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은 자신이 저술한 <사기>의 글자수를 ‘태사공자서’에 52만 6,500자라고 명시했다. 아마 역사서는 물론 모든 분야의 저서에서 자기 저서의 글자수를 밝힌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죽음보다 수치스러운 형벌을 자청하면서까지 완성했던 <사기>가 후대의 불순한 손에 의해 그 내용이 깎이거나 보태지는 것을 예견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글자수를 공개적으롭 밝힘으로써 그런 의도를 방지하려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나? 너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은 아닌지…
13.
“태사공은 부자가 대를 이어 그 자리를 맡게 되었는데
일찍이 아버지께서는
‘오호라! 내 선조께서 일찍부터 이 일을 주관하여
당우 때부터 이름이 났고, 주 왕조에서도 다시 그
일을 맡았으니 사마씨는 대대로 천문을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 일이 우리에까지 왔으니 너는 단단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단단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
120.
“이렇게 해서 총 130편에 52만 6,500자에
태사공서라는 이름을 붙였다.
간략한 서문을 통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모으고 빠진 곳을 보충하여 나름의 견해를 밝혔다.
아울러 6경의 다양한 해석을 취하고, 제자백가의 서로
다른 학설도 절충했다. 그리하여 정본은 명산에 감추어두고,
부본은 서울에 남겨 나중에 성인군자들이 참고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이 열전의 마지막 편인 제70 「태사공자서」다.
나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황제로부터 태초 연간에 이르기 까지의 역사를
편찬하고 서술하였으니 모두 130편이다.”
134.
“그러나 제 생각을 다 밝힐 수 없었으며 주상께서도
제 뜻을 이해 못하시고 제가 이사 장군을 비방하고
이릉을 위해 유세한다고 생각하셔서 결국 법관에게
넘겨졌습니다.
간절한 저의 충정은 끝내 드러나지 못했고,
근거없이 황제를 비방했다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사형을 면할 수 있는 재물도 없었고,
사귀던 벗들도 구하려 하지 않았으며,
황제의 측근들은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148.
“이리하여 사기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7년 뒤 태사공은 이릉의 화를 당하여
감옥에 갇혔다.
나는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몸은 망가져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구나!’라며
깊이 깊이 탄식했다.
그러나 물러나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155.
“그러니 제가 법에 굴복하여 죽임을 당한다 해도
아홉 마리 소에서 털 오라기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고,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도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세상은 절개를 위해 죽은 사람처럼 취급하기는 커녕
죄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죽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평소에 제가 해 놓은 것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습니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62.
“천한 노복이나 하녀도 얼마든지 자결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저 같은 사람이 왜 자결하지 못했겠습니까?
고통을 견디고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한 채
더러운 치욕을 마다치 않는 까닭은
제 마음 속에 다 드러내지 못한 그 무엇이 남아 있는데도
하잘 것 없이 세상에서 사라져 후세에
제 문장이 못 드러나면 어쩌나 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66.
전무후무한 글자수를 밝힌 최초의 서문 탄생 :
130편에 52만 6,500자의 저술 동기와 취지
사마천의 정신과 인욕을 압축해 넣은 고도의 압축 파일
태사공서의 정신적 명맥이자
경계와 한계를 뛰어넘은 문장의 격
* 후대의 훼손을 경계하다?
(저소손의 훼손과 현재 판본의 글자수 55만 5,660자)
174.
“지금까지 이렇게 작자 개인의 색채를 갖춘 역사서는 없었다.
사마천 자신의 생활 경험, 생활 배경이 있고, 자기 정감의 작용이 있고,
자신의 오장육부와 심장이 그 안에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과거와 현재를 포괄하는 역사서일 뿐만 아니라
사마천 자신의 기가 막힌 전기이기도 하다.(李長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