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관동대지진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9분, 도쿄를 중
심으로 한 관동 지역 이래에 진도 7.9급의
초강력 지진이 발생하였다. 불운하게도 점심
식사 준비로 인해 거의 전 가정에서 불을 때
고 있던 시간대라서 지진의 여파는 곧바로
대화재로 이어졌고, 도쿄, 요코하마 지역을
비롯한 관동 지역 일대가 궤멸되다시피 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사망자, 행방 불명자가
14만 명, 이재민 34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재난이었다. 그런데 재난의 혼란 속에 계엄
령이 시행되었고, 사회 불안 속에서 유언비
어가 난무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유언비어 속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방화하였다.', '우물에 조선인이 독
을 넣었다.'는 등의 근거도 없는 낭설이 경찰
조직의 비상 연락망을 통해 확대되면서 자
경단이나 경찰관에 의해서 조선인과 조선인
으로 의심받았던 중국인이나 일본인까지도
학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하였다. 살해된 수는
정확하지 않지만 3000명에서 6000명까지
이야기되고 있고, 그 이상이라는 설도 있다.
이러한 학살 사건은 대부분이 불문에 부쳐
지고 아직까지도 진상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사실로 존재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에
서 좀 더 윤택한 생활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
갔던 초기 이주자들과 소수이기는 했지만
소중한 인재였던 조선인 유학생들이 그 재
난의 희생자가 되었다.
(일본사, 2009. 4. 20., 미래엔)
12. 1923년 9월3일 월요일
“
도쿄/가나가와 현 전역 계엄령 확대
“수상한 조선인은 경찰,헌병이 적당히 처분하라”정부지침
각 신문사에 조선인 관련 기사 금지 경고 / 내무성 경보국
13. 1923년 9월3일 월요일
“
구) 요쓰기바시 다리
주고엔 고짓센(15엔 50전)
요쓰기바시 다리를 건너는데 거기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 셋을 두들겨
패 죽이고 있더라구, 우리는 그 걸 곁눈질로 보면서 다리를 건넜어.
그때 나도 발로 차이고 막 도비구치로 맞았지. 다리는 시체들로 가득했어
제방에도 여기저기 시체들이 마치 장작더미처럼 쌓여 있었어.
조인승(학살당한 조선인 유골을 발굴하고 추도하는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