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deShare a Scribd company logo
1 of 182
Download to read offline
3장. 고용이데올로기와 활동가

1. 들어가며 ································
································
································
································
1.1. 연구 목적과 문제 의식 ·························
························
························
························
1.2. 조사 연구 방법 ···························
···························
···························
··························

147
147
150

2.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교훈 ·······················
·······················
·······················
·······················
2.1. 왜 다시 98년 투쟁을 들추는가? ·····················
····················
····················
····················
2.2.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 경과 ·················
················
················
················
2.3.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기억과 영향 ··················
··················
·················
·················
2.4. 끝났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원직 복직 쟁취투쟁 ···
···
···
···
2.5. 98년의 의미와 영향 ··························
·························
·························
·························

152
152
153
159
170
186

3. ‘고용이데올로기’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운동에 미친 영향 ···········
···········
···········
···········
3.1. ‘고용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
····················
····················
···················
3.2. ‘고용이데올로기’에 의한 현장의 변화 ··················
·················
·················
·················
3.3. 역대 집행부 활동을 통해 살펴본 ‘고용이데올로기’의 변화 과정 ·······
·······
·······
·······
3.4. 구조조정 쟁점사안들의 구체적 진행 양상 ·················
·················
·················
·················
3.5. 요약 ································
································
·······························
·······························
3.6. 나가며 ·······························
·······························
······························
······························

191
191
193
220
248
263
266

4. 활동가 ·································
·································
·································
·································
271
4.1. 들어가며 ······························
······························
······························
·····························
271
4.2. 98년 이후의 변화 양상 : 사측의 노무관리 방식, 조합원, 활동가, 그리고 현장의 변화 ·
·
·
·274
4.3. 98년 이후 현장의 변화 ························
························
························
························
284
4.4. 현장의 요구에 대한 활동가들의 판단과 대응 ················
················
···············
···············
288
4.5. 활동가들의 일상활동 및 현장조직 활동 ··················
··················
··················
·················
300
4.6. 활동가 형성과 강화에 대하여 ······················
·····················
·····················
·····················
317
4.7. 소결 - 활동가 재생산을 위한 몇 가지 제언 ················
················
················
················
326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3장. 고용이데올로기와 활동가

1. 들어가며

1.1. 연구 목적과 문제 의식

1.1.1. 98년 5월 정리해고 반대 파업투쟁을 다시 바라본다

“하청들이 우리보다 월급 적게 받고 고생하는 것 누가 모르겠습니까. 활동가도 아니고, 노조 집행부도 아니
고, 평범한 조합원인 우리들도 이 나라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것, 다 알고 있습니다.
현자노조 조합원이라면 대부분 비정규직 불법파견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당연히 지지하고 함께 싸워줘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현장에서 인간적으로 개인적으로 잘 해주는 것과, 하청 노동자들의 정
규직화를 위해 조직적으로 싸우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고용의 문제가 달려 있기 때문
에 매우 민감합니다. 왜냐면, 현대차 노동자들은 98년 정리해고 사태 때 그 살벌한 칼바람의 경험을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악몽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에게 98년 5월은 생각하기도 싫은, 말 그대로 ‘악몽’이다. 그해 여름 277명 정리
해고와 1,900여명 18개월 무급휴직, 그리고 8,000여명 명예퇴직이라는 무서운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
후 정리해고자와 무급휴직자 등 대부분이 약 1년 만에 현장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러나 현대차 노
동자들은 7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그 아픔을 지워지지 않는 흉한 상처처럼 드러내기도 싫어하고,
당시의 고통이 재발할까 두려워하고 있다.” (‘레이버투데이’에서 인용)
우리의 문제의식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98년 투쟁 이후 조합원들은 고용 안정을 가장 중요한 사안
1순위로 꼽고 있다. 그리고 ‘악몽 같은’ 98년이 재현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한편으로는 사측의 구조
조정에 따른 공포감을 스스로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 이후 7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147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현대 자본은 사상 초유의 이윤을 창출하고 있는 반면, 현대 노동자들은 ‘상시적 고용불안(감)’에 시달
리고 있다. 이러한 불안이 집단적 불만으로 조직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 상태에 이르기
까지 사측의 노동 통제는 어떠하였고, 이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어떠하였는가. 투쟁의 성과와
패배는 현장 정서를 어떻게 변화시켜왔는가. 사측의 경영 전략과 이에 따른 통제 이데올로기, 그리고
조합원들의 패배 의식・무력감・실리주의 등이 한데 버무려진 현장의 여론을 선진 활동가들은 어떻게
바라보았고, 어떻게 대응해왔는가 등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1.1.2. 비정규직 철폐・계급적 노동운동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고용 이데올로기’

최근 현대자동차 불법 파견 투쟁의 어려움을 진단하면서 주로 짚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정규직 노조
의 이기주의이다. 비정규직 철폐 투쟁이 계급적 노동운동의 복원을 위해 무척 중요한 투쟁인데도, 정
규직 노조가 이를 적극 받아 안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정규직 노조의 이기주의에 대한 비판은
‘현상’에 대한 비판일 뿐이다. 정규직의 이기주의는 일상적 구조조정으로 일상적 불안정을 만들어온
자본의 공세에 대한 방어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
는 문제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전선을 만드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98년 정리해고의 수용, 2000년(직접 생산 라인 내 사내 하청 투입을 16.9%까지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는 내용의) 완전고용 합의서, 직영 인원 충원 시 인원의 40%를 사내 하청 노동자로 채우도록 했던
2003년 노사합의 등에서 드러나는 문제들은 바로 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전선’이 없음을 반
영한다. 98년 정리해고 반대 투쟁 당시 총노동과 총자본의 대리전 양상으로 격돌하면서 만들어졌다가
손상된 대(對)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전선이 아직 복구되지 못한 것이다.
정리해고 반대 투쟁이 실패한 후, 노동조합은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논리로 양보 교섭을 진행하였다.
고용을 약간 보장받는 대가로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노동 조건의 악화는 피할 수 없다’는 논
리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양보 교섭 때문에 현장의 불안감은 더욱 확산되었다. 노동조합을 중
심으로 반신자유주의 투쟁 전선을 복원하고 노동자 대항 이데올로기를 확장하는 길을 찾지 못하고,
그 대신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생존할 방도를 모색하면서 ‘자발적으로’(강제된 자발이지만) 노동강도
강화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된 것이다.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전체 노동자들을 나누고 위계화하
는 자본의 전략에 동조한 점도 지나칠 수 없는 문제다. 이런 문제점들은 다시 노동조합과 선진 활동
가들에게 되돌아와 그들의 역량과 활동 폭을 위축시키는 악순환을 밟아왔다.
몇 년 전부터 가장 주요하게, 가장 많이 외치고 있는 ‘고용안정 쟁취’라는 슬로건은 이런 과정을 거치
면서 그에 걸맞는 투쟁에 대한 기획과 결합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오히려 현장의 고용불안(감)을 증
폭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왜곡되고 있다.

148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1.1.3. 노동강도 강화와 고용이데올로기

이제 노동의 불안정화는 비정규직(주변부) 노동자의 문제로만 보기 어려워졌다. 이미 노동의 불안정
화와 빈곤화 경향은 특정 근로빈곤층이나 불안정 노동층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의 불안정화라는 칼날
은 전체 노동자를 이미 심각한 지경으로 분할하였을 뿐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의 기반까지 야금야
금 도려내고 있다.
2005년 현재 현대자동차의 상반기 순이익은 2조원이 넘었다. 연간 순이익은 3조원을 훌쩍 넘을 것이
라는 전망이다. 그렇다면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상황은 어떨까? 회사가 잘 나가는 만큼 노동자들도
더 쉽고 편하게 일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실제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조사한 결과들은 그러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음을
보여준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노동강도는 예전 그대로이거나 혹은 예전보다 더 나빠졌다. 더 놀라
운 사실은, 노동자들이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가들 역시 노동강도에 관한 문제들, 즉 노동자의 몸과 건강에 대한 문제들은 상대적으
로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혹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 문제는 최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의 성격과 크게 다르지 않
다. 노동강도 문제는 특수한 별도 영역이 아니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노동
의 위기’ 중 한 부분이고,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을 가장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노동강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노동강도 문제를 현대자동차 노동조
합 운동의 전체적 차원에서 인식해야 하고, 더 나아가 단위 사업장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총체
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그 인식과 대안을 위해, 먼저 98년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구조조정 반대 투쟁을 주목하고자 한다.
98년 현대자동차 구조조정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운동
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노동강도에 관한 ‘수수
께끼’를 푸는 열쇠를 찾으려면, 98년의 경험을 돌아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비단 노동강도의 문제
뿐 아니라, 지금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들
의 원인을 찾으려면 98년 구조조정 반대 투쟁에서 발생되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무엇’을 밝
혀내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으려면 그 ‘무엇’에 대한 대처방안이 나와야 한다. 그
‘무엇’이란 바로 ‘고용이데올로기’ 이다.
3장은 고용이데올로기로부터 출발하지만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그런 결과가 ‘연구’만
으로 온전한 결실을 맺을 수도 없는 일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결실이 자본의 공격에 맞서거나, 혹은
그 공격을 비껴가고 있는 현장 속에서 맺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결실을 맺기 위해 지나
간 흔적을 더듬거리며 찾고, 확인하고, 드러내는 것이 본 연구의 1차 목적이다.

149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1.1.4. 고용이데올로기와 활동가

이번 연구의 큰 줄기는 노동강도 강화 원인을 밝히고 노동강도를 평가하며, 그 대안을 찾는 것이다.
여기에는 현장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과 고려가 필요하다. 이 장에서는 현장의 이데올로기 지형과
이를 만들어내는 주요 주체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 중에서도 노동자의 대항 이데올로기를 생산하
는 이데올로그이자, 자본의 논리에 저항하는 하나의 집단으로서 ‘활동가’에 주목하고자 한다. 98년 정
리해고 반대투쟁 이후 현장도 변하고 조합원들도 변했다는데, 과연 활동가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여
전히 저항의 1차 기지로서의 현장의 구심력을 확보하고 있는가? 아니면 대다수의 조합원들이 눈살 찌
푸리는 모습으로 단결을 방해하는 원심력이 되고 있는가? 이런 점들이 우리의 주된 문제의식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고용이데올로기’, 즉 ‘고용불안(감)’ 증폭에 대한 현장의 대응을 분석하는 일이다.
그 분석을 위하여 활동가들이 구조조정에 대한 일상의 대응에서 원칙을 지키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
한 원칙을 가지고 조합원들과 끊임없이 만나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 보고서에서는 활동가들의 유입 경로나 생애 분석 등을 대폭 줄이고, 98년 이후 현장의 변
화, 활동가들의 변화, 사측의 경영전략의 변화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보고서가 현대자동차 활동가들의 의식 상태,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 방향, 방법, 활동 전반에 대한
인식 등을 활동가들 안에서 함께 나누고, 현장 활동 활성화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바람으로
조사한 내용을 최대한 가감 없이 싣고자 하였다.

1.2. 조사 연구 방법

1.2.1. 활동가 심층 면접 조사

대의원, 소위원, 여러 현장조직 구성원, 98년 투쟁을 경험한 활동가, 2002년 이후 입사자 중 활동가,
현 집행부 등으로 구분하여 면접 대상을 선정하였다. 면접 내용은 △98년 투쟁 평가, △98년의 개인
적 경험, △98년 이후 각 주체들의 변화 양상, △구조조정 대응에 대한 원칙・사례・평가, △활동가
조직에 대한 판단, △활동가들의 변화 양상, △신・구세대에 대한 판단 등 총 7가지 주제로 구성하였
다. 연구원과 면접 참여자가 1대 1로 이야기하는 면접 방식으로 진행하였으며, 면접 참여자는 총 46
명이었다.

150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1.2.2. 대의원・소위원 설문 조사

대・소위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하여 총 461부를 수거하였다. 설문 조사는 앞에 언급한 활
동가 면접 내용을 바탕으로 하되, 보다 많은 수를 포괄하여 활동가 그룹 일반의 경향을 파악하기 위
한 것이었다. 설문 내용은 면접 조사와 동일한 주제로 구성하되, 면접 결과에 따라 답변 항목들을 조
정하여 재구성하였다.

1.2.3. 조합원 면접

노동강도 평가 조합원 면접에 98년 정리해고 투쟁에 대한 개인적 경험과 평가, 98년 이후 고용불안감
을 느끼는 주・객관적 요소, 활동가들에 대한 인식 등을 포함하였다.

1.2.4. 문헌 조사

98년 당시 쟁의대책위원회 유인물을 비롯하여 98년 이후 노조 소식지와 활동 보고서를 토대로 노동
조합의 대응 흐름을 정리하면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운동에 관한 여러 논문들을 참고하였다. 활동 보
고서 등 노동조합에서 만들어낸 자료들은 실제로 진행된 노동조합의 사업과 사건, 소식들을 파악하고
일관된 흐름으로 존재하는 주제들을 설정하기 위함이었으며, 외부에서 작성된 논문들의 경우 본 보고
서에는 직접 인용되지는 않았으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운동을 이해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하였다.

151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2.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교훈

2.1. 왜 다시 98년 투쟁을 들추는가?

어떤 ‘사건’은 그 사건이 벌어진 공간과 시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 사건은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
어 반복 재생되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굴절되기도 하고 축소・확대되기도 한다. 규모가 큰 사건은 그
사건에 직접 연루된 사람들 뿐 아니라 목격자, 주변부, 혹은 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후세대
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97년 IMF 외환위기 국면을 기억한다. 갑자기 모든 경제 활동이 중단되었고, 잘 돌아가기만
하던 경제 시스템은 곧 붕괴될 위기에 처한 ‘문제덩어리’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의 모든 삶들이 수술
대 위에 올려졌고, 미국과 IMF는 이 사회의 경제 상태가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회생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내렸다. 정말 현실은 그런 것 같았다. 언론은 연일 금융 위기와 재벌 경영의 문제를
이구동성으로 쏟아냈고, 하루가 지날 때마다 픽픽 쓰러지는 지역 공단의 중소 사업장들, ‘가격파괴’라
는 신조어까지 등장해 쏟아지는 거리의 할인 물결들, 갑자기 생겨난 듯 역 대합실을 배회하는 노숙자
들1).
또한 우리는 96~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을 기억한다. 96월 12월 24일 새벽 6시, 노동법 개악
안이 통과되었음을 알리며 ‘탕 탕 탕’ 울려 퍼진 의사봉 소리와 함께 우리들의 투쟁도 전국 각 거리에
서 전개되었다. 아침에 모여 거리를 점거하고, 최루탄의 매캐한 냄새를 맡으며, 그 최루탄 파편을 맞
으며, 수십 일을 그렇게 거리에서 보냈다.
그 연장선에 현대자동차 98년 정리해고 반대 투쟁이 있었다. 정권과 자본의 입장에서는 정리해고 법
제화 이후 정리해고를 공식적으로 관철시킬 필요가 있었고, 노동의 입장에서는 정리해고의 도입을 실
제 현실에서 막아내느냐 마느냐의 투쟁이었다. 합의와 양보의 여지를 가늠하기 이전에 피차 지느냐,
이기느냐 둘 중 하나인 싸움이었다.
2005년 현재, 현대자동차 현장에서는 98년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 서로 다른 조건과 상황, 위
치, 98년 투쟁에 대한 인식의 차이 등을 생각한다면, 서로 다른 기억 그 자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직까지 집단적으로 98년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
나 그 다양한 기억들 한 구석에는 숨겨진, 혹은 이미 잊혀진 98년의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그것은 36
일간 진행된, 대중들이 직접 참여하고 겪었던 투쟁의 기억이다.

1) ‘심각한 문제는 구직을 할 수 없다는 참담함이다. 건설 일용공 노동자들의 61%가 자살을 고민해 보았다는 비극적 설문조사, 생활
고로 인한 자살자의 속출과 가장의 실업으로 인한 이혼율 급증, 가장의 가출과 가정 파탄으로 인하여 버려지는 아이들, 아버지의
실업으로 점심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과 학비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의 급증’ - 노동전선 36호, 1998. 6.

152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그런데 활동가나 조합원 대부분에게 98년에 대한 가장 강한 기억은 그 치열한 ‘투쟁’이 아니라 ‘결과’
이다. 당시 집행부의 마지막 협상 보고가 그들에게 남겨진 가장 강렬한 기억이다. 이런 식으로 결과로
만 기억되는 순간, 투쟁은 사라진다. 그 혹독했던 시기에 36일 간의 전면 파업으로 맞섰던 그 선도성
과 전투성도 사라진다. 자기 손가락의 금반지도 모자라 갓난 애기의 돌 반지마저 앞다투어 내놓던 그
혼돈의 시기에 정확히 자본을 향해 공격을 감행했던 그 선명함도 없어진다. 무엇보다 그 투쟁을 만들
었던 노동자 대중이 잊혀진다.
잊혀진 또 하나의 기억은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투쟁이다. 그들의 투쟁은 36일 간의 파업이 끝난 뒤
에도 계속 이어졌다. 노동조합의 공식적인 파업이 끝나고, 활동가들을 포함한 무급휴직자와 정리해고
자들이 현장을 떠나고, 어제의 투사였던 이들이 오늘의 생산 일꾼으로 숨막히는 노동 통제와 노동강
도를 감내하고 있었던 그때, 그들은 투쟁을 지속했고, 또 투쟁으로 정리해고를 철회시켜냈다. 그러므
로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은 36일 간의 파업이라는 1부 투쟁 뿐 아니라, 1부가 끝난
후에도 이어졌던 2부 투쟁, 바로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투쟁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적인 36일 간의 대중 투쟁이 말끔히 잊혀졌다는 것은 좀 과도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현장에
남아있는 기억에는 “98년 때도 그렇게 싸웠는데 졌다, 그런데 지금 뭘⋯.”이라며 말끝을 흐리는 한 면
접자의 말처럼 패배적인 정서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지도부의 직권조인으로 모든 투쟁의 의미를 패배
로만 남길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라도 98년의 기억 중에서 직권조인이라는 결과 속에 잊혀진 대중
행동과 투쟁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복원되어야 한다.
물론 이 보고서 역시 98년 투쟁을 제대로 복원해 내기에는 충분치 않다. 현장 활동가 46명과 조합원
100여 명이 참여한 면접 조사 결과의 양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 주체들의 내밀한 기억, 감추고 싶
은 기억, 아직 다 풀리지 못한 논쟁 지점들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연구팀의 미흡함 때문이다. 그리
고 이 보고서의 주 목적이 현대자동차의 ‘현실’에 대한 분석이므로, 그나마 수집한 면접 내용조차 충
분하게 담지 못한 점도 있다2).

2.2.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 경과3)

2.2.1. 첫 번째 양보 - 희망퇴직 합의

이른바 ‘IMF 국면’에 접어든 1997년 11월 이후 현대자동차 자본은 ‘1998년 인력관리 운영계획’을 통
해 1998년 한 해에만 총 3천명의 여유 인원을 정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자본은 1997년 말부터 하
청 노동자 1천 8백여 명을 쫓아내더니, 1998년 들어와 회사 임원과 과장급 이상 관리자들에 대한 명
2) 가령 이 보고서에는 98년 정리해고 반대 투쟁의 또 다른 주체였던 가족대책위원회의 기록은 담지 못하였다. 또한 98년 투쟁 이후
식당 여성 조합원들과 함께 <미완의 장기전>을 치룬 주체였던 징계・정리해고자들(생대위, 해복투)의 투쟁 역시 담지 못하였다.
이들은 상당 기간 식당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출근투쟁, 텐트농성 투쟁을 함께 벌여냈으며, 해고자들이 먼저 복직되었고, 이후
2000년 임단협 이후 식당 여성 노동자들이 복직되었다.
3) 이종호,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파업투쟁’(진보평론 3호)을 바탕으로 구성함.

153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예퇴직을 실시하여 8백 명 이상을 ‘정리’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1998년 1월 13일 임시 대의원대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쟁의 행위를 결의하고
‘단협 사수, 고용 안정, 민중생존권 사수를 위한 중앙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1월 15일
조합원 찬반투표를 실시하여 83.8%의 찬성으로 쟁의행위를 결의했다.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한 민주노총은 1998년 2월 6일 새벽, 2년간 유예되었던 정리해고제를 조기에 받
아들이는 노사정 합의안에 동의하고 말았다. 그러나 2월 9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는 ‘직권조인’된
노사정 합의안을 부결시키고 상근 임원 전체의 퇴진과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 구성을 결의하였
다. 다음날 비대위에서는 2월 13∼14일의 총파업 투쟁을 결정했다. 그런데 비대위는 2월 12일 8시간
의 회의 끝에 다시 총파업을 철회해버렸다. 바로 이날 대우조선 최대림 조합원은 정리해고 반대 총파
업투쟁에 전 조합원이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며 분신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철회로 전국 투쟁전선이
무너지고 2월 14일 임시국회에서 유예 조항이 삭제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가 통과됨으로써
이제 자본의 정리해고 공세는 거칠 것이 없어졌다. 전 공장에 걸쳐 잔업이 축소되고 일방적 배치전환
과 집단 순환 휴가가 실시되었다4).
4월 8일 현대자동차에서는 노동조합 주최로 현장조직들이 참여한 2차 현장토론회가 개최되었다. 현대
자동차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민투위), 실천하는노동자회(실노회), 현대자동차노동자신문(현노신), 한
빛노동자회(한빛) 등 현장조직들은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개선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부터 “현실
적 양보교섭”에 이르는 다양한 견해를 제출했다5). 4월 17일 노동조합 중앙비대위는 기자회견을 통해
“주당 38시간으로 근무시간 단축, 주간 연속 2교대제로 근무형태 변경, 배치 전환을 통한 일자리 나
누기”를 제안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자본은 노동조합의 제안을 무시하고 4월 17일부터 1주일 동안
일방적으로 1차 희망퇴직 모집에 들어갔다6).
5월 1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열린 제108주년 세계 노동절 기념 집회에서 이갑용 민주노총 2기 지도부
는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 철폐 및 부당 노동행위 근절, 고용안정과 생존권 보장, 고용・실업 대
책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정경유착 근절과 재벌해체・노동3권 보장・노동자 경영참가, IMF 재협
상’ 등 5대 요구를 중심으로 5월 말・6월 초의 총력투쟁을 선포했다. 이날 행진 과정에서 격렬한 거
리투쟁이 벌어졌다.
한편 현대자동차 공장에서는 5월 14일부터 1주일 동안 2차 희망퇴직이 실시되었고 1,500여명이 회사
를 떠났다. 자본은 5월 20일 ‘경영위기 극복 및 여유인원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 수정안’을 노사협의회
안건으로 제시하면서 2천 2백억 원 가량의 임금 삭감과 8,189명에 대한 2년간의 무급휴직・정리해고
를 기정사실화하여 노동조합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나갔다. 이 날 노동조합 집행부와 대의원들은 본
관 건물 로비에서 강제 희망퇴직 중단을 요구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이 자리에서 강제 희망퇴직 당한
52세의 한 여성 조합원은 “나 혼자서 4명 가족 먹여 살리는데 퇴직금 2천만 원으로 어떻게 살아가
4) 노동조합은 2월 19일 '중앙비대위'를 '고용안정대책위'로 전환하고, 3월 23일 노사실무협의에서 집단 휴가시 통상임금 70% 지급과
'고용안정 노사공동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합의로 노조 스스로 단체협약을 위반하게 되었다. 당시 캐피코 노조나 현
대정공 노조에서는 집단 휴가 시 단협에 의거 통상임금 100%씩을 쟁취하고 있었다. 현대자동차의 이 합의는 이후 다른 사업장에
서의 집단 휴가 때 많은 영향을 미쳤다.
5) 현장조직 민투위는 5월 들어 '주 35시간 이하로 노동시간 단축, 1일 7시간 주간 연속 2교대로 근무형태 개선, 노동시간 단축에 따
른 통상임금 100% 보전과 생계비 부족분에 대한 고정 OT 확보, UPH down을 통한 적정 노동강도 유지와 생산량 조절'이라는 정
책 대안을 정리하여 소책자로 제작·배포하고 조합원 중식 홍보투쟁 등을 벌여나갔다.
6) 통상급 4∼6개월치가 위로금으로 주어졌고 2,000명 가깝게 퇴직했다. 자본은 4월 23일 23%의 임금 삭감과 15,000여명에 대한
인원 정리를 의제로 하는 임시노사협의회를 4월 30일 개최하자고 요구하면서 정리해고 문제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왔다.

154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나?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차라리 회사에서 죽고 말겠다!”라며 대성통곡하였다. 5월 25일 조합
원 총회에서는 89.4%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총파업투쟁을 결의했다. 5월 27・28일 민주노총이 1차
총파업에 들어갔고, 이틀 동안 49개 노조 7만 7천여 명이 총파업에 참여했다.
5월 29일 기아자동차의 송인도 조합원이 분신했다.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은 6월 1일 '체불임금 지급과
고용안정 보장'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6월 5일 민주노총이 6・10 2차 총파업을 철회하
고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의 투쟁은 전국 총파업으로 발전하
지 못하고 고립된 채 패배하고 말았다. 민주노총의 2차 총파업 철회로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
또한 현대자동차만의 투쟁으로 고립되었다.
6월 24일 ‘임금 및 고용조정 대책위’ 본교섭에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집행부는 3차 희망퇴직에 합의
했다7). ‘노사합의’된 3차 희망퇴직으로 2천여 명이 다시 회사를 떠났다. 조합원들은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희망퇴직을 진행하는 동안 정리해고를 추진하지 않는다.”는 노사 합의사항을 “6월 30일 이
후에는 정리해고를 하겠다.”는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였다8).

2.2.2. 두 번째 양보 - 임금 삭감안 제출

6월 30일 오전, 현대자동차 자본은 4,830명의 조합원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노동부에 신고하여 접수를
마쳤다. 신고서에는 “임금을 22% 삭감하지 않으면 6,842명을 추가로 잘라야 한다.”라는 내용이 첨가
되어 있었다. 노동조합은 7월 4일까지 정리해고를 철회하라며 6월 30일 26시간 1차 경고 파업에 들
어갔고, 다시 7월 6일 48시간 2차 경고 파업을 벌였다. 7월 10・11・13일 자본은 부분적으로 정리해
고 대상자 명단을 기습 발표하고 7월 13일부터 4차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7월 14일 금속산업연맹을 시작으로 15・16일 총 68개 노조 15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총파업이 벌
어졌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비대위도 무기한 전면 파업을 선언하고 이틀 동안 파업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7월 15일 밤 중앙 비대위는 전면 파업을 유보하고 16일 오전 10시부터 정상조업에 임하기로
결정했다. 또 만장일치로 고용조정 및 임금 관련 교섭 폭에 대한 권한을 위원장에게 위임하였다. 노조
위원장은 이 날 민투위를 탈퇴했다9). 7월 16일,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눈물까지 흘려가며 대폭
적인 양보안을 내놓았다. △97년 성과금 150% 미지급분, 휴가비, 선물비, 고정 O/T수당, 직책수당 등
을 포함하여 1년간 약 2,500억원 규모 지급을 중단토록 하는 고통 분담 안 제출 △정리해고 규모인
4,380명 중 4차 희망퇴직자 500명을 제외한 4,300명 중에서 하도급 전환 대상으로 포함된(식당, 출
7) 합의 내용은 “희망퇴직을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실시하되 희망퇴직을 진행하는 동안은 정리해고를 추진하지 않고, 위로금은 (근
속) 10년 이상 12개월, 5∼10년 11개월, 5년 미만 10개월치 지급” 등이었다.
8) 당시 집행부의 희망퇴직 합의에 대해서 민투위는 "노조에서는 희망퇴직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정리해고 철회를
전제로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변동 등을 회사가 받아들일 때 협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아무 것도 쟁취하지 못
한 상태에서 희망퇴직을 합의한 것은 조합원들을 기만한 행동이다. 이는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한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희
망퇴직은 위장된 정리해고이며, 임금 삭감 또한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민투위 대자보 ‘희망퇴직 합의는 잘못되었다’,
1998.6.25)
9) “공인으로서 더욱더 조합원의 생존권 사수와 고용안정 쟁취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져 조직을 탈퇴하여, 공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삼만이천 조합원을 책임지려” 한다는 것이 당시 민투위 의장에게 제출한 탈퇴서의 내용이었다.

15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고, 시설 등) 938명은 직영으로 고용을 유지하고 △1,800명에 대해서는 근로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
기로 일자리를 유지하고 △나머지 1,500명에 대해서는 순환휴가제를 도입하여 6개월의 휴가를 실시
하며, 휴가시 임금은 회사 측이 통상금의 50%를 지급하고 노동조합은 기금을 조성하여 30%를 지원
한다는 안이 ‘마지막 협상에 임하는 노조 입장’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자본은 노동조합의 양보에도
아랑곳없이 7월 17일부터 정리해고자 명단을 개별 통보하기 시작했다.
7월 20일 노사협상은 1시간 만에 결렬되고 노동조합은 무기한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1만 조합원이
참가한 결사항전 결의대회에서 위원장이 삭발과 무기한 철야농성 투쟁을 시작하고, 세 전직 위원장들
이 45m 굴뚝농성에 들어갔다. 조합원 5천여 명은 노동조합과 공장 출입문을 중심으로 천막농성에 들
어갔다. 가족들도 가족대책위를 구성하여 정문 앞에 천막을 치고 23일부터 밤샘농성을 함께 벌였다.
자본은 7월 20일부터 임시 휴업에 들어갔고 7월 23일부터 마지막 5차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4・5차
희망퇴직으로 3천 명 가까이 회사를 떠났다. 이로써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난 조합원은 8천 명이 훨
씬 넘었다.
7월 22일에는 금속산업연맹 15개 노조 6만 8천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7월 23일 민주노총
산별 대표자 회의는 총파업 방침을 철회하고 말았다. 이후 전국 공동투쟁 전선은 급속히 와해되었
다10).
7월 31일 국민회의 노무현 부총재와 노사가 참여한 노사정 간담회가 열렸지만 자본은 오히려 1,538
명에 대해 최종 정리해고 통보를 하였다. 정리해고 대상에는 노조 상무집행위원 15명과 현직 대의원
89명 등 총 115명의 노동조합 간부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민투위 120여 명, 실노회 70여 명 등 현장
활동가 대다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8월 1일부터 9일까지 휴가 기간 동안 3천여 조합원들은 휴가를 반납하고 농성투쟁을 계속 벌여나갔
다. 노동조합은 휴가 기간 동안 어린이 여름학교, 노동영화제, 특별 강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
해 가족들의 참여를 이끌었고, 매일 저녁 집회를 통해 투쟁 결의를 다져나갔다.
8월 5일 집행부는 8월 6일 김대중 대통령의 울산 방문 소식에 맞춰 또다시 추가 양보안을 제시했다.
△사회적 상식 수준의 추가적 임금 삭감, △노동조합 임원에 대한 상징적 정리해고 수용, △노사 평화
선언 및 2000년까지 정리해고를 유보하는 고용안정 협정서 체결 등 이었다11).

10) 7월 24일 부산지방경찰청은 울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노동조합 상급단체 상근자들과 노동사회단체 활동가들 16명을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몰아 구속시켰다. 25일 현장조직 의장단에 대한 체포영장도 발부되었다.
11) 민투위는 집행부의 추가 양보에 대해 “첫째,… 만약 양보안처럼 2000년까지 정리해고 유보라면 이는 투쟁의 목표와 20여일 동안
강고한 투쟁을 전개해온 모든 노력과 성과가 물거품이 되는 것이며, 7월 31일 정리해고된 1,538명은 시한부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정리해고를 인정하는 것이며 2, 3차의 정리해고로 이어질 것이다. 둘째, 상식이 통하는 임금 삭감이라 하는데 이미 월
평균 임금 삭감액이 45만원을 육박하고 있는데 추가적인 임금 삭감을 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조합원의 동의
없는 추가 임금 삭감은 백지화되어야 한다. 셋째, 무쟁의 선언은 줄 것을 다 주고 현장을 사측에게 넘겨준다는 항복인 것이다…
향후 진행될 전환 배치, 라인 통합, 라인 축소, 하청 이관, 그리고 모답스 도입에 따른 여유인원 발생 등 사측의 의도가 분명함에
도 무쟁의 선언을 한다면 또 다시 현대자동차는 고용 불안에 직면하고 더 큰 희생과 양보만이 남을 뿐”이라고 비판했
다.(1998.8.9. '민투위 통신')

156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2.2.3. 공장 점거 천막농성 파업과 김광식 집행부의 정리해고 수용

휴가 마지막 날인 8월 9일 저녁, 1만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집회가 있었다. 이 집회의 ‘감동’을 한
조합원은 이렇게 전했다.

집회를 한참 하고 있는데 폭우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졌습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의 이탈자도 없이 ‘정리해고
철회’를 외쳤을 땐 정말 가슴이 찡했습니다. 사측도 이 광경을 보고 ‘모두들 미쳤다’라며 두 손 두 발 다 들
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정리해고를 철회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이 때 가졌습니다. 이 날 집회에 참
여한 조합원들 대부분은 속으로 많이 울었을 겁니다. (‘인터뷰, 현대자동차 윤실근’, 노동전선 1998.10)

휴가 이후 첫 출근인 8월 10일 자본은 협상을 제의해왔다. △정리해고 대상자 1,538명 중 60%는 3
년간 무급휴직, △40%는 정리해고, △정리해고 대상자 중 식당 종사자 167명에 대해서는 고용 승계
를 전제로 외주・하청화 하고 나머지 인원은 희망퇴직을 모집해서 정리해고 최소화, △희망퇴직 조건
은 5차 때와 같고(10∼12개월분 위로금), 노조의 2천 5백억 원 임금 삭감안은 수용한다는 것이 자본
의 최종 안이었다. 노동조합은 순환휴가와 정리해고 철회를 주장했지만 협상은 결렬되었다.
8월 13일 위원장은 노조 사무실 옥상 위에 지어놓은 10m 철탑 위로 올라가 농성투쟁에 들어갔다. 농
성 대오는 휴가 이후 4∼5천명으로 불어났고 매일 저녁 집회에는 1만 명 이상의 조합원과 가족들이
결합하면서 열기는 더욱 높아져갔다. 정문 앞 육교와 건물 등에는 지역 주민들이 가득 모여들어 집회
를 지켜보면서 호응을 보내왔다. 자본은 공장을 가동시킨다며 정몽구 회장을 앞세워 현장에 들어와
사수대와 대치하는 모습을 언론에 흘리면서 공권력 투입에 대한 명분을 쌓아가는 한편, 용역 깡패 수
백 명을 사택과 경주 등지에 대기시켜놓는 등 공권력 투입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8월 14일 대검찰청의 공권력 투입 발표가 있었고 15일 범민족대회 때문에 빠져나갔던 병력이 돌아오
면서 100여개 중대 1만 2천여 명의 경찰 병력이 현대자동차 주변에 배치되었다. 16일 안영수 노동부
차관이, 17일 이기호 노동부 장관이 내려와 중재를 시도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17일 자본은 관리
자와 하청업체 직원들 1만여 명을 동원하여 정상 조업 촉구 결의대회를 가졌으며, 농성에 참가하지
않는 조합원들에게 일당을 줘가면서 울산 인근으로 놀러 다니게 하는 등 투쟁 대오를 고립시키려 혈
안이 되었다.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다는 긴장감이 가장 높았던 이 날 저녁 집회에는 그동안 집회 중
에서 가장 많은 수인 2만여 명의 조합원이 가족들과 함께 참여하여 공권력에 맞서 끝까지 투쟁할 것
을 결의했다. 노동조합은 전 공장에 흩어져 있던 농성 천막들을 승용1공장 중심으로 재배치하고 곳곳
에 바리케이트를 쌓아 공권력 투입에 대비했다.
18일 새벽, 페퍼포그와 포크레인을 동원한 진압 병력이 정문 앞에 집결하자 순식간에 승용1공장 조합
원을 중심으로 1천여 명이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구호를 외치며 즉각 대치에 들어갔다. 이렇듯 강력한
저지로 경찰 병력은 금방 물러갔지만 상황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 날 밤 노무현 부총재를 중
심으로 한 국민회의 중재단이 급파되었다.
8월 20일 정부 중재안이 나왔다. △정리해고 대상자 1,538명중 식당 여성 조합원을 포함하여 250∼
300명으로 최소화, △1,200여명 무급휴직・순환휴가, △고용안정기금 설치・운영, △민・형사상 고소

157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고발과 손해배상, 재산가압류 취하, 징계 철회, △노사평화선언 등이 골자였다.
8월 21일 저녁 협상보고대회에서 위원장은 정부 중재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식당 조
합원 정리해고 위로금 2,000∼2,500만원을 요구하고 있다. 식당을 소비조합 형태로 노조에서 운영하
겠다. 고소고발, 손해배상 등 풀어야 할 과제들이 만만하지 않다. 내일 17시까지 중재안을 받지 않으
면 노조에서 제시한 모든 안을 철회하겠다.”라고 밝혔다. 집회 중간 중간 야유와 함성 소리 때문에 위
원장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고, 무대 뒷편에서는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집회
가 끝난 직후 식당 여성 대의원이 마이크를 잡고 그날 오전 “식당 조합원들이 정리해고를 수용하라.”
는 위원장과의 간담회 내용을 폭로했다. 이어 민투위 의장은 “국민회의 중재단은 바로 이것을 노렸다.
우리들이 분열하는 것을 노린 것이다. 힘을 한 곳으로 모을 때다. 노동조합이 정리해고를 철회시키지
못한다면 현장의 활동가들이 모여서 정리해고를 철회시키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선대에서도 마
이크를 잡고 “우리 투쟁의 목표는 정리해고 철회이다. 정리해고가 철회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자!”라
고 선동했다.
집회 뒤 가족대책위를 중심으로 노동조합 앞에서 항의 집회가 열렸다. 사수대를 비롯하여 1천여 조합
원이 노동조합 앞으로 몰려들었다. 분노한 조합원들의 즉석 발언이 이어졌다. “공권력이 무서웠으면
벌써 투쟁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우리는 공권력에 맞서 싸워 이길 자신이 있다!”, “위원장이 투쟁할
자신이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양보안과 중재안을 철회하라! 만약 그럴 자신이 없으면 노동조
합 위에 매달아 놓은 관을 불태워 버려라!”, “지금 이렇게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과 회사가 시켜서 일
당받고 놀러 다니는 사람들과 같은 투표권을 줘서 투표로 심판받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협상 때
회사는 당당한데 위원장은 왜 그렇게 힘이 없느냐? 힘내라. 표정 관리 해라!” 조합원들이 위원장의 입
장을 다시 요구하자 위원장은 “조합원들의 뜻을 충분히 알겠다.”고만 밝히고 끝까지 명확한 입장을 정
리하지 않았다12).
8월 22일 가족대책위, 식당 여성 조합원, 사수대, 민투위 등은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던 본관 앞에서
항의집회를 가졌다. 항의집회 대오는 저녁이 되어 5백여 명으로까지 불어나기도 했다. 저녁 집회에는
농성투쟁 이후 가장 적은 3천여 명이 참여했고, 위원장은 “앞으로 협상에 목매달지 않겠다. 지금까지
노조에서 밝혔던 임금삭감안을 철회한다. 더 이상 비굴하게 머리 숙여 협상에 임하는 일은 없을 것이
다. 다시 힘있는 투쟁을 조직하자.”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계속 타결이 임박했다는 보
도가 나오고 있었다.
8월 23일 오후 2시 태화강 둔치에서 민주노총 주최 ‘정리해고 저지와 민주노조 사수 전국 노동자대
회’가 열렸고 집회 참가자 3천여 명은 현대자동차까지 거리 행진을 벌였다. 이 날 권영길 민주노총 전
위원장은 “현대자동차 협상이 만약 불만족스러운 내용으로 타결되더라도 인정해 주자.”라고 얘기하여
집회 참가자들을 당혹스럽게 하였다. 이틀째 문선대가 문화선동 활동을 거부한 가운데 열린 이 날 저
녁 집회에서 위원장은 “언론에 현혹되지 말라. 조합원이 수용할 수 있는 안이 나오면 도장을 찍기 전
에 조합원들에게 먼저 의견을 묻겠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8월 24일 새벽 2시 30분 노사합의
소식이 TV 자막을 통해 발표되었고, 오전 6시 노사는 잠정합의 기자회견문을 발표했다. ‘277명 정리
해고, 나머지 1,261여명 1년 6개월 무급휴직, 정상조업을 위한 노력이 있을 때 재산 가압류와 고소고
12) 중재안 합의에 대해 민투위는 긴급 운영위원회를 열어 △기만적 중재안 반대, △전직 위원장들의 입장을 서면으로 받는다, △현
장조직들간의 입장을 통일해 유인물을 만든다는 입장을 결정했다. 그러나 실노회가 조직원 총회에서 자기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
면서 현장조직들 간의 입장을 통일시킬 수 없었고, 전직 위원장들의 입장 또한 현장조직들의 입장 정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
으면서 정리되지 않아 윤성근 전 위원장 혼자만 "정리해고는 저지해야 하며 무급휴직도 수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서신을 작성하
여 민투위 유인물에 실었을 뿐이었다.

158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발 등에 대한 부분 철회, 노사화합 및 무분규 선언’ 등이 주요 합의 내용이었다.
아침 뉴스를 통해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지자 조합원들은 망연자실하였다.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농성
장을 빠져나갔고, 몇몇 분노한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앞으로 몰려가 노동조합 유리창과 집기들을 부수
고, 사수대 옷을 벗어 불태우고, 관을 끌어내려 불태웠다. 오후 들어 농성 조합원들 거의 모두가 빠져
나갔고 바리케이트가 철거되었다.

2.2.4. 잠정합의안 부결

이른바 노사정이 합의한 8・24 잠정합의안은 9월 1일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63.6%의 반대로 부결되
었다. 그러나 이후 제대로 된 재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합의 내용은 오히려 더욱 개악되어 관철되
었다.
결국 98년 현대자동차에서는 하청 노동자 1천 8백여 명, 과장급 이상 관리자 8백여 명, 다섯 차례의
희망퇴직 8천여 명, 정리해고 277명, 무급휴직 1,261명 등 모두 1만 2천여 명이 이른바 ‘고용조정’되
었다. 현대자동차의 정리해고 수용으로 8월 17일부터 시작한 만도기계 노동조합의 전면 파업 투쟁은
전국 전선의 엄호를 받지 못한 채 무자비한 공권력 침탈로 격파당하고 말았다.
98년 12월 22일 7대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투표가 진행되었고, 62.2%가 불신임에 찬성함으로써 7대
집행부는 간신히 불신임을 모면했다. 99년 7대 집행부가 사퇴하고 난 뒤 노동조합 임원선거 2차 투표
에서 정갑득 후보 진영이 8대 집행부로 당선되어 간신히 노동조합이 정상화되었다. 99년 12월 27일
부로 무급휴직자 전원이 복직되었다.

2.3.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기억과 영향

2.3.1. ‘자발적 선택’이었던 희망퇴직이 남긴 공포

98년에는 일방적인 정리해고에 앞서 이른바 ‘자발적 선택’이었던 희망퇴직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 4월 17일부터 1주일 동안 일방적인 1차 희망퇴직을 모집하였다. 통상급 4∼6개월치의 위로금을 받고 2
천여 명이 퇴직했다.

159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 5월 14일부터 1주일 동안 2차 희망퇴직. 1천 5백여 명이 회사를 떠났다.
⋅ 6월 24일 ‘임금 및 고용조정 대책위’ 본교섭에서 집행부가 3차 희망퇴직에 합의하였다. ‘노사합의’된 3차
희망퇴직으로 2천여 명이 다시 회사를 떠났다.
⋅ 7월 10, 11, 13일 자본은 부분적으로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을 기습 발표하고, 7월 13일부터 15일까지 4
차 희망퇴직을 실시하였다.
⋅ 7월 20일부터 임시 휴업 돌입 후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마지막 5차 희망퇴직을 실시하였다. 4차, 5차
희망퇴직으로 3천여 명이 회사를 떠났다.
⋅ 이로써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난 조합원은 8천 명을 훨씬 넘었다.

이와 같이 현대자동차의 희망퇴직은 4개월여에 걸쳐 진행되었다. 당시 거의 대부분의 노동조합이 그
랬듯이 현대자동차 노동조합도 정리해고의 사전 예고판이었던 ‘희망’ 퇴직을 막아내지 못했다. 4개월
간 진행된 희망퇴직 기간 동안 노동조합이 잃은 것은 8천여 조합원만도, 노동조합에 대한 조합원들의
신뢰만도 아니었다. 8천여 조합원을 잃어가는 동안 마땅히 해야 할 투쟁의 접점을 만들지 못함으로써
흩어진 조합원들은 개별화되었고, 개별화된 조합원들과 집행부의 관계는 모호해졌다. 남은 조합원들은
생존을 위해 일대 일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일자리를 놓고 어제의 ‘형님’과 ‘동료’는 모두 경쟁 상
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4개월 간의 ‘희망’ 퇴직 경험은 살아남은 자에게 생존에 대한 공포 그 자체가
되었다.

힘들었지요. 그때가 할 일이 없으니까… 앉아서 대기하고, 교육받고, 그러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현장 노
동자들은 단합이 잘되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해야 하는데, 옆에 있는 동료가 아니면 내가 나가야 하는데
허심탄회하게 말을 못한다. 동료애도 많이 없어지고 그렇더라. 회사 와서 힘들고 집에 가서 힘들고. 나는 괜
찮겠지 하고 생각하는데 옆에 동료가 노란 봉투 타고 나갈 때 ‘그 사람 뭐먹고 사나’ 걱정은 하는데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생각을… 그런 시대는 정말 안왔으면… 오래된 사람은 시급이 많아서 먼저 짤리지 않
겠는가 걱정하고, 신입사원은 입사 역순으로 짜른다고 걱정하고. 젊은 사람들은 속으로 ‘나이도 들고 벌어
놨으니까 나가지’라고 생각하고, 나이든 사람들은 속으로 ‘젊은 너희들은 나가면 일자리 있지 않냐’ 하고…
겉으로는 서로 웃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고. (면접자 a, 조합원)

신입은 신입대로, 고참은 고참대로 ‘겉으로는 서로 웃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고’ 서로 누가 먼저 짤
릴 것인가에만 온통 관심이 쏠리게 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조업이 단축되는 그 순간부터 현장에 많은 유언비어가 난무했습니다. 짜른다 하더라… 기준점이 어떻게 된
다더라… 슬슬 흘리니까 스스로 참다 참다, 동료들도 생각해보더니만 스스로 사표 쓰고 튀어 나가고, 면담
한번 하고 오더니만 조용히 사표 쓰는 사람. 그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한 번씩 관
리자들이 전화 와서 ‘니는 괜찮다’하면 집회 다 빠지고… 같이 근무하는 애도 간곡히 말려도 그만 뒀습니다.
(면접자 b, 조합원)

160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집회는 집회대로 안되고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 앞가림’ 하기에 바빠졌다. 조합원 사이의 불신도 깊
어졌다. 회사의 편 가르기 수법이 먹혀 들어간 것도 그런 불안감들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조합원들 서로 간에 불신이 상당히 깊어 졌다는 거죠. 예를 들어 노란 봉투를 받았냐 안받았냐 차이. 회사가
편 가르기를 했잖아요. 이쪽은 집회하고 한쪽은 계곡으로 다니고, 심지어는 양쪽 다 다니기도 하고. 그런 과
정에서 아파트에 찾아가서 스프레이로 욕도 써놓고, 회사 쪽에 따라다닌 사람들도 자기가 그러고 싶어서 그
랬겠어요? 사회적 약자고 힘이 약하고, 보수적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저쪽에 휘말려가면 나도 정리해고 대상
이 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던 거고, 지도부가 거기에 대해서 확실한 신념을 갖도록 못하도록 한
책임이지 조합원 대중의 이탈을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상황이 크고 힘들었다 이거죠. 까놓고 보면
끝까지 모인 사람들 해봤자 몇 명 안 된다 이거죠. 전체 조합원이 3만이라면 3~4천이었죠. 나머지는 집에
서 문 잠가놓고 TV보고 있었겠죠. 이 사람은 노란 봉투를 주고 저 사람은 안주었잖아요. 안 받은 사람 입장
에서는 아이고 다행이다, 안도가 있었겠죠. 어쨌든 찍히고 싶지 않았겠죠. 그런 것들이 ‘니는 빠져나갔다’고
‘니만 살려고 하냐’고 하고 막 공격하고 할 때, 좀 그랬어요. (면접자 ㄱ, 활동가)

회사는 해고 통보를 받은 이들이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며 정리해고의 정당성을 보
장받으려 했다. 이는 자본이 쓰는 편 가르기 수법의 전형이다.

그때 당시 나간 사람의 일하는 자세 등을 보면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 주로 나간 사람은 노동조합에 많이
관여된 사람도 많이 나갔지만, 그 라인에서 일하는데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갔다. 일이란 그 일 맡은
데서 최선을 다하고 성의 있게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을 하면서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나갔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나갔다. (면접자 c, 조합원)

자식에게 피해가 갈까봐 해고를 받아들이는 경우까지 있었다. 젊은 사람이 다녀야 한다고 울며 겨자
먹기로 ‘배려’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란 봉투’라고 회사의 압력으로 나간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제 부친도 그렇게 나갔는데, 당사자 입장에서
보니까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어른들 입장은 아닌가 봐요. 혹시나 자식한테 피해갈
까 싶어서 주위에서 눈총은 안줬겠나. 오죽하면 그렇게 나왔을까 싶더라고요. 아버지가 지금 장애인 됐어요.
술을 많이 드셔셔요… 회사 나오고 공공근로 하시다가 2~3년 후에 쓰러졌어요. 병원에 있다가 방법이 없더
라고요. 솔직히 그런 생각까지 했거든요. 너무 억울해서요. 한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 있구나 싶어서요. 당
시 그런 여건이 안됐는데 법적으로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집에 이야기 하니까, 저도 다치니
까 그냥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희망퇴직 말이 희망퇴직이지 희망퇴직이 아니지요. (면접자 ㄴ, 2000년 이후
입사자, 활동가)
제일 기억나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때 조장이었는데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 힘들어 하셨어요. 1,2
차 넘어가고 결국에는 ‘인원이 없어서 내가 나가야 하겠다’고 식구들을 앉혀놓고 말씀하실 때 전부 울었죠.
투쟁이나 이런 부분은 잘은 모르지만, 제가 조합 활동 하면서 그때 사진이나 슬라이드를 보면 그때 절실했
구나, 아버지 입장으로 봤을 때 힘드셨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면접자 ㄷ, 2000년 이후 입사자, 활동

161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가)
마음이 아팠던 것은 반의 아줌마가 희망퇴직을 했는데 조합원들이 반 회식에 참여를 시키느냐 마냐를 놓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걸 보고 하도 열이 받아서 (아줌마) 모시고 회식하고, 무급 받은 사람들까지 다 불
러라, 만약에 한번이라도 연락이 안 오면 가만 안 있겠다고 했죠. 그런데 아주머니가 오셔서 ‘젊은 사람들이
다녀야지, 내가 나가야지.’ 하시면서, 제일 서글픈 게 회사에 출근하려고 밥 먹고 세수하고 대문 나오다가
다시 들어가고, 회사 앞까지 왔다가 출입하려고 보니 출입증이 없는걸 보면서, ‘아 내가 회사 그만두었지’
하면서 돌아가고 그러시더라. (면접자 ㄹ, 활동가)

노동자들의 이러한 순박하고 소박한 생각들과 행동들은 자본에게는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다. 정리해고를 자행한 자본의 ‘위기의식’ 또는 ‘경쟁력주의’는 노동자에게 곧바로 ‘삶의 위기’로 전가
된다. 노동자들의 개별적인 배려나 인간미조차 정리해고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자본의 운동 법칙이
다. 힘없이 ‘아 내가 회사를 그만두었지’ 하고 되뇌이며 돌아서는 노동자의 뒷모습을 서글퍼하는 것만
으로는 자본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 시기가 바로 희망퇴직 기간, 나아가 정리해고 반대 투쟁의 기간
이었다.
요컨대 98년은, 자본 운동의 위기가, 혹은 그런 위기를 빙자하여 더 많은 자본을 그러모으기 위한 자
본의 탐욕을 위하여, 자본가들(자본가 계급)이 노동자들(노동자계급)을 정리해고로 밀어내는 시기였
고, 노동자는 실업이나 비정규직이 되어 ‘삶의 위기’에 내몰리는 시기였다. 즉 자본가(계급)에게 다가
온 위기를 노동자(계급)에게 전가시키는 기간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정리해고 반대투쟁’은 그 자체가
양 계급간의 전면적인 계급투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시기에 노동자들의 소박한 양보심이나
배려는,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약한 고리에 불과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고용될 때 비로소 노동할 권리를 얻는다. 이 때문에 노동자
에게는 커다란 왜곡이 발생한다. 노동이 ‘고용노동’ 또는 ‘임금노동’이라는 형태로 왜곡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 운동의 위기’는 종종 고용을 매개로 하여 노동자들의 삶에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노동의
위기’를 불러온다.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은 이러한 노자간의 계급적 투쟁 관계가 집중적으로 드러
난 것이었다13).

2.3.2. 정리해고 대상자, 활동가, 그리고 조합원들의 극단적 분노 : ‘정신적 공황상태’

7월 16일 노조 위원장의 눈물의 기자회견을 통한 대폭적인 양보안에도 아랑곳없이 현대자동차 자본
은 바로 다음날부터 개별적으로 정리해고를 통보하기 시작한다. 7월 20일 노사협상은 1시간 만에 결
렬되고 사측은 2,678명의 정리해고자 명단을 발표한다. 개별 통보를 시작한 17일부터 20일 무기한
전면 파업 돌입 전까지, 대상자들의 분노는 개별적・즉자적・폭력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 대상자들은
20일부터 파업의 선두에 결합하지만, 사측은 7월 31일 1,539명 정리해고 대상자에게 인사 발령을 통
13) 따라서 현대자동차 투쟁만이 아니라 민주노총이나 금속연맹 등 상급단체의 96~97년 총파업투쟁을 위시하여 노동조합운동 진영
의 1998년 투쟁 전체 과정을 들추어 평가하는 것은, 이 장의 과제는 아니지만, 더없이 중요한 사업이라고 하겠다.

162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보해버린다.

관리자한테 전화가 딱 왔더라구요. (통지서) 갖다 줄테니까 집이 어디냐 그래서 필요 없으니까 내가 받으러
갈 테니까 어디서 만나자 했거든요. 그 때 한 반에 저하고 나이가 같은 친구가 있었거든요. 친구하고 같이
받으러 갔었죠, 그날 저녁에 촛불 집회하고 그 담날 사수대 결성하고. 몇 일 동안 텐트 지키면서 날이 가면
갈수록 참석하는 인원은 줄어들고… 어쨌든 내 자신도 약간은 자포자기 했는데, 자포자기가 ‘쓰고 나가겠다’
는 건 아니고 ‘이왕 하는데 까지 해보자’고 해서 남아있었던 거고… (면접자 ㅁ, 활동가)
정리해고 통보서를 받고 3일 정도 지나고 사수대 막사로 결합한 조합원들이 많은데요… 이 막사에 오기까지
사흘, 그 사흘 동안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민과 술로 밤을 지새고 결단을 내린 겁니다… 아직도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사수대 활동을 하고 있어요. 지금도 그 고통은 잘 다스려지지 않고, 단지 같이 지내는 사람들
에 의해서 통제되고 조합에 의해서 통제되는 상태이지, 마음을 진정하거나 감정을 추스리거나 냉정한 이성
을 되찾거나 그런 상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루 아침에 순식간에 자신이 폐품처리 당
했는데, 회사가 이미 정리해고를 단행했는데, 협상을 통해서 철회시킬거라는 기대도 안가지고 있어요.
(1998년 8월 11일 2지대 어느 사수대와의 인터뷰에서, 임인애, 세기말 현장보고서)
노란 봉투를 집으로 보내기 전에 대의원은 알았지요. 그 전에 식칼 들고 올라가 00부 대의원이다, 나를 먼
저 집어넣지 않으면 네가 죽을 줄 알아라 하고 나왔다. 분신 말리느라고 힘들었고요… 오히려 순했던 사람
들이 더 그랬어요. 후배 놈 중의 하나가 그래서 모질게 팼지요. 그 때 참 가슴이 아팠지요.(면접자 ㄹ)

정리해고 대상자들의 분노는 극단적이었다. 특히 활동가 그룹이 그랬고,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정신적
공황상태’였다. 사측에 의해 선별당하고 개별적으로 통보받는 방식이 정리해고 대상자들의 자존감을
심하게 훼손시켰다. 그 분노와 상실은 ‘내가 열심히 일했는데 정리해고 대상자에 들어간 이유를 납득
하지 못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당시에 노동조합에서 지불했던 선물이 있었어요. 정리해고 시점에 노조에서 지급했던 선물이 주방세트
였어요. 수저, 칼, 이런 것이 들어갔었는데, 이때 지급했던 주방기구를 무급휴직, 정리해고 대상자들이 집으
로 안가지고 가고 몸에 품고 있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분노가 극에 달했어요. 그때 당시에 공권력이 들어오
고 같이 맞부딪쳤다면 서로 엄청난 사고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내가 열심히 일했는데 정리해고 대
상자에 들어간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 것이지요. (면접자 ㅂ)

이러한 분노는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든 회사가 되게 하려고’ 양보하고 ‘희망’퇴직을
받아들이던 모습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정신적 공황상태에 처하게 된 조합원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노란 봉투, 시퍼런 해고의 칼날뿐이었기 때문이다.

정리해고 대상자들은 현장에서 막무가내였죠. 반장 책상에 칼 꽂고, 기물 파손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만들어
놓은 차에 테러를 가하고… 공구를 다 갔다 버리고. 어쨌든 시작하자마자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조합원들
은 포기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왜 하필 나냐 이런 것이지요. 누구든지 잘리게 되어 있다. 누구든

163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 생각하는 동지들도 있었다. 그런 동지들은 사수대로, 공장 점거로 결합을 하는 거고,
회사에서는 여러 방면으로 공격을 하는 거예요. 정리해고 대상자에게는 그 속에서 빠져나오면 무급휴직으로
전환시켜주겠다. 빠져나오면 무급휴직자들 대상에서 빠지게 해 주겠다. 고리가 약한 조합원들은 ‘지금이라도
희망퇴직 안하면 그것마저 못 찾아가는 것 아니냐’ 여러 가지로 다 파악했기 때문에 대응방식이 다 틀렸죠.
희망퇴직을 조합에서 받아 들였다는 것. 그런 기억들이 많이 나고요.(면접자 ㅅ)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참여했죠. 제가 처음에는 안 받고, 2차 때 해고 통지서를 받았는데… 사람들 중에서
무급 받은 사람도 있고 안 받은 사람도 있고… 동료들 간의 배신감 같은 게 좀 많았었죠. 어떤 사람은 자신
은 살았으니까 이런 거 참여 할 필요 없다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자기도 혹시 앞으로 당할지 모르
니까 열심히 참여하고 그런 거…. (면접자 d, 조합원)

또 한편에서는 어제까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정리해고) 대상자와 아닌 자로 분리되면서 함께 싸우
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가 커져갔다. 대상자와 아닌 자 사이의 갈등과 골은 비록 표면적인 갈등은 희
석되었을지 모르나, 파업이 끝나고 현장 복귀 후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투쟁은 자본에 의해 개별화된 노동자들을 동지적 관계로 다시 일으켜 세운다.

2.3.3. 투쟁은 자본에 의해 개별화된 노동자들을 동지적 관계로 재구성한다
- 단절된 관계, 새로운 동지 : ‘계곡파 조합원’과 식당 여성 조합원

파업 기간 내내 농성에 참여한 조합원들은, 사측에 동원된 일명 ‘계곡파 조합원들’과 쫓고 쫓기는 과
정을 지속했다. 그러나 과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투쟁 과정에서 노동조합 내부의 변별점이 ‘어용과
민주’의 구도였다면, 98년 이후 지금까지 조합원들은 정리해고 대상자였느냐 아니었느냐, 파업에 참여
했느냐 사측에 동원되었느냐에 따라 나뉘어 왔다. 한쪽은 사측의 파업 무력화를 저지하기 위한 자발
적인 행위였으며, 또 다른 한쪽은 정리해고를 비껴간 상황에서 나름대로 생존을 위한 행위였다. 그러
한 구분은 고용, 즉 자신의 생존권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첨예한 갈등으로 나타났으며, 파업이
끝난 뒤로도 극심한 대립과 갈등의 원인으로 남았고, 지금까지도 현장의 일상 속에 잠재되어 예전과
같은 공동체적 질서를 복원하는데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투쟁의 상흔
이기도 하지만, 파업 이후 투쟁의 우위에서 현장 질서를 바로잡지 못한 노동조합의 책임이기도 하다.
갈등을 해결하는 길은 막연한 화해와 용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기억을 복원하고 평가하는 것에서 시작
한다는 것을 재확인해야 한다.

여름에 비가 엄청 왔죠. 조합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비가 오는데 산에 간다고 조합원을 집결시켜놨다고 하더
라. 그 비를 맞고 오토바이를 타고 갔다. 사측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산행을 시작한다고 하니까 그 장대같은
비를 맞고 산에 올라갑디다. 타고 갔던 오토바이 헬멧을 집어던지고 욕을 했더니 가다가 돌아온 사람이 7명
이었어요. (면접자 ㄴ, 활동가)

164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조합원들 개 삶아먹고 그런 거 타격 갔었거든요. 갔는데 참 슬프더라고요. 참 불쌍하더라고요. 조합원들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니까, 밉지는 않았어요. 우리가 절대적인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우리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면접자 ㅇ, 당시 문화패)
그때 생각하면 선거구 조합원이 야속하다. 우리 선거구는 다 나갔다. 텐트 쳐놓고 대의원하고 저하고 둘이
있었다. 그동안 그 전까지 형・아우하고 지냈던 사람들하고 다 싸웠던 것 같다. 그 이후에도 대의원선거 나
가면서 공개 사과하라는 이딴 소리 들으면서까지… 저는 그 때… 그것이 제일 가슴이 아프다. (면접자 ㅈ)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투쟁은 자본에 의해 개별화된 노동자들을 동지적 관계로 재구성했다. 우리는
그것을 계급성의 회복이라고도 부른다. 식당 여성 조합원들은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투쟁을 통하여 ‘밥
주는 아줌마’에서 ‘함께 투쟁하고 있는 식당 아줌마 동지’로 거듭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에 대한 인
식은 ‘식당아줌마’였고 ‘여성 조합원’ 혹은 성별의 차이를 극복한 ‘조합원’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 한
계는 결국 투쟁의 막바지에 이 ‘동지’들을 ‘정리해고를 막기 위한 정리해고의 희생양’으로 몰아넣는 차
별로 나타났다. 이에 36일 간의 파업이 끝난 뒤 식당 여성 노동자들은, 한때 동지였던 남성 조합원들
이나 노동조합의 연대 없이 기나긴 해고 철회 투쟁을 이어가야 했다.

98년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식당 아줌마들의 남자들 못지않은 투쟁, 강한 이미지로 남아있고, 그럼에
도 불구하고 정리해고의 타겟이 되었다. 아쉽지요. 그리고, 조합원들뿐만 아니라 내 부인, 내 자식까지 하나
된 마음으로 그런 위기 상황에 공동으로 대처했다는 것이 상당히 가슴에 와 닿을 정도로 감동했어요. (면접
자 ㅊ)
처음에 식당 아줌마들이 파업할 때 저는 조합원한테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우리 집회할 때 창문으로 내려
보며 실실 웃고 하던 사람들인가. 솔직히 안 좋아했지요. 한번 해봐라, 그런데 여성 조합원들이 그만큼 열성
적으로 하고 98년 때도 식사도 다해주고 하는 것 보고. 남자 활동가들보다 더 열심히 하니까 나중에는 조합
원들이 엄청 좋아했죠. (면접자 ㅋ)

2.3.4. 집행부와 조합원 : 주체들 간의 동질감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8월 5일, 파업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노조 집행부는 ‘임금 삭감과 무쟁의 선언’을 주요 내용으로 한 양
보안을 내놓았다. 파업 참여 조합원들은 지도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작 그 지도부는 투쟁하고 있
는 대중이 아니라 정권과 현대자본과 공장 밖의 공권력들, 그리고 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조합원들과
관리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회유의 입들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조합원들은 “더 이상 미련도 여
한도 없다. 후회 없는 한판 싸움을 하고 싶다. 그리고 간다.”14)고 말하고 있었지만, 파업 지도부는
“우리의 피와 땀을 여기서 뿌리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투쟁을 남기고 싶습니다. 영원히 지역 주민과
국민들에게 기억될 순결한 투쟁을 자리매김하고 싶습니다.”15)라고 말하고 있었다. 파업을 둘러싼 내
14) 1998년 8월 14일, 파업 농성장 평조합원 텐트
15) 1998년 8월 18일 저녁집회, 김광식 위원장 발언

16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부 주체들 간의 긴장은 파업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긴장은 투쟁 과정에서 온
전하게 충돌하며 한 단계 상승하지 못한 채 그저 미묘한 기운으로 잠복해 있었다.
그토록 힘겨운 와중에도 파업은 파업 그 자체만으로 짜릿한 쾌감과 즐거움을 주었다. 굳이 말로 확인
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 있었고, 그러한 집단적인 체험은 파업의 커다란 동력이자 주
체들에게 동질감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학습 과정이기도 하다.
이번 연구 과정에 참여한 대다수의 면접자들은 휴가 마지막 날인 8월 9일 저녁, 1만 여명이 참여한
집회에 대해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이날의 집회는 공권력 침탈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오히려 더
많은 노동자들이 결집했다는 점, 집회 도중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집회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흩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획된 문화판’이 ‘전체의 난장판’으로 상승되어 집회 참가자 모두가 동일
한 흥분과 투쟁의 확신을 공유할 수 있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은 파업 지도부의 일관되고 확신에 찬
입장을 대중적으로 소통하고 공유하여 얻어지기도 하지만, 파업 공간에서 직접 느끼는 상호간의 소통
과 상승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오는 날 했던 집회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지요. 조합원들이 비 속에서 끝까지 남아있었다는 게 흥분되고
짜릿했죠. 그걸 계기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사람들이 참 많이 가졌어요. 조합원들이 공권력이 침탈한다
면, 전에 성과급 투쟁 때는 도망갔었는데 이번에는 담 넘어서 들어왔었거든요. 경찰들이 들어온다고 해서 각
문을 봉쇄했는데 오히려 담 넘어서 들어왔었어요. 사람들이 없는데, 집회하면 모이는 거야. (면접자 ㅌ)
비가 갑자기 와서 무릎 밑까지 차 있었다. 그 때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고 어깨동무하고 춤추고 했던 것. 지
금도 생각해보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안에 있었을 때 정신병자 같았는데, 그래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안에서 하고 했던 것들이, 동지적인 것들이
무언가, 결과야 어이됐던 이길 수 있다는, 동지들과 함께 있으면서 외롭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면서 안
에 있으면서 상당히 편했었다. 그런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면접자 ㅍ, 활동가, 당시 조합원)
소나기 쏟아지는 데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투쟁 동력도 있었어요. 해가 지면 어디서 사람이 나오는지
저녁 7시 집회만 할 때 되면 사람들이 많았어요…. (면접자 e, 조합원)

그 다음 날부터 현대 자본의 제의에 따라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자본은 최종안을 내놓았고, 협상
은 결렬되었다. 다음날 위원장은 노조 사무실 옥상 위, 철탑에서 농성을 시작한다. 협상으로는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자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8월 중순이 지나면서 공장 정문을 둘러싸고 있
는 공권력은 더욱더 불어났고, 정권에서는 연달아 중재단을 급파했다. 파업은 정점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정권과 자본의 조여 오는 압박과 함께 조합원들의 열기와 집중도 상승해갔다.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다는 긴장이 최고조이던 순간에 가장 많은 집회 대오가 모였다.
그 열기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서인 듯 때마침 노무현이 신자유주의 정권의 대리자로 울산에 내려왔
고, 8월 20일에는 노무현 중재단의 중재안이 발표된다. 당시의 상황과 판단에 대해 당시 노조 위원장
은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아래와 같이 술회하고 있다.

166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그런 과정에서 노무현이 국민회의 중재단을 꾸려 울산으로 내려온다. 이에 대해 김광식 위원장은 “공권력
투입을 앞두고, 회사 입장에서 보면 합법적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
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또 “당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별
단위 사업장이 정권과 총자본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며 “개별 단위 사업장이 투쟁을 벌여 정리해고 규모를 줄이는 것은 하지만 기업별 노조보다는 구조와 시스
템을 바꿔 산별노조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잠정합의(안)에 대해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1,2차 투표를 통해 부결시키지만 문안이 약간 수정돼 통과된다. 사실상 “노조를 유지할 힘조차 없어 합의하
는 상황으로 흘러갔다”는 것이 김 위원장이 바라보는 당시 정세다. - 2002년 6월 월간 『말』

반면 투쟁에 결합했던 현장조직들과 활동가, 조합원들은 즉각 분노와 반발을 표출하였다. 그들의 요구
는 “끝까지 싸울 수 있다, 싸우겠다.”는 것이었고, 위원장의 판단은 “노조를 유지할 힘조차 없어 합의
하는 상황으로 흘러갔다.”는 것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파업에서 그러하듯 지도부의 현실적인 고민과
조합원의 투쟁 열기 사이의 간극은 이 투쟁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으며, 특히 파업의 정점에서 극명한
대비를 보인다.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의 해결 방안은 파업의 주체들이 행동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답 외에는 있을 수 없다. 문제는 현실 속에서 행동하는 주체들의 힘이다.

2.3.5. 집행부와 조합원 : 파업의 지도력과 민주주의

면접자들에게 파업기간 동안 가장 큰 갈등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싸움에 대한 확신이나 전망이 불투
명함에서 오는 갈등인지, 가족들의 또 다른 회유가 갈등이었는지, 현장조직간 활동가간의 전술상의 이
견에서 오는 갈등인지, 조합원들에 대한 못미더움에서 오는 갈등인지, 지도부의 의지에 대한 불확실함
에서 오는 갈등인지를 물었다. 활동가들은 파업의 중요 국면에 대해 활동가로서의 판단을 요구받는다.
따라서 현장조직별, 공장별로 진행되는 토론 등을 통해 파업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또 그만큼 갈등의 요소들이 더 풍부하게 드러날 수 있는 집단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개인적인 고민
이나 갈등보다는 당시 정세 속에서 나타난 집단적인 갈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면접자들의 대다수는
지도부와의 갈등을 가장 큰 갈등으로 꼽았으며, 당시 사수대나 대의원으로서 파업에 결합했던 활동가
들은 특히 강렬한 반응을 보였다.

지도부의 책임이다. 사수대를 총괄 지휘했던 사람이 부위원장, 지도부 지침이 비폭력. 사수대는 무급휴직자
들 중심으로 격앙되어 있었죠. 지도부가 비폭력 지침을 내리고 회사가 야금야금… 결국 생산까지 가동해 보
려고, 그런 회의도 하고. 이건 조합원들이 할 수 없는 거다. 그러면서 지도부가 막았어요. 지도부가 투쟁이
확대되는 것에 대해 두려워했다. 마지막 정리할 때 새로운 형태의 파업지도부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는데, 소
수라서… (면접자 ㅎ, 당시 사수대)
사실 7대 집행부에서 침탈에 대한 대책을 안 세워 놨었다. 같이 있던 동지들이 공장(꽃)도 가동하고, 사실
믿을 만한 동지들이 별로 없었어요. 낮에는 사수대로, 거의 하루에 20시간씩 돌아다녔던 적도 있고, 밤에 공
장 타격투쟁도 하고, 생산시설 파괴부터 시작해서 그것을 진짜 믿을 동지들만 해서. 사실 타격 투쟁할 때는

167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회사에 대한 망을 본 것이 아니라 조합에 대한 망을 보면서 했다. 어용은 아니더라도 만족할 만큼 못 싸웠
었고, 그것에 대한 실망이 많았었지요. (면접자 ㄴ, 당시 사수대・대의원)
집행부에 대해서 그랬다. 이상한 기류로 흐르는 것들. 대중적으로는 결사항전 이런 쪽으로 이야기가 되고.
정확히 찍어내지는 못하겠는데요. 회사와 협상하면서부터 이면적으로 되고. 노무현 중재단 오기 전후 그 정
도일 거예요. 흔들렸던 거지. 사실 그 전에 희망퇴직을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는
데… (면접자 ㄹ)
집행부에 대한 절망감이 자꾸 계속 들었지요. 그리고 우리가 공장 공구들을 싹 다 갔다 버렸거든요. 나중에
다 주웠더라. 기계에다가 소금물 다 붓고 그랬었거든요. 투쟁 중에도 절망감을 많이 느꼈어요. 지도부에 대
한 절망감이 컸어요.(면접자 ㅁ)
문제는 투쟁이 지속되어 가면서 이 사람들의 요구는 무조건 정리해고 반대였고, 집행부에서는 시간이 가면
서 현실적인 고민이 하나 둘 생겼던 것이다. 상시적으로 소통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면접자
g, 활동가)

물리적인 폭력을 동반하는 투쟁 전술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의 목표를 둘러싼(합의안으로 표현되는)
지점이 주된 갈등의 양상이었다. 정리해고 명단 발표 이후 파업 기간 내내 대중들은 즉자적이고 즉각
적인 분노를 표출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지도부는 ‘질서’와 ‘조직된 투쟁’이라는 명분으로 그러한 분
노를 잠재우고자 했다. 또한 대중의 투쟁의지를 끊임없이 교섭이라는 제한된 틀 내로 가두고자 했다.
그 결과 투쟁동력과 교섭이 투쟁을 상승시키는 계기로 작동하기 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제약하는 결과
를 낳고 말았다16).
이러한 지도부와 활동가, 현장조직을 포함한 지도력과 조합원 대중의 정서 사이의 갈등-오히려 갈등
이 전면화 되지 못함으로 인해 내부의 골을 더 깊어졌지만-은 투쟁기간 내내 지속, 확장되었다.

연구원 : 상황이 긴박해지면서 활동가들 간 소통이 왜 막혀있었나요?
면접자 : 그때 이상하게 그렇게 막히더라고. 그것은 내가 느낀 것인데,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또 이런
것도 있다. 어떤 대의원은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더라. 그러면서 믿지를 못하는 거야. 그
러면서 보면 보이더라. 저거는 끝까지 갈 놈이다. 저놈은 못할 놈이다 그러다보니 함부로 이야기를 못하는
거야. 당시의 상황들은 굉장히 미묘하고 복잡했죠. (면접자 h, 활동가)
면접자 : 제가 알기론 위원장하고 뭐 독대도 하고 막 그랬는 거 같던데.
연구원 : 위원장이 사측하고?
면접자 : 네.
연구원 : 독대하는 거에 대해서 사람들이, 조합원이 안 좋아하나요?
면접자 : 네.
연구원 : 왜요?
면접자 : 불안해서. (면접자 j, 조합원)
파업지도부에서 대중과의 토론 이것이 핵심이다. 공권력에서 깨져야 하냐는 문제는 깨지면 성공이냐 아니냐
의 이런 문제보다는 결국 마지막까지 투쟁을 하면서 대중과 함께 어떻게 했느냐가 관건이었다. (면접자 k,
16) 노동자의 힘, 결코 꺾이지 않은 미완의 투쟁, 1999.

168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활동가)
집행부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다 오픈시켜놓고 판단해도 사실은 약이 올라 있는 활동가들을 이해시키기
도 힘들 텐데, 아마 정보자체를 다 오픈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공식적인 절차라는 것은 불가능했지
요. 그것은 합의 안하겠다는 이야기 이다. 그런 맥락에서 민주적인 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이전 과정까지 모
든 게 잘못했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면접자 l, 활동가)

98년 구조조정을 둘러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투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대중의 투쟁의지(동
력)에 지도부가 얹혀 있는 형국이었다. 이는 투쟁을 바라보는 상이한 시각 차가 소통의 부재, 혹은 단
절로 인식되게 만든다17). 대다수 면접자들의 평가에서도 파업과정에서 특히 마무리 교섭국면에서의
민주적 절차의 부재를 가장 크게 잘못한 지점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미 정리해
고가 법제화된 상황에서 벌어진 36일간의 정리해고를 전면 거부하는 그 자체가 이미 총자본과 총노동
의 전선인 98년 현대자동차 파업에서조차 대중들의 투쟁은 철저히 교섭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어버렸
다는 점이다.

“조합원 동지들! 투쟁의 목적은 협상에 있다.”18)
“집행부의 비폭력 평화노선을 적극 따르라. 조합원들이 위원장의 지시에 절대 복종하지 않는다면 투쟁을 포
기하겠다.”19)

20세기 말 한국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전개된 파업들은, 극단에 선 노동자들이 끝을 모르고 덤비는 투
쟁이라는 전통적인 의미로만 분석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망을 가진다. 이제 파업은 핵심 컨셉과 치밀
한 계획, 적절한 수위, 정세나 국면을 타고 잡는 일정이 필요한 하나의 기획이 되었다. 계획과 일정이
분명한 수단으로서 파업은 불시에 터져 나오는 돌출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충분히 예상 가능한 행위가
되어가고 있다20).
파업이 하나의 공인된, 사회적 행위 중의 하나라면 늘 예측 불가능하고 즉자적인 ‘들고양이 파업’만이
그 전형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기획’이 아니라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는 점이다. 투쟁의 효과를 높
이기 위한 다양한 기획보다는 노동자 대중의 운동 방식으로 파업의 기획이 마련되어야 한다. ‘통제’로
대체하려는 ‘지도’가 아니라 지도부의 지도력을 대중 스스로가 넘어서고 통제할 수 있도록 조합원들의
의지와 행동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을 ‘허용’하는 지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 면접자의 말대로 “민주적인 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이전 과정까지 모든 게 잘못했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오히려 파업의 전 과정에서 파업 지도부가 대중들을 통제와 지침에 따라 움
직이는 ‘파업기계’로 제한시킨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그 때문에 대중을 배제한 채 합의한 ‘종이’

17) 임인애, 실패한 상흔은 오래 지속된다, 진보평론 3호.
18) 1998년 8월 22일자 현자노조 중앙비대위속보 87호.
19) 1998년 8월 12일 저녁 집회, 당시 현자노조 위원장 발언.
20) 임인애, 실패한 상흔은 오래 지속된다. 진보평론 3호.

169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를 그야말로 한낱 ‘종이쪼가리’로 무력화시킬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노동자’로 대중이 진전해 나가지
못하였다. 이것이 평가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이다.

어수선했죠.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그 전에 짐작하고 있었죠. 막판에 오면서 노조 유인물도 이상하게 나오
기 시작했고, 홍보물이나 TV를 보니까, 이미 그쪽에서는 타결이 임박했다고 하는 것이고, 집회에서도 김광
식의 논조가 그런 식으로 가고 있고, 유인물도 그렇게 가고 있고, 그래서 이미 알고 있었다. 다음에 노무현
이 내려와서 중재를 하면서 위원장의 의지가 상당히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당시에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
었다. 마지막 그날, 이미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 하는 믿음이 있었던 상황이었다. 집회도 집회처럼 안되고 아
주 엉성했었다. 모여 있는 것도 아니고 퍼져 있으면서 씨발 씨발… 하면서 보고 있었는데 위원장이 단상에
올라와서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다… 정리해고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최소화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때는 머릿속에 별이 빤짝빤짝했다. 조합원들이 위원장 이야기 듣기 전에 삼삼오오 다 빠져나가고 있었던
상황이다. 가다가 돌아보면서 쳐다보는 조합원들. 내가 정문을 차단하고 막으면 저 사람들 투쟁대오로 이끌
수 있는가도 생각해보았는데, 자신이 없었다.(면접자 ㅅ)

합의의 3주체였던 정부와 현대자본과 노조 지도부는 역사적인 사진 한 컷을 남겼다. 그러나 조합원들
에게는 그들 스스로가 남지 못했다. 단지 정부와 자본에 의해 무력화된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합의문
과 마치 “군사 쿠데타이후의 상황을 방불케 하는21)” 현장만이 놓여지게 되었다.

2.4. 끝났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원직 복직 쟁취투쟁

2.4.1. 정리해고를 막기 위한 정리해고 : 희생양 277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 투쟁에서 식당 여성 노동자들이 주요 정리해고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는 점은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277명의 정리해고자 중 144명이 식당 여성 조합원이었다. 식당
여성이 집단적으로 정리해고 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여성의 차별적 정리해고에 대한 운동진영의 비판
들이 있었다. 그러나 내부 투쟁주체들 사이에서는 277명의 정리해고 수용과 지도부의 직권조인에 대
한 분노가 ‘여성 노동자 집단 정리해고’ 그 자체의 문제를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면접자들은 당시 잠정합의 이후 그 대상자의 대부분이 식당 여성 조합원이었다는 점이 미안함, 안쓰
러움과 동시에 불가피함, 일종의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고 한다. 자신이 정리해고 대상자에서 최종
제외되었음에 대한 안도와 함께 노동운동 진영 일부에서 제기된 정리해고 최소화론22)이 노조사수라
21) 면접자 w, 조합원.
22) 정리해고의 ‘상징적’ 수용과 ‘상징적’ 관철이라는 노조 집행부 및 일부 활동가들과 사측 및 정부의 이해 일치는 이미 노동법 개정

170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는 명분과 더해져 현실적인 타협이 이루어졌음을 회고하고 있다.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경우 조합원 전체로부터 호응 받고 있는 상태는 아니었죠. 그 이데올로기는 차 만드
는 사람하고 밥 짓는 사람하고 임금이나 모든 조건이 똑같을 수 없는 것 아니냐가 회사 측의 논리였단 말입
니다. (면접자 ㅍ, 활동가)
그때 어떤 집행부였어도 마찬가지 였을 거예요. 그렇게 안 했으면 다 죽었을 테니까. 어떤 집행부였어도 잘
한 거에요. 솔직히 내가 봤을 때는 그 정도면 잘 한 거예요. (면접자 v, 조합원)
그때 당시 솔직한 심정은 한마디로 말해서 해고를 피할 수 없으면 잘한 결정이다. 남자가 경제력을 짊어진
상황에서 여성들도 생계에서 역할부담을 하지만 그래도 남자가 경제력을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조합
쪽의 최선의 결정이지 않았나.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었나.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면접자 y, 조합원)
실제로 어떤 노동조합이던지 희생양은 있다고 본다. 저 아줌마들 저리 열심히 했는데 살릴 수 없었느냐? 나
름대로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고 보는데. 그렇다고 식당아줌마가 몇 천 명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노동운동
이 잘못되는 방향을 그때부터 배우지 않았나. (면접자 ㅎ, 활동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노동의 유연화를 증대시켰지만, 유연화는 차별적으로 진행되었다. 외환위기 이
전부터 진행된 외주화, 사내 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은 98년 투쟁당시 식당 여성 노동자들을 정리
해고하는데 기본적인 근거를 제공하고 있었고, 주변부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이 자본의 유연
화의 공세가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겨누어지는 상황 하에서 더욱 확대・심화되어 진행된 것이다.

그 한 달을 넘게 천막농성하면서 이리저리 식당이 타겟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요. 시간이 지나면 서울
에 간 사람이나 여러 경로를 통해서 식당아줌마가 그 안에 정리해고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되었어요.
공공연한 비밀로까지 되었었어요. 그래서 아줌마들이 여기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때 전경이 들어오니 불을
지르니 오만(가지) 이야기 돌 때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아이들도 많은데 아줌마들이 많은 생각을 했지요.
혹시 내 새끼 같은 저기 사람들 다치면 어떻게 하나. 파업도 끝나야 집에 가서 살림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도 할 수도 있고요. 억울해 미치겠다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노동조합이 식당 운영하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리석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
는 싸움을 해본 경험이 별로 없으니까. 노조에서 마지막 방법이다 하니까 우리도 그것을 또… (면접자 q, 당
시 식당 여성 조합원)
98년 투쟁 이야기하면 너무 속상해서요. 98년 투쟁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내가 있는 거지만. 어쨌든 98년
당시에는 그때까지만 해도 막 나라가 어렵고, 96년부터 그랬으니까 또 회사가 정말 어렵구나. 그래서 정리
해고를 해야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었죠. 그런데 어쨌든 노동조합 지침만 믿고 끝까지 싸웠는데 결국은 해

검토시 노조측의 ‘유연화’ 수용 불가피론에 그 맹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면에는 물질적인 단기적 이득을 위해 ‘상징적’
차원에서 양보하고 조직된 힘으로 막아내면서 조직적 동원력을 유지하고자 한,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민주노총 합법적 제도화를
통해 열릴 정치적 가능성이라는 계산과 경험론이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정리해고의 ‘상징적’ 수용과 ‘경제적
실리’의 보장을 통한 ‘노조 조직 보존’이라는 결과는 대다수의 노조운동 활동가 및 노동운동계와 학계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듯하다. 상층노조의 지원이 저조한 가운데 단위 대공장 노조만으로는 대정부 및 자본과의 전면적인 투쟁의 한계가 명확했
기 때문에 희생을 최소화하는 결과를 얻어낸 성과는 인정되어야 한다는 근거에서 그런 것 같다. (신병현, 여성 노동자의 집단적
정리해고와 ‘민주’노조 운동)

171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More Related Content

Similar to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일터] 산재보험 50년 특집
[일터] 산재보험 50년 특집[일터] 산재보험 50년 특집
[일터] 산재보험 50년 특집runkilsh
 
하부영이 걸어 온 노동운동(지역)
하부영이 걸어 온 노동운동(지역)하부영이 걸어 온 노동운동(지역)
하부영이 걸어 온 노동운동(지역)Younggie Hong
 
산재보험50년토론회
산재보험50년토론회산재보험50년토론회
산재보험50년토론회runkilsh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97~146)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97~146)[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97~146)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97~146)runkilsh
 
[2007]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 실태조사 보고서
[2007]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 실태조사 보고서[2007]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 실태조사 보고서
[2007]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 실태조사 보고서runkilsh
 
2013 11 일터
2013 11 일터2013 11 일터
2013 11 일터runkilsh
 
2014 07 일터 (최종)
2014 07 일터 (최종)2014 07 일터 (최종)
2014 07 일터 (최종)runkilsh
 
워커즈와함께 사회적경제이해하기(141214)
워커즈와함께 사회적경제이해하기(141214)워커즈와함께 사회적경제이해하기(141214)
워커즈와함께 사회적경제이해하기(141214)수원 주
 
2014 2 일터
2014 2 일터2014 2 일터
2014 2 일터runkilsh
 
2014 4일터
2014 4일터2014 4일터
2014 4일터runkilsh
 
2014 4 일터
2014 4 일터2014 4 일터
2014 4 일터runkilsh
 
2014 4 일터
2014 4 일터2014 4 일터
2014 4 일터runkilsh
 
[2010] 도시철도 서비스단 노동자의 우울수준에 관한 실태조사
[2010] 도시철도 서비스단 노동자의 우울수준에 관한 실태조사[2010] 도시철도 서비스단 노동자의 우울수준에 관한 실태조사
[2010] 도시철도 서비스단 노동자의 우울수준에 관한 실태조사runkilsh
 
2014 10 일터(최종)
2014 10 일터(최종)2014 10 일터(최종)
2014 10 일터(최종)runkilsh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seekly
 
블로거 이정환이 꿈꾸는 한국경제
블로거 이정환이 꿈꾸는 한국경제블로거 이정환이 꿈꾸는 한국경제
블로거 이정환이 꿈꾸는 한국경제TNM Media
 
이정환 블로거 이정환이 꿈꾸는 한국경제
이정환 블로거 이정환이 꿈꾸는 한국경제이정환 블로거 이정환이 꿈꾸는 한국경제
이정환 블로거 이정환이 꿈꾸는 한국경제Lee Dae Won
 
[2018체인지온@공룡]공장 담벼락을 넘는 노동자와 노동의 문제를 함께 들여다보는 지역의 구성, 교육과 선전
[2018체인지온@공룡]공장 담벼락을 넘는 노동자와 노동의 문제를 함께 들여다보는 지역의 구성, 교육과 선전[2018체인지온@공룡]공장 담벼락을 넘는 노동자와 노동의 문제를 함께 들여다보는 지역의 구성, 교육과 선전
[2018체인지온@공룡]공장 담벼락을 넘는 노동자와 노동의 문제를 함께 들여다보는 지역의 구성, 교육과 선전ChangeON@
 

Similar to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20)

[일터] 산재보험 50년 특집
[일터] 산재보험 50년 특집[일터] 산재보험 50년 특집
[일터] 산재보험 50년 특집
 
하부영이 걸어 온 노동운동(지역)
하부영이 걸어 온 노동운동(지역)하부영이 걸어 온 노동운동(지역)
하부영이 걸어 온 노동운동(지역)
 
산재보험50년토론회
산재보험50년토론회산재보험50년토론회
산재보험50년토론회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97~146)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97~146)[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97~146)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97~146)
 
2014 3 -_
2014 3 -_2014 3 -_
2014 3 -_
 
[2007]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 실태조사 보고서
[2007]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 실태조사 보고서[2007]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 실태조사 보고서
[2007]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 실태조사 보고서
 
2013 11 일터
2013 11 일터2013 11 일터
2013 11 일터
 
2014 07 일터 (최종)
2014 07 일터 (최종)2014 07 일터 (최종)
2014 07 일터 (최종)
 
워커즈와함께 사회적경제이해하기(141214)
워커즈와함께 사회적경제이해하기(141214)워커즈와함께 사회적경제이해하기(141214)
워커즈와함께 사회적경제이해하기(141214)
 
20110327 진보신당 복지 대토론회 자료집
20110327 진보신당 복지 대토론회 자료집20110327 진보신당 복지 대토론회 자료집
20110327 진보신당 복지 대토론회 자료집
 
2014 2 일터
2014 2 일터2014 2 일터
2014 2 일터
 
2014 4일터
2014 4일터2014 4일터
2014 4일터
 
2014 4 일터
2014 4 일터2014 4 일터
2014 4 일터
 
2014 4 일터
2014 4 일터2014 4 일터
2014 4 일터
 
[2010] 도시철도 서비스단 노동자의 우울수준에 관한 실태조사
[2010] 도시철도 서비스단 노동자의 우울수준에 관한 실태조사[2010] 도시철도 서비스단 노동자의 우울수준에 관한 실태조사
[2010] 도시철도 서비스단 노동자의 우울수준에 관한 실태조사
 
2014 10 일터(최종)
2014 10 일터(최종)2014 10 일터(최종)
2014 10 일터(최종)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블로거 이정환이 꿈꾸는 한국경제
블로거 이정환이 꿈꾸는 한국경제블로거 이정환이 꿈꾸는 한국경제
블로거 이정환이 꿈꾸는 한국경제
 
이정환 블로거 이정환이 꿈꾸는 한국경제
이정환 블로거 이정환이 꿈꾸는 한국경제이정환 블로거 이정환이 꿈꾸는 한국경제
이정환 블로거 이정환이 꿈꾸는 한국경제
 
[2018체인지온@공룡]공장 담벼락을 넘는 노동자와 노동의 문제를 함께 들여다보는 지역의 구성, 교육과 선전
[2018체인지온@공룡]공장 담벼락을 넘는 노동자와 노동의 문제를 함께 들여다보는 지역의 구성, 교육과 선전[2018체인지온@공룡]공장 담벼락을 넘는 노동자와 노동의 문제를 함께 들여다보는 지역의 구성, 교육과 선전
[2018체인지온@공룡]공장 담벼락을 넘는 노동자와 노동의 문제를 함께 들여다보는 지역의 구성, 교육과 선전
 

More from runkilsh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 안전대책의 문제점 토론회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 안전대책의 문제점 토론회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 안전대책의 문제점 토론회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 안전대책의 문제점 토론회runkilsh
 
반도체 직업병 예방대책 마련을 위한 토론회
반도체 직업병 예방대책 마련을 위한 토론회반도체 직업병 예방대책 마련을 위한 토론회
반도체 직업병 예방대책 마련을 위한 토론회runkilsh
 
[편집]산재보험제도 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보이스아이)
[편집]산재보험제도 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보이스아이)[편집]산재보험제도 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보이스아이)
[편집]산재보험제도 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보이스아이)runkilsh
 
2014 8 일터(완)
2014 8 일터(완)2014 8 일터(완)
2014 8 일터(완)runkilsh
 
E 6비자 이주노동자 인권실태와 개선방향 토론회
E 6비자 이주노동자 인권실태와 개선방향 토론회E 6비자 이주노동자 인권실태와 개선방향 토론회
E 6비자 이주노동자 인권실태와 개선방향 토론회runkilsh
 
2014 공공 산안법 활용 매뉴얼 총합
2014   공공 산안법 활용 매뉴얼   총합2014   공공 산안법 활용 매뉴얼   총합
2014 공공 산안법 활용 매뉴얼 총합runkilsh
 
일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산재보험 10대 개혁 요구안
일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산재보험 10대 개혁 요구안일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산재보험 10대 개혁 요구안
일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산재보험 10대 개혁 요구안runkilsh
 
20140611 자료집 참사를막기위한출발선에서다
20140611 자료집 참사를막기위한출발선에서다20140611 자료집 참사를막기위한출발선에서다
20140611 자료집 참사를막기위한출발선에서다runkilsh
 
2014 6 일터
2014 6 일터2014 6 일터
2014 6 일터runkilsh
 
우정사업본부 노동자의 최근 3년간 (2011 2013) 재해발생경위내역 분석 보고서 '집배원 노동자를 중심으로'
우정사업본부 노동자의 최근 3년간 (2011 2013) 재해발생경위내역 분석 보고서 '집배원 노동자를 중심으로'우정사업본부 노동자의 최근 3년간 (2011 2013) 재해발생경위내역 분석 보고서 '집배원 노동자를 중심으로'
우정사업본부 노동자의 최근 3년간 (2011 2013) 재해발생경위내역 분석 보고서 '집배원 노동자를 중심으로'runkilsh
 
[토론회] 2014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저임금실태와 노동환경개선을 위한 국회 토론회
[토론회] 2014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저임금실태와 노동환경개선을 위한 국회 토론회[토론회] 2014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저임금실태와 노동환경개선을 위한 국회 토론회
[토론회] 2014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저임금실태와 노동환경개선을 위한 국회 토론회runkilsh
 
2014년 4월 건강권 사업 민주노총 조합원 교육자료
2014년 4월 건강권 사업   민주노총 조합원 교육자료2014년 4월 건강권 사업   민주노총 조합원 교육자료
2014년 4월 건강권 사업 민주노총 조합원 교육자료runkilsh
 
2014 공공 산안법 활용 매뉴얼
2014 공공 산안법 활용 매뉴얼2014 공공 산안법 활용 매뉴얼
2014 공공 산안법 활용 매뉴얼runkilsh
 
[2013] 경진여객 보고서
[2013] 경진여객 보고서[2013] 경진여객 보고서
[2013] 경진여객 보고서runkilsh
 
두원보고서 20140115
두원보고서 20140115두원보고서 20140115
두원보고서 20140115runkilsh
 
코스파 보고서
코스파 보고서코스파 보고서
코스파 보고서runkilsh
 
직업환경 창립1주년 심포지움
직업환경 창립1주년 심포지움직업환경 창립1주년 심포지움
직업환경 창립1주년 심포지움runkilsh
 
[2013] 두원정공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과 노동자의 삶과 건강
[2013] 두원정공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과 노동자의 삶과 건강[2013] 두원정공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과 노동자의 삶과 건강
[2013] 두원정공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과 노동자의 삶과 건강runkilsh
 
[2013] 외국계 제약영업 노동자들의 직무스트레스 및 노동강도를 통해 살펴본 노동조건 개선방안 연구
[2013] 외국계 제약영업 노동자들의 직무스트레스 및 노동강도를 통해 살펴본 노동조건 개선방안 연구[2013] 외국계 제약영업 노동자들의 직무스트레스 및 노동강도를 통해 살펴본 노동조건 개선방안 연구
[2013] 외국계 제약영업 노동자들의 직무스트레스 및 노동강도를 통해 살펴본 노동조건 개선방안 연구runkilsh
 

More from runkilsh (20)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 안전대책의 문제점 토론회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 안전대책의 문제점 토론회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 안전대책의 문제점 토론회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 안전대책의 문제점 토론회
 
반도체 직업병 예방대책 마련을 위한 토론회
반도체 직업병 예방대책 마련을 위한 토론회반도체 직업병 예방대책 마련을 위한 토론회
반도체 직업병 예방대책 마련을 위한 토론회
 
[편집]산재보험제도 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보이스아이)
[편집]산재보험제도 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보이스아이)[편집]산재보험제도 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보이스아이)
[편집]산재보험제도 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보이스아이)
 
2014 9
2014 92014 9
2014 9
 
2014 8 일터(완)
2014 8 일터(완)2014 8 일터(완)
2014 8 일터(완)
 
E 6비자 이주노동자 인권실태와 개선방향 토론회
E 6비자 이주노동자 인권실태와 개선방향 토론회E 6비자 이주노동자 인권실태와 개선방향 토론회
E 6비자 이주노동자 인권실태와 개선방향 토론회
 
2014 공공 산안법 활용 매뉴얼 총합
2014   공공 산안법 활용 매뉴얼   총합2014   공공 산안법 활용 매뉴얼   총합
2014 공공 산안법 활용 매뉴얼 총합
 
일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산재보험 10대 개혁 요구안
일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산재보험 10대 개혁 요구안일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산재보험 10대 개혁 요구안
일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산재보험 10대 개혁 요구안
 
20140611 자료집 참사를막기위한출발선에서다
20140611 자료집 참사를막기위한출발선에서다20140611 자료집 참사를막기위한출발선에서다
20140611 자료집 참사를막기위한출발선에서다
 
2014 6 일터
2014 6 일터2014 6 일터
2014 6 일터
 
우정사업본부 노동자의 최근 3년간 (2011 2013) 재해발생경위내역 분석 보고서 '집배원 노동자를 중심으로'
우정사업본부 노동자의 최근 3년간 (2011 2013) 재해발생경위내역 분석 보고서 '집배원 노동자를 중심으로'우정사업본부 노동자의 최근 3년간 (2011 2013) 재해발생경위내역 분석 보고서 '집배원 노동자를 중심으로'
우정사업본부 노동자의 최근 3년간 (2011 2013) 재해발생경위내역 분석 보고서 '집배원 노동자를 중심으로'
 
[토론회] 2014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저임금실태와 노동환경개선을 위한 국회 토론회
[토론회] 2014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저임금실태와 노동환경개선을 위한 국회 토론회[토론회] 2014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저임금실태와 노동환경개선을 위한 국회 토론회
[토론회] 2014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저임금실태와 노동환경개선을 위한 국회 토론회
 
2014년 4월 건강권 사업 민주노총 조합원 교육자료
2014년 4월 건강권 사업   민주노총 조합원 교육자료2014년 4월 건강권 사업   민주노총 조합원 교육자료
2014년 4월 건강권 사업 민주노총 조합원 교육자료
 
2014 공공 산안법 활용 매뉴얼
2014 공공 산안법 활용 매뉴얼2014 공공 산안법 활용 매뉴얼
2014 공공 산안법 활용 매뉴얼
 
[2013] 경진여객 보고서
[2013] 경진여객 보고서[2013] 경진여객 보고서
[2013] 경진여객 보고서
 
두원보고서 20140115
두원보고서 20140115두원보고서 20140115
두원보고서 20140115
 
코스파 보고서
코스파 보고서코스파 보고서
코스파 보고서
 
직업환경 창립1주년 심포지움
직업환경 창립1주년 심포지움직업환경 창립1주년 심포지움
직업환경 창립1주년 심포지움
 
[2013] 두원정공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과 노동자의 삶과 건강
[2013] 두원정공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과 노동자의 삶과 건강[2013] 두원정공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과 노동자의 삶과 건강
[2013] 두원정공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과 노동자의 삶과 건강
 
[2013] 외국계 제약영업 노동자들의 직무스트레스 및 노동강도를 통해 살펴본 노동조건 개선방안 연구
[2013] 외국계 제약영업 노동자들의 직무스트레스 및 노동강도를 통해 살펴본 노동조건 개선방안 연구[2013] 외국계 제약영업 노동자들의 직무스트레스 및 노동강도를 통해 살펴본 노동조건 개선방안 연구
[2013] 외국계 제약영업 노동자들의 직무스트레스 및 노동강도를 통해 살펴본 노동조건 개선방안 연구
 

[200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p147~327)

  • 1. 3장. 고용이데올로기와 활동가 1. 들어가며 ································ ································ ································ ································ 1.1. 연구 목적과 문제 의식 ························· ························ ························ ························ 1.2. 조사 연구 방법 ··························· ··························· ··························· ·························· 147 147 150 2.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교훈 ······················· ······················· ······················· ······················· 2.1. 왜 다시 98년 투쟁을 들추는가? ····················· ···················· ···················· ···················· 2.2.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 경과 ················· ················ ················ ················ 2.3.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기억과 영향 ·················· ·················· ················· ················· 2.4. 끝났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원직 복직 쟁취투쟁 ··· ··· ··· ··· 2.5. 98년의 의미와 영향 ·························· ························· ························· ························· 152 152 153 159 170 186 3. ‘고용이데올로기’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운동에 미친 영향 ··········· ··········· ··········· ··········· 3.1. ‘고용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 ···················· ···················· ··················· 3.2. ‘고용이데올로기’에 의한 현장의 변화 ·················· ················· ················· ················· 3.3. 역대 집행부 활동을 통해 살펴본 ‘고용이데올로기’의 변화 과정 ······· ······· ······· ······· 3.4. 구조조정 쟁점사안들의 구체적 진행 양상 ················· ················· ················· ················· 3.5. 요약 ································ ································ ······························· ······························· 3.6. 나가며 ······························· ······························· ······························ ······························ 191 191 193 220 248 263 266 4. 활동가 ································· ································· ································· ································· 271 4.1. 들어가며 ······························ ······························ ······························ ····························· 271 4.2. 98년 이후의 변화 양상 : 사측의 노무관리 방식, 조합원, 활동가, 그리고 현장의 변화 · · · ·274 4.3. 98년 이후 현장의 변화 ························ ························ ························ ························ 284 4.4. 현장의 요구에 대한 활동가들의 판단과 대응 ················ ················ ··············· ··············· 288 4.5. 활동가들의 일상활동 및 현장조직 활동 ·················· ·················· ·················· ················· 300 4.6. 활동가 형성과 강화에 대하여 ······················ ····················· ····················· ····················· 317 4.7. 소결 - 활동가 재생산을 위한 몇 가지 제언 ················ ················ ················ ················ 326
  • 2.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3장. 고용이데올로기와 활동가 1. 들어가며 1.1. 연구 목적과 문제 의식 1.1.1. 98년 5월 정리해고 반대 파업투쟁을 다시 바라본다 “하청들이 우리보다 월급 적게 받고 고생하는 것 누가 모르겠습니까. 활동가도 아니고, 노조 집행부도 아니 고, 평범한 조합원인 우리들도 이 나라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것, 다 알고 있습니다. 현자노조 조합원이라면 대부분 비정규직 불법파견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당연히 지지하고 함께 싸워줘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현장에서 인간적으로 개인적으로 잘 해주는 것과, 하청 노동자들의 정 규직화를 위해 조직적으로 싸우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고용의 문제가 달려 있기 때문 에 매우 민감합니다. 왜냐면, 현대차 노동자들은 98년 정리해고 사태 때 그 살벌한 칼바람의 경험을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악몽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에게 98년 5월은 생각하기도 싫은, 말 그대로 ‘악몽’이다. 그해 여름 277명 정리 해고와 1,900여명 18개월 무급휴직, 그리고 8,000여명 명예퇴직이라는 무서운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 후 정리해고자와 무급휴직자 등 대부분이 약 1년 만에 현장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러나 현대차 노 동자들은 7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그 아픔을 지워지지 않는 흉한 상처처럼 드러내기도 싫어하고, 당시의 고통이 재발할까 두려워하고 있다.” (‘레이버투데이’에서 인용) 우리의 문제의식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98년 투쟁 이후 조합원들은 고용 안정을 가장 중요한 사안 1순위로 꼽고 있다. 그리고 ‘악몽 같은’ 98년이 재현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한편으로는 사측의 구조 조정에 따른 공포감을 스스로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 이후 7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147
  • 3.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현대 자본은 사상 초유의 이윤을 창출하고 있는 반면, 현대 노동자들은 ‘상시적 고용불안(감)’에 시달 리고 있다. 이러한 불안이 집단적 불만으로 조직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 상태에 이르기 까지 사측의 노동 통제는 어떠하였고, 이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어떠하였는가. 투쟁의 성과와 패배는 현장 정서를 어떻게 변화시켜왔는가. 사측의 경영 전략과 이에 따른 통제 이데올로기, 그리고 조합원들의 패배 의식・무력감・실리주의 등이 한데 버무려진 현장의 여론을 선진 활동가들은 어떻게 바라보았고, 어떻게 대응해왔는가 등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1.1.2. 비정규직 철폐・계급적 노동운동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고용 이데올로기’ 최근 현대자동차 불법 파견 투쟁의 어려움을 진단하면서 주로 짚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정규직 노조 의 이기주의이다. 비정규직 철폐 투쟁이 계급적 노동운동의 복원을 위해 무척 중요한 투쟁인데도, 정 규직 노조가 이를 적극 받아 안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정규직 노조의 이기주의에 대한 비판은 ‘현상’에 대한 비판일 뿐이다. 정규직의 이기주의는 일상적 구조조정으로 일상적 불안정을 만들어온 자본의 공세에 대한 방어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 는 문제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전선을 만드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98년 정리해고의 수용, 2000년(직접 생산 라인 내 사내 하청 투입을 16.9%까지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는 내용의) 완전고용 합의서, 직영 인원 충원 시 인원의 40%를 사내 하청 노동자로 채우도록 했던 2003년 노사합의 등에서 드러나는 문제들은 바로 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전선’이 없음을 반 영한다. 98년 정리해고 반대 투쟁 당시 총노동과 총자본의 대리전 양상으로 격돌하면서 만들어졌다가 손상된 대(對)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전선이 아직 복구되지 못한 것이다. 정리해고 반대 투쟁이 실패한 후, 노동조합은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논리로 양보 교섭을 진행하였다. 고용을 약간 보장받는 대가로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노동 조건의 악화는 피할 수 없다’는 논 리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양보 교섭 때문에 현장의 불안감은 더욱 확산되었다. 노동조합을 중 심으로 반신자유주의 투쟁 전선을 복원하고 노동자 대항 이데올로기를 확장하는 길을 찾지 못하고, 그 대신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생존할 방도를 모색하면서 ‘자발적으로’(강제된 자발이지만) 노동강도 강화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된 것이다.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전체 노동자들을 나누고 위계화하 는 자본의 전략에 동조한 점도 지나칠 수 없는 문제다. 이런 문제점들은 다시 노동조합과 선진 활동 가들에게 되돌아와 그들의 역량과 활동 폭을 위축시키는 악순환을 밟아왔다. 몇 년 전부터 가장 주요하게, 가장 많이 외치고 있는 ‘고용안정 쟁취’라는 슬로건은 이런 과정을 거치 면서 그에 걸맞는 투쟁에 대한 기획과 결합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오히려 현장의 고용불안(감)을 증 폭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왜곡되고 있다. 148
  • 4.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1.1.3. 노동강도 강화와 고용이데올로기 이제 노동의 불안정화는 비정규직(주변부) 노동자의 문제로만 보기 어려워졌다. 이미 노동의 불안정 화와 빈곤화 경향은 특정 근로빈곤층이나 불안정 노동층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의 불안정화라는 칼날 은 전체 노동자를 이미 심각한 지경으로 분할하였을 뿐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의 기반까지 야금야 금 도려내고 있다. 2005년 현재 현대자동차의 상반기 순이익은 2조원이 넘었다. 연간 순이익은 3조원을 훌쩍 넘을 것이 라는 전망이다. 그렇다면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상황은 어떨까? 회사가 잘 나가는 만큼 노동자들도 더 쉽고 편하게 일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실제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조사한 결과들은 그러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음을 보여준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노동강도는 예전 그대로이거나 혹은 예전보다 더 나빠졌다. 더 놀라 운 사실은, 노동자들이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가들 역시 노동강도에 관한 문제들, 즉 노동자의 몸과 건강에 대한 문제들은 상대적으 로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혹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 문제는 최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의 성격과 크게 다르지 않 다. 노동강도 문제는 특수한 별도 영역이 아니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노동 의 위기’ 중 한 부분이고,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을 가장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노동강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노동강도 문제를 현대자동차 노동조 합 운동의 전체적 차원에서 인식해야 하고, 더 나아가 단위 사업장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총체 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그 인식과 대안을 위해, 먼저 98년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구조조정 반대 투쟁을 주목하고자 한다. 98년 현대자동차 구조조정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운동 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노동강도에 관한 ‘수수 께끼’를 푸는 열쇠를 찾으려면, 98년의 경험을 돌아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비단 노동강도의 문제 뿐 아니라, 지금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들 의 원인을 찾으려면 98년 구조조정 반대 투쟁에서 발생되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무엇’을 밝 혀내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으려면 그 ‘무엇’에 대한 대처방안이 나와야 한다. 그 ‘무엇’이란 바로 ‘고용이데올로기’ 이다. 3장은 고용이데올로기로부터 출발하지만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그런 결과가 ‘연구’만 으로 온전한 결실을 맺을 수도 없는 일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결실이 자본의 공격에 맞서거나, 혹은 그 공격을 비껴가고 있는 현장 속에서 맺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결실을 맺기 위해 지나 간 흔적을 더듬거리며 찾고, 확인하고, 드러내는 것이 본 연구의 1차 목적이다. 149
  • 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1.1.4. 고용이데올로기와 활동가 이번 연구의 큰 줄기는 노동강도 강화 원인을 밝히고 노동강도를 평가하며, 그 대안을 찾는 것이다. 여기에는 현장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과 고려가 필요하다. 이 장에서는 현장의 이데올로기 지형과 이를 만들어내는 주요 주체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 중에서도 노동자의 대항 이데올로기를 생산하 는 이데올로그이자, 자본의 논리에 저항하는 하나의 집단으로서 ‘활동가’에 주목하고자 한다. 98년 정 리해고 반대투쟁 이후 현장도 변하고 조합원들도 변했다는데, 과연 활동가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여 전히 저항의 1차 기지로서의 현장의 구심력을 확보하고 있는가? 아니면 대다수의 조합원들이 눈살 찌 푸리는 모습으로 단결을 방해하는 원심력이 되고 있는가? 이런 점들이 우리의 주된 문제의식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고용이데올로기’, 즉 ‘고용불안(감)’ 증폭에 대한 현장의 대응을 분석하는 일이다. 그 분석을 위하여 활동가들이 구조조정에 대한 일상의 대응에서 원칙을 지키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 한 원칙을 가지고 조합원들과 끊임없이 만나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 보고서에서는 활동가들의 유입 경로나 생애 분석 등을 대폭 줄이고, 98년 이후 현장의 변 화, 활동가들의 변화, 사측의 경영전략의 변화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보고서가 현대자동차 활동가들의 의식 상태,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 방향, 방법, 활동 전반에 대한 인식 등을 활동가들 안에서 함께 나누고, 현장 활동 활성화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바람으로 조사한 내용을 최대한 가감 없이 싣고자 하였다. 1.2. 조사 연구 방법 1.2.1. 활동가 심층 면접 조사 대의원, 소위원, 여러 현장조직 구성원, 98년 투쟁을 경험한 활동가, 2002년 이후 입사자 중 활동가, 현 집행부 등으로 구분하여 면접 대상을 선정하였다. 면접 내용은 △98년 투쟁 평가, △98년의 개인 적 경험, △98년 이후 각 주체들의 변화 양상, △구조조정 대응에 대한 원칙・사례・평가, △활동가 조직에 대한 판단, △활동가들의 변화 양상, △신・구세대에 대한 판단 등 총 7가지 주제로 구성하였 다. 연구원과 면접 참여자가 1대 1로 이야기하는 면접 방식으로 진행하였으며, 면접 참여자는 총 46 명이었다. 150
  • 6.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1.2.2. 대의원・소위원 설문 조사 대・소위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하여 총 461부를 수거하였다. 설문 조사는 앞에 언급한 활 동가 면접 내용을 바탕으로 하되, 보다 많은 수를 포괄하여 활동가 그룹 일반의 경향을 파악하기 위 한 것이었다. 설문 내용은 면접 조사와 동일한 주제로 구성하되, 면접 결과에 따라 답변 항목들을 조 정하여 재구성하였다. 1.2.3. 조합원 면접 노동강도 평가 조합원 면접에 98년 정리해고 투쟁에 대한 개인적 경험과 평가, 98년 이후 고용불안감 을 느끼는 주・객관적 요소, 활동가들에 대한 인식 등을 포함하였다. 1.2.4. 문헌 조사 98년 당시 쟁의대책위원회 유인물을 비롯하여 98년 이후 노조 소식지와 활동 보고서를 토대로 노동 조합의 대응 흐름을 정리하면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운동에 관한 여러 논문들을 참고하였다. 활동 보 고서 등 노동조합에서 만들어낸 자료들은 실제로 진행된 노동조합의 사업과 사건, 소식들을 파악하고 일관된 흐름으로 존재하는 주제들을 설정하기 위함이었으며, 외부에서 작성된 논문들의 경우 본 보고 서에는 직접 인용되지는 않았으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운동을 이해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하였다. 151
  • 7.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2.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교훈 2.1. 왜 다시 98년 투쟁을 들추는가? 어떤 ‘사건’은 그 사건이 벌어진 공간과 시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 사건은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 어 반복 재생되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굴절되기도 하고 축소・확대되기도 한다. 규모가 큰 사건은 그 사건에 직접 연루된 사람들 뿐 아니라 목격자, 주변부, 혹은 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후세대 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97년 IMF 외환위기 국면을 기억한다. 갑자기 모든 경제 활동이 중단되었고, 잘 돌아가기만 하던 경제 시스템은 곧 붕괴될 위기에 처한 ‘문제덩어리’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의 모든 삶들이 수술 대 위에 올려졌고, 미국과 IMF는 이 사회의 경제 상태가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회생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내렸다. 정말 현실은 그런 것 같았다. 언론은 연일 금융 위기와 재벌 경영의 문제를 이구동성으로 쏟아냈고, 하루가 지날 때마다 픽픽 쓰러지는 지역 공단의 중소 사업장들, ‘가격파괴’라 는 신조어까지 등장해 쏟아지는 거리의 할인 물결들, 갑자기 생겨난 듯 역 대합실을 배회하는 노숙자 들1). 또한 우리는 96~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을 기억한다. 96월 12월 24일 새벽 6시, 노동법 개악 안이 통과되었음을 알리며 ‘탕 탕 탕’ 울려 퍼진 의사봉 소리와 함께 우리들의 투쟁도 전국 각 거리에 서 전개되었다. 아침에 모여 거리를 점거하고, 최루탄의 매캐한 냄새를 맡으며, 그 최루탄 파편을 맞 으며, 수십 일을 그렇게 거리에서 보냈다. 그 연장선에 현대자동차 98년 정리해고 반대 투쟁이 있었다. 정권과 자본의 입장에서는 정리해고 법 제화 이후 정리해고를 공식적으로 관철시킬 필요가 있었고, 노동의 입장에서는 정리해고의 도입을 실 제 현실에서 막아내느냐 마느냐의 투쟁이었다. 합의와 양보의 여지를 가늠하기 이전에 피차 지느냐, 이기느냐 둘 중 하나인 싸움이었다. 2005년 현재, 현대자동차 현장에서는 98년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 서로 다른 조건과 상황, 위 치, 98년 투쟁에 대한 인식의 차이 등을 생각한다면, 서로 다른 기억 그 자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직까지 집단적으로 98년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 나 그 다양한 기억들 한 구석에는 숨겨진, 혹은 이미 잊혀진 98년의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그것은 36 일간 진행된, 대중들이 직접 참여하고 겪었던 투쟁의 기억이다. 1) ‘심각한 문제는 구직을 할 수 없다는 참담함이다. 건설 일용공 노동자들의 61%가 자살을 고민해 보았다는 비극적 설문조사, 생활 고로 인한 자살자의 속출과 가장의 실업으로 인한 이혼율 급증, 가장의 가출과 가정 파탄으로 인하여 버려지는 아이들, 아버지의 실업으로 점심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과 학비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의 급증’ - 노동전선 36호, 1998. 6. 152
  • 8.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그런데 활동가나 조합원 대부분에게 98년에 대한 가장 강한 기억은 그 치열한 ‘투쟁’이 아니라 ‘결과’ 이다. 당시 집행부의 마지막 협상 보고가 그들에게 남겨진 가장 강렬한 기억이다. 이런 식으로 결과로 만 기억되는 순간, 투쟁은 사라진다. 그 혹독했던 시기에 36일 간의 전면 파업으로 맞섰던 그 선도성 과 전투성도 사라진다. 자기 손가락의 금반지도 모자라 갓난 애기의 돌 반지마저 앞다투어 내놓던 그 혼돈의 시기에 정확히 자본을 향해 공격을 감행했던 그 선명함도 없어진다. 무엇보다 그 투쟁을 만들 었던 노동자 대중이 잊혀진다. 잊혀진 또 하나의 기억은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투쟁이다. 그들의 투쟁은 36일 간의 파업이 끝난 뒤 에도 계속 이어졌다. 노동조합의 공식적인 파업이 끝나고, 활동가들을 포함한 무급휴직자와 정리해고 자들이 현장을 떠나고, 어제의 투사였던 이들이 오늘의 생산 일꾼으로 숨막히는 노동 통제와 노동강 도를 감내하고 있었던 그때, 그들은 투쟁을 지속했고, 또 투쟁으로 정리해고를 철회시켜냈다. 그러므 로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은 36일 간의 파업이라는 1부 투쟁 뿐 아니라, 1부가 끝난 후에도 이어졌던 2부 투쟁, 바로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투쟁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적인 36일 간의 대중 투쟁이 말끔히 잊혀졌다는 것은 좀 과도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현장에 남아있는 기억에는 “98년 때도 그렇게 싸웠는데 졌다, 그런데 지금 뭘⋯.”이라며 말끝을 흐리는 한 면 접자의 말처럼 패배적인 정서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지도부의 직권조인으로 모든 투쟁의 의미를 패배 로만 남길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라도 98년의 기억 중에서 직권조인이라는 결과 속에 잊혀진 대중 행동과 투쟁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복원되어야 한다. 물론 이 보고서 역시 98년 투쟁을 제대로 복원해 내기에는 충분치 않다. 현장 활동가 46명과 조합원 100여 명이 참여한 면접 조사 결과의 양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 주체들의 내밀한 기억, 감추고 싶 은 기억, 아직 다 풀리지 못한 논쟁 지점들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연구팀의 미흡함 때문이다. 그리 고 이 보고서의 주 목적이 현대자동차의 ‘현실’에 대한 분석이므로, 그나마 수집한 면접 내용조차 충 분하게 담지 못한 점도 있다2). 2.2.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 경과3) 2.2.1. 첫 번째 양보 - 희망퇴직 합의 이른바 ‘IMF 국면’에 접어든 1997년 11월 이후 현대자동차 자본은 ‘1998년 인력관리 운영계획’을 통 해 1998년 한 해에만 총 3천명의 여유 인원을 정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자본은 1997년 말부터 하 청 노동자 1천 8백여 명을 쫓아내더니, 1998년 들어와 회사 임원과 과장급 이상 관리자들에 대한 명 2) 가령 이 보고서에는 98년 정리해고 반대 투쟁의 또 다른 주체였던 가족대책위원회의 기록은 담지 못하였다. 또한 98년 투쟁 이후 식당 여성 조합원들과 함께 <미완의 장기전>을 치룬 주체였던 징계・정리해고자들(생대위, 해복투)의 투쟁 역시 담지 못하였다. 이들은 상당 기간 식당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출근투쟁, 텐트농성 투쟁을 함께 벌여냈으며, 해고자들이 먼저 복직되었고, 이후 2000년 임단협 이후 식당 여성 노동자들이 복직되었다. 3) 이종호,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파업투쟁’(진보평론 3호)을 바탕으로 구성함. 153
  • 9.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예퇴직을 실시하여 8백 명 이상을 ‘정리’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1998년 1월 13일 임시 대의원대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쟁의 행위를 결의하고 ‘단협 사수, 고용 안정, 민중생존권 사수를 위한 중앙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1월 15일 조합원 찬반투표를 실시하여 83.8%의 찬성으로 쟁의행위를 결의했다.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한 민주노총은 1998년 2월 6일 새벽, 2년간 유예되었던 정리해고제를 조기에 받 아들이는 노사정 합의안에 동의하고 말았다. 그러나 2월 9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는 ‘직권조인’된 노사정 합의안을 부결시키고 상근 임원 전체의 퇴진과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 구성을 결의하였 다. 다음날 비대위에서는 2월 13∼14일의 총파업 투쟁을 결정했다. 그런데 비대위는 2월 12일 8시간 의 회의 끝에 다시 총파업을 철회해버렸다. 바로 이날 대우조선 최대림 조합원은 정리해고 반대 총파 업투쟁에 전 조합원이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며 분신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철회로 전국 투쟁전선이 무너지고 2월 14일 임시국회에서 유예 조항이 삭제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가 통과됨으로써 이제 자본의 정리해고 공세는 거칠 것이 없어졌다. 전 공장에 걸쳐 잔업이 축소되고 일방적 배치전환 과 집단 순환 휴가가 실시되었다4). 4월 8일 현대자동차에서는 노동조합 주최로 현장조직들이 참여한 2차 현장토론회가 개최되었다. 현대 자동차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민투위), 실천하는노동자회(실노회), 현대자동차노동자신문(현노신), 한 빛노동자회(한빛) 등 현장조직들은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개선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부터 “현실 적 양보교섭”에 이르는 다양한 견해를 제출했다5). 4월 17일 노동조합 중앙비대위는 기자회견을 통해 “주당 38시간으로 근무시간 단축, 주간 연속 2교대제로 근무형태 변경, 배치 전환을 통한 일자리 나 누기”를 제안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자본은 노동조합의 제안을 무시하고 4월 17일부터 1주일 동안 일방적으로 1차 희망퇴직 모집에 들어갔다6). 5월 1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열린 제108주년 세계 노동절 기념 집회에서 이갑용 민주노총 2기 지도부 는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 철폐 및 부당 노동행위 근절, 고용안정과 생존권 보장, 고용・실업 대 책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정경유착 근절과 재벌해체・노동3권 보장・노동자 경영참가, IMF 재협 상’ 등 5대 요구를 중심으로 5월 말・6월 초의 총력투쟁을 선포했다. 이날 행진 과정에서 격렬한 거 리투쟁이 벌어졌다. 한편 현대자동차 공장에서는 5월 14일부터 1주일 동안 2차 희망퇴직이 실시되었고 1,500여명이 회사 를 떠났다. 자본은 5월 20일 ‘경영위기 극복 및 여유인원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 수정안’을 노사협의회 안건으로 제시하면서 2천 2백억 원 가량의 임금 삭감과 8,189명에 대한 2년간의 무급휴직・정리해고 를 기정사실화하여 노동조합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나갔다. 이 날 노동조합 집행부와 대의원들은 본 관 건물 로비에서 강제 희망퇴직 중단을 요구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이 자리에서 강제 희망퇴직 당한 52세의 한 여성 조합원은 “나 혼자서 4명 가족 먹여 살리는데 퇴직금 2천만 원으로 어떻게 살아가 4) 노동조합은 2월 19일 '중앙비대위'를 '고용안정대책위'로 전환하고, 3월 23일 노사실무협의에서 집단 휴가시 통상임금 70% 지급과 '고용안정 노사공동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합의로 노조 스스로 단체협약을 위반하게 되었다. 당시 캐피코 노조나 현 대정공 노조에서는 집단 휴가 시 단협에 의거 통상임금 100%씩을 쟁취하고 있었다. 현대자동차의 이 합의는 이후 다른 사업장에 서의 집단 휴가 때 많은 영향을 미쳤다. 5) 현장조직 민투위는 5월 들어 '주 35시간 이하로 노동시간 단축, 1일 7시간 주간 연속 2교대로 근무형태 개선, 노동시간 단축에 따 른 통상임금 100% 보전과 생계비 부족분에 대한 고정 OT 확보, UPH down을 통한 적정 노동강도 유지와 생산량 조절'이라는 정 책 대안을 정리하여 소책자로 제작·배포하고 조합원 중식 홍보투쟁 등을 벌여나갔다. 6) 통상급 4∼6개월치가 위로금으로 주어졌고 2,000명 가깝게 퇴직했다. 자본은 4월 23일 23%의 임금 삭감과 15,000여명에 대한 인원 정리를 의제로 하는 임시노사협의회를 4월 30일 개최하자고 요구하면서 정리해고 문제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왔다. 154
  • 10.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나?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차라리 회사에서 죽고 말겠다!”라며 대성통곡하였다. 5월 25일 조합 원 총회에서는 89.4%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총파업투쟁을 결의했다. 5월 27・28일 민주노총이 1차 총파업에 들어갔고, 이틀 동안 49개 노조 7만 7천여 명이 총파업에 참여했다. 5월 29일 기아자동차의 송인도 조합원이 분신했다.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은 6월 1일 '체불임금 지급과 고용안정 보장'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6월 5일 민주노총이 6・10 2차 총파업을 철회하 고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의 투쟁은 전국 총파업으로 발전하 지 못하고 고립된 채 패배하고 말았다. 민주노총의 2차 총파업 철회로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 또한 현대자동차만의 투쟁으로 고립되었다. 6월 24일 ‘임금 및 고용조정 대책위’ 본교섭에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집행부는 3차 희망퇴직에 합의 했다7). ‘노사합의’된 3차 희망퇴직으로 2천여 명이 다시 회사를 떠났다. 조합원들은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희망퇴직을 진행하는 동안 정리해고를 추진하지 않는다.”는 노사 합의사항을 “6월 30일 이 후에는 정리해고를 하겠다.”는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였다8). 2.2.2. 두 번째 양보 - 임금 삭감안 제출 6월 30일 오전, 현대자동차 자본은 4,830명의 조합원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노동부에 신고하여 접수를 마쳤다. 신고서에는 “임금을 22% 삭감하지 않으면 6,842명을 추가로 잘라야 한다.”라는 내용이 첨가 되어 있었다. 노동조합은 7월 4일까지 정리해고를 철회하라며 6월 30일 26시간 1차 경고 파업에 들 어갔고, 다시 7월 6일 48시간 2차 경고 파업을 벌였다. 7월 10・11・13일 자본은 부분적으로 정리해 고 대상자 명단을 기습 발표하고 7월 13일부터 4차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7월 14일 금속산업연맹을 시작으로 15・16일 총 68개 노조 15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총파업이 벌 어졌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비대위도 무기한 전면 파업을 선언하고 이틀 동안 파업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7월 15일 밤 중앙 비대위는 전면 파업을 유보하고 16일 오전 10시부터 정상조업에 임하기로 결정했다. 또 만장일치로 고용조정 및 임금 관련 교섭 폭에 대한 권한을 위원장에게 위임하였다. 노조 위원장은 이 날 민투위를 탈퇴했다9). 7월 16일,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눈물까지 흘려가며 대폭 적인 양보안을 내놓았다. △97년 성과금 150% 미지급분, 휴가비, 선물비, 고정 O/T수당, 직책수당 등 을 포함하여 1년간 약 2,500억원 규모 지급을 중단토록 하는 고통 분담 안 제출 △정리해고 규모인 4,380명 중 4차 희망퇴직자 500명을 제외한 4,300명 중에서 하도급 전환 대상으로 포함된(식당, 출 7) 합의 내용은 “희망퇴직을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실시하되 희망퇴직을 진행하는 동안은 정리해고를 추진하지 않고, 위로금은 (근 속) 10년 이상 12개월, 5∼10년 11개월, 5년 미만 10개월치 지급” 등이었다. 8) 당시 집행부의 희망퇴직 합의에 대해서 민투위는 "노조에서는 희망퇴직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정리해고 철회를 전제로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변동 등을 회사가 받아들일 때 협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아무 것도 쟁취하지 못 한 상태에서 희망퇴직을 합의한 것은 조합원들을 기만한 행동이다. 이는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한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희 망퇴직은 위장된 정리해고이며, 임금 삭감 또한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민투위 대자보 ‘희망퇴직 합의는 잘못되었다’, 1998.6.25) 9) “공인으로서 더욱더 조합원의 생존권 사수와 고용안정 쟁취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져 조직을 탈퇴하여, 공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삼만이천 조합원을 책임지려” 한다는 것이 당시 민투위 의장에게 제출한 탈퇴서의 내용이었다. 155
  • 11.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고, 시설 등) 938명은 직영으로 고용을 유지하고 △1,800명에 대해서는 근로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 기로 일자리를 유지하고 △나머지 1,500명에 대해서는 순환휴가제를 도입하여 6개월의 휴가를 실시 하며, 휴가시 임금은 회사 측이 통상금의 50%를 지급하고 노동조합은 기금을 조성하여 30%를 지원 한다는 안이 ‘마지막 협상에 임하는 노조 입장’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자본은 노동조합의 양보에도 아랑곳없이 7월 17일부터 정리해고자 명단을 개별 통보하기 시작했다. 7월 20일 노사협상은 1시간 만에 결렬되고 노동조합은 무기한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1만 조합원이 참가한 결사항전 결의대회에서 위원장이 삭발과 무기한 철야농성 투쟁을 시작하고, 세 전직 위원장들 이 45m 굴뚝농성에 들어갔다. 조합원 5천여 명은 노동조합과 공장 출입문을 중심으로 천막농성에 들 어갔다. 가족들도 가족대책위를 구성하여 정문 앞에 천막을 치고 23일부터 밤샘농성을 함께 벌였다. 자본은 7월 20일부터 임시 휴업에 들어갔고 7월 23일부터 마지막 5차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4・5차 희망퇴직으로 3천 명 가까이 회사를 떠났다. 이로써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난 조합원은 8천 명이 훨 씬 넘었다. 7월 22일에는 금속산업연맹 15개 노조 6만 8천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7월 23일 민주노총 산별 대표자 회의는 총파업 방침을 철회하고 말았다. 이후 전국 공동투쟁 전선은 급속히 와해되었 다10). 7월 31일 국민회의 노무현 부총재와 노사가 참여한 노사정 간담회가 열렸지만 자본은 오히려 1,538 명에 대해 최종 정리해고 통보를 하였다. 정리해고 대상에는 노조 상무집행위원 15명과 현직 대의원 89명 등 총 115명의 노동조합 간부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민투위 120여 명, 실노회 70여 명 등 현장 활동가 대다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8월 1일부터 9일까지 휴가 기간 동안 3천여 조합원들은 휴가를 반납하고 농성투쟁을 계속 벌여나갔 다. 노동조합은 휴가 기간 동안 어린이 여름학교, 노동영화제, 특별 강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 해 가족들의 참여를 이끌었고, 매일 저녁 집회를 통해 투쟁 결의를 다져나갔다. 8월 5일 집행부는 8월 6일 김대중 대통령의 울산 방문 소식에 맞춰 또다시 추가 양보안을 제시했다. △사회적 상식 수준의 추가적 임금 삭감, △노동조합 임원에 대한 상징적 정리해고 수용, △노사 평화 선언 및 2000년까지 정리해고를 유보하는 고용안정 협정서 체결 등 이었다11). 10) 7월 24일 부산지방경찰청은 울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노동조합 상급단체 상근자들과 노동사회단체 활동가들 16명을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몰아 구속시켰다. 25일 현장조직 의장단에 대한 체포영장도 발부되었다. 11) 민투위는 집행부의 추가 양보에 대해 “첫째,… 만약 양보안처럼 2000년까지 정리해고 유보라면 이는 투쟁의 목표와 20여일 동안 강고한 투쟁을 전개해온 모든 노력과 성과가 물거품이 되는 것이며, 7월 31일 정리해고된 1,538명은 시한부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정리해고를 인정하는 것이며 2, 3차의 정리해고로 이어질 것이다. 둘째, 상식이 통하는 임금 삭감이라 하는데 이미 월 평균 임금 삭감액이 45만원을 육박하고 있는데 추가적인 임금 삭감을 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조합원의 동의 없는 추가 임금 삭감은 백지화되어야 한다. 셋째, 무쟁의 선언은 줄 것을 다 주고 현장을 사측에게 넘겨준다는 항복인 것이다… 향후 진행될 전환 배치, 라인 통합, 라인 축소, 하청 이관, 그리고 모답스 도입에 따른 여유인원 발생 등 사측의 의도가 분명함에 도 무쟁의 선언을 한다면 또 다시 현대자동차는 고용 불안에 직면하고 더 큰 희생과 양보만이 남을 뿐”이라고 비판했 다.(1998.8.9. '민투위 통신') 156
  • 12.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2.2.3. 공장 점거 천막농성 파업과 김광식 집행부의 정리해고 수용 휴가 마지막 날인 8월 9일 저녁, 1만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집회가 있었다. 이 집회의 ‘감동’을 한 조합원은 이렇게 전했다. 집회를 한참 하고 있는데 폭우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졌습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의 이탈자도 없이 ‘정리해고 철회’를 외쳤을 땐 정말 가슴이 찡했습니다. 사측도 이 광경을 보고 ‘모두들 미쳤다’라며 두 손 두 발 다 들 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정리해고를 철회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이 때 가졌습니다. 이 날 집회에 참 여한 조합원들 대부분은 속으로 많이 울었을 겁니다. (‘인터뷰, 현대자동차 윤실근’, 노동전선 1998.10) 휴가 이후 첫 출근인 8월 10일 자본은 협상을 제의해왔다. △정리해고 대상자 1,538명 중 60%는 3 년간 무급휴직, △40%는 정리해고, △정리해고 대상자 중 식당 종사자 167명에 대해서는 고용 승계 를 전제로 외주・하청화 하고 나머지 인원은 희망퇴직을 모집해서 정리해고 최소화, △희망퇴직 조건 은 5차 때와 같고(10∼12개월분 위로금), 노조의 2천 5백억 원 임금 삭감안은 수용한다는 것이 자본 의 최종 안이었다. 노동조합은 순환휴가와 정리해고 철회를 주장했지만 협상은 결렬되었다. 8월 13일 위원장은 노조 사무실 옥상 위에 지어놓은 10m 철탑 위로 올라가 농성투쟁에 들어갔다. 농 성 대오는 휴가 이후 4∼5천명으로 불어났고 매일 저녁 집회에는 1만 명 이상의 조합원과 가족들이 결합하면서 열기는 더욱 높아져갔다. 정문 앞 육교와 건물 등에는 지역 주민들이 가득 모여들어 집회 를 지켜보면서 호응을 보내왔다. 자본은 공장을 가동시킨다며 정몽구 회장을 앞세워 현장에 들어와 사수대와 대치하는 모습을 언론에 흘리면서 공권력 투입에 대한 명분을 쌓아가는 한편, 용역 깡패 수 백 명을 사택과 경주 등지에 대기시켜놓는 등 공권력 투입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8월 14일 대검찰청의 공권력 투입 발표가 있었고 15일 범민족대회 때문에 빠져나갔던 병력이 돌아오 면서 100여개 중대 1만 2천여 명의 경찰 병력이 현대자동차 주변에 배치되었다. 16일 안영수 노동부 차관이, 17일 이기호 노동부 장관이 내려와 중재를 시도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17일 자본은 관리 자와 하청업체 직원들 1만여 명을 동원하여 정상 조업 촉구 결의대회를 가졌으며, 농성에 참가하지 않는 조합원들에게 일당을 줘가면서 울산 인근으로 놀러 다니게 하는 등 투쟁 대오를 고립시키려 혈 안이 되었다.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다는 긴장감이 가장 높았던 이 날 저녁 집회에는 그동안 집회 중 에서 가장 많은 수인 2만여 명의 조합원이 가족들과 함께 참여하여 공권력에 맞서 끝까지 투쟁할 것 을 결의했다. 노동조합은 전 공장에 흩어져 있던 농성 천막들을 승용1공장 중심으로 재배치하고 곳곳 에 바리케이트를 쌓아 공권력 투입에 대비했다. 18일 새벽, 페퍼포그와 포크레인을 동원한 진압 병력이 정문 앞에 집결하자 순식간에 승용1공장 조합 원을 중심으로 1천여 명이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구호를 외치며 즉각 대치에 들어갔다. 이렇듯 강력한 저지로 경찰 병력은 금방 물러갔지만 상황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 날 밤 노무현 부총재를 중 심으로 한 국민회의 중재단이 급파되었다. 8월 20일 정부 중재안이 나왔다. △정리해고 대상자 1,538명중 식당 여성 조합원을 포함하여 250∼ 300명으로 최소화, △1,200여명 무급휴직・순환휴가, △고용안정기금 설치・운영, △민・형사상 고소 157
  • 13.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고발과 손해배상, 재산가압류 취하, 징계 철회, △노사평화선언 등이 골자였다. 8월 21일 저녁 협상보고대회에서 위원장은 정부 중재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식당 조 합원 정리해고 위로금 2,000∼2,500만원을 요구하고 있다. 식당을 소비조합 형태로 노조에서 운영하 겠다. 고소고발, 손해배상 등 풀어야 할 과제들이 만만하지 않다. 내일 17시까지 중재안을 받지 않으 면 노조에서 제시한 모든 안을 철회하겠다.”라고 밝혔다. 집회 중간 중간 야유와 함성 소리 때문에 위 원장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고, 무대 뒷편에서는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집회 가 끝난 직후 식당 여성 대의원이 마이크를 잡고 그날 오전 “식당 조합원들이 정리해고를 수용하라.” 는 위원장과의 간담회 내용을 폭로했다. 이어 민투위 의장은 “국민회의 중재단은 바로 이것을 노렸다. 우리들이 분열하는 것을 노린 것이다. 힘을 한 곳으로 모을 때다. 노동조합이 정리해고를 철회시키지 못한다면 현장의 활동가들이 모여서 정리해고를 철회시키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선대에서도 마 이크를 잡고 “우리 투쟁의 목표는 정리해고 철회이다. 정리해고가 철회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자!”라 고 선동했다. 집회 뒤 가족대책위를 중심으로 노동조합 앞에서 항의 집회가 열렸다. 사수대를 비롯하여 1천여 조합 원이 노동조합 앞으로 몰려들었다. 분노한 조합원들의 즉석 발언이 이어졌다. “공권력이 무서웠으면 벌써 투쟁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우리는 공권력에 맞서 싸워 이길 자신이 있다!”, “위원장이 투쟁할 자신이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양보안과 중재안을 철회하라! 만약 그럴 자신이 없으면 노동조 합 위에 매달아 놓은 관을 불태워 버려라!”, “지금 이렇게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과 회사가 시켜서 일 당받고 놀러 다니는 사람들과 같은 투표권을 줘서 투표로 심판받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협상 때 회사는 당당한데 위원장은 왜 그렇게 힘이 없느냐? 힘내라. 표정 관리 해라!” 조합원들이 위원장의 입 장을 다시 요구하자 위원장은 “조합원들의 뜻을 충분히 알겠다.”고만 밝히고 끝까지 명확한 입장을 정 리하지 않았다12). 8월 22일 가족대책위, 식당 여성 조합원, 사수대, 민투위 등은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던 본관 앞에서 항의집회를 가졌다. 항의집회 대오는 저녁이 되어 5백여 명으로까지 불어나기도 했다. 저녁 집회에는 농성투쟁 이후 가장 적은 3천여 명이 참여했고, 위원장은 “앞으로 협상에 목매달지 않겠다. 지금까지 노조에서 밝혔던 임금삭감안을 철회한다. 더 이상 비굴하게 머리 숙여 협상에 임하는 일은 없을 것이 다. 다시 힘있는 투쟁을 조직하자.”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계속 타결이 임박했다는 보 도가 나오고 있었다. 8월 23일 오후 2시 태화강 둔치에서 민주노총 주최 ‘정리해고 저지와 민주노조 사수 전국 노동자대 회’가 열렸고 집회 참가자 3천여 명은 현대자동차까지 거리 행진을 벌였다. 이 날 권영길 민주노총 전 위원장은 “현대자동차 협상이 만약 불만족스러운 내용으로 타결되더라도 인정해 주자.”라고 얘기하여 집회 참가자들을 당혹스럽게 하였다. 이틀째 문선대가 문화선동 활동을 거부한 가운데 열린 이 날 저 녁 집회에서 위원장은 “언론에 현혹되지 말라. 조합원이 수용할 수 있는 안이 나오면 도장을 찍기 전 에 조합원들에게 먼저 의견을 묻겠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8월 24일 새벽 2시 30분 노사합의 소식이 TV 자막을 통해 발표되었고, 오전 6시 노사는 잠정합의 기자회견문을 발표했다. ‘277명 정리 해고, 나머지 1,261여명 1년 6개월 무급휴직, 정상조업을 위한 노력이 있을 때 재산 가압류와 고소고 12) 중재안 합의에 대해 민투위는 긴급 운영위원회를 열어 △기만적 중재안 반대, △전직 위원장들의 입장을 서면으로 받는다, △현 장조직들간의 입장을 통일해 유인물을 만든다는 입장을 결정했다. 그러나 실노회가 조직원 총회에서 자기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 면서 현장조직들 간의 입장을 통일시킬 수 없었고, 전직 위원장들의 입장 또한 현장조직들의 입장 정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 으면서 정리되지 않아 윤성근 전 위원장 혼자만 "정리해고는 저지해야 하며 무급휴직도 수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서신을 작성하 여 민투위 유인물에 실었을 뿐이었다. 158
  • 14.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발 등에 대한 부분 철회, 노사화합 및 무분규 선언’ 등이 주요 합의 내용이었다. 아침 뉴스를 통해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지자 조합원들은 망연자실하였다.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농성 장을 빠져나갔고, 몇몇 분노한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앞으로 몰려가 노동조합 유리창과 집기들을 부수 고, 사수대 옷을 벗어 불태우고, 관을 끌어내려 불태웠다. 오후 들어 농성 조합원들 거의 모두가 빠져 나갔고 바리케이트가 철거되었다. 2.2.4. 잠정합의안 부결 이른바 노사정이 합의한 8・24 잠정합의안은 9월 1일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63.6%의 반대로 부결되 었다. 그러나 이후 제대로 된 재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합의 내용은 오히려 더욱 개악되어 관철되 었다. 결국 98년 현대자동차에서는 하청 노동자 1천 8백여 명, 과장급 이상 관리자 8백여 명, 다섯 차례의 희망퇴직 8천여 명, 정리해고 277명, 무급휴직 1,261명 등 모두 1만 2천여 명이 이른바 ‘고용조정’되 었다. 현대자동차의 정리해고 수용으로 8월 17일부터 시작한 만도기계 노동조합의 전면 파업 투쟁은 전국 전선의 엄호를 받지 못한 채 무자비한 공권력 침탈로 격파당하고 말았다. 98년 12월 22일 7대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투표가 진행되었고, 62.2%가 불신임에 찬성함으로써 7대 집행부는 간신히 불신임을 모면했다. 99년 7대 집행부가 사퇴하고 난 뒤 노동조합 임원선거 2차 투표 에서 정갑득 후보 진영이 8대 집행부로 당선되어 간신히 노동조합이 정상화되었다. 99년 12월 27일 부로 무급휴직자 전원이 복직되었다. 2.3.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기억과 영향 2.3.1. ‘자발적 선택’이었던 희망퇴직이 남긴 공포 98년에는 일방적인 정리해고에 앞서 이른바 ‘자발적 선택’이었던 희망퇴직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 4월 17일부터 1주일 동안 일방적인 1차 희망퇴직을 모집하였다. 통상급 4∼6개월치의 위로금을 받고 2 천여 명이 퇴직했다. 159
  • 1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 5월 14일부터 1주일 동안 2차 희망퇴직. 1천 5백여 명이 회사를 떠났다. ⋅ 6월 24일 ‘임금 및 고용조정 대책위’ 본교섭에서 집행부가 3차 희망퇴직에 합의하였다. ‘노사합의’된 3차 희망퇴직으로 2천여 명이 다시 회사를 떠났다. ⋅ 7월 10, 11, 13일 자본은 부분적으로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을 기습 발표하고, 7월 13일부터 15일까지 4 차 희망퇴직을 실시하였다. ⋅ 7월 20일부터 임시 휴업 돌입 후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마지막 5차 희망퇴직을 실시하였다. 4차, 5차 희망퇴직으로 3천여 명이 회사를 떠났다. ⋅ 이로써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난 조합원은 8천 명을 훨씬 넘었다. 이와 같이 현대자동차의 희망퇴직은 4개월여에 걸쳐 진행되었다. 당시 거의 대부분의 노동조합이 그 랬듯이 현대자동차 노동조합도 정리해고의 사전 예고판이었던 ‘희망’ 퇴직을 막아내지 못했다. 4개월 간 진행된 희망퇴직 기간 동안 노동조합이 잃은 것은 8천여 조합원만도, 노동조합에 대한 조합원들의 신뢰만도 아니었다. 8천여 조합원을 잃어가는 동안 마땅히 해야 할 투쟁의 접점을 만들지 못함으로써 흩어진 조합원들은 개별화되었고, 개별화된 조합원들과 집행부의 관계는 모호해졌다. 남은 조합원들은 생존을 위해 일대 일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일자리를 놓고 어제의 ‘형님’과 ‘동료’는 모두 경쟁 상 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4개월 간의 ‘희망’ 퇴직 경험은 살아남은 자에게 생존에 대한 공포 그 자체가 되었다. 힘들었지요. 그때가 할 일이 없으니까… 앉아서 대기하고, 교육받고, 그러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현장 노 동자들은 단합이 잘되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해야 하는데, 옆에 있는 동료가 아니면 내가 나가야 하는데 허심탄회하게 말을 못한다. 동료애도 많이 없어지고 그렇더라. 회사 와서 힘들고 집에 가서 힘들고. 나는 괜 찮겠지 하고 생각하는데 옆에 동료가 노란 봉투 타고 나갈 때 ‘그 사람 뭐먹고 사나’ 걱정은 하는데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생각을… 그런 시대는 정말 안왔으면… 오래된 사람은 시급이 많아서 먼저 짤리지 않 겠는가 걱정하고, 신입사원은 입사 역순으로 짜른다고 걱정하고. 젊은 사람들은 속으로 ‘나이도 들고 벌어 놨으니까 나가지’라고 생각하고, 나이든 사람들은 속으로 ‘젊은 너희들은 나가면 일자리 있지 않냐’ 하고… 겉으로는 서로 웃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고. (면접자 a, 조합원) 신입은 신입대로, 고참은 고참대로 ‘겉으로는 서로 웃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고’ 서로 누가 먼저 짤 릴 것인가에만 온통 관심이 쏠리게 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조업이 단축되는 그 순간부터 현장에 많은 유언비어가 난무했습니다. 짜른다 하더라… 기준점이 어떻게 된 다더라… 슬슬 흘리니까 스스로 참다 참다, 동료들도 생각해보더니만 스스로 사표 쓰고 튀어 나가고, 면담 한번 하고 오더니만 조용히 사표 쓰는 사람. 그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한 번씩 관 리자들이 전화 와서 ‘니는 괜찮다’하면 집회 다 빠지고… 같이 근무하는 애도 간곡히 말려도 그만 뒀습니다. (면접자 b, 조합원) 160
  • 16.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집회는 집회대로 안되고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 앞가림’ 하기에 바빠졌다. 조합원 사이의 불신도 깊 어졌다. 회사의 편 가르기 수법이 먹혀 들어간 것도 그런 불안감들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조합원들 서로 간에 불신이 상당히 깊어 졌다는 거죠. 예를 들어 노란 봉투를 받았냐 안받았냐 차이. 회사가 편 가르기를 했잖아요. 이쪽은 집회하고 한쪽은 계곡으로 다니고, 심지어는 양쪽 다 다니기도 하고. 그런 과 정에서 아파트에 찾아가서 스프레이로 욕도 써놓고, 회사 쪽에 따라다닌 사람들도 자기가 그러고 싶어서 그 랬겠어요? 사회적 약자고 힘이 약하고, 보수적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저쪽에 휘말려가면 나도 정리해고 대상 이 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던 거고, 지도부가 거기에 대해서 확실한 신념을 갖도록 못하도록 한 책임이지 조합원 대중의 이탈을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상황이 크고 힘들었다 이거죠. 까놓고 보면 끝까지 모인 사람들 해봤자 몇 명 안 된다 이거죠. 전체 조합원이 3만이라면 3~4천이었죠. 나머지는 집에 서 문 잠가놓고 TV보고 있었겠죠. 이 사람은 노란 봉투를 주고 저 사람은 안주었잖아요. 안 받은 사람 입장 에서는 아이고 다행이다, 안도가 있었겠죠. 어쨌든 찍히고 싶지 않았겠죠. 그런 것들이 ‘니는 빠져나갔다’고 ‘니만 살려고 하냐’고 하고 막 공격하고 할 때, 좀 그랬어요. (면접자 ㄱ, 활동가) 회사는 해고 통보를 받은 이들이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며 정리해고의 정당성을 보 장받으려 했다. 이는 자본이 쓰는 편 가르기 수법의 전형이다. 그때 당시 나간 사람의 일하는 자세 등을 보면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 주로 나간 사람은 노동조합에 많이 관여된 사람도 많이 나갔지만, 그 라인에서 일하는데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갔다. 일이란 그 일 맡은 데서 최선을 다하고 성의 있게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을 하면서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나갔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나갔다. (면접자 c, 조합원) 자식에게 피해가 갈까봐 해고를 받아들이는 경우까지 있었다. 젊은 사람이 다녀야 한다고 울며 겨자 먹기로 ‘배려’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란 봉투’라고 회사의 압력으로 나간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제 부친도 그렇게 나갔는데, 당사자 입장에서 보니까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어른들 입장은 아닌가 봐요. 혹시나 자식한테 피해갈 까 싶어서 주위에서 눈총은 안줬겠나. 오죽하면 그렇게 나왔을까 싶더라고요. 아버지가 지금 장애인 됐어요. 술을 많이 드셔셔요… 회사 나오고 공공근로 하시다가 2~3년 후에 쓰러졌어요. 병원에 있다가 방법이 없더 라고요. 솔직히 그런 생각까지 했거든요. 너무 억울해서요. 한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 있구나 싶어서요. 당 시 그런 여건이 안됐는데 법적으로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집에 이야기 하니까, 저도 다치니 까 그냥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희망퇴직 말이 희망퇴직이지 희망퇴직이 아니지요. (면접자 ㄴ, 2000년 이후 입사자, 활동가) 제일 기억나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때 조장이었는데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 힘들어 하셨어요. 1,2 차 넘어가고 결국에는 ‘인원이 없어서 내가 나가야 하겠다’고 식구들을 앉혀놓고 말씀하실 때 전부 울었죠. 투쟁이나 이런 부분은 잘은 모르지만, 제가 조합 활동 하면서 그때 사진이나 슬라이드를 보면 그때 절실했 구나, 아버지 입장으로 봤을 때 힘드셨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면접자 ㄷ, 2000년 이후 입사자, 활동 161
  • 17.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가) 마음이 아팠던 것은 반의 아줌마가 희망퇴직을 했는데 조합원들이 반 회식에 참여를 시키느냐 마냐를 놓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걸 보고 하도 열이 받아서 (아줌마) 모시고 회식하고, 무급 받은 사람들까지 다 불 러라, 만약에 한번이라도 연락이 안 오면 가만 안 있겠다고 했죠. 그런데 아주머니가 오셔서 ‘젊은 사람들이 다녀야지, 내가 나가야지.’ 하시면서, 제일 서글픈 게 회사에 출근하려고 밥 먹고 세수하고 대문 나오다가 다시 들어가고, 회사 앞까지 왔다가 출입하려고 보니 출입증이 없는걸 보면서, ‘아 내가 회사 그만두었지’ 하면서 돌아가고 그러시더라. (면접자 ㄹ, 활동가) 노동자들의 이러한 순박하고 소박한 생각들과 행동들은 자본에게는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다. 정리해고를 자행한 자본의 ‘위기의식’ 또는 ‘경쟁력주의’는 노동자에게 곧바로 ‘삶의 위기’로 전가 된다. 노동자들의 개별적인 배려나 인간미조차 정리해고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자본의 운동 법칙이 다. 힘없이 ‘아 내가 회사를 그만두었지’ 하고 되뇌이며 돌아서는 노동자의 뒷모습을 서글퍼하는 것만 으로는 자본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 시기가 바로 희망퇴직 기간, 나아가 정리해고 반대 투쟁의 기간 이었다. 요컨대 98년은, 자본 운동의 위기가, 혹은 그런 위기를 빙자하여 더 많은 자본을 그러모으기 위한 자 본의 탐욕을 위하여, 자본가들(자본가 계급)이 노동자들(노동자계급)을 정리해고로 밀어내는 시기였 고, 노동자는 실업이나 비정규직이 되어 ‘삶의 위기’에 내몰리는 시기였다. 즉 자본가(계급)에게 다가 온 위기를 노동자(계급)에게 전가시키는 기간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정리해고 반대투쟁’은 그 자체가 양 계급간의 전면적인 계급투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시기에 노동자들의 소박한 양보심이나 배려는,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약한 고리에 불과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고용될 때 비로소 노동할 권리를 얻는다. 이 때문에 노동자 에게는 커다란 왜곡이 발생한다. 노동이 ‘고용노동’ 또는 ‘임금노동’이라는 형태로 왜곡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 운동의 위기’는 종종 고용을 매개로 하여 노동자들의 삶에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노동의 위기’를 불러온다.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은 이러한 노자간의 계급적 투쟁 관계가 집중적으로 드러 난 것이었다13). 2.3.2. 정리해고 대상자, 활동가, 그리고 조합원들의 극단적 분노 : ‘정신적 공황상태’ 7월 16일 노조 위원장의 눈물의 기자회견을 통한 대폭적인 양보안에도 아랑곳없이 현대자동차 자본 은 바로 다음날부터 개별적으로 정리해고를 통보하기 시작한다. 7월 20일 노사협상은 1시간 만에 결 렬되고 사측은 2,678명의 정리해고자 명단을 발표한다. 개별 통보를 시작한 17일부터 20일 무기한 전면 파업 돌입 전까지, 대상자들의 분노는 개별적・즉자적・폭력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 대상자들은 20일부터 파업의 선두에 결합하지만, 사측은 7월 31일 1,539명 정리해고 대상자에게 인사 발령을 통 13) 따라서 현대자동차 투쟁만이 아니라 민주노총이나 금속연맹 등 상급단체의 96~97년 총파업투쟁을 위시하여 노동조합운동 진영 의 1998년 투쟁 전체 과정을 들추어 평가하는 것은, 이 장의 과제는 아니지만, 더없이 중요한 사업이라고 하겠다. 162
  • 18.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보해버린다. 관리자한테 전화가 딱 왔더라구요. (통지서) 갖다 줄테니까 집이 어디냐 그래서 필요 없으니까 내가 받으러 갈 테니까 어디서 만나자 했거든요. 그 때 한 반에 저하고 나이가 같은 친구가 있었거든요. 친구하고 같이 받으러 갔었죠, 그날 저녁에 촛불 집회하고 그 담날 사수대 결성하고. 몇 일 동안 텐트 지키면서 날이 가면 갈수록 참석하는 인원은 줄어들고… 어쨌든 내 자신도 약간은 자포자기 했는데, 자포자기가 ‘쓰고 나가겠다’ 는 건 아니고 ‘이왕 하는데 까지 해보자’고 해서 남아있었던 거고… (면접자 ㅁ, 활동가) 정리해고 통보서를 받고 3일 정도 지나고 사수대 막사로 결합한 조합원들이 많은데요… 이 막사에 오기까지 사흘, 그 사흘 동안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민과 술로 밤을 지새고 결단을 내린 겁니다… 아직도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사수대 활동을 하고 있어요. 지금도 그 고통은 잘 다스려지지 않고, 단지 같이 지내는 사람들 에 의해서 통제되고 조합에 의해서 통제되는 상태이지, 마음을 진정하거나 감정을 추스리거나 냉정한 이성 을 되찾거나 그런 상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루 아침에 순식간에 자신이 폐품처리 당 했는데, 회사가 이미 정리해고를 단행했는데, 협상을 통해서 철회시킬거라는 기대도 안가지고 있어요. (1998년 8월 11일 2지대 어느 사수대와의 인터뷰에서, 임인애, 세기말 현장보고서) 노란 봉투를 집으로 보내기 전에 대의원은 알았지요. 그 전에 식칼 들고 올라가 00부 대의원이다, 나를 먼 저 집어넣지 않으면 네가 죽을 줄 알아라 하고 나왔다. 분신 말리느라고 힘들었고요… 오히려 순했던 사람 들이 더 그랬어요. 후배 놈 중의 하나가 그래서 모질게 팼지요. 그 때 참 가슴이 아팠지요.(면접자 ㄹ) 정리해고 대상자들의 분노는 극단적이었다. 특히 활동가 그룹이 그랬고,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정신적 공황상태’였다. 사측에 의해 선별당하고 개별적으로 통보받는 방식이 정리해고 대상자들의 자존감을 심하게 훼손시켰다. 그 분노와 상실은 ‘내가 열심히 일했는데 정리해고 대상자에 들어간 이유를 납득 하지 못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당시에 노동조합에서 지불했던 선물이 있었어요. 정리해고 시점에 노조에서 지급했던 선물이 주방세트 였어요. 수저, 칼, 이런 것이 들어갔었는데, 이때 지급했던 주방기구를 무급휴직, 정리해고 대상자들이 집으 로 안가지고 가고 몸에 품고 있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분노가 극에 달했어요. 그때 당시에 공권력이 들어오 고 같이 맞부딪쳤다면 서로 엄청난 사고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내가 열심히 일했는데 정리해고 대 상자에 들어간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 것이지요. (면접자 ㅂ) 이러한 분노는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든 회사가 되게 하려고’ 양보하고 ‘희망’퇴직을 받아들이던 모습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정신적 공황상태에 처하게 된 조합원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노란 봉투, 시퍼런 해고의 칼날뿐이었기 때문이다. 정리해고 대상자들은 현장에서 막무가내였죠. 반장 책상에 칼 꽂고, 기물 파손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만들어 놓은 차에 테러를 가하고… 공구를 다 갔다 버리고. 어쨌든 시작하자마자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조합원들 은 포기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왜 하필 나냐 이런 것이지요. 누구든지 잘리게 되어 있다. 누구든 163
  • 19.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 생각하는 동지들도 있었다. 그런 동지들은 사수대로, 공장 점거로 결합을 하는 거고, 회사에서는 여러 방면으로 공격을 하는 거예요. 정리해고 대상자에게는 그 속에서 빠져나오면 무급휴직으로 전환시켜주겠다. 빠져나오면 무급휴직자들 대상에서 빠지게 해 주겠다. 고리가 약한 조합원들은 ‘지금이라도 희망퇴직 안하면 그것마저 못 찾아가는 것 아니냐’ 여러 가지로 다 파악했기 때문에 대응방식이 다 틀렸죠. 희망퇴직을 조합에서 받아 들였다는 것. 그런 기억들이 많이 나고요.(면접자 ㅅ)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참여했죠. 제가 처음에는 안 받고, 2차 때 해고 통지서를 받았는데… 사람들 중에서 무급 받은 사람도 있고 안 받은 사람도 있고… 동료들 간의 배신감 같은 게 좀 많았었죠. 어떤 사람은 자신 은 살았으니까 이런 거 참여 할 필요 없다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자기도 혹시 앞으로 당할지 모르 니까 열심히 참여하고 그런 거…. (면접자 d, 조합원) 또 한편에서는 어제까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정리해고) 대상자와 아닌 자로 분리되면서 함께 싸우 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가 커져갔다. 대상자와 아닌 자 사이의 갈등과 골은 비록 표면적인 갈등은 희 석되었을지 모르나, 파업이 끝나고 현장 복귀 후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투쟁은 자본에 의해 개별화된 노동자들을 동지적 관계로 다시 일으켜 세운다. 2.3.3. 투쟁은 자본에 의해 개별화된 노동자들을 동지적 관계로 재구성한다 - 단절된 관계, 새로운 동지 : ‘계곡파 조합원’과 식당 여성 조합원 파업 기간 내내 농성에 참여한 조합원들은, 사측에 동원된 일명 ‘계곡파 조합원들’과 쫓고 쫓기는 과 정을 지속했다. 그러나 과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투쟁 과정에서 노동조합 내부의 변별점이 ‘어용과 민주’의 구도였다면, 98년 이후 지금까지 조합원들은 정리해고 대상자였느냐 아니었느냐, 파업에 참여 했느냐 사측에 동원되었느냐에 따라 나뉘어 왔다. 한쪽은 사측의 파업 무력화를 저지하기 위한 자발 적인 행위였으며, 또 다른 한쪽은 정리해고를 비껴간 상황에서 나름대로 생존을 위한 행위였다. 그러 한 구분은 고용, 즉 자신의 생존권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첨예한 갈등으로 나타났으며, 파업이 끝난 뒤로도 극심한 대립과 갈등의 원인으로 남았고, 지금까지도 현장의 일상 속에 잠재되어 예전과 같은 공동체적 질서를 복원하는데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투쟁의 상흔 이기도 하지만, 파업 이후 투쟁의 우위에서 현장 질서를 바로잡지 못한 노동조합의 책임이기도 하다. 갈등을 해결하는 길은 막연한 화해와 용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기억을 복원하고 평가하는 것에서 시작 한다는 것을 재확인해야 한다. 여름에 비가 엄청 왔죠. 조합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비가 오는데 산에 간다고 조합원을 집결시켜놨다고 하더 라. 그 비를 맞고 오토바이를 타고 갔다. 사측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산행을 시작한다고 하니까 그 장대같은 비를 맞고 산에 올라갑디다. 타고 갔던 오토바이 헬멧을 집어던지고 욕을 했더니 가다가 돌아온 사람이 7명 이었어요. (면접자 ㄴ, 활동가) 164
  • 20.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조합원들 개 삶아먹고 그런 거 타격 갔었거든요. 갔는데 참 슬프더라고요. 참 불쌍하더라고요. 조합원들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니까, 밉지는 않았어요. 우리가 절대적인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우리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면접자 ㅇ, 당시 문화패) 그때 생각하면 선거구 조합원이 야속하다. 우리 선거구는 다 나갔다. 텐트 쳐놓고 대의원하고 저하고 둘이 있었다. 그동안 그 전까지 형・아우하고 지냈던 사람들하고 다 싸웠던 것 같다. 그 이후에도 대의원선거 나 가면서 공개 사과하라는 이딴 소리 들으면서까지… 저는 그 때… 그것이 제일 가슴이 아프다. (면접자 ㅈ)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투쟁은 자본에 의해 개별화된 노동자들을 동지적 관계로 재구성했다. 우리는 그것을 계급성의 회복이라고도 부른다. 식당 여성 조합원들은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투쟁을 통하여 ‘밥 주는 아줌마’에서 ‘함께 투쟁하고 있는 식당 아줌마 동지’로 거듭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에 대한 인 식은 ‘식당아줌마’였고 ‘여성 조합원’ 혹은 성별의 차이를 극복한 ‘조합원’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 한 계는 결국 투쟁의 막바지에 이 ‘동지’들을 ‘정리해고를 막기 위한 정리해고의 희생양’으로 몰아넣는 차 별로 나타났다. 이에 36일 간의 파업이 끝난 뒤 식당 여성 노동자들은, 한때 동지였던 남성 조합원들 이나 노동조합의 연대 없이 기나긴 해고 철회 투쟁을 이어가야 했다. 98년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식당 아줌마들의 남자들 못지않은 투쟁, 강한 이미지로 남아있고, 그럼에 도 불구하고 정리해고의 타겟이 되었다. 아쉽지요. 그리고, 조합원들뿐만 아니라 내 부인, 내 자식까지 하나 된 마음으로 그런 위기 상황에 공동으로 대처했다는 것이 상당히 가슴에 와 닿을 정도로 감동했어요. (면접 자 ㅊ) 처음에 식당 아줌마들이 파업할 때 저는 조합원한테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우리 집회할 때 창문으로 내려 보며 실실 웃고 하던 사람들인가. 솔직히 안 좋아했지요. 한번 해봐라, 그런데 여성 조합원들이 그만큼 열성 적으로 하고 98년 때도 식사도 다해주고 하는 것 보고. 남자 활동가들보다 더 열심히 하니까 나중에는 조합 원들이 엄청 좋아했죠. (면접자 ㅋ) 2.3.4. 집행부와 조합원 : 주체들 간의 동질감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8월 5일, 파업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노조 집행부는 ‘임금 삭감과 무쟁의 선언’을 주요 내용으로 한 양 보안을 내놓았다. 파업 참여 조합원들은 지도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작 그 지도부는 투쟁하고 있 는 대중이 아니라 정권과 현대자본과 공장 밖의 공권력들, 그리고 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조합원들과 관리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회유의 입들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조합원들은 “더 이상 미련도 여 한도 없다. 후회 없는 한판 싸움을 하고 싶다. 그리고 간다.”14)고 말하고 있었지만, 파업 지도부는 “우리의 피와 땀을 여기서 뿌리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투쟁을 남기고 싶습니다. 영원히 지역 주민과 국민들에게 기억될 순결한 투쟁을 자리매김하고 싶습니다.”15)라고 말하고 있었다. 파업을 둘러싼 내 14) 1998년 8월 14일, 파업 농성장 평조합원 텐트 15) 1998년 8월 18일 저녁집회, 김광식 위원장 발언 165
  • 21.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부 주체들 간의 긴장은 파업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긴장은 투쟁 과정에서 온 전하게 충돌하며 한 단계 상승하지 못한 채 그저 미묘한 기운으로 잠복해 있었다. 그토록 힘겨운 와중에도 파업은 파업 그 자체만으로 짜릿한 쾌감과 즐거움을 주었다. 굳이 말로 확인 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 있었고, 그러한 집단적인 체험은 파업의 커다란 동력이자 주 체들에게 동질감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학습 과정이기도 하다. 이번 연구 과정에 참여한 대다수의 면접자들은 휴가 마지막 날인 8월 9일 저녁, 1만 여명이 참여한 집회에 대해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이날의 집회는 공권력 침탈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오히려 더 많은 노동자들이 결집했다는 점, 집회 도중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집회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흩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획된 문화판’이 ‘전체의 난장판’으로 상승되어 집회 참가자 모두가 동일 한 흥분과 투쟁의 확신을 공유할 수 있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은 파업 지도부의 일관되고 확신에 찬 입장을 대중적으로 소통하고 공유하여 얻어지기도 하지만, 파업 공간에서 직접 느끼는 상호간의 소통 과 상승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오는 날 했던 집회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지요. 조합원들이 비 속에서 끝까지 남아있었다는 게 흥분되고 짜릿했죠. 그걸 계기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사람들이 참 많이 가졌어요. 조합원들이 공권력이 침탈한다 면, 전에 성과급 투쟁 때는 도망갔었는데 이번에는 담 넘어서 들어왔었거든요. 경찰들이 들어온다고 해서 각 문을 봉쇄했는데 오히려 담 넘어서 들어왔었어요. 사람들이 없는데, 집회하면 모이는 거야. (면접자 ㅌ) 비가 갑자기 와서 무릎 밑까지 차 있었다. 그 때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고 어깨동무하고 춤추고 했던 것. 지 금도 생각해보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안에 있었을 때 정신병자 같았는데, 그래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안에서 하고 했던 것들이, 동지적인 것들이 무언가, 결과야 어이됐던 이길 수 있다는, 동지들과 함께 있으면서 외롭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면서 안 에 있으면서 상당히 편했었다. 그런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면접자 ㅍ, 활동가, 당시 조합원) 소나기 쏟아지는 데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투쟁 동력도 있었어요. 해가 지면 어디서 사람이 나오는지 저녁 7시 집회만 할 때 되면 사람들이 많았어요…. (면접자 e, 조합원) 그 다음 날부터 현대 자본의 제의에 따라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자본은 최종안을 내놓았고, 협상 은 결렬되었다. 다음날 위원장은 노조 사무실 옥상 위, 철탑에서 농성을 시작한다. 협상으로는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자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8월 중순이 지나면서 공장 정문을 둘러싸고 있 는 공권력은 더욱더 불어났고, 정권에서는 연달아 중재단을 급파했다. 파업은 정점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정권과 자본의 조여 오는 압박과 함께 조합원들의 열기와 집중도 상승해갔다.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다는 긴장이 최고조이던 순간에 가장 많은 집회 대오가 모였다. 그 열기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서인 듯 때마침 노무현이 신자유주의 정권의 대리자로 울산에 내려왔 고, 8월 20일에는 노무현 중재단의 중재안이 발표된다. 당시의 상황과 판단에 대해 당시 노조 위원장 은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아래와 같이 술회하고 있다. 166
  • 22.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그런 과정에서 노무현이 국민회의 중재단을 꾸려 울산으로 내려온다. 이에 대해 김광식 위원장은 “공권력 투입을 앞두고, 회사 입장에서 보면 합법적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 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또 “당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별 단위 사업장이 정권과 총자본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며 “개별 단위 사업장이 투쟁을 벌여 정리해고 규모를 줄이는 것은 하지만 기업별 노조보다는 구조와 시스 템을 바꿔 산별노조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잠정합의(안)에 대해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1,2차 투표를 통해 부결시키지만 문안이 약간 수정돼 통과된다. 사실상 “노조를 유지할 힘조차 없어 합의하 는 상황으로 흘러갔다”는 것이 김 위원장이 바라보는 당시 정세다. - 2002년 6월 월간 『말』 반면 투쟁에 결합했던 현장조직들과 활동가, 조합원들은 즉각 분노와 반발을 표출하였다. 그들의 요구 는 “끝까지 싸울 수 있다, 싸우겠다.”는 것이었고, 위원장의 판단은 “노조를 유지할 힘조차 없어 합의 하는 상황으로 흘러갔다.”는 것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파업에서 그러하듯 지도부의 현실적인 고민과 조합원의 투쟁 열기 사이의 간극은 이 투쟁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으며, 특히 파업의 정점에서 극명한 대비를 보인다.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의 해결 방안은 파업의 주체들이 행동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답 외에는 있을 수 없다. 문제는 현실 속에서 행동하는 주체들의 힘이다. 2.3.5. 집행부와 조합원 : 파업의 지도력과 민주주의 면접자들에게 파업기간 동안 가장 큰 갈등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싸움에 대한 확신이나 전망이 불투 명함에서 오는 갈등인지, 가족들의 또 다른 회유가 갈등이었는지, 현장조직간 활동가간의 전술상의 이 견에서 오는 갈등인지, 조합원들에 대한 못미더움에서 오는 갈등인지, 지도부의 의지에 대한 불확실함 에서 오는 갈등인지를 물었다. 활동가들은 파업의 중요 국면에 대해 활동가로서의 판단을 요구받는다. 따라서 현장조직별, 공장별로 진행되는 토론 등을 통해 파업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또 그만큼 갈등의 요소들이 더 풍부하게 드러날 수 있는 집단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개인적인 고민 이나 갈등보다는 당시 정세 속에서 나타난 집단적인 갈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면접자들의 대다수는 지도부와의 갈등을 가장 큰 갈등으로 꼽았으며, 당시 사수대나 대의원으로서 파업에 결합했던 활동가 들은 특히 강렬한 반응을 보였다. 지도부의 책임이다. 사수대를 총괄 지휘했던 사람이 부위원장, 지도부 지침이 비폭력. 사수대는 무급휴직자 들 중심으로 격앙되어 있었죠. 지도부가 비폭력 지침을 내리고 회사가 야금야금… 결국 생산까지 가동해 보 려고, 그런 회의도 하고. 이건 조합원들이 할 수 없는 거다. 그러면서 지도부가 막았어요. 지도부가 투쟁이 확대되는 것에 대해 두려워했다. 마지막 정리할 때 새로운 형태의 파업지도부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는데, 소 수라서… (면접자 ㅎ, 당시 사수대) 사실 7대 집행부에서 침탈에 대한 대책을 안 세워 놨었다. 같이 있던 동지들이 공장(꽃)도 가동하고, 사실 믿을 만한 동지들이 별로 없었어요. 낮에는 사수대로, 거의 하루에 20시간씩 돌아다녔던 적도 있고, 밤에 공 장 타격투쟁도 하고, 생산시설 파괴부터 시작해서 그것을 진짜 믿을 동지들만 해서. 사실 타격 투쟁할 때는 167
  • 23.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회사에 대한 망을 본 것이 아니라 조합에 대한 망을 보면서 했다. 어용은 아니더라도 만족할 만큼 못 싸웠 었고, 그것에 대한 실망이 많았었지요. (면접자 ㄴ, 당시 사수대・대의원) 집행부에 대해서 그랬다. 이상한 기류로 흐르는 것들. 대중적으로는 결사항전 이런 쪽으로 이야기가 되고. 정확히 찍어내지는 못하겠는데요. 회사와 협상하면서부터 이면적으로 되고. 노무현 중재단 오기 전후 그 정 도일 거예요. 흔들렸던 거지. 사실 그 전에 희망퇴직을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는 데… (면접자 ㄹ) 집행부에 대한 절망감이 자꾸 계속 들었지요. 그리고 우리가 공장 공구들을 싹 다 갔다 버렸거든요. 나중에 다 주웠더라. 기계에다가 소금물 다 붓고 그랬었거든요. 투쟁 중에도 절망감을 많이 느꼈어요. 지도부에 대 한 절망감이 컸어요.(면접자 ㅁ) 문제는 투쟁이 지속되어 가면서 이 사람들의 요구는 무조건 정리해고 반대였고, 집행부에서는 시간이 가면 서 현실적인 고민이 하나 둘 생겼던 것이다. 상시적으로 소통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면접자 g, 활동가) 물리적인 폭력을 동반하는 투쟁 전술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의 목표를 둘러싼(합의안으로 표현되는) 지점이 주된 갈등의 양상이었다. 정리해고 명단 발표 이후 파업 기간 내내 대중들은 즉자적이고 즉각 적인 분노를 표출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지도부는 ‘질서’와 ‘조직된 투쟁’이라는 명분으로 그러한 분 노를 잠재우고자 했다. 또한 대중의 투쟁의지를 끊임없이 교섭이라는 제한된 틀 내로 가두고자 했다. 그 결과 투쟁동력과 교섭이 투쟁을 상승시키는 계기로 작동하기 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제약하는 결과 를 낳고 말았다16). 이러한 지도부와 활동가, 현장조직을 포함한 지도력과 조합원 대중의 정서 사이의 갈등-오히려 갈등 이 전면화 되지 못함으로 인해 내부의 골을 더 깊어졌지만-은 투쟁기간 내내 지속, 확장되었다. 연구원 : 상황이 긴박해지면서 활동가들 간 소통이 왜 막혀있었나요? 면접자 : 그때 이상하게 그렇게 막히더라고. 그것은 내가 느낀 것인데,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또 이런 것도 있다. 어떤 대의원은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더라. 그러면서 믿지를 못하는 거야. 그 러면서 보면 보이더라. 저거는 끝까지 갈 놈이다. 저놈은 못할 놈이다 그러다보니 함부로 이야기를 못하는 거야. 당시의 상황들은 굉장히 미묘하고 복잡했죠. (면접자 h, 활동가) 면접자 : 제가 알기론 위원장하고 뭐 독대도 하고 막 그랬는 거 같던데. 연구원 : 위원장이 사측하고? 면접자 : 네. 연구원 : 독대하는 거에 대해서 사람들이, 조합원이 안 좋아하나요? 면접자 : 네. 연구원 : 왜요? 면접자 : 불안해서. (면접자 j, 조합원) 파업지도부에서 대중과의 토론 이것이 핵심이다. 공권력에서 깨져야 하냐는 문제는 깨지면 성공이냐 아니냐 의 이런 문제보다는 결국 마지막까지 투쟁을 하면서 대중과 함께 어떻게 했느냐가 관건이었다. (면접자 k, 16) 노동자의 힘, 결코 꺾이지 않은 미완의 투쟁, 1999. 168
  • 24.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활동가) 집행부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다 오픈시켜놓고 판단해도 사실은 약이 올라 있는 활동가들을 이해시키기 도 힘들 텐데, 아마 정보자체를 다 오픈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공식적인 절차라는 것은 불가능했지 요. 그것은 합의 안하겠다는 이야기 이다. 그런 맥락에서 민주적인 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이전 과정까지 모 든 게 잘못했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면접자 l, 활동가) 98년 구조조정을 둘러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투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대중의 투쟁의지(동 력)에 지도부가 얹혀 있는 형국이었다. 이는 투쟁을 바라보는 상이한 시각 차가 소통의 부재, 혹은 단 절로 인식되게 만든다17). 대다수 면접자들의 평가에서도 파업과정에서 특히 마무리 교섭국면에서의 민주적 절차의 부재를 가장 크게 잘못한 지점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미 정리해 고가 법제화된 상황에서 벌어진 36일간의 정리해고를 전면 거부하는 그 자체가 이미 총자본과 총노동 의 전선인 98년 현대자동차 파업에서조차 대중들의 투쟁은 철저히 교섭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어버렸 다는 점이다. “조합원 동지들! 투쟁의 목적은 협상에 있다.”18) “집행부의 비폭력 평화노선을 적극 따르라. 조합원들이 위원장의 지시에 절대 복종하지 않는다면 투쟁을 포 기하겠다.”19) 20세기 말 한국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전개된 파업들은, 극단에 선 노동자들이 끝을 모르고 덤비는 투 쟁이라는 전통적인 의미로만 분석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망을 가진다. 이제 파업은 핵심 컨셉과 치밀 한 계획, 적절한 수위, 정세나 국면을 타고 잡는 일정이 필요한 하나의 기획이 되었다. 계획과 일정이 분명한 수단으로서 파업은 불시에 터져 나오는 돌출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충분히 예상 가능한 행위가 되어가고 있다20). 파업이 하나의 공인된, 사회적 행위 중의 하나라면 늘 예측 불가능하고 즉자적인 ‘들고양이 파업’만이 그 전형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기획’이 아니라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는 점이다. 투쟁의 효과를 높 이기 위한 다양한 기획보다는 노동자 대중의 운동 방식으로 파업의 기획이 마련되어야 한다. ‘통제’로 대체하려는 ‘지도’가 아니라 지도부의 지도력을 대중 스스로가 넘어서고 통제할 수 있도록 조합원들의 의지와 행동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을 ‘허용’하는 지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 면접자의 말대로 “민주적인 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이전 과정까지 모든 게 잘못했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오히려 파업의 전 과정에서 파업 지도부가 대중들을 통제와 지침에 따라 움 직이는 ‘파업기계’로 제한시킨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그 때문에 대중을 배제한 채 합의한 ‘종이’ 17) 임인애, 실패한 상흔은 오래 지속된다, 진보평론 3호. 18) 1998년 8월 22일자 현자노조 중앙비대위속보 87호. 19) 1998년 8월 12일 저녁 집회, 당시 현자노조 위원장 발언. 20) 임인애, 실패한 상흔은 오래 지속된다. 진보평론 3호. 169
  • 25.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 보고서 를 그야말로 한낱 ‘종이쪼가리’로 무력화시킬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노동자’로 대중이 진전해 나가지 못하였다. 이것이 평가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이다. 어수선했죠.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그 전에 짐작하고 있었죠. 막판에 오면서 노조 유인물도 이상하게 나오 기 시작했고, 홍보물이나 TV를 보니까, 이미 그쪽에서는 타결이 임박했다고 하는 것이고, 집회에서도 김광 식의 논조가 그런 식으로 가고 있고, 유인물도 그렇게 가고 있고, 그래서 이미 알고 있었다. 다음에 노무현 이 내려와서 중재를 하면서 위원장의 의지가 상당히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당시에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 었다. 마지막 그날, 이미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 하는 믿음이 있었던 상황이었다. 집회도 집회처럼 안되고 아 주 엉성했었다. 모여 있는 것도 아니고 퍼져 있으면서 씨발 씨발… 하면서 보고 있었는데 위원장이 단상에 올라와서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다… 정리해고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최소화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때는 머릿속에 별이 빤짝빤짝했다. 조합원들이 위원장 이야기 듣기 전에 삼삼오오 다 빠져나가고 있었던 상황이다. 가다가 돌아보면서 쳐다보는 조합원들. 내가 정문을 차단하고 막으면 저 사람들 투쟁대오로 이끌 수 있는가도 생각해보았는데, 자신이 없었다.(면접자 ㅅ) 합의의 3주체였던 정부와 현대자본과 노조 지도부는 역사적인 사진 한 컷을 남겼다. 그러나 조합원들 에게는 그들 스스로가 남지 못했다. 단지 정부와 자본에 의해 무력화된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합의문 과 마치 “군사 쿠데타이후의 상황을 방불케 하는21)” 현장만이 놓여지게 되었다. 2.4. 끝났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원직 복직 쟁취투쟁 2.4.1. 정리해고를 막기 위한 정리해고 : 희생양 277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 투쟁에서 식당 여성 노동자들이 주요 정리해고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는 점은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277명의 정리해고자 중 144명이 식당 여성 조합원이었다. 식당 여성이 집단적으로 정리해고 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여성의 차별적 정리해고에 대한 운동진영의 비판 들이 있었다. 그러나 내부 투쟁주체들 사이에서는 277명의 정리해고 수용과 지도부의 직권조인에 대 한 분노가 ‘여성 노동자 집단 정리해고’ 그 자체의 문제를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면접자들은 당시 잠정합의 이후 그 대상자의 대부분이 식당 여성 조합원이었다는 점이 미안함, 안쓰 러움과 동시에 불가피함, 일종의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고 한다. 자신이 정리해고 대상자에서 최종 제외되었음에 대한 안도와 함께 노동운동 진영 일부에서 제기된 정리해고 최소화론22)이 노조사수라 21) 면접자 w, 조합원. 22) 정리해고의 ‘상징적’ 수용과 ‘상징적’ 관철이라는 노조 집행부 및 일부 활동가들과 사측 및 정부의 이해 일치는 이미 노동법 개정 170
  • 26. Ⅲ. 연구결과 …… 3장. 고용 이데올로기와 활동가 는 명분과 더해져 현실적인 타협이 이루어졌음을 회고하고 있다.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경우 조합원 전체로부터 호응 받고 있는 상태는 아니었죠. 그 이데올로기는 차 만드 는 사람하고 밥 짓는 사람하고 임금이나 모든 조건이 똑같을 수 없는 것 아니냐가 회사 측의 논리였단 말입 니다. (면접자 ㅍ, 활동가) 그때 어떤 집행부였어도 마찬가지 였을 거예요. 그렇게 안 했으면 다 죽었을 테니까. 어떤 집행부였어도 잘 한 거에요. 솔직히 내가 봤을 때는 그 정도면 잘 한 거예요. (면접자 v, 조합원) 그때 당시 솔직한 심정은 한마디로 말해서 해고를 피할 수 없으면 잘한 결정이다. 남자가 경제력을 짊어진 상황에서 여성들도 생계에서 역할부담을 하지만 그래도 남자가 경제력을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조합 쪽의 최선의 결정이지 않았나.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었나.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면접자 y, 조합원) 실제로 어떤 노동조합이던지 희생양은 있다고 본다. 저 아줌마들 저리 열심히 했는데 살릴 수 없었느냐? 나 름대로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고 보는데. 그렇다고 식당아줌마가 몇 천 명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노동운동 이 잘못되는 방향을 그때부터 배우지 않았나. (면접자 ㅎ, 활동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노동의 유연화를 증대시켰지만, 유연화는 차별적으로 진행되었다. 외환위기 이 전부터 진행된 외주화, 사내 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은 98년 투쟁당시 식당 여성 노동자들을 정리 해고하는데 기본적인 근거를 제공하고 있었고, 주변부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이 자본의 유연 화의 공세가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겨누어지는 상황 하에서 더욱 확대・심화되어 진행된 것이다. 그 한 달을 넘게 천막농성하면서 이리저리 식당이 타겟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요. 시간이 지나면 서울 에 간 사람이나 여러 경로를 통해서 식당아줌마가 그 안에 정리해고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되었어요. 공공연한 비밀로까지 되었었어요. 그래서 아줌마들이 여기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때 전경이 들어오니 불을 지르니 오만(가지) 이야기 돌 때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아이들도 많은데 아줌마들이 많은 생각을 했지요. 혹시 내 새끼 같은 저기 사람들 다치면 어떻게 하나. 파업도 끝나야 집에 가서 살림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도 할 수도 있고요. 억울해 미치겠다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노동조합이 식당 운영하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리석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 는 싸움을 해본 경험이 별로 없으니까. 노조에서 마지막 방법이다 하니까 우리도 그것을 또… (면접자 q, 당 시 식당 여성 조합원) 98년 투쟁 이야기하면 너무 속상해서요. 98년 투쟁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내가 있는 거지만. 어쨌든 98년 당시에는 그때까지만 해도 막 나라가 어렵고, 96년부터 그랬으니까 또 회사가 정말 어렵구나. 그래서 정리 해고를 해야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었죠. 그런데 어쨌든 노동조합 지침만 믿고 끝까지 싸웠는데 결국은 해 검토시 노조측의 ‘유연화’ 수용 불가피론에 그 맹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면에는 물질적인 단기적 이득을 위해 ‘상징적’ 차원에서 양보하고 조직된 힘으로 막아내면서 조직적 동원력을 유지하고자 한,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민주노총 합법적 제도화를 통해 열릴 정치적 가능성이라는 계산과 경험론이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정리해고의 ‘상징적’ 수용과 ‘경제적 실리’의 보장을 통한 ‘노조 조직 보존’이라는 결과는 대다수의 노조운동 활동가 및 노동운동계와 학계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듯하다. 상층노조의 지원이 저조한 가운데 단위 대공장 노조만으로는 대정부 및 자본과의 전면적인 투쟁의 한계가 명확했 기 때문에 희생을 최소화하는 결과를 얻어낸 성과는 인정되어야 한다는 근거에서 그런 것 같다. (신병현, 여성 노동자의 집단적 정리해고와 ‘민주’노조 운동) 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