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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대선전략 및 선거운동 평가



                                  발제자 : 국회의원 김현미




들어가며




선거는 기본적으로 경선 때는 캠프가, 본선 때는 당이 치르는 것이다. 선거의 주체는 당


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선의 실패는 민주당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선거의 주체인 민


주당이 대선을 어떻게 준비해왔고, 끌어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번 발제의 목표이다.




선거운동은 일정한 전략 하에 캠페인을 벌여 지지자를 확대, 동원하는 것이다. 그렇다


면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의 전략기조는 무엇이었는가? 운동의 주체인 조직상태는 어떠


했고 캠페인은 적절했는가? 선대본부장이었지만 저 또한 그 전모를 알지 못한다. 저뿐


만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당의 어느 누구도 이번 선거운동의 전체를 알지 못한 채 선거가


끝났다.
선거기간 내내 우리끼리 주고받던 ‘그럼 이건 누가 결정하는 거야?’‘우리가 결정하면 집


행은 되는 거야?’라는 얘기가 이번 선거를 상징한다고 본다.


어떻게 이런 선거운동이 이뤄졌을까


전략기획, 조직, 캠페인, 후보를 중심으로 되짚어본다.




민주당은 무엇을 했는가




1. 대선의 출발 - 4.11 총선의 실패와 혼선


이번 대선은 4.11 총선의 연장에 있었다. 두 선거가 시기적으로도 가까웠고, 선거를 지


배했던 시대정신도 일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선을 어떻게 치렀는가, 총선 이후 제


기된 과제들을 양당이 어떻게 극복했는가는 대선을 위한 기본적 준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성공한 새누리당과 실패한 민주당의 준비는 너무 달랐다.




새누리당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후 당을 4.11 총선과 대선 대비체제로 전면


적으로 바꿔냈다. 한나라당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선출로 총선을 시작했고, 박근혜


후보는 대선을 시작했다.
당명, 색깔, 강령, 인물, 조직 모두를 MB가 아닌, 박근혜대선후보 중심으로 재편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정책을 선점하여 중간층으로 세를 넓혔고, 당의 로고와 색깔까지 과


감히 바꿈으로써 MB와의 차별화를 가시적으로 만들어냈다. 열세로 보였던 SNS 분야


에서도 속칭 ‘십알단’초기행태를 통해 만회를 모색해갔다. 청년을 발탁하고 지역구와 비


례대표에 각 분야별, 직능별로 대선을 책임질 인물들을 고루 공천하여 이들을 통해 해


당분야에 대한 우군화를 가속화했다. 박근혜 후보는 전국을 시․군․구 단위로 훑으며 대


국민 접촉을 강화했다.




한마디로 중앙과 지역, 정책과 분야, on과 off 모두에서 한판 대선승부를 준비하는 총선


이었고, 승리했다. 총선승리 이후 새누리당에게는 준비된 레일 위를 달리는 일만 남아


있었다.




반면 민주당에게 2012년은 바쁘고 소란스러웠지만 대선을 위해 남긴 게 없는 한해였다.


국민경선을 세 번이나 치렀다. 국민경선은 조직적 기반이 취약한 민주당이 국민적 지지


를 확보하기 위한 길이지만,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일부를 제외하고는 당의 조직적 확대


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수백만명의 선거인단 명부는 쌓였지만 그것은 단지 수집된 명단


에 불과했다.
정책이나 홍보, 인물 면에서도 새로운 변신, 확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특히 국민경선


방식의 지역구 후보선출과 방향성없는 비례대표 선정은 특정분야는 과대 대표되고 특


정분야는 과소 대표되는 결과를 낳아 총선공천이 당의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


지 못했다.




정책적 혼선과 갈등, 수도권과 젊은층 중심의 선거운동, SNS 중심 홍보전략의 한계 등


과제를 남기고 민주당은 총선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총선패배 후 민주당은 한명숙대표


가 퇴진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숙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안한 채) 대통령선거를 맞았다.




총선 이후 당대표가 두 번 바뀌었다. 2~3달 간격으로 지도부는 바뀌고, 새 지도부는 눈


앞에 닥친 당내선거 치러내기에 바빴다. 결국 누구 하나 차분히 앉아서 총선을 점검하


고 대선을 준비하지 못했다.(안했다.)




2. 전략 부재


민주당은 4월11일 총선이 끝난 뒤 6월9일 이해찬 당대표 선출, 9월16일 문재인 대통령


후보 선출, 9월27일 중앙선대위 발족, 11월23일 미완의 단일화에 이어 11월27일부터
22일간의 본격적인 대통령선거운동에 돌입했다. 이해찬대표 선출 후 111일만에 선거


운동에 돌입한 것이다. 즉 민주당에게는 4개월 남짓한 111일 동안의 선거운동 준비기


간이 있었다. 그 111일 동안 민주당은 과연 어떤 준비를 했는가.




이해찬대표 체제는 대선후보경선이 한창 진행 중이던 8월3일에야 추미애최고위원을


단장으로 하는 대선기획단을 출범시켰다.




대선기획단은 중앙선대위 발족 전까지 선거기조와 전략 등 밑그림을 그리고 준비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기획단은 경선과정이라는 이유로 인적구성조차 신속히 마무


리하지 못했고, 뒤늦게 조직구성은 마쳤지만 특별한 결과물도 없이 중앙선대위 체제로


전환되었다. 대선기획단 내부적으론 전략개발을 위한 중심도 세워지지 않았다. 그러다보


니 가장 기초적인 여론분석과 유권자 분석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분석에 기초한 정책,


조직, 홍보전략 등은 물론 준비되지 못했고, 그나마도 이해찬대표 퇴진논란 속에서 흔들


리다가 10월 본선거 국면을 맞았다.




기획본부 A팀장 인터뷰 中
“10월 초순 업무를 시작하며 당으로부터 인계받은 여론조사 등 분석자료라고는 단 한
차례 실시한 FGI 분석자료 하나가 전부였다. 당이 자체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와 정세
분석 자료가 전무함에 따라 실무진은 타 기관의 공개된 분석 자료와 感에 의존한 초기
전략수립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전략기획 부재상황은 본선 선거대책위원회가 출범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후보단일


화와 2030 투표율 70%대, PK득표 40%가 전략이라면 유일한 전략이었다. 그 외 지역,


세대, 계층별 유권자 분석이 없으니 이에 따른 전략이 나올 수 없었고, 맞춤형 정책이나


홍보, 유세일정을 만들어낼 수 없음은 당연했다.




3. 중심이 없는 캠프


9월16일 선출된 문재인후보는 27일 중앙선대위를 발족했다. 선대위원장이 10명인 수


평적 구조 선대위였다. 또한 캠프를 민주캠프, 시민캠프, 미래캠프로 삼분화했고, 각 본


부를 더욱 세분화하여 실무진 포함 약 1천명이 상근하는 매머드급 선대위 체제였다.




그러나 수평적 의사결정 구조는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라는 동전의 뒷면을 드


러내고 말았다.




대통령선거는 특성상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보고서가 제출되고, 각 본부로부터 수많은


제안이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선대위원장회의, 선대본부장회의를 통해 논의되
고 결정, 집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논의는 무성했지만 누구도 결정


하지 못했다. 어쩌면 아무도 안했을 수 있다! 기막히게도... 동네 구의원 선거에도 있는


지도부가 없이 대통령 선거를 치른 것이다.




예를 들어 50대 유권자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선대본부장 회의에서 ‘50대 위원회’구성을


결정했음에도 끝내 집행되지 않았다. ‘어느 단위에서 추진하느냐’‘모르겠다’만 반복하다


가, 문재인후보가 50대를 위한 정책발표와 방송연설 한번 하는 것으로 이 제안은 사장


되고 말았다.




기획본부 B팀장 인터뷰 中
“‘제안→논의→지시→점검→채근․독려→성과’라는 가장 기본적 절차가 실종됐다.
집행할 수 있는 의사결정을 도대체 누구에게 요구해야 하는지 몰라 답답했다.
그럴수록 후보자의 의사결정 하중은 커져만 갔고, 후보자에게 각기 보고해서 후
보자가 각기 결정하는 비민주적 캠프 운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상황본부 C팀장 인터뷰 中
“친노 9인방이 물러났으면 강력한 총괄 타워가 있었어야 했다. 정세균고문이 총
괄을 맡기 전까지 의사결정을 전혀 하지 못하는 체계였다. 차라리 친노 9인방이
존치됐으면 이런 결과까지는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부별, 본부내 업무조정도 여의치 않았다. 같은 업무가 캠프별로 중복되기 일쑤였고,
같은 캠프 내에서도 A팀이 수행하던 업무가 갑자기 B팀으로 이관되기를 반복, 업무를


두고 치열한 신경전이 있었다. 선거운동 막바지까지 혼선은 계속되었다. 모두 선거총괄


책임자 부재가 불러온 사태였다. 제가 담당했던 소통2본부도 부끄럽지만 예외가 아니


었다.


기획본부 D팀장 인터뷰 中
“9월부터 정책위원회와 민주정책연구원 사이에 정책 주도권을 놓고 갈등이 있었
다. 선대위 체제로 전환된 이후에는 미래캠프와 공감본부, 공감 1본부와 공감 2
본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정책의 이슈화와 지역정책 발굴을 위한 논의는 제대
로 시작할 수도 없었다.”




이같은 지도부 공백사태는 11월23일 안철수후보 사퇴 이후 절정에 달했다.


안후보측을 문재인후보 선대위에 참여토록 하기 위해 선대위원장들이 총사퇴를 결정함


으로써, 지도부가 선대본부장회의로 내려왔다. 전국선거 경험이 많지 않은, 초재선들이


대부분인 선대본부장회의는 유감스럽지만, 말그대로 ‘봉숭아학당’이었다.


그렇게 금쪽같은 초반 열흘을 허송했다. 선거 열흘 앞두고 정세균전대표가 상임고문으


로 오고서야 비로소 선대위가 작동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4. 전국 총동원 체제 실패
이번 선거운동의 중심은 서울과 PK였다. 특히 안철수후보와 단일화 때문에 초기는 호


남에 집중해야 했고, 본선 동안은 서울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경기,


충청, 강원에 대한 투여가 적었고, 이는 선거결과 부진한 득표로 나타났다.




지역별로 선택하고 집중할 수는 있지만 최소한 소외되지는 않게 해야 했으나 우리는 그


러지 못했다. 선대위회의에서 지역별 분석과 대책을 들어보지 못했다. 지역별 이슈도


만들지 못했고, 지방단체장, 지방의원과 연계한 정책개발, 조직활동 또한 제대로 이루


어지지 않았다.




지금 누가 후보의 유세동선을 놓고서 당시 왜 그렇게 움직여야 했는지 묻는다면 누구도


합리적 근거를 들어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전략이 없었다. 우리가 타운홀 미팅과 서울


에서 쏟아내는 공중전에 의존할 때 새누리당은 시골골골도 누볐다.
소통본부 E팀장 인터뷰 中
“각 지역에서 열심히 선거운동을 해야 할 시의원, 도의원이 중앙선대위 직함을
받고 중앙당에서 상근하는 것은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다”


상황본부 F팀장 인터뷰 中
“선거가 끝난 후 보수진영의 자발적 전화홍보가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지 알았
다. 이에 반해 우리는 지역위원회 등 당원 조직을 전혀 가동하지 못해 조직력에
서 결국 패배했다”




단일화의 블랙홀에 빠진 대선




민주당에게 이번 대선은 안철수로 시작해서 안철수로 끝나는 선거였다. 그러나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는 약이었지만, 과하면 독이 되는 약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약으로부


터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에 묶여있었다. 자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드시 단일화에 성공해야 했다.


그래서 세대로는 20~40대, 지역적으로는 수도권과 호남에 집중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박근혜후보와 경쟁해야 하는 50대와 충청에 대한 집중을 어렵게 했고, 단일화 마무리
이후뒤집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




후보의 메시지, 정책, 일정, 홍보 포인트도 단일화로 모아져야 했다. 안철수후보는 ‘새정


치’를 주장했고, 우리는 사회경제적 민생이슈 대신 안철수후보가 주장하는 ‘새정치’를


얘기해야 했다. 안철수후보 사퇴 이후에도 선거가 끝날 때까지 문재인후보는 (정체불명


의) 새정치를 얘기하고 박근혜후보는 민생을 얘기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안철수후보가 사퇴한 단일화를 아름다운 단일화로 만들기 위해서 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여하고 전략을 수정해야 했다. 11월23일 사퇴에서 12월6일 회동까지 무려 2주일, 선


거운동 시작부터 무려 2주일을 문재인후보는 새정치를 얘기하면서 수도권에 묶여있어


야 했다. 거기에 선대위원장들까지 총사퇴해서 캠프는 지도부 공백상태로 남겨지고...
기획본부 G팀장 인터뷰 中
“2002년 당시 후보자들의 지지층을 보면, 노무현 후보는 2030대층이, 정몽준 후
보는 비교적 안정을 바라는 중장년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몽준 후보
를 이기는 것이 40~50대 이상을 흡수하는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따라서 예선
승리로 본선의 장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는 투표일로부터
역산했을 때 최소한 11월 10일 이전까지 단일화를 완료했었어야 했다”




단일화는 필요했고, 아름답게 만들어내야 했지만 실패했다. 벼랑끝 단일화로 시간적으


로도 본선을 준비할 여력을 없앴다. 단일화 직후, 준비되지 않은 전략과 홍보로 우왕좌


왕했던 일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이번 단일화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유권자 세대지형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단일화의 시기 설정이었다. 지지층이 박근혜후보와 겹치는 것을 알면서도 50대 이상의


유권자 세대지형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대응책이 없었다. 그리고 벼랑끝 단일화의 위험


을 알면서도 막판 미완의 단일화를 성사시킬 수밖에 없었던 한계는 인정하지만, 철저한


분석이 선행되었다면 단일화의 시기 설정은 대승적으로 결정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


한다. 이는 앞으로도 야권 전체 진영의 숙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후보자에 대한 준비 부족




이번 대선의 특이한 점은 유권자들이 유력후보였던 문재인후보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


에서 치른 선거라는 것이다. 양강구도로 진행된 대선인데 문재인후보를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장에서 보면 후보이름은 알아도 후보가 걸어온 삶은 잘 알지 못했다. ‘


민주당이니까 찍는다’‘박근혜 후보가 싫으니까 찍는다’는 반응 뒤에 ‘그런데 문재인 후보


는 뭐 하던 사람이냐’고 반문한다.




수십년 동안 대중적 인지도를 쌓아온 박근혜후보와 비교할 때 정치입문 1년이 안되는


문재인후보는 국민에게‘내가 누구인지’부터 알리며 시작해야 하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신선하다, 맑고 선해 보인다’‘바른 사람 같다’등 이미지는 분명 주요 득표요인이었지만,


대통령 문재인으로 대중에 각인되기까지는 너무 시간이 짧았다.




후보가 당과 정치인들 속에 뿌리내리는데도 시간적 한계는 작용했다. 국회의원 중에도


문재인후보와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채 선거를 치룬 의원들이 있다. 더구나


국정감사, 예산안심사가 선거기간과 겹치면서 후보가 의원들과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기


회가 적었을 것이다.
결국 의원들도 후보를 잘 몰랐겠지만, 후보도 의원들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선거를


치렀다. 하물며 원외 지역위원장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상태에서 당의 총력체제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결 – 패배에서 출발하자




대선승리를 위해 민주당은 우선 총선을 제대로 치러야 했다. 최소한 총선패배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둘 다를 제대로 해내지 못함으로써 대선에 실패했다.




총선 때 드러난 문제점을 시정하는 과정도 없이, 대선을 위한 기본적 준비도 없이 민주


당은 대선을 맞았다. 선거를 지휘하는 지도부도, 전략도 없었다. 안철수후보와의 단일


화는 미완에 그쳤고, 단일화 앞에서 그나마의 전략도 길을 잃었다.


그럼에도 1470만표, 48% 득표율은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들의 열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보여준다. 국민들의 절망과 민주당에 대한 분노가 만나는 지점이다. 여기가 민주당이


다시 시작해야 할 지점이다. 두 번의 선거패배에 대한 성찰에서 다시 시작하자.
민주당의 역대 선거는 언제나 지형적으로 불리했다. 인구분포도 언론도 늘 그랬다. 그


러나 당이 총력을 다했을 때 우리는 동토의 땅에서도 승리를 일궈내는 저력을 발휘한 바


있다. 두 번의 대선승리와 최문순 강원도지사 선거, 손학규 전 대표의 분당 선거 등이 대


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번 대선의 가장 큰 패인은 당이 중심이 되어 총력을 다하지 못한


것 외에는 사실상 실질적 답을 찾을 수 없다. 민주당의 저력은 다시 발휘될 수 있다. 두


번의 선거패배에 대한 성찰에서 다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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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민주당의 대선전략 및 선거운동 평가 발제자 : 국회의원 김현미 들어가며 선거는 기본적으로 경선 때는 캠프가, 본선 때는 당이 치르는 것이다. 선거의 주체는 당 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선의 실패는 민주당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선거의 주체인 민 주당이 대선을 어떻게 준비해왔고, 끌어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번 발제의 목표이다. 선거운동은 일정한 전략 하에 캠페인을 벌여 지지자를 확대, 동원하는 것이다. 그렇다 면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의 전략기조는 무엇이었는가? 운동의 주체인 조직상태는 어떠 했고 캠페인은 적절했는가? 선대본부장이었지만 저 또한 그 전모를 알지 못한다. 저뿐 만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당의 어느 누구도 이번 선거운동의 전체를 알지 못한 채 선거가 끝났다.
  • 2. 선거기간 내내 우리끼리 주고받던 ‘그럼 이건 누가 결정하는 거야?’‘우리가 결정하면 집 행은 되는 거야?’라는 얘기가 이번 선거를 상징한다고 본다. 어떻게 이런 선거운동이 이뤄졌을까 전략기획, 조직, 캠페인, 후보를 중심으로 되짚어본다. 민주당은 무엇을 했는가 1. 대선의 출발 - 4.11 총선의 실패와 혼선 이번 대선은 4.11 총선의 연장에 있었다. 두 선거가 시기적으로도 가까웠고, 선거를 지 배했던 시대정신도 일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선을 어떻게 치렀는가, 총선 이후 제 기된 과제들을 양당이 어떻게 극복했는가는 대선을 위한 기본적 준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성공한 새누리당과 실패한 민주당의 준비는 너무 달랐다. 새누리당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후 당을 4.11 총선과 대선 대비체제로 전면 적으로 바꿔냈다. 한나라당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선출로 총선을 시작했고, 박근혜 후보는 대선을 시작했다.
  • 3. 당명, 색깔, 강령, 인물, 조직 모두를 MB가 아닌, 박근혜대선후보 중심으로 재편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정책을 선점하여 중간층으로 세를 넓혔고, 당의 로고와 색깔까지 과 감히 바꿈으로써 MB와의 차별화를 가시적으로 만들어냈다. 열세로 보였던 SNS 분야 에서도 속칭 ‘십알단’초기행태를 통해 만회를 모색해갔다. 청년을 발탁하고 지역구와 비 례대표에 각 분야별, 직능별로 대선을 책임질 인물들을 고루 공천하여 이들을 통해 해 당분야에 대한 우군화를 가속화했다. 박근혜 후보는 전국을 시․군․구 단위로 훑으며 대 국민 접촉을 강화했다. 한마디로 중앙과 지역, 정책과 분야, on과 off 모두에서 한판 대선승부를 준비하는 총선 이었고, 승리했다. 총선승리 이후 새누리당에게는 준비된 레일 위를 달리는 일만 남아 있었다. 반면 민주당에게 2012년은 바쁘고 소란스러웠지만 대선을 위해 남긴 게 없는 한해였다. 국민경선을 세 번이나 치렀다. 국민경선은 조직적 기반이 취약한 민주당이 국민적 지지 를 확보하기 위한 길이지만,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일부를 제외하고는 당의 조직적 확대 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수백만명의 선거인단 명부는 쌓였지만 그것은 단지 수집된 명단 에 불과했다.
  • 4. 정책이나 홍보, 인물 면에서도 새로운 변신, 확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특히 국민경선 방식의 지역구 후보선출과 방향성없는 비례대표 선정은 특정분야는 과대 대표되고 특 정분야는 과소 대표되는 결과를 낳아 총선공천이 당의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 지 못했다. 정책적 혼선과 갈등, 수도권과 젊은층 중심의 선거운동, SNS 중심 홍보전략의 한계 등 과제를 남기고 민주당은 총선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총선패배 후 민주당은 한명숙대표 가 퇴진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숙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안한 채) 대통령선거를 맞았다. 총선 이후 당대표가 두 번 바뀌었다. 2~3달 간격으로 지도부는 바뀌고, 새 지도부는 눈 앞에 닥친 당내선거 치러내기에 바빴다. 결국 누구 하나 차분히 앉아서 총선을 점검하 고 대선을 준비하지 못했다.(안했다.) 2. 전략 부재 민주당은 4월11일 총선이 끝난 뒤 6월9일 이해찬 당대표 선출, 9월16일 문재인 대통령 후보 선출, 9월27일 중앙선대위 발족, 11월23일 미완의 단일화에 이어 11월27일부터
  • 5. 22일간의 본격적인 대통령선거운동에 돌입했다. 이해찬대표 선출 후 111일만에 선거 운동에 돌입한 것이다. 즉 민주당에게는 4개월 남짓한 111일 동안의 선거운동 준비기 간이 있었다. 그 111일 동안 민주당은 과연 어떤 준비를 했는가. 이해찬대표 체제는 대선후보경선이 한창 진행 중이던 8월3일에야 추미애최고위원을 단장으로 하는 대선기획단을 출범시켰다. 대선기획단은 중앙선대위 발족 전까지 선거기조와 전략 등 밑그림을 그리고 준비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기획단은 경선과정이라는 이유로 인적구성조차 신속히 마무 리하지 못했고, 뒤늦게 조직구성은 마쳤지만 특별한 결과물도 없이 중앙선대위 체제로 전환되었다. 대선기획단 내부적으론 전략개발을 위한 중심도 세워지지 않았다. 그러다보 니 가장 기초적인 여론분석과 유권자 분석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분석에 기초한 정책, 조직, 홍보전략 등은 물론 준비되지 못했고, 그나마도 이해찬대표 퇴진논란 속에서 흔들 리다가 10월 본선거 국면을 맞았다. 기획본부 A팀장 인터뷰 中 “10월 초순 업무를 시작하며 당으로부터 인계받은 여론조사 등 분석자료라고는 단 한 차례 실시한 FGI 분석자료 하나가 전부였다. 당이 자체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와 정세
  • 6. 분석 자료가 전무함에 따라 실무진은 타 기관의 공개된 분석 자료와 感에 의존한 초기 전략수립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전략기획 부재상황은 본선 선거대책위원회가 출범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후보단일 화와 2030 투표율 70%대, PK득표 40%가 전략이라면 유일한 전략이었다. 그 외 지역, 세대, 계층별 유권자 분석이 없으니 이에 따른 전략이 나올 수 없었고, 맞춤형 정책이나 홍보, 유세일정을 만들어낼 수 없음은 당연했다. 3. 중심이 없는 캠프 9월16일 선출된 문재인후보는 27일 중앙선대위를 발족했다. 선대위원장이 10명인 수 평적 구조 선대위였다. 또한 캠프를 민주캠프, 시민캠프, 미래캠프로 삼분화했고, 각 본 부를 더욱 세분화하여 실무진 포함 약 1천명이 상근하는 매머드급 선대위 체제였다. 그러나 수평적 의사결정 구조는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라는 동전의 뒷면을 드 러내고 말았다. 대통령선거는 특성상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보고서가 제출되고, 각 본부로부터 수많은 제안이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선대위원장회의, 선대본부장회의를 통해 논의되
  • 7. 고 결정, 집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논의는 무성했지만 누구도 결정 하지 못했다. 어쩌면 아무도 안했을 수 있다! 기막히게도... 동네 구의원 선거에도 있는 지도부가 없이 대통령 선거를 치른 것이다. 예를 들어 50대 유권자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선대본부장 회의에서 ‘50대 위원회’구성을 결정했음에도 끝내 집행되지 않았다. ‘어느 단위에서 추진하느냐’‘모르겠다’만 반복하다 가, 문재인후보가 50대를 위한 정책발표와 방송연설 한번 하는 것으로 이 제안은 사장 되고 말았다. 기획본부 B팀장 인터뷰 中 “‘제안→논의→지시→점검→채근․독려→성과’라는 가장 기본적 절차가 실종됐다. 집행할 수 있는 의사결정을 도대체 누구에게 요구해야 하는지 몰라 답답했다. 그럴수록 후보자의 의사결정 하중은 커져만 갔고, 후보자에게 각기 보고해서 후 보자가 각기 결정하는 비민주적 캠프 운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상황본부 C팀장 인터뷰 中 “친노 9인방이 물러났으면 강력한 총괄 타워가 있었어야 했다. 정세균고문이 총 괄을 맡기 전까지 의사결정을 전혀 하지 못하는 체계였다. 차라리 친노 9인방이 존치됐으면 이런 결과까지는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부별, 본부내 업무조정도 여의치 않았다. 같은 업무가 캠프별로 중복되기 일쑤였고,
  • 8. 같은 캠프 내에서도 A팀이 수행하던 업무가 갑자기 B팀으로 이관되기를 반복, 업무를 두고 치열한 신경전이 있었다. 선거운동 막바지까지 혼선은 계속되었다. 모두 선거총괄 책임자 부재가 불러온 사태였다. 제가 담당했던 소통2본부도 부끄럽지만 예외가 아니 었다. 기획본부 D팀장 인터뷰 中 “9월부터 정책위원회와 민주정책연구원 사이에 정책 주도권을 놓고 갈등이 있었 다. 선대위 체제로 전환된 이후에는 미래캠프와 공감본부, 공감 1본부와 공감 2 본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정책의 이슈화와 지역정책 발굴을 위한 논의는 제대 로 시작할 수도 없었다.” 이같은 지도부 공백사태는 11월23일 안철수후보 사퇴 이후 절정에 달했다. 안후보측을 문재인후보 선대위에 참여토록 하기 위해 선대위원장들이 총사퇴를 결정함 으로써, 지도부가 선대본부장회의로 내려왔다. 전국선거 경험이 많지 않은, 초재선들이 대부분인 선대본부장회의는 유감스럽지만, 말그대로 ‘봉숭아학당’이었다. 그렇게 금쪽같은 초반 열흘을 허송했다. 선거 열흘 앞두고 정세균전대표가 상임고문으 로 오고서야 비로소 선대위가 작동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4. 전국 총동원 체제 실패
  • 9. 이번 선거운동의 중심은 서울과 PK였다. 특히 안철수후보와 단일화 때문에 초기는 호 남에 집중해야 했고, 본선 동안은 서울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경기, 충청, 강원에 대한 투여가 적었고, 이는 선거결과 부진한 득표로 나타났다. 지역별로 선택하고 집중할 수는 있지만 최소한 소외되지는 않게 해야 했으나 우리는 그 러지 못했다. 선대위회의에서 지역별 분석과 대책을 들어보지 못했다. 지역별 이슈도 만들지 못했고, 지방단체장, 지방의원과 연계한 정책개발, 조직활동 또한 제대로 이루 어지지 않았다. 지금 누가 후보의 유세동선을 놓고서 당시 왜 그렇게 움직여야 했는지 묻는다면 누구도 합리적 근거를 들어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전략이 없었다. 우리가 타운홀 미팅과 서울 에서 쏟아내는 공중전에 의존할 때 새누리당은 시골골골도 누볐다.
  • 10. 소통본부 E팀장 인터뷰 中 “각 지역에서 열심히 선거운동을 해야 할 시의원, 도의원이 중앙선대위 직함을 받고 중앙당에서 상근하는 것은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다” 상황본부 F팀장 인터뷰 中 “선거가 끝난 후 보수진영의 자발적 전화홍보가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지 알았 다. 이에 반해 우리는 지역위원회 등 당원 조직을 전혀 가동하지 못해 조직력에 서 결국 패배했다” 단일화의 블랙홀에 빠진 대선 민주당에게 이번 대선은 안철수로 시작해서 안철수로 끝나는 선거였다. 그러나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는 약이었지만, 과하면 독이 되는 약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약으로부 터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에 묶여있었다. 자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드시 단일화에 성공해야 했다. 그래서 세대로는 20~40대, 지역적으로는 수도권과 호남에 집중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박근혜후보와 경쟁해야 하는 50대와 충청에 대한 집중을 어렵게 했고, 단일화 마무리
  • 11. 이후뒤집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 후보의 메시지, 정책, 일정, 홍보 포인트도 단일화로 모아져야 했다. 안철수후보는 ‘새정 치’를 주장했고, 우리는 사회경제적 민생이슈 대신 안철수후보가 주장하는 ‘새정치’를 얘기해야 했다. 안철수후보 사퇴 이후에도 선거가 끝날 때까지 문재인후보는 (정체불명 의) 새정치를 얘기하고 박근혜후보는 민생을 얘기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안철수후보가 사퇴한 단일화를 아름다운 단일화로 만들기 위해서 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여하고 전략을 수정해야 했다. 11월23일 사퇴에서 12월6일 회동까지 무려 2주일, 선 거운동 시작부터 무려 2주일을 문재인후보는 새정치를 얘기하면서 수도권에 묶여있어 야 했다. 거기에 선대위원장들까지 총사퇴해서 캠프는 지도부 공백상태로 남겨지고...
  • 12. 기획본부 G팀장 인터뷰 中 “2002년 당시 후보자들의 지지층을 보면, 노무현 후보는 2030대층이, 정몽준 후 보는 비교적 안정을 바라는 중장년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몽준 후보 를 이기는 것이 40~50대 이상을 흡수하는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따라서 예선 승리로 본선의 장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는 투표일로부터 역산했을 때 최소한 11월 10일 이전까지 단일화를 완료했었어야 했다” 단일화는 필요했고, 아름답게 만들어내야 했지만 실패했다. 벼랑끝 단일화로 시간적으 로도 본선을 준비할 여력을 없앴다. 단일화 직후, 준비되지 않은 전략과 홍보로 우왕좌 왕했던 일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이번 단일화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유권자 세대지형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단일화의 시기 설정이었다. 지지층이 박근혜후보와 겹치는 것을 알면서도 50대 이상의 유권자 세대지형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대응책이 없었다. 그리고 벼랑끝 단일화의 위험 을 알면서도 막판 미완의 단일화를 성사시킬 수밖에 없었던 한계는 인정하지만, 철저한 분석이 선행되었다면 단일화의 시기 설정은 대승적으로 결정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 한다. 이는 앞으로도 야권 전체 진영의 숙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 13. 후보자에 대한 준비 부족 이번 대선의 특이한 점은 유권자들이 유력후보였던 문재인후보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 에서 치른 선거라는 것이다. 양강구도로 진행된 대선인데 문재인후보를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장에서 보면 후보이름은 알아도 후보가 걸어온 삶은 잘 알지 못했다. ‘ 민주당이니까 찍는다’‘박근혜 후보가 싫으니까 찍는다’는 반응 뒤에 ‘그런데 문재인 후보 는 뭐 하던 사람이냐’고 반문한다. 수십년 동안 대중적 인지도를 쌓아온 박근혜후보와 비교할 때 정치입문 1년이 안되는 문재인후보는 국민에게‘내가 누구인지’부터 알리며 시작해야 하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신선하다, 맑고 선해 보인다’‘바른 사람 같다’등 이미지는 분명 주요 득표요인이었지만, 대통령 문재인으로 대중에 각인되기까지는 너무 시간이 짧았다. 후보가 당과 정치인들 속에 뿌리내리는데도 시간적 한계는 작용했다. 국회의원 중에도 문재인후보와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채 선거를 치룬 의원들이 있다. 더구나 국정감사, 예산안심사가 선거기간과 겹치면서 후보가 의원들과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기 회가 적었을 것이다.
  • 14. 결국 의원들도 후보를 잘 몰랐겠지만, 후보도 의원들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선거를 치렀다. 하물며 원외 지역위원장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상태에서 당의 총력체제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결 – 패배에서 출발하자 대선승리를 위해 민주당은 우선 총선을 제대로 치러야 했다. 최소한 총선패배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둘 다를 제대로 해내지 못함으로써 대선에 실패했다. 총선 때 드러난 문제점을 시정하는 과정도 없이, 대선을 위한 기본적 준비도 없이 민주 당은 대선을 맞았다. 선거를 지휘하는 지도부도, 전략도 없었다. 안철수후보와의 단일 화는 미완에 그쳤고, 단일화 앞에서 그나마의 전략도 길을 잃었다. 그럼에도 1470만표, 48% 득표율은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들의 열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보여준다. 국민들의 절망과 민주당에 대한 분노가 만나는 지점이다. 여기가 민주당이 다시 시작해야 할 지점이다. 두 번의 선거패배에 대한 성찰에서 다시 시작하자.
  • 15. 민주당의 역대 선거는 언제나 지형적으로 불리했다. 인구분포도 언론도 늘 그랬다. 그 러나 당이 총력을 다했을 때 우리는 동토의 땅에서도 승리를 일궈내는 저력을 발휘한 바 있다. 두 번의 대선승리와 최문순 강원도지사 선거, 손학규 전 대표의 분당 선거 등이 대 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번 대선의 가장 큰 패인은 당이 중심이 되어 총력을 다하지 못한 것 외에는 사실상 실질적 답을 찾을 수 없다. 민주당의 저력은 다시 발휘될 수 있다. 두 번의 선거패배에 대한 성찰에서 다시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