다. “어떤 작품이 
진행 중이신가요?” 
“그런 거 없소.”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 물론 미리 공개하긴 곤란하시겠죠.”남자는 이렇게 말하면 
서 사정을 다 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의 
미심장하게 눈을 깜빡거렸다.“그래도 조금만 얘기해주세요. 프로 
그램●이 있으시죠?” 
“물론이오.”내가 대답했다. “1920년부터 나오고 있소! 내 프로 
그램인 25개 조 강령●●에 대해 독일 민족 공동체 일원으로서 당신 
도 알지 않소?” 
● 방송프로그램. 정당의 정책이란 뜻도 있다. 
●● 나치의 정치 강령. 히틀러는 1920년 뮌헨의 비어홀에서 2,000명의 독일인을 모아 독일노동당 
의 창당 선언을 하고 25개 조의 당 강령을 발표했다. 당명은 후에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당(일명 
나치당)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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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예, 그건 뭐 그렇다 치고…. 선생님, 혹시 팸플릿 있으신가 
요? 아니면 명함이라도?” 
“미안하지만없소.”슬픈얼굴로내가말했다.“ 명함은작전통제 
실 본부에 있소.” 
나는 갑자기 기가 죽었다. 아주 중요한 사실이 생각났기 때문이 
다. 이대로라면 내가 다시 나타난다고 한들 총통 관저에서도, 지하 
벙커에서도 현재 쉰여섯 살인 총통을 믿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지 
금 상황을 분석해서 대책을 세울 시간을 벌어야 했다. 
우선 거주할 곳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 수중에는 동전 한 푼도 
없다. 스무 살 시절 불안정한 수입 탓에 싼 하숙집을 찾아 전전하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꼭 필요한 시간이었고, 이 세상의 어떤 
대학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을 깨우친 시간이었다. 워낙 궁핍했 
기에 당시에는 무척 힘들었지만 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 
던 몇 달간의 생활이 내 머리를 스쳤다.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면서 
매번 다음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야 했다. 
생각에 골몰하는 동안 무의식중에 손에 쥔 막대 곡물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까 가판대 주인이 건네준 것을 지금껏 잊고 있었다. 
굉장히 단맛이 났다. 베어 물고 남은 것을 눈앞에 대고 유심히 관 
찰했다. 
“저도그거좋아합니다.”그가말했다.“ 하나더드시겠어요?” 
그가 돌아왔다
난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내겐 더 큰 문제가 있지 않은가. 가장 단 
순하고 근본적인, 거주지 문제 말이다. 살 집이 필요하고, 지금 내 
가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 분명히 밝혀질 때까지는 생활비도 있 
어야 한다.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적어도 내가 다시 정상적으로 정 
부 업무를 맡을 수 있을지, 아니면 어떻게 해야 다시 일을 할 수 있 
을지 알 때까지는 임시로라도 일자리가 있어야 한다. 내 재능을 살 
려 화가로 일하든지, 당장 급하면 막노동이라도 해야겠지. 독일 국 
민에 대해 나만큼 방대한 지식을 갖춘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현재 상황이라면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현재에 대해서 
는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대체 독일제국의 아군이 누구이고 누구를 
향해 총을 겨눠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상황이 이렇다면 건축 현장 
이나 도로건설 현장에서 일할 만큼의 체력이라도 회복해야 한다. 
“이제 농담은 그쯤 하고 얘기 좀 해봅시다.”남자의 목소리가 귓 
가에 울렸다. “아직 초짜이신가요? 아니면 뭔가 역할을 맡은 적이 
있으신가요?” 
이 말은 정말 내 심기를 건드렸다. “난 초짜 따위가 아니오!”강 
한 어조로 남자에게 말했다. “더욱이 어설프게 남의 흉내나 내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남자가 달래듯 말했다. 그의 말투 
에는 마음속 진심을 전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었다. 
“배우가 아니라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쭤보려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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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직업이 뭐냐고? 내가 누군지는 아까 말했지 않은가.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바닥을 구를 정도로 웃지 않았느냐 말이다. 휴, 정말 
이지 나로서도 난감한 일이다. 
“난…, 난 지금은 그냥…, 은퇴했소.”조심스럽게 내 처지를 돌 
려서 말했다. 
“제 얘기를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남자가 열성적으로 말했다. 
“이런 분이 아직도 캐스팅이 안 되다니, 믿기 어려워서 하는 말이 
니까요. 아,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여기 베를린이란 곳은 에이전 
시나 영화사, TV 방송국 등 수많은 제작진이 바글거리는 곳이에 
요. 이 사람들은 먹이에 굶주린 사자처럼 항상 새로운 얼굴을 찾고 
정보를 구하러 돌아다닌다고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선생님을 발 
견하지 못했나, 그게 궁금할 따름이에요. 그런데 아직 명함도 없으 
시다니…. 선생님한테 연락하려면 어디로 하면 될까요? 전화번호 
는 있으신 거죠? 아니면 이메일 주소라도?” 
“음….” 
“어디 사세요?” 
그는 결국 내 아픈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한편으로, 그에게는 
내 형편을 솔직하게 털어놔도 될 것 같았다.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난 모험을 하기로 했다. 
“흠, 지금 집 문제는 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 
금은 없소.” 
그가 돌아왔다
“아, 그러세요. 그럼 애인 집에서 살고 계시는 건가요?” 
순간 에바를 생각했다. 에바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나처럼 살아 
있기는 한 걸까? 
“아니오.”난 의기소침해져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애인은 
없소. 지금은.” 
“그러시군요.”남자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된 
게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닌가 보군요.” 
“그렇소.”내가 대답했다.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 
이…, 당혹스럽소.” 
“전에는 괜찮았는데 사정이 나빠지신 거죠?” 
“그게 딱 맞는 말이오.”난 고개를 끄덕였다. “괘씸하게도 슈타 
이너 군집단●이 베를린을 포기했기 때문이오.” 
남자가혼란스러운듯잠시내얼굴을바라봤다.“ 아, 저는선생 
님이 애인과 헤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한 건데요. 누구 책임이었든 
간에.” 
“나도 모르겠소.”내 대답이었다. “맨 마지막은 처칠 때문인 것 
같은데….” 
남자가 웃었다. 그러더니 한참 동안 날 뚫어지게 바라봤다. 
● 1945년 창설된 군부대로 베를린 수비를 담당했다. 펠릭스 마틴 슈타이너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 
는데, 소련이 베를린을 포위할 때 히틀러가 베를린 수복 명령을 내렸지만 불복했다. 사실상 그럴 
만한 전력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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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말씀하시는 게 참 맘에 듭니다. 잘 들어보세요. 제가 제 
안을 하겠습니다.” 
“제안이라고 했소?” 
“어딘가 꼭 가셔야 할 곳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특별히 그 
런 게 없다면 하루 이틀 이곳에서 주무시면 어떠신지….” 
“여기서 말이오?”매점 안을 둘러보며 내가 물었다. 
“아니면 세계 갑부들이 애용한다는 아들론 호텔에서라도 묵으시 
게요?” 
“아들론 호텔이라…. 폭격으로 한쪽이 좀 부서졌을 텐데 수리를 
마쳤나 보군요.” 
“말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선생님 정도의 능력으로 캐스팅이 
안 된다면 말이 안 되지요. 관계자들이 왔을 때 어디 숨어 계시면 
안 됩니다.” 
“난 숨지 않소!”항의하듯 말했다.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인데 
어딜 숨겠소!” 
“네네, 맞습니다.”남자가 손짓하며 말했다. “일단은, 하루 이틀 
여기서 주무시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여기 오는 손님들 중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아보겠습니다. 인기 있는 영화 잡지 신간이 어제 
도착했으니, 그쪽 일 하는 사람들이 사러 올 겁니다. 어쩌면 그중에 
는 선생님 같은 인물을 찾고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죠. 솔직히 말 
해서 입고 계신 제복 하나만으로도 그 인물에 완벽하게 어울리니 
그가 돌아왔다
뭔가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나보고 여기서 지내란 말이오?” 
“우선은 그렇게 하자는 겁니다. 며칠만 여기 계시다가, 누군가 
영화 관련된 사람이 오면 제가 선생님을 소개해드린다는 거예요. 
아무도 안 오면 그냥 웃어넘길 추억거리가 생기는 거고요. 아니 
면…, 묵으실 만한 곳이 있나요?” 
“아니, 없소.”한숨이나왔다.“ 지하벙커빼고는….” 
남자가 웃었다. 그러다 웃음을 멈췄다. 
“설마 여기 있는 물건을 다 훔쳐 가시지는 않겠죠?” 
난당황해서남자를쳐다봤다.“ 내가도둑놈처럼보이오?” 
남자가날바라봤다.“ 아돌프히틀러처럼보입니다.” 
“그야 당연하지.”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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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며칠 동안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낯설기 짝이 없는 환경에다 
온갖 출판물과 담배, 스낵, 음료 캔이 쌓인 구석에 불편하고 비좁은 
잠자리가 마련됐다. 하긴 그것들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밤마다 나 
는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소파에 누워 내가 죽었다는 시점 이후로 
현재까지 66년간의 사건들을 곱씹어야 했다. 혹시라도 남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말이다. 자연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이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 대해 답을 얻 
어내야 하는 기이한 처지였다. 그렇지만 늘 실용적으로 사고하는 
내 이성은 현재 여건에 적응할 방법을 찾았다. 
고통을 한탄하는 대신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상황을 관망 
했으며, 사건에 대해 정확히 예측하고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지난 60여 년간 독일제국 지역에 주둔한 소련군의 수가 현저 
하게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과 관련해서, 어쩌면 내 
가 음모에 휘말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러시아가 나 
를 납치해서 내가 미래에 있다고 느끼도록 환경을 조작한 건 아닐 
까 하는 의심이었다. 내가 가진 가치 있는 비밀을 꾀어내려고 이런 
그가 돌아왔다
가상세계를 만들어놓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내 의지가 너무도 굳 
건하므로 그냥은 힘들 것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그 가정도 얼마 안 
가 포기했다. 암만 해도 그건 아닌 듯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까. 내겐 군대도 없고, 사령부도 없 
고, 무장친위대도 없다. 당분간은 도서관 같은 데 가는 것조차 위 
험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러 개의 신문과 잡지를 훑어보고, 행인 
들의 발언이나 짤막한 대화 내용에도 귀을 기울여봤다. 고맙게도, 
가판대 주인이 내가 밤에 혼자 있을 때 라디오를 듣도록 해주었다. 
라디오에 대한 기술이 그동안 엄청나게 발전했음을 새삼 느꼈다. 
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충격적일 만큼 한심했다. 라디오를 켜자 참 
을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가 났고 건질 거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허튼소리만 나왔다. 우리 독일제국의 발전된 기술에 흐뭇해 
서 큰 기대를 가졌건만, 급기야 전원을 꺼버리고 말았다. 화가 나서 
15분가량을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아, 독일이 어디로 가 
고 있는 것이냐. 
어쨌든 지금까지 파악한 바를 정리하자면, 불완전하긴 하지만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터키는 분명 우리를 지원하러 오지 않았다. 
2 바르바로사 작전이 초반 기습에 성공했지만 소련군의 반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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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서 밀려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은 나도 잘 안 
다. 그 후 반전은 없었고, 독일은 전쟁에서 졌다. 
3 나 자신은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알아본 바로는 내가 자살했다 
고 되어 있다. 물론 나도 군부 내에서 신뢰의 위기를 맞았을 때 
자살의 가능성을 생각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 순 
간에 어떻게 했는지는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죽은 게 확실한가? 
그런데 사실 신문 기사라는 게 어떤 건지 다들 알고 있지 않은 
가. 눈먼 사람이 하는 얘기를 귀가 어두운 사람이 받아 적고, 그 
걸 멍청이가 수정해 내보내는 게 신문 기사 아닌가. 더욱이 다른 
신문사에서는 그 내용을 그대로 베낀 다음 몇 마디 무의미한 거 
짓말을 보탠다. 그렇게 해서‘그럴싸하게’만들어진 신문을 대 
중은 뭐라도 되는 양 꼼꼼히 들여다본다. 
난 이 일을 그냥 놔두기로 했다. 마땅히 방법도 없다. 내가 나서 
서‘여기 살아 있소’할 것인가 어쩔 것인가 말이다. 
4 그런데 내 운명에 대한 건 그렇다 치고, 다른 분야에 대한 실상 
은 두고 볼 수가 없을 정도다. 군대, 역사, 정치, 일반적인 주제 
를 비롯해서 경제 분야까지 언론은 오판과 무지를 넘어 악의적 
인 비방으로 가득 차 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많은 
그가 돌아왔다
양의 머저리 같은 인쇄물로 아마 미쳐버릴 것이다. 그러니 이런 
건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5 언론은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자 퇴화하고 타락하고 정신적으 
로 무뎌져서, 환상 속 세계의 모습을 현실인 양 써댄다. 정말이 
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을 이야기한 신문 기사를 요 며칠 나는 한 
개도 보지 못했다. 
6 독일제국은 일명 독일연방공화국이 되었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 
람은 독일연방공화국 총리란 직함을 맡은 여자다. 물론 그 밑에 
는 다른 남자들이 직책을 맡고 있긴 하다. 
7 현재도 정당은 존재하고, 정당이 있기에 반드시 그와 관련된 비 
생산적인 다툼도 있다. 다만 나치당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8 〈민족의 관찰자〉는 아무 데서나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곳 
주인은 진보적 성향이 있는 것 같은데도 그의 가판대에는〈민족 
의 관찰자〉가 한 부도 없다. 그뿐 아니라 나치당을 표방하는 출 
판물은 단 한 가지도 전시되어 있지 않다. 
9 독일 영토는 눈에 띄게 줄어든 것 같다. 주변 국가들은 과거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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슷해 보인다. 그런데 폴란드는 영토가 줄어들지 않았고 심지어는 
구독일제국 영토까지도 자기들 영토로 만들었다! 참으로 기가 막 
힐 노릇이지만 그런 얘길 어디다 할 수도 없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때나는한밤중깜깜한허공에대고한탄했다.“ 내가그렇 
게 애를 썼는데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다니! 전쟁터에 흘린 우리 
독일 국민의 피와 땀이 이렇게 배반당하다고 말다니!” 
10 독일제국의 화폐였던 마르크는 이제 통용되지 않는다. 새 화폐 
이름이 유로라나 뭐라나…. 전 유럽에서 통용되는 단일 화폐를 
만들겠다는 구상은 사실 내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던 과제였는 
데, 다른 사람이 이 일을 진행했나 보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생각 없는 무능한 사람이 강자 편에서 만들었겠지. 
11 부분적으로 평화가 찾아온 것 같지만 국방군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한다. 예전의 국방군은 독일연방군이란 이름으로 불렸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군대였다. 그런 군대를 만들기 위해 내가 얼 
마나 고민했었는지 사람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당시엔 전 
방에서 40만이 넘는 군인이 피를 흘렸다. 1945년에 지금처럼 강 
하고 다양한 장비를 갖춘 군대가 있었더라면 아이젠하워의 군 
대를 바다로 처넣었을 수 있었을 테고, 스탈린의 무리도 몇 주 
안에 꼬리를 내리게 했을 것이다. 
그가 돌아왔다
결론은 지금은 익숙해져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편하긴 하지만 최소한 긴급한 위험이 도사리는 상황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정리를 하느라 거의 새벽녘에 잠이 들곤 했 
다. 그러므로 몸이 에너지를 회복하려면 오전까지는 좀 느긋하게 
쉬어야 한다. 하지만 가판대 주인은 아주 이른 아침에 가게 문을 여 
는 생활을 한다. 그래서 주인이 도착하는 시간부터는 나도 더는 누 
워 있을 수 없었다. 이 남자는 게다가 아침부터 엄청난 대화 욕구가 
있는 사람이었다. 
첫날 아침, 남자는 매점 안으로 박력 있게 들어오며 소리쳤다. 
“자, 총통 각하,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그는 내 대답을 들을 생각도 않고 문과 창을 모두 열어젖혔다. 
갑자기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내 입에서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고, 눈이 부셔 눈을 꽉 감으면서 내 상황을 생각해내려고 애썼 
다. 가장 실감나는 건 내가 있는 곳이 지하벙커는 아니라는 사실이 
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얼간이는 당장 총으로 쏘라고 명령을 내렸 
을지도 모른다. 나는 계속 화가 난 상태로 있기보다는, 이 바보가 
아침부터 귀찮게 깨우는 것도 다 내가 잘되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 일어납시다!”남자가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이리 오세요. 
저 좀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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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남자는 매장 안쪽으로 들여다놓은 이동식 잡지 스탠드 
들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남자는 그중 하나를 밖에 내놓았다. 
한숨이 나올 만큼 괴로웠다. 그의 청을 들어주기엔 너무 피곤했 
다. 그저께 난 제12군●을 옮기고 있었는데 오늘은 가판대를 옮겨야 
한다니. 내 시선이 아래쪽에 있던《사냥과 개》라는 책에 꽂혔다. 그 
책은 여러 권이 있었다. 나 자신이 그렇게 정열적인 사냥꾼은 아니 
었지만, 아니 도리어 사냥에 대해서는 다소 비판적이었지만 이 순 
간 난 잠시 동경에 빠져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희한한 일상에서 
벗어나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자연으로 뛰어들고 싶다고 말이다. 자 
연 속에서 생명체와 눈을 맞추고 세상의 흐름과 변화를 따라가고 
싶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내 머릿속에서 잠깐 스쳐 간 생각일 
뿐, 몇 분 지나지 않아 우리 두 사람은 장사 준비를 마쳤다. 남자는 
접이 의자 두 개를 꺼내 오더니 가판대 앞 해가 드는 곳에 나란히 
놓았다. 내게 자리를 권하면서 그는 셔츠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 
냈다. 그러고는 톡톡 두드려서 몇 개비를 나오게 한 뒤 나를 향해 
내밀었다. 
“담배안피웁니다.”고개를저으며내가말했다.“ 그래도고맙소.” 
● 1945년 4월 베를린이 러시아군에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 히틀러는 이동 중이던 제12군에 방향 
을 바꿔 소련군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일시적인 작전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전세를 바꾸지는 못 
했다. 
그가 돌아왔다
그는 한 가치를 집어 입에 물고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를 빨아들였다 다시 장난스럽게 내뿜으며 그가 
말했다. 
“아, 이제 커피 마셔야겠군요! 선생님도 드시죠? 제 말은, 드시 
고 싶으면요. 가루 커피밖에 없거든요.”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영국이 예나 지금이나 항로를 봉쇄했을 테고 
이 문제에 대해 난 충분히 알고 있다. 내가 없는 동안 새로운 제국의 
지도부에선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애를 많이 썼겠지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용감하고 고통을 잘 참는 독일 국민은 오래전부터 
그래왔듯 대용품으로 견뎌야 하지 않았겠는가. 순간 굉장히 달았던, 
어제의 그 뮈슬리바라는 게 생각났다. 훌륭한 독일 빵을 대신해 급 
할 때 얼치기로 만든 것임에 틀림없겠지. 그리고 가엾은 가판대 주 
인은 자기 손님 앞에서 미안해한다. 대용품 말고는 내놓을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참 가슴 아픈 일이다. 갑자기 동정심이 솟았다. 
“할수없지어쩌겠소, 착한양반이구려.”난남자를달랬다.“ 난 
커피를 그리 즐기는 사람이 아니오. 물이나 한 잔 주면 고맙게 마시 
겠소.” 
너무 이상한 새로운 날의 첫 아침을 난 이렇게 담배냄새를 풍기 
는 가판대 주인과 보냈다. 나를 위해 일할 기회를 찾아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남자와 말이다. 처음 몇 시간은 단순 노동자나 퇴직한 사 
람들이 많이 왔다. 이 사람들은 짤막한 몇 마디로 담배나 조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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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사 갔는데, 특히〈빌트〉●라는 이름의 신문이 인기가 많았다. 내 
가 보기엔 나이가 좀 많은 사람이 이 신문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글씨가 다른 신문에 비해 큼지막해서인 듯했다. 누구의 발상인지 
몰라도 아주 좋은 생각이다. 그 순간 난 우리 당의 탁월한 선전 장 
관 괴벨스가 생각났다. 이런 조치라면 우리가 국민들로부터 더 열 
렬한 환호를 받았을 텐데 말이다. 특히 나이 든 사람들에게 전쟁 소 
식을 전하기에 좋았을 것이다. 글씨를 좀 더 크게 한다는 단순한 방 
법으로 이렇게 큰 효과를 거둘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판대 앞에 있자니 신경에 거슬리는 일들이 가끔 눈에 띄었다. 
특히 젊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기분 좋을 때 종종‘쿨하다’라거나 
‘짱이야’같은 소리가 들리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래도 나를 향한 표정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존경심 
이 드러나기는 했다. 
“멋지지 않나요?”가판대 주인이 손님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똑같아서분간을못할정도라니까요, 안그래요?” 
“그러네요.”손님이 말했다. 20대 중반 정도의 노동자로 보이는 
남자가신문을접으며말했다.“ 근데저렇게해도되는건가요?” 
“뭐가요?”가판대 주인이 물었다. 
● 1952년에 창간된 타블로이드판 신문으로 유럽에서 가장 잘 팔리는 신문으로 알려졌다. 글보다 사 
그가 돌아왔다 
진이 많은 편이며 논란거리나 가십을 많이 다룬다.
“아니, 제복이….” 
“독일 군복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러시오?”나는 약간 따지는 
톤으로 화를 참으며 말했다. 
손님이 웃었다. 어쩌면 날 달래기 위해 그러는 것 같았다. 
“군복은 정말 멋져요. 그래도 선생님은 직업 군인이라 그러시는 
지는 모르지만, 공공장소에서 계속 군복을 입고 있으려면 특별허 
가가 필요한 거 아닌가 해서요.” 
“그거 좋은 생각이겠군.”난 비꼬듯 대꾸했다. 
“제 말은 그냥”손님이 말했다. “페어파숭●때문에 말씀드린 건 
데….” 
그 손님이 악의가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닌 듯했다. 실제로 
내 제복 페어파숭이 최고는 아니었으니까. 
“맞아요, 군복이 좀 지저분한 건 사실이오.”난 가볍게 고개를 끄 
덕이며 인정했다. “그런데 군인의 제복이 지저분하다 해도 거짓말 
을 일삼는 불성실한 외교관 나부랭이의 연미복보단 훨씬 명예스러 
운 복장이오!” 
“군복을 입으면 안 될 이유는 뭐죠? 금지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가판대주인이손님에게심드렁하게물었다.“ 하켄크로이츠●●도없 
는데 상관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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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인문제’‘. 상태’라는뜻도있다. 
●●‘갈고리 십자가’라는 뜻으로 나치즘의 상징.
“그건또무슨말이오?”분노에찬목소리로내가말했다.“ 내가 
어느 당 소속인지 당신들은 모르는 거요?” 
손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곳을 떠났다. 손님이 가고 나 
자 가판대 주인이 내게 자리에 좀 앉아보시라고 했다. 
“저 손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닙니다.”그가 공손하게 말을 꺼 
냈다.“ 손님들은희한하게쳐다봅니다. 선생님이자신의직업을소 
중하게 생각하신다는 건 저도 잘 압니다만, 그래도 혹시 다른 옷을 
입을 생각은 없으신가요?” 
“아니, 그럼 나보고 내 인생과 내 일, 내 국민을 속여야 한다는 
거요? 나한테 그런 식으로 요구하면 안 되오.”말하면서 난 의자에 
서벌떡일어났다.“ 난말이오,이제복을내몸에마지막피한방 
울이 남을 때까지 입을 거란 말이오.” 
“매번 이런 걸로 소동을 벌여야겠습니까?”가판대 주인이 약간 
뚱한얼굴로말했다.“ 그게꼭제복이어서만은아닙니다.” 
“그럼 또 뭣 때문이란 말이오?” 
“지독한 냄새가 납니다. 어디에서 뭘 하다 오셨는지 모르지만 혹 
시 주유소에서도 일을 하셨나요?” 
“말단 사병이라도 군복을 바꿀 수는 없소. 하물며 가장 높은 위 
치에 있는 내가 그럴 수는 더더욱 없지. 아무 옷이나 걸치고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인간들처럼 하고 다니긴 싫소.” 
“그러시겠죠, 그래도 선생님 프로그램을 생각해보세요!” 
그가 돌아왔다
“프로그램이라고?” 
“선생님 프로그램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거 아닌가요?” 
“맞소.”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선생님을 알고 싶어서 가까이 갔는데 지 
독한 냄새가 난다면 어떻겠어요? 선생님 옆에서 담배를 피우면 혹 
시 불이 옮겨 붙을까 봐 겁이 나지 않겠어요?” 
“당신은 내 옆에서 담배를 피웠잖소.”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내 
말은 이미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그의 논리에 동의할 수밖에 없 
었기 때문이다. 
“전원래용기있는사람이라….”남자가웃었다.“ 자, 얼른집으 
로 가서 다른 옷을 몇 벌 가져오시죠.” 
또다시 아픈 문제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집 문제 말이다. 
“내가 말했지 않소, 지금 상황에선 그게 좀 어렵다고 말이오.” 
“아…. 그래도 선생님 옛 애인은 지금 일하고 있을 시간 아닌가 
요? 아니면 장이라도 보러 나가겠죠.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해도 
방법은 있지 않을까요?” 
“어, 그게….”머뭇거리며 말했다. “그게 문제가 있소. 집 말이 
오….”이제 정말 제대로 위기상황에 빠졌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여분의 열쇠를 안 가지고 계시나요?”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천진난만한 표정을 보면서 이번엔 나도 웃 
지 않을 수 없었다. 관저에 열쇠가 있었는지는 나도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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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흠,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우리 관계는 어찌어찌해 
서… 깨져… 버렸소.” 
“접근 금지령이라도 있으신가요?” 
“나도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길이 없소.”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그런데어쩌면그런쪽이긴하오.” 
“이런, 그럼 그 집에 갈 수는 없겠군요.”남자가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대체무슨일을하셨습니까?” 
“나도 모르겠소.”난 사실대로 말했다. “특정 시간에 대한 기억 
이 안 나서….” 
“선생님이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 
다.”남자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글쎄, 뭐….”난 손으로 정수리를 만지작거리며 모양을 다듬었 
다.“ 물론난군인이니까말이오.” 
“좋습니다. 선생님은 군인이시죠.”남자가 말했다. “제가 제안 
하나 더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좋은 분 같긴 한데 어디 홀린 것처럼 
보입니다. 제 얘길 잘 들어보세요. 내일 옷 몇 벌을 가져다드릴게 
요. 고마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요즘 들어 체중이 좀 늘어서 단추가 
채워지지않거든요.”남자는자신의배를불만인듯바라봤다.“ 그 
래도 선생님한테는 잘 맞을 거예요. 선생님이 괴링● 역할을 맡으신 
게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나한테 당신 옷을 입으라는 얘기요?”난 혼란스러워 물었다. 
그가 돌아왔다
“옷이 세탁되는 동안만요. 가까운 데 세탁소가 있으니 제가 얼른 
맡기고 오면 되죠.” 
“내 제복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순 없소!”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남자가 말하곤 다소 지친 듯 덧붙였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직접 세탁소로 가져가시면 되지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 
죠? 그 제복을 세탁해야 한단 말이에요.” 
마치 어린아이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서 좀 당황스러웠다. 하지 
만 여기서 아무리 우겨봤자 내 옷이 깨끗해질 리 없다는 사실은 분 
명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군화도 좀 곤란한데요.”남자가 말했다. “신발 사이즈가 어 
떻게 되죠?” 
“43.”난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그럼제신발은너무작겠는걸요.”남자가말했다.“ 이건좀더 
생각해보죠.” 
● 헤르만 괴링. 독일의 군인 정치가로 히틀러의 집권에 큰 역할을 했으며 요직을 두루 거쳤다. 나치 
돌격대 지휘관이자 게슈타포 창설자이며 강제수용소를 만들었다. 은퇴 후 사치와 향락을 즐기느 
라 엄청나게 뚱뚱해졌다. 
42 
43
한정판 특별 부록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베스트셀러 작가의 
스페셜 만화 
그가 
돌아왔다 
in 서울 
글·그림 김태권 
김태권 작가의 기발한 아이디어 
독일이 아닌 서울에서 깨어난 히틀러의 
흥미진진한 그 두 번째 이야기!!
얼마 전《히틀러의 성공시대》라는 만화를 그렸습니다. 정치 초년생이던‘듣 
보잡’히틀러가 어떻게 민주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집권에 성공하는가, 그 
과정을 되짚는 작업이었지요. 자료를 수집하려고 베를린에 갔어요. 거기서 
만난 지인이 어떤 책 이야기를 해주셨답니다.“ 안 그래도 히틀러 소설이 독 
일에 나왔는데. 히틀러가 지금 되살아나서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래.”그 책 
이 바로 이 책, 《그가 돌아왔다(Er ist wieder da)》였어요. 비슷한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다룬 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것 참 인연이다 싶었 
죠. 읽어봐야지 마음먹었지만 얼마 후 나는 돌아와 만화 연재를 시작했고, 
서울의 바쁜 일상에 묻혀 지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인연이 있었던 걸까요. 이 재미있는 소설을 국내에 소개하는 
일에 나도 작은 부분이나마 거들게 되었거든요. 히틀러가 서울에 나타나는 
이야기를 작은 만화로 꾸며보았습니다. 원작 소설이 끝나는 지점과 비슷하 
게 한국의 히틀러 이야기도 멈추지요.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서울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을까요? 당신의 상상으로 채워주 
세요. 제2, 제3의 히틀러를 막을 방법 역시 당신이 상상해주셔야 한답니다. 
민주주의란 제도는 뜻밖에도 무척 여린 면이 있더군요. “생각이 다른 사람 
을 함부로 때려잡지 않는다”는 민주주의 최고의 미덕이 동시에 민주주의의 
급소이기도 하거든요. “나는 민주주의를 때려 부술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너는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므로 나를 때려잡을 수 없다”는 궤변을 앞세운 
사람들이 꼭 나타나더라고요. “민주주의는 사상의 자유가 있으므로, 남의 
사상의 자유를 박탈하자는 사상을 가질 자유가 나에겐 있다”는 사람을 어 
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다른 나라들을 괴롭히던 이 골치 아픈 문제가, 이 
제 우리 사회에도 등장하는 때 같아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태권(만화가)
김태권(만화가)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와《장정일 삼국지》일러스트로 데뷔했다. 서 
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 문학을 전공 
하고있다.《 히틀러의성공시대》를한겨레신문에서호평현재했으며,《 르 
네상스 미술 이야기》《히틀러의 성공시대》등 다수의 작품을 출간했다.
그가 돌아왔다 
제1판 1쇄 인쇄 | 2014년 10월 15일 
제1판 1쇄 발행 | 2014년 10월 23일 
지은이 | 티무르 베르메스 
옮긴이 | 송경은 
펴낸이 | 고광철 
펴낸곳 | 한국경제신문 한경BP 
편집주간 | 전준석 
편집 | 송인국·이혜영 
기획 | 김건희·이지혜 
홍보 | 정명찬·이진화 
마케팅 | 배한일·김규형 
디자인 | 김홍신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청파로 463 
기획출판팀 | 02-3604-553∼6 
영업마케팅팀 | 02-3604-595, 583 FAX | 02-3604-599 
H | http://bp.hankyung.com E | bp@hankyung.com 
T | @hankbp F | www.facebook.com/hankyungbp 
등록 | 제 2-315(1967. 5. 15) 
ISBN 978-89-475-2984-6 03850 
책값은 뒤표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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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 차원의 등가의 번역 2
문법 차원의 등가의 번역 2문법 차원의 등가의 번역 2
문법 차원의 등가의 번역 2
 

그가 돌아왔다 미리보기

  • 1.
  • 2.
  • 4. ER IST WIEDER DA by Timur Vermes Copyright ⓒ 2012 by EICHBORN, A division of Bastei Luebbe Publishing Group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14 by The Korea Economic Daily & Business Publications, Inc. All rights reserved. This edition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EICHBORN through MOMO Agency, Seoul.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모모에이전시를 통해 EICHBORN 사와의 독점계약으로 한국경제신문 ㈜한경BP에 있습니다. 신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 5. ER IST WIEDER DA 티무르 베르메스 지음 | 송경은 옮김
  • 6. 다시 깨어나다 독일 국민은 내게 가장 큰 기쁨을 주었다. 그동안 난 정말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냈다. 적이 혹시라 도 사용할 가능성이 있는 시설을 없애려고 다리와 발전소, 도로, 기차역까지 모조리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모든 공급 시설을 없애야 한다고 분명하게 지시했다. 상수도시설, 전 화시설, 생산수단, 공장, 작업장, 농가 등 인간이 만든 모든 것, 모조리 다! 그게 내 생각이었다. 이럴 때는 신중하게 조 치를 취해야 한다. 명령에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도록 해야 하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략적, 전술적 지식이 부족한 말단 병사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런 신문 가판대까지 불을 질러야 해? 이 조그만 가판대까지도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야? 이까짓 것이 적에게 넘어간들 뭐가 그렇게 심각하다고 말이야!” 심각하다! 적도 신문을 읽지 않는가 말이다! 적의 손에는 아무리 사소 한 것도 넘겨주면 안 된다. 아무것도 안 된다 말이다.
  • 7. 난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한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파괴 하라고. 집뿐 아니라 문, 심지어 문고리까지도. 하다못해 나사도. 큰 나사만이 아니라 작은 것까지 모조리. 문짝에서 나사를 돌려 빼낸 다음 다시 쓸 수 없도록 무자비하게 뒤틀 어야 한다. 문짝 역시 떼어내 가루로 만들어야 한다. 톱밥 이 될 때까지 말이다. 그러고 나서는 반드시 집 전체를 태 워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적들이 드나들 테니까. 문 은 사라졌지만 문이 있던 그 구멍으로 말이다. 고장 난 문 고리와 뒤틀린 나사와 잿더미. 이런 것들을 발견하면 처칠 의 표정이 볼 만하겠지. 이 모든 것이 전쟁이라는 잔인한 작업의 당연스러운 결과다. 분명히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내 명령은 제대로 내려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독일 민족이 영국과 볼셰비즘, 제국주의와 싸워 위대한 서사적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은 더는 부인할 수 없는 사 실이다.
  • 8. 그들은 이곳에서 사냥이나 수렵 같은 원시적인 단계로 계 속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조차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상수도시설이나 다리, 도로도 몽땅 사라졌다. 문고리 까지 말이다. 바로 이 모든 것이 내 명령에 따라 이뤄졌다. 미국과 영국이 공습을 해서 상당한 수고를 덜어주었다. 그 들이 내가 할 일을 대신해서 다 파괴해준 셈이다. 사람들은 내가 할 일이 굉장히 많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서 방에서는 미국을 타도하고 동방에서는 러시아에 맞서 저항 하고, 전 세계의 수도가 될 게르마니안 도시도 세워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문고리는 독일군이 처치했어야 했다. 그리고 특정한 민족을 더는 존재하지 못하게 만들었 어야 했다. 하지만 확신하건대 이 민족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건 어떤 면에서 이해할 수 없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나도 지금 살아 있다. 이 또한 이해하 기 어려운 일이다.
  • 9. 01 전진하라. 전진하라…. 갑자기 눈이 떠졌다. 가물가물하던 시야가 조금씩 또렷해지면서 내가 보고 있는 게 구름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렇다, 나는 누워 있었던 것이다. 몸을 뒤척여보니 등짝이 딱딱한 것이 맨바닥, 잔디보다 잡초가 더 많은 한데였다. 그걸 깨닫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지만, 온몸을 더 듬어봐도 크게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따뜻한 날씨였다. 구름이 약간 끼긴 했지만 하늘은 선명한 파란 색이었고, 이른 오후쯤인 듯했다. 4월치고는 너무나 따뜻하군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사방이 참 조용했다. 적군 비행기는 한 대도 안 보였다. 대포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주변에 폭발음도 없었으며 방 공 사이렌도 울리지 않았다. 여긴 마치 전쟁이라곤 없는 세상 같군. 길 건너에 집이 한 채 보였다. 어떤 놈이 그랬는지 그 집 담벼락 에 군데군데 낙서가 되어 있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되니츠● ● 독일의 해군 총사령관으로 유보트 함대 창설자. 히틀러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할 정도로 신임했고 67 실제로 히틀러 사후 며칠간 총통직을 수행했으나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받아들였다.
  • 10. 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 있으니 그도 근방 어딘 가에 있겠지. 하지만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개미 새끼 한 마리 보 이지 않는다. 이곳은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공터인 것 같다. 내 제 국에 이렇게 버려진 곳이 있다니, 이걸 당장….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독일제국 총통 관저도 아니고 지하벙커도 아 닌 이곳에 말이다. 평상시에 내가 이렇게 하늘이 보이는 땅바닥에서, 벽조차 둘러 쳐지지 않은 곳에서 자는 일은 없다. 뭔가 이상하다. 간밤에 내가 뭘 했지? 과음 같은 단어는 떠올릴 필요도 없다. 난 술을 입에도 안 대는 사람이다. 기억나는 건, 에바와 소파 위 깃털방석에 앉아 있 었다는 거다. 국정에 관련된 일은 잠시 놔두기로 하고 그냥 편안하 게 앉아 있었지. 우린 특별한 일정 없이 쉬고 있었다. 식사하러 가 거나 영화를 보러 갈 생각도 없었다. 하긴 독일제국의 수도 베를린 에서 유흥 시설은 내 명령에 따라 이미 정리된 지 오래다. 며칠 후 스탈린이 방문할 예정이라 했는데, 그는 아마 자기네 나라에서 늘 하듯이 여기서도 영화관을 찾겠지. 하지만 그래 봤자 소용없다는 얘기다. 어쨌든, 우린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나와 에바 둘 이서 말이다. 그러다가 에바에게 내 옛날 권총을 보여줬다. 그다음 어떻게 됐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두통 때문에 그렇기도 했다. 암만 해봐도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자,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하 기로 했다. 그동안 살면서 나는 관찰하고 판단하는 법을 익혔다. 때 그가 돌아왔다
  • 11. 론 학자들이 사소하게 생각하거나 무시하는 아주 미미한 일까지도 알아차리는 데 도가 텄다. 수년간 냉혹한 규율을 경험한 나다. 위기 상황이 되면 냉혈한이 되고 생각을 더 많이 하고 더 예리해진다. 일 을 할 땐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철저하면서도 감정이 없 는 기계처럼. 지금 내가 가진 정보를 체계적으로 요약해봤다. 나는 홀로 여기 에 있다. 내 옆엔 쓰레기가 있고 무성한 잡초 위로 지푸라기가 날린 다. 여기저기에 덤불이 있고 데이지와 민들레도 피어 있다. 나무 위 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더니 지저귀기 시작했다. 그저 기분 좋은 소리일 뿐이라고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겠지만, 아무리 작은 정보 라도 허투루 할 수 없는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선 그것조차 어떤 맹 수보다 더 큰 존재감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뒤쪽으로 웅 덩이가 있는데, 그 옆에 내 모자가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내 이성 은 쉼 없이 일을 했고, 혼란스러운 순간에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몸을 움직여보았다. 다리와 양손, 손가락도 움직여보았다. 내 몸 어딘가에 부상을 입은 곳은 없어 보였다. 두통이 있는 것만 제외하면 건강 상태는 완벽했고 심지어는 손 떨림 증상도 이제 거 의 없어진 것 같았다.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제복, 정확히 군복 차 림이었다. 좀 지저분하긴 했지만 못 봐줄 정도로 심하진 않았다. 흙 투성이까지는 아니었으니까. 옷에는 과자인지 빵인지 모르겠지만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옷에서 휘발유 냄새 같은 게 심하게 났다. 89
  • 12. 에바가 드라이클리닝 세제를 너무 많이 쏟아부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여전히 에바는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참모 중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무슨 소리가 났다. 그렇게 먼 곳은 아닌 듯하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남자아이 몇이 시야에 나타났다. 하나가 축 구공을 발로 차고 있는 걸로 보아 공터에서 축구를 하려는 것 같다. 그들 중 히틀러 소년단 복장을 갖춘 아이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열댓 살쯤 됐을까? 시민군이라기엔 너무 어리니 아마도 청년단이리 라.● 복무 중이어야 할 시간에 축구라? 아마 적군이 물러나 잠시 쉬 기로 했나 보다. 난 군복에 묻은 부스러기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그때 나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거기 공 좀 차주세요!” “우와, 저 아저씨 뭐야? 무슨 코스프레 같은 거 하나 본데?” 세 명의 나치 청년단원이 축구를 멈추고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 로 내게 다가왔다. 당연한 일이다. 독일제국의 총통이 갑자기 자기 들 앞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젊은이들, 이제 곧 성인이 될 이들에겐 이런 일이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리라. 젊은이는 국가의 ● 제2차 세계대전 후반 나치 조직에는 청소년 조직 역시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10~14세의 소년은 소년단 가입이 의무화되었고, 14~18세는 청년단이 되었으며 18세 이상은 군에 입대했다. 시민군 은 정규 군대의 기준에 미달하는 성년이나 청년으로 조직된 인민군을 가리킨다. 그가 돌아왔다
  • 13. 미래지! 아이들이 내 쪽으로 우르르 몰려 왔다. 녀석들은 날 둘러싸더니 내 복장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중 제일 덩치가 큰 아이가 한 발 더 다가오며 말했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나치 경례도 없이 나한테 말을 걸다니, 나도 몰래 인상이 찌푸려 졌다. 이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하, 그렇지. 격식조차 차리 지 못할 정도로 경황이 없다는 얘기겠지. 아마 보통 때라면 이런 실 수를 하지는 않을 거야. 난 몸을 꼿꼿이 세웠지만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지라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군복을 똑바로 펴고 급한 대로 손으로 툭툭 때려 옷 에 묻은 부스러기를 다 털어냈다. 그런 다음엔 헛기침을 한 번 하 고, 대장처럼 보이는 그 아이에게 물었다. “보어만은 어디 있나?” “그 사람이 누군데요?” 이해할 수 없었다. “보어만! 마틴 보어만 말이다!” “그런 사람 모르는데요.”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떻게 생겼는데요?” “제국의 총통 비서를 모른단 말이야? 제군들, 지금 무슨 생각을 10 11
  • 14. 하는 건가!” 나의 호통에도 아이들은 덤덤하기만 하다. 보통 같으면 눈도 제 대로 못 마주치고 벌벌 떨 텐데. 아니지, 애초에 이런 상황이 일어 나질 않았겠지. 어딘지 모르게 이곳은 현실성이 없다. 마치 내가 총통이 아닌 다 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빨리 총통 관저로 가봐야겠 다. 우선 길부터 찾아야 한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아무 특징이 없는 땅이라 시내 어디쯤인지 알 길이 없다. 일단 도로를 찾아야겠 다. 여전히 총성은 들려오지 않으니 적군이 상당히 먼 곳까지 퇴각 한 모양이군. 큰길에 나가면 행인들도 있을 테고 오가는 마차라도 불러 세워 탈 수 있겠지. 아이들은 다시 축구를 하려는 것 같았다. 방향을 돌려 아까 그 자리로 뛰어간다. 유니폼에 한 아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디다스 단원! 큰길은 어느 쪽이지?” 그런데 정작 그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다른 아이 하나가 공터 모서리쪽을 가리켰다. 그 녀석도 정중하게 그렇게 한 것은 아 니고, 뛰어가면서 대충 가리키는 둥 마는 둥 했을 뿐이다. 나는 분 통이 터졌다. 1933년부터 이 나라를 이끌어왔지만 군대가 이렇게 개판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누군지도 못 알아본다면 모스크 바로 가는 승리의 길은 어떻게 찾을 거냔 말이다. 정말이지 한심하 기 이를 데 없다. 이 아이들에 대해서는 보어만한테 명령을 내려 강 그가 돌아왔다
  • 15. 력히 조치하라고 해야겠다. 총통인 내가 일일이 이런 조무래기들 의 군기까지 왈가왈부하는 건 격에 맞지도 않고 말이다. 웅덩이 옆의 모자를 집어 들고 공터 모퉁이를 향했다. 공터가 끝 나는 곳에 이르자 높은 벽 사이로 좁은 통로가 나왔다. 고양이 한 마리가 소리도 없이 달려와 내 옆을 휙 지나갔다. 화려한 얼룩무늬 털을 가진 고양이였지만 주인이 없는지 돌보지 않은 티가 났다. 몇 걸음 더 가니 도로가 나왔다. 그런데 너무나도 이상한 풍경이라 눈 이 휘둥그래졌다. 한낮인데도 거리는 휘황찬란한 불빛과 깜빡거리는 간판들로 가 득 차 있었다. 온갖 색깔의 불빛이 돌진해왔고 나는 엄폐물도 없이 집중포화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어쩔 줄 모른 채 잠시 서 있었는데, 다행히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기억에 시내의 마지막 모습은 먼지가 자욱하고 어디든 회색 빛뿐이었다. 어떤 도시든 마찬가지로 폭격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폐허더미였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펼쳐진 모습에서는 그 비 슷한 자국조차 찾을 수 없다. 말짱한 건물들이 줄을 지어 서 있고 도로도 말끔했다. 더욱이 도로에는 수없이 많은, 정말 셀 수도 없는 자동차들이 꼬리를 물고 오가고 있었다. 아니, 하룻밤 새에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마치 몇십 년이 지났고, 자동차 기술을 발 전시키는 데만 온 나라가 매달린 듯한 모습이었다. 자동차들은 작 지만 화려해지고 소음도 크지 않았으며, 덜덜거리지도 않고 매끄 12 13
  • 16. 러운 도로를 부드럽게 달려갔다. 집들도 깨끗하게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다. 색상이 다양해서 어 렸을 때 가끔 보았던 사탕통 생각이 났다. 갑자기 좀 어지러웠다. 도로 건너편에 낡은 벤치가 있었다. 낡은 무엇인가가 하나라도 있 다는 점 때문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잠시 거기 앉아서 생각을 정리 해야겠다. 막 발걸음을 내딛는데 갑자기 끼익 하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이 양반아! 눈이 멀었어?” 그게 나한테 하는 소리라는 걸 알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고개를 돌리니 내 바로 뒤에서 한 남자가 나한테 삿대질을 하고 있 었다. 급정거를 한 듯 자전거를 붙들고 엉거주춤 선 채였다. 익숙한 것이 또 하나 나타났다. 이 남자가 날 바라보는 분노에 찬 시선, 그 게 날 안심시켜주었다. 아무렴, 지금은 전쟁 중 아닌가. 남자는 폭 격 탓인지 심하게 망가져서 구멍이 숭숭 난 헬멧을 쓰고 있었다. “아니, 찻길을 그렇게 막 지나가면 어떡합니까?” “나는 단지…, 저기 의자에 가서 앉으려는 것뿐이오.” “앉을 게 아니라 누워야 할 것 같은데요. 그것도 영영!” 남자는 그렇게 소리를 치고는 가던 길을 가버렸다. 피신하듯 벤 치에 몸을 부린 나는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 젊은 남자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물론 나치 경례를 요구할 틈도 없었다. 지금 그가 돌아왔다
  • 17. 모종의 훈련이 진행되고 있는 걸까.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훈련 이란 게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 말이다. 중년 남자 하나가 내 앞을 지나갔다. 그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했다. 꽤 덩치가 큰 부인이 미래의 세계에서 튀어나온 듯한 유모차를 끌고 지나간다. 나를 보고도 별 반응이 없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나는 벌떡 일어나 그 여자에게 다가갔다. “부인, 지금 당장 총통 관저로 가야 하는데 가장 빠른 길이 어디 요?” “슈테판 랍 씬가요?” “뭐라고요?” “아니면 케르켈링 씨? 가만있자, 코미디가 아니면 길거리 토크 쇼를 촬영하시는 중인가요?” 이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난 여자의 팔을 움켜잡고 외쳤다. “정신 차리시오, 부인! 독일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잊었소? 지금 은 전시 상황이란 말이오! 러시아군이 여기까지 쳐들어온다면 당 신에게무슨짓을할지생각해봤소? 또당신딸한테는어떻고!‘ 오 호라, 한창 피어오르는 독일 아가씨인걸’이러면서 음흉한 시선을 던지겠지. 독일 국민의 존속과 순수한 독일인의 피, 인류의 생존이 지금 위험에 처했소. 당신이 지금 독일제국의 총통에게 관저로 가 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말이지!” 놀라서 퍼뜩 정신을 차릴 거라고 기대했지만, 놀란 것은 도리어 14 15
  • 18. 나였다. 그 멍청이 같은 여자는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면 서 자기 팔을 휙 뺐다. 그러더니 머리 위에서 집게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는 동작을 반복했다. 이건 또 무슨 뜻인가. 여자는 그렇게 원을 몇 바퀴 그리더니 유모차를 끌고 가버렸다. 뭔가 잘못되었다.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다. 이곳에서 나를 군사 령관으로, 제국의 최고 지도자로, 총통으로 대우하는 사람은 아무 도 없다. 축구하던 아이들도, 자전거 타고 가던 남자도, 중년 남자 도, 유모차를 끌고 가던 부인도 그랬다.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물론 어떤 훈련 프로그램도 아니고 말이다. 다시 질서를 잡으려면 안보기관을 총동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벤치에 앉은 채 지금의 이 충격적인 상황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보았다. 난 수십 년을 독일, 그중에서도 이곳 베를린에서 살았다. 그런데도 지금 모든 게 낯설게 느껴진다. 여기가 독일도 아 니고 베를린도 아닌 걸까. 그럴 리가 없다. 전쟁 중에 내가 한가하 게 다른 나라를 여행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상당 히 오랫동안 실신해 있었던 걸까. 하나부터 열까지 알 수 없는 일들 뿐이다. 그때 벤치 밑에 뭔가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신문과 비슷한데 좀 더 화려하고, 종이도 질이 좋아 보였다. 집어 들고 맨 앞장을 보 니〈미디어 마켓〉이라고 쓰여 있다. 이런 인쇄물을 내가 허가해준 적이 있던가? 아무튼 인쇄물에 대해서도 한바탕 정비를 해야겠다. 그가 돌아왔다
  • 19. 그 안에 있는 내용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분노가 점 점 더 솟구쳤다. 대체 어떤 인간이 이따위 내용을 퍼뜨리느라 국민 의 귀한 자원을 펑펑 낭비하느냔 말이다. 어서 집무실로 달려가 독 일제국 국민으로서의 정신무장을 대대적으로 실시해야만 하겠다. 지금 나한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을 만한 뉴스다. 우리 당 기관 지인〈민족의 관찰자〉나〈돌격〉이 있다면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신문 가판대가 있었다. 오후 내내 나는 무방비 상태로 아무런 전략적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허둥댔다. 어서 신문 을 읽고 상황을 파악한 다음, 최대한 서둘러서 관저로 가야 한다. 제국 곳곳이 무질서로 가득 차 있는 데다, 사령부는 내가 없어졌다 는 사실 때문에 비상이 걸렸겠지. 난 신문 가판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곳 역시 내가 알던 분위기는 아니었다. 전투 속보를 전하는 긴 장감 같은 건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가판대를 둘러싸고 수 없이 많은 알록달록한 인쇄물이 진열돼 있는데, 터키어로 된 것도 네다섯 가지나 있었다. 이곳엔 분명 수많은 터키 사람이 왕래하는 듯하다. 흠…. 아주 중요한 문제다. 우리가 같은 편으로 전쟁에 참 가해달라고 굉장히 공을 들였음에도 터키는 끝내 중립으로 남지 않았던가. 내가 부재중인 기간에 누군가가, 아마도 되니츠가 터키 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나 보다. 독일과 터키가 동맹을 맺었다는 것은 역시나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제 제국의 전쟁 결과에 대해서는 한시름 놓았다. 오후 내내 그게 제일 16 17
  • 20. 큰 걱정이었다. 그다음 일은, 내가 실신한 채로 얼마나 오래 있었 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민족의 관찰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다 팔려서 없는 거겠 지. 그 옆을 보니〈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이라는 신문이 있었다. 처음 보는 신문이긴 하지만, 다른 신문들보다는 그래도 좀 낯이 익은 듯했다. 신문 타이틀 서체가 내게 아주 친숙했다. 이것저 것 보느라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난 제일 먼저 날짜부터 찾았다. 거기엔 8월 30일이라 적혀 있었다. 8월이라고? 그럼 내가 넉 달 이나 여기 누워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더 이상한 게 있었다. 연도가 2011년이다. 1945년에서 자그마치 66년이나 지났다는 거다! 난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봤다.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다. 급히 다른 신문도 들춰봤다. 〈베를리너차이퉁〉이란 신문, 분명 히 독일어로 된 신문이었다. 2011년. 신문을 확 펼쳐서 다음 장을 보고, 그다음 장도 확인해보았다. 2011년. 숫자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 눈앞에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그러더니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오늘 자가 맞기는 한지 기사를 읽어보려고 하는데 신문이 내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러고 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가 돌아왔다
  • 21. 02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또 바닥에 누워 있었다. 이번엔 홀로 버려 진 것 같진 않다. 누군가 내 이마에 젖은 수건을 얹어놓았다. “좀 어떠십니까?” 마흔다섯 살 정도, 어쩌면 쉰이 좀 넘어 보이는 남자가 상체를 기울여 기색을 살피면서 물었다. 체크무늬 남방에 노동자들이 입 는 것 같은 허름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는 다짜고짜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오?” “음, 8월 29일이요. 아니, 잠시만요, 30일이네요.” “몇 년도?”긴장 탓인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 나 앉자 젖은 물수건이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남자가 이마를 찡그리며 날 쳐다봤다. “그야 2011년이지요.”남자가 말하며 내 군복을 뚫어지라 바라 봤다.“ 그럼몇년이라고생각하셨나요? 1945년이요?” 난 적당한 대답을 찾으려 고심하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더 누워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남자가 말했다. “아니면 앉아 계시든가요. 안에 의자가 있어요.” 18 19
  • 22. 처음엔 이렇게 쉴 시간이 없다고 말하려 했는데 내 다리가 여전 히 심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남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밖 에서 볼 때는 신문만 파는 줄 알았는데 길거리 매점인 것 같다. 이 것저것 생필품이 상당히 있었다. 나한테 빈 의자를 가리키더니 남 자는 의자에 앉아서 날 쳐다봤다. 가끔 그는 창문 쪽을 보곤 했는데 네모난 구멍이 있는 걸로 보아 손님들이 오나 보는 듯했다. “물 한 모금 드릴까요? 초콜릿을 좀 드시겠어요? 아니면 뮈슬리 바?” 난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일어나 탄산수 한 병을 가져와서는 컵에 따라 내 앞에 놓았다. 선반에서 네모난 막대기 같 은 것도 꺼냈는데, 군인들이 먹는 비상식량처럼 생겼다. 포장이 알 록달록하고 화려하다는 점이 좀 달랐다. 남자가 매끄러운 포장을 벗겨 알맹이를 꺼내서는 내 손 위에 올려놨다. 곡물을 기계로 납작 하게 눌러 만든 것 같은 모양이었다. 식량 부족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나 보다. “아침을 좀 더 든든히 드시는 게 좋을 텐데요.”남자가 말했다. “이 주변에서 촬영하시나 봐요?” “촬영…?” “다큐멘터리 아니면 영화겠지요. 이 동네에서는 끊임없이 뭔가 를 찍잖아요.” “영화…?” 그가 돌아왔다
  • 23. “세상에, 선생님 지금 제정신이 아니신가 보군요.”남자가 웃으 며 손으로 내 위아래를 가리켰다. “아니면 평소에도 그렇게 하고 다니십니까?” 난 고개를 숙여 내 차림새를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뭐가 이상한 지 알 길이 없었다. 먼지가 좀 묻고 휘발유 냄새가 나긴 하지만 대 체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렇소만.”말해놓고 보니 내 얼굴에 상처가 있어서 그러 는가싶어그에게물었다.“ 혹시슈피겔●있습니까?” “그럼요.”남자가 말하고는 내 뒤쪽을 가리켰다. “저기요. 시사 주간지들있는곳,〈 포쿠스〉옆에있습니다.” 남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오렌지색 테를 두른 슈피겔(거울)이 있었고 거기에 커다란 글씨로‘슈피겔’이라고 쓰여 있었다. 마치 그 렇게 크게 쓰지 않으면 사람들이 못 알아보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난 일어나서 거울을 들여다봤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완벽해 보였고 군복도 막 다림질을 한 듯 반듯했다. 아마도 매점 안 조명 효과인 것 같았다. “표지사진 찍는 중이시군요?”남자가 물었다. “그 주간지에서 요즘 3주에 한 번은 히틀러 이야기를 다루니까요. 제 생각에 선생 님은 이제 더 노력하실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그대로도 아 20 21 ● 거울. 독일을 대표하는 시사주간지 이름이기도 하다.
  • 24. 주 완벽해 보입니다.” “고맙소.”난 엉겁결에 이렇게 말했다. “아니, 정말입니다.”남자가 말했다. “저도〈몰락: 히틀러와 제3 제국의 종말〉이라는 영화 봤습니다. 두 번 봤죠. 브루노 간츠가 히 틀러 역을 했는데 연기를 잘했지요. 그렇지만 선생님 근처에도 못 가겠는걸요.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랄까…. 아무튼 선생님이 했으면 정말 좋았을 걸 그랬어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돼서 내가 물었다. “뭐가 좋았겠다는 말이오?” “아, 선생님이 그 역에 더 어울린단 말이죠.” 그러면서 남자는 오른손을 번쩍 들더니 팔을 쭉 뻗어 올렸다. 아, 66년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치 경례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이다! 여하튼 내 정치적 영향이 그동안에 완전히 사라져버린 건 아 니라는 신호였다. 나도 힘차게 팔을 뻗어 경례에 답하고는 자못 흥분되어 말했다. “당신은 오늘 총통을 알아본 최초의 사람이오!” 남자는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댔다. “세상에, 어쩜 저렇게 자연스 러운지.” 도대체 뭐가 우습다는 건가. 조금 전 나치 경례까지 올려붙였던 남자가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내 행동을 코미디로 만들어버리다 니, 불쾌하기도 하고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그가 돌아왔다
  • 25. 그러다 서서히 내가 처한 상황이 조금씩 인식되었다. 만일 이게 꿈이 아니라면, 아니다, 꿈이라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다.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은 2011년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이곳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이고, 이 세계에서 나는 신기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론적 으로 보면 나는 122살이어야 한다. 아니지, 인간이 그렇게 오래 살 수는 없으니까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다. 풀 수 없는 수수 께끼에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다른 연기도 하십니까?”남자가 또 말을 걸었다. “어떤 작품이 진행 중이신가요?” “그런 거 없소.”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 물론 미리 공개하긴 곤란하시겠죠.”남자는 이렇게 말하면 서 사정을 다 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의 미심장하게 눈을 깜빡거렸다.“그래도 조금만 얘기해주세요. 프로 그램●이 있으시죠?” “물론이오.”내가 대답했다. “1920년부터 나오고 있소! 내 프로 그램인 25개 조 강령●●에 대해 독일 민족 공동체 일원으로서 당신 도 알지 않소?” ● 방송프로그램. 정당의 정책이란 뜻도 있다. ●● 나치의 정치 강령. 히틀러는 1920년 뮌헨의 비어홀에서 2,000명의 독일인을 모아 독일노동당 의 창당 선언을 하고 25개 조의 당 강령을 발표했다. 당명은 후에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당(일명 나치당)으로 변경되었다. 22 23
  • 26.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예, 그건 뭐 그렇다 치고…. 선생님, 혹시 팸플릿 있으신가 요? 아니면 명함이라도?” “미안하지만없소.”슬픈얼굴로내가말했다.“ 명함은작전통제 실 본부에 있소.” 나는 갑자기 기가 죽었다. 아주 중요한 사실이 생각났기 때문이 다. 이대로라면 내가 다시 나타난다고 한들 총통 관저에서도, 지하 벙커에서도 현재 쉰여섯 살인 총통을 믿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지 금 상황을 분석해서 대책을 세울 시간을 벌어야 했다. 우선 거주할 곳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 수중에는 동전 한 푼도 없다. 스무 살 시절 불안정한 수입 탓에 싼 하숙집을 찾아 전전하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꼭 필요한 시간이었고, 이 세상의 어떤 대학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을 깨우친 시간이었다. 워낙 궁핍했 기에 당시에는 무척 힘들었지만 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 던 몇 달간의 생활이 내 머리를 스쳤다.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면서 매번 다음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야 했다. 생각에 골몰하는 동안 무의식중에 손에 쥔 막대 곡물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까 가판대 주인이 건네준 것을 지금껏 잊고 있었다. 굉장히 단맛이 났다. 베어 물고 남은 것을 눈앞에 대고 유심히 관 찰했다. “저도그거좋아합니다.”그가말했다.“ 하나더드시겠어요?” 그가 돌아왔다
  • 27. 난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내겐 더 큰 문제가 있지 않은가. 가장 단 순하고 근본적인, 거주지 문제 말이다. 살 집이 필요하고, 지금 내 가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 분명히 밝혀질 때까지는 생활비도 있 어야 한다.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적어도 내가 다시 정상적으로 정 부 업무를 맡을 수 있을지, 아니면 어떻게 해야 다시 일을 할 수 있 을지 알 때까지는 임시로라도 일자리가 있어야 한다. 내 재능을 살 려 화가로 일하든지, 당장 급하면 막노동이라도 해야겠지. 독일 국 민에 대해 나만큼 방대한 지식을 갖춘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현재 상황이라면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현재에 대해서 는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대체 독일제국의 아군이 누구이고 누구를 향해 총을 겨눠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상황이 이렇다면 건축 현장 이나 도로건설 현장에서 일할 만큼의 체력이라도 회복해야 한다. “이제 농담은 그쯤 하고 얘기 좀 해봅시다.”남자의 목소리가 귓 가에 울렸다. “아직 초짜이신가요? 아니면 뭔가 역할을 맡은 적이 있으신가요?” 이 말은 정말 내 심기를 건드렸다. “난 초짜 따위가 아니오!”강 한 어조로 남자에게 말했다. “더욱이 어설프게 남의 흉내나 내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남자가 달래듯 말했다. 그의 말투 에는 마음속 진심을 전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었다. “배우가 아니라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쭤보려 한 겁니다.” 24 25
  • 28. 내 직업이 뭐냐고? 내가 누군지는 아까 말했지 않은가.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바닥을 구를 정도로 웃지 않았느냐 말이다. 휴, 정말 이지 나로서도 난감한 일이다. “난…, 난 지금은 그냥…, 은퇴했소.”조심스럽게 내 처지를 돌 려서 말했다. “제 얘기를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남자가 열성적으로 말했다. “이런 분이 아직도 캐스팅이 안 되다니, 믿기 어려워서 하는 말이 니까요. 아,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여기 베를린이란 곳은 에이전 시나 영화사, TV 방송국 등 수많은 제작진이 바글거리는 곳이에 요. 이 사람들은 먹이에 굶주린 사자처럼 항상 새로운 얼굴을 찾고 정보를 구하러 돌아다닌다고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선생님을 발 견하지 못했나, 그게 궁금할 따름이에요. 그런데 아직 명함도 없으 시다니…. 선생님한테 연락하려면 어디로 하면 될까요? 전화번호 는 있으신 거죠? 아니면 이메일 주소라도?” “음….” “어디 사세요?” 그는 결국 내 아픈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한편으로, 그에게는 내 형편을 솔직하게 털어놔도 될 것 같았다.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난 모험을 하기로 했다. “흠, 지금 집 문제는 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 금은 없소.” 그가 돌아왔다
  • 29. “아, 그러세요. 그럼 애인 집에서 살고 계시는 건가요?” 순간 에바를 생각했다. 에바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나처럼 살아 있기는 한 걸까? “아니오.”난 의기소침해져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애인은 없소. 지금은.” “그러시군요.”남자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된 게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닌가 보군요.” “그렇소.”내가 대답했다.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 이…, 당혹스럽소.” “전에는 괜찮았는데 사정이 나빠지신 거죠?” “그게 딱 맞는 말이오.”난 고개를 끄덕였다. “괘씸하게도 슈타 이너 군집단●이 베를린을 포기했기 때문이오.” 남자가혼란스러운듯잠시내얼굴을바라봤다.“ 아, 저는선생 님이 애인과 헤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한 건데요. 누구 책임이었든 간에.” “나도 모르겠소.”내 대답이었다. “맨 마지막은 처칠 때문인 것 같은데….” 남자가 웃었다. 그러더니 한참 동안 날 뚫어지게 바라봤다. ● 1945년 창설된 군부대로 베를린 수비를 담당했다. 펠릭스 마틴 슈타이너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 는데, 소련이 베를린을 포위할 때 히틀러가 베를린 수복 명령을 내렸지만 불복했다. 사실상 그럴 만한 전력도 되지 않았다. 26 27
  • 30. “선생님 말씀하시는 게 참 맘에 듭니다. 잘 들어보세요. 제가 제 안을 하겠습니다.” “제안이라고 했소?” “어딘가 꼭 가셔야 할 곳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특별히 그 런 게 없다면 하루 이틀 이곳에서 주무시면 어떠신지….” “여기서 말이오?”매점 안을 둘러보며 내가 물었다. “아니면 세계 갑부들이 애용한다는 아들론 호텔에서라도 묵으시 게요?” “아들론 호텔이라…. 폭격으로 한쪽이 좀 부서졌을 텐데 수리를 마쳤나 보군요.” “말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선생님 정도의 능력으로 캐스팅이 안 된다면 말이 안 되지요. 관계자들이 왔을 때 어디 숨어 계시면 안 됩니다.” “난 숨지 않소!”항의하듯 말했다.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인데 어딜 숨겠소!” “네네, 맞습니다.”남자가 손짓하며 말했다. “일단은, 하루 이틀 여기서 주무시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여기 오는 손님들 중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아보겠습니다. 인기 있는 영화 잡지 신간이 어제 도착했으니, 그쪽 일 하는 사람들이 사러 올 겁니다. 어쩌면 그중에 는 선생님 같은 인물을 찾고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죠. 솔직히 말 해서 입고 계신 제복 하나만으로도 그 인물에 완벽하게 어울리니 그가 돌아왔다
  • 31. 뭔가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나보고 여기서 지내란 말이오?” “우선은 그렇게 하자는 겁니다. 며칠만 여기 계시다가, 누군가 영화 관련된 사람이 오면 제가 선생님을 소개해드린다는 거예요. 아무도 안 오면 그냥 웃어넘길 추억거리가 생기는 거고요. 아니 면…, 묵으실 만한 곳이 있나요?” “아니, 없소.”한숨이나왔다.“ 지하벙커빼고는….” 남자가 웃었다. 그러다 웃음을 멈췄다. “설마 여기 있는 물건을 다 훔쳐 가시지는 않겠죠?” 난당황해서남자를쳐다봤다.“ 내가도둑놈처럼보이오?” 남자가날바라봤다.“ 아돌프히틀러처럼보입니다.” “그야 당연하지.”내가 말했다. 28 29
  • 32. 03 그 뒤 며칠 동안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낯설기 짝이 없는 환경에다 온갖 출판물과 담배, 스낵, 음료 캔이 쌓인 구석에 불편하고 비좁은 잠자리가 마련됐다. 하긴 그것들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밤마다 나 는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소파에 누워 내가 죽었다는 시점 이후로 현재까지 66년간의 사건들을 곱씹어야 했다. 혹시라도 남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말이다. 자연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이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 대해 답을 얻 어내야 하는 기이한 처지였다. 그렇지만 늘 실용적으로 사고하는 내 이성은 현재 여건에 적응할 방법을 찾았다. 고통을 한탄하는 대신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상황을 관망 했으며, 사건에 대해 정확히 예측하고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지난 60여 년간 독일제국 지역에 주둔한 소련군의 수가 현저 하게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과 관련해서, 어쩌면 내 가 음모에 휘말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러시아가 나 를 납치해서 내가 미래에 있다고 느끼도록 환경을 조작한 건 아닐 까 하는 의심이었다. 내가 가진 가치 있는 비밀을 꾀어내려고 이런 그가 돌아왔다
  • 33. 가상세계를 만들어놓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내 의지가 너무도 굳 건하므로 그냥은 힘들 것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그 가정도 얼마 안 가 포기했다. 암만 해도 그건 아닌 듯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까. 내겐 군대도 없고, 사령부도 없 고, 무장친위대도 없다. 당분간은 도서관 같은 데 가는 것조차 위 험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러 개의 신문과 잡지를 훑어보고, 행인 들의 발언이나 짤막한 대화 내용에도 귀을 기울여봤다. 고맙게도, 가판대 주인이 내가 밤에 혼자 있을 때 라디오를 듣도록 해주었다. 라디오에 대한 기술이 그동안 엄청나게 발전했음을 새삼 느꼈다. 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충격적일 만큼 한심했다. 라디오를 켜자 참 을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가 났고 건질 거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허튼소리만 나왔다. 우리 독일제국의 발전된 기술에 흐뭇해 서 큰 기대를 가졌건만, 급기야 전원을 꺼버리고 말았다. 화가 나서 15분가량을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아, 독일이 어디로 가 고 있는 것이냐. 어쨌든 지금까지 파악한 바를 정리하자면, 불완전하긴 하지만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터키는 분명 우리를 지원하러 오지 않았다. 2 바르바로사 작전이 초반 기습에 성공했지만 소련군의 반격으로 30 31
  • 34. 모스크바에서 밀려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은 나도 잘 안 다. 그 후 반전은 없었고, 독일은 전쟁에서 졌다. 3 나 자신은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알아본 바로는 내가 자살했다 고 되어 있다. 물론 나도 군부 내에서 신뢰의 위기를 맞았을 때 자살의 가능성을 생각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 순 간에 어떻게 했는지는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죽은 게 확실한가? 그런데 사실 신문 기사라는 게 어떤 건지 다들 알고 있지 않은 가. 눈먼 사람이 하는 얘기를 귀가 어두운 사람이 받아 적고, 그 걸 멍청이가 수정해 내보내는 게 신문 기사 아닌가. 더욱이 다른 신문사에서는 그 내용을 그대로 베낀 다음 몇 마디 무의미한 거 짓말을 보탠다. 그렇게 해서‘그럴싸하게’만들어진 신문을 대 중은 뭐라도 되는 양 꼼꼼히 들여다본다. 난 이 일을 그냥 놔두기로 했다. 마땅히 방법도 없다. 내가 나서 서‘여기 살아 있소’할 것인가 어쩔 것인가 말이다. 4 그런데 내 운명에 대한 건 그렇다 치고, 다른 분야에 대한 실상 은 두고 볼 수가 없을 정도다. 군대, 역사, 정치, 일반적인 주제 를 비롯해서 경제 분야까지 언론은 오판과 무지를 넘어 악의적 인 비방으로 가득 차 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많은 그가 돌아왔다
  • 35. 양의 머저리 같은 인쇄물로 아마 미쳐버릴 것이다. 그러니 이런 건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5 언론은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자 퇴화하고 타락하고 정신적으 로 무뎌져서, 환상 속 세계의 모습을 현실인 양 써댄다. 정말이 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을 이야기한 신문 기사를 요 며칠 나는 한 개도 보지 못했다. 6 독일제국은 일명 독일연방공화국이 되었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 람은 독일연방공화국 총리란 직함을 맡은 여자다. 물론 그 밑에 는 다른 남자들이 직책을 맡고 있긴 하다. 7 현재도 정당은 존재하고, 정당이 있기에 반드시 그와 관련된 비 생산적인 다툼도 있다. 다만 나치당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8 〈민족의 관찰자〉는 아무 데서나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곳 주인은 진보적 성향이 있는 것 같은데도 그의 가판대에는〈민족 의 관찰자〉가 한 부도 없다. 그뿐 아니라 나치당을 표방하는 출 판물은 단 한 가지도 전시되어 있지 않다. 9 독일 영토는 눈에 띄게 줄어든 것 같다. 주변 국가들은 과거와 비 32 33
  • 36. 슷해 보인다. 그런데 폴란드는 영토가 줄어들지 않았고 심지어는 구독일제국 영토까지도 자기들 영토로 만들었다! 참으로 기가 막 힐 노릇이지만 그런 얘길 어디다 할 수도 없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때나는한밤중깜깜한허공에대고한탄했다.“ 내가그렇 게 애를 썼는데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다니! 전쟁터에 흘린 우리 독일 국민의 피와 땀이 이렇게 배반당하다고 말다니!” 10 독일제국의 화폐였던 마르크는 이제 통용되지 않는다. 새 화폐 이름이 유로라나 뭐라나…. 전 유럽에서 통용되는 단일 화폐를 만들겠다는 구상은 사실 내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던 과제였는 데, 다른 사람이 이 일을 진행했나 보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생각 없는 무능한 사람이 강자 편에서 만들었겠지. 11 부분적으로 평화가 찾아온 것 같지만 국방군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한다. 예전의 국방군은 독일연방군이란 이름으로 불렸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군대였다. 그런 군대를 만들기 위해 내가 얼 마나 고민했었는지 사람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당시엔 전 방에서 40만이 넘는 군인이 피를 흘렸다. 1945년에 지금처럼 강 하고 다양한 장비를 갖춘 군대가 있었더라면 아이젠하워의 군 대를 바다로 처넣었을 수 있었을 테고, 스탈린의 무리도 몇 주 안에 꼬리를 내리게 했을 것이다. 그가 돌아왔다
  • 37. 결론은 지금은 익숙해져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편하긴 하지만 최소한 긴급한 위험이 도사리는 상황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정리를 하느라 거의 새벽녘에 잠이 들곤 했 다. 그러므로 몸이 에너지를 회복하려면 오전까지는 좀 느긋하게 쉬어야 한다. 하지만 가판대 주인은 아주 이른 아침에 가게 문을 여 는 생활을 한다. 그래서 주인이 도착하는 시간부터는 나도 더는 누 워 있을 수 없었다. 이 남자는 게다가 아침부터 엄청난 대화 욕구가 있는 사람이었다. 첫날 아침, 남자는 매점 안으로 박력 있게 들어오며 소리쳤다. “자, 총통 각하,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그는 내 대답을 들을 생각도 않고 문과 창을 모두 열어젖혔다. 갑자기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내 입에서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고, 눈이 부셔 눈을 꽉 감으면서 내 상황을 생각해내려고 애썼 다. 가장 실감나는 건 내가 있는 곳이 지하벙커는 아니라는 사실이 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얼간이는 당장 총으로 쏘라고 명령을 내렸 을지도 모른다. 나는 계속 화가 난 상태로 있기보다는, 이 바보가 아침부터 귀찮게 깨우는 것도 다 내가 잘되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 일어납시다!”남자가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이리 오세요. 저 좀 도와주세요!” 34 35
  • 38. 그러더니 남자는 매장 안쪽으로 들여다놓은 이동식 잡지 스탠드 들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남자는 그중 하나를 밖에 내놓았다. 한숨이 나올 만큼 괴로웠다. 그의 청을 들어주기엔 너무 피곤했 다. 그저께 난 제12군●을 옮기고 있었는데 오늘은 가판대를 옮겨야 한다니. 내 시선이 아래쪽에 있던《사냥과 개》라는 책에 꽂혔다. 그 책은 여러 권이 있었다. 나 자신이 그렇게 정열적인 사냥꾼은 아니 었지만, 아니 도리어 사냥에 대해서는 다소 비판적이었지만 이 순 간 난 잠시 동경에 빠져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희한한 일상에서 벗어나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자연으로 뛰어들고 싶다고 말이다. 자 연 속에서 생명체와 눈을 맞추고 세상의 흐름과 변화를 따라가고 싶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내 머릿속에서 잠깐 스쳐 간 생각일 뿐, 몇 분 지나지 않아 우리 두 사람은 장사 준비를 마쳤다. 남자는 접이 의자 두 개를 꺼내 오더니 가판대 앞 해가 드는 곳에 나란히 놓았다. 내게 자리를 권하면서 그는 셔츠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 냈다. 그러고는 톡톡 두드려서 몇 개비를 나오게 한 뒤 나를 향해 내밀었다. “담배안피웁니다.”고개를저으며내가말했다.“ 그래도고맙소.” ● 1945년 4월 베를린이 러시아군에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 히틀러는 이동 중이던 제12군에 방향 을 바꿔 소련군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일시적인 작전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전세를 바꾸지는 못 했다. 그가 돌아왔다
  • 39. 그는 한 가치를 집어 입에 물고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를 빨아들였다 다시 장난스럽게 내뿜으며 그가 말했다. “아, 이제 커피 마셔야겠군요! 선생님도 드시죠? 제 말은, 드시 고 싶으면요. 가루 커피밖에 없거든요.”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영국이 예나 지금이나 항로를 봉쇄했을 테고 이 문제에 대해 난 충분히 알고 있다. 내가 없는 동안 새로운 제국의 지도부에선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애를 많이 썼겠지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용감하고 고통을 잘 참는 독일 국민은 오래전부터 그래왔듯 대용품으로 견뎌야 하지 않았겠는가. 순간 굉장히 달았던, 어제의 그 뮈슬리바라는 게 생각났다. 훌륭한 독일 빵을 대신해 급 할 때 얼치기로 만든 것임에 틀림없겠지. 그리고 가엾은 가판대 주 인은 자기 손님 앞에서 미안해한다. 대용품 말고는 내놓을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참 가슴 아픈 일이다. 갑자기 동정심이 솟았다. “할수없지어쩌겠소, 착한양반이구려.”난남자를달랬다.“ 난 커피를 그리 즐기는 사람이 아니오. 물이나 한 잔 주면 고맙게 마시 겠소.” 너무 이상한 새로운 날의 첫 아침을 난 이렇게 담배냄새를 풍기 는 가판대 주인과 보냈다. 나를 위해 일할 기회를 찾아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남자와 말이다. 처음 몇 시간은 단순 노동자나 퇴직한 사 람들이 많이 왔다. 이 사람들은 짤막한 몇 마디로 담배나 조간신문 36 37
  • 40. 을 사 갔는데, 특히〈빌트〉●라는 이름의 신문이 인기가 많았다. 내 가 보기엔 나이가 좀 많은 사람이 이 신문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글씨가 다른 신문에 비해 큼지막해서인 듯했다. 누구의 발상인지 몰라도 아주 좋은 생각이다. 그 순간 난 우리 당의 탁월한 선전 장 관 괴벨스가 생각났다. 이런 조치라면 우리가 국민들로부터 더 열 렬한 환호를 받았을 텐데 말이다. 특히 나이 든 사람들에게 전쟁 소 식을 전하기에 좋았을 것이다. 글씨를 좀 더 크게 한다는 단순한 방 법으로 이렇게 큰 효과를 거둘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판대 앞에 있자니 신경에 거슬리는 일들이 가끔 눈에 띄었다. 특히 젊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기분 좋을 때 종종‘쿨하다’라거나 ‘짱이야’같은 소리가 들리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래도 나를 향한 표정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존경심 이 드러나기는 했다. “멋지지 않나요?”가판대 주인이 손님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똑같아서분간을못할정도라니까요, 안그래요?” “그러네요.”손님이 말했다. 20대 중반 정도의 노동자로 보이는 남자가신문을접으며말했다.“ 근데저렇게해도되는건가요?” “뭐가요?”가판대 주인이 물었다. ● 1952년에 창간된 타블로이드판 신문으로 유럽에서 가장 잘 팔리는 신문으로 알려졌다. 글보다 사 그가 돌아왔다 진이 많은 편이며 논란거리나 가십을 많이 다룬다.
  • 41. “아니, 제복이….” “독일 군복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러시오?”나는 약간 따지는 톤으로 화를 참으며 말했다. 손님이 웃었다. 어쩌면 날 달래기 위해 그러는 것 같았다. “군복은 정말 멋져요. 그래도 선생님은 직업 군인이라 그러시는 지는 모르지만, 공공장소에서 계속 군복을 입고 있으려면 특별허 가가 필요한 거 아닌가 해서요.” “그거 좋은 생각이겠군.”난 비꼬듯 대꾸했다. “제 말은 그냥”손님이 말했다. “페어파숭●때문에 말씀드린 건 데….” 그 손님이 악의가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닌 듯했다. 실제로 내 제복 페어파숭이 최고는 아니었으니까. “맞아요, 군복이 좀 지저분한 건 사실이오.”난 가볍게 고개를 끄 덕이며 인정했다. “그런데 군인의 제복이 지저분하다 해도 거짓말 을 일삼는 불성실한 외교관 나부랭이의 연미복보단 훨씬 명예스러 운 복장이오!” “군복을 입으면 안 될 이유는 뭐죠? 금지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가판대주인이손님에게심드렁하게물었다.“ 하켄크로이츠●●도없 는데 상관없죠.” 38 39 ●‘법적인문제’‘. 상태’라는뜻도있다. ●●‘갈고리 십자가’라는 뜻으로 나치즘의 상징.
  • 42. “그건또무슨말이오?”분노에찬목소리로내가말했다.“ 내가 어느 당 소속인지 당신들은 모르는 거요?” 손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곳을 떠났다. 손님이 가고 나 자 가판대 주인이 내게 자리에 좀 앉아보시라고 했다. “저 손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닙니다.”그가 공손하게 말을 꺼 냈다.“ 손님들은희한하게쳐다봅니다. 선생님이자신의직업을소 중하게 생각하신다는 건 저도 잘 압니다만, 그래도 혹시 다른 옷을 입을 생각은 없으신가요?” “아니, 그럼 나보고 내 인생과 내 일, 내 국민을 속여야 한다는 거요? 나한테 그런 식으로 요구하면 안 되오.”말하면서 난 의자에 서벌떡일어났다.“ 난말이오,이제복을내몸에마지막피한방 울이 남을 때까지 입을 거란 말이오.” “매번 이런 걸로 소동을 벌여야겠습니까?”가판대 주인이 약간 뚱한얼굴로말했다.“ 그게꼭제복이어서만은아닙니다.” “그럼 또 뭣 때문이란 말이오?” “지독한 냄새가 납니다. 어디에서 뭘 하다 오셨는지 모르지만 혹 시 주유소에서도 일을 하셨나요?” “말단 사병이라도 군복을 바꿀 수는 없소. 하물며 가장 높은 위 치에 있는 내가 그럴 수는 더더욱 없지. 아무 옷이나 걸치고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인간들처럼 하고 다니긴 싫소.” “그러시겠죠, 그래도 선생님 프로그램을 생각해보세요!” 그가 돌아왔다
  • 43. “프로그램이라고?” “선생님 프로그램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거 아닌가요?” “맞소.”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선생님을 알고 싶어서 가까이 갔는데 지 독한 냄새가 난다면 어떻겠어요? 선생님 옆에서 담배를 피우면 혹 시 불이 옮겨 붙을까 봐 겁이 나지 않겠어요?” “당신은 내 옆에서 담배를 피웠잖소.”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내 말은 이미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그의 논리에 동의할 수밖에 없 었기 때문이다. “전원래용기있는사람이라….”남자가웃었다.“ 자, 얼른집으 로 가서 다른 옷을 몇 벌 가져오시죠.” 또다시 아픈 문제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집 문제 말이다. “내가 말했지 않소, 지금 상황에선 그게 좀 어렵다고 말이오.” “아…. 그래도 선생님 옛 애인은 지금 일하고 있을 시간 아닌가 요? 아니면 장이라도 보러 나가겠죠.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해도 방법은 있지 않을까요?” “어, 그게….”머뭇거리며 말했다. “그게 문제가 있소. 집 말이 오….”이제 정말 제대로 위기상황에 빠졌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여분의 열쇠를 안 가지고 계시나요?”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천진난만한 표정을 보면서 이번엔 나도 웃 지 않을 수 없었다. 관저에 열쇠가 있었는지는 나도 알 길이 없다. 40 41
  • 44. “아니, 흠,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우리 관계는 어찌어찌해 서… 깨져… 버렸소.” “접근 금지령이라도 있으신가요?” “나도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길이 없소.”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그런데어쩌면그런쪽이긴하오.” “이런, 그럼 그 집에 갈 수는 없겠군요.”남자가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대체무슨일을하셨습니까?” “나도 모르겠소.”난 사실대로 말했다. “특정 시간에 대한 기억 이 안 나서….” “선생님이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 다.”남자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글쎄, 뭐….”난 손으로 정수리를 만지작거리며 모양을 다듬었 다.“ 물론난군인이니까말이오.” “좋습니다. 선생님은 군인이시죠.”남자가 말했다. “제가 제안 하나 더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좋은 분 같긴 한데 어디 홀린 것처럼 보입니다. 제 얘길 잘 들어보세요. 내일 옷 몇 벌을 가져다드릴게 요. 고마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요즘 들어 체중이 좀 늘어서 단추가 채워지지않거든요.”남자는자신의배를불만인듯바라봤다.“ 그 래도 선생님한테는 잘 맞을 거예요. 선생님이 괴링● 역할을 맡으신 게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나한테 당신 옷을 입으라는 얘기요?”난 혼란스러워 물었다. 그가 돌아왔다
  • 45. “옷이 세탁되는 동안만요. 가까운 데 세탁소가 있으니 제가 얼른 맡기고 오면 되죠.” “내 제복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순 없소!”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남자가 말하곤 다소 지친 듯 덧붙였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직접 세탁소로 가져가시면 되지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 죠? 그 제복을 세탁해야 한단 말이에요.” 마치 어린아이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서 좀 당황스러웠다. 하지 만 여기서 아무리 우겨봤자 내 옷이 깨끗해질 리 없다는 사실은 분 명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군화도 좀 곤란한데요.”남자가 말했다. “신발 사이즈가 어 떻게 되죠?” “43.”난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그럼제신발은너무작겠는걸요.”남자가말했다.“ 이건좀더 생각해보죠.” ● 헤르만 괴링. 독일의 군인 정치가로 히틀러의 집권에 큰 역할을 했으며 요직을 두루 거쳤다. 나치 돌격대 지휘관이자 게슈타포 창설자이며 강제수용소를 만들었다. 은퇴 후 사치와 향락을 즐기느 라 엄청나게 뚱뚱해졌다. 42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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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7. 한정판 특별 부록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베스트셀러 작가의 스페셜 만화 그가 돌아왔다 in 서울 글·그림 김태권 김태권 작가의 기발한 아이디어 독일이 아닌 서울에서 깨어난 히틀러의 흥미진진한 그 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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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 얼마 전《히틀러의 성공시대》라는 만화를 그렸습니다. 정치 초년생이던‘듣 보잡’히틀러가 어떻게 민주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집권에 성공하는가, 그 과정을 되짚는 작업이었지요. 자료를 수집하려고 베를린에 갔어요. 거기서 만난 지인이 어떤 책 이야기를 해주셨답니다.“ 안 그래도 히틀러 소설이 독 일에 나왔는데. 히틀러가 지금 되살아나서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래.”그 책 이 바로 이 책, 《그가 돌아왔다(Er ist wieder da)》였어요. 비슷한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다룬 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것 참 인연이다 싶었 죠. 읽어봐야지 마음먹었지만 얼마 후 나는 돌아와 만화 연재를 시작했고, 서울의 바쁜 일상에 묻혀 지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인연이 있었던 걸까요. 이 재미있는 소설을 국내에 소개하는 일에 나도 작은 부분이나마 거들게 되었거든요. 히틀러가 서울에 나타나는 이야기를 작은 만화로 꾸며보았습니다. 원작 소설이 끝나는 지점과 비슷하 게 한국의 히틀러 이야기도 멈추지요.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서울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을까요? 당신의 상상으로 채워주 세요. 제2, 제3의 히틀러를 막을 방법 역시 당신이 상상해주셔야 한답니다. 민주주의란 제도는 뜻밖에도 무척 여린 면이 있더군요. “생각이 다른 사람 을 함부로 때려잡지 않는다”는 민주주의 최고의 미덕이 동시에 민주주의의 급소이기도 하거든요. “나는 민주주의를 때려 부술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너는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므로 나를 때려잡을 수 없다”는 궤변을 앞세운 사람들이 꼭 나타나더라고요. “민주주의는 사상의 자유가 있으므로, 남의 사상의 자유를 박탈하자는 사상을 가질 자유가 나에겐 있다”는 사람을 어 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다른 나라들을 괴롭히던 이 골치 아픈 문제가, 이 제 우리 사회에도 등장하는 때 같아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태권(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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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3. 김태권(만화가)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와《장정일 삼국지》일러스트로 데뷔했다. 서 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 문학을 전공 하고있다.《 히틀러의성공시대》를한겨레신문에서호평현재했으며,《 르 네상스 미술 이야기》《히틀러의 성공시대》등 다수의 작품을 출간했다.
  • 84. 그가 돌아왔다 제1판 1쇄 인쇄 | 2014년 10월 15일 제1판 1쇄 발행 | 2014년 10월 23일 지은이 | 티무르 베르메스 옮긴이 | 송경은 펴낸이 | 고광철 펴낸곳 | 한국경제신문 한경BP 편집주간 | 전준석 편집 | 송인국·이혜영 기획 | 김건희·이지혜 홍보 | 정명찬·이진화 마케팅 | 배한일·김규형 디자인 | 김홍신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청파로 463 기획출판팀 | 02-3604-553∼6 영업마케팅팀 | 02-3604-595, 583 FAX | 02-3604-599 H | http://bp.hankyung.com E | bp@hankyung.com T | @hankbp F | www.facebook.com/hankyungbp 등록 | 제 2-315(1967. 5. 15) ISBN 978-89-475-2984-6 03850 책값은 뒤표지에 있습니다. 잘못 만들어진 책은 구입처에서 바꿔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