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deShare a Scribd company logo
1 of 277
Download to read offline
제1회 사라져가는 공장굴뚝, 탈산업도시 서울의 변신
- 1 -
한국의 고도경제성장을 이끈 핵심동력은 뭐니뭐니해도 제조업이었다. 근대공업은 일찍이
일제강점기때부터 발달했는데, 인구가 많아 노동력을 확보하기 좋고 철도의 중심지이기 했
던 서울이 단연 그 선두였다. 서울은 초창기 도심지역을 시작으로 하여 점차 왕십리, 청량
리, 영등포 등지로 공장을 확산시키며 공업도시로 발돋움했고 방직, 식료품, 인쇄 등을 중심
으로 각종 경공업이 발달하였다.
경제개발초기, 한국의 공업전략은 소비재공업의 수입대체산업화였고 이것이 차츰 수출중
심의 경공업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따라 섬유, 신발, 가발, 완구 등의 저임금에 바탕을 둔 노
동집약적 산업들이 우리의 주력 수출품목들이었다. 저렴한 노동력은 결국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하기에 서울 근교는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미 일제강점기
부터 공업화가 진행된 영등포를 시작으로 신도림, 구로, 부천, 부평으로 이어지는 경인선 철
도변을 따라 공장들이 세워졌다. 이로써 서울 남서부지역은 서울의 대표적인 공업지역이 되
었다.
1967년,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에 한국수출공단 제1단지가 들어섰는데, 당시로는 최초의
대규모 공업단지였다. 1972년에는 인근 가리봉동에 한국수출공단 제2단지가 조성되었고,
1976년에는 가리봉동은 물론 광명시 철산동 지역까지를 포함하여 한국수출공단 제3단지가
조성되었다. 주력업종은 섬유 외에도 봉제, 전자, 잡화 등지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 수출공
단의 고용인원은 1970년에 1만 명이었으나 1976년에는 10만 명을 넘었고, 한국의 수출실적
이 10억 달러를 돌파한 1971년에 구로공단의 실적은 1억 달러를, 100억 달러의 수출실적을
넘어선 1977년에 구로공단은 10억 달러를 돌파하였으니 구로공단은 한국수출산업의 선도적
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제복을 입은 여공들이 공장마당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운동을 하는 모습, 명절 때가 되면
고향의 가족들에게 줄 선물꾸러미를 들고 여공들이 공장인근의 버스정거장에 줄지어 서있던
모습들은 당시 구로구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었고 굴뚝이 우뚝 선 낮은 지붕의 공장건물들
도 서울 남서부 지역의 공장지대를 상징하는 경관이었다. 그들이 적은 봉급을 아껴가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속칭 ‘벌집’들도, 인간답게 살아보겠다며 벌였던 노동운동의 모습들
도 이 지역의 빼놓을 수 없는 풍경들이었다. 그들은 이 지역에서 정말 열심히 일하며 살았
고 그렇게 번 돈으로 고향에 송금을 하고, 동생들을 공부시켰다.
그러나 세상은 변해가고 있었다. 서울의 공장들은 농촌의 많은 인구를 빨아들였다. 일자리
가 넘치니 인구유입이 늘고, 인구유입의 증가는 각종 기능과 시설의 증가로 이어졌다. 서울
은 이미 과밀도시가 되었고 수도권은 정비의 대상이 되었다. 수요의 증가는 가격을 상승시
킨다는 경제학의 기본법칙에 따라 서울의 땅값과 임대료는 가파르게 올랐다. 서울의 공장들
이 지방으로 분산되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은 섬유 공업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저임금 중심의 경공업구조에서 서서히 탈피
해가고 있었다. 자동차, 기계, 조선 등 중화학공업으로 산업의 중심이 옮겨가고 있었다. 중화
학공업은 많은 원료를 해외에서 수입해야 하는 관계로 항구를 거느린 임해지역에서 발달하
고 있었다. 공업이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의 일반적 특성처럼 한국도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점차 커져갔다. 서울은 이 나라의 경제중심지이자, 점차 통합되는 세계경제에서도 나름 중요
한 거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당연히 서울은 금융, 도소매, 정보처리, 디자인, 법률 등의 생산
자 서비스산업의 입지를 필요로 하고 있었고 전통적인 제조업은 서울에게는 부담스러운 존
재로 변해갔다. 1990년대부터 눈부시게 발전한 IT산업은 생산자서비스 산업이 충분히 지원
되고 고학력의 전문인력이 많이 분포하며 도시기반시설과 생활환경이 양호한 대도시를 주요
- 2 -
입지장소로 선택하는 업종이었다.
오랜 개발독재체제가 서서히 후퇴하면서 이 땅에도 민주화가 찾아왔다. 노동자도 인간이
라는, 인간답게 살아보겠다는 노동자들의 외침은 결국 노동자들의 권리향상과 임금인상으로
이어졌다. 이제 저임금으로 제조업을 운영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후기산업사회 및 정보화사
회가 되면서 공업화에 따른 소득수준의 증가는 국민들의 생활환경과 여가시간에 대한 욕구
의 분출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소비문화의 확산, 웰빙생활에 대한 동경, 가치관의 변화에 따
라 새롭게 요구되는 장소들은 바로 대형할인마트나 전문상점, 각종체육시설, 공원, 문화시설
등이었다. 아파트의 뒤를 이은 고층주상복합이나 오피스텔도 수요가 급증했다.
결국 서울의, 그중에서도 구로, 가리봉, 신도림, 영등포 등지의 많은 공장들은 비싼 지가와
임금을 견디지 못하고 지방이나 해외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새롭게 요구되는 시설들의 입
지를 찾고 시민들의 높아진 환경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서울시와 오히려 공장들을 유
치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고 세수를 증대시키려는 지방도시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이 지역의 공장들은 하나둘씩 서울을 탈출했고 그 자리에는 벤처와 IT열풍에 힘입은 아파트
형공장과 테크노빌딩, 대형고급쇼핑몰, 주민들의 여가와 휴식을 위한 공원, 각종 예술공간,
대규모 아파트단지나 주상복합건물 등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모두 후기산업사회 및 정보
화사회의 생활문화에 필요한 장소들이다. 옛 공장과 굴뚝은 완전히 철거되는게 대부분이었
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새로운 용도에 맞게 리모델링되거나 과거의 흔적을 일부 남겨놓는 경
우도 있다.
특히 구로공단의 경우 완벽한 변신을 했다. 2000년에 구로공단을 구로디지털산업단지로
개명한 후 10년간 입주기업은 597개에서 10,025개로, 고용인원은 30,000여 명에서 124,000
명으로, 생산액은 3조 6천억 원에서 10조 원으로 급증했다. 업종 역시 과거의 섬유, 봉제,
단순조립 등에서 첨단, 지식, IT 등으로 혁신을 이루었다. 과거의 여공들의 모습 대신 이젠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차려입은 직원들이 노트북 가방을 매고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를 테이
크 아웃해가는 모습, 점심시간에 직원들이 건물 앞의 공원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 등
이 보편화되었다. 공장과 굴뚝, 담벼락밖에 없던 거리는 첨단산업의 이미지를 주는 유리벽의
투명한 아파트형 공장이나 벤처빌딩, 그리고 직원들이 이용하는 각종 상점들, 건물 앞의 소
공원들로 바뀌었다. 강남의 테헤란밸리에 비해 약 30-40%나 저렴한 임대료는 많은 테헤란
밸리의 벤처나 IT업체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이러한 ‘디지털도미노’는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가리봉동 일대의 옛 공단들도 변
경된 행정구역인 가산동에 맞추어 가산디지털산업단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옛 공단의 어둡
고 낙후된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공단과 관계된 지명들도 하나둘씩 바꾸고 있다. 지하철 구
로공단역이 2004년에 구로디지털산업단지역으로, 가리봉역이 2005년에 가산디지털산업단지
역으로 각각 바뀌었다. 공단로라는 도로명도 없어졌다. 주민들의 구성이 아파트중산층으로
바뀌면서 지역이미지 개선을 통한 주택가격의 상승을 바라는 움직임일 것이다.
신도림역 일대의 공장부지들은 이제 테크노빌딩과 대규모 아파트 및 주상복합단지, 쇼핑
몰 등으로 채워졌다. 문래동 일대의 영세금속공장과 철공소들은 아직 남아있으나 점차 아파
트와 주상복합건물에 밀리는 추세다. 영등포 일대의 옛 공장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대규모
공원과 주상복합건물, 벤처단지로 메워지고 있다.
옛 공장의 모습과 굴뚝들은 이제 점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제복 입은 여공들도 옛
사진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 남서부의 지역성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았
다. 전국의 산업단지 가운데 입주업체가 10,000개를 넘는 곳은 구로와 가산을 포함한 서울
- 3 -
▲ 구로디지털단지(위)와 구로공단(아래)의 모습. 구로구 일대는 가장 극적
으로 변신한 산업단지이다. (출처 : 뉴시스)
디지털산업단지가 유일하다고 한다. 오히려 새로운 업종과 구성원, 그리고 새로운 경관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뿐이며 여전히 서울의 주요 산업단지 역할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처럼 서울은 산업화 시대를 추억 속으로 보내며 탈산업시대 및 정보화 시대를 위한 변신
을 열심히 하고 있다.
다만 산업화시대에 이곳의 공단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땀과 눈물자국, 사연들이
극복되고 잊혀져야 할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것 같아서 조금 아쉽고, 그래서 기획중이라는
구로공단 산업박물관이 사뭇 기대되기도 한다. 지역성은 그리 빨리 변하는 것이 아니기에...
▲ 옛 구로공단의 담과 도로는 이처럼 넓고 쾌적하게 바뀌었다.
- 4 -
▲ 가산동의 옛 섬유공장건물들은 현재 의류 아울렛매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영등포의 옛 동양맥주공장이 1997년 경기도 이천으로 이전하면서 공장부지는 영등포공원이 되었
다. 영등포구는 이를 기념하여 동양맥주에서 사용하던 맥주제조시설을 공원 한가운데에 남겨놓았다.
1933년부터 사용하던 맥주제조시설이다.
▲ 문래동의 영세금속가공공장들은 아직 남아있으나 점차 아파트로 개발되고 있다.
- 5 -
▲ 신도림역 일대의 옛 기아자동차 출하장은 고층의 테크노마트건물로, 한국타이어공장은 대규모 아파
트단지로 변신했다.
▲ 금천구 가산동의 옛 인쇄공장은 서울시의 창작공간조성사업에 따라 금천예술공장으로 리모델링
되었다. 설치미술이나 실험예술을 전공하는 예술가나 창작인들에게 작업실로 임대된다. 과거 공단
지역으로의 문화예술전파에 기여할 것으로 서울시는 전망하고 있다.
▲ 옛 한국수출제2공단인 가리봉동과 한국수출3공단인 광명시를 연결하던 수출의 다리. 지금은 수도
권 전철 1호선 철로를 넘어 가산디지털단지의 아울렛매장과 경기도 광명시를 연결해주고 있다. 수
출의 다리란 명칭도 언제까지 남아있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제2회 천일염과 염전의 쇠퇴 그리고 부활
천일염과 염전의 쇠퇴 그리고 부활
세포의 기능을 유지시키고 혈액순환과 소화에 절대적으로 필요해 물만큼이나 우리 몸에
꼭 필요한 물질, 음식의 부패를 막고 맛을 내며 습기를 제거하고 치료에도 쓰이는 만능물질,
이것은? 바로 소금이다. 그리고 이런 소금을 만들어내던 소금밭은 바로 염전이다.
과거 소금은 생산량과 생산지역이 한정되어 있어서 값이 비쌌고 이 때문에 국가가 전매제
도로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우리나라의 서해안은 조선 시대 제염업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경기․충청지방의 경우 주요 중심지는 인천 일대, 남양만 일대, 안산, 강화, 서천, 남
포, 태안, 당진, 보령 등지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까지는 연료를 절약하고 생산량을 늘리는
방법, 즉 갯벌의 염전을 이용하여 바닷물을 농축시킨 후에 그 물을 벌막의 가마솥에서 끓이
는 방법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가마솥에서 바닷물이나 농축된 소금물을 끓여서 생산해 낸
소금은 자염 또는 전오염이라고 한다. 염전이 제공하는 이권은 의외로 커서 왕실이나 세도
가, 공신들이 염전을 사유화하기 위한 불법적인 행위를 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초에
엄격히 지켜진 어전과 소금가마의 사유화 금지 조치는 점차 후퇴하였다.
한편 1900년대 초반부터 중국 산둥지방으로부터 값싼 천일염이 대량으로 수입됨에 따라
전통적인 자염에서 천일제염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데 바닷물을 염전으로 끌어들여 가두
어 두고 수분을 증발시켜 소금이 침전되도록 하는 오늘날의 천일제염은 1907년에 인천의
주안에서 일본인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곳에서의 성과가 좋게 나타나자 염전개발은 강수량
이 적은 대동강 하구의 광량만과 그 밖의 서해안에서 급속히 진행되었다. 천일제염은 자연
에 크게 의존하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으로 서해안은 조차가 크고 간석지가 넓게 발달되어 있
는데다가 일조량이 많아 입지조건이 일본보다 훨씬 좋았다.
이러한 천일제염법은 서해안의 자연환경에 매우 적합했음은 물론 연료소비가 많아 값이
비싼 자염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경기만 일대는 해안선
이 복잡하고 섬이 많아 만의 입구를 막거나 섬을 연결하면 염전을 조성하기 좋았다. 또한
경기만으로 흘러드는 하천들은 모두 유로가 짧고 수량이 적은데, 이러한 조건이 오히려 염
전 발달에 유리했다. 왜냐하면 큰 하천에서는 많은 담수가 바다로 유입되며 해수의 염분농
도가 낮아서 천일제염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근에는 200-400m의 구릉성 산지가
해안에 인접해 있어 염전건설에 필요한 토석채취가 용이했다. 기온역시 높은 편이며 강수량
은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의 여러 지역과 비교하면 강수량이 적다.
따라서 총독부는 계획적으로 이러한 염전들을 더 많이 확대시켰고 그 중심지는 서해안이
었다. 인천 주안에서 시작된 염전은 1921년에 들어서면서 인천의 남동구 일대와 시흥의 군
자로, 1934년에는 시흥의 소래로 점차 확대되었다. 특히 인천에서 시흥으로 이어지는 지역
은 남한 제일의 천일염전지대라는 평판을 받았고 염전의 활성화로 인해 촌락이 발달하기도
하였다. 중국인 노동자도 많이 유입되어 중국인 마을도 생겨날 정도였다.
천일제염업의 운영은 1980년대 중반까지 비교적 순조로웠다. 수도권 서해안 지역의 도시
화가 많이 진행되었지만, 1986년의 경우 인천의 남동․소래지구와 시흥의 군자지구 등에서
아직 활발히 소금이 생산되고 있어서 이 지역의 염전만도 전국의 약 10.5%를 차지했다.
1987년의 염전분포를 보면 전남 46%, 경기 24%, 충남 22%, 전북 8%의 순이었다. 그러나
천일제염은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특성으로 인해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 인력부족으
로 사양화되기 시작했고, 정부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서 소금시장의 개방을 앞두고 보상금
을 지급하면서 폐전을 독려하였다. 공장에서 값싼 소금이 생산되고 수입산 소금이 국내시장
을 잠식하자 상대적으로 비싼 국산 천일염의 수요는 크게 하락했다.
폐염전들은 여러 가지 용도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인천의 남동산업단지와 시흥의 시화산
업단지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대규모의 염전이었던 남동염전과 군자염전에 들어선 공업단
지들이고, 이밖에 시화방조제의 축조로 없어진 염전도 많다. 공업단지조성이나 간척사업으로
인해 없어진 염전들도 있지만 화성 등지에 있던 일부 염전은 대하 양식장 또는 낚시터 등으
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대하는 잔잔한 물을 좋아하므로 해안선이 복잡한 서해안의 염전터
는 대하 양식장으로 매우 적합하였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소금을 공급해주던 염전들은 하나
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이제 염전들은 소수만이 남아 사진작가의 사진속에서나, 영화
의 배경장소로나 우리에게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다시금 염전과 천일염을 원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웰빙의 시대'가 열리면
서 좀더 비싼 값을 주고라도 더 나은 먹거리를 찾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자연에서 얻는
천일염과 공장에서 인공적으로 만드는 정제염과는 영양가나 품질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기에
소득수준이 높아진 국민들은 점차 천일염을 찾게 되었다. 더구나 소금은 한국인의 평생 먹
거리인 김치에 대량으로 들어가는 재료 아닌가. 특히 우리나라 서해안의 천일염은 유기물이
풍부한 세계적인 갯벌에서 생산되기에 품질이 우수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지방자치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역의 특성을 관광자원으로 삼기
시작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그 지역의 독특한 것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가 왔다.
서해안 지역들에게 염전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고유한 지역성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명
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탈산업사회 및 정보화사회를 맞이하며 교육의 철학도 달라졌다. 효율성을 최고의 미덕으
로 생각하고 지시사항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을 최고의 인재로 생각하던 산업사회의 암기식
교육의 폐단이 강조되었다. 대신 창의력과 주관, 그리고 체험을 중시하는 새로운 교육사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각급학교에서 체험활동이 강화되면서 주말이나 방학때 아이들을 데리고
국토의 여러 지역을 체험하는 부모들이 늘어났다. 소득수준의 향상과 여가시간의 확대로 관
광의 행태도 명승지나 유명관광지 중심의 기존 관광행태에서 체험과 테마 중심의 지속가능
한 관광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져가던 염전들은 이런 시대적 변화에 맞춰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모하거나 부활하고
있다. 경기도 시흥시 포동의 폐염전지역은 얼마전부터 갯골생태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났다. 이 지역은 1934년부터 1936년 사이에 염전이 조성되었으며 갯골을 중심으로 약
145만평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생산된 소금은 수인선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되
었다. 이곳의 염전은 인근의 인천 남동염전, 시흥의 군자염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소금 생산
량의 약 30%를 차지하였으나 천일염 수입자유화에 따른 채산성 악화로 1996년 7월 31일자
로 폐염전 처리되었다. 포동, 월곶동, 방산동 일대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 지역은 그
후 별다른 활용방안을 찾지 못한 채 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곳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폐염
전 활용방안이 점차 논의되기 시작하였고 염생식물은 물론 다른 생물들도 서식함이 밝혀지
면서 생태계의 복원이 가능해졌고 생태공원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염전도 일부 복원하
여 체험도 가능하다.
인천광역시 논현동의 소래염전도 소래습지생태공원이 되었다. 1933년에 염전으로 조성된
이곳은 인근에 소래철교와 소래포구가 있어 더 유명하다. 정부의 염전 구조조정 정책에 따
라 경쟁력을 상실한 이곳은 한동안 버려진 땅이었다. 그러던 중 버려진 폐염전 부지와 갯골
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염생습지들이 대규모로 형성되었고 이후 제2경인고속도로와 서해
안고속도로의 개통, 인천광역시 남동구의 시가지 확대 등으로 개발의 압력이 증가하였으나
과거 인천 특히 소래의 지역성을 간직하고 있는 폐염전을 보존하여 생태학습과 염전체험의
장으로 변모시킬 필요성을 제기하게 되었다.
원래는 폐염전 100만 여 평을 모두 생태습지공원으로 조성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인근 논
현동 일대에 대규모 택지가 조성되고 이 근처로 많은 교통로가 지나가게 되자 개발에 대한
욕구가 거세졌다. 결국 조성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인천시와 환경단체간의 지리한 협상과
공방 끝에 애초 계획부지의 약 60%가 삭감된 약 40여 만 평의 폐염전 부지에 습지생태공
원이 조성되기로 합의를 보았고 2009년 7월에 완공되었다. 습지생태공원 내에는 갯벌에 관
한 전시관이 있고 염전과 소금창고 등이 체험시설로 보존되고 있다. 그밖에 습지(염생․담수․
기수습지)와 갈대밭, 관찰데크, 갯벌체험장, 조류관찰대 등이 갖추어져 있다.
전북 부안군의 곰소염전은 곰소만 일대의 작은섬들을 연결한 간척사업으로 1930년대 중
반에 탄생한 염전이다. 곰소만 안쪽의 줄포항이 갯벌의 퇴적으로 어항의 구실을 하지 못하
자 곰소항이 새로운 곰소만의 어항으로 성장하면서 잡아온 수산물을 처리하는 소금공급지로
번영하였다. 곰소만 바닷물은 미네랄이 풍부하여 질좋은 소금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 염전의 규모가 크게 감소했지만 여전히 유명한 곰소젓갈에 들어가는 소금을 공
급하며 체험장으로도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의 태평염전은 '국가대표급' 염전이다. 면적으로 한국최대이면서 대
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염전이다. 1953년, 한국전쟁으로 인한 월남피난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당시 2개로 나뉘어있던 증도를 연결하면서 조성한 태평염전은 개발압력이
적은 호남의 해안지방인 탓에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 염전체험장
이 한쪽에 있어 2시간에 걸친 염전체험을 할 수 있으며 역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옛
소금창고를 리모델링한 소금박물관이 있어 소금과 염전에 대한 종합적 체험과 학습을 할 수
있는 장소로 많은 관광객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자연환경이 깨끗하고 전통문화가 잘 보전
된 지역을 뜻하는 슬로시티로 증도가 2007년 12월에 지정됨에 따라 증도의 염전은 다시금
전성기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유쾌한 천일염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은 설탕 없이는 살아도 소금 없이는 못산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묵묵히 성실히 일
하면서 그 조직이나 사회에 없어서는 안되는 사람을 가리켜 '소금같은 사람'이라고도 한다.
소금을 얻기 어려웠던 옛날, 염전은 지배층의 이권을 보장해주는 장소였고 약간의 소금을
얻기 위해 수많은 염부들의 땀과 시간이 바쳐진 곳이기도 했다. 바닷물을 끌어와 소금이 만
들어지기까지 대략 20여일이 걸리며 최종결정지의 바닷물조차도 하루 종일 염부들이 대파
로 밀어야 하얀 소금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한때 우리는 경제와 돈의 관점으로만 염전을 파악하고 쓸모없다며 버리거나 완전히 다른
장소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강이고 문화임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
다. 염전을 되살리고, 건강한 천일염을 다시 생산하며, 가볼만한 곳으로 만들고 있는 우리
모습이 그 증거 아닐까.
▲ 시흥갯골생태공원에서 수차를 돌리며 체험활동을 하는 모습
▲ 인천소래습지생태공원은 습지의 분위기가 나도록 풍차도 설치해놓았다.
▲ 주변의 개발과 도시화에도 소래염전을 보존하고 공원화한 점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 소래습지공원은 체험학습을 위해 소금생산과정의 내용을 잘 전시해놓았다.
▲ 태안의 태양광발전소는 태안반도 북부의 폐염전에 조성되었다. 햇빛을 받는다는 점에서 용도
는 변했으나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다.
▲ 신안군 증도의 한국최대규모 염전인 태평염전의 장쾌한 모습
▲ 증도 태평염전에서의 가족단위 체험모습
▲ 증도 태평염전에서 소금이 생산되는 모습. 아침일찍부터 작업해야 오후 늦은 시간에 저만큼의 소금
을 얻을 수 있다.
▲ 증도 염전 옆에는 신안 태양광발전소가 있다. 태양을 이용하는 장소라는 면에서 입지조건이 같다.
▲ 증도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옛 소금창고를 개조하여 소금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증도의 제일가는 특산물은 역시 천일염이다. 증도 특산물판매장의 모습.
▲ 부안 곰소염전은 근처의 곰소젓갈단지에 소금을 공급하고 있다. 멀리 젓갈상점들이 보인다.
제3회 워터프론트로 거듭나는 서해안의 옛 항만지역들
1876년의 강화도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고 열강들의 한반도 침략을 예고한 사건이었지
만 달리 생각하면 이땅에 근대문물이 들어오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했다. 강화도 조약에
따라 당시 조선 정부는 부산(1876)과 원산(1879), 그리고 인천(1883)을 차례로 개방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후 목포(1897)와 군산(1899) 등이 추가로 개항되었다. 일본과 서양의 근대문
물이 들어올 창구가 마련된 것이었다.
개항은 전통적인 포구의 모습과는 차원이 다른 큰 변화였다. 고깃배나 물건을 실은 황포
돛배들이 드나들고 상인들이 모여들던 옛 포구에서는 볼 수 없는 경관이 나타나기 시작했
다. 인천의 경우 1884년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仁川濟物浦各國租界章程)이 체결됨에 따라
일본과 청국을 비롯한 서양각국이 조계를 설치하고 영사관을 설치하였다. 조계지에는 관공
서는 물론 은행과 각종 상점, 종교건축물과 병원, 그리고 외국인 주거지까지 형성되면서 서
양의 도시시스템이 이 땅에 이식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국적인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각국 조계지를 중심으로 전기와 수도 등의 도시기반시설들이 도입되었고 통신 및 우편
제도가 실시되었다.
즉, 인천은 개항을 계기로 당시로서는 한반도의 최첨단 도시로 뛰어오른 셈이다. 바다에
면한 항구가 없던 서울의 외항 역할까지 하게 된 인천에는 당연히 더 많은 사람들과 화물들
이 모여들었고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자리 잡았다. 러일전쟁 후 당시 한반도에 개항된 8곳의
항구 가운데 인천이 44%의 무역점유율을 차지했음은 이를 충분히 증명한다고 하겠다. 특히
조차가 커서 큰 배가 들어오지 못하는 지형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1918년 갑문식 부두가
건설된 후 인천의 항만기능은 더욱 강화되어 각종 공장과 창고 및 해운시설, 관공서들이 들
어섰다.
인천은 경제개발시기에 공업지역으로 지정되면서 급성장했다. 인천항도 확장되면서 여러
개의 부두도 갖추었다. 그러나 수도권 전철망의 확충으로 서울과 가까운 부평 등이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경제성장과 냉전분위기에 따라 주요교역국가가 미국과 일본이 되면서
부산항에 독점적인 무역항의 자리를 내주었다. 인천공항의 건설과 고속도로망의 발달은 송
도국제도시와 남동구 지역을 또다른 인천의 중심지로 만들게 하였으며 인천항 근처의 구도
심과 옛 개항장 일대는 점차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군산은 1899년에 개항하였다. 군산의 배후지는 전북의 호남평야 일대와 금강유역의 논산
평야 일대로, 군산은 대일 쌀수출항으로 아주 적당한 위치였다. 또한 강경을 중심으로 한 금
강의 상권을 일본인들이 장악하기 위해서도 군산의 개항은 필수적이었다. 이에 따라 군산에
도 각국조계지가 들어섰으며 관공서와 일본계 은행 및 회사, 상점, 병원, 학교, 일본인 주택
들이 군산항 근처에 자리잡았다. 일본인들의 유입으로 1920년대에는 전국 11위의 도시로까
지 성장했다.
그러나 해방후 일본인의 철수와 대중국무역의 단절, 배후지의 취약한 공업화 등으로 군산
의 지위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국가의 발전축이 경부축으로 형성됨에 따라 중국을 바라보는
서해안의 군산은 경제적 기회를 별로 얻지 못하였다. 군산에는 합판, 양조 등의 경공업 일부
만이 발달했을 뿐이었다. 일본식 가옥이 군산에 많이 남아있는 것도 바로 군산의 개발로부
터의 소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목포는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네 번째로 개항된 도시이다. 1897년에 개항장이 들어섰고
인천과 마찬가지로 외국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군산처럼 목포도 배후지에 드넓은 영산
강변의 곡창지대를 거느리고 있어서 쌀수출항으로 번성했다. 특히 서울-목포간의 1번 국도
가 1911년에, 목포역을 종착역으로 하는 호남선 철도가 1914년에 개통되면서 목포는 단지
쌀수출항에 그치지 않고 일본자본의 내륙진출의 기지가 되기에 이르렀다. 목포에도 일본인
가옥과 각종 근대식 건물이 들어섰음은 물론이다. 쌀 이외에도 면화가 많이 반출되었고 일
본제품이 많이 수입되면서 목포는 1935년 당시 전국 6위의 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목포 역시 군산과 비슷한 경험을 겪어야 했다. 해방 후 일본인의 철수와 대일본무
역의 단절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군산과 마찬가지로 배후지는 공업화에서 소외된 농촌이었
고 목포의 산업은 양조, 수산물가공 등의 경공업이나 해운업에 그쳤다. 같은 서해안의 인천
이 서울의 외항이자 수도권의 공업도시로 성장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농업지역을 배후지로
거느리고 국가의 산업화 축에서 벗어난 군산과 목포의 운명은 비슷했다. 최근들어 군산은
새만금지구, 목포는 대불공단지구 및 영산강하굿둑 일대에 공업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항만
근처의 구도심은 여전히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국가발전의 거점이 수도권과 남동임해권으로 나뉘고 두 권역을 연결하는 경부축이 성장함
에 따라 서해안의 항구도시들은 점차 쇠락하고 있었으며 구도심의 부두근처에 있던 항만시
설들은 노후화된 도심을 상징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하였다. 일제강점기와 경제개발시기 이전
까지 번영을 누리던 항만근처의 구도심은 점차 활기를 잃어갔고, 이젠 용도조차 없어진 낡
은 건물들은 철거의 운명만 맞이하고 있었다. 더구나 일제의 잔재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쓰
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건물들과 풍경이 나름 대접받는 세상이 찾아왔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동시
에 진행된 지역화와 지방화의 물결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중시하고 이를 경쟁력으로 부각
시키는 분위기를 낳았다. 노후화된 옛 항만시설들은 지역성을 담보하는 훌륭한 문화유산이
되었고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시설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개념은 워터프론트(water front)이다. 워터프론트는 단지 수변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노후화 및 슬럼화한 도시의 임해부 또는 항만부를 대상으로
하여 어떤 종류의 재개발을 함으로써 지역의 환경정비와 활성화를 시도하고 나아가 도시를
재구조화하는 개념이다. 워터프론트의 개발은 지역의 지명도를 높일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
을 불러 모을 수 있다. 이는 서비스의 창출, 경제의 활성화, 인구의 정주성 확대, 나아가 지
방자치단체의 세수 및 투자의 증가로 이어진다.
워터프론트의 재개발은 세계적인 추세이며 특히 산업화시대에 조성한 항만부의 낙후를 경
험한 선진국일수록 더욱 적극적이다. 이러한 선진국 도시들의 과거 항만부가 낙후된 것은
화물수송의 변화와 산업의 재구조화이다. 즉, 소화물은 자동차 등의 육상교통으로 수송되고
대형화물은 컨테이너 선박으로 수송이 이루어지면서 신항만이 외곽에 새로 조성되었고 이에
따라 구항만 지역은 쇠퇴하게 되었다. 또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서비스업 중심으로 바
뀜에 따라 공장을 끼고 발달한 항만들은 점차 낙후지역으로 남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바다와 물은 우리에게 정서적인 마음의 편안함, 육체적 건강의 편안함, 지적 정신의 편안
함을 제공한다. 당연히 수변공간은 여가휴식의 공간으로 작용하게 된다. 워터프론트에서는
자연환경의 감상을 배경으로 다양한 문화 및 여가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시설이 노후화된 시설을 대체하거나 재활용하여 입지한다면 훌
륭한 도시문화공간이 되는 것이다.
인천은 옛 중국인거주지를 차이나타운으로 육성하여 인천의 대표적 관광지로 활성화시켰
다. 그리고 일본인거주지에 일본식 건물을 일부 복원하였고 옛 일본계 은행건물들을 박물관
이나 전시관으로 리모델링하였다. 그리고 개항장 일대의 근대건축물들을 연결하는 ‘근대역사
문화의 거리탐방’코스를 만들었다. 인천항 부두 근처의 옛 창고건물들을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한 인천 아트플랫폼도 눈여겨 볼만 하다. 해군부대가 있던 월미도를 돌려받아 도시자
연공원으로 꾸미고 인천항을 내려다보는 전망대를 만든 것도 워터프론트 사업의 일환이다.
차이나타운 뒤의 자유공원을 개항기처럼 각국(各國)공원으로 복원할 계획도 있다.
군산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남아있는 일본식 가옥을 문화재
로 지정하거나 시에서 매입하여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예정이다. 군산 역시 근대문화역사의
거리를 조성하고 있으며 옛 군산항 일대 근대건축물들을 전시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부두
일대를 해양테마공원으로 꾸몄고 뜬다리 부두나 부두 근처의 옛 철길들도 활용방안모색의
대상이다.
목포도 비슷한 움직임이다. 옛 일제강점기 건물이 전시관이나 문화원 등으로 사용되고 있
으며 일본식 가옥 중 일부는 카페 등으로 재활용되고 있다. 인천이나 군산에 비하면 움직임
은 느리지만 최근 목포골목길답사, 목포 근대역사거리 답사 등의 코스를 개발하면서 옛 항
만지역을 테마관광지로 꾸밀 계획을 갖고 있다. 일본인 관광객들도 제법 온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이런 움직임을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역사를 오히려 향수로
되살리는 것 아니냐며 분개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도 분명히 해당지역의 역사이며
오히려 역사의 교훈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젠 일제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만큼 우리의 국력이 높아지고 문화적으로도 성숙되었다는 점도 언급하고 싶다. 진정한 일제
의 극복은 무조건적인 외면과 역사지우기보다 지역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시작되
지 않을까?
▲ 인천 옛 개항장에 복원해놓은 일본인거리. 상점들이 입지해있다.
▲ 인천 차이나타운의 모습
▲ 인천개항박물관은 옛 인천개항장의 일본제1은행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 인천항 인근 옛 창고들은 인천아트플랫폼이라는 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했다.
▲ 군산 개항장에 있던 옛 군산세관건물. 현재 호남관세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군산시에서 제작한 근대역사문화탐방지도. 주요근대건축물과 그 내용을 보기 편하도록
이야기식으로 제작하였다.
▲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 군산항 근처의 옛 철길들은 새로운 활용방안을
모색중이다.
▲ 군산 옛 개항장의 일본인 가옥들. 이곳에는 일본인 가옥이 제법 많이 남아있다.
▲ 군산 옛 개항장 일대의 가로망. 반듯하고 넓은 직교식 가로망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 군산 진포해양테마공원에서 바라본 옛 군산항의 모습. 뜬다리부두가 있다. 새만금개발로 군산의
새항만이 비응도쪽으로 이전하는 중이어서 옛 군산항 일대의 워터프론트 개발이 불가피해졌다.
▲ 목포의 옛 개항장 일대에 있는 한 일본인 가옥은 얼마전부터 카페로 리모델링되어 목포의 명소
로 떠오르고 있다.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현재 목포근대역사전시관) 앞에 있다.
제4회 폐광의 아픔을 관광과 문화산업 육성으로 극복하는 탄광촌과 광산도시들
땔감과 숯을 뜻하는 신탄(薪炭)은 인류의 오랜 에너지 자원이었다. 영국의 환경정치학자인
클라이브 폰팅의 명저인 <녹색세계사>에는 인구 증가에 따라 유럽의 드넓은 원시림이 어떻
게 파괴되었는가를 잘 설명해 놓았다. 거주공간의 확보도 중요했지만 각종 동력수단으로, 그
리고 난방을 위해 신탄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만큼 삼림은 눈에 띄게 감소해갔다. 우리
나라 역시 울창한 숲이 땔감으로 베어져 나갔고 설상가상으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
치면서 더욱더 삼림은 파괴되었다.
한국전쟁 후 산업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고 산업시설이 복구되었다.
또한 산업철도가 조금씩 부설되면서 석탄개발의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박정희 정부는 산림녹화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일반 가정의 땔감사용을 대체할 자원으로 석
탄을 개발하면서 석탄생산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에너지소
비의 80% 가까이를 차지하던 신탄은 그 비중이 급격히 감소했고 1960년대 중반에 이르면
석탄의 비중은 50%에 육박했다. 한때 수요의 급증으로 인한 석탄가격의 급상승으로 석탄의
비중이 감소하기도 하였으나 1970년대 들어 벌어진 중동전쟁과 이란혁명 등으로 오일쇼크
가 발생하자 다시금 석탄은 전성시대를 맞이한다.
석탄의 수요가 항상 존재했고 생산이 끊이지 않는 호황이 계속되자 전국의 젊은이들이 일
자리를 얻기 위해 탄광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연탄업자들은 겨울철에 대비해 물량을 사전에
확보하기 위해 탄광에 상주하며 거래처를 확보하려 했다. 탄광지역에 돈이 돌면서 지역경제
는 탄탄해졌고, 탄광촌은 마침내 광산도시로 승격된다. 삼척군의 황지읍과 장성읍이 1981년
에 태백시로 통합승격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탄광촌에서는 광부들의 월급날, 개들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온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잿빛 가득한 분위기의 규칙적인 형태의 광부사택, 매일 아침 불안감을 안고 갱도로 출근
하는 광부들, 산더미처럼 가득 쌓인 석탄, 석탄을 가득 실은 탄차가 산업철도 위를 달리는
풍경 등이 탄광촌의 모습이었다. 갱도 붕괴의 뉴스가 가끔씩 들리기는 했어도 적어도 1970
년대까지는 탄광촌에 이처럼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1982년경부터 국제유가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석유가격의 하락은 국내 에너지소비
구조의 급변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다루기 쉽고 열효율도 높으며 연탄재나 연탄가스가 배출
되지 않는 석유를 더욱 선호하기 시작했다. 영세군소탄광의 난립, 심층매장에 따른 채굴의
고비용과 위험성, 석탄품질의 저하 등 국내 석탄생산의 구조적 문제점도 불거져 나왔다. 그
러면서도 석유가격은 계속 하락하고 안정세를 유지했고 국민들의 소득수준은 높아지면서 보
다 고급의 에너지를 찾게 되었다. 결국 정부는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을 1989년부터 실시하
였다. 경쟁력이 없는 탄광은 폐광을 유도하는 이 정책으로 1988년에 347곳이나 되었던 탄
광은 현재 10곳 미만으로 급감하게 되었다.
일자리가 없어진 탄광촌을 광부들이 떠나는 것은 당연하였다. 광부들이 떠나며 인구가 급
격히 줄자 다른 서비스업종들도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하면서 탄광촌은 지역경제가 마비되고
기본적인 생활유지도 어려운 동네로 전락해갔다. 이러다 탄광촌과 광산도시들이 유령도시로
변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대두되었다.
강원도의 태백·정선·영월·삼척, 충청남도의 보령, 경상북도의 문경 등지는 우리나라의 대표
적인 탄광지역이었고, 1980년대 후반부터 이들 지역은 앞서 말한바와 같은 심각한 문제점에
봉착하였다. 탄광이 문을 닫고 지역주민들인 광부들이 떠나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 지
역들은 많은 노력을 했다. 심지어 방사능폐기물처리장을 유치하려고 했던 지역도 있을 정도
였다. 그러나 대개 교통이 불편한 산촌이었던 만큼 대체산업이나 시설을 유치하기 쉽지 않
았다.
정선은 이러한 위기를 관광산업으로 극복한 대표적인 모범사례에 속한다. 많은 우려와 비
난을 무릅쓰고 고한읍에 카지노를 유치했다. 지역사회에 부정적인 기능을 하긴 했지만, 카지
노 유치는 세수의 증대와 교통의 발달을 가져왔다. 지역에 있던 옛 금광을 화암동굴이라고
하여 일종의 금광테마파크로 만들었다. 석탄을 실어나르던 정선선 철도의 약 7.4km구간에
레일바이크를 설치하고 레일바이크의 출발점에 옛 기차를 리모델링한 기차펜션을 마련하여
폭발적인 인기와 호응을 얻어내고 있다. 레일바이크는 일찍부터 예약하지 않으면 탈 수 없
을 정도이다.
지역의 전통도 관광상품화 하였다. 뗏목타고 나간 님을 그리워하는 정선아리랑의 고장답
게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이자 남한강 뗏목의 시작점인 여랑리 일대에 아우라지 관광지를 만
들어 뗏목체험을 할 수 있게 해놓았고 읍내에서는 5일장을 지속적으로 열어 서울서부터 기
차를 타고 찾아오는 유명한 철도관광상품으로 정착시켰다. 옛날 석탄을 실어나르던 철도가
이제는 관광철도의 구실을 하는 셈이다. 옛 산촌의 너와집 등의 전통가옥을 모아 아라리촌
이라는 숙박지역도 조성하였다.
많은 비난을 받았던 카지노도 주변에 스키장과 리조트를 추가로 조성하여 이젠 겨울철 종
합관광지로 자리잡았다. 해발고도가 높은 지형적 여건을 활용한 휴양림조성으로 여름철 고
원관광지로서의 기능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정선은 낙후된 지역의 부활의 사례로, 또한 노후화된 산업시설을 성공적으로 리모델링한
지역의 전형으로 충분히 꼽힐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대규모의 투자와 자연환경의 파괴만
이 아닌 아이디어와 발상의 전환, 지역성살리기 만으로도 충분한 관광지가 될 수 있음을 보
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정선 인근의 태백도 관광도시로의 전환으로 성공한 경우다. 폐광된 후 태백시에 기부채납
된 함태탄광을 탄광체험공원으로 꾸몄다. 옛 탄광촌 가옥들을 일부 복원하여 탄광촌의 모습
을 관광객들이 느낄 수 있게 했고 직접 갱도에도 들어가 볼 수 있게 했다. 우리나라 최대규
모의 석탄박물관도 조성해 놓아서 석탄관광지의 주요요건을 갖추었다. 철암동의 옛 탄광촌
과 탄광시설들을 그대로 보존하여 빌리지움(빌리지와 뮤지엄의 합성어)으로 꾸밀 계획도 진
행중이다. 여름이 서늘한 고원지대라 모기가 없다는 자연적 특징을 이용하여 '여름밤 쿨 시
네마 축제'도 개최한다. 탄광도시가 관광과 문화의 도시로 탈바꿈 한 것이다.
영월군 북면 마차리에도 옛 탄광촌 앞에 탄광문화촌이 조성되어 있다. 마차리의 탄광은
이미 1972년에 폐광되었고 지금은 옛 탄광사업소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탄광촌의 옛모습을
전시한 탄광문화촌이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끈다. 옛 탄광촌은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옛 풍경의 벽화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다.
충청남도 보령 역시 석탄박물관을 조성하였다. 보령의 탄광시설 재활용으로 특이한 것은
바로 냉풍욕장이다. 폐광된 옛 성주산 자락의 탄광이 지하 수백m아래에 있기 때문에 공기
의 대류에 의해 여름철에도 항상 12-14℃의 찬공기가 배출된다는 특징에 착안하여 여름철
냉풍욕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서늘한 바람을 이용해 버섯도 재배하고 버섯 음식점까지
인근에 생길 정도로 옛 탄광을 잘 활용하고 있다.
경상북도 문경도 탄광이 많던 가은읍 일대에 석탄박물관을 꾸몄다. 그리고 석탄을 실어나
르던 옛 문경선 철도의 일부를 레일바이크로 조성하였다. 구간은 진남역 주변의 왕복 4km
정도로, 정선의 레일바이크보다는 짧으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생긴 레일바이크라는 자
부심을 가지고 있다. 문경 역시 문경새재 옛길과 연계하여 경북 내륙의 관광도시로 도약할
예정이다.
한때는 탄광촌과 탄광시설들이 철거대상으로 거론된 적도 있었다. 잿빛의 을씨년스럽고
암울해 보이는 탄광시설과 마을들이 철거되거나 개발되었다면 산업화 시대의 우리 생활사,
탄가루를 마셔가며 석탄을 캤던 땀이 밴 지역사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칙칙하
기만 했던 옛 탄광지역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보고 다듬으니 훌륭한 관광지로, 우리의 지역
사를 돌이켜보는 좋은 역사공부소재로 재탄생함을 깨닫는다. 가난했던 시절, 시커멓기만 하
고 귀하게 보이지 않던 석탄이 사실 에너지자원의 수입대체와 산림녹화에 일등공신이었음을
이제 서야 알듯이 말이다.
▲정선레일바이크 : 가을철에는 수려한 단풍까지 감상할 수 있다.
▲ 화암동굴 : 폐광된 금광안에 일제강점기의 금채굴현장을 꾸며놓았다.
▲ 기차펜션 : 옛 전동차를 펜션으로 재활용한 것으로 시설도 매우 좋다.
▲ 정선 사북읍의 경관 : 정선의 대표적인 탄광지대였던 사북읍은 과거 탄광시설과 잿빛의 광산촌 뿐이었으나 최
근 관광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숙박시설이 많이 들어서는 등의 경관변화가 뚜렷하다.
▲ 태백체험공원 내에 복원된 옛 탄광촌 가옥들. 군대 막사같은 느낌을 준다.
▲ 태백체험공원은 옛 함태탄광을 바탕으로 꾸민 시설이다. 갱도안으로도 들어가 볼 수 있다.
▲ 영월군 마차리에는 옛 영월광업소 건물을 리모델링한 탄광문화촌이 조성되어 있다.
▲ 영월군 마차리의 옛 탄광촌은 석탄을 캐던 모습들의 벽화로 꾸며져 있어 지나가던 발길을 멈추게 한다.
▲ 영월군 마차리의 탄광문화촌 옆에 남아있는 옛날 광부들의 굴착연습 흔적. 굴착기로
바위에 구멍을 뚫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 폐광의 찬바람을 활용한 보령 냉풍욕장의 모습. 여름철임에도 관람객들이 추위를 느끼는 표정이다(출처:
인터넷 연합뉴스).
▲ 석탄을 실어나르던 문경선과 가은선이 만나던 역인 진남역. 현재는 문경 레일바이크의 매표소 역할을 한다.
제5회 근대화의 상징에서 낭만의 아이콘까지, 철도의 역정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상징으로 꼽히는 것으로 철도만한 것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산업
화가 진행되면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빠르게 대량으로 수송해야 하고 노동력이 과거보다
빠르게 이동해야 하는데, 이런 시대적 조건을 충족시켰던 당시의 교통수단은 바로 철도였다.
영국에서 시작된 철도는 산업화된 국가들을 거쳐 식민지에까지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 땅에 철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99년의 경인선이었다. 서울의 노량진에서 인천의 제
물포까지를 연결한 33.2km의 이 철도는 세계 최초인 영국철도보다 74년 늦은 것이었다. 종
전에 육로로 12시간 걸리던 거리가 1시간으로 단축되었으니 가히 교통혁명이라고 해도 틀
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 경인선에 기관차가 지나갈 때 많은 백성들이 철로변에 나와 구경을
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후 경부선(1905), 경의선(1906), 호남선(1914), 경원선(1914) 등이 놓이면서 한반도의 X
자형 철도망이 완성되었다. 해방 전까지 장항선(1931), 경춘선(1939), 중앙선(1942) 등의 주
요 철도들이 깔렸고 1950년대부터는 태백선(1956), 영동선(1963), 정선선(1974) 등이 석탄개
발을 위한 산업철도로 부설되었다. 충북선(1958), 경전선(1968) 등 남북방향의 철도들을 횡
으로 연결하는 철도들도 속속 개통되면서 한국의 철도망은 1960년대 말까지 거의 완성되었
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최고의 육상교통의 자리는 철도의 것이었다.
그러나 자동차의 등장과 도로교통의 발달은 철도의 쇠락을 예고하고 있었다. 1971년 철도
의 여객영업노선이 최고에 도달한 후 1972년에 수려선(수원-여주), 1980년에 진삼선(진주-삼
천포), 1989년에 안성선(천안-안성), 그리고 1995년에는 수인선(수원-인천)이 차례로 폐선되
었다. 한편으로는 기존 철도의 복선화 및 전철화사업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수도권의 경춘선
과 중앙선의 일부구간은 전철화되면서 서울의 생활권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선로 직선화 및
개량사업으로 일부 철길을 폐선시켰다. 결론적으로 승객이 많고 경쟁력이 있는 노선은 더욱
빠르고 효율적인 운송이 가능하도록 개량된 반면, 승객이 줄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노선은
철로 자체가 없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도시지역에서도 폐선되는 철로가 생겨났다. 도시가 커짐에 따라 과거에는 변두리에 있던
철로가 이제는 도심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따라서 도심부에 뻗어있어 도시발달과 성장을 저
해하는 일부 노선들의 경우 지하화하거나 도심 외곽으로 철로를 옮기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서울의 경의선 철길이 공항철도와 더불어 지하화작업에 들어갔고 광주의 경전선도 외곽으로
이전하였다.
폐선이 되면 레일과 침목은 뜯겨져 나갔다. 그러나 원래 철길을 놓기 위해 조성한 부지인
지라 철로의 흔적은 어렴풋이 남았다. 대개는 좁은 도로나 농로 등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
았다. 그러나 소득수준의 증가와 여가시간의 확대, 삶의 질을 추구하는 욕구의 확산으로 옛
철길과 폐선부지는 새로운 용도로 재활용되기 시작했다. 이젠 쓰지 않는다고 무작정 레일과
침목을 뜯어내는 일도 옛날이야기가 되기 시작했다.
협궤열차로 유명했던 수인선은 많은 여행객들에게 아쉬움을 던져주고 간 철길이었다. 일
반적인 철도보다 폭이 좁은 협궤열차였기에 수인선은 낭만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더 이상
타는 사람이 없는 철도의 운명은 낭만을 명분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웠다.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이 문을 닫고 협궤열차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자동차가 다니는 시대에는 더욱
그랬다.
폐선되고 한참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수인선은 최근 그 흔적과 역사를 조금아니마 지역에
남길 수 있었다. 수원시 세류동에는 2006년에 수인선세류공원이 조성되었다. 인천에서 출발
하여 수원에 도착하는 수인선의 끝머리이자 수원에서 여주로 이어지는 수여선의 시작지점이
기도 한 옛 철도구간 600여m의 폐선 부지를 공원화하면서 수인선공원으로 이름을 붙인 것
이다. 시민들이 자동차의 두려움 없이 마음껏 보행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든 점, 공원을 만들
면서 옛 철도의 역사를 살렸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안산시도 아직 철로가 남아있는 고잔역 일대에 수인선 테마공원을 만들었다. 옛 수인선
전동차 모형을 전시하고 철로주변에 꽃밭을 조성하여 추억과 낭만의 이미지를 연출하였다.
협궤철로를 뜯어내지 않아 과거 수인선의 역사를 증명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이고, 시민
들의 여가공간으로도 손색이 없다.
광주광역시는 도심을 지나던 경전선 철길이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생겨난 폐선 부지를 슬
기롭게 재활용한 사례로 꼽힌다. 8km나 되는 폐선 부지를 광주시측에서는 경전철 등으로
활용하려 했으나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호남 제1의 도시이자 한국의 6대 도시 중 하나
임에도 시민들의 녹지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시민들의 요구에 결국 시당국도 정책을 바
꿔야 했다. 이렇게 해서 옛 폐선부지는 2004년부터 숲으로 둘러싸인 그린웨이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그린웨이는 신호등의 제약이 최소화되어 보행자들이 마음껏 걷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보행자 전용로로서 선진국에서는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 광주시는 이 구간을 푸른
길 공원이라고 명명하였고, 도심녹지가 부족한 시민들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산책로가 생겨
난 셈이다.
서울은 경의선 철로를 그린웨이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경의선이 일산, 파주 등지로부터의
통근자들을 위해 복선화되면서 인천공항에서 서울역으로 이어지는 공항철도와 함께 지하화
되고 있다. 지하1층에는 경의선, 지하2층에는 공항철도가 통과하며 지상의 옛 경의선 부지
는 그린웨이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될 예정이다. 그린웨이는 용산 근처의 효창
동에서 가좌역 일대까지 만들어질 예정이다.
레일바이크는 주로 옛 산업철도가 지나가던 지역에서 많이 활용하는 철로재활용 방안이
다. 옛날 석탄을 실어 나르던 정선선(증산-구절), 문경선(점촌-문경) 등의 철로에 더 이상 석
탄을 실은 열차가 다니지 않게 되자, 일부 구간에 레일바이크를 설치하고 관광객을 유치하
게 되었다. 폐광으로 침체된 지역경제를 관광으로 부활시킴과 동시에 기존 철로를 철거하지
않고 재활용하는 성공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중앙선 철도의 전철화 및 직선화로 폐선된 양
평 원덕역에서 용문역까지의 3.2km 구간에도 레일바이크가 조성되었다.
폐선되는 철도구간이 점차 늘어나면서 구간 내에 위치한 간이역들의 운명도 기로에 서있
다. 간이역들은 완전히 폐선된 경우 텅빈 채로 방치되어 있거나 폐선을 앞두고 이용객이 급
격히 줄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 등으로 나뉜다. 등록문화재 정책 덕분에 일
부 간이역들의 경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철거는 면한 상태라는 점이 다행이기는 하다.
그러나 완전히 폐선된 간이역의 경우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어 관리상의 어려움이 크다.
관리만을 위한 지속적인 예산의 투입도 부담스러운 실정이다.
간이역에 대해서는 현재 재활용방안에 대해 한창 논의 및 연구 중이다. 간이역들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 철도의 초창기와 근대사를 증언하는 소중한 건축물들이다. 간이역의 건축양
식을 통해 일제강점기 근대화와 선진문명이 기차역 건축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린웨이로 조성되는 구간의 간이역의 경우, 걷기나 자전거타기를 즐기는 사
람들을 위한 카페나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역사를 간직한 소규모 전
시관이나 박물관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로교통이 발달하고 마이카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철도는 육상교통의 1인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기차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다녔고, 꿈을 이루기 위
해 노력했다. 서울에서 부산을 2시간 만에 간다는 고속철도가 등장해서 철도의 르네상스를
꿈꾸는 지금에도 아직도 많은 이들이 옛 철길과 간이역을 보면 반사적으로 낭만과 추억을
떠올리고, 그 철길을 걷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는건 옛 철길이 묵묵히 그 자리에서 너무도
많은 이들을 편리하게 날라다 주었음을 사람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떄문이 아닐런지.
▲ 옛 수인선에서 수려선으로 이어지던 철길의 폐선부지를 활용한 수인선 세류공원. 철길이 지나간
자리에 벽돌로 표시를 해놓아 지역의 역사를 알 수 있게 해놓았다.
▲ 안산 고잔역 근처의 수인선 테마공원. 수인선 협궤철로가 아직도 남아있고 주변에는 해바라기 밭
을 조성하여 시민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오른쪽 철로는 오이도로 가는 지하철 4호선이다.
▲ 수인선 테마공원에는 옛 협궤열차모형도 전시해 놓아 수인선의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해놓았다.
▲ 광주광역시의 푸른길 공원에 아직 남아있는 철도 신호등.
▲ 광주도심의 옛 경전선을 이전시킨후 그 부지에 조성한 푸른길공원은 남부지방의 상록활엽수림이
울창한 아름다운 숲길로 지역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서울의 경의선 구간을 지하화하고 지상에 그린웨이를 조성하기 위한 사업이 한창중인 동교동 일
대.
▲ 경의선 그린웨이 조성사업 계획도. 용산구청 근처에서 홍제천 인근 가좌역에 이어지는 보행자전용
녹지대가 탄생할 전망이다.
▲ 옛날 석탄을 실어나르던 정선선 일부 구간을 레일바이크로 재활용하는 모습.
▲ 경춘선 구간인 서울 공릉동의 화랑대역은 이용객수가 하루에 10명 이하로 급격히 줄면서 3-4차례
밖에 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역이 되었다. 이에 따라 과거 대합실은 시민들이 실비로 커피를 직접 타
마실 수 있도록 해놓았다. 등록문화재 300호로 지정되었고 서울에서 유일하게 기차를 탈 수 있는 간
이역이었으나 그마저도 경춘선이 완전히 복선화되면서 더 이상 기차가 서지 않는 역이 되었다.
▲ 전철화사업으로 폐선화된 경춘선의 성북역-구리 갈매역까지의 구간을 경춘선 공원으로 만들 전망
이다. 갤러리 등의 문화시설을 갖추고 나무를 더 많이 심어 쾌적한 숲길을 만들 계획이다. 화랑대역
등 보존할 만한 간이역들도 보존될 것이다.
제6회 간척의 대상이 아닌 소중한 땅으로 인식되어
우리나라는 신생대 3기의 비대칭적 융기로 인해 동쪽은 높고 서쪽은 완만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따라서 동해안으로 흐르는 하천은 경사가 급하고 짧아 상대적으로 무거운 모
래를 동해로 운반하여 대규모 모래해안을 형성시킨다. 반면 서해안은 해안선이 복잡하고 조
류의 흐름이 활발하여 상대적으로 입자가 가늘고 고운 점토를 퇴적시킨다. 서해안에 갯벌이
드넓게 펼쳐진 이유이다.
한반도의 갯벌 넓이는 약 5,300㎢정도로 이중 남한이 2,550㎢를, 북한이 2,670㎢정도를 차
지하고 있다. 한반도의 갯벌은 이미 유럽의 북해연안, 중국의 황하 하구 일대, 브라질의 아
마존 하구 일대, 캐나다 동부 해안과 더불어 세계 5대 갯벌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네덜란
드, 독일, 덴마크에 걸친 북해 연안의 전체 갯벌이 9,000㎢인 것에 비하면 한반도의 갯벌이
얼마나 대규모이며 풍요로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갯벌 가운데 80%가 넘는 1,980㎢의 갯벌이 서해안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예
로부터 서해안 일대는 갯벌의 활용에 대한 관심이 집중된 곳이었다. 원나라의 고려침략기에
고려정부는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했다. 말은 갯벌에서 힘을 못쓰니 당시 세계최강 몽골의
기마병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고려정부는 강화도 일대의 갯벌을 간척하여 몽
골침략의 비상사태를 극복하려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인구의 증가와 농업생산력의 발달로 토지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서
해안의 갯벌에 대한 이권쟁탈이 치열해졌다. 서해안의 갯벌은 간척을 통해 농경지를 늘리기
에 안성맞춤이었고 어살이나 독살 등의 전통적 장치를 설치해 고기를 잡기도 좋았다. 또한
염전을 설치해 운영해도 막대한 이익을 건질 수 있었다. 따라서 갯벌의 소유나 간척권을 둘
러싸고 왕실의 종친들과 세도가의 권력자들끼리 치열한 다툼을 벌이기 일쑤였다. 특히 한양
과 가까운 경기만 일대의 서해안에 이들은 눈독을 들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오면서 갯벌은 본격적인 간척의 대상이 된다. 당시만 해도 식량부족에
허덕이던 일본은 한반도 서해안을 간척하여 쌀을 확보하고 일본의 농업이민도 적극적으로
꾀하게 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전북 김제․군산․고창 등지와 전남 함평․영암 등 호남의 서
해안 일대가 관심지역이었고 많은 간척지가 생겨났다. 충남 당진․아산․서산․홍성 등지에서도
간척이 이루어졌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갯벌은 이제 대규모 간척사업의 대상이 된다. 식량자급이 지상과제
였던 산업화 시기 갯벌은 드넓은 농토를 만들어내는 '도깨비 방망이'였다. 간척사업을 통한
농토의 확장이 쌀의 증산과 자급에 큰 기여를 하였음은 물론이다. 지속적인 간척으로 당진․
해남․서산 등지가 논면적이 넓은 지역으로 떠올랐다.
갯벌을 간척한 땅은 농토로만 쓰이지 않았다. 바다를 끼고 있는 간척지는 원료를 수입하
고 제품을 수출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산업단지를 만들기에 매력적인 장소였다. 국토균형발
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그동안 산업화가 지체되었던 서해안 지방의 갯벌을
간척할 필요성은 높아졌다. 인구집중이 급격히 이루어진 수도권의 서해안에는 대규모 아파
트 단지나 신도시도 들어섰다.
갯벌을 매립한 간척지는 점점 만능이 되어갔다. 이미 세계적인 공항으로 발돋움한 인천국
제공항도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의 갯벌을 매립하여 조성된 곳이다. 21세기 동북아시아의 비
즈니스 중심지를 지향하는 인천의 송도 정보화신도시도 갯벌이 아니었다면 세상의 빛을 볼
수 었었을 것이다. 심지어 서울과 수도권 주민들이 버리는 쓰레기를 매립하는 수도권 매립
지도 갯벌을 매립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갯벌은 그동안 우리에게 간척의 대상으로 여겨졌고 너무나도 다양한 용도로, 요긴
하게 쓰여졌다. 그만큼 갯벌은 점점 사라져 갔다. 갯벌은 간척 이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땅으로 여겨졌다. 이미 우리가 이런저런 이유로 '없앤' 갯벌은 우리나라 갯벌의 40%에 달한
다고 할 정도였다.
이러다 우리나라의 갯벌이 다 사라져가는 건 아닐까...걱정과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짐과
동시에 갯벌의 가치와 효용에 대한 다른 시각의 연구가 쏟아지면서 갯벌에 대한 인식이 달
라지고 보전 움직임이 활발해진다. 즉, 갯벌은 쓸모없는 검은 땅이 아니라 생태계의 보고이
며 해양오염을 완화시켜주는 바다의 콩팥, 스펀지 기능을 한다는 점이 알려지게 되면서 본
격적인 보전운동이 벌어진다. 나아가 갯벌은 보전 그 자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여러 가지
목적과 용도로 재활용되고 있다.
기존의 주입식 교육이 아닌 창의력을 중시하는 구성주의 교육․열린 교육․수요자 중심교육
이 교육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부상하고 있다. 즉,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고 있고, 이에
따라 학습자 중심 교육, 다양하고 창의적인 사고 평가 등으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
서 체험학습의 필요성이 절실해지고 있으며 그 비중이 과거에 비해 크게 강화되고 있다. 갯
벌은 이러한 변화되는 교육목표에 아주 부합되는 체험학습장소이다. 학생들은 갯벌을 밟아
보고 느껴보고 갯벌의 생물을 관찰하면서 갯벌의 가치를 깨닫는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강
화도의 갯벌에는 갯벌센터가 만들어져 갯벌 체험과 동시에 갯벌에 대한 전시 및 교육의 역
할도 담당하고 있다.
갯벌은 공원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독일처럼 갯벌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갯벌과 습지를 생태공원으로 활용하는 곳들이 생겨나고 있다. 안산의 갈대습지공
원은 시화호 조성에 따른 수질오염을 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습지생태공원이다. 안산
시민들에게는 좋은 휴식처이자 시화호 수질개선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인천의 수도권 매
립지는 갯벌을 매립하여 쓰레기를 매립해왔지만 이를 흙과 숲으로 덮으면서 드림파크라는
거대 공원으로 변신하고 있다. 시흥은 갯벌과 폐염전 등을 활용한 갯골생태공원을 만들었고
인천도 비슷한 성격의 소래습지생태공원을 만들어 수도권 학생들의 자연학습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서해안의 그 밖의 여러 지역에서도 현재 갯벌생태공원 조성이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심미적인 가치의 변화도 갯벌의 용도를 변모시키고 있다. 서해안의 낙조나 철새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갯벌의 경관에 대한 관심과 호감이 날로 높아지고 있고 영화나 드라마, 다큐
멘터리 같은 영상물에서 갯벌을 비중 있게 다룸에 따라 앞으로 갯벌을 관광지로 인식하는
문화는 더욱 강해질 전망이다. 갯벌을 바라보고 그 주변을 거니는 것 자체가 좋은 생태관광
의 하나이며 갯벌에서 자연을 체험하는 친환경적인 축제도 개최된다.
충남 서산의 천수만 갯벌에서는 해마다 겨울이면 천수만의 갯벌로 날아오는 철새를 관찰
하는 철새축제가 열리며 전남 신안에서는 갯벌축제도 열린다. 충남 보령에서는 갯벌의 흙을
이용한 머드축제가 매년 여름 인기리에 개최되고 있으며 머드목욕을 상시적으로 할 수 있는
머드체험관도 마련되었다. 머드는 화장품, 비누 등을 제조하는 원료로도 쓰여 갯벌이 산업소
재로 까지 이용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갯벌은 넉넉하고 푸짐한 수산물을 품고 있고 생태계와 환경보전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온 국토의 소중한 일부였다. 하지만, 거무튀튀하고 쓸모없는 땅으로 인식되어왔기에 간척의
대상으로 여겨졌고 비좁은 국토에 대한 대안으로 꾸준히 간척되어왔다. 갯벌이 희생되면서
만들어진 땅은 우리의 식량자급과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교통의 발달에 큰 기여를 하였음
은 말할 것도 없다. 어찌 보면 갯벌이야말로 한국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는데 기여한 일등
▲ 김홍도의 그림 <어살>. 김홍도는 안산출신으
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이런 그림을 그린 것도 서
해안의 어살을 많이 보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
다. 그림과 같이 대나무를 설치하여 조류의 흐름
에 따라 이동하는 고기를 잡는 장치이다.
공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좀 신중해져야하지 않을까. 갯벌을 메우고 없애야 할 정도로 우리가 다급
하고 쪼들리는 단계는 분명히 아닌 만큼 갯벌 자체에도 무한한 생명과 존재이유가 있음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갯벌로 그동안 많은 이익을 보았고 갯벌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했던
만큼 이제는 갯벌에게 휴식을 좀 주어야하지 않을까. 갯벌 그 자체가 더 많은 이익과 경쟁
력을 가져다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리고 갯벌도 엄연한 우리 국토의 자산이자 특징이니까.
▲ 갯벌은 그동안 여러 가지 용도로 간척되어 사라졌다. 갯벌의 간척으로 농경지가
넓어진 김제는 지평선의 고장으로 불린다(상). 조성중인 송도국제도시는 인천의 갯
벌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다(중). 공업 위성도시 안산의 공단은 갯벌이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 서해안의 갯벌은 낙조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며 관광지로서의 재
조명을 받고 있다(안산 대부도 일대).
▲ 갯벌은 최근 훌륭한 자연체험학습장으로 이용되고 있다(인천 소래습지생태공
원).
▲ 전남 신안의 증도갯벌에서는 갯벌축제가 열린다.
▲ 안산갈대습지공원은 시화호의 수질개선과 휴식 공간 제공을 위해 조성
한 인공 습지와 갯벌이다.
▲ 인천의 수도권매립지는 갯벌을 간척하여 폐기물을 매립하는 곳이지만 최
근 흙과 식생으로 덮어 공원화하고 있다.
▲ 서산 천수만 일대에서 열리는 철새 기행전에 날아든 철새들의 군무(서산
천수만 철새기행전 홈페이지)
▲ 보령머드축제의 포스터
제7회 한적한 포구에서 종합관광지로 변모하는 어촌들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수산업이 발달하였다. 바다로부터 생선과 소금, 젓갈
등을 얻어왔고 이들은 우리 식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식량자원이었다. 이러다보니
고깃배가 드나드는 포구나 염전이 분포하는 곳들을 중심으로 어촌이 자리 잡게 되었다. 많
은 배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큰 포구도 있었지만 대체로 우리나라의 어촌은 작은 규모였고,
어업과 농업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어업에 대한 이권이 강화되면서 어장이나 염전 등에 대한 권력층의 개
입과 사유화가 심해졌다. 어민들에 대한 부당과세가 가혹해지면서 어민들의 유망이나 어업
의 포기현상이 나타났고 이는 한때 어촌과 수산업 발달에 악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하지
만 어업은 그럼에도 점차 활성화되었고 고기가 많이 잡히는 해역에서는 대규모 파시가 형성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어업과 어촌의 변화 계기가 마련되었다. 개항 이
후 통상협정을 통해 청국과 일본에게 한반도 주변 해역의 어업권을 인정해 줌에 따라 우리
어민들은 재래식 어구와 소규모 어선으로 청국 및 일본 어민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항상 위기는 기회가 되는 법이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식 어구와 어법
의 도입, 주변국가의 경쟁 등으로 재래식 수산업을 근대적인 수산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동력선이 늘어나고 어망 중심으로 어업이 발달하자 어획량이 증가하고 포구의 기능도 더
욱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어촌이 활성화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대체로 얕은 수심과 겨
울철 수온 저하로 남해안이나 동해안에 비해 서해안의 어업발달이 불리하였고 이는 어촌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서해안의 천일제염업은 이런 점을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산업화와 고도성장의 시기에 어촌 뿐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촌락에서 나타난 현상이기는
하지만,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어촌은 급격한 인구감소를 경험한다. 더구나 어업의 환경도 점
점 어려워져 갔다. 국토의 면적을 넓히고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루어야 한다는 명분 하에 간
척사업이 꾸준히 진행되었고 수출중심의 경제개발전략에 따라 해안지역에 대규모 공업단지
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바다 및 갯벌면적의 감소와 공업화로 인한 환경오염은 어업과 어
촌의 쇠퇴를 가져왔다.
어업의 발달이 도리어 쇠퇴를 가져오는 역설적인 상황도 벌어졌다. 점차 동력선이 늘어나
고 어선이 대형화되었으며 어망이 현대화된 것은 분명 수산업이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이지
만, 이로 인해 수산자원의 남획이 무차별적으로 발생했다. 쌍끌이 어선을 통한 대량포획은
수산자원의 씨를 말리는 일이었고 이는 어촌과 어업의 침체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더구나 세계 각국이 200해리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선포함에 따라 어업구역은 더욱
좁아졌다. 우리나라는 같은 해역에 걸친 중국, 일본과 제각각 어업협정을 맺어 어업가능구역
을 설정해야했다. 또한 수입개방으로 인한 값싼 외국 수산물의 유입도 수산업의 기반을 위
태롭게 했다. 어업은 이제 거의 사양산업으로 전락해갔고 많은 사람들은 어촌을 떠날 수 밖
에 없었다.
이러한 어촌의 어려운 상황에 숨통을 틔워준 것은 바로 관광산업의 발달이다.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승용차의 보급이 급증하고 주5일 근무제의 시행으로 여가시간이 대폭 증가했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건설과 전국의 주요국도의 4차선 확장 등은 해안지방, 특히 해안선의 길
이가 길고 복잡한 서해안과 남해안 지방에 대한 접근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서해안을 중심
으로 펼쳐졌던 대규모의 간척사업은 해안선을 직선화시켰고 방조제들은 교통로 구실을 하면
서 해안지방에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들었다.
물은 인간의 마음을 여유있고 평화롭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수변공간을 의미하는
워터프론트(water front)는 소득수준이 높고 여가시간이 긴 선진국일수록 관광여가공간으로
선호되는 경향이 뚜렷하다. 앞서 말한 조건이 어느 정도 국토에 충족되던 2000년대부터 어
촌은 새로운 관광대상지역으로 변모한다. 사람들은 주말에 차를 몰고 교통이 좋으며 경치가
멋진 바닷가 마을로 찾아가기 시작했다. 도착해서는 바다의 경치를 감상하고 낚시를 하거나
갯벌체험도 한다. 음식점에 들어가 회나 조개구이, 바지락칼국수를 먹는다. 바닷가 카페에서
차를 한 잔 하기도 한다. 그리고 바닷가의 전망 좋고 예쁜 펜션이나 리조트에서 숙박을 한
다. 잡는 어업에서 양식업 등의 기르는 어업으로 전환됨에 따라 생선회와 같은 음식은 많이
대중화 되었다.
인터넷의 보급은 관광어촌의 활성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규모의 작은 어촌들이 자
신들의 마을을 홍보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다녀간 사람들이 인터넷의 블로그 등에 글
과 사진을 올리면서 순식간에 유명관광지로 부각되는 마을들이 늘어갔다. 마을들도 홈페이
지 등을 통해 홍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해양수산부의 어촌 및 바다관광 운동
도 한몫했다.
이러다보니 어촌에는 숙박단지와 음식점 거리, 수산물 판매장과 같은 시설이 입지하게 된
다. 마을 주민들 가운데는 자신의 집을 리모델링하여 민박집을 운영하거나 횟집을 차리기도
한다. 쓸쓸하기만 하던 한적한 어촌들은 관광어촌으로 새롭게 변신한다. 한편 어촌들도 마을
의 독특한 어촌관광 프로그램을 마련하면서 관광객 유치에 나선다.
원래 마을의 수산자원을 공동 관리하면서 지속가능하도록 보존하는 역할을 하던 어촌계는
이제 관광객들의 갯벌체험을 관리하는 조직의 역할도 수행한다. 갯벌이 넓은 서해안 지역의
어촌들은 갯벌 체험장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안산의 대부도 종현마을의 경우 수도권 도
시들과 가깝다는 장점을 살려 갯벌체험에 각종 레포츠 활동까지 결합한 종합어촌체험마을로
부상하고 있다. 강화도의 여차리와 장화리 등지도 갯벌체험으로 유명하다. 충남 태안반도 일
대에도 독살이나 자염 등의 어촌문화 체험마을들이 여럿 분포한다.
아름다운 경관을 테마로 하여 관광어촌으로 부상한 곳도 있다. 당진의 왜목마을은 지형적
인 특성으로 인해 서해안의 어촌임에도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마을로 유명하다.
강화도의 장화리는 낙조마을로 명성이 높다. 동해안에는 신년 무렵의 해돋이를 테마로 한
마을들이 분포한다.
수산물을 먹거나 구입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어촌들도 있다. 인천의 소래포구는 원래 인천
항의 부두건설로 인해 옮겨온 작은 어항이었다. 그러나 이젠 수도권의 대표적인 수산물 시
장이자 관광어촌으로 성장했다. 과거 수인선이 폐선되기 전에는 협궤열차로 찾아가는 낭만
의 장소였고 폐선된 지금도 수산물을 구입하려는 사람들과 추억의 나들이를 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더구나 근처에 습지생태공원이 생기면서 연계관광코스로 거듭나고 있다. 시흥의 오
이도는 간척사업으로 육지와 연결되었는데, 지하철 4호선의 연장과 시화방조제의 연결 등
교통망의 발달로 인해 대규모 수산시장으로 발돋움했다. 홍성의 남당항도 서해안 고속도로
의 개통으로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게 되었다.
지역과 관계없는 색다른 테마로 유명해진 곳들도 있다. 강원도 강릉해변에는 바리스타들
이 운영하는 카페들이 마을을 이루어 성업 중이다. 강릉은 원래 커피와 관계없는 곳이지만,
우리나라 바리스타 1세대들이 강릉으로 커피점을 옮기면서 커피의 도시로 탈바꿈한 곳이다.
강릉에서는 매년 가을에 커피축제까지 개최한다. 강릉의 정동진은 드라마 촬영지로 이용되
면서 전국적인 관광지가 된 마을이다. 통영의 동피랑 마을은 노후화된 주택들이 모여 있는
▲ 수도권의 대표적인 어촌체험마을로 발전한 안산 대부도 종현마을
의 어촌체험 안내판
달동네였으나 공공미술프로젝트에 따른 벽화그리기를 통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남해안
의 명소가 된 곳이다.
몇년 전 <포구기행>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적이 있다. 물론 책 관련 방송 프로
그램에 소개된 계기가 결정적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작은 어촌에 대한 그리움
이나 호감이 그만큼 컸던 것이 반영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어촌은 황폐화되고 쓸쓸
한 낙후지역이 아니라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을 받아줄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으로 변모한
다는 느낌이다. 환경만 잘 관리한다면 어촌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장소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 서해안임에도 일출을 볼 수 있어 이색테마관광어촌으로
떠오른 당진 왜목마을의 일출
▲ 수도권의 대표적인 관광어촌이자 수산물시장인 인천 소래포구
▲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해진 강릉 정동진 해변
▲ 벽화를 통해 아름다운 어촌마을로 되살아난 통영의
동피랑마을
▲ 경북 포항의 구룡포는 어업기지이자 관광어촌이기도 하다. 최근 구
룡포는 남아있는 일본인 가옥거리를 역사관광거리로 조성하고 있다.
제8회 도시의 발전을 가로막던 장벽에서 도시의 멋으로 승화한 옛 성곽
우리나라의 도시들은 크게 보면 중국의 옛 고전인 <주례(周禮)>에 나오는 도성의 배치원
리와 풍수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중국 주나라의 관직제도와 전국시대 각국
의 제도를 기록한 책인 <주례>의 고공기(考工記)에는 궁궐을 기준으로 하여 남쪽을 바라보
았을때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의 원리로 배치하고 도읍은 방형의 성곽으로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즉 궁궐의 서쪽에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 동쪽에는 조상의 묘가 들어
서고 궁궐의 남쪽에는 관청이, 북쪽에는 시장이 들어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읍지를
성벽으로 둘러쌓아 경계로 삼고 방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풍수사상에 따라 궁궐은 주산의
아래에 자리 잡고 앞으로는 하천과 평야를 두었다. <주례>의 고공기는 이후 가장 이상적인
도성계획의 원리로 여겨졌고,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 등 동북아시아 지역의 도성건설
과 계획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도읍지나 지방의 읍치와 같은 우리나라 전통도시들은 자형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방식으로 도시구조가 형성되었고 돌을 쌓아 만든 성벽이 도시를 둘러싸게 되었다.
또한 방어상 중요한 요충지인 도시주변의 산에 산성이 들어선 곳도 많았다. 기본적으로 우
리나라는 산이 많은 나라이고, 전통적으로 강한 외적의 침략을 받으면 산성에 방어선을 구
축하고 외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전술로 맞섰기 때문이다.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한 적
군은 우리땅 깊숙이 진격하기 어려웠다.
도시를 둘러싼 성곽은 평지와 산의 능선을 연결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도시들이 풍
수사상의 원리에 따라 주산과 조산 그리고 좌청룡과 우백호 사이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서
양의 성곽도시들이 대체로 평지만을 둘러싸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경관인 셈이다. 도시의
주변산지와 평지를 연결한 성곽의 풍경은 마치 성벽이 물결치듯 멋진 모습이었다.
산성의 경우는 포곡식과 테뫼식 산성으로 나뉜다. 포곡식 산성은 능선을 연결하여 골짜기
를 둘러싸는 형태이다. 범위가 넓어지기에 장기전에 유리하고 골짜기를 포함하기에 물을 얻
기 쉬웠다.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등 규모가 큰 산성들은 대부분 포곡식으로 축조된 것들이
다. 반면 테뫼식 산성은 산의 정상부분을 둘러싼 것으로 대체로 규모가 작아 적에게 노출되
는 공간이 적은 장점이 있다. 테뫼식 산성은 주로 역사가 오래된 것들이 많으며 테뫼식에서
점차 포곡식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
성곽은 방어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시설이었다. 삼국시대에 벌어졌던 치열한 3국의 대결은
결국 성곽 뺏기의 과정이었다.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군이 쳐들어왔을때 고구려군은
이른바 청야수성(淸野守城-들판을 비우고 산성을 지킴)의 작전으로 슬기롭게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해안지방에는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견고한 읍성들이 세워졌고 광해군과 숙
종은 북방세력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성곽의 신축과 보수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국왕들로
기록되었다. 심지어는 서양열강의 군사력을 막을 수 없는 방어시설임에도 흥선대원군은 해
안지방의 성곽과 돈대 등을 꼼꼼히 점검하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화약의 보급으로 중세유럽의 높고 튼튼한 성벽들이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되었듯
이, 이 땅을 위협한 서양열강의 근대식 화력을 우리 전통성곽들이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프랑스 군대를 막으면서 기세를 올렸던 강화도의 성곽들은 결국 서양열강의 군사력을 당해
내지 못했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지켜낸 서울성곽은 일본의 국권침탈을 막아내기는커녕 전
차로의 부설과 인구증가에 따른 도시계획의 명분으로 무참하게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서양문물이 도입되고 전차와 같은 근대적 교통수단이 등장하면서 그리고 도시인구가 증가
하면서 성곽은 마을과 도시를 지켜주던 고마운 방어시설에서 도시의 발전을 방해하는 애물
단지로 전락하였다. 더구나 성곽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보수해주어야 할 조선의 국가시스
템이 멸망하자 한번 허물어지거나 망가진 성벽은 점차 폐허로 변해갔다. 넓은 도로를 내거
나 전차를 개통하려면 성벽을 헐어야 했고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할 주택지를 개발하고 도시
의 영역을 확장하는데 성벽은 장애물에 불과했다. 망한 나라의 옛 성곽과 성벽은 저개발의
상징이 되었으며 지역의 침체와 퇴락의 분위기를 더욱 가속화할 뿐이었다.
산업화 이후 엄청나게 많은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진
다. 산업화된 현대도시에 옛 성곽이 차지할 자리는 없었다. 성벽은 더욱 훼손되었고 운좋게
살아남은 옛 성문은 자동차의 홍수 속에 외롭게 떠있는 섬과도 같았다. 남북이 대치했던 냉
전시대에 산성은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철조망에 갇혀버리기도 했다. 개발이 덜했던 지방 소
도시들의 경우 성곽이 보존되기는 하였으나 아무 기능도 못하는 빈공간이 되었다. 음식점이
산성 안에 모여 있는 경우는 그나마 사람들이 많이 찾았으나 바람직한 보존과는 거리가 멀
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성곽과 성벽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다.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역사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우리 성곽에 대한 새로운 시선들이 탄생했다.
수원의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2002년 월드컵 일부경기가 수원에서 치뤄지면서
우리 성곽의 관광적 가치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관광행태의 변화와 삶의 질에 대한 욕구도 성곽을 다시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명한
기존의 대중관광지 대신 테마가 있는 장소를 찬찬히 둘러보는 답사문화가 형성되면서 성곽
이나 산성은 매력적인 장소가 된다. 성곽에는 수많은 역사적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말이다.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건강을 챙기는 이른바 ‘웰빙열풍’과 ‘걷기열풍’은 많은 사람들을 등산
의 길로 인도했으며 일정한 구간에 걸쳐 둘러쳐진 성곽은 훌륭한 걷기장소가 된다.
지방자치제도의 실시 역시 성곽재발견에 기폭제가 되었다. 자신의 지역들을 찾아오고 싶
어하는 매력적인 장소, 테마가 있는 장소로 만들어야 지역의 홍보가 되고 관광수입이 생기
며 지역경쟁력을 가지는 시대가 되었다. 지방자치단체 입장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지역 내에 남아있는 옛 성곽이었다. 전국적으로 성곽에 대한 복원운동이 일어난 것도
그런 이유였다.
600년 도읍지 서울은 과거 한양을 둘러쌌던 서울성곽이 많은 멸실에도 불구하고 2/3가량
남아있다. 박정희 정부때부터 꾸준히 복원되었는데, 앞으로 나머지 부분을 가능한 한 최대한
도로 복원하여 201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예정이다. 서울시는 이미 서울
성곽을 둘러보는 산책로를 조성하고 있다. 북한산의 북한산성은 1990년대부터 시작하여 이
미 복원을 거의 마쳤고 수많은 등산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역시 201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예정인 수도권의 남한산성도 꾸준한
복원으로 거의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수원의 화성은 이제 세계적인 유적지가 되었고
화성행궁의 복원과 화성관광열차운행 및 수원화성박물관의 건립으로 관광의 가치가 더욱 높
아졌다. 강화도의 성곽과 돈대 등의 유적들은 고인돌 등과 더불어 강화도를 살아있는 박물
관으로 만들고 있으며 ‘강화 나들길’이라는 걷기코스에 포함되어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청주의 상당산성도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훼손이 덜한 대표적인 충청권의 성곽이다.
충청권은 과거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이 치열한 대결을 벌였던 접경지역이라 산성이 많이
남아있다. 충청남북도는 상당산성 외에도 단양의 온달산성, 보은의 삼년산성, 충주의 장미산
성 등을 묶어 ‘중원의 산성 기행’코스를 개발하고 있다.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은 과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안지방에 세운 읍성이다. 꾸준
한 간척사업으로 바다로부터는 멀어졌지만 그 역사성만은 그대로 유지하여 해미읍성 병영축
▲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준비 중인 서울성곽은 최근 산책로를 조성하여 많
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제를 매년 봄에 개최하고 있다. 축제의 인기가 높아지자 읍성 안의 옛 건물들도 순차적으로
복원되고 있다. 전북 고창의 고창읍성과 순천의 낙안읍성은 우리나라 읍성의 원형을 비교적
잘 간직한 곳들로 최근 인기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으며, 낙안읍성의 경우 읍성안의 초가집
들이 민박집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남의 나주는 성벽은 유실되었으나 성문은 대부분 남아있
어 주목받고 있다.
영남지방의 도시들도 부분적으로 성문이나 성벽을 복원하고 있다. 부산과 김해는 읍성의
부분복원을 시작했고 통영은 옛 통제영을 복원계획중이다. 과거 신라와 가야의 산성들도 충
청권의 것들만큼 많이 알려지거나 정비되지는 않았지만 지방자치단체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진주의 진주성은 1980년대에 복원되어 남강유등축제의 화려한 배경이 되고 있다. 영남의 남
해안 일대에는 과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장기주둔하면서 쌓은 왜성들도 남아있다.
제주에도 제주읍성의 흔적이 있고 과거 삼별초, 원나라,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안가
에 쌓은 환해장성이 남아있다. 옛 정의현의 읍성은 제주성읍민속촌으로 단장되었다. 올레길
로 관광객이 몰려드는 제주도는 이러한 옛 성곽들을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제 옛 성곽과 성벽들은 더 이상 도시의 발전과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다. 오히
려 그 도시의 지역성을 증명하는 훌륭한 랜드마크이자, 지역을 알리고 지역의 소득을 높이
는 경제적 자산이기도 하다. 지역주민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걷기코스의 구실도 한다. 분명히
성곽은 과거의 방어요충지 만큼이나 중요해지고 있다.
▲ 남한산성은 병자호란때도 결국 함락되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많은
등산객들이 찾는 곳이다.
▲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은 화성열차로 더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
고 있다.
▲ 강화도 덕진돈대 앞에는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세워진 비석이 있어 역
사공부에도 도움이 된다. “다른 나라 배는 통행할 수 없다...”
▲ 곡선미가 뛰어난 청주 상당산성은 미호천 유역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을 만큼 전망도 빼어나다.
▲ 보은의 삼년산성은 삼국시대의 것이라 축성양식
이 다르기 때문에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 순천의 낙안읍성은 성곽도 둘러보고 읍성안 초가집에서 민박도 할
수 있는 체험형 관광지가 되었다.
▲ 진주성은 임진왜란의 역사가 담긴 곳으로 매년 가을 남강유등축제가
열린다.
▲ 사천의 선진리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쌓았던 왜성으로 지금
은 벚꽃이 아름다운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 김해의 분산성은 가야의 산성으로 추정되며 이후 왜
구의 침입을 막는데 활용된다. 가야의 도읍은 김해시내
는 물론 낙동강 삼각주가 조망되는 위치에 있다. 김해
가 역사관광도시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 제주도 동쪽의 우도에 있는 환해장성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현
무암으로 쌓은 해안방벽이다. 아름다운 우도의 또 다른 볼거리이다.
제9‧10회 새로운 테마로 단장하는 농촌과 도시의 마을들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More Related Content

Similar to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일본연수 관광지
일본연수 관광지일본연수 관광지
일본연수 관광지Sung Hoon KIM
 
디지털미디어컨텐츠
디지털미디어컨텐츠디지털미디어컨텐츠
디지털미디어컨텐츠혜민 강
 
격동의 반세기, 서울중앙시장상인 이야기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격동의 반세기, 서울중앙시장상인 이야기 '변화의 한가운데에서'격동의 반세기, 서울중앙시장상인 이야기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격동의 반세기, 서울중앙시장상인 이야기 '변화의 한가운데에서'별일사무소
 
농어업 유산제도의 도입
농어업 유산제도의 도입농어업 유산제도의 도입
농어업 유산제도의 도입Benjamin Chang-Kwon Chung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9기_응답하라 1964_탐방 계획서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9기_응답하라 1964_탐방 계획서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9기_응답하라 1964_탐방 계획서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9기_응답하라 1964_탐방 계획서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서울혁신백서] 시민의 삶을 바꾸는 77가지
[서울혁신백서] 시민의 삶을 바꾸는 77가지[서울혁신백서] 시민의 삶을 바꾸는 77가지
[서울혁신백서] 시민의 삶을 바꾸는 77가지서울
 
목소리로 읽는 신당동 2014ㅣLog In 신당ㅣ
목소리로 읽는 신당동 2014ㅣLog In 신당ㅣ목소리로 읽는 신당동 2014ㅣLog In 신당ㅣ
목소리로 읽는 신당동 2014ㅣLog In 신당ㅣ별일사무소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7기_라온파니_탐방 보고서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7기_라온파니_탐방 보고서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7기_라온파니_탐방 보고서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7기_라온파니_탐방 보고서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환경논총 제56권
환경논총 제56권환경논총 제56권
환경논총 제56권EPISNU
 
2014.03 서울사랑
2014.03 서울사랑2014.03 서울사랑
2014.03 서울사랑서울
 

Similar to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10)

일본연수 관광지
일본연수 관광지일본연수 관광지
일본연수 관광지
 
디지털미디어컨텐츠
디지털미디어컨텐츠디지털미디어컨텐츠
디지털미디어컨텐츠
 
격동의 반세기, 서울중앙시장상인 이야기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격동의 반세기, 서울중앙시장상인 이야기 '변화의 한가운데에서'격동의 반세기, 서울중앙시장상인 이야기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격동의 반세기, 서울중앙시장상인 이야기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농어업 유산제도의 도입
농어업 유산제도의 도입농어업 유산제도의 도입
농어업 유산제도의 도입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9기_응답하라 1964_탐방 계획서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9기_응답하라 1964_탐방 계획서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9기_응답하라 1964_탐방 계획서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9기_응답하라 1964_탐방 계획서
 
[서울혁신백서] 시민의 삶을 바꾸는 77가지
[서울혁신백서] 시민의 삶을 바꾸는 77가지[서울혁신백서] 시민의 삶을 바꾸는 77가지
[서울혁신백서] 시민의 삶을 바꾸는 77가지
 
목소리로 읽는 신당동 2014ㅣLog In 신당ㅣ
목소리로 읽는 신당동 2014ㅣLog In 신당ㅣ목소리로 읽는 신당동 2014ㅣLog In 신당ㅣ
목소리로 읽는 신당동 2014ㅣLog In 신당ㅣ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7기_라온파니_탐방 보고서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7기_라온파니_탐방 보고서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7기_라온파니_탐방 보고서
잡코리아 글로벌 프런티어 7기_라온파니_탐방 보고서
 
환경논총 제56권
환경논총 제56권환경논총 제56권
환경논총 제56권
 
2014.03 서울사랑
2014.03 서울사랑2014.03 서울사랑
2014.03 서울사랑
 

천종호 사라지고 살아나고(제1~34회 합본)

  • 1. 제1회 사라져가는 공장굴뚝, 탈산업도시 서울의 변신
  • 2. - 1 - 한국의 고도경제성장을 이끈 핵심동력은 뭐니뭐니해도 제조업이었다. 근대공업은 일찍이 일제강점기때부터 발달했는데, 인구가 많아 노동력을 확보하기 좋고 철도의 중심지이기 했 던 서울이 단연 그 선두였다. 서울은 초창기 도심지역을 시작으로 하여 점차 왕십리, 청량 리, 영등포 등지로 공장을 확산시키며 공업도시로 발돋움했고 방직, 식료품, 인쇄 등을 중심 으로 각종 경공업이 발달하였다. 경제개발초기, 한국의 공업전략은 소비재공업의 수입대체산업화였고 이것이 차츰 수출중 심의 경공업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따라 섬유, 신발, 가발, 완구 등의 저임금에 바탕을 둔 노 동집약적 산업들이 우리의 주력 수출품목들이었다. 저렴한 노동력은 결국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하기에 서울 근교는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미 일제강점기 부터 공업화가 진행된 영등포를 시작으로 신도림, 구로, 부천, 부평으로 이어지는 경인선 철 도변을 따라 공장들이 세워졌다. 이로써 서울 남서부지역은 서울의 대표적인 공업지역이 되 었다. 1967년,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에 한국수출공단 제1단지가 들어섰는데, 당시로는 최초의 대규모 공업단지였다. 1972년에는 인근 가리봉동에 한국수출공단 제2단지가 조성되었고, 1976년에는 가리봉동은 물론 광명시 철산동 지역까지를 포함하여 한국수출공단 제3단지가 조성되었다. 주력업종은 섬유 외에도 봉제, 전자, 잡화 등지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 수출공 단의 고용인원은 1970년에 1만 명이었으나 1976년에는 10만 명을 넘었고, 한국의 수출실적 이 10억 달러를 돌파한 1971년에 구로공단의 실적은 1억 달러를, 100억 달러의 수출실적을 넘어선 1977년에 구로공단은 10억 달러를 돌파하였으니 구로공단은 한국수출산업의 선도적 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제복을 입은 여공들이 공장마당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운동을 하는 모습, 명절 때가 되면 고향의 가족들에게 줄 선물꾸러미를 들고 여공들이 공장인근의 버스정거장에 줄지어 서있던 모습들은 당시 구로구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었고 굴뚝이 우뚝 선 낮은 지붕의 공장건물들 도 서울 남서부 지역의 공장지대를 상징하는 경관이었다. 그들이 적은 봉급을 아껴가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속칭 ‘벌집’들도, 인간답게 살아보겠다며 벌였던 노동운동의 모습들 도 이 지역의 빼놓을 수 없는 풍경들이었다. 그들은 이 지역에서 정말 열심히 일하며 살았 고 그렇게 번 돈으로 고향에 송금을 하고, 동생들을 공부시켰다. 그러나 세상은 변해가고 있었다. 서울의 공장들은 농촌의 많은 인구를 빨아들였다. 일자리 가 넘치니 인구유입이 늘고, 인구유입의 증가는 각종 기능과 시설의 증가로 이어졌다. 서울 은 이미 과밀도시가 되었고 수도권은 정비의 대상이 되었다. 수요의 증가는 가격을 상승시 킨다는 경제학의 기본법칙에 따라 서울의 땅값과 임대료는 가파르게 올랐다. 서울의 공장들 이 지방으로 분산되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은 섬유 공업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저임금 중심의 경공업구조에서 서서히 탈피 해가고 있었다. 자동차, 기계, 조선 등 중화학공업으로 산업의 중심이 옮겨가고 있었다. 중화 학공업은 많은 원료를 해외에서 수입해야 하는 관계로 항구를 거느린 임해지역에서 발달하 고 있었다. 공업이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의 일반적 특성처럼 한국도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점차 커져갔다. 서울은 이 나라의 경제중심지이자, 점차 통합되는 세계경제에서도 나름 중요 한 거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당연히 서울은 금융, 도소매, 정보처리, 디자인, 법률 등의 생산 자 서비스산업의 입지를 필요로 하고 있었고 전통적인 제조업은 서울에게는 부담스러운 존 재로 변해갔다. 1990년대부터 눈부시게 발전한 IT산업은 생산자서비스 산업이 충분히 지원 되고 고학력의 전문인력이 많이 분포하며 도시기반시설과 생활환경이 양호한 대도시를 주요
  • 3. - 2 - 입지장소로 선택하는 업종이었다. 오랜 개발독재체제가 서서히 후퇴하면서 이 땅에도 민주화가 찾아왔다. 노동자도 인간이 라는, 인간답게 살아보겠다는 노동자들의 외침은 결국 노동자들의 권리향상과 임금인상으로 이어졌다. 이제 저임금으로 제조업을 운영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후기산업사회 및 정보화사 회가 되면서 공업화에 따른 소득수준의 증가는 국민들의 생활환경과 여가시간에 대한 욕구 의 분출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소비문화의 확산, 웰빙생활에 대한 동경, 가치관의 변화에 따 라 새롭게 요구되는 장소들은 바로 대형할인마트나 전문상점, 각종체육시설, 공원, 문화시설 등이었다. 아파트의 뒤를 이은 고층주상복합이나 오피스텔도 수요가 급증했다. 결국 서울의, 그중에서도 구로, 가리봉, 신도림, 영등포 등지의 많은 공장들은 비싼 지가와 임금을 견디지 못하고 지방이나 해외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새롭게 요구되는 시설들의 입 지를 찾고 시민들의 높아진 환경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서울시와 오히려 공장들을 유 치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고 세수를 증대시키려는 지방도시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이 지역의 공장들은 하나둘씩 서울을 탈출했고 그 자리에는 벤처와 IT열풍에 힘입은 아파트 형공장과 테크노빌딩, 대형고급쇼핑몰, 주민들의 여가와 휴식을 위한 공원, 각종 예술공간, 대규모 아파트단지나 주상복합건물 등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모두 후기산업사회 및 정보 화사회의 생활문화에 필요한 장소들이다. 옛 공장과 굴뚝은 완전히 철거되는게 대부분이었 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새로운 용도에 맞게 리모델링되거나 과거의 흔적을 일부 남겨놓는 경 우도 있다. 특히 구로공단의 경우 완벽한 변신을 했다. 2000년에 구로공단을 구로디지털산업단지로 개명한 후 10년간 입주기업은 597개에서 10,025개로, 고용인원은 30,000여 명에서 124,000 명으로, 생산액은 3조 6천억 원에서 10조 원으로 급증했다. 업종 역시 과거의 섬유, 봉제, 단순조립 등에서 첨단, 지식, IT 등으로 혁신을 이루었다. 과거의 여공들의 모습 대신 이젠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차려입은 직원들이 노트북 가방을 매고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를 테이 크 아웃해가는 모습, 점심시간에 직원들이 건물 앞의 공원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 등 이 보편화되었다. 공장과 굴뚝, 담벼락밖에 없던 거리는 첨단산업의 이미지를 주는 유리벽의 투명한 아파트형 공장이나 벤처빌딩, 그리고 직원들이 이용하는 각종 상점들, 건물 앞의 소 공원들로 바뀌었다. 강남의 테헤란밸리에 비해 약 30-40%나 저렴한 임대료는 많은 테헤란 밸리의 벤처나 IT업체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이러한 ‘디지털도미노’는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가리봉동 일대의 옛 공단들도 변 경된 행정구역인 가산동에 맞추어 가산디지털산업단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옛 공단의 어둡 고 낙후된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공단과 관계된 지명들도 하나둘씩 바꾸고 있다. 지하철 구 로공단역이 2004년에 구로디지털산업단지역으로, 가리봉역이 2005년에 가산디지털산업단지 역으로 각각 바뀌었다. 공단로라는 도로명도 없어졌다. 주민들의 구성이 아파트중산층으로 바뀌면서 지역이미지 개선을 통한 주택가격의 상승을 바라는 움직임일 것이다. 신도림역 일대의 공장부지들은 이제 테크노빌딩과 대규모 아파트 및 주상복합단지, 쇼핑 몰 등으로 채워졌다. 문래동 일대의 영세금속공장과 철공소들은 아직 남아있으나 점차 아파 트와 주상복합건물에 밀리는 추세다. 영등포 일대의 옛 공장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대규모 공원과 주상복합건물, 벤처단지로 메워지고 있다. 옛 공장의 모습과 굴뚝들은 이제 점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제복 입은 여공들도 옛 사진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 남서부의 지역성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았 다. 전국의 산업단지 가운데 입주업체가 10,000개를 넘는 곳은 구로와 가산을 포함한 서울
  • 4. - 3 - ▲ 구로디지털단지(위)와 구로공단(아래)의 모습. 구로구 일대는 가장 극적 으로 변신한 산업단지이다. (출처 : 뉴시스) 디지털산업단지가 유일하다고 한다. 오히려 새로운 업종과 구성원, 그리고 새로운 경관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뿐이며 여전히 서울의 주요 산업단지 역할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처럼 서울은 산업화 시대를 추억 속으로 보내며 탈산업시대 및 정보화 시대를 위한 변신 을 열심히 하고 있다. 다만 산업화시대에 이곳의 공단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땀과 눈물자국, 사연들이 극복되고 잊혀져야 할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것 같아서 조금 아쉽고, 그래서 기획중이라는 구로공단 산업박물관이 사뭇 기대되기도 한다. 지역성은 그리 빨리 변하는 것이 아니기에... ▲ 옛 구로공단의 담과 도로는 이처럼 넓고 쾌적하게 바뀌었다.
  • 5. - 4 - ▲ 가산동의 옛 섬유공장건물들은 현재 의류 아울렛매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영등포의 옛 동양맥주공장이 1997년 경기도 이천으로 이전하면서 공장부지는 영등포공원이 되었 다. 영등포구는 이를 기념하여 동양맥주에서 사용하던 맥주제조시설을 공원 한가운데에 남겨놓았다. 1933년부터 사용하던 맥주제조시설이다. ▲ 문래동의 영세금속가공공장들은 아직 남아있으나 점차 아파트로 개발되고 있다.
  • 6. - 5 - ▲ 신도림역 일대의 옛 기아자동차 출하장은 고층의 테크노마트건물로, 한국타이어공장은 대규모 아파 트단지로 변신했다. ▲ 금천구 가산동의 옛 인쇄공장은 서울시의 창작공간조성사업에 따라 금천예술공장으로 리모델링 되었다. 설치미술이나 실험예술을 전공하는 예술가나 창작인들에게 작업실로 임대된다. 과거 공단 지역으로의 문화예술전파에 기여할 것으로 서울시는 전망하고 있다. ▲ 옛 한국수출제2공단인 가리봉동과 한국수출3공단인 광명시를 연결하던 수출의 다리. 지금은 수도 권 전철 1호선 철로를 넘어 가산디지털단지의 아울렛매장과 경기도 광명시를 연결해주고 있다. 수 출의 다리란 명칭도 언제까지 남아있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 7. 제2회 천일염과 염전의 쇠퇴 그리고 부활
  • 8. 천일염과 염전의 쇠퇴 그리고 부활 세포의 기능을 유지시키고 혈액순환과 소화에 절대적으로 필요해 물만큼이나 우리 몸에 꼭 필요한 물질, 음식의 부패를 막고 맛을 내며 습기를 제거하고 치료에도 쓰이는 만능물질, 이것은? 바로 소금이다. 그리고 이런 소금을 만들어내던 소금밭은 바로 염전이다. 과거 소금은 생산량과 생산지역이 한정되어 있어서 값이 비쌌고 이 때문에 국가가 전매제 도로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우리나라의 서해안은 조선 시대 제염업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경기․충청지방의 경우 주요 중심지는 인천 일대, 남양만 일대, 안산, 강화, 서천, 남 포, 태안, 당진, 보령 등지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까지는 연료를 절약하고 생산량을 늘리는 방법, 즉 갯벌의 염전을 이용하여 바닷물을 농축시킨 후에 그 물을 벌막의 가마솥에서 끓이 는 방법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가마솥에서 바닷물이나 농축된 소금물을 끓여서 생산해 낸 소금은 자염 또는 전오염이라고 한다. 염전이 제공하는 이권은 의외로 커서 왕실이나 세도 가, 공신들이 염전을 사유화하기 위한 불법적인 행위를 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초에 엄격히 지켜진 어전과 소금가마의 사유화 금지 조치는 점차 후퇴하였다. 한편 1900년대 초반부터 중국 산둥지방으로부터 값싼 천일염이 대량으로 수입됨에 따라 전통적인 자염에서 천일제염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데 바닷물을 염전으로 끌어들여 가두 어 두고 수분을 증발시켜 소금이 침전되도록 하는 오늘날의 천일제염은 1907년에 인천의 주안에서 일본인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곳에서의 성과가 좋게 나타나자 염전개발은 강수량 이 적은 대동강 하구의 광량만과 그 밖의 서해안에서 급속히 진행되었다. 천일제염은 자연 에 크게 의존하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으로 서해안은 조차가 크고 간석지가 넓게 발달되어 있 는데다가 일조량이 많아 입지조건이 일본보다 훨씬 좋았다. 이러한 천일제염법은 서해안의 자연환경에 매우 적합했음은 물론 연료소비가 많아 값이 비싼 자염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경기만 일대는 해안선 이 복잡하고 섬이 많아 만의 입구를 막거나 섬을 연결하면 염전을 조성하기 좋았다. 또한 경기만으로 흘러드는 하천들은 모두 유로가 짧고 수량이 적은데, 이러한 조건이 오히려 염 전 발달에 유리했다. 왜냐하면 큰 하천에서는 많은 담수가 바다로 유입되며 해수의 염분농 도가 낮아서 천일제염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근에는 200-400m의 구릉성 산지가 해안에 인접해 있어 염전건설에 필요한 토석채취가 용이했다. 기온역시 높은 편이며 강수량 은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의 여러 지역과 비교하면 강수량이 적다. 따라서 총독부는 계획적으로 이러한 염전들을 더 많이 확대시켰고 그 중심지는 서해안이 었다. 인천 주안에서 시작된 염전은 1921년에 들어서면서 인천의 남동구 일대와 시흥의 군 자로, 1934년에는 시흥의 소래로 점차 확대되었다. 특히 인천에서 시흥으로 이어지는 지역 은 남한 제일의 천일염전지대라는 평판을 받았고 염전의 활성화로 인해 촌락이 발달하기도 하였다. 중국인 노동자도 많이 유입되어 중국인 마을도 생겨날 정도였다. 천일제염업의 운영은 1980년대 중반까지 비교적 순조로웠다. 수도권 서해안 지역의 도시 화가 많이 진행되었지만, 1986년의 경우 인천의 남동․소래지구와 시흥의 군자지구 등에서 아직 활발히 소금이 생산되고 있어서 이 지역의 염전만도 전국의 약 10.5%를 차지했다. 1987년의 염전분포를 보면 전남 46%, 경기 24%, 충남 22%, 전북 8%의 순이었다. 그러나 천일제염은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특성으로 인해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 인력부족으 로 사양화되기 시작했고, 정부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서 소금시장의 개방을 앞두고 보상금 을 지급하면서 폐전을 독려하였다. 공장에서 값싼 소금이 생산되고 수입산 소금이 국내시장
  • 9. 을 잠식하자 상대적으로 비싼 국산 천일염의 수요는 크게 하락했다. 폐염전들은 여러 가지 용도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인천의 남동산업단지와 시흥의 시화산 업단지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대규모의 염전이었던 남동염전과 군자염전에 들어선 공업단 지들이고, 이밖에 시화방조제의 축조로 없어진 염전도 많다. 공업단지조성이나 간척사업으로 인해 없어진 염전들도 있지만 화성 등지에 있던 일부 염전은 대하 양식장 또는 낚시터 등으 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대하는 잔잔한 물을 좋아하므로 해안선이 복잡한 서해안의 염전터 는 대하 양식장으로 매우 적합하였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소금을 공급해주던 염전들은 하나 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이제 염전들은 소수만이 남아 사진작가의 사진속에서나, 영화 의 배경장소로나 우리에게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다시금 염전과 천일염을 원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웰빙의 시대'가 열리면 서 좀더 비싼 값을 주고라도 더 나은 먹거리를 찾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자연에서 얻는 천일염과 공장에서 인공적으로 만드는 정제염과는 영양가나 품질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기에 소득수준이 높아진 국민들은 점차 천일염을 찾게 되었다. 더구나 소금은 한국인의 평생 먹 거리인 김치에 대량으로 들어가는 재료 아닌가. 특히 우리나라 서해안의 천일염은 유기물이 풍부한 세계적인 갯벌에서 생산되기에 품질이 우수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지방자치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역의 특성을 관광자원으로 삼기 시작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그 지역의 독특한 것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가 왔다. 서해안 지역들에게 염전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고유한 지역성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명 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탈산업사회 및 정보화사회를 맞이하며 교육의 철학도 달라졌다. 효율성을 최고의 미덕으 로 생각하고 지시사항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을 최고의 인재로 생각하던 산업사회의 암기식 교육의 폐단이 강조되었다. 대신 창의력과 주관, 그리고 체험을 중시하는 새로운 교육사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각급학교에서 체험활동이 강화되면서 주말이나 방학때 아이들을 데리고 국토의 여러 지역을 체험하는 부모들이 늘어났다. 소득수준의 향상과 여가시간의 확대로 관 광의 행태도 명승지나 유명관광지 중심의 기존 관광행태에서 체험과 테마 중심의 지속가능 한 관광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져가던 염전들은 이런 시대적 변화에 맞춰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모하거나 부활하고 있다. 경기도 시흥시 포동의 폐염전지역은 얼마전부터 갯골생태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났다. 이 지역은 1934년부터 1936년 사이에 염전이 조성되었으며 갯골을 중심으로 약 145만평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생산된 소금은 수인선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되 었다. 이곳의 염전은 인근의 인천 남동염전, 시흥의 군자염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소금 생산 량의 약 30%를 차지하였으나 천일염 수입자유화에 따른 채산성 악화로 1996년 7월 31일자 로 폐염전 처리되었다. 포동, 월곶동, 방산동 일대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 지역은 그 후 별다른 활용방안을 찾지 못한 채 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곳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폐염 전 활용방안이 점차 논의되기 시작하였고 염생식물은 물론 다른 생물들도 서식함이 밝혀지 면서 생태계의 복원이 가능해졌고 생태공원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염전도 일부 복원하 여 체험도 가능하다. 인천광역시 논현동의 소래염전도 소래습지생태공원이 되었다. 1933년에 염전으로 조성된 이곳은 인근에 소래철교와 소래포구가 있어 더 유명하다. 정부의 염전 구조조정 정책에 따 라 경쟁력을 상실한 이곳은 한동안 버려진 땅이었다. 그러던 중 버려진 폐염전 부지와 갯골 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염생습지들이 대규모로 형성되었고 이후 제2경인고속도로와 서해
  • 10. 안고속도로의 개통, 인천광역시 남동구의 시가지 확대 등으로 개발의 압력이 증가하였으나 과거 인천 특히 소래의 지역성을 간직하고 있는 폐염전을 보존하여 생태학습과 염전체험의 장으로 변모시킬 필요성을 제기하게 되었다. 원래는 폐염전 100만 여 평을 모두 생태습지공원으로 조성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인근 논 현동 일대에 대규모 택지가 조성되고 이 근처로 많은 교통로가 지나가게 되자 개발에 대한 욕구가 거세졌다. 결국 조성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인천시와 환경단체간의 지리한 협상과 공방 끝에 애초 계획부지의 약 60%가 삭감된 약 40여 만 평의 폐염전 부지에 습지생태공 원이 조성되기로 합의를 보았고 2009년 7월에 완공되었다. 습지생태공원 내에는 갯벌에 관 한 전시관이 있고 염전과 소금창고 등이 체험시설로 보존되고 있다. 그밖에 습지(염생․담수․ 기수습지)와 갈대밭, 관찰데크, 갯벌체험장, 조류관찰대 등이 갖추어져 있다. 전북 부안군의 곰소염전은 곰소만 일대의 작은섬들을 연결한 간척사업으로 1930년대 중 반에 탄생한 염전이다. 곰소만 안쪽의 줄포항이 갯벌의 퇴적으로 어항의 구실을 하지 못하 자 곰소항이 새로운 곰소만의 어항으로 성장하면서 잡아온 수산물을 처리하는 소금공급지로 번영하였다. 곰소만 바닷물은 미네랄이 풍부하여 질좋은 소금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 염전의 규모가 크게 감소했지만 여전히 유명한 곰소젓갈에 들어가는 소금을 공 급하며 체험장으로도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의 태평염전은 '국가대표급' 염전이다. 면적으로 한국최대이면서 대 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염전이다. 1953년, 한국전쟁으로 인한 월남피난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당시 2개로 나뉘어있던 증도를 연결하면서 조성한 태평염전은 개발압력이 적은 호남의 해안지방인 탓에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 염전체험장 이 한쪽에 있어 2시간에 걸친 염전체험을 할 수 있으며 역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옛 소금창고를 리모델링한 소금박물관이 있어 소금과 염전에 대한 종합적 체험과 학습을 할 수 있는 장소로 많은 관광객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자연환경이 깨끗하고 전통문화가 잘 보전 된 지역을 뜻하는 슬로시티로 증도가 2007년 12월에 지정됨에 따라 증도의 염전은 다시금 전성기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유쾌한 천일염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은 설탕 없이는 살아도 소금 없이는 못산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묵묵히 성실히 일 하면서 그 조직이나 사회에 없어서는 안되는 사람을 가리켜 '소금같은 사람'이라고도 한다. 소금을 얻기 어려웠던 옛날, 염전은 지배층의 이권을 보장해주는 장소였고 약간의 소금을 얻기 위해 수많은 염부들의 땀과 시간이 바쳐진 곳이기도 했다. 바닷물을 끌어와 소금이 만 들어지기까지 대략 20여일이 걸리며 최종결정지의 바닷물조차도 하루 종일 염부들이 대파 로 밀어야 하얀 소금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한때 우리는 경제와 돈의 관점으로만 염전을 파악하고 쓸모없다며 버리거나 완전히 다른 장소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강이고 문화임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 다. 염전을 되살리고, 건강한 천일염을 다시 생산하며, 가볼만한 곳으로 만들고 있는 우리 모습이 그 증거 아닐까.
  • 11. ▲ 시흥갯골생태공원에서 수차를 돌리며 체험활동을 하는 모습 ▲ 인천소래습지생태공원은 습지의 분위기가 나도록 풍차도 설치해놓았다. ▲ 주변의 개발과 도시화에도 소래염전을 보존하고 공원화한 점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 소래습지공원은 체험학습을 위해 소금생산과정의 내용을 잘 전시해놓았다. ▲ 태안의 태양광발전소는 태안반도 북부의 폐염전에 조성되었다. 햇빛을 받는다는 점에서 용도 는 변했으나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다. ▲ 신안군 증도의 한국최대규모 염전인 태평염전의 장쾌한 모습 ▲ 증도 태평염전에서의 가족단위 체험모습
  • 12. ▲ 증도 태평염전에서 소금이 생산되는 모습. 아침일찍부터 작업해야 오후 늦은 시간에 저만큼의 소금 을 얻을 수 있다. ▲ 증도 염전 옆에는 신안 태양광발전소가 있다. 태양을 이용하는 장소라는 면에서 입지조건이 같다.
  • 13. ▲ 증도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옛 소금창고를 개조하여 소금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증도의 제일가는 특산물은 역시 천일염이다. 증도 특산물판매장의 모습. ▲ 부안 곰소염전은 근처의 곰소젓갈단지에 소금을 공급하고 있다. 멀리 젓갈상점들이 보인다.
  • 14. 제3회 워터프론트로 거듭나는 서해안의 옛 항만지역들
  • 15. 1876년의 강화도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고 열강들의 한반도 침략을 예고한 사건이었지 만 달리 생각하면 이땅에 근대문물이 들어오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했다. 강화도 조약에 따라 당시 조선 정부는 부산(1876)과 원산(1879), 그리고 인천(1883)을 차례로 개방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후 목포(1897)와 군산(1899) 등이 추가로 개항되었다. 일본과 서양의 근대문 물이 들어올 창구가 마련된 것이었다. 개항은 전통적인 포구의 모습과는 차원이 다른 큰 변화였다. 고깃배나 물건을 실은 황포 돛배들이 드나들고 상인들이 모여들던 옛 포구에서는 볼 수 없는 경관이 나타나기 시작했 다. 인천의 경우 1884년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仁川濟物浦各國租界章程)이 체결됨에 따라 일본과 청국을 비롯한 서양각국이 조계를 설치하고 영사관을 설치하였다. 조계지에는 관공 서는 물론 은행과 각종 상점, 종교건축물과 병원, 그리고 외국인 주거지까지 형성되면서 서 양의 도시시스템이 이 땅에 이식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국적인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각국 조계지를 중심으로 전기와 수도 등의 도시기반시설들이 도입되었고 통신 및 우편 제도가 실시되었다. 즉, 인천은 개항을 계기로 당시로서는 한반도의 최첨단 도시로 뛰어오른 셈이다. 바다에 면한 항구가 없던 서울의 외항 역할까지 하게 된 인천에는 당연히 더 많은 사람들과 화물들 이 모여들었고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자리 잡았다. 러일전쟁 후 당시 한반도에 개항된 8곳의 항구 가운데 인천이 44%의 무역점유율을 차지했음은 이를 충분히 증명한다고 하겠다. 특히 조차가 커서 큰 배가 들어오지 못하는 지형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1918년 갑문식 부두가 건설된 후 인천의 항만기능은 더욱 강화되어 각종 공장과 창고 및 해운시설, 관공서들이 들 어섰다. 인천은 경제개발시기에 공업지역으로 지정되면서 급성장했다. 인천항도 확장되면서 여러 개의 부두도 갖추었다. 그러나 수도권 전철망의 확충으로 서울과 가까운 부평 등이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경제성장과 냉전분위기에 따라 주요교역국가가 미국과 일본이 되면서 부산항에 독점적인 무역항의 자리를 내주었다. 인천공항의 건설과 고속도로망의 발달은 송 도국제도시와 남동구 지역을 또다른 인천의 중심지로 만들게 하였으며 인천항 근처의 구도 심과 옛 개항장 일대는 점차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군산은 1899년에 개항하였다. 군산의 배후지는 전북의 호남평야 일대와 금강유역의 논산 평야 일대로, 군산은 대일 쌀수출항으로 아주 적당한 위치였다. 또한 강경을 중심으로 한 금 강의 상권을 일본인들이 장악하기 위해서도 군산의 개항은 필수적이었다. 이에 따라 군산에 도 각국조계지가 들어섰으며 관공서와 일본계 은행 및 회사, 상점, 병원, 학교, 일본인 주택 들이 군산항 근처에 자리잡았다. 일본인들의 유입으로 1920년대에는 전국 11위의 도시로까 지 성장했다. 그러나 해방후 일본인의 철수와 대중국무역의 단절, 배후지의 취약한 공업화 등으로 군산 의 지위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국가의 발전축이 경부축으로 형성됨에 따라 중국을 바라보는 서해안의 군산은 경제적 기회를 별로 얻지 못하였다. 군산에는 합판, 양조 등의 경공업 일부 만이 발달했을 뿐이었다. 일본식 가옥이 군산에 많이 남아있는 것도 바로 군산의 개발로부 터의 소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목포는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네 번째로 개항된 도시이다. 1897년에 개항장이 들어섰고 인천과 마찬가지로 외국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군산처럼 목포도 배후지에 드넓은 영산 강변의 곡창지대를 거느리고 있어서 쌀수출항으로 번성했다. 특히 서울-목포간의 1번 국도 가 1911년에, 목포역을 종착역으로 하는 호남선 철도가 1914년에 개통되면서 목포는 단지
  • 16. 쌀수출항에 그치지 않고 일본자본의 내륙진출의 기지가 되기에 이르렀다. 목포에도 일본인 가옥과 각종 근대식 건물이 들어섰음은 물론이다. 쌀 이외에도 면화가 많이 반출되었고 일 본제품이 많이 수입되면서 목포는 1935년 당시 전국 6위의 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목포 역시 군산과 비슷한 경험을 겪어야 했다. 해방 후 일본인의 철수와 대일본무 역의 단절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군산과 마찬가지로 배후지는 공업화에서 소외된 농촌이었 고 목포의 산업은 양조, 수산물가공 등의 경공업이나 해운업에 그쳤다. 같은 서해안의 인천 이 서울의 외항이자 수도권의 공업도시로 성장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농업지역을 배후지로 거느리고 국가의 산업화 축에서 벗어난 군산과 목포의 운명은 비슷했다. 최근들어 군산은 새만금지구, 목포는 대불공단지구 및 영산강하굿둑 일대에 공업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항만 근처의 구도심은 여전히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국가발전의 거점이 수도권과 남동임해권으로 나뉘고 두 권역을 연결하는 경부축이 성장함 에 따라 서해안의 항구도시들은 점차 쇠락하고 있었으며 구도심의 부두근처에 있던 항만시 설들은 노후화된 도심을 상징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하였다. 일제강점기와 경제개발시기 이전 까지 번영을 누리던 항만근처의 구도심은 점차 활기를 잃어갔고, 이젠 용도조차 없어진 낡 은 건물들은 철거의 운명만 맞이하고 있었다. 더구나 일제의 잔재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쓰 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건물들과 풍경이 나름 대접받는 세상이 찾아왔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동시 에 진행된 지역화와 지방화의 물결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중시하고 이를 경쟁력으로 부각 시키는 분위기를 낳았다. 노후화된 옛 항만시설들은 지역성을 담보하는 훌륭한 문화유산이 되었고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시설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개념은 워터프론트(water front)이다. 워터프론트는 단지 수변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노후화 및 슬럼화한 도시의 임해부 또는 항만부를 대상으로 하여 어떤 종류의 재개발을 함으로써 지역의 환경정비와 활성화를 시도하고 나아가 도시를 재구조화하는 개념이다. 워터프론트의 개발은 지역의 지명도를 높일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 을 불러 모을 수 있다. 이는 서비스의 창출, 경제의 활성화, 인구의 정주성 확대, 나아가 지 방자치단체의 세수 및 투자의 증가로 이어진다. 워터프론트의 재개발은 세계적인 추세이며 특히 산업화시대에 조성한 항만부의 낙후를 경 험한 선진국일수록 더욱 적극적이다. 이러한 선진국 도시들의 과거 항만부가 낙후된 것은 화물수송의 변화와 산업의 재구조화이다. 즉, 소화물은 자동차 등의 육상교통으로 수송되고 대형화물은 컨테이너 선박으로 수송이 이루어지면서 신항만이 외곽에 새로 조성되었고 이에 따라 구항만 지역은 쇠퇴하게 되었다. 또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서비스업 중심으로 바 뀜에 따라 공장을 끼고 발달한 항만들은 점차 낙후지역으로 남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바다와 물은 우리에게 정서적인 마음의 편안함, 육체적 건강의 편안함, 지적 정신의 편안 함을 제공한다. 당연히 수변공간은 여가휴식의 공간으로 작용하게 된다. 워터프론트에서는 자연환경의 감상을 배경으로 다양한 문화 및 여가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시설이 노후화된 시설을 대체하거나 재활용하여 입지한다면 훌 륭한 도시문화공간이 되는 것이다. 인천은 옛 중국인거주지를 차이나타운으로 육성하여 인천의 대표적 관광지로 활성화시켰 다. 그리고 일본인거주지에 일본식 건물을 일부 복원하였고 옛 일본계 은행건물들을 박물관 이나 전시관으로 리모델링하였다. 그리고 개항장 일대의 근대건축물들을 연결하는 ‘근대역사 문화의 거리탐방’코스를 만들었다. 인천항 부두 근처의 옛 창고건물들을 문화예술공간으로
  • 17. 탈바꿈한 인천 아트플랫폼도 눈여겨 볼만 하다. 해군부대가 있던 월미도를 돌려받아 도시자 연공원으로 꾸미고 인천항을 내려다보는 전망대를 만든 것도 워터프론트 사업의 일환이다. 차이나타운 뒤의 자유공원을 개항기처럼 각국(各國)공원으로 복원할 계획도 있다. 군산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남아있는 일본식 가옥을 문화재 로 지정하거나 시에서 매입하여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예정이다. 군산 역시 근대문화역사의 거리를 조성하고 있으며 옛 군산항 일대 근대건축물들을 전시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부두 일대를 해양테마공원으로 꾸몄고 뜬다리 부두나 부두 근처의 옛 철길들도 활용방안모색의 대상이다. 목포도 비슷한 움직임이다. 옛 일제강점기 건물이 전시관이나 문화원 등으로 사용되고 있 으며 일본식 가옥 중 일부는 카페 등으로 재활용되고 있다. 인천이나 군산에 비하면 움직임 은 느리지만 최근 목포골목길답사, 목포 근대역사거리 답사 등의 코스를 개발하면서 옛 항 만지역을 테마관광지로 꾸밀 계획을 갖고 있다. 일본인 관광객들도 제법 온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이런 움직임을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역사를 오히려 향수로 되살리는 것 아니냐며 분개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도 분명히 해당지역의 역사이며 오히려 역사의 교훈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젠 일제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만큼 우리의 국력이 높아지고 문화적으로도 성숙되었다는 점도 언급하고 싶다. 진정한 일제 의 극복은 무조건적인 외면과 역사지우기보다 지역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시작되 지 않을까? ▲ 인천 옛 개항장에 복원해놓은 일본인거리. 상점들이 입지해있다.
  • 18. ▲ 인천 차이나타운의 모습 ▲ 인천개항박물관은 옛 인천개항장의 일본제1은행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 19. ▲ 인천항 인근 옛 창고들은 인천아트플랫폼이라는 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했다. ▲ 군산 개항장에 있던 옛 군산세관건물. 현재 호남관세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20. ▲ 군산시에서 제작한 근대역사문화탐방지도. 주요근대건축물과 그 내용을 보기 편하도록 이야기식으로 제작하였다. ▲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 군산항 근처의 옛 철길들은 새로운 활용방안을 모색중이다.
  • 21. ▲ 군산 옛 개항장의 일본인 가옥들. 이곳에는 일본인 가옥이 제법 많이 남아있다. ▲ 군산 옛 개항장 일대의 가로망. 반듯하고 넓은 직교식 가로망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 22. ▲ 군산 진포해양테마공원에서 바라본 옛 군산항의 모습. 뜬다리부두가 있다. 새만금개발로 군산의 새항만이 비응도쪽으로 이전하는 중이어서 옛 군산항 일대의 워터프론트 개발이 불가피해졌다. ▲ 목포의 옛 개항장 일대에 있는 한 일본인 가옥은 얼마전부터 카페로 리모델링되어 목포의 명소 로 떠오르고 있다.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현재 목포근대역사전시관) 앞에 있다.
  • 23. 제4회 폐광의 아픔을 관광과 문화산업 육성으로 극복하는 탄광촌과 광산도시들
  • 24. 땔감과 숯을 뜻하는 신탄(薪炭)은 인류의 오랜 에너지 자원이었다. 영국의 환경정치학자인 클라이브 폰팅의 명저인 <녹색세계사>에는 인구 증가에 따라 유럽의 드넓은 원시림이 어떻 게 파괴되었는가를 잘 설명해 놓았다. 거주공간의 확보도 중요했지만 각종 동력수단으로, 그 리고 난방을 위해 신탄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만큼 삼림은 눈에 띄게 감소해갔다. 우리 나라 역시 울창한 숲이 땔감으로 베어져 나갔고 설상가상으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 치면서 더욱더 삼림은 파괴되었다. 한국전쟁 후 산업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고 산업시설이 복구되었다. 또한 산업철도가 조금씩 부설되면서 석탄개발의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박정희 정부는 산림녹화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일반 가정의 땔감사용을 대체할 자원으로 석 탄을 개발하면서 석탄생산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에너지소 비의 80% 가까이를 차지하던 신탄은 그 비중이 급격히 감소했고 1960년대 중반에 이르면 석탄의 비중은 50%에 육박했다. 한때 수요의 급증으로 인한 석탄가격의 급상승으로 석탄의 비중이 감소하기도 하였으나 1970년대 들어 벌어진 중동전쟁과 이란혁명 등으로 오일쇼크 가 발생하자 다시금 석탄은 전성시대를 맞이한다. 석탄의 수요가 항상 존재했고 생산이 끊이지 않는 호황이 계속되자 전국의 젊은이들이 일 자리를 얻기 위해 탄광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연탄업자들은 겨울철에 대비해 물량을 사전에 확보하기 위해 탄광에 상주하며 거래처를 확보하려 했다. 탄광지역에 돈이 돌면서 지역경제 는 탄탄해졌고, 탄광촌은 마침내 광산도시로 승격된다. 삼척군의 황지읍과 장성읍이 1981년 에 태백시로 통합승격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탄광촌에서는 광부들의 월급날, 개들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온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잿빛 가득한 분위기의 규칙적인 형태의 광부사택, 매일 아침 불안감을 안고 갱도로 출근 하는 광부들, 산더미처럼 가득 쌓인 석탄, 석탄을 가득 실은 탄차가 산업철도 위를 달리는 풍경 등이 탄광촌의 모습이었다. 갱도 붕괴의 뉴스가 가끔씩 들리기는 했어도 적어도 1970 년대까지는 탄광촌에 이처럼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1982년경부터 국제유가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석유가격의 하락은 국내 에너지소비 구조의 급변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다루기 쉽고 열효율도 높으며 연탄재나 연탄가스가 배출 되지 않는 석유를 더욱 선호하기 시작했다. 영세군소탄광의 난립, 심층매장에 따른 채굴의 고비용과 위험성, 석탄품질의 저하 등 국내 석탄생산의 구조적 문제점도 불거져 나왔다. 그 러면서도 석유가격은 계속 하락하고 안정세를 유지했고 국민들의 소득수준은 높아지면서 보 다 고급의 에너지를 찾게 되었다. 결국 정부는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을 1989년부터 실시하 였다. 경쟁력이 없는 탄광은 폐광을 유도하는 이 정책으로 1988년에 347곳이나 되었던 탄 광은 현재 10곳 미만으로 급감하게 되었다. 일자리가 없어진 탄광촌을 광부들이 떠나는 것은 당연하였다. 광부들이 떠나며 인구가 급 격히 줄자 다른 서비스업종들도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하면서 탄광촌은 지역경제가 마비되고 기본적인 생활유지도 어려운 동네로 전락해갔다. 이러다 탄광촌과 광산도시들이 유령도시로 변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대두되었다. 강원도의 태백·정선·영월·삼척, 충청남도의 보령, 경상북도의 문경 등지는 우리나라의 대표 적인 탄광지역이었고, 1980년대 후반부터 이들 지역은 앞서 말한바와 같은 심각한 문제점에 봉착하였다. 탄광이 문을 닫고 지역주민들인 광부들이 떠나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 지 역들은 많은 노력을 했다. 심지어 방사능폐기물처리장을 유치하려고 했던 지역도 있을 정도 였다. 그러나 대개 교통이 불편한 산촌이었던 만큼 대체산업이나 시설을 유치하기 쉽지 않
  • 25. 았다. 정선은 이러한 위기를 관광산업으로 극복한 대표적인 모범사례에 속한다. 많은 우려와 비 난을 무릅쓰고 고한읍에 카지노를 유치했다. 지역사회에 부정적인 기능을 하긴 했지만, 카지 노 유치는 세수의 증대와 교통의 발달을 가져왔다. 지역에 있던 옛 금광을 화암동굴이라고 하여 일종의 금광테마파크로 만들었다. 석탄을 실어나르던 정선선 철도의 약 7.4km구간에 레일바이크를 설치하고 레일바이크의 출발점에 옛 기차를 리모델링한 기차펜션을 마련하여 폭발적인 인기와 호응을 얻어내고 있다. 레일바이크는 일찍부터 예약하지 않으면 탈 수 없 을 정도이다. 지역의 전통도 관광상품화 하였다. 뗏목타고 나간 님을 그리워하는 정선아리랑의 고장답 게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이자 남한강 뗏목의 시작점인 여랑리 일대에 아우라지 관광지를 만 들어 뗏목체험을 할 수 있게 해놓았고 읍내에서는 5일장을 지속적으로 열어 서울서부터 기 차를 타고 찾아오는 유명한 철도관광상품으로 정착시켰다. 옛날 석탄을 실어나르던 철도가 이제는 관광철도의 구실을 하는 셈이다. 옛 산촌의 너와집 등의 전통가옥을 모아 아라리촌 이라는 숙박지역도 조성하였다. 많은 비난을 받았던 카지노도 주변에 스키장과 리조트를 추가로 조성하여 이젠 겨울철 종 합관광지로 자리잡았다. 해발고도가 높은 지형적 여건을 활용한 휴양림조성으로 여름철 고 원관광지로서의 기능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정선은 낙후된 지역의 부활의 사례로, 또한 노후화된 산업시설을 성공적으로 리모델링한 지역의 전형으로 충분히 꼽힐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대규모의 투자와 자연환경의 파괴만 이 아닌 아이디어와 발상의 전환, 지역성살리기 만으로도 충분한 관광지가 될 수 있음을 보 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정선 인근의 태백도 관광도시로의 전환으로 성공한 경우다. 폐광된 후 태백시에 기부채납 된 함태탄광을 탄광체험공원으로 꾸몄다. 옛 탄광촌 가옥들을 일부 복원하여 탄광촌의 모습 을 관광객들이 느낄 수 있게 했고 직접 갱도에도 들어가 볼 수 있게 했다. 우리나라 최대규 모의 석탄박물관도 조성해 놓아서 석탄관광지의 주요요건을 갖추었다. 철암동의 옛 탄광촌 과 탄광시설들을 그대로 보존하여 빌리지움(빌리지와 뮤지엄의 합성어)으로 꾸밀 계획도 진 행중이다. 여름이 서늘한 고원지대라 모기가 없다는 자연적 특징을 이용하여 '여름밤 쿨 시 네마 축제'도 개최한다. 탄광도시가 관광과 문화의 도시로 탈바꿈 한 것이다. 영월군 북면 마차리에도 옛 탄광촌 앞에 탄광문화촌이 조성되어 있다. 마차리의 탄광은 이미 1972년에 폐광되었고 지금은 옛 탄광사업소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탄광촌의 옛모습을 전시한 탄광문화촌이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끈다. 옛 탄광촌은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옛 풍경의 벽화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다. 충청남도 보령 역시 석탄박물관을 조성하였다. 보령의 탄광시설 재활용으로 특이한 것은 바로 냉풍욕장이다. 폐광된 옛 성주산 자락의 탄광이 지하 수백m아래에 있기 때문에 공기 의 대류에 의해 여름철에도 항상 12-14℃의 찬공기가 배출된다는 특징에 착안하여 여름철 냉풍욕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서늘한 바람을 이용해 버섯도 재배하고 버섯 음식점까지 인근에 생길 정도로 옛 탄광을 잘 활용하고 있다. 경상북도 문경도 탄광이 많던 가은읍 일대에 석탄박물관을 꾸몄다. 그리고 석탄을 실어나 르던 옛 문경선 철도의 일부를 레일바이크로 조성하였다. 구간은 진남역 주변의 왕복 4km 정도로, 정선의 레일바이크보다는 짧으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생긴 레일바이크라는 자 부심을 가지고 있다. 문경 역시 문경새재 옛길과 연계하여 경북 내륙의 관광도시로 도약할
  • 26. 예정이다. 한때는 탄광촌과 탄광시설들이 철거대상으로 거론된 적도 있었다. 잿빛의 을씨년스럽고 암울해 보이는 탄광시설과 마을들이 철거되거나 개발되었다면 산업화 시대의 우리 생활사, 탄가루를 마셔가며 석탄을 캤던 땀이 밴 지역사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칙칙하 기만 했던 옛 탄광지역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보고 다듬으니 훌륭한 관광지로, 우리의 지역 사를 돌이켜보는 좋은 역사공부소재로 재탄생함을 깨닫는다. 가난했던 시절, 시커멓기만 하 고 귀하게 보이지 않던 석탄이 사실 에너지자원의 수입대체와 산림녹화에 일등공신이었음을 이제 서야 알듯이 말이다. ▲정선레일바이크 : 가을철에는 수려한 단풍까지 감상할 수 있다.
  • 27. ▲ 화암동굴 : 폐광된 금광안에 일제강점기의 금채굴현장을 꾸며놓았다. ▲ 기차펜션 : 옛 전동차를 펜션으로 재활용한 것으로 시설도 매우 좋다.
  • 28. ▲ 정선 사북읍의 경관 : 정선의 대표적인 탄광지대였던 사북읍은 과거 탄광시설과 잿빛의 광산촌 뿐이었으나 최 근 관광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숙박시설이 많이 들어서는 등의 경관변화가 뚜렷하다. ▲ 태백체험공원 내에 복원된 옛 탄광촌 가옥들. 군대 막사같은 느낌을 준다.
  • 29. ▲ 태백체험공원은 옛 함태탄광을 바탕으로 꾸민 시설이다. 갱도안으로도 들어가 볼 수 있다. ▲ 영월군 마차리에는 옛 영월광업소 건물을 리모델링한 탄광문화촌이 조성되어 있다.
  • 30. ▲ 영월군 마차리의 옛 탄광촌은 석탄을 캐던 모습들의 벽화로 꾸며져 있어 지나가던 발길을 멈추게 한다. ▲ 영월군 마차리의 탄광문화촌 옆에 남아있는 옛날 광부들의 굴착연습 흔적. 굴착기로 바위에 구멍을 뚫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 31. ▲ 폐광의 찬바람을 활용한 보령 냉풍욕장의 모습. 여름철임에도 관람객들이 추위를 느끼는 표정이다(출처: 인터넷 연합뉴스). ▲ 석탄을 실어나르던 문경선과 가은선이 만나던 역인 진남역. 현재는 문경 레일바이크의 매표소 역할을 한다.
  • 32. 제5회 근대화의 상징에서 낭만의 아이콘까지, 철도의 역정
  • 33.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상징으로 꼽히는 것으로 철도만한 것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산업 화가 진행되면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빠르게 대량으로 수송해야 하고 노동력이 과거보다 빠르게 이동해야 하는데, 이런 시대적 조건을 충족시켰던 당시의 교통수단은 바로 철도였다. 영국에서 시작된 철도는 산업화된 국가들을 거쳐 식민지에까지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 땅에 철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99년의 경인선이었다. 서울의 노량진에서 인천의 제 물포까지를 연결한 33.2km의 이 철도는 세계 최초인 영국철도보다 74년 늦은 것이었다. 종 전에 육로로 12시간 걸리던 거리가 1시간으로 단축되었으니 가히 교통혁명이라고 해도 틀 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 경인선에 기관차가 지나갈 때 많은 백성들이 철로변에 나와 구경을 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후 경부선(1905), 경의선(1906), 호남선(1914), 경원선(1914) 등이 놓이면서 한반도의 X 자형 철도망이 완성되었다. 해방 전까지 장항선(1931), 경춘선(1939), 중앙선(1942) 등의 주 요 철도들이 깔렸고 1950년대부터는 태백선(1956), 영동선(1963), 정선선(1974) 등이 석탄개 발을 위한 산업철도로 부설되었다. 충북선(1958), 경전선(1968) 등 남북방향의 철도들을 횡 으로 연결하는 철도들도 속속 개통되면서 한국의 철도망은 1960년대 말까지 거의 완성되었 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최고의 육상교통의 자리는 철도의 것이었다. 그러나 자동차의 등장과 도로교통의 발달은 철도의 쇠락을 예고하고 있었다. 1971년 철도 의 여객영업노선이 최고에 도달한 후 1972년에 수려선(수원-여주), 1980년에 진삼선(진주-삼 천포), 1989년에 안성선(천안-안성), 그리고 1995년에는 수인선(수원-인천)이 차례로 폐선되 었다. 한편으로는 기존 철도의 복선화 및 전철화사업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수도권의 경춘선 과 중앙선의 일부구간은 전철화되면서 서울의 생활권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선로 직선화 및 개량사업으로 일부 철길을 폐선시켰다. 결론적으로 승객이 많고 경쟁력이 있는 노선은 더욱 빠르고 효율적인 운송이 가능하도록 개량된 반면, 승객이 줄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노선은 철로 자체가 없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도시지역에서도 폐선되는 철로가 생겨났다. 도시가 커짐에 따라 과거에는 변두리에 있던 철로가 이제는 도심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따라서 도심부에 뻗어있어 도시발달과 성장을 저 해하는 일부 노선들의 경우 지하화하거나 도심 외곽으로 철로를 옮기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서울의 경의선 철길이 공항철도와 더불어 지하화작업에 들어갔고 광주의 경전선도 외곽으로 이전하였다. 폐선이 되면 레일과 침목은 뜯겨져 나갔다. 그러나 원래 철길을 놓기 위해 조성한 부지인 지라 철로의 흔적은 어렴풋이 남았다. 대개는 좁은 도로나 농로 등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 았다. 그러나 소득수준의 증가와 여가시간의 확대, 삶의 질을 추구하는 욕구의 확산으로 옛 철길과 폐선부지는 새로운 용도로 재활용되기 시작했다. 이젠 쓰지 않는다고 무작정 레일과 침목을 뜯어내는 일도 옛날이야기가 되기 시작했다. 협궤열차로 유명했던 수인선은 많은 여행객들에게 아쉬움을 던져주고 간 철길이었다. 일 반적인 철도보다 폭이 좁은 협궤열차였기에 수인선은 낭만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더 이상 타는 사람이 없는 철도의 운명은 낭만을 명분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웠다.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이 문을 닫고 협궤열차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자동차가 다니는 시대에는 더욱 그랬다. 폐선되고 한참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수인선은 최근 그 흔적과 역사를 조금아니마 지역에 남길 수 있었다. 수원시 세류동에는 2006년에 수인선세류공원이 조성되었다. 인천에서 출발 하여 수원에 도착하는 수인선의 끝머리이자 수원에서 여주로 이어지는 수여선의 시작지점이
  • 34. 기도 한 옛 철도구간 600여m의 폐선 부지를 공원화하면서 수인선공원으로 이름을 붙인 것 이다. 시민들이 자동차의 두려움 없이 마음껏 보행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든 점, 공원을 만들 면서 옛 철도의 역사를 살렸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안산시도 아직 철로가 남아있는 고잔역 일대에 수인선 테마공원을 만들었다. 옛 수인선 전동차 모형을 전시하고 철로주변에 꽃밭을 조성하여 추억과 낭만의 이미지를 연출하였다. 협궤철로를 뜯어내지 않아 과거 수인선의 역사를 증명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이고, 시민 들의 여가공간으로도 손색이 없다. 광주광역시는 도심을 지나던 경전선 철길이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생겨난 폐선 부지를 슬 기롭게 재활용한 사례로 꼽힌다. 8km나 되는 폐선 부지를 광주시측에서는 경전철 등으로 활용하려 했으나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호남 제1의 도시이자 한국의 6대 도시 중 하나 임에도 시민들의 녹지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시민들의 요구에 결국 시당국도 정책을 바 꿔야 했다. 이렇게 해서 옛 폐선부지는 2004년부터 숲으로 둘러싸인 그린웨이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그린웨이는 신호등의 제약이 최소화되어 보행자들이 마음껏 걷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보행자 전용로로서 선진국에서는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 광주시는 이 구간을 푸른 길 공원이라고 명명하였고, 도심녹지가 부족한 시민들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산책로가 생겨 난 셈이다. 서울은 경의선 철로를 그린웨이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경의선이 일산, 파주 등지로부터의 통근자들을 위해 복선화되면서 인천공항에서 서울역으로 이어지는 공항철도와 함께 지하화 되고 있다. 지하1층에는 경의선, 지하2층에는 공항철도가 통과하며 지상의 옛 경의선 부지 는 그린웨이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될 예정이다. 그린웨이는 용산 근처의 효창 동에서 가좌역 일대까지 만들어질 예정이다. 레일바이크는 주로 옛 산업철도가 지나가던 지역에서 많이 활용하는 철로재활용 방안이 다. 옛날 석탄을 실어 나르던 정선선(증산-구절), 문경선(점촌-문경) 등의 철로에 더 이상 석 탄을 실은 열차가 다니지 않게 되자, 일부 구간에 레일바이크를 설치하고 관광객을 유치하 게 되었다. 폐광으로 침체된 지역경제를 관광으로 부활시킴과 동시에 기존 철로를 철거하지 않고 재활용하는 성공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중앙선 철도의 전철화 및 직선화로 폐선된 양 평 원덕역에서 용문역까지의 3.2km 구간에도 레일바이크가 조성되었다. 폐선되는 철도구간이 점차 늘어나면서 구간 내에 위치한 간이역들의 운명도 기로에 서있 다. 간이역들은 완전히 폐선된 경우 텅빈 채로 방치되어 있거나 폐선을 앞두고 이용객이 급 격히 줄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 등으로 나뉜다. 등록문화재 정책 덕분에 일 부 간이역들의 경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철거는 면한 상태라는 점이 다행이기는 하다. 그러나 완전히 폐선된 간이역의 경우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어 관리상의 어려움이 크다. 관리만을 위한 지속적인 예산의 투입도 부담스러운 실정이다. 간이역에 대해서는 현재 재활용방안에 대해 한창 논의 및 연구 중이다. 간이역들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 철도의 초창기와 근대사를 증언하는 소중한 건축물들이다. 간이역의 건축양 식을 통해 일제강점기 근대화와 선진문명이 기차역 건축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린웨이로 조성되는 구간의 간이역의 경우, 걷기나 자전거타기를 즐기는 사 람들을 위한 카페나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역사를 간직한 소규모 전 시관이나 박물관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로교통이 발달하고 마이카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철도는 육상교통의 1인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기차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다녔고, 꿈을 이루기 위
  • 35. 해 노력했다. 서울에서 부산을 2시간 만에 간다는 고속철도가 등장해서 철도의 르네상스를 꿈꾸는 지금에도 아직도 많은 이들이 옛 철길과 간이역을 보면 반사적으로 낭만과 추억을 떠올리고, 그 철길을 걷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는건 옛 철길이 묵묵히 그 자리에서 너무도 많은 이들을 편리하게 날라다 주었음을 사람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떄문이 아닐런지. ▲ 옛 수인선에서 수려선으로 이어지던 철길의 폐선부지를 활용한 수인선 세류공원. 철길이 지나간 자리에 벽돌로 표시를 해놓아 지역의 역사를 알 수 있게 해놓았다. ▲ 안산 고잔역 근처의 수인선 테마공원. 수인선 협궤철로가 아직도 남아있고 주변에는 해바라기 밭 을 조성하여 시민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오른쪽 철로는 오이도로 가는 지하철 4호선이다.
  • 36. ▲ 수인선 테마공원에는 옛 협궤열차모형도 전시해 놓아 수인선의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해놓았다. ▲ 광주광역시의 푸른길 공원에 아직 남아있는 철도 신호등.
  • 37. ▲ 광주도심의 옛 경전선을 이전시킨후 그 부지에 조성한 푸른길공원은 남부지방의 상록활엽수림이 울창한 아름다운 숲길로 지역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서울의 경의선 구간을 지하화하고 지상에 그린웨이를 조성하기 위한 사업이 한창중인 동교동 일 대.
  • 38. ▲ 경의선 그린웨이 조성사업 계획도. 용산구청 근처에서 홍제천 인근 가좌역에 이어지는 보행자전용 녹지대가 탄생할 전망이다. ▲ 옛날 석탄을 실어나르던 정선선 일부 구간을 레일바이크로 재활용하는 모습.
  • 39. ▲ 경춘선 구간인 서울 공릉동의 화랑대역은 이용객수가 하루에 10명 이하로 급격히 줄면서 3-4차례 밖에 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역이 되었다. 이에 따라 과거 대합실은 시민들이 실비로 커피를 직접 타 마실 수 있도록 해놓았다. 등록문화재 300호로 지정되었고 서울에서 유일하게 기차를 탈 수 있는 간 이역이었으나 그마저도 경춘선이 완전히 복선화되면서 더 이상 기차가 서지 않는 역이 되었다. ▲ 전철화사업으로 폐선화된 경춘선의 성북역-구리 갈매역까지의 구간을 경춘선 공원으로 만들 전망 이다. 갤러리 등의 문화시설을 갖추고 나무를 더 많이 심어 쾌적한 숲길을 만들 계획이다. 화랑대역 등 보존할 만한 간이역들도 보존될 것이다.
  • 40. 제6회 간척의 대상이 아닌 소중한 땅으로 인식되어
  • 41. 우리나라는 신생대 3기의 비대칭적 융기로 인해 동쪽은 높고 서쪽은 완만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따라서 동해안으로 흐르는 하천은 경사가 급하고 짧아 상대적으로 무거운 모 래를 동해로 운반하여 대규모 모래해안을 형성시킨다. 반면 서해안은 해안선이 복잡하고 조 류의 흐름이 활발하여 상대적으로 입자가 가늘고 고운 점토를 퇴적시킨다. 서해안에 갯벌이 드넓게 펼쳐진 이유이다. 한반도의 갯벌 넓이는 약 5,300㎢정도로 이중 남한이 2,550㎢를, 북한이 2,670㎢정도를 차 지하고 있다. 한반도의 갯벌은 이미 유럽의 북해연안, 중국의 황하 하구 일대, 브라질의 아 마존 하구 일대, 캐나다 동부 해안과 더불어 세계 5대 갯벌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네덜란 드, 독일, 덴마크에 걸친 북해 연안의 전체 갯벌이 9,000㎢인 것에 비하면 한반도의 갯벌이 얼마나 대규모이며 풍요로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갯벌 가운데 80%가 넘는 1,980㎢의 갯벌이 서해안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예 로부터 서해안 일대는 갯벌의 활용에 대한 관심이 집중된 곳이었다. 원나라의 고려침략기에 고려정부는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했다. 말은 갯벌에서 힘을 못쓰니 당시 세계최강 몽골의 기마병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고려정부는 강화도 일대의 갯벌을 간척하여 몽 골침략의 비상사태를 극복하려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인구의 증가와 농업생산력의 발달로 토지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서 해안의 갯벌에 대한 이권쟁탈이 치열해졌다. 서해안의 갯벌은 간척을 통해 농경지를 늘리기 에 안성맞춤이었고 어살이나 독살 등의 전통적 장치를 설치해 고기를 잡기도 좋았다. 또한 염전을 설치해 운영해도 막대한 이익을 건질 수 있었다. 따라서 갯벌의 소유나 간척권을 둘 러싸고 왕실의 종친들과 세도가의 권력자들끼리 치열한 다툼을 벌이기 일쑤였다. 특히 한양 과 가까운 경기만 일대의 서해안에 이들은 눈독을 들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오면서 갯벌은 본격적인 간척의 대상이 된다. 당시만 해도 식량부족에 허덕이던 일본은 한반도 서해안을 간척하여 쌀을 확보하고 일본의 농업이민도 적극적으로 꾀하게 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전북 김제․군산․고창 등지와 전남 함평․영암 등 호남의 서 해안 일대가 관심지역이었고 많은 간척지가 생겨났다. 충남 당진․아산․서산․홍성 등지에서도 간척이 이루어졌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갯벌은 이제 대규모 간척사업의 대상이 된다. 식량자급이 지상과제 였던 산업화 시기 갯벌은 드넓은 농토를 만들어내는 '도깨비 방망이'였다. 간척사업을 통한 농토의 확장이 쌀의 증산과 자급에 큰 기여를 하였음은 물론이다. 지속적인 간척으로 당진․ 해남․서산 등지가 논면적이 넓은 지역으로 떠올랐다. 갯벌을 간척한 땅은 농토로만 쓰이지 않았다. 바다를 끼고 있는 간척지는 원료를 수입하 고 제품을 수출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산업단지를 만들기에 매력적인 장소였다. 국토균형발 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그동안 산업화가 지체되었던 서해안 지방의 갯벌을 간척할 필요성은 높아졌다. 인구집중이 급격히 이루어진 수도권의 서해안에는 대규모 아파 트 단지나 신도시도 들어섰다. 갯벌을 매립한 간척지는 점점 만능이 되어갔다. 이미 세계적인 공항으로 발돋움한 인천국 제공항도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의 갯벌을 매립하여 조성된 곳이다. 21세기 동북아시아의 비 즈니스 중심지를 지향하는 인천의 송도 정보화신도시도 갯벌이 아니었다면 세상의 빛을 볼 수 었었을 것이다. 심지어 서울과 수도권 주민들이 버리는 쓰레기를 매립하는 수도권 매립 지도 갯벌을 매립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갯벌은 그동안 우리에게 간척의 대상으로 여겨졌고 너무나도 다양한 용도로, 요긴
  • 42. 하게 쓰여졌다. 그만큼 갯벌은 점점 사라져 갔다. 갯벌은 간척 이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땅으로 여겨졌다. 이미 우리가 이런저런 이유로 '없앤' 갯벌은 우리나라 갯벌의 40%에 달한 다고 할 정도였다. 이러다 우리나라의 갯벌이 다 사라져가는 건 아닐까...걱정과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짐과 동시에 갯벌의 가치와 효용에 대한 다른 시각의 연구가 쏟아지면서 갯벌에 대한 인식이 달 라지고 보전 움직임이 활발해진다. 즉, 갯벌은 쓸모없는 검은 땅이 아니라 생태계의 보고이 며 해양오염을 완화시켜주는 바다의 콩팥, 스펀지 기능을 한다는 점이 알려지게 되면서 본 격적인 보전운동이 벌어진다. 나아가 갯벌은 보전 그 자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여러 가지 목적과 용도로 재활용되고 있다. 기존의 주입식 교육이 아닌 창의력을 중시하는 구성주의 교육․열린 교육․수요자 중심교육 이 교육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부상하고 있다. 즉,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고 있고, 이에 따라 학습자 중심 교육, 다양하고 창의적인 사고 평가 등으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 서 체험학습의 필요성이 절실해지고 있으며 그 비중이 과거에 비해 크게 강화되고 있다. 갯 벌은 이러한 변화되는 교육목표에 아주 부합되는 체험학습장소이다. 학생들은 갯벌을 밟아 보고 느껴보고 갯벌의 생물을 관찰하면서 갯벌의 가치를 깨닫는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강 화도의 갯벌에는 갯벌센터가 만들어져 갯벌 체험과 동시에 갯벌에 대한 전시 및 교육의 역 할도 담당하고 있다. 갯벌은 공원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독일처럼 갯벌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갯벌과 습지를 생태공원으로 활용하는 곳들이 생겨나고 있다. 안산의 갈대습지공 원은 시화호 조성에 따른 수질오염을 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습지생태공원이다. 안산 시민들에게는 좋은 휴식처이자 시화호 수질개선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인천의 수도권 매 립지는 갯벌을 매립하여 쓰레기를 매립해왔지만 이를 흙과 숲으로 덮으면서 드림파크라는 거대 공원으로 변신하고 있다. 시흥은 갯벌과 폐염전 등을 활용한 갯골생태공원을 만들었고 인천도 비슷한 성격의 소래습지생태공원을 만들어 수도권 학생들의 자연학습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서해안의 그 밖의 여러 지역에서도 현재 갯벌생태공원 조성이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심미적인 가치의 변화도 갯벌의 용도를 변모시키고 있다. 서해안의 낙조나 철새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갯벌의 경관에 대한 관심과 호감이 날로 높아지고 있고 영화나 드라마, 다큐 멘터리 같은 영상물에서 갯벌을 비중 있게 다룸에 따라 앞으로 갯벌을 관광지로 인식하는 문화는 더욱 강해질 전망이다. 갯벌을 바라보고 그 주변을 거니는 것 자체가 좋은 생태관광 의 하나이며 갯벌에서 자연을 체험하는 친환경적인 축제도 개최된다. 충남 서산의 천수만 갯벌에서는 해마다 겨울이면 천수만의 갯벌로 날아오는 철새를 관찰 하는 철새축제가 열리며 전남 신안에서는 갯벌축제도 열린다. 충남 보령에서는 갯벌의 흙을 이용한 머드축제가 매년 여름 인기리에 개최되고 있으며 머드목욕을 상시적으로 할 수 있는 머드체험관도 마련되었다. 머드는 화장품, 비누 등을 제조하는 원료로도 쓰여 갯벌이 산업소 재로 까지 이용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갯벌은 넉넉하고 푸짐한 수산물을 품고 있고 생태계와 환경보전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온 국토의 소중한 일부였다. 하지만, 거무튀튀하고 쓸모없는 땅으로 인식되어왔기에 간척의 대상으로 여겨졌고 비좁은 국토에 대한 대안으로 꾸준히 간척되어왔다. 갯벌이 희생되면서 만들어진 땅은 우리의 식량자급과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교통의 발달에 큰 기여를 하였음 은 말할 것도 없다. 어찌 보면 갯벌이야말로 한국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는데 기여한 일등
  • 43. ▲ 김홍도의 그림 <어살>. 김홍도는 안산출신으 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이런 그림을 그린 것도 서 해안의 어살을 많이 보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 다. 그림과 같이 대나무를 설치하여 조류의 흐름 에 따라 이동하는 고기를 잡는 장치이다. 공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좀 신중해져야하지 않을까. 갯벌을 메우고 없애야 할 정도로 우리가 다급 하고 쪼들리는 단계는 분명히 아닌 만큼 갯벌 자체에도 무한한 생명과 존재이유가 있음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갯벌로 그동안 많은 이익을 보았고 갯벌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했던 만큼 이제는 갯벌에게 휴식을 좀 주어야하지 않을까. 갯벌 그 자체가 더 많은 이익과 경쟁 력을 가져다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리고 갯벌도 엄연한 우리 국토의 자산이자 특징이니까.
  • 44. ▲ 갯벌은 그동안 여러 가지 용도로 간척되어 사라졌다. 갯벌의 간척으로 농경지가 넓어진 김제는 지평선의 고장으로 불린다(상). 조성중인 송도국제도시는 인천의 갯 벌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다(중). 공업 위성도시 안산의 공단은 갯벌이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 45. ▲ 서해안의 갯벌은 낙조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며 관광지로서의 재 조명을 받고 있다(안산 대부도 일대). ▲ 갯벌은 최근 훌륭한 자연체험학습장으로 이용되고 있다(인천 소래습지생태공 원). ▲ 전남 신안의 증도갯벌에서는 갯벌축제가 열린다.
  • 46. ▲ 안산갈대습지공원은 시화호의 수질개선과 휴식 공간 제공을 위해 조성 한 인공 습지와 갯벌이다. ▲ 인천의 수도권매립지는 갯벌을 간척하여 폐기물을 매립하는 곳이지만 최 근 흙과 식생으로 덮어 공원화하고 있다. ▲ 서산 천수만 일대에서 열리는 철새 기행전에 날아든 철새들의 군무(서산 천수만 철새기행전 홈페이지)
  • 48. 제7회 한적한 포구에서 종합관광지로 변모하는 어촌들
  • 49.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수산업이 발달하였다. 바다로부터 생선과 소금, 젓갈 등을 얻어왔고 이들은 우리 식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식량자원이었다. 이러다보니 고깃배가 드나드는 포구나 염전이 분포하는 곳들을 중심으로 어촌이 자리 잡게 되었다. 많 은 배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큰 포구도 있었지만 대체로 우리나라의 어촌은 작은 규모였고, 어업과 농업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어업에 대한 이권이 강화되면서 어장이나 염전 등에 대한 권력층의 개 입과 사유화가 심해졌다. 어민들에 대한 부당과세가 가혹해지면서 어민들의 유망이나 어업 의 포기현상이 나타났고 이는 한때 어촌과 수산업 발달에 악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하지 만 어업은 그럼에도 점차 활성화되었고 고기가 많이 잡히는 해역에서는 대규모 파시가 형성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어업과 어촌의 변화 계기가 마련되었다. 개항 이 후 통상협정을 통해 청국과 일본에게 한반도 주변 해역의 어업권을 인정해 줌에 따라 우리 어민들은 재래식 어구와 소규모 어선으로 청국 및 일본 어민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항상 위기는 기회가 되는 법이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식 어구와 어법 의 도입, 주변국가의 경쟁 등으로 재래식 수산업을 근대적인 수산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동력선이 늘어나고 어망 중심으로 어업이 발달하자 어획량이 증가하고 포구의 기능도 더 욱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어촌이 활성화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대체로 얕은 수심과 겨 울철 수온 저하로 남해안이나 동해안에 비해 서해안의 어업발달이 불리하였고 이는 어촌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서해안의 천일제염업은 이런 점을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산업화와 고도성장의 시기에 어촌 뿐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촌락에서 나타난 현상이기는 하지만,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어촌은 급격한 인구감소를 경험한다. 더구나 어업의 환경도 점 점 어려워져 갔다. 국토의 면적을 넓히고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루어야 한다는 명분 하에 간 척사업이 꾸준히 진행되었고 수출중심의 경제개발전략에 따라 해안지역에 대규모 공업단지 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바다 및 갯벌면적의 감소와 공업화로 인한 환경오염은 어업과 어 촌의 쇠퇴를 가져왔다. 어업의 발달이 도리어 쇠퇴를 가져오는 역설적인 상황도 벌어졌다. 점차 동력선이 늘어나 고 어선이 대형화되었으며 어망이 현대화된 것은 분명 수산업이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이지 만, 이로 인해 수산자원의 남획이 무차별적으로 발생했다. 쌍끌이 어선을 통한 대량포획은 수산자원의 씨를 말리는 일이었고 이는 어촌과 어업의 침체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더구나 세계 각국이 200해리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선포함에 따라 어업구역은 더욱 좁아졌다. 우리나라는 같은 해역에 걸친 중국, 일본과 제각각 어업협정을 맺어 어업가능구역 을 설정해야했다. 또한 수입개방으로 인한 값싼 외국 수산물의 유입도 수산업의 기반을 위 태롭게 했다. 어업은 이제 거의 사양산업으로 전락해갔고 많은 사람들은 어촌을 떠날 수 밖 에 없었다. 이러한 어촌의 어려운 상황에 숨통을 틔워준 것은 바로 관광산업의 발달이다.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승용차의 보급이 급증하고 주5일 근무제의 시행으로 여가시간이 대폭 증가했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건설과 전국의 주요국도의 4차선 확장 등은 해안지방, 특히 해안선의 길 이가 길고 복잡한 서해안과 남해안 지방에 대한 접근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서해안을 중심 으로 펼쳐졌던 대규모의 간척사업은 해안선을 직선화시켰고 방조제들은 교통로 구실을 하면 서 해안지방에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들었다.
  • 50. 물은 인간의 마음을 여유있고 평화롭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수변공간을 의미하는 워터프론트(water front)는 소득수준이 높고 여가시간이 긴 선진국일수록 관광여가공간으로 선호되는 경향이 뚜렷하다. 앞서 말한 조건이 어느 정도 국토에 충족되던 2000년대부터 어 촌은 새로운 관광대상지역으로 변모한다. 사람들은 주말에 차를 몰고 교통이 좋으며 경치가 멋진 바닷가 마을로 찾아가기 시작했다. 도착해서는 바다의 경치를 감상하고 낚시를 하거나 갯벌체험도 한다. 음식점에 들어가 회나 조개구이, 바지락칼국수를 먹는다. 바닷가 카페에서 차를 한 잔 하기도 한다. 그리고 바닷가의 전망 좋고 예쁜 펜션이나 리조트에서 숙박을 한 다. 잡는 어업에서 양식업 등의 기르는 어업으로 전환됨에 따라 생선회와 같은 음식은 많이 대중화 되었다. 인터넷의 보급은 관광어촌의 활성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규모의 작은 어촌들이 자 신들의 마을을 홍보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다녀간 사람들이 인터넷의 블로그 등에 글 과 사진을 올리면서 순식간에 유명관광지로 부각되는 마을들이 늘어갔다. 마을들도 홈페이 지 등을 통해 홍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해양수산부의 어촌 및 바다관광 운동 도 한몫했다. 이러다보니 어촌에는 숙박단지와 음식점 거리, 수산물 판매장과 같은 시설이 입지하게 된 다. 마을 주민들 가운데는 자신의 집을 리모델링하여 민박집을 운영하거나 횟집을 차리기도 한다. 쓸쓸하기만 하던 한적한 어촌들은 관광어촌으로 새롭게 변신한다. 한편 어촌들도 마을 의 독특한 어촌관광 프로그램을 마련하면서 관광객 유치에 나선다. 원래 마을의 수산자원을 공동 관리하면서 지속가능하도록 보존하는 역할을 하던 어촌계는 이제 관광객들의 갯벌체험을 관리하는 조직의 역할도 수행한다. 갯벌이 넓은 서해안 지역의 어촌들은 갯벌 체험장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안산의 대부도 종현마을의 경우 수도권 도 시들과 가깝다는 장점을 살려 갯벌체험에 각종 레포츠 활동까지 결합한 종합어촌체험마을로 부상하고 있다. 강화도의 여차리와 장화리 등지도 갯벌체험으로 유명하다. 충남 태안반도 일 대에도 독살이나 자염 등의 어촌문화 체험마을들이 여럿 분포한다. 아름다운 경관을 테마로 하여 관광어촌으로 부상한 곳도 있다. 당진의 왜목마을은 지형적 인 특성으로 인해 서해안의 어촌임에도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마을로 유명하다. 강화도의 장화리는 낙조마을로 명성이 높다. 동해안에는 신년 무렵의 해돋이를 테마로 한 마을들이 분포한다. 수산물을 먹거나 구입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어촌들도 있다. 인천의 소래포구는 원래 인천 항의 부두건설로 인해 옮겨온 작은 어항이었다. 그러나 이젠 수도권의 대표적인 수산물 시 장이자 관광어촌으로 성장했다. 과거 수인선이 폐선되기 전에는 협궤열차로 찾아가는 낭만 의 장소였고 폐선된 지금도 수산물을 구입하려는 사람들과 추억의 나들이를 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더구나 근처에 습지생태공원이 생기면서 연계관광코스로 거듭나고 있다. 시흥의 오 이도는 간척사업으로 육지와 연결되었는데, 지하철 4호선의 연장과 시화방조제의 연결 등 교통망의 발달로 인해 대규모 수산시장으로 발돋움했다. 홍성의 남당항도 서해안 고속도로 의 개통으로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게 되었다. 지역과 관계없는 색다른 테마로 유명해진 곳들도 있다. 강원도 강릉해변에는 바리스타들 이 운영하는 카페들이 마을을 이루어 성업 중이다. 강릉은 원래 커피와 관계없는 곳이지만, 우리나라 바리스타 1세대들이 강릉으로 커피점을 옮기면서 커피의 도시로 탈바꿈한 곳이다. 강릉에서는 매년 가을에 커피축제까지 개최한다. 강릉의 정동진은 드라마 촬영지로 이용되 면서 전국적인 관광지가 된 마을이다. 통영의 동피랑 마을은 노후화된 주택들이 모여 있는
  • 51. ▲ 수도권의 대표적인 어촌체험마을로 발전한 안산 대부도 종현마을 의 어촌체험 안내판 달동네였으나 공공미술프로젝트에 따른 벽화그리기를 통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남해안 의 명소가 된 곳이다. 몇년 전 <포구기행>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적이 있다. 물론 책 관련 방송 프로 그램에 소개된 계기가 결정적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작은 어촌에 대한 그리움 이나 호감이 그만큼 컸던 것이 반영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어촌은 황폐화되고 쓸쓸 한 낙후지역이 아니라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을 받아줄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으로 변모한 다는 느낌이다. 환경만 잘 관리한다면 어촌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장소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 52. ▲ 서해안임에도 일출을 볼 수 있어 이색테마관광어촌으로 떠오른 당진 왜목마을의 일출 ▲ 수도권의 대표적인 관광어촌이자 수산물시장인 인천 소래포구 ▲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해진 강릉 정동진 해변
  • 53. ▲ 벽화를 통해 아름다운 어촌마을로 되살아난 통영의 동피랑마을 ▲ 경북 포항의 구룡포는 어업기지이자 관광어촌이기도 하다. 최근 구 룡포는 남아있는 일본인 가옥거리를 역사관광거리로 조성하고 있다.
  • 54. 제8회 도시의 발전을 가로막던 장벽에서 도시의 멋으로 승화한 옛 성곽
  • 55. 우리나라의 도시들은 크게 보면 중국의 옛 고전인 <주례(周禮)>에 나오는 도성의 배치원 리와 풍수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중국 주나라의 관직제도와 전국시대 각국 의 제도를 기록한 책인 <주례>의 고공기(考工記)에는 궁궐을 기준으로 하여 남쪽을 바라보 았을때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의 원리로 배치하고 도읍은 방형의 성곽으로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즉 궁궐의 서쪽에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 동쪽에는 조상의 묘가 들어 서고 궁궐의 남쪽에는 관청이, 북쪽에는 시장이 들어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읍지를 성벽으로 둘러쌓아 경계로 삼고 방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풍수사상에 따라 궁궐은 주산의 아래에 자리 잡고 앞으로는 하천과 평야를 두었다. <주례>의 고공기는 이후 가장 이상적인 도성계획의 원리로 여겨졌고,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 등 동북아시아 지역의 도성건설 과 계획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도읍지나 지방의 읍치와 같은 우리나라 전통도시들은 자형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방식으로 도시구조가 형성되었고 돌을 쌓아 만든 성벽이 도시를 둘러싸게 되었다. 또한 방어상 중요한 요충지인 도시주변의 산에 산성이 들어선 곳도 많았다. 기본적으로 우 리나라는 산이 많은 나라이고, 전통적으로 강한 외적의 침략을 받으면 산성에 방어선을 구 축하고 외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전술로 맞섰기 때문이다.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한 적 군은 우리땅 깊숙이 진격하기 어려웠다. 도시를 둘러싼 성곽은 평지와 산의 능선을 연결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도시들이 풍 수사상의 원리에 따라 주산과 조산 그리고 좌청룡과 우백호 사이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서 양의 성곽도시들이 대체로 평지만을 둘러싸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경관인 셈이다. 도시의 주변산지와 평지를 연결한 성곽의 풍경은 마치 성벽이 물결치듯 멋진 모습이었다. 산성의 경우는 포곡식과 테뫼식 산성으로 나뉜다. 포곡식 산성은 능선을 연결하여 골짜기 를 둘러싸는 형태이다. 범위가 넓어지기에 장기전에 유리하고 골짜기를 포함하기에 물을 얻 기 쉬웠다.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등 규모가 큰 산성들은 대부분 포곡식으로 축조된 것들이 다. 반면 테뫼식 산성은 산의 정상부분을 둘러싼 것으로 대체로 규모가 작아 적에게 노출되 는 공간이 적은 장점이 있다. 테뫼식 산성은 주로 역사가 오래된 것들이 많으며 테뫼식에서 점차 포곡식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 성곽은 방어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시설이었다. 삼국시대에 벌어졌던 치열한 3국의 대결은 결국 성곽 뺏기의 과정이었다.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군이 쳐들어왔을때 고구려군은 이른바 청야수성(淸野守城-들판을 비우고 산성을 지킴)의 작전으로 슬기롭게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해안지방에는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견고한 읍성들이 세워졌고 광해군과 숙 종은 북방세력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성곽의 신축과 보수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국왕들로 기록되었다. 심지어는 서양열강의 군사력을 막을 수 없는 방어시설임에도 흥선대원군은 해 안지방의 성곽과 돈대 등을 꼼꼼히 점검하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화약의 보급으로 중세유럽의 높고 튼튼한 성벽들이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되었듯 이, 이 땅을 위협한 서양열강의 근대식 화력을 우리 전통성곽들이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프랑스 군대를 막으면서 기세를 올렸던 강화도의 성곽들은 결국 서양열강의 군사력을 당해 내지 못했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지켜낸 서울성곽은 일본의 국권침탈을 막아내기는커녕 전 차로의 부설과 인구증가에 따른 도시계획의 명분으로 무참하게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서양문물이 도입되고 전차와 같은 근대적 교통수단이 등장하면서 그리고 도시인구가 증가 하면서 성곽은 마을과 도시를 지켜주던 고마운 방어시설에서 도시의 발전을 방해하는 애물 단지로 전락하였다. 더구나 성곽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보수해주어야 할 조선의 국가시스
  • 56. 템이 멸망하자 한번 허물어지거나 망가진 성벽은 점차 폐허로 변해갔다. 넓은 도로를 내거 나 전차를 개통하려면 성벽을 헐어야 했고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할 주택지를 개발하고 도시 의 영역을 확장하는데 성벽은 장애물에 불과했다. 망한 나라의 옛 성곽과 성벽은 저개발의 상징이 되었으며 지역의 침체와 퇴락의 분위기를 더욱 가속화할 뿐이었다. 산업화 이후 엄청나게 많은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진 다. 산업화된 현대도시에 옛 성곽이 차지할 자리는 없었다. 성벽은 더욱 훼손되었고 운좋게 살아남은 옛 성문은 자동차의 홍수 속에 외롭게 떠있는 섬과도 같았다. 남북이 대치했던 냉 전시대에 산성은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철조망에 갇혀버리기도 했다. 개발이 덜했던 지방 소 도시들의 경우 성곽이 보존되기는 하였으나 아무 기능도 못하는 빈공간이 되었다. 음식점이 산성 안에 모여 있는 경우는 그나마 사람들이 많이 찾았으나 바람직한 보존과는 거리가 멀 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성곽과 성벽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다.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역사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우리 성곽에 대한 새로운 시선들이 탄생했다. 수원의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2002년 월드컵 일부경기가 수원에서 치뤄지면서 우리 성곽의 관광적 가치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관광행태의 변화와 삶의 질에 대한 욕구도 성곽을 다시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명한 기존의 대중관광지 대신 테마가 있는 장소를 찬찬히 둘러보는 답사문화가 형성되면서 성곽 이나 산성은 매력적인 장소가 된다. 성곽에는 수많은 역사적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말이다.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건강을 챙기는 이른바 ‘웰빙열풍’과 ‘걷기열풍’은 많은 사람들을 등산 의 길로 인도했으며 일정한 구간에 걸쳐 둘러쳐진 성곽은 훌륭한 걷기장소가 된다. 지방자치제도의 실시 역시 성곽재발견에 기폭제가 되었다. 자신의 지역들을 찾아오고 싶 어하는 매력적인 장소, 테마가 있는 장소로 만들어야 지역의 홍보가 되고 관광수입이 생기 며 지역경쟁력을 가지는 시대가 되었다. 지방자치단체 입장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지역 내에 남아있는 옛 성곽이었다. 전국적으로 성곽에 대한 복원운동이 일어난 것도 그런 이유였다. 600년 도읍지 서울은 과거 한양을 둘러쌌던 서울성곽이 많은 멸실에도 불구하고 2/3가량 남아있다. 박정희 정부때부터 꾸준히 복원되었는데, 앞으로 나머지 부분을 가능한 한 최대한 도로 복원하여 201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예정이다. 서울시는 이미 서울 성곽을 둘러보는 산책로를 조성하고 있다. 북한산의 북한산성은 1990년대부터 시작하여 이 미 복원을 거의 마쳤고 수많은 등산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역시 201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예정인 수도권의 남한산성도 꾸준한 복원으로 거의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수원의 화성은 이제 세계적인 유적지가 되었고 화성행궁의 복원과 화성관광열차운행 및 수원화성박물관의 건립으로 관광의 가치가 더욱 높 아졌다. 강화도의 성곽과 돈대 등의 유적들은 고인돌 등과 더불어 강화도를 살아있는 박물 관으로 만들고 있으며 ‘강화 나들길’이라는 걷기코스에 포함되어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청주의 상당산성도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훼손이 덜한 대표적인 충청권의 성곽이다. 충청권은 과거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이 치열한 대결을 벌였던 접경지역이라 산성이 많이 남아있다. 충청남북도는 상당산성 외에도 단양의 온달산성, 보은의 삼년산성, 충주의 장미산 성 등을 묶어 ‘중원의 산성 기행’코스를 개발하고 있다.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은 과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안지방에 세운 읍성이다. 꾸준 한 간척사업으로 바다로부터는 멀어졌지만 그 역사성만은 그대로 유지하여 해미읍성 병영축
  • 57. ▲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준비 중인 서울성곽은 최근 산책로를 조성하여 많 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제를 매년 봄에 개최하고 있다. 축제의 인기가 높아지자 읍성 안의 옛 건물들도 순차적으로 복원되고 있다. 전북 고창의 고창읍성과 순천의 낙안읍성은 우리나라 읍성의 원형을 비교적 잘 간직한 곳들로 최근 인기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으며, 낙안읍성의 경우 읍성안의 초가집 들이 민박집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남의 나주는 성벽은 유실되었으나 성문은 대부분 남아있 어 주목받고 있다. 영남지방의 도시들도 부분적으로 성문이나 성벽을 복원하고 있다. 부산과 김해는 읍성의 부분복원을 시작했고 통영은 옛 통제영을 복원계획중이다. 과거 신라와 가야의 산성들도 충 청권의 것들만큼 많이 알려지거나 정비되지는 않았지만 지방자치단체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진주의 진주성은 1980년대에 복원되어 남강유등축제의 화려한 배경이 되고 있다. 영남의 남 해안 일대에는 과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장기주둔하면서 쌓은 왜성들도 남아있다. 제주에도 제주읍성의 흔적이 있고 과거 삼별초, 원나라,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안가 에 쌓은 환해장성이 남아있다. 옛 정의현의 읍성은 제주성읍민속촌으로 단장되었다. 올레길 로 관광객이 몰려드는 제주도는 이러한 옛 성곽들을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제 옛 성곽과 성벽들은 더 이상 도시의 발전과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다. 오히 려 그 도시의 지역성을 증명하는 훌륭한 랜드마크이자, 지역을 알리고 지역의 소득을 높이 는 경제적 자산이기도 하다. 지역주민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걷기코스의 구실도 한다. 분명히 성곽은 과거의 방어요충지 만큼이나 중요해지고 있다.
  • 58. ▲ 남한산성은 병자호란때도 결국 함락되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많은 등산객들이 찾는 곳이다. ▲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은 화성열차로 더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 고 있다. ▲ 강화도 덕진돈대 앞에는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세워진 비석이 있어 역 사공부에도 도움이 된다. “다른 나라 배는 통행할 수 없다...”
  • 59. ▲ 곡선미가 뛰어난 청주 상당산성은 미호천 유역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을 만큼 전망도 빼어나다. ▲ 보은의 삼년산성은 삼국시대의 것이라 축성양식 이 다르기 때문에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 60. ▲ 순천의 낙안읍성은 성곽도 둘러보고 읍성안 초가집에서 민박도 할 수 있는 체험형 관광지가 되었다. ▲ 진주성은 임진왜란의 역사가 담긴 곳으로 매년 가을 남강유등축제가 열린다. ▲ 사천의 선진리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쌓았던 왜성으로 지금 은 벚꽃이 아름다운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 61. ▲ 김해의 분산성은 가야의 산성으로 추정되며 이후 왜 구의 침입을 막는데 활용된다. 가야의 도읍은 김해시내 는 물론 낙동강 삼각주가 조망되는 위치에 있다. 김해 가 역사관광도시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 제주도 동쪽의 우도에 있는 환해장성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현 무암으로 쌓은 해안방벽이다. 아름다운 우도의 또 다른 볼거리이다.
  • 62. 제9‧10회 새로운 테마로 단장하는 농촌과 도시의 마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