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PENDIX. IRREPLACEABLE
Zer01ne X Ars Electronica
Post City LAB Workshop Review
Gruop 3 (Post-Sensation)
크리에이터: 김나희, 김성백, 김정태, 박승순, 조호영, 후니다킴
모더레이터: Bradly Dunn Klerks
전문가: Edwin Portocarrero, Ilaria Hoppe
답사장소
: 문래동 철공소, 영등포 타임스퀘어, 약령시장, 광장시장, 세운상가 등
문래동은 내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긴 하지만,
지난번 리포트에 언급하였듯 매일 소음이 늘어나는 탓에
점차 서울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사실 소음보다 더 불편한 것은
귀가 따갑도록 듣는 ‘젠트리피케이션’
2년 전, 문래동 작업실에서 내용증명을 받았다.
다행히 더 나은 공간을 찾아
별다른 갈등 없이 나올 수 있었지만
카페와 음식점을 들이길 원하는 건물주들,
건물주와 세입자를 이간질하고 돌아다니던 부동산 실장 등
눈 감고 고개를 돌린다고 해서
다른 이들의 고통마저 들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서울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점차 대도시화 됨에 따라 모두 엇비슷한 생김새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여하튼 그 당시 문래동에서의 ‘나’는
얼마든 대체 가능한 존재였다.
약령시장 답사 과정에서 나는 잘 알지는 못하지만
서양의학이 해부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특정 질병을 치료하는데 중점을 둔다면
한의학은 인체를 ‘소우주’로 인식하여 증상이 독립된 것이 아닌
내/외적 요소들과 인체구조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파악하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따라서 통계학적 접근에 가까운 서양의학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학문으로 정의될 수 있는 부분에 있어 커다란 강점을 갖고 있지만,
한의학은 ‘하나’로 규정짓기 어려운, 모호함이 늘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들어 판소리와 같은 도제식 교육,
음과 양의 우주론
‘한국인의 얼’을 어떻게 잘 설명할 수 있을까?
동양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참 많다.
어릴 적 부터 ‘약재’물을 달여 마시던 환경에서 자란 나는
어른들이 구전으로 전해주는 ‘암묵지’에 따라
각 약재의 기능과 배합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지식 정도는 생활상식으로 알고 지냈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더이상 ‘약재’를 찾지 않는다.
대신 서구화된 삶에 알맞게 ‘영양제’를 복용한다.
약령시장의 약재들은 상당수 다른 것들로 대체 되어가고 있다.
세운상가 주변을 거닐 때는
청계 상가인들이 재개발로 인해 이주해야 한다는 기사가 떠올라 씁쓸했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고구려, 발해 민족이
지금의 멕시코 지역으로 이동했을지도 모른다는 ‘학설’을 보면서
그 옛날에는 러시아 캄차카 반도와 알래스카를
실제로 넘나들 수 있었겠다는 생각과 함께
모두가 연결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복잡한 알고리즘으로 엮여진 ‘도시’라는 살아있는 생명체는
우리 인간과 또는 우주와 같아서
매우 다이나믹한 변화가 일어나는 ‘유체’같기도 하고,
북쪽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는 일이
전혀 관계 없는 서쪽 어딘가에 영향을 주고
그 움직임이 동쪽으로, 남쪽으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유기체적 도시.
그런 도시가 점차 스마트해진다는 것은,
대체 가능한 것들이 점차 빠르게 늘어남을 의미할텐데
변화의 속도가 빨라질 수록
그 안에 존재하는 ‘시민’이란 입자의 회전 속도는
전체의 속도에 비례하여 증가하고,
‘나’라는 입자의 일상이 빨라지면
분명 멀미를 하게 될테며
거대한 도시의 리듬에 적응하지 못하면
자연스레 궤도를 이탈하게 되는 것일까?
과학기술로의 감각 확장, 충분히 동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새로운 매체를 통해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이 이해 되면서도
책 = 눈의 확장
바퀴 = 다리의 확장
옷 = 피부의 확장
전자회로 = 중추신경의 확장
시력이 평균 3.0 이상의 몽골인을 떠올려보면
자연에 더 가깝고 친화적인 환경에 노출될 수록
우리 본연의 고유 감각 기능들이 회복 되는 것은 아닐까?
분명 우리 안에 내재된 초월적 감각들이 존재하는데
도시의 현대화로 인해 오히려 감각이 퇴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정말 기술에 의해 감각이 확장된 것일지는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감각을 확장해주는 장치들은
대부분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이용 가능하다.
이는 단순히 기술 장비 뿐만이 아니다.
사는 곳, 음식, 옷, 여행, 학교, 관계 등.
너무 당연하게도,
비용을 더 지불 함에 따라
더 나은 기회를 제공받는 시스템은
게임에서 더 나은 아이템을 사는 것과 동일하다.
서울에서도 더 많은 아이템(돈)을 보유하고 있을 수록
더 다양한, 더 나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기회,
재밌는 곳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
그런 기회 자체가 어려운 이들에게
새로운 감각을 제공한들 무슨 소용일까?
많은 이들의 일상이 무너진다면
아무리 스마트한들,
사람이 살지 않는, 아니
사람이 살지 못하는 도시가 되어버린다면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영양소의 불균형
삶의 불균형
도시의 불균형
집단의 불균형
국가의 불균형
척추의 불균형
기회의 불균형
…
스마트 도시 시대로 접어들 수록
일자리가 감소와 빈부격차가 더욱 가속화 된다면
어쩌면, 새로운 형태의 젠트리피케이션이 생겨나는 건 아닐런지.
문득, 폼페이 유적지에서 발견된 담벼락 낙서가
훗날 한 젊은 청년에 의해 다른 모습의
‘담벼락’으로 다시 태어난 걸 보면
우리가 감각하고 도시에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일상을 공유하고, 감정을 공유하고.
그렇다면 2035년이 온다면 과연 무엇이 달라지는 것일까?
우리들의 보편적 감정마저 무언가로 대체 가능해지는 것일까?
우리의 감각마저 대체 가능하다면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기계에 무기력하게 대체된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을까?
‘대체불가능한 주체’가 되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그 과정에서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Intermedia Mobility R&D Ideation Note I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