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deShare a Scribd company logo
1 of 10
Download to read offline
정림사지(定林寺址)
11 이수진 이혜진
12 김주연 서지아

분

류

유적건조물/불교/사찰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 답사 포인트
1. 정림사의 창건배경과 그에 관련한 백제 부흥 정신에 대해서 알아보자.
2. 정림사의 가람배치와 그에 따른 전반적 건물의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자.
3. 정림사 유물에서 나타나는 백제와 고려 시기의 특징을 비교해보자.
Ⅰ. 들어가며
백제는 ‘문화 왕국’이다. 도읍을 세 번씩이나 옮기며 나라의 운명을 힘겹게 끌고 갔지만
백제인들의 창조적 열정은 대단했고, 예술적 슬기는 놀라웠다. 그중 정림사지는 숱한 백제역
사의 풍상 속에서도 굳건히 부여를 지키고 있어 옛 왕도의 체면을 지키고 있다.
백제 성왕은 538년 봄에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왕궁과 관청을 비롯하
여 사비도성 안을 중앙·동·서·남·북 5부로 가르고 그 안에 거주민을 조성하는 도시계획과 더
불어 사찰을 건립하였다. 부여 정림사지는 백제도성 건설과 함께 세워진 이후, 백제 사비시
대에 절정을 이루는 불교 문화를 바탕으로 세워진 사찰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찰이라
고 평가받는다. 정림사지 석탑 1층 탑신 표면에 적힌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
적인 내용은 정림사지가 백제 왕실 내지 국가의 명운과 직결된 상징적인 공간으로 존재했음
을 시사한다.
이처럼 백제 사비시대에 절정을 이루는 불교 문화에서도 중요한 유적지라 일컬을 수 있는
정림사지 유적의 특징을 살펴보며 여유롭고 화합지향적인 백제의 선진문화를 살펴보자.

Ⅱ. 정림사의 역사성
1. 창건배경
백제는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의 기반을 단단하게 다지게 된다.
그것이 가능했던 배경으로는 불교사상을 국가질서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던 사실을 들 수 있
다. 이 시기에 백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도성 내외에 수많은 사찰을 건립하게 하였고, 더 나
아가 백제왕이 직접 사찰건립에 관여하기도 하였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특히 정림사는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후 도성 한 가운데 대표적인 사찰로 건립되었다. 도
성 한 가운데 이와 같은 사원을 건립한 것은 국가의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려울 것임
을 미루어 볼 때 국가적 차원에서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림사는 사비 천도 후 흐
트러진 사회질서를 불교의 힘으로 바로잡고,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했던 시기에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서는 국가의 지도력을 불교를 통해 확
립하고자 했으며, 그 작업의 일환으로 도성 한 가운데 사회통합을 열망하면서 정림사를 건
립하였던 것이다. 이런 전후 사정을 볼 때, 정림사는 당시 나라 안에서 가장 기술이 뛰어난
장인을 총동원하여 국가적 차원의 목적을 가지고 당대 최고의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사찰이라 할 수 있다.

2. 정림사의 역사
정림사가 백제시대에 창건된 것은 확실했지만, 이 절을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그리고 창
건 당시 절 이름이 무엇인지는 문헌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1942~43년에 걸쳐 일
본인 후지사와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당시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
초(太平八年戊辰定林大藏當草)’라는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정림사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1)
또한 이 조사를 통하여 정림사의 가람배치가 확인됨으로써, 전형적인 1탑1금당양식의 가람
배치를 하고 있는 절터의 대표적인 예로 정림사지를 꼽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979년과 1980년에 충남대학교 주관으로 다시 발굴 조사가 실시되어 창건 당시 가
람의 규모와 성격을 파악하고 그 변천과정을 조사하게 되었다.2) 발굴은 1979년 10월 15일
에 착수되고 남쪽으로 중문지부터 개시하여 그해 연말까지는 금당지 후면에 이르는 범위에
대한 조사를 완료하였다.3) 이러한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정림사지의 정비·복원연구가 진행
되었으나 조사자 사이에 가람배치안이 다르고 유구 간 선후관계도 불명확하여 재발굴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우선 강당지 및 그 주변, 동회랑지 일대를 중심으로 발굴조
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백제시대 정림사 및 고려시대 정림사 가람배치와 그 변천과정 일
부를 규명하게 되었다.4)

3. 정림사와 백제 부흥
현종조 정림사 건축은 1942년의 발굴에 의하여 고려 현종 19년(1028)에 해당하는 연대(대
평 8년)와 함께 ‘정림사’라는 절이 재건되었음을 말해주는 기와 명문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
다. 그 명문은 ‘대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이고, 이 명문기와
에서 절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또한 정림사지 5층탑 뒤에 자리한 높이 5.6미터의 고려시대
석불좌상도 바로 이 무렵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조에 백제 부흥에 대한 관심
과 문화적, 정신적인 기운의 발흥에서 비롯되어 약 400년 만에 복원된 정림사는 단순한 사
원의 복원을 뛰어 넘어, ‘백제정신의 복원’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5)
정림사는 660년 부여 도성 함락 당시 당군에 의해 소멸되었고, 당시 오직 정림사지 5층
석탑만이 소정방의 ‘백제평정’의 기념탑 역할을 하면서 겨우 생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
시대에 정림사는 백제 멸망 ‘기념’의 공간으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고려가 고구려 계승을 표
방하며 후백제를 무력적으로 제압함으로써 통일 왕조를 이루어 사실상 백제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고려조에서 백제 부흥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는 상황이었
다. 따라서 백제 부흥이 두드러지게 일어나지 못하고, 정림사 역시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려조에서 백제문화의 복원에 대한 관심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근거가
있다. 당시 이미 백제의 지상 건축물들의 흔적은 찾기 어려웠으나, 백제의 마지막 왕도였던
부여 시내 한복판에 백제를 상징하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남아있었다. 이 정림사지 5층 석
탑을 본 따 고려시대에 옛 백제지역에서 백제식의 고려석탑이 건축된 사실이 있다. 부여 인
근 지역에 서천 비인면의 탑과 공주 계룡산의 남매탑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고려시대 백제 부흥에의 문화적, 정신적 기운의 발흥과 함께 정림사의 재건은 주
목할 만하다. 방치되어 있던 정림사지가 현종대에 이르러 그 기능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 다시 절이 복원되고, 금당이 세워지고 미륵석불 좌상이 안치됨에 따라 정림사는 백

1)
2)
3)
4)
5)

이왕기, 2006, 「백제사찰건축의 조형과 기술」, 주류성, p.42
차용준, 2000, 「전통문화의 이해- 3권」, 전주대학교출판부, p.49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건축유적 발굴조사 자료집」, p.294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한국 고고학저널」, pp.114-pp.115
윤용혁, 2009, 「충청 역사문화 연구」, 서경문화사
제 멸망의 공간에서 다시 ‘신앙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하였다.6)

그림1. 후지사화에 의해 출
토된 명문기와

그림 2. 정림사 건물지개요

Ⅲ. 정림사지의 가람배치와 건물
1. 정림사지의 가람배치
정림사지는 583년 백제가 사비로 도움을 옮긴 후 흐트
러진 사회질서를 불교의 힘으로 바로잡고, 왕권을 회복하
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부여 시내 한가운데 남향으로 창
건되었다. 정림사지는 1942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의한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7차례에 걸쳐 조사가 진행되었다. 발
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창건가람으로 추정되는 강당지, 부
속건물지(강당지 좌우 각 1기), 강당지 우측 부속 건물지
동편의 구상유구, 석축배수로 1기, 소성 유구 1기 등이 확
인되었다.
정림사지는 남향한 일탑식 가람으로서 남쪽에서부터 중
문터와 5층석탑, 금당터, 강당터 등이 남북을 중심으로 배
치되었다. 강당터 좌우에는 작은 건물을 각 한 개씩 배치
했던 것으로 보이나 확실한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7) 중문
과 이 건문터 사이에 회랑이 연결되었다. 백제시대 정림사
지는 강당지 좌,우에 별도의 독립된 건문지가 회랑지까지

6) 윤무병, 1981, 「정림사지 발굴조사보고서」, 민족문화, p.70
7) 이왕기, 2006, 「백제사찰건축의 조형과 기술」, 주류성, p.45
이어지도록 남북방향으로 길게 구축되어 있다.
정림사지에는 본래 목탑을 세웠는데, 뒤에 목탑을 없애고 5층의 석탑을 세웠다. 정림사 오
층석탑은 백제를 대표하는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정림사 오층탑은 목조의 조형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석재가 갖는 재료의 특성을 적절히 살리면서 전체적으로 목조탑의 조형미를 갖춘
석탑으로 평가된다. 이와 같이 정림사 오층석탑은 목조탑의 조형을 석탑으로 번안하여 새로
운 조형세계의 지평을 열어간 대표적인 탑이다.
전체적인 배치형식은 1942년 발굴조사에서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 중심축선에 따라
배치되고 중문에서 강당에 이르는 회랑이 있는 일탑식 가람배치임이 밝혀졌다. 전체 배치는
미륵사지처럼 정확한 균제에 의해 조정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격이 떨어지는 배치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2. 정림사지의 건물
1) 중문
석탑에서 남쪽으로 19.98m 거리에 건물의 중심을 두고 있다. 초석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초석 밑에 깔았던 적심석은 거의 그대로 발견 되었다. 적심은 지표면에서 20~30cm 깊이에
위치해 있다. 기단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그 흔적을 그대로 인정하여 기단크기
를 설정할 경우 너무 크기 때문에 이는 중문의 기단으로 보기 어렵다. 건물의 크기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11.3X5.3m 크기인데 적심석8)을 기준으로 한 수치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다. 중문은 정면 3칸에 측면은 회랑과 같은 폭의 1칸 규모이다.
기단은 가공석 기단으로 만들고 공포는 하양식 공포9)를 짜 올렸으며, 지붕은 양쪽 용마루
끝에 치미10)를 올린 팔각지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금당
석탑 중심에서 26.2m 북으로 떨어져 금당의 중심이 자리잡고 있다. 다만 건물의 남북 중
심선이 서쪽으로 24cm 치우쳐있다. 기단은 2중 기단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당 기
단중 상층 기단은 훼손되어 규모를 알 수 없으나 하층기단은 적심석이 발견되어 그 규모를
알 수 있는데 그 크기는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18.75X13.8m이다. 하층기단의 적심석을 기
준으로 기단의 크기를 추정해 보면 동서길이 20.55m, 남북길이 15.6m가 될 것으로 보인다.

3) 강당
강당은 금당에서 북쪽으로 31.7m 떨어진 지점에 건물의 중심을 두고 있다. 금당은 중심축
선에서 서편으로 약간 치우친 반면 강당은 동편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특이한 점으로 볼 수
있다. 기단의 구성으로 보아 원래 백제시대 강당이 있었으나 폐허된 후 고려시대 재건하면
서 기단을 새로 조성하고 백제시대 적심석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기단을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결과 전면 기둥 중심에서 약 120cm 떨어진 곳에서 높이 50cm의 백제 기단
8) 돌 따위를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는 돌
9) 공포는 기둥 위에 여러 개의 부재를 연결하고 짜 맞춰 구성되는 곳으로 목조건축물에서 가장 아름
답고 복잡한 부분이다.
10) 전각(殿閣), 문루(門樓) 따위 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
끝부분이 확인되었다.

4) 회랑
석탑과 금당을 에워싸고 있는 회랑은 동서길이 52.2m, 남북길이는 83.5m이다. 동회랑터
남단은 훼손되어 기둥 간격을 알 수 없으나, 서회랑터는 석탑과 금당 사이 부분의 기단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기단 폭은 약 5m 정도가 됩니다. 동회랑의 적심석 보간 길이가 약
4.2m이며 이를 서회랑에 적용해 본다면 기둥 중심에 양 기단 끝까지는 각각 40cm 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동회랑의 기단 폭도 5m였다고 볼 수 있다.

Ⅳ. 정림사지의 유물
1.

오층석탑 (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
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11)’이
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
림기법12)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
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목조건축물의 공포부를 모방한 2단의 옥개받침을 두었으며 1단은 직
각으로 2단은 밑부분을 경사지게 깎아 장식적 기교를 주었다. 기둥 위에 창방석과 평방석을
짜 맞추지 않았다. 옥개석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정림사지 5층석
탑의 1층부터 4층까지는 옥개석이 8매, 5층에는 4매로 조립되었다. 또한 옥개석의 처마가
전각에서 약간 들려있어 경쾌감을 주며 처마 모서리에는 풍탁을 달았던 흔적이 있다.13)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
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탑은 가까이 다가설수록 더 웅장하게 보이도록 고
안되었는데, 백제만의 건축 비법인 하앙식14) 구조에 그 비밀이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11) 정림사탑과 관련해 학자들이 ‘평제탑’이라 규정하는 것은 일제시대 식민사관적 의도가 작용한 것
이었다. 본디 ‘평제탑’이라는 용어 자체는 조선시대 읍지에 널리 도장하고 있어 용어 자체의 연원은
좀 더 오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령 18세기 영조년간에 제작된 『여지도서』 부여현 고적조에서는
‘평제탑’을 당장 소정방의 백제정벌 기념비로 규정하고 있다.
12) 기둥의 중간이 배가 부르고 아래위로 가면서 점점 가늘어지게 만드는 방법
13) 엄기표, 2004, 「정말 거기에 백제가 있었을까」, p.166-168
14) 하앙식 구조란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하여 지렛대의 원리로 일반 구
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
아름다운 작품이다.

2.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108호)
충청남도 부여의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
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
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
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15)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
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
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
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그림 7 . 석조여래좌상

현재 불상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정림사
는 6세기 중엽부터 백제 멸망 때까지와 고려시대에 두차례에 걸쳐 번창하였던 것으로 추정
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3. 활석제삼존불
금당지 서북쪽으로 서회랑지와의 중간지점에서 1점 출토되었다. 삼존불은 화기를 입어 대
부분 손상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전체를 살필 수 가 없으나 석촌의 한 면에 높게 부조되고 있
다. 3존 모두 얼굴이 파실되고 우측의 협시는 그 발과 대좌만이 남아 있다. 주존은 법의가
통견16)으로 앞면에 V자형의 주름이 반복되었고, 옷자락이 좌우로 퍼지면서 발등까지 덮고
있다. 좌측의 협시17)도 옷자락이 지느러미처럼 좌우로 벌어졌고 천의18)가 앞면에서 X자형으
로 교차되고 있다. 3존불 모두가 연판을 새긴 낮은 원형대좌를 두고 그 밑에 방형의 대좌가
조각되었다. 그런데 이 방형대좌는 그 앞면과 측면에 단판의 연꽃무늬가 일렬로 새겨져 있
어 이채롭다. 그리고 삼존불 뒷면에는 아무런 조각도 없는데 그 하단에 요구19)가 있다. 석촌
의 높이는 11.4cm이며 너비는 8.2cm 두께 3.2cm이다. 파손된 부분은 많지만 전체적으로 양
감이 풍부하고 강한 신체조형과 백제 특유의 조형감각을 볼 수 있다.

15) 태양의 빛처럼 불교의 진리가 우주 가득히 비추이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부처는 다른 부처
와는 달리 설법하지 않는 점이 특징이다. 불교의 진리, 곧 불법(佛法) 그 자체를 상징하는 법신불
(法身佛)이므로 불상으로서 형상화될 수 없는, 추상적인 개념에 속한다.
16) 앞가슴을 둘러 양어깨를 덮어 입는 부처의 옷차림
17) 부처를 좌우에서 모시는 두 보살
18) 천자가 입는 옷
19) 오목한 도랑
4. 소조불
회랑 안쪽에 서남우에서 발견된 기와구덩이 속에
서 도용의 파편들과 함께 적지 않은 수량이 출토되
었다. 적갈색으로 소성된 불상들의 파편들인데 얼굴
이 완전하게 남아있는 1점을 포함하여 6점의 불
두20)와 등신대21)보다 작게 만들어진 동체파편이 특
히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이외는 대부분
이 몸체 각부의 잔편들인데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림 8 . 소조불 불상 파편
파편들도 다수 발견되었다. 얼굴이 잘 남아있는 불
두는 그 높이가 10.5cm인데 높고 뚜렷한 코에 입은 작게 표현하였으며 머리는 소발22)인 듯
하다. 목에는 삼도를 선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 하단면의 중앙에 목심을 꽂았던 방공이
남아있다. 그런데 얼굴과 목에는 황갈색의 유약으로 생각되는 물질이 칠해져 있다. 그리고
등신대보다 약간 작은 편인 불신의 동체 파편은 배위로 올려진 두손으로 보주23)를 받들고
있는데 조각수법이 매우 생동적이어서 소위 양수봉주불을 대표할 수 있는 전형적인 작례로
서 그의 학술적 가치가 중요시되고 있다. 양수봉주불은 중국 사천성 성도출토의 남조불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으며 백제에서 널리 유행된 조상형식의 하나이다. 그리고 소조불의 각
부분에는 녹색유나 흑색안유를 칠하였거나 흑색물감으로 여러가지 무늬를 표시하기도 했다.

5. 도용
흙으로 빚어 구운 도용인데 이것을 이상 또는 토우라 한다. 정림사지의 기와구덩이에서 발
견된 도용의 파편은 모두 63점인데 무인상, 관인상, 시녀상 등으로 구분되며 인상 이외에
수형의 파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수점 포함되어 있다.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것은 하나도
없으나 농관이라고 부르는 중국 육조식의 관모를 쓰고 있거나 물결모양의 두발에서 눈이 깊
고 코가 큰 이국적인 모습에서 호인의 풍모를 엿볼 수 있는 도용들이 등장해 있어서 매우
이채로운 출토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도용들은 머리와 신체부분을 별도로 제작한 후 그것을
서로 결합시켜서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하였는데 발굴 당시에는 수부 상반신 하반신 등의
파편으로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정림사지 출토의 도용들은 중국 북위시대의 분기에서 발견
된 도용들과 그 모습, 제작방법 크기 등에 있어서 유사한 점이 적지 않으며 서로 관련되고
있어서 양 지역의 문화교류를 시사해주고 있다.

6. 와전류
정림사지에서는 많은 수량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백제 및 고려시대의 암·수키와를 비롯해
암막새, 수막새, 서까래기와 인각명기 전편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어 사원의 창건시기와 중건
시기를 밝히는데 주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연꽃무늬가 새겨진 수막새는 단판, 복판, 세판 등 여러가지 형식으로 구분되고 있는데 그 제
작시기가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백제의 수막새는 전반적으로 단판연화
문이 장식되어 있는데 판단이 반전되었거나 첨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6세기 중
20)
21)
22)
23)

부처의 머리
사람의 크기와 같은 크기
흰 머리카락
탑이나 석등 따위의 맨 꼭대기에 얹은 구슬 모양의 장식
엽을 중심으로 한 유물들이다. 그리고 통
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제작된 약간의
수막새가 출토되었는데 주연부에는 주문이
모두 배치되고 있으며 연화문의 양식은 복
판 또는 세판으로 구분된다. 이들 중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볼 수 있는 수막새
의 수량은 근소하였다. 서까래기와는 모두
백제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단판형인데 연
꽃잎수가 8엽또는 12엽으로 장식되고 있
다. 암막새는 당초문24)과 귀면문이 배치되
고 있는데 모두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이
다. 귀면문 암막새는 중앙에 귀면을 간략하게 의장시키고 이의 좌우에는 귀면의 입에서 나
오는 서기문이 당초문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한편 막대한 수량이 출토된 백제시대와 고려시대 암·수키와의 파편들은 와질과 문양구성
에서 그 시대를 구분할 수 있다. 백제시대의 기와들은 대개가 연질이고 무문의 기와가 대부
분인데 문양이 있는 것을 보면 승석문과 격자문 그리고 평행선조문에 한정되었다. 이에 대
하여 고려시대 기와들은 경질로서 어골문을 지문으로 하여 거기에 여러 종류로 구성된 기하
학적 선문을 배합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사명과 연호가 새겨진 고려시대의
명문 암키와가 강당지 주변에서 발견되어 이의 제작연대와 사명을 밝힐 수 있어서 중요시
되고 있다. 어골문을 치밀하게 나타내고 있는 암키와의 중심에 장방형의 구획을 만들어 「대
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라는 좌서2행의 명문을 양각했다. 대평팔년은 고려현종19년으로
정림사의 중건시기를 이 명문와를 통해 확실히 밝힐 수가 있었다.

Ⅴ. 나오며
지금까지 정림사의 역사, 가람배치, 건물, 유물, 관련 인물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정림사는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후 도성 한 가운데 건립한 대표적인 사찰이다. 사비로 천도 후 백제
는 흐트러진 사회질서를 바로잡고,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작업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정
림사 창건은 그 작업의 일환으로, 조정에서는 도성 한 가운데 사원을 건립함으로써, 불교를
토해 국가의 지도력을 확립하고 사회통합을 열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후 사정을
볼 때 정림사는 당시 나라 안에서 가장 기술이 뛰어난 장인을 총동원하여 당대 최고의 건축
물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사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라도 절터도 무너진 숱한 역사의 풍상 속에서도,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굳건히 부여를
지키고 있다. 역사 속에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단순한 돌탑이 아니라 백제의 자존심이며
예술혼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우리의 몸속에도 맥맥이 흐르고 있는 문화 민족의 자긍심을
느끼며 이번 답사를 통해 정림사지의 역사성과 다양한 유물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24) 덩굴무늬
Ⅵ. 참고문헌
윤무병, 1981, 『정림사지 발굴조사보고서』, 민족문화
이도학, 2006, 『불교의 나라 백제 사비성』, 주류성
이왕기, 2006, 『백제 사찰건축의 조형과 기술』, 주류성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건축유적 발굴조사 자료집 사찰편1』,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한국 고고학저널 2007』, 주류성
이동영, 2011, 「사비시대 부여지역 가람건축의 특성에 관한 연구 – 평지 1탑식 가람을 중심
으로 = The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Puyeo district’s Buddhist Temple Architecture
in Sabi dynasty」, 『농촌건축 : 한국농촌건축학회논문집』 13-2, 한국농촌건축학회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정림사지박물관 홈페이지 http://www.jeongnimsaji.or.kr/

More Related Content

Similar to jy22

재활건강증진학과 22041127 윤수빈 최종 답사보고서.pdf
재활건강증진학과 22041127 윤수빈 최종 답사보고서.pdf재활건강증진학과 22041127 윤수빈 최종 답사보고서.pdf
재활건강증진학과 22041127 윤수빈 최종 답사보고서.pdfssuser715d39
 
[새건협 도시 건축_답사]_남산-해방촌__식민지배의_흔적과_해방ㆍ분단의_산물_해방촌
[새건협 도시 건축_답사]_남산-해방촌__식민지배의_흔적과_해방ㆍ분단의_산물_해방촌[새건협 도시 건축_답사]_남산-해방촌__식민지배의_흔적과_해방ㆍ분단의_산물_해방촌
[새건협 도시 건축_답사]_남산-해방촌__식민지배의_흔적과_해방ㆍ분단의_산물_해방촌정민 이
 
2011 고구려의 북을 울려라 취지문 프린트용
2011 고구려의 북을 울려라 취지문 프린트용2011 고구려의 북을 울려라 취지문 프린트용
2011 고구려의 북을 울려라 취지문 프린트용Hyun Chul Kim
 
[베트남] 다낭 호이안 후에 여행안내
[베트남] 다낭 호이안 후에 여행안내[베트남] 다낭 호이안 후에 여행안내
[베트남] 다낭 호이안 후에 여행안내Mal-Yong Yoon
 
沸流百濟 小考
沸流百濟 小考沸流百濟 小考
沸流百濟 小考Soojin Shin
 

Similar to jy22 (6)

재활건강증진학과 22041127 윤수빈 최종 답사보고서.pdf
재활건강증진학과 22041127 윤수빈 최종 답사보고서.pdf재활건강증진학과 22041127 윤수빈 최종 답사보고서.pdf
재활건강증진학과 22041127 윤수빈 최종 답사보고서.pdf
 
[새건협 도시 건축_답사]_남산-해방촌__식민지배의_흔적과_해방ㆍ분단의_산물_해방촌
[새건협 도시 건축_답사]_남산-해방촌__식민지배의_흔적과_해방ㆍ분단의_산물_해방촌[새건협 도시 건축_답사]_남산-해방촌__식민지배의_흔적과_해방ㆍ분단의_산물_해방촌
[새건협 도시 건축_답사]_남산-해방촌__식민지배의_흔적과_해방ㆍ분단의_산물_해방촌
 
2011 고구려의 북을 울려라 취지문 프린트용
2011 고구려의 북을 울려라 취지문 프린트용2011 고구려의 북을 울려라 취지문 프린트용
2011 고구려의 북을 울려라 취지문 프린트용
 
[베트남] 다낭 호이안 후에 여행안내
[베트남] 다낭 호이안 후에 여행안내[베트남] 다낭 호이안 후에 여행안내
[베트남] 다낭 호이안 후에 여행안내
 
[베트남] 다낭 호이안 후에 여행안내
[베트남] 다낭 호이안 후에 여행안내[베트남] 다낭 호이안 후에 여행안내
[베트남] 다낭 호이안 후에 여행안내
 
沸流百濟 小考
沸流百濟 小考沸流百濟 小考
沸流百濟 小考
 

More from Joo Yeon Kim (16)

jy25
jy25jy25
jy25
 
jy24
jy24jy24
jy24
 
jy24
jy24jy24
jy24
 
jy23
jy23jy23
jy23
 
jy17
jy17jy17
jy17
 
jy15
jy15jy15
jy15
 
jy14
jy14jy14
jy14
 
jy13
jy13jy13
jy13
 
jy12
jy12jy12
jy12
 
jy8
jy8jy8
jy8
 
jy7
jy7jy7
jy7
 
jy6
jy6jy6
jy6
 
jy6
jy6jy6
jy6
 
jy4
jy4jy4
jy4
 
jy3
jy3jy3
jy3
 
jy2
jy2jy2
jy2
 

jy22

  • 1. 정림사지(定林寺址) 11 이수진 이혜진 12 김주연 서지아 분 류 유적건조물/불교/사찰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 답사 포인트 1. 정림사의 창건배경과 그에 관련한 백제 부흥 정신에 대해서 알아보자. 2. 정림사의 가람배치와 그에 따른 전반적 건물의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자. 3. 정림사 유물에서 나타나는 백제와 고려 시기의 특징을 비교해보자.
  • 2. Ⅰ. 들어가며 백제는 ‘문화 왕국’이다. 도읍을 세 번씩이나 옮기며 나라의 운명을 힘겹게 끌고 갔지만 백제인들의 창조적 열정은 대단했고, 예술적 슬기는 놀라웠다. 그중 정림사지는 숱한 백제역 사의 풍상 속에서도 굳건히 부여를 지키고 있어 옛 왕도의 체면을 지키고 있다. 백제 성왕은 538년 봄에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왕궁과 관청을 비롯하 여 사비도성 안을 중앙·동·서·남·북 5부로 가르고 그 안에 거주민을 조성하는 도시계획과 더 불어 사찰을 건립하였다. 부여 정림사지는 백제도성 건설과 함께 세워진 이후, 백제 사비시 대에 절정을 이루는 불교 문화를 바탕으로 세워진 사찰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찰이라 고 평가받는다. 정림사지 석탑 1층 탑신 표면에 적힌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 적인 내용은 정림사지가 백제 왕실 내지 국가의 명운과 직결된 상징적인 공간으로 존재했음 을 시사한다. 이처럼 백제 사비시대에 절정을 이루는 불교 문화에서도 중요한 유적지라 일컬을 수 있는 정림사지 유적의 특징을 살펴보며 여유롭고 화합지향적인 백제의 선진문화를 살펴보자. Ⅱ. 정림사의 역사성 1. 창건배경 백제는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의 기반을 단단하게 다지게 된다. 그것이 가능했던 배경으로는 불교사상을 국가질서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던 사실을 들 수 있 다. 이 시기에 백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도성 내외에 수많은 사찰을 건립하게 하였고, 더 나 아가 백제왕이 직접 사찰건립에 관여하기도 하였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특히 정림사는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후 도성 한 가운데 대표적인 사찰로 건립되었다. 도 성 한 가운데 이와 같은 사원을 건립한 것은 국가의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려울 것임 을 미루어 볼 때 국가적 차원에서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림사는 사비 천도 후 흐 트러진 사회질서를 불교의 힘으로 바로잡고,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했던 시기에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서는 국가의 지도력을 불교를 통해 확 립하고자 했으며, 그 작업의 일환으로 도성 한 가운데 사회통합을 열망하면서 정림사를 건 립하였던 것이다. 이런 전후 사정을 볼 때, 정림사는 당시 나라 안에서 가장 기술이 뛰어난 장인을 총동원하여 국가적 차원의 목적을 가지고 당대 최고의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사찰이라 할 수 있다. 2. 정림사의 역사 정림사가 백제시대에 창건된 것은 확실했지만, 이 절을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그리고 창 건 당시 절 이름이 무엇인지는 문헌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1942~43년에 걸쳐 일 본인 후지사와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당시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
  • 3. 초(太平八年戊辰定林大藏當草)’라는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정림사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1) 또한 이 조사를 통하여 정림사의 가람배치가 확인됨으로써, 전형적인 1탑1금당양식의 가람 배치를 하고 있는 절터의 대표적인 예로 정림사지를 꼽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979년과 1980년에 충남대학교 주관으로 다시 발굴 조사가 실시되어 창건 당시 가 람의 규모와 성격을 파악하고 그 변천과정을 조사하게 되었다.2) 발굴은 1979년 10월 15일 에 착수되고 남쪽으로 중문지부터 개시하여 그해 연말까지는 금당지 후면에 이르는 범위에 대한 조사를 완료하였다.3) 이러한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정림사지의 정비·복원연구가 진행 되었으나 조사자 사이에 가람배치안이 다르고 유구 간 선후관계도 불명확하여 재발굴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우선 강당지 및 그 주변, 동회랑지 일대를 중심으로 발굴조 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백제시대 정림사 및 고려시대 정림사 가람배치와 그 변천과정 일 부를 규명하게 되었다.4) 3. 정림사와 백제 부흥 현종조 정림사 건축은 1942년의 발굴에 의하여 고려 현종 19년(1028)에 해당하는 연대(대 평 8년)와 함께 ‘정림사’라는 절이 재건되었음을 말해주는 기와 명문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 다. 그 명문은 ‘대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이고, 이 명문기와 에서 절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또한 정림사지 5층탑 뒤에 자리한 높이 5.6미터의 고려시대 석불좌상도 바로 이 무렵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조에 백제 부흥에 대한 관심 과 문화적, 정신적인 기운의 발흥에서 비롯되어 약 400년 만에 복원된 정림사는 단순한 사 원의 복원을 뛰어 넘어, ‘백제정신의 복원’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5) 정림사는 660년 부여 도성 함락 당시 당군에 의해 소멸되었고, 당시 오직 정림사지 5층 석탑만이 소정방의 ‘백제평정’의 기념탑 역할을 하면서 겨우 생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 시대에 정림사는 백제 멸망 ‘기념’의 공간으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고려가 고구려 계승을 표 방하며 후백제를 무력적으로 제압함으로써 통일 왕조를 이루어 사실상 백제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고려조에서 백제 부흥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는 상황이었 다. 따라서 백제 부흥이 두드러지게 일어나지 못하고, 정림사 역시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려조에서 백제문화의 복원에 대한 관심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근거가 있다. 당시 이미 백제의 지상 건축물들의 흔적은 찾기 어려웠으나, 백제의 마지막 왕도였던 부여 시내 한복판에 백제를 상징하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남아있었다. 이 정림사지 5층 석 탑을 본 따 고려시대에 옛 백제지역에서 백제식의 고려석탑이 건축된 사실이 있다. 부여 인 근 지역에 서천 비인면의 탑과 공주 계룡산의 남매탑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고려시대 백제 부흥에의 문화적, 정신적 기운의 발흥과 함께 정림사의 재건은 주 목할 만하다. 방치되어 있던 정림사지가 현종대에 이르러 그 기능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 다시 절이 복원되고, 금당이 세워지고 미륵석불 좌상이 안치됨에 따라 정림사는 백 1) 2) 3) 4) 5) 이왕기, 2006, 「백제사찰건축의 조형과 기술」, 주류성, p.42 차용준, 2000, 「전통문화의 이해- 3권」, 전주대학교출판부, p.49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건축유적 발굴조사 자료집」, p.294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한국 고고학저널」, pp.114-pp.115 윤용혁, 2009, 「충청 역사문화 연구」, 서경문화사
  • 4. 제 멸망의 공간에서 다시 ‘신앙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하였다.6) 그림1. 후지사화에 의해 출 토된 명문기와 그림 2. 정림사 건물지개요 Ⅲ. 정림사지의 가람배치와 건물 1. 정림사지의 가람배치 정림사지는 583년 백제가 사비로 도움을 옮긴 후 흐트 러진 사회질서를 불교의 힘으로 바로잡고, 왕권을 회복하 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부여 시내 한가운데 남향으로 창 건되었다. 정림사지는 1942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의한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7차례에 걸쳐 조사가 진행되었다. 발 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창건가람으로 추정되는 강당지, 부 속건물지(강당지 좌우 각 1기), 강당지 우측 부속 건물지 동편의 구상유구, 석축배수로 1기, 소성 유구 1기 등이 확 인되었다. 정림사지는 남향한 일탑식 가람으로서 남쪽에서부터 중 문터와 5층석탑, 금당터, 강당터 등이 남북을 중심으로 배 치되었다. 강당터 좌우에는 작은 건물을 각 한 개씩 배치 했던 것으로 보이나 확실한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7) 중문 과 이 건문터 사이에 회랑이 연결되었다. 백제시대 정림사 지는 강당지 좌,우에 별도의 독립된 건문지가 회랑지까지 6) 윤무병, 1981, 「정림사지 발굴조사보고서」, 민족문화, p.70 7) 이왕기, 2006, 「백제사찰건축의 조형과 기술」, 주류성, p.45
  • 5. 이어지도록 남북방향으로 길게 구축되어 있다. 정림사지에는 본래 목탑을 세웠는데, 뒤에 목탑을 없애고 5층의 석탑을 세웠다. 정림사 오 층석탑은 백제를 대표하는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정림사 오층탑은 목조의 조형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석재가 갖는 재료의 특성을 적절히 살리면서 전체적으로 목조탑의 조형미를 갖춘 석탑으로 평가된다. 이와 같이 정림사 오층석탑은 목조탑의 조형을 석탑으로 번안하여 새로 운 조형세계의 지평을 열어간 대표적인 탑이다. 전체적인 배치형식은 1942년 발굴조사에서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 중심축선에 따라 배치되고 중문에서 강당에 이르는 회랑이 있는 일탑식 가람배치임이 밝혀졌다. 전체 배치는 미륵사지처럼 정확한 균제에 의해 조정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격이 떨어지는 배치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2. 정림사지의 건물 1) 중문 석탑에서 남쪽으로 19.98m 거리에 건물의 중심을 두고 있다. 초석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초석 밑에 깔았던 적심석은 거의 그대로 발견 되었다. 적심은 지표면에서 20~30cm 깊이에 위치해 있다. 기단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그 흔적을 그대로 인정하여 기단크기 를 설정할 경우 너무 크기 때문에 이는 중문의 기단으로 보기 어렵다. 건물의 크기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11.3X5.3m 크기인데 적심석8)을 기준으로 한 수치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다. 중문은 정면 3칸에 측면은 회랑과 같은 폭의 1칸 규모이다. 기단은 가공석 기단으로 만들고 공포는 하양식 공포9)를 짜 올렸으며, 지붕은 양쪽 용마루 끝에 치미10)를 올린 팔각지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금당 석탑 중심에서 26.2m 북으로 떨어져 금당의 중심이 자리잡고 있다. 다만 건물의 남북 중 심선이 서쪽으로 24cm 치우쳐있다. 기단은 2중 기단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당 기 단중 상층 기단은 훼손되어 규모를 알 수 없으나 하층기단은 적심석이 발견되어 그 규모를 알 수 있는데 그 크기는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18.75X13.8m이다. 하층기단의 적심석을 기 준으로 기단의 크기를 추정해 보면 동서길이 20.55m, 남북길이 15.6m가 될 것으로 보인다. 3) 강당 강당은 금당에서 북쪽으로 31.7m 떨어진 지점에 건물의 중심을 두고 있다. 금당은 중심축 선에서 서편으로 약간 치우친 반면 강당은 동편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특이한 점으로 볼 수 있다. 기단의 구성으로 보아 원래 백제시대 강당이 있었으나 폐허된 후 고려시대 재건하면 서 기단을 새로 조성하고 백제시대 적심석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기단을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결과 전면 기둥 중심에서 약 120cm 떨어진 곳에서 높이 50cm의 백제 기단 8) 돌 따위를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는 돌 9) 공포는 기둥 위에 여러 개의 부재를 연결하고 짜 맞춰 구성되는 곳으로 목조건축물에서 가장 아름 답고 복잡한 부분이다. 10) 전각(殿閣), 문루(門樓) 따위 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
  • 6. 끝부분이 확인되었다. 4) 회랑 석탑과 금당을 에워싸고 있는 회랑은 동서길이 52.2m, 남북길이는 83.5m이다. 동회랑터 남단은 훼손되어 기둥 간격을 알 수 없으나, 서회랑터는 석탑과 금당 사이 부분의 기단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기단 폭은 약 5m 정도가 됩니다. 동회랑의 적심석 보간 길이가 약 4.2m이며 이를 서회랑에 적용해 본다면 기둥 중심에 양 기단 끝까지는 각각 40cm 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동회랑의 기단 폭도 5m였다고 볼 수 있다. Ⅳ. 정림사지의 유물 1. 오층석탑 (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 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11)’이 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 림기법12)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 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목조건축물의 공포부를 모방한 2단의 옥개받침을 두었으며 1단은 직 각으로 2단은 밑부분을 경사지게 깎아 장식적 기교를 주었다. 기둥 위에 창방석과 평방석을 짜 맞추지 않았다. 옥개석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정림사지 5층석 탑의 1층부터 4층까지는 옥개석이 8매, 5층에는 4매로 조립되었다. 또한 옥개석의 처마가 전각에서 약간 들려있어 경쾌감을 주며 처마 모서리에는 풍탁을 달았던 흔적이 있다.13)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 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탑은 가까이 다가설수록 더 웅장하게 보이도록 고 안되었는데, 백제만의 건축 비법인 하앙식14) 구조에 그 비밀이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11) 정림사탑과 관련해 학자들이 ‘평제탑’이라 규정하는 것은 일제시대 식민사관적 의도가 작용한 것 이었다. 본디 ‘평제탑’이라는 용어 자체는 조선시대 읍지에 널리 도장하고 있어 용어 자체의 연원은 좀 더 오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령 18세기 영조년간에 제작된 『여지도서』 부여현 고적조에서는 ‘평제탑’을 당장 소정방의 백제정벌 기념비로 규정하고 있다. 12) 기둥의 중간이 배가 부르고 아래위로 가면서 점점 가늘어지게 만드는 방법 13) 엄기표, 2004, 「정말 거기에 백제가 있었을까」, p.166-168 14) 하앙식 구조란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하여 지렛대의 원리로 일반 구 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
  • 7. 아름다운 작품이다. 2.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108호) 충청남도 부여의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 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 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 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15)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 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 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 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그림 7 . 석조여래좌상 현재 불상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정림사 는 6세기 중엽부터 백제 멸망 때까지와 고려시대에 두차례에 걸쳐 번창하였던 것으로 추정 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3. 활석제삼존불 금당지 서북쪽으로 서회랑지와의 중간지점에서 1점 출토되었다. 삼존불은 화기를 입어 대 부분 손상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전체를 살필 수 가 없으나 석촌의 한 면에 높게 부조되고 있 다. 3존 모두 얼굴이 파실되고 우측의 협시는 그 발과 대좌만이 남아 있다. 주존은 법의가 통견16)으로 앞면에 V자형의 주름이 반복되었고, 옷자락이 좌우로 퍼지면서 발등까지 덮고 있다. 좌측의 협시17)도 옷자락이 지느러미처럼 좌우로 벌어졌고 천의18)가 앞면에서 X자형으 로 교차되고 있다. 3존불 모두가 연판을 새긴 낮은 원형대좌를 두고 그 밑에 방형의 대좌가 조각되었다. 그런데 이 방형대좌는 그 앞면과 측면에 단판의 연꽃무늬가 일렬로 새겨져 있 어 이채롭다. 그리고 삼존불 뒷면에는 아무런 조각도 없는데 그 하단에 요구19)가 있다. 석촌 의 높이는 11.4cm이며 너비는 8.2cm 두께 3.2cm이다. 파손된 부분은 많지만 전체적으로 양 감이 풍부하고 강한 신체조형과 백제 특유의 조형감각을 볼 수 있다. 15) 태양의 빛처럼 불교의 진리가 우주 가득히 비추이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부처는 다른 부처 와는 달리 설법하지 않는 점이 특징이다. 불교의 진리, 곧 불법(佛法) 그 자체를 상징하는 법신불 (法身佛)이므로 불상으로서 형상화될 수 없는, 추상적인 개념에 속한다. 16) 앞가슴을 둘러 양어깨를 덮어 입는 부처의 옷차림 17) 부처를 좌우에서 모시는 두 보살 18) 천자가 입는 옷 19) 오목한 도랑
  • 8. 4. 소조불 회랑 안쪽에 서남우에서 발견된 기와구덩이 속에 서 도용의 파편들과 함께 적지 않은 수량이 출토되 었다. 적갈색으로 소성된 불상들의 파편들인데 얼굴 이 완전하게 남아있는 1점을 포함하여 6점의 불 두20)와 등신대21)보다 작게 만들어진 동체파편이 특 히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이외는 대부분 이 몸체 각부의 잔편들인데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림 8 . 소조불 불상 파편 파편들도 다수 발견되었다. 얼굴이 잘 남아있는 불 두는 그 높이가 10.5cm인데 높고 뚜렷한 코에 입은 작게 표현하였으며 머리는 소발22)인 듯 하다. 목에는 삼도를 선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 하단면의 중앙에 목심을 꽂았던 방공이 남아있다. 그런데 얼굴과 목에는 황갈색의 유약으로 생각되는 물질이 칠해져 있다. 그리고 등신대보다 약간 작은 편인 불신의 동체 파편은 배위로 올려진 두손으로 보주23)를 받들고 있는데 조각수법이 매우 생동적이어서 소위 양수봉주불을 대표할 수 있는 전형적인 작례로 서 그의 학술적 가치가 중요시되고 있다. 양수봉주불은 중국 사천성 성도출토의 남조불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으며 백제에서 널리 유행된 조상형식의 하나이다. 그리고 소조불의 각 부분에는 녹색유나 흑색안유를 칠하였거나 흑색물감으로 여러가지 무늬를 표시하기도 했다. 5. 도용 흙으로 빚어 구운 도용인데 이것을 이상 또는 토우라 한다. 정림사지의 기와구덩이에서 발 견된 도용의 파편은 모두 63점인데 무인상, 관인상, 시녀상 등으로 구분되며 인상 이외에 수형의 파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수점 포함되어 있다.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것은 하나도 없으나 농관이라고 부르는 중국 육조식의 관모를 쓰고 있거나 물결모양의 두발에서 눈이 깊 고 코가 큰 이국적인 모습에서 호인의 풍모를 엿볼 수 있는 도용들이 등장해 있어서 매우 이채로운 출토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도용들은 머리와 신체부분을 별도로 제작한 후 그것을 서로 결합시켜서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하였는데 발굴 당시에는 수부 상반신 하반신 등의 파편으로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정림사지 출토의 도용들은 중국 북위시대의 분기에서 발견 된 도용들과 그 모습, 제작방법 크기 등에 있어서 유사한 점이 적지 않으며 서로 관련되고 있어서 양 지역의 문화교류를 시사해주고 있다. 6. 와전류 정림사지에서는 많은 수량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백제 및 고려시대의 암·수키와를 비롯해 암막새, 수막새, 서까래기와 인각명기 전편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어 사원의 창건시기와 중건 시기를 밝히는데 주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연꽃무늬가 새겨진 수막새는 단판, 복판, 세판 등 여러가지 형식으로 구분되고 있는데 그 제 작시기가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백제의 수막새는 전반적으로 단판연화 문이 장식되어 있는데 판단이 반전되었거나 첨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6세기 중 20) 21) 22) 23) 부처의 머리 사람의 크기와 같은 크기 흰 머리카락 탑이나 석등 따위의 맨 꼭대기에 얹은 구슬 모양의 장식
  • 9. 엽을 중심으로 한 유물들이다. 그리고 통 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제작된 약간의 수막새가 출토되었는데 주연부에는 주문이 모두 배치되고 있으며 연화문의 양식은 복 판 또는 세판으로 구분된다. 이들 중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볼 수 있는 수막새 의 수량은 근소하였다. 서까래기와는 모두 백제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단판형인데 연 꽃잎수가 8엽또는 12엽으로 장식되고 있 다. 암막새는 당초문24)과 귀면문이 배치되 고 있는데 모두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이 다. 귀면문 암막새는 중앙에 귀면을 간략하게 의장시키고 이의 좌우에는 귀면의 입에서 나 오는 서기문이 당초문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한편 막대한 수량이 출토된 백제시대와 고려시대 암·수키와의 파편들은 와질과 문양구성 에서 그 시대를 구분할 수 있다. 백제시대의 기와들은 대개가 연질이고 무문의 기와가 대부 분인데 문양이 있는 것을 보면 승석문과 격자문 그리고 평행선조문에 한정되었다. 이에 대 하여 고려시대 기와들은 경질로서 어골문을 지문으로 하여 거기에 여러 종류로 구성된 기하 학적 선문을 배합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사명과 연호가 새겨진 고려시대의 명문 암키와가 강당지 주변에서 발견되어 이의 제작연대와 사명을 밝힐 수 있어서 중요시 되고 있다. 어골문을 치밀하게 나타내고 있는 암키와의 중심에 장방형의 구획을 만들어 「대 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라는 좌서2행의 명문을 양각했다. 대평팔년은 고려현종19년으로 정림사의 중건시기를 이 명문와를 통해 확실히 밝힐 수가 있었다. Ⅴ. 나오며 지금까지 정림사의 역사, 가람배치, 건물, 유물, 관련 인물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정림사는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후 도성 한 가운데 건립한 대표적인 사찰이다. 사비로 천도 후 백제 는 흐트러진 사회질서를 바로잡고,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작업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정 림사 창건은 그 작업의 일환으로, 조정에서는 도성 한 가운데 사원을 건립함으로써, 불교를 토해 국가의 지도력을 확립하고 사회통합을 열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후 사정을 볼 때 정림사는 당시 나라 안에서 가장 기술이 뛰어난 장인을 총동원하여 당대 최고의 건축 물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사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라도 절터도 무너진 숱한 역사의 풍상 속에서도,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굳건히 부여를 지키고 있다. 역사 속에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단순한 돌탑이 아니라 백제의 자존심이며 예술혼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우리의 몸속에도 맥맥이 흐르고 있는 문화 민족의 자긍심을 느끼며 이번 답사를 통해 정림사지의 역사성과 다양한 유물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24) 덩굴무늬
  • 10. Ⅵ. 참고문헌 윤무병, 1981, 『정림사지 발굴조사보고서』, 민족문화 이도학, 2006, 『불교의 나라 백제 사비성』, 주류성 이왕기, 2006, 『백제 사찰건축의 조형과 기술』, 주류성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건축유적 발굴조사 자료집 사찰편1』,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한국 고고학저널 2007』, 주류성 이동영, 2011, 「사비시대 부여지역 가람건축의 특성에 관한 연구 – 평지 1탑식 가람을 중심 으로 = The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Puyeo district’s Buddhist Temple Architecture in Sabi dynasty」, 『농촌건축 : 한국농촌건축학회논문집』 13-2, 한국농촌건축학회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정림사지박물관 홈페이지 http://www.jeongnimsaji.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