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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Spring | No.23
                                                        www.nationaltrust.or.kr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무처 : 02-739-3131 김금호 사무국장   ISSN 1976-2577
CONTENTS
04 집중과 조명                오래된 변방으로서 서촌, 역사적 장소성의 위기                  조명래 | 내셔널트러스트 이사, 단국대학교 교수

                         서촌의 역사     김한울 | 서촌주거공간연구회 사무국장

                         꿈을 물려주는 사람들      김정찬 | 마을공동체‘품애’이사

                         기억의 도시공간, 서촌       이충기 |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과학대학 건축학부 교수

16 내셔널트러스트가 만난 사람        김만수 부천시장       윤인석 | 성균관대학교 교수, 내셔널트러스트 편집위원

20 영국NT 이야기              워즈워드의 영감,‘ 호반의 집’ 조명래 | 내셔널트러스트 이사, 단국대학교 교수
24 품안에                   우리가 강이 되어주자 - 1차 매입대상지‘내성천 범람원’확보                        김금호 |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무국장

26 내셔널트러스트 여행            모래강의 나라에서 모래강의 고향에 들다                 박용훈 | 4대강 사진 기록가

28 내셔널트러스트 추천도서          에코의 함정 - 녹색의 이름으로 용서되던 그 모든 어둠                   임정진 | 동화작가

30 회원인터뷰 1               두루두루 아름다운 사람         홍두루미 회원님 | 하나로 의료재단 의사

31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자연이야기 1   두루미   한동욱 | (사)에코코리아 상임이사

32 회원인터뷰 2               따뜻한 변화, 함께 더 멀리가는 길             홍승아 | 네오위즈 기업문화실장, 마법나무재단 사무국장

33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자연이야기 2   우리산꽃의 제왕 함박꽃         고주환 | 작가

34 내셔널트러스트 소식            내셔널트러스트 활동소식
35 내셔널트러스트 알림마당          공지사항
36 후원해주시는 분들             2011년 12월 ~ 2012년 2월 후원내역
38 회원마당                  내셔널트러스트 통신망
39 팝업카드시리즈               내성천




                                                                                                                                     발행일 2012년 4월 2일                     발행처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
                                                                                                                                     발행인 김홍남 양병이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11길 20 우리빌딩 4층
                                                                                                                          2012년 봄호   편집위원장 이은희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4가 72-4번지 우리빌딩 4층)
                                                                                                                                     편집위원 남준기 서왕진 안창모 오충현 유상오            전화 02-739-3131
                                                                                                                                            윤인석 임정진 조명래 한동욱              전송 02-739-9598
                                                                                                                                     기획 허주희                              1년 정기구독료 20,000원
                                                                                                                                     편집인쇄 (주)디자인내일                       (정기구독료는 후원금으로 사용됩니다.)
                                                                                                         ISSN 1976-2577
                                                                                                                                     www.nationaltrust.or.kr             * 본지에 게재된 글과 사진, 그림은
                                                                                                                                     페이스북 www.facebook.com/trustkorea     무단 전재하거나 복제하여 사용할 수 없습니다.

                                                                                                                                     트위터 @ntrus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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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확보하여 시민의 소유로 영구히 보전하고 관리하는 시민운동입니다.
                  표지
                  서촌 누하동 사진제공 김한울 서촌주거공간연구회 사무국장                                                                                                               목차사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선암사 매화 첫 꽃 사진 남준기 내일신문 기자
|✽집중과 조명│




                                                  서촌은 서울 도성 안에서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의 지역      서 문예활동을 하기 위한 것과 무관치 않았다. 이곳이 조선 후기‘위항문학’운동(위
                                                  을 말한다. 궁궐의 동편으로는 고관대작들이 모여 살       항인은 중인 이하 하급계층 사람을 말함)의 본거지였던 것은 우연한 게 아니었다.
                                                  던 북촌이 있었다. 북촌은 청계천 남쪽 너머 남산기슭      1786년 규장각 서리들이 결성한‘옥계시사(玉溪詩社)’
                                                                                                                  (혹은 송석원시사)는 위항문
                                                  까지 뻗어있는 남촌과 짝이었다. 이곳엔 퇴락한 양반       학운동을 이끈 서촌의 대표적인 시 동아리였다. 서촌이 중인계급의 거주공간을 넘어
                                                  과 상민들이 주로 살았다. 이에 견주어 서촌은 궁궐 동     문예공간이 된 것은 궁궐 옆이지만 주류 양반 거주지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그러
                                                  편 북촌의 짝이었다. 인왕산 기슭 서촌엔 중인과 아전      면서 풍광이 빼어난 곳이라는‘도성의 변방’ 즉 주변부적 장소성 때문에 가능했다.
                                                                                                           ,
                                                  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거주했다. 중인은 본래 한양 도       이러한 장소적 특징은 20세기 들어와서도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1886
                                                  성 안에서 북촌과 남촌 중간인 청계천 일대에 살았던       년 계동에서 옥인동으로 옮긴 경운궁과 나란히 서편으로 윤덕영의 벽수산장과 동편
                                                  사람들을 지칭했다. 이들 대부분이 궁궐에서 전문기술       으로 이완용의 집이 들어섰다. 친일파 거두가 사는 집이였던 만큼 엄청난 크기로 조
                                                  직을 수행했던 중간계급에 속했기에 중인은 자연스럽        성되었다. 경복궁에 총독부가 들어서면서 총독부 관리들이 사는 일식주택들이 서촌
                                                  게 신분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었다.                일대에 많이 지어졌다. 조선시대 왕족을 포함한 고관대작 일부가 북촌 일대에 거처
                                                   인왕산으로 둘러쳐진 넓지 않는 지형에다 남측에 사       를 정한 것과 같은 현상인 셈이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 들어 경성이 급격하게 팽창
                                                  직단이 있어 서촌은 처음부터 고을이 크게 들어 설 곳      하고 집이 부족했지만 집장사들이 이곳의 땅을 쪼개 (필지분할을 해) 20평 남짓한 개
                                                  이 아니었다. 대신 북악산과 인왕산, 그리고 백운동천      량한옥을 대량으로 지어 팔았다. 요즘 도시외곽에 대규모 주거단지를 조성하면서 아
                                                  과 옥류동천(모두 청계천의 물줄기)으로 에워싸인, 즉      파트를 파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서촌은 외곽의 쾌적한 신주거지로 변
                                                  이산(二山)이수(二水)가 만들어낸 빼어난 경승지였다.      모하면서 당시로선 신지식인이었던 문예예술인들이 모여들었다. 가령, 화가 이중
                                                  왕과 고관대작은 물론이고 장안의 시인묵객들이 경승        섭, 이상범, 박노순, 시인 노천명, 현진건, 윤동주, 모윤숙, 이상, 소설가 현진건 등
                                                  의 아름다움을 찾아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안견이       이 서촌에 살면서 여러 흔적을 지금까지 남기고 있다.
                                                  그린‘몽유도원도’ 실제 배경이었고, 연산군이 이곳
                                                          의                           해방이 되어 일인이 떠나면서 적산 건물들이 한국인의 손으로 넘어갔고, 동란 동
                                                  탕춘대에서 시샘하는 봄날을 탐했으며, 정조가 꽃 버       안 많은 건물이 파괴되기도 했다. 또한 해방과 동란을 거치면서 서울로 찾아든 피난
                                                  들에 매료되어 갈 길을 잊었던 데가 바로 이곳이었다.      민들과 지방민의 일부가 이곳 서촌까지 들어와 기존 주택들을 쪼개어 살게 되면서
                                                  겸제 정선의‘장동팔경첩’ 인왕산 아래 장동일대를
                                                              은
                                                  8폭의 진경으로 그려 놓은 것이다.
                                                   서촌은 이렇듯 궁궐 옆이지만 산자락이고 중심 번화
                                                  가로부터 떨어진 도성 안 변방과 같은 곳이었다. 조선                                                     송석원시사야연도, 김홍도

                                                  초만 하더라도 지금의 통의동과 창성동 일대에 관청이
                                                  몇 있었을 뿐 주택들은 많지 않았다. 임진왜란 후 인구
                                                  집중과 함께 계급에 따른 주거지가 분화되면서 양반들
                                                  이 거주하던 북촌과 분리되어 누각동 일대에 중인을 비
                                                  롯한 이서계층의 주거지가 만들어졌다. 세종 이도가
                                                  태어났고(1397년) 안평대군 이용이 기거했으며 영조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정철, 김정희, 이항복 등 몇몇 권문

    오래된 변방으로서 서촌,                                 세가들이 거처했지만, 대개 궁궐 근방이나 풍광이 좋
                                                  은 곳(예, 장동)에 한정됐다. 임진왜란 이후 몰려 든 중
                                                  인계급은 필운동에서 누각동에 이르는 웃대에 넓게 분

    역사적 장소성의 위기                                   포해 살았다(청계천 일대를 아랫대, 인왕산 자락 일대
                                                  를 웃대라 했음). 이들을 그래서 웃대사람 혹은 상촌인
    조명래 | 내셔널트러스트 이사, 단국대학교 교수                    이라 불렀다. 낮은 신분이었지만 여유가 있었던 중인
                                 사진 Kernbeisser
                                                  들이 외진 이곳에 들어 온 것은 빼어난 풍광을 즐기면


4   | 2012년 봄호 |   |                                                                                                 | 2012년 봄호 |            |   5
주거환경이 급속하게 나빠졌다. 청계천에서 쫓겨난 철거민 일부는 인왕산 기슭에 무                        가 지정되면서부터 이러한 변화는 드세어졌다. 2001년      있다. 가령, 서촌의 한옥은 총 663채가 되는 데, 이는
허가 판자집을 짓기도 했다. 도시화의 바람이 더욱 거세어지면서 부족한 주택을 공                        엔 윤덕영가(家) 등이 있는 옥인동이 주택재개발 예정지      일대 전체 가옥의 31%, 4대문 안 한옥 37000여 채의
급하기 위해 도심 근방 구릉지에 시범아파트단지들이 생겨날 때 서촌에도 인왕산 속                        구로 지정되었다. 30여 년 간 자연경관지구로 묶여 개      18%, 북촌의 전체 한옥 1200여 채의 절반에 해당한다.
살까지 파고든 옥류동천 입구에 시범아파트(1971년) 9동이 들어섰다. 인왕산에서 발                     발이 엄격하게 제한되던 곳이었지만 2001년 이후 일부       그간 우리는 시간의 이끼가 낀 도시의 많은 유산을
원해 청계천으로 흘러가던 물길들도 하나하나 복개되어 모두 사라졌다. 지금은 구불                        해제와 2종 일반주거지역 변경 등으로 재개발 사업이        개발이란 이름으로 파괴하고 지워버렸다. 이는 우리의
구불한 도로의 모습에서 옛 물길의 흔적을 어렴풋이 기억해 낼 수 있다.                             추진되었다. 2004년 체부동, 필운동, 누하동 등이 주택    정체성과 주체성을 우리 스스로 부정하는 것에 다름없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도시화의 바람이 불어 닥치면서 서촌의 본래 모습은 빠르                     재개발 예정구역으로 지정되었다. 한옥을 싹 쓸어 내고       다는 인식이 뒤늦게 생기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후
게 잃어갔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른 지역에 비해 그러한 변화는 오래가지                       돈이 되는 아파트를 맘껏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주민들      반을 거치면서 복원과 보전이 도시개발의 새로운 키워
못했다. 1968년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한 후, 인왕산과 북악산의 입산이 금지되                      은 조합을 설립해 꿈에 부푼 재개발을 진행하면서 그간       드가 된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서촌에도 재개발
고 서촌 일대에 고층 건물 등의 신축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심지어 이곳 주민들의                       억눌린 개발욕구에 대한 보상을 한꺼번에 받고자 했다.       바람이 불어 닥쳤지만, 시민들의 높아진 보전의식, 정
일상생활조차 보안차원에서 24시간 감시를 받았다. 서울의 대표적인‘통제 및 감시                         우리는 그간 싹쓸이 재개발이 도시를 사실상 학살하        체성의 뿌리 찾기에 관한 관심이 급격하게 커지면서,
의 지역’
    으로 떠오르면서 사람들은 편한 곳을 찾아 하나하나 떠났고, 개발 열풍도 비                       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봐 왔다. 재개발 바람이 끝내      서촌의 개발사업들은 여러 반대에 직면하면서 하나하
껴감에 따라 서촌의 건물들은‘조용히 숨죽이며 낡아 갔다’ 개발의 변방이 된 결과,
                              .                                     불어 닥치면서 서촌의 학살도 시간의 문제가 됐다. 서       나 변경되어 갔다. 이를테면, 체부동 등의 주택재개발
서촌의 풍경은 남루해졌지만, 이는 멀리는 조선시대, 가까이는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                       울의 오랜 변방으로 있는 동안 서촌은 다른 곳에 비해       사업은 조합설립추진위원회까지 승인됐지만, 2010년
방이후 60, 70년대까지 이어져 온 삶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의 다른 모습이었다.                    상대적으로 많은 문화유산을 품게 되었다. 특히 20세       서울시 방침에 따라 한옥보전 수복형 재개발정비사업
    그러나 문민정부 이후 불기 시작한 민주화 바람은 도시개발 분야에서 규제완화의                      기 초반 문화예술인의 거처, 일본식 가옥, 초기 근대 양     지구로 변경되었다. 또한 같은 해 4월 서울시는 서촌 일
바람을 동반했다. 개발과 건축 규제가 조금씩 풀리면서 서촌에도 한옥을 허문 자리에                       식의 공공건물, 1930년대 개량 한옥, 나아가 60,70년   대 15개 동 58만2297㎡ 지역에 대한 한옥보존대책을
다세대나 빌라가 하나둘씩 들어섰다. 1992년 누상동, 옥인동 일대 주거환경개선지구                      대식 공동체 일상문화 등이 상대적으로 풍부하게 남아        담은‘경복궁 서쪽 제1종 지구단위계획’ 수립했다.
                                                                                                                            을                                                               사진 정진호
                                                                                                         지구단위계획에 의하면 서촌일대 한옥은 한옥지정
                                                                                                        구역과 한옥권장구역으로 나누어 관리된다. 이에 따라
                                                                                                        서촌 일대 재개발 예정구역으로 지정된 체부, 필운, 누
서촌은 청운동, 옥인동, 통인동, 누하동, 누상동, 효자동, 체부동, 필운동, 통의동 등 작은 구역으로 나뉘어져있다.
1 체부동의 골목 2 누하동 사진 이한울                                                                                  하동 등 3곳도, 이 지구단위계획과 별도로 재개발 사업
                                             1   2                                                      을 추진할 수 있으나, 한옥보전에 관한 내용을 정비계       1943년에 신축된 가옥이라는 이유로 2008년 등록 해제되고, 문화유산보전단체들이
                                                                                                        획에 포함해야 한다. 옥인1구역 주택재개발사업도 관        이를 사들인 뒤 헐고 4층짜리‘이상기념관’ 지으려 했다.
                                                                                                                                                                  을
                                                                                                        리처분단계까지 갔지만 2011년 말 서울시는 윤덕영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철거식 재개발의 불씨가 이곳저곳에 넓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등의 문화유산이 사업구역 내에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다. 서촌은 20세기 초 서울의 모습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사라진 1960, 70년대의 동
                                                                                                        이유로 승인을 보류했다. 이에 앞서 2008년부터 서울      네 풍경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재산권 행사를 최우선으로 하는 철거식 개발은 돈이
                                                                                                        시는 옥류동천 인근의 옥인시범아파트(1971년 건립)를      되는 것으로 바꾸기 위해 물리적 시설의 소실과 함께 보이지 않은 동네 일상 관계나
                                                                                                        철거 한 후 옛 수정계곡의 모습을 되살리는 사업을 추       문화 모두를 지워버린다. 이러한 개발방식 하에서는 서촌에서 사라진 자연의 복원도
                                                                                                        진해 왔다.                              어렵다. 서울시는 수성계곡의 복원과 함께 옥류동천도 복원해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하지만 이것으로 서촌이 온전히 보전되는 것은 결코        물길을 되살릴 계획이다. 그러나 주민들은 물길복원 사업이 옥인동과 통인시장 일대
                                                                                                        아니다. 역설적으로‘경복궁 서측 지구단위계획’ 발
                                                                                                                                이           300여 가구 주민들의 삶터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극렬히 반대하고 있다.
                                                                                                        표된 후 한옥이 헐리고 고층건물이 들어서는 일이 오히        서촌에서는 현재 보전과 개발, 공익과 사익이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다. 말하자면
                                                                                                        려 더 잦아졌다. 지구단위계획에 따르면 한옥지정구역        돈이 되는 것으로 바꾸어내려는 세력과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지켜내려는 세력 간의
                                                                                                        안의 신축건물에 한해서만 한옥을 짓도록 돼 있고, 다       전쟁이 서촌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최근엔 장소화 된 문화를 상품화하는,
                                                                                                        른 곳에서는 한옥을 헐고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되      이른바‘서촌의 삼청동화 혹은 북촌화’ 현상마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물리적
                                                                                                                                                               란
                                                                                                        었다. 심지어 한옥권장지역의 한옥마저 법 취지와 달        철거가 아닐 뿐,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퇴적 되어 온 서촌의 문화유산을 오염시키
                                                                                                        리 계속 헐려나가는 중이다. 통인동 154-10번지의‘이     고 왜곡시켜 종내엔 서촌다움을 지워내게 된다. 이 모두는 변방으로 지켜온 서촌의
                                                                                                        상의 집’ 비근한 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이                               ‘역사적 장소성’ 전에 없는 위기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
                                                                                                                                                    이


6    | 2012년 봄호 |        |                                                                                                                                                   | 2012년 봄호 |     |   7
|✽집중과 조명│




서촌의
                                    이 성곽 사이에 끼여 있고 시장바닥에 섞여 있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아끼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촌은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는 않았다.”
                                          [서촌. 1, 역사 경관 도시조직의 변화(서울역사박물관 편, 2010) 중]                                                        된다. 1992년, 인왕산에 맞닿은 누상동이 노후불량주
                                    ‘사대문의 중심인 종로에 이웃하면서도 시골 같은 동네’
                                                                 라는 말은 200년 전은 물                                                            택 밀집지역이라는 이름을 달고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역사                                  론, 2012년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촌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서촌의 골목길도 200년 이상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최초의 근대 지도라
                                    는 한성부지도(漢城府地圖, 1902)는 물론, 18세기의 한성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고
                                                                                                                                            지정되고, 1994년에는 지금 서촌을 관통하고 있는 필
                                                                                                                                            운대로에 대한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한다. 신교동에도
                                                                                                                                            좁은 길 사이로 빌라가 들어선다. 당시에 빌라를 짓기
 김한울 | 서촌주거공간연구회 사무국장
                                    있다고 하는 도성대지도(都城E大地圖)에서도 오늘날 서촌의 골목길 형태를 찾아볼                                                             위해 주택을 허무는 과정에서 기와집이 헐리는 것은 물
                                    수 있을 정도다. 길썰미만 있으면 조선시대 지도를 펼쳐놓고도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론 초가집들도 대거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달동네라는
                                    표시할 수 있고, 찾아갈 수 있는 동네라는 이야기다.                                                                           이유로 인왕산과 맞닿은 동네를 중심으로 사업이 진행
                                     길이 변하지 않는데 집자리만 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집자리와 길자리를                                                            되는 가운데 오히려 큰 도로에 가까운 체부동, 누하동,
                                    모두 밀어버리는 재개발이 아닌 한에야 길이 그대로라면 그 길을 통해 닿았던 집자                                                       2
                                                                                                                                            통인동에는 기와집들이 많이 남게 된 것은 이러한 전후
                                    리의 모양도 크게 달라질 수 없음을 쉽게 짐작해 알 수 있다. 1910년에 시작된 일제                                                        를 알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근래 들어
                                    의 조선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처음 만들어진 지적도를 보아도 지금의 지적도와의 차                                                             서울시의 한옥보존 정책과 맞물려 누하동, 체부동을
                                    이점을 찾아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중심으로 한옥수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주
“정치1번지라는 종로가 말이 시내지 시골읍내같지 않         주로 관청이 소재하던 서촌에 본격적으로 주거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거환경개선’ 반드시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이
느냐면서 한탄하셨습니다.”                      이후 계급에 따라 주거지가 구분되면서 중인을 비롯한 이서계층이 자리잡기 시작하                                                             복층 건물을 지어야만 하는 것이었는지 생각해 볼 문제
     2012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동네를 돌아다니던   면서부터로 알려져 있다. 양반도 천민도 아니었지만 전문지식과 기능을 갖추고 있던                                                            가 될 것이다.
한 예비후보가 SNS로 전한 메시지는 흥미롭게도 조선       중인계급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계급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골목문학’
                                                                          이라는                                                                커다란 변화를 여기에서 마무리하는 것은 실로 다행
후기 중인문학의 주요인물로서 조선후기를 살다 간 장        뜻의 위항문학(혹은 여향문학)의 대표격인 시인 공동체‘옥계시사’ 서촌에 자리를
                                                                      도                                                                     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서촌
혼(張混, 1759~1828)이 서촌(옥류동, 현재의 옥인    잡고 있었다. 단원 김홍도는 이들의 모임을 그림으로 그렸고, 추사 김정희는 이들 모                                                          의 골목에는 재개발을 외치는 고함소리가 드높았다. 이
동)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연상케 한다.              임을 위해‘松石園’
                                             (송석원)이라는 글자를 써서 바위에 새겼다.                      체부동 골목
                                                                                                                                            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때에 약속한 체부동, 필운
 “물줄기가 모인 곳을 젖히고 들어가면 좌우의 숲이         옛 모습을 이어가던 서촌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30년대이다. 경제공황이 휩쓸                                                           동, 누하동, 옥인동 재개발과 오세훈 서울시장의 한옥보
빽빽하게 모여 있고, 그 위에 개와 닭이 숨어 살며, 그     고 간 후, 경기가 다소 회복되면서 경성으로 지방민들이 급격히 유입됨과 동시에 부                                                           존정책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한옥보존
사이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 옥류동은 넓지만        동산 경기가 활황을 맞는다. 폭발하는 주택 수요에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던 집이 팔         250년을 내다본다는‘대경성 도시계획’
                                                                                                               이라는 이름으로 경성이라는 도시 전체를 술      을 조건으로 더이상 재개발이 진행될 수 없게 된 것은 다
수레가 지나다닐 정도는 아니고, 깊숙하지만 낮거나         리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20평 내외의 땅에 10평 내외로 지어진 근대 도시형 한옥        렁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 개발 과정에서 큰 필지를 나누어 대량으로 공급됐던     행이지만, 아직도 열악한 주거환경과 한옥보존의 갈등
습하지 않았다. 고요하면서 상쾌하였다. 그런데 그 땅       이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북촌, 서촌을 막론한 경성 전역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은         한옥들은 지금도 곧게 뻗은 골목 양쪽으로 늘어선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은 잦아든 불씨로 남아있다. 옥인동 재개발의 경우, 아
                                                                                           1930년대의 대량주택공급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직 불씨가 꺼지지 않은 채 뜨거운 입김을 내뿜고 있다.
                                                                                            해방 이후, 이완용과 윤덕영이 소유했던 거대한 땅과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시내를 걸으며 고층 건물 발치에 조용히 놓여있는 표
도성대지도 사진 문화재청                   통인동의 한옥지붕 사진 김한울
                                                                                           집들이 비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전쟁으로 피난민이 유입되면서 서촌은      석을 읽는 것만으로 역사 속의 사건이나 장소를 상상할
                                                                                           좀 더 비좁아진다. 경제개발시대에 상경한 지방민에 청계천 복개 공사로 집을 잃은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다. 어느 누가 살던 집, 어느 누
                                                                                           사람들까지 일부 서촌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판자집은 늘어나고 한옥집은 칸칸마다       가 걷던 골목은 그러한 앙상한 기록에 생생한 숨을 불
                                                                                           한 가구씩 사는 집도 적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주거 환경이 열악해지는 것은 불 보듯   어넣을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이것은 비단 흔히 생각
                                                                                           뻔한 일이었다.                                         하는 거창한‘역사’
                                                                                                                                                     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 동
                                                                                            남파된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눈앞에 두고 진압되었던 청와대 습격사건은 서촌에       네를 살았던 어느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올 것만
                                                                                           긴 인내와 고통의 시간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청와대에 인접한 동네라는 이유로      같은 풍경은 단순히 오래된 것으로써의 가치가 아니라
                                                                                           집을 고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고 지붕에라도 올라가면 경호원이 쫓아왔다는 주민      그 시간의 심연에서부터 지금까지 유구하게 켜를 쌓아
                                                                                           들의 생활은 계엄령이나 긴급조치 처럼 얼마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근대화라는     온 퇴적의 산물이고 시간의 증거로써의 가치를 지닌
                                                                                           이름으로 개발의 엔진 소리가 드높을 때에도 서촌은 그로부터 비껴져 남겨지게 된      다. 서촌은 그래서 재현될 수도 모사될 수도 없는 그 자
                                                                                       1
                                                                                           것은 분단의 현장이 천혜의 자연으로 돌아온 비무장지대를 연상시키게도 한다.        체로 기원, 즉 오리지널이 되는 동네이다.


 8    | 2012년 봄호 |   |                                                                                                                                    | 2012년 봄호 |   |   9
|✽집중과 조명│




                                                                                                      꿈│품애
꿈을
                                                  번쩍번쩍 들어서는 세련된 카페와 인터넷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맛집들과 주말이면
                                                  카메라를 목에 건 젊은 남녀들이 혼재하는 이곳의 풍경도‘삶’ 모습이다. 하지만
                                                                                  의                   이웃, 조직
                                                  ‘진짜 이곳의 삶’
                                                           에서는 주인공이 달라진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웃친구가 많이 있는       정서적으로 어떤 거리감이 있건, 공동체의 가치에 주목


물려주는                                              평범한 초등학생들부터, 등하교 하며 인사하는 애들이 어느 집 몇째인지 잘 아시는
                                                  어르신들까지. 이해와 신뢰의 관계로 맺어진 이들이 주인공이다. 이들의 삶에선, 한
                                                  옥의 보존 이전에 그 집에 살고 있는‘어느 댁 어르신’ 건강이 우선이 된다.
                                                                               의           ‘이상
                                                                                                      하고 정의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은 공동체 성원의 덕
                                                                                                      목이며 그 집단의 원칙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그가 아
                                                                                                      무리 좋은 철학을 말한다 해도‘독불장군’ 뿐이다.
                                                                                                                            일


사람들                                               이 살던 집’ 관련한 정치적 혹은 경제적 논의 이전에, 그것이 이웃의 관계에 미치는
                                                        에
                                                  영향을 고민하는 것이 보다 가치 있다. 이곳에 사는 이들에게‘문화’ ‘콘텐츠’
                                                                                      란,    가
                                                                                                      이곳에 사는 이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나름의 삶을 살아
                                                                                                      가고 있지만,
                                                                                                            ‘품애’
                                                                                                               라는 마을공동체 안에서는 이웃이
                                                  아닌‘이웃의 깊어짐과 넓어짐’
                                                                 이어야 한다.                              자 조직의 성원으로서 공동체 가치 실현과 정의 구현에
김정찬 | 마을공동체‘품애’이사
                                                                                                      힘 써야 하는 주체가 된다.
                                                  그래서│마을공동체
                                                  ‘있는 것’ ‘만들기’
                                                       과                                              다음 세대의 꿈
                                                  서촌에는 마을공동체가 있어왔다. 최근‘마을공동체 만들기’ 그것과는
                                                                                의     ‘깊이와            마을 안에는‘맹학교’ ‘농학교’ 있다. 그 학교 학생
                                                                                                                와     가
                                                  격’ 다르다. 청운효자동을 중심으로 부암동, 사직동의 관계망이 지닌 특징 중 하나
                                                   이                                                  은 누구네 집 둘째이기도 하고, 예전에는 친구네 큰형이
시작│문화                                             가 바로‘주민자치’ 강력함이다. 일상적인 문제부터 좀 더 크게는 지역현안 사업과
                                                           의                                          기도 하며, 언젠가는 내 아이의 친구일수도 있는 이웃이
‘시간’ ‘운동’
   과                                              정치적인 이슈에서까지 주민의 발언권은 강하게 작용하며, 주민자치위원회를 비롯          다. 이들과 함께 수영과 등산을 하는 계획을 세우고 마
서촌에 쌓인 시간을 건축물이나 골목의 구조에서 찾는                      한 자치공동체의 조직구성과 의견수렴은 원주민 보편 정서를 매우 잘 반영한다. 몇몇       을사람들이 모이고 함께 걷기 시작했다. 이들과 함께 영
이들이 많다. 찾을 고향이 있는 이들이라면, 삶이 누적
                       ‘                          사적 목적을 지닌 조직이나 특정 목적을 지닌 외부인 주도의 단체가, 신뢰를 얻지 못      화를 보거나, 장터를 열어 안쓰는 물건을 서로 나누기도
된 시간’ 확인하는 좀 더 좋은 방법을 알고 있다. 명
    을                                             하고 원주민의 반발에 직면하게 되는 핵심적인 요인도 바로 기존 자치공동체가 지닌        한다. 동네 곳곳에 이곳의 역사와 숨은 이야기를 그려
절이면 텅 비는 서울 도심 한 복판에, 골목까지 빽빽하                    ‘원주민 보편 정서’ 대한 몰이해와 오만에 있다. 공공미술’
                                                             에              ‘      이라는 허울로‘예          넣기도 한다. 골목에 의자를 마련하여 어르신들이 걷다
게 들어차는 주차된 차량들은 이곳이‘고향’
                      임을 증명                       산’ 쫓아 들어온 단체들의
                                                   을            ‘저의’ 모를 만큼 순진하기 어려운 도시인들이며, 이
                                                                   를                      ‘           쉬어 가시기를 바라고, 자투리 땅에는 텃밭을 꾸려 어르
하는 매우 중요한 흔적이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 그                   리저리 두 얼굴 두 말 하는 모양’ 사람 좋게 웃어넘길 만큼 한가하지도 않은
                                                                    을                       ‘종로’      신들의 취미도 삼아 드린다. 명절에는 마을잔치를 준비
아버지의 형제들, 그 이웃들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한 복판의 사람들이다.                                        하고, 미혼모의 돌잔치나 화환이나 축의금 대신 기부를
자랐으며, 여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이어져 가고 있다.                                                                         받는 혼인잔치도 연다. 아이들의 등・하굣길에는 인사
서촌이 주목받고, 서촌의 문화도 하나의‘운동’
                        으로 주                      ‘문제’ ‘필요’
                                                     와                                                드릴 어른이 많고, 내 아이들의 오고가는 길을 살피시는
목받기 시작하였다. 시작을 제대로 하자. 그것이‘운                      새로운 사람은 계속 유입된다. 그리고 이웃이 된다. 현재, 또는 기간만을 기준으로       어른도 많다. 마을의 낡은 주택이나 낡은 가구는 동네목
동’ 되는 것은, 이제야 이곳을 바라보고 새롭다고 여
 이                                            1   ‘공동체 성원’ 판단하지 않는다.
                                                         을         ‘공동체 성원임을 자각’
                                                                               하는가의 문제는,
                                                                                       ‘공동            수가 낮은 품삯으로 수선하고, 좋은 계절마다 마을 곳곳
                                              2
기는 당신의‘시선’ 국한된다. 이곳의 문화는
         에              ‘시간                       체의 문제에 대해 얼마나 공감’
                                                                  하는가의 체감온도를 확인하는 것으로 분명해진다.          에서는 즐거운 장터와 음악제가 열린다. 내 아이가 살아
의 지속’ ‘운동’
    이다.  이라 부르는 것들은 이어져 오는                        ‘원주민 보편 정서’ 결국 지금 우리이기 때문에 마주하는 문제를 함께 서서 바라
                                                            란,                                        갈 마을을 꿈꾸며, 우리는 지금 꿈을 만든다.
것 위의 편린이다.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타자’ 특징을 지닌다. (1)필요 가르치기 (2)배우려하지 않
                                                                 는
                                                  기 (3)필요에 따른 편 나누기(배척하기)                             마무리│유산
‘사람’ ‘콘텐츠’
   과                                               우리는 우리 안에서 배운다. 순서는 먼저‘이웃’ 되는 것이어야 한다. 타인들은
                                                                            이                         지킬 것
많은 가수와 시인들이‘사람’ 본질적 가치이며 아름
              이                                   자신들의 필요를 우리의 필요라고 가르치려 애쓰면서도,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생각        ‘꼭 지켜야할 문화유산 - 서촌의 문화’ 대한 글을 요
                                                                                                                           에
다움임을 노래했듯, 문화도 결국 사람이다. 한옥과 적                     을 하는지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그 무지를 극복하려는 의지       청 받았을 때, 떠오른 문구는‘우리 아이들’
                                                                                                                             이었다. 지
산가옥, 조선과 근대의 시간을 잇는 골목, 사연과 흔적                    도 없다. 이러한 게으름은 쉬운 길을 택하게 되는데, 대개가‘내 맘에 드는 사람들과      키는 것은, 그것이 지닌 가치만큼 의지가 더 해 질 것이
을 남긴 한 시대의 창작자들, 재래시장, 몇 주 사이에도                   편먹기’
                                                     이다. 내 맘에 드는 이가 내 친구요 가까운 이웃이 되는 것이야 인지상정이겠       다. 문화는 유/무형의‘누리는 것’
                                                                                                                        이며, 결국‘누리는
                                                  지만, 이미 있는 이웃이 모두 내 마음에 들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 것이기에.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가며 마을공동체
                                                                                                       의
                                                  고 내 마음대로 어찌 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사람 사는 곳에는 좋은 사람   ‘품애’ 통해 이루고자 하는 꿈도
                                                                                                         를              ‘우리 아이들이 누릴
                        1 골목 디자인 2 우리마을 시장해       도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이니까.                            것’
                                                                                                       이다.


10   | 2012년 봄호 |   |                                                                                               | 2012년 봄호 |   |   11
|✽집중과 조명│




기억의
                               도시와 기억
                               건축은 도시를 구성하는 그 어떤 요소들보다 사람들의
                               기억과 함께 오래 유지된다. 그것은 아마도 건축이 말이


도시공간,                          나 글이 아닌 시공간의 흔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
                               다. 도시의 과거는 보잘것 없는 현재에 한층 영광스러운
                               배경을 마련해 준다는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서촌                             말이 아니더라도 지난 시대의 역사와 문화는 현재를 한
                               층 더 돋보이게 해주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 위치 : 옥인동 19-46번지
                                                                                                                                  ● 대지면적 : 266.41m2(80.6평)
                                                                                                                                  ● 건축유형 : 부분 2층형 한옥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는 <보이지 않는 도시
이충기 |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과학대학 건축학부 교수                                                                                                      ● 계획개념
                               들>에서 마르코 폴로의 입을 빌어 황제 쿠빌라이 칸에                                                                      - 분리 임대할 수 있도록 계획함(각 채별 독립적 생활 가능)
                               게 도시와 기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지하공간의 활용

                               “도시는 자신의 과거를 말로 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신한옥 계획
                               과거는 마치 손에 그어진 손금들처럼 거리 모퉁이에, 창
                               살에, 계단 난간에, 피뢰침 안테나에, 깃대에 쓰여 있으
                               며 그 자체로 긁히고 잘리고 조각나고 소용돌이치는 모
                               든 단편들에 담겨 있습니다.”                      어진 건물이라고 하여 자본주의 시대에 지어진 건물은         들이 상실될 위험에 있다고 경고한다. 서촌 역시 도시기억의 보고임에도 불구하고 재
                                농학과 문학을 전공한 이탈로 칼비노의 도시의 기억          가치있는 건물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건물의 축조연대         개발을 피해갈 수 없었던 지역이었다. 다행히 새로운 지구단위계획으로 시간을 지연
                               에 대한 표현은 어느 건축전문가의 정의 보다 설명적이         를 조작하여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즉 지난 시대의 역사        할 수 있었으나 정치적 개입에 의한 기억파괴의 위기는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
                               며 적확하다. 기억이라는 단어는 칼비노의 문학적 힘을         에 대한 망각을 강요하고 있는 내용이다. 조지오웰 역시       된다.
                               빌어 도시에서 한층 더 빛을 발한다. 건축가 알도로시         이미 도시와 건축이 사람들에게 집단적 기억으로 작용
                               역시 도시는 그 자체로 도시민의 집단기억이고 사물 및         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음이 놀라울 따름이다.          서촌의 기억과 건축
                               장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쟁과 침략은 대표적인 도시기억의 파괴행위라 할          서촌은 서울을 대표하는 기억의 동네다.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의 동네를 일컫는 비
                                이렇듯 도시와 건축은 사람들에게 집단의 기억으로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아니더라도 기억의 파괴행위는        행정지명으로 인왕산의 동쪽에서 발원하는 청계천의 상류 옥류동천과 백운동천 주
                               작용하는 대표적 매개체라 할 수 있다. 건물이 지어지고        일어난다. 역사와 전통이 도시와 건축을 통한 기억으로        변에 형성된 600년의 전통을 가진 마을이다.
                               사용되며 허물어지는 물리적 변화는 개인의 감정과 환          지탱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지난 10여 년 동안        이 지역은 인왕산, 오래된 한옥과 근대에 지어진 양옥, 현대의 다가구다세대주택,
                               경에 영향을 미치는 지리적 환경으로 작용함으로써 사          재개발, 재건축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당당하고 자연         골목길, 시장 등에 시간이 만들어 낸 흔적과 풍경들이 공존하고 있다. 한옥봉창, 담
                               람들에게 기억의 장소라 할 수 있는 심리적 지리(psy-       스럽게 시민들의 삶의 터전에 대한 집단기억을 파괴해         벼락낙서와 꽃화분, 골목가로등, 피맛길 점포 등에 삶의 파편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cho-geography)를 형성하게 된다. 진정한 망각은 존    온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 개인들은 경제적 이       있는 동네인 것이다.
                               재하지 않으며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을 뿐이라는 프로         익 앞에 무기력했던 것도… 재개발, 재건축을 통한 아파        이러한 주민들의 삶의 흔적 외에 지금도 육상궁과 선희궁지, 사직단, 황학정 등의
                               이트의 주장처럼 도시와 건축의 과거나 역사에 대한 의         트의 건축이 문제가 되는 것은 기억의 급격한 단절이 발       궁궐 문화재와 홍종문가옥, 신익희가옥, 박노수가옥 등의 지정 문화재와 마애각자,
                               식은 기록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기억으로 대물림되           생하기 때문이다. 2,3층 이하의 주택과 건물들, 우물,      보호수, 관아터 그리고 세종대왕, 이항복, 정선, 김정희, 이완용, 윤동주, 이중섭, 김
                               어 나타나는 것이다.                           정자, 골목, 나무, 언덕 등 수백년 이어오던 대물림의 동     상용, 윤덕영, 노천명, 이상 등 조선과 근대를 아우르는 인물들의 유적과 문화자원들
                                그러나 도시의 기억들이 칼비노와 알도로시의 기억           네 기억들이 전면재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새로         이 역사와 문화라는 기억으로 이어져 오고 있어 역사문화자원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처럼 늘 낭만적이거나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운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는 것은 엄청난 정신적 충        그러나 이 서촌에도 예외없이 재개발의 바람이 불어 체부동(2004), 누하동(2005),
                               기억의 파괴행위가 그것이다. 조지오웰의 <1984>에는        격이며 문화적, 공간적 충격이다. 재개발로 인해 개인        필운동(2008)에 조합설립추진위원회의 승인이 되어 정비계획신청이 진행되었고 이
                               지배계급이 건축물을 이용해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하           이 친숙한 사물과 자기주변의 환경을 모두 잃는 다는 것       에 서울시가 경복궁 서측에 대한 종합적 한옥보존의 수립을 사유로 부결 및 보류하
                               고 강요하는 얘기가 나온다. 누가 봐도 오래된 건물은         은 사물과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기억과 추억을 상실하         면서 이곳의 지구단위계획수립을 공모하게 되었다. 이 공모전에서 필자 팀이 당선
                               중세라는 애매한 시기로 분류하고 크고 훌륭한 건물은          는 것을 의미한다. 로버트 베번Robert Bevan은 이 경   되어 서촌의 도시계획, 즉 지구단위계획을 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우리 팀은
                               오래된 건물이라도 겉모습이 멀쩡하면 혁명 이후에 지          우 개개인의 집단 정체성과 정체성들의 견고한 연속성         문헌상에 없다는 등의 논란에도 불구하고‘서촌’
                                                                                                                                  이라는 비공식적 명칭을 이 지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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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 Volun Tour

                                                                                                          ● 일정 : 5월 5~6일, 12~13일, 19~20일
                                                                                                            6월 2~3일, 9~10일, 16~17일
                                                                                                          ● 주요활동
명칭이자 공모안의 제목으로 사용함으로써 서촌에 대한 집단기억을 되살리는 노력        축물로 인정한 이 계획은 향후 서촌이라는 지역과 장소
                                                                                                          ○ 자원봉사활동 : 작물파종, 야생화단지 가꾸기 등
을 하였고 이후 서촌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의 가치를 지속하고 기억을 유지하기 위한 개별필지들                            ○ 농촌체험활동 : 야생화효소 만들기, 봄나물요리, 동강생태탐방,
    이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함에 있어 우리 팀은 서촌의 건축을 과거로 돌리는 것이    의 건축방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건축 기준들은 개                            태양열오븐기 등
                                                                                                          ○ 동강뼝대길 트레킹
아니라(많이 파괴되었다고 해도 재개발이 추진되던 3개 동의 한옥 보존은 평균 50%    별 건축주와 건축가에 의해 지역과 블록단위의 재개발                            ● 참가비 : 회원 100,000원, 비회원 126,000원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의 서촌다움을 인정하고 유지해야 하며 과거와 현재의      보다는 주민 개개인의 상황과 능력에 따라 순차적으로                            ● 신청방법
                                                                                                          ○ 참가비 입금 전 전화 문의 02-747-3136
기억이 지속되는 느림의 동네로 계획되어야한다는 원칙을 지키고자 하였다. 이는 곧      신축, 증축, 리모델링 등의 수단으로 주민의 기억을 유
                                                                                                          ○ 참가비는 해당 여행일 7일전까지 입금하셔야 참가 확정
건축이나 장소의 기억이 가치가 되는 동네, 풍경이 유지되는 서촌을 만드는 것이었      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진행되는 것이 바                           ○ 참가비입금 선착순 마감




                                                                                   동강 Volun Tour로
으며 과거의 건축적 유물에 파묻혀 사는 것이 아니라 로버트 베번의 주장처럼 자유      람직할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에 대한 집단기억을 유                           ● 입금계좌 : 신한은행 100-014-305960 한국내셔널트러스트
                                                                                                          ※ 자세한 내용은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홈페이지 참고하세요.
롭게 선택한 과거의 흔적들 틈에서 사회 안에 이질성을 긍정적으로 반영할 수 있도      지하기 위한 주민윤리가 발휘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보                              내용은 상황에 따라 변동될 수 있습니다.

록 다양한 흔적들과 함께 살아갈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다 중요하다. 주민들은 서촌의 건축과 공간에 대해 자




                                                                                   봄여행하세요
    이를 위해 서촌지역의 인문역사 자원의 조사와 한옥에 대한 조사와 기록은 무엇보   세히 살피고 애정을 가질 것이며 오래 고민하고 생각하
다 소중한 일이었다. 한옥과 골목길, 역사문화자원 등에 대한 보존의 근거가 필요했     여 사랑해야 할 것이다. 서촌의 기억들이 그것을 요구
기 때문이다. 이 조사를 근거로 서촌지역의 도시와 건축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한옥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형성되기 시작한 마을 공동
의 보존과 새로운 한옥건축 유도, 기존 골목길 보존과 담의 기준, 건축규모제한과 소    체 조직들이 활성화되어 주민들이 주도하는 마을가꾸
규모 필지유지 및 대지합필규모제한, 저층규모 유지, 서촌의 역사문화자원 보존 및      기로 전개되어 지구단위계획 기준을 넘어서는 서촌의      Volun Tour(자원봉사+여행)
재생, 유흥 및 위해 용도의 제한 등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였고 지역적으로 부    건축물과 공간에 대한 마을규약을 만들기를 소망한다.     동강을 보전하는 자원봉사활동과 더불어
족한 주차장, 공중화장실, 지역안내소, 주민이용 공동체시설 등을 계획하였다. 20년    그것이 희망적인 것은 장소가 가지는 가치나 심리적 지    동강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전에 이미 한옥을 헐고 새로 지은 다세대 주택이 한옥과 공존하는 동네에서 한옥은      리가 파괴될 위기가 도래하면 사람들의 기억은 훨씬      느낄 수 있는 여행에 초대합니다.     동강사랑(東江舍廊) 이용규칙
한옥대로, 다세대 주택은 다세대 주택대로 모두 시대의 역사와 흔적을 담고 있는 건     더, 잘 되살아난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 이용 가능일 : 매주 금, 토, 일요일(3일)
                                                                                                          ● 이용 대상자 :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회원(최근 3개월 이
                                                                                                            상 회비 납부자)에 한함
                                                                                                          ● 최대 수용인원 : 2팀 이하(최대 10명 이하)
1 골목길 변경 전 2 골목길 변경 후 3 서촌지구 단위계획 종합계획안
                                                                                                          ● 방 선택과 배치 : 인원을 고려 권장하거나 사무처에서 조정
                                          3                                                               ● 방별 이용요금 (1박기준)
                                                                                                          ※ (재)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 회원은‘일반회원’
                                                                                                                                     기준을 적용
                                                                                                              방      비용       수용가능인원             방 형식
                                                                                                                           기본 2인. 추가 1인당 만원
                                                                                                             동강      5만원                       2층침대/ 온돌
                                                                                                                              (3명까지 가능)
                                                                                                                           기본 2인. 추가 1인당 만원
                                                                                                           동강할미꽃     5만원                      트윈침대/ 온돌
                                                                                                                              (3명까지 가능)
                                                                                                             백운산     5만원        기본 2인         싱글침대/ 온돌
                                                                                                            동강여울     5만원      5명 이용 가능        별채 2층/ 전기판넬
                                                                                                           동강 다락방    3만원      2명 이용 가능            다락
                                                                                                           칠족령 다락방   3만원      2명 이용 가능            다락

                                                                                                          ● 환불 : 예약일 6일전~1일전 취소시 70% 환불, 예약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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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취소시 50% 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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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용 가능 횟수 : 1년 1회 기준
                                                                                                          ● 접수방법 : 원하시는 날짜에 숙박이 가능한지 미리 연락
                                                                                                            하여 확인 후, 신청서를 작성
                                                                                                          ● 동강사랑 주소 :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95번지
                                                                                                          ● 회원별 이용가능 인원
                                                                                                          ○ 청소년 회원(본인 1인)
                                                                                                          ○ 일반회원(2인 : 본인 1인 + 동반인)
                                                                                                          ○ 가족회원(5인 : 본인 1인 + 가족 4인)
                                                                                                          ○ 평생회원(5인 : 본인 1인 + 지인 4인)
                                                                                                          ○ 법인 및 단체회원(10인)
                                                                                                          ● 이용문의 : (02)739-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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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트러스트가 만난 사람│




                        김
                                                부천시는 특히 문화사업에 많이 신경을 쓰고 있는 점이 많은데요, 특히나
                                                지난해 도시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지요. 부천은 부천국제판타
                                                스틱영화제(PIFAN), 국제만화축제 등 여러 문화사업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경험이 있는데요, 지속적인 문화사업에 대한 마인드를 가꿔오신 것이 성
                                                과로 드러난 것이라고 봅니다. 부천시장님이 말씀해주시는 부천의 문화사
                                                업에 대해 들어보았습니다.




                        만
                        수
                        부천
                        시장
                        일시 : 2012. 3. 14        ● 바쁘신 가운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 부천은 제가 젊을 때     를 넣자 생각했죠.
                        장소 : 부천시청                인천 가는 길에 들녘을 보면서 가던 곳이었는데, 10~15년 사이에 인구    이 계획이 순항하는 것 같았는데 그 다음해에 IMF를 맞았습니다. 구
                        진행 : 윤인석 (성균관대학교 교수/     밀도가 높아진 곳이 되었습니다. 부천하면 영화, 애니메이션과 같은 문      상했던 문화사업에 엄청난 위기를 맞이한 거죠. 부천국제판타스틱
                              <내셔널트러스트> 편집위원)
                                                 화적인 이미지가 떠오르곤 합니다. 이를 위해 많은 분들이 노력해 오셨      영화제 같은 경우 1회는 진행했는데 2회를 할 수 있겠느냐는 위기에
                                                 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임 시장님들께서 그런 방향 설정에 있어 김만수      처했는데 영화제를 하자고 결국 결정했고, 현재 16회를 준비하는 중
                                                 시장께서도 많은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입니다. 만화 사업도 중요하게 시도하면서 부천만화정보센터를 만
                                                ○ 저는 그때 시의원이었습니다. 95년도에 본격적으로 지방자치가 시        들었습니다. 한국만화의 공간적 거점이 생긴 거죠. 그게 한국만화영
                                                 작되면서 시의회가 구성되었는데, 전 2기, 3기 시의원을 했습니다.       상진흥원으로 발전했으니 지난 10여 년간 숨 가쁘게 달려왔죠.
                                                 처음 등장한 민선 시장과의 협력 관계 핵심 주제는 앞으로 부천이 어
                                                 떤 도시로 발전해나가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이었죠. 그때 문화도시        ● 영화 뿐 만 아니라 만화 사업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요.
                                                 라는 콘셉트가 거론되었어요. 원혜영 시장 시절부터 구체적인 문화        ○ 사실 만화는 사랑을 많이 받는 콘텐츠인데 소외당하고 있었습니다.
                                                 도시의 틀을 갖춰나갔죠. 문화는 영역이 포괄적이어서 선택과 집중         부천이 만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현재는 그 위치를 공고히 하
                                                 을 해야 된다는 게 대전제였죠. 부천필하모니오케스트라를 중심으          고 있죠. 만화는 양귀자 선생님의 원미동 사람들 작품을 만화로 만드
                                                 로 한 좋은 컨텐츠가 원래 있었고요. 영화는 문화도시라는 비전을 고       는 작업을 얼마 전에 했어요. 또 부천FC축구단이 있는데 이를 토대
                                                 민하면서 의도적으로 배치한 콘텐츠였죠. 아쉽게도 아직 개발이 안         로 한 만화 <모든걸 걸었어>를 웹툰으로 게재해서 호응을 받았구요.
                                                 되고 있지만 영상문화단지 10만평에 문화도시를 구체화하는 콘텐츠         내년에는 문화관광부와 협의해서 프랑스에서 한국만화 특별전을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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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은 역사가 오래된 도시가 아니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베드 타운이어서
                                          자연적 요소가 많지 않아 자연・문화유산이
                                               많지 않습니다. 보전보다는 유산을
                                                창출해내야 하는 도시인 거지요.
                                            그래서 고민하는 것이 재생개념입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한국만화 100주년 기념식 전시 개막식




     천이 주관해서 열기로 했습니다. 세계의 만화계는 미국, 일본 만화로      원에서의 예술교육입니다. 학원에서 할 수 없는 수준 있는 예술교육      ○ 문화영역의 생태계를 구성하고자 합니다. 생태계는 다양한 생명체         이어지는 단초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요.
     양분되고 있는데, 한국만화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게 될 겁니다. 만      을 일반학교에서 하자는 취지죠. 그것은 부천이 문화도시의 인프라        층위의 공존이잖아요. 이를 문화예술영역에서 부천에서 구현해보자
     화는 애니메이션 영화, 아니면 캐릭터 산업 등으로 진출하는 점을 신      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부천필하모니 단원이 직접 학교에       는 거죠.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까지 단계와 수준에 맞게 문화와 예    ● 영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는 기관명으로 회원가입을 하기도 합니다. 기
     경쓰고 있어요. 이처럼 음악, 영화, 만화를 집중적으로 매진해보자는      가서 가르쳐 주는 거죠. 대한민국의 탑클래스 수준의 강습인거죠.        술을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어요. 생애맞춤형문화예술        관장이 바뀌더라도 예산 편성할 때 내셔널트러스트 회비가 책정되어 있
     전략을 가지고 십 수 년을 거쳐왔고, 지금은 성과를 내고 있는 시기입     고급과정은 아닙니다만, 아이들에게 예술의 영역 하나를 맛보게 해        프로그램을 많이 고민하는데, 청소년 대상, 주부 대상, 노인 대상 등      어 단체의 장이 바뀌거나 방침이 바뀌어도 지속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니다. 굉장히 기대를 많이 하고 있고, 이런 문화영역들이 산업 연계성     서 여기에서 재능 있는 아이들은 별도의 과정으로 진출할 수 있게 길      문화예술프로그램을 어떻게 구상할지 다양성을 갖추는 것을 최대 사         조치지요.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시민단체에 대한 활동과 지원을 기초
     을 갖게 하는 것, 이에 대한 비전을 설정하고 있어요.             을 열어주는 겁니다. 아이들이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단체와 연계한다면 좋겠습니다. 내셔널트러스트 운동과의 부천 사업을
                                                하지 않고, 가급적 많은 아이들이 예술과 문화를 경험하게 하는 것                                                   연계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나요?
● 문화예술회관 건립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가요?                     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도시의 기초 체력을 탄탄히 하      ● 문화사업이 다양한 분야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부천에서는 그 향    ○ 부천둘레길을 만들어보니 시민단체의 운동과의 결합성이 크더군요.
○ 지금 위치는 중앙공원 안에 예술회관을 지으려 합니다. 예술회관을           는 거라고 봐야 되겠죠.                              방을 어떻게 준비하고 계시나요?                           구간을 나눠서 관리해줄 단체나 회사를 모집했었어요. 38개 회사가
     하나 지으려면 1500억원이 필요합니다. 일반회계에서 다른 살림을                                                 ○ 문화사업이 선순환 구조를 가지려면 우선 콘텐츠가 있어야 하고 두        참여했고, 그 구간을 선정된 단체와 회사에서 관리하게 되어 보전을
     알뜰히 해서 짓기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토지 매입 금액으로 공원     ● 가르치시는 전문인들이 재능기부를 하는 개념이신건가요?             번째로 재생산의 참여구조가 있어야 합니다. 즉 교육이 있어야 하죠.       지속해나는 거죠.
     안에 짓자라는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건데, 외국에도 이런 사례가 많      ○ 그렇습니다. 일정의 강사료는 상징적인 의미이고 모두 자원봉사의 의      마지막으로 산업 구조를 갖춰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춰져야 생명       부천은 아쉽게도 역사가 오래된 도시가 아니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 있다고 합니다. 공원 안에 예술공원화 해서 갤러리도 있고, 음악      미로 하고 계십니다. 부천에서 받은 혜택을 부천의 아이들에게 돌려준      력을 가지죠. 앞으로 문화의 영역이 경제의 영역과 결합되는 걸 생각       베드 타운(침상 도시, 寢牀都市)이고 자연적 요소가 많지 않아 자연,
     당도 있는 곳인 거죠. 지금은 의회를 거쳐 시민 설명회를 해야 하는      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강사들의 몰입도와 만족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하고 있는데, 우리의 강점을 경제영역으로 변환시키려는 거지요. 문        문화유산이 많지 않습니다. 보전보다는 유산을 창출해내야 하는 도
     단계입니다. 역점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고요, 예술회관이 지하철 고       취지를 빨리 공감해주셔서 시도하는 첫 해에 초등학교 전 학교에서        화를 매개로 한 관광을 들 수 있습니다. 시민 뿐 아니라 외국인들이       시인 거지요.
     속도로와 같은 문화의 인프라가 있는 사업이기 때문에 더 이상 늦출       동시에 진행할 수 있었어요. 올해에는 중학교 전체에 보급되고요. 다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죠. 부천의 입지는 이 점에 경쟁력이 있습니       그래서 고민하는 것이 재생개념입니다. 부천도 뉴타운 재개발 문제의
     수 없는 상황이죠.                                 행히 굉장히 순조롭게 안착된 경우입니다.                     다. 인천공항 30분 거리이고, 서울과 인천을 끼고 있어요. 접근이 좋     과정에 있습니다만, 싹 밀고 고층아파트를 세우는 건 이제 불가능하다
                                                다른 시에서도 벤치마킹을 하러 오실 겁니다. 그런데 이 사업은 강사      기 때문에 체류형 관광지보다 셔틀형 관광지로 강화하려합니다. 외         고 봅니다. 낡았다고 밀어버리는 것 또한 만만치 않지요. 울타리 쳐서
● 부천시에서는 교육청과 예술교육특구 MOU를 맺어 긴밀하게 활동하고          역량이 있어야 하고, 수익모델로 접근하기도 어렵고 외부 지역에서        국 관광객이 서울에서 공항가기 전이나 공항에서 서울 들어가기 전         보전하는 것보다, 효용성 있게 보전 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부천의
     계시죠. 특히 청소년들의 1人1技라는 내용이 눈에 띕니다. 초등학생 아    초청하기도 어려운 점이 있죠. 이 사업은 부천이 충분한 역량을 가지      에 부천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얼마 전 김치체험관      40여년 된 소각장이 곧 폐쇄됩니다. 유산적 개념으로 보전하기에는
     이들이 정규과정에 일주일에 두시간 씩 예술교육을 예술인 강사들에게       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죠. 광역 단위에서 진행하려면 다양하고 풍       을 열어 시민과 외국인들이 직접 담가서 가져갈 수 있게 하고 있어요.      조금 부족해 보이지만, 그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재창조해서 시민들이
     받는 것이죠? 예술에 대한 수혜층이 넓어지고, 수준이 높아졌을 것으로     성한 강사풀을 구축해야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한국의 김치명인 1호가 김순자씨인데 부천에서 사업을 하세요. 그분        계속 이용하는 개념을 시도해보려 합니다. 소각장 뿐 만 아니라 폐쇄
     예상되는데 어떻게 시행하시게 되셨나요?                                                                 이 직접 김치 체험관에서 강의를 합니다. 허영만 선생님도 부천에 오       된 학교도 포함될 수 있겠죠. 지금은 아니지만 이후에 유산이 될 수
○ 이 모티브는 베네수엘라의 엘시스테마를 모델로 한건데요, 엘시스           ● 시민들에게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계실텐데요. 주로    픈스튜디오를 가질 생각이고요. 앞으로 한류가 드라마, K-POP을        있는 것을 재생산 해보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테마는 저소득층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거고요, 저희들은 공교육 차        역점을 두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요?                        거쳐, 음식한류, 만화한류로 이어질 거라 봅니다. 그것이 산업으로        내셔널트러스트와 같은 단체와의 연계는 꼭 필요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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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내셔널트러스트│




                                                                                                       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8세 때 어머니를, 13세 때 아버         는 여러 편의 시를 썼는데, 루시 시편(Lucy)’ 대표작이다. 1799년 독일서 돌아 온
                                                                                                                                                              ‘            이
                                                                                                       지를 여윈 후 친척들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어릴 때           후 그는 동생과 함께 호수지역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떠난 지 12년만이다. 첫 밤
                                                                                                       고향 코커머스의 학교를 잠시 다니다가 어머니 고향인             을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혹스헤드에서 보내고, 다음날 그들은 그래스미어로 갔
                                                                                                       펜리스(Penrith, 컴브리아의 동부지역)의 서당(dame        다. 그렇게 해서 1799년 12월 20일 워즈워드와 동생 도로시는 그래스미어의 끄트머
                                                                                                       school, 여인이 자택을 개방하여 가르치는 곳)을 다녔         리(Town End)에 자리한 오두막(후에 도브 코테지로 명명)에 새로운 거처를 정했다.
                                                                                                       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여동생 도로시(Dorothy)는        그 집은 그 해 워즈워드가 코울리지와 호수지역을 도보여행 하면서 눈여겨 봐 놨던
                                                                                                       요크셔 친척집으로 보내졌지만, 워즈워드와 다른 형제             것으로 연 5파운드의 세로 얻은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약 8년을 살았고, 그 기간 동
                                                                                                       들은 혹스헤드의 학교를 다녔다. 어릴 적부터 이곳저곳            안 그의 작품 중에서 최고의 걸작들이 생산됐다. 앞서 소개한 작품들은 이때 생산된
                                                                                                       을 옮겨 가며 사는 동안 워즈워드는 호수지역을 좋아하            것들이다.
                                                                                                       게 되었고, 호수지역의 풍광은 그에게 문학적 상상력과             1802년 워즈워드는 어린 시절의 친구였던 메리 허친슨(Marry Hutchinson)과 결
                                                                                                       ‘자연애(love of nature)’ 가져다주었다.
                                                                                                                           를                    혼했다. 그의 여동생 도로시와 메리의 동생 사라(Sara)가 함께 살면서 집안 살림을
                                                                                                         1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자, 백부들이 조카인 워즈워          돌보았다. 워즈워드의 나이 스물아홉 때였다.
                                                                                                                                                                       ‘생활은 소박하게, 그러나 생각은 높
                                                                                                       드를 돌보았다. 그러나 그의 다른 형제들은 외가가 있            게(plain living, but high thinking)라는 신념을 가지고 그는 오두막집 정원에서 완
                                                                                                       는 펜리스로 보내져 그곳 친척들과 살았다. 17살이 되           두콩과 강낭콩을 기르고, 또한 호반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많은 시적 영감을 얻었다.
                                                                                                       던 1787년 캠브리지 대학을 들어간 워즈워드는, 그 후          다른 작가들도 끌어들여 많은 일들을 함께 하기도 했다. 코울리지도 이곳을 자주 찾
                                                                                                       12년 간 (29살이 될 때까지) 잉글랜드와 유럽 이곳저곳         아왔다. 도로시의‘그래스미어 일기’
                                                                                                                                                                  에는 이들이 보냈던 나날이 잘 그려져 있다.
                                                                                                       을 여행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1795년 시인 사무엘 테           워즈워드와 메리는 이 오두막 집에서 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4번째 아이를


워즈워드의 영감, 호반의 집’
        ‘
                                                                                                       일러 코울리지(Samuel Taylor Coleridg)를 만나 친분   갖게 되면서 집이 좁아지자 그들은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했다. 1808년 알렌 뱅크
                                                                                                       을 쌓기 시작하면서, 워즈워드는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Allen Bank)로 먼저 옮겼다가, 1810년 옛 교구목사관(the Vicarage)으로 옮겼다. 이
                                                                                                       받았다. 여동생 도로시(Dorothy)와 함께 남부지역 소         곳도 마음에 들지 않자, 그들은 1813년 인근의‘라달 마운트’ 이사했다. 워즈워드
                                                                                                                                                                                  으로
조명래 | 내셔널트러스트 이사, 단국대학교 교수                                                                             머세트(Somerset)의 레이스다운(Racedown)에 자리       나이 43세가 되던 해였다. 그 이후 37년간 그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라달 마운트에서
                                                                                                       를 자리 잡았다가 앨폭스던(Alfoxden)으로 옮긴 것도         정원을 가꾸고 호반의 풍경과 교감하면서 무르익은 시작(詩作)을 계속 했다. 이곳에서
                                                                    워즈워드의 호반‘레이크 디스트릭트’사진 Roy Higson   코울리지에 가까이 가기 위한 것이었다. 문학적 교류를
                                                                                                       더욱 깊게 갖기 위함이었다. 1798년 두 시인은‘서정민
                                                                                                       요집(Lyrical Ballads)’ 함께 출간했다. 이 시집에서
                                                                                                                          을                     워즈워드 하우스. 워즈워드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집으로 영국내셔널트러스트가 소유0관리하고 있다. 사진 Graham Hogg

윌리암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는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도움으로 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rter)는 호반의 동          코울리지는‘초자연적이고도 환상적인 세계’ 워즈
                                                                                                                            를,
계관시인이다.
      ‘초원의 빛’
            ,‘수선화’
                 ,‘무지개’ 자연과 인생의 내면적 교감을 노
                       등                                 물들을 이인화한 그림동화‘피터 레빗(Peter Rabbit)’            워드는‘전원과 시골을 배경으로 자연의 장엄함’ 다
                                                                                                                               을
래하는 그의 주옥같은 시들은 세계인들의 가슴을 늘 촉촉이 적셔주고 있다. 워즈워             등을 출간해 엄청난 부를 얻었고, 그 부로 사들인 4천                뤄 영문학 사상사에서 낭만주의를 부활시켰다. 같은
드의 문학적 감수성은 그가 태어나 성장했던 고향인‘레이크 디스트릭트(the Lake           에이커의 땅과 15개 농장을 사후 내셔널트러스트에                   해(1798년) 워즈워드는‘철학적이고 자전적인’시를
District)’ 즉 호수지역의 아름다움이 준 영감에 기초하고 있다. 잉글랜드 북서부 컴
         ,                                               기증했다. 영국 국립공원 1호가 된 호수지역의 땅 4분                쓰기 시작해 1805년에 완성하게 되는 데, 이는 사후에
브리아 카운티(Cumbria County) 일대 동서 20km, 남북 30km에 걸쳐 크고 작은    의 1이 영국내셔널트러스트의 소유가 되고, 그렇게 해                 ‘서곡(The Prelude)’
                                                                                                                       이란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이 방
호수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 호수지역은 18세기, 19세기 영국문학과 뗄 수 없는 관계          서‘영원히 보전’ 수 있게 된 뿌리에 바로 시인 워즈
                                                                 될                                     대한 작품은 시인의‘자연애’ 세상에서 그가 자리한
                                                                                                                     와
를 가지고 있다. 호수지역의 아름다움은 1769년 토마스 그레이(Thomas Gray)의        워드가 자리하고 있다. 워즈워드는 80년 전 생애에서                 곳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서정 민요집’ 펴낸
                                                                                                                             을
‘대기행(Grand Tour)’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실제 워즈워드의 시가 가장 유
                에                                        60년을 호반에서 보냈다. 10대 후반까지는 호수 서쪽                다음 10년간, 워즈워드는 가장 왕성하게 시를 썼다.
명하고 영향력이 컸다. 이곳을‘워즈워드의 호반(Wordsworth’ Lake)’
                                    s      이라 부르         ‘혹스헤드(Hawkshead)’ 시작(詩作)을 가장 왕성하
                                                                         에,                            ‘마이클(Michael)’
                                                                                                                    ‘서곡(The Prelude)’등이 출간되
는 것은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게 했던 30대 때는 호수동쪽 그래스미어(Grasmere)              었고, 장편시‘소요(The Excursion)’ 완성되었다.
                                                                                                                                가
  영국의 문학만큼이나 호수지역은 영국내셔널트러스트와도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             에, 그리고 40대 이후엔 그래스미어 인근 라이달 마운                이때부터 그의 작품은 도덕적이고 보수적인 색채를 드
고 있다. 여기에도 워즈워드의 흔적이 절대적이다. 1895년 영국내셔널트러스트 창설           트(Rydal Mount)에 살았다.                          러내기 시작했다.
을 이끌었던 3인방 중 성공회 신부‘하드윅 론슬리(Hardwick Rawnsley)’ 워즈워
                                              는            워즈워드는 1770년 4월 7일 호수지역의 서북 끝에 있               워즈워드는 동생 도로시와 시인 코울리지와 함께
드의‘자연 보전론’ 감화를 받아 호수지역의 보전운동에 투신했다. 또한 론슬리의
         에                                               는 코커머스(Cockermouth)란 소도시에서 변호사의 아             1798~1799년 겨울을 독일에서 보냈다. 그곳에서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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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2012 | Spring | No.23 www.nationaltrust.or.kr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무처 : 02-739-3131 김금호 사무국장 ISSN 1976-2577
  • 2. CONTENTS 04 집중과 조명 오래된 변방으로서 서촌, 역사적 장소성의 위기 조명래 | 내셔널트러스트 이사, 단국대학교 교수 서촌의 역사 김한울 | 서촌주거공간연구회 사무국장 꿈을 물려주는 사람들 김정찬 | 마을공동체‘품애’이사 기억의 도시공간, 서촌 이충기 |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과학대학 건축학부 교수 16 내셔널트러스트가 만난 사람 김만수 부천시장 윤인석 | 성균관대학교 교수, 내셔널트러스트 편집위원 20 영국NT 이야기 워즈워드의 영감,‘ 호반의 집’ 조명래 | 내셔널트러스트 이사, 단국대학교 교수 24 품안에 우리가 강이 되어주자 - 1차 매입대상지‘내성천 범람원’확보 김금호 |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무국장 26 내셔널트러스트 여행 모래강의 나라에서 모래강의 고향에 들다 박용훈 | 4대강 사진 기록가 28 내셔널트러스트 추천도서 에코의 함정 - 녹색의 이름으로 용서되던 그 모든 어둠 임정진 | 동화작가 30 회원인터뷰 1 두루두루 아름다운 사람 홍두루미 회원님 | 하나로 의료재단 의사 31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자연이야기 1 두루미 한동욱 | (사)에코코리아 상임이사 32 회원인터뷰 2 따뜻한 변화, 함께 더 멀리가는 길 홍승아 | 네오위즈 기업문화실장, 마법나무재단 사무국장 33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자연이야기 2 우리산꽃의 제왕 함박꽃 고주환 | 작가 34 내셔널트러스트 소식 내셔널트러스트 활동소식 35 내셔널트러스트 알림마당 공지사항 36 후원해주시는 분들 2011년 12월 ~ 2012년 2월 후원내역 38 회원마당 내셔널트러스트 통신망 39 팝업카드시리즈 내성천 발행일 2012년 4월 2일 발행처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 발행인 김홍남 양병이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11길 20 우리빌딩 4층 2012년 봄호 편집위원장 이은희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4가 72-4번지 우리빌딩 4층) 편집위원 남준기 서왕진 안창모 오충현 유상오 전화 02-739-3131 윤인석 임정진 조명래 한동욱 전송 02-739-9598 기획 허주희 1년 정기구독료 20,000원 편집인쇄 (주)디자인내일 (정기구독료는 후원금으로 사용됩니다.) ISSN 1976-2577 www.nationaltrust.or.kr * 본지에 게재된 글과 사진, 그림은 페이스북 www.facebook.com/trustkorea 무단 전재하거나 복제하여 사용할 수 없습니다. 트위터 @ntrustkorea ※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자산기증과 기부를 통해 보존가치가 높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 을 확보하여 시민의 소유로 영구히 보전하고 관리하는 시민운동입니다. 표지 서촌 누하동 사진제공 김한울 서촌주거공간연구회 사무국장 목차사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선암사 매화 첫 꽃 사진 남준기 내일신문 기자
  • 3. |✽집중과 조명│ 서촌은 서울 도성 안에서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의 지역 서 문예활동을 하기 위한 것과 무관치 않았다. 이곳이 조선 후기‘위항문학’운동(위 을 말한다. 궁궐의 동편으로는 고관대작들이 모여 살 항인은 중인 이하 하급계층 사람을 말함)의 본거지였던 것은 우연한 게 아니었다. 던 북촌이 있었다. 북촌은 청계천 남쪽 너머 남산기슭 1786년 규장각 서리들이 결성한‘옥계시사(玉溪詩社)’ (혹은 송석원시사)는 위항문 까지 뻗어있는 남촌과 짝이었다. 이곳엔 퇴락한 양반 학운동을 이끈 서촌의 대표적인 시 동아리였다. 서촌이 중인계급의 거주공간을 넘어 과 상민들이 주로 살았다. 이에 견주어 서촌은 궁궐 동 문예공간이 된 것은 궁궐 옆이지만 주류 양반 거주지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그러 편 북촌의 짝이었다. 인왕산 기슭 서촌엔 중인과 아전 면서 풍광이 빼어난 곳이라는‘도성의 변방’ 즉 주변부적 장소성 때문에 가능했다. , 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거주했다. 중인은 본래 한양 도 이러한 장소적 특징은 20세기 들어와서도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1886 성 안에서 북촌과 남촌 중간인 청계천 일대에 살았던 년 계동에서 옥인동으로 옮긴 경운궁과 나란히 서편으로 윤덕영의 벽수산장과 동편 사람들을 지칭했다. 이들 대부분이 궁궐에서 전문기술 으로 이완용의 집이 들어섰다. 친일파 거두가 사는 집이였던 만큼 엄청난 크기로 조 직을 수행했던 중간계급에 속했기에 중인은 자연스럽 성되었다. 경복궁에 총독부가 들어서면서 총독부 관리들이 사는 일식주택들이 서촌 게 신분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었다. 일대에 많이 지어졌다. 조선시대 왕족을 포함한 고관대작 일부가 북촌 일대에 거처 인왕산으로 둘러쳐진 넓지 않는 지형에다 남측에 사 를 정한 것과 같은 현상인 셈이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 들어 경성이 급격하게 팽창 직단이 있어 서촌은 처음부터 고을이 크게 들어 설 곳 하고 집이 부족했지만 집장사들이 이곳의 땅을 쪼개 (필지분할을 해) 20평 남짓한 개 이 아니었다. 대신 북악산과 인왕산, 그리고 백운동천 량한옥을 대량으로 지어 팔았다. 요즘 도시외곽에 대규모 주거단지를 조성하면서 아 과 옥류동천(모두 청계천의 물줄기)으로 에워싸인, 즉 파트를 파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서촌은 외곽의 쾌적한 신주거지로 변 이산(二山)이수(二水)가 만들어낸 빼어난 경승지였다. 모하면서 당시로선 신지식인이었던 문예예술인들이 모여들었다. 가령, 화가 이중 왕과 고관대작은 물론이고 장안의 시인묵객들이 경승 섭, 이상범, 박노순, 시인 노천명, 현진건, 윤동주, 모윤숙, 이상, 소설가 현진건 등 의 아름다움을 찾아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안견이 이 서촌에 살면서 여러 흔적을 지금까지 남기고 있다. 그린‘몽유도원도’ 실제 배경이었고, 연산군이 이곳 의 해방이 되어 일인이 떠나면서 적산 건물들이 한국인의 손으로 넘어갔고, 동란 동 탕춘대에서 시샘하는 봄날을 탐했으며, 정조가 꽃 버 안 많은 건물이 파괴되기도 했다. 또한 해방과 동란을 거치면서 서울로 찾아든 피난 들에 매료되어 갈 길을 잊었던 데가 바로 이곳이었다. 민들과 지방민의 일부가 이곳 서촌까지 들어와 기존 주택들을 쪼개어 살게 되면서 겸제 정선의‘장동팔경첩’ 인왕산 아래 장동일대를 은 8폭의 진경으로 그려 놓은 것이다. 서촌은 이렇듯 궁궐 옆이지만 산자락이고 중심 번화 가로부터 떨어진 도성 안 변방과 같은 곳이었다. 조선 송석원시사야연도, 김홍도 초만 하더라도 지금의 통의동과 창성동 일대에 관청이 몇 있었을 뿐 주택들은 많지 않았다. 임진왜란 후 인구 집중과 함께 계급에 따른 주거지가 분화되면서 양반들 이 거주하던 북촌과 분리되어 누각동 일대에 중인을 비 롯한 이서계층의 주거지가 만들어졌다. 세종 이도가 태어났고(1397년) 안평대군 이용이 기거했으며 영조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정철, 김정희, 이항복 등 몇몇 권문 오래된 변방으로서 서촌, 세가들이 거처했지만, 대개 궁궐 근방이나 풍광이 좋 은 곳(예, 장동)에 한정됐다. 임진왜란 이후 몰려 든 중 인계급은 필운동에서 누각동에 이르는 웃대에 넓게 분 역사적 장소성의 위기 포해 살았다(청계천 일대를 아랫대, 인왕산 자락 일대 를 웃대라 했음). 이들을 그래서 웃대사람 혹은 상촌인 조명래 | 내셔널트러스트 이사, 단국대학교 교수 이라 불렀다. 낮은 신분이었지만 여유가 있었던 중인 사진 Kernbeisser 들이 외진 이곳에 들어 온 것은 빼어난 풍광을 즐기면 4 | 2012년 봄호 | | | 2012년 봄호 | | 5
  • 4. 주거환경이 급속하게 나빠졌다. 청계천에서 쫓겨난 철거민 일부는 인왕산 기슭에 무 가 지정되면서부터 이러한 변화는 드세어졌다. 2001년 있다. 가령, 서촌의 한옥은 총 663채가 되는 데, 이는 허가 판자집을 짓기도 했다. 도시화의 바람이 더욱 거세어지면서 부족한 주택을 공 엔 윤덕영가(家) 등이 있는 옥인동이 주택재개발 예정지 일대 전체 가옥의 31%, 4대문 안 한옥 37000여 채의 급하기 위해 도심 근방 구릉지에 시범아파트단지들이 생겨날 때 서촌에도 인왕산 속 구로 지정되었다. 30여 년 간 자연경관지구로 묶여 개 18%, 북촌의 전체 한옥 1200여 채의 절반에 해당한다. 살까지 파고든 옥류동천 입구에 시범아파트(1971년) 9동이 들어섰다. 인왕산에서 발 발이 엄격하게 제한되던 곳이었지만 2001년 이후 일부 그간 우리는 시간의 이끼가 낀 도시의 많은 유산을 원해 청계천으로 흘러가던 물길들도 하나하나 복개되어 모두 사라졌다. 지금은 구불 해제와 2종 일반주거지역 변경 등으로 재개발 사업이 개발이란 이름으로 파괴하고 지워버렸다. 이는 우리의 구불한 도로의 모습에서 옛 물길의 흔적을 어렴풋이 기억해 낼 수 있다. 추진되었다. 2004년 체부동, 필운동, 누하동 등이 주택 정체성과 주체성을 우리 스스로 부정하는 것에 다름없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도시화의 바람이 불어 닥치면서 서촌의 본래 모습은 빠르 재개발 예정구역으로 지정되었다. 한옥을 싹 쓸어 내고 다는 인식이 뒤늦게 생기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후 게 잃어갔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른 지역에 비해 그러한 변화는 오래가지 돈이 되는 아파트를 맘껏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주민들 반을 거치면서 복원과 보전이 도시개발의 새로운 키워 못했다. 1968년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한 후, 인왕산과 북악산의 입산이 금지되 은 조합을 설립해 꿈에 부푼 재개발을 진행하면서 그간 드가 된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서촌에도 재개발 고 서촌 일대에 고층 건물 등의 신축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심지어 이곳 주민들의 억눌린 개발욕구에 대한 보상을 한꺼번에 받고자 했다. 바람이 불어 닥쳤지만, 시민들의 높아진 보전의식, 정 일상생활조차 보안차원에서 24시간 감시를 받았다. 서울의 대표적인‘통제 및 감시 우리는 그간 싹쓸이 재개발이 도시를 사실상 학살하 체성의 뿌리 찾기에 관한 관심이 급격하게 커지면서, 의 지역’ 으로 떠오르면서 사람들은 편한 곳을 찾아 하나하나 떠났고, 개발 열풍도 비 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봐 왔다. 재개발 바람이 끝내 서촌의 개발사업들은 여러 반대에 직면하면서 하나하 껴감에 따라 서촌의 건물들은‘조용히 숨죽이며 낡아 갔다’ 개발의 변방이 된 결과, . 불어 닥치면서 서촌의 학살도 시간의 문제가 됐다. 서 나 변경되어 갔다. 이를테면, 체부동 등의 주택재개발 서촌의 풍경은 남루해졌지만, 이는 멀리는 조선시대, 가까이는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 울의 오랜 변방으로 있는 동안 서촌은 다른 곳에 비해 사업은 조합설립추진위원회까지 승인됐지만, 2010년 방이후 60, 70년대까지 이어져 온 삶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의 다른 모습이었다. 상대적으로 많은 문화유산을 품게 되었다. 특히 20세 서울시 방침에 따라 한옥보전 수복형 재개발정비사업 그러나 문민정부 이후 불기 시작한 민주화 바람은 도시개발 분야에서 규제완화의 기 초반 문화예술인의 거처, 일본식 가옥, 초기 근대 양 지구로 변경되었다. 또한 같은 해 4월 서울시는 서촌 일 바람을 동반했다. 개발과 건축 규제가 조금씩 풀리면서 서촌에도 한옥을 허문 자리에 식의 공공건물, 1930년대 개량 한옥, 나아가 60,70년 대 15개 동 58만2297㎡ 지역에 대한 한옥보존대책을 다세대나 빌라가 하나둘씩 들어섰다. 1992년 누상동, 옥인동 일대 주거환경개선지구 대식 공동체 일상문화 등이 상대적으로 풍부하게 남아 담은‘경복궁 서쪽 제1종 지구단위계획’ 수립했다. 을 사진 정진호 지구단위계획에 의하면 서촌일대 한옥은 한옥지정 구역과 한옥권장구역으로 나누어 관리된다. 이에 따라 서촌 일대 재개발 예정구역으로 지정된 체부, 필운, 누 서촌은 청운동, 옥인동, 통인동, 누하동, 누상동, 효자동, 체부동, 필운동, 통의동 등 작은 구역으로 나뉘어져있다. 1 체부동의 골목 2 누하동 사진 이한울 하동 등 3곳도, 이 지구단위계획과 별도로 재개발 사업 1 2 을 추진할 수 있으나, 한옥보전에 관한 내용을 정비계 1943년에 신축된 가옥이라는 이유로 2008년 등록 해제되고, 문화유산보전단체들이 획에 포함해야 한다. 옥인1구역 주택재개발사업도 관 이를 사들인 뒤 헐고 4층짜리‘이상기념관’ 지으려 했다. 을 리처분단계까지 갔지만 2011년 말 서울시는 윤덕영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철거식 재개발의 불씨가 이곳저곳에 넓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등의 문화유산이 사업구역 내에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다. 서촌은 20세기 초 서울의 모습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사라진 1960, 70년대의 동 이유로 승인을 보류했다. 이에 앞서 2008년부터 서울 네 풍경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재산권 행사를 최우선으로 하는 철거식 개발은 돈이 시는 옥류동천 인근의 옥인시범아파트(1971년 건립)를 되는 것으로 바꾸기 위해 물리적 시설의 소실과 함께 보이지 않은 동네 일상 관계나 철거 한 후 옛 수정계곡의 모습을 되살리는 사업을 추 문화 모두를 지워버린다. 이러한 개발방식 하에서는 서촌에서 사라진 자연의 복원도 진해 왔다. 어렵다. 서울시는 수성계곡의 복원과 함께 옥류동천도 복원해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하지만 이것으로 서촌이 온전히 보전되는 것은 결코 물길을 되살릴 계획이다. 그러나 주민들은 물길복원 사업이 옥인동과 통인시장 일대 아니다. 역설적으로‘경복궁 서측 지구단위계획’ 발 이 300여 가구 주민들의 삶터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극렬히 반대하고 있다. 표된 후 한옥이 헐리고 고층건물이 들어서는 일이 오히 서촌에서는 현재 보전과 개발, 공익과 사익이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다. 말하자면 려 더 잦아졌다. 지구단위계획에 따르면 한옥지정구역 돈이 되는 것으로 바꾸어내려는 세력과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지켜내려는 세력 간의 안의 신축건물에 한해서만 한옥을 짓도록 돼 있고, 다 전쟁이 서촌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최근엔 장소화 된 문화를 상품화하는, 른 곳에서는 한옥을 헐고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되 이른바‘서촌의 삼청동화 혹은 북촌화’ 현상마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물리적 란 었다. 심지어 한옥권장지역의 한옥마저 법 취지와 달 철거가 아닐 뿐,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퇴적 되어 온 서촌의 문화유산을 오염시키 리 계속 헐려나가는 중이다. 통인동 154-10번지의‘이 고 왜곡시켜 종내엔 서촌다움을 지워내게 된다. 이 모두는 변방으로 지켜온 서촌의 상의 집’ 비근한 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이 ‘역사적 장소성’ 전에 없는 위기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 이 6 | 2012년 봄호 | | | 2012년 봄호 | | 7
  • 5. |✽집중과 조명│ 서촌의 이 성곽 사이에 끼여 있고 시장바닥에 섞여 있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아끼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촌은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는 않았다.” [서촌. 1, 역사 경관 도시조직의 변화(서울역사박물관 편, 2010) 중] 된다. 1992년, 인왕산에 맞닿은 누상동이 노후불량주 ‘사대문의 중심인 종로에 이웃하면서도 시골 같은 동네’ 라는 말은 200년 전은 물 택 밀집지역이라는 이름을 달고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역사 론, 2012년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촌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서촌의 골목길도 200년 이상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최초의 근대 지도라 는 한성부지도(漢城府地圖, 1902)는 물론, 18세기의 한성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고 지정되고, 1994년에는 지금 서촌을 관통하고 있는 필 운대로에 대한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한다. 신교동에도 좁은 길 사이로 빌라가 들어선다. 당시에 빌라를 짓기 김한울 | 서촌주거공간연구회 사무국장 있다고 하는 도성대지도(都城E大地圖)에서도 오늘날 서촌의 골목길 형태를 찾아볼 위해 주택을 허무는 과정에서 기와집이 헐리는 것은 물 수 있을 정도다. 길썰미만 있으면 조선시대 지도를 펼쳐놓고도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론 초가집들도 대거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달동네라는 표시할 수 있고, 찾아갈 수 있는 동네라는 이야기다. 이유로 인왕산과 맞닿은 동네를 중심으로 사업이 진행 길이 변하지 않는데 집자리만 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집자리와 길자리를 되는 가운데 오히려 큰 도로에 가까운 체부동, 누하동, 모두 밀어버리는 재개발이 아닌 한에야 길이 그대로라면 그 길을 통해 닿았던 집자 2 통인동에는 기와집들이 많이 남게 된 것은 이러한 전후 리의 모양도 크게 달라질 수 없음을 쉽게 짐작해 알 수 있다. 1910년에 시작된 일제 를 알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근래 들어 의 조선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처음 만들어진 지적도를 보아도 지금의 지적도와의 차 서울시의 한옥보존 정책과 맞물려 누하동, 체부동을 이점을 찾아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중심으로 한옥수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주 “정치1번지라는 종로가 말이 시내지 시골읍내같지 않 주로 관청이 소재하던 서촌에 본격적으로 주거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거환경개선’ 반드시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이 느냐면서 한탄하셨습니다.” 이후 계급에 따라 주거지가 구분되면서 중인을 비롯한 이서계층이 자리잡기 시작하 복층 건물을 지어야만 하는 것이었는지 생각해 볼 문제 2012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동네를 돌아다니던 면서부터로 알려져 있다. 양반도 천민도 아니었지만 전문지식과 기능을 갖추고 있던 가 될 것이다. 한 예비후보가 SNS로 전한 메시지는 흥미롭게도 조선 중인계급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계급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골목문학’ 이라는 커다란 변화를 여기에서 마무리하는 것은 실로 다행 후기 중인문학의 주요인물로서 조선후기를 살다 간 장 뜻의 위항문학(혹은 여향문학)의 대표격인 시인 공동체‘옥계시사’ 서촌에 자리를 도 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서촌 혼(張混, 1759~1828)이 서촌(옥류동, 현재의 옥인 잡고 있었다. 단원 김홍도는 이들의 모임을 그림으로 그렸고, 추사 김정희는 이들 모 의 골목에는 재개발을 외치는 고함소리가 드높았다. 이 동)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연상케 한다. 임을 위해‘松石園’ (송석원)이라는 글자를 써서 바위에 새겼다. 체부동 골목 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때에 약속한 체부동, 필운 “물줄기가 모인 곳을 젖히고 들어가면 좌우의 숲이 옛 모습을 이어가던 서촌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30년대이다. 경제공황이 휩쓸 동, 누하동, 옥인동 재개발과 오세훈 서울시장의 한옥보 빽빽하게 모여 있고, 그 위에 개와 닭이 숨어 살며, 그 고 간 후, 경기가 다소 회복되면서 경성으로 지방민들이 급격히 유입됨과 동시에 부 존정책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한옥보존 사이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 옥류동은 넓지만 동산 경기가 활황을 맞는다. 폭발하는 주택 수요에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던 집이 팔 250년을 내다본다는‘대경성 도시계획’ 이라는 이름으로 경성이라는 도시 전체를 술 을 조건으로 더이상 재개발이 진행될 수 없게 된 것은 다 수레가 지나다닐 정도는 아니고, 깊숙하지만 낮거나 리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20평 내외의 땅에 10평 내외로 지어진 근대 도시형 한옥 렁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 개발 과정에서 큰 필지를 나누어 대량으로 공급됐던 행이지만, 아직도 열악한 주거환경과 한옥보존의 갈등 습하지 않았다. 고요하면서 상쾌하였다. 그런데 그 땅 이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북촌, 서촌을 막론한 경성 전역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은 한옥들은 지금도 곧게 뻗은 골목 양쪽으로 늘어선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은 잦아든 불씨로 남아있다. 옥인동 재개발의 경우, 아 1930년대의 대량주택공급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직 불씨가 꺼지지 않은 채 뜨거운 입김을 내뿜고 있다. 해방 이후, 이완용과 윤덕영이 소유했던 거대한 땅과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시내를 걸으며 고층 건물 발치에 조용히 놓여있는 표 도성대지도 사진 문화재청 통인동의 한옥지붕 사진 김한울 집들이 비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전쟁으로 피난민이 유입되면서 서촌은 석을 읽는 것만으로 역사 속의 사건이나 장소를 상상할 좀 더 비좁아진다. 경제개발시대에 상경한 지방민에 청계천 복개 공사로 집을 잃은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다. 어느 누가 살던 집, 어느 누 사람들까지 일부 서촌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판자집은 늘어나고 한옥집은 칸칸마다 가 걷던 골목은 그러한 앙상한 기록에 생생한 숨을 불 한 가구씩 사는 집도 적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주거 환경이 열악해지는 것은 불 보듯 어넣을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이것은 비단 흔히 생각 뻔한 일이었다. 하는 거창한‘역사’ 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 동 남파된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눈앞에 두고 진압되었던 청와대 습격사건은 서촌에 네를 살았던 어느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올 것만 긴 인내와 고통의 시간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청와대에 인접한 동네라는 이유로 같은 풍경은 단순히 오래된 것으로써의 가치가 아니라 집을 고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고 지붕에라도 올라가면 경호원이 쫓아왔다는 주민 그 시간의 심연에서부터 지금까지 유구하게 켜를 쌓아 들의 생활은 계엄령이나 긴급조치 처럼 얼마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근대화라는 온 퇴적의 산물이고 시간의 증거로써의 가치를 지닌 이름으로 개발의 엔진 소리가 드높을 때에도 서촌은 그로부터 비껴져 남겨지게 된 다. 서촌은 그래서 재현될 수도 모사될 수도 없는 그 자 1 것은 분단의 현장이 천혜의 자연으로 돌아온 비무장지대를 연상시키게도 한다. 체로 기원, 즉 오리지널이 되는 동네이다. 8 | 2012년 봄호 | | | 2012년 봄호 | | 9
  • 6. |✽집중과 조명│ 꿈│품애 꿈을 번쩍번쩍 들어서는 세련된 카페와 인터넷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맛집들과 주말이면 카메라를 목에 건 젊은 남녀들이 혼재하는 이곳의 풍경도‘삶’ 모습이다. 하지만 의 이웃, 조직 ‘진짜 이곳의 삶’ 에서는 주인공이 달라진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웃친구가 많이 있는 정서적으로 어떤 거리감이 있건, 공동체의 가치에 주목 물려주는 평범한 초등학생들부터, 등하교 하며 인사하는 애들이 어느 집 몇째인지 잘 아시는 어르신들까지. 이해와 신뢰의 관계로 맺어진 이들이 주인공이다. 이들의 삶에선, 한 옥의 보존 이전에 그 집에 살고 있는‘어느 댁 어르신’ 건강이 우선이 된다. 의 ‘이상 하고 정의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은 공동체 성원의 덕 목이며 그 집단의 원칙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그가 아 무리 좋은 철학을 말한다 해도‘독불장군’ 뿐이다. 일 사람들 이 살던 집’ 관련한 정치적 혹은 경제적 논의 이전에, 그것이 이웃의 관계에 미치는 에 영향을 고민하는 것이 보다 가치 있다. 이곳에 사는 이들에게‘문화’ ‘콘텐츠’ 란, 가 이곳에 사는 이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나름의 삶을 살아 가고 있지만, ‘품애’ 라는 마을공동체 안에서는 이웃이 아닌‘이웃의 깊어짐과 넓어짐’ 이어야 한다. 자 조직의 성원으로서 공동체 가치 실현과 정의 구현에 김정찬 | 마을공동체‘품애’이사 힘 써야 하는 주체가 된다. 그래서│마을공동체 ‘있는 것’ ‘만들기’ 과 다음 세대의 꿈 서촌에는 마을공동체가 있어왔다. 최근‘마을공동체 만들기’ 그것과는 의 ‘깊이와 마을 안에는‘맹학교’ ‘농학교’ 있다. 그 학교 학생 와 가 격’ 다르다. 청운효자동을 중심으로 부암동, 사직동의 관계망이 지닌 특징 중 하나 이 은 누구네 집 둘째이기도 하고, 예전에는 친구네 큰형이 시작│문화 가 바로‘주민자치’ 강력함이다. 일상적인 문제부터 좀 더 크게는 지역현안 사업과 의 기도 하며, 언젠가는 내 아이의 친구일수도 있는 이웃이 ‘시간’ ‘운동’ 과 정치적인 이슈에서까지 주민의 발언권은 강하게 작용하며, 주민자치위원회를 비롯 다. 이들과 함께 수영과 등산을 하는 계획을 세우고 마 서촌에 쌓인 시간을 건축물이나 골목의 구조에서 찾는 한 자치공동체의 조직구성과 의견수렴은 원주민 보편 정서를 매우 잘 반영한다. 몇몇 을사람들이 모이고 함께 걷기 시작했다. 이들과 함께 영 이들이 많다. 찾을 고향이 있는 이들이라면, 삶이 누적 ‘ 사적 목적을 지닌 조직이나 특정 목적을 지닌 외부인 주도의 단체가, 신뢰를 얻지 못 화를 보거나, 장터를 열어 안쓰는 물건을 서로 나누기도 된 시간’ 확인하는 좀 더 좋은 방법을 알고 있다. 명 을 하고 원주민의 반발에 직면하게 되는 핵심적인 요인도 바로 기존 자치공동체가 지닌 한다. 동네 곳곳에 이곳의 역사와 숨은 이야기를 그려 절이면 텅 비는 서울 도심 한 복판에, 골목까지 빽빽하 ‘원주민 보편 정서’ 대한 몰이해와 오만에 있다. 공공미술’ 에 ‘ 이라는 허울로‘예 넣기도 한다. 골목에 의자를 마련하여 어르신들이 걷다 게 들어차는 주차된 차량들은 이곳이‘고향’ 임을 증명 산’ 쫓아 들어온 단체들의 을 ‘저의’ 모를 만큼 순진하기 어려운 도시인들이며, 이 를 ‘ 쉬어 가시기를 바라고, 자투리 땅에는 텃밭을 꾸려 어르 하는 매우 중요한 흔적이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 그 리저리 두 얼굴 두 말 하는 모양’ 사람 좋게 웃어넘길 만큼 한가하지도 않은 을 ‘종로’ 신들의 취미도 삼아 드린다. 명절에는 마을잔치를 준비 아버지의 형제들, 그 이웃들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한 복판의 사람들이다. 하고, 미혼모의 돌잔치나 화환이나 축의금 대신 기부를 자랐으며, 여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이어져 가고 있다. 받는 혼인잔치도 연다. 아이들의 등・하굣길에는 인사 서촌이 주목받고, 서촌의 문화도 하나의‘운동’ 으로 주 ‘문제’ ‘필요’ 와 드릴 어른이 많고, 내 아이들의 오고가는 길을 살피시는 목받기 시작하였다. 시작을 제대로 하자. 그것이‘운 새로운 사람은 계속 유입된다. 그리고 이웃이 된다. 현재, 또는 기간만을 기준으로 어른도 많다. 마을의 낡은 주택이나 낡은 가구는 동네목 동’ 되는 것은, 이제야 이곳을 바라보고 새롭다고 여 이 1 ‘공동체 성원’ 판단하지 않는다. 을 ‘공동체 성원임을 자각’ 하는가의 문제는, ‘공동 수가 낮은 품삯으로 수선하고, 좋은 계절마다 마을 곳곳 2 기는 당신의‘시선’ 국한된다. 이곳의 문화는 에 ‘시간 체의 문제에 대해 얼마나 공감’ 하는가의 체감온도를 확인하는 것으로 분명해진다. 에서는 즐거운 장터와 음악제가 열린다. 내 아이가 살아 의 지속’ ‘운동’ 이다. 이라 부르는 것들은 이어져 오는 ‘원주민 보편 정서’ 결국 지금 우리이기 때문에 마주하는 문제를 함께 서서 바라 란, 갈 마을을 꿈꾸며, 우리는 지금 꿈을 만든다. 것 위의 편린이다.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타자’ 특징을 지닌다. (1)필요 가르치기 (2)배우려하지 않 는 기 (3)필요에 따른 편 나누기(배척하기) 마무리│유산 ‘사람’ ‘콘텐츠’ 과 우리는 우리 안에서 배운다. 순서는 먼저‘이웃’ 되는 것이어야 한다. 타인들은 이 지킬 것 많은 가수와 시인들이‘사람’ 본질적 가치이며 아름 이 자신들의 필요를 우리의 필요라고 가르치려 애쓰면서도,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생각 ‘꼭 지켜야할 문화유산 - 서촌의 문화’ 대한 글을 요 에 다움임을 노래했듯, 문화도 결국 사람이다. 한옥과 적 을 하는지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그 무지를 극복하려는 의지 청 받았을 때, 떠오른 문구는‘우리 아이들’ 이었다. 지 산가옥, 조선과 근대의 시간을 잇는 골목, 사연과 흔적 도 없다. 이러한 게으름은 쉬운 길을 택하게 되는데, 대개가‘내 맘에 드는 사람들과 키는 것은, 그것이 지닌 가치만큼 의지가 더 해 질 것이 을 남긴 한 시대의 창작자들, 재래시장, 몇 주 사이에도 편먹기’ 이다. 내 맘에 드는 이가 내 친구요 가까운 이웃이 되는 것이야 인지상정이겠 다. 문화는 유/무형의‘누리는 것’ 이며, 결국‘누리는 지만, 이미 있는 이웃이 모두 내 마음에 들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 것이기에.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가며 마을공동체 의 고 내 마음대로 어찌 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사람 사는 곳에는 좋은 사람 ‘품애’ 통해 이루고자 하는 꿈도 를 ‘우리 아이들이 누릴 1 골목 디자인 2 우리마을 시장해 도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이니까. 것’ 이다. 10 | 2012년 봄호 | | | 2012년 봄호 | | 11
  • 7. |✽집중과 조명│ 기억의 도시와 기억 건축은 도시를 구성하는 그 어떤 요소들보다 사람들의 기억과 함께 오래 유지된다. 그것은 아마도 건축이 말이 도시공간, 나 글이 아닌 시공간의 흔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 다. 도시의 과거는 보잘것 없는 현재에 한층 영광스러운 배경을 마련해 준다는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서촌 말이 아니더라도 지난 시대의 역사와 문화는 현재를 한 층 더 돋보이게 해주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 위치 : 옥인동 19-46번지 ● 대지면적 : 266.41m2(80.6평) ● 건축유형 : 부분 2층형 한옥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는 <보이지 않는 도시 이충기 |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과학대학 건축학부 교수 ● 계획개념 들>에서 마르코 폴로의 입을 빌어 황제 쿠빌라이 칸에 - 분리 임대할 수 있도록 계획함(각 채별 독립적 생활 가능) 게 도시와 기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지하공간의 활용 “도시는 자신의 과거를 말로 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신한옥 계획 과거는 마치 손에 그어진 손금들처럼 거리 모퉁이에, 창 살에, 계단 난간에, 피뢰침 안테나에, 깃대에 쓰여 있으 며 그 자체로 긁히고 잘리고 조각나고 소용돌이치는 모 든 단편들에 담겨 있습니다.” 어진 건물이라고 하여 자본주의 시대에 지어진 건물은 들이 상실될 위험에 있다고 경고한다. 서촌 역시 도시기억의 보고임에도 불구하고 재 농학과 문학을 전공한 이탈로 칼비노의 도시의 기억 가치있는 건물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건물의 축조연대 개발을 피해갈 수 없었던 지역이었다. 다행히 새로운 지구단위계획으로 시간을 지연 에 대한 표현은 어느 건축전문가의 정의 보다 설명적이 를 조작하여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즉 지난 시대의 역사 할 수 있었으나 정치적 개입에 의한 기억파괴의 위기는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 며 적확하다. 기억이라는 단어는 칼비노의 문학적 힘을 에 대한 망각을 강요하고 있는 내용이다. 조지오웰 역시 된다. 빌어 도시에서 한층 더 빛을 발한다. 건축가 알도로시 이미 도시와 건축이 사람들에게 집단적 기억으로 작용 역시 도시는 그 자체로 도시민의 집단기억이고 사물 및 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음이 놀라울 따름이다. 서촌의 기억과 건축 장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쟁과 침략은 대표적인 도시기억의 파괴행위라 할 서촌은 서울을 대표하는 기억의 동네다.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의 동네를 일컫는 비 이렇듯 도시와 건축은 사람들에게 집단의 기억으로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아니더라도 기억의 파괴행위는 행정지명으로 인왕산의 동쪽에서 발원하는 청계천의 상류 옥류동천과 백운동천 주 작용하는 대표적 매개체라 할 수 있다. 건물이 지어지고 일어난다. 역사와 전통이 도시와 건축을 통한 기억으로 변에 형성된 600년의 전통을 가진 마을이다. 사용되며 허물어지는 물리적 변화는 개인의 감정과 환 지탱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지난 10여 년 동안 이 지역은 인왕산, 오래된 한옥과 근대에 지어진 양옥, 현대의 다가구다세대주택, 경에 영향을 미치는 지리적 환경으로 작용함으로써 사 재개발, 재건축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당당하고 자연 골목길, 시장 등에 시간이 만들어 낸 흔적과 풍경들이 공존하고 있다. 한옥봉창, 담 람들에게 기억의 장소라 할 수 있는 심리적 지리(psy- 스럽게 시민들의 삶의 터전에 대한 집단기억을 파괴해 벼락낙서와 꽃화분, 골목가로등, 피맛길 점포 등에 삶의 파편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cho-geography)를 형성하게 된다. 진정한 망각은 존 온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 개인들은 경제적 이 있는 동네인 것이다. 재하지 않으며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을 뿐이라는 프로 익 앞에 무기력했던 것도… 재개발, 재건축을 통한 아파 이러한 주민들의 삶의 흔적 외에 지금도 육상궁과 선희궁지, 사직단, 황학정 등의 이트의 주장처럼 도시와 건축의 과거나 역사에 대한 의 트의 건축이 문제가 되는 것은 기억의 급격한 단절이 발 궁궐 문화재와 홍종문가옥, 신익희가옥, 박노수가옥 등의 지정 문화재와 마애각자, 식은 기록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기억으로 대물림되 생하기 때문이다. 2,3층 이하의 주택과 건물들, 우물, 보호수, 관아터 그리고 세종대왕, 이항복, 정선, 김정희, 이완용, 윤동주, 이중섭, 김 어 나타나는 것이다. 정자, 골목, 나무, 언덕 등 수백년 이어오던 대물림의 동 상용, 윤덕영, 노천명, 이상 등 조선과 근대를 아우르는 인물들의 유적과 문화자원들 그러나 도시의 기억들이 칼비노와 알도로시의 기억 네 기억들이 전면재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새로 이 역사와 문화라는 기억으로 이어져 오고 있어 역사문화자원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처럼 늘 낭만적이거나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운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는 것은 엄청난 정신적 충 그러나 이 서촌에도 예외없이 재개발의 바람이 불어 체부동(2004), 누하동(2005), 기억의 파괴행위가 그것이다. 조지오웰의 <1984>에는 격이며 문화적, 공간적 충격이다. 재개발로 인해 개인 필운동(2008)에 조합설립추진위원회의 승인이 되어 정비계획신청이 진행되었고 이 지배계급이 건축물을 이용해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하 이 친숙한 사물과 자기주변의 환경을 모두 잃는 다는 것 에 서울시가 경복궁 서측에 대한 종합적 한옥보존의 수립을 사유로 부결 및 보류하 고 강요하는 얘기가 나온다. 누가 봐도 오래된 건물은 은 사물과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기억과 추억을 상실하 면서 이곳의 지구단위계획수립을 공모하게 되었다. 이 공모전에서 필자 팀이 당선 중세라는 애매한 시기로 분류하고 크고 훌륭한 건물은 는 것을 의미한다. 로버트 베번Robert Bevan은 이 경 되어 서촌의 도시계획, 즉 지구단위계획을 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우리 팀은 오래된 건물이라도 겉모습이 멀쩡하면 혁명 이후에 지 우 개개인의 집단 정체성과 정체성들의 견고한 연속성 문헌상에 없다는 등의 논란에도 불구하고‘서촌’ 이라는 비공식적 명칭을 이 지역의 12 | 2012년 봄호 | | | 2012년 봄호 | | 13
  • 8. 동강 Volun Tour ● 일정 : 5월 5~6일, 12~13일, 19~20일 6월 2~3일, 9~10일, 16~17일 ● 주요활동 명칭이자 공모안의 제목으로 사용함으로써 서촌에 대한 집단기억을 되살리는 노력 축물로 인정한 이 계획은 향후 서촌이라는 지역과 장소 ○ 자원봉사활동 : 작물파종, 야생화단지 가꾸기 등 을 하였고 이후 서촌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의 가치를 지속하고 기억을 유지하기 위한 개별필지들 ○ 농촌체험활동 : 야생화효소 만들기, 봄나물요리, 동강생태탐방, 이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함에 있어 우리 팀은 서촌의 건축을 과거로 돌리는 것이 의 건축방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건축 기준들은 개 태양열오븐기 등 ○ 동강뼝대길 트레킹 아니라(많이 파괴되었다고 해도 재개발이 추진되던 3개 동의 한옥 보존은 평균 50% 별 건축주와 건축가에 의해 지역과 블록단위의 재개발 ● 참가비 : 회원 100,000원, 비회원 126,000원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의 서촌다움을 인정하고 유지해야 하며 과거와 현재의 보다는 주민 개개인의 상황과 능력에 따라 순차적으로 ● 신청방법 ○ 참가비 입금 전 전화 문의 02-747-3136 기억이 지속되는 느림의 동네로 계획되어야한다는 원칙을 지키고자 하였다. 이는 곧 신축, 증축, 리모델링 등의 수단으로 주민의 기억을 유 ○ 참가비는 해당 여행일 7일전까지 입금하셔야 참가 확정 건축이나 장소의 기억이 가치가 되는 동네, 풍경이 유지되는 서촌을 만드는 것이었 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진행되는 것이 바 ○ 참가비입금 선착순 마감 동강 Volun Tour로 으며 과거의 건축적 유물에 파묻혀 사는 것이 아니라 로버트 베번의 주장처럼 자유 람직할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에 대한 집단기억을 유 ● 입금계좌 : 신한은행 100-014-305960 한국내셔널트러스트 ※ 자세한 내용은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홈페이지 참고하세요. 롭게 선택한 과거의 흔적들 틈에서 사회 안에 이질성을 긍정적으로 반영할 수 있도 지하기 위한 주민윤리가 발휘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보 내용은 상황에 따라 변동될 수 있습니다. 록 다양한 흔적들과 함께 살아갈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다 중요하다. 주민들은 서촌의 건축과 공간에 대해 자 봄여행하세요 이를 위해 서촌지역의 인문역사 자원의 조사와 한옥에 대한 조사와 기록은 무엇보 세히 살피고 애정을 가질 것이며 오래 고민하고 생각하 다 소중한 일이었다. 한옥과 골목길, 역사문화자원 등에 대한 보존의 근거가 필요했 여 사랑해야 할 것이다. 서촌의 기억들이 그것을 요구 기 때문이다. 이 조사를 근거로 서촌지역의 도시와 건축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한옥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형성되기 시작한 마을 공동 의 보존과 새로운 한옥건축 유도, 기존 골목길 보존과 담의 기준, 건축규모제한과 소 체 조직들이 활성화되어 주민들이 주도하는 마을가꾸 규모 필지유지 및 대지합필규모제한, 저층규모 유지, 서촌의 역사문화자원 보존 및 기로 전개되어 지구단위계획 기준을 넘어서는 서촌의 Volun Tour(자원봉사+여행) 재생, 유흥 및 위해 용도의 제한 등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였고 지역적으로 부 건축물과 공간에 대한 마을규약을 만들기를 소망한다. 동강을 보전하는 자원봉사활동과 더불어 족한 주차장, 공중화장실, 지역안내소, 주민이용 공동체시설 등을 계획하였다. 20년 그것이 희망적인 것은 장소가 가지는 가치나 심리적 지 동강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전에 이미 한옥을 헐고 새로 지은 다세대 주택이 한옥과 공존하는 동네에서 한옥은 리가 파괴될 위기가 도래하면 사람들의 기억은 훨씬 느낄 수 있는 여행에 초대합니다. 동강사랑(東江舍廊) 이용규칙 한옥대로, 다세대 주택은 다세대 주택대로 모두 시대의 역사와 흔적을 담고 있는 건 더, 잘 되살아난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 이용 가능일 : 매주 금, 토, 일요일(3일) ● 이용 대상자 :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회원(최근 3개월 이 상 회비 납부자)에 한함 ● 최대 수용인원 : 2팀 이하(최대 10명 이하) 1 골목길 변경 전 2 골목길 변경 후 3 서촌지구 단위계획 종합계획안 ● 방 선택과 배치 : 인원을 고려 권장하거나 사무처에서 조정 3 ● 방별 이용요금 (1박기준) ※ (재)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 회원은‘일반회원’ 기준을 적용 방 비용 수용가능인원 방 형식 기본 2인. 추가 1인당 만원 동강 5만원 2층침대/ 온돌 (3명까지 가능) 기본 2인. 추가 1인당 만원 동강할미꽃 5만원 트윈침대/ 온돌 (3명까지 가능) 백운산 5만원 기본 2인 싱글침대/ 온돌 동강여울 5만원 5명 이용 가능 별채 2층/ 전기판넬 동강 다락방 3만원 2명 이용 가능 다락 칠족령 다락방 3만원 2명 이용 가능 다락 ● 환불 : 예약일 6일전~1일전 취소시 70% 환불, 예약 당 1 일 취소시 50% 환불 2 ● 이용 가능 횟수 : 1년 1회 기준 ● 접수방법 : 원하시는 날짜에 숙박이 가능한지 미리 연락 하여 확인 후, 신청서를 작성 ● 동강사랑 주소 :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95번지 ● 회원별 이용가능 인원 ○ 청소년 회원(본인 1인) ○ 일반회원(2인 : 본인 1인 + 동반인) ○ 가족회원(5인 : 본인 1인 + 가족 4인) ○ 평생회원(5인 : 본인 1인 + 지인 4인) ○ 법인 및 단체회원(10인) ● 이용문의 : (02)739-3131 14 | 2012년 봄호 | | 15
  • 9. |✽내셔널트러스트가 만난 사람│ 김 부천시는 특히 문화사업에 많이 신경을 쓰고 있는 점이 많은데요, 특히나 지난해 도시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지요. 부천은 부천국제판타 스틱영화제(PIFAN), 국제만화축제 등 여러 문화사업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경험이 있는데요, 지속적인 문화사업에 대한 마인드를 가꿔오신 것이 성 과로 드러난 것이라고 봅니다. 부천시장님이 말씀해주시는 부천의 문화사 업에 대해 들어보았습니다. 만 수 부천 시장 일시 : 2012. 3. 14 ● 바쁘신 가운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 부천은 제가 젊을 때 를 넣자 생각했죠. 장소 : 부천시청 인천 가는 길에 들녘을 보면서 가던 곳이었는데, 10~15년 사이에 인구 이 계획이 순항하는 것 같았는데 그 다음해에 IMF를 맞았습니다. 구 진행 : 윤인석 (성균관대학교 교수/ 밀도가 높아진 곳이 되었습니다. 부천하면 영화, 애니메이션과 같은 문 상했던 문화사업에 엄청난 위기를 맞이한 거죠. 부천국제판타스틱 <내셔널트러스트> 편집위원) 화적인 이미지가 떠오르곤 합니다. 이를 위해 많은 분들이 노력해 오셨 영화제 같은 경우 1회는 진행했는데 2회를 할 수 있겠느냐는 위기에 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임 시장님들께서 그런 방향 설정에 있어 김만수 처했는데 영화제를 하자고 결국 결정했고, 현재 16회를 준비하는 중 시장께서도 많은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입니다. 만화 사업도 중요하게 시도하면서 부천만화정보센터를 만 ○ 저는 그때 시의원이었습니다. 95년도에 본격적으로 지방자치가 시 들었습니다. 한국만화의 공간적 거점이 생긴 거죠. 그게 한국만화영 작되면서 시의회가 구성되었는데, 전 2기, 3기 시의원을 했습니다. 상진흥원으로 발전했으니 지난 10여 년간 숨 가쁘게 달려왔죠. 처음 등장한 민선 시장과의 협력 관계 핵심 주제는 앞으로 부천이 어 떤 도시로 발전해나가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이었죠. 그때 문화도시 ● 영화 뿐 만 아니라 만화 사업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요. 라는 콘셉트가 거론되었어요. 원혜영 시장 시절부터 구체적인 문화 ○ 사실 만화는 사랑을 많이 받는 콘텐츠인데 소외당하고 있었습니다. 도시의 틀을 갖춰나갔죠. 문화는 영역이 포괄적이어서 선택과 집중 부천이 만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현재는 그 위치를 공고히 하 을 해야 된다는 게 대전제였죠. 부천필하모니오케스트라를 중심으 고 있죠. 만화는 양귀자 선생님의 원미동 사람들 작품을 만화로 만드 로 한 좋은 컨텐츠가 원래 있었고요. 영화는 문화도시라는 비전을 고 는 작업을 얼마 전에 했어요. 또 부천FC축구단이 있는데 이를 토대 민하면서 의도적으로 배치한 콘텐츠였죠. 아쉽게도 아직 개발이 안 로 한 만화 <모든걸 걸었어>를 웹툰으로 게재해서 호응을 받았구요. 되고 있지만 영상문화단지 10만평에 문화도시를 구체화하는 콘텐츠 내년에는 문화관광부와 협의해서 프랑스에서 한국만화 특별전을 부 16 | 2012년 봄호 | | | 2012년 봄호 | | 17
  • 10. 부천은 역사가 오래된 도시가 아니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베드 타운이어서 자연적 요소가 많지 않아 자연・문화유산이 많지 않습니다. 보전보다는 유산을 창출해내야 하는 도시인 거지요. 그래서 고민하는 것이 재생개념입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한국만화 100주년 기념식 전시 개막식 천이 주관해서 열기로 했습니다. 세계의 만화계는 미국, 일본 만화로 원에서의 예술교육입니다. 학원에서 할 수 없는 수준 있는 예술교육 ○ 문화영역의 생태계를 구성하고자 합니다. 생태계는 다양한 생명체 이어지는 단초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요. 양분되고 있는데, 한국만화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게 될 겁니다. 만 을 일반학교에서 하자는 취지죠. 그것은 부천이 문화도시의 인프라 층위의 공존이잖아요. 이를 문화예술영역에서 부천에서 구현해보자 화는 애니메이션 영화, 아니면 캐릭터 산업 등으로 진출하는 점을 신 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부천필하모니 단원이 직접 학교에 는 거죠.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까지 단계와 수준에 맞게 문화와 예 ● 영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는 기관명으로 회원가입을 하기도 합니다. 기 경쓰고 있어요. 이처럼 음악, 영화, 만화를 집중적으로 매진해보자는 가서 가르쳐 주는 거죠. 대한민국의 탑클래스 수준의 강습인거죠. 술을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어요. 생애맞춤형문화예술 관장이 바뀌더라도 예산 편성할 때 내셔널트러스트 회비가 책정되어 있 전략을 가지고 십 수 년을 거쳐왔고, 지금은 성과를 내고 있는 시기입 고급과정은 아닙니다만, 아이들에게 예술의 영역 하나를 맛보게 해 프로그램을 많이 고민하는데, 청소년 대상, 주부 대상, 노인 대상 등 어 단체의 장이 바뀌거나 방침이 바뀌어도 지속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니다. 굉장히 기대를 많이 하고 있고, 이런 문화영역들이 산업 연계성 서 여기에서 재능 있는 아이들은 별도의 과정으로 진출할 수 있게 길 문화예술프로그램을 어떻게 구상할지 다양성을 갖추는 것을 최대 사 조치지요.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시민단체에 대한 활동과 지원을 기초 을 갖게 하는 것, 이에 대한 비전을 설정하고 있어요. 을 열어주는 겁니다. 아이들이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단체와 연계한다면 좋겠습니다. 내셔널트러스트 운동과의 부천 사업을 하지 않고, 가급적 많은 아이들이 예술과 문화를 경험하게 하는 것 연계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나요? ● 문화예술회관 건립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가요? 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도시의 기초 체력을 탄탄히 하 ● 문화사업이 다양한 분야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부천에서는 그 향 ○ 부천둘레길을 만들어보니 시민단체의 운동과의 결합성이 크더군요. ○ 지금 위치는 중앙공원 안에 예술회관을 지으려 합니다. 예술회관을 는 거라고 봐야 되겠죠. 방을 어떻게 준비하고 계시나요? 구간을 나눠서 관리해줄 단체나 회사를 모집했었어요. 38개 회사가 하나 지으려면 1500억원이 필요합니다. 일반회계에서 다른 살림을 ○ 문화사업이 선순환 구조를 가지려면 우선 콘텐츠가 있어야 하고 두 참여했고, 그 구간을 선정된 단체와 회사에서 관리하게 되어 보전을 알뜰히 해서 짓기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토지 매입 금액으로 공원 ● 가르치시는 전문인들이 재능기부를 하는 개념이신건가요? 번째로 재생산의 참여구조가 있어야 합니다. 즉 교육이 있어야 하죠. 지속해나는 거죠. 안에 짓자라는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건데, 외국에도 이런 사례가 많 ○ 그렇습니다. 일정의 강사료는 상징적인 의미이고 모두 자원봉사의 의 마지막으로 산업 구조를 갖춰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춰져야 생명 부천은 아쉽게도 역사가 오래된 도시가 아니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 있다고 합니다. 공원 안에 예술공원화 해서 갤러리도 있고, 음악 미로 하고 계십니다. 부천에서 받은 혜택을 부천의 아이들에게 돌려준 력을 가지죠. 앞으로 문화의 영역이 경제의 영역과 결합되는 걸 생각 베드 타운(침상 도시, 寢牀都市)이고 자연적 요소가 많지 않아 자연, 당도 있는 곳인 거죠. 지금은 의회를 거쳐 시민 설명회를 해야 하는 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강사들의 몰입도와 만족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하고 있는데, 우리의 강점을 경제영역으로 변환시키려는 거지요. 문 문화유산이 많지 않습니다. 보전보다는 유산을 창출해내야 하는 도 단계입니다. 역점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고요, 예술회관이 지하철 고 취지를 빨리 공감해주셔서 시도하는 첫 해에 초등학교 전 학교에서 화를 매개로 한 관광을 들 수 있습니다. 시민 뿐 아니라 외국인들이 시인 거지요. 속도로와 같은 문화의 인프라가 있는 사업이기 때문에 더 이상 늦출 동시에 진행할 수 있었어요. 올해에는 중학교 전체에 보급되고요. 다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죠. 부천의 입지는 이 점에 경쟁력이 있습니 그래서 고민하는 것이 재생개념입니다. 부천도 뉴타운 재개발 문제의 수 없는 상황이죠. 행히 굉장히 순조롭게 안착된 경우입니다. 다. 인천공항 30분 거리이고, 서울과 인천을 끼고 있어요. 접근이 좋 과정에 있습니다만, 싹 밀고 고층아파트를 세우는 건 이제 불가능하다 다른 시에서도 벤치마킹을 하러 오실 겁니다. 그런데 이 사업은 강사 기 때문에 체류형 관광지보다 셔틀형 관광지로 강화하려합니다. 외 고 봅니다. 낡았다고 밀어버리는 것 또한 만만치 않지요. 울타리 쳐서 ● 부천시에서는 교육청과 예술교육특구 MOU를 맺어 긴밀하게 활동하고 역량이 있어야 하고, 수익모델로 접근하기도 어렵고 외부 지역에서 국 관광객이 서울에서 공항가기 전이나 공항에서 서울 들어가기 전 보전하는 것보다, 효용성 있게 보전 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부천의 계시죠. 특히 청소년들의 1人1技라는 내용이 눈에 띕니다. 초등학생 아 초청하기도 어려운 점이 있죠. 이 사업은 부천이 충분한 역량을 가지 에 부천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얼마 전 김치체험관 40여년 된 소각장이 곧 폐쇄됩니다. 유산적 개념으로 보전하기에는 이들이 정규과정에 일주일에 두시간 씩 예술교육을 예술인 강사들에게 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죠. 광역 단위에서 진행하려면 다양하고 풍 을 열어 시민과 외국인들이 직접 담가서 가져갈 수 있게 하고 있어요. 조금 부족해 보이지만, 그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재창조해서 시민들이 받는 것이죠? 예술에 대한 수혜층이 넓어지고, 수준이 높아졌을 것으로 성한 강사풀을 구축해야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한국의 김치명인 1호가 김순자씨인데 부천에서 사업을 하세요. 그분 계속 이용하는 개념을 시도해보려 합니다. 소각장 뿐 만 아니라 폐쇄 예상되는데 어떻게 시행하시게 되셨나요? 이 직접 김치 체험관에서 강의를 합니다. 허영만 선생님도 부천에 오 된 학교도 포함될 수 있겠죠. 지금은 아니지만 이후에 유산이 될 수 ○ 이 모티브는 베네수엘라의 엘시스테마를 모델로 한건데요, 엘시스 ● 시민들에게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계실텐데요. 주로 픈스튜디오를 가질 생각이고요. 앞으로 한류가 드라마, K-POP을 있는 것을 재생산 해보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테마는 저소득층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거고요, 저희들은 공교육 차 역점을 두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요? 거쳐, 음식한류, 만화한류로 이어질 거라 봅니다. 그것이 산업으로 내셔널트러스트와 같은 단체와의 연계는 꼭 필요하리라 봅니다. 18 | 2012년 봄호 | | | 2012년 봄호 | | 19
  • 11. | ✽영국내셔널트러스트│ 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8세 때 어머니를, 13세 때 아버 는 여러 편의 시를 썼는데, 루시 시편(Lucy)’ 대표작이다. 1799년 독일서 돌아 온 ‘ 이 지를 여윈 후 친척들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어릴 때 후 그는 동생과 함께 호수지역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떠난 지 12년만이다. 첫 밤 고향 코커머스의 학교를 잠시 다니다가 어머니 고향인 을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혹스헤드에서 보내고, 다음날 그들은 그래스미어로 갔 펜리스(Penrith, 컴브리아의 동부지역)의 서당(dame 다. 그렇게 해서 1799년 12월 20일 워즈워드와 동생 도로시는 그래스미어의 끄트머 school, 여인이 자택을 개방하여 가르치는 곳)을 다녔 리(Town End)에 자리한 오두막(후에 도브 코테지로 명명)에 새로운 거처를 정했다. 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여동생 도로시(Dorothy)는 그 집은 그 해 워즈워드가 코울리지와 호수지역을 도보여행 하면서 눈여겨 봐 놨던 요크셔 친척집으로 보내졌지만, 워즈워드와 다른 형제 것으로 연 5파운드의 세로 얻은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약 8년을 살았고, 그 기간 동 들은 혹스헤드의 학교를 다녔다. 어릴 적부터 이곳저곳 안 그의 작품 중에서 최고의 걸작들이 생산됐다. 앞서 소개한 작품들은 이때 생산된 을 옮겨 가며 사는 동안 워즈워드는 호수지역을 좋아하 것들이다. 게 되었고, 호수지역의 풍광은 그에게 문학적 상상력과 1802년 워즈워드는 어린 시절의 친구였던 메리 허친슨(Marry Hutchinson)과 결 ‘자연애(love of nature)’ 가져다주었다. 를 혼했다. 그의 여동생 도로시와 메리의 동생 사라(Sara)가 함께 살면서 집안 살림을 1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자, 백부들이 조카인 워즈워 돌보았다. 워즈워드의 나이 스물아홉 때였다. ‘생활은 소박하게, 그러나 생각은 높 드를 돌보았다. 그러나 그의 다른 형제들은 외가가 있 게(plain living, but high thinking)라는 신념을 가지고 그는 오두막집 정원에서 완 는 펜리스로 보내져 그곳 친척들과 살았다. 17살이 되 두콩과 강낭콩을 기르고, 또한 호반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많은 시적 영감을 얻었다. 던 1787년 캠브리지 대학을 들어간 워즈워드는, 그 후 다른 작가들도 끌어들여 많은 일들을 함께 하기도 했다. 코울리지도 이곳을 자주 찾 12년 간 (29살이 될 때까지) 잉글랜드와 유럽 이곳저곳 아왔다. 도로시의‘그래스미어 일기’ 에는 이들이 보냈던 나날이 잘 그려져 있다. 을 여행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1795년 시인 사무엘 테 워즈워드와 메리는 이 오두막 집에서 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4번째 아이를 워즈워드의 영감, 호반의 집’ ‘ 일러 코울리지(Samuel Taylor Coleridg)를 만나 친분 갖게 되면서 집이 좁아지자 그들은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했다. 1808년 알렌 뱅크 을 쌓기 시작하면서, 워즈워드는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Allen Bank)로 먼저 옮겼다가, 1810년 옛 교구목사관(the Vicarage)으로 옮겼다. 이 받았다. 여동생 도로시(Dorothy)와 함께 남부지역 소 곳도 마음에 들지 않자, 그들은 1813년 인근의‘라달 마운트’ 이사했다. 워즈워드 으로 조명래 | 내셔널트러스트 이사, 단국대학교 교수 머세트(Somerset)의 레이스다운(Racedown)에 자리 나이 43세가 되던 해였다. 그 이후 37년간 그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라달 마운트에서 를 자리 잡았다가 앨폭스던(Alfoxden)으로 옮긴 것도 정원을 가꾸고 호반의 풍경과 교감하면서 무르익은 시작(詩作)을 계속 했다. 이곳에서 워즈워드의 호반‘레이크 디스트릭트’사진 Roy Higson 코울리지에 가까이 가기 위한 것이었다. 문학적 교류를 더욱 깊게 갖기 위함이었다. 1798년 두 시인은‘서정민 요집(Lyrical Ballads)’ 함께 출간했다. 이 시집에서 을 워즈워드 하우스. 워즈워드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집으로 영국내셔널트러스트가 소유0관리하고 있다. 사진 Graham Hogg 윌리암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는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도움으로 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rter)는 호반의 동 코울리지는‘초자연적이고도 환상적인 세계’ 워즈 를, 계관시인이다. ‘초원의 빛’ ,‘수선화’ ,‘무지개’ 자연과 인생의 내면적 교감을 노 등 물들을 이인화한 그림동화‘피터 레빗(Peter Rabbit)’ 워드는‘전원과 시골을 배경으로 자연의 장엄함’ 다 을 래하는 그의 주옥같은 시들은 세계인들의 가슴을 늘 촉촉이 적셔주고 있다. 워즈워 등을 출간해 엄청난 부를 얻었고, 그 부로 사들인 4천 뤄 영문학 사상사에서 낭만주의를 부활시켰다. 같은 드의 문학적 감수성은 그가 태어나 성장했던 고향인‘레이크 디스트릭트(the Lake 에이커의 땅과 15개 농장을 사후 내셔널트러스트에 해(1798년) 워즈워드는‘철학적이고 자전적인’시를 District)’ 즉 호수지역의 아름다움이 준 영감에 기초하고 있다. 잉글랜드 북서부 컴 , 기증했다. 영국 국립공원 1호가 된 호수지역의 땅 4분 쓰기 시작해 1805년에 완성하게 되는 데, 이는 사후에 브리아 카운티(Cumbria County) 일대 동서 20km, 남북 30km에 걸쳐 크고 작은 의 1이 영국내셔널트러스트의 소유가 되고, 그렇게 해 ‘서곡(The Prelude)’ 이란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이 방 호수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 호수지역은 18세기, 19세기 영국문학과 뗄 수 없는 관계 서‘영원히 보전’ 수 있게 된 뿌리에 바로 시인 워즈 될 대한 작품은 시인의‘자연애’ 세상에서 그가 자리한 와 를 가지고 있다. 호수지역의 아름다움은 1769년 토마스 그레이(Thomas Gray)의 워드가 자리하고 있다. 워즈워드는 80년 전 생애에서 곳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서정 민요집’ 펴낸 을 ‘대기행(Grand Tour)’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실제 워즈워드의 시가 가장 유 에 60년을 호반에서 보냈다. 10대 후반까지는 호수 서쪽 다음 10년간, 워즈워드는 가장 왕성하게 시를 썼다. 명하고 영향력이 컸다. 이곳을‘워즈워드의 호반(Wordsworth’ Lake)’ s 이라 부르 ‘혹스헤드(Hawkshead)’ 시작(詩作)을 가장 왕성하 에, ‘마이클(Michael)’ ‘서곡(The Prelude)’등이 출간되 는 것은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게 했던 30대 때는 호수동쪽 그래스미어(Grasmere) 었고, 장편시‘소요(The Excursion)’ 완성되었다. 가 영국의 문학만큼이나 호수지역은 영국내셔널트러스트와도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 에, 그리고 40대 이후엔 그래스미어 인근 라이달 마운 이때부터 그의 작품은 도덕적이고 보수적인 색채를 드 고 있다. 여기에도 워즈워드의 흔적이 절대적이다. 1895년 영국내셔널트러스트 창설 트(Rydal Mount)에 살았다. 러내기 시작했다. 을 이끌었던 3인방 중 성공회 신부‘하드윅 론슬리(Hardwick Rawnsley)’ 워즈워 는 워즈워드는 1770년 4월 7일 호수지역의 서북 끝에 있 워즈워드는 동생 도로시와 시인 코울리지와 함께 드의‘자연 보전론’ 감화를 받아 호수지역의 보전운동에 투신했다. 또한 론슬리의 에 는 코커머스(Cockermouth)란 소도시에서 변호사의 아 1798~1799년 겨울을 독일에서 보냈다. 그곳에서도 그 20 | 2012년 봄호 | | | 2012년 봄호 | |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