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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 1. ­김삼웅의 
인물열전 ­한겨레신문 
교육∙권리∙경제 '삼균주의' 창안자 조소앙 일가 
“조소앙의 신념체계와 정책기조는 삼균주의입니다. 삼균주의란 개인간, 민족간, 
국가간의 균등을 말하고, 정치적 균등, 경제적 균등, 교육적 균등의 실현으로 삼균을 
이루어 세계일가(世界一家)의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평등주의 사상입니다.”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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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이념의 용광로 정제된 실천논리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조소앙 평전>을 마치면서 2014/08/13 08:00 김삼웅 
한국 근현대사는 격동의 시대만큼이나 다양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그 중의 한 분인 조소앙 선생은 매우 특출한 인물이다. 독립운동사는 물론 민족사에 
불멸의 문건으로 남을 몇 건의 ‘선언문’을 작성하고, 풍찬노숙의 독립운동가로서 생애를 
바쳐 삼균주의사상을 연구하고 그 결과 <건국강령> 등을 마련하였다. 삼균주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뿐만 아니라 좌우 독립운동 진영의 이념적 기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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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에는 삼균주의에 바탕을 두고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 참여하고, 피랍되어서는 
중립화통일론을 제기하였지만, 양쪽에 포진한 분단세력, 권력지상주의자들에게 
조소앙과 그의 사상은 배척의 대상일 뿐이었다. 
20세기 전반 민족의 수난기에 사상가 조소앙이 아니었다면 우리 독립운동사는 매우 
건조했을 것이다. 과문의 탓인지 모르지만, 세계 피식민지 해방운동사에서 우리 
임시정부처럼 일관되게 이념과 정책을 제시하면서 복국운동을 전개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 그 중심에 조소앙 선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사상가로서만 아니라 정치가ㆍ외교가로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열강의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에 반대 이론을 전개하면서 대응해 나간 활동을 보면 더욱 놀라게 된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임시정부가 개인자격이 아니고 정부자격으로 환국하여 국민의 
지지 속에서 해방정국의 통치기관이 되고 삼균주의가 새나라 정부의 국책으로 
채택되었다면 한국의 방향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통일정부수립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승만이 초대 국무총리에 그를 지명했더라면 
6ㆍ25전쟁을 막거나 민족주의자와 중도파 인사들의 대량 납북 또는 월북과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이승만의 독선과 독재는 크게 억재되었을 
것이다. 이 같은 가정에서 생각할 때 조소앙 선생의 존재감은 더욱 돋보인다. 
조소앙 선생은 삼균주의학생동맹을 창설하면서 “삼균주의야말로 모든 인민이 골고루 
배우고 골고루 살고 골고루 먹는 유기철학에 의한 절대진리”라고 선언하였다.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균등사상을 풀어 설명한 것이다. 민족자결의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그의 정치이념을 ‘균등’이란 단어만을 떼내어 사회주의, 
회색주의자로 매도하는 식자도 있다. 그 협량함이 민망할 지경이다. 
조소앙의 균등주의는 소비에트나 북한식의 ‘균등’이 아닌 독립국가, 민주정부의 전제로 
가능한 이데올로기라 하겠다. 그러니까 ‘목표로서의 균등’이 아니라 ‘수단으로서의 
균등’이다. 출발점이 다른 달리기 경주가 불공정하고 결과가 뻔하듯이, 수단이 균등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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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면 목표가 균등할 리 만무하다. 예컨대 교육기회가 균등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권ㆍ경제력의 균등이 불가능한 이치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권력층이나 재벌가 
자녀와 빈곤층 자녀의 교육의 기회가 같지 않듯이 말이다. 
나는 2006년 평양의 애국열사릉의 조소앙 선생 묘소 앞에서, 그가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면 <사회계약론>으로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적 지주가 된 루소가 되었을 
것이고,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미국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퍼슨이 되었을 것이고,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민족주의ㆍ민권주의ㆍ민생주의의 삼민주의를 내건 국부 손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학식과 경륜을 살리지 못한 민족사의 불운 앞에 한동안 발길을 돌리지 
못하였다. 
조소앙 선생은 다양한 외래문화와 외래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이를 민족적 
정통성 속에 용해시키고, 인류적 보편성과 민족적 특수성을 통합하여 한민족의 
독자적이고도 진보적인 삼균주의 혁명이론을 체계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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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선생은 일제강점기 최초의 사상가이고, 해방정국에 최후의 경륜가였다. 그는 
175센티의 키에 70킬로가 넘는 (해방 후) 건장한 체구만큼 순금과도 같은 무게의 
함량을 지닌 사상가이자 경륜가였다. 20세기 한 시대를 통털어 한국에서 그이 만큼 
폭넓은 식견과 경륜을 지닌 인물이 과연 몇 분이나 될까 상도할 때, 필자의 평전 작업은 
거인의 사상과 발자취를 다 담기에는 능력이 역부족이었음을 고백한다. 
아울러 선생의 다양한 저술 중 <소앙기설(素昻氣說)>, <이순신구선지 연구>, <국선지( 
國仙誌)>, <사선고(四仙考)>, <발해경>, <화랑열전> 등 전문서와 논설 등은 손도 대지 
못하였음을 밝힌다. 순전히 능력이 미치지 못한 때문이다. 
현행 헌법에는 조소앙 선생이 기초하여 1944년 4월 22일 임시정부의 <헌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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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택된 조항과 유사한 내용이 상당히 포함되고 있다. 제1장의 총강 ‘민주공화국’과 
‘국민주권’ 조항은 그대로이고 권리와 의무, 평등권 등에서 유사점이 적지않다. 
오늘에 ‘삼균주의 원칙’을 그대로 실행할 수는 없지만, 정치ㆍ경제ㆍ교육균등의 
정신만은 살려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빈부격차ㆍ양극화의 ‘99 대 1’의 현상이 
지나치게 심화되고 갈수록 폭이 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경기, 한 울타리에서 ‘양과 호랑이의 자유경쟁’으로 표상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강화는 헌법정신과도 배치되는 현상이다. 여기에 박근혜 정부는 
‘규제철폐’라는 구실 아래 호랑이를 가두었던 울타리의 말뚝마저 하나 씩 뽑고 있다. 
지난 해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5천 달러, 한화로 2천 5백만 원, 3인 가구로 치면 7천 
5백만 원 수준이다. 2013년 월 소득 139만원 미만의 국민이 1천만 명에 육박하고, 
상위소득 1%가 국부의 24%를 차지하는 소득불균형의 위험사회가 되었다. 위가 
지나치게 무겁고 아래가 가벼우면 침몰하는 것은 세월호 뿐만 아니다. 그래서 더욱 
선생의 삼균주의 정신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천안 독립기념관에 세워진 조소앙 선생 어록비에는 “삼균주의­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제도와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호혜 평등으로 민주국가 
건설하자”는 내용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그의 사상을 집약한 것이다. 
해방 후 선생이 정치현장에 뛰어들면서 사회당을 창당할 때의 비화가 전한다. 다수의 
간부들이 ‘한국사회당’이란 당명을 주장하자 그냥 ‘사회당’이라 해야한다는 설명에서 
국제주의자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가 삼균주의를 실천해 나가려는 마당에서 
이를 굳이 한국에 국한시킬 이유가 없다. 이는 사람 대 사람, 민족 대 민족, 국가 대 
국가의 평등한 관계회복을 통해 세계 일가를 이룩하자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굳이 
‘사회’ 자(字) 위에다 ‘한국’을 붙여 지역성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김재명 
<한국현대사의 비극>) 
선생의 사상체계는 민족주의의 터전 위에 세워진 구조물이지만, 안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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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적ㆍ신민적(臣民的) 굴종의식을 청산하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침략주의를 
분쇄하면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여 3균에 기본하는 고루 잘사는 민주공화국가를 
세우는 국제주의였다. 여기에는 중국의 노장사상과 영국노동당의 정책 뿐만 아니라 
고드원ㆍ푸르동 등 아나키즘까지 수용하는 거대한 이념의 용광로였다. 그 용광로에서 
단련되고 정제된 것이 3균주의 사상이고 실천논리가, 
좌우합작ㆍ남북협상ㆍ통일정부수립ㆍ중립화통일론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조소앙 
선생은 우리의 ‘지나간 미래상’ 이라 할 수 있겠다. 
한 가지 덧붙힌다면 조소앙 선생의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번역하여 전집 또는 선집을 
제작했으면 싶다. 독립운동사, 통일운동사, 민족문화사 연구에 절실한 자료(사료)가 될 
것이다. 뜻 있는 독지가가 있었으면 한다.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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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조소앙 평전 연재를 시작하면서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1장] 오늘에 더욱 필요한 조소앙의 3균주의사상 2014/05/21 
08:00 김삼웅 
만물이 유전하듯이 사상이나 이념, 종교나 철학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부침을 하게 
되지요. 세월의 강하(江河)는 많은 것을 삼키기도 하고 재생시키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영구불변의 정의나 진리는 흔치 않지만, 무수한 세월의 두께나 강하의 
흐름에도 변치않는 것은 존재합니다. 
몇 천년이 지나도 단절되지 않는 성인들의 가르침이나, 지성들의 언행이 시간의 풍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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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수록 더욱 새로워지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와 정의의 가치는 쉽게 
퇴색하지 않고 단절되지도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지성사는 무수히 많은 사상ㆍ이념ㆍ종교ㆍ철학을 배출했으나 대부분 세월의 
강하에서 침몰하거나 세탁되고, 현재 존재하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부침성쇠의 
과정을 거친 것이지요, 하지만 사멸해도 되는 것이 남아있거나, 남았어야 할 것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유익한 이념이나 철학이 시대상황이나 권력에 희생당한 
사례도 있고, 이와 반대로 무익한 것이 조장되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무지개색깔을 띌만큼 다양한 인물들에 의해 다양한 방략이 
전개되었지요. 20세기 세계 피압박 민족해방운동사에서 한민족처럼 처절하게,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반제투쟁을 전개한 나라도 찾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민족 또는 
종족의 해방이나 분리독립이 목표이고 이념이었지요.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크게 
달랐습니다. 민족해방에 이르는 투쟁의 방법과 해방 후 국가건설의 방략이 
다양하였지요. 우선 투쟁방법의 큰 갈래만 해도 다음과 같습니다. 
의열투쟁론 
의병전쟁론 
실력양성론 
외교론 
무장전쟁론 
계급투쟁론 
민중혁명론 
어느 것이 타당하고 어느것이 불가하다거나, 여기에 우선 순위를 매기기란 쉽지 
않습니다. 
시대상황과 국제정세의 추세에 따라 바뀌고 변하며, 또 종합하여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해방 후 민족국가 건설의 방략은 3ㆍ1혁명으로 민주공화제가 중심이 되었지만, 다른 
방안도 추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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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복벽주의 
아나키즘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중에는 의사ㆍ열사ㆍ지사ㆍ투사ㆍ선생ㆍ박사 등 다양한 호칭이 
많습니다. 거기에 걸맞는 투쟁을 하여 얻게된 호칭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독립전선에서 투쟁하면서 독립운동단체(기관)의 이념과 정책을 
만들고 해방조국의 비전을 연구ㆍ제시한 경륜가들입니다. 
조선왕조 건국의 초석을 쌓는 이가 정도전이었다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정부수립(헌법제정)에 이념과 정책을 제시한 사람은 조소앙 선생입니다.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이 법통으로 연계될 수 있었던 것은 조소앙이 마련한 임시정부의 
<당헌>과 <건국강령>이 대한민국의 <헌법>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조소앙은 독립운동의 방향과 목표를 정하고, 국민주권에 기초하여 임시정부수립 
이론을 전개하였습니다.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하여 임시정부 수립의 당위를 
기도하고, 1918년 <대한독립선언>을 집필하여 무장투쟁론을 제시하는 한편 1919년 
도쿄 2ㆍ8독립선언과, 3.1독립혁명의 단초를 열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는 
<임시헌장>을 마련하고 일제패망을 내다보면서는 <건국강령>을 준비한 것도 
그였지요. 
조소앙의 신념체계와 정책기조는 삼균주의입니다. 삼균주의란 개인간, 민족간, 
국가간의 균등을 말하고, 정치적 균등, 경제적 균등, 교육적 균등의 실현으로 삼균을 
이루어 세계일가(世界一家)의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평등주의 사상입니다. 
흔히 손문이 주장한 삼민주의의 아류처럼 인식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출발 시점과 
내용 그리고 이론면에서 차이가 많고, 오히려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는 이미 
1920년대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결점을 보완하는 이념체제로 삼민주의를 연구하고 
정책으로 내걸었습니다. 
1930년대부터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의 정당과 단체에서는 
당의ㆍ당강ㆍ정책으로 이를 채택하지요. 삼균주의는 독립운동 진영의 공통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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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이념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소앙은 이념적ㆍ학문적 동력을 어디서 공급받았을까요. 그는 대단히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이면서 유교ㆍ기독교ㆍ대종교를 경험하고, 불교ㆍ이슬람교와 
소크라테스 철학을 간접으로 경험합니다.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현장에서 체험했지요. 
그리고 단군ㆍ공자ㆍ예수ㆍ석가모니ㆍ마호메트ㆍ소크라테스, 여섯 성자를 아우르는 
육성교(六聖敎)를 제창하기도 한, 별난 경력과 이력을 갖고 있었지요. 삼균주의 이념은 
바로 이와같은 체험과 간접경험에서 우러나온 경륜의 집대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삼균주의가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독립운동 단체들의 정강ㆍ정책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여 비판과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삼균주의가 평등을 강조한 나머지 
자유나 정의ㆍ질서ㆍ평화 등에 대한 논구에 소흘한 것이나, 토지 및 중요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이상론이란 비판이 따랐지요. 이 때문에 이념적인 공격에 시달리기도 하고, 
해방 후 오늘까지 대중화의 족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일본제국주의였고 
1920~40년대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자세히 논급하겠습니다. 
해방 후 정통 독립운동가들의 생애가 그렇듯이 그의 삶도 불우했습니다. 분단을 
배척하고 통일정부수립론을 주창했지만, 단독정부 수립이 확고해지자 1948년 
5ㆍ10총선거에 입후보하여 전국 최다득표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지요. 
제헌헌법의 전문에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하고⋯⋯”라고 선언한 것은 임시정부의 헌법과「건국강령」의 정신을 그대로 
승계한 것이었습니다. 6.25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납북되었다가 1958년 9월 9일 
북쪽에서 사망했는데, 시신이 대동강에 떠올랐다는 증언도 있어서, 병사 아닌 자살설이 
제기되었으나, 아직도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론가이고 사상가이며 정치가이고 지사의 인격을 갖췄던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의 
파란곡절의 평전을 쓰고자 하니, 우선 그의 끝이 집히지 않는 사상의 넓이와 인격적 
깊이에 압도됩니다. 하지만 20세기의 대표적 사상사ㆍ역사학자인 홉스봄의 “21세기는 
분배의 시대”라는 주장이 아니더라도, 한국사회의 ‘99 대 1’의 빈부격차와 불균형 
상태를 우려하면서,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 는 오늘 우리 시대의 가치, 한국이 
추구해야하는 정책이 되어야 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의 평전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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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삼균주의는 위기의 자본주의의 대안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1장] 오늘에 더욱 필요한 조소앙의 3균주의사상 2014/05/22 
08:00 김삼웅 
우리는 흔히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압축적으로 성취한 나라라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민주화’는 이명박ㆍ박근혜 정권에서 크게 역행하고 있지요. 정부가 민간인을 
사찰하고, ‘국’자 돌림기관인 국가정보원, 국군사이버사령부, 국가보훈처 등에서 
대통령선거부정이 감행되고, 이것을 정부가 처벌은커녕 보호하기에 급급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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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민의 피와 땀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처절하게 
짓밟히고 있습니다. 
‘경제대국’의 실상은 더욱 참담합니다. 엄마와 두딸이 전재산 70만 원을 전세와 
공과금으로 남기고 자살하고, 어떤 서민은 1일 감옥살이가 5만 원인데, 재벌은 5억 
원이고, 지난해 최태원 SK회장연봉이 301억 5,000만 원, 정몽구 현대차그룹회장 140억 
원, 김승연 한화그룹회장 131억 원, 이재현 CJ그룹회장 47억⋯⋯. 어떤 장관은 로펌의 
한 달 자문료가 1억 원이고,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퇴임하면 줄줄이 산하기관장으로 
내려가 몇 억대의 연봉을 챙깁니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인데, 그나마 정규직 노동자의 평균월급은 2013년 
연봉기준으로 3,036만 원, 비정규직의 평균월급은 141만 원이랍니다. 비정규직도 
못되는 수백만 명 무직자의 경우는 통계에도 잡히지 않지요.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후보는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정의의 천사가 되는 듯하더니, 당선되고는 뻥치고 
말았습니다. 최저임금을 협상할 때 노동자들이 시간당 몇 100원만 인상해 달라 
애원해도 정부와 기업은 손사레를 쳤지요. 참고로 올해 최저임금은 시간당 
5,210원입니다. 가히 천국과 지옥입니다. 
등록금이 없어 휴학을 하고 세월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홀어머니를 봉양한 
박지영씨,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나눠주면서 “너희들 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게, 
선원이 마지막이야” 말하고 시신으로 돌아온 박지영 씨와 
선주ㆍ선장ㆍ재벌ㆍ장관들이 같은 공화국시민일까요? 
한국사회의 가장 큰 위기는 지나치게 벌어진 빈부격차 곧 양극화현상입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집단자살이고 ‘묻지마 범죄’로 나타납니다. 자살률 세계최고라는 불명예는 
‘10대 경제강국’의 반사경이지요. 
실정이 이런 데도 위정자와 재벌기업들이 위기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프랑스혁명 
전야의 마리 앙뜨와네트나 재무장관 차르 알렉산드르 칼론과 비슷한 수준이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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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 코끼리 떼가 초원을 짓밟아버리고, 사자 무리가 초식동물을 모조리 
잡아먹으면, 다음 차례는 자신들이라는 이치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매ㆍ무지ㆍ탐욕의 삼박자입니다. 
우리 사회는 ‘분배’를 말하면 종북으로 몰지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종북타령’처럼 호제도 다시없겠지요. 한데 요즘은 이것도 하도 써먹어서 잘 먹히지 
않은 것 같더군요. ‘더불어 같이 사는 것’이 민주공화제의 기본인데, 한 쪽은 배 터져죽고 
한 쪽은 배 곯아죽는 구조는 종북ㆍ반북을 넘어 스스로 묘혈을 파는 파멸 행위인데도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자본주의라는 200년이 넘은 낡은 열차는 위기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자유주의 도입 이후 시장질서는 한 우리 안의 ‘사자와 양’의 대결장이 
되고 말았지요. 구 소련의 공산주의는 외부에서 총 한 방 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무너지고 따라서 자본주의는 경쟁자가 사라지면서 더욱 탐욕스러워져가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불황과 금융위기가 거듭되고, 신제국주의국가들은 다시 전쟁터를 찾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정의를 지키지 않고, 국민이 삶에 보람과 가치를 갖지 못할 때 그런 
사회는 붕괴됩니다. 정부기관이 부정선거를 해도 책임지지 않고, 국가기관이 간첩을 
조작하고도 그냥 넘어가는 사회라면,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들만 탓할 수는 없겠지요. 
플라톤의 경구대로 “정의가 배제된 권력은 강도집단”이 되고 말지요. 
사설이 길어졌습니다마는, 제가 조소앙의 평전을 쓰면서 ‘삼균주의’에 관심을 갖게된 
배경입니다. 근 1세기 전에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 이와같은 철학과 경륜을 갖춘 
선각자가 있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혹자는 말 할 것입니다. “균등분배라니, 공산당하자는 주장이냐”. 이같은 단세포적인 
인식은 금물입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자본주의는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수정하지 
않으면 파탄 납니다. 힘 센 국가들은 전쟁을 통해 위기를 해소하려 하겠지요. 과거 
세계대전이 공황에서 비롯된 것을 다 알지 않습니까. 고장난 선박을 수리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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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적을 거듭하면 세월호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는 현시점에서 채택할 것도 있고 수정할 부분도 있으며 버려야 
할 대목도 적지 않습니다. 다만 진보ㆍ보수, 좌ㆍ우 이데올로기의 편향성을 접고, 
나라를 살리고, 천민성자본주의를 수정하고, 우리 공동체인 ‘민주공화’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관심을 가져야할 것 같습니다. <삼균사상가 
조소앙평전>을 연재하는 이유입니다. 
조소앙의 연구에는 고 홍선희 선생의 <조소앙의 삼균주의연구>를 시작으로 김기승 
교수의 <조소앙이 꿈꾼세상>을 비롯하여 여러 선학들의 많은 연구 성과가 있습니다. 
이분들의 성과를 참고하겠습니다. 
많은 편달과 애독을 기원합니다. 
[3회] 명문가 후예, 성균관에서 수학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2장] 출생과 학문, 일본유학시절 2014/05/23 08:00 김삼웅 
조소앙(趙素昻)의 본관은 함안, 본명은 용은(鏞殷), 자는 경중(敬仲), 호가 소앙이다. 
본명보다 호가 널리 알려진 사례가 된다. 1887년 4월 8일(음력) 경기도 교하군(현 
파주군) 월롱면에서 아버지 조정규와 어머니 박필양의 6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일본 유학 중에는 아은(亞隱)ㆍ소인(素印)ㆍ소앙(蘇昻)ㆍ소해(啸海)ㆍ한살임(韓薩任) 
ㆍ아나가야후인(阿那伽倻後人)이라는 별명을 쓰다가, 1920년대 이후에는 소앙으로만 
사용하였다. 
장남은 용하, 삼남은 용주, 사남은 용한, 오남은 용진, 육남은 용원이다. 부친이 아들들의 
이름을 지을 때에 중국 왕조 명칭인 하ㆍ은ㆍ주ㆍ한ㆍ진ㆍ원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중국 역대 왕조의 이름을 자식들의 이름으로 지은 경우는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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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의 선조 중에는 세조의 단종 폐위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를 비롯하여, 선대 중에는 고관대작과 절의를 중히 여기는 
인물들이 많았다. 증조부와 조부도 학식이 풍부한 한학자였다. 가계는 먹고 살 만큼의 
재력이 있었던 것 같다. 
조소앙은 5세부터 15세까지 할아버지 조성룡(趙性龍)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대단히 
총명하여 어려서 <제자백가>ㆍ<사서오경>을 독파하였다고 한다. 
조소앙이 태어나고 자랄 시기는 안으로는 국정의 문란으로 민란이 일어나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탈이 시작되는 혼란기였다. 태어나기 한 해 전에는 거문도를 점거했던 
영국군이 철수하고, 5세 때에 동학교도들의 삼례집회가 열리는가 하면 1894년 1월에는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소앙은 15세 때인 1902년 상경하여 성균관 경학원에 입학하였다. 그가 청소년기 
2년을 보낸 성균관은 조선시대 인재양성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교육기관이었다. 조선 말기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성균관에 경학원이 부설되었으나 
특수 귀족학교의 성격을 갖게 되어 개화풍조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1895년에 성균관의 
관제가 새로이 마련되었다. 개화의 물결 속에서도 우리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나가는 동시에, 근대화에 대처해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한 것이다. 
경학과의 학제가 바뀌어 3년제 학제로서 전ㆍ후 2학기로 구분되었으며, 입학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되 20세 이상 40세까지의 연령 제한을 두고, 졸업시험에 합격한 
자에게만 졸업증명서를 주어 졸업시켰다. 1896년부터는 3년 학제가 다시 바뀌어 매년 
말에 시행하는 시험으로 수업 연한이 조정되었다. 조소앙이 입학했을 때의 학과목은 
유학을 비롯하여 본국역사, 만국역사, 만국지지, 산술 등을 가르쳤다. 
‘20세 이상’의 연령 제한에도 불구하고 조소앙이 15세에 입교한 것으로 보아 
입교기준이 문란했거나, 출중한 능력때문에 특별 전형이 가능했을 지 모른다. 조소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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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15세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신채호 등과 항일성토문을 작성, 역신 이하영 등의 
매국음모를 규탄하였다. 신채호는 1898년(19세) 가을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 해 10월 
경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11월 5일(음)에 체포되었다. 이 때에 조소앙이 
교류한 사람은 신채호 외에 변영만ㆍ김연성ㆍ류인식 등이 있었다. 조소앙은 이들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주자학의 틀을 깰 수 있었다. 
1904년에 성균관을 2년 만에 마친 조소앙은 황실특파 유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하고 
10월 인천을 출발하여 일본에 도착하였다. 11월에 동경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한다. 
최남선ㆍ최린 등과 함께였다. (주석 1) 
조소앙이 당시 유력자 가문의 자손들이 택한 관료의 길을 접고 일본 유학을 택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백형 조용하의 영향때문이었다. 조소앙보다 5년 연상인 
조용하(1882~1937)는 1901년 독일주재 참사관으로 부임한데 이어 죽산ㆍ이천ㆍ마전 
등 군수를 역임했다. 이어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베이징으로 망명하고, 
1913년에는 만주에서 이상룡ㆍ이시영ㆍ이동녕 등과 경학사 활동에 관계하였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서 한국독립단, 한인협회 등을 조직하고, 1921년에는 
<신한민보> 창간을 주도하여 독립운동과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1932년 상하이로 가던 
중 일본에서 피체되어 경성으로 이감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병보석 중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주석 2) 대단히 일찍 개화한 인물 중의 하나다. 
주석 
1> 홍선희, <조소앙의 삼균주의 연구>, 22쪽, 한길사, 1882. 
2> 앞의 책, 20~21쪽. 
[4회] 관비 일본유학생으로 뽑혀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2장] 출생과 학문, 일본유학시절 2014/05/24 08:00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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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형의 권유로 관리의 길을 접고 일본 유학을 택한 조소앙에게 ‘10년 일본 유학’은 그의 
학문연구와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같은 물을 먹고도 소는 젖을 만들고, 뱀은 독을 
생산하듯이, 같은 일본 유학을 하고도 대다수는 친일파가 되었지만, 조소앙은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조소앙의 일본 유학 결심에는 박형의 권유도 있었지만 1904년 2월 한일의정서의 체결 
소식이 작용하였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급박해지자 1904년 1월 23일 
한국정부는 ‘엄정중립’을 내외에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반도에 군대를 상륙시키고 
자기네에게 협력할 것을 강요ㆍ협박하여, 2월 23일 외부대신서리 이지용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께의 명의로 6개항의 한일의정서가 체결하였다.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일본이 한국 식민지화의 제1단계로서 한국을 강압하여 체결한 굴욕적인 의정서였다. 
조소앙은 한일의정서 체결 소식을 <황성신문> 보도를 통해 알고 크게 분개하면서 
성균관을 중퇴하고 일본 유학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성균관 경학과를 2년만에 마친 
셈이다. 
마침 정부에서는 신교육의 명목으로 황실유학생을 선발하고 있었다. 1904년 7월 28일 
시행된 일본파견 유학생선발 시험에는 700여 명의 정부 고관의 자제가 응시하였다. 
작문 시험 제목은 <유학은 반드시 충효를 근본으로 해야 함>이었다. 50명을 뽑는 선발 
시험에 조소앙은 합격하였다. 성균관 출신인데다 총명했던 그는 쉽게 합격할 수 있었다. 
명문가인데다 백형이 독일주재 3등 서기관이고, 종숙 조원규는 선발된 유학생을 
인솔하는 인솔위원이어서 황실특파유학생 선발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조소앙이 성균관 입학이나 황실특파유학생으로 선발된 것은 고종시대 개혁정책의 
특혜를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15~25세의 양반 관료 자제 50여 명의 황실특파유학생은 1904년 10월 9일 영솔위원 
조원구의 인솔 아래 인천항을 출발→일본 시모네세끼→고베→오사카→교토를 거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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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도쿄에 도착했다. 이들은 11월 5일 동경부림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동경부림제일중학교는 1879년 창립된 학생수 800명, 교수 50명 규모의 명문 
중학교였다. 이때 조소앙과 함께 입학한 학생은 최린ㆍ최남선ㆍ유승훈ㆍ이승근 등 
모두 45명이었다. 이들 중 조소앙보다 어리거나 동갑내기인 학생이 5명에 불과했고 
대부분 연상이었다. 대한제국 학부에서는 이들 유학생들의 교육ㆍ기술ㆍ감독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중학교 측에 위촉하였다. 
이에 따라 중학교에서는 특설한국위탁생과를 속성과로 별도 개설하여 이들을 
수용하였다. 학생의 교비나 기숙사비 등 일체의 비용은 한국의 궁내부에서 지급하게 
되어 있었다. (주석 3) 
아직 어린 나이의 조소앙에게 일본유학의 특전은 행운이었다. 성균관에서 기초학문을 
배운 터여서 학과 수업이 어렵지는 않았다. 입학 초기에는 일본어의 미숙으로 저급반에 
편성되었다가 얼마 후에는 상급반으로 편성되었다. 함께 입학했던 유학생 40% 이상이 
중도에 퇴학한데 비해 조소앙은 유학생활에 잘 적응하였다. 
조소앙은 일본동경부림제일중학교 재학 중에 을사늑약의 소식을 들었다. 이에 통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한국 유학생들을 모욕하는 이 학교 가츠우라 교장의 
인터뷰 기사가 일본 신문에 보도되었다. 가츠우라는 한국 유학생들을 평하여 “일본어 
향상은 놀랍도록 빠르지만 수학과 기타 과학 등에 대해서는 형편없기 짝이 없다. 그 
열등한 정도로 말하면 25~32세까지 어른의 수리 두뇌는 일본 소년의 수준에도 못 
미친다고 말해도 좋다고 생각 한다”고 떠벌였다. 그는 이어서 수학ㆍ이학 등에 대한 
기초가 없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은 무리’라고 단정하였다. (주석 4) 
가츠우라의 이 발언은 을사늑약의 체결로 가뜩이나 울분에 차 있었던 한국 
유학생들에게 휘발유를 뿌리는 격이었다. 사설 서당 등에서 정통 유학을 공부해온 한국 
유학생들이 수학이나 이과분야에 수준이 뒤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학교 책임자의 비교육적인 언사는 한국 유학생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손상시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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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했다. 
조소앙 등 한국 유학생들은 회합을 거듭한 끝에 12월 5일 동맹휴교를 결의하고 37명 
전원이 기숙사의 퇴사를 결행했다. 동맹휴학은 교장의 망언이 계기가 되었지만, 한국 
유학생들은 그동안 학교당국의 감시와 차별대우에 격분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방과 후에도 외출을 금지당하고, 기숙사에는 사감 2명을 배치하여 모든 
행동을 감시하였다. 교과과목도 국가주의적 복종윤리와 
일본어ㆍ일본역사ㆍ일본지리ㆍ일한 비교문법 등이 중심이었다. 한국 유학생들이 
바라던 근대학문에는 소홀히 하였다. 
한국유학생들은 한국정부와 학교 당국의 설득에도 한동안 복교하지 않았다. 37명 
전원의 퇴학이 확정되고, 진로 문제는 유학생들의 자유의사에 맡겨졌다. 이 같은 조처가 
조소앙에게는 행운이었다. 중학 1년 만에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석 
3> 아부 양(阿部 洋), <구한말의 일본유학> 2, <한(韓)>4, 96쪽, 1974, 김기승, <조소앙이 
꿈꾼세상>, 27~28쪽, 재인용, 지영사, 2003. 
4> 김기승, 앞의 책, 30~31쪽, 재인용. 
[5회] 명치대학에서 법학 전공, 민족의식 싹터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2장] 출생과 학문, 일본유학시절 2014/05/25 09:56 김삼웅 
조소앙은 1906년 1월 11일 명치대학 입학 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선배 최석하 등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다. 최린ㆍ유승흠ㆍ한상우 등과 함께였다. 집에서 보내준 돈으로 
입학금과 월사금을 납부하고 하숙집을 학교 근처로 옮겼다. 이제부터는 대한제국 
정부의 장학생이 아니어서 등록금과 하숙비 등은 완전히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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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은 아직 여력이 있었기에 학비 마련이 가능했다. 
명치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법률공부를 하고 있을 때 한국 정부에서 복교 명령이 
나왔다. 22세 이하인 자는 중학교에 재입학하고, 23세 이상인 자는 전문학교에 
진학하기로 한일 두 나라 정부의 협약이 이루어졌다. 조소앙은 중학교 복교 대상이어서 
1906년 3월 31일 명치대학을 퇴학하고, 4월 28일 동경부림제일중학교에 재입학했다. 
동경부림제일중학교에서 조소앙의 학업성적은 양호한 편이었다. 중학교 1년 과정은 
3학기체제였는데, 매학기 시험을 보았다. 시험문제에서 특징적인 것은 영어와 일어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과목이 주관식 논술형으로 출제되었다는 점이다. 
역사ㆍ수신ㆍ지리 시험 문제는 물론 이과나 박물 등 과학 시험도 개념이나 실험방법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문제가 출제 되었다. 첫학기 조소앙은 갑조 12명 중 2위의 성적을 
차지했다. (주석 5) 
조소앙은 1907년 3월 31일 우수한 성적으로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과 더불어 
한국유학생감독부 내에 설치된 보습과를 다니고, 11월 1일부터는 정칙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영어공부에 집중하였다. 대학진학에 필수코스였기 때문이다. 
조소앙이 대부분 일본인 학생인 명치대학 고등예과에 입학한 것은 1908년 3월 3일이다. 
이 학교 고등예과는 1년 6개월의 3학기 과정으로, 그는 1909년 7월 1일 학업을 마쳤다. 
그리고 이 해 9월 13일 명치대학 법학부 본과에 입학하였다. 법학부에서는 형법각론, 
상법총칙, 법리학, 민사소송법, 행정법, 민법물권, 민법채권 등을 공부하였다. 
조소앙은 법학 공부에 별로 흥미를 갖지 못하였다. 1학년 시험성적은 61.9점으로 
26명중 25등으로 참담한 결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결과는 법학에 대한 흥미가 없었던 
것도 이유지만, 1910년 국치 소식을 들으면서 갖게 된 울연한 심경이 공부에 전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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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달리 영특하고 국가의 운명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국치는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기독교였다. 국치를 전후하여 기독교에 입교했으며, 
1911년 10월 22일에는 사원보 목사와 전덕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조소앙은 1912년 7월 명치대학을 졸업하였다. 2학년 진학시험에는 성적이 좋아서 
우등상을 받았지만, 그의 대학시절은 망국의 시대여서 정신적 고통이 적지 않았다. 
다음의 자전 기록에서 이 시기 그의 심경의 일단을 찾게 된다. 
내가 동쪽으로 유학 온 지 어느덧 8년이 되었다. 옛 일을 더듬어 생각해보니 흐느끼며 
통곡할 일이 많았다. 내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것이 털끝만큼이라도 있었는가? 고개 
숙이고 학교에 매일 가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이것이 어찌 중생을 구제하는 
길이겠는가. (주석 6) 
조소앙을 가장 먼저 학문적으로 연구한 홍선희는 그의 <약전>에서 일본 유학 시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904. 2 (17세) : 성균관 수료. 
1904. 7 : 황실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동경의 모 중학에 입학. 이 해에 백형 용하가 
백림(베를린)에서 보내준 <손문전>과 고리키 작품을 받아 읽음. 
1905(18세) : 동경 유학생들과 상야(上野) 공원에서 7충신 추모대회를 열고 일진회의 
매국 행위를 규탄. 
1907. 1(20세) : 미국에서 귀국차 동경에 들른 도산 안창호와 회견. 국채보상운동에 
참가. 
1909. 1(22세) : 동경에 대한흥학회를 창립. 5월에 회보를 창간. 이 해에 명치대 법과 
재학 중 중국혁명가 재계도(載季陶)와 접촉. <대한흥학보>에 4편의 에세이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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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23세) : 일본 (혹은 국내)에서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 받음. 합방을 전후해서 
비상대회 소집에 실패, 문자와 집회사건으로 연금당해 철학연구에 착수(이 해에 일시 
귀국 여부 불명) 
1911 (24세) : 중국 망명계획 중 헌병대에 구금됨. 
1912 (25세) : 명치대 법학과 졸업. 국내의 경신ㆍ양정ㆍ대동법률전문 등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음.(주석 7) 
조소앙의 8년 일본유학은 을사늑약과 경술병탄 등 망국과 국치의 기간이었다. 법학을 
공부하면서 적잖게 회의감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학문이 조국을 위해 어디에 쓸모가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들었을 거였다. 이 기간 기독교에 입문하여 신앙인이 되고 틈틈이 
철학을 공부하여 사고와 세계관의 폭을 넓혔다. 법학연구는 훗날 독립운동 과정에서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시 헌법기초위원으로서 입정의 법체계를 
확립하는데, 그리고 1940년대 건국을 준비하기 위해 임정 건국강령을 기초하는데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대학 4년 동안의 법학 
교육에서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는 훈련을 한 셈이었다. 삼균주의 
이념의 체계화 작업은 이러한 논리적 훈련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주석 8) 
주석 
5> 앞의 책, 35쪽, 재인용. 
6> 조소앙, <동유략초>, 1911년 5월 7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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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홍선희, <조소앙의 삼균주의연구>, 22~23쪽, 한길사, 1982. 
8> 이기승, 앞의 책, 51쪽. 
[6회] 재학중 망국소식 듣고 민족운동 전개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2장] 출생과 학문, 일본유학시절 2014/05/26 08:00 김삼웅 
조소앙은 일본 유학에서 폭넓은 독서와 교우관계, 한인유학생단체 참여, 저명 인사들의 
강연 등을 통해 자기 철학을 정립하고 민족주의사상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당시 일본은 
이웃 나라 침략 전쟁, 한국병탄 등 제국주의적인 국가였으나 국내적으로는 어느 정도 
자유와 민권이 보장되었다. 조소앙은 명치대학 법학부의 자유주의적인 학풍에서 
다양한 사상과 인물을 접할 수 있었다. 
그가 이 시기에 탐독한 책 중에는 일본 자유민권사상가 바바의 <천부인권론>, 파알젠의 
<윤리학대계>, 쿠로이와 루이코우의 <천인론>을 비롯하여 <무정부주의>, 
<동아외교사>, <논리학대계>, <정치강요>, <천인론>과 동양고전으로 <논어>, <시경>, 
<맹자>, <도덕경>, <장자>, <석가모니전> 그리고 <고려사>와 <동양역사> 등이었다. 
그의 폭넓은 지식과 교양은 동경 유학시절에 읽거나 강연을 통해 축적된 학식이 바탕이 
되었다. 관비유학생 의장으로 선임되고, 조선유학생친목회가 창립되었을 때에는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홍명희ㆍ문일평ㆍ안재홍ㆍ송진우 등과 교우하면서 
재동경한국유학생회를 이끌었다. 그는 또 <천부인권론>을 번역하여 동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인권사상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조소앙이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게 된 첫 사건은 한국병탄 직후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준비하다가 일제 관헌의 방해로 좌절되고, 이로서 1910년 8월 26일부터 9월 14일까지 
경찰에 체포되어 극심한 신문을 받게 되었다. 그는 관비유학생이라는 조정에 대한 
부채의식도 없지 않았으나, 본질적으로는 민족에 대한 애착심이 누구못지 않게 강했다. 
그에게 동경유학 생활은 폭넓은 학문과 더불어 망한 민족의 독립을 강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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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사상의 발아기였다고 하겠다. 
1910년 국망 이후 그에게서 확인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은 한민족을 구하고, 빈궁한 
민중을 구제하는 것을 ‘천계’로 받아들이는 철저하면서도 비장한 책임의식과 
사명감이다. 이러한 비장한 사명감은 차후 그의 독립운동의 정신적 밑바탕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빈궁한 민중의 구제에 대한 관심은 훗날 구체화되면서 평등사회 
실현이라는 이상사회론으로 발전하였다. 그의 경우 일본유학 시기에 이미 추상적인 
형태로나마 삼균주의의 핵심요소인 평등의식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주석 9) 
앞에서 소개한 홍선희의 <약전>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강만길 교수가 삼균학회에서 
발행한 <소앙선생 문집> 下 등을 발췌하여 정리한 <조소앙연보>에는 조소앙의 일본 
유학시절 민족운동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1906년(20세) : 동경유학생들과 제휴하여 반일운동의 일환으로 스트라이크를 일으키는 
한편 공수학회를 조직하고, 학보(주필)을 발간하여 배일사상을 고취. <2천만 동포에게 
고하는 글」등 발표. 
1907년(21세) :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하여 단지동맹을 조직하고 활동. 한일신협약에 
분개하여 반일시위운동전개. <동고아(慟告我) 2천만 동포>등 <대한매일신보>에 발표. 
1908년(22세): 공수학회(동경유학생 친목단체) 평의원 겸 동 회보 주필로 활약. 
전명운ㆍ장인환 의사의 스티븐슨 사살 의거를 계기로 동경유학생들과 반일운동대회를 
열고 매국도당을 성토하며 항일운동을 적극 추진, 하기 방학에 일시 귀국하였다가 
부인과 함께 도일하여 동거. 
1909년(23세) : 대한홍학회를 창립, <대한흥학회보>(주필)를 발간하여 국내외 각 
학회ㆍ신문 등과 호응하여 배일 사상을 고취, 여기에 4편의 글을 발표. 장남 출생. 
1910년(24세) : 한일합방 성토문과 위임장 2통을 작성하여 국내의 윤치호ㆍ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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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게 전달하고자 이창환을 국내로 밀파. 비상대회의 비밀소집이 일경에 밀고되어 
피검, 신문을 당함. 합방의 분개로 신경 쇠약에 걸리고, 두 형사의 감시로 연금. 
1911년 (25세) : 중국 혁명지사들과 교류를 통해 중국에 혁명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중국 망명계획을 세우던 중 105인사건 일어나 일 헌병대에 구금당함. 
1912년(26세) : 명치대학 법학부 졸업하고 귀국. (주석 10) 
조소앙은 동시대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청소년기에 국제적인 체험을 겪고, 법학의 
전문성과 동서의 근대학문에 접하게 되었다. 이 같은 전문성과 연구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크게 기여하였다. 
주석 
9> 앞의 책, 95~96쪽. 
10> 강만길 편, <조소앙>, 300~301쪽, 한길사, 1982. 
[7회] 베이징에서 독립운동가들과 박달학원 설립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3장] 중국망명, 독립운동의 길에 나서다 2014/05/27 08:00 
김삼웅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조소앙은 잠시 경신학교, 양정의숙, 대동법률전문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중국 망명을 준비하였다. 일본에 있을 때 상하이에 있던 신규식 
등과 연계가 있어서, 그의 연락을 기다리던 중 중국 혁명지사 황각(黃覺)의 내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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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로 중국망명을 계획을 서둘렀다. 
상하이에서는 해외 독립운동 최초의 단체인 동제사가 1912년 7월 신규식ㆍ박은식 등이 
독립운동가와 유학생, 교민들에 의해 창립되고 있었다. “어려움을 당하면 같은 배를 
타고 함께 건넌다”는 뜻으로, 나라 잃은 동포들이 함께 나누고 서로 통하는 의미의 
동제사는 이사장 신규식, 총재 박은식이 선임되고, 주요 간부에는 
김규식ㆍ신채호ㆍ박찬익ㆍ조성환ㆍ이광ㆍ신석우ㆍ변영만 등이 참여하였다. 
1913년 27세가 된 조소앙은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당시 상하이는 최신 
사조를 접할 수 있는 국제도시이고, 중국혁명(신해혁명)의 중심지였으며 정치활동이 
자유로워서 일제식민지에서 고통받는 조선청년들에게는 학문과 독립운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신규식 등이 설립한 박달학원은 영어반과 중국어반으로 나누어 전문적으로 어학을 
가르치고 교과목으로 영어ㆍ중국어ㆍ수학, 그리고 민족의식을 키워주기 위하여 조선의 
역사ㆍ지리과목을 교수하였다. 교육기관은 1년 6개월 과정이었으며, 모두 3기생을 
배출하였는데, 이동안 100여 명의 인재가 배출되었다. 
조소앙은 박달학원의 교수로 참여하였다. 김규식ㆍ박은식ㆍ신채호 등과 동경유학 
시절에 사귀었던 홍명희ㆍ문일평도 교수진이 되었다. 쟁쟁한 민족주의 역사학자들로 
구성된 교사진이었다. 외국인 교사는 중국혁명운동가 농죽(農竹), 미국인 화교 모대위( 
毛大衛) 등이다. 박달학원을 마친 청년들은 근대학문을 더 공부하기 위하여 미주나 
유럽으로 떠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청년들은 동제사의 주선으로 중국 내의 
각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다. (주석 1)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은 동제사, 박달학원에 이어 1913년 초 중국 혁명운동가들과
28 
합작으로 신아동제사를 창립하였다. 조소앙도 참여한 신아동제사의 중국혁명가는 
진영사(陳英士)ㆍ진과부(陳果夫)ㆍ황각ㆍ재계도 등이었다. 신아동제사는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한ㆍ중 혁명운동가들을 연결하고, 양국민의 우의를 증진시켜 상호 협조 
속에서 혁명운동을 전개한다는 목표로 창설되었다. 
한ㆍ중 협력기관으로 처음조직되고, 여기 참여한 중국측 인사들이 중국혁명정부의 
중추세력이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중국혁명정부와의 유대가 가능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아동제사는 한국독립운동사에 크게 기여한 
조직이다. 
조소앙은 신아동제사의 활동과 함께 만주를 거쳐 상하이에 온 동생 용주 등과 함께 
중국혁명지사들과 공동발기로 아시아민족 반일 대동단을 조직하였다. 중국측 참여자는 
국민당 원로 장박천(張博泉)ㆍ대동당 발기인 황각, 국민당 조직부장 진과부 등이었다. 
상하이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1915년 3월 동제사의 중추인 신규식ㆍ박은식 등이 해외 
각지에 분산된 독립운동세력을 연대하여 독립전쟁을 치루고자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연해주의 이상설, 베이징의 유동열ㆍ성낙형, 북간도의 이동휘ㆍ이동춘 등 
독립운동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신한혁명당은 중국과 러시아지역은 물론 
국내에까지 비밀 지부를 설치하였다. 
신한혁명당은 본부장 이상설, 재정부장 이춘일, 교통부장 유동열, 외교부장 성낙형, 
감독 박은식, 상하이 지부 신규식, 한구 김위원, 연길현 이동춘, 평양 정항준, 회령 
박정래, 나남 강재후 등의 지도체계를 갖추었다. 
조소앙과 홍명희 등도 신한혁명당에 참여하였을 것이나, 연령이나 독립운동 연조로 
보아 아직 직책을 맡기는 어려웠던 것인지, 명단을 찾기 어렵다. 
주석
29 
1> 이명화, <박달학원>,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524~525쪽, 독립기념관, 2004. 
[8회] 국민정신통일 방안, ‘육성교’ 구상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3장] 중국망명, 독립운동의 길에 나서다 2014/05/28 08:00 
김삼웅 
이 시기에 조소앙은 독특한 활동을 하였다. 국내외 동포의 대동단결을 정신적으로 
유도하기 위하여 종교통일의 방안으로 ‘육성교(六聖敎)’를 제창한 것이다. 그는 
일본유학 시절부터 육성교를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통 유학과 근대 교육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기독교에 입문하고서도 불교와 이슬람 등에 관심과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유교ㆍ불교ㆍ기독교를 소개하면서 모든 종교는 ‘권선징악의 도’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고 했다. 그리고 공자ㆍ석가ㆍ예수를 세상에서는 ‘삼성(三聖)’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중 어떤 종교를 선택해야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동양의 
한국인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 문제에 대해 사고했다. 
그는 종교 선택의 원칙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실행주의요, 둘째는 임성자적( 
任性自適)이요, 셋째는 종교적 이상이오, 넷째는 정치상 의미라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네 가지 원칙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은 유교를 종교화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주석 2) 
조소앙은 민족해방의 방략을 연구하면서 ‘육성교’를 구상하게 된 것 같다. 일본경찰서에 
구치되었을 때 읽었던 각종 철학ㆍ종교 서적에서 얻은 영감,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나 제3의 종교에 대한 열망 때문에 기독교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육성교를 
구상하게 되는 배경이다. 
조소앙은 1915년경 ‘육성교’라는 독자 종교를 구상하고, 그것은 <일신교령(一神敎令)
30 
>이라는 경문으로 표현하였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본래는 탕탕일신(蕩蕩一神)으로 유진유성(惟眞惟聖)이지만, 곧 만물지주요 백교지종( 
百敎之宗)이다. 
2. 일신이되 십상(十相)이 있어 그때그때에 현현하니, 
단군ㆍ불타ㆍ공자ㆍ소크라테스ㆍ예수 그리스도ㆍ마호메트 등의 대 성인이 모두 신자( 
神子)요 신의 성명(聖名)일 따름이다. 
3. 일신이 대도를 펴고 사학(邪學)이 맥출하여 아집과 미망에 빠지는 내세에 이르렀다. 
4. 성전표절, 교기망수, 골육상구, 인자를 멀리하고 잡혼, 마승을 따르느느 것, 파당을 
짓는 것, 이기ㆍ사욕에 따르는 사교의 유행, 물욕 때문에 형제를 파는 것 등이 모두 
말세의 증상 이다. 
5. 이대로 가면 10년 내외에 천량(天良)이 인멸하고, 질실순직지한 성품이 맹수와 같이 
될 터이니 큰 일이다. 
6. 신자는 모두 깨어나 신을 향해 기도하라.(이하 생략) 
7. 눈 앞의 고해를 건너감에 단단시일사순신(斷斷是一死殉神)과 영생도령지지성(永生 
靈之至誠)으로 하라. 
8. 신과 영은 천자, 본원일말류(本源 一末流)의 관계이니 신령감응이 가능하고, 그들이 
일치한 후에 심증선과하니 선지위원은 곧 진ㆍ선ㆍ미요, 진ㆍ선ㆍ미는 우주의 
본체이다. 
9. 영과 신이 합하면 유신이 방광하야 일체독립, 일체자유, 일체평등, 일체귀일, 
일체행복, 영생부활, 초월열반의 경지에 이르니 선지위덕이 크고도 멀다.
31 
10. 신의 일체육성(一體六聖)이 동원동심(同源同心)이니 신은 곧 육성상합지장(六聖相 
合之場)이요, 일신은 자비하사 인간을 위해 육자(六子)를 바쳤다. 
11. 일체지성이 육지(六池)를 비추는 것과 같고, 일월육초(一月六초). 일체육용(一體六 
用)의 관계에 있으니, 선은 육성의 궁극적 근원적 가치이며, 성신지도는 희생이고 
성의헌신이고 자지계(自持械)에서부터 출발한다. 
12. 중생을 영각케 하고 물과 물(物)을 선에 합하는 것이 일신의 사명이다. 
13. 일신이 육자를 희생시켜 중생을 구하고, 파괴지옥하는 애정을 깨달아라. 
14. 신자는 정성껏 수행여계하면 7일 이내에 단득영각할 것이다. 
15. 신국이 새로 만들어지는 데 쓸 사람이 없으니 신의 종도는 어서 깨닫도록 하라. 
(주석 3) 
조소앙이 육성교를 구상하면서 신의 제1인자로 단군을 택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나철에 의해 1909년 1월15일 서울에서 오기호ㆍ이기ㆍ박호암 등과 함께 단군교의 
중광식을 거행하고 제1대 교주가 되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단군을 신의 제1인자로 한 것은 1909년 1월에 나철이 단군교를 개창하고, 그 이듬 해 
7월에 대종교로 개칭하면서부터 재만독립운동자와 국내외의 국학자들을 중심으로 
단군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정신적 상황의 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실 
소앙 자신이 1930년에 상해로 망명한 것도 당시 대종교의 핵심간부이고 대표적 
이론가였던 아관 신규식과의 연락에 의한 것이었고, 바로 그때부터 그는 
신규식ㆍ박은식ㆍ신채호 등과 같이 행동하였으며, 동제사에서 세운 박달학원도 실은 
신규식이 주관한 것이었다.(주석 4)
32 
주석 
2> 김기승, 앞의 책, 104쪽. 
3> 홍선희, 앞의 책, 49~50쪽, 재인용. 
4> 앞의 책, 51쪽. 
[9회] 독립운동가들과 대종교에 참여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3장] 중국망명, 독립운동의 길에 나서다 2014/05/29 08:00 
김삼웅 
1900년대를 전후하여 나라의 운명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황실은 권력투쟁의 장(場) 
이 되고 지도층은 갈리어 청국에 기댄 위정척사파와 일본을 등에 업은 개화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국정은 세도정치로 부패타락하고 백성들은 가렴주구에 시달려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천주교가 들어와 반상의 신분질서를 바꾸고자 하였지만 정부의 혹독한 
탄압으로 수많은 순교자를 낸 채 지하에 숨어들었다. 동학농민군이 마지막 몸부림을 
쳤지만 외세가 들고온 신식 무기에 녹두꽃처럼 떨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이었다. 백성들은 육체적으로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황폐화되었다. 
이럴즈음 이땅에서는 각종 민족종교가 창도되어 신생(新生)의 횃불이 되거나 
혹세무민에 나섰다. 
천도교ㆍ시천교ㆍ청림교ㆍ상제교(上帝敎)ㆍ수운교ㆍ경천교ㆍ천도명리교(天道明理
33 
敎)ㆍ제우교(濟遇敎)ㆍ백백교ㆍ태을교(太乙敎)ㆍ보천교ㆍ단군교ㆍ대종교ㆍ원종교(元 
宗敎)ㆍ원불교ㆍ증산교 등이 치병에서 영혼구제ㆍ국난극복에 이르기까지 제각각 
사명을 제시하면서 창도되었다. 
민족종교 중에는 본래의 목표대로 정진하는 교단이 있었는가 하면 상당수는 변질되어 
친일 매국의 앞잡이가 되거나 국난기에 편승하여 혹세무민을 일삼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종교 중에서 대종교는 가장 격렬하고 줄기차게 일제침략자들과 
싸웠다. 대종교의 전신인 단군교의 전통과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단군교는 단군조선 시대부터 명칭을 달리하면서 연면한 전통으로 이어졌다. 
부여에서는 대천교, 예맥에서는 무천, 마한에서는 천군, 신라에서는 숭천교, 
고구려에서는 경천교, 발해에서는 진종교, 고려에서는 왕검교, 만주에서는 주신교, 기타 
다른 지역에서는 천신교라 불리면서 개국주(開國主)인 단군을 받들었다. 
단군숭배사상을 기초로 한 단군교는 옛날부터 단군을 시조(始祖), 국조(國祖), 교조(敎 
祖)로 신봉하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단군교는 사찰 본당과 대웅전의 
뒷켠 삼신각에서 간신히 잔명을 유지하고, 유교가 국교가 되면서는 공자나 주자에 
밀려났다. 기독교(천주교)가 유입되면서 ‘우상’으로 전락되고 일제강점기에는 말살의 
대상이 되었다. 
단군(교)의 존제가 새롭게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 몽골제국에 맞서 싸우면서 내부적으로 
민족의식ㆍ민족적일체감이 형성되면서 부터이다. 안으로는 무인정권의 폭압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세계를 제패한 몽골의 침략으로 국토가 쑥대밭이 된 민족수난기에 
내적인 민족통합의 정신적 일체감이 단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단군을 국조로 하는 일연 선사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편술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민족적인 위기를 국조를 중심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34 
몽골제국이 13세기 초에서 중엽까지 80여 년 동안 고려의 정치에 간섭할 때 나타난 
단군교가 20세기 초 일제의 침략으로 다시 국권이 위태로워지면서 국권회복의 
구심체로서 부활하였다. 몽골침략 이후 7백여 년간 단절되었던 단군교가 1910년 8월 
5일 나철이 대종교로 교명을 개칭하면서 국난극복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셈이다. 
단군교가 대종교로 명명한 날을 중광절이라 한 것은 단군신앙의 부활을 뜻하였다. 
‘중광’(重光:거듭 빛남)이란 국교(國敎)의 계승을 분명히 한 것이다. 
대종교가 중광을 계기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강하게 표명하면서 일제의 가혹한 
통제와 탄압이 따르게 되었다. 일제는 대종교를 항일구국운동의 비밀결사체로 
인식하면서 치안경계 대상으로 삼아 심하게 탄압했다.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된 대종교는 1911년 7월 21일 백두산 기슭의 화룡현 청파호(靑 
湖)로 총본사를 옮겼다.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사는 청파호에 총본사와 대종교 경각 등을 
짓고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청파호를 근거지로 삼아 4도본사를 각기 
청호ㆍ상해ㆍ서울ㆍ소왕청에 두고, 조선ㆍ중국ㆍ러시아 연해주 등 조선족이 사는 곳에 
학교를 세워 포교활동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조선총독부가 1915년 10월 1일 이른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대종교에 
포교금지령을 내리면서 공식적으로는 해방이 될 때까지 국내에서 포교활동은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대종교가 민족정통사상을 계승하면서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자 각지의 
애국지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대종교 중광의 주역인 나철은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라는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의 정신으로 독립운동과 
단군신앙을 일체화하였다. 이에 따라 대종교에서는 일제의 조선사왜곡에 맞서 단군에 
대한 서적을 대량 출간하였다.
35 
1914년에 <신단실기>와 <신단민사>의 발간을 시작으로 1922년에 <신고강의>, 
<신리대전>, <회삼경>, <신사기>, <조천기>, <신단민사>, <신가집>을 간행하였다. 
1923년에는 국문으로 된 <현토신고강의>, <신리대전>, <신사기>, <화삼경>, 
<신단민사> 등을 발간하고, 이와 함께 <신고강의>, <종라문답>, <신가집>, 
<배달족강역형세도>등 교적을 속속 간행하였다. 
대종교의 사서 간행은 1930~1940년대에도 이어져서 <삼일신고>, <신단실기>, 
<오대종지강연>, <종문지남>, <한얼노래>등을 펴내어 동포들을 교육하고 민족혼을 
지켰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걸쳐 대종교에는 독립운동계의 거물들이 참여하였다. 
신규식ㆍ박은식ㆍ홍범도ㆍ윤세복ㆍ신채호ㆍ김두봉ㆍ정인보ㆍ장지연ㆍ유근ㆍ김교헌 
ㆍ서일 등 당대의 민족사학자 대부분이 대종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종교 계열의 독립운동가 신규식은 나라 망한 원인을 “첫째는 선조들의 교화와 종법을 
잊어 버렸고, 둘째는 선민(先民)들의 공열(功烈)과 그 이기(利器)를 잊어버렸고, 셋째는 
제 나라의 국사를 잊어버렸고, 넷째는 나라의 치욕을 잊어버리게 되었으니 이처럼 
잊어버리길 잘하고 보면 그 나라는 망하게 마련이다.”라고 통분하면서 <한국혼>을 
지었다. 대종교의 ‘역사지키기’ 정신의 일환이었다. 
조소앙이 ‘육성교’를 제창하면서 단군을 윗자리에 올린 것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였다. 
기성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육성교’는 이단 또는 사이비종교로 보일 지 모르지만, 
1910년대 엄혹했던 민족현실에서는 국민정신의 ‘대동단결’을 위한 독립운동의 
방략이고 종교운동이었다. 
[10회] 신규식 등과 ‘대동단결선언’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4장] 두 가지 ‘독립선언서’ 작성하다 2014/05/30 08:00 
김삼웅
36 
조소앙은 1915년(29세) 육성교를 전도하고 국내 상황을 살피기 위해 만주를 거쳐 
국내로 잠입하려다 안둥에서 홍수를 만나 그곳에 머물렀다. 얼마 후 국내 밀사의 연락을 
받으며 입국하다가 경찰에 피검되었다. 총독부의 뜻이었던지, 중앙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할 것을 제의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국내에서 이종소 등 청년들과 배일운동의 지하단체 조직을 시도했지만, 경찰의 감시로 
성사되지 못하고, 1916년에는 대종(大腫)으로 반년 간이나 입원치료를 받았다. 이 해에 
감시 경찰을 피하며 다시 상하이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망명길이 해방으로 
귀국할 때까지 29년 동안 계속되었다. 
상하이로 돌아온 조소앙은 동생 용주, 중국인 황각 등과 대동당 결성을 추진하여 인도, 
중국, 대만, 필리핀, 조선, 베트남 등 7개국 지사들의 단결을 위해 중국 혁명가들과 
연대를 추진하였다. 조소앙의 행적이 이때까지는 아직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상하이에는 쟁쟁한 선배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소앙이 독립운동진영에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17년 7월 상하이에서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하고 독립운동가 14명과 공표하면서였다. 
신규식ㆍ윤세복ㆍ박은식ㆍ신채호ㆍ박용만 등은 독립운동의 활로와 이론의 정립을 
모색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수립에 관한 민족대회의 소집을 제의, 제창하는 
<대동단결선언>의 기초를 조소앙에게 의뢰하였다. 
이 ‘선언’은 1919년 3ㆍ1혁명으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기 2년 전에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창하는, 역사적인 문건이다. 조소앙은 일본유학과 중국망명기에 
중국사상가 강유위(康有爲)의 ‘대동사상(大同思想)’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동양적인 
전제정치, 계급제도를 부인하는 평등사상과 민권사상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를 
연구하였다. 또 박은식의 대동사상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그가 대동사상을 수용한 것은, 
여기에 담긴 국가 간, 민족 간, 계급 간 불평등을 지양하고 철저한 평등주의정신
37 
때문이었다. 
조소앙은 실제로 1916년 중국인 황각 등과 <대동당>을 추진한 적이 있고, 
1922년경에는 중국인 황개민(黃介民) 등과 <한울님>을 조직하여 김상옥 등을 
입단시키기도 하였다. (주석 1) 
일본이 국토를 강점하고 있으니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가 주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으므로 해외동포가 민족대회를 개최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조소앙의 주장은 
당시 국제정세와 독립운동의 상황 등 여건 변화에서 기인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노령과 만주지방의 독립운동이 러시아, 중국 정부의 
강압으로 봉쇄되었다. 이에 따라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간민회 등이 해체되고, 
심지어 노령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감금되거나 축출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노령에 있던 이 상설은 중국으로 건너와 신규식ㆍ박은식 등과 1915년에 신한혁명당을 
결성하는 등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국제적으로는 러시아에서 2월혁명이 일어나고, 핀란드와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하며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있어 같은 처지의 약소민족을 고무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참전으로 일본을 포함한 연합군이 우세해지고, 중국도 연합국에 기울어져갔다. 
독립운동도 전환되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해혁명에 참가했던 
신규식을 중심으로 <대동단결선언>이 나오게 되고, 조소앙이 역사적 문건을 
집필하였다. 
‘선언’은 주권불멸론과 융희황제의 주권포기론을 근거로 국민주권설을 정립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이념을 확립했을 뿐 아니라 정부의 통할체제를 계획하는 등 1917년까지 
다양하던 독립운동의 이론을 결집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이같은 ‘선언’의 계획은 당장에는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그 문서가 동포사회에 널리 
송달되었으며, <신한민보> 등 각처의 신문을 통해 계몽되면서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주석 2)
38 
‘선언’의 강령은 모두 7개항으로 되어 있는데, 앞의 3개항은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것이고,뒤의 4개항은 운영에 관한 것이다. 
제1항은 “해외 각지에 현존한 단체의 대소ㆍ은현을 막론하고 규합 통일하여 
유일무이의 통일기관을 조직한다”고 하여, 민족대회의 또는 임시의정원과 같은 것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제2항은 “중앙총본부를 상당한 지점에 치(置)하여 일절 한족을 통합하여 각지 지부로 
관할구역을 명정한다”고 하여 최고 행정부를 두고 그 산하에 지역별로 지부를 두자는 
것이다. 
제3항은 “대헌(大憲)을 제정하여 민정에 합한 법치를 실행한다”고 하여 헌법의 제정과 
법치주의를 천명하였다. 
제4항은 “독립 평등의 성권(聖權)을 주장하여 동화의 마력과 자치의 열근(劣根)을 
박멸하자”고 하여 국내문제에 대한 방책을 선언하고 있다. 
제5항은 “국정을 세계에 공개하여 국민외교를 실행하자”고 하여 국제외교를 
모색하였다. 
제6항은 “영구히 통일적 유기체의 존립을 공고키 위하여 동지간의 애정과 수양을 할 
것” 주장하였다. 
제7항은 위의 실행방법으로 “기성한 각 단체와 덕망이 유한 개인의 회의로 결정할 
것”이라고 하여, 제1항에서 결정한 회의에서 합의하여 실천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선언의 제일 끝에 찬동 여부의 회담통지서가 부착되어 있고, 단체와 개인에게 함께 
발송되었다. 
주석
39 
1> <한국독립운동사> 제4권, 516쪽. 
2> 조동걸,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 <한국학논총> 10, 국민대학교, 1987. 
[11회] 주권불멸론(고유주권론)에 의한 국민주권론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4장] 두 가지 ‘독립선언서’ 작성하다 2014/05/31 08:00 
김삼웅 
조소앙은 이 ‘선언’에서 주권을 상속받으면 국가적 행동을 실천해야 하는데, 그의 
실질적 가능성에 대하여 재정ㆍ인물ㆍ신용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해외동포를 1백만 명으로 계산하고 재정에서 1인당 반원, 합계 50만 원의 연수입으로 
공동사업을 운영하여 재정을 충당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대동단결을 강조하면서, 
이같이 단결과 재정이 마련되면 인물도 육성되고 합력이 더욱 공고해진다고 
역설하였다. 
조소앙의 <대동단결선언>의 원본이 뒤늦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6년 8월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도산 안창호의 유품에서 발견된 것이다. 표지만 모조지이고 
본문은 갱지인 이 문건은 세로 29cm, 가로 20cm의 12면에 인쇄되었다. 
‘선언’은 148행으로 엮어져 있는데 그 중에 18행은 대동단결의 필요성, 12행은 
국내참상, 50행은 해외동지의 역할, 18행은 국제환경, 끝의 12행은 대동단결의 
호소이고, 본문만은 118행이다. 그리고 <제의의 강령> 11행과 제의에 대한 답장 관계가 
19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권불멸론>에 대한 한 연구가의 분석이다. 
주권이란 민족고유한 것으로 융희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것은 국민에 양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권행사의 의무와 권리가 국민에게 있는데 국내 동포는 일제에 
구속되어 있으니 그 책임을 해외 동지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에서 기독교적 폭군방벌론이 자연법사상의 천부인권설(고유인권론)로
40 
발전하여 국민주권설에 이른 과정과 비교하면 국민주권설 입론의 방법이 흡사하여 
흥미로운 것이다. 국민주권설이 구한말에도 소개되고 또 신민회는 그에 근거하여 
공화주의 이념을 표방했지만, 어떤 경우도 서양의 천부인권설이나 사회계약론을 
도입한 논리였는데, ‘선언’이 주장한 국민주권설은 그와 달리, 민족사적 정통을 의식한 
논리전개로써 특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융희황제의 주권 포기를 단정함으로써 이조 왕실이 신국가건설에 끼어들 
여지를 봉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제의 주권침탈은 민족사적으로는 침략이지만, 
왕조사로 보면 주권의 포기이니, 그 주권의 행사권은 민족에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 동지난 당연히 삼보를 계승하야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유하도다. 고로 2천만의 생령과 3천리의 구강과 4천년의 주권은 오인 동지가 
상속하였고 상속하는 중이오 상속할 터이니 오인 동지난 차(此)에 대하야 불가분의 
무한책임이 중대하도다”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1910년대 꾸준히 계속되어온 광무황제의 옹립으로서 망명정부를 수립하려던 
신한청년당 등의 황보주의를 종결한 선언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주석 3) 
주석 
3> 조동걸,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 <한국학총론> 제19집, 
국민대한국학 연구소, 1987. 
[12회] ‘대한독립선언서’ 집필의 배경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4장] 두 가지 ‘독립선언서’ 작성하다 2014/06/01 08:00 
김삼웅
41 
조소앙은 1917년 <대동단결선언>에 이어 이 해 8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 
예정인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준비를 서둘렀다. 제2인터네셔널로도 
불리는 이 대회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비자본ㆍ비공산을 내세우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 유럽국가들 의 중심이데올로기로 떠올랐다. 
조소앙은 신규식 등과 이 대회에 참석하고자 했으나 경비 등의 이유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대신 조소앙은 한국독립의 역사적인 <주권불멸론> <주권민유론(主權民有論)>, 
<최고기관 창조의 필요론>을 골자로 하는 취지서를 작성하여 한국문제의 의제로 
제출하고, 이를 통과시키게 하였다. 한국독립문제가 국제회의(대회)에서 공식 논의된 
것은 망국 이후 이것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한국 대표가 참석하지 못한 대회의 결정은 
별다른 효과를 찾기 어려웠다. 
조소앙은 1917년 <대동단결선언>에 이어 이 해 8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 
예정인 만국사회당대회(제2 인터네셔널)를 앞두고 조선사회당을 창당하였다. 일제의 
패악을 폭로하고,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만국사회당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급조한 
터여서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는 비자본ㆍ비공산을 내세우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사회민주주의 이데올로기가 팽배하였다. 실제로 이를 택한 나라도 
적지 않았다. 스톡홀름대회는 이같은 여건에서 개최하는 국제행사였다. 
역사적으로 한국인의 사회주의 운동조직을 가장 먼저 결성했던 사람이 조소앙이었다. 
그것이 1917년 상해에서 신규식과 더불어 결성한 조선사회당이었다. 흔히 외교용 
전단조직이었다고 하지만 조소앙이 1919년부터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사회당의 
이름을 사용하였던 것을 보면, 단순한 전단정당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석 4)
42 
뒤에서 다시 논급하겠지만. 조소앙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은 모스크바의 공산주의 
이념이 아닌 독일사회민주당이나 영국의 노동당 노선에 가까운 편이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을 지원하기 위해 2년간 유럽을 
순방하면서 영국 노동당 인사들과 교우하고 하원의원에서 한국독립문제를 의안으로 
채택하게 하였다. 
또 해방 후에는 직접 사회당을 조직하여 정권경쟁에 나서는 등 그의 정치이데올로기는 
사회민주주의의 성향이 강한 편이었다. 연구가들 중에는 <대한독립선언>과 삼균주의 
사상에는 사회민주주의적 가치와 목표가 깔려 있다고 분석한다. 
조소앙은 1918년 국내외 동포들의 대동단결운동을 펴기 위하여 만주로 떠났다. 당시 
만주에는 무장독립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만주에서 
윤세복ㆍ이시영ㆍ윤기섭 등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고, 마침 이곳으로 
망명한 김좌진 등과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1919년 1월 27일(음력) 길림성 여준의 집에서 
여준ㆍ박찬익ㆍ황상규ㆍ김좌진ㆍ정원택ㆍ정운해등이 모여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다음날 의군부회의를 열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가까운 여러 곳과 구미에 
선언서를 보낼 것을 논의하였다. (주석 5) 
조소앙이 만주에서 행한 가장 큰 과업은 1919년 2월 길림에서 해외 지도급 독립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일이다. <무오독립선언서>로도 
불리는 이 선언서는 <2ㆍ8독립선언서>와 <3ㆍ1독립선언서>에 앞서 발표되고, 시기나 
내용, 서명자에 있어서 항일독립선언의 효시가 되었다. 서명자 중에는 쟁쟁한 
민족사학자, 언론인, 문인, 학자 출신이 있음에도 32세의 젊은 조소앙이 기초자가
43 
될만큼 그는 이미 독립운동가 진영에서 출중한 능력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선언서의 주요 서명자는 당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지도급 인사들이 총 
망라되었다. 가나다순의 서명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조소앙은 본명 조용은이라 썼다) 
김교헌ㆍ김규식ㆍ김동삼ㆍ김약연ㆍ김좌진ㆍ김학만ㆍ여준ㆍ유동열ㆍ이광ㆍ이대위ㆍ 
이동녕ㆍ이동휘ㆍ이범윤ㆍ이봉우ㆍ이상룡ㆍ이세영(이천민)ㆍ이승만ㆍ이시영ㆍ이종 
탁ㆍ이탁ㆍ문창범ㆍ박성태ㆍ박용만ㆍ박은식ㆍ박찬익ㆍ손일민ㆍ신 
성ㆍ신채호ㆍ안정근ㆍ안창호ㆍ임 
방ㆍ윤세복ㆍ조용은ㆍ조욱(조성환)ㆍ정재관ㆍ최병학ㆍ한흠ㆍ허혁ㆍ황상규. 
<대한독립선언>은 조소앙이 부주석으로 활동한 무장투쟁 단체 대한독립의군부가 
주체가 되어 서명자를 동원하고 문건을 기초하고 인쇄와 배포의 책임을 맡았다. 모필로 
쓴 것을 석판으로 약 4.000부를 인쇄하여,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배포하였다. 국내에 배포되었다는 단서는 아직 찾기 어렵다. 수취인(단체)들이 공개하기 
어려웠을 것이거나, 보안상 해외 독립운동가에게만 배포했을 지 모른다. 
‘선언서’의 구성은 <독립선언서>라고 제(題)한 부분, 본문, 발표 일자, 서명자 등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문은 35행으로 띄어쓰기와 마침표를 제외하고 
1,273자이며, 크게 네 부분으로 짜여 있다. 
‘선언서’는 먼저 ‘한일합병’의 무효를 선언하면서, 경술국치를 일본에 대한 주권의 
양도가 아니라 융희황제의 주권포기로 간주하고, 그것은 국민에게 주권을 선양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어서 이 독립선언으로 일본을 응징해야 할 것으로 규정하고, 
여러가지 이유를 열거하면서 독립군의 총궐기와 한민족 전체의 육탄혈전을 
촉구하였다.
44 
조소앙은 이 ‘선언’에서 해외망명 독립운동지도자들이 국내 동포의 위임을 받아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책임의식과 일본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절대 적임을 분명히 하고, 
항일독립전쟁은 하늘의 인도와 대동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신성하고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점을 분명히 적시하였다. 따라서 민족의 독립은 자기희생의 비장한 결단에 
의해 성취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3ㆍ1독립선언서>가 비폭력적인 저항을 선언한 데 비해 <대한독립선언>는 한민족 
전체의 ‘육탄혈전’을 촉구하여 무장전쟁론을 제시한 것이다. 국내와 국외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국망 이후 지도급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선언’에 ‘육탄혈전’을 천명한 
것은 최초의 일이다. 조소앙의 무장전쟁론의 의지를 살피게 하는 대목이다. 
‘선언서’의 중요한 대목은 <앞으로의 행동강령 다섯 가지>부분이다. 
1. 독립의 제일의 ­일체 
방편으로 군국전제를 산제하야 민족평등을 전구(전지구)에 
보시할 것. 
2. 독립의 본령­무력 
겸병을 근절하야 평균천하의 공도로 진행할 것. 
3. 복국의 사명 ­밀맹( 
密盟) 사건을 엄금하고 대동평화를 선전할 것. 
4. 입국의 가치 ­동권동수( 
同權同壽)로 일제 동포에 시(施)하야 남녀 빈부를 제하여, 
동현동수로 지우노유에 균하야 사해인류를 토할것. 
5. 대한민족의 응시 부활의 구경의(究竟義) ­진하야 
국제불의를 감독하고 우주의 
진선미를 제현할 것.(주석 6) 
‘선언서’의 핵심은 무어라해도 마지막의 ‘육탄혈전’이다. 이 부분은 “조소앙의 동생 
조용주의 직접 집필 내지는 그의 사상이나 논리 및 문투가 그대로 반영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주석 7) 
‘선언서’의 발표 시점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원본 선언서의 발표 일자는
45 
‘단군기원 4252년 2월 일’로 되어 있다. 4252년은 서기로는 1919년 2월이다. 1919년 
2월 1일이 음력 기미년 1월 1일이므로 ‘무오선언’이 되려면, 발표일이 1919년 1월 31일 
이전이 되어야 한다. 조소앙의 기록에는 1919년 2월경에 이 선언서를 발표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 ‘선언’은 1919년 3ㆍ1일 서울에서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후에 
발표되었다는 주장(송우혜)과, 1919년의 <2ㆍ8 독립선언서>보다 1개월 앞선 
주장(신용하)으로 대별된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에서는 만주에서 나온 <대한독립선언서>가 1918년(무오년)에 
발표된 것으로 알았고, 따라서 명칭조차 <무오독립선언서>라 불러 왔다. 또한 더 나아가 
1919년 2월 8일에 발표된 <2ㆍ8독립선언서>와 3월 1일에 발표된 <3ㆍ1독립선언서>가 
세칭 <무오독립선언서>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하는 견해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무오독립선언서>라는 별칭 및 다른 독립선언서들에 미친 영향력에 대한 
추정은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다. <대한독립선언>는 <2ㆍ8독립선언서>와 
<3ㆍ1독립선언서>가 나오고 난 뒤인 1919년 3월 중순에 만주 길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 8) 
무오독립선언은 1918년 음력 12월 만주 동삼성에서 중광단이라는 독립운동 단체가 
중심이 되어 당시 여러 곳에 있는 저명한 독립운동의 지도자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독립선언을 별칭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양력으로는 1919년 1월경이니,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국제정세의 변동을 포착해 독립선언을 발표한 것으로는 가장 앞선 
것이었다. 노령과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된 간도의 무오독립선언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의 독립선언 중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재일유학생들의 ‘2ㆍ8독립선언’보다도 약 
1개월이 앞선 것이었다. (주석 9)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시기에 대한 문제점은 최근에 입수한 임정 편인(編印), 
<한국독립선언서 23주년 3ㆍ1절기념특감>에 의해서 밝혀졌다. 즉 부록에 수록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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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배열 순서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2ㆍ8독립선언서’ 앞에 게재되고 있다는 것은 
대한독립선언서가 2ㆍ8독립선언서 이전에 발표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원동 민족해방투쟁과 3ㆍ1절>이나 <대한독립선언서>등에서 뒷받침 
되고 있다. 또한 이 발표일자는 임시정부가 정부 차원에서 발행한 ‘3ㆍ1운동특집’ 
간행물인 만큼 여기에 사용된 공용년기(公用年紀)는 음력일 수는 없고, 당연히 
양력이라는 것도 자명하게 되었다. 
이렇게 대한독립선언서가 2ㆍ8독립선언서와 3ㆍ1독립선언서에 앞서 발표 일자가 
확실시 될 경우에 대한독립선언서 ‘원본’과 ‘대한독립선언서 친필 조소앙’의 년기 
‘단군기원 4252년 2월 일’은 2월 초순경인 2월 1~7일 사이로 보는 것이 올바른 견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고, 3ㆍ1독립선언서의 년기 ‘조선건국 4252년 3월 일’의 
경우를 감안하면 2월 1일로 볼 수도 있다. 결국 대한독립선언서는 세계대전 후 2월 초순 
경에 가장 먼저 발표된 선언서로서 ‘2ㆍ8, 3ㆍ1독립선언서의 모체요, 선도적 역할’을 
다하였던 것이다. (주석 10)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시기에 대한 엇갈린 주장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의미'는 높이 
평가된다. 
첫째. 1919년의 저 거대한 독립운동 에너지의 분출로 국내외가 혼연일체가 되었을 때, 
‘외응(外應)’의 측면에서 가장 형식이 잘 짜여진 선언서였다는 점이다. 선언서 발표의 
주체들을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국외거주 동포사회의 대표격인 인물들로 내세운 것은 
일종의 탁월한 정치적 감각으로 보인다. 
둘째, 논리의 일관성이란 점에서 문제를 안고 있긴 하지만, 선언서 최종 부분에서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부분이 갖는 의의는 참으로 크다. 다른 
독립선언서들이 환상적인 국제외교적 처리에 의한 독립을 갈구하고 있을 때, 혼자서 
깨어 있는 자로서의 의식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삼균주의의 사상적 태동이 이 독립선언서에서 시작되었다. 삼균주의는 곧 임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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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강령의 기본정신이기도 하거니와 그후 우리 헌법의 정신적인 골격을 받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소앙은 “이것은(주: <대한독립선언서>의 작성을 가리킴) 
삼균주의의 배태기었다. 토지는 국민의 소유이며 인민은 세습적으로 독자적 결정권을 
행사할 것과 세계 화평을 고조하고 침략주의를 배격하였다.”라는 말로 
<대한독립선언서>가 지닌 사상적인 골격과 의미를 크게 평가했다. 
넷째, <대한독립선언서>와 ‘대한독립의군부’와의 관계이다. 대한독립의군부는 결국 이 
선언서를 세상에 내어놓기 위해 존재했었다고 할 수 있다. 조직을 결성한 후 첫 업적이 
<대한독립선언서>의 작성과 선포였고, 선언서가 나온 후에는 이내 조직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조소앙ㆍ정원택ㆍ박찬익 등 간부진들이 곧 상해로 갔고, 김좌진 역시 몇 달 
후에 북간도의 정의단(북로군정서의 전신)에 입단하는 등 소속 인원이 모두 흩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선언서는 한 독립운동단체의 전부가 담긴 문서이기도 한 것이다. 
(주석 11) 
주석 
4> 조동걸, <한국근현대사의 이상과 현실>, 320쪽, 푸른역사, 2001. 
5> 정원택, <자산외유일기>, 송우혜 ‘대한독립선언서’<세칭‘무오독립선언서’의 실체>, 
<역사비평>, 여름호, 147쪽, 1988년. 
6> 송우혜, 앞의 책, 161쪽. 
7> 앞의 책, 162쪽. 
8> 앞의 책, 164쪽. 
9> 신용하, <3.1독립운동발발의 경위>, <한국근현대사론> Ⅱ, 55~56쪽, 지식산업사. 
10> 조항래, <대한독립선언서 발표시기의 경위>, 조만제 편, <삼균주의논선>, 73쪽,
48 
삼균학회, 2003. 
11> 송우혜, 앞의 책, 175쪽. 
[13회] 대한독립선언서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4장] 두 가지 ‘독립선언서’ 작성하다 2014/06/02 08:00 
김삼웅 
우리 대한 동족 남매와 온 세계 우방 동포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의 신성한 평등 복리로 우리 자손 여민에 대대로 전하기 
위하여 여기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우리 대한은 예로부터 우리 대한의 한(韓)이요, 이 민족의 한이 아니라, 반만년사의 
내치외교는 한왕한제(韓王韓帝)의 고유권한이요. 백만방리의 고려산수는 한남한녀의 
고유재산이요. 기골물언이 유럽과 아시아에 뛰어난 우리 민족은 능히 자국을 옹호하며, 
만방을 화협하여 세계에 공진할 천민(天民)이라, 우리나라의 털끝만한 권한이라도 
이민족에게 양보할 의무가 없고, 우리 강토의 촌토라도 이민족이 점유할 권한이 없으며, 
한 사람의 한인이라도 이민족이 간섭할 조건이 없으니, 우리 한은 완전한 한인의 
한이라. 
슬프다. 일본의 무력이여. 임진 이래로 반도에 쌓아 놓은 악은 만세에 엄폐할 수 
없을지며, 갑오 이후 대륙에서 지은 죄는 만국에 용납치 못할지라. 그들이 호전 악습을 
자보(自保)의 자위(自衛)의 구실을 만들더니, 마침내 하늘에 반하고 인도에 거스르는 
보호 합병을 강제하고, 그들의 윤맹패습은 영토보존이니 문호 개방이니 기회균등이니 
삼다가 필경 몰의무법한 밀관협약을 강제로 맺고, 그들의 요망한 정책은 감히 종교를 
핍박하여 신화의 전달을 저희하였다. 
학자를 압제하여 문화의 유통을 막고, 의전을 박탈하여 경제를 농락하며 군경의 무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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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이 암계로 한족을 멸하고 일인을 증하려는 간흉을 실행한지라. 적극 소극으로 
한족을 마멸시킴이 얼마이며, 십년 무단의 작폐가 여기서 극단에 이르므로 하늘이 
그들의 악덕을 꺼리어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주실 새, 하늘에 순종하고 인도에 응하여 
대한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그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한 죄악을 선포하고 
징계하노라. 
1. 일본의 합방 동기는 그의 소위 범일본주의를 아시아에서 시행함이니 이는 동양의 
적이요. 
2.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불법무도한 폭력폭행을 극도로 써서 된 것이니 
이는 국제법규의 악마이며, 
3. 일본의 합방 결과는 군대 경찰의 야만적 힘과 경제압박으로 종족을 마멸하며 종교를 
강박하고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문화를 저해하였으니 이는 인류의 적이라, 그러므로 
하늘의 뜻과 사람의 도리가 정의법리에 비추어 만국의 입증으로 합방 무효를 선포하여, 
그의 치악을 응징하여 우리의 권리를 회복하노라(중략) 
귈기하라, 독립군! 일제히 독립군은 천지를 바르게 한다. 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이니, 개 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랴.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동체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냐. 집을 
기울여 나라를 회복하면 3천리 옥토는 자가의 소유이다. 일가의 희생을 어찌 
아깝다고만 하겠느냐. 
아아! 우리의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된 본령을 자각한 독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요.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위해서의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명을 받들고 일체의 사악으로부터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단군기원 4252년 2월 일
50 
[14회] 임시정부 헌장ㆍ법률제정에 참여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5장] 임정 외교활동, 시민주의 현장체험 2014/06/03 08:00 
김삼웅 
1919년은 조소앙에게도 생애에서 가장 분주한 해가 되었다. 만주 길림에서 국내 
3ㆍ1혁명의 소식을 듣고 즉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과도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우자는 데 뜻을 모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국민의 총궐기에 
신바람이 나고, 그 대신 책무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3ㆍ1혁명을 계기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대동단결선언>과 <대한독립선언>을 기초한 그에게 3ㆍ1혁명은 자신이 켜든 봉화에 
2천만 민중이 화답하는 듯한 감격을 느꼈을 터였다. 상하이는 신규식 등과 동제사와 
박달학원의 교사로서, 그리고 신한청년당에 참여했던, 항일독립운동의 
출발지점이었다. 
상하이에서는 여운형과 김규식 등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송했는가 하면, 국내와 일본에 간부들을 파견하여, 2ㆍ8독립선언과 
3ㆍ1독립선언을 추동하는 등 임시정부 수립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3ㆍ1혁명 
직후에 상하이 프랑스조계 안의 보창로 329호에 동제사와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여 활동을 개시하였다. 
독립사무소 출범 초기의 주요 구성원은 위에서 본 신한청년당의 대표들과, 일본에서 
2ㆍ8운동에 참가하고 상해로 온 이광수ㆍ최근우, 미국에서 온 여운홍, 그리고 국내에서 
3 ㆍ1운동의 주역들이 파견한 현순 등이었는데, 이 가운데 현순이 총무를 맡았다. 
그 뒤 3월 말에 이르러 각지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인물들이 여기에
51 
집결하였으니, 대표적인 인물은 본국에서 온 최창식, 일본에서 온 신익희ㆍ윤현진, 
만주와 러시아지역에서 온 이동녕ㆍ조성환ㆍ이시영ㆍ조소앙ㆍ김동삼 등이고, 총 
30명이 넘었다. (주석 1)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4월 10일 저녁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논의를 
거듭하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란 회의 명칭을 결정하고 의장단을 선출하였다. 
이어서 국호를 대한민국, 정체를 민주공화제로 정하고, 정부조직과 임시헌장을 
제정하였다. 조소앙은 국무원비서장에 선임되었다. 
조소앙은 임시헌장 등 임시정부 조직의 법률 제정에 발군의 역량을 발휘하였다. 
이시영ㆍ남형우ㆍ신익희 등 법학(률) 전문가들과 헌장제정위원으로 선임되어 전문 
13장 57개 조로 구성된 임시의정원법을 1차로 제정하였다. 임시의정원법은 임시정부 
구성의 모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어서 임시정부헌장기초위원, 심사위원 등 
정부조직의 각종 법률제정에 참여하였다. 
조소앙은 경기지역 의정원의원과 국무원비서장에 선임되었다. 국무원비서장은 
총무처장관과 같은 역할이었다. 4월 22일에는 국무원비서장을 사임하고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임시정부가 출범하여 어느 정도 안착되면서 조소앙은 6월에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을 지원하라는 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유럽으로 떠났다.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전승국 중심의 평화질서 형성을 
위해 1919년초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이른바 베르사이유 체제를 향한 
전승국회의였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김규식은 대한청년당이 조직되면서 파리강화회의에 대한청년당의 
대표 자격으로 파리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교활동은 쉽지 않았다. 
전승국의 일원이 된 일본의 끈질긴 방해로 한국문제가 상정되지도 못했고, 김규식은 
일본인들로부터 테러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1919년 12월 12일자 임시의정원 손정도 의장의 이름으로 된 <국내유지에게 주는
조소앙 평전 1.  김삼웅 저-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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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평전 1. 김삼웅 저-한겨레신문

  • 1. 1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 1. ­김삼웅의 인물열전 ­한겨레신문 교육∙권리∙경제 '삼균주의' 창안자 조소앙 일가 “조소앙의 신념체계와 정책기조는 삼균주의입니다. 삼균주의란 개인간, 민족간, 국가간의 균등을 말하고, 정치적 균등, 경제적 균등, 교육적 균등의 실현으로 삼균을 이루어 세계일가(世界一家)의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평등주의 사상입니다.” ­김삼웅
  • 2. 2 거대한 이념의 용광로 정제된 실천논리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조소앙 평전>을 마치면서 2014/08/13 08:00 김삼웅 한국 근현대사는 격동의 시대만큼이나 다양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그 중의 한 분인 조소앙 선생은 매우 특출한 인물이다. 독립운동사는 물론 민족사에 불멸의 문건으로 남을 몇 건의 ‘선언문’을 작성하고, 풍찬노숙의 독립운동가로서 생애를 바쳐 삼균주의사상을 연구하고 그 결과 <건국강령> 등을 마련하였다. 삼균주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뿐만 아니라 좌우 독립운동 진영의 이념적 기틀이 되었다.
  • 3. 3 해방 후에는 삼균주의에 바탕을 두고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 참여하고, 피랍되어서는 중립화통일론을 제기하였지만, 양쪽에 포진한 분단세력, 권력지상주의자들에게 조소앙과 그의 사상은 배척의 대상일 뿐이었다. 20세기 전반 민족의 수난기에 사상가 조소앙이 아니었다면 우리 독립운동사는 매우 건조했을 것이다. 과문의 탓인지 모르지만, 세계 피식민지 해방운동사에서 우리 임시정부처럼 일관되게 이념과 정책을 제시하면서 복국운동을 전개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 그 중심에 조소앙 선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사상가로서만 아니라 정치가ㆍ외교가로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열강의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에 반대 이론을 전개하면서 대응해 나간 활동을 보면 더욱 놀라게 된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임시정부가 개인자격이 아니고 정부자격으로 환국하여 국민의 지지 속에서 해방정국의 통치기관이 되고 삼균주의가 새나라 정부의 국책으로 채택되었다면 한국의 방향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통일정부수립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승만이 초대 국무총리에 그를 지명했더라면 6ㆍ25전쟁을 막거나 민족주의자와 중도파 인사들의 대량 납북 또는 월북과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이승만의 독선과 독재는 크게 억재되었을 것이다. 이 같은 가정에서 생각할 때 조소앙 선생의 존재감은 더욱 돋보인다. 조소앙 선생은 삼균주의학생동맹을 창설하면서 “삼균주의야말로 모든 인민이 골고루 배우고 골고루 살고 골고루 먹는 유기철학에 의한 절대진리”라고 선언하였다.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균등사상을 풀어 설명한 것이다. 민족자결의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그의 정치이념을 ‘균등’이란 단어만을 떼내어 사회주의, 회색주의자로 매도하는 식자도 있다. 그 협량함이 민망할 지경이다. 조소앙의 균등주의는 소비에트나 북한식의 ‘균등’이 아닌 독립국가, 민주정부의 전제로 가능한 이데올로기라 하겠다. 그러니까 ‘목표로서의 균등’이 아니라 ‘수단으로서의 균등’이다. 출발점이 다른 달리기 경주가 불공정하고 결과가 뻔하듯이, 수단이 균등하지
  • 4. 4 못하면 목표가 균등할 리 만무하다. 예컨대 교육기회가 균등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권ㆍ경제력의 균등이 불가능한 이치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권력층이나 재벌가 자녀와 빈곤층 자녀의 교육의 기회가 같지 않듯이 말이다. 나는 2006년 평양의 애국열사릉의 조소앙 선생 묘소 앞에서, 그가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면 <사회계약론>으로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적 지주가 된 루소가 되었을 것이고,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미국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퍼슨이 되었을 것이고,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민족주의ㆍ민권주의ㆍ민생주의의 삼민주의를 내건 국부 손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학식과 경륜을 살리지 못한 민족사의 불운 앞에 한동안 발길을 돌리지 못하였다. 조소앙 선생은 다양한 외래문화와 외래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이를 민족적 정통성 속에 용해시키고, 인류적 보편성과 민족적 특수성을 통합하여 한민족의 독자적이고도 진보적인 삼균주의 혁명이론을 체계화시켰다.
  • 5. 5 조소앙 선생은 일제강점기 최초의 사상가이고, 해방정국에 최후의 경륜가였다. 그는 175센티의 키에 70킬로가 넘는 (해방 후) 건장한 체구만큼 순금과도 같은 무게의 함량을 지닌 사상가이자 경륜가였다. 20세기 한 시대를 통털어 한국에서 그이 만큼 폭넓은 식견과 경륜을 지닌 인물이 과연 몇 분이나 될까 상도할 때, 필자의 평전 작업은 거인의 사상과 발자취를 다 담기에는 능력이 역부족이었음을 고백한다. 아울러 선생의 다양한 저술 중 <소앙기설(素昻氣說)>, <이순신구선지 연구>, <국선지( 國仙誌)>, <사선고(四仙考)>, <발해경>, <화랑열전> 등 전문서와 논설 등은 손도 대지 못하였음을 밝힌다. 순전히 능력이 미치지 못한 때문이다. 현행 헌법에는 조소앙 선생이 기초하여 1944년 4월 22일 임시정부의 <헌장>으로
  • 6. 6 채택된 조항과 유사한 내용이 상당히 포함되고 있다. 제1장의 총강 ‘민주공화국’과 ‘국민주권’ 조항은 그대로이고 권리와 의무, 평등권 등에서 유사점이 적지않다. 오늘에 ‘삼균주의 원칙’을 그대로 실행할 수는 없지만, 정치ㆍ경제ㆍ교육균등의 정신만은 살려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빈부격차ㆍ양극화의 ‘99 대 1’의 현상이 지나치게 심화되고 갈수록 폭이 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경기, 한 울타리에서 ‘양과 호랑이의 자유경쟁’으로 표상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강화는 헌법정신과도 배치되는 현상이다. 여기에 박근혜 정부는 ‘규제철폐’라는 구실 아래 호랑이를 가두었던 울타리의 말뚝마저 하나 씩 뽑고 있다. 지난 해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5천 달러, 한화로 2천 5백만 원, 3인 가구로 치면 7천 5백만 원 수준이다. 2013년 월 소득 139만원 미만의 국민이 1천만 명에 육박하고, 상위소득 1%가 국부의 24%를 차지하는 소득불균형의 위험사회가 되었다. 위가 지나치게 무겁고 아래가 가벼우면 침몰하는 것은 세월호 뿐만 아니다. 그래서 더욱 선생의 삼균주의 정신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천안 독립기념관에 세워진 조소앙 선생 어록비에는 “삼균주의­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제도와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호혜 평등으로 민주국가 건설하자”는 내용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그의 사상을 집약한 것이다. 해방 후 선생이 정치현장에 뛰어들면서 사회당을 창당할 때의 비화가 전한다. 다수의 간부들이 ‘한국사회당’이란 당명을 주장하자 그냥 ‘사회당’이라 해야한다는 설명에서 국제주의자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가 삼균주의를 실천해 나가려는 마당에서 이를 굳이 한국에 국한시킬 이유가 없다. 이는 사람 대 사람, 민족 대 민족, 국가 대 국가의 평등한 관계회복을 통해 세계 일가를 이룩하자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굳이 ‘사회’ 자(字) 위에다 ‘한국’을 붙여 지역성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김재명 <한국현대사의 비극>) 선생의 사상체계는 민족주의의 터전 위에 세워진 구조물이지만, 안으로는
  • 7. 7 봉건적ㆍ신민적(臣民的) 굴종의식을 청산하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침략주의를 분쇄하면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여 3균에 기본하는 고루 잘사는 민주공화국가를 세우는 국제주의였다. 여기에는 중국의 노장사상과 영국노동당의 정책 뿐만 아니라 고드원ㆍ푸르동 등 아나키즘까지 수용하는 거대한 이념의 용광로였다. 그 용광로에서 단련되고 정제된 것이 3균주의 사상이고 실천논리가, 좌우합작ㆍ남북협상ㆍ통일정부수립ㆍ중립화통일론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조소앙 선생은 우리의 ‘지나간 미래상’ 이라 할 수 있겠다. 한 가지 덧붙힌다면 조소앙 선생의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번역하여 전집 또는 선집을 제작했으면 싶다. 독립운동사, 통일운동사, 민족문화사 연구에 절실한 자료(사료)가 될 것이다. 뜻 있는 독지가가 있었으면 한다.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 8. 8 [1회] 조소앙 평전 연재를 시작하면서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1장] 오늘에 더욱 필요한 조소앙의 3균주의사상 2014/05/21 08:00 김삼웅 만물이 유전하듯이 사상이나 이념, 종교나 철학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부침을 하게 되지요. 세월의 강하(江河)는 많은 것을 삼키기도 하고 재생시키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영구불변의 정의나 진리는 흔치 않지만, 무수한 세월의 두께나 강하의 흐름에도 변치않는 것은 존재합니다. 몇 천년이 지나도 단절되지 않는 성인들의 가르침이나, 지성들의 언행이 시간의 풍상을
  • 9. 9 거칠수록 더욱 새로워지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와 정의의 가치는 쉽게 퇴색하지 않고 단절되지도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지성사는 무수히 많은 사상ㆍ이념ㆍ종교ㆍ철학을 배출했으나 대부분 세월의 강하에서 침몰하거나 세탁되고, 현재 존재하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부침성쇠의 과정을 거친 것이지요, 하지만 사멸해도 되는 것이 남아있거나, 남았어야 할 것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유익한 이념이나 철학이 시대상황이나 권력에 희생당한 사례도 있고, 이와 반대로 무익한 것이 조장되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무지개색깔을 띌만큼 다양한 인물들에 의해 다양한 방략이 전개되었지요. 20세기 세계 피압박 민족해방운동사에서 한민족처럼 처절하게,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반제투쟁을 전개한 나라도 찾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민족 또는 종족의 해방이나 분리독립이 목표이고 이념이었지요.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크게 달랐습니다. 민족해방에 이르는 투쟁의 방법과 해방 후 국가건설의 방략이 다양하였지요. 우선 투쟁방법의 큰 갈래만 해도 다음과 같습니다. 의열투쟁론 의병전쟁론 실력양성론 외교론 무장전쟁론 계급투쟁론 민중혁명론 어느 것이 타당하고 어느것이 불가하다거나, 여기에 우선 순위를 매기기란 쉽지 않습니다. 시대상황과 국제정세의 추세에 따라 바뀌고 변하며, 또 종합하여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해방 후 민족국가 건설의 방략은 3ㆍ1혁명으로 민주공화제가 중심이 되었지만, 다른 방안도 추구되었습니다.
  • 10. 10 민주공화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복벽주의 아나키즘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중에는 의사ㆍ열사ㆍ지사ㆍ투사ㆍ선생ㆍ박사 등 다양한 호칭이 많습니다. 거기에 걸맞는 투쟁을 하여 얻게된 호칭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독립전선에서 투쟁하면서 독립운동단체(기관)의 이념과 정책을 만들고 해방조국의 비전을 연구ㆍ제시한 경륜가들입니다. 조선왕조 건국의 초석을 쌓는 이가 정도전이었다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정부수립(헌법제정)에 이념과 정책을 제시한 사람은 조소앙 선생입니다.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이 법통으로 연계될 수 있었던 것은 조소앙이 마련한 임시정부의 <당헌>과 <건국강령>이 대한민국의 <헌법>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조소앙은 독립운동의 방향과 목표를 정하고, 국민주권에 기초하여 임시정부수립 이론을 전개하였습니다.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하여 임시정부 수립의 당위를 기도하고, 1918년 <대한독립선언>을 집필하여 무장투쟁론을 제시하는 한편 1919년 도쿄 2ㆍ8독립선언과, 3.1독립혁명의 단초를 열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는 <임시헌장>을 마련하고 일제패망을 내다보면서는 <건국강령>을 준비한 것도 그였지요. 조소앙의 신념체계와 정책기조는 삼균주의입니다. 삼균주의란 개인간, 민족간, 국가간의 균등을 말하고, 정치적 균등, 경제적 균등, 교육적 균등의 실현으로 삼균을 이루어 세계일가(世界一家)의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평등주의 사상입니다. 흔히 손문이 주장한 삼민주의의 아류처럼 인식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출발 시점과 내용 그리고 이론면에서 차이가 많고, 오히려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는 이미 1920년대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결점을 보완하는 이념체제로 삼민주의를 연구하고 정책으로 내걸었습니다. 1930년대부터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의 정당과 단체에서는 당의ㆍ당강ㆍ정책으로 이를 채택하지요. 삼균주의는 독립운동 진영의 공통된
  • 11. 11 지도이념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소앙은 이념적ㆍ학문적 동력을 어디서 공급받았을까요. 그는 대단히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이면서 유교ㆍ기독교ㆍ대종교를 경험하고, 불교ㆍ이슬람교와 소크라테스 철학을 간접으로 경험합니다.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현장에서 체험했지요. 그리고 단군ㆍ공자ㆍ예수ㆍ석가모니ㆍ마호메트ㆍ소크라테스, 여섯 성자를 아우르는 육성교(六聖敎)를 제창하기도 한, 별난 경력과 이력을 갖고 있었지요. 삼균주의 이념은 바로 이와같은 체험과 간접경험에서 우러나온 경륜의 집대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삼균주의가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독립운동 단체들의 정강ㆍ정책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여 비판과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삼균주의가 평등을 강조한 나머지 자유나 정의ㆍ질서ㆍ평화 등에 대한 논구에 소흘한 것이나, 토지 및 중요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이상론이란 비판이 따랐지요. 이 때문에 이념적인 공격에 시달리기도 하고, 해방 후 오늘까지 대중화의 족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일본제국주의였고 1920~40년대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자세히 논급하겠습니다. 해방 후 정통 독립운동가들의 생애가 그렇듯이 그의 삶도 불우했습니다. 분단을 배척하고 통일정부수립론을 주창했지만, 단독정부 수립이 확고해지자 1948년 5ㆍ10총선거에 입후보하여 전국 최다득표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지요. 제헌헌법의 전문에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하고⋯⋯”라고 선언한 것은 임시정부의 헌법과「건국강령」의 정신을 그대로 승계한 것이었습니다. 6.25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납북되었다가 1958년 9월 9일 북쪽에서 사망했는데, 시신이 대동강에 떠올랐다는 증언도 있어서, 병사 아닌 자살설이 제기되었으나, 아직도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론가이고 사상가이며 정치가이고 지사의 인격을 갖췄던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의 파란곡절의 평전을 쓰고자 하니, 우선 그의 끝이 집히지 않는 사상의 넓이와 인격적 깊이에 압도됩니다. 하지만 20세기의 대표적 사상사ㆍ역사학자인 홉스봄의 “21세기는 분배의 시대”라는 주장이 아니더라도, 한국사회의 ‘99 대 1’의 빈부격차와 불균형 상태를 우려하면서,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 는 오늘 우리 시대의 가치, 한국이 추구해야하는 정책이 되어야 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의 평전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 12. 12 [2회] 삼균주의는 위기의 자본주의의 대안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1장] 오늘에 더욱 필요한 조소앙의 3균주의사상 2014/05/22 08:00 김삼웅 우리는 흔히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압축적으로 성취한 나라라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민주화’는 이명박ㆍ박근혜 정권에서 크게 역행하고 있지요. 정부가 민간인을 사찰하고, ‘국’자 돌림기관인 국가정보원, 국군사이버사령부, 국가보훈처 등에서 대통령선거부정이 감행되고, 이것을 정부가 처벌은커녕 보호하기에 급급하지요.
  • 13. 13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민의 피와 땀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처절하게 짓밟히고 있습니다. ‘경제대국’의 실상은 더욱 참담합니다. 엄마와 두딸이 전재산 70만 원을 전세와 공과금으로 남기고 자살하고, 어떤 서민은 1일 감옥살이가 5만 원인데, 재벌은 5억 원이고, 지난해 최태원 SK회장연봉이 301억 5,000만 원, 정몽구 현대차그룹회장 140억 원, 김승연 한화그룹회장 131억 원, 이재현 CJ그룹회장 47억⋯⋯. 어떤 장관은 로펌의 한 달 자문료가 1억 원이고,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퇴임하면 줄줄이 산하기관장으로 내려가 몇 억대의 연봉을 챙깁니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인데, 그나마 정규직 노동자의 평균월급은 2013년 연봉기준으로 3,036만 원, 비정규직의 평균월급은 141만 원이랍니다. 비정규직도 못되는 수백만 명 무직자의 경우는 통계에도 잡히지 않지요.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후보는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정의의 천사가 되는 듯하더니, 당선되고는 뻥치고 말았습니다. 최저임금을 협상할 때 노동자들이 시간당 몇 100원만 인상해 달라 애원해도 정부와 기업은 손사레를 쳤지요. 참고로 올해 최저임금은 시간당 5,210원입니다. 가히 천국과 지옥입니다. 등록금이 없어 휴학을 하고 세월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홀어머니를 봉양한 박지영씨,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나눠주면서 “너희들 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게, 선원이 마지막이야” 말하고 시신으로 돌아온 박지영 씨와 선주ㆍ선장ㆍ재벌ㆍ장관들이 같은 공화국시민일까요? 한국사회의 가장 큰 위기는 지나치게 벌어진 빈부격차 곧 양극화현상입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집단자살이고 ‘묻지마 범죄’로 나타납니다. 자살률 세계최고라는 불명예는 ‘10대 경제강국’의 반사경이지요. 실정이 이런 데도 위정자와 재벌기업들이 위기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프랑스혁명 전야의 마리 앙뜨와네트나 재무장관 차르 알렉산드르 칼론과 비슷한 수준이 될
  • 14. 14 것입니다. 코끼리 떼가 초원을 짓밟아버리고, 사자 무리가 초식동물을 모조리 잡아먹으면, 다음 차례는 자신들이라는 이치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매ㆍ무지ㆍ탐욕의 삼박자입니다. 우리 사회는 ‘분배’를 말하면 종북으로 몰지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종북타령’처럼 호제도 다시없겠지요. 한데 요즘은 이것도 하도 써먹어서 잘 먹히지 않은 것 같더군요. ‘더불어 같이 사는 것’이 민주공화제의 기본인데, 한 쪽은 배 터져죽고 한 쪽은 배 곯아죽는 구조는 종북ㆍ반북을 넘어 스스로 묘혈을 파는 파멸 행위인데도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자본주의라는 200년이 넘은 낡은 열차는 위기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자유주의 도입 이후 시장질서는 한 우리 안의 ‘사자와 양’의 대결장이 되고 말았지요. 구 소련의 공산주의는 외부에서 총 한 방 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무너지고 따라서 자본주의는 경쟁자가 사라지면서 더욱 탐욕스러워져가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불황과 금융위기가 거듭되고, 신제국주의국가들은 다시 전쟁터를 찾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정의를 지키지 않고, 국민이 삶에 보람과 가치를 갖지 못할 때 그런 사회는 붕괴됩니다. 정부기관이 부정선거를 해도 책임지지 않고, 국가기관이 간첩을 조작하고도 그냥 넘어가는 사회라면,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들만 탓할 수는 없겠지요. 플라톤의 경구대로 “정의가 배제된 권력은 강도집단”이 되고 말지요. 사설이 길어졌습니다마는, 제가 조소앙의 평전을 쓰면서 ‘삼균주의’에 관심을 갖게된 배경입니다. 근 1세기 전에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 이와같은 철학과 경륜을 갖춘 선각자가 있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혹자는 말 할 것입니다. “균등분배라니, 공산당하자는 주장이냐”. 이같은 단세포적인 인식은 금물입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자본주의는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수정하지 않으면 파탄 납니다. 힘 센 국가들은 전쟁을 통해 위기를 해소하려 하겠지요. 과거 세계대전이 공황에서 비롯된 것을 다 알지 않습니까. 고장난 선박을 수리하지 않고
  • 15. 15 과적을 거듭하면 세월호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는 현시점에서 채택할 것도 있고 수정할 부분도 있으며 버려야 할 대목도 적지 않습니다. 다만 진보ㆍ보수, 좌ㆍ우 이데올로기의 편향성을 접고, 나라를 살리고, 천민성자본주의를 수정하고, 우리 공동체인 ‘민주공화’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관심을 가져야할 것 같습니다. <삼균사상가 조소앙평전>을 연재하는 이유입니다. 조소앙의 연구에는 고 홍선희 선생의 <조소앙의 삼균주의연구>를 시작으로 김기승 교수의 <조소앙이 꿈꾼세상>을 비롯하여 여러 선학들의 많은 연구 성과가 있습니다. 이분들의 성과를 참고하겠습니다. 많은 편달과 애독을 기원합니다. [3회] 명문가 후예, 성균관에서 수학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2장] 출생과 학문, 일본유학시절 2014/05/23 08:00 김삼웅 조소앙(趙素昻)의 본관은 함안, 본명은 용은(鏞殷), 자는 경중(敬仲), 호가 소앙이다. 본명보다 호가 널리 알려진 사례가 된다. 1887년 4월 8일(음력) 경기도 교하군(현 파주군) 월롱면에서 아버지 조정규와 어머니 박필양의 6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일본 유학 중에는 아은(亞隱)ㆍ소인(素印)ㆍ소앙(蘇昻)ㆍ소해(啸海)ㆍ한살임(韓薩任) ㆍ아나가야후인(阿那伽倻後人)이라는 별명을 쓰다가, 1920년대 이후에는 소앙으로만 사용하였다. 장남은 용하, 삼남은 용주, 사남은 용한, 오남은 용진, 육남은 용원이다. 부친이 아들들의 이름을 지을 때에 중국 왕조 명칭인 하ㆍ은ㆍ주ㆍ한ㆍ진ㆍ원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중국 역대 왕조의 이름을 자식들의 이름으로 지은 경우는 흔치 않다.
  • 16. 16 조소앙의 선조 중에는 세조의 단종 폐위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를 비롯하여, 선대 중에는 고관대작과 절의를 중히 여기는 인물들이 많았다. 증조부와 조부도 학식이 풍부한 한학자였다. 가계는 먹고 살 만큼의 재력이 있었던 것 같다. 조소앙은 5세부터 15세까지 할아버지 조성룡(趙性龍)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대단히 총명하여 어려서 <제자백가>ㆍ<사서오경>을 독파하였다고 한다. 조소앙이 태어나고 자랄 시기는 안으로는 국정의 문란으로 민란이 일어나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탈이 시작되는 혼란기였다. 태어나기 한 해 전에는 거문도를 점거했던 영국군이 철수하고, 5세 때에 동학교도들의 삼례집회가 열리는가 하면 1894년 1월에는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소앙은 15세 때인 1902년 상경하여 성균관 경학원에 입학하였다. 그가 청소년기 2년을 보낸 성균관은 조선시대 인재양성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교육기관이었다. 조선 말기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성균관에 경학원이 부설되었으나 특수 귀족학교의 성격을 갖게 되어 개화풍조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1895년에 성균관의 관제가 새로이 마련되었다. 개화의 물결 속에서도 우리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나가는 동시에, 근대화에 대처해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한 것이다. 경학과의 학제가 바뀌어 3년제 학제로서 전ㆍ후 2학기로 구분되었으며, 입학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되 20세 이상 40세까지의 연령 제한을 두고, 졸업시험에 합격한 자에게만 졸업증명서를 주어 졸업시켰다. 1896년부터는 3년 학제가 다시 바뀌어 매년 말에 시행하는 시험으로 수업 연한이 조정되었다. 조소앙이 입학했을 때의 학과목은 유학을 비롯하여 본국역사, 만국역사, 만국지지, 산술 등을 가르쳤다. ‘20세 이상’의 연령 제한에도 불구하고 조소앙이 15세에 입교한 것으로 보아 입교기준이 문란했거나, 출중한 능력때문에 특별 전형이 가능했을 지 모른다. 조소앙은
  • 17. 17 1904년 15세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신채호 등과 항일성토문을 작성, 역신 이하영 등의 매국음모를 규탄하였다. 신채호는 1898년(19세) 가을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 해 10월 경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11월 5일(음)에 체포되었다. 이 때에 조소앙이 교류한 사람은 신채호 외에 변영만ㆍ김연성ㆍ류인식 등이 있었다. 조소앙은 이들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주자학의 틀을 깰 수 있었다. 1904년에 성균관을 2년 만에 마친 조소앙은 황실특파 유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하고 10월 인천을 출발하여 일본에 도착하였다. 11월에 동경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한다. 최남선ㆍ최린 등과 함께였다. (주석 1) 조소앙이 당시 유력자 가문의 자손들이 택한 관료의 길을 접고 일본 유학을 택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백형 조용하의 영향때문이었다. 조소앙보다 5년 연상인 조용하(1882~1937)는 1901년 독일주재 참사관으로 부임한데 이어 죽산ㆍ이천ㆍ마전 등 군수를 역임했다. 이어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베이징으로 망명하고, 1913년에는 만주에서 이상룡ㆍ이시영ㆍ이동녕 등과 경학사 활동에 관계하였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서 한국독립단, 한인협회 등을 조직하고, 1921년에는 <신한민보> 창간을 주도하여 독립운동과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1932년 상하이로 가던 중 일본에서 피체되어 경성으로 이감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병보석 중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주석 2) 대단히 일찍 개화한 인물 중의 하나다. 주석 1> 홍선희, <조소앙의 삼균주의 연구>, 22쪽, 한길사, 1882. 2> 앞의 책, 20~21쪽. [4회] 관비 일본유학생으로 뽑혀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2장] 출생과 학문, 일본유학시절 2014/05/24 08:00 김삼웅
  • 18. 18 백형의 권유로 관리의 길을 접고 일본 유학을 택한 조소앙에게 ‘10년 일본 유학’은 그의 학문연구와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같은 물을 먹고도 소는 젖을 만들고, 뱀은 독을 생산하듯이, 같은 일본 유학을 하고도 대다수는 친일파가 되었지만, 조소앙은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조소앙의 일본 유학 결심에는 박형의 권유도 있었지만 1904년 2월 한일의정서의 체결 소식이 작용하였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급박해지자 1904년 1월 23일 한국정부는 ‘엄정중립’을 내외에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반도에 군대를 상륙시키고 자기네에게 협력할 것을 강요ㆍ협박하여, 2월 23일 외부대신서리 이지용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께의 명의로 6개항의 한일의정서가 체결하였다.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일본이 한국 식민지화의 제1단계로서 한국을 강압하여 체결한 굴욕적인 의정서였다. 조소앙은 한일의정서 체결 소식을 <황성신문> 보도를 통해 알고 크게 분개하면서 성균관을 중퇴하고 일본 유학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성균관 경학과를 2년만에 마친 셈이다. 마침 정부에서는 신교육의 명목으로 황실유학생을 선발하고 있었다. 1904년 7월 28일 시행된 일본파견 유학생선발 시험에는 700여 명의 정부 고관의 자제가 응시하였다. 작문 시험 제목은 <유학은 반드시 충효를 근본으로 해야 함>이었다. 50명을 뽑는 선발 시험에 조소앙은 합격하였다. 성균관 출신인데다 총명했던 그는 쉽게 합격할 수 있었다. 명문가인데다 백형이 독일주재 3등 서기관이고, 종숙 조원규는 선발된 유학생을 인솔하는 인솔위원이어서 황실특파유학생 선발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조소앙이 성균관 입학이나 황실특파유학생으로 선발된 것은 고종시대 개혁정책의 특혜를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15~25세의 양반 관료 자제 50여 명의 황실특파유학생은 1904년 10월 9일 영솔위원 조원구의 인솔 아래 인천항을 출발→일본 시모네세끼→고베→오사카→교토를 거쳐
  • 19. 19 15일 도쿄에 도착했다. 이들은 11월 5일 동경부림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동경부림제일중학교는 1879년 창립된 학생수 800명, 교수 50명 규모의 명문 중학교였다. 이때 조소앙과 함께 입학한 학생은 최린ㆍ최남선ㆍ유승훈ㆍ이승근 등 모두 45명이었다. 이들 중 조소앙보다 어리거나 동갑내기인 학생이 5명에 불과했고 대부분 연상이었다. 대한제국 학부에서는 이들 유학생들의 교육ㆍ기술ㆍ감독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중학교 측에 위촉하였다. 이에 따라 중학교에서는 특설한국위탁생과를 속성과로 별도 개설하여 이들을 수용하였다. 학생의 교비나 기숙사비 등 일체의 비용은 한국의 궁내부에서 지급하게 되어 있었다. (주석 3) 아직 어린 나이의 조소앙에게 일본유학의 특전은 행운이었다. 성균관에서 기초학문을 배운 터여서 학과 수업이 어렵지는 않았다. 입학 초기에는 일본어의 미숙으로 저급반에 편성되었다가 얼마 후에는 상급반으로 편성되었다. 함께 입학했던 유학생 40% 이상이 중도에 퇴학한데 비해 조소앙은 유학생활에 잘 적응하였다. 조소앙은 일본동경부림제일중학교 재학 중에 을사늑약의 소식을 들었다. 이에 통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한국 유학생들을 모욕하는 이 학교 가츠우라 교장의 인터뷰 기사가 일본 신문에 보도되었다. 가츠우라는 한국 유학생들을 평하여 “일본어 향상은 놀랍도록 빠르지만 수학과 기타 과학 등에 대해서는 형편없기 짝이 없다. 그 열등한 정도로 말하면 25~32세까지 어른의 수리 두뇌는 일본 소년의 수준에도 못 미친다고 말해도 좋다고 생각 한다”고 떠벌였다. 그는 이어서 수학ㆍ이학 등에 대한 기초가 없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은 무리’라고 단정하였다. (주석 4) 가츠우라의 이 발언은 을사늑약의 체결로 가뜩이나 울분에 차 있었던 한국 유학생들에게 휘발유를 뿌리는 격이었다. 사설 서당 등에서 정통 유학을 공부해온 한국 유학생들이 수학이나 이과분야에 수준이 뒤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학교 책임자의 비교육적인 언사는 한국 유학생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손상시키기에
  • 20. 20 충분했다. 조소앙 등 한국 유학생들은 회합을 거듭한 끝에 12월 5일 동맹휴교를 결의하고 37명 전원이 기숙사의 퇴사를 결행했다. 동맹휴학은 교장의 망언이 계기가 되었지만, 한국 유학생들은 그동안 학교당국의 감시와 차별대우에 격분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방과 후에도 외출을 금지당하고, 기숙사에는 사감 2명을 배치하여 모든 행동을 감시하였다. 교과과목도 국가주의적 복종윤리와 일본어ㆍ일본역사ㆍ일본지리ㆍ일한 비교문법 등이 중심이었다. 한국 유학생들이 바라던 근대학문에는 소홀히 하였다. 한국유학생들은 한국정부와 학교 당국의 설득에도 한동안 복교하지 않았다. 37명 전원의 퇴학이 확정되고, 진로 문제는 유학생들의 자유의사에 맡겨졌다. 이 같은 조처가 조소앙에게는 행운이었다. 중학 1년 만에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석 3> 아부 양(阿部 洋), <구한말의 일본유학> 2, <한(韓)>4, 96쪽, 1974, 김기승, <조소앙이 꿈꾼세상>, 27~28쪽, 재인용, 지영사, 2003. 4> 김기승, 앞의 책, 30~31쪽, 재인용. [5회] 명치대학에서 법학 전공, 민족의식 싹터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2장] 출생과 학문, 일본유학시절 2014/05/25 09:56 김삼웅 조소앙은 1906년 1월 11일 명치대학 입학 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선배 최석하 등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다. 최린ㆍ유승흠ㆍ한상우 등과 함께였다. 집에서 보내준 돈으로 입학금과 월사금을 납부하고 하숙집을 학교 근처로 옮겼다. 이제부터는 대한제국 정부의 장학생이 아니어서 등록금과 하숙비 등은 완전히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의
  • 21. 21 가정은 아직 여력이 있었기에 학비 마련이 가능했다. 명치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법률공부를 하고 있을 때 한국 정부에서 복교 명령이 나왔다. 22세 이하인 자는 중학교에 재입학하고, 23세 이상인 자는 전문학교에 진학하기로 한일 두 나라 정부의 협약이 이루어졌다. 조소앙은 중학교 복교 대상이어서 1906년 3월 31일 명치대학을 퇴학하고, 4월 28일 동경부림제일중학교에 재입학했다. 동경부림제일중학교에서 조소앙의 학업성적은 양호한 편이었다. 중학교 1년 과정은 3학기체제였는데, 매학기 시험을 보았다. 시험문제에서 특징적인 것은 영어와 일어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과목이 주관식 논술형으로 출제되었다는 점이다. 역사ㆍ수신ㆍ지리 시험 문제는 물론 이과나 박물 등 과학 시험도 개념이나 실험방법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문제가 출제 되었다. 첫학기 조소앙은 갑조 12명 중 2위의 성적을 차지했다. (주석 5) 조소앙은 1907년 3월 31일 우수한 성적으로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과 더불어 한국유학생감독부 내에 설치된 보습과를 다니고, 11월 1일부터는 정칙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영어공부에 집중하였다. 대학진학에 필수코스였기 때문이다. 조소앙이 대부분 일본인 학생인 명치대학 고등예과에 입학한 것은 1908년 3월 3일이다. 이 학교 고등예과는 1년 6개월의 3학기 과정으로, 그는 1909년 7월 1일 학업을 마쳤다. 그리고 이 해 9월 13일 명치대학 법학부 본과에 입학하였다. 법학부에서는 형법각론, 상법총칙, 법리학, 민사소송법, 행정법, 민법물권, 민법채권 등을 공부하였다. 조소앙은 법학 공부에 별로 흥미를 갖지 못하였다. 1학년 시험성적은 61.9점으로 26명중 25등으로 참담한 결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결과는 법학에 대한 흥미가 없었던 것도 이유지만, 1910년 국치 소식을 들으면서 갖게 된 울연한 심경이 공부에 전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 22. 22 남달리 영특하고 국가의 운명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국치는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기독교였다. 국치를 전후하여 기독교에 입교했으며, 1911년 10월 22일에는 사원보 목사와 전덕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조소앙은 1912년 7월 명치대학을 졸업하였다. 2학년 진학시험에는 성적이 좋아서 우등상을 받았지만, 그의 대학시절은 망국의 시대여서 정신적 고통이 적지 않았다. 다음의 자전 기록에서 이 시기 그의 심경의 일단을 찾게 된다. 내가 동쪽으로 유학 온 지 어느덧 8년이 되었다. 옛 일을 더듬어 생각해보니 흐느끼며 통곡할 일이 많았다. 내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것이 털끝만큼이라도 있었는가? 고개 숙이고 학교에 매일 가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이것이 어찌 중생을 구제하는 길이겠는가. (주석 6) 조소앙을 가장 먼저 학문적으로 연구한 홍선희는 그의 <약전>에서 일본 유학 시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904. 2 (17세) : 성균관 수료. 1904. 7 : 황실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동경의 모 중학에 입학. 이 해에 백형 용하가 백림(베를린)에서 보내준 <손문전>과 고리키 작품을 받아 읽음. 1905(18세) : 동경 유학생들과 상야(上野) 공원에서 7충신 추모대회를 열고 일진회의 매국 행위를 규탄. 1907. 1(20세) : 미국에서 귀국차 동경에 들른 도산 안창호와 회견. 국채보상운동에 참가. 1909. 1(22세) : 동경에 대한흥학회를 창립. 5월에 회보를 창간. 이 해에 명치대 법과 재학 중 중국혁명가 재계도(載季陶)와 접촉. <대한흥학보>에 4편의 에세이를 발표.
  • 23. 23 1910 (23세) : 일본 (혹은 국내)에서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 받음. 합방을 전후해서 비상대회 소집에 실패, 문자와 집회사건으로 연금당해 철학연구에 착수(이 해에 일시 귀국 여부 불명) 1911 (24세) : 중국 망명계획 중 헌병대에 구금됨. 1912 (25세) : 명치대 법학과 졸업. 국내의 경신ㆍ양정ㆍ대동법률전문 등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음.(주석 7) 조소앙의 8년 일본유학은 을사늑약과 경술병탄 등 망국과 국치의 기간이었다. 법학을 공부하면서 적잖게 회의감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학문이 조국을 위해 어디에 쓸모가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들었을 거였다. 이 기간 기독교에 입문하여 신앙인이 되고 틈틈이 철학을 공부하여 사고와 세계관의 폭을 넓혔다. 법학연구는 훗날 독립운동 과정에서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시 헌법기초위원으로서 입정의 법체계를 확립하는데, 그리고 1940년대 건국을 준비하기 위해 임정 건국강령을 기초하는데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대학 4년 동안의 법학 교육에서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는 훈련을 한 셈이었다. 삼균주의 이념의 체계화 작업은 이러한 논리적 훈련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주석 8) 주석 5> 앞의 책, 35쪽, 재인용. 6> 조소앙, <동유략초>, 1911년 5월 7일조.
  • 24. 24 7> 홍선희, <조소앙의 삼균주의연구>, 22~23쪽, 한길사, 1982. 8> 이기승, 앞의 책, 51쪽. [6회] 재학중 망국소식 듣고 민족운동 전개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2장] 출생과 학문, 일본유학시절 2014/05/26 08:00 김삼웅 조소앙은 일본 유학에서 폭넓은 독서와 교우관계, 한인유학생단체 참여, 저명 인사들의 강연 등을 통해 자기 철학을 정립하고 민족주의사상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당시 일본은 이웃 나라 침략 전쟁, 한국병탄 등 제국주의적인 국가였으나 국내적으로는 어느 정도 자유와 민권이 보장되었다. 조소앙은 명치대학 법학부의 자유주의적인 학풍에서 다양한 사상과 인물을 접할 수 있었다. 그가 이 시기에 탐독한 책 중에는 일본 자유민권사상가 바바의 <천부인권론>, 파알젠의 <윤리학대계>, 쿠로이와 루이코우의 <천인론>을 비롯하여 <무정부주의>, <동아외교사>, <논리학대계>, <정치강요>, <천인론>과 동양고전으로 <논어>, <시경>, <맹자>, <도덕경>, <장자>, <석가모니전> 그리고 <고려사>와 <동양역사> 등이었다. 그의 폭넓은 지식과 교양은 동경 유학시절에 읽거나 강연을 통해 축적된 학식이 바탕이 되었다. 관비유학생 의장으로 선임되고, 조선유학생친목회가 창립되었을 때에는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홍명희ㆍ문일평ㆍ안재홍ㆍ송진우 등과 교우하면서 재동경한국유학생회를 이끌었다. 그는 또 <천부인권론>을 번역하여 동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인권사상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조소앙이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게 된 첫 사건은 한국병탄 직후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준비하다가 일제 관헌의 방해로 좌절되고, 이로서 1910년 8월 26일부터 9월 14일까지 경찰에 체포되어 극심한 신문을 받게 되었다. 그는 관비유학생이라는 조정에 대한 부채의식도 없지 않았으나, 본질적으로는 민족에 대한 애착심이 누구못지 않게 강했다. 그에게 동경유학 생활은 폭넓은 학문과 더불어 망한 민족의 독립을 강구하는
  • 25. 25 민족주의사상의 발아기였다고 하겠다. 1910년 국망 이후 그에게서 확인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은 한민족을 구하고, 빈궁한 민중을 구제하는 것을 ‘천계’로 받아들이는 철저하면서도 비장한 책임의식과 사명감이다. 이러한 비장한 사명감은 차후 그의 독립운동의 정신적 밑바탕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빈궁한 민중의 구제에 대한 관심은 훗날 구체화되면서 평등사회 실현이라는 이상사회론으로 발전하였다. 그의 경우 일본유학 시기에 이미 추상적인 형태로나마 삼균주의의 핵심요소인 평등의식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주석 9) 앞에서 소개한 홍선희의 <약전>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강만길 교수가 삼균학회에서 발행한 <소앙선생 문집> 下 등을 발췌하여 정리한 <조소앙연보>에는 조소앙의 일본 유학시절 민족운동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1906년(20세) : 동경유학생들과 제휴하여 반일운동의 일환으로 스트라이크를 일으키는 한편 공수학회를 조직하고, 학보(주필)을 발간하여 배일사상을 고취. <2천만 동포에게 고하는 글」등 발표. 1907년(21세) :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하여 단지동맹을 조직하고 활동. 한일신협약에 분개하여 반일시위운동전개. <동고아(慟告我) 2천만 동포>등 <대한매일신보>에 발표. 1908년(22세): 공수학회(동경유학생 친목단체) 평의원 겸 동 회보 주필로 활약. 전명운ㆍ장인환 의사의 스티븐슨 사살 의거를 계기로 동경유학생들과 반일운동대회를 열고 매국도당을 성토하며 항일운동을 적극 추진, 하기 방학에 일시 귀국하였다가 부인과 함께 도일하여 동거. 1909년(23세) : 대한홍학회를 창립, <대한흥학회보>(주필)를 발간하여 국내외 각 학회ㆍ신문 등과 호응하여 배일 사상을 고취, 여기에 4편의 글을 발표. 장남 출생. 1910년(24세) : 한일합방 성토문과 위임장 2통을 작성하여 국내의 윤치호ㆍ김규식
  • 26. 26 등에게 전달하고자 이창환을 국내로 밀파. 비상대회의 비밀소집이 일경에 밀고되어 피검, 신문을 당함. 합방의 분개로 신경 쇠약에 걸리고, 두 형사의 감시로 연금. 1911년 (25세) : 중국 혁명지사들과 교류를 통해 중국에 혁명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중국 망명계획을 세우던 중 105인사건 일어나 일 헌병대에 구금당함. 1912년(26세) : 명치대학 법학부 졸업하고 귀국. (주석 10) 조소앙은 동시대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청소년기에 국제적인 체험을 겪고, 법학의 전문성과 동서의 근대학문에 접하게 되었다. 이 같은 전문성과 연구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크게 기여하였다. 주석 9> 앞의 책, 95~96쪽. 10> 강만길 편, <조소앙>, 300~301쪽, 한길사, 1982. [7회] 베이징에서 독립운동가들과 박달학원 설립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3장] 중국망명, 독립운동의 길에 나서다 2014/05/27 08:00 김삼웅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조소앙은 잠시 경신학교, 양정의숙, 대동법률전문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중국 망명을 준비하였다. 일본에 있을 때 상하이에 있던 신규식 등과 연계가 있어서, 그의 연락을 기다리던 중 중국 혁명지사 황각(黃覺)의 내한을
  • 27. 27 계기로 중국망명을 계획을 서둘렀다. 상하이에서는 해외 독립운동 최초의 단체인 동제사가 1912년 7월 신규식ㆍ박은식 등이 독립운동가와 유학생, 교민들에 의해 창립되고 있었다. “어려움을 당하면 같은 배를 타고 함께 건넌다”는 뜻으로, 나라 잃은 동포들이 함께 나누고 서로 통하는 의미의 동제사는 이사장 신규식, 총재 박은식이 선임되고, 주요 간부에는 김규식ㆍ신채호ㆍ박찬익ㆍ조성환ㆍ이광ㆍ신석우ㆍ변영만 등이 참여하였다. 1913년 27세가 된 조소앙은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당시 상하이는 최신 사조를 접할 수 있는 국제도시이고, 중국혁명(신해혁명)의 중심지였으며 정치활동이 자유로워서 일제식민지에서 고통받는 조선청년들에게는 학문과 독립운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신규식 등이 설립한 박달학원은 영어반과 중국어반으로 나누어 전문적으로 어학을 가르치고 교과목으로 영어ㆍ중국어ㆍ수학, 그리고 민족의식을 키워주기 위하여 조선의 역사ㆍ지리과목을 교수하였다. 교육기관은 1년 6개월 과정이었으며, 모두 3기생을 배출하였는데, 이동안 100여 명의 인재가 배출되었다. 조소앙은 박달학원의 교수로 참여하였다. 김규식ㆍ박은식ㆍ신채호 등과 동경유학 시절에 사귀었던 홍명희ㆍ문일평도 교수진이 되었다. 쟁쟁한 민족주의 역사학자들로 구성된 교사진이었다. 외국인 교사는 중국혁명운동가 농죽(農竹), 미국인 화교 모대위( 毛大衛) 등이다. 박달학원을 마친 청년들은 근대학문을 더 공부하기 위하여 미주나 유럽으로 떠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청년들은 동제사의 주선으로 중국 내의 각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다. (주석 1)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은 동제사, 박달학원에 이어 1913년 초 중국 혁명운동가들과
  • 28. 28 합작으로 신아동제사를 창립하였다. 조소앙도 참여한 신아동제사의 중국혁명가는 진영사(陳英士)ㆍ진과부(陳果夫)ㆍ황각ㆍ재계도 등이었다. 신아동제사는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한ㆍ중 혁명운동가들을 연결하고, 양국민의 우의를 증진시켜 상호 협조 속에서 혁명운동을 전개한다는 목표로 창설되었다. 한ㆍ중 협력기관으로 처음조직되고, 여기 참여한 중국측 인사들이 중국혁명정부의 중추세력이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중국혁명정부와의 유대가 가능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아동제사는 한국독립운동사에 크게 기여한 조직이다. 조소앙은 신아동제사의 활동과 함께 만주를 거쳐 상하이에 온 동생 용주 등과 함께 중국혁명지사들과 공동발기로 아시아민족 반일 대동단을 조직하였다. 중국측 참여자는 국민당 원로 장박천(張博泉)ㆍ대동당 발기인 황각, 국민당 조직부장 진과부 등이었다. 상하이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1915년 3월 동제사의 중추인 신규식ㆍ박은식 등이 해외 각지에 분산된 독립운동세력을 연대하여 독립전쟁을 치루고자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연해주의 이상설, 베이징의 유동열ㆍ성낙형, 북간도의 이동휘ㆍ이동춘 등 독립운동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신한혁명당은 중국과 러시아지역은 물론 국내에까지 비밀 지부를 설치하였다. 신한혁명당은 본부장 이상설, 재정부장 이춘일, 교통부장 유동열, 외교부장 성낙형, 감독 박은식, 상하이 지부 신규식, 한구 김위원, 연길현 이동춘, 평양 정항준, 회령 박정래, 나남 강재후 등의 지도체계를 갖추었다. 조소앙과 홍명희 등도 신한혁명당에 참여하였을 것이나, 연령이나 독립운동 연조로 보아 아직 직책을 맡기는 어려웠던 것인지, 명단을 찾기 어렵다. 주석
  • 29. 29 1> 이명화, <박달학원>,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524~525쪽, 독립기념관, 2004. [8회] 국민정신통일 방안, ‘육성교’ 구상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3장] 중국망명, 독립운동의 길에 나서다 2014/05/28 08:00 김삼웅 이 시기에 조소앙은 독특한 활동을 하였다. 국내외 동포의 대동단결을 정신적으로 유도하기 위하여 종교통일의 방안으로 ‘육성교(六聖敎)’를 제창한 것이다. 그는 일본유학 시절부터 육성교를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통 유학과 근대 교육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기독교에 입문하고서도 불교와 이슬람 등에 관심과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유교ㆍ불교ㆍ기독교를 소개하면서 모든 종교는 ‘권선징악의 도’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고 했다. 그리고 공자ㆍ석가ㆍ예수를 세상에서는 ‘삼성(三聖)’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중 어떤 종교를 선택해야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동양의 한국인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 문제에 대해 사고했다. 그는 종교 선택의 원칙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실행주의요, 둘째는 임성자적( 任性自適)이요, 셋째는 종교적 이상이오, 넷째는 정치상 의미라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네 가지 원칙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은 유교를 종교화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주석 2) 조소앙은 민족해방의 방략을 연구하면서 ‘육성교’를 구상하게 된 것 같다. 일본경찰서에 구치되었을 때 읽었던 각종 철학ㆍ종교 서적에서 얻은 영감,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나 제3의 종교에 대한 열망 때문에 기독교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육성교를 구상하게 되는 배경이다. 조소앙은 1915년경 ‘육성교’라는 독자 종교를 구상하고, 그것은 <일신교령(一神敎令)
  • 30. 30 >이라는 경문으로 표현하였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본래는 탕탕일신(蕩蕩一神)으로 유진유성(惟眞惟聖)이지만, 곧 만물지주요 백교지종( 百敎之宗)이다. 2. 일신이되 십상(十相)이 있어 그때그때에 현현하니, 단군ㆍ불타ㆍ공자ㆍ소크라테스ㆍ예수 그리스도ㆍ마호메트 등의 대 성인이 모두 신자( 神子)요 신의 성명(聖名)일 따름이다. 3. 일신이 대도를 펴고 사학(邪學)이 맥출하여 아집과 미망에 빠지는 내세에 이르렀다. 4. 성전표절, 교기망수, 골육상구, 인자를 멀리하고 잡혼, 마승을 따르느느 것, 파당을 짓는 것, 이기ㆍ사욕에 따르는 사교의 유행, 물욕 때문에 형제를 파는 것 등이 모두 말세의 증상 이다. 5. 이대로 가면 10년 내외에 천량(天良)이 인멸하고, 질실순직지한 성품이 맹수와 같이 될 터이니 큰 일이다. 6. 신자는 모두 깨어나 신을 향해 기도하라.(이하 생략) 7. 눈 앞의 고해를 건너감에 단단시일사순신(斷斷是一死殉神)과 영생도령지지성(永生 靈之至誠)으로 하라. 8. 신과 영은 천자, 본원일말류(本源 一末流)의 관계이니 신령감응이 가능하고, 그들이 일치한 후에 심증선과하니 선지위원은 곧 진ㆍ선ㆍ미요, 진ㆍ선ㆍ미는 우주의 본체이다. 9. 영과 신이 합하면 유신이 방광하야 일체독립, 일체자유, 일체평등, 일체귀일, 일체행복, 영생부활, 초월열반의 경지에 이르니 선지위덕이 크고도 멀다.
  • 31. 31 10. 신의 일체육성(一體六聖)이 동원동심(同源同心)이니 신은 곧 육성상합지장(六聖相 合之場)이요, 일신은 자비하사 인간을 위해 육자(六子)를 바쳤다. 11. 일체지성이 육지(六池)를 비추는 것과 같고, 일월육초(一月六초). 일체육용(一體六 用)의 관계에 있으니, 선은 육성의 궁극적 근원적 가치이며, 성신지도는 희생이고 성의헌신이고 자지계(自持械)에서부터 출발한다. 12. 중생을 영각케 하고 물과 물(物)을 선에 합하는 것이 일신의 사명이다. 13. 일신이 육자를 희생시켜 중생을 구하고, 파괴지옥하는 애정을 깨달아라. 14. 신자는 정성껏 수행여계하면 7일 이내에 단득영각할 것이다. 15. 신국이 새로 만들어지는 데 쓸 사람이 없으니 신의 종도는 어서 깨닫도록 하라. (주석 3) 조소앙이 육성교를 구상하면서 신의 제1인자로 단군을 택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나철에 의해 1909년 1월15일 서울에서 오기호ㆍ이기ㆍ박호암 등과 함께 단군교의 중광식을 거행하고 제1대 교주가 되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단군을 신의 제1인자로 한 것은 1909년 1월에 나철이 단군교를 개창하고, 그 이듬 해 7월에 대종교로 개칭하면서부터 재만독립운동자와 국내외의 국학자들을 중심으로 단군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정신적 상황의 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실 소앙 자신이 1930년에 상해로 망명한 것도 당시 대종교의 핵심간부이고 대표적 이론가였던 아관 신규식과의 연락에 의한 것이었고, 바로 그때부터 그는 신규식ㆍ박은식ㆍ신채호 등과 같이 행동하였으며, 동제사에서 세운 박달학원도 실은 신규식이 주관한 것이었다.(주석 4)
  • 32. 32 주석 2> 김기승, 앞의 책, 104쪽. 3> 홍선희, 앞의 책, 49~50쪽, 재인용. 4> 앞의 책, 51쪽. [9회] 독립운동가들과 대종교에 참여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3장] 중국망명, 독립운동의 길에 나서다 2014/05/29 08:00 김삼웅 1900년대를 전후하여 나라의 운명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황실은 권력투쟁의 장(場) 이 되고 지도층은 갈리어 청국에 기댄 위정척사파와 일본을 등에 업은 개화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국정은 세도정치로 부패타락하고 백성들은 가렴주구에 시달려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천주교가 들어와 반상의 신분질서를 바꾸고자 하였지만 정부의 혹독한 탄압으로 수많은 순교자를 낸 채 지하에 숨어들었다. 동학농민군이 마지막 몸부림을 쳤지만 외세가 들고온 신식 무기에 녹두꽃처럼 떨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이었다. 백성들은 육체적으로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황폐화되었다. 이럴즈음 이땅에서는 각종 민족종교가 창도되어 신생(新生)의 횃불이 되거나 혹세무민에 나섰다. 천도교ㆍ시천교ㆍ청림교ㆍ상제교(上帝敎)ㆍ수운교ㆍ경천교ㆍ천도명리교(天道明理
  • 33. 33 敎)ㆍ제우교(濟遇敎)ㆍ백백교ㆍ태을교(太乙敎)ㆍ보천교ㆍ단군교ㆍ대종교ㆍ원종교(元 宗敎)ㆍ원불교ㆍ증산교 등이 치병에서 영혼구제ㆍ국난극복에 이르기까지 제각각 사명을 제시하면서 창도되었다. 민족종교 중에는 본래의 목표대로 정진하는 교단이 있었는가 하면 상당수는 변질되어 친일 매국의 앞잡이가 되거나 국난기에 편승하여 혹세무민을 일삼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종교 중에서 대종교는 가장 격렬하고 줄기차게 일제침략자들과 싸웠다. 대종교의 전신인 단군교의 전통과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단군교는 단군조선 시대부터 명칭을 달리하면서 연면한 전통으로 이어졌다. 부여에서는 대천교, 예맥에서는 무천, 마한에서는 천군, 신라에서는 숭천교, 고구려에서는 경천교, 발해에서는 진종교, 고려에서는 왕검교, 만주에서는 주신교, 기타 다른 지역에서는 천신교라 불리면서 개국주(開國主)인 단군을 받들었다. 단군숭배사상을 기초로 한 단군교는 옛날부터 단군을 시조(始祖), 국조(國祖), 교조(敎 祖)로 신봉하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단군교는 사찰 본당과 대웅전의 뒷켠 삼신각에서 간신히 잔명을 유지하고, 유교가 국교가 되면서는 공자나 주자에 밀려났다. 기독교(천주교)가 유입되면서 ‘우상’으로 전락되고 일제강점기에는 말살의 대상이 되었다. 단군(교)의 존제가 새롭게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 몽골제국에 맞서 싸우면서 내부적으로 민족의식ㆍ민족적일체감이 형성되면서 부터이다. 안으로는 무인정권의 폭압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세계를 제패한 몽골의 침략으로 국토가 쑥대밭이 된 민족수난기에 내적인 민족통합의 정신적 일체감이 단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단군을 국조로 하는 일연 선사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편술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민족적인 위기를 국조를 중심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 34. 34 몽골제국이 13세기 초에서 중엽까지 80여 년 동안 고려의 정치에 간섭할 때 나타난 단군교가 20세기 초 일제의 침략으로 다시 국권이 위태로워지면서 국권회복의 구심체로서 부활하였다. 몽골침략 이후 7백여 년간 단절되었던 단군교가 1910년 8월 5일 나철이 대종교로 교명을 개칭하면서 국난극복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셈이다. 단군교가 대종교로 명명한 날을 중광절이라 한 것은 단군신앙의 부활을 뜻하였다. ‘중광’(重光:거듭 빛남)이란 국교(國敎)의 계승을 분명히 한 것이다. 대종교가 중광을 계기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강하게 표명하면서 일제의 가혹한 통제와 탄압이 따르게 되었다. 일제는 대종교를 항일구국운동의 비밀결사체로 인식하면서 치안경계 대상으로 삼아 심하게 탄압했다.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된 대종교는 1911년 7월 21일 백두산 기슭의 화룡현 청파호(靑 湖)로 총본사를 옮겼다.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사는 청파호에 총본사와 대종교 경각 등을 짓고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청파호를 근거지로 삼아 4도본사를 각기 청호ㆍ상해ㆍ서울ㆍ소왕청에 두고, 조선ㆍ중국ㆍ러시아 연해주 등 조선족이 사는 곳에 학교를 세워 포교활동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조선총독부가 1915년 10월 1일 이른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대종교에 포교금지령을 내리면서 공식적으로는 해방이 될 때까지 국내에서 포교활동은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대종교가 민족정통사상을 계승하면서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자 각지의 애국지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대종교 중광의 주역인 나철은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라는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의 정신으로 독립운동과 단군신앙을 일체화하였다. 이에 따라 대종교에서는 일제의 조선사왜곡에 맞서 단군에 대한 서적을 대량 출간하였다.
  • 35. 35 1914년에 <신단실기>와 <신단민사>의 발간을 시작으로 1922년에 <신고강의>, <신리대전>, <회삼경>, <신사기>, <조천기>, <신단민사>, <신가집>을 간행하였다. 1923년에는 국문으로 된 <현토신고강의>, <신리대전>, <신사기>, <화삼경>, <신단민사> 등을 발간하고, 이와 함께 <신고강의>, <종라문답>, <신가집>, <배달족강역형세도>등 교적을 속속 간행하였다. 대종교의 사서 간행은 1930~1940년대에도 이어져서 <삼일신고>, <신단실기>, <오대종지강연>, <종문지남>, <한얼노래>등을 펴내어 동포들을 교육하고 민족혼을 지켰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걸쳐 대종교에는 독립운동계의 거물들이 참여하였다. 신규식ㆍ박은식ㆍ홍범도ㆍ윤세복ㆍ신채호ㆍ김두봉ㆍ정인보ㆍ장지연ㆍ유근ㆍ김교헌 ㆍ서일 등 당대의 민족사학자 대부분이 대종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종교 계열의 독립운동가 신규식은 나라 망한 원인을 “첫째는 선조들의 교화와 종법을 잊어 버렸고, 둘째는 선민(先民)들의 공열(功烈)과 그 이기(利器)를 잊어버렸고, 셋째는 제 나라의 국사를 잊어버렸고, 넷째는 나라의 치욕을 잊어버리게 되었으니 이처럼 잊어버리길 잘하고 보면 그 나라는 망하게 마련이다.”라고 통분하면서 <한국혼>을 지었다. 대종교의 ‘역사지키기’ 정신의 일환이었다. 조소앙이 ‘육성교’를 제창하면서 단군을 윗자리에 올린 것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였다. 기성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육성교’는 이단 또는 사이비종교로 보일 지 모르지만, 1910년대 엄혹했던 민족현실에서는 국민정신의 ‘대동단결’을 위한 독립운동의 방략이고 종교운동이었다. [10회] 신규식 등과 ‘대동단결선언’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4장] 두 가지 ‘독립선언서’ 작성하다 2014/05/30 08:00 김삼웅
  • 36. 36 조소앙은 1915년(29세) 육성교를 전도하고 국내 상황을 살피기 위해 만주를 거쳐 국내로 잠입하려다 안둥에서 홍수를 만나 그곳에 머물렀다. 얼마 후 국내 밀사의 연락을 받으며 입국하다가 경찰에 피검되었다. 총독부의 뜻이었던지, 중앙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할 것을 제의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국내에서 이종소 등 청년들과 배일운동의 지하단체 조직을 시도했지만, 경찰의 감시로 성사되지 못하고, 1916년에는 대종(大腫)으로 반년 간이나 입원치료를 받았다. 이 해에 감시 경찰을 피하며 다시 상하이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망명길이 해방으로 귀국할 때까지 29년 동안 계속되었다. 상하이로 돌아온 조소앙은 동생 용주, 중국인 황각 등과 대동당 결성을 추진하여 인도, 중국, 대만, 필리핀, 조선, 베트남 등 7개국 지사들의 단결을 위해 중국 혁명가들과 연대를 추진하였다. 조소앙의 행적이 이때까지는 아직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상하이에는 쟁쟁한 선배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소앙이 독립운동진영에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17년 7월 상하이에서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하고 독립운동가 14명과 공표하면서였다. 신규식ㆍ윤세복ㆍ박은식ㆍ신채호ㆍ박용만 등은 독립운동의 활로와 이론의 정립을 모색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수립에 관한 민족대회의 소집을 제의, 제창하는 <대동단결선언>의 기초를 조소앙에게 의뢰하였다. 이 ‘선언’은 1919년 3ㆍ1혁명으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기 2년 전에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창하는, 역사적인 문건이다. 조소앙은 일본유학과 중국망명기에 중국사상가 강유위(康有爲)의 ‘대동사상(大同思想)’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동양적인 전제정치, 계급제도를 부인하는 평등사상과 민권사상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를 연구하였다. 또 박은식의 대동사상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그가 대동사상을 수용한 것은, 여기에 담긴 국가 간, 민족 간, 계급 간 불평등을 지양하고 철저한 평등주의정신
  • 37. 37 때문이었다. 조소앙은 실제로 1916년 중국인 황각 등과 <대동당>을 추진한 적이 있고, 1922년경에는 중국인 황개민(黃介民) 등과 <한울님>을 조직하여 김상옥 등을 입단시키기도 하였다. (주석 1) 일본이 국토를 강점하고 있으니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가 주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으므로 해외동포가 민족대회를 개최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조소앙의 주장은 당시 국제정세와 독립운동의 상황 등 여건 변화에서 기인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노령과 만주지방의 독립운동이 러시아, 중국 정부의 강압으로 봉쇄되었다. 이에 따라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간민회 등이 해체되고, 심지어 노령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감금되거나 축출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노령에 있던 이 상설은 중국으로 건너와 신규식ㆍ박은식 등과 1915년에 신한혁명당을 결성하는 등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국제적으로는 러시아에서 2월혁명이 일어나고, 핀란드와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하며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있어 같은 처지의 약소민족을 고무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참전으로 일본을 포함한 연합군이 우세해지고, 중국도 연합국에 기울어져갔다. 독립운동도 전환되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해혁명에 참가했던 신규식을 중심으로 <대동단결선언>이 나오게 되고, 조소앙이 역사적 문건을 집필하였다. ‘선언’은 주권불멸론과 융희황제의 주권포기론을 근거로 국민주권설을 정립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이념을 확립했을 뿐 아니라 정부의 통할체제를 계획하는 등 1917년까지 다양하던 독립운동의 이론을 결집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이같은 ‘선언’의 계획은 당장에는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그 문서가 동포사회에 널리 송달되었으며, <신한민보> 등 각처의 신문을 통해 계몽되면서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주석 2)
  • 38. 38 ‘선언’의 강령은 모두 7개항으로 되어 있는데, 앞의 3개항은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것이고,뒤의 4개항은 운영에 관한 것이다. 제1항은 “해외 각지에 현존한 단체의 대소ㆍ은현을 막론하고 규합 통일하여 유일무이의 통일기관을 조직한다”고 하여, 민족대회의 또는 임시의정원과 같은 것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제2항은 “중앙총본부를 상당한 지점에 치(置)하여 일절 한족을 통합하여 각지 지부로 관할구역을 명정한다”고 하여 최고 행정부를 두고 그 산하에 지역별로 지부를 두자는 것이다. 제3항은 “대헌(大憲)을 제정하여 민정에 합한 법치를 실행한다”고 하여 헌법의 제정과 법치주의를 천명하였다. 제4항은 “독립 평등의 성권(聖權)을 주장하여 동화의 마력과 자치의 열근(劣根)을 박멸하자”고 하여 국내문제에 대한 방책을 선언하고 있다. 제5항은 “국정을 세계에 공개하여 국민외교를 실행하자”고 하여 국제외교를 모색하였다. 제6항은 “영구히 통일적 유기체의 존립을 공고키 위하여 동지간의 애정과 수양을 할 것” 주장하였다. 제7항은 위의 실행방법으로 “기성한 각 단체와 덕망이 유한 개인의 회의로 결정할 것”이라고 하여, 제1항에서 결정한 회의에서 합의하여 실천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선언의 제일 끝에 찬동 여부의 회담통지서가 부착되어 있고, 단체와 개인에게 함께 발송되었다. 주석
  • 39. 39 1> <한국독립운동사> 제4권, 516쪽. 2> 조동걸,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 <한국학논총> 10, 국민대학교, 1987. [11회] 주권불멸론(고유주권론)에 의한 국민주권론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4장] 두 가지 ‘독립선언서’ 작성하다 2014/05/31 08:00 김삼웅 조소앙은 이 ‘선언’에서 주권을 상속받으면 국가적 행동을 실천해야 하는데, 그의 실질적 가능성에 대하여 재정ㆍ인물ㆍ신용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해외동포를 1백만 명으로 계산하고 재정에서 1인당 반원, 합계 50만 원의 연수입으로 공동사업을 운영하여 재정을 충당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대동단결을 강조하면서, 이같이 단결과 재정이 마련되면 인물도 육성되고 합력이 더욱 공고해진다고 역설하였다. 조소앙의 <대동단결선언>의 원본이 뒤늦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6년 8월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도산 안창호의 유품에서 발견된 것이다. 표지만 모조지이고 본문은 갱지인 이 문건은 세로 29cm, 가로 20cm의 12면에 인쇄되었다. ‘선언’은 148행으로 엮어져 있는데 그 중에 18행은 대동단결의 필요성, 12행은 국내참상, 50행은 해외동지의 역할, 18행은 국제환경, 끝의 12행은 대동단결의 호소이고, 본문만은 118행이다. 그리고 <제의의 강령> 11행과 제의에 대한 답장 관계가 19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권불멸론>에 대한 한 연구가의 분석이다. 주권이란 민족고유한 것으로 융희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것은 국민에 양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권행사의 의무와 권리가 국민에게 있는데 국내 동포는 일제에 구속되어 있으니 그 책임을 해외 동지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에서 기독교적 폭군방벌론이 자연법사상의 천부인권설(고유인권론)로
  • 40. 40 발전하여 국민주권설에 이른 과정과 비교하면 국민주권설 입론의 방법이 흡사하여 흥미로운 것이다. 국민주권설이 구한말에도 소개되고 또 신민회는 그에 근거하여 공화주의 이념을 표방했지만, 어떤 경우도 서양의 천부인권설이나 사회계약론을 도입한 논리였는데, ‘선언’이 주장한 국민주권설은 그와 달리, 민족사적 정통을 의식한 논리전개로써 특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융희황제의 주권 포기를 단정함으로써 이조 왕실이 신국가건설에 끼어들 여지를 봉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제의 주권침탈은 민족사적으로는 침략이지만, 왕조사로 보면 주권의 포기이니, 그 주권의 행사권은 민족에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 동지난 당연히 삼보를 계승하야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유하도다. 고로 2천만의 생령과 3천리의 구강과 4천년의 주권은 오인 동지가 상속하였고 상속하는 중이오 상속할 터이니 오인 동지난 차(此)에 대하야 불가분의 무한책임이 중대하도다”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1910년대 꾸준히 계속되어온 광무황제의 옹립으로서 망명정부를 수립하려던 신한청년당 등의 황보주의를 종결한 선언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주석 3) 주석 3> 조동걸,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 <한국학총론> 제19집, 국민대한국학 연구소, 1987. [12회] ‘대한독립선언서’ 집필의 배경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4장] 두 가지 ‘독립선언서’ 작성하다 2014/06/01 08:00 김삼웅
  • 41. 41 조소앙은 1917년 <대동단결선언>에 이어 이 해 8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 예정인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준비를 서둘렀다. 제2인터네셔널로도 불리는 이 대회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비자본ㆍ비공산을 내세우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 유럽국가들 의 중심이데올로기로 떠올랐다. 조소앙은 신규식 등과 이 대회에 참석하고자 했으나 경비 등의 이유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대신 조소앙은 한국독립의 역사적인 <주권불멸론> <주권민유론(主權民有論)>, <최고기관 창조의 필요론>을 골자로 하는 취지서를 작성하여 한국문제의 의제로 제출하고, 이를 통과시키게 하였다. 한국독립문제가 국제회의(대회)에서 공식 논의된 것은 망국 이후 이것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한국 대표가 참석하지 못한 대회의 결정은 별다른 효과를 찾기 어려웠다. 조소앙은 1917년 <대동단결선언>에 이어 이 해 8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 예정인 만국사회당대회(제2 인터네셔널)를 앞두고 조선사회당을 창당하였다. 일제의 패악을 폭로하고,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만국사회당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급조한 터여서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는 비자본ㆍ비공산을 내세우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사회민주주의 이데올로기가 팽배하였다. 실제로 이를 택한 나라도 적지 않았다. 스톡홀름대회는 이같은 여건에서 개최하는 국제행사였다. 역사적으로 한국인의 사회주의 운동조직을 가장 먼저 결성했던 사람이 조소앙이었다. 그것이 1917년 상해에서 신규식과 더불어 결성한 조선사회당이었다. 흔히 외교용 전단조직이었다고 하지만 조소앙이 1919년부터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사회당의 이름을 사용하였던 것을 보면, 단순한 전단정당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석 4)
  • 42. 42 뒤에서 다시 논급하겠지만. 조소앙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은 모스크바의 공산주의 이념이 아닌 독일사회민주당이나 영국의 노동당 노선에 가까운 편이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을 지원하기 위해 2년간 유럽을 순방하면서 영국 노동당 인사들과 교우하고 하원의원에서 한국독립문제를 의안으로 채택하게 하였다. 또 해방 후에는 직접 사회당을 조직하여 정권경쟁에 나서는 등 그의 정치이데올로기는 사회민주주의의 성향이 강한 편이었다. 연구가들 중에는 <대한독립선언>과 삼균주의 사상에는 사회민주주의적 가치와 목표가 깔려 있다고 분석한다. 조소앙은 1918년 국내외 동포들의 대동단결운동을 펴기 위하여 만주로 떠났다. 당시 만주에는 무장독립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만주에서 윤세복ㆍ이시영ㆍ윤기섭 등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고, 마침 이곳으로 망명한 김좌진 등과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1919년 1월 27일(음력) 길림성 여준의 집에서 여준ㆍ박찬익ㆍ황상규ㆍ김좌진ㆍ정원택ㆍ정운해등이 모여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다음날 의군부회의를 열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가까운 여러 곳과 구미에 선언서를 보낼 것을 논의하였다. (주석 5) 조소앙이 만주에서 행한 가장 큰 과업은 1919년 2월 길림에서 해외 지도급 독립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일이다. <무오독립선언서>로도 불리는 이 선언서는 <2ㆍ8독립선언서>와 <3ㆍ1독립선언서>에 앞서 발표되고, 시기나 내용, 서명자에 있어서 항일독립선언의 효시가 되었다. 서명자 중에는 쟁쟁한 민족사학자, 언론인, 문인, 학자 출신이 있음에도 32세의 젊은 조소앙이 기초자가
  • 43. 43 될만큼 그는 이미 독립운동가 진영에서 출중한 능력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선언서의 주요 서명자는 당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지도급 인사들이 총 망라되었다. 가나다순의 서명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조소앙은 본명 조용은이라 썼다) 김교헌ㆍ김규식ㆍ김동삼ㆍ김약연ㆍ김좌진ㆍ김학만ㆍ여준ㆍ유동열ㆍ이광ㆍ이대위ㆍ 이동녕ㆍ이동휘ㆍ이범윤ㆍ이봉우ㆍ이상룡ㆍ이세영(이천민)ㆍ이승만ㆍ이시영ㆍ이종 탁ㆍ이탁ㆍ문창범ㆍ박성태ㆍ박용만ㆍ박은식ㆍ박찬익ㆍ손일민ㆍ신 성ㆍ신채호ㆍ안정근ㆍ안창호ㆍ임 방ㆍ윤세복ㆍ조용은ㆍ조욱(조성환)ㆍ정재관ㆍ최병학ㆍ한흠ㆍ허혁ㆍ황상규. <대한독립선언>은 조소앙이 부주석으로 활동한 무장투쟁 단체 대한독립의군부가 주체가 되어 서명자를 동원하고 문건을 기초하고 인쇄와 배포의 책임을 맡았다. 모필로 쓴 것을 석판으로 약 4.000부를 인쇄하여,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배포하였다. 국내에 배포되었다는 단서는 아직 찾기 어렵다. 수취인(단체)들이 공개하기 어려웠을 것이거나, 보안상 해외 독립운동가에게만 배포했을 지 모른다. ‘선언서’의 구성은 <독립선언서>라고 제(題)한 부분, 본문, 발표 일자, 서명자 등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문은 35행으로 띄어쓰기와 마침표를 제외하고 1,273자이며, 크게 네 부분으로 짜여 있다. ‘선언서’는 먼저 ‘한일합병’의 무효를 선언하면서, 경술국치를 일본에 대한 주권의 양도가 아니라 융희황제의 주권포기로 간주하고, 그것은 국민에게 주권을 선양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어서 이 독립선언으로 일본을 응징해야 할 것으로 규정하고, 여러가지 이유를 열거하면서 독립군의 총궐기와 한민족 전체의 육탄혈전을 촉구하였다.
  • 44. 44 조소앙은 이 ‘선언’에서 해외망명 독립운동지도자들이 국내 동포의 위임을 받아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책임의식과 일본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절대 적임을 분명히 하고, 항일독립전쟁은 하늘의 인도와 대동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신성하고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점을 분명히 적시하였다. 따라서 민족의 독립은 자기희생의 비장한 결단에 의해 성취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3ㆍ1독립선언서>가 비폭력적인 저항을 선언한 데 비해 <대한독립선언>는 한민족 전체의 ‘육탄혈전’을 촉구하여 무장전쟁론을 제시한 것이다. 국내와 국외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국망 이후 지도급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선언’에 ‘육탄혈전’을 천명한 것은 최초의 일이다. 조소앙의 무장전쟁론의 의지를 살피게 하는 대목이다. ‘선언서’의 중요한 대목은 <앞으로의 행동강령 다섯 가지>부분이다. 1. 독립의 제일의 ­일체 방편으로 군국전제를 산제하야 민족평등을 전구(전지구)에 보시할 것. 2. 독립의 본령­무력 겸병을 근절하야 평균천하의 공도로 진행할 것. 3. 복국의 사명 ­밀맹( 密盟) 사건을 엄금하고 대동평화를 선전할 것. 4. 입국의 가치 ­동권동수( 同權同壽)로 일제 동포에 시(施)하야 남녀 빈부를 제하여, 동현동수로 지우노유에 균하야 사해인류를 토할것. 5. 대한민족의 응시 부활의 구경의(究竟義) ­진하야 국제불의를 감독하고 우주의 진선미를 제현할 것.(주석 6) ‘선언서’의 핵심은 무어라해도 마지막의 ‘육탄혈전’이다. 이 부분은 “조소앙의 동생 조용주의 직접 집필 내지는 그의 사상이나 논리 및 문투가 그대로 반영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주석 7) ‘선언서’의 발표 시점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원본 선언서의 발표 일자는
  • 45. 45 ‘단군기원 4252년 2월 일’로 되어 있다. 4252년은 서기로는 1919년 2월이다. 1919년 2월 1일이 음력 기미년 1월 1일이므로 ‘무오선언’이 되려면, 발표일이 1919년 1월 31일 이전이 되어야 한다. 조소앙의 기록에는 1919년 2월경에 이 선언서를 발표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 ‘선언’은 1919년 3ㆍ1일 서울에서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후에 발표되었다는 주장(송우혜)과, 1919년의 <2ㆍ8 독립선언서>보다 1개월 앞선 주장(신용하)으로 대별된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에서는 만주에서 나온 <대한독립선언서>가 1918년(무오년)에 발표된 것으로 알았고, 따라서 명칭조차 <무오독립선언서>라 불러 왔다. 또한 더 나아가 1919년 2월 8일에 발표된 <2ㆍ8독립선언서>와 3월 1일에 발표된 <3ㆍ1독립선언서>가 세칭 <무오독립선언서>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하는 견해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무오독립선언서>라는 별칭 및 다른 독립선언서들에 미친 영향력에 대한 추정은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다. <대한독립선언>는 <2ㆍ8독립선언서>와 <3ㆍ1독립선언서>가 나오고 난 뒤인 1919년 3월 중순에 만주 길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 8) 무오독립선언은 1918년 음력 12월 만주 동삼성에서 중광단이라는 독립운동 단체가 중심이 되어 당시 여러 곳에 있는 저명한 독립운동의 지도자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독립선언을 별칭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양력으로는 1919년 1월경이니,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국제정세의 변동을 포착해 독립선언을 발표한 것으로는 가장 앞선 것이었다. 노령과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된 간도의 무오독립선언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의 독립선언 중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재일유학생들의 ‘2ㆍ8독립선언’보다도 약 1개월이 앞선 것이었다. (주석 9)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시기에 대한 문제점은 최근에 입수한 임정 편인(編印), <한국독립선언서 23주년 3ㆍ1절기념특감>에 의해서 밝혀졌다. 즉 부록에 수록된
  • 46. 46 자료배열 순서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2ㆍ8독립선언서’ 앞에 게재되고 있다는 것은 대한독립선언서가 2ㆍ8독립선언서 이전에 발표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원동 민족해방투쟁과 3ㆍ1절>이나 <대한독립선언서>등에서 뒷받침 되고 있다. 또한 이 발표일자는 임시정부가 정부 차원에서 발행한 ‘3ㆍ1운동특집’ 간행물인 만큼 여기에 사용된 공용년기(公用年紀)는 음력일 수는 없고, 당연히 양력이라는 것도 자명하게 되었다. 이렇게 대한독립선언서가 2ㆍ8독립선언서와 3ㆍ1독립선언서에 앞서 발표 일자가 확실시 될 경우에 대한독립선언서 ‘원본’과 ‘대한독립선언서 친필 조소앙’의 년기 ‘단군기원 4252년 2월 일’은 2월 초순경인 2월 1~7일 사이로 보는 것이 올바른 견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고, 3ㆍ1독립선언서의 년기 ‘조선건국 4252년 3월 일’의 경우를 감안하면 2월 1일로 볼 수도 있다. 결국 대한독립선언서는 세계대전 후 2월 초순 경에 가장 먼저 발표된 선언서로서 ‘2ㆍ8, 3ㆍ1독립선언서의 모체요, 선도적 역할’을 다하였던 것이다. (주석 10)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시기에 대한 엇갈린 주장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의미'는 높이 평가된다. 첫째. 1919년의 저 거대한 독립운동 에너지의 분출로 국내외가 혼연일체가 되었을 때, ‘외응(外應)’의 측면에서 가장 형식이 잘 짜여진 선언서였다는 점이다. 선언서 발표의 주체들을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국외거주 동포사회의 대표격인 인물들로 내세운 것은 일종의 탁월한 정치적 감각으로 보인다. 둘째, 논리의 일관성이란 점에서 문제를 안고 있긴 하지만, 선언서 최종 부분에서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부분이 갖는 의의는 참으로 크다. 다른 독립선언서들이 환상적인 국제외교적 처리에 의한 독립을 갈구하고 있을 때, 혼자서 깨어 있는 자로서의 의식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삼균주의의 사상적 태동이 이 독립선언서에서 시작되었다. 삼균주의는 곧 임정의
  • 47. 47 건국강령의 기본정신이기도 하거니와 그후 우리 헌법의 정신적인 골격을 받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소앙은 “이것은(주: <대한독립선언서>의 작성을 가리킴) 삼균주의의 배태기었다. 토지는 국민의 소유이며 인민은 세습적으로 독자적 결정권을 행사할 것과 세계 화평을 고조하고 침략주의를 배격하였다.”라는 말로 <대한독립선언서>가 지닌 사상적인 골격과 의미를 크게 평가했다. 넷째, <대한독립선언서>와 ‘대한독립의군부’와의 관계이다. 대한독립의군부는 결국 이 선언서를 세상에 내어놓기 위해 존재했었다고 할 수 있다. 조직을 결성한 후 첫 업적이 <대한독립선언서>의 작성과 선포였고, 선언서가 나온 후에는 이내 조직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조소앙ㆍ정원택ㆍ박찬익 등 간부진들이 곧 상해로 갔고, 김좌진 역시 몇 달 후에 북간도의 정의단(북로군정서의 전신)에 입단하는 등 소속 인원이 모두 흩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선언서는 한 독립운동단체의 전부가 담긴 문서이기도 한 것이다. (주석 11) 주석 4> 조동걸, <한국근현대사의 이상과 현실>, 320쪽, 푸른역사, 2001. 5> 정원택, <자산외유일기>, 송우혜 ‘대한독립선언서’<세칭‘무오독립선언서’의 실체>, <역사비평>, 여름호, 147쪽, 1988년. 6> 송우혜, 앞의 책, 161쪽. 7> 앞의 책, 162쪽. 8> 앞의 책, 164쪽. 9> 신용하, <3.1독립운동발발의 경위>, <한국근현대사론> Ⅱ, 55~56쪽, 지식산업사. 10> 조항래, <대한독립선언서 발표시기의 경위>, 조만제 편, <삼균주의논선>, 73쪽,
  • 48. 48 삼균학회, 2003. 11> 송우혜, 앞의 책, 175쪽. [13회] 대한독립선언서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4장] 두 가지 ‘독립선언서’ 작성하다 2014/06/02 08:00 김삼웅 우리 대한 동족 남매와 온 세계 우방 동포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의 신성한 평등 복리로 우리 자손 여민에 대대로 전하기 위하여 여기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우리 대한은 예로부터 우리 대한의 한(韓)이요, 이 민족의 한이 아니라, 반만년사의 내치외교는 한왕한제(韓王韓帝)의 고유권한이요. 백만방리의 고려산수는 한남한녀의 고유재산이요. 기골물언이 유럽과 아시아에 뛰어난 우리 민족은 능히 자국을 옹호하며, 만방을 화협하여 세계에 공진할 천민(天民)이라, 우리나라의 털끝만한 권한이라도 이민족에게 양보할 의무가 없고, 우리 강토의 촌토라도 이민족이 점유할 권한이 없으며, 한 사람의 한인이라도 이민족이 간섭할 조건이 없으니, 우리 한은 완전한 한인의 한이라. 슬프다. 일본의 무력이여. 임진 이래로 반도에 쌓아 놓은 악은 만세에 엄폐할 수 없을지며, 갑오 이후 대륙에서 지은 죄는 만국에 용납치 못할지라. 그들이 호전 악습을 자보(自保)의 자위(自衛)의 구실을 만들더니, 마침내 하늘에 반하고 인도에 거스르는 보호 합병을 강제하고, 그들의 윤맹패습은 영토보존이니 문호 개방이니 기회균등이니 삼다가 필경 몰의무법한 밀관협약을 강제로 맺고, 그들의 요망한 정책은 감히 종교를 핍박하여 신화의 전달을 저희하였다. 학자를 압제하여 문화의 유통을 막고, 의전을 박탈하여 경제를 농락하며 군경의 무단과
  • 49. 49 이민이 암계로 한족을 멸하고 일인을 증하려는 간흉을 실행한지라. 적극 소극으로 한족을 마멸시킴이 얼마이며, 십년 무단의 작폐가 여기서 극단에 이르므로 하늘이 그들의 악덕을 꺼리어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주실 새, 하늘에 순종하고 인도에 응하여 대한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그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한 죄악을 선포하고 징계하노라. 1. 일본의 합방 동기는 그의 소위 범일본주의를 아시아에서 시행함이니 이는 동양의 적이요. 2.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불법무도한 폭력폭행을 극도로 써서 된 것이니 이는 국제법규의 악마이며, 3. 일본의 합방 결과는 군대 경찰의 야만적 힘과 경제압박으로 종족을 마멸하며 종교를 강박하고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문화를 저해하였으니 이는 인류의 적이라, 그러므로 하늘의 뜻과 사람의 도리가 정의법리에 비추어 만국의 입증으로 합방 무효를 선포하여, 그의 치악을 응징하여 우리의 권리를 회복하노라(중략) 귈기하라, 독립군! 일제히 독립군은 천지를 바르게 한다. 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이니, 개 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랴.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동체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냐. 집을 기울여 나라를 회복하면 3천리 옥토는 자가의 소유이다. 일가의 희생을 어찌 아깝다고만 하겠느냐. 아아! 우리의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된 본령을 자각한 독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요.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위해서의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명을 받들고 일체의 사악으로부터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단군기원 4252년 2월 일
  • 50. 50 [14회] 임시정부 헌장ㆍ법률제정에 참여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5장] 임정 외교활동, 시민주의 현장체험 2014/06/03 08:00 김삼웅 1919년은 조소앙에게도 생애에서 가장 분주한 해가 되었다. 만주 길림에서 국내 3ㆍ1혁명의 소식을 듣고 즉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과도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우자는 데 뜻을 모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국민의 총궐기에 신바람이 나고, 그 대신 책무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3ㆍ1혁명을 계기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대동단결선언>과 <대한독립선언>을 기초한 그에게 3ㆍ1혁명은 자신이 켜든 봉화에 2천만 민중이 화답하는 듯한 감격을 느꼈을 터였다. 상하이는 신규식 등과 동제사와 박달학원의 교사로서, 그리고 신한청년당에 참여했던, 항일독립운동의 출발지점이었다. 상하이에서는 여운형과 김규식 등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송했는가 하면, 국내와 일본에 간부들을 파견하여, 2ㆍ8독립선언과 3ㆍ1독립선언을 추동하는 등 임시정부 수립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3ㆍ1혁명 직후에 상하이 프랑스조계 안의 보창로 329호에 동제사와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여 활동을 개시하였다. 독립사무소 출범 초기의 주요 구성원은 위에서 본 신한청년당의 대표들과, 일본에서 2ㆍ8운동에 참가하고 상해로 온 이광수ㆍ최근우, 미국에서 온 여운홍, 그리고 국내에서 3 ㆍ1운동의 주역들이 파견한 현순 등이었는데, 이 가운데 현순이 총무를 맡았다. 그 뒤 3월 말에 이르러 각지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인물들이 여기에
  • 51. 51 집결하였으니, 대표적인 인물은 본국에서 온 최창식, 일본에서 온 신익희ㆍ윤현진, 만주와 러시아지역에서 온 이동녕ㆍ조성환ㆍ이시영ㆍ조소앙ㆍ김동삼 등이고, 총 30명이 넘었다. (주석 1)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4월 10일 저녁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논의를 거듭하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란 회의 명칭을 결정하고 의장단을 선출하였다. 이어서 국호를 대한민국, 정체를 민주공화제로 정하고, 정부조직과 임시헌장을 제정하였다. 조소앙은 국무원비서장에 선임되었다. 조소앙은 임시헌장 등 임시정부 조직의 법률 제정에 발군의 역량을 발휘하였다. 이시영ㆍ남형우ㆍ신익희 등 법학(률) 전문가들과 헌장제정위원으로 선임되어 전문 13장 57개 조로 구성된 임시의정원법을 1차로 제정하였다. 임시의정원법은 임시정부 구성의 모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어서 임시정부헌장기초위원, 심사위원 등 정부조직의 각종 법률제정에 참여하였다. 조소앙은 경기지역 의정원의원과 국무원비서장에 선임되었다. 국무원비서장은 총무처장관과 같은 역할이었다. 4월 22일에는 국무원비서장을 사임하고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임시정부가 출범하여 어느 정도 안착되면서 조소앙은 6월에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을 지원하라는 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유럽으로 떠났다.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전승국 중심의 평화질서 형성을 위해 1919년초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이른바 베르사이유 체제를 향한 전승국회의였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김규식은 대한청년당이 조직되면서 파리강화회의에 대한청년당의 대표 자격으로 파리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교활동은 쉽지 않았다. 전승국의 일원이 된 일본의 끈질긴 방해로 한국문제가 상정되지도 못했고, 김규식은 일본인들로부터 테러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1919년 12월 12일자 임시의정원 손정도 의장의 이름으로 된 <국내유지에게 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