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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아무리 큰 불행이 닥치더라도 결코 굴하지 않고 오히려 웃는 얼
굴로 기어오르는 것이 이 소년의 특수한 체질이기도 하지만, 우선 '불
행'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시 한 번 되풀이하지만 카미조 토우마는 불행한 인간이다.
슈퍼마켓 특별할인 시간을 겨우 몇 분 차이로 놓친다거나, 편의점에서
산 만화잡지의 한가운데 페이지가 와그작 구겨져 있는 것은 당연하고,
스크래치 카드를 긁으면 나오는 것은 전부 꽝, 아이스크르미 막대나
주스 자판기에 붙어 있는 액정화면에서도 당첨이 나오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다시 되풀이하지만 카미조 토우마는 불행한 인간이다.
"음ㅡ, 방문자 수 넘버스의 결과 당신의 지정숫자는 일등상, 멋지게
당첨되셨습니다! 상품은 북부 이탈리아 5박 7일 페어 여행, 축하드립
니다!!"
뭐냐, 이건. 평범한 고등학생 카미조 토우마는 딸랑딸랑 울려 퍼지는
핸드벨 소리를 들으면서 오히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멍하니 그 목소
리를 들었다. 그의 검고 뾰족뾰족한 머리카락이 바람을 맞아 멍청하게
흔들린다.
여기는 도쿄 서부를 차지하고 있는 학원도시. 시기는 초거대규모 운동
회 대패성제의 마지막 날. 그는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큰길가의 인도
한 모퉁이에 서 있고, 그 눈앞에는 베니어판과 각목과 못으로 만든,
어느 모로 보나 손으로 만든 듯한 가판대가 있다. 가판대를 맡고 있는
것은 키리가오카 여학교인가 하는 아가씨 학교의 여고생이다. 이곳은
학생들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방문자수 넘버스' 행사장이다.
방식은 간단하다.
돈을 내고 종이로 만든 전용 카드를 산다. 거기에 대패성제의 총 방문
자수를 예상해서 적어넣고 접수대에 건넨다. 그 후에는 실제 기록에
가까운 사람부터 순위가 결정되는 것이다.
당연히 TV 등에서는 '드디어 천만 명 돌파!'라는 등 대략적인 정보가
나오기 때문에 기간 후반에 하는 편이 맞히기 쉽다. 그러나 같은 숫자
인 경우에는 먼저 제출한 사람이 우선이라는 이점도 있다.
가판대를 맡고 있던 반소매 티셔츠에 빨간 바지를 입은 스포츠 소녀는
가판대 카운터 밑에 있는 물건 넣는 공간에서 설계도라도 들어 있을
것 같은 큼지막한 봉투를 부스럭거리며 꺼내더니,
"원래는 학생용이 아니지만 대패성제가 끝난 후의 대체휴일 기간을 이
용해서 참가하는 여행이거든요."
소녀는 생긋 웃는 영업용 얼굴로,
"여행에 관한 자세한 일정, 관광 예정, 필요한 서류 등은 전부 여기
있으니까 나중에 훑어 보세요. 그리고 질문이 있는 경우에는 우리 학
교가 아니라 여행 대리점 쪽으로 문의해주세요. 자, 자, 받으세요, 받
으세요."
거대한 봉투가 내밀어졌지만 카미조 토우마는 지금 자신에게 닥친 이
사태에 터무니없는 함정이 있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었다.
카미조는 양손을 깍지끼고 으ㅡ음 하고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고,
"저어ㅡ, 좀 물어봐도 되나요?"
"여행에 관한 자세한 질문에는 대답해드리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래
도 괜찮으시다면."
"일등상이라면 그 일등상이겠죠?"
"질문의 뜻을 모르겠는데요."
"제일 운 좋은 사람이 당첨되는 그 상 맞죠?!"
"저기, 그만 가봐도 될까요?"
"아니, 기다려! 이건 북부 이탈리야 여행이죠?"
"이 정도라면 대답해드릴 수 있으니까 대답하겠지만, 서류에 그렇게
적혀 있을 텐데요."
"정신을 차려 보니 비행기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과학종교의 사설 공항
으로 향하고 있다거나 하는 처절한 전개는 아니겠죠?"
"...아, 알았다. 혹시 해외여행은 처음인가요?"
기가 막힌다기보다 오히려 뭔가 상냥한 눈길을 받고 말았다. 아무래도
키리가오카 아가씨의 시점에서는, 카미조가 아직 보지 못한 외국의 풍
경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불쌍한 사람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어쨌든 이등상 이후도 발표해야 하니까 질문은 여행대리점 쪽에 해주
세요."
"앗, 잠깐! 아니, 나도 알아. 십중팔구 그런 돌발 사태는 일어나지 않
는다는 것 정도는! 하지만 뭔가 있을 것 같잖아? 비행기가 갑자기 유
괴범에게 납치된다거나, 눈을 떠보니 그곳은 남극 한가운데였다거나!
나도 알아, 지나친 생각이라는 것 정도는 하지만 뭔가 함정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거 정말 페어로 북부 이탈리아에 갈 수 있는 거
겠지?! 이봐!!"
일등상이라니 이런 걸 받는 게 더 이상하다.
그러니까 어차피 뭔가 놓친 게 있을 거라고 카미조는 생각하고 있었다
.
그리고 그 놓친 게 있으니까 여행은 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
다.
"맞다, 여권이 없잖아!"
카미조는 학생 기숙사의 자기 방에서 외쳤다.
그 말을 들은 인덱스가 바닥 위를 데굴데굴 구르면서 카미조를 보았다
. 허리까지 오는 긴 은발에 초록색 눈을 한 하얀 피부의 얼너댓 살 정
도의 소녀지만, 대패성제 기간 중에는 계속 땡볕 아래에 있었기 때문
에 지금은 조금 볕에 그을렸다. 그래도 그녀는 색소가 옅은 백인이라
서 피부가 갈색으로 변하지는 않고 살짝 붉은 기가 도는 상태였다. 덧
붙여 발하자면 복장은 찻잔 같은 하얀 바탕에 금실로 자수가 되어 있
는 수도복에 안전핀이 가득 달린, 상당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
"토우마, 토우마. '여권'이 뭐야?"
평소에 비해 말투가 느릿한 것은 인덱스가 보기 드물게 배가 부른 상
태이기 때문이다. 폐회식이 끝난 후 학급 뒤풀이에 난입해, 즉시 모든
사람들의 환영을 받은 인덱스는 이제는 그런 직업의 프로가 된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만큼 많이, 빨리먹고 온 것이다.
카미조는 인덱스 쪽을 보지 않고 거대한 봉투를 뜯어 그 안에서 갖가
지 색깔의 서류와 팸플릿을 꺼내면서,
"여권이라는 건 해외여행에 필요한 물건이야. 아마 신청하고 나서 발
행되기까지 한 달 정도 걸리지 않았던가?"
영국에서 일본으로 온 인덱스가 왜 여권의 존재를 모르는 것일까 하고
카미조는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녀는 본래 일본의 헌법은 고사
하고 국제법조차 통용되지 않는 마술 세계의 주민이다.
하늘을 나는 양탄자라도 타고 초저공비행으로 제공 레이더망의 눈을
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괜찮은 거냐, 자위대 방공성능. 카미조는 대강
생각하면서 거대한 봉투에 들어 있던 각종 자료를 유리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아무래도 여행 계획을 보면 단체 코스 여행의 일종인 듯. 북부 이탈리
아의 공항에서 여행자들이 집합하면 그때부터 단체행동이 시작되는 모
양이다. 다시 말해서 일정이 처음부터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다.
현지 집합 예정일은 9월 27일.
앞으로 이틀밖에 안 남았다.
대패성제가 끝난 후에는 업자들이 설비를 철거하고 경비 상태를 바꾸
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는 며칠간 임시 휴일이 생긴다. 아마 거기에 맞
춘 여행 계획을 억지로 짜내는 바람에 이런 급박한 일정이 된 거겠지
만ㅡ 이 상태에서 여권을 신청해봐야, 만에 하나라도 늦지 않게 나올
리가 없었다.
"......, 그것 봐, 이럴 줄 알았어. 정말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분하
지도 않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각오는 되어 있었다고ㅡ!!"
카미조는 거대한 봉투를 집어던지고 마룻받가 위에 털썩 쓰러져 데굴
데굴데굴데굴데굴데굴ㅡ!! 하고 초고속으로 좌우로 구르기 시작했다.
분한 마음을 잊기 위한 행위였지만 그의 오른쪽 장딴지가 딱! 하고 유
리 테이블의 다리에 호되게 격돌했다. 우오오오오!! 하고 격투가 같은
비명을 지르자, 가까운 곳에 웅크리고 있던 삼색고양이가 흠칫 떨며
도망치듯이 침대로 뛰어오르더니, 또 거기에서 벽에 걸려 있는 옷에
발톱을 박으며 옷장 위로 뛰어 이동한다.
그때 삼색고양이의 뒷다리가 걷어찼는지, 퍼석퍼석한 먼지 뭉치와 함
께 옷장 위쪽에서 뭔가가 누워 있는 카미조의 얼굴에 똑바로 떨어졌다
.
"우왓! 고양이까지 날 우습게 봤어!! 그런데 이게 뭐야?!"
카미조는 자신의 이마 언저리를 직격한 물체를 알아내기 위해 오른손
으로 움켜쥐었다. 쓰러진 자세 그대로 얼굴 앞으로 가져간다. 드라마
에서 본 경찰수첩을 조금 크게 만든 정도의, 빨간색 합성피혁으로 표
지를 씌운 작은 노트 같은 것이다. 표지에는 '일본국 여권'이라고 금
박으로 인쇄가 되어 있다.
여권이었다.
카미조 토우마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어, 어째서? 어째서 내 여권이 이런 곳에?!"
교과서 영어가 이미 낙제점일 정도로 해외문화와 인연이 없는 카미조
다. 신경이 쓰여서 안을 팔랑팔랑 넘겨보니 아무래도 몇 번 사이판이
나 괌에 갔던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을 찍혀 있는 스탬프로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가족끼리 여행이라도 갔던 걸까?
"우선 여권은 어떻게 되긴 했는데... 왠지 기분 나쁘네."
이럴 때 카미조 토우마는 기억상실이라서 자세한 사정을 알 수가 없다
. 게다가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감추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상의
할 수도 없다. 카미조는 인덱스 쪽을 힐끗 보았지만 그녀는 카미조가
자신의 여권의 존재에 놀라고 있다는 사실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
는 것 같다. 애초에 여권이라는 물품 자체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도 모르니 판단할 수가 없는 모양이라고, 카미조는 대강 생각하기로
했다.
"앗, 그렇다면 인덱스, 역시 넌 여권이 없는 거야?"
"'여권'이라니, 토우마가 갖고 있는 그거? 그럼 난 없을지도."
"그럼 결국 여행은 무리잖아. 너 혼자 여기에 남았다간 사흘이면 움직
이지 못하게 될 것 같은데."
"음, 그 말투는 뭐지? 하지만 없는 건 없어."
"...아니, 인덱스 씨. 아까부터 엄청나게 냉정하신데, 이탈리아거든요
? 해외여행이거든요?! 오기로라도 가고 싶어지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
잖아!!"
"토우마, 토우마."
인덱스는 새삼스럽게 뭘, 그런 눈으로 이쪽을 본 후,
"애초에 나한테는 학원도시도 외국이거든?"
"우웃?! 다가가는 것조차 은근슬쩍 거부당했어!!"
카미조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하얀 소녀를 보며,
"......, 어라? 그럼 너한테는 매일이 나랑 둘이서 해외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 거네?"
쾅쾅!! 하고 인덱스가 드러누운 채고 갑자기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그녀는 기세 좋게 얼굴을 들더니,
"무, 무무무슨, 갑자기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거야, 토우마?! 나, 나
는 경건한 수녀님이니까 그렇게 오해를 살 만한 말을 하면 곤란할지도
!!"
"어, 하지만."
"어, 어쨌든 토우마가 갖고 있는 것 같은 '여권'은 없어! 비슷한 거라
면 있지만."
"비슷한 거?"
"응, 이런 거."
말하면서 수도복 소매를 부스럭부스럭 뒤져 꺼낸 것은 영국식 여권이
었다. 카미조는 디자인이 조금 다른 해외의 여권을 보고 감탄했다.
"하, 하진 그렇겠지. 아무리 '네세사리우스(필요악의 교회)'라도 여행
을 갈 때에는 비행기 정도는 이용할 테니까! 다행이다, 다행이야. 네
가 실은 낙타를 현지조달해서 실크로드를 건너온 게 아닐까 하고 카미
조 씨는 살짝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까부터 걸핏하면 날 바보취급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
런데 토우마, 그 '여권'이라는 건 어떻게 쓰는 거야?"
"자, 잠깐만, 인덱스. 네 여권을 보여ㅡ 이게 뭐야?! 어째서 네건 안
이 전부 새거지?! 최소한 영국에서 나올 때 스탬프가 한 개 정도는 찍
혔을 텐데!!"
게다가 명의는 있는 그대로 Index Librorun Prohibitorum이었다.
무시무시한 국가종교, 라고 말하며 전율하는 토우마를 아랑곳하지 않
고 소녀는 지루하다는 듯한 하품과 함께,
"토우마, 토우마. 여기에는 그런 자동서기효과 같은 건 딸려 있을 리
가 없을지도."
"이 자식, 모처럼 '네세사리우스'에서 발행해준 여권을 완전히 무시하
는 거야?! 역시 너 실크로드를 경유해서 온 거 아니야?!!"
"토우마, 아까부터 괜히 흥분하는 것 같은데. 결국 그게 있으면 나도
토우마랑 같이 여행을 떠나도... 괜찮은, 거야?"
인덱스는 다소 가슴이 설레는 듯이 그렇게 물었다.
......, 어라? 하고 카미조는 거기에서 멍청한 얼굴을 했다.
지금으로서는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대로 북부 이탈리아 5박 7일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카미조 토우마는 불행한 인간일 텐데,
이런 일과는 세상에서 제일 인연이 없었을 텐데.
그러저러해서 다음 날 아침.
카미조와 인덱스는 몸속에 여행용 나노디바이스(발신기)를 넣고 학원
도시의 제23학구ㅡ 한 학구 전체가 항공, 우주 개발을 위해 준비된 특
별학구에 도착했다.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학괴 같은 것이 열릴 때
학원도시 바깥에서 오는 손님들을 위해 만들어진 국제 공항이다.
오히려 쓸모없다고 느껴질 만큼 드넓은 공항 로비는 벽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고 활주로 쪽에서 들어오는 햇빛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대패성
제 기간에는 그야말로 출퇴근길 러시아워처러머 혼잡했다고 뉴스에서
수군거렸던 로비였지만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그럭저럭
몰려 있는 정도다. 하기야 이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휴일 기간에 며칠 준비를 한 모양이지만. 소란스럽게 붐비는 로비에
카미조가 드르륵드르륵 끌고 다니는 슈트케이스 바퀴 소리가 빨려 들
어간다.
카미조의 옷차림은 평소와 똑같은 반소매 티셔츠에 카키색 바지였지만
지갑용 체인이 주머니에서 나와 바지 벨트에 걸려 있다거나 장딴지에
붕대를 감고 바지 안쪽에 예비용 지갑을 숨겨두는 등, 이야기만은 들
은 적이 있는 막연한 해외에 대한 불안감이 한껏 나타나 있었다. 게다
가 어중간하게 가느다란 체인은 지갑이 있는 장소를 다른 사람에게 알
려줄 뿐 당장이라도 쉽게 끊어낼 수 있을 것 같았고, 장딴지의 예비용
지갑은 바지 자락을 올려도 꺼내기 어려운 위치인 주제에 걷다 보면
쑥 빠질 것 같았다. 한편 지갑을 이렇게 경계하고 있으면서 여권은 반
대쪽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찔러넣은 것을 보면, 어느 모로 보나 해외
여행에 익숙하지 않다는 느낌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슈드케이스는 카미조의 손에 있는 하나뿐이고 인덱스
는 빈손이었다. 속옷이나 잠옷은 몇 종류 갖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수
도복 한 벌밖에 사복이 없는 그녀의 짐은 전부 카미조의 슈트케이스
안에 들어갔던 것이다. 또 출발하기 전에 인덱스는 얼굴을 붉히며 "이
것도 짐에 넣어줘" 하고 작은 등나무 케이스를 내밀었다. 내용물은 뭘
까 하고 생각했지만 입 밖에 냈다간 물리적으로 물어뜯길 것 같아서
얌전히 있기로 한 카미조 토우마다.
그 외에 짐이라면, 그녀는 늘 양손에 삼색고양이를 안고 다니지만 그
고양이는 현재 코모에 선생님의 아파트에 대출 중이다. 그녀는 "카,
카미조가 해외여행? 정말 괜찮은 건가요?! 아니 그, 여러 가지 의미로
!! 외국에는 선생님이 없다고요!" 하며 실례되는 말을 했지만 쓸데없
는 참견이다.
카미조는 로비 안쪽에 있는 출입국 관리 게이트를 바라보면서,
"어라? ...두고 온 물건은 없겠지. 지갑 있고, 여권 있고, 비행기 표
있고, 여행에 필요한 서류 있고, 갈아입을 옷 있고, 드라이어 있고,
휴대전화 있고, 여차할 때 쓸 돈도 은행에서 찾아왔고... 응, 괜찮,
겠지? 여기에서 '불행해!'로 연결되는 건망증 전개는 없을 거야.
"토우마, 토우마. 아까부터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야?"
들뜬 얼굴로 묻는 인덱스는 가슴속의 즐거움이 그대로 밖으로 흘러넘
치는 것 같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다 보니 카미조는 자신의 떨떠름
한 마음이 바보처럼 생각되었다.
"...그렇, 지. 아아, 즐겨도 되는 거겠지! 항상 불행하다 불행하다 하
니까 일이 이상하게 꼬였던 거지. 나도 가끔은 행복해도 되는 걸거야!
이렇게 의미 있는 휴가는 좀처럼 없을 테니까! 좋았어, 북부 이탈리아
5박 7일 여행, 오랜만의 오랜만에 행복한 기분을 만끽해야지!!"
그제아 카미조는 후련한 듯 상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인덱
스도 생긋 웃으며,
"그래야지, 토우마. 긍정적인 마음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면 말은 좀
모르더라도 의사는 통할지도."
"뭐어어!! 외국어?! 그걸 잊고 있었어!!"
갑자기 타격을 받은 카미조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엎어질 뻔 했다.
어쨌더나 그는 영어 쪽지시험이 22점이라는 1인 쇄국제도 실시 중. 그
런 자신을 떠올린 카미조는 머뭇머뭇 인덱스에게 물어보았다.
"저어, 인덱스 씨."
"왜, 토우마?"
"당신은 이탈리아 어를 할 줄 아십니까?"
"할 줄 아는데, 토우마. 말투가 올소라 같은데 왜 그러는 거야?"
"이탈리아 어라는 것은 이탈리아에서 사용되는 그 이탈리아 어를 말하
는 건가요?"
"토우마, 갑자기 왜 그렇게 지나치게 당연한 소릴 하는 거야? 이탈리
아 문법 중에서 잘 모르는 게 있으면 가르쳐줄 수도 있는데."
"......, 그럼 외람되지만, 우선은 이탈리아 어로 '네'와 '아니요'부
터."
"토우마, 토우마. 실례인 줄 알면서 말하는 건데 이탈리아까지 뭘하러
갈 생각이야?"
하지만 모르는 건 모르는 거잖아! 하고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공항 로
비 바닥에 엎어지는 카미조를 보고, 인덱스는 어느 모로 보나 맥이 빠
졌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저기, 토우마. 요즘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최소한 3개 국
어 정도는 할 수 있도록 해두는 편이 좋을지도."
"이런 이상한 수녀님한테서 요즘이니 최소한이니 하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우선 그쪽에 도착하면 어쨌든 너한테 마구 의지하겠다고 여기
에서 맹세해두지! 왜냐하면 '예'와 '아니요'를 이미 모르니까!!"
"뭐, 통역이 되어주는 건 별로 상관은 없는데. 하지만 토우마, 좋은
기회니까 기왕이면 현지에서 직접 말을 배우는 게 더 빠르지 않을..."
"그건 기억력이 좋은 사람의 이론이잖아! 나 같은 건 벼락치기로 도전
해봤자 분명히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날 게 뻔하다고!!"
"또 그런 과장된 말을..."
"그 어이없다는 얼굴도 상식적으로 여러 개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
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아니, 인덱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본어도 술술 하잖아. 그럼 이탈리아 어도 그렇게 잘하는 건가..."
"일단, 나는 이래 봬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10만3천 권을 읽어야
하는 몸이거든? 이탈리아 어 정도는 간단하지. 어려운 건 체계화되어
있지 않은 언어권 정도일지도. 노래 같은 감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게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 그런 건 실제의 리듬이나 음계가 지워진 채
어중간한 가사만 석판에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노래하는
방법을 따로 배워야 하거든. 하지만 그런 건 일부 섬나라나 밀림 문화
권에만 있는 거니까."
"...무슨 소리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의지해도 괜찮다는
겁니까?"
"응. 평소에는 토우마가 끌고 다녀주지만 이번에는 내가 이끌어줄 차
례잖아. 내가 얼마든지 지원해줄 테니까 토우마는 트러블을 두려워하
지 말고 실컷 즐기면 돼."
그렇게 말하며 당당하게 빈약한 가슴을 편 수녀님은 카미조 토우마의
눈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성녀님처럼 보였다. 구원이란 정말 있었구나,
인덱스가 이렇게까지 단언하니까 괜찮을 거야, 좋았어. 실컷 즐기는
거다, 북부 이타릴아 5박 7일 여행! 이라는 듯이 카미조는 슈트케이스
바퀴를 기세 좋게 굴리며 출입국 관리 게이트로 향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가이드님!!"
"맡겨둬, 토우마. 그쪽에 있는 가게에서는 들어가면 우선 점원에게 인
사를 해야 해."
"가이드님, 상대 쪽에서 말을 거는 게 아닌가요?"
"굳이 말하자면 '손님과 점원이 같이 물건을 찾는다'는 느낌이거든.
격의가 없는 거지. 흐흥, 이 정도는 알아두지 않으면 해외에서는 생활
할 수 없ㅡ."
삐익ㅡ!
그때 게이트의 금속탐지기가 이상한 소리를 냈고, 갑자기 체격이 탄탄
한 담당자들이 양쪽에서 인덱스를 붙들었다.
음? 하고 인덱스는 의아한 듯이 눈썹을 찌푸린다.
가이드님한테 무슨 짓이냐, 이런 눈빛이다.
"음, 그러니까... 뭡니까. 온몸에 달려 있는 그 수많은 안전핀은?"
한편 수상한 사람을 구속한 그들은 관자놀이를 떨며 매우 낮은 목소리
로 물었다.
"와앗! 듣고 보니 겉으로 보기에는 흉기가 가득!! 하지만 아니에요,
이걸 떼어내면 수도복은 너덜너덜 조각조각이 나버리거든요!!"
일본을 떠나기도 전부터 이미 인덱스의 말썽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하는
카미조 토우마. 한편 인덱스 쪽은 왜 안전핀이 안 되는지, 애초에 게
이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 것은 무엇 때문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역시 이 녀석한테 지원을 부탁하는 건 좀 불안하지 않나ㅡ?! 카미조는
등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담당자에게 물어본다.
"아니, 이 옷이 위험한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떡하죠? 비행
기가 떠나려면 이제 30분 남았는데요..."
"그렇군요... 일단 우리 공항 내에 쇼핑몰이 있으니까 그쪽에서 제대
로 된 옷을 구입하실 수밖에."
어디몰이라니 그게 어디야?! 카미조는 게이트 근처의 벽에 붙어 있던
안내 패널을 훑어본다. 그러자,
『쇼핑구역ㅡ 여기에서 1.5킬로미터.』
"멀어!! 제23학구의 공항은 틀림없이 부지를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하지만 그 외에는 비행기를 놓치거나 낙타를 타고 실크로드를
가는 수밖에 없어! 제길, 뛰자, 인덱스! 좀 더 제대로 된 옷이 아니면
비행기에 못 탄대!!"
"어, 뭐야, 토우마. ...혹시 옷을 사주는 거야?!"
"빌어먹을, 반짝반짝 빛나는 그 두 눈이 한없이 짜증난다! 이런 곳에
서 쓸데없이 돈을 쓰게 되다니, 역시 이번에도 불행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ㅡ!!"
한탄하면서도 카미조는 소녀의 손을 잡고 허둥지둥 공항의 기나긴 연
결통로를 달린다.
이륙까지 앞으로 28분.
슬슬 여객기 엔진도 알맞게 데워져 있을 무렵이었다.
제1장 키오자의 거리 Il_Vento_di_Chioggia
- 1 -
북부 이탈리아, 특히 베네토 주의 현관이라면 마르코 폴로 국제공항이
유명하다.
아드리아 해에 떠 있는 '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베네치아에서는 맞은
편 기슭에 해당하는 이탈리아 본토 연안에 있는 공항으로, 용도도 관
광객 수송이 대부분이다. 여기에서 버스나 철도를 이용해 유일한 육로
인 전체 길이 4킬뢰터 전후의 리베르타 다리를 지나 본토로 들어가거
나, 아니면 맞은편 해안에서 보트를 이용한 해로로 들어가는 것으로
관광객의 흐름이크게 나뉜다.
베네치아 본토 이외에도 비첸차, 파도바, 바사노델그라파, 벨루노 등
의 관광지로 가는 루트도 있다. 어쨌거나 관광객이 해외에서 북동부
이탈리아로 가려면 우선은 이 공항을 거쳐야 하고, 카미조와 인덱스를
태운 여객기도 이곳에 착륙했다. 본래 이 공항은 일본 직항편은 운행
되지 않고 있지만 학원도시는 예외인 모양이다.
출입국 관리 게이트에서 외국인 직원이 던진 질문을 애드립 이탈리아
어로 넘기기도 하고, 벨트 컨베이어 앞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 슈트케이스에 식은땀을 흘리기도 하는 등 여러 가
지 드라마가 전개되었지만, 그래도 일단 공항에서 밖으로 나가는 데에
는 성공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현재의 인덱스는 학원도시의 공항에서 산 간소한 블
라우스와 치마에서 다시 원래의 하얀 수도복으로 돌아가 있었다. 안전
핀을 갖고 들어갈 수 없어서 기내에서는 분해되어 있던 천 조각을 마
르코 폴로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안전핀을 현지에서 조달해 다시
조합한 것이다. 이탈리아까지 와서 제일 먼저 여자애가 조르는 것이
수십 개의 안전핀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청소년으로서 어떻게 생각해
야 할까, 카미조는 조금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무사히 공항을 나와 외국 땅을 밟은 것은 사실.
이제는 다른 비행기로 올 단체여행 멤버들과 만나 현지 가이드의 안내
를 받으며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북부 이탈리아의 핵심이라면 물론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된 베네치아 본섬이겠지만 그 이외에도 볼 곳은
많다. 실은 밤에도 자지 않고 팸플릿을 몇 번이나 훑어 보았기 때문에
카미조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베네치아라면 산마르코 광장이랑 두칼레 궁전이랑 종루랑 아카데미아
다리랑 자연사박물관이랑 해양역사박물관이랑 세계 제일의 페니체 가
극장! 선물로는 유리공예품이랑 가면! 베네치아에서 벗어나도 갈릴레
오가 교편을 잡은 도시 등 볼 만한 곳이 가득! 전부 가이드북의 광고
지만 말이야! 하지만 지금부터 전부 진짜 경험과 추억이 되는 거야!
와하하하핫ㅡ!! 굉장해, 굉장해, 여행 너무 기대된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안 오네..., 토우마."
"아아, 가이드는 고사하고 누구 한 사람 안 모이는데..."
집합시각에서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다.
가고 싶은 곳은 여러 군데 있어도 가이드에 따라 관광할 수 있는 곳이
다르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가장 첫 번째 시점에서 고꾸라질 줄이
야.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공항 앞에 있는 버스터미널이다. 버스터미널이
라고 해도 거의 실내 같은 곳이어서, 공항의 일부인 천장과 기둥이 질
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이 일대는 태양빛이 아니라 천장의 네모난 형
광등 불빛을 받고 있다. 땅에서 전장까지 전부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
어서 조금도 '바깥'이라는느낌은 들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빛을 받
아들이는 방식을 손을 본 입체 주차장처럼 보인다.
아까부터 눈앞을 그냥 기나쳐 가는 버스들은 차체가 파란색이나 오렌
지색 등 몇 가지 패턴으로 나뉘어 있고, 아무래도 운행 노선이나 제도
에 차이가 있는 모양이라고 카미조는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
나 아무래도 노선표를 쉽사리 읽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렇군. 올소라가 버스 타는 방법을 몰라서 헤매고 있었던 건 이래서
였나...'
카미조는 약간 템포가 느린 전직 로마 정교 수녀의 웃는 얼굴을 떠울
리면서 묘하게 납득했다. 한편 인덱스는 더위에 지쳤는지, 벌써 축 늘
어지기 시작했다.
유럽은 평균적인 경도로 말하자면 훗카이도와 비슷한 정도이고, 일본
보다 습도가 낮기 때문에 쾌적하게 지낼 수 있다... 는 이야기가 가이
드북에 있었지만 아무래도 예외란 어디에나 있는 건가보다.
공항 바로 옆은 아드리아 해다. 그쪽에서 바다 냄새를 머금은 따뜻한
바람이 흘러들어오고, 그것이 끊임없이 오가는 버스의 배기가스와 섞
여 소용돌이치고 있다. 기온 자체는 쾌적할지도 모르지만 오래 있으면
파도에 바위가 깎이듯이 마음이 지칠 것만 같다. 주위를 오가는 서유
럽계 관광객이나 비즈니스맨 같은 사람들도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손수
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곤 한다.
"토우마ㅡ, 혹시 우리는 버려진 거야?"
"제길ㅡ, 시간에는 맞춰 왔는데... 정말이지, 전화도 연결되지 않고.
이거 우리끼리 우선 움직일 수밖에 없을지도."
학원도시에서 만든 것이라서인지 전화회사가 노력한 성과인지 카미조
의 휴대전화 자체는 이탈리아에서도 쓸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사전
에 가르쳐준 전화번호로 걸어봐도 일본어로 녹음된 안내방송밖에 돌아
오지 않았다. 상대방이 받지 않는 것이다. 멤버는 모이지 않고 가이드
도 오지 않는다니 말도 안 된다고 카미조는 생각했다. 그러나 말도 안
된다고 해서 이대로 비행기를 타고 되돌아간다면 개그도 못 된다. 일
단 여행 일정이나 호텔방 등은 확보되어 있으니,
"이쪽에는 해외에 강할 것 같은 수녀가 한 명 있으니까 괜찮을까? 어
쨌든 우두커니 서 있어 봐야 소용없으니까 짐만이라도 호텔에 놔두러
가자. 묵을 곳은 다 같으니까 그쪽에서 가이드와 합류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 아우우... 토우마, 아직 못 쉬는 거야? 난 여기에 온 지 5초 만
에 흐물흐물일지도."
"걱정하지 마, 나도 여덟 걸음 만에 흐물흐물이야. 하지만 어쨌든 호
텔까지 가면 침대도, 에어컨도 있을 테니 좀 쉬고 나면 마음대로 관광
을 해버리자고."
"우우, 그 정도로는 기분이 풀리지 않아. 난 이탈리아 명물 젤라토가
없으면 부활할 수 없을지도, 먹어본 적은 없지만 유명한 걸 보면 틀림
없이 맛있을 거야."
"그런거냐. 뭐, 관광이라면 유명한 데를 공략하는 게 기본인가?"
"응. 말난 김에 베네치아 명물은 오징어먹물 젤라토."
"...한 가지 묻겠는데, 정말 유명한 거 맞아?"
어딘가 계절상품 냄새를 풍기는 요청을 들으며서 카미조는 기둥에 붙
어 있던 네모난 간판 모양의 운행표를 쳐다보았다. 당장 최초의 관문
은 어느 버스를 타느냐 하는 것이다.
"ㅡ, 고민해봐야 소용없고, 내 힘으로 읽는 건 완전히 포기하고... 인
덱스! 미안하지만 호텔까지가려면 어떤 버스를 타야 되는지 좀 읽어줄
래?"
"어, 응. 그러지, 뭐ㅡ."
기둥의 간판으로 터벅터벅 다가가는 인덱스를 보고, 정말 이 녀석과
같이 와서 다행이라고 카미조는 살며시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영어라
면 다소는 실마리가 있지만 이탈리아 어는 이해의 접점이라곤 없다.
만일 혼자서 내팽겨쳐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카미조가 평소에 잊기
쉬운 수녀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새롭게 느끼고 있는데 그녀는 한마
디,
"ㅡ그런데 토우마. 버스 노선표는 어떻게 읽으면 돼?"
"끄아악!! 소녀틱하게 고개를 갸웃거린다!!"
결국,
서로 발뺌만 하던 두 사람이 버스를 탄 것은 그로부터 15분이나 지난
뒤였다.
- 2 -
북부 이탈리아 5박 7일 여행의 핵심은 베네치아 본토다.
하지만 카미조 일행이 묵을 호텔은 거기에서 직선거리고 20킬로미터
정도 남쪽으로 내려간 곳에 있는(실제로는 호를 그리는 해안선을 따라
기 때문에 그 이상) 키오자라는 작은 도시에 있다.
이것은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베네치아는 전체적으로 가
게를 닫는 시간이 일러서 야간 위락시설이 부족하기 때문인 모양이다.
24시간 실컷 놀려면 일부러 베네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호텔을 잡은
것은 드물지 않은 방법이라는 것이 팸플릿의 설명이었다. ...고등학생
인 카미조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인연이 없는 정보인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그런데 또 바다가 가깝네ㅡ."
카미조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무심코 중얼거렸다. 슈트케이스를 드르
륵드르륵 잡아끄는 손이 벌써 무거워졌다.
공항도 바다 옆이었지만 키오자도 전체적으로 바닷바람 냄새가 강한
도시다.
그러나 모래사장은 없다. 해안선은 모두 돌로 만들어진 운하로 되어
있었다. 마치 톱으로 육지를 절단한 것처럼 직섡거인, 바닷물로 된 강
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서 있던 인덱스가,
"바다가 가깝다기보다 바다에 둘러싸여 잇다고 하는 게 옳을지도."
"무슨 소리야?"
카미조는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걸음을 멈축 인덱스에게 물었다. 슈트
케이스를 들고 있는 것은 카미조뿐이니까, 주위에 있는 것은 이 근방
에 일을 하러 오거나 놀러 온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 있는 키오자의 중심부는 세 개의 운하로 분단되어 있는,
아드리아 해에 떠 있는 섬도시야. 가로지그리만 한다면 겨우 400미터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 아무래도 땅은 크지 않으니까 그만큼 건물
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어. 대충 둘러보면 알 수 있겠지만 집들 사이의
공간은 굉장히 좁아."
흐음, 카미조는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앞에 그 운하가 있다. 푸른색 속에 살짝 초록색이 섞인 바닷물
이 자로 선을 그은 것처럼 도시를 분단하고 있었다. 폭은 2, 30미터
정도다. 그 양쪽 기슭을 따라 평행하게 두 개의 도로가 나 있었는데,
그 도중에 갑자기 길이 집으로 막혀 있었다. 베이지색이나 흰색을 한
납작한 집의 벽돌은 마치 그것 자체가 제방인 것처럼 운하 옆 아슬아
슬한 데까지 튀어나와 있다. 집들 사이의 간격도 엄청나게 좁아서 축
구공도 못 지나갈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청소하는 걸까 하고 카미조
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그런 카미조의 시야를 가로지르듯이 소형 모터보트가 운하를 지
나갔다.
운하 양쪽 기슭에는 빈틈도 없을 만큼 수많은 보트가 대어져 있었다.
운하 폭의 절반 정도를 점거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 정도의 수가 생
활에 필요하고, 교통의 기반을 바다가 상당 부분 점거하고 있는 것이
다. 보트는 레저용처럼 잘 닦여 있는 게 아니라 하나같이 오래 사용한
것 같은 색깔을 띠고 있다. 슬쩍 들여다보니 걸레나 양동이 등이 아무
렇게나 던져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은 카미조는 솔직하게 "번거로울 것 같아" 하고
중얼거렸다.
"실제로 번거로울 거야."
어이없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인덱스는 선선히 찬동했다.
"많은 운하로 분단되어 있다는 건,걸어서 가려면 다리가 있는 데까지
빙 돌아가야 한다는 거니까. 배를 이용하면 또 배를 이용하는 대로,
이번에는 운하를 따라서만 갈 수 있고. 분명히 말하자면 전부 도로로
되어 있는 게 편한 건 당연한 거야."
그녀는 쓴 웃음을 지으며,
"이런 건 베네치아랑 비슷할지도. 키오자는 16세기 이후에 관광지가
되기 이전의 베네치아 본래의 풍경이 지금도 남아 있는 도시라는 말을
듣고 있을 정도니까. 다시 말해서 결점도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거지."
"......"
술술 나오는 말에 카미조는 자기도 모르게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그런 그의 모습에 인덱스는 눈썹을 찌푸리며,
"왜 그래, 토우마?"
"인덱스가..., 인덱스가 마술 이외의 측면에서 사람에게 도움이 되다
니..."
"토우마한테 은근히 바보 취급당했어! 어째서 친절하게 설명해준 것만
으로 이렇게 분한 심정을 느껴야 하는 거지?! 토우마가 그럴 생각이라
면 나도 사정없이 덥석 해버릴지도!!"
"해버릴지도가 아니야! 도대체가! 사정없이라고 선언한다는 건 지금까
지랑 어떻게 다른 건지ㅡ 아니, 됐어, 시험해보지 마 안다니까 시험해
보지 않아도 아플 거라는 건 상상이 간다고!!"
위아래 이를 딱딱 맞부딪치는 인덱스를 보고 카미조는 저도 모르게 뒤
로 물러난다. 여차하면 슈트케이스를 방패로 삼을 생각이지만 이 정도
방어력으로는 얼마 못 버티고 물어뜯기지 않을까 하고 약간 진지하게
몸의 위험을 느낀다.
그러나 흠칫흠칫 떨고 있는 카미조의 예측과 달리, 의외로 인덱스는
덤벼들지 않고 어깨에서 힘을 빼며 한숨을 쉬었다.
"뭐, 즐기기 위해서 여행을 온 거니까 너무 딱딱하게 굴어 바야 별수
없을지도. 자, 토우마. 여행가방 뒤에 쪼그리고 있지 말고 나와."
"...기특한 말로 속여 놓고, 나간 순간 턱이 덮쳐들거나 하지는 않을
까요?"
"안 그래."
"그렇게 이중으로 속여 놓고 안심한 순간 습격할 속셈은 아닙니까?"
"안 그래, 안 그래."
"음, 마지막으로 확인하겠는데요... 진짜?"
"그러니까 안 그런다니까."
"거짓말이야! 너 틀림없이 화났다고! 남자애보다 성장이 빠른 어른스
러운 소녀의 연기로 사람을 속이려고 해도 카미조 씨는 그렇게 쉽게
걸려들지 않습니다!! 핫핫하, 평소부터 불행한 내가그런 기대를 품기
라도 할 줄 알았냐! 어차피 평소처럼 마지막에는 있는 힘껏 덥석 물어
뜯길 게 뻔해! 경계하라, 사나운 수녀 인덱스는 이러고 있는 지금도
호시탐탐 내 정수리를 노리고 있을 게 틀림없으니까!!"
"......"
"그것 봐, 화났잖아요ㅡ? 점점 수상쩍은 연기가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ㅡ ...어라. 너 혹시 진심으로 화났, 어요? 끄아아! 상냥한 수녀님의
입이 소리도 없이 좌우로 찢어지고?! 제길, 역시 이렇게 될 거라고 생
각하고 있었어! 내 말이 맞잖아!! 조금도 기쁘지 않지만 으에에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ㅡ!!"
살을 물어뜯는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인덱스를 쓸데없이 화나게 한 소년의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 3 -
북부 이탈리아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사달라고 조른 것은 안전핀.
키오자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만든 추억은 머리를 물어뜯긴 것.
"...... 한 마디로 말할게. 어떻게 됐어?"
"토우마, 피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리둥절한 얼굴의 인덱스는 아까에 비하면 초조감이 누그러진 것처럼
보인다.
이곳은 호텔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큰길이었다. 실제로 조금 걸어보고
알게 된 것인데 아무래도 이 도시는 길이 극단적으로 좁거나 아니며녀
넓거나 중 하나인 것 같다. 차가 오가기도 어려울 것 같은 좁은 길을
지났는가 싶으면, 이번에는 길의 폭만 해도 광장처럼 보이는 큰길이
기다리고 있다.
카미조와 인덱스가 지금 걷고 있는 곳은 큰길 쪽이다. 3차선 정도 될
것 같은 폭이지만 도로에 하얀 선은 없다. 차도와 인도의 구별도 없고
, 길 가득히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보행자 천국에 가
까울지도 모른다. 당연히 늘 학원도시에서 보는 동양계 사람은 거의
없고, 영화에서 보던 서양인들뿐이다.
길 좌우에는 적갈색이나 노란색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3층에서 5층
정도 높이의 건물은 찻집이나음식점인 듯, 가게 2충 부분에서부터 쳐
져 있는 텐트 모양의 차양이 건물 폭만큼 뻗어 있어 노천카페 공간을
완벽하게 덮고 있었다. 길에 며해 있는 가게가 전부 파라솔이나 차양
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길 양쪽은 천으로 된 아케이드나 터널처럼
되어 있다.
이곳은 음식점이 몰려 있는 곳이다.
인덱스의 기분이 나아지고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즉 자기 주위에 먹
을 것이 가득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는 소녀의 반응에 카미조는 한숨을 쉬며,
"먹는 건 호텔에 짐을 풀고 나서 하자."
"큭, 다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지도!!"
당황한 듯이 얼굴을 붉힌 인덱스는 외쳤지만, 정말 아고 있었는지 어
떤지 카미조는 판단할 수가 없다. 어쨌거나 말하는 와중에도 시선이
여기저기에 있는 가게를 향하고 있으니.
"하아ㅡ. 저기, 먹을 것도 좋지만 여기에 오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곳
에 대해서도 생각하자고. 자, 구체적으로는 이 뭐였더라 어쩌고 사원
같은 데 가고 싶어! 팸플릿을 봐, 유래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멋지잖아, 이거!"
"토우마, 그건 성 마르코 사원이라고 하는데 베네치아의 수호자 성 마
르코의 유해를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물의 도시의 마술적 중심부야."
"그런 복잡한 설명 따윈 아무래도 좋을 만큼 가보고 싶단 말이다!!"
"우웃?! 토우마가 남의 친절을 거부했다?!"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나면 멍청한 가이드 놈을 붙잡아서 베네치아로
갈 거야, 베네치아! 곤돌라 만세ㅡ!!"
"내 말 좀 들어 봐, 토우마! 나도 먹을 것만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우와아, 큰일났다. 토우마는 실은 이탈리아의 분위기에 들떠서 남
의 얘기를 안 듣고 있을지도?!"
두 팔을 마구 휘두르며 이야기하는 인덱스였지만 카미조는 상관하지
않는다. 이쪽은 이탈리아 하면 피자와 축구와 전투 수녀 정도밖에 생
각나지 않는 일보산 고등학생. 갑자기 영화 같은 도시에 뚝 떨어지면
흥분하는 것도 당연하다.
"Quanto costa?"
이런 말이나
"Posso fare lo sconto del 10%."
이런 뜻을 알 수 없는 이탈리아 어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감싸여 있는
것만으로도 소풍 온 것 같은 기분이 폭발할 것만 같다.
"Desidera?"
"우왓! 저, 저건 설마 본고장의 오징어먹물 젤라토일지도...?"
"Sto solo guarando. Grazie."
어라, 지금 뭔가 일본어가 섞여 있지 않았나? 카미조는 고개를 갸웃거
렸지만, 아마 환청일 거라고 다시 생각했다. 슈트케이스를 드르륵드르
륵 끌며 앞장서서 걷던 카미조는 문득 뒤를 돌아보며,
"맞다, 인덱스. 점심 먹고 나서 말인데ㅡ."
하려던 말이 멎는다.
카미조는 이탈리아까지와서 '할 말을 잃다'라는 일본어를 떠올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3초 전까지 그 자리에 있던 인덱스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벌써 이탈리아식 미아?! 아까 그 환청 젤라토는 인덱스였던 건가!"
카미조는 철렁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렇게 화려한 수도복을 입은
소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제길. 인파 때문인지, 골목길로 들어간 건지, 어디에 있는지 식욕 수
녀의 행방을 전혀 파악할 수가 없어! 빌어먹을, 역시 네 머릿속에는
먹을 것뿐이잖아!!"
한탄하는 카미조에게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고, 어디를 둘러보아도 인
덱스의 모습은 완벽하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일단 지갑을 갖고 있는 것
은 카미조니까 그녀가 혼자서 어디론가 가바야 할 수 있는 일은 한정
되어 있다. 그러니 쫓아가지 않아도 자연히 돌아올 테지만... 왠지 카
미조는 지금 당장 인덱스의 목덜미를 잡아채지 않으면 더욱 큰 소동이
찾아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다.
"어ㅡ이, 인덱스!"
카미조는 우선 주위를 둘러보고, 그 후에 큰길에서 벗어나 있는 골목
길로 머뭇머뭇 들어간다. 여기저기를 훑어보면서 걸어가다보니, 이번
에는 자신의 현재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허둥지둥 골목길 안쪽으
로 달려가 보니 안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까 그
큰길로 돌아와 있었다.
뭐가 뭔지 모른 채 시간만이 지나간다.
"우와, 내 쪽이 마아가 될 것 같다...?!"
식은땀이 살짝 나기 시작한 카미조는 거기에서 일단 멈춰 섰다.
'구, 구원의 동아줄은 휴대전화인가!'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인덱스의 공짜 휴대전화는 전원이 계속 꺼져 있었다(아
마 비행기를 타기 전에 카미조가 그녀의 휴대전화 전원을 끈 후로 그
대로 두었을 것이다). 규칙적인 합성음(이탈리아 어가 아니라 역시 일
본어였다)의 안내에, 카미조는 통화를 끊고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
은 것도 잊고 손에 움켜쥔 채 슈트케이스를 향해, 비유가 아니라 정말
로 털썩 쓰러졌다.
카미조 토우마는 지금의 심정을 한마디로 말했다.
"어쩔 거야아아아!!"
고함소리에 주위를 걸어가던 사람들이 돌아보았지만 카미조에게는 그
것을 확인할 만한 여유도 없다. 그때 슈트케이스 위에 이마를 처박다
시피 하며 쓰러져 있는 그에게 이 지역 사람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그녀는 힘 쓰는 일이라도 하고 있을 것 같은, 어딘가 호쾌함이 느껴지
는 웃음을 띠면서,
"Ci sono delle preoccupazioni?"
"아?"
무슨 고민이라도? 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지만 카미조가 알 리도 없다.
한편 아주머니는 별로 기분 나빠하지도 않고 이번에는 단어를 하나씩
끊는 것 같은 발음으로 천천히,
"Non puoi parlare I'italiano? La' ce' un ristorante dove un
giapponese fa il capo."
이탈리아 어를 못 하니? 그렇다면 일본인이 하고 있는 일본음식점이
저쪽에 있어 하고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는 거지만 카미조는 이해할 수
가 없다. 다만 어조나 표정으로 보아 어쩐지 우호적인 것 같다는 사실
만은 느껴져서,
'이, 이탈리아 어는 모르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정말로 천애고아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좋아, 이 아주머니에게 일본어... 는 안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영어로 얘기해달라고 하자. 하지만 애초에 『영어로
말해주세요』라는 이탈리아 어 문장이 이미 상상도 가지 않아! 그걸
알면 이탈리아 어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는데!!'
처절한 딜레마에 사로잡히는 카미조. 실은 상대방이 영어가 통하는 상
대라면 떠듬떠듬 단어를 늘어놓아 플리즈 잉글리시라고 말하기만 해도
어떻게든 될 것 같지만, 역시 외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카미조는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한다. 카미조는 마침내 생각을 너무 많이 한 나머지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기 시작했지만,
"Senta."
그런 그에게, 갑자기 옆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Lui e' un mio amico. La ringrazia per la Sua gentilezza."
술술 흐르는 것 같은 말에 아주머니는 어머나 라고 하듯이 얼굴을 들
고,
"Prego."
홀가분한 듯이 말하더니 카미조에게 선뜻 등을 돌리고 인파 속으로 사
라지고 말았다.
한편 뒤에 남겨진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으아! 아주머니가 갑자기 포기했다?! 너 이 자식, 원래 같으면 이제
부터 아므의교우를 이룬 나와 아주머니가 인덱스랑 재회하기 위해 땀
과 눈물의 두 시간짜리 드라마를 펼쳐 보일 예정이었는데!! 그런데 갑
자기 끼어든 건 누구지? 이제 일본어라도 좋아, 설사 말이 통하지 않
더라도 걸고 넘어져주마!!"
저도 모르게 외쳤다.
이 넓은 세계에서는 어차피 이런 외침도 아무도 듣지 못할 거라며 카
미조는 절반 이상 패배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어머나, 그거 미안한 짓을 하고 말았군요. 저는 또 당신이 언어 때문
에 곤란을 겪고 계시는 것처럼 보여서 그랬지요."
문득 익숙한 말이 귀에 들어왔다.
일본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여자의 목소리 자체가 귀에
익다.
"너..."
카미조는 돌아보았다.
학원도시에서 시차 여덟 시간, 머나먼 키오자에서 재회한 것은,
"덧붙여 말하자면 아까, 그 사람은 제 친구입니다, 친절에 감사드립니
다 하고 말한 것인데요... 친구라니, 조금 뻔뻔스러웠을지도 모르겠네
요."
"올소라! 어째서 여기에?!"
카미조가 외치자, 이런 때에도 새까만 수도복을 입은 훈훈한 수녀님은
생긋 미소를 지었다.
- 4 -
올소라 아퀴나스.
전직 로마 정교 수녀로, 지금은 영국 청교도로 옮긴 몸이다. 원인은
「법의 서」라는 마도서 해독서를 저지하려 한 로마 정교와 대립했기
때문이다. 그 일은 이미 결말이 났고, 현재는 런던에서 느긋하게 지내
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수녀님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똑같이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수도복으로 빈틈없이 맨살을 감추고 있었다. 손에도 하얀 장갑을 꼈고
머리카락도 윔플로 완벽하게 덮여 있었다. 유일하게 맨살이 보이는 것
은 얼굴 정도다. 피부의 노출이 적은 것과 반비례해서 몸매는 풍만하
다고, 할까 여성적이라고 할까. 수수한 수도복이 오히려 몸의 선을 강
조하는 섹시 수녀님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그러는 당신은 왜 이런 곳에? 분명히 일본에 있는 학원도시에서 살고
계셨지요?"
"아니, 나는 그냥 여행티켓에 당첨되었을 뿐이야. 그쪽은?"
"실은 바로 며칠 전까지 이곳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잠깐, 올소라. 넌 분명 런던에 있었을 텐데. 대패성제 때에는 영국
도서관에서 전화로 조언도 해주었고."
"그러니까 그 로마 정교에서 영국 청교도로 옮겨갈 때 좀 분주했던지
라 아직 짐이 이쪽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가재도구를 런던
에 보내기 위해 돌아온 것이지요."
"여기, 네 고향이야?"
카미조가 질문하자 올소라는 "네"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대화지만 안심하고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 상황을 인식하자,
사실대로 말하면 카미조는 조금 눈물이 날 뻔했다. 어쨌거나 우연이든
뭐든 살았다! 하고 마음속으로 가슴 앞에서 양손을 모아쥐고 있었다.
"흐, 흐음. 그건 그렇고 너 영국 청교도로 옮겨갔다면서 여전히 수도
복은 그대로네. '네세사리우스(필요악의 교회)' 놈들은 화 안내?"
"으음. 하지만 가재도구를 옮긴다고 해도 아마쿠사식 여러분이 이삿짐
센터처럼 거들어주시기도 해서."
"우에?! 아, 뭐야. 아까 그 대화로 돌아간 건가?! 하지만 아마쿠사식
이라면 그 아마쿠사식? 아마 타테미야인지 뭔지가 있는 곳이었던가?
그 녀석 지금 어떻게 지내?"
"의복에 대해서는 괜찮습니다. 영국 청교도는 마술 대책의 일환으로
여러 가지 술식,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적극적이니까요. 우선 지금
의 저는 영국 청교도 로마파로 되어 있거든요. 아마쿠사식 여러분이
아마쿠사식이라는 틀로 남아 있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이번에는 수도복 이야기가!! 게다가 얘기를 완전히 무시하는 게 아니
라 일단 아마쿠사식도 언급하고! 뭐랄까, 굉장히 대화 리듬을 잡기가
어려워!!"
이 대화 패턴은 대충 나오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는 독특한 규칙에 따라 순서대로 이야기할 뿐인 것 같지만 받아들이는
쪽으로서는 상당히 대화가 어렵다.
한편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런데 당신은 쇼핑을 하는 중입니까?"
"아니, 그게... 인덱스랑 둘이 여기까지 온 건 좋았는데. 그 녀석 이
탈리안 젤라토에 정신이 나가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어! 어떡하지, 올
소라. 낚싯줄 끝에 아이스크림을 묶어서 들고 있으면 걸려들까?! 내
생각에 승산 5대 5인 좋은 승부가 될 것 같은데!"
"자, 자.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그러니까 당신과 인덱스 씨 두 사람은
여행으로 온 것뿐이라는 겁니까? 특별히 학원도시의 심부름을 온 게
아니라."
"또 대화가 되돌아간! ...건 아닌가? 하지만 심부름을 오려고 해도 거
의 지구 반대쪽이라먼 너무 먼 것 같은데."
"어쨌든 시간에 조금 여유가 있으신 거지요? 여기에서 만난 것도 인연
이니, 마침 잘됐습니다. 실은 이삿짐을 정리할 일손이 부족했거든요.
너무 한가하고 할 일이 없으시다면 점심을 만들어드릴 테니 꼭 좀 도
와주세요."
"아니, 되돌아갔어! 난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 온 건데 자기 좋을 대로
캔슬하고 있다?! 무, 무엇보다 우리는 지금부터 관광지를 돌 거고, 음
식점은 꽤 많이 있으니까 일부러 식사를 만들어주지 않아도."
평범하게 대꾸했다고 생각했는데, 올소라는 의아한 듯이 새삼 이쪽을
쳐다보았다. 카미조의 얼굴이라기보다 복장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
녀는 지갑 체인이나 손에 든 짐 등을 확인하더니,
"어머나. 일단 여쭤보겠는데요, 그 차림으로 말씀이신가요?"
"복장에 대해서 너한테 이런저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어!"
늦더위도, 찌는 듯한 무더위도 물러가긴 했지만 아직 반소매를 입어야
할지 긴소매를 입어야 할지 망설여지는 더위 속에서, 위에서 아래까지
새까만 수도복으로 몸을 감싼 수녀님에게 카미조는 울부짖었다.
하지만 올소라는 무슨 시덥잖은 소리를 하느냐는 눈으로 이쪽을 보며,
"일본과 달리 이쪽에는 수녀라면 얼마든지 있는데요."
"어라, 올소라인데 평범한 대답?!"
"그것보다."
올소라는 카미조의 놀라움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검지로 하나하나 날카
롭게 가리키며,
"새것이나 마찬가지인 슈트케이스를 끌고 여행용 팸플릿을 한 손에 든
채 카메라 달린 휴대전화까지 갖고 있다니... 하아,그래서야 사기꾼이
나 소매치기 여러분께 '어서 오세요. 원하시는 물건은 지갑인가요, 여
권인가요?'라고 말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우웃?!"
카미조는 당황해서 휴대전화와 팸플릿을 집어넣는다.
"하, 하지만 올소라의 입에서 사기꾼이니 소매치기니 하는 말이 나오
는 건 좀 의외일지도 모르겠어."
올소라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여기는 아직 작은 도시니까 별일은 없지만, 세계적으로 보아 이탈리
아의 대도시에는 여행자에게 혹독한 환경입니다. 음식점도 마찬가지.
바가지를 씌우는 가게는 관광지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불할 돈이
표시가격의 열 배가 되는 것도 당연하지요. 큰길에 있다거나, 일본어
소개문 간판이 세워져 있다거나, 그 정도의 정보만으로 판단했다간 엄
청난 일을 당하게 될 걸요?"
"우와아! 본고장의 말은 굉장히 와닿아!! 그럼 난 이제부터 어떻게 하
면 되지?!"
"그러니까 제가 식사를 대접하면 그런 종류의 가게에 걸려들 일도 없
다는 결론은 어떨까요? 그런 가게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한 요령도
먹으면서 가르쳐드릴 수 있고요. 자, 자. 이런 곳에 서서 얘기하는 것
도 뭣하고, 금서목록 수녀님과 합류하려 해도 집합장소는 필요하지 않
겠어요? 하긴 키오자 중심부는 세로가 1,300미터, 가로는 400미터 정
도 되는 작은 곳이니까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문제는 없겠
습니다만."
망설임 없이 술술 나오는 말에 카미조는 저도 모르게 조금 감동했다.
당연하지만 이탈리아에 대한 것은 이탈리아 인에게 부탁하는 게 제일
이라는, 상당히 기본 중의 기본 같은 교훈을 얻었으나 거기에서 문득
생각했다.
"하지만 일단 관광에 전념하고 싶은데 말이지..."
"아뇨, 아뇨. 저기 있는 젤라토 전문점에 계시던 인덱스 씨도 그렇게
즐거워 보였는걸요."
.................................................................
................, 응?
"잠깐, 올소라. 지금 얘기가 어디로 튀었어?"
"그렇지. 관광이라면 키오자의 일반주택을 보신다는 건 어떨까요? 아
름다운 관광명소라면 돈만 내면 실컷 보고 다닐 수 있지만, 반면 거기
에 사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분위기는 가이드만 따라다녀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랍니다."
"잠, 되돌아가지 마! 그 의견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전에
지금 인덱스라고...!"
"정말,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고 있으면서. 이 행복한 놈ㅡ 이잖
아요."
"우왓ㅡ?! 나아간 거야, 되돌아간 거야. 어느 쪽이야!!"
카미조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지만 올소라는 훈훈하게 미소를 지을 뿐.
"인덱스 씨라면 저기 있는 젤라토 전문점의 유리창에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아까 발견했습니다."
"가능하다면 그 말을 제일 먼저 해줬으면 좋았을 걸!! ...그런데 그렇
다면 인덱스는 지금 어디에?"
"그러니까 버스 정류장 읽는 법은."
"당장 이야기의 궤도를 원래대로 되돌리겠는데 인덱스는 어디에?!"
어라? 하며 올소라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그렇지, 그렇지. 그랬지요. 제 친구에게 부탁해서 먼저 저희 집 쪽으
로 초대했습니다."
"그 자식, 날 두고?!"
"이제부터 점심을 먹을 거라고 했더니 희희낙락 따라간 것처럼 보였는
데요."
"제기이이이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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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roll

  • 1. 설사 아무리 큰 불행이 닥치더라도 결코 굴하지 않고 오히려 웃는 얼 굴로 기어오르는 것이 이 소년의 특수한 체질이기도 하지만, 우선 '불 행'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시 한 번 되풀이하지만 카미조 토우마는 불행한 인간이다. 슈퍼마켓 특별할인 시간을 겨우 몇 분 차이로 놓친다거나, 편의점에서 산 만화잡지의 한가운데 페이지가 와그작 구겨져 있는 것은 당연하고, 스크래치 카드를 긁으면 나오는 것은 전부 꽝, 아이스크르미 막대나 주스 자판기에 붙어 있는 액정화면에서도 당첨이 나오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다시 되풀이하지만 카미조 토우마는 불행한 인간이다. "음ㅡ, 방문자 수 넘버스의 결과 당신의 지정숫자는 일등상, 멋지게 당첨되셨습니다! 상품은 북부 이탈리아 5박 7일 페어 여행, 축하드립 니다!!" 뭐냐, 이건. 평범한 고등학생 카미조 토우마는 딸랑딸랑 울려 퍼지는 핸드벨 소리를 들으면서 오히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멍하니 그 목소 리를 들었다. 그의 검고 뾰족뾰족한 머리카락이 바람을 맞아 멍청하게 흔들린다. 여기는 도쿄 서부를 차지하고 있는 학원도시. 시기는 초거대규모 운동 회 대패성제의 마지막 날. 그는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큰길가의 인도 한 모퉁이에 서 있고, 그 눈앞에는 베니어판과 각목과 못으로 만든, 어느 모로 보나 손으로 만든 듯한 가판대가 있다. 가판대를 맡고 있는 것은 키리가오카 여학교인가 하는 아가씨 학교의 여고생이다. 이곳은 학생들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방문자수 넘버스' 행사장이다. 방식은 간단하다. 돈을 내고 종이로 만든 전용 카드를 산다. 거기에 대패성제의 총 방문 자수를 예상해서 적어넣고 접수대에 건넨다. 그 후에는 실제 기록에
  • 2. 가까운 사람부터 순위가 결정되는 것이다. 당연히 TV 등에서는 '드디어 천만 명 돌파!'라는 등 대략적인 정보가 나오기 때문에 기간 후반에 하는 편이 맞히기 쉽다. 그러나 같은 숫자 인 경우에는 먼저 제출한 사람이 우선이라는 이점도 있다. 가판대를 맡고 있던 반소매 티셔츠에 빨간 바지를 입은 스포츠 소녀는 가판대 카운터 밑에 있는 물건 넣는 공간에서 설계도라도 들어 있을 것 같은 큼지막한 봉투를 부스럭거리며 꺼내더니, "원래는 학생용이 아니지만 대패성제가 끝난 후의 대체휴일 기간을 이 용해서 참가하는 여행이거든요." 소녀는 생긋 웃는 영업용 얼굴로, "여행에 관한 자세한 일정, 관광 예정, 필요한 서류 등은 전부 여기 있으니까 나중에 훑어 보세요. 그리고 질문이 있는 경우에는 우리 학 교가 아니라 여행 대리점 쪽으로 문의해주세요. 자, 자, 받으세요, 받 으세요." 거대한 봉투가 내밀어졌지만 카미조 토우마는 지금 자신에게 닥친 이 사태에 터무니없는 함정이 있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었다. 카미조는 양손을 깍지끼고 으ㅡ음 하고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고, "저어ㅡ, 좀 물어봐도 되나요?" "여행에 관한 자세한 질문에는 대답해드리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래 도 괜찮으시다면." "일등상이라면 그 일등상이겠죠?" "질문의 뜻을 모르겠는데요."
  • 3. "제일 운 좋은 사람이 당첨되는 그 상 맞죠?!" "저기, 그만 가봐도 될까요?" "아니, 기다려! 이건 북부 이탈리야 여행이죠?" "이 정도라면 대답해드릴 수 있으니까 대답하겠지만, 서류에 그렇게 적혀 있을 텐데요." "정신을 차려 보니 비행기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과학종교의 사설 공항 으로 향하고 있다거나 하는 처절한 전개는 아니겠죠?" "...아, 알았다. 혹시 해외여행은 처음인가요?" 기가 막힌다기보다 오히려 뭔가 상냥한 눈길을 받고 말았다. 아무래도 키리가오카 아가씨의 시점에서는, 카미조가 아직 보지 못한 외국의 풍 경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불쌍한 사람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어쨌든 이등상 이후도 발표해야 하니까 질문은 여행대리점 쪽에 해주 세요." "앗, 잠깐! 아니, 나도 알아. 십중팔구 그런 돌발 사태는 일어나지 않 는다는 것 정도는! 하지만 뭔가 있을 것 같잖아? 비행기가 갑자기 유 괴범에게 납치된다거나, 눈을 떠보니 그곳은 남극 한가운데였다거나! 나도 알아, 지나친 생각이라는 것 정도는 하지만 뭔가 함정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거 정말 페어로 북부 이탈리아에 갈 수 있는 거 겠지?! 이봐!!" 일등상이라니 이런 걸 받는 게 더 이상하다. 그러니까 어차피 뭔가 놓친 게 있을 거라고 카미조는 생각하고 있었다 . 그리고 그 놓친 게 있으니까 여행은 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
  • 4. 다. "맞다, 여권이 없잖아!" 카미조는 학생 기숙사의 자기 방에서 외쳤다. 그 말을 들은 인덱스가 바닥 위를 데굴데굴 구르면서 카미조를 보았다 . 허리까지 오는 긴 은발에 초록색 눈을 한 하얀 피부의 얼너댓 살 정 도의 소녀지만, 대패성제 기간 중에는 계속 땡볕 아래에 있었기 때문 에 지금은 조금 볕에 그을렸다. 그래도 그녀는 색소가 옅은 백인이라 서 피부가 갈색으로 변하지는 않고 살짝 붉은 기가 도는 상태였다. 덧 붙여 발하자면 복장은 찻잔 같은 하얀 바탕에 금실로 자수가 되어 있 는 수도복에 안전핀이 가득 달린, 상당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 "토우마, 토우마. '여권'이 뭐야?" 평소에 비해 말투가 느릿한 것은 인덱스가 보기 드물게 배가 부른 상 태이기 때문이다. 폐회식이 끝난 후 학급 뒤풀이에 난입해, 즉시 모든 사람들의 환영을 받은 인덱스는 이제는 그런 직업의 프로가 된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만큼 많이, 빨리먹고 온 것이다. 카미조는 인덱스 쪽을 보지 않고 거대한 봉투를 뜯어 그 안에서 갖가 지 색깔의 서류와 팸플릿을 꺼내면서, "여권이라는 건 해외여행에 필요한 물건이야. 아마 신청하고 나서 발 행되기까지 한 달 정도 걸리지 않았던가?" 영국에서 일본으로 온 인덱스가 왜 여권의 존재를 모르는 것일까 하고 카미조는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녀는 본래 일본의 헌법은 고사 하고 국제법조차 통용되지 않는 마술 세계의 주민이다. 하늘을 나는 양탄자라도 타고 초저공비행으로 제공 레이더망의 눈을 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괜찮은 거냐, 자위대 방공성능. 카미조는 대강
  • 5. 생각하면서 거대한 봉투에 들어 있던 각종 자료를 유리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아무래도 여행 계획을 보면 단체 코스 여행의 일종인 듯. 북부 이탈리 아의 공항에서 여행자들이 집합하면 그때부터 단체행동이 시작되는 모 양이다. 다시 말해서 일정이 처음부터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다. 현지 집합 예정일은 9월 27일. 앞으로 이틀밖에 안 남았다. 대패성제가 끝난 후에는 업자들이 설비를 철거하고 경비 상태를 바꾸 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는 며칠간 임시 휴일이 생긴다. 아마 거기에 맞 춘 여행 계획을 억지로 짜내는 바람에 이런 급박한 일정이 된 거겠지 만ㅡ 이 상태에서 여권을 신청해봐야, 만에 하나라도 늦지 않게 나올 리가 없었다. "......, 그것 봐, 이럴 줄 알았어. 정말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분하 지도 않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각오는 되어 있었다고ㅡ!!" 카미조는 거대한 봉투를 집어던지고 마룻받가 위에 털썩 쓰러져 데굴 데굴데굴데굴데굴데굴ㅡ!! 하고 초고속으로 좌우로 구르기 시작했다. 분한 마음을 잊기 위한 행위였지만 그의 오른쪽 장딴지가 딱! 하고 유 리 테이블의 다리에 호되게 격돌했다. 우오오오오!! 하고 격투가 같은 비명을 지르자, 가까운 곳에 웅크리고 있던 삼색고양이가 흠칫 떨며 도망치듯이 침대로 뛰어오르더니, 또 거기에서 벽에 걸려 있는 옷에 발톱을 박으며 옷장 위로 뛰어 이동한다. 그때 삼색고양이의 뒷다리가 걷어찼는지, 퍼석퍼석한 먼지 뭉치와 함 께 옷장 위쪽에서 뭔가가 누워 있는 카미조의 얼굴에 똑바로 떨어졌다 . "우왓! 고양이까지 날 우습게 봤어!! 그런데 이게 뭐야?!" 카미조는 자신의 이마 언저리를 직격한 물체를 알아내기 위해 오른손
  • 6. 으로 움켜쥐었다. 쓰러진 자세 그대로 얼굴 앞으로 가져간다. 드라마 에서 본 경찰수첩을 조금 크게 만든 정도의, 빨간색 합성피혁으로 표 지를 씌운 작은 노트 같은 것이다. 표지에는 '일본국 여권'이라고 금 박으로 인쇄가 되어 있다. 여권이었다. 카미조 토우마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어, 어째서? 어째서 내 여권이 이런 곳에?!" 교과서 영어가 이미 낙제점일 정도로 해외문화와 인연이 없는 카미조 다. 신경이 쓰여서 안을 팔랑팔랑 넘겨보니 아무래도 몇 번 사이판이 나 괌에 갔던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을 찍혀 있는 스탬프로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가족끼리 여행이라도 갔던 걸까? "우선 여권은 어떻게 되긴 했는데... 왠지 기분 나쁘네." 이럴 때 카미조 토우마는 기억상실이라서 자세한 사정을 알 수가 없다 . 게다가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감추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상의 할 수도 없다. 카미조는 인덱스 쪽을 힐끗 보았지만 그녀는 카미조가 자신의 여권의 존재에 놀라고 있다는 사실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 는 것 같다. 애초에 여권이라는 물품 자체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도 모르니 판단할 수가 없는 모양이라고, 카미조는 대강 생각하기로 했다. "앗, 그렇다면 인덱스, 역시 넌 여권이 없는 거야?" "'여권'이라니, 토우마가 갖고 있는 그거? 그럼 난 없을지도." "그럼 결국 여행은 무리잖아. 너 혼자 여기에 남았다간 사흘이면 움직 이지 못하게 될 것 같은데."
  • 7. "음, 그 말투는 뭐지? 하지만 없는 건 없어." "...아니, 인덱스 씨. 아까부터 엄청나게 냉정하신데, 이탈리아거든요 ? 해외여행이거든요?! 오기로라도 가고 싶어지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 잖아!!" "토우마, 토우마." 인덱스는 새삼스럽게 뭘, 그런 눈으로 이쪽을 본 후, "애초에 나한테는 학원도시도 외국이거든?" "우웃?! 다가가는 것조차 은근슬쩍 거부당했어!!" 카미조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하얀 소녀를 보며, "......, 어라? 그럼 너한테는 매일이 나랑 둘이서 해외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 거네?" 쾅쾅!! 하고 인덱스가 드러누운 채고 갑자기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그녀는 기세 좋게 얼굴을 들더니, "무, 무무무슨, 갑자기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거야, 토우마?! 나, 나 는 경건한 수녀님이니까 그렇게 오해를 살 만한 말을 하면 곤란할지도 !!" "어, 하지만." "어, 어쨌든 토우마가 갖고 있는 것 같은 '여권'은 없어! 비슷한 거라 면 있지만." "비슷한 거?"
  • 8. "응, 이런 거." 말하면서 수도복 소매를 부스럭부스럭 뒤져 꺼낸 것은 영국식 여권이 었다. 카미조는 디자인이 조금 다른 해외의 여권을 보고 감탄했다. "하, 하진 그렇겠지. 아무리 '네세사리우스(필요악의 교회)'라도 여행 을 갈 때에는 비행기 정도는 이용할 테니까! 다행이다, 다행이야. 네 가 실은 낙타를 현지조달해서 실크로드를 건너온 게 아닐까 하고 카미 조 씨는 살짝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까부터 걸핏하면 날 바보취급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 런데 토우마, 그 '여권'이라는 건 어떻게 쓰는 거야?" "자, 잠깐만, 인덱스. 네 여권을 보여ㅡ 이게 뭐야?! 어째서 네건 안 이 전부 새거지?! 최소한 영국에서 나올 때 스탬프가 한 개 정도는 찍 혔을 텐데!!" 게다가 명의는 있는 그대로 Index Librorun Prohibitorum이었다. 무시무시한 국가종교, 라고 말하며 전율하는 토우마를 아랑곳하지 않 고 소녀는 지루하다는 듯한 하품과 함께, "토우마, 토우마. 여기에는 그런 자동서기효과 같은 건 딸려 있을 리 가 없을지도." "이 자식, 모처럼 '네세사리우스'에서 발행해준 여권을 완전히 무시하 는 거야?! 역시 너 실크로드를 경유해서 온 거 아니야?!!" "토우마, 아까부터 괜히 흥분하는 것 같은데. 결국 그게 있으면 나도 토우마랑 같이 여행을 떠나도... 괜찮은, 거야?" 인덱스는 다소 가슴이 설레는 듯이 그렇게 물었다.
  • 9. ......, 어라? 하고 카미조는 거기에서 멍청한 얼굴을 했다. 지금으로서는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대로 북부 이탈리아 5박 7일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카미조 토우마는 불행한 인간일 텐데, 이런 일과는 세상에서 제일 인연이 없었을 텐데. 그러저러해서 다음 날 아침. 카미조와 인덱스는 몸속에 여행용 나노디바이스(발신기)를 넣고 학원 도시의 제23학구ㅡ 한 학구 전체가 항공, 우주 개발을 위해 준비된 특 별학구에 도착했다.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학괴 같은 것이 열릴 때 학원도시 바깥에서 오는 손님들을 위해 만들어진 국제 공항이다. 오히려 쓸모없다고 느껴질 만큼 드넓은 공항 로비는 벽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고 활주로 쪽에서 들어오는 햇빛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대패성 제 기간에는 그야말로 출퇴근길 러시아워처러머 혼잡했다고 뉴스에서 수군거렸던 로비였지만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그럭저럭 몰려 있는 정도다. 하기야 이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휴일 기간에 며칠 준비를 한 모양이지만. 소란스럽게 붐비는 로비에 카미조가 드르륵드르륵 끌고 다니는 슈트케이스 바퀴 소리가 빨려 들 어간다. 카미조의 옷차림은 평소와 똑같은 반소매 티셔츠에 카키색 바지였지만 지갑용 체인이 주머니에서 나와 바지 벨트에 걸려 있다거나 장딴지에 붕대를 감고 바지 안쪽에 예비용 지갑을 숨겨두는 등, 이야기만은 들 은 적이 있는 막연한 해외에 대한 불안감이 한껏 나타나 있었다. 게다 가 어중간하게 가느다란 체인은 지갑이 있는 장소를 다른 사람에게 알 려줄 뿐 당장이라도 쉽게 끊어낼 수 있을 것 같았고, 장딴지의 예비용 지갑은 바지 자락을 올려도 꺼내기 어려운 위치인 주제에 걷다 보면 쑥 빠질 것 같았다. 한편 지갑을 이렇게 경계하고 있으면서 여권은 반 대쪽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찔러넣은 것을 보면, 어느 모로 보나 해외 여행에 익숙하지 않다는 느낌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 10. 덧붙여 말하자면 슈드케이스는 카미조의 손에 있는 하나뿐이고 인덱스 는 빈손이었다. 속옷이나 잠옷은 몇 종류 갖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수 도복 한 벌밖에 사복이 없는 그녀의 짐은 전부 카미조의 슈트케이스 안에 들어갔던 것이다. 또 출발하기 전에 인덱스는 얼굴을 붉히며 "이 것도 짐에 넣어줘" 하고 작은 등나무 케이스를 내밀었다. 내용물은 뭘 까 하고 생각했지만 입 밖에 냈다간 물리적으로 물어뜯길 것 같아서 얌전히 있기로 한 카미조 토우마다. 그 외에 짐이라면, 그녀는 늘 양손에 삼색고양이를 안고 다니지만 그 고양이는 현재 코모에 선생님의 아파트에 대출 중이다. 그녀는 "카, 카미조가 해외여행? 정말 괜찮은 건가요?! 아니 그, 여러 가지 의미로 !! 외국에는 선생님이 없다고요!" 하며 실례되는 말을 했지만 쓸데없 는 참견이다. 카미조는 로비 안쪽에 있는 출입국 관리 게이트를 바라보면서, "어라? ...두고 온 물건은 없겠지. 지갑 있고, 여권 있고, 비행기 표 있고, 여행에 필요한 서류 있고, 갈아입을 옷 있고, 드라이어 있고, 휴대전화 있고, 여차할 때 쓸 돈도 은행에서 찾아왔고... 응, 괜찮, 겠지? 여기에서 '불행해!'로 연결되는 건망증 전개는 없을 거야. "토우마, 토우마. 아까부터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야?" 들뜬 얼굴로 묻는 인덱스는 가슴속의 즐거움이 그대로 밖으로 흘러넘 치는 것 같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다 보니 카미조는 자신의 떨떠름 한 마음이 바보처럼 생각되었다. "...그렇, 지. 아아, 즐겨도 되는 거겠지! 항상 불행하다 불행하다 하 니까 일이 이상하게 꼬였던 거지. 나도 가끔은 행복해도 되는 걸거야! 이렇게 의미 있는 휴가는 좀처럼 없을 테니까! 좋았어, 북부 이탈리아 5박 7일 여행, 오랜만의 오랜만에 행복한 기분을 만끽해야지!!"
  • 11. 그제아 카미조는 후련한 듯 상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인덱 스도 생긋 웃으며, "그래야지, 토우마. 긍정적인 마음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면 말은 좀 모르더라도 의사는 통할지도." "뭐어어!! 외국어?! 그걸 잊고 있었어!!" 갑자기 타격을 받은 카미조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엎어질 뻔 했다. 어쨌더나 그는 영어 쪽지시험이 22점이라는 1인 쇄국제도 실시 중. 그 런 자신을 떠올린 카미조는 머뭇머뭇 인덱스에게 물어보았다. "저어, 인덱스 씨." "왜, 토우마?" "당신은 이탈리아 어를 할 줄 아십니까?" "할 줄 아는데, 토우마. 말투가 올소라 같은데 왜 그러는 거야?" "이탈리아 어라는 것은 이탈리아에서 사용되는 그 이탈리아 어를 말하 는 건가요?" "토우마, 갑자기 왜 그렇게 지나치게 당연한 소릴 하는 거야? 이탈리 아 문법 중에서 잘 모르는 게 있으면 가르쳐줄 수도 있는데." "......, 그럼 외람되지만, 우선은 이탈리아 어로 '네'와 '아니요'부 터." "토우마, 토우마. 실례인 줄 알면서 말하는 건데 이탈리아까지 뭘하러 갈 생각이야?"
  • 12. 하지만 모르는 건 모르는 거잖아! 하고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공항 로 비 바닥에 엎어지는 카미조를 보고, 인덱스는 어느 모로 보나 맥이 빠 졌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저기, 토우마. 요즘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최소한 3개 국 어 정도는 할 수 있도록 해두는 편이 좋을지도." "이런 이상한 수녀님한테서 요즘이니 최소한이니 하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우선 그쪽에 도착하면 어쨌든 너한테 마구 의지하겠다고 여기 에서 맹세해두지! 왜냐하면 '예'와 '아니요'를 이미 모르니까!!" "뭐, 통역이 되어주는 건 별로 상관은 없는데. 하지만 토우마, 좋은 기회니까 기왕이면 현지에서 직접 말을 배우는 게 더 빠르지 않을..." "그건 기억력이 좋은 사람의 이론이잖아! 나 같은 건 벼락치기로 도전 해봤자 분명히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날 게 뻔하다고!!" "또 그런 과장된 말을..." "그 어이없다는 얼굴도 상식적으로 여러 개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 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아니, 인덱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본어도 술술 하잖아. 그럼 이탈리아 어도 그렇게 잘하는 건가..." "일단, 나는 이래 봬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10만3천 권을 읽어야 하는 몸이거든? 이탈리아 어 정도는 간단하지. 어려운 건 체계화되어 있지 않은 언어권 정도일지도. 노래 같은 감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게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 그런 건 실제의 리듬이나 음계가 지워진 채 어중간한 가사만 석판에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노래하는 방법을 따로 배워야 하거든. 하지만 그런 건 일부 섬나라나 밀림 문화 권에만 있는 거니까."
  • 13. "...무슨 소리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의지해도 괜찮다는 겁니까?" "응. 평소에는 토우마가 끌고 다녀주지만 이번에는 내가 이끌어줄 차 례잖아. 내가 얼마든지 지원해줄 테니까 토우마는 트러블을 두려워하 지 말고 실컷 즐기면 돼." 그렇게 말하며 당당하게 빈약한 가슴을 편 수녀님은 카미조 토우마의 눈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성녀님처럼 보였다. 구원이란 정말 있었구나, 인덱스가 이렇게까지 단언하니까 괜찮을 거야, 좋았어. 실컷 즐기는 거다, 북부 이타릴아 5박 7일 여행! 이라는 듯이 카미조는 슈트케이스 바퀴를 기세 좋게 굴리며 출입국 관리 게이트로 향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가이드님!!" "맡겨둬, 토우마. 그쪽에 있는 가게에서는 들어가면 우선 점원에게 인 사를 해야 해." "가이드님, 상대 쪽에서 말을 거는 게 아닌가요?" "굳이 말하자면 '손님과 점원이 같이 물건을 찾는다'는 느낌이거든. 격의가 없는 거지. 흐흥, 이 정도는 알아두지 않으면 해외에서는 생활 할 수 없ㅡ." 삐익ㅡ! 그때 게이트의 금속탐지기가 이상한 소리를 냈고, 갑자기 체격이 탄탄 한 담당자들이 양쪽에서 인덱스를 붙들었다. 음? 하고 인덱스는 의아한 듯이 눈썹을 찌푸린다. 가이드님한테 무슨 짓이냐, 이런 눈빛이다. "음, 그러니까... 뭡니까. 온몸에 달려 있는 그 수많은 안전핀은?"
  • 14. 한편 수상한 사람을 구속한 그들은 관자놀이를 떨며 매우 낮은 목소리 로 물었다. "와앗! 듣고 보니 겉으로 보기에는 흉기가 가득!! 하지만 아니에요, 이걸 떼어내면 수도복은 너덜너덜 조각조각이 나버리거든요!!" 일본을 떠나기도 전부터 이미 인덱스의 말썽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하는 카미조 토우마. 한편 인덱스 쪽은 왜 안전핀이 안 되는지, 애초에 게 이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 것은 무엇 때문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역시 이 녀석한테 지원을 부탁하는 건 좀 불안하지 않나ㅡ?! 카미조는 등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담당자에게 물어본다. "아니, 이 옷이 위험한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떡하죠? 비행 기가 떠나려면 이제 30분 남았는데요..." "그렇군요... 일단 우리 공항 내에 쇼핑몰이 있으니까 그쪽에서 제대 로 된 옷을 구입하실 수밖에." 어디몰이라니 그게 어디야?! 카미조는 게이트 근처의 벽에 붙어 있던 안내 패널을 훑어본다. 그러자, 『쇼핑구역ㅡ 여기에서 1.5킬로미터.』 "멀어!! 제23학구의 공항은 틀림없이 부지를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하지만 그 외에는 비행기를 놓치거나 낙타를 타고 실크로드를 가는 수밖에 없어! 제길, 뛰자, 인덱스! 좀 더 제대로 된 옷이 아니면 비행기에 못 탄대!!" "어, 뭐야, 토우마. ...혹시 옷을 사주는 거야?!" "빌어먹을, 반짝반짝 빛나는 그 두 눈이 한없이 짜증난다! 이런 곳에
  • 15. 서 쓸데없이 돈을 쓰게 되다니, 역시 이번에도 불행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ㅡ!!" 한탄하면서도 카미조는 소녀의 손을 잡고 허둥지둥 공항의 기나긴 연 결통로를 달린다. 이륙까지 앞으로 28분. 슬슬 여객기 엔진도 알맞게 데워져 있을 무렵이었다. 제1장 키오자의 거리 Il_Vento_di_Chioggia - 1 - 북부 이탈리아, 특히 베네토 주의 현관이라면 마르코 폴로 국제공항이 유명하다. 아드리아 해에 떠 있는 '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베네치아에서는 맞은 편 기슭에 해당하는 이탈리아 본토 연안에 있는 공항으로, 용도도 관 광객 수송이 대부분이다. 여기에서 버스나 철도를 이용해 유일한 육로 인 전체 길이 4킬뢰터 전후의 리베르타 다리를 지나 본토로 들어가거 나, 아니면 맞은편 해안에서 보트를 이용한 해로로 들어가는 것으로 관광객의 흐름이크게 나뉜다. 베네치아 본토 이외에도 비첸차, 파도바, 바사노델그라파, 벨루노 등 의 관광지로 가는 루트도 있다. 어쨌거나 관광객이 해외에서 북동부 이탈리아로 가려면 우선은 이 공항을 거쳐야 하고, 카미조와 인덱스를 태운 여객기도 이곳에 착륙했다. 본래 이 공항은 일본 직항편은 운행 되지 않고 있지만 학원도시는 예외인 모양이다. 출입국 관리 게이트에서 외국인 직원이 던진 질문을 애드립 이탈리아 어로 넘기기도 하고, 벨트 컨베이어 앞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 슈트케이스에 식은땀을 흘리기도 하는 등 여러 가 지 드라마가 전개되었지만, 그래도 일단 공항에서 밖으로 나가는 데에 는 성공했다.
  • 16. 덧붙여 말하자면 현재의 인덱스는 학원도시의 공항에서 산 간소한 블 라우스와 치마에서 다시 원래의 하얀 수도복으로 돌아가 있었다. 안전 핀을 갖고 들어갈 수 없어서 기내에서는 분해되어 있던 천 조각을 마 르코 폴로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안전핀을 현지에서 조달해 다시 조합한 것이다. 이탈리아까지 와서 제일 먼저 여자애가 조르는 것이 수십 개의 안전핀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청소년으로서 어떻게 생각해 야 할까, 카미조는 조금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무사히 공항을 나와 외국 땅을 밟은 것은 사실. 이제는 다른 비행기로 올 단체여행 멤버들과 만나 현지 가이드의 안내 를 받으며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북부 이탈리아의 핵심이라면 물론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된 베네치아 본섬이겠지만 그 이외에도 볼 곳은 많다. 실은 밤에도 자지 않고 팸플릿을 몇 번이나 훑어 보았기 때문에 카미조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베네치아라면 산마르코 광장이랑 두칼레 궁전이랑 종루랑 아카데미아 다리랑 자연사박물관이랑 해양역사박물관이랑 세계 제일의 페니체 가 극장! 선물로는 유리공예품이랑 가면! 베네치아에서 벗어나도 갈릴레 오가 교편을 잡은 도시 등 볼 만한 곳이 가득! 전부 가이드북의 광고 지만 말이야! 하지만 지금부터 전부 진짜 경험과 추억이 되는 거야! 와하하하핫ㅡ!! 굉장해, 굉장해, 여행 너무 기대된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안 오네..., 토우마." "아아, 가이드는 고사하고 누구 한 사람 안 모이는데..." 집합시각에서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다. 가고 싶은 곳은 여러 군데 있어도 가이드에 따라 관광할 수 있는 곳이 다르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가장 첫 번째 시점에서 고꾸라질 줄이
  • 17. 야.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공항 앞에 있는 버스터미널이다. 버스터미널이 라고 해도 거의 실내 같은 곳이어서, 공항의 일부인 천장과 기둥이 질 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이 일대는 태양빛이 아니라 천장의 네모난 형 광등 불빛을 받고 있다. 땅에서 전장까지 전부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 어서 조금도 '바깥'이라는느낌은 들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빛을 받 아들이는 방식을 손을 본 입체 주차장처럼 보인다. 아까부터 눈앞을 그냥 기나쳐 가는 버스들은 차체가 파란색이나 오렌 지색 등 몇 가지 패턴으로 나뉘어 있고, 아무래도 운행 노선이나 제도 에 차이가 있는 모양이라고 카미조는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 나 아무래도 노선표를 쉽사리 읽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렇군. 올소라가 버스 타는 방법을 몰라서 헤매고 있었던 건 이래서 였나...' 카미조는 약간 템포가 느린 전직 로마 정교 수녀의 웃는 얼굴을 떠울 리면서 묘하게 납득했다. 한편 인덱스는 더위에 지쳤는지, 벌써 축 늘 어지기 시작했다. 유럽은 평균적인 경도로 말하자면 훗카이도와 비슷한 정도이고, 일본 보다 습도가 낮기 때문에 쾌적하게 지낼 수 있다... 는 이야기가 가이 드북에 있었지만 아무래도 예외란 어디에나 있는 건가보다. 공항 바로 옆은 아드리아 해다. 그쪽에서 바다 냄새를 머금은 따뜻한 바람이 흘러들어오고, 그것이 끊임없이 오가는 버스의 배기가스와 섞 여 소용돌이치고 있다. 기온 자체는 쾌적할지도 모르지만 오래 있으면 파도에 바위가 깎이듯이 마음이 지칠 것만 같다. 주위를 오가는 서유 럽계 관광객이나 비즈니스맨 같은 사람들도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손수 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곤 한다. "토우마ㅡ, 혹시 우리는 버려진 거야?"
  • 18. "제길ㅡ, 시간에는 맞춰 왔는데... 정말이지, 전화도 연결되지 않고. 이거 우리끼리 우선 움직일 수밖에 없을지도." 학원도시에서 만든 것이라서인지 전화회사가 노력한 성과인지 카미조 의 휴대전화 자체는 이탈리아에서도 쓸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사전 에 가르쳐준 전화번호로 걸어봐도 일본어로 녹음된 안내방송밖에 돌아 오지 않았다. 상대방이 받지 않는 것이다. 멤버는 모이지 않고 가이드 도 오지 않는다니 말도 안 된다고 카미조는 생각했다. 그러나 말도 안 된다고 해서 이대로 비행기를 타고 되돌아간다면 개그도 못 된다. 일 단 여행 일정이나 호텔방 등은 확보되어 있으니, "이쪽에는 해외에 강할 것 같은 수녀가 한 명 있으니까 괜찮을까? 어 쨌든 우두커니 서 있어 봐야 소용없으니까 짐만이라도 호텔에 놔두러 가자. 묵을 곳은 다 같으니까 그쪽에서 가이드와 합류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 아우우... 토우마, 아직 못 쉬는 거야? 난 여기에 온 지 5초 만 에 흐물흐물일지도." "걱정하지 마, 나도 여덟 걸음 만에 흐물흐물이야. 하지만 어쨌든 호 텔까지 가면 침대도, 에어컨도 있을 테니 좀 쉬고 나면 마음대로 관광 을 해버리자고." "우우, 그 정도로는 기분이 풀리지 않아. 난 이탈리아 명물 젤라토가 없으면 부활할 수 없을지도, 먹어본 적은 없지만 유명한 걸 보면 틀림 없이 맛있을 거야." "그런거냐. 뭐, 관광이라면 유명한 데를 공략하는 게 기본인가?" "응. 말난 김에 베네치아 명물은 오징어먹물 젤라토."
  • 19. "...한 가지 묻겠는데, 정말 유명한 거 맞아?" 어딘가 계절상품 냄새를 풍기는 요청을 들으며서 카미조는 기둥에 붙 어 있던 네모난 간판 모양의 운행표를 쳐다보았다. 당장 최초의 관문 은 어느 버스를 타느냐 하는 것이다. "ㅡ, 고민해봐야 소용없고, 내 힘으로 읽는 건 완전히 포기하고... 인 덱스! 미안하지만 호텔까지가려면 어떤 버스를 타야 되는지 좀 읽어줄 래?" "어, 응. 그러지, 뭐ㅡ." 기둥의 간판으로 터벅터벅 다가가는 인덱스를 보고, 정말 이 녀석과 같이 와서 다행이라고 카미조는 살며시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영어라 면 다소는 실마리가 있지만 이탈리아 어는 이해의 접점이라곤 없다. 만일 혼자서 내팽겨쳐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카미조가 평소에 잊기 쉬운 수녀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새롭게 느끼고 있는데 그녀는 한마 디, "ㅡ그런데 토우마. 버스 노선표는 어떻게 읽으면 돼?" "끄아악!! 소녀틱하게 고개를 갸웃거린다!!" 결국, 서로 발뺌만 하던 두 사람이 버스를 탄 것은 그로부터 15분이나 지난 뒤였다. - 2 - 북부 이탈리아 5박 7일 여행의 핵심은 베네치아 본토다. 하지만 카미조 일행이 묵을 호텔은 거기에서 직선거리고 20킬로미터 정도 남쪽으로 내려간 곳에 있는(실제로는 호를 그리는 해안선을 따라
  • 20. 기 때문에 그 이상) 키오자라는 작은 도시에 있다. 이것은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베네치아는 전체적으로 가 게를 닫는 시간이 일러서 야간 위락시설이 부족하기 때문인 모양이다. 24시간 실컷 놀려면 일부러 베네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호텔을 잡은 것은 드물지 않은 방법이라는 것이 팸플릿의 설명이었다. ...고등학생 인 카미조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인연이 없는 정보인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그런데 또 바다가 가깝네ㅡ." 카미조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무심코 중얼거렸다. 슈트케이스를 드르 륵드르륵 잡아끄는 손이 벌써 무거워졌다. 공항도 바다 옆이었지만 키오자도 전체적으로 바닷바람 냄새가 강한 도시다. 그러나 모래사장은 없다. 해안선은 모두 돌로 만들어진 운하로 되어 있었다. 마치 톱으로 육지를 절단한 것처럼 직섡거인, 바닷물로 된 강 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서 있던 인덱스가, "바다가 가깝다기보다 바다에 둘러싸여 잇다고 하는 게 옳을지도." "무슨 소리야?" 카미조는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걸음을 멈축 인덱스에게 물었다. 슈트 케이스를 들고 있는 것은 카미조뿐이니까, 주위에 있는 것은 이 근방 에 일을 하러 오거나 놀러 온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 있는 키오자의 중심부는 세 개의 운하로 분단되어 있는, 아드리아 해에 떠 있는 섬도시야. 가로지그리만 한다면 겨우 400미터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 아무래도 땅은 크지 않으니까 그만큼 건물
  • 21. 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어. 대충 둘러보면 알 수 있겠지만 집들 사이의 공간은 굉장히 좁아." 흐음, 카미조는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앞에 그 운하가 있다. 푸른색 속에 살짝 초록색이 섞인 바닷물 이 자로 선을 그은 것처럼 도시를 분단하고 있었다. 폭은 2, 30미터 정도다. 그 양쪽 기슭을 따라 평행하게 두 개의 도로가 나 있었는데, 그 도중에 갑자기 길이 집으로 막혀 있었다. 베이지색이나 흰색을 한 납작한 집의 벽돌은 마치 그것 자체가 제방인 것처럼 운하 옆 아슬아 슬한 데까지 튀어나와 있다. 집들 사이의 간격도 엄청나게 좁아서 축 구공도 못 지나갈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청소하는 걸까 하고 카미조 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그런 카미조의 시야를 가로지르듯이 소형 모터보트가 운하를 지 나갔다. 운하 양쪽 기슭에는 빈틈도 없을 만큼 수많은 보트가 대어져 있었다. 운하 폭의 절반 정도를 점거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 정도의 수가 생 활에 필요하고, 교통의 기반을 바다가 상당 부분 점거하고 있는 것이 다. 보트는 레저용처럼 잘 닦여 있는 게 아니라 하나같이 오래 사용한 것 같은 색깔을 띠고 있다. 슬쩍 들여다보니 걸레나 양동이 등이 아무 렇게나 던져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은 카미조는 솔직하게 "번거로울 것 같아" 하고 중얼거렸다. "실제로 번거로울 거야." 어이없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인덱스는 선선히 찬동했다. "많은 운하로 분단되어 있다는 건,걸어서 가려면 다리가 있는 데까지 빙 돌아가야 한다는 거니까. 배를 이용하면 또 배를 이용하는 대로, 이번에는 운하를 따라서만 갈 수 있고. 분명히 말하자면 전부 도로로 되어 있는 게 편한 건 당연한 거야."
  • 22. 그녀는 쓴 웃음을 지으며, "이런 건 베네치아랑 비슷할지도. 키오자는 16세기 이후에 관광지가 되기 이전의 베네치아 본래의 풍경이 지금도 남아 있는 도시라는 말을 듣고 있을 정도니까. 다시 말해서 결점도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거지." "......" 술술 나오는 말에 카미조는 자기도 모르게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그런 그의 모습에 인덱스는 눈썹을 찌푸리며, "왜 그래, 토우마?" "인덱스가..., 인덱스가 마술 이외의 측면에서 사람에게 도움이 되다 니..." "토우마한테 은근히 바보 취급당했어! 어째서 친절하게 설명해준 것만 으로 이렇게 분한 심정을 느껴야 하는 거지?! 토우마가 그럴 생각이라 면 나도 사정없이 덥석 해버릴지도!!" "해버릴지도가 아니야! 도대체가! 사정없이라고 선언한다는 건 지금까 지랑 어떻게 다른 건지ㅡ 아니, 됐어, 시험해보지 마 안다니까 시험해 보지 않아도 아플 거라는 건 상상이 간다고!!" 위아래 이를 딱딱 맞부딪치는 인덱스를 보고 카미조는 저도 모르게 뒤 로 물러난다. 여차하면 슈트케이스를 방패로 삼을 생각이지만 이 정도 방어력으로는 얼마 못 버티고 물어뜯기지 않을까 하고 약간 진지하게 몸의 위험을 느낀다. 그러나 흠칫흠칫 떨고 있는 카미조의 예측과 달리, 의외로 인덱스는 덤벼들지 않고 어깨에서 힘을 빼며 한숨을 쉬었다.
  • 23. "뭐, 즐기기 위해서 여행을 온 거니까 너무 딱딱하게 굴어 바야 별수 없을지도. 자, 토우마. 여행가방 뒤에 쪼그리고 있지 말고 나와." "...기특한 말로 속여 놓고, 나간 순간 턱이 덮쳐들거나 하지는 않을 까요?" "안 그래." "그렇게 이중으로 속여 놓고 안심한 순간 습격할 속셈은 아닙니까?" "안 그래, 안 그래." "음, 마지막으로 확인하겠는데요... 진짜?" "그러니까 안 그런다니까." "거짓말이야! 너 틀림없이 화났다고! 남자애보다 성장이 빠른 어른스 러운 소녀의 연기로 사람을 속이려고 해도 카미조 씨는 그렇게 쉽게 걸려들지 않습니다!! 핫핫하, 평소부터 불행한 내가그런 기대를 품기 라도 할 줄 알았냐! 어차피 평소처럼 마지막에는 있는 힘껏 덥석 물어 뜯길 게 뻔해! 경계하라, 사나운 수녀 인덱스는 이러고 있는 지금도 호시탐탐 내 정수리를 노리고 있을 게 틀림없으니까!!" "......" "그것 봐, 화났잖아요ㅡ? 점점 수상쩍은 연기가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ㅡ ...어라. 너 혹시 진심으로 화났, 어요? 끄아아! 상냥한 수녀님의 입이 소리도 없이 좌우로 찢어지고?! 제길, 역시 이렇게 될 거라고 생 각하고 있었어! 내 말이 맞잖아!! 조금도 기쁘지 않지만 으에에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ㅡ!!"
  • 24. 살을 물어뜯는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인덱스를 쓸데없이 화나게 한 소년의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 3 - 북부 이탈리아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사달라고 조른 것은 안전핀. 키오자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만든 추억은 머리를 물어뜯긴 것. "...... 한 마디로 말할게. 어떻게 됐어?" "토우마, 피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리둥절한 얼굴의 인덱스는 아까에 비하면 초조감이 누그러진 것처럼 보인다. 이곳은 호텔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큰길이었다. 실제로 조금 걸어보고 알게 된 것인데 아무래도 이 도시는 길이 극단적으로 좁거나 아니며녀 넓거나 중 하나인 것 같다. 차가 오가기도 어려울 것 같은 좁은 길을 지났는가 싶으면, 이번에는 길의 폭만 해도 광장처럼 보이는 큰길이 기다리고 있다. 카미조와 인덱스가 지금 걷고 있는 곳은 큰길 쪽이다. 3차선 정도 될 것 같은 폭이지만 도로에 하얀 선은 없다. 차도와 인도의 구별도 없고 , 길 가득히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보행자 천국에 가 까울지도 모른다. 당연히 늘 학원도시에서 보는 동양계 사람은 거의 없고, 영화에서 보던 서양인들뿐이다. 길 좌우에는 적갈색이나 노란색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3층에서 5층 정도 높이의 건물은 찻집이나음식점인 듯, 가게 2충 부분에서부터 쳐 져 있는 텐트 모양의 차양이 건물 폭만큼 뻗어 있어 노천카페 공간을 완벽하게 덮고 있었다. 길에 며해 있는 가게가 전부 파라솔이나 차양 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길 양쪽은 천으로 된 아케이드나 터널처럼
  • 25. 되어 있다. 이곳은 음식점이 몰려 있는 곳이다. 인덱스의 기분이 나아지고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즉 자기 주위에 먹 을 것이 가득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는 소녀의 반응에 카미조는 한숨을 쉬며, "먹는 건 호텔에 짐을 풀고 나서 하자." "큭, 다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지도!!" 당황한 듯이 얼굴을 붉힌 인덱스는 외쳤지만, 정말 아고 있었는지 어 떤지 카미조는 판단할 수가 없다. 어쨌거나 말하는 와중에도 시선이 여기저기에 있는 가게를 향하고 있으니. "하아ㅡ. 저기, 먹을 것도 좋지만 여기에 오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곳 에 대해서도 생각하자고. 자, 구체적으로는 이 뭐였더라 어쩌고 사원 같은 데 가고 싶어! 팸플릿을 봐, 유래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멋지잖아, 이거!" "토우마, 그건 성 마르코 사원이라고 하는데 베네치아의 수호자 성 마 르코의 유해를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물의 도시의 마술적 중심부야." "그런 복잡한 설명 따윈 아무래도 좋을 만큼 가보고 싶단 말이다!!" "우웃?! 토우마가 남의 친절을 거부했다?!"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나면 멍청한 가이드 놈을 붙잡아서 베네치아로 갈 거야, 베네치아! 곤돌라 만세ㅡ!!" "내 말 좀 들어 봐, 토우마! 나도 먹을 것만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우와아, 큰일났다. 토우마는 실은 이탈리아의 분위기에 들떠서 남
  • 26. 의 얘기를 안 듣고 있을지도?!" 두 팔을 마구 휘두르며 이야기하는 인덱스였지만 카미조는 상관하지 않는다. 이쪽은 이탈리아 하면 피자와 축구와 전투 수녀 정도밖에 생 각나지 않는 일보산 고등학생. 갑자기 영화 같은 도시에 뚝 떨어지면 흥분하는 것도 당연하다. "Quanto costa?" 이런 말이나 "Posso fare lo sconto del 10%." 이런 뜻을 알 수 없는 이탈리아 어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감싸여 있는 것만으로도 소풍 온 것 같은 기분이 폭발할 것만 같다. "Desidera?" "우왓! 저, 저건 설마 본고장의 오징어먹물 젤라토일지도...?" "Sto solo guarando. Grazie." 어라, 지금 뭔가 일본어가 섞여 있지 않았나? 카미조는 고개를 갸웃거 렸지만, 아마 환청일 거라고 다시 생각했다. 슈트케이스를 드르륵드르 륵 끌며 앞장서서 걷던 카미조는 문득 뒤를 돌아보며, "맞다, 인덱스. 점심 먹고 나서 말인데ㅡ." 하려던 말이 멎는다. 카미조는 이탈리아까지와서 '할 말을 잃다'라는 일본어를 떠올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 27. 3초 전까지 그 자리에 있던 인덱스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벌써 이탈리아식 미아?! 아까 그 환청 젤라토는 인덱스였던 건가!" 카미조는 철렁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렇게 화려한 수도복을 입은 소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제길. 인파 때문인지, 골목길로 들어간 건지, 어디에 있는지 식욕 수 녀의 행방을 전혀 파악할 수가 없어! 빌어먹을, 역시 네 머릿속에는 먹을 것뿐이잖아!!" 한탄하는 카미조에게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고, 어디를 둘러보아도 인 덱스의 모습은 완벽하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일단 지갑을 갖고 있는 것 은 카미조니까 그녀가 혼자서 어디론가 가바야 할 수 있는 일은 한정 되어 있다. 그러니 쫓아가지 않아도 자연히 돌아올 테지만... 왠지 카 미조는 지금 당장 인덱스의 목덜미를 잡아채지 않으면 더욱 큰 소동이 찾아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다. "어ㅡ이, 인덱스!" 카미조는 우선 주위를 둘러보고, 그 후에 큰길에서 벗어나 있는 골목 길로 머뭇머뭇 들어간다. 여기저기를 훑어보면서 걸어가다보니, 이번 에는 자신의 현재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허둥지둥 골목길 안쪽으 로 달려가 보니 안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까 그 큰길로 돌아와 있었다. 뭐가 뭔지 모른 채 시간만이 지나간다. "우와, 내 쪽이 마아가 될 것 같다...?!" 식은땀이 살짝 나기 시작한 카미조는 거기에서 일단 멈춰 섰다. '구, 구원의 동아줄은 휴대전화인가!'
  • 28.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인덱스의 공짜 휴대전화는 전원이 계속 꺼져 있었다(아 마 비행기를 타기 전에 카미조가 그녀의 휴대전화 전원을 끈 후로 그 대로 두었을 것이다). 규칙적인 합성음(이탈리아 어가 아니라 역시 일 본어였다)의 안내에, 카미조는 통화를 끊고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 은 것도 잊고 손에 움켜쥔 채 슈트케이스를 향해, 비유가 아니라 정말 로 털썩 쓰러졌다. 카미조 토우마는 지금의 심정을 한마디로 말했다. "어쩔 거야아아아!!" 고함소리에 주위를 걸어가던 사람들이 돌아보았지만 카미조에게는 그 것을 확인할 만한 여유도 없다. 그때 슈트케이스 위에 이마를 처박다 시피 하며 쓰러져 있는 그에게 이 지역 사람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그녀는 힘 쓰는 일이라도 하고 있을 것 같은, 어딘가 호쾌함이 느껴지 는 웃음을 띠면서, "Ci sono delle preoccupazioni?" "아?" 무슨 고민이라도? 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지만 카미조가 알 리도 없다. 한편 아주머니는 별로 기분 나빠하지도 않고 이번에는 단어를 하나씩 끊는 것 같은 발음으로 천천히, "Non puoi parlare I'italiano? La' ce' un ristorante dove un giapponese fa il capo." 이탈리아 어를 못 하니? 그렇다면 일본인이 하고 있는 일본음식점이 저쪽에 있어 하고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는 거지만 카미조는 이해할 수
  • 29. 가 없다. 다만 어조나 표정으로 보아 어쩐지 우호적인 것 같다는 사실 만은 느껴져서, '이, 이탈리아 어는 모르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정말로 천애고아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좋아, 이 아주머니에게 일본어... 는 안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영어로 얘기해달라고 하자. 하지만 애초에 『영어로 말해주세요』라는 이탈리아 어 문장이 이미 상상도 가지 않아! 그걸 알면 이탈리아 어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는데!!' 처절한 딜레마에 사로잡히는 카미조. 실은 상대방이 영어가 통하는 상 대라면 떠듬떠듬 단어를 늘어놓아 플리즈 잉글리시라고 말하기만 해도 어떻게든 될 것 같지만, 역시 외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카미조는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한다. 카미조는 마침내 생각을 너무 많이 한 나머지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기 시작했지만, "Senta." 그런 그에게, 갑자기 옆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Lui e' un mio amico. La ringrazia per la Sua gentilezza." 술술 흐르는 것 같은 말에 아주머니는 어머나 라고 하듯이 얼굴을 들 고, "Prego." 홀가분한 듯이 말하더니 카미조에게 선뜻 등을 돌리고 인파 속으로 사 라지고 말았다. 한편 뒤에 남겨진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으아! 아주머니가 갑자기 포기했다?! 너 이 자식, 원래 같으면 이제 부터 아므의교우를 이룬 나와 아주머니가 인덱스랑 재회하기 위해 땀
  • 30. 과 눈물의 두 시간짜리 드라마를 펼쳐 보일 예정이었는데!! 그런데 갑 자기 끼어든 건 누구지? 이제 일본어라도 좋아, 설사 말이 통하지 않 더라도 걸고 넘어져주마!!" 저도 모르게 외쳤다. 이 넓은 세계에서는 어차피 이런 외침도 아무도 듣지 못할 거라며 카 미조는 절반 이상 패배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어머나, 그거 미안한 짓을 하고 말았군요. 저는 또 당신이 언어 때문 에 곤란을 겪고 계시는 것처럼 보여서 그랬지요." 문득 익숙한 말이 귀에 들어왔다. 일본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여자의 목소리 자체가 귀에 익다. "너..." 카미조는 돌아보았다. 학원도시에서 시차 여덟 시간, 머나먼 키오자에서 재회한 것은, "덧붙여 말하자면 아까, 그 사람은 제 친구입니다, 친절에 감사드립니 다 하고 말한 것인데요... 친구라니, 조금 뻔뻔스러웠을지도 모르겠네 요." "올소라! 어째서 여기에?!" 카미조가 외치자, 이런 때에도 새까만 수도복을 입은 훈훈한 수녀님은 생긋 미소를 지었다. - 4 - 올소라 아퀴나스.
  • 31. 전직 로마 정교 수녀로, 지금은 영국 청교도로 옮긴 몸이다. 원인은 「법의 서」라는 마도서 해독서를 저지하려 한 로마 정교와 대립했기 때문이다. 그 일은 이미 결말이 났고, 현재는 런던에서 느긋하게 지내 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수녀님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똑같이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수도복으로 빈틈없이 맨살을 감추고 있었다. 손에도 하얀 장갑을 꼈고 머리카락도 윔플로 완벽하게 덮여 있었다. 유일하게 맨살이 보이는 것 은 얼굴 정도다. 피부의 노출이 적은 것과 반비례해서 몸매는 풍만하 다고, 할까 여성적이라고 할까. 수수한 수도복이 오히려 몸의 선을 강 조하는 섹시 수녀님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그러는 당신은 왜 이런 곳에? 분명히 일본에 있는 학원도시에서 살고 계셨지요?" "아니, 나는 그냥 여행티켓에 당첨되었을 뿐이야. 그쪽은?" "실은 바로 며칠 전까지 이곳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잠깐, 올소라. 넌 분명 런던에 있었을 텐데. 대패성제 때에는 영국 도서관에서 전화로 조언도 해주었고." "그러니까 그 로마 정교에서 영국 청교도로 옮겨갈 때 좀 분주했던지 라 아직 짐이 이쪽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가재도구를 런던 에 보내기 위해 돌아온 것이지요." "여기, 네 고향이야?" 카미조가 질문하자 올소라는 "네"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대화지만 안심하고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 상황을 인식하자, 사실대로 말하면 카미조는 조금 눈물이 날 뻔했다. 어쨌거나 우연이든
  • 32. 뭐든 살았다! 하고 마음속으로 가슴 앞에서 양손을 모아쥐고 있었다. "흐, 흐음. 그건 그렇고 너 영국 청교도로 옮겨갔다면서 여전히 수도 복은 그대로네. '네세사리우스(필요악의 교회)' 놈들은 화 안내?" "으음. 하지만 가재도구를 옮긴다고 해도 아마쿠사식 여러분이 이삿짐 센터처럼 거들어주시기도 해서." "우에?! 아, 뭐야. 아까 그 대화로 돌아간 건가?! 하지만 아마쿠사식 이라면 그 아마쿠사식? 아마 타테미야인지 뭔지가 있는 곳이었던가? 그 녀석 지금 어떻게 지내?" "의복에 대해서는 괜찮습니다. 영국 청교도는 마술 대책의 일환으로 여러 가지 술식,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적극적이니까요. 우선 지금 의 저는 영국 청교도 로마파로 되어 있거든요. 아마쿠사식 여러분이 아마쿠사식이라는 틀로 남아 있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이번에는 수도복 이야기가!! 게다가 얘기를 완전히 무시하는 게 아니 라 일단 아마쿠사식도 언급하고! 뭐랄까, 굉장히 대화 리듬을 잡기가 어려워!!" 이 대화 패턴은 대충 나오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는 독특한 규칙에 따라 순서대로 이야기할 뿐인 것 같지만 받아들이는 쪽으로서는 상당히 대화가 어렵다. 한편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런데 당신은 쇼핑을 하는 중입니까?" "아니, 그게... 인덱스랑 둘이 여기까지 온 건 좋았는데. 그 녀석 이 탈리안 젤라토에 정신이 나가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어! 어떡하지, 올 소라. 낚싯줄 끝에 아이스크림을 묶어서 들고 있으면 걸려들까?! 내 생각에 승산 5대 5인 좋은 승부가 될 것 같은데!"
  • 33. "자, 자.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그러니까 당신과 인덱스 씨 두 사람은 여행으로 온 것뿐이라는 겁니까? 특별히 학원도시의 심부름을 온 게 아니라." "또 대화가 되돌아간! ...건 아닌가? 하지만 심부름을 오려고 해도 거 의 지구 반대쪽이라먼 너무 먼 것 같은데." "어쨌든 시간에 조금 여유가 있으신 거지요? 여기에서 만난 것도 인연 이니, 마침 잘됐습니다. 실은 이삿짐을 정리할 일손이 부족했거든요. 너무 한가하고 할 일이 없으시다면 점심을 만들어드릴 테니 꼭 좀 도 와주세요." "아니, 되돌아갔어! 난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 온 건데 자기 좋을 대로 캔슬하고 있다?! 무, 무엇보다 우리는 지금부터 관광지를 돌 거고, 음 식점은 꽤 많이 있으니까 일부러 식사를 만들어주지 않아도." 평범하게 대꾸했다고 생각했는데, 올소라는 의아한 듯이 새삼 이쪽을 쳐다보았다. 카미조의 얼굴이라기보다 복장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 녀는 지갑 체인이나 손에 든 짐 등을 확인하더니, "어머나. 일단 여쭤보겠는데요, 그 차림으로 말씀이신가요?" "복장에 대해서 너한테 이런저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어!" 늦더위도, 찌는 듯한 무더위도 물러가긴 했지만 아직 반소매를 입어야 할지 긴소매를 입어야 할지 망설여지는 더위 속에서, 위에서 아래까지 새까만 수도복으로 몸을 감싼 수녀님에게 카미조는 울부짖었다. 하지만 올소라는 무슨 시덥잖은 소리를 하느냐는 눈으로 이쪽을 보며, "일본과 달리 이쪽에는 수녀라면 얼마든지 있는데요."
  • 34. "어라, 올소라인데 평범한 대답?!" "그것보다." 올소라는 카미조의 놀라움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검지로 하나하나 날카 롭게 가리키며, "새것이나 마찬가지인 슈트케이스를 끌고 여행용 팸플릿을 한 손에 든 채 카메라 달린 휴대전화까지 갖고 있다니... 하아,그래서야 사기꾼이 나 소매치기 여러분께 '어서 오세요. 원하시는 물건은 지갑인가요, 여 권인가요?'라고 말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우웃?!" 카미조는 당황해서 휴대전화와 팸플릿을 집어넣는다. "하, 하지만 올소라의 입에서 사기꾼이니 소매치기니 하는 말이 나오 는 건 좀 의외일지도 모르겠어." 올소라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여기는 아직 작은 도시니까 별일은 없지만, 세계적으로 보아 이탈리 아의 대도시에는 여행자에게 혹독한 환경입니다. 음식점도 마찬가지. 바가지를 씌우는 가게는 관광지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불할 돈이 표시가격의 열 배가 되는 것도 당연하지요. 큰길에 있다거나, 일본어 소개문 간판이 세워져 있다거나, 그 정도의 정보만으로 판단했다간 엄 청난 일을 당하게 될 걸요?" "우와아! 본고장의 말은 굉장히 와닿아!! 그럼 난 이제부터 어떻게 하 면 되지?!" "그러니까 제가 식사를 대접하면 그런 종류의 가게에 걸려들 일도 없
  • 35. 다는 결론은 어떨까요? 그런 가게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한 요령도 먹으면서 가르쳐드릴 수 있고요. 자, 자. 이런 곳에 서서 얘기하는 것 도 뭣하고, 금서목록 수녀님과 합류하려 해도 집합장소는 필요하지 않 겠어요? 하긴 키오자 중심부는 세로가 1,300미터, 가로는 400미터 정 도 되는 작은 곳이니까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문제는 없겠 습니다만." 망설임 없이 술술 나오는 말에 카미조는 저도 모르게 조금 감동했다. 당연하지만 이탈리아에 대한 것은 이탈리아 인에게 부탁하는 게 제일 이라는, 상당히 기본 중의 기본 같은 교훈을 얻었으나 거기에서 문득 생각했다. "하지만 일단 관광에 전념하고 싶은데 말이지..." "아뇨, 아뇨. 저기 있는 젤라토 전문점에 계시던 인덱스 씨도 그렇게 즐거워 보였는걸요." ................................................................. ................, 응? "잠깐, 올소라. 지금 얘기가 어디로 튀었어?" "그렇지. 관광이라면 키오자의 일반주택을 보신다는 건 어떨까요? 아 름다운 관광명소라면 돈만 내면 실컷 보고 다닐 수 있지만, 반면 거기 에 사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분위기는 가이드만 따라다녀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랍니다." "잠, 되돌아가지 마! 그 의견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전에 지금 인덱스라고...!" "정말,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고 있으면서. 이 행복한 놈ㅡ 이잖 아요."
  • 36. "우왓ㅡ?! 나아간 거야, 되돌아간 거야. 어느 쪽이야!!" 카미조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지만 올소라는 훈훈하게 미소를 지을 뿐. "인덱스 씨라면 저기 있는 젤라토 전문점의 유리창에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아까 발견했습니다." "가능하다면 그 말을 제일 먼저 해줬으면 좋았을 걸!! ...그런데 그렇 다면 인덱스는 지금 어디에?" "그러니까 버스 정류장 읽는 법은." "당장 이야기의 궤도를 원래대로 되돌리겠는데 인덱스는 어디에?!" 어라? 하며 올소라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그렇지, 그렇지. 그랬지요. 제 친구에게 부탁해서 먼저 저희 집 쪽으 로 초대했습니다." "그 자식, 날 두고?!" "이제부터 점심을 먹을 거라고 했더니 희희낙락 따라간 것처럼 보였는 데요." "제기이이이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