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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이념의용광로 정제된 실천논리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조소앙 평전>을 마치면서 2014/08/13 08:00 김삼웅
한국 근현대사는 격동의 시대만큼이나 다양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그 중의 한 분인 조소앙 선생은 매우 특출한 인물이다. 독립운동사는 물론 민족사에
불멸의 문건으로 남을 몇 건의 ‘선언문’을 작성하고, 풍찬노숙의 독립운동가로서 생애를
바쳐 삼균주의사상을 연구하고 그 결과 <건국강령> 등을 마련하였다. 삼균주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뿐만 아니라 좌우 독립운동 진영의 이념적 기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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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에는삼균주의에 바탕을 두고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 참여하고, 피랍되어서는
중립화통일론을 제기하였지만, 양쪽에 포진한 분단세력, 권력지상주의자들에게
조소앙과 그의 사상은 배척의 대상일 뿐이었다.
20세기 전반 민족의 수난기에 사상가 조소앙이 아니었다면 우리 독립운동사는 매우
건조했을 것이다. 과문의 탓인지 모르지만, 세계 피식민지 해방운동사에서 우리
임시정부처럼 일관되게 이념과 정책을 제시하면서 복국운동을 전개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 그 중심에 조소앙 선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사상가로서만 아니라 정치가ㆍ외교가로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열강의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에 반대 이론을 전개하면서 대응해 나간 활동을 보면 더욱 놀라게 된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임시정부가 개인자격이 아니고 정부자격으로 환국하여 국민의
지지 속에서 해방정국의 통치기관이 되고 삼균주의가 새나라 정부의 국책으로
채택되었다면 한국의 방향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통일정부수립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승만이 초대 국무총리에 그를 지명했더라면
6ㆍ25전쟁을 막거나 민족주의자와 중도파 인사들의 대량 납북 또는 월북과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이승만의 독선과 독재는 크게 억재되었을
것이다. 이 같은 가정에서 생각할 때 조소앙 선생의 존재감은 더욱 돋보인다.
조소앙 선생은 삼균주의학생동맹을 창설하면서 “삼균주의야말로 모든 인민이 골고루
배우고 골고루 살고 골고루 먹는 유기철학에 의한 절대진리”라고 선언하였다.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균등사상을 풀어 설명한 것이다. 민족자결의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그의 정치이념을 ‘균등’이란 단어만을 떼내어 사회주의,
회색주의자로 매도하는 식자도 있다. 그 협량함이 민망할 지경이다.
조소앙의 균등주의는 소비에트나 북한식의 ‘균등’이 아닌 독립국가, 민주정부의 전제로
가능한 이데올로기라 하겠다. 그러니까 ‘목표로서의 균등’이 아니라 ‘수단으로서의
균등’이다. 출발점이 다른 달리기 경주가 불공정하고 결과가 뻔하듯이, 수단이 균등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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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면 목표가균등할 리 만무하다. 예컨대 교육기회가 균등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권ㆍ경제력의 균등이 불가능한 이치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권력층이나 재벌가
자녀와 빈곤층 자녀의 교육의 기회가 같지 않듯이 말이다.
나는 2006년 평양의 애국열사릉의 조소앙 선생 묘소 앞에서, 그가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면 <사회계약론>으로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적 지주가 된 루소가 되었을
것이고,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미국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퍼슨이 되었을 것이고,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민족주의ㆍ민권주의ㆍ민생주의의 삼민주의를 내건 국부 손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학식과 경륜을 살리지 못한 민족사의 불운 앞에 한동안 발길을 돌리지
못하였다.
조소앙 선생은 다양한 외래문화와 외래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이를 민족적
정통성 속에 용해시키고, 인류적 보편성과 민족적 특수성을 통합하여 한민족의
독자적이고도 진보적인 삼균주의 혁명이론을 체계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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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선생은일제강점기 최초의 사상가이고, 해방정국에 최후의 경륜가였다. 그는
175센티의 키에 70킬로가 넘는 (해방 후) 건장한 체구만큼 순금과도 같은 무게의
함량을 지닌 사상가이자 경륜가였다. 20세기 한 시대를 통털어 한국에서 그이 만큼
폭넓은 식견과 경륜을 지닌 인물이 과연 몇 분이나 될까 상도할 때, 필자의 평전 작업은
거인의 사상과 발자취를 다 담기에는 능력이 역부족이었음을 고백한다.
아울러 선생의 다양한 저술 중 <소앙기설(素昻氣說)>, <이순신구선지 연구>, <국선지(
國仙誌)>, <사선고(四仙考)>, <발해경>, <화랑열전> 등 전문서와 논설 등은 손도 대지
못하였음을 밝힌다. 순전히 능력이 미치지 못한 때문이다.
현행 헌법에는 조소앙 선생이 기초하여 1944년 4월 22일 임시정부의 <헌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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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택된 조항과유사한 내용이 상당히 포함되고 있다. 제1장의 총강 ‘민주공화국’과
‘국민주권’ 조항은 그대로이고 권리와 의무, 평등권 등에서 유사점이 적지않다.
오늘에 ‘삼균주의 원칙’을 그대로 실행할 수는 없지만, 정치ㆍ경제ㆍ교육균등의
정신만은 살려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빈부격차ㆍ양극화의 ‘99 대 1’의 현상이
지나치게 심화되고 갈수록 폭이 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경기, 한 울타리에서 ‘양과 호랑이의 자유경쟁’으로 표상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강화는 헌법정신과도 배치되는 현상이다. 여기에 박근혜 정부는
‘규제철폐’라는 구실 아래 호랑이를 가두었던 울타리의 말뚝마저 하나 씩 뽑고 있다.
지난 해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5천 달러, 한화로 2천 5백만 원, 3인 가구로 치면 7천
5백만 원 수준이다. 2013년 월 소득 139만원 미만의 국민이 1천만 명에 육박하고,
상위소득 1%가 국부의 24%를 차지하는 소득불균형의 위험사회가 되었다. 위가
지나치게 무겁고 아래가 가벼우면 침몰하는 것은 세월호 뿐만 아니다. 그래서 더욱
선생의 삼균주의 정신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천안 독립기념관에 세워진 조소앙 선생 어록비에는 “삼균주의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제도와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호혜 평등으로 민주국가
건설하자”는 내용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그의 사상을 집약한 것이다.
해방 후 선생이 정치현장에 뛰어들면서 사회당을 창당할 때의 비화가 전한다. 다수의
간부들이 ‘한국사회당’이란 당명을 주장하자 그냥 ‘사회당’이라 해야한다는 설명에서
국제주의자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가 삼균주의를 실천해 나가려는 마당에서
이를 굳이 한국에 국한시킬 이유가 없다. 이는 사람 대 사람, 민족 대 민족, 국가 대
국가의 평등한 관계회복을 통해 세계 일가를 이룩하자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굳이
‘사회’ 자(字) 위에다 ‘한국’을 붙여 지역성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김재명
<한국현대사의 비극>)
선생의 사상체계는 민족주의의 터전 위에 세워진 구조물이지만, 안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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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적ㆍ신민적(臣民的) 굴종의식을청산하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침략주의를
분쇄하면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여 3균에 기본하는 고루 잘사는 민주공화국가를
세우는 국제주의였다. 여기에는 중국의 노장사상과 영국노동당의 정책 뿐만 아니라
고드원ㆍ푸르동 등 아나키즘까지 수용하는 거대한 이념의 용광로였다. 그 용광로에서
단련되고 정제된 것이 3균주의 사상이고 실천논리가,
좌우합작ㆍ남북협상ㆍ통일정부수립ㆍ중립화통일론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조소앙
선생은 우리의 ‘지나간 미래상’ 이라 할 수 있겠다.
한 가지 덧붙힌다면 조소앙 선생의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번역하여 전집 또는 선집을
제작했으면 싶다. 독립운동사, 통일운동사, 민족문화사 연구에 절실한 자료(사료)가 될
것이다. 뜻 있는 독지가가 있었으면 한다.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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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조소앙평전 연재를 시작하면서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1장] 오늘에 더욱 필요한 조소앙의 3균주의사상 2014/05/21
08:00 김삼웅
만물이 유전하듯이 사상이나 이념, 종교나 철학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부침을 하게
되지요. 세월의 강하(江河)는 많은 것을 삼키기도 하고 재생시키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영구불변의 정의나 진리는 흔치 않지만, 무수한 세월의 두께나 강하의
흐름에도 변치않는 것은 존재합니다.
몇 천년이 지나도 단절되지 않는 성인들의 가르침이나, 지성들의 언행이 시간의 풍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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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수록 더욱새로워지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와 정의의 가치는 쉽게
퇴색하지 않고 단절되지도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지성사는 무수히 많은 사상ㆍ이념ㆍ종교ㆍ철학을 배출했으나 대부분 세월의
강하에서 침몰하거나 세탁되고, 현재 존재하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부침성쇠의
과정을 거친 것이지요, 하지만 사멸해도 되는 것이 남아있거나, 남았어야 할 것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유익한 이념이나 철학이 시대상황이나 권력에 희생당한
사례도 있고, 이와 반대로 무익한 것이 조장되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무지개색깔을 띌만큼 다양한 인물들에 의해 다양한 방략이
전개되었지요. 20세기 세계 피압박 민족해방운동사에서 한민족처럼 처절하게,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반제투쟁을 전개한 나라도 찾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민족 또는
종족의 해방이나 분리독립이 목표이고 이념이었지요.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크게
달랐습니다. 민족해방에 이르는 투쟁의 방법과 해방 후 국가건설의 방략이
다양하였지요. 우선 투쟁방법의 큰 갈래만 해도 다음과 같습니다.
의열투쟁론
의병전쟁론
실력양성론
외교론
무장전쟁론
계급투쟁론
민중혁명론
어느 것이 타당하고 어느것이 불가하다거나, 여기에 우선 순위를 매기기란 쉽지
않습니다.
시대상황과 국제정세의 추세에 따라 바뀌고 변하며, 또 종합하여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해방 후 민족국가 건설의 방략은 3ㆍ1혁명으로 민주공화제가 중심이 되었지만, 다른
방안도 추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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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복벽주의
아나키즘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중에는 의사ㆍ열사ㆍ지사ㆍ투사ㆍ선생ㆍ박사 등 다양한 호칭이
많습니다. 거기에 걸맞는 투쟁을 하여 얻게된 호칭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독립전선에서 투쟁하면서 독립운동단체(기관)의 이념과 정책을
만들고 해방조국의 비전을 연구ㆍ제시한 경륜가들입니다.
조선왕조 건국의 초석을 쌓는 이가 정도전이었다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정부수립(헌법제정)에 이념과 정책을 제시한 사람은 조소앙 선생입니다.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이 법통으로 연계될 수 있었던 것은 조소앙이 마련한 임시정부의
<당헌>과 <건국강령>이 대한민국의 <헌법>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조소앙은 독립운동의 방향과 목표를 정하고, 국민주권에 기초하여 임시정부수립
이론을 전개하였습니다.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하여 임시정부 수립의 당위를
기도하고, 1918년 <대한독립선언>을 집필하여 무장투쟁론을 제시하는 한편 1919년
도쿄 2ㆍ8독립선언과, 3.1독립혁명의 단초를 열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는
<임시헌장>을 마련하고 일제패망을 내다보면서는 <건국강령>을 준비한 것도
그였지요.
조소앙의 신념체계와 정책기조는 삼균주의입니다. 삼균주의란 개인간, 민족간,
국가간의 균등을 말하고, 정치적 균등, 경제적 균등, 교육적 균등의 실현으로 삼균을
이루어 세계일가(世界一家)의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평등주의 사상입니다.
흔히 손문이 주장한 삼민주의의 아류처럼 인식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출발 시점과
내용 그리고 이론면에서 차이가 많고, 오히려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는 이미
1920년대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결점을 보완하는 이념체제로 삼민주의를 연구하고
정책으로 내걸었습니다.
1930년대부터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의 정당과 단체에서는
당의ㆍ당강ㆍ정책으로 이를 채택하지요. 삼균주의는 독립운동 진영의 공통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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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이념이 된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소앙은 이념적ㆍ학문적 동력을 어디서 공급받았을까요. 그는 대단히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이면서 유교ㆍ기독교ㆍ대종교를 경험하고, 불교ㆍ이슬람교와
소크라테스 철학을 간접으로 경험합니다.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현장에서 체험했지요.
그리고 단군ㆍ공자ㆍ예수ㆍ석가모니ㆍ마호메트ㆍ소크라테스, 여섯 성자를 아우르는
육성교(六聖敎)를 제창하기도 한, 별난 경력과 이력을 갖고 있었지요. 삼균주의 이념은
바로 이와같은 체험과 간접경험에서 우러나온 경륜의 집대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삼균주의가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독립운동 단체들의 정강ㆍ정책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여 비판과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삼균주의가 평등을 강조한 나머지
자유나 정의ㆍ질서ㆍ평화 등에 대한 논구에 소흘한 것이나, 토지 및 중요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이상론이란 비판이 따랐지요. 이 때문에 이념적인 공격에 시달리기도 하고,
해방 후 오늘까지 대중화의 족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일본제국주의였고
1920~40년대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자세히 논급하겠습니다.
해방 후 정통 독립운동가들의 생애가 그렇듯이 그의 삶도 불우했습니다. 분단을
배척하고 통일정부수립론을 주창했지만, 단독정부 수립이 확고해지자 1948년
5ㆍ10총선거에 입후보하여 전국 최다득표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지요.
제헌헌법의 전문에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하고⋯⋯”라고 선언한 것은 임시정부의 헌법과「건국강령」의 정신을 그대로
승계한 것이었습니다. 6.25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납북되었다가 1958년 9월 9일
북쪽에서 사망했는데, 시신이 대동강에 떠올랐다는 증언도 있어서, 병사 아닌 자살설이
제기되었으나, 아직도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론가이고 사상가이며 정치가이고 지사의 인격을 갖췄던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의
파란곡절의 평전을 쓰고자 하니, 우선 그의 끝이 집히지 않는 사상의 넓이와 인격적
깊이에 압도됩니다. 하지만 20세기의 대표적 사상사ㆍ역사학자인 홉스봄의 “21세기는
분배의 시대”라는 주장이 아니더라도, 한국사회의 ‘99 대 1’의 빈부격차와 불균형
상태를 우려하면서,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 는 오늘 우리 시대의 가치, 한국이
추구해야하는 정책이 되어야 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의 평전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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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삼균주의는위기의 자본주의의 대안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1장] 오늘에 더욱 필요한 조소앙의 3균주의사상 2014/05/22
08:00 김삼웅
우리는 흔히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압축적으로 성취한 나라라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민주화’는 이명박ㆍ박근혜 정권에서 크게 역행하고 있지요. 정부가 민간인을
사찰하고, ‘국’자 돌림기관인 국가정보원, 국군사이버사령부, 국가보훈처 등에서
대통령선거부정이 감행되고, 이것을 정부가 처벌은커녕 보호하기에 급급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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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에 이르기까지수많은 국민의 피와 땀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처절하게
짓밟히고 있습니다.
‘경제대국’의 실상은 더욱 참담합니다. 엄마와 두딸이 전재산 70만 원을 전세와
공과금으로 남기고 자살하고, 어떤 서민은 1일 감옥살이가 5만 원인데, 재벌은 5억
원이고, 지난해 최태원 SK회장연봉이 301억 5,000만 원, 정몽구 현대차그룹회장 140억
원, 김승연 한화그룹회장 131억 원, 이재현 CJ그룹회장 47억⋯⋯. 어떤 장관은 로펌의
한 달 자문료가 1억 원이고,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퇴임하면 줄줄이 산하기관장으로
내려가 몇 억대의 연봉을 챙깁니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인데, 그나마 정규직 노동자의 평균월급은 2013년
연봉기준으로 3,036만 원, 비정규직의 평균월급은 141만 원이랍니다. 비정규직도
못되는 수백만 명 무직자의 경우는 통계에도 잡히지 않지요.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후보는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정의의 천사가 되는 듯하더니, 당선되고는 뻥치고
말았습니다. 최저임금을 협상할 때 노동자들이 시간당 몇 100원만 인상해 달라
애원해도 정부와 기업은 손사레를 쳤지요. 참고로 올해 최저임금은 시간당
5,210원입니다. 가히 천국과 지옥입니다.
등록금이 없어 휴학을 하고 세월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홀어머니를 봉양한
박지영씨,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나눠주면서 “너희들 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게,
선원이 마지막이야” 말하고 시신으로 돌아온 박지영 씨와
선주ㆍ선장ㆍ재벌ㆍ장관들이 같은 공화국시민일까요?
한국사회의 가장 큰 위기는 지나치게 벌어진 빈부격차 곧 양극화현상입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집단자살이고 ‘묻지마 범죄’로 나타납니다. 자살률 세계최고라는 불명예는
‘10대 경제강국’의 반사경이지요.
실정이 이런 데도 위정자와 재벌기업들이 위기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프랑스혁명
전야의 마리 앙뜨와네트나 재무장관 차르 알렉산드르 칼론과 비슷한 수준이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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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 코끼리떼가 초원을 짓밟아버리고, 사자 무리가 초식동물을 모조리
잡아먹으면, 다음 차례는 자신들이라는 이치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매ㆍ무지ㆍ탐욕의 삼박자입니다.
우리 사회는 ‘분배’를 말하면 종북으로 몰지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종북타령’처럼 호제도 다시없겠지요. 한데 요즘은 이것도 하도 써먹어서 잘 먹히지
않은 것 같더군요. ‘더불어 같이 사는 것’이 민주공화제의 기본인데, 한 쪽은 배 터져죽고
한 쪽은 배 곯아죽는 구조는 종북ㆍ반북을 넘어 스스로 묘혈을 파는 파멸 행위인데도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자본주의라는 200년이 넘은 낡은 열차는 위기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자유주의 도입 이후 시장질서는 한 우리 안의 ‘사자와 양’의 대결장이
되고 말았지요. 구 소련의 공산주의는 외부에서 총 한 방 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무너지고 따라서 자본주의는 경쟁자가 사라지면서 더욱 탐욕스러워져가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불황과 금융위기가 거듭되고, 신제국주의국가들은 다시 전쟁터를 찾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정의를 지키지 않고, 국민이 삶에 보람과 가치를 갖지 못할 때 그런
사회는 붕괴됩니다. 정부기관이 부정선거를 해도 책임지지 않고, 국가기관이 간첩을
조작하고도 그냥 넘어가는 사회라면,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들만 탓할 수는 없겠지요.
플라톤의 경구대로 “정의가 배제된 권력은 강도집단”이 되고 말지요.
사설이 길어졌습니다마는, 제가 조소앙의 평전을 쓰면서 ‘삼균주의’에 관심을 갖게된
배경입니다. 근 1세기 전에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 이와같은 철학과 경륜을 갖춘
선각자가 있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혹자는 말 할 것입니다. “균등분배라니, 공산당하자는 주장이냐”. 이같은 단세포적인
인식은 금물입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자본주의는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수정하지
않으면 파탄 납니다. 힘 센 국가들은 전쟁을 통해 위기를 해소하려 하겠지요. 과거
세계대전이 공황에서 비롯된 것을 다 알지 않습니까. 고장난 선박을 수리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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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적을 거듭하면세월호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는 현시점에서 채택할 것도 있고 수정할 부분도 있으며 버려야
할 대목도 적지 않습니다. 다만 진보ㆍ보수, 좌ㆍ우 이데올로기의 편향성을 접고,
나라를 살리고, 천민성자본주의를 수정하고, 우리 공동체인 ‘민주공화’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관심을 가져야할 것 같습니다. <삼균사상가
조소앙평전>을 연재하는 이유입니다.
조소앙의 연구에는 고 홍선희 선생의 <조소앙의 삼균주의연구>를 시작으로 김기승
교수의 <조소앙이 꿈꾼세상>을 비롯하여 여러 선학들의 많은 연구 성과가 있습니다.
이분들의 성과를 참고하겠습니다.
많은 편달과 애독을 기원합니다.
[3회] 명문가 후예, 성균관에서 수학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2장] 출생과 학문, 일본유학시절 2014/05/23 08:00 김삼웅
조소앙(趙素昻)의 본관은 함안, 본명은 용은(鏞殷), 자는 경중(敬仲), 호가 소앙이다.
본명보다 호가 널리 알려진 사례가 된다. 1887년 4월 8일(음력) 경기도 교하군(현
파주군) 월롱면에서 아버지 조정규와 어머니 박필양의 6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일본 유학 중에는 아은(亞隱)ㆍ소인(素印)ㆍ소앙(蘇昻)ㆍ소해(啸海)ㆍ한살임(韓薩任)
ㆍ아나가야후인(阿那伽倻後人)이라는 별명을 쓰다가, 1920년대 이후에는 소앙으로만
사용하였다.
장남은 용하, 삼남은 용주, 사남은 용한, 오남은 용진, 육남은 용원이다. 부친이 아들들의
이름을 지을 때에 중국 왕조 명칭인 하ㆍ은ㆍ주ㆍ한ㆍ진ㆍ원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중국 역대 왕조의 이름을 자식들의 이름으로 지은 경우는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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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의 선조중에는 세조의 단종 폐위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를 비롯하여, 선대 중에는 고관대작과 절의를 중히 여기는
인물들이 많았다. 증조부와 조부도 학식이 풍부한 한학자였다. 가계는 먹고 살 만큼의
재력이 있었던 것 같다.
조소앙은 5세부터 15세까지 할아버지 조성룡(趙性龍)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대단히
총명하여 어려서 <제자백가>ㆍ<사서오경>을 독파하였다고 한다.
조소앙이 태어나고 자랄 시기는 안으로는 국정의 문란으로 민란이 일어나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탈이 시작되는 혼란기였다. 태어나기 한 해 전에는 거문도를 점거했던
영국군이 철수하고, 5세 때에 동학교도들의 삼례집회가 열리는가 하면 1894년 1월에는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소앙은 15세 때인 1902년 상경하여 성균관 경학원에 입학하였다. 그가 청소년기
2년을 보낸 성균관은 조선시대 인재양성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교육기관이었다. 조선 말기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성균관에 경학원이 부설되었으나
특수 귀족학교의 성격을 갖게 되어 개화풍조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1895년에 성균관의
관제가 새로이 마련되었다. 개화의 물결 속에서도 우리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나가는 동시에, 근대화에 대처해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한 것이다.
경학과의 학제가 바뀌어 3년제 학제로서 전ㆍ후 2학기로 구분되었으며, 입학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되 20세 이상 40세까지의 연령 제한을 두고, 졸업시험에 합격한
자에게만 졸업증명서를 주어 졸업시켰다. 1896년부터는 3년 학제가 다시 바뀌어 매년
말에 시행하는 시험으로 수업 연한이 조정되었다. 조소앙이 입학했을 때의 학과목은
유학을 비롯하여 본국역사, 만국역사, 만국지지, 산술 등을 가르쳤다.
‘20세 이상’의 연령 제한에도 불구하고 조소앙이 15세에 입교한 것으로 보아
입교기준이 문란했거나, 출중한 능력때문에 특별 전형이 가능했을 지 모른다. 조소앙은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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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15세에성균관에 입학하여, 신채호 등과 항일성토문을 작성, 역신 이하영 등의
매국음모를 규탄하였다. 신채호는 1898년(19세) 가을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 해 10월
경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11월 5일(음)에 체포되었다. 이 때에 조소앙이
교류한 사람은 신채호 외에 변영만ㆍ김연성ㆍ류인식 등이 있었다. 조소앙은 이들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주자학의 틀을 깰 수 있었다.
1904년에 성균관을 2년 만에 마친 조소앙은 황실특파 유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하고
10월 인천을 출발하여 일본에 도착하였다. 11월에 동경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한다.
최남선ㆍ최린 등과 함께였다. (주석 1)
조소앙이 당시 유력자 가문의 자손들이 택한 관료의 길을 접고 일본 유학을 택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백형 조용하의 영향때문이었다. 조소앙보다 5년 연상인
조용하(1882~1937)는 1901년 독일주재 참사관으로 부임한데 이어 죽산ㆍ이천ㆍ마전
등 군수를 역임했다. 이어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베이징으로 망명하고,
1913년에는 만주에서 이상룡ㆍ이시영ㆍ이동녕 등과 경학사 활동에 관계하였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서 한국독립단, 한인협회 등을 조직하고, 1921년에는
<신한민보> 창간을 주도하여 독립운동과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1932년 상하이로 가던
중 일본에서 피체되어 경성으로 이감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병보석 중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주석 2) 대단히 일찍 개화한 인물 중의 하나다.
주석
1> 홍선희, <조소앙의 삼균주의 연구>, 22쪽, 한길사, 1882.
2> 앞의 책, 20~21쪽.
[4회] 관비 일본유학생으로 뽑혀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2장] 출생과 학문, 일본유학시절 2014/05/24 08:00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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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형의 권유로관리의 길을 접고 일본 유학을 택한 조소앙에게 ‘10년 일본 유학’은 그의
학문연구와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같은 물을 먹고도 소는 젖을 만들고, 뱀은 독을
생산하듯이, 같은 일본 유학을 하고도 대다수는 친일파가 되었지만, 조소앙은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조소앙의 일본 유학 결심에는 박형의 권유도 있었지만 1904년 2월 한일의정서의 체결
소식이 작용하였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급박해지자 1904년 1월 23일
한국정부는 ‘엄정중립’을 내외에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반도에 군대를 상륙시키고
자기네에게 협력할 것을 강요ㆍ협박하여, 2월 23일 외부대신서리 이지용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께의 명의로 6개항의 한일의정서가 체결하였다.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일본이 한국 식민지화의 제1단계로서 한국을 강압하여 체결한 굴욕적인 의정서였다.
조소앙은 한일의정서 체결 소식을 <황성신문> 보도를 통해 알고 크게 분개하면서
성균관을 중퇴하고 일본 유학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성균관 경학과를 2년만에 마친
셈이다.
마침 정부에서는 신교육의 명목으로 황실유학생을 선발하고 있었다. 1904년 7월 28일
시행된 일본파견 유학생선발 시험에는 700여 명의 정부 고관의 자제가 응시하였다.
작문 시험 제목은 <유학은 반드시 충효를 근본으로 해야 함>이었다. 50명을 뽑는 선발
시험에 조소앙은 합격하였다. 성균관 출신인데다 총명했던 그는 쉽게 합격할 수 있었다.
명문가인데다 백형이 독일주재 3등 서기관이고, 종숙 조원규는 선발된 유학생을
인솔하는 인솔위원이어서 황실특파유학생 선발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조소앙이 성균관 입학이나 황실특파유학생으로 선발된 것은 고종시대 개혁정책의
특혜를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15~25세의 양반 관료 자제 50여 명의 황실특파유학생은 1904년 10월 9일 영솔위원
조원구의 인솔 아래 인천항을 출발→일본 시모네세끼→고베→오사카→교토를 거쳐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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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도쿄에도착했다. 이들은 11월 5일 동경부림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동경부림제일중학교는 1879년 창립된 학생수 800명, 교수 50명 규모의 명문
중학교였다. 이때 조소앙과 함께 입학한 학생은 최린ㆍ최남선ㆍ유승훈ㆍ이승근 등
모두 45명이었다. 이들 중 조소앙보다 어리거나 동갑내기인 학생이 5명에 불과했고
대부분 연상이었다. 대한제국 학부에서는 이들 유학생들의 교육ㆍ기술ㆍ감독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중학교 측에 위촉하였다.
이에 따라 중학교에서는 특설한국위탁생과를 속성과로 별도 개설하여 이들을
수용하였다. 학생의 교비나 기숙사비 등 일체의 비용은 한국의 궁내부에서 지급하게
되어 있었다. (주석 3)
아직 어린 나이의 조소앙에게 일본유학의 특전은 행운이었다. 성균관에서 기초학문을
배운 터여서 학과 수업이 어렵지는 않았다. 입학 초기에는 일본어의 미숙으로 저급반에
편성되었다가 얼마 후에는 상급반으로 편성되었다. 함께 입학했던 유학생 40% 이상이
중도에 퇴학한데 비해 조소앙은 유학생활에 잘 적응하였다.
조소앙은 일본동경부림제일중학교 재학 중에 을사늑약의 소식을 들었다. 이에 통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한국 유학생들을 모욕하는 이 학교 가츠우라 교장의
인터뷰 기사가 일본 신문에 보도되었다. 가츠우라는 한국 유학생들을 평하여 “일본어
향상은 놀랍도록 빠르지만 수학과 기타 과학 등에 대해서는 형편없기 짝이 없다. 그
열등한 정도로 말하면 25~32세까지 어른의 수리 두뇌는 일본 소년의 수준에도 못
미친다고 말해도 좋다고 생각 한다”고 떠벌였다. 그는 이어서 수학ㆍ이학 등에 대한
기초가 없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은 무리’라고 단정하였다. (주석 4)
가츠우라의 이 발언은 을사늑약의 체결로 가뜩이나 울분에 차 있었던 한국
유학생들에게 휘발유를 뿌리는 격이었다. 사설 서당 등에서 정통 유학을 공부해온 한국
유학생들이 수학이나 이과분야에 수준이 뒤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학교 책임자의 비교육적인 언사는 한국 유학생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손상시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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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했다.
조소앙등 한국 유학생들은 회합을 거듭한 끝에 12월 5일 동맹휴교를 결의하고 37명
전원이 기숙사의 퇴사를 결행했다. 동맹휴학은 교장의 망언이 계기가 되었지만, 한국
유학생들은 그동안 학교당국의 감시와 차별대우에 격분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방과 후에도 외출을 금지당하고, 기숙사에는 사감 2명을 배치하여 모든
행동을 감시하였다. 교과과목도 국가주의적 복종윤리와
일본어ㆍ일본역사ㆍ일본지리ㆍ일한 비교문법 등이 중심이었다. 한국 유학생들이
바라던 근대학문에는 소홀히 하였다.
한국유학생들은 한국정부와 학교 당국의 설득에도 한동안 복교하지 않았다. 37명
전원의 퇴학이 확정되고, 진로 문제는 유학생들의 자유의사에 맡겨졌다. 이 같은 조처가
조소앙에게는 행운이었다. 중학 1년 만에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석
3> 아부 양(阿部 洋), <구한말의 일본유학> 2, <한(韓)>4, 96쪽, 1974, 김기승, <조소앙이
꿈꾼세상>, 27~28쪽, 재인용, 지영사, 2003.
4> 김기승, 앞의 책, 30~31쪽, 재인용.
[5회] 명치대학에서 법학 전공, 민족의식 싹터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2장] 출생과 학문, 일본유학시절 2014/05/25 09:56 김삼웅
조소앙은 1906년 1월 11일 명치대학 입학 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선배 최석하 등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다. 최린ㆍ유승흠ㆍ한상우 등과 함께였다. 집에서 보내준 돈으로
입학금과 월사금을 납부하고 하숙집을 학교 근처로 옮겼다. 이제부터는 대한제국
정부의 장학생이 아니어서 등록금과 하숙비 등은 완전히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의
21.
21
가정은 아직여력이 있었기에 학비 마련이 가능했다.
명치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법률공부를 하고 있을 때 한국 정부에서 복교 명령이
나왔다. 22세 이하인 자는 중학교에 재입학하고, 23세 이상인 자는 전문학교에
진학하기로 한일 두 나라 정부의 협약이 이루어졌다. 조소앙은 중학교 복교 대상이어서
1906년 3월 31일 명치대학을 퇴학하고, 4월 28일 동경부림제일중학교에 재입학했다.
동경부림제일중학교에서 조소앙의 학업성적은 양호한 편이었다. 중학교 1년 과정은
3학기체제였는데, 매학기 시험을 보았다. 시험문제에서 특징적인 것은 영어와 일어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과목이 주관식 논술형으로 출제되었다는 점이다.
역사ㆍ수신ㆍ지리 시험 문제는 물론 이과나 박물 등 과학 시험도 개념이나 실험방법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문제가 출제 되었다. 첫학기 조소앙은 갑조 12명 중 2위의 성적을
차지했다. (주석 5)
조소앙은 1907년 3월 31일 우수한 성적으로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과 더불어
한국유학생감독부 내에 설치된 보습과를 다니고, 11월 1일부터는 정칙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영어공부에 집중하였다. 대학진학에 필수코스였기 때문이다.
조소앙이 대부분 일본인 학생인 명치대학 고등예과에 입학한 것은 1908년 3월 3일이다.
이 학교 고등예과는 1년 6개월의 3학기 과정으로, 그는 1909년 7월 1일 학업을 마쳤다.
그리고 이 해 9월 13일 명치대학 법학부 본과에 입학하였다. 법학부에서는 형법각론,
상법총칙, 법리학, 민사소송법, 행정법, 민법물권, 민법채권 등을 공부하였다.
조소앙은 법학 공부에 별로 흥미를 갖지 못하였다. 1학년 시험성적은 61.9점으로
26명중 25등으로 참담한 결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결과는 법학에 대한 흥미가 없었던
것도 이유지만, 1910년 국치 소식을 들으면서 갖게 된 울연한 심경이 공부에 전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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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달리 영특하고국가의 운명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국치는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기독교였다. 국치를 전후하여 기독교에 입교했으며,
1911년 10월 22일에는 사원보 목사와 전덕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조소앙은 1912년 7월 명치대학을 졸업하였다. 2학년 진학시험에는 성적이 좋아서
우등상을 받았지만, 그의 대학시절은 망국의 시대여서 정신적 고통이 적지 않았다.
다음의 자전 기록에서 이 시기 그의 심경의 일단을 찾게 된다.
내가 동쪽으로 유학 온 지 어느덧 8년이 되었다. 옛 일을 더듬어 생각해보니 흐느끼며
통곡할 일이 많았다. 내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것이 털끝만큼이라도 있었는가? 고개
숙이고 학교에 매일 가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이것이 어찌 중생을 구제하는
길이겠는가. (주석 6)
조소앙을 가장 먼저 학문적으로 연구한 홍선희는 그의 <약전>에서 일본 유학 시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904. 2 (17세) : 성균관 수료.
1904. 7 : 황실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동경의 모 중학에 입학. 이 해에 백형 용하가
백림(베를린)에서 보내준 <손문전>과 고리키 작품을 받아 읽음.
1905(18세) : 동경 유학생들과 상야(上野) 공원에서 7충신 추모대회를 열고 일진회의
매국 행위를 규탄.
1907. 1(20세) : 미국에서 귀국차 동경에 들른 도산 안창호와 회견. 국채보상운동에
참가.
1909. 1(22세) : 동경에 대한흥학회를 창립. 5월에 회보를 창간. 이 해에 명치대 법과
재학 중 중국혁명가 재계도(載季陶)와 접촉. <대한흥학보>에 4편의 에세이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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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23세): 일본 (혹은 국내)에서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 받음. 합방을 전후해서
비상대회 소집에 실패, 문자와 집회사건으로 연금당해 철학연구에 착수(이 해에 일시
귀국 여부 불명)
1911 (24세) : 중국 망명계획 중 헌병대에 구금됨.
1912 (25세) : 명치대 법학과 졸업. 국내의 경신ㆍ양정ㆍ대동법률전문 등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음.(주석 7)
조소앙의 8년 일본유학은 을사늑약과 경술병탄 등 망국과 국치의 기간이었다. 법학을
공부하면서 적잖게 회의감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학문이 조국을 위해 어디에 쓸모가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들었을 거였다. 이 기간 기독교에 입문하여 신앙인이 되고 틈틈이
철학을 공부하여 사고와 세계관의 폭을 넓혔다. 법학연구는 훗날 독립운동 과정에서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시 헌법기초위원으로서 입정의 법체계를
확립하는데, 그리고 1940년대 건국을 준비하기 위해 임정 건국강령을 기초하는데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대학 4년 동안의 법학
교육에서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는 훈련을 한 셈이었다. 삼균주의
이념의 체계화 작업은 이러한 논리적 훈련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주석 8)
주석
5> 앞의 책, 35쪽, 재인용.
6> 조소앙, <동유략초>, 1911년 5월 7일조.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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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홍선희,<조소앙의 삼균주의연구>, 22~23쪽, 한길사, 1982.
8> 이기승, 앞의 책, 51쪽.
[6회] 재학중 망국소식 듣고 민족운동 전개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2장] 출생과 학문, 일본유학시절 2014/05/26 08:00 김삼웅
조소앙은 일본 유학에서 폭넓은 독서와 교우관계, 한인유학생단체 참여, 저명 인사들의
강연 등을 통해 자기 철학을 정립하고 민족주의사상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당시 일본은
이웃 나라 침략 전쟁, 한국병탄 등 제국주의적인 국가였으나 국내적으로는 어느 정도
자유와 민권이 보장되었다. 조소앙은 명치대학 법학부의 자유주의적인 학풍에서
다양한 사상과 인물을 접할 수 있었다.
그가 이 시기에 탐독한 책 중에는 일본 자유민권사상가 바바의 <천부인권론>, 파알젠의
<윤리학대계>, 쿠로이와 루이코우의 <천인론>을 비롯하여 <무정부주의>,
<동아외교사>, <논리학대계>, <정치강요>, <천인론>과 동양고전으로 <논어>, <시경>,
<맹자>, <도덕경>, <장자>, <석가모니전> 그리고 <고려사>와 <동양역사> 등이었다.
그의 폭넓은 지식과 교양은 동경 유학시절에 읽거나 강연을 통해 축적된 학식이 바탕이
되었다. 관비유학생 의장으로 선임되고, 조선유학생친목회가 창립되었을 때에는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홍명희ㆍ문일평ㆍ안재홍ㆍ송진우 등과 교우하면서
재동경한국유학생회를 이끌었다. 그는 또 <천부인권론>을 번역하여 동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인권사상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조소앙이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게 된 첫 사건은 한국병탄 직후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준비하다가 일제 관헌의 방해로 좌절되고, 이로서 1910년 8월 26일부터 9월 14일까지
경찰에 체포되어 극심한 신문을 받게 되었다. 그는 관비유학생이라는 조정에 대한
부채의식도 없지 않았으나, 본질적으로는 민족에 대한 애착심이 누구못지 않게 강했다.
그에게 동경유학 생활은 폭넓은 학문과 더불어 망한 민족의 독립을 강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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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사상의 발아기였다고하겠다.
1910년 국망 이후 그에게서 확인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은 한민족을 구하고, 빈궁한
민중을 구제하는 것을 ‘천계’로 받아들이는 철저하면서도 비장한 책임의식과
사명감이다. 이러한 비장한 사명감은 차후 그의 독립운동의 정신적 밑바탕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빈궁한 민중의 구제에 대한 관심은 훗날 구체화되면서 평등사회
실현이라는 이상사회론으로 발전하였다. 그의 경우 일본유학 시기에 이미 추상적인
형태로나마 삼균주의의 핵심요소인 평등의식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주석 9)
앞에서 소개한 홍선희의 <약전>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강만길 교수가 삼균학회에서
발행한 <소앙선생 문집> 下 등을 발췌하여 정리한 <조소앙연보>에는 조소앙의 일본
유학시절 민족운동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1906년(20세) : 동경유학생들과 제휴하여 반일운동의 일환으로 스트라이크를 일으키는
한편 공수학회를 조직하고, 학보(주필)을 발간하여 배일사상을 고취. <2천만 동포에게
고하는 글」등 발표.
1907년(21세) :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하여 단지동맹을 조직하고 활동. 한일신협약에
분개하여 반일시위운동전개. <동고아(慟告我) 2천만 동포>등 <대한매일신보>에 발표.
1908년(22세): 공수학회(동경유학생 친목단체) 평의원 겸 동 회보 주필로 활약.
전명운ㆍ장인환 의사의 스티븐슨 사살 의거를 계기로 동경유학생들과 반일운동대회를
열고 매국도당을 성토하며 항일운동을 적극 추진, 하기 방학에 일시 귀국하였다가
부인과 함께 도일하여 동거.
1909년(23세) : 대한홍학회를 창립, <대한흥학회보>(주필)를 발간하여 국내외 각
학회ㆍ신문 등과 호응하여 배일 사상을 고취, 여기에 4편의 글을 발표. 장남 출생.
1910년(24세) : 한일합방 성토문과 위임장 2통을 작성하여 국내의 윤치호ㆍ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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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게 전달하고자이창환을 국내로 밀파. 비상대회의 비밀소집이 일경에 밀고되어
피검, 신문을 당함. 합방의 분개로 신경 쇠약에 걸리고, 두 형사의 감시로 연금.
1911년 (25세) : 중국 혁명지사들과 교류를 통해 중국에 혁명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중국 망명계획을 세우던 중 105인사건 일어나 일 헌병대에 구금당함.
1912년(26세) : 명치대학 법학부 졸업하고 귀국. (주석 10)
조소앙은 동시대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청소년기에 국제적인 체험을 겪고, 법학의
전문성과 동서의 근대학문에 접하게 되었다. 이 같은 전문성과 연구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크게 기여하였다.
주석
9> 앞의 책, 95~96쪽.
10> 강만길 편, <조소앙>, 300~301쪽, 한길사, 1982.
[7회] 베이징에서 독립운동가들과 박달학원 설립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3장] 중국망명, 독립운동의 길에 나서다 2014/05/27 08:00
김삼웅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조소앙은 잠시 경신학교, 양정의숙, 대동법률전문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중국 망명을 준비하였다. 일본에 있을 때 상하이에 있던 신규식
등과 연계가 있어서, 그의 연락을 기다리던 중 중국 혁명지사 황각(黃覺)의 내한을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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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로 중국망명을계획을 서둘렀다.
상하이에서는 해외 독립운동 최초의 단체인 동제사가 1912년 7월 신규식ㆍ박은식 등이
독립운동가와 유학생, 교민들에 의해 창립되고 있었다. “어려움을 당하면 같은 배를
타고 함께 건넌다”는 뜻으로, 나라 잃은 동포들이 함께 나누고 서로 통하는 의미의
동제사는 이사장 신규식, 총재 박은식이 선임되고, 주요 간부에는
김규식ㆍ신채호ㆍ박찬익ㆍ조성환ㆍ이광ㆍ신석우ㆍ변영만 등이 참여하였다.
1913년 27세가 된 조소앙은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당시 상하이는 최신
사조를 접할 수 있는 국제도시이고, 중국혁명(신해혁명)의 중심지였으며 정치활동이
자유로워서 일제식민지에서 고통받는 조선청년들에게는 학문과 독립운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신규식 등이 설립한 박달학원은 영어반과 중국어반으로 나누어 전문적으로 어학을
가르치고 교과목으로 영어ㆍ중국어ㆍ수학, 그리고 민족의식을 키워주기 위하여 조선의
역사ㆍ지리과목을 교수하였다. 교육기관은 1년 6개월 과정이었으며, 모두 3기생을
배출하였는데, 이동안 100여 명의 인재가 배출되었다.
조소앙은 박달학원의 교수로 참여하였다. 김규식ㆍ박은식ㆍ신채호 등과 동경유학
시절에 사귀었던 홍명희ㆍ문일평도 교수진이 되었다. 쟁쟁한 민족주의 역사학자들로
구성된 교사진이었다. 외국인 교사는 중국혁명운동가 농죽(農竹), 미국인 화교 모대위(
毛大衛) 등이다. 박달학원을 마친 청년들은 근대학문을 더 공부하기 위하여 미주나
유럽으로 떠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청년들은 동제사의 주선으로 중국 내의
각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다. (주석 1)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은 동제사, 박달학원에 이어 1913년 초 중국 혁명운동가들과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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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으로 신아동제사를창립하였다. 조소앙도 참여한 신아동제사의 중국혁명가는
진영사(陳英士)ㆍ진과부(陳果夫)ㆍ황각ㆍ재계도 등이었다. 신아동제사는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한ㆍ중 혁명운동가들을 연결하고, 양국민의 우의를 증진시켜 상호 협조
속에서 혁명운동을 전개한다는 목표로 창설되었다.
한ㆍ중 협력기관으로 처음조직되고, 여기 참여한 중국측 인사들이 중국혁명정부의
중추세력이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중국혁명정부와의 유대가 가능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아동제사는 한국독립운동사에 크게 기여한
조직이다.
조소앙은 신아동제사의 활동과 함께 만주를 거쳐 상하이에 온 동생 용주 등과 함께
중국혁명지사들과 공동발기로 아시아민족 반일 대동단을 조직하였다. 중국측 참여자는
국민당 원로 장박천(張博泉)ㆍ대동당 발기인 황각, 국민당 조직부장 진과부 등이었다.
상하이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1915년 3월 동제사의 중추인 신규식ㆍ박은식 등이 해외
각지에 분산된 독립운동세력을 연대하여 독립전쟁을 치루고자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연해주의 이상설, 베이징의 유동열ㆍ성낙형, 북간도의 이동휘ㆍ이동춘 등
독립운동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신한혁명당은 중국과 러시아지역은 물론
국내에까지 비밀 지부를 설치하였다.
신한혁명당은 본부장 이상설, 재정부장 이춘일, 교통부장 유동열, 외교부장 성낙형,
감독 박은식, 상하이 지부 신규식, 한구 김위원, 연길현 이동춘, 평양 정항준, 회령
박정래, 나남 강재후 등의 지도체계를 갖추었다.
조소앙과 홍명희 등도 신한혁명당에 참여하였을 것이나, 연령이나 독립운동 연조로
보아 아직 직책을 맡기는 어려웠던 것인지, 명단을 찾기 어렵다.
주석
29.
29
1> 이명화,<박달학원>,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524~525쪽, 독립기념관, 2004.
[8회] 국민정신통일 방안, ‘육성교’ 구상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3장] 중국망명, 독립운동의 길에 나서다 2014/05/28 08:00
김삼웅
이 시기에 조소앙은 독특한 활동을 하였다. 국내외 동포의 대동단결을 정신적으로
유도하기 위하여 종교통일의 방안으로 ‘육성교(六聖敎)’를 제창한 것이다. 그는
일본유학 시절부터 육성교를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통 유학과 근대 교육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기독교에 입문하고서도 불교와 이슬람 등에 관심과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유교ㆍ불교ㆍ기독교를 소개하면서 모든 종교는 ‘권선징악의 도’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고 했다. 그리고 공자ㆍ석가ㆍ예수를 세상에서는 ‘삼성(三聖)’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중 어떤 종교를 선택해야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동양의
한국인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 문제에 대해 사고했다.
그는 종교 선택의 원칙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실행주의요, 둘째는 임성자적(
任性自適)이요, 셋째는 종교적 이상이오, 넷째는 정치상 의미라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네 가지 원칙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은 유교를 종교화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주석 2)
조소앙은 민족해방의 방략을 연구하면서 ‘육성교’를 구상하게 된 것 같다. 일본경찰서에
구치되었을 때 읽었던 각종 철학ㆍ종교 서적에서 얻은 영감,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나 제3의 종교에 대한 열망 때문에 기독교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육성교를
구상하게 되는 배경이다.
조소앙은 1915년경 ‘육성교’라는 독자 종교를 구상하고, 그것은 <일신교령(一神敎令)
30.
30
>이라는 경문으로표현하였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본래는 탕탕일신(蕩蕩一神)으로 유진유성(惟眞惟聖)이지만, 곧 만물지주요 백교지종(
百敎之宗)이다.
2. 일신이되 십상(十相)이 있어 그때그때에 현현하니,
단군ㆍ불타ㆍ공자ㆍ소크라테스ㆍ예수 그리스도ㆍ마호메트 등의 대 성인이 모두 신자(
神子)요 신의 성명(聖名)일 따름이다.
3. 일신이 대도를 펴고 사학(邪學)이 맥출하여 아집과 미망에 빠지는 내세에 이르렀다.
4. 성전표절, 교기망수, 골육상구, 인자를 멀리하고 잡혼, 마승을 따르느느 것, 파당을
짓는 것, 이기ㆍ사욕에 따르는 사교의 유행, 물욕 때문에 형제를 파는 것 등이 모두
말세의 증상 이다.
5. 이대로 가면 10년 내외에 천량(天良)이 인멸하고, 질실순직지한 성품이 맹수와 같이
될 터이니 큰 일이다.
6. 신자는 모두 깨어나 신을 향해 기도하라.(이하 생략)
7. 눈 앞의 고해를 건너감에 단단시일사순신(斷斷是一死殉神)과 영생도령지지성(永生
靈之至誠)으로 하라.
8. 신과 영은 천자, 본원일말류(本源 一末流)의 관계이니 신령감응이 가능하고, 그들이
일치한 후에 심증선과하니 선지위원은 곧 진ㆍ선ㆍ미요, 진ㆍ선ㆍ미는 우주의
본체이다.
9. 영과 신이 합하면 유신이 방광하야 일체독립, 일체자유, 일체평등, 일체귀일,
일체행복, 영생부활, 초월열반의 경지에 이르니 선지위덕이 크고도 멀다.
31.
31
10. 신의일체육성(一體六聖)이 동원동심(同源同心)이니 신은 곧 육성상합지장(六聖相
合之場)이요, 일신은 자비하사 인간을 위해 육자(六子)를 바쳤다.
11. 일체지성이 육지(六池)를 비추는 것과 같고, 일월육초(一月六초). 일체육용(一體六
用)의 관계에 있으니, 선은 육성의 궁극적 근원적 가치이며, 성신지도는 희생이고
성의헌신이고 자지계(自持械)에서부터 출발한다.
12. 중생을 영각케 하고 물과 물(物)을 선에 합하는 것이 일신의 사명이다.
13. 일신이 육자를 희생시켜 중생을 구하고, 파괴지옥하는 애정을 깨달아라.
14. 신자는 정성껏 수행여계하면 7일 이내에 단득영각할 것이다.
15. 신국이 새로 만들어지는 데 쓸 사람이 없으니 신의 종도는 어서 깨닫도록 하라.
(주석 3)
조소앙이 육성교를 구상하면서 신의 제1인자로 단군을 택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나철에 의해 1909년 1월15일 서울에서 오기호ㆍ이기ㆍ박호암 등과 함께 단군교의
중광식을 거행하고 제1대 교주가 되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단군을 신의 제1인자로 한 것은 1909년 1월에 나철이 단군교를 개창하고, 그 이듬 해
7월에 대종교로 개칭하면서부터 재만독립운동자와 국내외의 국학자들을 중심으로
단군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정신적 상황의 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실
소앙 자신이 1930년에 상해로 망명한 것도 당시 대종교의 핵심간부이고 대표적
이론가였던 아관 신규식과의 연락에 의한 것이었고, 바로 그때부터 그는
신규식ㆍ박은식ㆍ신채호 등과 같이 행동하였으며, 동제사에서 세운 박달학원도 실은
신규식이 주관한 것이었다.(주석 4)
32.
32
주석
2>김기승, 앞의 책, 104쪽.
3> 홍선희, 앞의 책, 49~50쪽, 재인용.
4> 앞의 책, 51쪽.
[9회] 독립운동가들과 대종교에 참여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3장] 중국망명, 독립운동의 길에 나서다 2014/05/29 08:00
김삼웅
1900년대를 전후하여 나라의 운명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황실은 권력투쟁의 장(場)
이 되고 지도층은 갈리어 청국에 기댄 위정척사파와 일본을 등에 업은 개화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국정은 세도정치로 부패타락하고 백성들은 가렴주구에 시달려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천주교가 들어와 반상의 신분질서를 바꾸고자 하였지만 정부의 혹독한
탄압으로 수많은 순교자를 낸 채 지하에 숨어들었다. 동학농민군이 마지막 몸부림을
쳤지만 외세가 들고온 신식 무기에 녹두꽃처럼 떨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이었다. 백성들은 육체적으로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황폐화되었다.
이럴즈음 이땅에서는 각종 민족종교가 창도되어 신생(新生)의 횃불이 되거나
혹세무민에 나섰다.
천도교ㆍ시천교ㆍ청림교ㆍ상제교(上帝敎)ㆍ수운교ㆍ경천교ㆍ천도명리교(天道明理
33.
33
敎)ㆍ제우교(濟遇敎)ㆍ백백교ㆍ태을교(太乙敎)ㆍ보천교ㆍ단군교ㆍ대종교ㆍ원종교(元
宗敎)ㆍ원불교ㆍ증산교등이 치병에서 영혼구제ㆍ국난극복에 이르기까지 제각각
사명을 제시하면서 창도되었다.
민족종교 중에는 본래의 목표대로 정진하는 교단이 있었는가 하면 상당수는 변질되어
친일 매국의 앞잡이가 되거나 국난기에 편승하여 혹세무민을 일삼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종교 중에서 대종교는 가장 격렬하고 줄기차게 일제침략자들과
싸웠다. 대종교의 전신인 단군교의 전통과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단군교는 단군조선 시대부터 명칭을 달리하면서 연면한 전통으로 이어졌다.
부여에서는 대천교, 예맥에서는 무천, 마한에서는 천군, 신라에서는 숭천교,
고구려에서는 경천교, 발해에서는 진종교, 고려에서는 왕검교, 만주에서는 주신교, 기타
다른 지역에서는 천신교라 불리면서 개국주(開國主)인 단군을 받들었다.
단군숭배사상을 기초로 한 단군교는 옛날부터 단군을 시조(始祖), 국조(國祖), 교조(敎
祖)로 신봉하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단군교는 사찰 본당과 대웅전의
뒷켠 삼신각에서 간신히 잔명을 유지하고, 유교가 국교가 되면서는 공자나 주자에
밀려났다. 기독교(천주교)가 유입되면서 ‘우상’으로 전락되고 일제강점기에는 말살의
대상이 되었다.
단군(교)의 존제가 새롭게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 몽골제국에 맞서 싸우면서 내부적으로
민족의식ㆍ민족적일체감이 형성되면서 부터이다. 안으로는 무인정권의 폭압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세계를 제패한 몽골의 침략으로 국토가 쑥대밭이 된 민족수난기에
내적인 민족통합의 정신적 일체감이 단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단군을 국조로 하는 일연 선사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편술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민족적인 위기를 국조를 중심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34.
34
몽골제국이 13세기초에서 중엽까지 80여 년 동안 고려의 정치에 간섭할 때 나타난
단군교가 20세기 초 일제의 침략으로 다시 국권이 위태로워지면서 국권회복의
구심체로서 부활하였다. 몽골침략 이후 7백여 년간 단절되었던 단군교가 1910년 8월
5일 나철이 대종교로 교명을 개칭하면서 국난극복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셈이다.
단군교가 대종교로 명명한 날을 중광절이라 한 것은 단군신앙의 부활을 뜻하였다.
‘중광’(重光:거듭 빛남)이란 국교(國敎)의 계승을 분명히 한 것이다.
대종교가 중광을 계기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강하게 표명하면서 일제의 가혹한
통제와 탄압이 따르게 되었다. 일제는 대종교를 항일구국운동의 비밀결사체로
인식하면서 치안경계 대상으로 삼아 심하게 탄압했다.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된 대종교는 1911년 7월 21일 백두산 기슭의 화룡현 청파호(靑
湖)로 총본사를 옮겼다.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사는 청파호에 총본사와 대종교 경각 등을
짓고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청파호를 근거지로 삼아 4도본사를 각기
청호ㆍ상해ㆍ서울ㆍ소왕청에 두고, 조선ㆍ중국ㆍ러시아 연해주 등 조선족이 사는 곳에
학교를 세워 포교활동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조선총독부가 1915년 10월 1일 이른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대종교에
포교금지령을 내리면서 공식적으로는 해방이 될 때까지 국내에서 포교활동은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대종교가 민족정통사상을 계승하면서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자 각지의
애국지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대종교 중광의 주역인 나철은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라는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의 정신으로 독립운동과
단군신앙을 일체화하였다. 이에 따라 대종교에서는 일제의 조선사왜곡에 맞서 단군에
대한 서적을 대량 출간하였다.
35.
35
1914년에 <신단실기>와<신단민사>의 발간을 시작으로 1922년에 <신고강의>,
<신리대전>, <회삼경>, <신사기>, <조천기>, <신단민사>, <신가집>을 간행하였다.
1923년에는 국문으로 된 <현토신고강의>, <신리대전>, <신사기>, <화삼경>,
<신단민사> 등을 발간하고, 이와 함께 <신고강의>, <종라문답>, <신가집>,
<배달족강역형세도>등 교적을 속속 간행하였다.
대종교의 사서 간행은 1930~1940년대에도 이어져서 <삼일신고>, <신단실기>,
<오대종지강연>, <종문지남>, <한얼노래>등을 펴내어 동포들을 교육하고 민족혼을
지켰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걸쳐 대종교에는 독립운동계의 거물들이 참여하였다.
신규식ㆍ박은식ㆍ홍범도ㆍ윤세복ㆍ신채호ㆍ김두봉ㆍ정인보ㆍ장지연ㆍ유근ㆍ김교헌
ㆍ서일 등 당대의 민족사학자 대부분이 대종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종교 계열의 독립운동가 신규식은 나라 망한 원인을 “첫째는 선조들의 교화와 종법을
잊어 버렸고, 둘째는 선민(先民)들의 공열(功烈)과 그 이기(利器)를 잊어버렸고, 셋째는
제 나라의 국사를 잊어버렸고, 넷째는 나라의 치욕을 잊어버리게 되었으니 이처럼
잊어버리길 잘하고 보면 그 나라는 망하게 마련이다.”라고 통분하면서 <한국혼>을
지었다. 대종교의 ‘역사지키기’ 정신의 일환이었다.
조소앙이 ‘육성교’를 제창하면서 단군을 윗자리에 올린 것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였다.
기성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육성교’는 이단 또는 사이비종교로 보일 지 모르지만,
1910년대 엄혹했던 민족현실에서는 국민정신의 ‘대동단결’을 위한 독립운동의
방략이고 종교운동이었다.
[10회] 신규식 등과 ‘대동단결선언’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4장] 두 가지 ‘독립선언서’ 작성하다 2014/05/30 08:00
김삼웅
36.
36
조소앙은 1915년(29세)육성교를 전도하고 국내 상황을 살피기 위해 만주를 거쳐
국내로 잠입하려다 안둥에서 홍수를 만나 그곳에 머물렀다. 얼마 후 국내 밀사의 연락을
받으며 입국하다가 경찰에 피검되었다. 총독부의 뜻이었던지, 중앙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할 것을 제의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국내에서 이종소 등 청년들과 배일운동의 지하단체 조직을 시도했지만, 경찰의 감시로
성사되지 못하고, 1916년에는 대종(大腫)으로 반년 간이나 입원치료를 받았다. 이 해에
감시 경찰을 피하며 다시 상하이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망명길이 해방으로
귀국할 때까지 29년 동안 계속되었다.
상하이로 돌아온 조소앙은 동생 용주, 중국인 황각 등과 대동당 결성을 추진하여 인도,
중국, 대만, 필리핀, 조선, 베트남 등 7개국 지사들의 단결을 위해 중국 혁명가들과
연대를 추진하였다. 조소앙의 행적이 이때까지는 아직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상하이에는 쟁쟁한 선배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소앙이 독립운동진영에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17년 7월 상하이에서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하고 독립운동가 14명과 공표하면서였다.
신규식ㆍ윤세복ㆍ박은식ㆍ신채호ㆍ박용만 등은 독립운동의 활로와 이론의 정립을
모색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수립에 관한 민족대회의 소집을 제의, 제창하는
<대동단결선언>의 기초를 조소앙에게 의뢰하였다.
이 ‘선언’은 1919년 3ㆍ1혁명으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기 2년 전에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창하는, 역사적인 문건이다. 조소앙은 일본유학과 중국망명기에
중국사상가 강유위(康有爲)의 ‘대동사상(大同思想)’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동양적인
전제정치, 계급제도를 부인하는 평등사상과 민권사상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를
연구하였다. 또 박은식의 대동사상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그가 대동사상을 수용한 것은,
여기에 담긴 국가 간, 민족 간, 계급 간 불평등을 지양하고 철저한 평등주의정신
37.
37
때문이었다.
조소앙은실제로 1916년 중국인 황각 등과 <대동당>을 추진한 적이 있고,
1922년경에는 중국인 황개민(黃介民) 등과 <한울님>을 조직하여 김상옥 등을
입단시키기도 하였다. (주석 1)
일본이 국토를 강점하고 있으니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가 주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으므로 해외동포가 민족대회를 개최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조소앙의 주장은
당시 국제정세와 독립운동의 상황 등 여건 변화에서 기인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노령과 만주지방의 독립운동이 러시아, 중국 정부의
강압으로 봉쇄되었다. 이에 따라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간민회 등이 해체되고,
심지어 노령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감금되거나 축출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노령에 있던 이 상설은 중국으로 건너와 신규식ㆍ박은식 등과 1915년에 신한혁명당을
결성하는 등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국제적으로는 러시아에서 2월혁명이 일어나고, 핀란드와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하며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있어 같은 처지의 약소민족을 고무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참전으로 일본을 포함한 연합군이 우세해지고, 중국도 연합국에 기울어져갔다.
독립운동도 전환되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해혁명에 참가했던
신규식을 중심으로 <대동단결선언>이 나오게 되고, 조소앙이 역사적 문건을
집필하였다.
‘선언’은 주권불멸론과 융희황제의 주권포기론을 근거로 국민주권설을 정립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이념을 확립했을 뿐 아니라 정부의 통할체제를 계획하는 등 1917년까지
다양하던 독립운동의 이론을 결집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이같은 ‘선언’의 계획은 당장에는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그 문서가 동포사회에 널리
송달되었으며, <신한민보> 등 각처의 신문을 통해 계몽되면서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주석 2)
38.
38
‘선언’의 강령은모두 7개항으로 되어 있는데, 앞의 3개항은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것이고,뒤의 4개항은 운영에 관한 것이다.
제1항은 “해외 각지에 현존한 단체의 대소ㆍ은현을 막론하고 규합 통일하여
유일무이의 통일기관을 조직한다”고 하여, 민족대회의 또는 임시의정원과 같은 것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제2항은 “중앙총본부를 상당한 지점에 치(置)하여 일절 한족을 통합하여 각지 지부로
관할구역을 명정한다”고 하여 최고 행정부를 두고 그 산하에 지역별로 지부를 두자는
것이다.
제3항은 “대헌(大憲)을 제정하여 민정에 합한 법치를 실행한다”고 하여 헌법의 제정과
법치주의를 천명하였다.
제4항은 “독립 평등의 성권(聖權)을 주장하여 동화의 마력과 자치의 열근(劣根)을
박멸하자”고 하여 국내문제에 대한 방책을 선언하고 있다.
제5항은 “국정을 세계에 공개하여 국민외교를 실행하자”고 하여 국제외교를
모색하였다.
제6항은 “영구히 통일적 유기체의 존립을 공고키 위하여 동지간의 애정과 수양을 할
것” 주장하였다.
제7항은 위의 실행방법으로 “기성한 각 단체와 덕망이 유한 개인의 회의로 결정할
것”이라고 하여, 제1항에서 결정한 회의에서 합의하여 실천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선언의 제일 끝에 찬동 여부의 회담통지서가 부착되어 있고, 단체와 개인에게 함께
발송되었다.
주석
39.
39
1> <한국독립운동사>제4권, 516쪽.
2> 조동걸,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 <한국학논총> 10, 국민대학교, 1987.
[11회] 주권불멸론(고유주권론)에 의한 국민주권론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4장] 두 가지 ‘독립선언서’ 작성하다 2014/05/31 08:00
김삼웅
조소앙은 이 ‘선언’에서 주권을 상속받으면 국가적 행동을 실천해야 하는데, 그의
실질적 가능성에 대하여 재정ㆍ인물ㆍ신용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해외동포를 1백만 명으로 계산하고 재정에서 1인당 반원, 합계 50만 원의 연수입으로
공동사업을 운영하여 재정을 충당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대동단결을 강조하면서,
이같이 단결과 재정이 마련되면 인물도 육성되고 합력이 더욱 공고해진다고
역설하였다.
조소앙의 <대동단결선언>의 원본이 뒤늦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6년 8월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도산 안창호의 유품에서 발견된 것이다. 표지만 모조지이고
본문은 갱지인 이 문건은 세로 29cm, 가로 20cm의 12면에 인쇄되었다.
‘선언’은 148행으로 엮어져 있는데 그 중에 18행은 대동단결의 필요성, 12행은
국내참상, 50행은 해외동지의 역할, 18행은 국제환경, 끝의 12행은 대동단결의
호소이고, 본문만은 118행이다. 그리고 <제의의 강령> 11행과 제의에 대한 답장 관계가
19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권불멸론>에 대한 한 연구가의 분석이다.
주권이란 민족고유한 것으로 융희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것은 국민에 양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권행사의 의무와 권리가 국민에게 있는데 국내 동포는 일제에
구속되어 있으니 그 책임을 해외 동지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에서 기독교적 폭군방벌론이 자연법사상의 천부인권설(고유인권론)로
40.
40
발전하여 국민주권설에이른 과정과 비교하면 국민주권설 입론의 방법이 흡사하여
흥미로운 것이다. 국민주권설이 구한말에도 소개되고 또 신민회는 그에 근거하여
공화주의 이념을 표방했지만, 어떤 경우도 서양의 천부인권설이나 사회계약론을
도입한 논리였는데, ‘선언’이 주장한 국민주권설은 그와 달리, 민족사적 정통을 의식한
논리전개로써 특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융희황제의 주권 포기를 단정함으로써 이조 왕실이 신국가건설에 끼어들
여지를 봉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제의 주권침탈은 민족사적으로는 침략이지만,
왕조사로 보면 주권의 포기이니, 그 주권의 행사권은 민족에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 동지난 당연히 삼보를 계승하야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유하도다. 고로 2천만의 생령과 3천리의 구강과 4천년의 주권은 오인 동지가
상속하였고 상속하는 중이오 상속할 터이니 오인 동지난 차(此)에 대하야 불가분의
무한책임이 중대하도다”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1910년대 꾸준히 계속되어온 광무황제의 옹립으로서 망명정부를 수립하려던
신한청년당 등의 황보주의를 종결한 선언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주석 3)
주석
3> 조동걸,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 <한국학총론> 제19집,
국민대한국학 연구소, 1987.
[12회] ‘대한독립선언서’ 집필의 배경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4장] 두 가지 ‘독립선언서’ 작성하다 2014/06/01 08:00
김삼웅
41.
41
조소앙은 1917년<대동단결선언>에 이어 이 해 8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
예정인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준비를 서둘렀다. 제2인터네셔널로도
불리는 이 대회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비자본ㆍ비공산을 내세우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 유럽국가들 의 중심이데올로기로 떠올랐다.
조소앙은 신규식 등과 이 대회에 참석하고자 했으나 경비 등의 이유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대신 조소앙은 한국독립의 역사적인 <주권불멸론> <주권민유론(主權民有論)>,
<최고기관 창조의 필요론>을 골자로 하는 취지서를 작성하여 한국문제의 의제로
제출하고, 이를 통과시키게 하였다. 한국독립문제가 국제회의(대회)에서 공식 논의된
것은 망국 이후 이것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한국 대표가 참석하지 못한 대회의 결정은
별다른 효과를 찾기 어려웠다.
조소앙은 1917년 <대동단결선언>에 이어 이 해 8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
예정인 만국사회당대회(제2 인터네셔널)를 앞두고 조선사회당을 창당하였다. 일제의
패악을 폭로하고,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만국사회당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급조한
터여서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는 비자본ㆍ비공산을 내세우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사회민주주의 이데올로기가 팽배하였다. 실제로 이를 택한 나라도
적지 않았다. 스톡홀름대회는 이같은 여건에서 개최하는 국제행사였다.
역사적으로 한국인의 사회주의 운동조직을 가장 먼저 결성했던 사람이 조소앙이었다.
그것이 1917년 상해에서 신규식과 더불어 결성한 조선사회당이었다. 흔히 외교용
전단조직이었다고 하지만 조소앙이 1919년부터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사회당의
이름을 사용하였던 것을 보면, 단순한 전단정당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석 4)
42.
42
뒤에서 다시논급하겠지만. 조소앙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은 모스크바의 공산주의
이념이 아닌 독일사회민주당이나 영국의 노동당 노선에 가까운 편이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을 지원하기 위해 2년간 유럽을
순방하면서 영국 노동당 인사들과 교우하고 하원의원에서 한국독립문제를 의안으로
채택하게 하였다.
또 해방 후에는 직접 사회당을 조직하여 정권경쟁에 나서는 등 그의 정치이데올로기는
사회민주주의의 성향이 강한 편이었다. 연구가들 중에는 <대한독립선언>과 삼균주의
사상에는 사회민주주의적 가치와 목표가 깔려 있다고 분석한다.
조소앙은 1918년 국내외 동포들의 대동단결운동을 펴기 위하여 만주로 떠났다. 당시
만주에는 무장독립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만주에서
윤세복ㆍ이시영ㆍ윤기섭 등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고, 마침 이곳으로
망명한 김좌진 등과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1919년 1월 27일(음력) 길림성 여준의 집에서
여준ㆍ박찬익ㆍ황상규ㆍ김좌진ㆍ정원택ㆍ정운해등이 모여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다음날 의군부회의를 열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가까운 여러 곳과 구미에
선언서를 보낼 것을 논의하였다. (주석 5)
조소앙이 만주에서 행한 가장 큰 과업은 1919년 2월 길림에서 해외 지도급 독립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일이다. <무오독립선언서>로도
불리는 이 선언서는 <2ㆍ8독립선언서>와 <3ㆍ1독립선언서>에 앞서 발표되고, 시기나
내용, 서명자에 있어서 항일독립선언의 효시가 되었다. 서명자 중에는 쟁쟁한
민족사학자, 언론인, 문인, 학자 출신이 있음에도 32세의 젊은 조소앙이 기초자가
43.
43
될만큼 그는이미 독립운동가 진영에서 출중한 능력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선언서의 주요 서명자는 당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지도급 인사들이 총
망라되었다. 가나다순의 서명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조소앙은 본명 조용은이라 썼다)
김교헌ㆍ김규식ㆍ김동삼ㆍ김약연ㆍ김좌진ㆍ김학만ㆍ여준ㆍ유동열ㆍ이광ㆍ이대위ㆍ
이동녕ㆍ이동휘ㆍ이범윤ㆍ이봉우ㆍ이상룡ㆍ이세영(이천민)ㆍ이승만ㆍ이시영ㆍ이종
탁ㆍ이탁ㆍ문창범ㆍ박성태ㆍ박용만ㆍ박은식ㆍ박찬익ㆍ손일민ㆍ신
성ㆍ신채호ㆍ안정근ㆍ안창호ㆍ임
방ㆍ윤세복ㆍ조용은ㆍ조욱(조성환)ㆍ정재관ㆍ최병학ㆍ한흠ㆍ허혁ㆍ황상규.
<대한독립선언>은 조소앙이 부주석으로 활동한 무장투쟁 단체 대한독립의군부가
주체가 되어 서명자를 동원하고 문건을 기초하고 인쇄와 배포의 책임을 맡았다. 모필로
쓴 것을 석판으로 약 4.000부를 인쇄하여,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배포하였다. 국내에 배포되었다는 단서는 아직 찾기 어렵다. 수취인(단체)들이 공개하기
어려웠을 것이거나, 보안상 해외 독립운동가에게만 배포했을 지 모른다.
‘선언서’의 구성은 <독립선언서>라고 제(題)한 부분, 본문, 발표 일자, 서명자 등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문은 35행으로 띄어쓰기와 마침표를 제외하고
1,273자이며, 크게 네 부분으로 짜여 있다.
‘선언서’는 먼저 ‘한일합병’의 무효를 선언하면서, 경술국치를 일본에 대한 주권의
양도가 아니라 융희황제의 주권포기로 간주하고, 그것은 국민에게 주권을 선양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어서 이 독립선언으로 일본을 응징해야 할 것으로 규정하고,
여러가지 이유를 열거하면서 독립군의 총궐기와 한민족 전체의 육탄혈전을
촉구하였다.
44.
44
조소앙은 이‘선언’에서 해외망명 독립운동지도자들이 국내 동포의 위임을 받아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책임의식과 일본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절대 적임을 분명히 하고,
항일독립전쟁은 하늘의 인도와 대동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신성하고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점을 분명히 적시하였다. 따라서 민족의 독립은 자기희생의 비장한 결단에
의해 성취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3ㆍ1독립선언서>가 비폭력적인 저항을 선언한 데 비해 <대한독립선언>는 한민족
전체의 ‘육탄혈전’을 촉구하여 무장전쟁론을 제시한 것이다. 국내와 국외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국망 이후 지도급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선언’에 ‘육탄혈전’을 천명한
것은 최초의 일이다. 조소앙의 무장전쟁론의 의지를 살피게 하는 대목이다.
‘선언서’의 중요한 대목은 <앞으로의 행동강령 다섯 가지>부분이다.
1. 독립의 제일의 일체
방편으로 군국전제를 산제하야 민족평등을 전구(전지구)에
보시할 것.
2. 독립의 본령무력
겸병을 근절하야 평균천하의 공도로 진행할 것.
3. 복국의 사명 밀맹(
密盟) 사건을 엄금하고 대동평화를 선전할 것.
4. 입국의 가치 동권동수(
同權同壽)로 일제 동포에 시(施)하야 남녀 빈부를 제하여,
동현동수로 지우노유에 균하야 사해인류를 토할것.
5. 대한민족의 응시 부활의 구경의(究竟義) 진하야
국제불의를 감독하고 우주의
진선미를 제현할 것.(주석 6)
‘선언서’의 핵심은 무어라해도 마지막의 ‘육탄혈전’이다. 이 부분은 “조소앙의 동생
조용주의 직접 집필 내지는 그의 사상이나 논리 및 문투가 그대로 반영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주석 7)
‘선언서’의 발표 시점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원본 선언서의 발표 일자는
45.
45
‘단군기원 4252년2월 일’로 되어 있다. 4252년은 서기로는 1919년 2월이다. 1919년
2월 1일이 음력 기미년 1월 1일이므로 ‘무오선언’이 되려면, 발표일이 1919년 1월 31일
이전이 되어야 한다. 조소앙의 기록에는 1919년 2월경에 이 선언서를 발표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 ‘선언’은 1919년 3ㆍ1일 서울에서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후에
발표되었다는 주장(송우혜)과, 1919년의 <2ㆍ8 독립선언서>보다 1개월 앞선
주장(신용하)으로 대별된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에서는 만주에서 나온 <대한독립선언서>가 1918년(무오년)에
발표된 것으로 알았고, 따라서 명칭조차 <무오독립선언서>라 불러 왔다. 또한 더 나아가
1919년 2월 8일에 발표된 <2ㆍ8독립선언서>와 3월 1일에 발표된 <3ㆍ1독립선언서>가
세칭 <무오독립선언서>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하는 견해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무오독립선언서>라는 별칭 및 다른 독립선언서들에 미친 영향력에 대한
추정은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다. <대한독립선언>는 <2ㆍ8독립선언서>와
<3ㆍ1독립선언서>가 나오고 난 뒤인 1919년 3월 중순에 만주 길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 8)
무오독립선언은 1918년 음력 12월 만주 동삼성에서 중광단이라는 독립운동 단체가
중심이 되어 당시 여러 곳에 있는 저명한 독립운동의 지도자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독립선언을 별칭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양력으로는 1919년 1월경이니,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국제정세의 변동을 포착해 독립선언을 발표한 것으로는 가장 앞선
것이었다. 노령과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된 간도의 무오독립선언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의 독립선언 중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재일유학생들의 ‘2ㆍ8독립선언’보다도 약
1개월이 앞선 것이었다. (주석 9)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시기에 대한 문제점은 최근에 입수한 임정 편인(編印),
<한국독립선언서 23주년 3ㆍ1절기념특감>에 의해서 밝혀졌다. 즉 부록에 수록된
46.
46
자료배열 순서에서‘대한독립선언서’가 ‘2ㆍ8독립선언서’ 앞에 게재되고 있다는 것은
대한독립선언서가 2ㆍ8독립선언서 이전에 발표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원동 민족해방투쟁과 3ㆍ1절>이나 <대한독립선언서>등에서 뒷받침
되고 있다. 또한 이 발표일자는 임시정부가 정부 차원에서 발행한 ‘3ㆍ1운동특집’
간행물인 만큼 여기에 사용된 공용년기(公用年紀)는 음력일 수는 없고, 당연히
양력이라는 것도 자명하게 되었다.
이렇게 대한독립선언서가 2ㆍ8독립선언서와 3ㆍ1독립선언서에 앞서 발표 일자가
확실시 될 경우에 대한독립선언서 ‘원본’과 ‘대한독립선언서 친필 조소앙’의 년기
‘단군기원 4252년 2월 일’은 2월 초순경인 2월 1~7일 사이로 보는 것이 올바른 견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고, 3ㆍ1독립선언서의 년기 ‘조선건국 4252년 3월 일’의
경우를 감안하면 2월 1일로 볼 수도 있다. 결국 대한독립선언서는 세계대전 후 2월 초순
경에 가장 먼저 발표된 선언서로서 ‘2ㆍ8, 3ㆍ1독립선언서의 모체요, 선도적 역할’을
다하였던 것이다. (주석 10)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시기에 대한 엇갈린 주장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의미'는 높이
평가된다.
첫째. 1919년의 저 거대한 독립운동 에너지의 분출로 국내외가 혼연일체가 되었을 때,
‘외응(外應)’의 측면에서 가장 형식이 잘 짜여진 선언서였다는 점이다. 선언서 발표의
주체들을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국외거주 동포사회의 대표격인 인물들로 내세운 것은
일종의 탁월한 정치적 감각으로 보인다.
둘째, 논리의 일관성이란 점에서 문제를 안고 있긴 하지만, 선언서 최종 부분에서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부분이 갖는 의의는 참으로 크다. 다른
독립선언서들이 환상적인 국제외교적 처리에 의한 독립을 갈구하고 있을 때, 혼자서
깨어 있는 자로서의 의식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삼균주의의 사상적 태동이 이 독립선언서에서 시작되었다. 삼균주의는 곧 임정의
47.
47
건국강령의 기본정신이기도하거니와 그후 우리 헌법의 정신적인 골격을 받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소앙은 “이것은(주: <대한독립선언서>의 작성을 가리킴)
삼균주의의 배태기었다. 토지는 국민의 소유이며 인민은 세습적으로 독자적 결정권을
행사할 것과 세계 화평을 고조하고 침략주의를 배격하였다.”라는 말로
<대한독립선언서>가 지닌 사상적인 골격과 의미를 크게 평가했다.
넷째, <대한독립선언서>와 ‘대한독립의군부’와의 관계이다. 대한독립의군부는 결국 이
선언서를 세상에 내어놓기 위해 존재했었다고 할 수 있다. 조직을 결성한 후 첫 업적이
<대한독립선언서>의 작성과 선포였고, 선언서가 나온 후에는 이내 조직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조소앙ㆍ정원택ㆍ박찬익 등 간부진들이 곧 상해로 갔고, 김좌진 역시 몇 달
후에 북간도의 정의단(북로군정서의 전신)에 입단하는 등 소속 인원이 모두 흩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선언서는 한 독립운동단체의 전부가 담긴 문서이기도 한 것이다.
(주석 11)
주석
4> 조동걸, <한국근현대사의 이상과 현실>, 320쪽, 푸른역사, 2001.
5> 정원택, <자산외유일기>, 송우혜 ‘대한독립선언서’<세칭‘무오독립선언서’의 실체>,
<역사비평>, 여름호, 147쪽, 1988년.
6> 송우혜, 앞의 책, 161쪽.
7> 앞의 책, 162쪽.
8> 앞의 책, 164쪽.
9> 신용하, <3.1독립운동발발의 경위>, <한국근현대사론> Ⅱ, 55~56쪽, 지식산업사.
10> 조항래, <대한독립선언서 발표시기의 경위>, 조만제 편, <삼균주의논선>, 73쪽,
48.
48
삼균학회, 2003.
11> 송우혜, 앞의 책, 175쪽.
[13회] 대한독립선언서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4장] 두 가지 ‘독립선언서’ 작성하다 2014/06/02 08:00
김삼웅
우리 대한 동족 남매와 온 세계 우방 동포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의 신성한 평등 복리로 우리 자손 여민에 대대로 전하기
위하여 여기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우리 대한은 예로부터 우리 대한의 한(韓)이요, 이 민족의 한이 아니라, 반만년사의
내치외교는 한왕한제(韓王韓帝)의 고유권한이요. 백만방리의 고려산수는 한남한녀의
고유재산이요. 기골물언이 유럽과 아시아에 뛰어난 우리 민족은 능히 자국을 옹호하며,
만방을 화협하여 세계에 공진할 천민(天民)이라, 우리나라의 털끝만한 권한이라도
이민족에게 양보할 의무가 없고, 우리 강토의 촌토라도 이민족이 점유할 권한이 없으며,
한 사람의 한인이라도 이민족이 간섭할 조건이 없으니, 우리 한은 완전한 한인의
한이라.
슬프다. 일본의 무력이여. 임진 이래로 반도에 쌓아 놓은 악은 만세에 엄폐할 수
없을지며, 갑오 이후 대륙에서 지은 죄는 만국에 용납치 못할지라. 그들이 호전 악습을
자보(自保)의 자위(自衛)의 구실을 만들더니, 마침내 하늘에 반하고 인도에 거스르는
보호 합병을 강제하고, 그들의 윤맹패습은 영토보존이니 문호 개방이니 기회균등이니
삼다가 필경 몰의무법한 밀관협약을 강제로 맺고, 그들의 요망한 정책은 감히 종교를
핍박하여 신화의 전달을 저희하였다.
학자를 압제하여 문화의 유통을 막고, 의전을 박탈하여 경제를 농락하며 군경의 무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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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이민이 암계로한족을 멸하고 일인을 증하려는 간흉을 실행한지라. 적극 소극으로
한족을 마멸시킴이 얼마이며, 십년 무단의 작폐가 여기서 극단에 이르므로 하늘이
그들의 악덕을 꺼리어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주실 새, 하늘에 순종하고 인도에 응하여
대한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그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한 죄악을 선포하고
징계하노라.
1. 일본의 합방 동기는 그의 소위 범일본주의를 아시아에서 시행함이니 이는 동양의
적이요.
2.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불법무도한 폭력폭행을 극도로 써서 된 것이니
이는 국제법규의 악마이며,
3. 일본의 합방 결과는 군대 경찰의 야만적 힘과 경제압박으로 종족을 마멸하며 종교를
강박하고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문화를 저해하였으니 이는 인류의 적이라, 그러므로
하늘의 뜻과 사람의 도리가 정의법리에 비추어 만국의 입증으로 합방 무효를 선포하여,
그의 치악을 응징하여 우리의 권리를 회복하노라(중략)
귈기하라, 독립군! 일제히 독립군은 천지를 바르게 한다. 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이니, 개 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랴.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동체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냐. 집을
기울여 나라를 회복하면 3천리 옥토는 자가의 소유이다. 일가의 희생을 어찌
아깝다고만 하겠느냐.
아아! 우리의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된 본령을 자각한 독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요.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위해서의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명을 받들고 일체의 사악으로부터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단군기원 4252년 2월 일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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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회] 임시정부헌장ㆍ법률제정에 참여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5장] 임정 외교활동, 시민주의 현장체험 2014/06/03 08:00
김삼웅
1919년은 조소앙에게도 생애에서 가장 분주한 해가 되었다. 만주 길림에서 국내
3ㆍ1혁명의 소식을 듣고 즉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과도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우자는 데 뜻을 모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국민의 총궐기에
신바람이 나고, 그 대신 책무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3ㆍ1혁명을 계기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대동단결선언>과 <대한독립선언>을 기초한 그에게 3ㆍ1혁명은 자신이 켜든 봉화에
2천만 민중이 화답하는 듯한 감격을 느꼈을 터였다. 상하이는 신규식 등과 동제사와
박달학원의 교사로서, 그리고 신한청년당에 참여했던, 항일독립운동의
출발지점이었다.
상하이에서는 여운형과 김규식 등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송했는가 하면, 국내와 일본에 간부들을 파견하여, 2ㆍ8독립선언과
3ㆍ1독립선언을 추동하는 등 임시정부 수립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3ㆍ1혁명
직후에 상하이 프랑스조계 안의 보창로 329호에 동제사와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여 활동을 개시하였다.
독립사무소 출범 초기의 주요 구성원은 위에서 본 신한청년당의 대표들과, 일본에서
2ㆍ8운동에 참가하고 상해로 온 이광수ㆍ최근우, 미국에서 온 여운홍, 그리고 국내에서
3 ㆍ1운동의 주역들이 파견한 현순 등이었는데, 이 가운데 현순이 총무를 맡았다.
그 뒤 3월 말에 이르러 각지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인물들이 여기에
51.
51
집결하였으니, 대표적인인물은 본국에서 온 최창식, 일본에서 온 신익희ㆍ윤현진,
만주와 러시아지역에서 온 이동녕ㆍ조성환ㆍ이시영ㆍ조소앙ㆍ김동삼 등이고, 총
30명이 넘었다. (주석 1)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4월 10일 저녁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논의를
거듭하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란 회의 명칭을 결정하고 의장단을 선출하였다.
이어서 국호를 대한민국, 정체를 민주공화제로 정하고, 정부조직과 임시헌장을
제정하였다. 조소앙은 국무원비서장에 선임되었다.
조소앙은 임시헌장 등 임시정부 조직의 법률 제정에 발군의 역량을 발휘하였다.
이시영ㆍ남형우ㆍ신익희 등 법학(률) 전문가들과 헌장제정위원으로 선임되어 전문
13장 57개 조로 구성된 임시의정원법을 1차로 제정하였다. 임시의정원법은 임시정부
구성의 모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어서 임시정부헌장기초위원, 심사위원 등
정부조직의 각종 법률제정에 참여하였다.
조소앙은 경기지역 의정원의원과 국무원비서장에 선임되었다. 국무원비서장은
총무처장관과 같은 역할이었다. 4월 22일에는 국무원비서장을 사임하고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임시정부가 출범하여 어느 정도 안착되면서 조소앙은 6월에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을 지원하라는 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유럽으로 떠났다.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전승국 중심의 평화질서 형성을
위해 1919년초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이른바 베르사이유 체제를 향한
전승국회의였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김규식은 대한청년당이 조직되면서 파리강화회의에 대한청년당의
대표 자격으로 파리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교활동은 쉽지 않았다.
전승국의 일원이 된 일본의 끈질긴 방해로 한국문제가 상정되지도 못했고, 김규식은
일본인들로부터 테러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1919년 12월 12일자 임시의정원 손정도 의장의 이름으로 된 <국내유지에게 주는
52.
52
글>중에 김규식등의 활약을 총정리한 “파리의 우리 대표”라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는
조소앙과 관련한 내용도 포함되었다.
우리 특파전권 대표 김규식 씨는 파리에 도착하여 전년 해아밀사 이준 씨와 동반한
미국인 헐버트 씨와 의사 안중근 씨의 최후 유탁을 받은 프랑스 홍 신부와 강화회의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그후 상해의 우리쪽에서 조소앙ㆍ여운홍 양씨를 파견하여 우리
대표를 도우게 했는데, 그곳 각국의 정치가ㆍ법률가ㆍ언론계의 여러 명사들이 우리
대표를 내방하여 우리 대한의 사정을 청취한 후 우리를 원조하는 것이 자신들의
천직이며 영예라 하고, 5월 11일에 만국으로부터 우리 대표 김규식 씨를
한국전권대표로 승인하고 발언권을 주었다. 우리 대사는 임시정부의
한국독립승인청원서를 제출했는데 다른 약소국의 청원은 받지 않았지만 특히 우리가
제출한 청원서를 정식으로 수리되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요구는 이번 평화조약의 결과 성립되는 10월의 미국수도 워싱턴
국제연맹회에서 결정 승인될 것이라 확신한다. (주석 2)
주석
1>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연구>, 87쪽, 지식산업사, 1984.
2> 김정명 편, <대한민국임시정부각료명부 등 보고건>, <조선독립운동>, 83쪽, 원서방,
1967.
[15회] 유럽순방 임정승인 요청, 사민주의체험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5장] 임정 외교활동, 시민주의 현장체험 2014/06/04 08:00
김삼웅
53.
53
조소앙은 파리에서김규식ㆍ이관용ㆍ여운홍 등과 합류하여 만국평화회의에 대처하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8월에는 국제사회당대회가 열리는 스위스로 건너갔다.
국제사회당대회에 참석한 조소앙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되었음을
보고하고, 각국 대표들에게 자국의 국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줄 것과
한국을 국제연맹에 가입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8월에 스위스에서 개최되는 국제사회당대회에 출석하여 대한민국 성립을 보고하고
각국 국회를 통하여 임시정부 승인과 국제연맹 가입을 제청, 가결하니 36개국의
대표들로 구성된 농ㆍ공 대중의 국제대회로서 한국대표를 영접하고 의결안을 통과시킨
것은 유사 이래 초유의 활동이라고 각국 인사들의 환영을 받기에 이름.
9월에 영국국회에 한국문제를 제출하기 위하여 노동당수(헨더슨) 등 인사를 사전에
만나 협의.
그후 네델란드, 프랑스, 에스토니아 등 6, 7개국을 역방하고 일본의 지자체실시 등
기만을 폭로하며 한국독립군의 위세 당당함을 역설하여 한국독립 승인을 각국 국회로
하여금 의결케 할 것을 추진.
12월에 선생의 외교활동 지원을 목적으로 미국 켈리포니아에서
이륭음ㆍ김곤ㆍ임일ㆍ이범영ㆍ김여식 등이 노동사회개진당을 조직하고 딴유바에서
당대회를 소집하고 세계인민연맹 결성대회에 한국대표로 선출. (주석 3)
조소앙은 2년여 동안 유럽 여러 나라를 순방하면서 국제사회당대회에 참석한 것은 물론
영국 노동당수 등 각국 지도자들과 만나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효과도 적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여행 중 유럽 여러 나라의 실정을 지켜보면서 폭넓은 이해를 하게 되었다.
1921년 5월 북경에 도착하기까지 2년간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ㆍ독일, 발틱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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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국과 혁명중의러시아를 돌며 외교활동을 펴는 한편, 견문을 넓혔다. 스위스에서는
조선사회당 대표로 국제사회당대회와 네덜란드의 국제사회당 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한국독립의 결의안을 통과시킨 성과를 얻었고, 영국 노동당 인사와 교우하여
하원의회에서 한국독립문제를 의안으로 채택하는 등의 외교적 성과를 올리는 동안
유럽 사회민주주의를 익힐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조소앙의 사회주의는 사회민주주의 또는 민주사회주의의 틀을 이루어 간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국제사회당대회 집행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국제사회당과
대립해 있던, 그리고 내전으로 혼란한 러시아를 시찰하면서 확인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소앙의 일크츠크와 치타를 통과하던 1921년 4,5월은 그해 6월의 자유시참변을
앞두고 치타의 상해파고려공산당과 일크츠크의 일크츠크파고려공산당이 충돌
직전이었으므로, 폭풍전야의 광경을 목견하면서 공산당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린
기회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주석 4)
‘사상가 조소앙’이 형성되기에는 30대 초반기 유럽의 순방이 큰 밑거름이 되었다.
1920년대 한국독립운동가 중에 상당수가 공산주의이념에 매료되었지만, 그가 시종
반공산주의 노선을 걸었던 것은 이 때 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체감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1918년 6월 노령 하바로프스키에서 이동휘를 중심으로 박애ㆍ박진순ㆍ이한영ㆍ김립
등이 조직한 한인사회당도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가능했고, 이동휘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할만큼 막강한 위치에 있었다.
조소앙은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국제대회에
참석하지 않고 만주를 거쳐 곧바로 중국으로 돌아왔다. 극동인민대회,
극도피압박민족대회 등으로도 불리는 이 대회는 1920년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채택한 <민족ㆍ식민지문제에 관한 태제>에 입각하여 극동의 피압박 문제를 다룬
회의로서, 중국ㆍ한국ㆍ일본ㆍ몽골ㆍ자바 등지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한국은 23개
단체 대표 52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대표총수 144명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55.
55
한국의 참석자중에는
여운형ㆍ이동휘ㆍ홍범도ㆍ박헌영ㆍ김규식ㆍ김단야ㆍ김상덕ㆍ김시현ㆍ나용균 등이
포함되었다.
소앙이 참석한 국제사회당대회는 1919년 모스크바에서 레닌이 주도하여 코민테른을
결성하고 그것을 제3인터네셔널이라고 선언한데 대립하여 제2인터네셔널의 재건을
모색하는 대회였다.
그러므로 소앙은 보불전쟁 때 민족주의와 발전주의가 대립하여 끝난
제1인터네셔널이나,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역시 민족주의와 반전주의가 대립하여
끝난 제2인터네셔널의 운명을 회고 성찰하면서, 반일 독립운동을 수행하는 자신의
처지에서 코민테른 방식의 반전주의 또는 세계주의보다 각국의 특수성을 존중하는
사회민주주의의 길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개량주의 노선이 어디보다 강한 영국 노동당 인사와 자주 접촉하는
가운데 또 그들과 함께 러시아를 시찰하는 가운데 심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앙은
그해 11월부 터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극동인민노동자대회에 김규식ㆍ여운형 등
한국독립운동가 대표자가 대거 참석하는 것도 뒤로하고, 홀로 상해로 돌아왔던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소앙의 사회주의는 다른 지도자와 달리, 모스크바의 공산주의와는
결연히 이별하고 독일 사회민주주의당이나 영국 노동당 노선으로 자리를 잡아갔던
것이다. (주석 5)
당시 조소앙이 경유했던 지역은 유럽 전역에 이르렀다. 아일랜드, 네덜란드, 덴마크,
이태리, 그리스, 핀란드 등도 포함되었다. 이 시기에 인도의 시인 타골과 회담하고,
1920년 5~11월까지 국제사회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덴마크, 단찌히,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를 경유하여 러시아 페테로부르크에 도착, 러시아 혁명기념대회에
참석하고, 12월에는 약 3개월간 8개국 대표 25명으로 구성된 시찰단의 일원으로 러시아
각지를 시찰하였다.
56.
56
주석
3>강만길, <조소앙 연보>, 302~303쪽, 한길사, 1982.
4> 조동걸, <조소앙의 삼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사상의 형성>, 조만제 편,
<삼균주의론선>, 36~37쪽.
5> 앞의 책, 37쪽.
[16회] 민족유일당운동 전개했으나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5장] 임정 외교활동, 시민주의 현장체험 2014/06/05 08:00
김삼웅
해가 바뀐 1921년 이르크추쿠→치타→만주리 등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
<만주리선언>(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조소앙이 귀환했을 무렵 상하이 임시정부는 대통령 이승만 축출문제와 국민대표회의
소집문제로 큰 홍역을 치루고 있었다. 이승만의 존재로 인하여 임시정부는 분열상을
면치 못하다가 그가 축출되면서, 임시정부의 위상을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로
대립하고 있었다. 베이징에 머물던 조소앙은 1922년 1월 중국국민당 간부 장계(張繼)의
초청으로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의 주선으로 중국혁명의 지도자 손문과 회담하였다.
<발해경(渤海経)>을 집필하고 이어서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에 <3ㆍ1절
독립신고(神誥)>를 집필하였다. 또 같은 신문에 <독립당과 공산당의 전도>, <독립당의
계급성>등을 발표하였다.
<독립당과 공산당>에서는 “독립당은 민주정치와 민족주의를, 공산당은 계급통치와
세계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특징”이라 하고, “식민지하에서는 공산당도 제1차적 목적이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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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이고 연후에제2차적 목적이 공산전쟁이므로 당장에는 ‘공조협진’이
필요하다”하고, “독립당은 공산당을 ‘기로매한(倚露賣韓)의 적’이니 ‘탁왜체한(托倭替
韓)의 심장’이라는 것은 한국 공산주의자의 잘못이지 공산당 자체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서로 욕하지 말고 먼저 “강유력(强有力)한 동맹체를 조조하여 무력적
실력을 속히 집중”하라고 촉구하고 “전도의 승리는 경성(서울)에 선입(先入)할 자에 귀(
歸)한다”고 주장하였다. (주석 6)
여기서 ‘기로매한’은 러시아에 붙어서 조국을 파는 행위, ‘탁왜치한’은 일본공산당
핀산체(片山替)에게 동조하는 행위를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이동녕ㆍ이시영ㆍ김구
등과 임시정부 수호파(개조파)에 속하여, 이에 대한 이론과 정책을 제시하면서
‘임정수호’의 역할을 하였다.
6월에는 다시 임시의정원의원에 피선되고 이어서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선임되었다. 그
동안의 외교활동이 평가받은 것이다. 조소앙은 독립운동세력의 대동단결을 위하여
이동녕ㆍ안창호ㆍ여운형ㆍ김구ㆍ원세훈ㆍ신숙ㆍ홍진ㆍ신익희ㆍ노백린ㆍ김상옥
등과 시사책진회를 발기하여 통합을 시도했으나 의견 차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대신 청년독립운동가로 의열단원인 김상옥과 만나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에
밀파하였다. 그는 1921년 7월에도 비밀리에 입국하여 독립자금을 모금해간 적이
있었다. 1922년 12월에 다시 밀입국한 김상옥은 활동 중 1월 2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경찰과 격전 끝에 자결하였다.
조소앙은 김상옥 의사의 거룩한 생애를 기려 1929년 1월 상하이에서 <열사
김상옥전>을 펴냈다.
<열사 김상옥전>은 서문과 1장, 소년시대. 2장, 철공장시대. 3장, 마모자시대. 4장,
혁신단시대. 5장, 미국의원단 도한시 암살단사건. 6장, 기적상해시대. 7장, 도한지포부.
8장, 한경혈전. 9장, 김상옥지(之) 정신불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임시정부는 침체된 가운데 지도부의 교체가 잇따랐다. 이승만이 탄핵된 이후 박은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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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 취임하면서내각제 개헌을 단행하여 국무령 체제로 변경하고, 그가 노령으로
서거하면서 서간도 무장독립전쟁의 지도자 이상룡이 초대 국무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내각 구성에 실패하고 1926년 2월에 사임하였다. 뒤이어 양기탁이
선출되었으나 그도 역시 같은 이유로 자진사퇴하였다. 1926년 7월 홍진이 국무령에
취임하면서 일단 혼란의 국면이 수습되었다.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면서 임시정부 안팎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다.
좌우세력을 가릴 것 없이 독립운동계의 모든 세력과 집단을 통합하여 유일한 대규모의
정당조직이나 대당제를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운동이었다.
이것은 좌우세력의 협동전선운동과 정당조직운동이 그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 운동이 촉발된 계기는 두 가지 면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는 3ㆍ1운동 이후 국내에서
등장했던 자치론에 반박을 가한 비타협주의요. 또 하나는 1924년 중국의 1차
공공합작의 영향 아래 전개된 민족협동전선론이었다. 특히 국민대표회의가
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민주적회의였음에도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또 다시
독립운동계가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되자, 안창호를 중심으로 이를 극복하려는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주석 7)
조소앙은 노백린 내각에 이어 이동녕 내각에서도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1924년
초에는 외무총장의 자격으로 중국정부 당국자들과 회담하고, 한ㆍ중 양국의 제휴와
중국군벌 중심의 불리함을 설득하고, 5월에는 중국측 인사들과 <상해주간>은 창간하여
양국의 우의와, 공동으로 일제침략세력에 대응할 것을 촉구하는 논설을 실었다.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기에 앞서 조소앙은 1926년 8월에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피선되었다. 그의 나이 어느덧 40세, 이제 망명정부의 국무위원에 선임되어 임시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국무위원이 되면서 외무총장직은 사임하였다.
조소앙은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면서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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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ㆍ안창호ㆍ홍진ㆍ이시영ㆍ김구ㆍ조완구ㆍ김두봉 등과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조직하고 상임위원에 선임되었다. 민족진영의 대동단결만이 항일독립전쟁을
효율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였다. 이 해 1월에는 ‘촉성회’의 대표로 홍진을
만주에 파견하여 한국독립당 조직에 있어 삼균주의 원칙에 입각한 당령ㆍ정책을
채택도록 하였다.
그동안 조소앙의 가정사에는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장남, 1913년 2남, 1917년
3남, 1920년 장녀, 1924년 차녀가 태어났다. 1927년 장남이 상하이에서 사망하고, 이
해에 동생 조용주가 국내에서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일경에 구속되었으며, 둘째동생
조시원은 재중국한인청년동맹본부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형제들이 독립운동에 나선
것이다. 이 해에 동생 조용한이 국내에서 70노령의 부모를 모시고 선편으로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모처럼 가족이 모여 살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이
따랐다. 조용주는 1년여 만에 석방되었다.
주석
6> 조동걸, 앞의 책, 37쪽.
7> 김희곤, 앞의 책, 72~73쪽.
[17회] 한국독립당 ‘당의’와 ‘당강’ 기초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6장] 한국독립당 창당 참여, 각종 저술 2014/06/06 08:00
김삼웅
조소앙은 1929년(43세) 1월 민족유일당운동의 좌절을 딛고
이동녕ㆍ안창호ㆍ이시영ㆍ김구ㆍ조성환ㆍ조완구ㆍ엄대위ㆍ김두봉 등과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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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순수한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당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주도적으로 참여한 한국독립당에서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온
삼민주의에 입각한 당의(黨義)와 당강(黨鋼) 등을 기초하였다. 조소앙이 자신의
신념체계를 삼균주의라는 용어로 쓰게 된 것은 <자전>에 따르면 1926년
한국유일당촉성회를 조직하면서였다고 한다. 이 때에 <삼균제도>라는 글을
기초하였다.
삼균주의는 한국독립당과 그 후신이라 할 한국국민당 그리고 좌우세력을 망라한
민족혁명당을 비롯하여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채택한 공통적인 이념ㆍ정강이 되었다.
‘삼균주의’의 태반이라 할 <삼균제도>의 원고는 현재 나타나지 않고 있다.
조소앙은 삼균주의를 체게적으로 확립한 뒤에도 그는 자신의 삼균주의 사상을 설명할
때 ‘삼균주의’라는 용어보다도 ‘삼균제도’라는 용어를 보다 많이 사용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삼균제도’라는 개념은 구체적 정책의 시행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이념을 원칙이나 방향에 대한 천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마련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 점에서 <삼균제도>의 저술은 독립운동 정당의
지도이념으로서의 실천 전략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삼균주의 체계와 작업이 특정세력을 대변하는 세력의
지도이념으로 구상된 것이 아니라 이념과 정파를 통합한 민족유일당의 지도이념으로
구상되었다는 점이다. 조소앙은 초지일관 이 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진영에서 문제시되었던 이념적 대립을 극복하고 좌익과 우익의 연합을
가능케할 수 있는 지도이념으로서 자기확립을 도모했음을 말해준다. (주석 1)
조소앙의 삼균주의 또는 삼균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한국독립당의 ‘당의’와
‘당강’을 살펴보자.
당의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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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5천년자주독립하여 오던 국가를 이족 일본에게 빼앗기고 지금 정치의 유린과
경제의 파멸과 문화의 말살 아래서 사멸에 직면하여 민족적으로 자존을 득하기
불능하고 세계적으로 공영을 도하기 미유(未由)한 지라.
이에 본당은 혁명적 수단으로서 원수일본의 모든 침략세력을 박멸하여 국토와 주권을
완전 광복하고, 정치ㆍ경제ㆍ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건설하여서 내로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하며 외로는 족여족(族與族) 국여국(國與國)의 평등을
실현하고 나아가 세계일가의 진로를 향함. (주석 2)
당강
1. 대중에 대하여 혁명의식을 환기하고 민족적 혁명역량을 총집중할 것.
2. 엄밀한 조직 하에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
3. 세계 피압박민족의 혁명단체와 연락을 취할 것.
4. 보선제(보통선거제)를 실시하고 국민의 참정권을 평등하게 하는 기본권리를 보장할
것.
5.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하여 국민의 생활권을 평등하게 할 것.
6.생활상 기본지식과 필요 기능을 보급함에 충분한 의무교육을 공비(公費)로서
실시하고 국민의 수학권을 평등하게 할 것.
7. 민족자결과 국제평등을 실현할 것.
8. 세계일가의 조성에 노력할 것. (주석 3)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를 지지ㆍ강화하기 위해 조직된 정당이다. 따라서 삼민주의는
자연스럽게 한국독립당의 지도이념이 되었다. 뒷날 조소앙은 <대한민국건국강령>에서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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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이술회하였다.
임시정부는 13년(1931년) 4월 대외선언을 발표하고 삼균제도의 건국 원칙을
천명하였으니 이른바 “보통선거제도를 실시하여 정권을 균하고 국유제도를 채용하여
이권을 균하고 공비교육으로서 학권을 균하며 국내외에 대하여 민족자결의 권리를
보장하여서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와의 불평등을 혁제할지니, 이로서 국내에
실현하면 특권계급이 곧 소망하고, 소수민족의 침릉을 면하고,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권리를 고루히 하여 헌지(軒輊)가 없게 하고 동민족이 이족에 대하여 또한 이러하게
한다.” 하였다. 이는 삼균제도의 제1차 선언이니 이 제도를 발양확대할 것임. (주석 4)
주석
1> 김기승, 앞의 책, 216쪽.,
2> <소앙선생문집>상, 337쪽, 삼균학회, 1979.
3> 앞의 책 337쪽.
4> <소앙선생문집>상, 149쪽.
[18회] 항주 피난지에서 저술활동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6장] 한국독립당 창당 참여, 각종 저술 2014/06/07 08:00
김삼웅
조소앙이 민족주의계열 독립운동지도자들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할 즈음 국내외의
정세는 많은 변화가 일고 있었다. 열강의 임시정부 외면과 국내의 연결고리인 연통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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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국이 마비되면서,그리고 거듭되는 내분으로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프랑스 조계에 있는 사무실 임대료 미화 36달러도 내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그나마 1926년 12월 14일 김구가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면서 오랜 침체에 빠졌던
임시정부가 활력을 되찾게 되고, 같은 달 28일에는 의열단원 나석주가 서울에서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제 경찰과 교전 끝에 자결함으로써
의열투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1927년 1월 19일 서울에서 민족통일전선운동의 단체로
언론계ㆍ기독교ㆍ천도교ㆍ불교ㆍ사회주의계가 연합하여 산간회를 창립하였다. 일부
우파계열의 자치론과 민족개량주의에 반대하면서 조직된 신간회는 국치 이후 국내에서
결성된 최대규모(회원 4만여 명)의 단체였다.
1928년 1월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ML당 사건)으로 김준연 등 34명이 구속되고, 동년
5월 14일 조명하가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인 구미노니야 기니히코 일본 육군대장을
독검으로 공격하였다. 1929년 1월 22일 원산노동연합회가 총독부의 노동운동 탄압에
항거하여 ‘원산총파업’을 시작하고, 3월에는 만주에서 정의부ㆍ참의부ㆍ신민부가
통합회의를 열고 자치기관으로 국민부를 조직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였다. 3ㆍ1혁명 이래 최대규모로 확산된
학생운동은 민중대회로 이어지고, 일제 경찰이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를
계획하던 신간회간부 44명과 자매단체 근우회 간부 47명을 검거하는 등 혹심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외국에서는 1927년 4월 중국 장개석이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정부를
수립하고, 4월에는 모택동이 정강산에 근거지를 마련함으로써 중국의 정세는 장개석과
모택동세력으로 양분되었다. 1928년 4월 소련에서 ‘사유지법’이 제정되고, 1929년
64.
64
10월 세계대공황이시작되었다. 장개석과 모택동의 대립이 중국의 운명을 가름하는
중대한 계기였다면, 유럽발 세계공황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서 나치즘과 파시즘이
대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1년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면서 일제의 조작에 놀아난 중국 인민들이 한국인과
한국독립운동 단체들을 적대시하였다. 일제는 자국 국민의 사상자가 없었는데도 이
사건을 만주침략의 구실로 삼기 위해 대대적으로 왜곡선전하면서 한ㆍ중간의 이간책을
폈다.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년 1월 일본군이 상하이 등을 점령한데
이어 3월에는 중국 침략의 교두보로 만주에 ‘만주괴뢰국’을 세웠다. 1932년 1월 8일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의 일왕 암살미수 사건과, 4월 29일 역시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이 상하이 흥거우공원에서 중국주둔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을 폭사시킨 의거가 있었다.
만보산사건 등으로 임시정부와 한국독립가들을 홀대하던 중국정부와 중국인민들은
이봉창 ㆍ윤봉길 두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장개석 충통은
중국인민 5억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하면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단체들을 지원하였다.
조소앙은 이봉창 의거가 일어나자 성명과 일제죄악상의 성토문을 발표했다. 중국 각
신문에 내용이 보도되면서 수 차례나 일경에 체포될 위기에 놓였다. 이같은 위기에서도
3월에 김구ㆍ김철 등과 중국측 저명인사들과 ‘한ㆍ중항일동맹’을 조직하여 의열투쟁을
더욱 과감하게 전개하기로 약조하였다.
윤봉길의거 후 일제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검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전병력을
동원했다. 상하이에 거주하던 임정요인들은 대부분 피신에 성공했지만 안창호는
붙들려 국내로 끌려왔다. 조소앙은 신변이 극도로 위험해지자 김구와 항주로
65.
65
피신하였다. 이피신 기간에 <유방집(遺芳集)>과 <국사유소서(國師遺疏序)>등을
집필하고, 그동안 써온 글을 모아 <소앙집> 상ㆍ중 편을 출간하고, 10월에는 <한국문원(
韓國文苑)>을 간행하였다.
[19회] ‘한국독립운동의 근황’ 저술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6장] 한국독립당 창당 참여, 각종 저술 2014/06/08 08:00
김삼웅
조소앙의 각종 저술 중에 일반에 비교적 덜 알려진 <한국독립운동의 근황>은
한국독립당의 유래로부터 조직ㆍ군사력ㆍ활동ㆍ주의ㆍ정강과 정책 등을 밝히는
소중한 문헌이다. 1931년 1월 즉 만주사변 전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소개한
글로서 <소앙문집>에 수록되었다. 원문은 한문으로 강만길 교수가 자료집 <조소앙>을
편역할 때에 대학생불교연합회 사무총장(당시) 여익구 씨가 번역한 것을 강 교수가 다소
손질하여 실었다.
이를 통해 한국독립당의 실체와, 조소앙의 삼민주의 이념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겠다. 주요 내용을 발췌한다.
1. 조직
한국독립당은 일종의 비밀결사이다. 비록 그러하나 그 수량과 능력은 일정한 정도에
달하여 반드시 공개하게 되리라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조직제도는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의 제도를 절충하여 영수의 지위를 설정하지 않고 능히 중앙집권의 실재를
행한다. 그러므로 중앙간부는 실제적 영수가 되며 능히 당원을 통제하되 전횡의 폐단이
없다.
질적인 면에서 볼 때 독립운동계의 정통적인 인물과 분자를 총망라했으며
농ㆍ공ㆍ상ㆍ학계의 노소남녀가 함께 가담하여 비밀리에 각지에서 그 부분적 공략을
66.
66
진행시킴으로써 주요한이득을 거두게 한다. 이것이 한국독립당의 특색이자 장점이다.
2. 군사력
넓고 넓은 천지 간에 삼한의 장정들은 무기를 쓸 땅을 잃고 만주에서 독립군이라고 하여
싸우고 있을 뿐이다. 짐승같고 승냥이같은 적도들은 우리 집을 손상시키고 우리의
자손에까지 해를 입혔으며 중국을 놀라고 노하게 하였다.
더욱 자신의 직분을 넘어서 남의 일까지 대리하며 나아가 나라를 방위하려는 인재들을
끊어놓으니 우방의 관민이 여기에서 적극적으로 선후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한국의
독립군은 장차 북으로 러시아 국경까지 도망가 만주에서마져 자취가 끊어질는지도
모른다.
3. 활동
상해 한인 독립당의 각종 단체와 기관
(1) 한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한민단(상해에 한함)
(2) 한국 ㅁㅁㅁ 본부
(3) 애국부인회(이하는 전국적 성격이 아닌 상해에 한한 조직체임)
(4) 여자청년동맹
(5) 청년단
(6) 소년동맹
(7) 화랑사(소년단체)
67.
67
(8) 인성학교(소학교)
(9) 척후대
(10) 병인의용대(1926년 결성)
(11) 노병회
(12) 흥사단(전국적 규모)
(13) 상업회의소
(14) 직업동맹회
4. 주의ㆍ정강과 정책
국가를 이룩했거나 아니거나를 막론하고 무릇 정치단체는 ‘주의’로서 생명을 삼으며
정강으로 골간을 삼고 정책으로 혈맥을 삼는다. 그중 ‘주의’가 가장 중요하다. 일정한
주의가 없는 것은 정당으로서 가치가 없다.
사람들은 흔히 한국독립당은 ‘배일독립’으로서 주의를 삼는다고 말한다. 망국 전후의
일반 거사는 이런 종지를 품는 외에 실로 파괴 건설의 구체적 방략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과거의 일이고 지금은 이렇게 막연한 민족감정으로서 주의를 삼는 자는
없다.
그러면 독립당이 내거는 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균등한 생활을 주의로 삼는다.” 어떻게 하여야 사람과 사람이 균등할 수 있는가?
정치 균등화, 경제 균등화, 교육 균등화가 이것이다. 보통선거제를 실시하여 정권을
안정시키고 국유제를 실행하여 경제를 안정시키고 국비 의무교육제를 실행하여 교육을
안정시킨다. 이것으로 국내의 균등생활을 실행한다.
민족과 민족의 균등은 어떻게 하여야 이룰 수 있는가? ‘민족자결’이다. 각개의 민족이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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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하게 조화를이루고 소수민족과 약소민족으로 하여금 피압박ㆍ피통치의 자위에
떠러지지 않게 한다면 민족 간의 균등을 이룰 수 있는 일이다. 어떻게 하여야 국가와
국가의 균등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식민정책과 자본제국주의를 파괴하고, 약한 것을
정병하고 매(昧)한 것을 공략하여 어지러운 것을 취하고 망한 것을 모멸하는 전쟁
행위를 금지시켜서 일체의 국가가 서로 범하지 않고 서로 침탈하지 않으며
국제생활에서 평등한 지위를 온전케 하여 사해가 일가이며 세계가 일원(一元)인 구경의
목적을 도모해 간다면 국가 간의 균등은 이룰 수 있다.
그러면 건립하는 국가는 어떤 국체에 속하며 어떤 정체를 의지해야 하는가. 그건 민주
입헌공화국이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국가건립은 모름지기 동일한 주의를 지닌
정치단체가 집권하여 입법한 이후에 비로소 국내의 일체 인민과 더불어 그 법규를
승인하고 완성하는 일이다.(…)
독립당의 투쟁방식으로 위에 서술한 것 외에 두 가지 정책이 있는데 그것은 민중적
반일운동과 무력적 파괴운동이다. 이런 두 가지 방법을 동시에 행하는 까닭에 인도의
비폭력적 반항은 우리가 취할 바가 아니며 아일랜드의 실전도 또한 우리가 능히 행할
바가 아니다. 문화운동 및 시위와 더불어 투기적으로 움직이는 일체의 비혁명적 수단도
역시 독립당이 능히 채용할 바가 아니다. (주석 5)
주석
5> 강만길, 앞의 책, 13~18쪽, 발췌.
[20회] '유방집'에서 의열사 81명 기려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6장] 한국독립당 창당 참여, 각종 저술 2014/06/09 08:00
김삼웅
69.
69
조소앙이 항주피난 시기에 지은 책 중에 <유방집>이 있다.
“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오래도록 전한다”라는 ‘유방백세’의 뜻을 담아 1905년부터
1932년(집필시기) 까지의 민족수난기에 온몸으로 맞서 투쟁한 민족의열사 81인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1932년 한인애국단원 이봉창ㆍ윤봉길 두 의사의 처절한 투쟁과 거룩한 희생을
지켜보면서 피난지에서 집필한 이 책은 1932년 5월 15일 중국 난징의 대동학회에서
간행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망명지에서 짧은 기간에 81명 의열사들의 행적을 어떻게
그토록 소상하게 자료를 찾아 기록할 수 있었는가 함이다.
서문인 <유방집 서>에서, 마한의 장수 주근이 백제군과 대항하다가 자결한 일을 한인의
고대독립전쟁의 하나의 유범이 되었다고 쓰면서, 신라의 박제상이 왜왕에게 굽히지
않고 요살당한 일을 상기하면서 이는 고대로부터 한민족이 의기를 잃지 않았음을
제시하였다. 또한 백제 계백 장군이 나당연합군을 맞아 처자를 미리 죽이고 싸움터에
나가 결사항전의 자세로 전투에 임한 일 등은 망사보국한 유풍이란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신라 김대문의 <화랑세기>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피력한다. 이 책(화랑세기)이
비록 전하고 있지 않지만, 이 책이 저술됨으로써 화랑정신이 민족사에 전해질 수
있었다고 기록하면서, 이런 뜻을 이어 <유방집>을 지음으로써 민족투혼이
우리민족에게 영원토록 계승되기를 바란다는 의도임을 밝혔다.
책은 크게 6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중국인 황제민ㆍ강경권ㆍ민천배 등의
서문과 조소앙 자신의 <유방집 서>, 둘째는 중국인들의 휘호. 셋째는 조선족의 시조인
단군의 사진, 의열사들의 사진, 훈민정음판의 사진 등 50여 점의 사진을 수룩한 <조편>,
넷째는 1905년부터 1932년 사이에 전개된 <암살당요목표>, 여섯째는 1905년부터
1932년 사이의 의열사 등 81인의 <유방집>을 실었다. 이 부분이 책의 핵심이다.
의열사 부분은 다시 9개 부분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70.
70
열전 제1:
민영환ㆍ조병세ㆍ홍만식ㆍ이상철ㆍ김봉학ㆍ송병선ㆍ이건석ㆍ이한웅ㆍ방종례
열전 제2 :
최익현ㆍ이인영ㆍ이은찬ㆍ이강년ㆍ유인석ㆍ서상렬ㆍ허위ㆍ이광렬ㆍ이범윤
열전 제3 : 이상설ㆍ이 준
열전 제4 :
박승환ㆍ지홍윤ㆍ손재규ㆍ연기우ㆍ강기동ㆍ노희태ㆍ윤동섭ㆍ민긍호ㆍ박여성ㆍ전해
산ㆍ심남일ㆍ기삼연ㆍ황중옥ㆍ심돌석ㆍ김수민ㆍ고원식ㆍ김석하ㆍ이진룡.
열전 제5 : 채응언ㆍ최재형ㆍ홍범도ㆍ백상규ㆍ김좌진ㆍ이남규
열전 제6 : 기산도ㆍ장인환ㆍ전명운ㆍ안중근ㆍ이재명ㆍ안명근
열전 제7 : 이범진ㆍ김석진ㆍ홍범직ㆍ김도원ㆍ황현ㆍ박성진ㆍ나인영
열전 제8 :
강우규ㆍ박치의ㆍ임일룡ㆍ양근환ㆍ박열ㆍ김익상ㆍ김상옥ㆍ문창숙ㆍ김지섭ㆍ김시현
ㆍ이의준ㆍ김성범ㆍ송학선ㆍ이덕삼ㆍ이수홍ㆍ유택수ㆍ장진홍ㆍ나석주ㆍ조변운ㆍ조
명하ㆍ최양옥
열전 제9 : 이봉창ㆍ윤봉길ㆍ이회영 (주석 6)
조소앙의 <유방집>은 1992년 대동학회가 아세아문화사에서 재간하였다. <해제>를 쓴
조항래 교수가 밝혔듯이 열전 중에 윤봉길전의 일부와 이회영전 전문이 낙장되었다.
또한 한자 원문을 그대로 실어서 현대인들이 접하기 쉽지 않다.
71.
71
주석
6>조소앙, <유방집>, 조항래, <해제>, 5~6쪽, 서울 아세아문화사, 1992.
[21회] ‘당의’에 내포된 삼균사상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6장] 한국독립당 창당 참여, 각종 저술 2014/06/10 08:00
김삼웅
한국독립당의 ‘당의’를 기초한 조소앙은 한국독립당 당원에게 배부하기 위해
<한국독립당 당의 연구방법>이라는 유인물을 제작하였다. 1932~1933년에 집필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 1946년 4월 1일 <한국독립당 당의 해석>을 재판 발행하였다.
집필 시기는 1940년 경으로 추정된다.
조소앙이 두 차례나 ‘당의 연구방법’과 ‘당의 해석’을 발표할만큼 ‘당의’에 깊은 철학적
명제를 부여하고 애착심을 보였다. 실제로 한국독립당의 ‘당의’에 집약된 내용은 민족의
역사로부터 망국, 독립전쟁, 해방 후 나라건설의 방략이 담긴 문건이다. <한국독립당
당의 연구방법>중 ‘분절(分節)’을 소개한다.
당의 자수(黨義字數)가 199자인데 9절로 나누면,
(1) 우리는 5천 년 독립 자주하여 오던 국가를 이족 일본에게 빼앗기고,
(2) 지금 정치의 유린과 경제의 파멸과 문화의 말살 아래서 사멸에 직면하여,
(3) 민족적으로 자존을 득하기 불능하고 세계적으로 공영을 도하기 미유한지라,
(4) 이에 본 당은 혁명적 수단으로써,
(5) 원수 일본의 모든 침탈세력을 박멸하여,
72.
72
(6) 국토와주권을 완전 광복하고,
(7) 정치ㆍ경제ㆍ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건설하여서,
(8) 안으로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하며 밖으로는 족여족 국여국의 평등을
실현하고,
(9) 나아가 세계일가의 진로를 향함.
이상 중의 (1)은 망국, (2)는 멸족, (3)은 망국ㆍ멸족한 총과(總果)를 열거하여 당원의
진실한 혁명적 발심과 동기를 촉진한 것이며, (4)는 입장, (5)는 도왜(倒倭), (6)은 복국(復
國)하는 진행수단 및 방법을 적시하여 당원의 일상 실행 정서(程序)를 표시하는 것이며,
최하단으로 (7)은 건국, (8)은 치국, (9)는 구세(求世)의 최후결과와 목적을 예시한
것이다. (주석 7)
조소앙은 <한국독립당 당의 해석>에서 ‘당의 원문의 중심사상’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삼균주의사상의 골격임을 보이고 있다.
당의의 중심사상은 평등이다. 우리 선철은 말하였으되 “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하여
흥방보태평(興邦保泰平)함이 홍익인간하고 이화세계하는 최고공리”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머리와 꼬리 상ㆍ하라고도
할 수 있다 의
위치를 고르게 함으로써 나라를
흥왕케 하며 태평을 보전함이 널리 인간을 유익케 하여 세계를 진리로써 화하는 가장
높은 공리라 함이다.
중국의 철인 한유(韓愈)는 말하되 “무릇 물건이 그 고른 것을 얻지 못하면 운다”고
ㅡ 凡物不得其平則鳴 하였고,
공자는 말하되 “적은 것을 걱정할 것 없이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 不
患寡而患不均 하였다.
물(物)이 평(平)함을 부득(不得)하면 반드시
명(鳴)하며 명하여도 평할 길이 없으면 필경 난에 이르게 되고 수미의 위가 평균하면
인간을 홍익할뿐 아니라 세계까지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과(
寡)를 불환(不患)하고 불균(不均)을 환할지니 이는 동서고금에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인
73.
73
것이다. (주석8)
조소앙의 평등사상은 시기와 장소를 초월하여 오늘 한국사회에서도 적합한 정책이
되고 있다. 2조 원이 넘는 자산가가 있는가 하면 월 88만 원도 못 버는 시민이 다수인
사회, 그래서 ‘99 대 1’의 불균등한 사회구조는 나날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조소앙의
말을 더 들어보자.
개인과 개인 사이에 생활의 평균을 얻지 못하므로 가정이 불화하며 사회에 혁명이
일어나며 국가에 내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 사이에 평등한 국제적 지위를
보전치 못하게 되면 국제적 대혈전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요, 민족과 민족 사이에
이익이 각각 균형발전을 하기 불능하게 되면 필경 민족적 대전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회고하건대 영국 명예혁명, 프랑스 대혁명, 미국 독립전쟁, 소련의 사회주의혁명,
중국의 신해혁명, 그리고 우리 한국의 홍경래혁명, 동학당혁명, 갑신정치혁명 등은 다
본국 인민 사이에 존재한 불평으로 인하여 폭발한 것이다. 이밖에 나라와 나라 사이의
지위, 즉 국제적 지위의 불평으로 인하여 난이 일어난 예가 또한 많으니 이를테면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등이 다 그것이다. (주석 9)
조소앙이 망국기가 아닌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으면 세계적인 대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의 포부와 식견, 철학과 비전, 경륜과 사상은 오롯이 삼균주의사상으로
집약되었다. 대단히 진보적이면서 개혁주의적인 정치철학은 다소 이상주의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 한민족이 처한 처지와, 추구하는 독립운동의 방법론이고 해방 후
수립될 새공화국의 방략으로서 충분한 비전이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평화의
방안이기도 하다. 그는 국제평화의 방략을 삼균주의사상에서 제시하였다. 평화사상
관련 부분이다.
전쟁은 인류의 재앙이요, 평화는 인류의 행복이다. 그런데 전쟁은 균형을 상실하므로
폭발되는 것이요. 평화는 균등을 유지함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장하는 정치ㆍ경제ㆍ교육의 삼균원칙을 실현함에서만 인여인ㆍ족여족ㆍ국여국
74.
74
내지 세계전 인류의 행복에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사회의 균등을 실현함으로써 행복이 올 것이요. 균등을 실현하지
못함으로써 재앙이 올 것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우리는 우리 민족의 행복 내지 전 인류의 행복을 실현함에 유일하고 또
절대적 기초가 되는 ‘균등’을 중심사상으로 한 것이다. (주석 10)
주석
7> 강만길, 앞의 책, 185쪽.
8> 앞의 책, 192쪽.
9> 앞의 책, 192~193쪽.
10> 앞의 책, 194쪽.
[22회] 기관지 ‘진광’ 발행 주도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7장] 국무위원으로 임정 진로 제시 2014/06/11 08:00
김삼웅
조소앙은 1933년(47세) 3월 임시정부가 개편되면서 다시 국무위원으로 선임되고,
이어서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김구 내각의 중추가 된 것이다. 그는 임시정부의 업무
틈틈이 <한국주자사고(韓國鑄字史考)>와 <신라국 원효대사전>을 저술하고, 그동안
준비해 온 저서 <유방집>을 간행하였다.
조소앙은 독립운동가이면서 사상가이고 저술가였다. 흔히 사상가들이 실천에는 약한
편이지만, 그는 지행일치의 행동하는 지식인의 전범이었다. 운명을 예측할 수 없는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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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고단한생활 속에서도 학구열을 멈추지 않았다. 진보적이고 올곧은
지식인의 슬픈 숙명이라 할 것이다.
<한국주자사고>는 한국의 ‘주자’쇠붙이를
녹여 부어 만드는 활자를
연대순으로
소개하는 글이다.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니면 손대기가 쉽지 않는 내용이다. 순한자로 된 논설은 서문에
이어 (1) 계미자(癸未字), (2) 경자자(庚子字), (3) 갑인자(甲寅字), (4) 임신자(壬申子), (5)
을해자(乙亥字), 을유자(乙酉字), (8) 신묘자(辛卯字), (9) 계축자(癸丑字), (10)기묘자(己
卯字), (11) 훈련도감자, (12) 교서관활자, (13) 초주한구자(初鑄韓構字), (14) 임진자(壬
辰字), (15) 정유자(丁酉字), (16) 재주한구자(再鑄韓構字), (17) 생생자(生生字), (18)
정리자(整理字), (19) 삼주한구자(三鑄韓構字), (20) 운현궁활자, (21) 김두봉활자의
순으로 정리하였다. (주석 1)
1933년 항주 시기에 쓴 <신라국 원효대사전>역시 순한문의 전기문이다. 두 편이 다
관련 자료에 없이는 집필이 쉽지 않은 글인데, 조소앙은 망명지에서 이런 글을 썼다.
조소앙은 개인적인 연구 활동에만 머물지 않았다. 1934년 1월에는 항주에서
한국독립당 기관지로 <진광(震光)>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책임을 맡았다. 격월간으로
발행한 <진광>은 국문본과 중국어본을 4. 6배판 활판본으로 동시에 간행하였다.
중국어본을 별도로 발행한 것은 한국독립운동의 실상과 일제의 야만적인 행위를
중국식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제6호까지 나온 <진광>의 국문본은 1934년 1월 25일자로 제11호, 3월 25일자로
제2,3합간호, 5월 25일자로 제4호, 9월 25일자로 제6호가 각각 발간되었다.
중국어본은 같은 해 1월 제1호, 1935년 11월 4,5호만 현재 남아 있다. 원래는 월간으로
준비했으나 재정사정으로 격월간으로 펴내고, 그나마 국문본의 경우 제6호가 종간호가
76.
76
될 수밖에없었다. 중국어본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발행부수는 국문본이 약 500부, 중국어본이 약 1,000부였다. 지면의 쪽수는 일정하지
않지만 보통 20~50쪽 안팎이었다. 매호 권당 70원(元)하는 발간 경비는 중국 국민당
저장성 당부와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의 협찬으로 충당하였다. 조소앙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발간 취지는 세 가지였다.
첫째, 한국독립운동의 진상을 선전하고 우방과의 연락을 촉진하며, 상호협력을
도모하여 공동으로 구적(仇敵)을 제거함에 기여할 것.
둘째, 반일혁명세력을 획득하고 통일ㆍ연결시키기 위한 주장, 이론, 소식을
게재함으로써 독립운동을 발전시킬 것.
셋째, 각국 혁명운동에 관한 소식과 정보를 수집 게재함으로써 한국민족혁명운동의
이론과 전략을 더욱 발전시킬 것 등이다.
각 호에는 이같은 취지에 부합하는 여러 종류의 기사와 논설들이 실렸다. 그중에서도
단체연합(1932년에 결성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위상 및 기능과 통일대당
결성문제에 관한 논설들이 주목된다.(…)
민족문제에 관한 과학적ㆍ이론적 인식을 지향하는 연재논설(<각국 혁명운동사요>
등)도 실렸다. 또한 한국독립운동의 과거 이력과 잠재적 역량을 환기시켜 주는 자료성
기사와 전기들, 당시의 국내외 정세와 주요 인사들의 동정을 다룬 <중요소식>란도
유익한 정보들을 담고 있다. (주석 2)
주석
1> <소앙선생문집> 上, 351~359쪽.
77.
77
2> 김영범,<진광>, <한국독립운동사사전> 6, 749쪽, 독립기념관.
[23회] ‘진광’에 독립운동 관련 논설 집필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7장] 국무위원으로 임정 진로 제시 2014/06/12 08:00
김삼웅
조소앙이 이 시기 <진광>에 쓴 대표적인 논설은 <혁명단체의 연합문제>, <대당(大黨)
조직문제>, <해외독립운동의 특수임무>등을 들 수 있다. 차례로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혁명단체의 연합문제
우리 운동의 목표인 타도 일본은 국제 제국주의의 일단세력의 타도를 의미하는 것인
만큼 우리 운동과 국제적 모든 반일세력과의 관계는 본질상으로 매우 밀절(密切)한
것이다. 그러므로 국내에 비하여 다소 간의 운동 자유를 가진 해외운동은 일본과 근본적
혹은 일시적인 대립관계를 가진 국제적 반일세력과 긴밀한 연결관계를 결성하여
해외운동의 특수임무를 유력하게 진전하는 동시에 그것이 전체운동과의 국제관계로
전변되도록 하는 정치적 매개공작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 운동의 역량을 확충하는 유일한 방침이니 우리는 항상 최저한도의
당면공작을 통하여 최소한도의 자동적 방침으로써 국제적 반일세력과의 연결 및 그
확대를 촉진하여야 할 것이다.
해외운동의 특수임무를 실천하기 위한 이상 3대 문제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연대관계가 있는 것이므로 그 문제를 개별적ㆍ분리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해외운동의 목전 정형(情形)은 이상문제의 해결을 위한 현실적, 정치적 배경이
현존한 자단체 혹은 단체연합의 조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배경하에서 시작하든지
각항 공작 그것을 해외 전체운동의 완정적(完整的) 발전을 목적한 일개의 과정적
공작으로 인식하여 그것의 총해결을 위한 내면적 연락만 성실하면 그만일 것이다. (주석
78.
78
3)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선언
조소앙은 이 논설의 주제와 관련하여 1. 대당은 왜 조직되지 않았는가를 분석하여 ①
‘일정하고 공등한 주의정책이 없었던 것’ ② ‘인물적 중심세력이 없었던 것’ ③
‘조직동기와 목적이 불순하였던 것’을 들었다. 그리고 2, 어떻게 하여야 대당이 조직될
것인가는 ① ‘먼저 각각 자단체에 충실하면서’, ② ‘연합운동에 노력하라’, 3. 개인
단위로의 연결을 힘쓰라와 4, 결론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논설의 서두 부분이다.
회고하면 과거 독립운동 역사에 있어서 대당 조직운동은 다른 모든 운동과 같이 뚜렷한
일장(一章)의 사실(史實)이었다. 만주에서의 각 단체 통일을 위한 종종의 집회,
북경에서의 군사통일회, 상해에서의 국민대표회, 각지에서의 대독립당촉성회, 등등의
활동은 다수의 지도분자의 정력과 장구한 시일과 다대한 물력을 소모한 당시의 대활동,
대공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단체통일을 목적한 대당 조직운동은 (그 전후 운동의 개념이 일치한 것은
아니다. 소단체를 해체하고 대단체를 조직하라는 목적은 동일하였음) 한번도 성공되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단체 통일을 위한 매회의 집회와 매회의 대운동이 있는 후에는 그
전보다 오히려 더 격심한 파당적 대립관계가 혹은 공공연한 투쟁의 형식으로서, 혹은
비밀한 음모적 작용으로 출생되지 않았던가.
우리는 금부의 대당조직을 촉진함에 있어서 과거의 그 쓰라린 실패의 원인을 명백히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주석 4)
해외 독립운동의 특수임무
이 논설문은 서문에 이어 1. ‘조직문제에 대하여’. 2, ‘기술문제에 대하여’. 3, ‘국제적
79.
79
반일세력과의 연결문제’로나뉘었다. 여기서는 서두 부문을 소개한다.
해외운동의 특수임무란 ‘해외’라는 지대의 특수성에 기인한 여러 유형의 임무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적의 직립 압박 하에 있는 국내에서는 진행하기 불가능한
유효한 혁명공작의 실천이 그것이다. 금일 우리의 해외운동은 종종 다단한 인과관계
하에서 실로 일반 혁명군중의 간절한 기대에 응할만한 혁명역량을 가지지 못하였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체운동의 중대한 요구인 전위대적, 결사대적 운동의
특수임무는 우리의 해외운동이 담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실로 해외운동의
역사적 권리와 의무인 동시에 목적 정세에 있어서 더욱 간절히 부여되는 임무인 것이다.
국내 관계에 있어서 비록 국내운동을 구체적으로 지도하지는 못한다하더라도 현
단계의 국내운동을 급격히 촉진시킬 만한 강대한 영향은 던져 주어야 할 것이며,
국제관계에 있어서 비록 국제적 반일세력을 당장에 촉진시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과의 긴밀한 연밀은 성취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니, 이는 해외운동의 주관적 희망에
의하여 실현된 것이 아니요. 해외운동을 특수임무의 용감한 실천에 의하여 진전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해외운동의 특수임무를 개별적으로 말하면 강력한 군사운동, 희생적 직접운동,
정찰공작, 선전공작, 내외 반일전선의 확대공작, 이상 모든 부분운동의 전체적ㆍ통제적
발전을 위한 조직공작 등등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 모든 공작의 진행을 위하여 우리의 현하실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행(前行)
공작은 역량 단결 및 그 통제적 진행을 위한 조직문제, 모든 공작의 효과적 실천을 위한
기술문제, 운동역량의 확대적 발전을 위한 국제적 반일세력과 연결문제 등이니 이제 이
3대문제를 급속히 해결하여야 할 필요를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주석 5)
주석
3> <진광>, 1932년 9월 20일치(논설의 뒷부분).
80.
80
4> <진광>,1934년 5월 28일치.
5> <진광>, 1932년 9월 20일치.
[24회] ‘통일운동의 방략’ 임시정부 채택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7장] 국무위원으로 임정 진로 제시 2014/06/13 08:00
김삼웅
조소앙의 논설 <독립운동의 방략>은 1939년 11월 11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통과되고 11월 12일 임시의정원에서 의결된 정부의 공식 ‘통일운동의방략’이 된
글이다.
논설은 “국무원은 국무회의의 조직원이며 임시정부의 총판원이며, 광복운동진행 중에
국권을 섭지발동, 옹호ㆍ강화하는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은 임시약법이 부여한 직능으로
보아 당연한 것이며, 대한민국은 광복시기에 있어서 반드시 광복운동자
전체인원으로서 그의 구성원, 그의 기간, 그의 제일 방선(防船)의 보루와 초석을 삼을
것이며, 최저한도로 그의 세력범위를 이에 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며, 대한민국의
국무원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6종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제시한 ‘방략’이다.
(1)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는 당과 원과 부의 삼각적 결정체인 주력을 출발점으로 한지라
부단히 노력하여 국내 대중의 의식과 방향을 대한민국의 완성에로 전환하게 할 것.
(2) 광복운동자 전체인원을 대한민국의 기본국민으로 인식하고 그와 더불어
공동노력하는 데서만 대업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조직체로 하여금
체계있고 실행에 유효한 통일을 촉진하도록 할 것.
(3) 광복운동자 전체 인원으로 하여금 지역적으로 또는 당의 당강의 범주에 편입케 하여
단결화ㆍ조직화ㆍ무장화하여 그들로서 대한민국의 전위부대를 삼게 할 것.
81.
81
(4) 대한민국의권위와 기치를 발양광대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조직적으로 통일된 당에
그 뿌리를 박게 하고 임시정부의 활동능력과 전투력은 반드시 조직적으로 훈련받은
영용한 무장독립군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과 군의 전력확대에 전력할
것.
(5) 당과 군의 문무역량을 양대우익으로 가진 대한민국과 임시정부는 비로소
명실상합한 호령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의 호령이 지리적으로 발동될 때에
파쇄천답되었던 식민지는 우리 국토로 광복될 것이며, 인간적으로 파동될 때에 우마
노예로 되어 있는 동포를 승구개편하여 우리 국민으로 광복될 것이며, 국제적으로
발전될 때에 우리의 역사적 주권을 신국가의 소유로 광복소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무 병진하는 전술로서 실지에 입각하여 광복을 완성할 것.
(6) 광복된 국토 위에 민족국가를 건설하여 정치ㆍ경제ㆍ교육ㆍ문화 등등에 완전한
균등제도를 전국 국민에게 보편적으로 균일하게 시행할 것. 이와 같이 임시정부
국무원으로서의 직책은 광복운동에 관한 초보공작, 즉 당의 통일과 장교 및 군대의 훈련
및 편성으로부터 국가건설에 관한 고급적 입무까지 일관성을 가질 것이다. (주석 6)
조소앙은 이 글에서 “우린 3년 계획으로 광복운동의 초보공작을 완성하고자 한다”는
전제 하에 3가지 방략을 제시하였다. 발췌한다.
(1) 1921년 말까지 원동에 있는 광복진선당의 통일을 완성하게 하여 군사상 서북진출의
초보공작을 완료할 것. 광복전선 소속단체는 대한민국의 기초세력이 되어 있고
원동3단체는 수 3년 이래로 통일운동을 위시하여 모든 행동에 공동투쟁하여 왔으므로
자당을 해산하고 신당을 창당함에 하등 지절(支節)이 없을 뿐 아니라 3당의 대립국면을
통일국면으로 전환하게 함은 당ㆍ정ㆍ군ㆍ외(外)ㆍ선(宣)ㆍ재(財) 등 각종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므로 임시정부는 있는 역량을 기울여 금년 이래로 3당 통일의
숙제를 해결하도록 할 것이며 군사상 서북 진출을 필요로 인식함은 중제(重堤)할 여지가
없다.
82.
82
(2) 1922년상반기에 ① 중ㆍ러시아령 및 미ㆍ하와이ㆍ멕시코 각지에 있는 각당 각파에
협동합작을 개시하여 선전ㆍ외교ㆍ군사ㆍ재정 등의 집중 및 조절에 노력할 것. ②
임시정부의 법적 승인을 우방에 제청할 것. ③ 22년도를 제1기로 하여 2백인의 장교를
양성할 것. ④ 3당 통일로 창립된 신당에 당원 2만 인을 모집할 것. ⑤ 기본부대로 만인의
무장군을 편성할 것과 5만인 이상의 유격전을 황하 이북 우수리강, 송화강, 압록강,
두만강 등 연안에 개시할 것. ⑥ 이상 각종 사업진행에 불가결할 선전기구의 창립합동 및
집행에 착수할 것. ⑦ 이상 7종 사업진행에 쓰일 비용으로 장교 2백 인 양성비용 7만 원,
당원 2만 인 모집비 6만 원. 기본 무장대 약 1만 명 편성비 약 3백만 원, 유격대 약 5만
명의 경비 약 5백만 원, 총계 8백 13만 원(元).
(3) 23년도를 제2기로 하여 전년도의 배수 4종 사업을 진행할 것이니 ① 4백 인의 장교를
양성할 것. ② 4만 인의 신당원을 모집할 것. ③ 기본부대를 확대하여 4만 인 이상의
신군을 편성할 것. ④ 전년도의 유격지대에서 10만 인 이상 유격대를 활동케 할 것. ⑤
선전기관을 중ㆍ러시아ㆍ미ㆍ영ㆍ인ㆍ필리핀 등지에 분포하여 인적 물적 호조 및
협력을 요구할 것. ⑥ 이상 각종 소요 비용으로 장교 4백 인 이상 양성비 14만 원, 당원
4만 인 모집비용 12만 원, 기본무장대 4만 인 편성비 1천 2백만 원, 유격대 10만 인의
경비 약 1천만 원과 제1년도에 양성된 장교와 편성된 기본대의 의식비로 1백 33만 6천
원, 총 2천 3백 59만 6천 원.
(4) 24년도를 제3기로 하여 ① 6백 인의 장교를 양성할 것. ② 4만 인의 신당원을 모집할
것. ③ 기본대오의 확대로 4만 인 이상의 신군을 편성할 것. ④ 전년도의 지대 혹은 한국
부근 지대에서 20만 이상의 유력전을 개시할 것. ⑤ 선전은 전년도에 의할 것. ⑥
비용(생략) (주석 7)
조소앙은 대단한 전략가임을 알 수 있다. 외교ㆍ군사ㆍ용병ㆍ전술ㆍ선전 등에서
이처럼 치밀하게 제시한 문건은 독립운동사에서 찾기 어렵다. 그는 임시정부 제31회
의정원의원으로 선임되어 이같은 ‘독립운동의 방략’을 마련하여 국무회의와
83.
83
의정원에서 통과를보았다.
그는 이같은 3년 계획을 실행하고자 국무원 전체와 의정원의원 전체가 일치한 결정적
태도를 가지고 행동을 통하여 호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하면서 11가지의
실천방안도 제시하였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처한 사정은 조소앙의 ‘방략’을
실천하기에는 아직 능력이 갖춰있지 못하였다.
주석
6> 강만길, <조소앙>, 93~94쪽.
7> 앞의 책, 93~96쪽. (발췌)
[25회] ‘한국의 현상과 그 혁명추세’ 집필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7장] 국무위원으로 임정 진로 제시 2014/06/14 08:00
김삼웅
조소앙이 1930년대 초에 발표한 많은 글 가운데 1932년 상하이에서 발간된 <소앙집>에
실린 <한국의 현상과 그 혁명추세>는 당시 혹독한 식민지 조선의 실정을 각종 통계와
증언을 동원하여 파헤친 특수한 보고서이며, 식민통치를 혁파하는 정책적인
대안이기도하다.
한문으로 된 글의 번역서만으로도 60쪽에 이르고, 내용면에서는 조선에서 벌어진
일제의 폭압, 망국조약의 연혁, 광주학생운동의 실상 등을 상세히 기록한 독립운동사의
소중한 자료이다. 항주 피난지에서 어떻게 이토록 많고 상세한 자료를 입수한 것인지
놀랍다. 1930년대 식민통치사를 연구하는 데도 이만한 자료를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글의 구성부터 알아보자.
84.
84
제1장 이민족통치 하의 정치적 유린
1. 체포와 구금을 능사로 삼는 일본정치
2. 혁명사상의 단속망
3. 한인 군경기관의 억압
4. 죄인의 격증과 감옥의 확장
5. 언론ㆍ집회ㆍ결사ㆍ출판의 압박상황
제2장 이민족 통치 하의 교육적 압박
1. 교육계의 모순성
2. 가혹한 입학제한
① 학교수와 학령 아동수
② 재정적 제한
③ 사상 및 신분적 제한과 고시의 가혹함
3. 학생의 반항(파업운동)
4. 졸업생의 진로
5. 학생의 혁명운동과 적도의 압박에 의한 참상
제3장 이민족 통치 하의 경제적 파멸
1. 한국 부력(富力)의 개황
85.
85
① 농업생산
② 수산업
③ 광업생산
④ 공업
⑤ 상업
⑥ 철도
⑦ 목재
⑧ 은행
⑨ 무역
2. 한국의 인구문제
3. 토지 겸병의 위기
4. 지주의 몰락과 농노의 격증
5. 한인의 몰락상황
제4장 한국혁명의 역사적 기초
1. 인민기본권리의 불평등
① 계급제도
② 노예제도
86.
86
2. 인민생활권리의 불평등
3. 학문을 할 권리의 불평등
4. 망국조약의 연혁
제5장 한국혁명운동의 체계
1. 총서
2. 제5차 혁명이래 각 방면의 활동개황
제6장 광주혁명의 진상
1. 광주의 역사적 지위
2. 광주혁명 발생 전의 전국적 상황
3. 광주혁명 폭발의 진상
4. 경성제1차 시위
① 시위ㆍ휴학의 상세한 상황
② 수천 여학생 학교에서 통곡
③ 수만 장의 격문 등사 유포의 내용
④ 결의문 사건
5. 경성 제2차 시위
6. 여자 시위운동의 예비 대표회 (주석 8)
87.
87
한국 혁명의역사적 기초
조소앙의 역사관은 대단히 진보적이었다. 고려시대에 일어난 노예의 난을
‘노예혁명’으로 평가하면서, 노예혁명이 네 차례나 있었다고 정리하였다. “노예의 난을
민족전체의 평등과 동질성을 주장ㆍ실현하려는 혁명운동으로 보았던
때문이다”(한시준).
그는 근대에도 다섯 차례의 혁명운동이 일어났다고 하면서 <한국의 현상과 그
혁명추세>에서 대원군이 집권한 이래 3ㆍ1운동이 일어나기까지 5차례의 혁명이
있었다고 분석하였다. 그리고 각 혁명의 특징ㆍ주체ㆍ방법ㆍ이념ㆍ결과ㆍ실패원인을
설명한다. 3ㆍ1운동을 3ㆍ1혁명이라 명명하는 등 역사관의 진보성을 보여주었다.
여기서는 한시준 교수가 요약 정리한 것을 소개한다.
제1기혁명 : 1863년 이하응의 황족혁명
특징 : 외세에 붙지 않는 것
주체 : 이하응 개인
방법 : 섭정과 권력
결과 : 사색당론타파, 지방ㆍ계급차별의 타파, 서원의 소탕, 세제개혁, 외세에 붙는
사조를 억압
제2기 혁명 : 1884년 김옥균 등 귀족청년의 벌열혁명
성격 : 반청독립운동
주체 : 뜻을 얻지 못한 청년귀족
88.
88
방법 :외세이용
실패 : 청의 간섭, 민중의 후원을 얻지 못함
제3기 혁명 : 1894년 번봉준의 평민혁명
특징 : 홍수전의 혁명(태평천국의 난)과 흡사
발생 : 제2기 혁명 실패 후 10년 동안 민중들의 자각과 경험이 있었던 것
주체 : 동학당
실패 : 수구파 정부의 청국원병
결과 : 청일전쟁 발발, 갑오경장
제4기 혁명 : 1896년 서재필의 민권혁명
특징 : 제2기 혁명의 후계적 조직체로서 활동한 합법적 운동
성과 :정치결사의 조직, 민중운동의 진흥, 민권사상의 독립적 민족의식 고취, 황권의
제한, 이권침탈 저지, 언론집회의 자유확보
실패 : 외세의존
제5기 혁명 : 1919년 손병희 항일독립운동
성격 : 이족을 구축하려는 민족혁명
활동력 : 과거 60년 동안 실패한 혁명적 경험, 일제가 뿌린 증오의 씨앗, 국내외 각종
혁명단체의 역량이 합류
89.
89
실패 :투쟁방식이 화평에 기울고 조직방식이 미숙. (주석 9)
주석
8> 강만길, 앞의 책, 19~78쪽.(목차)
9> 한시준, <조소앙의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 조만제 편, <삼균주의논선>, 205쪽.
[26회] 식민지 조선의 참담한 실정 폭로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7장] 국무위원으로 임정 진로 제시 2014/06/15 08:00
김삼웅
조소앙의 앞의 논설은 방대한 자료의 집성이다. 박은식의 <한국통사>에 못지않는
내용은 담고 있었지만, 우리 독립운동연구가들이나 학계에서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장대한 내용을 전부 소개할 수는 없고, 여기서는 중요하다고 판단한 몇
대목만을 발췌한다.
체포와 구금을 능사로 하는 일본정치
저들의 소위 법률이라는 것은 단지 강자가 약자에 대하여 꺾고 부수어 도살하는 도구일
뿐이니 형법ㆍ보안법ㆍ치안유지법ㆍ출판법 등이 그것이다. 저들은 전국에 2.700여
개의 경찰서를 설치하여 체포와 구금을 일삼아 죄 있고 없음을 묻지 않고 반드시 고문을
가하여 1, 2년을 경과한 후에야 비로소 공판을 연다.
저들은 이러한 새어나가지 않도록 모든 흉악함을 다 동원하여, 신문 지상에 그런 일들을
상세히 보도하려고 하면 정간시키거나 감옥에 집어넣어 버린다.
제일 평안하고 무사하였던 1929년 5월을 예로 든다 하더라도 평안남도 1개 지역에
90.
90
옥사가 1.300여건이나 되며, 평안북도의 1년 옥사가 1만 3천여 건이며 저들에게
희생된 자가 13.695인이며 전국통계로는 저들에게 체포ㆍ구금ㆍ희생된 자가 1년 내에
무려 158.000여 인이나 된다. 저들은 오히려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작년, 즉 1929년부터
10만금을 들여 지문을 수집하여 체포와 구금을 도왔다.
적의 경무국 발표에 의하면, 반일 혁명사상을 가진 한국인을 체포하여 지문을 채집한
것이 13만이나 되었다고 하니 저들의 일망타진의 기술이 이제는 완전히 갖추어 졌다고
할 수 있겠다. (주석 10)
한인 군경기관의 억압
독립당원이 국경을 침입할 때에 적 경찰에 포로된 자가 4.000여 명이나
되며(신의주경찰서 발표), 1년 내의 중요인물 체포건수도 100여 건이나
된다(치안유지법 위반). 작년도(1929) 통계에 의하면 고려국민당원, 정의부원,
참의부원, 고려혁명군 간부, 대한통의부원, 천마대원, 한국노동당원 등의 분투정신을
필두로 겨울 광주혁명 이래 어떤 계급을 막론하고 50만 청년학생을 선봉으로 전
한민족이 일치 반항하여 민족적 혁명성을 열렬히 발휘하였다.
저 일인들이 아무리 흉포하고 잔인한 수단을 쓴다하더라도 한 사람의 한인도 물러서게
할 수 없으며 모든 한인의 의식적 자각을 결코 총검으로 파괴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오히려 깨닫지 못한 채 더욱 흉포하여 져서 스스로 몰락을
재촉하고 있다. (주석 11)
학생의 반항(파업운동)
압박의 정도가 더욱 가혹해 감에 따라 반항과 자각운동도 높아가고 있다. 소년 혈기의
울분과 적개심이 쌓여 발산되지 못하면 그 둑이 무너져 넘쳐나게 마련이다. 근래 3, 4년
간 파업의 바람이 전국학계에 가득한데 그 원인을 살펴보면 이민족의 포악한
탄압때문이다. 1928년 12월 이전의 6개월 간 전 한국 내 파업학교는 54개 교나 되는데
소학교가 제일 많고 중학이 그 다음이고 전문학교 및 대학이 그 다음이다. 무릇 파업에
91.
91
참가하여 당국에대항한 자가 1만여 명이 이르고 거기에 동조해서 파업에 따른 자가
3만에 달한다. 특히 10여 세 내외의 소학생이 그 주력군이 됨도 한국의 특징이다. (주석
12)
토지 겸병의 위기
적은 한국을 병탄할 때부터 토지문제에 착수해서 8년 8개월이라는 세월과 2천 40만
금이라는 경비를 들여 실지측량과 정밀조사를 하여 경제적 착취용으로 전용했다. 전국
경지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4백 33만 5천 3백 96정보(1916년 책으로 만들었으나
비밀에 붙히고 발매하지 않음)에 불과한데 10년의 개간과 개량 결과 증가한 경지가
12만 6천여 정보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전국 경지면적은 산림과 대지를 제외하고 실로
1백 45만 6천 4백 95정보가 되는데 일본이 점탈하고 있는 것은 39만 5천 8백 21
정보(일인이 소유한 산림, 대지는 제외) 이다. 이는 전국 경지 총면적의 11분의 1에
해당하는 토지이다.
50분의 1의 일본인이 전 한국경지의 11분의 1을 점유하고 있다. 경기도의 경우
일본인이 점유한 경지는 11분의 1로서 가격은 4분의 1에 해당한다. (경기도 재무부가
공표한 바에 의거함). 이로 미루어 보건대 적도가 전국 토지를 점유한 바는 전국 경지
가격의 3분의 1을 밑돌지 않는다.(남한 일대의 제일 비옥한 경지는 태반이 일인이
점탈했고 그 가격 평균은 이로 미루어 볼 수 있다). (주석 13)
주석
10> 앞의 책, 19쪽.
11> 앞의 책, 21쪽.
12> 앞의 책, 30~31쪽.
92.
92
13> 앞의책, 39~40쪽.
[27회] ‘한인의 몰락 상황’을 적시하다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7장] 국무위원으로 임정 진로 제시 2014/06/16 08:00
김삼웅
조소앙은 이 글에서 ‘한인의 몰락상황’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였다. 참담하기 그지없는
상황의 기록이다.
정치적ㆍ경제적 압박수단에 쫓기어 유리 걸식하고 이산하여 자살하는 화를 입어 1년 내
자살자가 2.000여 명이나 되어 세(稅)관리가 강제집행하는 것이 1년에 30만 건이나
된다. 1천 5백만이나 되는 빈농은 전에 없던 새로운 가옥세 때문에 곤란을 받고 있으며,
경성에 살며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자가 1만 7천호에 10만여만 명이나 된다.
경성에서 월급이 20만 원 미만으로 7인 가족의 가난한 집이 경성총인구의 10분의 4가
된다. 가난한 집은 머리를 조아리고 간청해도 시의 구획정리로 쫓겨나고 관청에서
재물을 빼앗아 가는 것이 25만원이나 된다. 1년의 전국 실업자수는 16만 명이나 되고
경향 각지의 각 계급은 이민족의 폭력에 억눌려 무보수로 부역에 끌려나가는 자가
1년에 무려 2백 12만이나 된다. 풀뿌리, 나무 껍질로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는 농가는
5도 내에 25만 호 약 1백 25만 명이나 된다.
일본으로 흘러가서 죽으려해도 죽을 길을 찾지 못하는 실업자가 무려 40만 명이고
9년간 재산을 당패한 집이 7만 5천 가구 약 37만 5천명이나 된다. 중산계급의 몰락자는
10년 내 50만 명이고, 만주로 이주한 자는 30여만 명이다. 1년 간 한인이 고리대금으로
곤란을 받는 금액은 무려 6천만 원이나 된다. 1년 간 온갖 고초를 다 겪고 경작하여
생산해 낸 백미가 1천 7백만 석인데 일인이 빼앗아 가는 것이 과반수이고 반도 못되는
8백만 석이 국내에서 소비되는데 중산계급 이상과 국내 일본인이 먹어치운다.
93.
93
일반 농민은소미(小米)로 일상 식품을 삼는데 아주 염가인 만주산 조(栗)의 1년 수입은
대략 3백만 석인데 매년 그 양이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한에 쫓겨 학교를 퇴학하는
자가 1년에 무려 7만여 명이나 된다. 이렇게 한인을 구박하지 않음이 없는 여러가지
험상한 현상과 위기를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데는 다른 길이 없다.
한인의 천여 가지 직업 중 오직 혁명이라는 직업이 최고로 발전적이며 제일 성공의
희망이 있는 직업이고 이것이 아니면 완전히 자립하고 자존하는 방책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한인 청년ㆍ학생ㆍ노동자ㆍ농민 등 각계각층을 막론하고 일치단결해서
민족혁명 투쟁을 일으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주석 14)
주석
14> 앞의 책, 45~46쪽.
[28회] 광주혁명 발생 전의 전국적 상황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7장] 국무위원으로 임정 진로 제시 2014/06/17 08:00
김삼웅
광주혁명(광주학생운동필자)
발생 전의 한국사회는 검은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여 장차
비를 몰고 올 형상이었다. 여러 해 쌓인 불평스러운 기색은 바야흐로 한 번 건드리면
폭발할 찰나에 놓이게 되었으니 실로 중요한 사실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 국면을
상승시키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중요한 사실은 의열단사건, 보천보사건, 임시정부사건, M.L당 사건, 간도격문사건,
러시아혁명기념계비사건, 태평양회의가 한국 대표를 거절한 사건, 한국정음사건
편찬회 발기 등등 모두 1929년 11월을 전후해서 발생한 대사건들이다.(중략)
94.
94
전국적 불안의중요한 요소 가운데 첫째는 남한에 대흉년이 들어서 유리하여 걸식하는
민중이 수백여만 명이고 배고파 학교를 그만 둔 학생이 수천여 명이며, 둘째는 박람회가
개최되어 경향 각지의 민중이 1백여 만이 모여서 적의 경비가 평상시보다 더욱
긴장되었고, 이 때문에 사회심리가 충분히 동요되고 있는 점이다.
한 두 호걸이 이런 때를 타고 봉기할 계획을 짜고 웅변대회를 한다는 핑계로 전국의
중학 정도 이상의 각 급 학교 학생대표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계획이
사전에 적 경찰에 탐지되어 개최하지 못하고 좌절되고 말았다. 이때 참고 기다린
지사들이 팔을 떨치고 호령을 하니 50만 학생군이 전선에 서고 노ㆍ농ㆍ공ㆍ상ㆍ각
계급이 이에 호응하여 광주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주석 15)
조소앙은 대단한 필력의 소유자다. 구하기 어려운 국내의 각종 자료와 통계를 조사하여
식민지 조선의 참상을 밝히고 용어 하나에도 독립운동가로서의 굳은 신념을 내보였다.
일본을 ‘적’이라 호칭하고, 일제의 한국침략을 ‘병탄’이라고 썼다. 독립을 하고도 오랜
세월 동안 ‘을사보호조약’이라 쓰고, 지금도 일부 사학자들이 ‘5조약’이니 ‘합병’ 또는
그나마 ‘강제합병’의 용어를 사용한 것과 비교하면, 그의 투철한 역사관을 보게 된다.
‘임시정부를 지지 옹호하라’ 논설
조소앙은 많은 글 중에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쓴 것이 없고, 따라서 독립운동사와
민족문화에 길이 남을 대문장이 아닌 것이 없다. 1935년 3월 1일 3ㆍ1혁명 제16주년을
맞아 발표한 <임시정부를 옹호 지지하라 3ㆍ1절
제16주년 기념선언>은 내용이나
문장에 있어 명문 중의 하나로 꼽힌다. 서두부터가 장엄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백만 대중을 동원하고 수만 동포의 벽혈(碧血)로써 장엄한 3ㆍ1절을 창조한지 이미
16주년이 되었다. 이 날에 임하여 국내외 동지와 선열의 위대한 분투와 구로(劬勞
:수고)와 의백(毅魄:굳세고 단단한 정신)을 다시 추장(推獎)ㆍ동경ㆍ위로하고자 하는
정서가 우리 민족 개개인의 가슴 속에 하나가 되어 있으며, 더욱 적군의 유린 중에
변명혈전(拚命血戰:목숨을 바쳐 싸움)하는 각계 장사(壯士)의 최후 승리의 북소리를
95.
95
진동시켜 마지않을 것을 명백히 인식하겠다.
조소앙은 독립운동계의 일각에서 3ㆍ1운동을 비하하고, 임시정부를 폄하하는 데
대하여 단호하게 말한다.
혹자는 말하여 독립운동의 최대장애가 ‘정부’ 두 자에 있다 하여 사(社)ㆍ단(團)ㆍ회(會)
ㆍ당(黨) 등 각종 결사에 가치와 흑적(黑赤) 찬란한 허다한 색채를 조염석탁(朝染夕濁)
하면서 무계통ㆍ무체계적 국부할거(國部割據)의 상태를 고수하여 보았으나, 역시
현저한 전적을 거두지 못하였으며, 혹자는 3ㆍ1절과 정부와의 인과관계를 말살키
위하여 3ㆍ1절의 구성요소를 들어 미래의 특수계급의 토대 위에 세력을 건축한다 하여
정부의 조직을 근본으로 부정하며 비조국(非祖國)의 조국과 타인의 부(父)를 부로
추방하는 기태를 온용하기에 열중하던 부분도 있었으나, 역사적 조건과 민족적 대립을
무시하는 허망환상에 빠질 것이요, 하등의 공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정부에 대한 다방의 비난과 불평은 도리어 모든 운동의 지절이 되었고 정부
자신은 최저한도로 독립운동을 고려(鼓勵)하였다. 과거 16년 이래로 간난 고초 중에
적국과 대립하여 있는 점에서, 5천 년 국가의 주권과 정통을 고수하는 점에서 혼잡한
사상과 파란중에 뛰어나고 뜻을 굽히지 않으며 백절불굴하는 점에서, 세계 우방에
대하여 민족운동의 중추신경인 사실상 인식을 얻어 민족적 체면과 독립운동의 광망을
방사한 점에서, 장사용군을 고동하여 적의 노소(老巢)와 주뇌(主腦)를 초탕진집케 한
점에서, 정부로서의 직권 중 어느 정도의 특점을 표현한 것만은 누가 감히 부인할 수
없는 바이니 이러한 위대한 임무는 어느 개별적 집단에서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 장래를 볼진대 정식정부가 성립될 시기까지 본 정부를 고수할
필요가 무엇보다도 진중한 지라 한국에 역사적 국가의 체상(體相)을 승계 전수하는
국통상 주권독립의 이유와 적의 침점(侵佔)된 기간에 우리 민족의 주권과 대의를
부지하는 과도적 임무로서의 정중한 명분상 이유와, 조만간 교전 단체의 국제적 인식을
촉성할 외교상 정세 등등을 보아온 정부는 전박불파할 근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안으로
2천 만의 충용한 국민의 기대가 날로 견고하여 가며, 밖으로 국제환경의 변동이
96.
96
박두하여 동아문제를해결하는 열쇠로서의 목표가 되어 있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니,
백척필두에 일보를 갱진하여 국토광복을 갱진할 때까지 정부를 옹호하는 중에 각계의
대단결을 완성하여 당으로서의 직무와 정부로서의 서로 표리장수하여 독립전쟁의
대업을 협성할 뿐이다.
조소앙의 안목은 대단하다. 이 글을 쓴 1935년 3월 초에 “조만간 교전단체의 국제적
인식을 촉성할 외교상정세 등등”을 언급하고 있다. 아직 중ㆍ일전쟁(1937년 7월)과
미ㆍ일전쟁(태평양 전쟁 1941년 12월)이 일어나기 한참 전이다. 조소앙과 임시정부
지도부는 이같은 국제정세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부분이다.
본 정부는 결코 혁명혼의 고유한 이론이 해부한 억압적 기관, 이소제중(以小制衆)하는
공구(工具), 착취하는 기계가 아니니 현재의 과도적 정부나 장래의 입국할 정식정부를
막론하고 당적 이론과 정책을 체혈하여 민족의 진정한 균등한 민치를 골자로 한 전
민족의 정치적 표현기관임을 명확히 인식하되 이것이 우리 운동을 유력 활발하게 하는
정경(正經) 원칙이다.
그러나 조직은 국가의 생명이며 민중은 정부의 기본이니 조직을 떠나는 국가나, 민중과
격절한 정부가 되지 말고, 조직적 민중을 내포한 민국정부로 구체화하기에 노력하여
국내외 각계 민중이 조직화ㆍ체계화ㆍ이론화 하는 대집단의 창조에 노력하라. 조직의
완성이 곧 정부를 옹호하는 최대임무이니라.(주석 16)
주석
15> 앞의 책, 72쪽.
16> 강만길, <조소앙>, 151~152쪽.
[29회] 민족운동진영의 통합운동
97.
97
<삼균사상가> 조소앙평전/[8장] 민족혁명당 참여와 재건한국독립당 창당 2014/06/18
08:00 김삼웅
중국 항주에서 민족혁명당이 결성된 것은 1935년 7월 5일이다.
6월 20일부터 예비회담이 열리고 마침내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큰 몫을 하게 되는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다.
강력한 통일전선 정당을 탄생시키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되었고, 여기서 중국 관내 좌우세력이 참여한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다.
하지만 김구 등 임시정부의 주류는 참여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1927년 ‘민족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창립되었던 신간회가
창설되어 활동하다가 1931년 5월 해소되면서, 국내외적으로 단일당 또는 좌우세력의
연합은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 여기에 중국정부로부터 한국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이
요쳥되고 있었다. 통합해야 지원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조소앙은 당시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독립당 소속이었다. 조선혁명당에 참여한 9개
단체는 다음과 같다.
의열단 : 김원봉ㆍ진의로 외 1인
한국독립당 : 조소앙ㆍ양기탁ㆍ최석순
조선혁명당 : 최동오ㆍ김학규 외 1인
신한독립당 : 이청천ㆍ윤기섭ㆍ신익희
대한독립당 : 김규식ㆍ이청천ㆍ신익희
98.
98
뉴욕대한인교포단
미주국민회
하와이혁명동지회
민족혁민당
민족혁명당 창당의 주체는 우익 독립운동세력의 대표적 정당인 한국독립당과
사회주의지향적인 의열단이 주체가 되었다. 따라서 민족혁명당은 사실상 중국관내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좌우합작 통일전선이었다.
1925년 경 우리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주관적, 객관적 요구에 의해 통일전선 정당으로
성립된 민족혁명당은 이후 상당한 곡절을 겪게 되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이후 전체
민족해방운동전선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민족의 해방에 대비하면서 전체 전선의
통일을 달성하려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정당이 곧 민족혁명당이라 할 수 있다. (주석 1)
민족혁명당 창당 당시의 실질적 리더그룹이라 할 수 있는 중앙집행위원은
김원봉ㆍ김두봉ㆍ김규식ㆍ윤기섭ㆍ이청천ㆍ최동오ㆍ윤세주ㆍ진의로ㆍ김학수ㆍ김활
석ㆍ이관일ㆍ조소앙ㆍ이광제ㆍ최석순ㆍ신익희 등이었다.
중앙집행위원은 김구 등 임시정부 고수파를 제외한 중국 관내 한국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부분 망라되었다. 그런데 세력의 분포로 보아 가장 강력했던 한국독립당
출신이 소외되면서, 의열단 계열의 독주가 예상되었다.
중앙집행위원회는 위원장을 두지 않고 중앙위원들의 합의제로 운영하였다. 일제
정보기관은 중앙집행위원장을 공식으로 둔 것은 한인애국단장 김구를 영입하기 위한
것이라는 보고도 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99.
99
민족혁명당은 <창립대회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요지를 발췌한다.
세계대전(제1차대전) 후 일시적 안정기에 보지(保持)된 열강의 표면적 균세는 일본의
만주침략과 독일의 재군비 및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에 대한 군사행동 등에 의해 동요
교란되었고, 이 표면적 기초 위에 신축되었던 국제연맹 및 기타 각종 조약 등 소위
현상유지의 평화기구가 결정적으로 파괴됨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은 불가피한
시간문제가 되었다.
우리는 3ㆍ1운동 실패 후 지도의 통일 및 혁명역량의 집중을 위해 민족적 통일대담의
결성에 노력해왔다. 1926년 60여 단체 대표로서 20만 원(元)의 활동비를 소비하여
국민대표대회를 산출했으나 우리 혁명에 대한 견해와 입장의 불일치가 주요 원인이
되어 대표회의는 무산되고 그 후 계속해서 1928년에 민족통일당조직촉진회를
조직하여 대동단결을 향해 적극 노력했으나 역시 내외 환경의 불리와 제반 정세의
미숙성에 의해 와해되었다.
지금 민족의 통일이 결성된 것은 우리 민족의 고도강렬한 혁명의 수요와 자각의
성과이며 혁명운동자 등의 통일운동에 대한 비상한 열망 노력의 결정이다. 또한 우리
독립운동사상 획기적 발전의 신기원이다.(주석 2)
민족혁명당의 ‘당의’와 ‘당강’ 등은 조소앙의 삼균주의사상이 크게 작용하였다. ‘당의’의
요지다.
본당은 혁명적 수단으로서 구적 일본의 침략세력을 박멸하여 5천년 이래 독립자주해온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고 정치ㆍ경제ㆍ교육의 평등을 기초로 한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국민전체 생활의 평등을 확보하고, 나아가서 세계인류의 평등과 행복을
추진한다. (주석 3)
주석
100.
100
1> 강만길,<증보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 21쪽, 역사비평사, 2003.
2> <사상정세시찰보고서>(2), 76~81쪽, 강만길, 앞의 책, 66~67쪽, 재인용.
3> 앞의 책, 83쪽.
[30회] 의열단 주도 신당 삼균주의 채택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8장] 민족혁명당 참여와 재건한국독립당 창당 2014/06/19
08:00 김삼웅
김원봉의 의열단 계열에서 주도한 민족혁명당이 조소앙의 삼균주의 사상을 ‘당의’와
‘당강’ 그리고 정책부분에서 그대로 수용한 것은 특이할만한 일이었다.
민족혁명당의 당의가 “정치ㆍ경제ㆍ교육의 평등을 기초로 한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 했을 때의 민주공화국은 당시로도 소비에트정권이나 인민공화국과는
구분되는, 다분히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적 색채가 짙은 국가로 간주되게 마련이지만,
이와 같은 국가의 정권을 민주집권제에 의해 수립하겠다고 한 점에 민족혁명당의
강령이 갖는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4)
민족혁명당은 강령의 주요 정치부분에서 “국민은 일체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가진다”, “1군을 단위로 하는 지방자치제를 실시한다”고 명시하고,
사회ㆍ경제ㆍ부분에서 “토지는 국유로 하여 농민에게 분급한다”,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립적 기업은 국영으로 한다”, “국민의 일체의 경제적 활동은 국가의 계획 아래
통제한다”, “누진율의 세칙(稅則)을 실시한다”, “국적(國賊)의 일체의 재산 및 국내에
있는 적 일본의 재산은 몰수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또한 사회정책 부분은 “국민은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ㆍ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여자는 남자와 일체의 권리를 동등히 가진다”, “노동운동의 자유를 보장한다”,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은 국가의 경비로써 실시한다”, “양로ㆍ육영ㆍ구제 등
101.
101
공공기관을 설립한다”등을 명시하여 사회보장제를 실시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조소앙이 어느 정도로 참여한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민족혁명당의 ‘당가’는
1930년대 중후반기 중국 관내 한국독립운동가들의 애창곡이었다고 한다.
민족혁명당 당가
1.
일심일의(一心一義)
굳은 단결
민족적 명당
우리 당은
우리 민족의 전위
희생 분투 유혈은 우리들의 각오
나가자 혁명전선으로
2.
우리 동지 높이 드는 깃발 아래
전진하는 역사에 발 맞추어라
강도 일본을 타도하여 땅을 되찾고
102.
102
싸우자 자유의신깃발을. (주석 5)
민족혁명당 창당 초기의 간부진은 다음과 같다.
서기부장: 김원봉(의열단), 부원 윤세주(의열단), 김상덕(신한당) 외 1인
조직부장 : 김두봉(한독당), 부원 김학규(조혁당), 안일청(조혁당), 최석순(한독당)
선전부장 : 최동오(조혁당), 부원 신익희(신한당), 성주식(의열단)
군사부장 : 이청천(신한당), 부원 윤기섭(신한당), 김창환(의열단) 외 1인
국민부장 : 김규식(대한당), 부원 조소앙(한독당) 외 1인
훈련부장 : 윤기섭(신한당), 부원 3인
조사부장 : 이광제, 부원 진일오.
중앙검사위원 : 양기탁(한독당), 홍진(신한당) 외 3인. (주석 6)
주석
4> 앞의 책, 84쪽.
5> <사상정세 사찰보고집> 제3집, 328쪽.
6> 이강훈 편저, <독립운동대사전> 권 2, 395쪽, 도서출판 동아, 1990.
103.
103
[31회] 이념,소외 이유로 민혁당 이탈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8장] 민족혁명당 참여와 재건한국독립당 창당 2014/06/20
08:00 김삼웅
어렵게 결성되었던 민족혁명당의 진로는 그러나 순탄하지 않았다.
창당 3개월 후 조소앙과 한독당 출신 박창세ㆍ문일민 등 6인이 탈당하면서 반쪽의
형태가 되고 말았다. 여기에 신한독립당의 홍진ㆍ조성환 등과 미주의 대한독립당 등이
이탈하면서 민족혁명당의 창당 목표와 의도가 크게 희석되었다. 의열단 계열의 독주가
심했던 데다 이념적으로도 좌편향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한 연구가는 조소앙 등의 민족혁명당 이탈을 이념적이기보다 당내의 홀대를 이유로
들었다.
조소앙 등은 이념의 차이 때문에 민족혁명당을 탈당했다고 하지만, 민족혁명당의
<당의>, <당강>과 ‘재건한국독립당’의 그것은 일제로부터의 독립과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국가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탈당 이유는 정당한
명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6인의 탈당은 민족혁명당 창당 과정에서 ‘상해한국독립당’의 대표로 나섰던
조소앙이, 당이 결성된 이후 이렇다 할 직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등 당내 위상이 격하된
것과 더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의열단 계열의 독주와도 깊은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요인은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운영의 측면을 어떻게 개선하느냐와 더 밀접히
연관된 것이었다. (주석 7)
조소앙 등은 10월 5일 ‘한국독립당 임시 정무위원회’의 명의로 <고(告) 당원동지>라는
성명을 통해 탈당의 이유를 상세히 공표하였다.
104.
104
자립자존의 일개민족이 경제적으로 합병되어 수치를 세척하기 위해 피병합의 지위를
원상대로 광복시키려고 노력하는 민족주의의 독립운동은 원칙상 사회주의자의
국제관과는 판연히 다른 감정과 이론을 갖는 것이다. 민족의 경제문제만을 중심으로
하여 국가의 말살과 주권의 파기, 자기민족의 과정을 무시하는 공산주의자와는 일층
빙탄불상용하는 혈분적(血分的) 상반성을 갖는 것이다. (주석 8)
조소앙은 민족혁명당 창당선언문을 비롯 당의, 당강 등을 제정하는 데 깊히 관여하였고,
여기에는 삼균주의가 골격이 되었다. 문제는 창당 이후 노선의 변경과 역할의 소외였다.
성명은 이어진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체계의 요점은 유물론을 근본신조로 하여 지구단위의 공동생활, 즉
국계종별(國界種別)을 일시에 돌파하려는 용감한 혈기로서 경제제도의 돌변을
전세계에 실시하려고 하는 순정이론(純正理論)을 골간으로 하고 보복심리를 이용하여
반대계급의 뿌리를 뽑아내려고 하는 격론으로서 무산계급의 독재적 정치를
유일수단으로 하여 과거 문화의 진화적 율법을 초계급적 인위로서 중단하고 본능적
성욕을 기탄없이 발휘하여 감정 충동의 비윤리적 맹동으로서 혁명의 미명하에 무모한
파괴만을 주장하고 있다. (주석 9)
조소앙은 자신의 사회철학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체계와는 다름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재건한국독립당의 노선이 민족혁명당과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전인류의 최후 목적지와 구경점을 목표로 추진하지만, 당연한 급선무인 시급한
재일보의 정책을 즉각적으로 간취하고 민족중심국가본위, 주관확립 등의 과정적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려는 것.
계급적 대립상태로서 동족간의 분화작용을 도발하기보다는 민족적 대립관계를
적대방향으로 첨예화하여 폭력적 합병을 폭력으로서 분리하려는 것.
105.
105
5천 년간 독립한 금성철벽의 민족적 국가를 아등(我等)의 손에 의해 건설하려는 것.
(주석 10)
조소앙 등의 분당사태와 관련하여 민족혁명당은 극심한 배신감에서 비난을 쏟아냈다.
양기탁의 명의로 된 <조소앙 등 6인의 반당사건에 관해 일반 동지에게 고하는 글>이다.
<고 당원동지>의 요지는 신통일당(민족혁명당)을 홍색분자라고 은연 모함하여 당에
대한 도전을 피하고 이목만 현혹시키고 외력을 빌려 박멸시키려고 하는 음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증거를 표명하지 않는 것도 모순이다. 민족혁명당에 통합된 전 의열단의
내지(內地) 활동과 신한혁명당의 만주에서의 혈전악투하는 것을 홍색공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독(한국독립당) 자신과 미국 대한독립당을 홍색이라고 할 수 있는가? 특히
한독시대에 절실히 악수 환영하고 통일동맹을 공통적으로 창립한 것이 사실이며 금반
통일당 창립에도 소앙 등 자신이 한독 대표로서 한독의 안에 의해 성립시키고 지금이
되어 홍색당이라고 모함한다면 최초부터 반대하고 참가하지 않았어야지 하고(何故)로
통일에 찬성하고 결당에 참가하여 성의로 노력하여 간부가 된 것일까? (주석 11)
주석
7> 신주백, <1930년대 중국 관내지역 정당통일운동>, 165쪽, 독립기념관, 2009.
8> 앞의 책, 342쪽.
9> 앞의 책, 346쪽.
10> 앞과 같음.
11> 조범래, 앞의 책, 353쪽, 재인용.
106.
106
[32회] ‘재건한국독립당’창당 주도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8장] 민족혁명당 참여와 재건한국독립당 창당 2014/06/21
08:00 김삼웅
조소앙 등의 이탈에 민족혁명당 측이 얼마나 분개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원인이야
무엇이든, 그의 민족혁명당 탈당은 ‘통일대당운동’의 관점에서는 분파행동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민족혁명당을 떠난 조소앙은 박창세ㆍ문일민 등과 1935년 9월 25일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재건’이란 표현은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기존 정당은 대부분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한국독립당도 마찬가지였다.
민족혁명당 참여를 둘러싸고 임시정부 계열 인사들의 입장은 몇 갈래로 나뉘었다.
김구와 이동녕 등은 신당 반대, 송병조ㆍ차리석 등은 임시정부 고수, 김붕준ㆍ양명진
등은 불참을 선언하였다. 따라서 민족혁명당은 창당 당시부터 ‘민족대당’으로서의
기반을 온전히 갖추지 못한 실정이었다.
조소앙 등은 한국독립당을 재건하면서(재건한국독립당) <한국독립당 재건선언>을
통해 창당의 명분과 목표를 분명히 하였다. 조소앙의 삼균주의사상이 그대로 담겼다.
오등은 5천년래 독립 자주해 온 국가를 이족 일본에게 탈취 당한 이래 정치의 유린과
경제의 파멸, 문화의 말살하에서 사멸에 직면하고 민족적으로 자존하기 불능하고,
세계적으로 공영을 도모하기 어려운 경우에 있다.
자에 본당은 혁명적 수단으로서 구적 일본의 모든 침탈 세력을 박멸하여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하고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하는 신민주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안으로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하여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실현하고 나아가 세계일가의 진로를 향한다. (주석 12)
107.
107
‘재건선언’에 나타난한국독립당의 재건 이유는 4가지로 요약되었다
첫째, 순수한 민족주의의 대의를 위해
둘째, 3ㆍ1운동의 정맥을 유지하기 위해
셋째,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진로, 즉 독립운동 노선을 분명히 하기 위해
넷째, 독립당의 본령을 고수하여 독립운동진영을 정화하기 위한 것이다. (주석 13)
재건민족혁명당은 창당하면서 ‘당강’도 제시하였다. 역시 조소앙의 작품이다.
1. 대중의 혁명의식을 환기하여 민족혁명역량을 총집중할 것.
2. 엄밀한 조직 아래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적으로 진행해야 할 것.
3. 세계 피압박민족의 혁명단체와 연락을 취할 것.
4. 민족자결과 국제평등을 실현할 것. (주석 14)
조소앙의 재건한국독립당은 운영이 쉽지 않았다. 여타의 정당들도 사정이 비슷했지만,
한국독립단의 경우는 특히 심한 편이었다. 민족혁명당에서는 반당 분자로 적대시하고,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에서도 분파세력으로 인식하면서 거리를 두었다. 당원은 20여
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그동안 행동을 같이해 온 박창세ㆍ문일민 등이 당을 떠났다.
임시정부는 1935년 11월 2일부터 시작한 제28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조소앙ㆍ박창세
108.
108
등을 제외한채 국무위원 보선을 실시하였다. 조소앙은 의정원 상임위원에 임명되었을
뿐이다. 임시정부로부터 박대를 당한 셈이다.
중국의 정세는 날로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중ㆍ일전쟁을 앞두고 일제의 군사적 압박이
날로 심해지고, 1934년 10월에는 모택동이 지도하는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국민당정부는 안팎으로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했던
국민당정부를 떠나 한국의 임시정부를 비롯 독립운동 단체들은 그동안 활동의
근거지였던 항주를 따라 1935년 11월 하순 강소성 진강으로 옮기게 되었다.
조소앙과 재건한국독립당도 진강으로 거처를 옮겼다. 1937년 7월 중ㆍ일 전쟁이
시작되고 전세가 날로 중국측에 불리해지면서 진강도 위험해졌다. 그래서 호남성
장사로, 다시 광동성 광주로, 광서성 유주로, 사천성 기강으로 옮겨다니는 유랑시대를
겪게 되었다.
조소앙의 생애에서 어느 때라고 평온한 시절이 별로 없었지만, 민족혁명당 참여와
재건한국독립당 시대, 그리고 중원 천지를 떠도는 유랑의 시대는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세월이었다. 조소앙은 유랑시대에도 당세 확장과 임시정부의 주도권 장악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조소앙은 송병조ㆍ차리석을 끌어들여 김구를 견제하고
한국애국단 계열을 제외한 채 두 사람을 비롯하여 김구와 경쟁적 관계에 있던 사람들과
연합하여 임시정부를 장악하는 한편 민족혁명당 반대세력의 중심에 서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송병조ㆍ차리석은 소수파로 전락하여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하는 곤란한
처지에 있던 임시정부의 어려운 사정을 타개하고 부흥을 위해 김구의 재정지원과 김구
계열의 임시정부 참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조소앙이 끝까지
김구의 임시정부 참여를 반대하자 그와의 연합보다 김구와의 연합을 선택한 것이다.
이로써 조소앙은 반민족혁명당 세력의 주도권을 잡는데 실패했으며, 오히려
민족주의운동 계열 내에서 소수파로 전락하였다. (주석 15)
109.
109
‘유랑의 시대’는조소앙과 재건한국독립당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를 비롯, 모든 독립운동
단체의 피난기, 침체기였다. 잦은 이주와 일본군의 공습위험에 시달리면서 그때 그때
대처해야 했기 때문에 한층 어려움이 많았다.
주석
12> <소앙선생 문집> 上, 246쪽.
13> 조범래, <재건 한국독립당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5집, 345쪽, 독립기념관,
1990.
14> 김진명 편, <1939년의 재지(在支) 불령조선인의 불온책동선언>, <조선독립운동> 2,
647쪽.
15> 신주백, 앞의 책, 165~166쪽.
[33회] 유랑과정에서도 선전활동 계속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8장] 민족혁명당 참여와 재건한국독립당 창당 2014/06/22
08:00 김삼웅
재건한국독립당은 이주를 거듭하면서도 선전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35년 10월에는 상해 한국독립당의 기관지였던 <진광> 제4ㆍ5호 합권을 발행하였다.
중국어본이었다. 이 시기에 발행되었을 <진광>은 거듭되는 이주로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일제의 정보자료에만 단편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재건한국독립당은 <진광>이외에도 1935년 10월 29일자로 <건국기념선언>, 1936년
3월 1일 <제17주년 3ㆍ1절 기념선언>, 1936년 8월 29일 <한망(韓亡) 26주년 통언>,
110.
110
1936년 8월1일 <박장군 순국 30년 기념선언>(박장군은 박승환필자),
1937년 3월 1일
<한국독립절 18주기념선언>등의 선언문을 발표하여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쟁취의
의지를 천명하였다. 재건한국독립당 연구가인 조범래 박사는 이 당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재건한국독립당은 1935년 9월에 결성된 이후 1940년 5월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과
함께 ‘통합 한국독립당’으로 발전적으로 해체를 할 때까지 관내 민족주의 진영의 정당의
하나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비록 인물난, 재정난, 계속되는 피난 등 대내외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선전활동 이외에는 뚜렷한 활동을 지속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재건한국독립당은 상해 한국독립당과 ‘통합’ 한국독립당의 역사를 이어주는 하나의
고리 역할을 하였다는 데에 동당의 역사적 의의를 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석
16)
민족혁명당의 창당과 분열, 조소앙의 재건독립당의 창당 등 중국관내 독립운동 진영의
이합집산이 극심할 때인 1935년 11월 항주에서 한국국민당이 창당되었다. 민족혁명당
창당으로 수세국면에 놓인 김구ㆍ송병조 등이 반임시정부세력에 대항하면서 임시정부
수호ㆍ강화를 기치로 내걸고 창당하였다.
김구는 민족혁명당 참여를 종용받고, “통일은 좋으나, 한 이불 속에서 딴 꿈을 꾸려는
통일운동에는 참가할 수 없다.” (주석 17)며 이를 거부하였다. 그는 임시정부의 폐지를
주장하는 민족혁명당에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내었다. 그리고 한국국민당의 창당을
주도하였다. 창당의 변이다.
5당 통일론이 났을 때에도 여러 동지들은 한 단체를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나는
차마 또 한 단체를 만들어 파쟁을 늘리기를 원치 아니한다는 이유로 줄곧 반대하여
왔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유지하려면 그 배경이 될 단체가 필요하였고, 또 조소앙이
벌써 한국독립당을 재건한다 하니 내가 새 단체를 재건하더라도 통일을 파괴하는
책임을 지지 아니하리라 하여, 동지들의 찬동을 얻어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다.
111.
111
이와 같은이유에서 한국국민당이 창당되었다. 한국국민당은 <창립선언서>에서 “한
줌의 땅도 되찾지 못하고 쇠사슬의 유린에 울부짖는 동포들의 울음소리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의 잘못에도 중요한 성분을 갖고 있다. 즉 사상의 차이,
견해의 부동, 조직의 무능이 상당한 원인요소이고, 기본적인 정의ㆍ도덕의 산란, 현대적
종횡실책의 난용이 최대의 요소인 것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자책하였다.
하지만 창당선언의 방점은 “전민족적 정치ㆍ경제ㆍ교육ㆍ고용균등의 3대 원칙의
신앙을 확립하고”, “완전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 “위로는 조선의 광휘를
빛내고 밑으로는 자손만대의 영예를 발전시킬” (주석 18)것임을 천명하여,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수용한 것이라 하겠다.
주석
16> 앞의 책, 370쪽.
17> 김구, <백범일지>, 321쪽, 국사원, 1948.
18> 김정주, <조선통치사료> 10, 783쪽, 한상도, <대한민국임시정부> Ⅱ장정시기
170쪽, 독립기념관, 재인용.
[34회] 쫓기는 정세에서 민족진영 통합시도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9장] 피난기 통합운동과 임시정부 외교위원장 2014/06/23
08:00 김삼웅
중ㆍ일전쟁의 발발로 중국대륙이 요동치면서 한국독립운동가들은 중국 국민당정부와
행보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장개석 정부는 밖으로는 일제 침략군과 안으로는
모택동의 붉은군대와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112.
112
장개석은 1936년12월 장학량에 의해 서안에서 감금되는 ‘서반사변’을 겪으면서 외국
기자들에게 “일본은 피부병이고 공산당은 심장병이다”라고 발언할 정도로 ‘외적보다
내적’과의 싸움에 군사력을 집중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으나,
결렬되어 다시 적대관계가 이루어졌다.
1937년 12월 13일 일제는 장개석 정부의 수도였던 남경을 쉽게 점령하였다.
중ㆍ일전쟁이 시작된 지 6개월 만이다. 장개석 정부는 일본군의 남경점령 직전에 이
도시에서 철수하였다. 이후 남경 시민 30여 만 명이 일본군에 학살되었다.
일본군의 야만성을 중국 작가 임어당은 다음과 같이 썼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후 오늘에 이르러 처음으로, 병사들이 웃는 얼굴로 어린아이를
공중으로 던졌다가 떨어져내려오는 어린 아이를 날카로운 총검의 끝으로 받아내고는
그것을 스포츠라 부르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눈을 가리운 포로가 참호
옆에서 총검술 등과 같은 훈련의 표적으로 사용되었다.” (주석 1)
일제의 야만성을 <뉴욕타임즈>는 이렇게 보도했다.
남경 점령은 일본군에게 있어서 정치ㆍ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이 군사적
승리는 야만적 잔혹행위, 포로들의 대량학살, 강탈, 강간 및 양민학살로 일본민족의
명예에 오점을 남겼다. (주석 2)
일본군은 1938년 5월 서주를 점령하고, 10월에는 무한ㆍ광주 등을 차례로 점령했다.
점령지마다 인민 학살과 약탈이 자행되었다. 장개석 정부는 일본군을 피해 무한으로,
다시 중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국제정세에 비교적 밝은 편이었던 조소앙은 1938년 9월
사천성 기강에서 동지들과 만나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국제정세의 추세로 보아 미ㆍ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일제의 패망이
얼마남지 않았으므로 최후의 결전을 위해서는 독립운동단체(정당)의 통합이
113.
113
중요하다는 인식에서였다.
이에 앞서 1937년 7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표들이 모여 3당합당을
논의하고, 임시정부 옹호ㆍ강화ㆍ확대에 뜻을 모았다. 이어서 3당과
한인애국단ㆍ미주대한민국민회ㆍ하와이대한민국민회ㆍ대한인단합회ㆍ대한인부인구
제회의 등 9개 단체가 참여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이 결성되었다.
조소앙은 ‘광복진선’의 기관지 <광선(光線)>에 <한국광복운동단체 연합선언>을
기고하였다. 광복운동단체의 연합ㆍ통합의 필요성을 절절히 설명한다. 논설은 서언에
이어 세가지 방법론을 제시한다. 서언의 주요 부분부터 살펴보자.
아직도 대업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정신과 물량이 집중되지
않았기 때문인가. 혁명이론에 체계가 없어서 그런가. 이런 것들은 ① 모름지기 빨리
보충하여야 할 것이다. ② 우리 민족주의의 정당한 발동은 누차 반민족, 반혁명세력의
파괴 공작에 상처를 입었으니 저 잡색분자의 방해와 교란이 그것이다. ③ 우리는
불리하고 나쁜 환경 가운데서도 일체의 계획을 진취적으로 실행했으나 열가지 중
하나도 성공한 것이 없는 것은 적의 압력과 간계로 말미암아 국내외의 연락이 차단된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고통과 실천경험을 통해서 용맹 노력하여 군중의 책략과 민중의 힘을
집중시켜 적 일단을 타도하고 광복전선의 일대조직을 조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은
그것이 유일한 활로임을 인식하고 매진하고자 한다.
1. 유력한 광복진선을 건립하고 확대한다.
광복진선의 통일 강화는 모름지기 동일한 주의를 가진 각 단체를 구성하여 조직하고 각
방면의 정예분자를 집약시켜 한편으로 당면한 실제 공작을 집행시키는 데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민족전선을 위험하게 하는 반동세력과 민족운동을 가장한 단체 혹
114.
114
개인을 엄격하게선별하여 민족적 정개운동(整個運動)을 가하는 데 있다.
2. 힘을 합하여 일체의 중요한 당면공작을 실행한다.
진정한 통일은 형식에 있지 않고 실질에 있다. 연래에 우리는 수없이 통일을 절규했으나
마침내 수포로 돌아갔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근본을 버리고 지엽을 좇으며 헛됨이 많고
실질이 적어 잡색분자가 기회를 타서 소란을 피워 마침내 그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후엔 다시는 전철을 밟지 말고 각파가 성실하게 힘써 권위를 세우고 우의를
돈독히 하여 신뢰를 증진시키고 통일을 강화하는 데 모든 힘을 다 발휘하여야 한다.
금일부터는 협력 동진하여 신국면을 조성하여야 한다.
3. 임시정부를 지지ㆍ옹호한다
임시정부는 3천만 민중의 심혈이 결집된 것이며 3ㆍ1운동의 정맥이며 또한 지사,
선열의 유업이며 민족의 공기(公器)이다. 그것을 지지ㆍ옹호한다는 것은 당연히
민족운동의 위대한 임무이며 혁명과정 중 반드시 그 존엄을 인식해야 한다. 그 이유의
첫째는 적국과 대립하는 최고기관이며, 둘째는 민족국가의 독립정신을 대표하는
곳이며, 셋째는 정치와 법률의 중대한 사명을 실행하는 곳이다. (주석 3)
주석
1> 안정애ㆍ양정현, <중국사 100장면>, 382쪽, 가람기획, 1994.
115.
115
2> 앞의책, 381쪽, 재인용.
3> 강만길, 앞의 책, 90~91쪽, 재인용.
[35회] 7단체회담 결렬 등 분열속에서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9장] 피난기 통합운동과 임시정부 외교위원장 2014/06/24
08:00 김삼웅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장개석 국민당정부는 한국독립운동 단체의 대동단결을 이루어
장기적인 대일항전에 동원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그래서 김구와 김원봉을 별도로
초치하여 통합(연대)을 제의하였다. 한국독립운동세력의 항일전 참여는 한국독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두 사람은 1939년 5월 10일, <동지ㆍ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하였고, 머잖아
좌우합작 정부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김구와 김원봉의 공동선언을 계기로 1939년 8월
사천성 기강에서 7당 통일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는 7개 정당(단체)의 대표
14명이 참석하였다.
한국 광복운동단체연합회 : 조완구ㆍ엄항섭
중경 한국독립당 : 홍진ㆍ조소앙
조선혁명당 : 이청천ㆍ최동오
조선민족전선연맹 : 윤세주
조선민족해방동맹 : 김성숙ㆍ박건웅
116.
116
조선청년전위동맹 :신익희ㆍ김해악
조선혁명자동맹 : 유자명, 이하유. (주석 4)
조소앙은 이 회의에서 조완구ㆍ신익희와 함께 주석단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
회의체는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이 이탈하고, 9월에 ‘5당 통일회의’가
열렸지만, 이번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이 탈퇴함으로써 통합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김구는 7당회의 등 두 차례 통일회의가 결렬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기강에서 7당 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개회 후 대다수 쟁점이 단일화되는 것을 간파한
혁해방, 전위 양 동맹은, 자기 단체가 해소되기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퇴장해 버렸다. 양 동맹은 공산주의자 단체이므로 민족운동을 위하여 자기 단체를
희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전부터 주장하였던 터이니, 놀라거나 괴이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이에 곧장 5당 통일의 순서를 순진한 민족주의적 신당을 조직하여 각당 수석 대표들이
8개조의 협정에 서명하고 며칠 간의 휴식에 들어갔다. 그런데 민족혁명당 대표 김약산
등이 통일문제 제창 이래로 순전히 민족운동을 역설하였으나, 민혁당 간부는 물론이고
의용대원들까지도 공산주의를 신봉한 터에 지금 8개조를 고치지 않고 단일조직을
결성하면 청년들이 전부 도주케 되니 탈퇴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통일회의는
파열되었다. (주석 5)
7당 통일회의가 결렬된 것은 각 정파의 단일당 조직에 대한 이해가 상충한 것이지만,
이념문제도 크게 작용하였다. “광복진선 측은 삼균주의를 채택하고, ‘토지국유’의
문제는 광복 이후 결정하자고 제의하였다. 반면에 진선연맹 측은 삼균주의가
개념상ㆍ실제상 타당성을 결여하였으며, 토지국유화정책은 한국에서는 실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주석 6)
117.
117
‘토지국유’ 문제에대해, 민족혁명당은 창당 시 17개 항의 당강에 포함시켰고,
한국국민당도 당의에서 이를 명문화하였다. 그리고 진선연맹의 ‘토지국유’에 대한
반대가 반사적으로 ‘토지사유’의 주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도 곤란할 것 같다.
우파세력인 광복진선이 ‘토지국유’를 주장한 반면, 중간ㆍ좌파세력인 진선연맹이
‘토지국유’에 반대한 사실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검토가 요구된다. (주석 7)
7단체회의 결렬에 이어 5당 통일이 무산되면서 중국내 동포사회는 물론 그동안 통합을
요청해 온 중국 국민당정부는 극심한 불신감을 표시하면서 “합작이 불가능한 원인을
생각해보면 사상문제가 제일 크고 조직문제는 그 다음이다”라고 분석하면서, 원인을
네가지를 들었다. 요지만 설명한다.
첫째, 민족성에 단결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둘째, 위대한 영수인재가 결여되어 있다.
셋째, 중심사상이 부족하다.
넷째, 각 당파의 시기가 너무 심하다. (주석 8)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민족주의 진영 독립운동가들은 우선 우파계열만이라도
통합해야 한다는 여론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10월 2일부터 3당통합을 위한 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신당 명칭을 한국민주독립당으로 정하고 창당 절차를 마련하였다.
임시정부에서도 적극 지원하여, 10월 31일 열린 제31회 임시의정원의원 회의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 수를 11인으로 늘렸다. 이에 따라 재건한국독립당의 조소앙ㆍ홍진,
조선혁명당의 이청천ㆍ유동열을 국무위원으로 선임하여 ‘3당 연립내각’이 구성되었다.
2차 대표회의에서 당명을 한국독립당으로 결정하고 당의ㆍ당강ㆍ당책(정책) 등에
118.
118
합의하였다.
주석
4>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기강 한국7당통일회의경과보고서>,
<국민정부한국독립운동사료>, 20~21쪽, 1988.
5> 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380~381쪽, 돌베개, 1997.
6> 한상도, 앞의 책, 291쪽.
7> 앞의 책, 주석 165, 291~292쪽.
8> 앞의 자료, 중앙연구원 근현대사 연구소, 25~28쪽(요약).
[36회] 임시정부 외무위원장 선임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9장] 피난기 통합운동과 임시정부 외교위원장 2014/06/25
08:00 김삼웅
1930년대 중반 이래 중국 관내의 한국 민족주의세력은 크게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국민당, 조소앙과 홍진이 주도하던 한국독립당(재건), 이청천을 비롯하여 만주에서
이동해 온 독립군 출신들이 주축이 된 조선혁명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 3당은
정치적 이념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도 같았다.
그러나 각기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활동하고 있었다. (주석 9)
3당 대표들은 5월 8일 공동명의로 기존의 3당을 완전히 해체하고 한국독립당을
창당한다는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119.
119
신당의 전신이었던3당은 이제부터 다시 존재할 조건이 소멸되었을 뿐이니라 각기
해소될 것을 전제로 하고 신당창립에 착수하였다. 과거 3당의 모든 사업과 혁혁한
역사를 쫓아 신당에 완전히 계승화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당은 보다 큰 권위와 보다
많은 인원과 보다 광대한 성세 보다 고급적 지위를 가지고 우리 독립운동을 보다
유력하게 추진케 할 것을 확실히 믿고 바라며 3당 자신은 이에 해소됨을 선언한다.
아울러 우리 3당의 결정으로 된 신당 즉 한국독립당이 3ㆍ1운동의 정맥을 계승한
민족운동의 중심적 대표당임을 성명한다. (주석 10)
이 선언문은 조소앙이 집필하였다. 자신의 문집에 실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문맥상으로 보아 그의 작품임이 분명하다. 그는 ‘3ㆍ1운동의 정맥’이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었다.
한국독립당 창당대회가 1940년 5월 9일 진강에서 개최되었다. 3당 간부ㆍ당원들이
참석하여 당명ㆍ당의ㆍ당강ㆍ당헌 등을 준비위원회에서 마련한 원인대로 통과시키고,
중앙집행위원장 등 간부들을 선임하였다. 간부진은 다음과 같다.
중앙집행위원장 : 김구
중앙집행위원 :
홍진ㆍ조소앙ㆍ조시원ㆍ이청천ㆍ김학규ㆍ유동열ㆍ안훈ㆍ송병조ㆍ조완구ㆍ
엄항섭ㆍ김붕준ㆍ양우조ㆍ조성환ㆍ박찬익ㆍ차리석ㆍ이복원
감찰위원장 : 이동녕
감찰위원 : 이시영ㆍ공진원ㆍ김의한 (주석 11)
조소앙은 동생 조시원과 나란히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고,
120.
120
당의ㆍ당강ㆍ당헌 등을기초하였다. 정치적 목표는 3균주의에 근거한 것이었다.
1935년 상하이에서 창립된 한국독립당의 당의ㆍ당강ㆍ정책을 대부분 그대로
승계하였다.
조소앙의 사상과 신념이 물씬나는 한국독립당의 당의와 당강, 당책을 차례로 소개한다.
당의
이에 본당은 혁명적 수단으로써 일본의 모든 침략세력을 박멸하여 국토와 주권을 완전
광복하고, 정치ㆍ경제ㆍ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건설하여서 안으로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하며, 밖으로는 민족과 민족국가와 국가와의 평등을
실현하고 나아가 세계일가의 진로를 향함.
당강
1. 국토와 주권을 완전 광복하여 대한민국을 건립할 것.
2. 우리 민족 생존 발전의 기초 조건인 국토ㆍ국권ㆍ국리를 보위하며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발양할 것.
3. 보선제를 실시하여 국민의 참정권을 평등히 하고 성별ㆍ교파ㆍ계급 등의 차별이
없이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리를 균등화할 것.
4. 토지 및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하여 국민의 생활권을 균등화할 것.
5. 국민의 생활상 기본지식과 필수기능을 보급함에 충족한 의무교육을 국비로 실시하여
국민의 수학권을 균등화할 것.
6. 국방군을 편성하기 위하여 국민에게 의무병역을 실시할 것.
7. 평등호조의 우의로써 우리 국가 민족을 대우하는 국가 및 민족으로 더불어 인류의
121.
121
화평과 행복을공동촉진할 것. (주석 12)
주석
9> 한시준, <대한민국임시정부(3)중경시기>,
8~9쪽, 독립기념관, 2009.
10> 삼균학회, <3당해체선언>, <소앙선생문집> 상, 264쪽.
11> 김구, <백범일지>(백범학술원 총서2), 387쪽, 백범 김구선생 기념관.
12> 백범김구선생전집 편찬위원회, <백범김구전집> 6, 62~63쪽, 대한매일신보사,
1999.
[37회] 한국국민당의 진보적인 당의ㆍ당강ㆍ당책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9장] 피난기 통합운동과 임시정부 외교위원장 2014/06/26
08:00 김삼웅
한국국민당의 당의와 당강 그리고 당책은 70여 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 정당의 강령,
정책 보다 더 진취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조소앙과 한국국민당 지도자들의 신념을
살피게 한다.
한국독립당의 정치적 목표는 삼균주의에 근거한 것이었다. 삼균주의는 1920년대
조소앙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균등사회를 건설한다는 정치이념이었다. 삼균주의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정치ㆍ경제ㆍ교육 균등을 통해 개인과 개인의 균등생활을
실현하고, 이를 토대로 민족과 민족ㆍ국가와 국가의 균등생활을 이루며, 나아가
세계일가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정치ㆍ경제ㆍ교육의 균등에 기초한
신민주국을 건설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정리하였다. (주석 13)
한국독립당의 주요 당책도 살펴보자.
122.
122
당 책
△ 일반 민중들에게 당의와 당강을 적극 선전하여 민족의 혁명의식을 불러일으킨다.
△ 국내외의 우리 민족의 혁명역량을 집중하여 광복운동의 총동원을 실시한다.
△ 장교와 무장대오를 통일적으로 훈련하여 광복군을 적극적으로 편성한다.
△ 일본의 침략 세력을 박멸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대중의 반항, 무장투쟁,
국제적 선전 등 독립운동을 확대하고 강화하여 전면적인 혈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한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지지한다.
△ 한국독립운동을 동정하고 원조하는 민족 및 그 국가와 연락하여 우리의 광복운동의
역량을 충실하게 한다.
△지금 일본에 대하여 용감히 항전하고 있는 중화민국과 연락하여 한중 동맹군으로서의
구체적인 행동을 시행한다. 본당은 위의 당의ㆍ당강ㆍ당책에 의거하여 위대한 역사적
사명과 혁명적 행동에 과감히 돌진하며 이족 침략세력을 일거에 박멸함으로써 우리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고 정치ㆍ경제ㆍ교육 3권이 균등한 신 민주국가를 건립하며
이것으로 전국 각계 민중들에게 책임지고 선포합니다.
동지들! 동포들! 최근 10여 년간 포악한 일본 최후의 흉악한 기세는 아시아 전역의
광대한 지역에 뻗어있다. 일본은 아시아를 독차지할 꿈을 이루기 위해 중국에 대하여
무리한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며, 남북의 각성(各省)에서 마음대로 불지르고
약탈ㆍ학살ㆍ간음하는 짐승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우리 독립운동을 방해하기
위하여 전국 13도의 각계각층에 마수를 뻗쳐 이것도 저것도 아닌 단체들을 조직하여
우리 민중의 혁명적 의식과 역사적 정신을 암살하려 하고 있다 (주석 14)(하략).
조소앙은 1939년 11월 임시정부국무회의에서 외교부장 겸 선전위원회 주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김구 내각의 각료와 선전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외교부장직은 일제 패망
123.
123
때까지 맡게되면서 격동기의 주요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소앙은 유려한 문장력과 외교적 감각으로 임시정부의 각종 성명서와 주요 외교문서,
정책문건을 집필하여 필력을 날렸다. 1940년 3ㆍ1운동 제21주년을 맞아 사천에서
한국혁명 단체의 3ㆍ1절 기념대회에서 <3ㆍ1운동 제21주년기념선언>을 발표하였다.
주요 대목을 발췌한다.
중국항전이 30개월을 경과한 이 때에 중국항전의 근거지인 사천에서 우리가 이 역사적
기념일을 두 번째 맞게 되는 것은 특별한 의의와 흥분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3ㆍ1운동의 의의를 규명하고 현재 국내외의 정세를 고찰하여, 우리의 당면
임무를 규정하는 것이 이날의 기념을 더욱 의의있게 할 것이다.
3ㆍ1운동 이후 20년의 한국민족운동의 발전은 비록 허다한 파란곡절을 경과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모두 3ㆍ1운동의 계속 발전인 것은 사실이며, 이것이 또 우리 민족의
자유독립을 완성할때까지 계속할 것도 보증하는 바이다.
그런데 현재의 객관정세는 3ㆍ1운동의 전야보다도 우리에게 유리한 방면에서 또 다시
제2차의 3ㆍ1운동을 상상하게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내일의 신성한 사업을 위하여
준비 공작을 최촉하고 있다. 중ㆍ일전쟁은 이미 30개월을 지나서, 중국의 항전 역량은
더욱 더 증진되고, 왜적은 무한한 침략전으로 인하여 병력의 부족과 재정의 파산과
문자의 결핍과 민기(民氣)의 소침과 국민의 염전과 국제상의 고립 등으로 정희 진전
중에 있어서 모든 침략적 흑암의 세력은 맹렬한 포화 중에서 매일 폭로 파멸되고 있는
중이다. 이번 세계적 동원과 최후 결과는 필경 세계상 피압박민족의 자주독립과
피압박계급의 해방과 제국주의의 소멸로서 결속될 것이다.
다음에 우리 2천 3백만 동포는, 현재 적의 정신과 물질을 총괄한 전시체제 강화와
더우기 미증유의 한재로 인한 극도에 달한 천재인화(天災人禍) 중에서, 생존번영의
신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내일의 독립혈전을 침착하게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중국기관
내에 있는 우리 혁명 각 단체는 중ㆍ일 대전이 개시되면서부터 통일 단결의 필요를
124.
124
절감하고, 이것을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여 왔고, 또 과거 1년 중에는 이것만을 위하여
시종 노력하여 왔으나, 우리의 기대하던 통일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내외의 정세가 긴박한 관두에 임한 우리 혁명자 자신들은 일층 더 심각히
경척(警惕)하여 속히 통일단결을 환성하고 중국항쟁과 배합하여, 우리 한ㆍ중 양 민족의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우리의 최후의 승리를 전취하며 동아의 진정한
평화를 건립하여야 한다.
우리의 구호는
1. 3ㆍ1정신을 계승하여 한국의 독립을 완성하자!
2. 중국항전과 배합하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3. 한국독립 만세!
4. 중국 항전승리 만세!
5. 피압박 민족해방 만세! (주석 15)
한국국민당은 임시정부의 한 축으로서 정부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내 세력
구조는 김구ㆍ조완구ㆍ박찬익ㆍ엄항섭 등이 주류가 되고, 조소앙ㆍ홍진ㆍ유동열 등이
비주류 즉 야당의 역할을 하였다. 창당 초기에는 김구 계열이 주류가 되었으나 1943년
5월 제3차 전당대회에서는 조소앙 계열이 주류로 바뀌었다.
조소앙은 전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됨으로써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까지
한국국민당의 영수가 되었다. 미ㆍ일 전쟁이 발발하고 중국의 정세가 급변하면서
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한국국민당과 민혁당 사이에 적잖은 갈등이
생기고, 이의 여파로 홍진ㆍ유동열 등이 왕을 떠났다.
125.
125
주석
13>한시준, 앞의 책, 15쪽.
14> 신주백, 앞의 책, 275~276쪽, 재인용.
15> 강만길, 앞의 책, 156~157쪽.
[38회] 중ㆍ일전쟁기 중국의 정세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10장] 대일 선전포고문 작성하다 2014/06/27 08:00 김삼웅
1937년 7월 7일 일제의 베이징 부근 노구교 도발은 중ㆍ일전쟁의 시발점이 되고,
국공합작을 급속히 구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장개석은 노산회의에서(7월 17일) “만약 일단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토지의 남북을
불문하고 노소를 구분할 것 없이 누구든지 국토를 지키고 항전할 책임이 있다”고
호소하고, 일본군이 상하이까지 점령하자 국민정부는 항일자위선언을 발표한데 이어
300여 명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뒤늦게 나마
본격적인 항일전의 체제를 갖춘 것이다.
모택동의 중공군은 이 해 8월 말 <항일구국 10대 강령>을 발표하여 항일민족
통일전선의 구체적인 과제를 제시하였다.
1. 일제 타도
2. 전국적인 군사력의 총동원
3. 전국민중의 총동원(구국의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 및 무장저항의 자유)
4. 정치가구의 개혁(국민대회의 소집, 민주주의적 헌법의 채택, 민주집중적인
126.
126
국방정부의 선거)
5. 항일외교정책
6. 전시의 재정경제정책
7. 민중생활의 개선
8. 항일을 위한 교육정책
9. 민족배반자, 매국노, 친일파 일소
10. 항일을 위한 민족단결(국공양당의 협력을 기초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여
항일전쟁을 지도한다) (주석 1)
일제의 중국침략전은 거칠것 없이 진행되었다.
점령지구는 1937년 8월부터
남구→장가구→대동→보정→창주→집념→포두→석가장→나태→덕주→안양→대명→
태원→남경→상해로 이어졌다. 그리고 1938년 말까지
산서→산동→하북→치하얼→수원→서주→무한→광주로 전개되었다. 그야말로
‘중원’이 일제의 점령지로 떨어졌다.
하지만 일본군의 공격은 주로 점과 선으로 연결되었다. 그들이 실제로 점령한 것은
대도시와 주요철도선 뿐이었다. 여전히 광막한 대륙은 중국ㆍ중공군의 영역이었다.
1937년 9월 팔로군이 평형관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1938년 3월
산동성 태아장의 승리, 하북성 중구와 태행산 등 곳곳에 항일유격근거지가 마련되고
민병이 구성되어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하였다.
모택동은 1938년 5월 <지구전론(持久戰論)>에서 중ㆍ일전쟁의 특징을 제시하면서
일본측의 기본적인 조건을 분석하였다.
127.
127
1. 일본은강력한 제국주의이고, 그 군사력, 경제력, 정치조직력은 동양에서 제1급이며,
세계에서도 굴지의 제국주의국가 중 하나이다. 이것은 일본의 침략전쟁과 단기결전의
기초를 이룬다.
2. 일본사회 경제의 제국주의적 성격때문에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이 생겨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퇴보적이며 야만적이다.
3. 일본의 군사력, 경제력ㆍ정치조직력은 선천적으로 부족한 것이 많다. 그것은
장기전을 곤란하게 할 것이다.
4.일본은 국제적인 파시스트세력의 원조를 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우세한
국제적인 반파소세력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모택동은 이어 중국측의 기본조건을 제시하면서 지구전의 중요성을 분석하였다.
1. 중국은 반식민지 반봉건의 약소국이다. 더구나 중국의 군사력, 경제력은 일본보다
열악하다. 이 때문에 전쟁은 피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은 장기전이 될 수 밖에 없다.
2.중국의 항일전은 100년 가까운 혁명운동의 축적 위에 진행되고 있고, 그 전쟁은
점진적인 것이다. 또한 이 전쟁의 진보성에서 전쟁을 받쳐주는 내면적인 힘, 즉
정의성이 생긴다.
3.중국을 매우 큰 나라이고 물자가 풍부하며, 인구가 많기 때문에 병력을 언제든지
충당할 수 있어서 장기적으로 전쟁을 지탱할 수 있기 때문에 장기전이 유리하다.
4.중국에 대한 국제적인 원조가 많다. (주석 2)
주석
128.
128
1> 중국사연구회편저, <중국혁명의 전개과정>, 232쪽, 거름, 1985.
2> 앞의 책, 333~334쪽.
[39회] 한국광복군 창설, ‘사령부성립보고서’ 마련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10장] 대일 선전포고문 작성하다 2014/06/28 08:00 김삼웅
중국의 항일전은 모택동의 중공군이 앞서고,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뒤쫓는 형국이었다.
국민당군이 본격적인 항일전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중공군의 항일전과 더불어
광범위한 민중의 항일요구를 외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편성할 수 있게 되었다.
중ㆍ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7월 15일 임시정부는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바
있는 유동열ㆍ이청천ㆍ이복원ㆍ현익철ㆍ김학규ㆍ안공근을 중심으로 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전시체제에 대처하는 군사정책과 활동을 전담케 하려는 기구였다. 1939년
사천성 기강에 도착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 해 11월 국무회의에서 조소앙이 마련한
<독립운동방략>을 채택하고, 이에 대한 무장독립군의 편성에 착수했다.
임시정부는 미주 국민회 등에 광복군 창설 소식을 알리고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조성환을 책임자로 군사특파단을 조직하여 산서성 서안에 파견하였다. 이 지역에는
한인 20여만 명이 살고 있어서 한일청년들을 모집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관련 중국정부(국민당정부)를 상대로 교섭을 벌이기로 하였다. 일본군에는 적지
않은 한인 사병들이 있는데 이들을 빼내면 적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중국의
항일전에도 크게 도움을 주게 된다고 설득하였다. 그리고 중국이 동북지방을 수복하는
데는 그곳에 사는 한인들이 큰 역할을 하게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임시정부 군사위원회는 <한국광복군 편련계획대강>을 마련하여 중국정부에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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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출하였다. 한국광복군이중국군과 함께 연합작전을 전개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중국군 실무진에서 광복군이 중국군과 대등한 관계는 인정할 수 없다면서 광복군은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임시정부는 독자적으로 광복군을 창설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만주 한국독립군 출신
이청천을 총사령으로 하여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구성하였다. 1940년 9월 15일 김구
주석의 명의로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하고 9월 17일 중경의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거행하였다.
조소앙은 한국광복군총사령부전례식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 보고서를 통해 광복군의 역사적 의의와 성립과정, 향후 과제 등을 살피게 한다.
보고서는 1. 광복군과 역사상 국제전쟁. 2. 포츠머스조약과 한국. 3. 국방군의 해산과
광복군의 창립. 4. 광복군의 국외로의 이전. 5. 대한민국과 광복군. 6. 중ㆍ로의 일본
타협과 광복군. 7. 광복군과 중국. 8. 광복군의 임무와 구성 등으로 구성되었다. 조소앙의
광복군의 ‘정신사’가 오롯이 담겼다고 하겠다. 차례로 살펴보자.
1. 광복군과 역사상 국제전쟁
한국민족의 건국한 역사가 5천 년이다. 중국ㆍ이집트ㆍ그리스ㆍ인도와 함께 가장 오랜
문화민족의 하나였다. 2천 5백만 인구와 8만 4천 평방마일의 강토를 가졌으므로 우리의
국군의 수는 50만 내지 100만을 수요한다. 한국민족의 전성시대는 강병 100만을 두어
강폭한 이웃 민족의 침략을 몰아내며 안으로는 국가의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독립국가를 항구 여일히 유지하였었다.
18세기 말엽에 왜란을 당하여 해군대장 이층무공과 육군 권도원수는 명나라 장수
송봉창ㆍ양호ㆍ진린ㆍ이여송 등으로 더불어 8년 동안을 싸워서 비로소 왜적을
130.
130
구축하였다. 18세기만주족과 충돌되어 여러 번 싸우며 여러 번 강화하였다. 이 두
전쟁을 치른 후로 우리의 민족정신은 고급적으로 발전되어 국방군을 훈련함에
거국일치로 노력하였었다. 유럽의 신무기인 총포와 중국 명장 척계광의 전략은 3백여
년 전 이전에 벌써 우리가 채용하였다.
2. 포츠머스 조약과 한국
18세기 하반기 이래로 서양의 세력이 동으로 달려들며 이웃민족은 틈을 엿보여 내란이
자주 일어났었다. 노ㆍ일전쟁이 끝나면서 포츠머스 조약이 한국을 희생시키고 말았다.
을사ㆍ경술 5, 6년 간에 수십 종 망국조약은 우리 2천 5백만 민족으로 하여금 일절의
부로(포로)가 되게 하여 13도 국토는 적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광대무량한 일체
경제권리는 전리품이 되며 중요한 국방군은 적에게 해산되어(정미년 8월 1일) 5천 년
독립국가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3. 국방군의 해산과 광복군의 창립
(…) 전후 10여 년 동안 우리의 남녀노유 중 적에게 도살된 자가 50만이며 적군이
우리에게 섬멸된 것이 무수하였다. 말하자면 정미년 8월 1일 국방군 해산의 날이 곧
광복군이 창립된 날이라 할 것이다. 금년 8월은 마침 33주년이 되었으며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이 8월 4일에 되었음은 광복군의 역사적 의미가 더욱 명백하게 표현된
것이다.
4. 광복군의 국외로의 이전
광복군이 국내에서 항전한 지 5, 6년에 왜놈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였으나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또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오래 저항하였으므로 민족정신을 발휘하여
위대한 민족영웅과 혁명선열을 부단히 배출하게 되었다. 경술 신해 이후로 우리의
국치와 중국혁명이 앞뒤를 이으며 광복군 대본영은
상해ㆍ동삼성ㆍ해삼위ㆍ호놀룰루ㆍ샌프란시스코 등을 근거로 하여 비밀리에 미국과
러시아와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군사와 외교를 추진하여 왔었다. 동삼성의 신흥학교와
131.
131
호놀룰루의 병학교와운남의 사관학교는 기미년 이전 한국광복군의 기간부대
양성소였다.
5. 대한민국과 광복군
3ㆍ1운동 당시에 임시정부는 국내외 무장한 군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기 위하여
조례를 반포하고 총사령부를 세워 동삼성에 3가지 군사기관으로 하여금 2백만 교포를
통제하여 장정과 군량을 징발하여 맹렬히 적과 싸웠다. 일본총독은 한국에 있는
3사단의 병력으로는 남북만주 독립군에 대항하기에 너무 박약함을 깨달아 3사단을
늘리려 하였으나 경비선, 교통망, 정탐망 포대와 보루, 군용철도, 비행기, 철갑차를
비상히 확장하여 경찰과 밀탑 편의대를 총동원하여 정식국가에 대한 전쟁과 다름없이
싸웠으나 적은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하였다.(…)
1931년 이후로는 동삼성의 한국군과 중화군이 서로 연결하여 왜놈을 토멸하기에
전력하는 무장세력이 아직도 5, 6만에 쓸 만한 군대가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건국군이며 민족의 전위대이며 공동한 원수를 타도하는 한ㆍ중 양군에 선봉군이며
동양화평을 건설할 임무를 가진 기간부대이다.
6. 중ㆍ러의 일본타협과 광복군
(…) 근자 러시아와 일본이 타협할 시기에 있어서 우리 군대는 러시아 경내에 접촉을
못하게 되었고, 삼시(三矢)협정이 동삼성에서 체결됨에 무한한 험난 중에 국제상으로
아무 원조도 없고 국내 민중의 옹호와 지지도 잃게 되었다. 과거의 우리 군대는
가지각색의 위협과 구박을 받았고, 더우기 무기와 군자금의 곤란이 심하였다.
그러나 구사일생의 희생적 정신으로 수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왜적을 대파하기를 수십
년 내로 계속되었으니 과연 약소민족운동사상에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사실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렇게 투쟁을 계속 부단하면서 오직 우방 중국이 왜적과 싸우기를
132.
132
고대하며 촉성하였었다.
7. 광복군과 중국
(…) 오늘은 마침 중국의 최고영수 장개석 선생이 동구 적개의 의리와
손중산(손문)선생의 약소민족을 부조하라는 유훈에 의거하여 중국 경내에서 우리
광복군의 편성과 활동을 허락하는 동시에 중국 지방당국에게 명령하여 우리
군대활동의 편의를 수시 지시하여 방조하여 주라 하였으니 이로부터는 확실히 한ㆍ중
연합군의 성립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국임시정부가 전에 규정된 광복군 조례와 총사령부 조직 대강에 의하여 금년 8월
4일에 총사령부를 설립하고 그 전례를 9월 17일에 중국 중경에서 거행하는 금일에
있어서 한ㆍ중 5천 년 역사적 신의와 교분이 좋게 되었다. 협력하는 동안에 더욱
독실하게 추진될 것이 자연의 추세이다.
8. 광복군의 임무와 구성분자
우리 광복군은 파괴와 건설의 임무가 있다.
파괴방면으로서 ① 한국 내에 있는 왜적의 일제 침략적 정치ㆍ경제ㆍ군사ㆍ문화ㆍ교통
등의 기구를 박멸할 것. ② 국내 한인의 일체 봉건세력, 반혁명세력과 왜적에게 아부하는
각종의 악랄한 소인을 숙청할 것. ③ 재래의 모든 악풍, 오속을 타파할 것이다.
건설방면으로서 ① 대한민국 건설방침에 의하여 정치ㆍ교육ㆍ경제의 균등제도(토지의
국유, 보선제도, 국비 교육, 의무교육 연한의 연장 등을 실현할 것)를 수립할 것.
②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평등한 지위를 실현할 것. ③ 우리에게 평등대우하는
자로 더불어 반드시 유수하여 세계 인류의 화평과 행복을 위하여 협력촉진할 것 등이다.
우리 광복군의 임무가 결정됨에 따라서 그 구성분자도 자연 정해질 것이다. 조국의
133.
133
독립과 민족의해방을 위하여 싸우려는 자, 공화국과 합리화한 사회를 건립하기 위하여
싸우는 자는 모두 우리 광복군 깃대 아래 모여 뒤를 돌아 볼 것 없이 용약매진하여
인류의 목적인 왜적을 섬멸하고 국가기초를 영원무궁하게 세울 것이다. 정의 인도를
주장하는 우방인사에게 많은 지교를 바란다. (주석 3)
주석
3> 강만길, 앞의 책, 97~101쪽. (발췌)
[40회] 미ㆍ일전쟁 발발, 김구와 대일 선전포고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10장] 대일 선전포고문 작성하다 2014/06/29 08:00 김삼웅
중국이 아무리 일제의 침략을 당하고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 내전을 치루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처지라 하더라도 자국 내에 남의 나라 군대를 양성하는 일을 허용하기란
쉽지 않았다.
중국군 당국은 한국광복군을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을 요구하였지만, 임시정부는
1940년 10월 9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조직조례>를 제정하고 총사령부는 임시정부
주석 직할하에 설치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로써 광복군의 통수권이 김구 주석에
주어졌다. 하지만 상당 기간 이른바 ‘9개준승’에 묶여 자유로운 활동이 제약되었다.
우리나라는 1907년 7월 31일 이른바 한일신협약에 따라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당한 지 33년 만에 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 광복군이 창설되었다.
조소앙은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보고서>를 통해 국군의 역사와 사명, 책무를
정리하고, 광복군은 이를 교육훈련 과정에 자료로 활용하였다.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고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체제로 전환하는 등
전시체제를 마련하고 있을 때 국제정세는 제2차 세계대전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34.
134
1940년 6월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9월에는 일본ㆍ독일ㆍ이탈리아 3국이
군사동맹을 체결하였다. 1941년 4월에 일본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맺고, 6월에는
독일군이 소련을 기습한 데 이어 12월 6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다.
임시정부와 한국독립운동가들은 오래 전부터 미ㆍ일전쟁을 기대해왔다. 일본이
중국전장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고 동남아 일대의 자원을 손에 넣고자 미국을
공격하였다. 일본 전투기들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미 공군과 해군에 큰 피해를 입히고는
개전 반년 만에 필리핀, 말레이반도, 싱가포르, 버마 등을 점령하였다.
조소앙은 미ㆍ일전쟁이 결국 미국이 승리하고 일본이 패망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미ㆍ일전쟁의 발발이 조선독립의 절호의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조소앙의 인식에서 주목되는 점은 태평양전쟁에 중점을 두어
파악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운동 진영이 제2차 세계대전을 파쇼진영 대
반파쇼진영의 대립이라는 국제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시각은 동아시아에서의 실제적
전쟁상황에 중점을 두는 관점이다. 그리고 전쟁을 일본과의 전쟁 당사국 중심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은, 세계사라는 전체적 구도보다는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로
파악하는 국제적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균등 이념의 확산을 세계사적
차원에서 동시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시작하여 점차 국제적 차원으로
확대하여 단계적으로 실현한다는 삼균주의적 사고가 1940년대 초반의 전쟁 국면에
대한 인식에도 확인되는 것이다. (주석 4)
임시정부는 1941년 10월 10일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 명의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국치 31년 만에 일본에 공식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순 한문으로 쓰여진 ‘선전성명서’는 조소앙이 기초하여
의정원의원에서 의결을 거친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임시약헌>
제2장 10조는 “주외사절의 임면 및 조약의 체결과 선전ㆍ강화를 동의함에는 총의원
135.
135
과반수의 출석과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선전성명서’는 전문과 5개 항의 성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번역한 것이
<소앙선생문집>에 실려 있다. 이 번역문은 약간 소략하게 처리된 부분이 있고 어투도
고문체인 것을, 김희곤 교수의 번역을 소개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
우리는 3천 만 한인과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ㆍ영국ㆍ미국
캐나다ㆍ네덜란드ㆍ오스트리아 및 기타 여러 나라가 일본에 대해 선전을 선포한 것이
일본을 격패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므로 이를 축하하면서,
특히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한국의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전선이 참가해 오고 있으며, 이제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축심국(軸心國)에 전쟁을 선언한다.
2. 1910년의 합방조약과 일체의 불평등조약이 무효이며, 아울러 반침략국가가
한국에서 합리적으로 얻은 기득권익이 존중될 것임을 선포한다.
3.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항전한다.
4. 일본세력 아래 조성된 장춘과 남경 정권을 절대로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스벨트ㆍ처칠 선언의 각 항이 한국독립을 실현하는 데 적용되기를 견결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진영의 최후승리를 미리 축원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외교부장 조 소 앙
136.
136
대한민국 23년12월 10일. (주석 5)
이를 위해 임시정부는 외교활동의 영역을 나누었다. 중국국민당 정부에 대해서는
김구와 조소앙이 나서서 활동하도록 하고, 미국에 대해서는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여
이들로 하여금 교섭하도록 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에 대해서는 중경주재 판사처에
머물고 있는 대표들을 통해 접촉하는 방안을 택하였다.
먼저 중국국민당 정부에 대해 장개석과 직접 담판하기로 하고 임시정부는 그
연결망으로 오칠성ㆍ주가화 등 당간부를 선택하였다. 광복군을 창설한 뒤 이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내고자 노력하던 임시정부는 9개 준승이라는 족쇄를 푸는 데
온갖 시도를 다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먼저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해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중국 정부는 광복군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통수권을 장악한 뒤로 쉽게 그것을 돌려주지 않았고, 정부 승인에 대해서도 연합국과의
협의를 기다리면서 뒤로 미루고 있었다. (주석 6)
주석
4> 김기승, 앞의 책, 250쪽.
5>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연구>,179쪽, 지식산업사, 2004.
6> 앞의 책, 188쪽.
[41회] 광복 후 국가건설의 설계도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11장] ‘대한민국건국강령’ 기초하다 2014/06/30 08:00
김삼웅
137.
137
독립운동가 또는사상가로서 조소앙의 최대 업적은 1941년 11월 28일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명의로 발표한 <대한민국건국강령>(건국강령)을 기초한 일일 것이다.
건국강령은 그가 기초한 것이지만, 형식을 임시정부가 광복 후의 민족국가
건설계획으로 제정 발표한 것이다. 당시 조소앙은 외무부장 겸 선전위원회
주임위원이었다. 임시정부 기관지 <임정공보> 제72호에 <건국강령> 전문이
게재되었다.
임시정부가 건국강령을 제정한 시점은 일제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기 40일
전이다.
임시정부는 미ㆍ일전쟁을 내다보고, 그리고 일제의 패망을 예측하면서 조소앙에게
건국강령의 기초를 맡긴 것이다. 머지않아 도래할 해방을 앞두고 임시정부는 새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구상하면서, 이 분야에 전문성을 인정받아 온 조소앙에게
역사적인 건국강령을 위촉하였다.
세계식민지 역사상 해방 후 국가건설과 관련하여 체계 있는 방략을 갖춘 민족은 사례를
찾기 쉽지 않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1년 4월에 이미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언>을
통해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기반하는 광복 후 건설할 민족국가의 대강(大綱)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삼균주의 건국방략은 1930년 1월 창당한 한국독립당의 당의ㆍ당강이
되고, 1935년 11월 김구의 주도하에 결성한 한국국민당, 1940년 5월 재건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과 조선혁명당이 통합하여 결성한 한국독립당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런가
하면 좌익진영의 주요 정당들도 삼균주의를 정치이념으로 채택하였다. 1935년 7월
의열단,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 등 5개 정당이 통합하여
결성한 민족혁명당이 수용하면서 1930년대 중국관내에서 활동하던 좌우익
주요정당들이 삼균주의를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였다.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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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익 정당들이극심한 이데올로기 대립상을 보이면서도 정치 이념과 해방 후
신국가건설의 건국방략으로 삼균주의를 기본골격으로 삼은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었다. 삼균주의 사상이 그만큼 독립운동가(정당ㆍ단체)들의 공통적인 이념과
정책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국강령은 제1장 총강(總綱), 제2장 복국(復國) 10개항, 제3장 건국 7개항 등 모두 3장
24개항으로 구성되었다. 총강은 민족의 과거 내력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제2항에서 새국가운영 원리로서 홍익인간의 구체적인 건국정신의 방안으로
권력ㆍ부력ㆍ지력의 삼균을 제시하였다. 민족국가를 건설하기까지의 단계설정과 그
과정에서 추진할 임무ㆍ절차를 규정하였다. 조소앙은 총강에서 한국은 반반년 이어
민족국가를 유지해 온 고정적인 집단이라는 고유주권설을 거듭 주장한다.
제1장 총강은 모두 7개항으로 구성되었는데, 제3항에서 전통시대의 토지공유제를
중시하여 토지의 국유화를 선언한다. 조선 역사에서 토지가 사유화일 때는 패망하거나
국난에 처하고, 국유화일 때에는 부강하였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제4항에서 독립운동의 민족적 책임을 강조하고, 제5항에서 3ㆍ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서 혁명적인 민주제도가 확립되었음을 강조하고,
제6항에서 1931년 4월에 삼균제도를 발표한 것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당시에 이미
천명한 것이라는 점. 제7항에서 삼균은 복국과 건국의 단계를 밟아 실현한다고 밝혔다.
제2장 복국은 모두 10개항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복국을 3기로 나누어, 독립을
선포하고, 국호를 일정히 행사하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세우고 임시약법과 기타
법규를 제정하고, 인민의 납세ㆍ병역의무를 행하여, 군사력ㆍ외교ㆍ당무ㆍ인심이 서로
융합하여 적에 대한 혈전을 계속하는 과정을 제1기로 삼았다.
제2기에 독립군의 본토 상륙과 국제적 발언권을 확보하고, 3기는 국토를 완전 탈환하여
북국을 완성한다고 제시하였다. 복국기의 공무집행은 임시의정원의 선거로 조직된
국무위원회에서 행하며, 국가의 주권은 광복운동자 전체가 대행토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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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국의 방법으로는민족의 혁명역량을 총집중하고 장교와 무장대오를 통일 훈련하여
광복군을 편성, 혈전을 강화할 것과 대중적 반항, 국제적 외교 및 선전, 일본과 항쟁하는
우방들과 항일동맹군으로서의 구체적 행동을 제시한다.
제3장의 건국은 모두 7개항으로 구성되었다. 제1항은 정부수립을 건국 제1기, 제2항의
건국 제2기는 삼균주의에 의한 민주제도의 실시단계로서 지방자치의 실현, 토지와
대량생산기관의 국유화를 완성하고, 의무교육과 면비 수학 체제를 완성하여
극빈계층까지 생활과 문화수준의 제고가 보장되는 단계로 규정하였다.
제3기는 건국에 관한 기초시설 및 건설기구가 예정계획의 절반 이상 성취된 시기로서
건국의 완성기라고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어떤 한 계층이나 특권계급에 의한 독재를
철저히 배격하고 국민전체가 균등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으로, 국민의 이익을
기초로 하여 정권을 민주적으로 균등화한다고 하였다.
이를 위해 인민의 기본권리(노동권ㆍ휴식권ㆍ피보험권ㆍ참정권ㆍ남녀평등권 등),
의무(납세ㆍ병역ㆍ조국건설보위 등)를 법률로 규정하였다. 중앙정부는 헌법에 의하여
조직된 국무회의가 최고 행정기관으로 국무를 집행하며, 행정 분담을 위해
내무ㆍ외무ㆍ군무ㆍ법무ㆍ재무ㆍ교통ㆍ실업ㆍ교육의 8부로 구성하였다.
지방자치는 도(道)ㆍ부(府)ㆍ군(郡)ㆍ도(島)에 각각 정부와 의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분배의 합리성을 통해 경제균등을 실현하고, 왜적이 약탈하였던
관공ㆍ사유지를 비롯하여 모든 적산ㆍ부일배의 자본 및 부동산 등을 몰수하여 국유로
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또한 토지는 자력자경인(自力自耕人)에게 나누어 주되 토지의 상속ㆍ매매ㆍ저당 등은
금지하였고 대생산기관은 국유를 원칙으로 하되, 소규모 및 중소기업은 사영도
인정하기로 하였다.
특히 교육제도의 기본원칙은 국비 의무교육제도였다. 6~12세까지 초등교육과 12세
이상의 고등교육에 대한 일체 비용은 국가가 부담하고, 학령 초과로 교육을 받지 못한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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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에게는 일률적으로면비 보습 교육을 시행키로 하였다.
지방에는 인구ㆍ교통ㆍ문화ㆍ경제 등의 형편에 따라 교육기관을 시설하되, 최소한 1읍
1면에 5개 소학교와 2개 중학교를, 1군 1도에 전문학교를, 1도에 1개 대학을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교과서는 무료로 나누어주고, 교과서 편찬은 국영이었다.(주석 1)
주석
1> 한시준, <대한민국건국강령>,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103~105쪽, 발췌,
독립기념관.
[42회] 현대적 인권ㆍ권리ㆍ평등ㆍ교육문제 제시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11장] ‘대한민국건국강령’ 기초하다 2014/07/01 08:00
김삼웅
건국강령을 연구해 온 조동걸 교수는 제3장 건국의 제4항과 제5항, 제6항, 제7항을 요약
정리한 바 있다.
제4항 인민의
권리ㆍ의무
㉠ 권리는 노동권ㆍ휴식권ㆍ피구제권ㆍ피보험권ㆍ수학권 등 수익권에 해당하는
권리를 열거했고, 이어 선거권ㆍ파면권ㆍ입법권 등의 참정권을 명시했다. 수익권을
강조하고 파면권과 입법권을 명시한 것이 주목된다.
㉡ 남녀평등권 선언.
㉢ 신체ㆍ거주ㆍ언론ㆍ출판ㆍ신앙ㆍ집회ㆍ결사ㆍ여행ㆍ시위ㆍ통신 등의 자유권을
명시.
141.
141
㉣ 선거권은18세 이상, 피선거권은 23세 이상의 연령제한 외에는 보통 평등 비밀
직접선거의 원칙 천명.
㉤ 적의 부역자, 독립운동 방해자, 건국강령 반대자, 정신 결격자, 범죄 판결을 받은 자는
선거권ㆍ피선거권 박탈.
㉥ 준법 납세 병력 의무를 규정, 1919년 헌법 제6조에 규정한 교육의 의무는 언급이
없는 것이 이상하다.
제6항 경제정책의 원칙
㉠ 중소기업의 사명 외에는 모두 국영으로 함.
㉡ 적의 재산과 부역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
㉢ 몰수재산은 무산자의 이익을 위하여 제공함.
㉣ 토지에 관한 매도ㆍ양도ㆍ저당ㆍ상속ㆍ조차와 고리대금과 고용농업의 금지.
㉤ 국제 무역과 발전소, 대규모의 인쇄ㆍ출판ㆍ영화ㆍ극장의 국유.
㉥ 노유와 여공의 야간노동 금지, 연령ㆍ지대ㆍ시간의 불합리한 노동금지.
㉦ 노동자ㆍ농민의 무료 의약 혜택, 건강권의 규정은 이 조항 뿐이다.
㉧ 토지분배는 고용농ㆍ소학농ㆍ자작농ㆍ소지주ㆍ중지주의 순서로 우선 분급함.
제7항 교육의 기본원칙
㉠ 교육의 기본취지는 혁명공리의 민족정기를 발량하며
국민도덕ㆍ생활지능ㆍ자치능력을 양성.
㉡ 초등교육과 고등(중등) 교육의 국비 의무교육.
142.
142
㉢ 학령초과 자의 보습교육과 빈한한 학령자의 의식 제공.
㉣ 학교수는 최소한 1면에 5개 소학과 2개 중학, 1군에 2개 전문학교, 도에는 1개 대학을
설치.
㉤ 교과서는 국정으로 하고 무료 배본함.
㉥ 중학과 전문학교에서 국민병 실시.
㉦ 공사립 학교의 국가감독과 교포교육에 대한 국가시책을 강조.
누가보아도 국가통제가 철저한 교육정책의 선언이라고 하겠는데 그것은 식민지시대의
후속조치 때문으로 이해된다. (주석 2)
주석
2> 조동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 <한국의 독립운동과 광복 50주년>
고려문화재단, 1995.
[43회] 건국강령, 전문가들의 분석ㆍ평가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11장] ‘대한민국건국강령’ 기초하다 2014/07/02 08:00
김삼웅
<건국강령>에 관한 전문연구가들의 분석ㆍ평가다.
임시정부가 일본의 태평양전쟁 도발을 눈앞에 두고 발표한 건국강령은 해방 후에
귀국하여 수립할 민족국가의 수립 방안을 종합적으로 담은 것으로서 임시정부로서는
20여 년간 지속된 망명정부의 구체적 건국 이념과 방향을 총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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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건국강령은 임시정부로서는 독립운동의 총결산적 의미를 가지며 한편으로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운동 전선이 본 민족해방의 역사적 단계를 가능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주석 3)
건국강령이 공표된 뒤 1942년 연안에서 결성한 독립동맹(김두봉)도 이념상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 학계의 연구 결론이다. 한편 보수적 반대가 있을 것 같아서 조완구의
견해를 추적해 보았더니 그도 건국강령의 옹호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42년부터
의정원의 약헌수개위원회(約憲修改委員會) 위원으로서 새 헌법에 건국강령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회의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때 만든 헌법이 1944년의
임시헌장이다. 임시헌장에서는 그 전문에서 자유ㆍ평등ㆍ진보를 기본정신이라고
선언하면서 제30조 1항에서 국무위원회는 “복국과 건국의 방책을 의결함”이라고
건국강령의 헌법상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주석 4)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에는 삼균주의의 사상 내용과 독립운동 방법론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건국강령>이 삼균주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데는 연구자들의 이견이 거의 없다. 그래도 이 경우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조소앙
개인의 사상으로서의 삼균주의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필자는 이에 주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된
<대한민국건국강령>과 조소앙이 직접 쓴 <대한민국건국강령 초안>을 비교 검토한
결과 흥미 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대한민국건국강령>에서는 ‘삼균주의’라는 용어가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삼균제도’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그런데 임시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확정되기 전 조소앙이 작성한 <대한민국건국강령 초안>에는 균등제도 2회, 균등주의
2회, 혁명적 균등주의 1회, 삼균주의가 3회 사용되고 있다.
또 앞부분에서는 ‘삼균주의’로 표시했다가 ‘균등주의’로 바꾼 것이 2군데 발견된다. 또
‘균생주의’를 ‘삼균주의’로 고친 부분도 있다. 그런데 흥미있는 것은 강령이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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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강ㆍ복국ㆍ건국 세부분으로 나뉘어졌는데, 삼균주의라는 용어는 주로 ‘건국’
부분에서 사용되고 있다. 즉 후반부에서 삼균주의를 고착된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주석 5)
조소앙의 건국강령 초안이 심의과정에서 적잖이 수정되었음을 보여준다. ‘건국강령’의
수정위원회에서 강주홍 위원은 "국유가 당시의 상황에 맞지 않는, 보다 발전된
상황에서 이루어져야 할 내용이라고 하면서 반대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건국강령이
영원하기보다는 과도기적인 것이며, 건국이 된 이후에 상황에 맞게 수정해야 한다는 점
역시 강조되었다.” (주석 6)
조소앙의 <건국강령>은 1944년 임시정부의 마지막 개헌에 중심개념으로 수용되고,
1948년 신생 대한민국헌법에도 반영되었다. 조소앙의 역사인식이 담긴 <건국강령>은
대한민국헌법으로 이어진 것이다.
조소앙이 삼균주의를 독립운동의 지도이념으로 제시한 것은 1930년대였다. 그러나
삼균주의가 구체적인 실천 전략을 갖춘 이론 체계로 확립된 것은 1940년대 초였다.
그것은 1937년 중ㆍ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전쟁
국면이 본격화하면서 이에 따른 독립전쟁 가능성이 현실화하였기 때문이었다.
독립전쟁 수행의 전략적 사고가 삼균주의의 실천전략에 반영되면서 가능한 것이었다.
<대한민국건국강령>에 나타난 삼균주의의 실천전략은 복국 건국
치국의
3단계
전략이었다. 당시를 일본제국주의의 타도를 목표로 하는 민족혁명 단계인 복국 단계로
파악했으며, 사람 사이의 균등보다는 민족과 국가 사이의 균등 실현에 중점을 두었다.
사람 사이의 정치ㆍ경제ㆍ교육 3부분의 균등화는 주로 건국 단계의 사업으로
파악되었다. 이에 따라 조소앙의 독립 활동은 임정의 교전단체로서의 승인을 받는
전시외교에 중점이 두어졌다. (주석 7)
145.
145
주석
3><재발굴 한국독립운동사중국
본토에서의 투쟁>, 295쪽, 한국일보사, 1989.
4> 조동걸, 앞의 책, 130~131쪽.
5> <소앙선생문집>, 154~173쪽, 김기승, 앞의 책, 235~336쪽.
6>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임정 편 1), 七, 건국강령수정위원회회의록, 대한민국 26년
10월 26일.
7> 김기승, <1940년대 조소앙의 정세인식과 삼균주의>, 조만제 편, <삼균주의론선>,
172~173쪽.
[44회] 대한민국건국강령(전문)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11장] ‘대한민국건국강령’ 기초하다 2014/07/03 08:00
김삼웅
임시정부에서 채택 선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전문)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총 강
(1) 우리나라는 우리 민족이 과거 반만년 이래 공통한 말과 국토와 주권과 경제와
문화를 가지고 공통한 민족정기를 길러 온 우리끼리로서 형성하고 단결한 고정적
집단의 최고 조직임.
(2) 우리 나라의 건국정신은 삼균제도에 역사적 근거를 두었으니 선민(先民)이 명령한
바 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지위를 머리부터 꼬리까지 고르게 함)하면 홍방보태평(興邦
保泰平: 나라를 일으키고 태평을 보지함) 하리라 하였다. 이는 사회 각 층 각 계급의
지력(智力)과 권력과 부력(富力)의 향유를 균평하게 하며 국가를 진흥하며 태평을
146.
146
보유하라 함이니홍익인간과 이화세계(理化世界:진리로 세계를 화합) 하자는 우리
민족이 지킬 바 최고공리임.
(3) 우리 나라의 토지제도는 국유에 유법(遺法)을 두었으니 선현의 통론(痛論)한 바
준성조지공분수지법(遵聖祖至公分授之法:聖祖의 지극히 공평하면 分水法에 따름)하여
혁후인 사유겸병지폐(革後人私有兼倂之弊: 혁명을 일으킨 후에 사람들이 사사로이
겸병하는 패단이 있었음)라 하였다. 이는 문란한 사유제도를 국유로 환원하라는
토지혁명의 역사적 선언이다. 우리 민족은 고규와 신법을 참호(參互)하여 토지제도를
국유로 확정할 것임.
(4) 우리 나라의 대외주권이 상실되었을 때에 순국한 선열은 우리 민족에게 동심복국(同
心復國)할 것을 유촉하였으니 이른바 망아동포(望我同胞:우리 동포에게 바라는 것)는
물망국치(物忘國恥 : 국가의 치욕을 잊지 말라)하고 견인노력하여 동심동덕으로
이한외모(以捍外侮 : 외부로부터의 모욕을 막음)하여 북아독립(復我獨立)하라 하였다.
이는 전후 순국한 수 십만 선열의 전형적 유지로서 현재와 장례에 민족정기를
고통함이니 우리 민족의 노소남녀가 영세불망할 것임.
(5) 우리나라의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의 발인(發軔:일의 출발)이며
신천지의 개벽이니 이른바 “우리 조국이 독립국임과 우리 민족이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천명하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여 민족 자존의 정권을 영유하라”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의 3ㆍ1혈전을
발동한 원기이며 동년 4월 11일에 13도 대표로 조직된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임시정부와 임시헌장 10조를 창조 발표하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자력으로써
이족 통치를 전복하고 5천 년 군주정치의 구각(舊殼 : 낡은 바탕)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여 사회의 계급을 소멸하는 제일 보의 착수이었다. 우리는 대중의
혈육으로 창조한 신국가형식의 초석인 대한민국을 절대로 옹호하며 확립하며
공동혈전할 것임.
(6) 임시정부는 13년 4월 대외선언을 발표하고 삼균제도의 건국원칙을 천명하였으니
147.
147
이른바 “보통선거제도를실시하여 정권을 균하고 국유제도를 채용하여 이권을 균하고
공비(共費)교육으로서 학권을 균하며 국내외에 대하여 민족자결의 권리를 보장하여서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와의 불평등을 혁제(革除)할지니 이로써 국내에 실현하면
특권계급이 곧 소망하고 소수민족의 침릉(侵凌)을 면하고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권리를
고루히 하여 헌지(軒輊 : 수레의 앞이 높았다 낮았다 함. 높음과 낮음)가 없게 하고 우리
민족이 이족에 대하여 또한 이러하게 한다” 하였다. 이는 삼균제도의 제1차 선언이니 이
제도를 발양 확대할 것임.
(7) 임시정부는 이상에 근거하여 혁명적 삼균제도로써 복국과 건국을 통하여 일관한
최고 공리인 정치ㆍ경제ㆍ교육의 균등과 독립ㆍ민주ㆍ균치의 3종 방식을 동시에
실시할 것임.
제2장 복 국
(1) 선포 독립하고 국호를 일정히 하여 행사하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세우고
임시약법과 기타 법규를 반포하고 인민의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행하며 군력과 외교와
당부와 인심이 서로 융합하여 적에 대한 혈전을 정부로써 계속하는 과정을 복국의
제1기라 할 것임.
(2) 일부 국토를 회복하고 당ㆍ정ㆍ군의 기구가 국내에 전전(轉奠 :옮겨 정함)하여
국제적 지위를 본질적으로 취득함에 충족한 조건이 성숙할 때를 복국의 제2기라 할
것임.
(3) 적의 세력에 포위된 국토와 부로된 인민과 침점된 정치ㆍ경제와 말살된 교육과 문화
등을 완전히 탈환하고 평등지위와 자유의지로써 각국 정부와 조약을 체결할 때를
복국의 완성기라 할 것임.
(4) 복국기에는 임시약헌과 기타 반포한 법규에 의하여 임시의정원의 선거로 조직된
148.
148
국무위원회로써 복국의공무를 집행할 것임.
(5) 복국기의 국가주권은 광복운동자 전체가 대행할 것임.
(6) 삼균제도로써 민족의 혁명의식을 환기하며 국내의 민족의 혁명역량을 집중하여
광복 운동의 총동원을 실시하며 장교와 무장대오를 통일 훈련하여 상당한 병력의
광복군을 곳곳마다 편성하여 혈전을 강화할 것임.
(7) 적의 침탈세력을 박멸함에 모든 수단을 다하되 대중적 반항과 무장적 투쟁과 국제적
외교와 선전 등의 독립운동을 확대 강화할 것임.
(8) 우리 독립운동을 동정하고 원조하는 민족과 국가와 연락하여 광복운동의 역량을
확대할 것이며 적 일본과 항쟁하는 우방과 절실히 연락하여 항일동맹군의 구체적
행동을 취할 것임.
(9) 복국 임무가 완성되는 단계에 건국임무에 소용되는 인재와 법령과 계획을 준비할
것임.
(10) 건국시기에 실행할 헌법과 중앙과 지방의 정부조직법과 중앙의정원과
지방의정원의 조직 및 선거법과 지방자치제도와 군사외교에 관한 법규는 임시의정원의
기초와 결의를 경과하여 임시정부가 이것을 반포할 것임.
제3장 건국
(1) 적의 일체 통치기구를 국내에서 완전히 박멸하고 국도를 전정(奠定:정함)하고
중앙정부와 중앙의회의 정식활동으로 주권을 행사하며 선거와 입법과 임관과 군사와
외교와 경제 등에 관한 국가의 정령이 자유로 행사되어 삼균제도의 강령과 정책을
국내에 추행(推行)하기 시작하는 과정을 건국의 제1기라 함.
(2) 삼균제도를 골자로 한 헌법을 실시하여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민주적 시설로 실제상
149.
149
균형을 도모하며전국의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가 완성되고 전국 학령아동의
전수가 고급 교육의 면비수학(免費受學)이 완성되고 보통선거제도가 구속 없이 완전히
실시되어 전국 각 이ㆍ동ㆍ촌과 면ㆍ읍과 도ㆍ군ㆍ부와 도의 자치조직과 행정조직과
민중 단체와 민중조직이 완비되어 삼균제도와 배합 실시되고, 경향 각 층의 극빈 계급의
물질과 정신상 생활정도와 문화 수준이 제고 보장되는 과정을 건국의 제2기라 함.
(3) 건국에 관한 일체 기초적 시설, 즉
군사ㆍ교육ㆍ행정ㆍ생산ㆍ위생ㆍ경찰ㆍ농ㆍ공ㆍ상ㆍ외교 등 방면의 건설기구와
성적이 예정계획의 과반이 성취될 때를 건국의 완성기라 함.
(4) 건국기의 헌법상 인민의 기본권리와 의무는 다음 원칙에 의거하고 법률로 영정시행(
另定施行)함.
가.
노동권ㆍ휴식권ㆍ피구제권ㆍ피보험권ㆍ면비수학권ㆍ참정권ㆍ선거권ㆍ피선거권ㆍ파
면권ㆍ입법권과 사회 각 조직에 가입하는 권리가 있음.
나. 부녀는 경제와 국가와 문화와 사회생활상 남자와 평등권리가 있음.
다. 신체자유와
거주ㆍ언론ㆍ저작ㆍ출판ㆍ신앙ㆍ집회ㆍ결사ㆍ여행ㆍ시위ㆍ운동ㆍ통신ㆍ비밀 등의
자유가 있음.
라. 보통선거에는 만 18세 이상 남녀로 선거권을 행사하되
신앙ㆍ교육ㆍ거주연수ㆍ사회출신ㆍ재산상황과 과거행동을 분별치 아니하며 선거권을
가진 만 23세 이상의 남녀는 피선거권이 있으되 매 개인의 평등과 비밀과 직접으로 함.
마. 인민은 법률을 지키며 세금을 바치며 병역에 응하며 공무에 복하고, 조국을 건설
보위하며 사회를 시설 지지하는 의무기 있음.
바. 적에 부화한 자와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건국강령을 반대한 자와 정신이 결함된
150.
150
자와 범죄판결을받은 자는 선거와 피선거권이 없음.
(5) 건국시기에 헌법상 중앙과 지방의 정치기관은 아래 열거한 원칙에 의거함.
가. 중앙정부는 건국 제1기에 중앙에서 총선거한 의회에서 통과한 헌법에 의거하여
조직한 국무회의의 결의로 국무를 집행하는 전국적 최고행정기관인 행정 분담은
내ㆍ외ㆍ군ㆍ법ㆍ재ㆍ교통ㆍ실업ㆍ교육 각 부로 함.
나. 지방에는 도에 도정부, 부ㆍ군ㆍ 도에 부ㆍ군ㆍ도정부를 두고 도에 도의회,
부ㆍ군ㆍ도에 부ㆍ군ㆍ도의회를 둠.
(6) 전국시기의 헌법상 경제체계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함과 민족 전체의 발전
및 국가를 건립 보위함에 연환(連環) 관계를 가지게 하되 다음의 기본원칙에 의거하여
경제 정책을 실시함.
가. 대생산기관의 공구와 수단을 국유로 하고 토지ㆍ광산ㆍ어업ㆍ농림ㆍ수리ㆍ소택(沼
澤)과 수상ㆍ육상ㆍ공중의 운수사업과 은행ㆍ전신ㆍ교통 등과 대규모의 농ㆍ공ㆍ상
기업과 성시공업구역의 공동적 주요 방산(房産 : 국내생산)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또는
중등 기업은 사영으로 함.
나. 적의 침점 혹은 시설한 관공사유토지와
어업ㆍ광산ㆍ농림ㆍ은행ㆍ회사ㆍ공장ㆍ철도ㆍ학교ㆍ교회ㆍ시찰ㆍ병원ㆍ공원 등의
방산과 기지와 기타 경제ㆍ정치ㆍ군사ㆍ문화ㆍ교육ㆍ종교ㆍ위생에 관한 일체
사유자본과 부적자(附敵者 : 적에 아부한 자)의 일체 소유자본과 부동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
다. 몰수한 재산은 빈공ㆍ빈농과 일체 무산자의 사익을 위한 국영 혹은 공영의
집단생산기관에 충공함을 원칙으로 함.
151.
151
라.토지의 상속ㆍ매매ㆍ저압(低押)ㆍ전양(典讓)ㆍ유증(遺贈)ㆍ전조차(轉租借)의
금지와 고리대금업과 사인의 고용, 농업의 금지를 원칙으로 하고,
두레농장ㆍ국영공장ㆍ생산ㆍ소비와 무역의 합작기구를 조직 확대하여 농ㆍ공대중의
물질과 정신상 생활정도와 문화 수준을 제고함.
마.국제무역ㆍ전기ㆍ자래수(自來水 : 수도)와 대규모의 인쇄ㆍ출판ㆍ전영(電影 :
영화)ㆍ극장 등을 국유 국영으로 함.
바.노공ㆍ유공ㆍ여공의 야간노동과 연령ㆍ지대ㆍ시간의 불합리한 노동을 금지함.
사. 공인과 농인의 면비의료를 보시(普施 : 넓게 시행)하며 질병소멸과 건강보장을 힘써
행함.
아. 토지는 자력자경인에게 분급함을 원칙으로 하되 원래의
고용농ㆍ자작농ㆍ소지주농ㆍ중지주농 등 농민 지위를 보아 저급으로부터 우선권을 줌.
(7) 전국시기의 헌법상 교육의 기본원칙은 국민 각개의 과학적 지식을 보편적으로 균화(
均化)하기 위하여 다음 원칙에 의거하여 교육정책을 추행함.
가. 교육 종지(宗旨)는 삼균제도로 원칙을 삼아 혁명공리의 민족정기를 배합 발양하며
국민도덕과 생활기능과 자치능력을 양성하여 완전한 국민을 조성함에 둠.
나. 6세부터 12세까지의 초등교육과 12세 이상의 고등기본교육에 관한 일체 비용은
국가가 부담하고 의무로 시행함.
다. 학령이 초과되고 초등 혹은 고등의 기본교육을 받지 못한 인민에게 일률로 면비보습
교육을 시행하고 빈한한 자제로 의식을 자비하지 못하는 자는 국가에서 대공(代供 :
대신하여 공여함)함.
라. 지방의 인구ㆍ교통ㆍ문화ㆍ경제 등 정형을 따라 일정한 균형비례로 교육기관을
시설하되 최저한도 매 1읍 1면에 5개 소학과 2개 중학, 매 1군 1도에 2개 전문학교, 매
152.
152
1도에 1개대학을 설치함.
마. 교과서의 편집과 인쇄ㆍ발행을 국영으로 하고 학생에게 무료로 분급함.
바. 국민병과 상비병의 기본지식에 관한 교육은 전문훈련으로 하는 이외에 매 중학교나
전문 학교는 필수과목으로 함.
사. 공사학교는 일률로 국가의 감독을 받고 국가의 규정한 교육정책을 준수케 하며
한교(韓僑)의 교육에 대하여 국가로써 교육정책을 추행함. (주석 8)
주석
8> 강만길, 앞의 책, 102~107쪽.
[45회] 전시내각의 외교ㆍ홍보책임 맡아
<삼균사상가> 조소앙 평전/[12장] 임시정부의 외교활동 주도, ‘카이로선언’ 큰 기
2014/07/04 08:00 김삼웅
조소앙에게 1940년대는 굉장히 바쁜 시기였다. 그만큼 많은 일을 하였다. 우선 1940년
전후 임시정부와 그의 주요 활동을 살펴보자.
1939년 (52세)
9월 : 사천성 기강에서 3당 통일을 역설.
11월 : 임정 국무회의에서 외무장 겸 선전위원회 주임위원으로 피선.
12월 : 임정국무위원 명의의 <선포문>을 기초ㆍ발표(독립군의 특점에 삼균제도 채택).
153.
153
1940년
3월1일 : 3ㆍ1절 맞아 <경고(敬告) 중국 동포서(書)> 발표.
5월 9일 : 3당 통합에 성공,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가, 창립선언서에 삼균주의 재확인.
9월 : 임정국무회의. 광복군총사령부 설립에 관한 <포고문> 발표.
10월 15일 : <한민(韓民)>지에 <광복군 성립보고> 발표.
1941년
2월 1일 : 임시정부, <광복>지 창간.
5월 9일 : 한국독립당, <제1차 전당대표 대회선언> 작성 발표.
5월 20일 : <광복>(1권 3ㆍ4기)지에 <한국독립당당강> 발표.
8월 29일 : 임정명의의 <루스벨트ㆍ처어칠 선언에 대한 성명서> 발표, 한독당 명의의
<국치 제31주년 기념선언에 대한 성명서> 발표, 한독당 명의의 <국치 제31주년
기념선언>을 작성 발표.
11월 25일 : 임정, 조소앙 작성의 <건국강령>을 정식으로 공포.
1942년
1월 25일 : 임정선전위원회(위원장 조소앙), <고(告) 국내 동포서> 발표.
3월 1일 : <제23주년 3ㆍ1선언서>를 발표하고, 중경에서 임정주최의 3ㆍ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 발표.
12월 8일 : 임정의정원 약헌개정위원회 제3회 회의에서 <균치 공화국>론을 주장,
신영삼 의원과 토지국유론에 관하여 논쟁. (주석 1)
154.
154
태평양전쟁을 민족독립의계기로 인식한 임시정부는 1940년 10월 8일 중경에서
임시의정원회의를 열고 <임시헌장>을 수정하여 국무회의 주석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전시체제에서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주석에게 국가원수ㆍ정부 수반 및
군사통수권을 부여하였다. 아울러 임시정부 각 부를 내무ㆍ외무ㆍ군무ㆍ법무ㆍ재무로
조정하는 한편 광복군에 참모총장과 임시정부 고문제도를 도입하고, 종전의 각 부
총장을 부장으로 개칭하기로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의정원회의에서는 김구를 국무회의 주석으로 하고,
이시영ㆍ조소앙ㆍ조완구ㆍ차리석ㆍ박찬익ㆍ조성환을 국무위원으로 선임하면서,
내무부장 조완구,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조성환, 법무부장 박찬익, 재무부장
이시영, 비서장 차리석, 참모총장 유동열로 하는 전시 내각을 구성하였다. 송병조와
홍진은 고문으로 추대 되었다.
1941년 3월 1일, 임시정부는 3ㆍ1혁명 22주년 기념식을 중경 청사에서 거행하였다.
이날 대회의 하일라이트는 조소앙이 발표한 <중국 동포들에게 경고하는 글>이었다.
‘경고(敬告)’는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에게 존경하며 알린다는 뜻이었다. 조소앙은
임시정부의 임무는, “중국의 한국 동포들이 중국 항전에 참가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한국 국내의 수천 만 군중들이 왜적에 대한 전국적 무장봉기를 일으켜 중국의 항전에
호응함으로써, 한국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할 것이다.… 우리들이 견지하는 믿음은
중ㆍ한 양국 민족이 철통 같이 뭉쳐, 강도 왜적을 영원히 지구 밖으로 몰아내어, 중ㆍ한
양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하는 일이다.” (주석 2) 라고 강조하였다.
조소앙은 또 이 해 8월 29일 국치 30주년에는 <한국임시정부선언>을 발표하여,
임시정부 외교부장의 자격으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6개 조항의 요구 사항을
제시하였다.
155.
155
첫째, 대한민국임시정부의승인.
둘째, 외교관계 수립.
셋째, 중국과 한국의 항일전에 필요한 원조의 강화.
넷째, 군수품ㆍ기술 및 경제의 지원.
다섯째, 평화회의 개최시 한국대표의 참가를 허락해 줄 것.
여섯째, 국제 평화의 가구가 성립될 때 한국의 참가를 허락할 것. (주석 3)
주석
1> 홍선희, 앞의 책, 28~29쪽.
2> <신화일보>(중경판), 1941년 3월 1일치.
3> 앞의 신문, 1941년 8월 29일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