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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소리 13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 부녀국채보상운동과 역사적 의미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려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종류와 내용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경과
<북후정> 국채보상운동과 헤이그 밀사의 활동
<특별기획> 앵무 염농산
<나눔과 책임> 핀테크로 내다보는 기부의 미래
<청년에게 길을 묻다> 대구 청년유니온 소개
2015 실크로드 경주! 청년이 다녀오다
<천둥문학> 홍시 하나 / 후박나무
<회원광장> 내 꿈의 結實을 찾아
충과 효를 모두 이룬 벽산 김.도.현
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꿈인가 생시인가, 하늘이 준 것인가
때가 온 것인가, 구름 안개 걷히는 것인가…
대한 광무 11년(1907년) 새봄의 제일 좋은 소식은
하늘에서 온 복음을 소리쳐 전하는 것이로다.
이 소식이 무슨 소식인고,
이 소식이 무슨 소식인고
이러한 좋은 소식을 우리는
급히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이오…
이 소식은 다름이 아니라
대구광문사 부회장 서상돈씨 등이
단연동맹한 호소식이로다.>
1907. 2. 25 자 황성신문 논설에서 따옴
국채보상운동
부녀국채보상운동과 역사적 의미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려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종류와 내용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경과
북후정
국채보상운동과 헤이그 밀사의 활동
특별기획
앵무 염농산
나눔과 책임
핀테크로 내다보는 기부의 미래
청년에게 길을 묻다
대구 청년유니온 소개
경북의 큰 행사, 2015 실크로드 경주! 		
청년이 다녀오다!
천둥문학
홍시 하나
후박나무
회원광장
내 꿈의 結實을 찾아
충과 효를 모두 이룬 벽산 김.도.현
국채보상운동기녑사업회 소식
사업회 소식
방문단체
박용옥
신동학
김지욱
이정희
윤석호
이창훈
이건희
이규동
서지월
윤봉중
김주환
이영재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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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2015. 가을 제35호
발 행 인
편집고문
편집위원
발 행 처
기획제작
표지사진
신동학
박용규, 서상호
엄창옥(위원장), 권오현, 남정원, 우웅택, 이용수, 전환길,
최경집, 최윤진, 황성하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 670(동인동 2가 42번지)
전화. 053-745-6753 팩스. 053-746-6753
www.gukchae.com E-mail. master@gukchae.com
밝은사람들 053-652-5700
나눔과 책임의
표지사진은 올 한해 추진되었던 세계기록
유산 등재를 위한 국채보상운동기록물
과 대구박물관 광복70주년 기념 특별전
시 ‘애국의 길 국채보상운동’의 타이틀,
그리고 보령에 세워진 김광제지사의
동상이다. 이렇게 국채보상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시민사회의 시대정신으로 되살려
내는 토대를 구축하는 과정을 통하여 세계
기록유산 등재로 한 걸음 더 다가가기를
바래본다.
입회안내>
회비안내
국채보상기념사업회원을 모십니다.
애국애족의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에 뜻을 함께 하고자 하시는 분은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 회원에게는
각종 학술행사 및 연구회에 참여하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며, 각종 동호회에도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회비는
연 1만원 이상입니다.
가입을 희망하시는 분은 전화 053)745-6753으로 문의하시거나
홈페이지(www.gukchae.com)를 방문해서 회원가입을 해주시면 확인 후 바로 답변을 드립니다.
회비를 미납하신 회원께서는 동봉한 지로용지나 은행계좌로 조속히 납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구은행 031-05-003912-4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김 영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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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국채보상운동과 역사적 의미
1. 들어가는 말
노일전쟁에 승리한 일제는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1905년 11월 17일에 황제와
참정대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국 5족을 데리고 황제의 승인인
직인도 없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우리의 외교권과
내정권을 일제가 통괄하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후 대한제국의 재정을
장악하기 위하여 시설개선 등의 명목으로 막대한 일본의 차관을 안겨
조약 체결 1년여에 이르러 나라의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원의 고리
차관의 거대한 나라 빚을 짊어지게 되었다. 만일 갚지 못할 경우 마침내
전 국토를 일본에게 빼앗기고 2천만 민족은 그들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민족자존의 절박감에서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대구를 시발로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갔다. 대구의 재력가이자 민족자존정신이 강한 서상돈 선생이 담배
석다을 끊은 60전씩을 모으고 모자라는 것은 1원, 10원, 100원, 1000원씩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출연하면 된다는 뜻을 발의하여 거족적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국채보상운동 성명서에 의하면 원래는 남성 중심의 운동으로 부녀들은 남자 부수적
존재로 참여함을 당연시하였다. 그러나, 전국 부녀들은 남자와 동등한 국민
자격으로 참여할 것을 주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부녀들의 독자적 참여운동도
역시 대구(남일동) 부인들이 기치를 올려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니 대구 부인들의
민족사적 존재감은 실로 높다 하지 않을 수 없다.
2. 국채보상을 위한 부녀계의 활발한 활동
국채보상운동이 발의된 것은 1907년 1월 29일 대동광문회 개칭
특별회에서였고 동 2월 21일에 국채보상취지서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어 전국에 선포되었고 같은 날 대구 북후정에서는 국채보상국민대회를
개최하여 대구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 취지서 내용을 보면 남자 중심의 운동일 뿐 부녀들의 참여는 논외로 하고
있었다. 즉 부녀들은 역사의 주변인으로 여겼던 것이다. 국망의 위기에 처해 있는
박용옥
前성신여대 교수
국채보상운동
Ⅰ
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천둥소리 5
매일매일 속에서 부녀들은 더욱 절박하게 국가 보존의
구국의식이 성장되고 있었는데 남자 세계에서는 그것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녀들을 논외로 한 국채보상취지에
순응하지 않고 부녀들의 독자적이고도 자발적인 적극적 참여를
주장하여 ‘60전론’의 10배를 훨씬 능가하는 자신의 소중한 패물을 내놓고 대구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조직하고 전국 부녀들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게 하는 강한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대구 북후정 국민대회 이틀 후인 2월 23일(음 1월 11일), 대구 동상 남일동의 7 부인들이 부녀의 참여
방법을 제시하지 않은 남성위주의 운동을 비판하고 우리 부녀들은 패물 폐지로 참여하겠다면서, “우리
부인 동포에게 삼가 고함”이라는 제목의 격문(檄文)을 작성하고 그 다음날 북후정에서 정운갑 모 서씨와
서병규 부인 정씨 등이 국채보상 부녀대회를 열어 대구 부녀들의 적극적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
격문을 『대한매일신보』 3월 8일에 개재하였다. 이처럼 대구에서 처음으로 국채보상 부녀단체인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가 출범된 것은 근대민족운동사에서 자못 큰 의미를 지닌다.
7명의 부인은 정운갑모 서씨·서병규처 정씨·정운화처 김씨·서학균처 정씨·서석균처 최씨·서덕균처
이씨 및 김수원처 배씨로 이들은 자신의 소유인 은지환·은장도·은가지·은연화 등 총 13냥 8돈쭝의
패물을 의연하였으니 1인당 약 2냥씩 되는 은패물을 나라 위해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다.
이 격문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 있어 어찌 남녀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가라고 강력한 항의를 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남자측 제안인 1인당 60전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수십 배에 달하는 패물을 부녀들의 의연 방법으로 제시하고 실행했다는 점이다. 이는 부녀들도 떳떳하고
독립된 평등 국민임을 선포한 것이다. 이는 봉건적 남녀 차별관에 대한 적극적인 도전이다.
국채보상운동에서 평등 국민의식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평양에 사는 가난한 선비(林基馨)가
국채보상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1식구 당 1원씩 7원을 의연하고 귀가하여 부인(崔信實)에게 자기가 한
일을 말하자 부인이 정색하여 남편을 책망하면서 “국가적 관념과 천부(天賦)의 자유는 사람마다 다 가진
것이니 나도 마땅히 국민된 의무를 이행하겠다고 하고는 시집올 때 가져온 은장도 한 개를 즉각
연출하였다. 이것은 전통시대의 순종적인 부녀상에 대한 도전으로서 국채보상 운동을 통해 부녀들의
평등 국민의식이 자리 잡고 성장하게 될 수 있었다.
우리가 함기 여자 몸으로 규문에 처하와 삼종지의에 간섭할 사 무기 없사오나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나 엇지 남녀가 다르리요. 듣사오니 국채를 갚으려고 이천만 동포들이 석달간 연초를
아니 먹고 대전을 구취헌다 하오니 족히 사람으로 홍감케 할지요. 전장에 아름다움이라.
그러하오나 부인은 논하지 않는다니 대저 여자는 나라 백성이 아니며 화육중 일물(化育中一物)이
아니오. 본인 등은 여자의 소처로 일신 소정이 다만 패물 등속이라. 태산이 흙덩이를 사양치
아니하고 하해가 가는(細) 물을 가리지 아니하기를 적음으로 큰 것을 도우나니 유지하신 부인
동포들은 다소를 불구하고 혈심 의연하와 국채를 청장하심이 천만 행심
천둥소리 7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3. 부녀 참여의 전국적 확대와 활동상
대구에서 일어난 부녀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으로 확대되어 각지에서 의연금 수합 방법에 따라
1)패물 폐지형, 2)감선(減膳(饌)·감반(減飯)형, 3)현금형, 4)위 3가지의 혼합형 등 다양한
부녀 활동이 있었다. 당시 조직 활동된 부녀 국채보상운동 단체들은 서울(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 부인
감찬회, 국채보상여자의성회)을 비롯하여, 경기도(인천 국미적성회, 김포검단면국채보상의무소, 안성군
장터동국채보상부인회, 남양군부인의성회), 충청도(진천군국채보상부인회, 음성군금자면무극리패물
폐지부인회), 전라도(금산봉황정부인회, 제주도삼도리부인회, 제주함덕리국채보상기성회), 경상도(대구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 부산항좌천리감선의연부인회 단연동맹부인회, 영도
국채보상부인회, 수정동부인의연회, 진 애국부인회 애국상채회, 창원항국채보상부인회, 경주군국채보상
부인회, 금상부인의연회), 황해도(안악군국채보상탈환회), 평안도(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 삼화항비석동
예수교부인국채보상회, 선천군부인의성회), 함경도(청북강계부인급수보상회, 영흥군국채보상감반회) 등
전국적이었다.
전국에서 부녀 자신들의 독자적 조직으로 활동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부녀들은 이미
구국에는 남녀 차별도 지방적 차별은 물론 신분 직업의 차별도 없다는 국민평등의식을 확고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평양 주희(酒姬) 31명의 32원 출연과 대구 기생 앵무(鸚鵡)의 100원 출연은
국채보상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국채보상운동 참여를 통해 부녀들은 스스로 주도권을
가지고 국권을 회복시키겠다는 놀라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3월 14일 조직 활동된 삼화항(진남포)의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에서는 1천만 여성이 각자 가지고 있는
3원 이상의 패물을 의연하면 3천만원이 될 것이니 이 중 1천만원은 국채를 보상하고 1천만원은 은행을
설립하고 1천만원은 학교를 설립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처럼 광대한 포부를 가지고 활동한 경우에서
우리는 부녀들의 구국의식이 실로 강렬했음을 볼 수 있다.
부녀들이 국민된 권리와 의무를 내세우면서 독립된 참여와 활동을 한 것은 국채보상운동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4. 맺음말 : 남녀동권의식의 성장
국채보상운동은 국민의 경제력을 결집하여 국권을 수호하겠다는 국민적 각성에 기초한
거대한 민족운동이다. 여성이 이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은 여성의 각성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여성의 참여는 한국근대여성운동사에서 볼 때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다.
첫째, 국권수호라고 하는 국가의 중대사에 부녀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남자만의 독점이었던
정치와 사회 문제에 부녀들도 참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남자 찬성원의 지도 아래 진행되던
개화기 여성운동에서 탈피하여 이제 부녀들이 독자적으로 구국적 운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남녀동권의식의 적극적 발전이다. 종래 개화사상가들은 남자편에서 여성들에게
남녀동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자편에서 주는 식의 남녀동권 관념을 완전히 벗어버린 것은
국채보상운동에서였다.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 취지에 밝혀졌듯이 남녀동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권수호와 같은 민족적 과제 해결에 부녀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의식이
크게 성장되어 있었다.
국채보상을 위해 최초로 조직된 여성단체인 대구의 남일동폐물폐지부인회의 조직 동기 자체가 이 중대한
국가사업인 국채보상운동에 남자들이 여성을 제외하고 있는 데에 격분하여 전국여성을 향해 분발하여
일어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을 돌림으로써 시작된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에는 강한 국권회복의식과
남녀동등권의식이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남존여비사상 내지 남성 우월적
윤리관과 생활관습에 대한 도전과 저항이 분명하게 보인다.
국채보상에의 여성 참여를 적극 권장하였던 이준열사도 여성의 참여는 국채를 갚고 남녀평등도 획득하는
중요한 운동임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 대한부인회도 부녀의 구국운동이오 이 국채보상부인회도 부녀구국운동으로서 그 성격은 같다
하겠으나 하나는 관념적이고 이상적이며 하나는 실천적이오 효과적인 까닭입니다 … 우리나라를
위하는 일을 우리 남자들만이 한다면 이는 1천만 밖에 아니됩니다 … 부녀는 거내하여 문호를 나지
아니한다는 그러한 구투의 부녀 생활방식은 앞으로는 전연 이론이 서지 못하는 생활방식일까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귀존한 남녀가 즉 다시 말씀하면 하나님께서 꼭같이 사랑하는 자녀가 된
우리 남녀의 권의가 무엇이 다를 것이 있습니까. 남녀는 평등입니다. 남녀는 영원히 평등입니다…
숙녀 여러분 우리나라의 역사는 결코 남존여비인 것같이 된 것은 결국 부녀되시는 당신네들이 무력
불찰의 결과 … 오늘 이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하신 것은 의례의 일이오 … 국권 찾는 운동이라면
남녀를 물론하고 목숨을 바쳐 피로 주검으로 싸워가면서 기어코 실천 실행하여야 되겠습니다 …
우리의 국채를 우리가 갚고 남녀평등으로 복영이 있고 은혜가 깊은 국민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 남녀가 꼭같이 분투하기를 바랍니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부녀에 대한 남성들의 태도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종래의 봉건적인 남녀관을 탈피하고 부녀의 자발적인 애국적 참여정신을 극구 찬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녀들의 참여가 오히려 남성들의 국권수호의지를 고양시키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남성들이
깊이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에 나타난 남녀평등적인 사회 참여에는 아직도 걸림돌적인
사회적 역사적 과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녀국채보상운동은 전통적인 남녀차별관을 타파하고
민주사회로 지향해가는 단계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려면
1907년으로부터 100주년이 되던 2007년 2월21일에 대구 엑스코에서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처음으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총 정리하는 작업이 있었습니다. 그 성과물로
『국채보상운동 100년』(대구광역시)이 발간되었고요, 이 작업이 기초가
되어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OW) 등재 추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묵시적·명시적으로 등재를 위한 작업기간이
8여 년이 되었고, 아직도 부족한 점이나 불명료한 부분이 이곳저곳
보이지만, 여기까지의 성과를 묶어서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신청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대구시와 시민들의 성의를 힘입어
신청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금년 8월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록물의
정리 작업이 아직 완전히 끝이 나지 않았지만, 이 모든 정리가 끝날
때까지 등재신청을 미룰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국채보상운동 자료를 정리하면서 그 기록물이 뿜어내는 어떤
힘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100여 년 전 우리의 선조들이 국채보상 취지문을
작성하여 그것을 마을마다 전달하고, 마을에서는 통문을 작성하여
이웃마을로 보내고, 마을마다 국민들은 가진 것 없는 것 다 모아 의연금을
내고, 그것을 성책에 하나하나 기록한 그 기록물을 보면서,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켜보려는 그들의 간절한 마음이 감당할 수 없는 힘으로 살아나
피부에 와 닿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선조들의 마음은 틀림없이
애국심이었을 것입니다. 그 애국심이 기부라고 하는 평화적 방식으로 온
신 동 학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상임대표
천둥소리 7천둥소리 9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그것을 ‘백성된 도리’라고 말했습니다. 나라가
없어지면 백성도 없어지니,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다해 나라를 건져보자는 애국심이었습니다. 나라를
건져내려는 책임이었습니다. 이 국채보상운동 정신이 오늘 우리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세계시민에게
시급하게 호소하고 있다고 우리는 느꼈습니다. 시민의 사회적 책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호소되는
요즘, 세계경제가 외환위기, 부채위기 속에서 채무자의 책임과 채권자의 책임이 동시에 요구되는 요즘,
우리가 느꼈던 힘은 국채보상운동 정신이 세계사회의 시대정신으로 되살아나야 한다는 자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서양의 시민적 자유와 권리의 상징인 「권리 장전」을 늘 생각해 왔습니다만,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이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바로 100여 년 전 우리 선조들이, 의식적으로든지
무의식적으로든지, ‘백성의 책임’을 다하려고 몸으로 쓴 「책임 장전」임을 불현 듯 깨달았습니다. 이
정신이 세계시민사회에 전달되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느꼈습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 있습니다만, 10월 4일부터 6일까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아부다비에서
제12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가 개최되었고, 그곳에서 2014-5년의 신규
세계기록유산 47건을 유네스코 사무총장에게 전달했습니다. 61개국에서 신청된 88건의 자료를 14명의
전문위원의 심사를 통해 최종적으로 선정된 것입니다.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파리 현지시간 9일 이들을
유네스크 세계기록유산(2015년) 사례
(http://www.unesco.org/new/en/communication-and-information/flagship-project-activities/memory-of-the-
world/register/access-by-year/New-inscriptions-on-the-International-Memory-of-the-World-
Register-(2014-2015))
국채보상운동
Ⅰ
천둥소리 111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최종 승인함으로서 새로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확정되었습니다. 그 기록물 속에 한국의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와 <한국의 유교책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사입니다.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AC)는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기록물이 대한민국의
비극적 냉전 상황과 전쟁의 참상을 전 세계인에게 전하고 인권과 보편적 인류애를 고취시킨 세계 방송사상
기념비적 유산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동시에 <한국의 유교책판> 역시 ‘문중-학맥-서원-지역사회’로
연결되는 지식인 집단의 500년간 지속된 유교공동체의 집단지성으로 세계사적 가치를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이번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흥미로운 몇가지 등재 목록을 보면, 독일의 경우는
‘바흐의 B마이너 미사(Mass in B minor) 악보’가 등재되었고, 이스라엘에서는 ‘뉴튼의 신학논문’(Isaac
N e w t o n’s T h e o l o g i c a l P a p e r s)이 등재 되었습니다. 언론에 알려진 대로 중국에는
‘난징대학살기록물’이, 일본에서는 ‘마이쮸르 항의 귀환’ 자료와 ‘퇴지사(寺)(교토)의 백개 상자속의
아카이브’가 등재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여러 기록물이 등재되었습니다만 특히 처칠수상의 여러
공적·개인적 기록물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등재한 기록물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독일과 영국 그리고 미얀마는 당시 버마의 왕이 영국 왕 죠지2세에게 보낸
‘황금편지’(The Golden Letter)를 공동으로 등재했으며, 포르투칼과 스페인은 ‘요한계시록의 주석서
사본’도 그 예로 들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록물이 인류의 평화와 상호이해를 위해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네스코 사무총장 이리나 보코보씨도 이번 등재목록을 발표하면서 ‘이러한 인류의 기록유산과 소중한
기억을 보존하는 작업이 국제적 상호협력과 상호간의 이해 증진과 인류의 평화를 건설한다는 점에서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의 복리증진에 크게 기여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형식적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느냐 못되느냐를 넘어서서, 이
유산이 인류의 평화와 상호이해에 크게 기여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 지역사회가 힘을
보태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선적으로는 우리 대구·경북지역에서만이라도 그 정신을 공유하고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기록물의 가치를 공유하기 위한 서명운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국채보상운동처럼 지역을 넘어 국가적으로 서명운동이 확산되었으면 합니다. 우리지역에서
국채보상운동 정신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세계시민사회가 공유할 수 있도록 자료를 정리하는 일입니다. 현재는 한국 국민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옛날 글씨체로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우리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본 기록물의 기본적인
해제작업과 데이터베이스 구축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만, 상당한 비용이 드는 관계로 여러 각도의
협력을 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나아가서는 북한지역에 산재하고 있을 국채보상운동 기록물들을
모으고 정리하고 해독 가능하도록 분석하는 일도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사람만이
아니라 외국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전시공간과 체험공간 그리고 기록물들을 심도 있게 연구하고
국제적으로 교류하는 아카이브공간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는 일이 한국 그리고 대구의 국채보상운동
유산을 세계적 유산으로 만드는 길일 것입니다. 물론 이런 작업은 단숨에 이루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 한 두 사람이나 단체가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국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힘을 모아
협력하여 이룩해나갈 일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선조의 지혜가 인류의 지혜가 되도록 상호이해하고 협력하며 그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세계기록유산으로의 등재는 이 과정에서의 당연한 결과물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1)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종류와 세부 사항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서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한 기록물은 모두 4개 종류
2,472건으로써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직접 소장하고 있는 자료와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연구원, 한국국학진흥원, 서울대도서관, 한국금융사박물관 등 관계기관과 개인이 소장한 자료들이다.
이를 소장처별로 분류하면 아래 〔표1〕과 같다.
〔표1〕 기록물의 소장처별 분류
이를 다시 시기별로 분류하면 〔표2〕와 같다.
〔표2〕 기록물의 시기별 분류
김지욱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이를 주제별로 분류하면 〔표3〕과 같다.
〔표3〕 기록물의 주제별 분류
이를 문체별로 분류하면 〔표4〕와 같다.
〔표4〕 기록물의 문체별 분류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중 가장 시기가 빠른 것은 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 기사 「국채 1,200만원
보상취지」이며, 가장 늦은 것은 1947년 류자후의 「이준 선생전」이다.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형태는 모든 기록물이 종이류로 구성되어 있다. 종이류도 더 자세히 살펴보면,
두루마리 형태, 편지글 형태, 공문 형태, 성책 형태, 그리고 영수증 형태가 그 당시 직접 활동한 사람들의
흔적이며, 언론을 대표하는 신문에 난 기사들은 모두 신문 형태이다. 그리고 문집, 잡지에 게재한 것들은 책자
형태이며, 통감부 문서들은 정부 보고서 형태로 남아 있다.
취지서, 발기문, 회문, 편지글 등은 모두 한지로 된 낱장이거나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으며, 성금의 액수와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은 소책자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신문에 난 것은 1면 등 일반 지면에 게재되기도 했지만 의연자가 많을 때에는 별책으로 인쇄하여 발행하기도
하였다.
기록물의 사이즈는 10cm 정도의 영수증 같은 작은 사이즈부터 70cm정도의 길게 작성된 것도 존재한다.
기록물의 문체는 대부분이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으나, 일부 문서는 순수한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순수
한글도 몇 건 남아있다.
2)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내용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내용은 애국선열들의 활동 중 당시의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계몽운동이나 구국활동의
상황들이다.
그 기록물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국채보상운동의 발단과 전개를 기록한 수기 기록물들이다. 주로
소장처
국채
보상
운동
기념
사업회
독립
기념관
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
연구원
한국
국학
진흥원
서울대
도서관
한국
금융사
박물관
연세대
학술
정보원
국립
고궁
박물관
국가
기록원
고려대
학교
도서관
개인
수 량 22 3 117 792 52 454 8 378 639 4 1 2
비 율 0.9 0.1 4.7 32 2.1 18.4 0.3 15.3 25.8 0.2 0 0.1
시 기 1907년 1908년 1909년 1910년 이후 기 타
수 량 1,881 399 53 124 15
비 율 76.1 16.1 2.1 5 0.6
종 류 수 량 비 율
국채보상운동 발단과 전개에 관한 자료 : 발기문 및 취지문 등 12 0.5
국채보상운동의 확산에 관한 자료 :
각 지역(간)의 연락문(회문, 통문), 서간문, 기부자 명단(성책), 기부 영수증 등
75 3
국채보상운동의 전개상황을 전달한 언론 자료 :
발기문, 취지문, 성금자 명단, 논설, 광고, 관련 기사(국내외), 잡지 등
2,264 91.6
국채보상운동 관련 통감부 자료 : 공판기록, 통감부 자료 121 4.9
종 류 한 문 국한문 혼용 한 글 일본어
수 량 74 2,277 0 121
비 율 3 92.1 0 4.9
1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천둥소리 13
국채보상운동
Ⅰ
천둥소리 151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발기문, 취지문 등이다. 국채보상운동 발기문 및 취지문은 전
국민에게 국채보상운동에의 참여를 호소하기 위해 이 운동의 취지와
목적 등을 설명하는 기록물이다. 발기문 및 취지문은 한지에 한문
혹은 한글혼용체의 붓글씨로 기록되어 있고, 내용은 대체로 ‘국민 된
책임으로 금연 등의 기부운동을 통해 국채 1,300만 원을 갚아서
나라의 위기를 구하자’라는 내용이다.
둘째, 국채보상운동의 확산과 파급을 기록한 수기 기록물들이다. 이는 각 지역 간의 회문 및 통문 등 연락문,
보상소 규약, 기부자 명단, 기부 영수증 등이다. 국채보상운동의 확산에 관한 자료는 지역 간 또는 지역 내
국채보상운동 주체들이 주고받은 회문 및 통문, 국채보상소의 운영 규약, 개인 또는 단체 간에 주고받은
서간문, 국채보상운동의 지역별 참여자와 모금액을 파악할 수 있는 기부자 명단, 그리고 기부 영수증 등의
기록물이다. 이 기록물은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전개되는 구체적 과정을 담고 있다.
셋째, 국채보상운동 관련 일제 정부 기록물들이다. 이는 주로 통감부 문서 및 총독부 기록물 등이다.
국채보상운동 관련 일제 정부 기록물은 통감부 및 총독부가 국채보상운동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관계기관으로부터 받은 보고서와 이에 대해 정부의 방침을 하달한 명령서이다. 이 자료들을 통해 일제가 펼친
국채보상운동 방해 공작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국채보상운동의 실황을 전한 신문 및 잡지의 언론 기록물들이다. 구체적으로는 신문 및 잡지에
게재된 발기문, 취지문, 기부자 명단, 논설, 광고 등 관련 기사들이다. 국채보상운동의 전개상황을 전달한
언론 기록물은 1900년대 초반 국내외에서 발행된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7종의 신문 및
「대한자강회월보」 등 3종의 잡지에 수록된 국채보상운동 관련 자료이다. 언론 기록물은 국채보상운동의
참여를 호소하는 발기문, 취지서, 논설과 광고문,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개별지역이나 개인의
상황을 기록한 기사, 모금운동 과정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건을 소개한 기사, 성금 참여자와 모금액을 파악할
수 있는 기부자 명단과 금액 등을 담고 있는 기록물이다.
국채보상운동은 이러한 기록물들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의미인 애국애족
정신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역사적 교훈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리라 기대해 본다.
13. 02. 21.
13. 05. 18.
14. 11. 05.
15. 01. 13.
15. 01. 27. ~ 28.
15. 02. 11.
15. 03. 03.
15. 03 .15.
15. 03. 24.
정기이사회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키로 결정
운영위원회에서 기록유산 등재 준비팀 결성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세미나
- 강사 전택수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전 사무총장
등재추진 사무국 개설
- 전문위원 1명
광주 518기록물, 새마을운동기록물 등재 관련 벤치마킹
문화재청 담당부서인 국제협력과 방문, 자문
시의회의장 및 문화복지위원회 예방, 자문
지역 국회의원 예방(서상기 국회의원) 및 국회 차원의 지원 자문
대구시장 방문, 취지 설명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경과
천둥소리 171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북후정
Ⅱ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1907년에 일어난 국채보상운동과 헤이그 밀사의 활동에는 어떤 관련이 없는 것일까?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것은 1907년 2월 19일이며, 고종의 특사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밀사 3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6월 25일이었다. 헤이그 밀사의 활동은 국채보상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던 시기와 거의 겹친다. 또 하나 헤이그 밀사의 한 명인 이준(李儁, 1859-1907)은 4월 초 결성된
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 초대 소장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양자 간에는 분명히 어떠한 연관이
있을 것 같아 헤이그로 조사 여행을 떠났다.
국채보상운동과
헤이그 밀사의 활동
15. 05. 08.
15. 05. 08.
15. 05. 08.
15. 05. 20.
15. 06. 26.
15. 07. 14. ~ 09. 06.
15. 07. 20.
15. 08. 05.
15. 08. 14.
15. 08. 21.
15. 08. 24.
15. 08. 27.
15. 08. 28.
15. 09. 10.
15. 09. 23.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 결성
- 고문단(상임고문 권영진, 김관용, 서상기) 54명
- 자문단(위원장 전택수) 39명
- 추진위원(공동위원장 김영호, 문희갑, 신동학) 73명
- 실무분과위원장 9명
- 추진단 및 사무국(단장 1명 등) 구성 완료
추진위원회 시민 보고회 및 발대식 개최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범시민 서명운동 전개
국회 세미나 개최
지역연구 학술대회 개최
국립대구박물관 주최 ‘애국의 길 국채보상운동’ 특별전시회 개최
대구자원봉사포럼과 함께 하는 포럼 개최
- 주제 : ‘국채보상운동과 시대정신’ 포럼 개최
- 참석 : 150명
자문위원단 학술자문회의
추진위원회 자문단 전체 회의
대구KBS 방송국 특별 TV토론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유네스코 등재
신청의 당위성’
대시민 교육을 위한 전문강사 양성과정 시행
- 주제 : ‘국채보상운동과 나라사랑’
- 참석강사 : 30여 명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여성포럼 개최
- 주제 : ‘국채보상운동의 책임정신’
- 참석 : 450명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서 제출
등재용 도록 한글판 배포(심사위원 및 추진위원 관계자)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 대시민 보고회
천둥소리 191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헤이그의 이준열사기념관
헤이그의 이준열사기념관(YI JUN PEACE MUSEUM)을 찾은 것은 공교롭게도 헤이그
밀사가 108년 전 도착한 그날이었다.
이 기념관은 헤이그의 차이나타운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이 기념관의 건물은 세 명의 밀사가 머물고
이준이 7월 14일 목숨을 거둔 ‘더종(DE JONG)호텔’이었다. 네델란드 교포인 이기항 원장이 1990년대
초반 이 건물에 밀사가 머물렀다는 것을 알고, 거의 폐허가 되어 있던 이 건물을 헤이그시로부터
사들였다. 이기항 원장은 부인인 송창주 관장과 함께 밀사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건물을 수리, 한국
정부와 경제 단체의 도움을 얻어 1995년 개관한 것이 현재의 기념관이다. 개관 이후 이기항 원장과
송창주 관장은 거주지인 암스테르담에서 기념관까지의 먼 거리를 왕복하며, 휴관일인 일요일을
제외하고 20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근무하고 있다.
이 건물의 2층과 3층에 위치한 기념관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각 전시관, 한국과
네덜란드 관계 전시관, 그리고 기념관의
활동을 소개한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또 한 전 시 관 의 벽 면 에 는 역 대 한 국
대통령의 헤이그 밀사의 고귀한 뜻과
활동을 되새기는 친필 휘호가 걸려 있다.
기념관을 방문한 날 한국에서 이곳을 찾은
많은 시민과 학생을 만났으며, 프랑스 청년
방문객도 만났다. 이곳을 찾은 방문객은
한국인과 네덜란드인뿐 아니라 미테랑 전
프랑스 총리도 이곳을 찾았으며, 일본인
교수와 학생, 언론인도 이곳을 찾았다.
헤이그 밀사는 도착 이틀째인 6월 27일 44개 참가국 대표에게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이
참가할 수 있도록 간곡히 부탁하는 내용과 일본에 의한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부당성을 담은
‘항고문(抗告文)’을 보냈다. 항고문은 다음날 민간인 단체가 주재하여 만든 ‘만국평화회의보’에
프랑스어로 게재되었다.
헤이그의 이준열사기념관
이 항고문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은 헤이그 밀사 중의 한 명으로 전 러시아공사관의 서기관이었던
이위종이었다. 그는 러시아공사인 이범진의 차남으로 어릴 때부터 부친을 따라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지서 생활했기 때문에 불어, 영어,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헤이그 밀사가 이와 같은 항고문을 보낸 이유는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을사늑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만국평화회의의 정식
초청국의 자격이 부여되지 않았다.
헤이그 밀사의 항고문
항고문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일본은 청일전쟁 선전 포고문, 청일전쟁 승전으로 체결된
시모노세키(下関)조약, 그리고 러일전쟁의 선전포고문, 러일전쟁의 승전으로 체결된
포츠머스조약, 그리고 1904년 2월 체결된 한일의정서에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이 명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905년 11월 10일 고종 황제에게 조선의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를 강요했다. 고종 황제가 이를 거절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각 부(部) 대신들에게 이를
받아들이도록 강압했다. 결국 강압에 이기지 못한 5개 부의 대신(일명, 을사오적)이 찬성하여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의 체결에 대해 정부 관료와 국민은 맹렬히 저항했다. 육군중장인
민영환은 “나의 죽음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유린하는 자들과 투쟁하는 용기와 힘을 북돋을 것이라는
희망과 목적”으로 자결했다. 그에 이어 전 총리대신 조병세가 음독자살하고,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켜
붙잡힌 후 쓰시마로 유배되어 음식을 거부한 채 순직했다. 일본이 군대를 해산하자 전국 각지에서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일본은 한국을 경제적으로도 침략했다. 한국인은 일본의 철도 건설에 강제로 동원되었으며,
화폐정리사업으로 한국인 상인은 큰 손해를 입었고, 일본에서 이주한 일본인은 각종의 약탈을
자행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사법부의 인사권을 장악, 친일적인 판사를 임명했는데 이들은 일본인의
이익을 보호하는데 전념했다.
상기와 같은 내용을 적은 후, 항고문의 마지막 부분에 국채보상운동 관련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내용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천둥소리 212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 내용을 마지막으로 항고문은 끝을 맺었다. 이 중요한 결론 부분에 국채보상운동을 크게 드러낸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항고문의 구성 순서는 ‘을사조약’의 강제성을 먼저 설명한 후, 이에 대해 정부
관료와 한국인이 어떻게 저항했는지, 그리고 일본의 경제적 침략의 악랄함을 보여준 후, 그 마지막에
국채보상운동이 배치되어 있다. 헤이그 밀사는 한국인이 일본의 어떠한 도움 없이도 자치적으로
국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시기 때 금모으기운동이 세계의 찬사를 받은 것은 “한국인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한 자주, 독립의 정신은 항고문 가운데 “국가 정치와 공업 발달에 불가결한 기본 요소를 이루는
민족주의 사상과 독립 정신에 한국민이 어느 정도 젖어 있는지는 이와 같은 애국심의 발로가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에 잘 드러나 있다.
즉, 한 나라의 정치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민족주의사상’과 ‘독립정신’이 한국인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을 단순한 경제운동의 수준에서 해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근대국가 수립의
수준으로 확대하여 해석한 것은 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 초대 소장을 지낸 이준의 생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을 보다 더 철저히 감독하기 위하여 일본 정부는 우리 정부에게 1,300만 원의 국채를 지우는 계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 국채는 한국의 필요에서 한 것이 아니고, 한국 상품을 희생시키고 일본의 상품을 전국에
범람 시키게 하고 공산품을 독점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 한 시민이었던 서상돈은 일본 담배의 불매운동을
제의한 것이 전국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한편으로 그는 한국 정부가 체결한 1,300만 원의 국채를 갚기
위하여 어떤 단체 조직을 착안했다. 이 구상은 대 성공리에 즉각 실천되었다. 빈부·남녀노소·유아들까지
국채경감운동에 참여했다. 그들이 가져오는 것은 돈만이 아니라, 돈이 없는 사람들은 보석과 때로는 옷가지도
희사했다. 아낙네와 처녀들은 패물과 머리채를 제공할 정도로 희생을 감수했다. 이러한 기증은 거액에
달했으며, 불원간 채무를 갚을 수 있는 서광이 보였다. 국가 정치와 공업 발달에 불가결한 기본 요소를 이루는
민족주의 사상과 독립 정신에 한국민이 어느 정도 젖어 있는지는 이와 같은 애국심의 발로가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역, “헤이그만국평화회의관련일본정부기밀문서자료집”, 선인, 2007, 97쪽(프랑스어 본문은
84-85쪽))
이준열사기념관 소장 자료
이준열사기념관에는 국채연합회의소 초대소장을 지낸 이준의 유품이 적지 않게 보관되어
있다. 먼저 이준이 헤이그에서 숨을 거두고 묘지에 안장되었을 때의 최초의 비석이 잘
보존되어 있다. 비석은 한자 이름과 그 이외는 영문으로 적혀있다. “YI JOON BORN AT POOK
CHUNG(KOREAN)1858 DIED AT THE HAGUE
1907”
이준은 비석에 적혀 있는 대로 함경남도 POOK
CHUNG(북청) 출신이다. 이기항 원장에 따르면, 경제
업무 때문에 네덜란드를 방문한 북한의 관계자가 어느
날 기념관을 찾아와서, 북한에서 이준 열사의 영화를
보고 이곳을 방문했다는 사실이 있었다 한다. 아마
그가 본 영화는 1984년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돌아오지 않는 밀사”일 것이다. 이준열사의 삶과
조국애를 다룬 작품이다.
기념관에는 1906년 평리원 검사 재식 시 이준이 직접 쓴 자필 이력서가 있다. 이력서에 따르면 1895년
4월 16일 법관양성소(현 서울대 법대의 전신) 제1기생으로 입학하고, 그해 11월 10일 졸업했다. 그
다음해인 1896년 2월 3일 한성재판소 검사시보(檢事試補)로 임명되지만 3월 5일 면관(免官)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력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면관된 후 이준은 일본 동경의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양기탁, 이상설, 민영환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1904년
12월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여 공진회를 결성하여 반 일진회 투쟁을 전개하다 황해도
철도(鐵島)에 유배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이준은 을사늑약 폐기운동을
전개했다.
이력서에 따르면, 이준은 1906년 6월 18일 평리원
검사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7월 31일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되었다. 이 이력서는 이준의 사회활동은 나와 있지
않고 주로 공직 관련 이력만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대한제국 정부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것은
아닌지 추측된다. 참고로 이 이력서는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되는 그 날 이준이 쓴 것이다. 이준의 특별검사
재임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통감부의 설치로
이준열사 최초의 비석
이준열사 자필 이력서
천둥소리 232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일본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이준은 곧 사임한 것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준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이다. 헤이그 밀사 파견 직전 그는 서울 상동교회
청년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헤이그 밀사 파견 때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전덕기(1875-1914)는
상동교회의 목사였고, 이회영(1867-1932, 이시영의 형)은 이 교회에 같이 활동했던 인물이다.
한편, 이준열사기념관은 제2차 만국평회회의에 대해 민간단체가 발행하던 ‘만국평화회의보’의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 우리들이 많이 보는 헤이그 밀사 3인의 사진은 바로 이 ‘만국평화회의보’에 수록된
것이다.
‘만국평화회의보(프랑스어)’에 이준의 사상이 반영된 내용의 기사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헤이그
밀사 3인 가운데 대외 홍보와 언론을 담당한 것은 프랑스어와 영어가 능통한 이위종이었기 때문이다.
이위종은 21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늠름한 기상과 논리적인 언변으로 서양 기자들을
매료시켰다. 비록 헤이그 밀사가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정식으로 참가는 하지 못했지만 이위종에 의해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불법성은 이 ‘만국평화회의보’를 통해 외부 세계에 전해졌다. 일본은 헤이그
밀사의 활동이 ‘만국평화회의보’를 통해 알려지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각종 방해공작을 펼쳤다.
‘만국평화회의보’ 1907년 7월 5일자 신문
한 서양 기자가 이위종에게 “당신은 일본이 강대국임을 잊고 계십니다”라는 질문에 유창한 프랑스어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말하는 법의 신이란 유령일 뿐이며, 정의를 존중한다는 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고, 당신들의 기독교란 한낱 위선에 불과합니다. 왜 대한제국이 희생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대한제국이 약자이기 때문입니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정의, 권리 그리고 법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왜 대포가 유일한 법이며 강대국들은 어떤 이유로도 처벌될 수 없다고 솔직히 시인하지
않습니까?”
이위종은 만국평화회의가 강대국의 이익균점을 위한 장이 되고 약소국의 권익은 추호도 돌보지 않는
행태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만국평화회의의 정신이 밑바탕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맹이
탄생했으며, 국제연맹의 강대국 중심주의의 반성에서 각 회원국의 주권평등에 기반한 국제연합(UN)이
탄생한 것을 상기하면, 이위종의 약소국 주권 존중의 열변은 선구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위종의 이 발언은 이위종의 생각일 수 있지만 법학을 전공하고 검사를 지냈으며 기독교인인
이준의 사상이 깊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법과 정의, 그리고 기독교 정신의
정수를 확실히 이해하지 않으면 이러한 발언은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세 명의 밀사는 호텔이라고
하지만 만국평화회의장에서 꽤 떨어진 허름한 ‘여관’에서 연일 대책회의를 열고 토론했을 것이다.
이위종의 이 발언은 그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봐야 하며, 그 내용으로 볼 때 이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준은 7월 14일 드종호텔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자결설, 병사설, 분사(憤死)설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이기항 원장은 네덜란드의 어느 자료를 봐도 자결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환갑을 앞둔 59세의 나이와 오랜 여행에서 오는 여독, 맞지 않는 음식,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초조함과
울분이 결합되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아닐까.
국채보상운동의 가치
올해는 을사늑약 체결 110주년이 되는 해다.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화와 식민통치가
합법적으로 이뤄졌다는 주장을 강화하고 있는 이때에 여러 역경 속에서도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불법성을 합당한 논리로 세계에 알린 헤이그 밀사의 활동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러한
헤이그 밀사의 활동에 중요한 논거를 제공한 것이 국채보상운동이었다는 것이 이번의 검토를 통해
처음으로 일부분 밝혀졌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의 활동과 국채보상운동 사이의 관계의 해명은 이제
특별기획
Ⅲ
국채보상운동이 발기된지 한 달여가 지난 1907년 2월 21일, 대구 북후정에서는 대구군민대회가
개최되었다. 국채보상의 취치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마련된 이 행사에서, 낭독된 취지서에 공감한
군중이 수백원의 성금을 십시일반 출현했다.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거금 100원을 쾌척한 한
여성도 있었다.
“금번 의금에 힘에 따라 내는 것이 국민의 의미이거늘,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한 푼이라도 더 낼
수가 없으니 누구든지 1천원을 출연하면 죽기를 무릅쓰고 따라한다.”
거액보다 더한 결연함에서 명망과 재력이 있는 대구지역 명문가의 여성을 떠올리게 되겠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당시의 기사를 따르자면 ‘주파[酒婆]’, 즉 기생이었던, 앵무(鸚鵡) 염농산(廉隴山) 선생이었다.
그 뜻에 감동한 때문이었을까? 참석한 여성들은 눈물을 뿌리며 담뱃대를 꺾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틀 뒤인 2월 23일에는 대구 남일동 부인 7명이 패물폐지부인회(佩物廃止婦人会)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이는 국채보상운동 최초의 여성조직으로 평가된다. 이들은 곧 「경고, 아 부인동포라」라는 격문을
발표하며 여성의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대구군민대회는 국채보상운동이 그간 정치참여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여성, 하층민 등을 대중운동의
장으로 이끌었던 첫 발걸음이 되었는데, 이는 염농산 선생이 몸소 보여준 여성으로서의 주체성과
참여의지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대구 국채보상사무총회소의 의연금 참여인원 134명
가운데 여성은 27명이었고, 패물 의연자는 12명에 달했다. 또한 대구단연상채회사무소를 통해
대한매일신보에 도착된 부인 의연자 수도 227명이었는데, 이는 진주애국부인회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수였다.
전국적으로 본다면,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및 만세신보 등 4개 신문에 게재된 국채보상
윤석호
역사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
앵무鸚鵡 염농산廉隴山
천둥소리 252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시작에 불과하며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검토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또한 이준열사기념관은 올해 설립 20주년을 맞았다. 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 초대 소장을 지낸 이준의
기념관이기 때문에 국채보상기념관과 자매결연을 추진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특히 국채보상기념사업회는
현재 국채보상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이준열사기념관에는 이준을
비롯한 헤이그밀사의 기록물이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협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준은 함경남도 북청 출신이다. ‘북청 물장수’로 유명한 바로 그 북청이다. 북한은 그가 북청
출신이라는 점과 각종 애국운동을 펼친 것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북한의 그의 생가를 보존하고 있으며
앞에서 본 대로 ‘돌아오지 않는 밀사’의 영화를 제작했다. 남북관계가 점차 개선되고 있는 이때, 이준은
남북교류 활성화와 평화통일을 이끄는데 중요한 매개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준열사기념관을 조사하는데 이기항 원장과 송창주 관장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참고문헌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역, “헤이그만국평화회의관련일본정부기밀문서자료집”, 선인, 2007
꾼드꿰스터, ‘1907년 헤이그 특사의 성공과 좌절’, “한국사학보” 제30호, 2008. 2
片山慶隆,‘ハーグ密使事件と日本の新聞報道 : ‘事件’ 発生から第三次日韓協約締結まで’, “マスコミュニケーシ
ョン研究” No.86, 2015
서울 상동교회 홈페이지 www.sangdong.org
이준열사기념박물관 www.yijunpeacemuseum.com
자료-1
앵무 염농산 선생
출처 : 조선민보 1937년 4월 24일자
자료-2
달성권번 위치도(현 대구 중구 상서동 20번지)
출처 : 손태룡,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70쪽
자료-3
염농산제언공덕비(성주군 용암면 용정리 용암파출소 인근)
출처: http://blog.daum.net/12977705/8724641
❶
❷ ❸
의연자 명단 중에서 여성 의연자는 1,821명에 달했다. 주목되는 것은 그 중
양반 및 유지 부인층이 전체의 63%였으며, 기생 및 주희(酒姫) 등도 무려
21.8%에 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식인층, 상인층이 주도하여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이 부녀자와 하층민의 주체적 참여를 통해 확산되어
명실공히 대중운동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서의 활동을 통해 그녀의 재력과 각성된 의식을 엿볼 수
있지만, 관기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그때까지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자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1907년 이후 10여 년간의 행적 또한 묘연하다. 그러던 그녀의 이름이 별안간
다시 등장한 것은 1919년 5월 5일 성주군 용암면에 세워진 비석에서였다. 현 용암경찰서 인근에
비각은 소실된 채 덩그러니 남아있는 「염농산(廉隴山) 제언공덕비(堤堰功徳碑)」가 바로 그것이다.
「성주군지」(1996)에는 이 비석에 대한 설명이 간단히 부기되어 있는데, ‘앵무빗집의 앵무는 1889-
1946년 사이에 생존한 기녀의 이름으로서 일개 기생의 몸으로 용암면의 농업 경제기반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두리방천의 복구를 이룩하였으니, 누가 감히 그녀를 기생으로 천시하겠는가?’라고
전한다. 실제로 성주에는 해마다 큰 물난리로 마을이 피폐했다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오는데, 아마도
이를 안타깝게 여긴 염농산 선생이 두리방천의 제언 축조를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염농산 선생은 재력뿐만 아니라 사회참여의식을 두루 갖춘 이른바 ‘혁신기생’이었다. 특히
통감부시기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민간 기생단체가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염농산 선생은 1927년 1월
6일에 설립된 기생단체인 달성권번의 대표가 되기도 했다. 염농산의 사회참여는 교육계의 지원에도
미쳤다. 대표적으로 1937년 4월 24일자 조선민보의 기사를 보면,
	
「비경(悲境)의 교남교(嶠南校)에 2만원을 출자하다. 택지건물 기부를 신고하다.
- 염농산 여사의 미거(美挙)」
“대구유일의 민간학교로서 개교 이래 16년간 다수의 인재를 사회에 내보냈던 사립 교남교는 근년 경영난에
처해 이를 이겨내기 위해 학교당국은 물론 동창회와 후원회에서는 필사의 노력을 다해왔지만, 분발에 찬
인사가 부족하여 이제는 풍전등화같이 폐교의 비운에 당면하게 된 절박한 때에 화전동 염농산 여사가 근일간
학교에 시가 2만원의 택지와 건물을 기부하겠다고 신고해서 사회에 근래 희박해진 감격을 주고 있습니다.
여사는 젊은 시절에 남편을 여의고 그 후 뼈를 깎는 양돈에 힘써서 지금 5,6만원의 사재를 모아 행복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는 78세 노파이지만, 교남학교의 비운을 들었을 때 당시 여자의 몸이지만 강하게 분발을 다해
재산의 대다수를 내어 동 학교의 회생에 일조를 했습니다. 이하 생략”
이 기사에 따르면 선생은 당시 78세의 노령[1859년생]인데, 함께 실린 사진을 보더라도
1889년생으로 전한 성주군지의 기록보다는 신빙성이 있다. 한편 교남학교[현 대륜고등학교]는
홍주일(洪宙一)·김영서(金永瑞)·정운기(鄭雲騏) 등 3명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설립한
교남학원(嶠南学院)의 후신으로, 이육사 등의 애국지사를 배출한 명문이었다.
선생의 기부는 복명학교 설립자인 김울산 여사 등의 선행과 함께 ‘남자의 그것에는 기막히는
대조를 보이는 것’으로 당시에 평가되었다. 여성의 사회참여가 남성의 그것에 견주어지는 시대적
한계가 고스란히 묻어난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여느 혁신기생과는 달리 기생이라는 직업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이중적 편견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는 사회참여에 주체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그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사회운동의 주체로 이끌어내는 울림이
있었다. 기생 출신 중년여성이 결연히 100원의 기금을 쾌척했던 1907년 어느 날의 북후정에서도, 이
울림은 그렇게 퍼져나가 무명 여성들의 의로움을 일깨웠을 것이다.
천둥소리 272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나눔과 책임
Ⅳ
영리와 비영리의 조화, 핀테크를 통한 기부
지난 7월 LG글로벌챌린저의 일원으로 ‘핀테크로 실천하는 기부의 일상화’라는 주제로 네덜란드, 독일,
영국을 다녀왔습니다. 기부와 핀테크, 두 분야에 대한 전무한 상태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로 서류와 면접을
통과해 선발되고 해외까지 다녀와 탐방보고서까지 제출했습니다.
올해로 21년째인 LG글로벌챌린저는 대학생들의 해외 탐방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주제 선정,
탐방, 보고서 그리고 실행까지 모든 과정을 같은 학교 4인으로 구성된 팀이 주체적으로 수행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기부공학’이란 팀 이름은 영리와 비영리의 조화,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기술을
추구하자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평소 봉사활동을 통해 나눔을 실천하는 팀원들에게 기부는 낯설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 가까이서 봉사를 실천하면서 우리 사회의 온정이 어떻게 이들에게 쓰이는지를 가까이서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매번 ‘더 많은 손길이 닿을 수만 있으면 더 좋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분들을 도울 수 있는 ‘기부’를 더 활성화 시킬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저희 팀을
‘핀테크를 활용한 한국형 기부 일상화 모델을 제시하자’는 주제에 대한 탐방으로 이끌었습니다.
해외탐방을 가기 전 모금분야에서 일 하시는 국내의 전문가들을 만나 뵀습니다. 현장에서 바라보는
기부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 저희 팀이 추구하는 방향, 해외의 현황 등 계획서 작성할 때 바라보지 못했던
다양한 관점에서 탐방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월드비전과 더 브릿지에서 시도하는 새로운 모금 캠페인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색다른 기부 모델을 활용하는 외국 기관들에서 알아볼 점들을 미리 준비해서 갔습니다.
지난 7월 20일부터 8월 2일까지, 총 14일 동안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독일의 베를린, 영국의 런던 3개
이창훈
경북대 영어교육 4학년
천둥소리 292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도시를 방문해서 총 8개 기관을 방문 및 담당자들을 인터뷰 했습니다. 자선단체를 위한 컨설팅을 하는
네덜란드의 Nassau Fundraising, 영국의 Small Charity Coalition. 문화예술 단체 및 개인을 후원하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운영하는 네덜란드의 Voornekunst(뜻 : 예술을 위한) 독특한 기부 모델을
운영중인 영국의 Penny for London와 Givey, 독일의 Elefunds. 즐거운 기부를 추구하는 영국의 The
Hunger project. 크라우드 펀딩을 연구하는 네덜란드의 Crowdfunding hub를 방문했습니다.
탐방한 기관들 중에서 색다른 기부 플랫폼을 운영하는 기관 3곳에 대한 설명을 하고 색다른 아이디어를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기술과 아이디어가 만난 최초의 온라인 쇼핑몰 기부모델, Elefunds
Elefunds는 독일 최초로 온라인 쇼핑몰과 기부를 결합하는 새로운 모델을 선보였다. 그들은 독자적
기술로 2011년부터 온라인 쇼핑몰의 결제에 기부를 접목한 새로운 플랫폼을 구축했다.
맥도날드에서 물건을 사고 남은 잔돈을 기부하는 박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동일한 원리를 온라인
쇼핑몰에서 적용하고자 했다. 온라인 쇼핑몰의 최종 결제 단계에 기부할 곳을 선택하고 금액을 입력하면
상품 금액에 기부금도 함께 결제가 된다. 현재는 다양한 쇼핑몰, 금융사, 자선단체와 파트너쉽을 구축한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되지만, 처음엔 결코 쉽지가 않았다. Elefunds의 모델 자체가 새로운 방식이었기에
온라인 쇼핑몰들이 제휴하기를 꺼려했다. 게다가 쇼핑몰별로 다른 결제 시스템에 Elefunds 방식을
적용하는 데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쇼핑몰들 역시 CSR을 실천할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춰 설득을 하면서 점차 많은 쇼핑몰들과 협력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작년 한 해 동안 3만 유로를 모금했으며 20여 개의 자선단체들이 Elefunds를 통해서 기부금을 전달받고
있다. 쇼핑몰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15% 정도가 기부에 참여 하는 것으로 나타나면 현재 이 비율을 끌어
올리기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SNS를 활용한 기부경험 공유, Givey
Givey는 기부의 동기와 기부경험을 SNS로 공유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기부를 자극해 사람들의 기부
참여를 이끌어내는 전략을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기부를 하도록 자극한 영상인 사진을 유투브와
인스타그램으로 공유해서 이를 보고 다른 사람들의 공감과 참여를 이끈다. 게다가 Givey는 다른 플랫폼과
다르게 자선단체로 부터는 어떤 수수료도 받지 않고 기부금 전액을 전달했다. 전체 기부금액의 5%되는
금액을 수수료로 따로 받으며 기부금 전액은 온전히 기부단체에 전달한다. 5% 수수료만으로는 모델 유지가
되지 않기에 비즈니스 파트너들을 확보하거나 Givey의 후원자를 찾아서 투자를 받는다. 우리는 Givey와의
인터뷰에서 기부금의 수수료를 절감하는 방법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투브를 비롯한 SNS를 적극
활용하는 그들의 기부 전략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작년 한 해동안 2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Givey를
통해서 다양한 곳에 기부를 했으며 약 백만 파운드를 모금했다. 현재는 영국을 넘어 전세계로 Givey의
3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서비스를 확장할 예정이다. 끊임없이 신선한 콘텐츠를 고민하고 만들어 내는 그들의 열정이 Givey의 성공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밀리와 마크와의 인터뷰는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우리는 영국의 전통 홍차를 대접받았으며
인터뷰가 끝난 후엔 우리가 부탁하기도 전에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다. 심지어 우리가 한국으로 귀국한 뒤에
국제택배로 감사편지와 소정의 선물을 보내 주었다. 탐방 후에도 지속되는 감동과 여운을 선사해 준
Givey의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1페니로 바꾸는 런던, Penny for London
세 번째 영국 방문기관인 Penny for London은 런던 시청에 사무실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Penny for London의 COO인 데이비드(David Saidman)와 마케팅 담당자 쉬나엘(Shahnaz Awan)을
만날 수 있었다.
Penny for London은 런던 시와 독립된 기관이지만 그들의 하는 일은 런던 시와 매우 밀접하다. 런던의
청년들을 위한 교육환경 개선, 급식지원, 직업교육과 같은 일들을 맡아하는 그들은 비접촉식(Contactless)
카드 결제에 기부를 접목한 독자적인 모금 플랫폼을 운영하는 중이다. 쉽고 편리한 기술에 소액기부가
접목된 그들의 모델은 우리가 맨 처음 구상했던 핀테크 기반의 기부모델 아이디어와 같았다. 버스와
지하철을 탈 때마다 1페니 씩 기부할 수 있도록 만든 그들의 생활 속 기부실천 모델에 현재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작년 10월부터 도입된 Penny for London에서 시작된 시민들의 작은 실천이
모여 올 7월에 자선단체에 35,000파운드를 전달 할 수 있었다. 비접촉식 카드 결제로 바뀌는 시장의
트렌드 맞춰 기부를 접목한 Penny for London은 영국 제1의 카드회사인 Barclays와 Visa, Mastercard
협력도 쉽게 이끌어낼 수 있었다. 게다가 런던 시와의 긴밀한 공조 덕분에 런던 대중교통에 그들의
아이디어를 접목할 수 있었다. 좋은 아이디어가 변화의 때를 만나 혁신적인 기부 플랫폼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마치며
처음 시작은 핀테크라는 기술이 우리나라의 낮은 기부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요술방망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탐방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 기술의 개선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문제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영리와 비영리의 조화, 기부를 둘러싼 여러 구성원들의 이해관계가 상통해야
지속가능한 기부모델이 운영될 수 있다는 것을 해외의 탐방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스토리, 그리고 기부자와 수혜자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에 둔 다음에야
핀테크를 활용한 기부 플랫폼이 지속가능한 모델로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알면 알수록
어렵고 복잡한 연구였지만 그 덕분에 국내외 다양한 전문가들을 만나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고민을
진심으로 해볼 수 있었습니다. 도와준 많은 분들과 함께해준 김도연, 김수현, 유현지 팀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표합니다. `
청년에게 길을 묻다
Ⅴ
한국사회에서 청년세대를 규정하는 몇 가지의
담론이 있다. 88만원 세대, 아프니까 청춘이다,
달관세대 등이 그것이다. 청년을 규정하는
사회담론은 변해왔으나 공통점은 사회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보다는 개인들의 태도변화를 통해
문제해결을 유보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청년문제는
개인의 태도변화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이다. 청년세대는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계층이다. 청년문제를 바라볼 때 세대 간
갈 등 보 다 는 기 존 의 사 회 체 제 로 는 사 회 가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다음 세대 또는 특정집단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현 사회체제에 대한
문제로 바라보아야 한다. 현재 청년문제는 한
국가에서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국가의 발전을
이 끌 어 가 는 주 체 가 아 닌 도 움 을 받 아 야 할
취약계층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청년들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부당한 요구,
이를테면 열정페이나
구 직 과 정 에 서 의
차별에 순응하고
있다.
2010년 청년유니온이 대한민국 최초의 ‘세대별
노동조합’으로 창립할 당시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학생 또는 청년이라 호명되는 계층의 핵심문제가
‘노동’ 문제에 있다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큰
비경제활동인구의 규모, 높은 이직률, 비정규직 비율
등의 문제가 청년세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문 제 라 고 파 악 하 고 이 를 해 결 하 기 위 해 서
노동문제로부터 접근해야 한다. 한국 청년들에게
나타나는 문제적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정치적
무관심, 청년실업, 결혼과 육아의 포기, 자살 등이
나타나는 가장 핵심적 원인은 노동권의 약화에 있다.
청년유니온은 세대별 노동조합으로써 청년
노동자들의 노동권리를 보호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노동조합은 대부분 대기업, 정규직 위주의 기업별
노동조합이다. 취업하기 힘든, 취업했다하더라도
기 존 의 노 동 조 합 에 쉽 게 가 입 할 수 없 는
비정규직·청년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권을 보호
받을 수 없다. 노동3권이 거의 무력화되어있는
대한민국에서 일시적인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청년들을 보호해주는 단체는 사실상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청년유니온은 일하는 청년들, 기업이
원하는 스펙을 쌓고도 취업이 좌절되는 청년
당사자가 스스로 우리의 노동권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건희
대구청년유니온 사무국장
천둥소리 31
청년유니온은 전국조직이다.
현재 서울, 경기, 경남, 광주, 대구, 부산, 인천에 지부가 있다. 대구청년유니온은 2013년에
설립되었다. 대구 청년유니온의 첫 번째 사업은 청년들의 아르바이트 노동에 대한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대학생 아르바이트 실태조사를 시작으로 대구지역토종브랜드 커피전문점 실태조사, 대기업
프랜차이즈 아르바이트 실태조사까지 총 세 차례의 아르바이트 실태조사를 진행하였다.
커피전문점 실태조사의 경우 기자회견과 노동청 고발 등을 통해 주휴수당 문제를 이슈화시켰다. 업체의
실제 시정조치를 이끌어 냄으로써 청년노동조합으로서의 가능성과 자신감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청년 정책 생산이나 청년문제 해결의 출발선은
실제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2014년 6월
지방선거에 맞추어 64명의 청년들을 만나서
인터뷰한 책을 펴내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구직자, 아르바이트, 비정규직,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청년 등 분야를 나누어 인터뷰를 하였다.
2014년 4월 2일~9월 19일 동안 지역 청년들을
만 나 고 대 구 청 년 백 서 ‘ 아 는 사 람 이 야 기 ’ 를
발간하였다. 대구 청년들의 삶과 현실을 담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고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다양한 청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대구청년유니온은 청년정책 생산을 위한
활 동 도 꾸 준 히 하 고 있 다 . 2 0 1 4 년
6.4지방선거 당시 각 후보 캠프에 정책
질의서를 보내어 답변 내용을 바탕으로
전국동시청년정책제안 기자회견을 하였다.
그리고 대구고용노사민정협의회의 주최로
‘청년공감정책제안발표회’를 하였다.
‘청년공감정책제안발표회’는 서울사례를
중심으로 거버넌스에 대한 가능성과
청년센터 건립을 위한 제안, 그리고 지역 청년을 위한 일자리·복지 정책 제안까지 폭넓은 주제로
정책제안을 하는 자리였다. 현재는 지역고용문제 개선을 위한 대구고용전략개발포럼에 참여하고 있다.
청년유니온 내에서 일상적으로 정책팀을 운영하면서 청년·노동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올해 정책팀에서 발굴한 사업은 두 가지가 있다. 대구청년유니온 정책팀은 팀 회의 중 대구시의회
속기록을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대구 시의회 오철환의원이 대구시의회 제7대 제230회
기획행정위원회에서 “청년이라는 것은 아주 미숙한 상태고 시야가 좁고 판단력이 미숙하다고 보기
때문에(대구시청년위원회가) 여론 결집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아니다.”라고 발언한 것을
발견하였다. 대구청년유니온은 이에 대응하여 대구시 청년위원회의 역할, 청년조례제정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의서를 대구시의원 30명 모두에게 보냈다. 그러나 30명의 시의원 중 한명도 답변을 하지 않았고
이를 규탄하는 1인 시위를 대구시의회 앞에서 진행하였다.
사진출처 - 평화뉴스
2015년 대구 희망고문상 시상식(2015. 9. 3)
2013 대학생 아르바이트 실태조사 2014 대구지역 대기업 프랜차이즈 아르바이트 실태조사
주휴수당캠페인, 대구고용노동청 고발 기자회견, 커피전문업체 관계자와 간담회
책 ‘아는사람이야기’ 북콘서트
[관련기사]
2015. 9. 2. 노컷뉴스- “3주 기다렸는데 전원 탈락” 대성에너지 채용
갑질 논란
http://joongang.joins.com/article/291/18579291.html?cloc=joongang%
7Cext%7Cgooglenews
2015. 9. 3. 한겨레- 대성에너지 ‘채용 갑질’ 논란…3차 면접까지 보고
“전원 탈락”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07254.html?_fr=mt2
3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천둥소리 33
천둥소리 353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1인 시위 후 전자우편과 팩스로 질의서를 재차 보낸 결과 16명의 의원에게 답변이 왔다. 그러나 2명의
의원을 제외한 14명의 의원들은 익명으로 답변서를 보냈다. 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해야 할 의무가 있는
시의회가 지역 청년의 여론을 담은 질의서를 응하지 않거나 익명으로 답변한 것은 대의기관으로써 의무를
저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사업은 대성에너지 채용갑질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대성에너지는 올해 5월 대졸공채를
추진하였다. 12명의 신입사원을 채용한다는 공고를 냈지만 결과는 전원 불합격이었다. 애초 채용공고를
무시하고 한 명도 채용하지 않은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채용과정 중에 발생했다. 대성에너지는
2차 면접에서 기독교 색채가 강한 창립회장 자서전과 창립회장 부인 자서전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라고
했다. 2차 면접 현장에서는 회장 누나라는 사람이 면접장에서 성경을 읽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애초 예정에 없던 회장이 참석하는 영어 ppt 면접이 진행하였다. 절박한 처지의 구직자들을
희망고문한 대성에너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였다.
기자회견 이후 대성에너지는 채용 과정 중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사과하고 애초 채용계획을 철회한
이유에 대해 공식적으로 해명하는 글을 자사 홈페이지에 게재하였다. 대구청년유니온은 희망고문상
시상식을 시작으로 청년 노동자의 절박한 처지를 이용하여 직장 내에서 그들을 일상적으로 착취하는
블랙기업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대구청년유니온은 앞으로도 청년 노동자 당사자의 입장에서
구직과정에서부터 실제 직장에서 발생하는 부당행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작은 승리를
축적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청년에게 길을 묻다
Ⅴ
2015년 8월 21일부터 10월 18일까지 총 59일간 진행하는 경주에 아주 자랑스러운 행사 실크로드
경주로 가보았습니다. 47개 국가가 참여하여 실크로드와 관련된 모든 문화, 전시, 공연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 큰 행사인 만큼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또한 ‘내일로
홍보단’에선 실크로드 경주 수건을 들고 사진 찍는 미션을 수행하는 학생들이 있어 이 행사의 홍보를
톡톡히 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실크로드 경주 2015의 개막식은 8월 21일 15:00~16:10(70분)에 진행되었는데 저는 개막식을
아쉽게 보진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개막식 이후 지속적으로 방문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간 날에도 많은 사람들과 현장학습을 온 학생들로 북적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서
그런지 평소에는 주차비용을 받지 않은 엑스포였지만, 큰 행사인 만큼 주차장 비용을 2,000원 정도
받았습니다. 큰돈은 아니지만 주차비용을 내는 만큼 주차장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고 주차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 자가용을 끌고 가더라도 가족단위로 편하게 다닐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매표소와는 거리가 멀기에 많이 걸어야했습니다. 제가 다녀왔을 때는 「K-그랜드 세일
특별주간」 할인행사 기간 중이라서 12,000원에 판매되는 입장권을 10,000원에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조금 더 저렴하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코스, 매표소를 들어가니 가장 먼저 천마광장에서 다양한 세계 음식들이 저를
맞이해주었습니다. 현지인들이 직접 각국의 대표 음식들을 즉석으로 요리해주어 신선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환전해야 한다는 사실! 여기서 환전이란? 실크로드
경북의 큰 행사,
2015 실크로드 경주!
청년이 다녀오다
이규동기자
대구한의대학교 청소년교육상담학과
천둥소리 35
[천둥소리 청년기자단 현장르포]
천둥소리 373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안에서만 쓸 수 있는 엽전 같은 돈입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중간에 환전소가 있으니, 환전을
한꺼번에 할 필요는 없을듯합니다.
음식뿐만 아니라 각국에서 자랑하는 장신구들도 많이 보이니 외국에서 살 수 있는 것을 실크로드
경주 2015를 통해서 사는 행운도 얻을 수 있습니다. 건물 사이사이 골목을 형성하여 중간에 공연도
볼 수 있어서 마치 미니 마을 안에 들어온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해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경북권의 자랑거리들도 쏠쏠히 볼 수 있고 대학생 창업 등 다양함을 체험해보기도 하고, 또 맛보고
즐길 수 있는 경험을 얻어 좋은 기회였습니다. 먹거리를 구경하다 보면 기차도 지나다니는 풍경을
보실 수 있는데 아이들과 어르신들을 위해 작은 금액을 내면 기차를 타고 5분에서 10분 남짓 거리를
다닐 수 있습니다.(기차를 타려면 계림지에 표 끊는 곳이 있으니 참고)
두 번째 코스, 천마광장을 지나 엑스포 문화센터로 들어서면 롯데면세점홍보관·한국전통예술전·
실크로드리얼작품전·Real4D·바실라(뮤지컬)·백남준비디오작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롯데면세점홍보관의 경우 롯데면세점을 대표하는 연예인들의 핸드프린팅이 사인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으며 한국전통예술전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한복들과 다도예절을 배울 수 있게 체험공간도
있었습니다. 실크로드 리얼작품전은 실크로드에 참여한 각국의 예술가들이 직접 그린 미술작품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Real4D는 동국대학교 학생들이 직접 해주면서 실크로드를 4D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바실라(뮤지컬)은 세계 문화 간의 만남과 융합을 그려내는 ‘종합 퍼포먼스 쇼’ 로써 시간을
잘 맞추신다면 좋은 뮤지컬을 저렴한 가격에 볼 수 있습니다.(Real4D·바실라(뮤지컬)는 금액을
지불해야 함)
세 번째 코스, 선덕광장에는 경상북도에 있는
다문화센터들의 부스들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었지만 한 바퀴 돌고 오는 사이 일찍 끝나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네 번째 코스, 쥬라기로드로 가보니 옛날 화석과
보석들을 전시하고 있어 아름다움과 신기함을 볼
수 있었으며 어두워서 그런지 지나다니다가 옆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코스, 실크로드 애니메이션으로
시간타임마다 각국의 애니메이션을 방영해주어
아이들을 위한 코스로도 잘 마련되어 있었으며
가족단위로 왔을 때 꼭 들러볼만한 코스였습니다.
여섯 번째 코스, 백결공연장으로 이동하여 제
시간대에는 ‘페인터즈 히어로, 판타스틱 공연’을 볼
수 있었는데 미리 행사 일정을 알고 시간을 잘
맞춰서 간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보기에는 조금은 난이도가 있다는 생각이 들며
청년들과 성인들이 보기에는 아주 적합하고
흥미로운 공연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주고
봐야하는 공연들을 실크로드를 통해 무료로 보고
공연장이 크기 때문에 자리걱정은 넣어두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야외 공연장인 만큼 사람들이
많이 움직이는 경우를 보아서 공연에 집중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일곱 번째 코스, 엑스포의 자랑인 경주타워에 올라 가보았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엘리베이터의
4대수로는 어림이 없어 기다려야 했지만 엘리베이터를 잡아주고 태워주는 안내요원이 배치되어 있어
금방 빠지고 탈 수 있었습니다. 82m 높이로 엘리베이터가 층수가 아닌 m로 알려주며 82m층으로
가보니 전시회가 한류문화에 대해 전시도 잘해놓았으며, 석굴암 HMD 트래블 체험관도 볼
수 있어 많은 체험과 구경거리도 쏠쏠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HMD 트래블
체험은 비용이 어느 정도 있지만 재미와 신기함으로 공존하여 구경거리로 아주
신기했습니다.
감나무 가지에
마지막 남은 홍시 하나
生의 가장 빛나는 한때를
훤히 밝히고 있다
그 높이만큼 오르기 위해
폭염과 소나기 광풍의
시달림도 견뎌내었으리라
함께 조국광복 위해
목숨 바치자던 동지들 먼저
떠나가고 광활한 하늘, 벌판 삼아
의엿이 매달려 있는 저 초연함이
더욱 진홍의 빛을 내나 보다
불이 꺼진 시대의 등불같이
그 아래 걸어가는 사람들
발걸음 비추이며
마지막 한 순간까지 끓어오르는
심장에 불을 당긴다
홍시
하나
천둥문학
Ⅵ
약력
•1985년, 『심상』 및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02년, 중국 「長白山文學賞」 수상
•시집 『백도라지꽃의 노래』
(白桔梗花之歌, 2002 료녕민족출판사) 등
서지월
천둥소리 393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여덟 번째 코스, 장보고관·계림지·곡수원 등 공원이 형성되어 있어 여기는 사진 찍기 좋은
장소로 적합했습니다. 참여한 나라들이 국기도 매표소 앞과 이 코스에 달려있어 국기를 보면서
사이를 걸어가는 그곳들이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연인들과 가족들이 사진을 많이 찍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도착했던 시간은 12시였는데 다 둘러보고 사진 찍고 체험하고 경험하고 먹어보고 하는 시간이
지나니 어느새 5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많이 걸어서 다리는 아팠지만 구경하는 재미와 먹는 재미가
너무 쏠쏠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고 경험했던 시간이었습니다.
행복 그 이상 해외에 다녀온 기분을 느꼈습니다.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다른 나라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에 최고의 행사였고 실크로드를 그저 해외문화를 경험하는 것 그 이상으로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느끼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고 많은 행사의 노력을 기운 것이 엿보였으며 다양한
국적사람들을 보고 소통하고 나누는 재미가 쏠쏠했고, 다양한 행사와 요깃거리도 즐길 수 있어서
외국에 가지 않아도 실크로드 경주를 통해 다른 나라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참 큰
묘미였습니다. 더군다나 MOU 체결을 맺은 대학교들도 대학생들을 앞장세워 직접 부스를 운영하여
현장에서 직접 열심히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는데 저희 과는 비록 아니지만, 제가 재학 중인
대구한의대학교도 눈에 보여서 모교에 대한 뿌듯함도 느꼈습니다. 대학생들이 이렇게 작게나마
학교의 지원을 통해서 작게나마 큰 행사를 참여할 수 있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청년창업가들도
부스운영을 하고 있어, ‘다음에 이 행사에서는 지금 보았던 대학생들이 청년창업부스를 운영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다른 시각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기사를 보고 계시는 청년들도 문화재에
관심이 많다면 이 기회에 부스운영을 해보는 것도 청년들에게 좋은 기회가 된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것저것 부스를 체험하다보니 시간이 훅훅 지나가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고 ‘입장료가 조금 더
저렴했다면 대학생들에게는 더 좋은 기회로 더 많은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천둥문학
Ⅵ
윤봉중
후박나무
펄벅기념관에 가면,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네가 한 사람 있다. 노인네 나이에 비해
색상이 좀 야하다 싶은, 핫 핑크색 재킷을 걸치고 손에는 부채를 쥐고 있다. 목걸이 명찰을 걸고 있는데, 명찰이 마치
태극무공훈장이라도 되는 양 뒷짐을 지고 다소 거오하게 서 있다. 그 노인네가 바로 나다. 문화해설사!
이 일은, 내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해온 많은 일 중에서도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일이요, 긍지를 갖는 직함이다.
노년이 내게 준 깜짝 선물이요, 늘그막에 얻은 홍복이다. 하지만, 나는 펄벅에 대해서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라는 것밖
에 아는 게 없고, 그녀의 작품도 대지 외에는 읽은 게 없다. 또한, 그녀의 고국인 미국이나 그녀가 사십 년 동안이
나 살아 고국이나 다름없다는 중국에도 가본 적이 없는 우물 안 개구리로 문화하고는 거리가 먼 촌뜨기다.
이런 내가 펄벅기념관 문화해설사라니!
그렇긴 해도, 세상살이에 이리 채이고 저리 밟혀, 자코메티의 조각 ‘걸어가는 남자’처럼 피골이 상접해 헐쭉해진 내
몰골이, 기념관이라는 어감이 풍기는 예스러운 이미지와 어울림 직하기는 하다. 6.25 때 놀라고, 보릿고개 때 배곯
고, IMF 때 데고, 주식에 투자하다 깡통 찬, 아픈 내력이 내 얼굴이나 몸, 어딘가에 화인처럼 남아 있을 테니 말이다.
뒤늦게야 나는 펄벅의 70여 작품을 찾아서 읽고, 대지 삼부작보다 더 크고 두툼한 ‘펄벅평전’을 훑어보며 말 꽤나
하는, 유식한 문화인-문화해설사가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부천 시니어클럽에서 관장하는 문화해설사의 선발기준은
‘노인 일자리 만들어주기 사업’의 취지에 맞게 단순하고 아주 인간적이다. 면접이라는 요식을 치르긴 해도, 부천시에
적을 두고 있는 65세 이상 노인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두 발로 걸을 수 있으면 된다. 신체가 건강하면 더 말할 나위
없지만, 조금 부실해도 눈감아주니 다분히 친노적(親老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삼무(三無)는 반드시 갖추어
야 할 절대적 조건이다. 삼무란, 첫째, 돈푼 꽤나 나가는 어연번듯한 집이 없어야 하고 둘째, 돈푼 꽤나 받는 그럴듯
한 직장이 없어야 하고 셋째, 돈푼 꽤나 되는 보수를 받았으면 하는, 돈 욕심이 없어야 함을 말한다. 나도 삼무에 속
한다. 주식에 투자하면서 돈푼 꽤나 나가는 대지 60평짜리 너른 집을 일찌감치 없애버렸고, IMF 때 그럴듯한 직장에
서 쫓겨나 마누라 눈칫밥이나 얻어먹는 백수요, 책 욕심은 있어도 돈 욕심은 - 욕심낸다고 더 주는 것도 아니고 - 별
로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없이 사는 노인네’라야 한다. 이걸 두고 새옹지마요, 전화위복이라 하던가.
하지만, ‘없이 사는 노인네’라고 해서 마음까지 가난하거나 옹색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세상만사 마음먹기’라고
했듯, 홀가분하게 삼무의 삶을 살다 보니, 저절로 삼락(三樂)을 얻게 되었다. 삼락이란, 문 닫으면 마음에 드는 책을
읽고, 문 열면 마음에 맞는 손을 맞이하고, 문을 나서면 마음에 드는 산천경개를 찾아가는 세 가지 즐거움을 일컫는
데, 조선조 유학자인 신흠(申欽)선생의 인생삼락(人生三樂)을 말함이다.
펄벅기념관은 부천시 소사구 심곡동, 성주산 자락에 집필에 몰두한 작가처럼 고즈넉이 들어앉아 있다.
소설 대지로 미국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 여사는 세계적인 작가일 뿐만 아니라, 사회사업에 평생을
바친 인도주의자요, 박애주의자이다.
여사는 전쟁 중 미군으로 인해 태어난 혼혈 고아들의 양부모를 찾아주기 위해 미국에 ‘웰컴 하우스’를 창설하고,
그녀도 일곱 명의 혼혈 고아를 입양했다. 그 후, 혼혈아가 많은 아시아 여러 나라 중국, 베트남, 태국, 필리핀, 타이완
그리고 한국에 ‘펄벅재단’을 설립해 혼혈아와 전쟁고아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활발하게 펼쳤다,
한국에는 1967년, 현 펄벅기념관 자리에 사재를 털어 ‘소사희망원’을 건립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회에
서 냉대 받고 편견에 시달려야 했던 전국의 많은 혼혈아와 전쟁 고아들이, 이 시설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전시장 중앙에 높이 170cm, 폭 45cm 크기의 산수화가 한 폭 있는데, 그녀가 80회 생신 때 소사희망원 예전 원생
들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산수화 뒷면에는 소사희망원을 거쳐 간 2,000여 명의 원생 중 1,030명의 이름이 깨알같이
쓰여 있다. 그 명단에는 혼혈가수 인순이를 비롯하여 윤수일, 박일준, 함중아 등 유명 가수들 이름도 들어 있다.
올봄 유치원생들이 체험학습을 나온 날이었다. 고만고만한 또래의 아이들이 노란 유니폼을 입고 나비 날개를 등에
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를 것 같은 앙증맞은 나비들이었다. 활짝 핀 철쭉을 배경으로 깜찍
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는 손에 손 잡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왔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말소리로 전시장 안은 금세 시끌시끌해졌다. 초상화 속의 펄벅 여사가 활짝 웃으며 반기는 것 같았다. 내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쭈그리고 앉자, 내 주위로 아이들이 나비 떼처럼 모여들었다. 나는 유리진열장
안에 전시된 펄벅 여사의 유품인 머리핀을 가리키며 애써 부드럽게 얘기했다.
“이 자그마한 머리핀은 펄벅 할머니가 앞머리에 꽂고 다니셨던 머리핀인데…”
“할아버지! 할아버지 머리는 왜 하얘요?”
아까부터 내 등에 기대고 서서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한 아이가 불쑥 내 말허리를 자르고 나섰다. 유치원 햇살
반인 내 손녀 또래의 아이였다.
“그건 말이야, 왜냐하면……”
아이의 뜬금없는 행동과 질문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마땅한 대답을 찾느라 끙끙대고 있는데, 머리가 허연 펄벅 여
사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펄벅 할머니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머리가 하얘지는 거란다.”
“……우리 할아버지 머리는 까만데….”
“……”
나는 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 말대로라면, 그 아이 할아버지는 좋은 일을 많이 하지 않은 할아버지가 되는 셈
이기 때문이다.
“호연아, 그건…… 호연이 할아버지는 머리를 까맣게 물을 들여서 그런 거란다.”
아이들 뒤를 따라다니던 인솔교사가 얼른 나서 거들어주었다. 멋쩍어진 나는 아이를 향해 ‘봉숭아학당’의 영구처럼
헤벌쭉 웃어주었다. 또 다른 아이는 내 이마와 얼굴에 굵게 파인 주름살을 손가락으로 꼭꼭 찌르면서, “할아버지는 왜
이렇게 주름이 많아요?”하는 것이었다. 졸지에 내가 기념관 해설사가 아니라 유물이 된 느낌이었다. 그날, 집에 돌아
온 나는 거실에 있는 큰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까맣던 머리는 된서리를 얼마나 맞았
는지 허옇게 바랬고 이마의 주름은 밭고랑처럼 언틀먼틀 깊고 굵게 파였다. 윤곽도 희미해진 눈썹에는 흰 터럭이 성
깃성깃 돋아 있고, 안경 너머 두 눈은 밤샘 문상이라도 하고 온 듯 퀭하다. 길고 깊이 파인 팔자 주름과 굵은 실로 꿰
맨 듯 꾹 다문 입술은 몽니가 잔뜩 난 고집불통처럼 보였다. 한동안 허우룩한 눈길을 거울에서 거두지 못하고 서 있
던 나는 서름하게 돌아섰다. 그러자 뭔가 알 수 없는 서러움 같은 게 울컥 치밀어 올랐다. 서러움은 우울함으로 번져
갔다. 노년에 찾아드는 우울증은 어떤 질병보다 무섭다. 어떻게든 나를 달래야 했다. 내가 나를 위로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로해줄 것인가.
무릇, 육안(肉眼)으로 보이는 것은 사물의 겉모습에 불과하다. 참모습이 아니다. 참모습을 보려면 심안(心眼)으로
보아야 한다. 나는 자책이 아닌 자애(自愛)의 눈길로 다시 거울 앞에 섰다. 흰머리는, 삶의 긴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
고 끈기 있게 달려온 마라토너만이 쓸 수 있는 왕관이다. 이마의 굵고 거친 내천(川)자 주름은, 삶의 전장을 누비고 다
녔던 탱크의 캐터필러 자국이요, 삼성(三星)장군의 계급장이다.
흰 눈썹은, 마량(馬良)의 백미요 출중함이다. 움푹 들어가고 퀭한 두 눈은, 사려와 분별, 삶의 지혜가 그득 고인 웅
천둥소리 414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제1회 매일신문 시민문학상 최우수상 수상작(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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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소리 35

  • 1. 천둥소리 13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 부녀국채보상운동과 역사적 의미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려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종류와 내용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경과 <북후정> 국채보상운동과 헤이그 밀사의 활동 <특별기획> 앵무 염농산 <나눔과 책임> 핀테크로 내다보는 기부의 미래 <청년에게 길을 묻다> 대구 청년유니온 소개 2015 실크로드 경주! 청년이 다녀오다 <천둥문학> 홍시 하나 / 후박나무 <회원광장> 내 꿈의 結實을 찾아 충과 효를 모두 이룬 벽산 김.도.현
  • 2. 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꿈인가 생시인가, 하늘이 준 것인가 때가 온 것인가, 구름 안개 걷히는 것인가… 대한 광무 11년(1907년) 새봄의 제일 좋은 소식은 하늘에서 온 복음을 소리쳐 전하는 것이로다. 이 소식이 무슨 소식인고, 이 소식이 무슨 소식인고 이러한 좋은 소식을 우리는 급히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이오… 이 소식은 다름이 아니라 대구광문사 부회장 서상돈씨 등이 단연동맹한 호소식이로다.> 1907. 2. 25 자 황성신문 논설에서 따옴 국채보상운동 부녀국채보상운동과 역사적 의미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려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종류와 내용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경과 북후정 국채보상운동과 헤이그 밀사의 활동 특별기획 앵무 염농산 나눔과 책임 핀테크로 내다보는 기부의 미래 청년에게 길을 묻다 대구 청년유니온 소개 경북의 큰 행사, 2015 실크로드 경주! 청년이 다녀오다! 천둥문학 홍시 하나 후박나무 회원광장 내 꿈의 結實을 찾아 충과 효를 모두 이룬 벽산 김.도.현 국채보상운동기녑사업회 소식 사업회 소식 방문단체 박용옥 신동학 김지욱 이정희 윤석호 이창훈 이건희 이규동 서지월 윤봉중 김주환 이영재 4 17 25 28 31 39 43 49 2015. 가을 제35호 발 행 인 편집고문 편집위원 발 행 처 기획제작 표지사진 신동학 박용규, 서상호 엄창옥(위원장), 권오현, 남정원, 우웅택, 이용수, 전환길, 최경집, 최윤진, 황성하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 670(동인동 2가 42번지) 전화. 053-745-6753 팩스. 053-746-6753 www.gukchae.com E-mail. master@gukchae.com 밝은사람들 053-652-5700 나눔과 책임의 표지사진은 올 한해 추진되었던 세계기록 유산 등재를 위한 국채보상운동기록물 과 대구박물관 광복70주년 기념 특별전 시 ‘애국의 길 국채보상운동’의 타이틀, 그리고 보령에 세워진 김광제지사의 동상이다. 이렇게 국채보상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시민사회의 시대정신으로 되살려 내는 토대를 구축하는 과정을 통하여 세계 기록유산 등재로 한 걸음 더 다가가기를 바래본다. 입회안내> 회비안내 국채보상기념사업회원을 모십니다. 애국애족의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에 뜻을 함께 하고자 하시는 분은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 회원에게는 각종 학술행사 및 연구회에 참여하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며, 각종 동호회에도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회비는 연 1만원 이상입니다. 가입을 희망하시는 분은 전화 053)745-6753으로 문의하시거나 홈페이지(www.gukchae.com)를 방문해서 회원가입을 해주시면 확인 후 바로 답변을 드립니다. 회비를 미납하신 회원께서는 동봉한 지로용지나 은행계좌로 조속히 납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구은행 031-05-003912-4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김 영 호 > >>
  • 3. 부녀국채보상운동과 역사적 의미 1. 들어가는 말 노일전쟁에 승리한 일제는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1905년 11월 17일에 황제와 참정대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국 5족을 데리고 황제의 승인인 직인도 없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우리의 외교권과 내정권을 일제가 통괄하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후 대한제국의 재정을 장악하기 위하여 시설개선 등의 명목으로 막대한 일본의 차관을 안겨 조약 체결 1년여에 이르러 나라의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원의 고리 차관의 거대한 나라 빚을 짊어지게 되었다. 만일 갚지 못할 경우 마침내 전 국토를 일본에게 빼앗기고 2천만 민족은 그들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민족자존의 절박감에서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대구를 시발로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갔다. 대구의 재력가이자 민족자존정신이 강한 서상돈 선생이 담배 석다을 끊은 60전씩을 모으고 모자라는 것은 1원, 10원, 100원, 1000원씩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출연하면 된다는 뜻을 발의하여 거족적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국채보상운동 성명서에 의하면 원래는 남성 중심의 운동으로 부녀들은 남자 부수적 존재로 참여함을 당연시하였다. 그러나, 전국 부녀들은 남자와 동등한 국민 자격으로 참여할 것을 주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부녀들의 독자적 참여운동도 역시 대구(남일동) 부인들이 기치를 올려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니 대구 부인들의 민족사적 존재감은 실로 높다 하지 않을 수 없다. 2. 국채보상을 위한 부녀계의 활발한 활동 국채보상운동이 발의된 것은 1907년 1월 29일 대동광문회 개칭 특별회에서였고 동 2월 21일에 국채보상취지서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어 전국에 선포되었고 같은 날 대구 북후정에서는 국채보상국민대회를 개최하여 대구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 취지서 내용을 보면 남자 중심의 운동일 뿐 부녀들의 참여는 논외로 하고 있었다. 즉 부녀들은 역사의 주변인으로 여겼던 것이다. 국망의 위기에 처해 있는 박용옥 前성신여대 교수 국채보상운동 Ⅰ 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천둥소리 5 매일매일 속에서 부녀들은 더욱 절박하게 국가 보존의 구국의식이 성장되고 있었는데 남자 세계에서는 그것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녀들을 논외로 한 국채보상취지에 순응하지 않고 부녀들의 독자적이고도 자발적인 적극적 참여를 주장하여 ‘60전론’의 10배를 훨씬 능가하는 자신의 소중한 패물을 내놓고 대구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조직하고 전국 부녀들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게 하는 강한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대구 북후정 국민대회 이틀 후인 2월 23일(음 1월 11일), 대구 동상 남일동의 7 부인들이 부녀의 참여 방법을 제시하지 않은 남성위주의 운동을 비판하고 우리 부녀들은 패물 폐지로 참여하겠다면서, “우리 부인 동포에게 삼가 고함”이라는 제목의 격문(檄文)을 작성하고 그 다음날 북후정에서 정운갑 모 서씨와 서병규 부인 정씨 등이 국채보상 부녀대회를 열어 대구 부녀들의 적극적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 격문을 『대한매일신보』 3월 8일에 개재하였다. 이처럼 대구에서 처음으로 국채보상 부녀단체인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가 출범된 것은 근대민족운동사에서 자못 큰 의미를 지닌다. 7명의 부인은 정운갑모 서씨·서병규처 정씨·정운화처 김씨·서학균처 정씨·서석균처 최씨·서덕균처 이씨 및 김수원처 배씨로 이들은 자신의 소유인 은지환·은장도·은가지·은연화 등 총 13냥 8돈쭝의 패물을 의연하였으니 1인당 약 2냥씩 되는 은패물을 나라 위해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다. 이 격문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 있어 어찌 남녀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가라고 강력한 항의를 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남자측 제안인 1인당 60전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수십 배에 달하는 패물을 부녀들의 의연 방법으로 제시하고 실행했다는 점이다. 이는 부녀들도 떳떳하고 독립된 평등 국민임을 선포한 것이다. 이는 봉건적 남녀 차별관에 대한 적극적인 도전이다. 국채보상운동에서 평등 국민의식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평양에 사는 가난한 선비(林基馨)가 국채보상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1식구 당 1원씩 7원을 의연하고 귀가하여 부인(崔信實)에게 자기가 한 일을 말하자 부인이 정색하여 남편을 책망하면서 “국가적 관념과 천부(天賦)의 자유는 사람마다 다 가진 것이니 나도 마땅히 국민된 의무를 이행하겠다고 하고는 시집올 때 가져온 은장도 한 개를 즉각 연출하였다. 이것은 전통시대의 순종적인 부녀상에 대한 도전으로서 국채보상 운동을 통해 부녀들의 평등 국민의식이 자리 잡고 성장하게 될 수 있었다. 우리가 함기 여자 몸으로 규문에 처하와 삼종지의에 간섭할 사 무기 없사오나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나 엇지 남녀가 다르리요. 듣사오니 국채를 갚으려고 이천만 동포들이 석달간 연초를 아니 먹고 대전을 구취헌다 하오니 족히 사람으로 홍감케 할지요. 전장에 아름다움이라. 그러하오나 부인은 논하지 않는다니 대저 여자는 나라 백성이 아니며 화육중 일물(化育中一物)이 아니오. 본인 등은 여자의 소처로 일신 소정이 다만 패물 등속이라. 태산이 흙덩이를 사양치 아니하고 하해가 가는(細) 물을 가리지 아니하기를 적음으로 큰 것을 도우나니 유지하신 부인 동포들은 다소를 불구하고 혈심 의연하와 국채를 청장하심이 천만 행심
  • 4. 천둥소리 7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3. 부녀 참여의 전국적 확대와 활동상 대구에서 일어난 부녀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으로 확대되어 각지에서 의연금 수합 방법에 따라 1)패물 폐지형, 2)감선(減膳(饌)·감반(減飯)형, 3)현금형, 4)위 3가지의 혼합형 등 다양한 부녀 활동이 있었다. 당시 조직 활동된 부녀 국채보상운동 단체들은 서울(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 부인 감찬회, 국채보상여자의성회)을 비롯하여, 경기도(인천 국미적성회, 김포검단면국채보상의무소, 안성군 장터동국채보상부인회, 남양군부인의성회), 충청도(진천군국채보상부인회, 음성군금자면무극리패물 폐지부인회), 전라도(금산봉황정부인회, 제주도삼도리부인회, 제주함덕리국채보상기성회), 경상도(대구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 부산항좌천리감선의연부인회 단연동맹부인회, 영도 국채보상부인회, 수정동부인의연회, 진 애국부인회 애국상채회, 창원항국채보상부인회, 경주군국채보상 부인회, 금상부인의연회), 황해도(안악군국채보상탈환회), 평안도(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 삼화항비석동 예수교부인국채보상회, 선천군부인의성회), 함경도(청북강계부인급수보상회, 영흥군국채보상감반회) 등 전국적이었다. 전국에서 부녀 자신들의 독자적 조직으로 활동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부녀들은 이미 구국에는 남녀 차별도 지방적 차별은 물론 신분 직업의 차별도 없다는 국민평등의식을 확고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평양 주희(酒姬) 31명의 32원 출연과 대구 기생 앵무(鸚鵡)의 100원 출연은 국채보상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국채보상운동 참여를 통해 부녀들은 스스로 주도권을 가지고 국권을 회복시키겠다는 놀라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3월 14일 조직 활동된 삼화항(진남포)의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에서는 1천만 여성이 각자 가지고 있는 3원 이상의 패물을 의연하면 3천만원이 될 것이니 이 중 1천만원은 국채를 보상하고 1천만원은 은행을 설립하고 1천만원은 학교를 설립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처럼 광대한 포부를 가지고 활동한 경우에서 우리는 부녀들의 구국의식이 실로 강렬했음을 볼 수 있다. 부녀들이 국민된 권리와 의무를 내세우면서 독립된 참여와 활동을 한 것은 국채보상운동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4. 맺음말 : 남녀동권의식의 성장 국채보상운동은 국민의 경제력을 결집하여 국권을 수호하겠다는 국민적 각성에 기초한 거대한 민족운동이다. 여성이 이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은 여성의 각성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여성의 참여는 한국근대여성운동사에서 볼 때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다. 첫째, 국권수호라고 하는 국가의 중대사에 부녀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남자만의 독점이었던 정치와 사회 문제에 부녀들도 참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남자 찬성원의 지도 아래 진행되던 개화기 여성운동에서 탈피하여 이제 부녀들이 독자적으로 구국적 운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남녀동권의식의 적극적 발전이다. 종래 개화사상가들은 남자편에서 여성들에게 남녀동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자편에서 주는 식의 남녀동권 관념을 완전히 벗어버린 것은 국채보상운동에서였다.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 취지에 밝혀졌듯이 남녀동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권수호와 같은 민족적 과제 해결에 부녀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의식이 크게 성장되어 있었다. 국채보상을 위해 최초로 조직된 여성단체인 대구의 남일동폐물폐지부인회의 조직 동기 자체가 이 중대한 국가사업인 국채보상운동에 남자들이 여성을 제외하고 있는 데에 격분하여 전국여성을 향해 분발하여 일어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을 돌림으로써 시작된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에는 강한 국권회복의식과 남녀동등권의식이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남존여비사상 내지 남성 우월적 윤리관과 생활관습에 대한 도전과 저항이 분명하게 보인다. 국채보상에의 여성 참여를 적극 권장하였던 이준열사도 여성의 참여는 국채를 갚고 남녀평등도 획득하는 중요한 운동임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 대한부인회도 부녀의 구국운동이오 이 국채보상부인회도 부녀구국운동으로서 그 성격은 같다 하겠으나 하나는 관념적이고 이상적이며 하나는 실천적이오 효과적인 까닭입니다 … 우리나라를 위하는 일을 우리 남자들만이 한다면 이는 1천만 밖에 아니됩니다 … 부녀는 거내하여 문호를 나지 아니한다는 그러한 구투의 부녀 생활방식은 앞으로는 전연 이론이 서지 못하는 생활방식일까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귀존한 남녀가 즉 다시 말씀하면 하나님께서 꼭같이 사랑하는 자녀가 된 우리 남녀의 권의가 무엇이 다를 것이 있습니까. 남녀는 평등입니다. 남녀는 영원히 평등입니다… 숙녀 여러분 우리나라의 역사는 결코 남존여비인 것같이 된 것은 결국 부녀되시는 당신네들이 무력 불찰의 결과 … 오늘 이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하신 것은 의례의 일이오 … 국권 찾는 운동이라면 남녀를 물론하고 목숨을 바쳐 피로 주검으로 싸워가면서 기어코 실천 실행하여야 되겠습니다 … 우리의 국채를 우리가 갚고 남녀평등으로 복영이 있고 은혜가 깊은 국민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 남녀가 꼭같이 분투하기를 바랍니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부녀에 대한 남성들의 태도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종래의 봉건적인 남녀관을 탈피하고 부녀의 자발적인 애국적 참여정신을 극구 찬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녀들의 참여가 오히려 남성들의 국권수호의지를 고양시키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남성들이 깊이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에 나타난 남녀평등적인 사회 참여에는 아직도 걸림돌적인 사회적 역사적 과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녀국채보상운동은 전통적인 남녀차별관을 타파하고 민주사회로 지향해가는 단계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 5.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려면 1907년으로부터 100주년이 되던 2007년 2월21일에 대구 엑스코에서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처음으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총 정리하는 작업이 있었습니다. 그 성과물로 『국채보상운동 100년』(대구광역시)이 발간되었고요, 이 작업이 기초가 되어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OW) 등재 추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묵시적·명시적으로 등재를 위한 작업기간이 8여 년이 되었고, 아직도 부족한 점이나 불명료한 부분이 이곳저곳 보이지만, 여기까지의 성과를 묶어서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신청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대구시와 시민들의 성의를 힘입어 신청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금년 8월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록물의 정리 작업이 아직 완전히 끝이 나지 않았지만, 이 모든 정리가 끝날 때까지 등재신청을 미룰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국채보상운동 자료를 정리하면서 그 기록물이 뿜어내는 어떤 힘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100여 년 전 우리의 선조들이 국채보상 취지문을 작성하여 그것을 마을마다 전달하고, 마을에서는 통문을 작성하여 이웃마을로 보내고, 마을마다 국민들은 가진 것 없는 것 다 모아 의연금을 내고, 그것을 성책에 하나하나 기록한 그 기록물을 보면서,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켜보려는 그들의 간절한 마음이 감당할 수 없는 힘으로 살아나 피부에 와 닿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선조들의 마음은 틀림없이 애국심이었을 것입니다. 그 애국심이 기부라고 하는 평화적 방식으로 온 신 동 학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상임대표 천둥소리 7천둥소리 9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그것을 ‘백성된 도리’라고 말했습니다. 나라가 없어지면 백성도 없어지니,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다해 나라를 건져보자는 애국심이었습니다. 나라를 건져내려는 책임이었습니다. 이 국채보상운동 정신이 오늘 우리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세계시민에게 시급하게 호소하고 있다고 우리는 느꼈습니다. 시민의 사회적 책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호소되는 요즘, 세계경제가 외환위기, 부채위기 속에서 채무자의 책임과 채권자의 책임이 동시에 요구되는 요즘, 우리가 느꼈던 힘은 국채보상운동 정신이 세계사회의 시대정신으로 되살아나야 한다는 자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서양의 시민적 자유와 권리의 상징인 「권리 장전」을 늘 생각해 왔습니다만,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이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바로 100여 년 전 우리 선조들이, 의식적으로든지 무의식적으로든지, ‘백성의 책임’을 다하려고 몸으로 쓴 「책임 장전」임을 불현 듯 깨달았습니다. 이 정신이 세계시민사회에 전달되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느꼈습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 있습니다만, 10월 4일부터 6일까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아부다비에서 제12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가 개최되었고, 그곳에서 2014-5년의 신규 세계기록유산 47건을 유네스코 사무총장에게 전달했습니다. 61개국에서 신청된 88건의 자료를 14명의 전문위원의 심사를 통해 최종적으로 선정된 것입니다.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파리 현지시간 9일 이들을 유네스크 세계기록유산(2015년) 사례 (http://www.unesco.org/new/en/communication-and-information/flagship-project-activities/memory-of-the- world/register/access-by-year/New-inscriptions-on-the-International-Memory-of-the-World- Register-(2014-2015)) 국채보상운동 Ⅰ
  • 6. 천둥소리 111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최종 승인함으로서 새로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확정되었습니다. 그 기록물 속에 한국의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와 <한국의 유교책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사입니다.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AC)는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기록물이 대한민국의 비극적 냉전 상황과 전쟁의 참상을 전 세계인에게 전하고 인권과 보편적 인류애를 고취시킨 세계 방송사상 기념비적 유산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동시에 <한국의 유교책판> 역시 ‘문중-학맥-서원-지역사회’로 연결되는 지식인 집단의 500년간 지속된 유교공동체의 집단지성으로 세계사적 가치를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이번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흥미로운 몇가지 등재 목록을 보면, 독일의 경우는 ‘바흐의 B마이너 미사(Mass in B minor) 악보’가 등재되었고, 이스라엘에서는 ‘뉴튼의 신학논문’(Isaac N e w t o n’s T h e o l o g i c a l P a p e r s)이 등재 되었습니다. 언론에 알려진 대로 중국에는 ‘난징대학살기록물’이, 일본에서는 ‘마이쮸르 항의 귀환’ 자료와 ‘퇴지사(寺)(교토)의 백개 상자속의 아카이브’가 등재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여러 기록물이 등재되었습니다만 특히 처칠수상의 여러 공적·개인적 기록물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등재한 기록물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독일과 영국 그리고 미얀마는 당시 버마의 왕이 영국 왕 죠지2세에게 보낸 ‘황금편지’(The Golden Letter)를 공동으로 등재했으며, 포르투칼과 스페인은 ‘요한계시록의 주석서 사본’도 그 예로 들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록물이 인류의 평화와 상호이해를 위해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네스코 사무총장 이리나 보코보씨도 이번 등재목록을 발표하면서 ‘이러한 인류의 기록유산과 소중한 기억을 보존하는 작업이 국제적 상호협력과 상호간의 이해 증진과 인류의 평화를 건설한다는 점에서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의 복리증진에 크게 기여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형식적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느냐 못되느냐를 넘어서서, 이 유산이 인류의 평화와 상호이해에 크게 기여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 지역사회가 힘을 보태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선적으로는 우리 대구·경북지역에서만이라도 그 정신을 공유하고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기록물의 가치를 공유하기 위한 서명운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국채보상운동처럼 지역을 넘어 국가적으로 서명운동이 확산되었으면 합니다. 우리지역에서 국채보상운동 정신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세계시민사회가 공유할 수 있도록 자료를 정리하는 일입니다. 현재는 한국 국민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옛날 글씨체로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우리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본 기록물의 기본적인 해제작업과 데이터베이스 구축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만, 상당한 비용이 드는 관계로 여러 각도의 협력을 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나아가서는 북한지역에 산재하고 있을 국채보상운동 기록물들을 모으고 정리하고 해독 가능하도록 분석하는 일도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사람만이 아니라 외국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전시공간과 체험공간 그리고 기록물들을 심도 있게 연구하고 국제적으로 교류하는 아카이브공간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는 일이 한국 그리고 대구의 국채보상운동 유산을 세계적 유산으로 만드는 길일 것입니다. 물론 이런 작업은 단숨에 이루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 한 두 사람이나 단체가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국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힘을 모아 협력하여 이룩해나갈 일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선조의 지혜가 인류의 지혜가 되도록 상호이해하고 협력하며 그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세계기록유산으로의 등재는 이 과정에서의 당연한 결과물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 7. 1)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종류와 세부 사항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서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한 기록물은 모두 4개 종류 2,472건으로써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직접 소장하고 있는 자료와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연구원, 한국국학진흥원, 서울대도서관, 한국금융사박물관 등 관계기관과 개인이 소장한 자료들이다. 이를 소장처별로 분류하면 아래 〔표1〕과 같다. 〔표1〕 기록물의 소장처별 분류 이를 다시 시기별로 분류하면 〔표2〕와 같다. 〔표2〕 기록물의 시기별 분류 김지욱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이를 주제별로 분류하면 〔표3〕과 같다. 〔표3〕 기록물의 주제별 분류 이를 문체별로 분류하면 〔표4〕와 같다. 〔표4〕 기록물의 문체별 분류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중 가장 시기가 빠른 것은 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 기사 「국채 1,200만원 보상취지」이며, 가장 늦은 것은 1947년 류자후의 「이준 선생전」이다.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형태는 모든 기록물이 종이류로 구성되어 있다. 종이류도 더 자세히 살펴보면, 두루마리 형태, 편지글 형태, 공문 형태, 성책 형태, 그리고 영수증 형태가 그 당시 직접 활동한 사람들의 흔적이며, 언론을 대표하는 신문에 난 기사들은 모두 신문 형태이다. 그리고 문집, 잡지에 게재한 것들은 책자 형태이며, 통감부 문서들은 정부 보고서 형태로 남아 있다. 취지서, 발기문, 회문, 편지글 등은 모두 한지로 된 낱장이거나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으며, 성금의 액수와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은 소책자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신문에 난 것은 1면 등 일반 지면에 게재되기도 했지만 의연자가 많을 때에는 별책으로 인쇄하여 발행하기도 하였다. 기록물의 사이즈는 10cm 정도의 영수증 같은 작은 사이즈부터 70cm정도의 길게 작성된 것도 존재한다. 기록물의 문체는 대부분이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으나, 일부 문서는 순수한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순수 한글도 몇 건 남아있다. 2)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내용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내용은 애국선열들의 활동 중 당시의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계몽운동이나 구국활동의 상황들이다. 그 기록물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국채보상운동의 발단과 전개를 기록한 수기 기록물들이다. 주로 소장처 국채 보상 운동 기념 사업회 독립 기념관 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 연구원 한국 국학 진흥원 서울대 도서관 한국 금융사 박물관 연세대 학술 정보원 국립 고궁 박물관 국가 기록원 고려대 학교 도서관 개인 수 량 22 3 117 792 52 454 8 378 639 4 1 2 비 율 0.9 0.1 4.7 32 2.1 18.4 0.3 15.3 25.8 0.2 0 0.1 시 기 1907년 1908년 1909년 1910년 이후 기 타 수 량 1,881 399 53 124 15 비 율 76.1 16.1 2.1 5 0.6 종 류 수 량 비 율 국채보상운동 발단과 전개에 관한 자료 : 발기문 및 취지문 등 12 0.5 국채보상운동의 확산에 관한 자료 : 각 지역(간)의 연락문(회문, 통문), 서간문, 기부자 명단(성책), 기부 영수증 등 75 3 국채보상운동의 전개상황을 전달한 언론 자료 : 발기문, 취지문, 성금자 명단, 논설, 광고, 관련 기사(국내외), 잡지 등 2,264 91.6 국채보상운동 관련 통감부 자료 : 공판기록, 통감부 자료 121 4.9 종 류 한 문 국한문 혼용 한 글 일본어 수 량 74 2,277 0 121 비 율 3 92.1 0 4.9 1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천둥소리 13 국채보상운동 Ⅰ
  • 8. 천둥소리 151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발기문, 취지문 등이다. 국채보상운동 발기문 및 취지문은 전 국민에게 국채보상운동에의 참여를 호소하기 위해 이 운동의 취지와 목적 등을 설명하는 기록물이다. 발기문 및 취지문은 한지에 한문 혹은 한글혼용체의 붓글씨로 기록되어 있고, 내용은 대체로 ‘국민 된 책임으로 금연 등의 기부운동을 통해 국채 1,300만 원을 갚아서 나라의 위기를 구하자’라는 내용이다. 둘째, 국채보상운동의 확산과 파급을 기록한 수기 기록물들이다. 이는 각 지역 간의 회문 및 통문 등 연락문, 보상소 규약, 기부자 명단, 기부 영수증 등이다. 국채보상운동의 확산에 관한 자료는 지역 간 또는 지역 내 국채보상운동 주체들이 주고받은 회문 및 통문, 국채보상소의 운영 규약, 개인 또는 단체 간에 주고받은 서간문, 국채보상운동의 지역별 참여자와 모금액을 파악할 수 있는 기부자 명단, 그리고 기부 영수증 등의 기록물이다. 이 기록물은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전개되는 구체적 과정을 담고 있다. 셋째, 국채보상운동 관련 일제 정부 기록물들이다. 이는 주로 통감부 문서 및 총독부 기록물 등이다. 국채보상운동 관련 일제 정부 기록물은 통감부 및 총독부가 국채보상운동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관계기관으로부터 받은 보고서와 이에 대해 정부의 방침을 하달한 명령서이다. 이 자료들을 통해 일제가 펼친 국채보상운동 방해 공작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국채보상운동의 실황을 전한 신문 및 잡지의 언론 기록물들이다. 구체적으로는 신문 및 잡지에 게재된 발기문, 취지문, 기부자 명단, 논설, 광고 등 관련 기사들이다. 국채보상운동의 전개상황을 전달한 언론 기록물은 1900년대 초반 국내외에서 발행된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7종의 신문 및 「대한자강회월보」 등 3종의 잡지에 수록된 국채보상운동 관련 자료이다. 언론 기록물은 국채보상운동의 참여를 호소하는 발기문, 취지서, 논설과 광고문,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개별지역이나 개인의 상황을 기록한 기사, 모금운동 과정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건을 소개한 기사, 성금 참여자와 모금액을 파악할 수 있는 기부자 명단과 금액 등을 담고 있는 기록물이다. 국채보상운동은 이러한 기록물들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의미인 애국애족 정신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역사적 교훈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리라 기대해 본다. 13. 02. 21. 13. 05. 18. 14. 11. 05. 15. 01. 13. 15. 01. 27. ~ 28. 15. 02. 11. 15. 03. 03. 15. 03 .15. 15. 03. 24. 정기이사회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키로 결정 운영위원회에서 기록유산 등재 준비팀 결성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세미나 - 강사 전택수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전 사무총장 등재추진 사무국 개설 - 전문위원 1명 광주 518기록물, 새마을운동기록물 등재 관련 벤치마킹 문화재청 담당부서인 국제협력과 방문, 자문 시의회의장 및 문화복지위원회 예방, 자문 지역 국회의원 예방(서상기 국회의원) 및 국회 차원의 지원 자문 대구시장 방문, 취지 설명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경과
  • 9. 천둥소리 171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북후정 Ⅱ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1907년에 일어난 국채보상운동과 헤이그 밀사의 활동에는 어떤 관련이 없는 것일까?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것은 1907년 2월 19일이며, 고종의 특사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밀사 3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6월 25일이었다. 헤이그 밀사의 활동은 국채보상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던 시기와 거의 겹친다. 또 하나 헤이그 밀사의 한 명인 이준(李儁, 1859-1907)은 4월 초 결성된 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 초대 소장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양자 간에는 분명히 어떠한 연관이 있을 것 같아 헤이그로 조사 여행을 떠났다. 국채보상운동과 헤이그 밀사의 활동 15. 05. 08. 15. 05. 08. 15. 05. 08. 15. 05. 20. 15. 06. 26. 15. 07. 14. ~ 09. 06. 15. 07. 20. 15. 08. 05. 15. 08. 14. 15. 08. 21. 15. 08. 24. 15. 08. 27. 15. 08. 28. 15. 09. 10. 15. 09. 23.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 결성 - 고문단(상임고문 권영진, 김관용, 서상기) 54명 - 자문단(위원장 전택수) 39명 - 추진위원(공동위원장 김영호, 문희갑, 신동학) 73명 - 실무분과위원장 9명 - 추진단 및 사무국(단장 1명 등) 구성 완료 추진위원회 시민 보고회 및 발대식 개최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범시민 서명운동 전개 국회 세미나 개최 지역연구 학술대회 개최 국립대구박물관 주최 ‘애국의 길 국채보상운동’ 특별전시회 개최 대구자원봉사포럼과 함께 하는 포럼 개최 - 주제 : ‘국채보상운동과 시대정신’ 포럼 개최 - 참석 : 150명 자문위원단 학술자문회의 추진위원회 자문단 전체 회의 대구KBS 방송국 특별 TV토론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유네스코 등재 신청의 당위성’ 대시민 교육을 위한 전문강사 양성과정 시행 - 주제 : ‘국채보상운동과 나라사랑’ - 참석강사 : 30여 명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여성포럼 개최 - 주제 : ‘국채보상운동의 책임정신’ - 참석 : 450명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서 제출 등재용 도록 한글판 배포(심사위원 및 추진위원 관계자)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 대시민 보고회
  • 10. 천둥소리 191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헤이그의 이준열사기념관 헤이그의 이준열사기념관(YI JUN PEACE MUSEUM)을 찾은 것은 공교롭게도 헤이그 밀사가 108년 전 도착한 그날이었다. 이 기념관은 헤이그의 차이나타운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이 기념관의 건물은 세 명의 밀사가 머물고 이준이 7월 14일 목숨을 거둔 ‘더종(DE JONG)호텔’이었다. 네델란드 교포인 이기항 원장이 1990년대 초반 이 건물에 밀사가 머물렀다는 것을 알고, 거의 폐허가 되어 있던 이 건물을 헤이그시로부터 사들였다. 이기항 원장은 부인인 송창주 관장과 함께 밀사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건물을 수리, 한국 정부와 경제 단체의 도움을 얻어 1995년 개관한 것이 현재의 기념관이다. 개관 이후 이기항 원장과 송창주 관장은 거주지인 암스테르담에서 기념관까지의 먼 거리를 왕복하며, 휴관일인 일요일을 제외하고 20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근무하고 있다. 이 건물의 2층과 3층에 위치한 기념관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각 전시관, 한국과 네덜란드 관계 전시관, 그리고 기념관의 활동을 소개한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또 한 전 시 관 의 벽 면 에 는 역 대 한 국 대통령의 헤이그 밀사의 고귀한 뜻과 활동을 되새기는 친필 휘호가 걸려 있다. 기념관을 방문한 날 한국에서 이곳을 찾은 많은 시민과 학생을 만났으며, 프랑스 청년 방문객도 만났다. 이곳을 찾은 방문객은 한국인과 네덜란드인뿐 아니라 미테랑 전 프랑스 총리도 이곳을 찾았으며, 일본인 교수와 학생, 언론인도 이곳을 찾았다. 헤이그 밀사는 도착 이틀째인 6월 27일 44개 참가국 대표에게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이 참가할 수 있도록 간곡히 부탁하는 내용과 일본에 의한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부당성을 담은 ‘항고문(抗告文)’을 보냈다. 항고문은 다음날 민간인 단체가 주재하여 만든 ‘만국평화회의보’에 프랑스어로 게재되었다. 헤이그의 이준열사기념관 이 항고문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은 헤이그 밀사 중의 한 명으로 전 러시아공사관의 서기관이었던 이위종이었다. 그는 러시아공사인 이범진의 차남으로 어릴 때부터 부친을 따라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지서 생활했기 때문에 불어, 영어,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헤이그 밀사가 이와 같은 항고문을 보낸 이유는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을사늑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만국평화회의의 정식 초청국의 자격이 부여되지 않았다. 헤이그 밀사의 항고문 항고문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일본은 청일전쟁 선전 포고문, 청일전쟁 승전으로 체결된 시모노세키(下関)조약, 그리고 러일전쟁의 선전포고문, 러일전쟁의 승전으로 체결된 포츠머스조약, 그리고 1904년 2월 체결된 한일의정서에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이 명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905년 11월 10일 고종 황제에게 조선의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를 강요했다. 고종 황제가 이를 거절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각 부(部) 대신들에게 이를 받아들이도록 강압했다. 결국 강압에 이기지 못한 5개 부의 대신(일명, 을사오적)이 찬성하여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의 체결에 대해 정부 관료와 국민은 맹렬히 저항했다. 육군중장인 민영환은 “나의 죽음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유린하는 자들과 투쟁하는 용기와 힘을 북돋을 것이라는 희망과 목적”으로 자결했다. 그에 이어 전 총리대신 조병세가 음독자살하고,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켜 붙잡힌 후 쓰시마로 유배되어 음식을 거부한 채 순직했다. 일본이 군대를 해산하자 전국 각지에서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일본은 한국을 경제적으로도 침략했다. 한국인은 일본의 철도 건설에 강제로 동원되었으며, 화폐정리사업으로 한국인 상인은 큰 손해를 입었고, 일본에서 이주한 일본인은 각종의 약탈을 자행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사법부의 인사권을 장악, 친일적인 판사를 임명했는데 이들은 일본인의 이익을 보호하는데 전념했다. 상기와 같은 내용을 적은 후, 항고문의 마지막 부분에 국채보상운동 관련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내용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 11. 천둥소리 212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 내용을 마지막으로 항고문은 끝을 맺었다. 이 중요한 결론 부분에 국채보상운동을 크게 드러낸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항고문의 구성 순서는 ‘을사조약’의 강제성을 먼저 설명한 후, 이에 대해 정부 관료와 한국인이 어떻게 저항했는지, 그리고 일본의 경제적 침략의 악랄함을 보여준 후, 그 마지막에 국채보상운동이 배치되어 있다. 헤이그 밀사는 한국인이 일본의 어떠한 도움 없이도 자치적으로 국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시기 때 금모으기운동이 세계의 찬사를 받은 것은 “한국인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한 자주, 독립의 정신은 항고문 가운데 “국가 정치와 공업 발달에 불가결한 기본 요소를 이루는 민족주의 사상과 독립 정신에 한국민이 어느 정도 젖어 있는지는 이와 같은 애국심의 발로가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에 잘 드러나 있다. 즉, 한 나라의 정치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민족주의사상’과 ‘독립정신’이 한국인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을 단순한 경제운동의 수준에서 해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근대국가 수립의 수준으로 확대하여 해석한 것은 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 초대 소장을 지낸 이준의 생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을 보다 더 철저히 감독하기 위하여 일본 정부는 우리 정부에게 1,300만 원의 국채를 지우는 계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 국채는 한국의 필요에서 한 것이 아니고, 한국 상품을 희생시키고 일본의 상품을 전국에 범람 시키게 하고 공산품을 독점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 한 시민이었던 서상돈은 일본 담배의 불매운동을 제의한 것이 전국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한편으로 그는 한국 정부가 체결한 1,300만 원의 국채를 갚기 위하여 어떤 단체 조직을 착안했다. 이 구상은 대 성공리에 즉각 실천되었다. 빈부·남녀노소·유아들까지 국채경감운동에 참여했다. 그들이 가져오는 것은 돈만이 아니라, 돈이 없는 사람들은 보석과 때로는 옷가지도 희사했다. 아낙네와 처녀들은 패물과 머리채를 제공할 정도로 희생을 감수했다. 이러한 기증은 거액에 달했으며, 불원간 채무를 갚을 수 있는 서광이 보였다. 국가 정치와 공업 발달에 불가결한 기본 요소를 이루는 민족주의 사상과 독립 정신에 한국민이 어느 정도 젖어 있는지는 이와 같은 애국심의 발로가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역, “헤이그만국평화회의관련일본정부기밀문서자료집”, 선인, 2007, 97쪽(프랑스어 본문은 84-85쪽)) 이준열사기념관 소장 자료 이준열사기념관에는 국채연합회의소 초대소장을 지낸 이준의 유품이 적지 않게 보관되어 있다. 먼저 이준이 헤이그에서 숨을 거두고 묘지에 안장되었을 때의 최초의 비석이 잘 보존되어 있다. 비석은 한자 이름과 그 이외는 영문으로 적혀있다. “YI JOON BORN AT POOK CHUNG(KOREAN)1858 DIED AT THE HAGUE 1907” 이준은 비석에 적혀 있는 대로 함경남도 POOK CHUNG(북청) 출신이다. 이기항 원장에 따르면, 경제 업무 때문에 네덜란드를 방문한 북한의 관계자가 어느 날 기념관을 찾아와서, 북한에서 이준 열사의 영화를 보고 이곳을 방문했다는 사실이 있었다 한다. 아마 그가 본 영화는 1984년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돌아오지 않는 밀사”일 것이다. 이준열사의 삶과 조국애를 다룬 작품이다. 기념관에는 1906년 평리원 검사 재식 시 이준이 직접 쓴 자필 이력서가 있다. 이력서에 따르면 1895년 4월 16일 법관양성소(현 서울대 법대의 전신) 제1기생으로 입학하고, 그해 11월 10일 졸업했다. 그 다음해인 1896년 2월 3일 한성재판소 검사시보(檢事試補)로 임명되지만 3월 5일 면관(免官)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력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면관된 후 이준은 일본 동경의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양기탁, 이상설, 민영환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1904년 12월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여 공진회를 결성하여 반 일진회 투쟁을 전개하다 황해도 철도(鐵島)에 유배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이준은 을사늑약 폐기운동을 전개했다. 이력서에 따르면, 이준은 1906년 6월 18일 평리원 검사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7월 31일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되었다. 이 이력서는 이준의 사회활동은 나와 있지 않고 주로 공직 관련 이력만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대한제국 정부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것은 아닌지 추측된다. 참고로 이 이력서는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되는 그 날 이준이 쓴 것이다. 이준의 특별검사 재임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통감부의 설치로 이준열사 최초의 비석 이준열사 자필 이력서
  • 12. 천둥소리 232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일본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이준은 곧 사임한 것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준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이다. 헤이그 밀사 파견 직전 그는 서울 상동교회 청년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헤이그 밀사 파견 때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전덕기(1875-1914)는 상동교회의 목사였고, 이회영(1867-1932, 이시영의 형)은 이 교회에 같이 활동했던 인물이다. 한편, 이준열사기념관은 제2차 만국평회회의에 대해 민간단체가 발행하던 ‘만국평화회의보’의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 우리들이 많이 보는 헤이그 밀사 3인의 사진은 바로 이 ‘만국평화회의보’에 수록된 것이다. ‘만국평화회의보(프랑스어)’에 이준의 사상이 반영된 내용의 기사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헤이그 밀사 3인 가운데 대외 홍보와 언론을 담당한 것은 프랑스어와 영어가 능통한 이위종이었기 때문이다. 이위종은 21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늠름한 기상과 논리적인 언변으로 서양 기자들을 매료시켰다. 비록 헤이그 밀사가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정식으로 참가는 하지 못했지만 이위종에 의해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불법성은 이 ‘만국평화회의보’를 통해 외부 세계에 전해졌다. 일본은 헤이그 밀사의 활동이 ‘만국평화회의보’를 통해 알려지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각종 방해공작을 펼쳤다. ‘만국평화회의보’ 1907년 7월 5일자 신문 한 서양 기자가 이위종에게 “당신은 일본이 강대국임을 잊고 계십니다”라는 질문에 유창한 프랑스어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말하는 법의 신이란 유령일 뿐이며, 정의를 존중한다는 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고, 당신들의 기독교란 한낱 위선에 불과합니다. 왜 대한제국이 희생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대한제국이 약자이기 때문입니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정의, 권리 그리고 법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왜 대포가 유일한 법이며 강대국들은 어떤 이유로도 처벌될 수 없다고 솔직히 시인하지 않습니까?” 이위종은 만국평화회의가 강대국의 이익균점을 위한 장이 되고 약소국의 권익은 추호도 돌보지 않는 행태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만국평화회의의 정신이 밑바탕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맹이 탄생했으며, 국제연맹의 강대국 중심주의의 반성에서 각 회원국의 주권평등에 기반한 국제연합(UN)이 탄생한 것을 상기하면, 이위종의 약소국 주권 존중의 열변은 선구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위종의 이 발언은 이위종의 생각일 수 있지만 법학을 전공하고 검사를 지냈으며 기독교인인 이준의 사상이 깊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법과 정의, 그리고 기독교 정신의 정수를 확실히 이해하지 않으면 이러한 발언은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세 명의 밀사는 호텔이라고 하지만 만국평화회의장에서 꽤 떨어진 허름한 ‘여관’에서 연일 대책회의를 열고 토론했을 것이다. 이위종의 이 발언은 그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봐야 하며, 그 내용으로 볼 때 이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준은 7월 14일 드종호텔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자결설, 병사설, 분사(憤死)설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이기항 원장은 네덜란드의 어느 자료를 봐도 자결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환갑을 앞둔 59세의 나이와 오랜 여행에서 오는 여독, 맞지 않는 음식,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초조함과 울분이 결합되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아닐까. 국채보상운동의 가치 올해는 을사늑약 체결 110주년이 되는 해다.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화와 식민통치가 합법적으로 이뤄졌다는 주장을 강화하고 있는 이때에 여러 역경 속에서도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불법성을 합당한 논리로 세계에 알린 헤이그 밀사의 활동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러한 헤이그 밀사의 활동에 중요한 논거를 제공한 것이 국채보상운동이었다는 것이 이번의 검토를 통해 처음으로 일부분 밝혀졌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의 활동과 국채보상운동 사이의 관계의 해명은 이제
  • 13. 특별기획 Ⅲ 국채보상운동이 발기된지 한 달여가 지난 1907년 2월 21일, 대구 북후정에서는 대구군민대회가 개최되었다. 국채보상의 취치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마련된 이 행사에서, 낭독된 취지서에 공감한 군중이 수백원의 성금을 십시일반 출현했다.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거금 100원을 쾌척한 한 여성도 있었다. “금번 의금에 힘에 따라 내는 것이 국민의 의미이거늘,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한 푼이라도 더 낼 수가 없으니 누구든지 1천원을 출연하면 죽기를 무릅쓰고 따라한다.” 거액보다 더한 결연함에서 명망과 재력이 있는 대구지역 명문가의 여성을 떠올리게 되겠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당시의 기사를 따르자면 ‘주파[酒婆]’, 즉 기생이었던, 앵무(鸚鵡) 염농산(廉隴山) 선생이었다. 그 뜻에 감동한 때문이었을까? 참석한 여성들은 눈물을 뿌리며 담뱃대를 꺾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틀 뒤인 2월 23일에는 대구 남일동 부인 7명이 패물폐지부인회(佩物廃止婦人会)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이는 국채보상운동 최초의 여성조직으로 평가된다. 이들은 곧 「경고, 아 부인동포라」라는 격문을 발표하며 여성의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대구군민대회는 국채보상운동이 그간 정치참여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여성, 하층민 등을 대중운동의 장으로 이끌었던 첫 발걸음이 되었는데, 이는 염농산 선생이 몸소 보여준 여성으로서의 주체성과 참여의지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대구 국채보상사무총회소의 의연금 참여인원 134명 가운데 여성은 27명이었고, 패물 의연자는 12명에 달했다. 또한 대구단연상채회사무소를 통해 대한매일신보에 도착된 부인 의연자 수도 227명이었는데, 이는 진주애국부인회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수였다. 전국적으로 본다면,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및 만세신보 등 4개 신문에 게재된 국채보상 윤석호 역사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 앵무鸚鵡 염농산廉隴山 천둥소리 252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시작에 불과하며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검토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또한 이준열사기념관은 올해 설립 20주년을 맞았다. 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 초대 소장을 지낸 이준의 기념관이기 때문에 국채보상기념관과 자매결연을 추진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특히 국채보상기념사업회는 현재 국채보상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이준열사기념관에는 이준을 비롯한 헤이그밀사의 기록물이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협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준은 함경남도 북청 출신이다. ‘북청 물장수’로 유명한 바로 그 북청이다. 북한은 그가 북청 출신이라는 점과 각종 애국운동을 펼친 것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북한의 그의 생가를 보존하고 있으며 앞에서 본 대로 ‘돌아오지 않는 밀사’의 영화를 제작했다. 남북관계가 점차 개선되고 있는 이때, 이준은 남북교류 활성화와 평화통일을 이끄는데 중요한 매개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준열사기념관을 조사하는데 이기항 원장과 송창주 관장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참고문헌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역, “헤이그만국평화회의관련일본정부기밀문서자료집”, 선인, 2007 꾼드꿰스터, ‘1907년 헤이그 특사의 성공과 좌절’, “한국사학보” 제30호, 2008. 2 片山慶隆,‘ハーグ密使事件と日本の新聞報道 : ‘事件’ 発生から第三次日韓協約締結まで’, “マスコミュニケーシ ョン研究” No.86, 2015 서울 상동교회 홈페이지 www.sangdong.org 이준열사기념박물관 www.yijunpeacemuseum.com
  • 14. 자료-1 앵무 염농산 선생 출처 : 조선민보 1937년 4월 24일자 자료-2 달성권번 위치도(현 대구 중구 상서동 20번지) 출처 : 손태룡,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70쪽 자료-3 염농산제언공덕비(성주군 용암면 용정리 용암파출소 인근) 출처: http://blog.daum.net/12977705/8724641 ❶ ❷ ❸ 의연자 명단 중에서 여성 의연자는 1,821명에 달했다. 주목되는 것은 그 중 양반 및 유지 부인층이 전체의 63%였으며, 기생 및 주희(酒姫) 등도 무려 21.8%에 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식인층, 상인층이 주도하여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이 부녀자와 하층민의 주체적 참여를 통해 확산되어 명실공히 대중운동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서의 활동을 통해 그녀의 재력과 각성된 의식을 엿볼 수 있지만, 관기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그때까지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자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1907년 이후 10여 년간의 행적 또한 묘연하다. 그러던 그녀의 이름이 별안간 다시 등장한 것은 1919년 5월 5일 성주군 용암면에 세워진 비석에서였다. 현 용암경찰서 인근에 비각은 소실된 채 덩그러니 남아있는 「염농산(廉隴山) 제언공덕비(堤堰功徳碑)」가 바로 그것이다. 「성주군지」(1996)에는 이 비석에 대한 설명이 간단히 부기되어 있는데, ‘앵무빗집의 앵무는 1889- 1946년 사이에 생존한 기녀의 이름으로서 일개 기생의 몸으로 용암면의 농업 경제기반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두리방천의 복구를 이룩하였으니, 누가 감히 그녀를 기생으로 천시하겠는가?’라고 전한다. 실제로 성주에는 해마다 큰 물난리로 마을이 피폐했다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오는데, 아마도 이를 안타깝게 여긴 염농산 선생이 두리방천의 제언 축조를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염농산 선생은 재력뿐만 아니라 사회참여의식을 두루 갖춘 이른바 ‘혁신기생’이었다. 특히 통감부시기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민간 기생단체가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염농산 선생은 1927년 1월 6일에 설립된 기생단체인 달성권번의 대표가 되기도 했다. 염농산의 사회참여는 교육계의 지원에도 미쳤다. 대표적으로 1937년 4월 24일자 조선민보의 기사를 보면, 「비경(悲境)의 교남교(嶠南校)에 2만원을 출자하다. 택지건물 기부를 신고하다. - 염농산 여사의 미거(美挙)」 “대구유일의 민간학교로서 개교 이래 16년간 다수의 인재를 사회에 내보냈던 사립 교남교는 근년 경영난에 처해 이를 이겨내기 위해 학교당국은 물론 동창회와 후원회에서는 필사의 노력을 다해왔지만, 분발에 찬 인사가 부족하여 이제는 풍전등화같이 폐교의 비운에 당면하게 된 절박한 때에 화전동 염농산 여사가 근일간 학교에 시가 2만원의 택지와 건물을 기부하겠다고 신고해서 사회에 근래 희박해진 감격을 주고 있습니다. 여사는 젊은 시절에 남편을 여의고 그 후 뼈를 깎는 양돈에 힘써서 지금 5,6만원의 사재를 모아 행복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는 78세 노파이지만, 교남학교의 비운을 들었을 때 당시 여자의 몸이지만 강하게 분발을 다해 재산의 대다수를 내어 동 학교의 회생에 일조를 했습니다. 이하 생략” 이 기사에 따르면 선생은 당시 78세의 노령[1859년생]인데, 함께 실린 사진을 보더라도 1889년생으로 전한 성주군지의 기록보다는 신빙성이 있다. 한편 교남학교[현 대륜고등학교]는 홍주일(洪宙一)·김영서(金永瑞)·정운기(鄭雲騏) 등 3명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설립한 교남학원(嶠南学院)의 후신으로, 이육사 등의 애국지사를 배출한 명문이었다. 선생의 기부는 복명학교 설립자인 김울산 여사 등의 선행과 함께 ‘남자의 그것에는 기막히는 대조를 보이는 것’으로 당시에 평가되었다. 여성의 사회참여가 남성의 그것에 견주어지는 시대적 한계가 고스란히 묻어난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여느 혁신기생과는 달리 기생이라는 직업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이중적 편견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는 사회참여에 주체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그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사회운동의 주체로 이끌어내는 울림이 있었다. 기생 출신 중년여성이 결연히 100원의 기금을 쾌척했던 1907년 어느 날의 북후정에서도, 이 울림은 그렇게 퍼져나가 무명 여성들의 의로움을 일깨웠을 것이다. 천둥소리 272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15. 나눔과 책임 Ⅳ 영리와 비영리의 조화, 핀테크를 통한 기부 지난 7월 LG글로벌챌린저의 일원으로 ‘핀테크로 실천하는 기부의 일상화’라는 주제로 네덜란드, 독일, 영국을 다녀왔습니다. 기부와 핀테크, 두 분야에 대한 전무한 상태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로 서류와 면접을 통과해 선발되고 해외까지 다녀와 탐방보고서까지 제출했습니다. 올해로 21년째인 LG글로벌챌린저는 대학생들의 해외 탐방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주제 선정, 탐방, 보고서 그리고 실행까지 모든 과정을 같은 학교 4인으로 구성된 팀이 주체적으로 수행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기부공학’이란 팀 이름은 영리와 비영리의 조화,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기술을 추구하자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평소 봉사활동을 통해 나눔을 실천하는 팀원들에게 기부는 낯설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 가까이서 봉사를 실천하면서 우리 사회의 온정이 어떻게 이들에게 쓰이는지를 가까이서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매번 ‘더 많은 손길이 닿을 수만 있으면 더 좋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분들을 도울 수 있는 ‘기부’를 더 활성화 시킬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저희 팀을 ‘핀테크를 활용한 한국형 기부 일상화 모델을 제시하자’는 주제에 대한 탐방으로 이끌었습니다. 해외탐방을 가기 전 모금분야에서 일 하시는 국내의 전문가들을 만나 뵀습니다. 현장에서 바라보는 기부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 저희 팀이 추구하는 방향, 해외의 현황 등 계획서 작성할 때 바라보지 못했던 다양한 관점에서 탐방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월드비전과 더 브릿지에서 시도하는 새로운 모금 캠페인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색다른 기부 모델을 활용하는 외국 기관들에서 알아볼 점들을 미리 준비해서 갔습니다. 지난 7월 20일부터 8월 2일까지, 총 14일 동안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독일의 베를린, 영국의 런던 3개 이창훈 경북대 영어교육 4학년 천둥소리 292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도시를 방문해서 총 8개 기관을 방문 및 담당자들을 인터뷰 했습니다. 자선단체를 위한 컨설팅을 하는 네덜란드의 Nassau Fundraising, 영국의 Small Charity Coalition. 문화예술 단체 및 개인을 후원하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운영하는 네덜란드의 Voornekunst(뜻 : 예술을 위한) 독특한 기부 모델을 운영중인 영국의 Penny for London와 Givey, 독일의 Elefunds. 즐거운 기부를 추구하는 영국의 The Hunger project. 크라우드 펀딩을 연구하는 네덜란드의 Crowdfunding hub를 방문했습니다. 탐방한 기관들 중에서 색다른 기부 플랫폼을 운영하는 기관 3곳에 대한 설명을 하고 색다른 아이디어를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기술과 아이디어가 만난 최초의 온라인 쇼핑몰 기부모델, Elefunds Elefunds는 독일 최초로 온라인 쇼핑몰과 기부를 결합하는 새로운 모델을 선보였다. 그들은 독자적 기술로 2011년부터 온라인 쇼핑몰의 결제에 기부를 접목한 새로운 플랫폼을 구축했다. 맥도날드에서 물건을 사고 남은 잔돈을 기부하는 박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동일한 원리를 온라인 쇼핑몰에서 적용하고자 했다. 온라인 쇼핑몰의 최종 결제 단계에 기부할 곳을 선택하고 금액을 입력하면 상품 금액에 기부금도 함께 결제가 된다. 현재는 다양한 쇼핑몰, 금융사, 자선단체와 파트너쉽을 구축한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되지만, 처음엔 결코 쉽지가 않았다. Elefunds의 모델 자체가 새로운 방식이었기에 온라인 쇼핑몰들이 제휴하기를 꺼려했다. 게다가 쇼핑몰별로 다른 결제 시스템에 Elefunds 방식을 적용하는 데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쇼핑몰들 역시 CSR을 실천할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춰 설득을 하면서 점차 많은 쇼핑몰들과 협력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작년 한 해 동안 3만 유로를 모금했으며 20여 개의 자선단체들이 Elefunds를 통해서 기부금을 전달받고 있다. 쇼핑몰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15% 정도가 기부에 참여 하는 것으로 나타나면 현재 이 비율을 끌어 올리기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SNS를 활용한 기부경험 공유, Givey Givey는 기부의 동기와 기부경험을 SNS로 공유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기부를 자극해 사람들의 기부 참여를 이끌어내는 전략을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기부를 하도록 자극한 영상인 사진을 유투브와 인스타그램으로 공유해서 이를 보고 다른 사람들의 공감과 참여를 이끈다. 게다가 Givey는 다른 플랫폼과 다르게 자선단체로 부터는 어떤 수수료도 받지 않고 기부금 전액을 전달했다. 전체 기부금액의 5%되는 금액을 수수료로 따로 받으며 기부금 전액은 온전히 기부단체에 전달한다. 5% 수수료만으로는 모델 유지가 되지 않기에 비즈니스 파트너들을 확보하거나 Givey의 후원자를 찾아서 투자를 받는다. 우리는 Givey와의 인터뷰에서 기부금의 수수료를 절감하는 방법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투브를 비롯한 SNS를 적극 활용하는 그들의 기부 전략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작년 한 해동안 2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Givey를 통해서 다양한 곳에 기부를 했으며 약 백만 파운드를 모금했다. 현재는 영국을 넘어 전세계로 Givey의
  • 16. 3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서비스를 확장할 예정이다. 끊임없이 신선한 콘텐츠를 고민하고 만들어 내는 그들의 열정이 Givey의 성공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밀리와 마크와의 인터뷰는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우리는 영국의 전통 홍차를 대접받았으며 인터뷰가 끝난 후엔 우리가 부탁하기도 전에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다. 심지어 우리가 한국으로 귀국한 뒤에 국제택배로 감사편지와 소정의 선물을 보내 주었다. 탐방 후에도 지속되는 감동과 여운을 선사해 준 Givey의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1페니로 바꾸는 런던, Penny for London 세 번째 영국 방문기관인 Penny for London은 런던 시청에 사무실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Penny for London의 COO인 데이비드(David Saidman)와 마케팅 담당자 쉬나엘(Shahnaz Awan)을 만날 수 있었다. Penny for London은 런던 시와 독립된 기관이지만 그들의 하는 일은 런던 시와 매우 밀접하다. 런던의 청년들을 위한 교육환경 개선, 급식지원, 직업교육과 같은 일들을 맡아하는 그들은 비접촉식(Contactless) 카드 결제에 기부를 접목한 독자적인 모금 플랫폼을 운영하는 중이다. 쉽고 편리한 기술에 소액기부가 접목된 그들의 모델은 우리가 맨 처음 구상했던 핀테크 기반의 기부모델 아이디어와 같았다. 버스와 지하철을 탈 때마다 1페니 씩 기부할 수 있도록 만든 그들의 생활 속 기부실천 모델에 현재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작년 10월부터 도입된 Penny for London에서 시작된 시민들의 작은 실천이 모여 올 7월에 자선단체에 35,000파운드를 전달 할 수 있었다. 비접촉식 카드 결제로 바뀌는 시장의 트렌드 맞춰 기부를 접목한 Penny for London은 영국 제1의 카드회사인 Barclays와 Visa, Mastercard 협력도 쉽게 이끌어낼 수 있었다. 게다가 런던 시와의 긴밀한 공조 덕분에 런던 대중교통에 그들의 아이디어를 접목할 수 있었다. 좋은 아이디어가 변화의 때를 만나 혁신적인 기부 플랫폼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마치며 처음 시작은 핀테크라는 기술이 우리나라의 낮은 기부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요술방망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탐방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 기술의 개선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문제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영리와 비영리의 조화, 기부를 둘러싼 여러 구성원들의 이해관계가 상통해야 지속가능한 기부모델이 운영될 수 있다는 것을 해외의 탐방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스토리, 그리고 기부자와 수혜자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에 둔 다음에야 핀테크를 활용한 기부 플랫폼이 지속가능한 모델로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알면 알수록 어렵고 복잡한 연구였지만 그 덕분에 국내외 다양한 전문가들을 만나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고민을 진심으로 해볼 수 있었습니다. 도와준 많은 분들과 함께해준 김도연, 김수현, 유현지 팀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표합니다. ` 청년에게 길을 묻다 Ⅴ 한국사회에서 청년세대를 규정하는 몇 가지의 담론이 있다. 88만원 세대, 아프니까 청춘이다, 달관세대 등이 그것이다. 청년을 규정하는 사회담론은 변해왔으나 공통점은 사회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보다는 개인들의 태도변화를 통해 문제해결을 유보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청년문제는 개인의 태도변화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이다. 청년세대는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계층이다. 청년문제를 바라볼 때 세대 간 갈 등 보 다 는 기 존 의 사 회 체 제 로 는 사 회 가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다음 세대 또는 특정집단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현 사회체제에 대한 문제로 바라보아야 한다. 현재 청년문제는 한 국가에서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국가의 발전을 이 끌 어 가 는 주 체 가 아 닌 도 움 을 받 아 야 할 취약계층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청년들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부당한 요구, 이를테면 열정페이나 구 직 과 정 에 서 의 차별에 순응하고 있다. 2010년 청년유니온이 대한민국 최초의 ‘세대별 노동조합’으로 창립할 당시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학생 또는 청년이라 호명되는 계층의 핵심문제가 ‘노동’ 문제에 있다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큰 비경제활동인구의 규모, 높은 이직률, 비정규직 비율 등의 문제가 청년세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문 제 라 고 파 악 하 고 이 를 해 결 하 기 위 해 서 노동문제로부터 접근해야 한다. 한국 청년들에게 나타나는 문제적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정치적 무관심, 청년실업, 결혼과 육아의 포기, 자살 등이 나타나는 가장 핵심적 원인은 노동권의 약화에 있다. 청년유니온은 세대별 노동조합으로써 청년 노동자들의 노동권리를 보호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노동조합은 대부분 대기업, 정규직 위주의 기업별 노동조합이다. 취업하기 힘든, 취업했다하더라도 기 존 의 노 동 조 합 에 쉽 게 가 입 할 수 없 는 비정규직·청년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권을 보호 받을 수 없다. 노동3권이 거의 무력화되어있는 대한민국에서 일시적인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청년들을 보호해주는 단체는 사실상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청년유니온은 일하는 청년들, 기업이 원하는 스펙을 쌓고도 취업이 좌절되는 청년 당사자가 스스로 우리의 노동권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건희 대구청년유니온 사무국장 천둥소리 31
  • 17. 청년유니온은 전국조직이다. 현재 서울, 경기, 경남, 광주, 대구, 부산, 인천에 지부가 있다. 대구청년유니온은 2013년에 설립되었다. 대구 청년유니온의 첫 번째 사업은 청년들의 아르바이트 노동에 대한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대학생 아르바이트 실태조사를 시작으로 대구지역토종브랜드 커피전문점 실태조사, 대기업 프랜차이즈 아르바이트 실태조사까지 총 세 차례의 아르바이트 실태조사를 진행하였다. 커피전문점 실태조사의 경우 기자회견과 노동청 고발 등을 통해 주휴수당 문제를 이슈화시켰다. 업체의 실제 시정조치를 이끌어 냄으로써 청년노동조합으로서의 가능성과 자신감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청년 정책 생산이나 청년문제 해결의 출발선은 실제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2014년 6월 지방선거에 맞추어 64명의 청년들을 만나서 인터뷰한 책을 펴내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구직자, 아르바이트, 비정규직,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청년 등 분야를 나누어 인터뷰를 하였다. 2014년 4월 2일~9월 19일 동안 지역 청년들을 만 나 고 대 구 청 년 백 서 ‘ 아 는 사 람 이 야 기 ’ 를 발간하였다. 대구 청년들의 삶과 현실을 담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고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다양한 청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대구청년유니온은 청년정책 생산을 위한 활 동 도 꾸 준 히 하 고 있 다 . 2 0 1 4 년 6.4지방선거 당시 각 후보 캠프에 정책 질의서를 보내어 답변 내용을 바탕으로 전국동시청년정책제안 기자회견을 하였다. 그리고 대구고용노사민정협의회의 주최로 ‘청년공감정책제안발표회’를 하였다. ‘청년공감정책제안발표회’는 서울사례를 중심으로 거버넌스에 대한 가능성과 청년센터 건립을 위한 제안, 그리고 지역 청년을 위한 일자리·복지 정책 제안까지 폭넓은 주제로 정책제안을 하는 자리였다. 현재는 지역고용문제 개선을 위한 대구고용전략개발포럼에 참여하고 있다. 청년유니온 내에서 일상적으로 정책팀을 운영하면서 청년·노동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올해 정책팀에서 발굴한 사업은 두 가지가 있다. 대구청년유니온 정책팀은 팀 회의 중 대구시의회 속기록을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대구 시의회 오철환의원이 대구시의회 제7대 제230회 기획행정위원회에서 “청년이라는 것은 아주 미숙한 상태고 시야가 좁고 판단력이 미숙하다고 보기 때문에(대구시청년위원회가) 여론 결집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아니다.”라고 발언한 것을 발견하였다. 대구청년유니온은 이에 대응하여 대구시 청년위원회의 역할, 청년조례제정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의서를 대구시의원 30명 모두에게 보냈다. 그러나 30명의 시의원 중 한명도 답변을 하지 않았고 이를 규탄하는 1인 시위를 대구시의회 앞에서 진행하였다. 사진출처 - 평화뉴스 2015년 대구 희망고문상 시상식(2015. 9. 3) 2013 대학생 아르바이트 실태조사 2014 대구지역 대기업 프랜차이즈 아르바이트 실태조사 주휴수당캠페인, 대구고용노동청 고발 기자회견, 커피전문업체 관계자와 간담회 책 ‘아는사람이야기’ 북콘서트 [관련기사] 2015. 9. 2. 노컷뉴스- “3주 기다렸는데 전원 탈락” 대성에너지 채용 갑질 논란 http://joongang.joins.com/article/291/18579291.html?cloc=joongang% 7Cext%7Cgooglenews 2015. 9. 3. 한겨레- 대성에너지 ‘채용 갑질’ 논란…3차 면접까지 보고 “전원 탈락”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07254.html?_fr=mt2 3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천둥소리 33
  • 18. 천둥소리 353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1인 시위 후 전자우편과 팩스로 질의서를 재차 보낸 결과 16명의 의원에게 답변이 왔다. 그러나 2명의 의원을 제외한 14명의 의원들은 익명으로 답변서를 보냈다. 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해야 할 의무가 있는 시의회가 지역 청년의 여론을 담은 질의서를 응하지 않거나 익명으로 답변한 것은 대의기관으로써 의무를 저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사업은 대성에너지 채용갑질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대성에너지는 올해 5월 대졸공채를 추진하였다. 12명의 신입사원을 채용한다는 공고를 냈지만 결과는 전원 불합격이었다. 애초 채용공고를 무시하고 한 명도 채용하지 않은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채용과정 중에 발생했다. 대성에너지는 2차 면접에서 기독교 색채가 강한 창립회장 자서전과 창립회장 부인 자서전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라고 했다. 2차 면접 현장에서는 회장 누나라는 사람이 면접장에서 성경을 읽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애초 예정에 없던 회장이 참석하는 영어 ppt 면접이 진행하였다. 절박한 처지의 구직자들을 희망고문한 대성에너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였다. 기자회견 이후 대성에너지는 채용 과정 중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사과하고 애초 채용계획을 철회한 이유에 대해 공식적으로 해명하는 글을 자사 홈페이지에 게재하였다. 대구청년유니온은 희망고문상 시상식을 시작으로 청년 노동자의 절박한 처지를 이용하여 직장 내에서 그들을 일상적으로 착취하는 블랙기업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대구청년유니온은 앞으로도 청년 노동자 당사자의 입장에서 구직과정에서부터 실제 직장에서 발생하는 부당행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작은 승리를 축적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청년에게 길을 묻다 Ⅴ 2015년 8월 21일부터 10월 18일까지 총 59일간 진행하는 경주에 아주 자랑스러운 행사 실크로드 경주로 가보았습니다. 47개 국가가 참여하여 실크로드와 관련된 모든 문화, 전시, 공연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 큰 행사인 만큼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또한 ‘내일로 홍보단’에선 실크로드 경주 수건을 들고 사진 찍는 미션을 수행하는 학생들이 있어 이 행사의 홍보를 톡톡히 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실크로드 경주 2015의 개막식은 8월 21일 15:00~16:10(70분)에 진행되었는데 저는 개막식을 아쉽게 보진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개막식 이후 지속적으로 방문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간 날에도 많은 사람들과 현장학습을 온 학생들로 북적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서 그런지 평소에는 주차비용을 받지 않은 엑스포였지만, 큰 행사인 만큼 주차장 비용을 2,000원 정도 받았습니다. 큰돈은 아니지만 주차비용을 내는 만큼 주차장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고 주차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 자가용을 끌고 가더라도 가족단위로 편하게 다닐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매표소와는 거리가 멀기에 많이 걸어야했습니다. 제가 다녀왔을 때는 「K-그랜드 세일 특별주간」 할인행사 기간 중이라서 12,000원에 판매되는 입장권을 10,000원에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조금 더 저렴하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코스, 매표소를 들어가니 가장 먼저 천마광장에서 다양한 세계 음식들이 저를 맞이해주었습니다. 현지인들이 직접 각국의 대표 음식들을 즉석으로 요리해주어 신선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환전해야 한다는 사실! 여기서 환전이란? 실크로드 경북의 큰 행사, 2015 실크로드 경주! 청년이 다녀오다 이규동기자 대구한의대학교 청소년교육상담학과 천둥소리 35 [천둥소리 청년기자단 현장르포]
  • 19. 천둥소리 373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안에서만 쓸 수 있는 엽전 같은 돈입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중간에 환전소가 있으니, 환전을 한꺼번에 할 필요는 없을듯합니다. 음식뿐만 아니라 각국에서 자랑하는 장신구들도 많이 보이니 외국에서 살 수 있는 것을 실크로드 경주 2015를 통해서 사는 행운도 얻을 수 있습니다. 건물 사이사이 골목을 형성하여 중간에 공연도 볼 수 있어서 마치 미니 마을 안에 들어온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해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경북권의 자랑거리들도 쏠쏠히 볼 수 있고 대학생 창업 등 다양함을 체험해보기도 하고, 또 맛보고 즐길 수 있는 경험을 얻어 좋은 기회였습니다. 먹거리를 구경하다 보면 기차도 지나다니는 풍경을 보실 수 있는데 아이들과 어르신들을 위해 작은 금액을 내면 기차를 타고 5분에서 10분 남짓 거리를 다닐 수 있습니다.(기차를 타려면 계림지에 표 끊는 곳이 있으니 참고) 두 번째 코스, 천마광장을 지나 엑스포 문화센터로 들어서면 롯데면세점홍보관·한국전통예술전· 실크로드리얼작품전·Real4D·바실라(뮤지컬)·백남준비디오작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롯데면세점홍보관의 경우 롯데면세점을 대표하는 연예인들의 핸드프린팅이 사인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으며 한국전통예술전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한복들과 다도예절을 배울 수 있게 체험공간도 있었습니다. 실크로드 리얼작품전은 실크로드에 참여한 각국의 예술가들이 직접 그린 미술작품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Real4D는 동국대학교 학생들이 직접 해주면서 실크로드를 4D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바실라(뮤지컬)은 세계 문화 간의 만남과 융합을 그려내는 ‘종합 퍼포먼스 쇼’ 로써 시간을 잘 맞추신다면 좋은 뮤지컬을 저렴한 가격에 볼 수 있습니다.(Real4D·바실라(뮤지컬)는 금액을 지불해야 함) 세 번째 코스, 선덕광장에는 경상북도에 있는 다문화센터들의 부스들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었지만 한 바퀴 돌고 오는 사이 일찍 끝나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네 번째 코스, 쥬라기로드로 가보니 옛날 화석과 보석들을 전시하고 있어 아름다움과 신기함을 볼 수 있었으며 어두워서 그런지 지나다니다가 옆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코스, 실크로드 애니메이션으로 시간타임마다 각국의 애니메이션을 방영해주어 아이들을 위한 코스로도 잘 마련되어 있었으며 가족단위로 왔을 때 꼭 들러볼만한 코스였습니다. 여섯 번째 코스, 백결공연장으로 이동하여 제 시간대에는 ‘페인터즈 히어로, 판타스틱 공연’을 볼 수 있었는데 미리 행사 일정을 알고 시간을 잘 맞춰서 간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보기에는 조금은 난이도가 있다는 생각이 들며 청년들과 성인들이 보기에는 아주 적합하고 흥미로운 공연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주고 봐야하는 공연들을 실크로드를 통해 무료로 보고 공연장이 크기 때문에 자리걱정은 넣어두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야외 공연장인 만큼 사람들이 많이 움직이는 경우를 보아서 공연에 집중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일곱 번째 코스, 엑스포의 자랑인 경주타워에 올라 가보았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엘리베이터의 4대수로는 어림이 없어 기다려야 했지만 엘리베이터를 잡아주고 태워주는 안내요원이 배치되어 있어 금방 빠지고 탈 수 있었습니다. 82m 높이로 엘리베이터가 층수가 아닌 m로 알려주며 82m층으로 가보니 전시회가 한류문화에 대해 전시도 잘해놓았으며, 석굴암 HMD 트래블 체험관도 볼 수 있어 많은 체험과 구경거리도 쏠쏠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HMD 트래블 체험은 비용이 어느 정도 있지만 재미와 신기함으로 공존하여 구경거리로 아주 신기했습니다.
  • 20. 감나무 가지에 마지막 남은 홍시 하나 生의 가장 빛나는 한때를 훤히 밝히고 있다 그 높이만큼 오르기 위해 폭염과 소나기 광풍의 시달림도 견뎌내었으리라 함께 조국광복 위해 목숨 바치자던 동지들 먼저 떠나가고 광활한 하늘, 벌판 삼아 의엿이 매달려 있는 저 초연함이 더욱 진홍의 빛을 내나 보다 불이 꺼진 시대의 등불같이 그 아래 걸어가는 사람들 발걸음 비추이며 마지막 한 순간까지 끓어오르는 심장에 불을 당긴다 홍시 하나 천둥문학 Ⅵ 약력 •1985년, 『심상』 및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02년, 중국 「長白山文學賞」 수상 •시집 『백도라지꽃의 노래』 (白桔梗花之歌, 2002 료녕민족출판사) 등 서지월 천둥소리 393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여덟 번째 코스, 장보고관·계림지·곡수원 등 공원이 형성되어 있어 여기는 사진 찍기 좋은 장소로 적합했습니다. 참여한 나라들이 국기도 매표소 앞과 이 코스에 달려있어 국기를 보면서 사이를 걸어가는 그곳들이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연인들과 가족들이 사진을 많이 찍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도착했던 시간은 12시였는데 다 둘러보고 사진 찍고 체험하고 경험하고 먹어보고 하는 시간이 지나니 어느새 5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많이 걸어서 다리는 아팠지만 구경하는 재미와 먹는 재미가 너무 쏠쏠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고 경험했던 시간이었습니다. 행복 그 이상 해외에 다녀온 기분을 느꼈습니다.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다른 나라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에 최고의 행사였고 실크로드를 그저 해외문화를 경험하는 것 그 이상으로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느끼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고 많은 행사의 노력을 기운 것이 엿보였으며 다양한 국적사람들을 보고 소통하고 나누는 재미가 쏠쏠했고, 다양한 행사와 요깃거리도 즐길 수 있어서 외국에 가지 않아도 실크로드 경주를 통해 다른 나라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참 큰 묘미였습니다. 더군다나 MOU 체결을 맺은 대학교들도 대학생들을 앞장세워 직접 부스를 운영하여 현장에서 직접 열심히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는데 저희 과는 비록 아니지만, 제가 재학 중인 대구한의대학교도 눈에 보여서 모교에 대한 뿌듯함도 느꼈습니다. 대학생들이 이렇게 작게나마 학교의 지원을 통해서 작게나마 큰 행사를 참여할 수 있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청년창업가들도 부스운영을 하고 있어, ‘다음에 이 행사에서는 지금 보았던 대학생들이 청년창업부스를 운영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다른 시각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기사를 보고 계시는 청년들도 문화재에 관심이 많다면 이 기회에 부스운영을 해보는 것도 청년들에게 좋은 기회가 된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것저것 부스를 체험하다보니 시간이 훅훅 지나가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고 ‘입장료가 조금 더 저렴했다면 대학생들에게는 더 좋은 기회로 더 많은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 21. 천둥문학 Ⅵ 윤봉중 후박나무 펄벅기념관에 가면,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네가 한 사람 있다. 노인네 나이에 비해 색상이 좀 야하다 싶은, 핫 핑크색 재킷을 걸치고 손에는 부채를 쥐고 있다. 목걸이 명찰을 걸고 있는데, 명찰이 마치 태극무공훈장이라도 되는 양 뒷짐을 지고 다소 거오하게 서 있다. 그 노인네가 바로 나다. 문화해설사! 이 일은, 내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해온 많은 일 중에서도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일이요, 긍지를 갖는 직함이다. 노년이 내게 준 깜짝 선물이요, 늘그막에 얻은 홍복이다. 하지만, 나는 펄벅에 대해서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라는 것밖 에 아는 게 없고, 그녀의 작품도 대지 외에는 읽은 게 없다. 또한, 그녀의 고국인 미국이나 그녀가 사십 년 동안이 나 살아 고국이나 다름없다는 중국에도 가본 적이 없는 우물 안 개구리로 문화하고는 거리가 먼 촌뜨기다. 이런 내가 펄벅기념관 문화해설사라니! 그렇긴 해도, 세상살이에 이리 채이고 저리 밟혀, 자코메티의 조각 ‘걸어가는 남자’처럼 피골이 상접해 헐쭉해진 내 몰골이, 기념관이라는 어감이 풍기는 예스러운 이미지와 어울림 직하기는 하다. 6.25 때 놀라고, 보릿고개 때 배곯 고, IMF 때 데고, 주식에 투자하다 깡통 찬, 아픈 내력이 내 얼굴이나 몸, 어딘가에 화인처럼 남아 있을 테니 말이다. 뒤늦게야 나는 펄벅의 70여 작품을 찾아서 읽고, 대지 삼부작보다 더 크고 두툼한 ‘펄벅평전’을 훑어보며 말 꽤나 하는, 유식한 문화인-문화해설사가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부천 시니어클럽에서 관장하는 문화해설사의 선발기준은 ‘노인 일자리 만들어주기 사업’의 취지에 맞게 단순하고 아주 인간적이다. 면접이라는 요식을 치르긴 해도, 부천시에 적을 두고 있는 65세 이상 노인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두 발로 걸을 수 있으면 된다. 신체가 건강하면 더 말할 나위 없지만, 조금 부실해도 눈감아주니 다분히 친노적(親老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삼무(三無)는 반드시 갖추어 야 할 절대적 조건이다. 삼무란, 첫째, 돈푼 꽤나 나가는 어연번듯한 집이 없어야 하고 둘째, 돈푼 꽤나 받는 그럴듯 한 직장이 없어야 하고 셋째, 돈푼 꽤나 되는 보수를 받았으면 하는, 돈 욕심이 없어야 함을 말한다. 나도 삼무에 속 한다. 주식에 투자하면서 돈푼 꽤나 나가는 대지 60평짜리 너른 집을 일찌감치 없애버렸고, IMF 때 그럴듯한 직장에 서 쫓겨나 마누라 눈칫밥이나 얻어먹는 백수요, 책 욕심은 있어도 돈 욕심은 - 욕심낸다고 더 주는 것도 아니고 - 별 로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없이 사는 노인네’라야 한다. 이걸 두고 새옹지마요, 전화위복이라 하던가. 하지만, ‘없이 사는 노인네’라고 해서 마음까지 가난하거나 옹색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세상만사 마음먹기’라고 했듯, 홀가분하게 삼무의 삶을 살다 보니, 저절로 삼락(三樂)을 얻게 되었다. 삼락이란, 문 닫으면 마음에 드는 책을 읽고, 문 열면 마음에 맞는 손을 맞이하고, 문을 나서면 마음에 드는 산천경개를 찾아가는 세 가지 즐거움을 일컫는 데, 조선조 유학자인 신흠(申欽)선생의 인생삼락(人生三樂)을 말함이다. 펄벅기념관은 부천시 소사구 심곡동, 성주산 자락에 집필에 몰두한 작가처럼 고즈넉이 들어앉아 있다. 소설 대지로 미국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 여사는 세계적인 작가일 뿐만 아니라, 사회사업에 평생을 바친 인도주의자요, 박애주의자이다. 여사는 전쟁 중 미군으로 인해 태어난 혼혈 고아들의 양부모를 찾아주기 위해 미국에 ‘웰컴 하우스’를 창설하고, 그녀도 일곱 명의 혼혈 고아를 입양했다. 그 후, 혼혈아가 많은 아시아 여러 나라 중국, 베트남, 태국, 필리핀, 타이완 그리고 한국에 ‘펄벅재단’을 설립해 혼혈아와 전쟁고아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활발하게 펼쳤다, 한국에는 1967년, 현 펄벅기념관 자리에 사재를 털어 ‘소사희망원’을 건립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회에 서 냉대 받고 편견에 시달려야 했던 전국의 많은 혼혈아와 전쟁 고아들이, 이 시설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전시장 중앙에 높이 170cm, 폭 45cm 크기의 산수화가 한 폭 있는데, 그녀가 80회 생신 때 소사희망원 예전 원생 들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산수화 뒷면에는 소사희망원을 거쳐 간 2,000여 명의 원생 중 1,030명의 이름이 깨알같이 쓰여 있다. 그 명단에는 혼혈가수 인순이를 비롯하여 윤수일, 박일준, 함중아 등 유명 가수들 이름도 들어 있다. 올봄 유치원생들이 체험학습을 나온 날이었다. 고만고만한 또래의 아이들이 노란 유니폼을 입고 나비 날개를 등에 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를 것 같은 앙증맞은 나비들이었다. 활짝 핀 철쭉을 배경으로 깜찍 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는 손에 손 잡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왔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말소리로 전시장 안은 금세 시끌시끌해졌다. 초상화 속의 펄벅 여사가 활짝 웃으며 반기는 것 같았다. 내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쭈그리고 앉자, 내 주위로 아이들이 나비 떼처럼 모여들었다. 나는 유리진열장 안에 전시된 펄벅 여사의 유품인 머리핀을 가리키며 애써 부드럽게 얘기했다. “이 자그마한 머리핀은 펄벅 할머니가 앞머리에 꽂고 다니셨던 머리핀인데…” “할아버지! 할아버지 머리는 왜 하얘요?” 아까부터 내 등에 기대고 서서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한 아이가 불쑥 내 말허리를 자르고 나섰다. 유치원 햇살 반인 내 손녀 또래의 아이였다. “그건 말이야, 왜냐하면……” 아이의 뜬금없는 행동과 질문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마땅한 대답을 찾느라 끙끙대고 있는데, 머리가 허연 펄벅 여 사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펄벅 할머니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머리가 하얘지는 거란다.” “……우리 할아버지 머리는 까만데….” “……” 나는 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 말대로라면, 그 아이 할아버지는 좋은 일을 많이 하지 않은 할아버지가 되는 셈 이기 때문이다. “호연아, 그건…… 호연이 할아버지는 머리를 까맣게 물을 들여서 그런 거란다.” 아이들 뒤를 따라다니던 인솔교사가 얼른 나서 거들어주었다. 멋쩍어진 나는 아이를 향해 ‘봉숭아학당’의 영구처럼 헤벌쭉 웃어주었다. 또 다른 아이는 내 이마와 얼굴에 굵게 파인 주름살을 손가락으로 꼭꼭 찌르면서, “할아버지는 왜 이렇게 주름이 많아요?”하는 것이었다. 졸지에 내가 기념관 해설사가 아니라 유물이 된 느낌이었다. 그날, 집에 돌아 온 나는 거실에 있는 큰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까맣던 머리는 된서리를 얼마나 맞았 는지 허옇게 바랬고 이마의 주름은 밭고랑처럼 언틀먼틀 깊고 굵게 파였다. 윤곽도 희미해진 눈썹에는 흰 터럭이 성 깃성깃 돋아 있고, 안경 너머 두 눈은 밤샘 문상이라도 하고 온 듯 퀭하다. 길고 깊이 파인 팔자 주름과 굵은 실로 꿰 맨 듯 꾹 다문 입술은 몽니가 잔뜩 난 고집불통처럼 보였다. 한동안 허우룩한 눈길을 거울에서 거두지 못하고 서 있 던 나는 서름하게 돌아섰다. 그러자 뭔가 알 수 없는 서러움 같은 게 울컥 치밀어 올랐다. 서러움은 우울함으로 번져 갔다. 노년에 찾아드는 우울증은 어떤 질병보다 무섭다. 어떻게든 나를 달래야 했다. 내가 나를 위로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로해줄 것인가. 무릇, 육안(肉眼)으로 보이는 것은 사물의 겉모습에 불과하다. 참모습이 아니다. 참모습을 보려면 심안(心眼)으로 보아야 한다. 나는 자책이 아닌 자애(自愛)의 눈길로 다시 거울 앞에 섰다. 흰머리는, 삶의 긴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 고 끈기 있게 달려온 마라토너만이 쓸 수 있는 왕관이다. 이마의 굵고 거친 내천(川)자 주름은, 삶의 전장을 누비고 다 녔던 탱크의 캐터필러 자국이요, 삼성(三星)장군의 계급장이다. 흰 눈썹은, 마량(馬良)의 백미요 출중함이다. 움푹 들어가고 퀭한 두 눈은, 사려와 분별, 삶의 지혜가 그득 고인 웅 천둥소리 414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제1회 매일신문 시민문학상 최우수상 수상작(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