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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 역사가 숨쉬는
사찰에서 백련결사의 자취를 찾다
11 길은지 황금보라
12 김주연 성유나 이수정 채송은

분 류

백련사

절

소재지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6

☞ 답사 포인트
1. 고려시대 천태교관 요세의 주도로 일어난 백련결사의 배경을 백련사 중건과 관련지어 살
펴보고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2. 백련사의 유구한 역사에 따라 변화해온 성보와 건물들을 살펴보면서 백련사의 역사적 가
치에 대해 생각해 본다.
Ⅰ. 들어가며
전라남도 강진군에 위치한 백련사는 통일신라 말에 지어졌다고 전해지며 현재까지 그 명
맥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특히 고려시대 때에는 보수적인 불교에 변화의 흐름
을 가지고 온 천태종의 교관 요세가 주도한 백련결사의 핵심적인 기구로 기능하기도 하였던
중요한 사찰이다. 이후 백련사는 왜구의 침입, 조선시대의 억불숭유 사상으로 인하여 잠시
주춤하였다가 임진왜란 이후 불교가 민간신앙으로 중흥하여 다시 본래의 기능을 하게 되는
등 우리나라 불교 역사의 흐름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또한 절의
풍광을 바라보면 산비탈에 위치해 있어 다른 절과는 다른 독특한 가람배치를 볼 수 있으며,
다양한 건물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대표적 건물인 대웅전은 내부에 아름
다운 벽화와 조각이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의 보물 제 1396호인 사적비는 고려시대와 조선
시대의 흔적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이에 본고에서는 백련사의 창건 배경 및 역사를 백련결사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자세히
서술하고 백련사의 역사를 담고 있는 가람배치와 건물들을 살펴본 뒤, 사적비를 포함한 성
보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백련사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Ⅱ. 백련사의 창건 배경 및 역사
1. 백련사의 역사
백련사(白蓮寺)는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통일신라 말
기인 839년(문성왕 1년)에 무염국사(801~888)가 처음으로 세웠다고 전해져 내려오며 원래
이름은 만덕산에서 유래한 만덕사(萬德寺)였다고 한다.
백련사가 중요한 사찰로써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고려 희종7년인 1211년에 원묘국사
(圓妙國師) 요세(了世)(1163-1245)가 옛터에 크게 중건1)하고 난 뒤 부터였다. 한 때 조계종
계통인 지눌(知訥)(1158-1210)과 함께 활동했던 요세는 천태종으로 사상을 전환하면서 만덕
산에 자리를 잡고 그의 제자 원영(元營)으로 하여금 80여 칸의 백련사를 짓게 하였다. 백련
사는 1211년부터 1232년(고종 19)까지 21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백련사 중건의 소식을 들은
최중헌의 부인인 정화택주(靜和宅主)는 백련사에다 무량수불상2)(無量壽佛像)을 조성하고 금
자법화경3)(金字法華經)을 베껴 쓰게 하였다.4)
고종 19년(1232), 절이 완공되자 요세는 보현도량5)(普賢道場)을 개설하고 강진의 지방호족
으로 추정되는 최표, 최홍, 이인천 등의 지원을 받아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서 백련사
결사(白蓮社結社)6)를 맺었다. 이러한 신앙결사는 12세기 후반, 무신란 이후 사회의 전반적인
변동 속에서 보수적 경향이 강화된 불교계에 대해 비판하는 움직임에서 시작되었다. 천태종
1) 절이나 궁궐 따위를 보수하거나 고쳐 지음
2) 아미타불상. 서방 정토 부처의 모습을 본 뜬 상.
3) 『법화경』은 묘법연화경을 줄여서 부르는 말로,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중
요사상으로 하고 있다.
4) 채상식, 「백련사의 성립과 전개」,『한국사』 21, 국사편찬위원회, 1996 p75-80
5) 불도를 닦는 곳
6)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단체를 만듦. 또는 그 단체.
계의 백련결사는 조계종계의 신앙결사인 수선결사와 더불어 불교가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른 자기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개혁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자각, 반성운
동이라고 할 수 있다.7)
이러한 백련결사 조직화 과정에서의 특징으로 중앙 집중적인 교단체제에 대해 개별적·독
자적인 지방 불교의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점과 대체로 지방의 중간 신분층과 그 이하 신분
층의 참여와 후원으로 결성되고 유지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즉, 백련결사는 지식층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농민, 천민과 같은 백성들을 아우르려는 면이 많았기에 최초의 민간 결
사 운동으로 평가된다.8)
요세의 백련결사 이후 백련사에서는 120년 동안 고려 8분의 국사9)(원묘국사, 정명국사,
원환국사, 진정국사, 원조국사, 원혜국사, 진감국사, 목암국사)를 배출하며 명성을 떨쳤다.10)
그러나 고려 말 강진 지방이 세 차례의 왜구 침입으로 살육과 약탈을 겪으면서 백련사는
폐허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조선왕조가 들어선 이후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
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백련사를 중건할 스님이나 지방호족이 없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
서야 불교가 민간신앙으로 중흥하게 되어 1430년(세종 12년)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孝
寧大君)의 후원을 받아 행호 스님이 왜구의 침입에 맞서 토성을 쌓는 등 도량을 중건할 수
있었다. 8분의 국사를 배출한 고려에 이어서 조선시대에도 백련사는 8명의 종사11)(소요대사,
해운대사, 취여대사, 화약대사, 설봉대사, 송파대사, 정암대사, 연파대사)를 배출하며 그 대를
이어갔다. 행호대사 이후 백련사는 사맥을 유지해 나갔지만 1760년 화재로 수백 칸을 태우
고 2년에 걸쳐 중건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12)
또한, 백련사는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과도 인연이 깊다. 당시 정약용이 유배하던 다산
초당과 근접해있어 정약용은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교류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13)

2. 백련사와 백련결사
고려 후기 무신란을 계기로 하여 당시 사회는 커다란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의종24년
(1170)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란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문벌귀족 체제에
대한 무신들의 불만과 군인들의 불평이 축적되어 일어난 것이었으며, 그 결과 고려사회는
이전부터 내재되어있던 기층사회의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사회에서는 정
치·사회·경제구조 상의 변동이 진행되었고 사상구조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
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불교 운동으로 신앙결사가 결성됨에 따라 불교계는 서서히 재편되
어갔다. 통일신라 말기인 839년에 무염선사에 의해 창건된 후 작은 절집에 불과했던 백련사
가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 있었다. 원묘국사 요세가 백
련사를 근거지로 하여 백련결사를 맺었기 때문이다. 지눌의 조계종 중심의 수선결사와 더불
어 백련사 결사는 대표적인 신앙결사이며, 기존의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계의 타락상과
7) 채상식, 앞의 책, 국사편찬위원회, 1996 p72-75
8) 채상식, 앞의 책, 국사편찬위원회, 1996 p72-89
9) 신라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덕이 높은 승려에게 내리던 최고 승직(僧職)
10) 정약용, 『白蓮寺址』, 강진문헌연구회, 1998 p5-71
11) 법맥을 받은 고승. 또는 각 종파의 조사(祖師)
12)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창비, 2012 p62
13) 신정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전라도』, 다음생각, 2012 p350
모순에 대한 비판하는 움직임에서 시작되었다.14)
백련결사를 주도한 천태종 승려 요세(1163-1245)는 명종 4년(1174)에 천태종 승려로 입문
하였으며 1198년 봄에 개경의 천태종 사찰인 고봉사 법회에 참석하였다가 분위기에 실망해
신앙결사에 뜻을 두었다. 그 해 가을에 동지 10여 명과 더불어 여러 지역을 유력하다가 영
동산(靈洞山) 장연사(長淵寺)에서 수행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요세는 참선15)을 중시하는 조계
종계의 지눌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지만 경문을 읽으며 부처의 공덕을 생각하는 염불 중심의
천태교관으로 사상을 바꾸게 된다. 그 뒤 요세는 만덕산으로 주거를 옮겨 고종3년(1216)에
본격적인 백련결사를 조직하게 된다. 이는 최씨 정권과 밀착되어 있던 강진의 지방 호족인
최표, 최홍, 이인천 지원에 의해 결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백련사를 중건하고 사람을 모으니
요세의 제자만 하더라도 38명에 왕공, 귀족, 문인, 관리로 결사에 들어온 사람이 300명에 달
했다.
이러한 백련사의 움직임에 대해서 강화도정부는 백련사가 보현도량을 설치하고 ‘백련결사
문’을 공포한 이후에 와서야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련사에서 1232년(고종 19) 4
월 8일에 보현도량을 설한 것은 분명 대몽항전과 관련된 대응조처였으며 대몽항전을 표방
한 것에서 그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고종 24년 여름에 고종이 75세의 고령
인 요세에게 높은 도를 쌓은 승려를 나타내는 ‘선사’의 직함과 함께 세찬16)을 내린 것을 통
해 강화도정부에서 백련사에 관심 있게 지켜봤다는 것을 알 수 있다.17)
지방호족과 지식인층, 일반민들이 보수적인 문벌귀족체제에서 유리되어가면서 한편으로는
성장기반을 서서히 구축해가던 잠재성이 궁극에는 사회변혁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13
세기전후에, 실천적인 백련결사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사회계층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보수적인 소수의 문벌귀족체제에 의해 장악되고 있던
불교계의 모순을 지방호족과 지식인층들이 자각·비판하고 이에 대한 개혁을 주도했다는 사
실이다. 곧 보수적·귀족적인 불교에서 지방 불교·대중적인불교로 사상사의 전환을 이룬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사상사적 측면에서 볼 때 수행과 교화를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실천적인 교화
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었다.
셋째, 백련 결사를 비롯한 당시 신앙 결사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실천신앙을 강조하면
서도 이에 대한 이념적·철학적 기반을 동시에 제시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18)
이렇듯 백련결사는 고려사회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불교의 실천
성을 강조함으로써 불교계의 세속화와 사회모순을 극복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백련결사의 사
상적 경향은 서민 대중의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몽고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Ⅲ. 백련사의 가람배치 및 건물

14) 채상식, 「고려후기 원묘국사 요세의 백련결사와 그 역사적 의의」,『천태학연구』 6, 천태불교문화연
구원 ,2004, p196-197
15) 스스로 선법을 닦아 구함
16) 세배를 하러 온 사람에게 대접하는 음식
17) 채상식, 앞의 책, 국사편찬위원회, 1996, p86,87
18) 채상식, 앞의 책 ,천태불교문화연구원 ,2004, p196-197
1. 가람배치

그림 2 백련사 가람배치, www.koreatemple.net
백련사는 만덕산 자락 경사가 급한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사역은 석축을 계단식으
로 쌓아 터를 만들고 건물을 배치하였다. 다른 사찰과는 다르게 백련사에서는 조금 독특한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19)백련사

초입의 넓은 마당에는 아무런 축조물이 없고 위편이 장대

한 규모를 자랑하는 만경루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그 뿐만 아니라 만경루는 아래층 벽면은
창고마냥 널빤지로 굳게 막혀 있다. 절 안쪽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길 배치를 보면 만
경루를 완전히 감싸고돌아 그 앞, 옆모습을 다 본 후에 대웅전 안뜰로 들어서게 되어있다.
이 대웅전 또한 높은 축대 위에 팔작다포집으로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편 듯한 형상을 하고
있고, 정면에는 계단이 없어 다시 옆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백련사가 갖는 이러한 특수
성은 산비탈에 위치한 백련사의 위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제일 하단에 있는 누각 만경
루에서는 서쪽을 바라보면 강진만의 빼어난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가람 배치상 현재는 백
련사에서 만경루가 가장 앞에 있지만 기록에 의하면 예전에는 그 앞에 해탈문이 있었다고
한다. 규모가 큰 사찰에는 보제루(菩濟樓)라는 건물이 따로 있는데, 누각 형식의 이 건물은
보통 법당과 불이문(해탈문) 사이에 위치한다. 따라서 만경루는 백련사의 보제루였던 셈인
것이다. 만경루 밑으로 올라가면 좁은 대웅보전 앞마당이 있다. 주불전인 대웅전 좌우로 주
요 전각이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 오른쪽에는 삼성각, 대웅전 왼쪽에는 명부전이 자리 잡았
다. 명부전에서 산 쪽으로 약간 올라간 지대에 응진전이 외따로 있다. 요사채는 대웅전 앞마
당에서 좌우로 치우친 곳에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오른쪽에는 2층 건물인 육화당이 있고,
그 뒤로 ㄱ자형 요사 1동이 있다. 대웅전 좌측에는 일자형 요사 1동이 자리 잡았다. 만경루
와 대웅보전은 중심축선상에 배치되어 있으나 좌우 요사는 마당에서 뚝 떨어져 있어 중정중
심의 배치는 아니다. 만경루와 대웅보전 사이 마당이 좁아 약간 답답하긴 하지만 좌우 요사
가 간격이 넓어 지나친 폐쇄감은 느끼지 못한다. 명부전 서쪽으로는 응진당 앞에 부도 1기
19)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창비, 2012 pp58-pp60
가 있고, 그 아래 넓은 공간에 유형문화재 제137호인 사적비가 있다. 만경루 옆에는 새로
지은 종각이 있다. 백련사에는 응진전 앞에 1기, 만경루 좌측 선방 앞에 1기, 입구 축대 위
에 1기 그리고 절 서쪽의 동백 숲에 4기 등 전부 7기의 부도가 있다. 만경루 옆에는 예전
스님들이 사용하였던 맷돌이 남아있다.

20)

2. 건물
1)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주존불로 모시는 건물이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로 등록되
어있다.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내부에는 목조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삼
존불은 중앙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협시보살상이 배치되어야 하지만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이 대웅전은 1760년(영조36)에 큰 화재로 인하여 대부분의
전각이 손실되었고, 1762년에 현재의 대웅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
면 3칸에 팔작지붕21)으로 겹처마인 다포식22)이다. 추녀마다 활주를 세워 4개의 활주가 건물
을 받치고 있으며, 앞면 2개의 주두에 용두를 장식하여 단청과 함께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
낌을 준다. 한편, 대웅전의 내부는 아름다운 벽화들과 조각을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성보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2) 육화당
육화당은 ‘ㄱ’자의 전각으로 본래 있던 요사를 1995년 확장 중수한 것으로서 1층은 식당
이고 2층은 객실로 사용하고 있다. 육화(六和)란 부처님께서 교단의 화합을 위하고 대중이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세를 일깨우고자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을 말씀하셨는데, 그 여섯 가
지 발원을 말한다고 한다.
3) 명부전과 만경루
명부전은 저승의 명부를 상징하는 불전을 이르며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모시고 있다고
해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고 해서 지장전(地藏殿)이
라고도 부른다. 이곳에는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무독귀왕, 도명존자 및 시왕 10체와 판관, 녹
사, 인왕상 각2체 그리고 사자상 1체는 지장보살의 권속으로 봉안되어 있다. 만경루는 남도
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누각으로 예전에 스님들이 만경루를 선방 삼아 수행을 했고,
지금은 템플스테이 공간으로도 쓰이는 귀중한 누각이다.
4) 응진당과 삼성각
응진당의 응진(應眞)이란 ‘존경 받을만 하다’, ‘공양 받을만 하다’라는 의미로 부처는 아니
지만 부처님의 제자나 고된 수행을 거쳐 진리를 깨달은 역대의 고매한 존재를 모신 집인데
나한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백련사 응진당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아난, 가섭이

20) 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2013. 9. 7. www.koreatemple.net
21) 옆에서 볼 때 ‘八’자 모양인 지붕으로 한국 목조 기와지붕 중에서 우진각지붕과 같이 사방으로 지
붕면이 있으나 양측 지붕면 위에 삼각형의 합각(合閣)이 있어서, 우진각지붕 상부를 수평으로 잘라
그 위에 맞배지붕을 올려놓은 것 같은 복합형 지붕형식
22)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있는 형식
협시를 이루고, 16상 나한상 및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다. 한편, 삼성각에는
독서탱화와 칠성탱화, 1931년에 그려진 산신탱화가 그려져 있는데 소나무 아래 부채를 들고
있는 산신령과 까치 호랑이, 그리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동자그림이 민화적이고 친근한 느
낌을 준다. 한편, 백련사 삼성각에는 좌측에 칠성탱화, 우측에 산신탱화, 그리고 중앙에 독성
탱화가 있다. 산신탱화는 1931년에 봉안되었는데 본래는 대웅보전에 있었다고 한다. 소나무
아래 부채를 들고 있는 산신령과 항상 따라다니는 호랑이, 지팡이를 들고 있는 동자가 그려
져 있는데, 호랑이의 표현이 민화적이며 재미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중앙에는 치성광여
래를 협시하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있고, 상단에 일곱 부처님이 모셔져 있으며, 하단에는
도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성군(星君)들이 그려져 있다.
5) 부도전
부도란 스님들이 열반에 들면 다비식을 마친 후 나온 사리를 모셔놓은 탑을 이른다. 천연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된 동백숲 안에는 원묘국사증진탑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3호 강
진백련사원구형부도, 대웅전을 중수하신 월인당 총신 스님의 부도, 그리고 이름모를 2기의
부도가 있다. 또한 응진전 앞에 춘파당 부도, 절 입구 축대 위에 부도, 명부전 앞에 부도의
잔해가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Ⅳ. 백련사의 성보
1. 비석
1) 강진 백련사 사적비 (보물 제 1396호)

백련사 사적비는 백련사 대웅전에서 오른
쪽으로 약 5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
는 높이 447cm 규모의 전형적인 석비이다.
백련사에는 여러 기의 석비가 있었으나, 현
재는 1669년(현종 10)에 세워진 백련사 사
적비만 남아 있다. 사적비의 비문과 정약용
의 만덕사지에 의하면 고려시대 한림학사
최자가 찬한 백련사 원묘국사의 비로 추정
되는 고비가 있었지만 이후 왜란으로 훼손
되었다고 한다. 이후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
던 귀부23) 위에 새로 비를 세웠다고 한다.
결국 귀부는 고려시대의 것이고 비신은 조
선시대의 것으로 서로 다른 건립연대를 보
이고 있다. 그러나 귀부와 비신 모두 각각
의 시대가 지닌 양식상 특성을 잘 포함하고

23)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

그림 3 백련사 사적비, 문화재청
있어 가치가 있다.
백련사 사적비는 귀부, 비수, 이수24)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귀부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고려 전기 귀부에서 볼 수 있는 역동적인 모습보다는 동세가 약하고 장식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귀부의 크기는 227cm X 190cm X 110cm이다. 귀부의 얼굴은 용두화 되었으며 입에
는 여의주가 없고 목에는 5개의 줄이 가로로 음각되었다. 귀부의 등면에 곽을 만들어 내부
를 당초문25)으로 양각하였으며 이중의 육각문 안에는 5엽의 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귀부의
중앙 상면에는 비좌26)가 있는데 그 주변에는 인동문27)으로 조각되어 있다.
비신은 2면비로 전·후면에는 비문이 있으며 크기는 234㎝×118㎝×29㎝이다. 비문은 모두
19행이며 비신 전면의 상단에는 ‘만덕산백련사비’라 새겼고, 가로로 「전라도강진만덕산백련
사사적비」라 기록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백련사의 역사와 주변경관, 원묘국사의 중창, 백련
결사를 일으킨 보조와의 교류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뒷면에는 당시 불사(佛事)에 참여한 사
람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崇禎紀元戊辰後五十四年辛酉五月立’라는 사적비 말미의
명문으로 보아 1681년(조선 숙종 7)에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비신 양 측면에는 초화
문을 양각했는데 이는 조선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수는 우진각지붕28)의 형태로 하단에는 목조 건축의 겹처마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정
상에는 2마리의 용이 등을 맞대고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는 모습을 매수 사실적이게 조
각했다. 크기는 170㎝×75㎝이다.

2. 부도29)
정약용의 만덕사지에 백련사 내에는 중진탑, 무명탑을 포함해 총 8기의 부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조사에 따르면 백련사 내에서 발견된 부도는 총 7기이다.
그 중 동백림 내 월인당부도와 응진전 앞의 춘파당부도 2기만이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이
외에 명부전 앞 부도, 절 입구 축대 위 부도, 동백림 내 부도 2기 그리고 백련사원구형부도
는 따로 명문이 없어 이름을 알 수가 없다. 또한 부도들의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
대까지 다양하다.30)
1) 강진 백련사원구형부도(전남 유형문화재 제 223호)
백련사원구형부도는 백련사 내외 승탑 가운데 연대가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부도이다.
그런데 부도의 탑신이나 기단부에 명문이 없어 누구 것인지 알 수 가 없다. 이 부도를 향해
서 원묘국사의 사리탑인 중진탑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정확한 연대나 명문이 없어 확증하기
힘들다. 부도의 높이는 293cm이며, 사각형의 기단 위에 원구형의 탑신 그리고 그 위에 팔각
의 옥개석이 올려져있는 모양이다. 특히 탑신의 상단에는 사방으로 연화무늬 모양의 연주문
띠로 장식되어 있어 양식적으로 특이한 기법을 보인다. 이 부도는 신라시대 이후 전통적으
로 내려오던 팔각원당형에서 몇 가지 변형된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24)
25)
26)
27)
28)
29)
30)

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
줄기, 덩굴, 잎이 얽히고설킨 식물문양에 대한 호칭
비신을 꽂아 세우기 위해 홈을 판 자리
화문과 덩굴무늬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초화형식의 장식무늬. 당초문의 일종
건물 사면에 지붕면이 있고 귀마루(내림마루)가 용마루에서 만나게 되는 지붕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묘탑
석탑이나 석등의 지붕돌
2) 백련사월인당부도
백련사 동백림 숲속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진 부도이다. 방형의 기단 위에 대좌31)를
놓고 그 위에 고복형을 띠는 팔각의 탑신과 팔각의 옥개석이 차례로 올려져있다. 탑신의 8
면 중 한 면에 월인당이라 당호를 새겨 놓아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대좌의 한
면에는 조성연대를 새겨놓아 1804년에 만들어 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절대연대가
명기되어있는 월인당부도로 인해 다른 부도에 대한 연대편년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백련사 내에서 주요한 부도라 할 수 있다.

3. 불화
1) 백련사 영산회상도
영산회상도는 대웅전 본존불 바로 후벽에 걸려 있다. 높이 450cm 폭 400cm의 규모로
중앙 상단에는 삼존불이 위치하며 그 앞에는 두 줄로 보살들이 서 있다. 삼존불 뒤편으로는
사천왕을 비롯한 권속들의 얼굴이 있다. 삼존불은 모두 두광. 신광을 지고 결가부좌를 취하
고 있으며 모두 여래상이다. 불화의 하단에는 조성명기가 흐릿하게 남아있으며 1705년(숙종
31)에 그려진 18세기 초반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2) 백련사 삼장보살도
이 불화는 백련사 대웅전 좌측 벽에 걸려있는 그림으로 높이 185cm 폭 315cm 크기이
다. 그림의 상단 중앙에 천장보살, 그 왼쪽에 지지보살, 오른쪽에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전후
좌우에는 권속들을 배치하였다. 삼장보살들은 머리에 화려한 보관과 가슴에 영락을 걸치고
있으며 우측의 지장보살만이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다. 불화 하단에는 제작에 참여한 인물
과 조성명기가 기록되어있는데 1773년(영조49)에 그려진 18세기 후반의 그림이다.
3) 대웅보전 벽화
백련사 내 사찰건물에는 다양하고 아름다운 불화들이 그려져 있다. 특히 대웅보전 내부
와 외부 문에는 특히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러한 벽화들은 묘법연화경32)에 나오는 내
용들을 근거로 스님들이 직접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묘법연화경에 따르면 영축산에서 부처
님께서 설법하실 때 하늘에서 만다라, 만수사 꽃비가 내리고 하늘의 노래를 좋아하는 긴나
라와 음악을 건달바, 부처님의 제자인 아라한들이 이전에 없던 일에 기뻐하여 합장하며 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기뻐했다고 한다. 백련사 대웅전의 벽화는 이러한 내용
을 근거로 그려진 것이다. 또한 벽화에 그려진 봉황, 도끼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들의 모
습이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데 조선시대 사람들이 대웅전을 반야용선이라고 한 것의 근
거로 추측할 수 있다.

4. 불상
31) 비, 조각상 등을 지탱하는 대 또는 기둥
32) 법화경(法華經)이라고도 한다. 이 경은 불탑신앙을 하는 집단에 의해 성립된 대표적 대승경전으로
삼승(三乘)을 한데 모아 일승(一乘)의 큰 수레로 일체 중생을 구제한다는 정신에서 여래는 큰 인연
으로 세상에 나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경지에 들어가게 하는 데 근본목적이 있다.
1) 백련사대웅전삼존불
이 삼존불은 백련사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삼존불이다. 먼저 본존불을 보면 머
리는 나발33)이며 정상에는 보주형인 둥근 육계34)가 조그마하게 솟아 있고 그 아래에 계주
가 보인다. 양미간의 모습이나 코, 입, 귀의 모습 등이 어느 정도 사실성을 띠고 있으나 어
딘지 모르게 얼굴 전체가 약간 부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보이며, 법의
는 가슴 밑에서 U자형으로 조식되었으며, 왼쪽 어깨에서 내려온 대의자락과 오른쪽 팔꿈치
를 감돌아 무릎 위로 돋아 나온 옷주름이 무릎 중앙에서 모아져 파상문을 이루고 있다. 가
부좌를 한 다리 밑으로 군의자락이 덮고 있으며 수인은 항마인을 결하고 있다.
양 협시불35)도 나발을 하고 육계를 갖춘 여래상으로 본존불과 유사한 형식이나 다만 수
인에 있어서 중품하생인36)을 결하고 있는 것이 다르다. 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항마인
을 결하는 석가여래라 한다면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되어야 하는데도 현재의 협시
불은 각각 여래상인 점이 특이하다. 조성연대는 조선후기로 추정된다.

Ⅴ. 나오며
지금까지 백련사의 역사와 가람배치 및 건물, 그리고 성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백련사는
천태종의 주도로 일어난 백련결사의 주축이 되었던 장소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또한
백련사의 독특한 가람배치와 경관은 자연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오랜 세월 명맥을 이어온 절인만큼 건물의 벽화나 석비를 비롯한 성보들에서 다양한 연대를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사적비의 비문은 백련결사와 그 주도자 요세의 이야기를 비롯한 백
련사의 역사도 담고 있어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렇듯 백련사는 통일신라 말 이래 우리 불교 역사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면서 이어져 왔
고 현재까지 많은 국사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절로 명성을 떨치고 있어 이번 답사에서 백련
사를 방문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Ⅵ. 참고문헌
관광진흥국, 『문화와 역사가 살아있는 남도의 향기』, 전라남도, 2006.
국립목포대학교박물관, 「강진군의 문화유적」, 『목포대학박물관학술총서』, 제13권, 국립목포
대학교박물관, 1989
신정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전라도』, 다음생각, 2012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창비, 2012
윤평현, 「백련사」,『호남문화 자료조사와 문화정보시스템 개발에 관한 연구』, 전남대학교,
2003

33)
34)
35)
36)

불상 중 소라 모양으로 된 여래상의 머리카락
부처의 정수리에 상투처럼 우뚝 솟아오른 혹과 같은 것
협시불: 본존불을 옆에서 모시고 있는 불상
중품하생인: 아미타불이 맺고 있는 9가지 수인 중 하나로 중품의 근기를 타고난 사람을 하생으로
이끈다는 뜻
정약용, 『白蓮寺址』, 강진문헌연구회, 1998
조용욱, 「영산강문화권」,『우리 역사문화의 갈래를 찾아서』, 역사공간, 2011
채상식, 「고려후기 원묘국사 요세의 백련결사와 그 역사적 의의」,『천태학연구』 6, 천태불교
문화연구원 ,2004
채상식, 「백련사의 성립과 전개」,『한국사』 21, 국사편찬위원회, 1996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5-전남』, 돌베개, 2004.
만덕산 백련사 홈페이지, http://www.baekryunsa.net/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홈페이지, http://encykorea.aks.ac.kr
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w.koreatemple.net
한국민족문화대백화, 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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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백련사 - 역사가 숨쉬는 사찰에서 백련결사의 자취를 찾다 11 길은지 황금보라 12 김주연 성유나 이수정 채송은 분 류 백련사 절 소재지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6 ☞ 답사 포인트 1. 고려시대 천태교관 요세의 주도로 일어난 백련결사의 배경을 백련사 중건과 관련지어 살 펴보고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2. 백련사의 유구한 역사에 따라 변화해온 성보와 건물들을 살펴보면서 백련사의 역사적 가 치에 대해 생각해 본다.
  • 2. Ⅰ. 들어가며 전라남도 강진군에 위치한 백련사는 통일신라 말에 지어졌다고 전해지며 현재까지 그 명 맥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특히 고려시대 때에는 보수적인 불교에 변화의 흐름 을 가지고 온 천태종의 교관 요세가 주도한 백련결사의 핵심적인 기구로 기능하기도 하였던 중요한 사찰이다. 이후 백련사는 왜구의 침입, 조선시대의 억불숭유 사상으로 인하여 잠시 주춤하였다가 임진왜란 이후 불교가 민간신앙으로 중흥하여 다시 본래의 기능을 하게 되는 등 우리나라 불교 역사의 흐름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또한 절의 풍광을 바라보면 산비탈에 위치해 있어 다른 절과는 다른 독특한 가람배치를 볼 수 있으며, 다양한 건물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대표적 건물인 대웅전은 내부에 아름 다운 벽화와 조각이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의 보물 제 1396호인 사적비는 고려시대와 조선 시대의 흔적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이에 본고에서는 백련사의 창건 배경 및 역사를 백련결사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자세히 서술하고 백련사의 역사를 담고 있는 가람배치와 건물들을 살펴본 뒤, 사적비를 포함한 성 보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백련사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Ⅱ. 백련사의 창건 배경 및 역사 1. 백련사의 역사 백련사(白蓮寺)는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통일신라 말 기인 839년(문성왕 1년)에 무염국사(801~888)가 처음으로 세웠다고 전해져 내려오며 원래 이름은 만덕산에서 유래한 만덕사(萬德寺)였다고 한다. 백련사가 중요한 사찰로써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고려 희종7년인 1211년에 원묘국사 (圓妙國師) 요세(了世)(1163-1245)가 옛터에 크게 중건1)하고 난 뒤 부터였다. 한 때 조계종 계통인 지눌(知訥)(1158-1210)과 함께 활동했던 요세는 천태종으로 사상을 전환하면서 만덕 산에 자리를 잡고 그의 제자 원영(元營)으로 하여금 80여 칸의 백련사를 짓게 하였다. 백련 사는 1211년부터 1232년(고종 19)까지 21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백련사 중건의 소식을 들은 최중헌의 부인인 정화택주(靜和宅主)는 백련사에다 무량수불상2)(無量壽佛像)을 조성하고 금 자법화경3)(金字法華經)을 베껴 쓰게 하였다.4) 고종 19년(1232), 절이 완공되자 요세는 보현도량5)(普賢道場)을 개설하고 강진의 지방호족 으로 추정되는 최표, 최홍, 이인천 등의 지원을 받아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서 백련사 결사(白蓮社結社)6)를 맺었다. 이러한 신앙결사는 12세기 후반, 무신란 이후 사회의 전반적인 변동 속에서 보수적 경향이 강화된 불교계에 대해 비판하는 움직임에서 시작되었다. 천태종 1) 절이나 궁궐 따위를 보수하거나 고쳐 지음 2) 아미타불상. 서방 정토 부처의 모습을 본 뜬 상. 3) 『법화경』은 묘법연화경을 줄여서 부르는 말로,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중 요사상으로 하고 있다. 4) 채상식, 「백련사의 성립과 전개」,『한국사』 21, 국사편찬위원회, 1996 p75-80 5) 불도를 닦는 곳 6)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단체를 만듦. 또는 그 단체.
  • 3. 계의 백련결사는 조계종계의 신앙결사인 수선결사와 더불어 불교가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른 자기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개혁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자각, 반성운 동이라고 할 수 있다.7) 이러한 백련결사 조직화 과정에서의 특징으로 중앙 집중적인 교단체제에 대해 개별적·독 자적인 지방 불교의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점과 대체로 지방의 중간 신분층과 그 이하 신분 층의 참여와 후원으로 결성되고 유지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즉, 백련결사는 지식층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농민, 천민과 같은 백성들을 아우르려는 면이 많았기에 최초의 민간 결 사 운동으로 평가된다.8) 요세의 백련결사 이후 백련사에서는 120년 동안 고려 8분의 국사9)(원묘국사, 정명국사, 원환국사, 진정국사, 원조국사, 원혜국사, 진감국사, 목암국사)를 배출하며 명성을 떨쳤다.10) 그러나 고려 말 강진 지방이 세 차례의 왜구 침입으로 살육과 약탈을 겪으면서 백련사는 폐허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조선왕조가 들어선 이후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 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백련사를 중건할 스님이나 지방호족이 없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 서야 불교가 민간신앙으로 중흥하게 되어 1430년(세종 12년)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孝 寧大君)의 후원을 받아 행호 스님이 왜구의 침입에 맞서 토성을 쌓는 등 도량을 중건할 수 있었다. 8분의 국사를 배출한 고려에 이어서 조선시대에도 백련사는 8명의 종사11)(소요대사, 해운대사, 취여대사, 화약대사, 설봉대사, 송파대사, 정암대사, 연파대사)를 배출하며 그 대를 이어갔다. 행호대사 이후 백련사는 사맥을 유지해 나갔지만 1760년 화재로 수백 칸을 태우 고 2년에 걸쳐 중건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12) 또한, 백련사는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과도 인연이 깊다. 당시 정약용이 유배하던 다산 초당과 근접해있어 정약용은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교류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13) 2. 백련사와 백련결사 고려 후기 무신란을 계기로 하여 당시 사회는 커다란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의종24년 (1170)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란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문벌귀족 체제에 대한 무신들의 불만과 군인들의 불평이 축적되어 일어난 것이었으며, 그 결과 고려사회는 이전부터 내재되어있던 기층사회의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사회에서는 정 치·사회·경제구조 상의 변동이 진행되었고 사상구조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 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불교 운동으로 신앙결사가 결성됨에 따라 불교계는 서서히 재편되 어갔다. 통일신라 말기인 839년에 무염선사에 의해 창건된 후 작은 절집에 불과했던 백련사 가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 있었다. 원묘국사 요세가 백 련사를 근거지로 하여 백련결사를 맺었기 때문이다. 지눌의 조계종 중심의 수선결사와 더불 어 백련사 결사는 대표적인 신앙결사이며, 기존의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계의 타락상과 7) 채상식, 앞의 책, 국사편찬위원회, 1996 p72-75 8) 채상식, 앞의 책, 국사편찬위원회, 1996 p72-89 9) 신라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덕이 높은 승려에게 내리던 최고 승직(僧職) 10) 정약용, 『白蓮寺址』, 강진문헌연구회, 1998 p5-71 11) 법맥을 받은 고승. 또는 각 종파의 조사(祖師) 12)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창비, 2012 p62 13) 신정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전라도』, 다음생각, 2012 p350
  • 4. 모순에 대한 비판하는 움직임에서 시작되었다.14) 백련결사를 주도한 천태종 승려 요세(1163-1245)는 명종 4년(1174)에 천태종 승려로 입문 하였으며 1198년 봄에 개경의 천태종 사찰인 고봉사 법회에 참석하였다가 분위기에 실망해 신앙결사에 뜻을 두었다. 그 해 가을에 동지 10여 명과 더불어 여러 지역을 유력하다가 영 동산(靈洞山) 장연사(長淵寺)에서 수행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요세는 참선15)을 중시하는 조계 종계의 지눌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지만 경문을 읽으며 부처의 공덕을 생각하는 염불 중심의 천태교관으로 사상을 바꾸게 된다. 그 뒤 요세는 만덕산으로 주거를 옮겨 고종3년(1216)에 본격적인 백련결사를 조직하게 된다. 이는 최씨 정권과 밀착되어 있던 강진의 지방 호족인 최표, 최홍, 이인천 지원에 의해 결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백련사를 중건하고 사람을 모으니 요세의 제자만 하더라도 38명에 왕공, 귀족, 문인, 관리로 결사에 들어온 사람이 300명에 달 했다. 이러한 백련사의 움직임에 대해서 강화도정부는 백련사가 보현도량을 설치하고 ‘백련결사 문’을 공포한 이후에 와서야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련사에서 1232년(고종 19) 4 월 8일에 보현도량을 설한 것은 분명 대몽항전과 관련된 대응조처였으며 대몽항전을 표방 한 것에서 그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고종 24년 여름에 고종이 75세의 고령 인 요세에게 높은 도를 쌓은 승려를 나타내는 ‘선사’의 직함과 함께 세찬16)을 내린 것을 통 해 강화도정부에서 백련사에 관심 있게 지켜봤다는 것을 알 수 있다.17) 지방호족과 지식인층, 일반민들이 보수적인 문벌귀족체제에서 유리되어가면서 한편으로는 성장기반을 서서히 구축해가던 잠재성이 궁극에는 사회변혁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13 세기전후에, 실천적인 백련결사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사회계층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보수적인 소수의 문벌귀족체제에 의해 장악되고 있던 불교계의 모순을 지방호족과 지식인층들이 자각·비판하고 이에 대한 개혁을 주도했다는 사 실이다. 곧 보수적·귀족적인 불교에서 지방 불교·대중적인불교로 사상사의 전환을 이룬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사상사적 측면에서 볼 때 수행과 교화를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실천적인 교화 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었다. 셋째, 백련 결사를 비롯한 당시 신앙 결사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실천신앙을 강조하면 서도 이에 대한 이념적·철학적 기반을 동시에 제시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18) 이렇듯 백련결사는 고려사회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불교의 실천 성을 강조함으로써 불교계의 세속화와 사회모순을 극복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백련결사의 사 상적 경향은 서민 대중의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몽고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Ⅲ. 백련사의 가람배치 및 건물 14) 채상식, 「고려후기 원묘국사 요세의 백련결사와 그 역사적 의의」,『천태학연구』 6, 천태불교문화연 구원 ,2004, p196-197 15) 스스로 선법을 닦아 구함 16) 세배를 하러 온 사람에게 대접하는 음식 17) 채상식, 앞의 책, 국사편찬위원회, 1996, p86,87 18) 채상식, 앞의 책 ,천태불교문화연구원 ,2004, p196-197
  • 5. 1. 가람배치 그림 2 백련사 가람배치, www.koreatemple.net 백련사는 만덕산 자락 경사가 급한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사역은 석축을 계단식으 로 쌓아 터를 만들고 건물을 배치하였다. 다른 사찰과는 다르게 백련사에서는 조금 독특한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19)백련사 초입의 넓은 마당에는 아무런 축조물이 없고 위편이 장대 한 규모를 자랑하는 만경루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그 뿐만 아니라 만경루는 아래층 벽면은 창고마냥 널빤지로 굳게 막혀 있다. 절 안쪽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길 배치를 보면 만 경루를 완전히 감싸고돌아 그 앞, 옆모습을 다 본 후에 대웅전 안뜰로 들어서게 되어있다. 이 대웅전 또한 높은 축대 위에 팔작다포집으로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편 듯한 형상을 하고 있고, 정면에는 계단이 없어 다시 옆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백련사가 갖는 이러한 특수 성은 산비탈에 위치한 백련사의 위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제일 하단에 있는 누각 만경 루에서는 서쪽을 바라보면 강진만의 빼어난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가람 배치상 현재는 백 련사에서 만경루가 가장 앞에 있지만 기록에 의하면 예전에는 그 앞에 해탈문이 있었다고 한다. 규모가 큰 사찰에는 보제루(菩濟樓)라는 건물이 따로 있는데, 누각 형식의 이 건물은 보통 법당과 불이문(해탈문) 사이에 위치한다. 따라서 만경루는 백련사의 보제루였던 셈인 것이다. 만경루 밑으로 올라가면 좁은 대웅보전 앞마당이 있다. 주불전인 대웅전 좌우로 주 요 전각이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 오른쪽에는 삼성각, 대웅전 왼쪽에는 명부전이 자리 잡았 다. 명부전에서 산 쪽으로 약간 올라간 지대에 응진전이 외따로 있다. 요사채는 대웅전 앞마 당에서 좌우로 치우친 곳에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오른쪽에는 2층 건물인 육화당이 있고, 그 뒤로 ㄱ자형 요사 1동이 있다. 대웅전 좌측에는 일자형 요사 1동이 자리 잡았다. 만경루 와 대웅보전은 중심축선상에 배치되어 있으나 좌우 요사는 마당에서 뚝 떨어져 있어 중정중 심의 배치는 아니다. 만경루와 대웅보전 사이 마당이 좁아 약간 답답하긴 하지만 좌우 요사 가 간격이 넓어 지나친 폐쇄감은 느끼지 못한다. 명부전 서쪽으로는 응진당 앞에 부도 1기 19)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창비, 2012 pp58-pp60
  • 6. 가 있고, 그 아래 넓은 공간에 유형문화재 제137호인 사적비가 있다. 만경루 옆에는 새로 지은 종각이 있다. 백련사에는 응진전 앞에 1기, 만경루 좌측 선방 앞에 1기, 입구 축대 위 에 1기 그리고 절 서쪽의 동백 숲에 4기 등 전부 7기의 부도가 있다. 만경루 옆에는 예전 스님들이 사용하였던 맷돌이 남아있다. 20) 2. 건물 1)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주존불로 모시는 건물이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로 등록되 어있다.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내부에는 목조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삼 존불은 중앙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협시보살상이 배치되어야 하지만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이 대웅전은 1760년(영조36)에 큰 화재로 인하여 대부분의 전각이 손실되었고, 1762년에 현재의 대웅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 면 3칸에 팔작지붕21)으로 겹처마인 다포식22)이다. 추녀마다 활주를 세워 4개의 활주가 건물 을 받치고 있으며, 앞면 2개의 주두에 용두를 장식하여 단청과 함께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 낌을 준다. 한편, 대웅전의 내부는 아름다운 벽화들과 조각을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성보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2) 육화당 육화당은 ‘ㄱ’자의 전각으로 본래 있던 요사를 1995년 확장 중수한 것으로서 1층은 식당 이고 2층은 객실로 사용하고 있다. 육화(六和)란 부처님께서 교단의 화합을 위하고 대중이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세를 일깨우고자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을 말씀하셨는데, 그 여섯 가 지 발원을 말한다고 한다. 3) 명부전과 만경루 명부전은 저승의 명부를 상징하는 불전을 이르며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모시고 있다고 해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고 해서 지장전(地藏殿)이 라고도 부른다. 이곳에는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무독귀왕, 도명존자 및 시왕 10체와 판관, 녹 사, 인왕상 각2체 그리고 사자상 1체는 지장보살의 권속으로 봉안되어 있다. 만경루는 남도 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누각으로 예전에 스님들이 만경루를 선방 삼아 수행을 했고, 지금은 템플스테이 공간으로도 쓰이는 귀중한 누각이다. 4) 응진당과 삼성각 응진당의 응진(應眞)이란 ‘존경 받을만 하다’, ‘공양 받을만 하다’라는 의미로 부처는 아니 지만 부처님의 제자나 고된 수행을 거쳐 진리를 깨달은 역대의 고매한 존재를 모신 집인데 나한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백련사 응진당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아난, 가섭이 20) 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2013. 9. 7. www.koreatemple.net 21) 옆에서 볼 때 ‘八’자 모양인 지붕으로 한국 목조 기와지붕 중에서 우진각지붕과 같이 사방으로 지 붕면이 있으나 양측 지붕면 위에 삼각형의 합각(合閣)이 있어서, 우진각지붕 상부를 수평으로 잘라 그 위에 맞배지붕을 올려놓은 것 같은 복합형 지붕형식 22)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있는 형식
  • 7. 협시를 이루고, 16상 나한상 및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다. 한편, 삼성각에는 독서탱화와 칠성탱화, 1931년에 그려진 산신탱화가 그려져 있는데 소나무 아래 부채를 들고 있는 산신령과 까치 호랑이, 그리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동자그림이 민화적이고 친근한 느 낌을 준다. 한편, 백련사 삼성각에는 좌측에 칠성탱화, 우측에 산신탱화, 그리고 중앙에 독성 탱화가 있다. 산신탱화는 1931년에 봉안되었는데 본래는 대웅보전에 있었다고 한다. 소나무 아래 부채를 들고 있는 산신령과 항상 따라다니는 호랑이, 지팡이를 들고 있는 동자가 그려 져 있는데, 호랑이의 표현이 민화적이며 재미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중앙에는 치성광여 래를 협시하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있고, 상단에 일곱 부처님이 모셔져 있으며, 하단에는 도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성군(星君)들이 그려져 있다. 5) 부도전 부도란 스님들이 열반에 들면 다비식을 마친 후 나온 사리를 모셔놓은 탑을 이른다. 천연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된 동백숲 안에는 원묘국사증진탑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3호 강 진백련사원구형부도, 대웅전을 중수하신 월인당 총신 스님의 부도, 그리고 이름모를 2기의 부도가 있다. 또한 응진전 앞에 춘파당 부도, 절 입구 축대 위에 부도, 명부전 앞에 부도의 잔해가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Ⅳ. 백련사의 성보 1. 비석 1) 강진 백련사 사적비 (보물 제 1396호) 백련사 사적비는 백련사 대웅전에서 오른 쪽으로 약 5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 는 높이 447cm 규모의 전형적인 석비이다. 백련사에는 여러 기의 석비가 있었으나, 현 재는 1669년(현종 10)에 세워진 백련사 사 적비만 남아 있다. 사적비의 비문과 정약용 의 만덕사지에 의하면 고려시대 한림학사 최자가 찬한 백련사 원묘국사의 비로 추정 되는 고비가 있었지만 이후 왜란으로 훼손 되었다고 한다. 이후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 던 귀부23) 위에 새로 비를 세웠다고 한다. 결국 귀부는 고려시대의 것이고 비신은 조 선시대의 것으로 서로 다른 건립연대를 보 이고 있다. 그러나 귀부와 비신 모두 각각 의 시대가 지닌 양식상 특성을 잘 포함하고 23)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 그림 3 백련사 사적비, 문화재청
  • 8. 있어 가치가 있다. 백련사 사적비는 귀부, 비수, 이수24)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귀부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고려 전기 귀부에서 볼 수 있는 역동적인 모습보다는 동세가 약하고 장식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귀부의 크기는 227cm X 190cm X 110cm이다. 귀부의 얼굴은 용두화 되었으며 입에 는 여의주가 없고 목에는 5개의 줄이 가로로 음각되었다. 귀부의 등면에 곽을 만들어 내부 를 당초문25)으로 양각하였으며 이중의 육각문 안에는 5엽의 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귀부의 중앙 상면에는 비좌26)가 있는데 그 주변에는 인동문27)으로 조각되어 있다. 비신은 2면비로 전·후면에는 비문이 있으며 크기는 234㎝×118㎝×29㎝이다. 비문은 모두 19행이며 비신 전면의 상단에는 ‘만덕산백련사비’라 새겼고, 가로로 「전라도강진만덕산백련 사사적비」라 기록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백련사의 역사와 주변경관, 원묘국사의 중창, 백련 결사를 일으킨 보조와의 교류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뒷면에는 당시 불사(佛事)에 참여한 사 람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崇禎紀元戊辰後五十四年辛酉五月立’라는 사적비 말미의 명문으로 보아 1681년(조선 숙종 7)에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비신 양 측면에는 초화 문을 양각했는데 이는 조선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수는 우진각지붕28)의 형태로 하단에는 목조 건축의 겹처마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정 상에는 2마리의 용이 등을 맞대고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는 모습을 매수 사실적이게 조 각했다. 크기는 170㎝×75㎝이다. 2. 부도29) 정약용의 만덕사지에 백련사 내에는 중진탑, 무명탑을 포함해 총 8기의 부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조사에 따르면 백련사 내에서 발견된 부도는 총 7기이다. 그 중 동백림 내 월인당부도와 응진전 앞의 춘파당부도 2기만이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이 외에 명부전 앞 부도, 절 입구 축대 위 부도, 동백림 내 부도 2기 그리고 백련사원구형부도 는 따로 명문이 없어 이름을 알 수가 없다. 또한 부도들의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 대까지 다양하다.30) 1) 강진 백련사원구형부도(전남 유형문화재 제 223호) 백련사원구형부도는 백련사 내외 승탑 가운데 연대가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부도이다. 그런데 부도의 탑신이나 기단부에 명문이 없어 누구 것인지 알 수 가 없다. 이 부도를 향해 서 원묘국사의 사리탑인 중진탑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정확한 연대나 명문이 없어 확증하기 힘들다. 부도의 높이는 293cm이며, 사각형의 기단 위에 원구형의 탑신 그리고 그 위에 팔각 의 옥개석이 올려져있는 모양이다. 특히 탑신의 상단에는 사방으로 연화무늬 모양의 연주문 띠로 장식되어 있어 양식적으로 특이한 기법을 보인다. 이 부도는 신라시대 이후 전통적으 로 내려오던 팔각원당형에서 몇 가지 변형된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24) 25) 26) 27) 28) 29) 30) 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 줄기, 덩굴, 잎이 얽히고설킨 식물문양에 대한 호칭 비신을 꽂아 세우기 위해 홈을 판 자리 화문과 덩굴무늬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초화형식의 장식무늬. 당초문의 일종 건물 사면에 지붕면이 있고 귀마루(내림마루)가 용마루에서 만나게 되는 지붕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묘탑 석탑이나 석등의 지붕돌
  • 9. 2) 백련사월인당부도 백련사 동백림 숲속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진 부도이다. 방형의 기단 위에 대좌31)를 놓고 그 위에 고복형을 띠는 팔각의 탑신과 팔각의 옥개석이 차례로 올려져있다. 탑신의 8 면 중 한 면에 월인당이라 당호를 새겨 놓아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대좌의 한 면에는 조성연대를 새겨놓아 1804년에 만들어 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절대연대가 명기되어있는 월인당부도로 인해 다른 부도에 대한 연대편년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백련사 내에서 주요한 부도라 할 수 있다. 3. 불화 1) 백련사 영산회상도 영산회상도는 대웅전 본존불 바로 후벽에 걸려 있다. 높이 450cm 폭 400cm의 규모로 중앙 상단에는 삼존불이 위치하며 그 앞에는 두 줄로 보살들이 서 있다. 삼존불 뒤편으로는 사천왕을 비롯한 권속들의 얼굴이 있다. 삼존불은 모두 두광. 신광을 지고 결가부좌를 취하 고 있으며 모두 여래상이다. 불화의 하단에는 조성명기가 흐릿하게 남아있으며 1705년(숙종 31)에 그려진 18세기 초반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2) 백련사 삼장보살도 이 불화는 백련사 대웅전 좌측 벽에 걸려있는 그림으로 높이 185cm 폭 315cm 크기이 다. 그림의 상단 중앙에 천장보살, 그 왼쪽에 지지보살, 오른쪽에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전후 좌우에는 권속들을 배치하였다. 삼장보살들은 머리에 화려한 보관과 가슴에 영락을 걸치고 있으며 우측의 지장보살만이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다. 불화 하단에는 제작에 참여한 인물 과 조성명기가 기록되어있는데 1773년(영조49)에 그려진 18세기 후반의 그림이다. 3) 대웅보전 벽화 백련사 내 사찰건물에는 다양하고 아름다운 불화들이 그려져 있다. 특히 대웅보전 내부 와 외부 문에는 특히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러한 벽화들은 묘법연화경32)에 나오는 내 용들을 근거로 스님들이 직접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묘법연화경에 따르면 영축산에서 부처 님께서 설법하실 때 하늘에서 만다라, 만수사 꽃비가 내리고 하늘의 노래를 좋아하는 긴나 라와 음악을 건달바, 부처님의 제자인 아라한들이 이전에 없던 일에 기뻐하여 합장하며 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기뻐했다고 한다. 백련사 대웅전의 벽화는 이러한 내용 을 근거로 그려진 것이다. 또한 벽화에 그려진 봉황, 도끼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들의 모 습이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데 조선시대 사람들이 대웅전을 반야용선이라고 한 것의 근 거로 추측할 수 있다. 4. 불상 31) 비, 조각상 등을 지탱하는 대 또는 기둥 32) 법화경(法華經)이라고도 한다. 이 경은 불탑신앙을 하는 집단에 의해 성립된 대표적 대승경전으로 삼승(三乘)을 한데 모아 일승(一乘)의 큰 수레로 일체 중생을 구제한다는 정신에서 여래는 큰 인연 으로 세상에 나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경지에 들어가게 하는 데 근본목적이 있다.
  • 10. 1) 백련사대웅전삼존불 이 삼존불은 백련사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삼존불이다. 먼저 본존불을 보면 머 리는 나발33)이며 정상에는 보주형인 둥근 육계34)가 조그마하게 솟아 있고 그 아래에 계주 가 보인다. 양미간의 모습이나 코, 입, 귀의 모습 등이 어느 정도 사실성을 띠고 있으나 어 딘지 모르게 얼굴 전체가 약간 부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보이며, 법의 는 가슴 밑에서 U자형으로 조식되었으며, 왼쪽 어깨에서 내려온 대의자락과 오른쪽 팔꿈치 를 감돌아 무릎 위로 돋아 나온 옷주름이 무릎 중앙에서 모아져 파상문을 이루고 있다. 가 부좌를 한 다리 밑으로 군의자락이 덮고 있으며 수인은 항마인을 결하고 있다. 양 협시불35)도 나발을 하고 육계를 갖춘 여래상으로 본존불과 유사한 형식이나 다만 수 인에 있어서 중품하생인36)을 결하고 있는 것이 다르다. 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항마인 을 결하는 석가여래라 한다면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되어야 하는데도 현재의 협시 불은 각각 여래상인 점이 특이하다. 조성연대는 조선후기로 추정된다. Ⅴ. 나오며 지금까지 백련사의 역사와 가람배치 및 건물, 그리고 성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백련사는 천태종의 주도로 일어난 백련결사의 주축이 되었던 장소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또한 백련사의 독특한 가람배치와 경관은 자연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오랜 세월 명맥을 이어온 절인만큼 건물의 벽화나 석비를 비롯한 성보들에서 다양한 연대를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사적비의 비문은 백련결사와 그 주도자 요세의 이야기를 비롯한 백 련사의 역사도 담고 있어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렇듯 백련사는 통일신라 말 이래 우리 불교 역사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면서 이어져 왔 고 현재까지 많은 국사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절로 명성을 떨치고 있어 이번 답사에서 백련 사를 방문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Ⅵ. 참고문헌 관광진흥국, 『문화와 역사가 살아있는 남도의 향기』, 전라남도, 2006. 국립목포대학교박물관, 「강진군의 문화유적」, 『목포대학박물관학술총서』, 제13권, 국립목포 대학교박물관, 1989 신정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전라도』, 다음생각, 2012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창비, 2012 윤평현, 「백련사」,『호남문화 자료조사와 문화정보시스템 개발에 관한 연구』, 전남대학교, 2003 33) 34) 35) 36) 불상 중 소라 모양으로 된 여래상의 머리카락 부처의 정수리에 상투처럼 우뚝 솟아오른 혹과 같은 것 협시불: 본존불을 옆에서 모시고 있는 불상 중품하생인: 아미타불이 맺고 있는 9가지 수인 중 하나로 중품의 근기를 타고난 사람을 하생으로 이끈다는 뜻
  • 11. 정약용, 『白蓮寺址』, 강진문헌연구회, 1998 조용욱, 「영산강문화권」,『우리 역사문화의 갈래를 찾아서』, 역사공간, 2011 채상식, 「고려후기 원묘국사 요세의 백련결사와 그 역사적 의의」,『천태학연구』 6, 천태불교 문화연구원 ,2004 채상식, 「백련사의 성립과 전개」,『한국사』 21, 국사편찬위원회, 1996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5-전남』, 돌베개, 2004. 만덕산 백련사 홈페이지, http://www.baekryunsa.net/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홈페이지, http://encykorea.aks.ac.kr 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w.koreatemple.net 한국민족문화대백화, 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