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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고 급진적인
국회의원 장혜영 2020 의정보고서
장혜영1
이 말하고 이슬아2
가 듣다
1
제21대 국회의원: 정의당, 비례대표
2
작가, 〈국회의원장혜영후원회〉 회장
장혜영
1987년생. 21대 국회에서 정의당 소속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다.
바꿔달라고 요청하는 정치에 지쳐 직접 하는
정치에 뛰어들었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변화를 만드는 정치, 모든 시민의 존엄과 평등을
지키는 정치를 꿈꾼다. 21대 국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대표발의했다. 소속 상임위원회는
기획재정위원회이다.
이슬아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다. 작가이자
글쓰기 교사다.
‘일간 이슬아’를 발행하고 헤엄 출판사를 운영한다.
〈심신단련〉, 〈깨끗한 존경〉, 〈부지런한 사랑〉 등을
썼다. 비건 지향인이다. 현재 국회의원 장혜영
후원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2020년 12월 2일. 장혜영-이슬아 만남.
국회의원회관 516호 장혜영 의원실에서 진행.
인사와 소개 04
첫 번째 약속: 지금 당장 변화를 일으키는 12
정치를 하겠다.
두 번째 약속: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48
존엄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정치를 하겠다.
세 번째 약속: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정치를 하겠다. 76
04–05
인사와 소개
01. 의정보고를 시작하며
장혜영: 이슬아 후원회장님 안녕하세요. 지난 9월에 처음 의원실
오신 후에 오랜만에 다시 뵙네요.
이슬아: 그러게요.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많이
바쁘시죠.
장혜영: 늘 그렇죠. 후원회장님도 많이 바쁘시잖아요. 여러 일정
있으신 와중에 시간 쪼개서 이렇게 제안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슬아: 하하하. 살면서 이런 대담은 처음 해봅니다. 혹시 제가
정말 기본적인 것을 되물어도 괜찮나요?
장혜영: 너무 좋아요. 후원회장님이 모르시는 것은 아마 이
보고서를 보시는 다른 분들도 잘 모르실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 부분을 대의해서 물어보는 것이라 생각해
주시면 조금 더 편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슬아: 네. 좋아요.
장혜영: 그럼 먼저 제가 왜 이렇게 후원회장님을 모시고
이야기의 형식으로 의정보고를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드리면 좋을 것 같아요. 국회의원들이
의정보고라고 하는 것을 연말이 되면 정말 열심히
하는데요. 사실 꼭 연말에만 하는 것은 아니고
수시로 문자나 카톡, 이메일 같은 것들을 보내기도
해요. 어떤 국회의원이 자기가 뭐를 따냈다, 무슨
법률을 만들어냈다, 그런 내용이 가득한 문서랄까
편집물이랄까. 그런데 저는 그런 것을 받아도 의외로
그걸 끝까지 읽은 기억이 별로 없어요. 그냥 주욱
훑어보고 끝나는 거죠. 제 의정보고서를 그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슬아: 쉽게 말해 의정보고라는 것은 ‘한 의원이 당선 후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를 말하는 것 아닌가요?
장혜영: 그렇죠. ‘올 한 해 저는 국회의원으로서 뭐뭐뭐를
했습니다’를 전하고 싶은 거죠. 그런데 말하는 쪽에서
하고 싶은 말만 잔뜩 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에서도 궁금하고 소화 가능한 방법이 무엇일지가
고민이었죠. 그런데 아무리 어려운 것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야기로 풀면 그래도 사람들이 끝까지 들을 수
있잖아요?
이슬아: 맞아요.
장혜영: 결국 의정보고라는 건 시민들에게 말을 거는 일이니까,
후원회장님을 모시고 제가 한 해동안 한 정치를 말로
가만가만 설명을 드리고, 그 내용을 글로 풀어서 다른
분들께 보여드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슬아: 그러고보면 지난번에 대담 형식으로 진행하신 황선우
작가님과의 인터뷰*도 너무 좋았잖아요. 정치에 대해
아주 잘 알지 못하는 분들도 끝까지 읽으신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대화가 기다려졌습니다. 잘
들어보겠습니다.
*황선우의 스압 인터뷰: 카카오페이지 ‘멋있으면 다 언니’
06–07
장혜영: 감사합니다. 의정보고라는 말을 단어 그대로 풀면
‘의회’의 ‘정치’를 ‘보고’하는 것인데요. 결국 정치란
약속에 관한 것이잖아요. 어떤 정치인이 시민들에게
자기가 어떤 정치를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것이
구체적인 공약이든 선언적인 가치이든 그 약속을
지켜가는 과정을 소상히 알려나가고, 그것을 접한
시민들이 ‘아 저 사람은 약속을 지키고 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다면 그것은 참 좋은 정치겠죠.
그런 의미에서 의정보고란 제가 정치를 통해 시민들께
드린 약속이 무엇인지, 그 약속을 어떻게 지켜가고
있는지를 알려드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오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앞서, 제가 정치인으로서 처음으로 쓴 글인 ‘공개정치
선언문’을 가져왔어요. 이 글 안에는 제가 정치인으로서
한 약속들이 아주 압축적으로 들어있거든요. 이것을
먼저 보여드리고 그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면 좋겠어요.
〈공개정치선언문〉, 2019년 10월 29일.
안녕하세요. 장혜영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정치를 시작하려 합니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넘어, 더 많은 책임과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모두를 위한
공동체를 만드는 길을 가보려 합니다.
지쳤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반드시 필요한 변화를
만드는 일을 주저하는 지금의 정치에 지쳤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나 신문고만 두드릴 뿐 결정에는 참여할 수 없는
정치에 지쳤기 때문입니다. 호소하고 외치고 기다리고
실망하는 정치, 약자에게 ‘나중에’를 말하는 정치, 약속을
어기고도 사과는 커녕 모른척만 하는 정치에 지쳤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미룰 수 있을지 모릅니다. 법과 제도는 미룰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아마 누군가에게는 변화를 미뤄야 할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은 미룰 수가 없습니다. 지금 벼랑 끝에
서서 하루하루를 견디다 못해 떨어져나가는 사람들의 삶은
미룰 수가 없습니다. 무참한 불평등 앞에 꺼질듯이 흔들리는
곳곳의 촛불같은 삶에는 ‘나중’이 없습니다.
갖고 싶은 게 있습니다. 미래를 갖고 싶습니다. 죽어라
노력해서 나만 겨우 살아남는 미래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무사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가는 미래를 갖고 싶습니다.
장애인이니까, 가난하니까, 못 배웠으니까, 부모를 잘못
만났으니까, 운이 없으니까 불행해져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 미래를 갖고 싶습니다. 평범한 일상과 존엄한
삶이 건강하고 똑똑하며 부유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고, 장애가 있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평등하게 보장되는 미래를 갖고 싶습니다.
그런 미래를 가질 수만 있다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겠습니다. 시간도, 마음도, 하고싶었던 다른 일들도
전부 내려놓을 것입니다. 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 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 두렵습니다. 고독
속에 남겨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이제 막 손에 쥔 동생과의
평범한 행복을 잃어버리는 것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에게 미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의 불평등을 만든 것은 탐욕을 통제하지 못한 우리
사회입니다. 우리는 가진 사람들이 끝없이 더 가지려 할
때 그 탐욕을 막지 못했고 갖지 못한 사람들이 끝없이 자기
몫을 빼앗길 때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가진 자들이 규칙을 정하는 사회에서 공정은 힘없는
외침입니다. 공정한 차별이 하루가 다르게 우리 사회를
08–09
잠식하는 지금, 우리는 공정이 아니라 불평등을 외쳐야
합니다. 불평등을 똑바로 직시하지 않고서 평등의 미래로 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누구나 평등하게 존엄한 삶을 누리는 미래를 만드는
사람이 오직 저여야만 할 이유는 없지만 제가 아니어야 할
이유도 없기에 내가 아닌 누구라도 응당 그렇게 해야 할
일들을 시작하기 위해 시민으로서의 자부심과 동료 시민에
대한 신뢰와 애정, 미래에 대한 낙관을 마음에 품고 저는
오늘부터 정의당에서 정치를 시작합니다.
이슬아: 오랜만에 이 글을 다시 읽으니 찡하네요.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죠? 시작하신 다음부터 너무
많은 일을 하셔서 그런 것 같아요.
장혜영: 이 글을 쓴 것이 작년 10월 19일이에요. 지금이 12월
초니까 약 1년하고 한 달 정도가 지났네요.
이슬아: 이때 예상한 정치 생활은 지금과 비슷하세요?
장혜영: 비슷한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는데, 예전에는 그냥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생각을 했다면 이제 그 추상을
채우는 경험들이 생긴 셈이죠.
02. 세 가지 약속
장혜영: 이 글에 들어있는 약속은 크게 세 가지예요. 첫 번째
약속은 지금 당장 변화를 만들겠다는 약속이에요.
기존의 정치가 계속 ‘나중에’로 미루는 것들을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필요한 변화를 곧장 만들겠다는
약속이죠. 두 번째 약속은 그 누구라도 평등하게
존엄을 누릴 수 있는 미래를 만드는 정치를 하겠다는
약속이에요. 마지막은 어쩜 동어반복일 수도 있지만
‘정치’를 하겠다는 약속이에요. 대의 정치를 시작하기
전에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정치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책임과 권력을
가지고 변화를 일으키는 일을 하겠다는 의미로 ‘정치’를
하겠다는 약속을 드렸어요.
이슬아: 맞아요. 정치는 사실 저도 하고 있고 저희 어머니도
하고 있지만, 더 많은 권한과 책임을 가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죠. 근데 되게 재미있네요, 예전에
대학을 그만두시면서 쓰신 ‘공개이별선언문’은
커다란 제도적인 집단에서 나오는 선언이고, 이
‘공개정치선언문’은 그곳에 다시 들어가는 선언이네요.
장혜영: (웃음) 정말 그러네요.
이슬아: 의원님께서는 나오는 것도 화끈하게 나오시고,
들어가는 것도 화끈하게 들어가시네요. 대학에서
나오셔서 국회에 다시 들어가기까지 몇 년이 흐른거죠?
장혜영: 학교 그만둔 게 2011년이었으니까 9년이네요.
10–11
이슬아: 그 세월 동안 뭔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이런저런
성취를 하셨잖아요? 영화도 만드시고, 책도 내시고.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신 거군요.
장혜영: 네, 어떤 종류의 한계를 느꼈던 것 같아요.
이슬아: 정치를 막 너무 하고 싶어서 하신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이대로 더 지칠 수는 없어서 시작하신 것이죠.
장혜영: 맞아요. 시민 개인으로서 노력하는 것에 지쳐서 이젠
대의권력이라는 더 큰 힘을 갖고 변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작년 10월부터 지금까지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숨가쁘게 보내왔어요. 국회의원
임기는 5월 30일부터 시작이니 약 6개월 정도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1년, 혹은 임기 시작 후 약 6개월간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다 빼곡하게 적어 사전으로 만들어서
보내드릴 수도 있지만, 사전보다는 이야기로 남는
정치를 하고 싶으니까, 오늘은 그 중에서 후원회장님과
시민 여러분께서 꼭 기억해주셨으면 하는 몇 가지
내용을 ‘공개정치선언문’에 담아둔 세 가지 약속에
비추어 말씀을 드리려고 해요.
12–13
첫 번째 약속:
지금 당장
변화를 일으키는
정치를 하겠다.
01. “그래서 언제 하실 건데요?”
장혜영: 제가 정치를 시작하며 드린 첫 번째 약속은 지금 당장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사진을 먼저 한 장 보여드릴게요.
정의당 국회의원들에게는 전통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임기 시작 첫 번째 점심은 국회의 청소노동자
분들과 함께 나누는 전통이에요. 국회는 의원들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분명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이잖아요. 이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먼저 출근해서 쓸고 닦고 돌보는 분들이
계신 거죠.
이슬아: 어쨌거나 누군가는 계속 치우고 있으니까.
장혜영: 맞아요. 새벽 4시에 나오셔서 청소를 하시고, 요즘엔
코로나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이 많아져서 더 일찍
나오신다고 하더라고요. 여튼 그날 식사를 하면서
여쭤봤어요. 어떻게 하면 하시는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는지를요. 그랬더니 전혀 생각도 못한
말씀을 하셨어요.
국회 의원회관에는 토론회 같은 것을 열 수
있는 회의실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행사를 열면
사람들에게 물이라도 줘야 하니까 생수 500ml를 사서
많이들 비치하나봐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물을 다
마시는 게 아니라 적당히 몇 모금 마시고 두고 간다는
거죠. 그럼 그것들을 일일이 수거해서 물 따로 플라스틱
따로 버리는 것이 꽤 번거로운 작업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쭤보니 500ml가 아니라
350ml 짜리 작은 병으로 준비해서 깨끗이 다 마시고 갈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슬아: 그렇군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요.
장혜영: 식사자리가 끝난 후에 제가 페이스북에 이 대화를
적으면서 국회에서 토론회 할 때는 쓰레기는 나가면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물 준비하실 때는 이렇게 하시는 게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써서 올렸어요. 법을 만든다든가
행정부를 견제한다든가 하는 국회의원 고유의 역할도
있지만, 그 이전에 눈앞의 생활공간에서부터 변화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고민의 표현이었죠. 그런데 게시물에
달린 댓글 중에 ‘일회용 생수병을 쓰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피드백이 있어서, 과연 그 또한 옳으신
말씀이라고 생각했어요.
2020년 6월 1일. 개원 첫 오찬: 국회 청소노동자와 함께.
이슬아: 여러 종류의 옳으신 말씀 속에 계실 것 같아요.
장혜영: (웃음) 그렇죠. 이것 말고도 당장 국회라는 공간 안에서
계속 눈에 띄는 부분들이 많았어요.
국회에는 브리핑이나 기자회견을 할 수 있는
소통관이라는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 수어통역사가
상주해있지 않았어요.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쪽에서
따로 섭외하지 않는 한 수어통역이 제공되지 않는
상황이었던 거죠. 그런데 국회라는 곳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적 공간이고, 국회에서 나오는
메시지는 곧 대국민 메시지인데, 그 메시지가 발신되는
장소에 수어통역이 없다는 것은 수어를 사용하는
국민들이 배제되고 있다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국회의장님을 찾아가 소통관에 수어통역을
상주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드렸어요. 국회에는 국회
전반의 운영과 회의를 관장하는 국회의원 전체의 대표
격인 국회의장님이 계시거든요. 그 의장실을 찾아가서
소통관 수어통역 문제 뿐만 아니라 국회 자체의
장애접근성을 높이는 여러 아이디어를 말씀드렸는데
기본적으로 공감을 많이 해주셨어요. 그날 소통관
수어통역사 상시 배치에 대한 확답을 받았고, 실제로
한 달 정도가 지나서 8월 10일부터 정식으로 소통관에
수어통역사가 상주하게 되었죠.
2020년 7월 2일.
국회의장 비서실장 면담:
국회 기자회견장 수어 통역 배치 확답.16–17
장혜영: 그리고 소통관 수어통역 상시배치의 첫 기자회견으로
제가 국회방송이나 국회에서 인터넷으로 중계하는
의사일정에 대한 수어통역, 폐쇄자막, 화면해설 등을
제공하게 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어요. 제가 장애접근권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점을 국회의장님께서 각별하게
고려해주신 것 같아요.
이슬아: 제 느낌엔 그 정도면 상당히 빨리 반영되었다고
느껴져요.
장혜영: 그렇죠. 사실 기자회견장 수어통역 문제는 제가
처음으로 지적한 문제는 아니고, 20대 국회부터
정의당에서 반복적으로 요청했던 문제이기도 해요.
다만 문제를 알고도 개선하기까지 미적거리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번에는 반드시 하게 만든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마치 마감을 재촉하는
편집자처럼 ‘언제 하실거예요?’ ‘그래서 언제 하실
건데요?’ 하고 계속 쪼고 쪼고 쪼아서, 귀찮아서라도
하게 만드는 거죠.
2020년 12월 9일 장혜영 의원이 발의한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 되었다.
아래는 통과 직후 트위터에 올린 게시글.
제가 대표발의한, 국회방송을 운용하거나 인터넷으로
의사일정을 중계하는 경우 한국수어, 폐쇄자막, 화면해설을
제공케하는 국회법 개정안이 대안반영되어 어제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장애가 있든 없든 모든 시민들께서 국회를 더
가까이 느끼실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2020년 8월 20일.
국회 기자회견장 수어 통역 상시 배치 첫날,
장애포괄적 국회법 발의 기자회견.18–19
02. ‘고마움’ 대신 ‘반갑다’
이슬아: 그러네요. 분명 첫 요청이 아니었을 텐데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의원님이 하셨기 때문에 뭔가 다른
부분이 있었던 걸까요?
장혜영: 일단 같은 말을 하더라도 청년이며 여성인 국회의원이
할 때의 긴장감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이슬아: 역시 눈에 띌까요? 중년 남성 중심의 집단이니까,
장혜영: 낯선 존재가 주는 어떤 생경함, 그 생경함이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잖아요. 그런 포인트를 잘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죠.
이슬아: 의회 안에서 성별을 자주 실감하시나요?
장혜영: 엄청, 늘, 매일요. 막 친해진 의원님들은 어떤
이야기까지 하시냐면요, 30대 여성인데 더 늦으면 안
된다고 혼처 알아봐 주겠다는 말씀까지 하기도 하세요.
‘관심 감사합니다. 그런데 요샌 어디서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돼요.’를 입에 달고 살죠. 어디 노란 종이에 써서 그런
말씀 들을 때마다 옐로카드 들고 싶어요.
사실 의원들의 언어라는 것이 누구보다
공적이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잖아요. 되게 관용적으로 굳어졌지만 의미를 따져보면
분명 장애를 비하한다든가 성별을 비하한다든가 하는
표현들이 많고, 그런 말들을 쓰는 의원들에 대한 비판이
지속적으로 있어왔죠.
20–21
제가 속해있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초반 회의
중에 더불어민주당의 중진 의원인 이광재 의원이라는
분이 정책의 하자를 우려하면서 이렇게 되면 ‘절름발이
정책’이 된다는 표현을 하신 적이 있어요.
이슬아: 그 순간 어딘가에서 눈초리를 느끼셨겠어요. 장혜영
의원님의 눈초리… (웃음)
장혜영: (웃음) 그러니까요. 심지어 자리도 바로 앞자리라 그
분을 제가 빤히 보면서 생각을 했어요. 저도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보는지 알잖아요. ‘까탈스러운 페미니스트’
혹은 ‘프로불편러’로 이미 정평이 나 있죠. 저 표현을
짚으면 분명 사람들이 또 프로불편러 나오셨다며
비아냥거리는 것을 감수해야 할텐데. 하지만 저는
공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부분을
짚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의정활동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질의 시간이 돌아왔을 때 먼저 앞부분
질의를 다 하고나서 남는 시간에 정중하게 의원님이
쓰신 표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소셜미디어에서는 예전에 정의당 정치인들이 사용했던
부적절한 표현들까지 끌어올리며 아주 난리가 났는데,
(물론 정의당 내의 누군가가 부적절한 표현을 썼다면
당연히 그 또한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작
이광재 의원님께서는 제가 지적한 부분을 겸허히
수용하고 공개적으로 사과문을 올려주셨어요.
이슬아: 되게 보람차셨겠어요.
장혜영: 맞아요. 지적을 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지적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이광재 의원님의 그런
모습이 참 좋았는데, 이제 제가 답을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감사합니다’라고 쓰려고 했는데,
뭔가 ‘감사’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지적을
수용해준 것이 고맙기는 하지만, 잘못을 시정한 것에
대해 ‘고마움’은 좀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고민 끝에
‘반갑다’는 표현을 썼어요.
이슬아: 그 워딩 선택에 되게 감탄했어요. 감사할 것까지 없다.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되게 긍정적으로 잘 받아넘기고 싶잖아요. 그럴 때
‘반갑습니다’는 정말 적절한 선택인 것 같아요. 서로
존중하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낮아지지 않는 워딩이었던
것 같아요. 너무 좋다. 글을 쓰는 사람이 정치를 하면
이런 부분이 참 좋네요.
장혜영: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종종 계시더라고요.
이슬아: ‘반갑습니다’의 적절함을 말이죠.
장혜영: 맞아요. 다만 그걸 긍정적으로 보시는 분들과 더불어
그냥 ‘감사하다’고 써도 될 텐데 굳이 ‘반갑다’라고까지
써야 하느냐고 뭐라 하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관점은
다르지만 어쨌든 민감하게 알아봐주신다는 점은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22–23
03. 법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장혜영: 어쨌든. 이런 식의 국회라는 공간 안에서 일상적인
변화들을 지금 당장 일으켜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국회의원의 중요한 역할은 입법, 법을 만드는 데에
있잖아요. 이번에는 입법을 통해서 ‘지금 당장의 변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그러기에 앞서서 입법 과정에 대해 혹시 궁금한 부분이
있으신가요?
이슬아: 하나의 법안이 발의가 되서 통과가 되기까지 대략적인
과정이 궁금해요. 우선 발의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거죠?
장혜영: 네. 일단 법안을 발의하는 데는 최소 국회의원 10명의
동의가 필요해요. 최소한 대표발의 의원이 한 명, 그리고
9명의 공동발의 의원이 필요한 셈이죠. 의원들끼리
‘공발’해달라고 줄여서 쓰기도 해요. 일단 도장 10개
이상을 모아서 법안이 발의가 되면 그 법안은 내용에
맞는 상임위원회에 배정이 돼요.
국회의원 정원이 300명이잖아요. 그런데
300명이 늘 한데 모여서 모든 것을 다 같이 의논하는
건 굉장히 비현실적이고 비효율적이니까 국회에는
정부 부처와 기관들의 구성을 염두에 두고서 주제별로
17개의 상임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져 있어요. 예를
들면 보건복지위원회, 교육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기획재정위원회 등등 이렇게 위원회가 있고 의원들은
각각의 상임위에 소속되어서 활동을 해요. 상임위마다
특성들이 달라서, 사람이 많은 상임위는 30명까지
하나의 상임위 안에서 활동을 하고, 제일 적은
교육위원회는 총 16명의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일단 법안이 발의되고 적절한 상임위에 배정이
되면 그것을 상임위 전체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을
해요. 상정을 하고 나면 30명에서 16명까지 되는
사람들이 다 같이 그 법을 논의하는 게 아니라, 또
그보다 작은 ‘소위원회’라는 단위를 구성해서 심사를
해요. 예를 들면 저는 26명으로 구성된 기획재정
위원회의 경제재정소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어요.
경제재정소위 위원은 총 11명이고요. 정리하자면,
상임위에 안건이 상정되고, 그 안건이 다시 관련 소위에
회부되어야 비로소 논의가 시작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의 법안이 통과가 되려면 이 소위를
통과하고, 상임위 전체회의를 통과하고, 그 다음에는
법제사법위원회라는 상임위의 ‘체계자구심사’라는 것을
거쳐야 해요. 이 법안이 기존 법들과 충돌하지 않도록
체계에 맞는지, 또 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문장으로
쓰느냐에 따라 명확성과 아름다움이 달라지니까 그런
자구를 수정하는 단계를 모든 법률들이 거쳐야 해요.
이슬아: 법사위에 계신 분들이 윤문을 하신다는 말씀이세요?
장혜영: 어떤 의미에서 윤문이라고 할 수도 있죠. 문장 구조가 안
맞거나 전혀 다른 해석의 여지를 주는 법안들도 의외로
올라오거든요.
그런 것들을 바로잡고 다듬는 과정을 법사위에서
거쳐야 비로소 우리가 국회 하면 상상하는 그 300명이
모여있는 본회의로 올라오게 돼요. 그 본회의에 출석한
의원들 중 과반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비로소 법안이
법률로 재탄생하는 거죠.
24–25
이슬아: 모든 법은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통과가 되는
건가요.
장혜영: 그렇죠. 출석한 의원들의 과반을 넘겨야 해요.
04. ‘현대판 고려장’을 없애다
장혜영: 사실 2020년에 지금 당장 필요한 변화를 말할
때 코로나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죠. 올 초에
코로나19가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를 덮치면서
여러 불편한 사실들을 드러냈는데, 그 중 하나가 이미
취약한 사람들이 재난 상황에서 더욱 취약해진다는
점이죠. 장애인들은 가장 취약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 중 대표적인 집단이고요. 후원회장님은 혹시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이슬아: 어렴풋이 알고 있어요.
장혜영: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는 장애당사자의 곁에서 그
사람의 활동과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활동지원사’라는
일자리를 만들고, 그 활동지원사 급여의 대부분을
국가가 지원하는 제도예요. 이 제도가 ‘장애인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에
도입되기 전까지 장애인을 돌보는 것은 당연히 본인과
그 가족의 일이라고만 여겨져 왔죠. 그러나 치열한
장애인권운동의 싸움을 통해서 제도가 만들어진 후에는
가족이 아니라 사회가 사회의 자원으로 장애인을 함께
돌볼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어요.
다만 제도적으로 보완할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어요. 가장 단적으로 이 서비스는 필요한 사람들이
필요한 만큼 지원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국가가 정한
기준에 따라 장애인을 평가해서 서비스 대상인지,
서비스 제공 시간은 얼마나 배정할지를 정하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다양한 사각지대가 존재합니다.
코로나19는 이런 돌봄공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요.
당장 기존에 서비스를 받지 않던 장애인이 자가격리에
들어가서 갑자기 활동지원서비스가 필요해졌을 때,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아서 많은 장애인들이 그야말로 방치와
다름없는 상황을 견뎌내야 했어요.
이슬아: 세상에, 그랬겠군요.
장혜영: 사실 코로나19 이전에도 이 제도에 대해 다양한
개선점들이 제기되어왔어요. 대표적으로 만 65세
연령제한 문제와 24시간 지원의 근거가 없는 문제가
있죠. 법적으로 만 65세를 넘긴 장애인들은 행정체계상
장애인복지체계가 아니라 노인복지체계에서 지원을
받게 되어 있어요. 아주 불합리하죠. 그래서 만 65세
생일이 지나면 어제까지는 하루에 16시간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지만 오늘부터는 서너시간밖에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거예요.
이슬아: 치명적으로 위험한 상황이네요.
장혜영: 그야말로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죠. 이
조항을 노령 장애인들에 대한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부르는 이유예요. 당장 개선되어야 하는 문제죠.
26–27
뿐만 아니라 장애라는 것이 24시간 지속되는
특성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혼자 사는 최중증
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활동지원서비스를 24시간
제공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필요한 시간보다 적은 시간을 배정받게 되어
활동지원사가 없는 시간에 불의의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는 일들도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 의원실에서 1호 법안, 가장 처음
발의한 법안이 바로 이 장애인활동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에요.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 문제를 개선하는
내용을 골자로 임기 시작 전부터 준비해서 공식 임기가
시작된 지 거의 2주만인 6월 15일에 발의했어요.
많이들 알고 계신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그 2주 후인 6월
29일에 두 번째로 발의를 했고요.
이슬아: 정말 부지런하게 하셨네요. 그럼 그 법안은 이제 어떤
상황인가요?
장혜영: 발의 이후에 보건복지위에 배정이 되었고, 지난
11월 24일에 소위 의결이 되었고, 이틀 후에 상임위
전체회의에서도 의결이 되었어요. 그리고 바로 오늘
(12월 2일) 법사위와 본회의에서 의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물론 그렇게 상임위원회 논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제가 법안에 꾹꾹 눌러담아놓은 내용들이 다
통과되지는 않고, 많은 부분들이 깎여나갔죠. 하지만
최소한 만 65세 이상 연령 제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슬아: 정말 오늘 통과될 예정인가요?
장혜영: 오늘 예정된 본회의에 이 안건이 올라오면, 통과될
가능성이 높죠.
이슬아: 그렇군요.
인터뷰 당일인 2020년 12월 2일 오후 11시,
장혜영 의원의 1호 법안이 통과 되었다.
아래는 통과 직후 장혜영 의원의 페이스북 게시글.
이렇게 또 한 걸음 나아갑니다. 조금 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제가 21대 국회 1호 대표발의법안으로 발의한
장애인활동지원법 일부개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장애인들에 대한 ‘현대판 고려장’이라 불리던
장애인활동지원법의 만 65세 연령제한 독소조항을 개정하여
기존 장애인 활동지원급여 수급자 중 혼자서 사회활동을
하기 어려운 중증장애인의 경우 만65세 이후에도 급여
신청이 가능하도록 변경한 것입니다.
“65세가 되는 내년 저는 거의 모든 지원이 중단돼요.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죠. 현대판 고려장입니다. 지금 그냥 내다
버리는 건가요? 65세가 된다고 장애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껏 활동지원서비스의 부당한 연령제한
조항으로 삶을 위협받아온 당사자 시민들의 절박한 외침에
비하면 오늘의 이 소식은 여전히 너무나 작은 변화입니다.
하지만 한번 시작된 변화는 더 큰 변화로 이어질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그렇게 만들어갈 것입니다.
오늘의 법안 통과를 기념하며 다시금 다짐합니다. 제가 처음
정치를 시작했을 때 여러분께 드렸던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를 만들어가겠다는 약속을 앞으로도 소중히
지켜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8–29
05. 행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국회
장혜영: 지금까지 6개월간 입법을 통해 만들려고 한 ‘지금
당장의 변화’에 관한 말씀을 드렸다면 이번에는
행정부를 견제하고 움직여서 변화를 만들어낸 얘기들을
들려드리고 싶어요.
이슬아: 행정부 견제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 궁금해요.
장혜영: 삼권분립이라는 단어에서 설명을 시작하고 싶은데요.
국가 권력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큰 힘이잖아요. 그
힘이 좋은 데에만 쓰이면 좋겠지만, 악용되거나 남용될
수도 있으니 그 권력이란 것을 분산하고 분산된
권력이 서로를 견제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 지금 우리
민주주의가 권력을 작동시키는 방법의 핵심이죠.
국가권력을 입법, 행정, 사법의 세 가지로 나누어 서로를
견제할 수 있게 했으니까요.
국민에 의해 직접 선출된 입법부인 국회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행정, 즉 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에요. 정부는 집행을 위한 거대한 공무원 조직이죠.
그 가운데 대통령은 선출을 통해 뽑히지만 대부분의
정부 인력들은 그렇지 않고요. 국회는 정부가 국민의
뜻과 정해진 법률에 따라 제대로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지 감시해야 할 책무가 있어요. 그래서 국회의 각
상임위는 각기 담당하는 소관 부처들이 정해져 있어요.
제가 있는 기획재정위원회, 줄여서 기재위는
정부 부처 가운데서도 아주 큰 입김을 행사하는
기획재정부를 시작으로 한국은행, 수출입은행, 조달청,
통계청 같은 정부 부처와 기관들을 담당해요.
이슬아: 그런데 의원님은 왜 기획재정위원회에 들어가게
되셨나요? 선택할 수 있는 건가요?
장혜영: 일단 지망을 할 수는 있지만 원한다고 다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저는 장애인 정책에 관심이 많으니
처음에는 보건복지위원회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수많은 장애인 복지
정책들의 핵심은 결국 예산이거든요,
이슬아: 돈의 흐름에 관련된 위원회로 가야겠다고
생각하셨군요.
장혜영: 맞아요. 예산 없는 복지는 빛 좋은 개살구죠. 돈 없이
무슨 일을 하겠어요. 그래서 돈을 다루는 곳을 가야
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리고 돈이 흐르는 것을 보면
뭐랄까 전체를 조망하기 좋다고 할까요. 정치를 한번
시작한 이상 정말 3점 슛 쏘듯이 내가 제일 하고 싶은
정책만 딱 만들고 끝내고 이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국정운영의 전반을 진지하게 대하고 싶었고,
순서를 정한다면 전체를 먼저 보고 각론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로 정했죠.
이슬아: 말하자면 기재위는 정말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네요.
장혜영: 네. 공부할 게 정말 너무 많아요. 그래서 초선 비례
의원들에게 추천을 잘 안 하죠.
이슬아: 우리 의원님 원대하신 분이잖아요. (웃음)
열공하는 장혜영 의원.
(사진 제공: 뉴시스)30–31
06. 지금 당장의 변화를 만들어낸 국정감사
장혜영: 꿈은 크게 꾸는 게 좋으니까요. (웃음) 기재위가
아무래도 예산과 세금을 다루는 상임위다보니 늘 돈
이야기만 할 것 같지만 사실은 경제 전반의 문제를
포함해 의외로 여러가지 사회 문제를 입체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곳이에요. 예를 들면, 후원회장님 지금
출판사를 운영하고 계시잖아요. 혹시 세금을 홈택스에
접속해서 직접 내고 계신가요?
이슬아: 초반에는 직접 하다가 너무 어려워서 현재는 정직원
웅이 님과 세무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가며 홈택스
업무를 하고 있어요. 하나 하나 물어봐가면서요.
장혜영: 그러시군요. 저도 의원이 되기 전,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매년 홈택스에서 직접 종합소득세를 신고했었는데, 역시
너무 어려워서 나중에는 결국 세무대행업체를 이용하게
되었는데요. 이렇게 홈택스가 비장애인들에게도 사용이
어렵게 느껴지지만, 장애인들에게는 사실상 이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기본적인 웹접근성조차 보장하고 있지
못해요.
이런 부분은 아주 대단한 정치적인 쟁점이라기
보다는 그야말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방치되는 고약한
문제들이죠. 이런 부분들을 제대로 짚고 개선할 수 있는
국회의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국정감사예요.
32–33
이슬아: 국정감사라고 하면 몹시 살벌한 분위기, 혹은 소리
지르며 싸우는 사람들의 이미지부터 생각 났던 것
같아요. 장혜영 의원님의 국정감사 방식은 그렇지
않지만요.
장혜영: 국정감사는 정기적으로 매년 10월쯤에 약 30여일간
국회의원들이 각 상임위의 소관 정부 부처와 기관들을
대상으로 제대로 국정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질문하고
감사하는 일정이에요. 방대한 자료를 요구할 수 있고,
부처의 수장들을 대상으로 직접 여러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죠. 줄여서 ‘국감’이라고들 많이 해요. 정의당은
매년 국감 때마다 그 국감의 컨셉을 잡아서 현판식을
하는데, 올해의 국감 키워드는 ‘위기탈출 국감’이었어요.
저는 여러 위기 가운데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불평등과
기후위기를 탈출하는 데 조금이라도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국감을 하겠다는 목표를 잡았고요.
이슬아: 아주 중요한 권한이 있는 자리네요. 임기 후 첫 국감을
진행하면서 어떠셨는지 듣고 싶어요.
장혜영: 말로 설명드리는 것보다 영상으로 보시는 것이 제일
실감나게 전달되실 것 같아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국세청 홈택스 서비스의 장애접근성 문제에 대해 제가
국세청장님께 질의한 영상을 보여드릴게요.
지금 당장의 변화를 만들어낸 국정감사 ⑴:
국세청 홈택스 웹 접근성 미비 관련 질의
2020년 10월 12일, 국세청 국정감사.
→ 질의 전체 영상
이슬아: 너무 천박한 표현밖에 안 떠오르는데, 족치셨네요.
우아하게 족치셨네요.
장혜영: 끝나고 해당 업무를 담당하시는 공무원 분께서 직접
저를 찾아오셨어요. 실무선에서 정확하게 해결하겠다고
몇 번을 약속하셨고, 실제로 해당 작업을 수행하는
중이세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이번 국감에는 제대로
못 하시는 부분을 지적했지만, 잘 해결하시면 지적한
것 이상으로 다른 부처들에 ‘국세청 홈택스만큼만
하시라’고 동네방네 칭찬할 테니까 확실하게
개선하시라고요.
34–35
이슬아: 실무 하시는 분들이 실제로 장애인 당사자 분들에게
계속 모니터링을 받고 피드백을 받으면서 다시
개발하시면 좋을 텐데요.
장혜영: 그럼요. 그걸 일상적으로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데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을 굉장히 대단한 일을
하는 양 생색내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예요.
이슬아: 그런데 이렇게 영상으로 보니까 정말 실감이 나네요.
만약 의정활동 보고가 웹에도 정리된다면 영상이랑
같이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장혜영: 좋은 의견 감사해요. 책에도 QR코드라든지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해 영상을 쉽게 보실 수 있는 방법을 편집
과정에서 고민해 넣으려고 해요.
이슬아: 방금 보여주신 영상 말고도 다른 국감 영상들도 많이
있나요? 몇 개는 저도 온라인에서 본 기억이 있어요.
장혜영: 네. 최대한 활동 내용을 있는 그대로 시민들께서 보실
수 있도록 제 유튜브 채널에 자막과 함께 편집해서
공개하고 있어요. 국감이 한 달이나 진행되다보니 꽤
여러 주제를 다룰 수 있는데요, 오늘은 실제로 유의미한
성과로 이어진 몇 가지 질의를 후원회장님께 자랑하고
싶어요. (웃음)
이슬아: 오늘은 자랑 타임이니까.
장혜영: 이번에는 속기록을 하나 보여드릴게요. 올해 실시하는
인구주택총조사에 대해 질의드린 내용이에요.
지금 당장의 변화를 만들어낸 국정감사 ⑵: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배우자 성별 표기 문제
2020년 10월 14일, 기획재정위원회 통계청 국정감사 속기록 중
장혜영 의원:
통계청장님께 질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청장님 혹시
주한 뉴질랜드 대사님이 누구신지 아세요? 필립 터너
대사님이신데요. 그분이 올해로 배우자분하고 결혼
26주년이시고, 두 분은 동성커플이세요. 작년 이맘때쯤
대사 부부로 주한 외교단 추청 리셉션으로 청와대도
다녀오셨거든요, 물론 이 분들이 공무로 인해 체류 중인
국내 거주 외국인이셔서 그 조사 대상은 아니시지만 우리
인구주택 총 조사 기준으로 뉴질랜드 대사분의 배우자분의
가구주와의 관계는 어디에 해당될까요?
강신욱 청장:
배우자로 해당될 것 같습니다.
장혜영 의원:
그렇죠, 당연히 배우자이지요. 그러면 다른 케이스 여쭤
볼께요.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라는 책이고요, 저자
소개를 보면 한국 국적 유부녀 레즈비언이라고 합니다.
김규진 작가님 책인데요, “변화하는 세상에 남은 마지막
혼외수호자들은 바로 동성애자들이다.” 이 책은 이분이
결혼하신 내용에 대한 이야기에요. 뉴욕에 가서 혼인신고
하시고 한국에 와서 한국에서 결혼식을 성대하게 하시고
한국에서도 혼인신고 접수를 하셨다가 물론 수리가
36–37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결혼을 하신 거죠. 만일 김규진 씨
댁이 우리 표본 가구로 선정이 된다면 이 분하고 이 분의
배우자는 이 23번에 있는 혼인 상태 항목을 어떻게 하셔야
되죠?
강신욱 청장:
법적인 혼인 관계만을 혼인으로 체크하는 것을 물어보시는
것 같은데.
장혜영 의원:
아니요, 여기서 어떻게 체크해야 하는 거죠? 결혼을
하셨잖아요.
강신욱 청장:
결혼을 하셨으면 배우자 있음으로 체크 하시는 게.
장혜영 의원:
그렇죠, 배우자 있음으로 체크하는 게 너무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겠지요. 근데 우리 현실을 보면 우리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때 온라인 서베이 화면이거든요, 배우자
성별은 가구주의 성별과 같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변경하시겠습니까? 변경을 할 경우에 데이터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통계청에 여쭤봤어요, 그 데이터가 취합은
되는데 걸러내는 작업을 통해서 배우자를 기타 동거인으로
뺀다는 거예요, 임의로, 동의를 구하지 않고, 근데 기타
동거인은 잘 아시겠지만 고용인이나 하숙인이나 그런
사람들을 상정하고 만든 항목이잖아요, 멀쩡한 배우자를
고용인으로 어떤 종류의 조작을 하는 거죠, 통계라고 하는
것은 정책의 근거가 되는 것이고, 통계가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면 정책은 잘못 될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미국 같은 경우에는 뭐 동성법제화 이전부터 통계에서는
unmarried partner 라는 항목을 가지고 그런 근거를
가지고 파악했기 때문에. 내일부터 시작하는 조사에다가
이런 결혼하지 않은 파트너 항목을 넣을 수는 없지만 이런
조사에서 배우자의 성별과 가구주의 성별이 같은 데이터도
기타 동거인이 아니라 배우자로 있는 그대로의 통계를
작성하고 그것을 결과에 반영해주실 것을 제안 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강신욱 청장:
지금 이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있을 텐데 변경 가능한지
검토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슬아: 장혜영 의원님은 굉장히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요청하시네요.
장혜영: 그래야 회피하기 어려우니까요. 정치는 말로 집을
짓는 일이에요.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나중에 하는 말을
구속하기 때문에 쌓이면 쌓일수록 회피하기 어렵죠.
그러니까 말 한마디를 하거나 반대로 이끌어낼 때는
이 말이 단순히 그냥 공기중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회의 국정감사 속기록에 영원히 남아서 이
다음에 이어질 수많은 정치활동의 토대가 된다는 점을
늘 의식해요. 벽돌을 쌓는 기분으로 말한다고나 할까요.
이슬아: 의원님 영상을 볼 때마다 느끼지만 별로 호통을 치지
않으세요. 호통치지 않아도 선명하게 귀에 꽂히는
말소리죠. 아주 힘있는 말소리라고 느끼는데요.
의원님은 원래 이렇게 말할 줄 아셨나요? 아니면
꾸준히 연습하신 건가요?
장혜영: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사석에서 만나면
아무 얘기나 두서없이 하는 거 잘 아시잖아요. 다만
저도 모르게 말하기 방식에 ‘국회의원 모드’를 추가한 것
같아요.
38–39
이슬아: 국회의원은 약간 연극인 모드라는 생각이 들어요.
발성을 바꾸고 화법도 바꾸잖아요.
장혜영: 맞아요. 연극으로서의 정치는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슬아: 의원님은 좋은 연극인이세요.
장혜영: 감사합니다. 제겐 엄청난 칭찬이네요.
지금 당장의 변화를 만들어낸 국정감사 ⑶:
한국은행의 성별 다양성 미흡 관련 질의
2020년 10월 16일, 한국은행 국정감사.
→ 질의 전체 영상
지금 당장의 변화를 만들어낸 국정감사 ⑷:
수출입은행 석탄화력발전 지원 중단 관련 질의
2020년 10월 19일, 수출입은행 국정감사.
→ 질의 전체 영상
지금 당장의 변화를 만들어낸 국정감사 ⑸:
탄소세 연구용역 요청 질의
2020년 10월 7일, 기획재정부 국정감사.
→ 질의 전체 영상
40–41
07. ‘소수자 문제’는 모두의 문제
이슬아: 영상을 보면서 스치는 생각들 중 하나는, 보통의
일반적인 국민들이 정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따라가기
어려운 이유가 되게 많은 한자어들, 낯선 단어들
탓도 있는 것 같아요. 법이 발의되고 진행되는 과정,
여러 일정과 절차들이 진행되는 과정에 너무 생소한
단어들이 많네요. 의원님은 이런 정치의 언어에 어떻게
적응하셨어요?
장혜영: 그냥 닥치는 대로 공부하고 있죠. (웃음) 저는 일본어를
공부했으니까 한자 조합으로 된 단어들은 어느 정도 그
뜻을 짐작할 수 있기는 해요. 하지만 역시 되게 생소하고
어려워요.
이슬아: 국감 영상들을 쭉 보니까 장혜영 의원이라는 사람이
절박하게 느끼는 주제들을 순서대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그런데 이것들이 많은 의원들이
목소리를 내는 이슈들은 아니잖아요.
장혜영: 아직은 그렇죠.
이슬아: 제가 정치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의 순서와도
거의 비슷해서 반갑고 감사한 마음이에요.
장혜영: 감사합니다. 국회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많은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소수자 문제는
‘소수자 문제’이지 모두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적 소수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을
촉구하는 이유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당사자들의
침해당한 권리를 회복함과 동시에 그것이 사회 전체의
복리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이 지점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저에겐 굉장히 중요한 미션이에요. 앞서 보여드린
통계청의 배우자 성별 표기 질의는 단순히 통계가
성소수자 국민들을 배제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취약성을 다루는 데 아주 서툴다는 점을
지적하는 내용이에요. 한국은행의 성별다양성 문제를
짚은 것은 여성들이 받는 차별을 드러냄과 동시에
한국은행이 빠질 수 있는 집단적 사고의 위험을
경고하려 했던 것이고요.
이슬아: 그런데 답변들을 보면, 분명 반영을 하겠다는
맥락이지만 ‘고려해보겠다’는 대답이 되게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고려라는 것은 약속이 아니잖아요?
장혜영: 그렇죠.
이슬아: 고려해보고 나서 안 할 수도 있으니까요. 대체로
답변들이 소극적이고, 뭔가를 최대한 내어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42–43
장혜영: 맞아요. 국정감사에서 정부 쪽은 기본적으로 방어적인
스탠스가 무척 강해요. 그래도 고려해보겠다고 대답을
받으면, 그 다음에 다시 만나서 고려해봤냐고 재차 물을
수 있잖아요. 고려의 결론이 뭐냐. 이렇게 한 발 한 발,
앞에 해 놓은 말들 위에 그 다음 말들이 쌓여서 점차 그
무게감이 달라지는 거죠.
이슬아: 의원님의 화법을 보면 처음에 이야기의 초입에서는
진짜 보편적인 가치를 언급하며 ‘당신들, 상식적인
사람이면 이건 다 동의할 수 있죠?’ 라고 하면서 갈수록
점점 뾰족하게 상대를 몰아가는 느낌으로 말씀하시는
듯해요. (웃음)
장혜영: 네, 그런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웃음)
08. 행동하면 변화는 반드시 일어난다
장혜영: 지금까지 계속 제가 정치를 하면서 약속한 첫 번째
약속, 변화를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일으키는
정치를 하겠다는 약속을 어떻게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를 말씀드렸는데요. 이 주제에 관해서는 또 한
장의 사진을 보여드리며 마무리를 지으면 어떨까 해요.
이슬아: 어떤 사진이죠?
장혜영: 이 사진이에요.
2020년 10월 11일.
정의당 대표단 현충원 참배.44–45
장혜영: 정의당에서는 지도부가 교체된다거나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기념일들에 국립 현충원의 무명 용사탑에
참배를 하러 가요. 지난 10월 11일에 새롭게 당내
선거를 통해 탄생한 당대표 및 신임 지도부와 의원단이
현충원에 참배를 하러 갔어요. 그런데 계단으로 된
단차가 있어서 배복주 부대표님의 휠체어가 자연스럽게
단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죠. 물론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휠체어를 들어서 올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 때 배복주
부대표님과 저, 그리고 함께 있던 류호정 의원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그 계단 밑에 그냥 멈춰섰어요. 말없이
문제를 제기한 거죠. 그때 저희 모습을 당에 계신 분이
사진을 찍어주셨죠. 참배가 끝난 후 현충원에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했고, 한달여만에 계단은 깔끔한
경사로로 바뀌었어요.
이슬아: 되게 빨리 바뀌었네요. (웃음)
장혜영: 그렇죠. 어떤 분들은 이렇게 작은 것을 가지고 대단한
정치를 해낸 양 유세를 떤다고 비웃기도 하셨는데요.
저는 그렇게 폄하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게
작은 변화일 수는 있지만 분명한 변화거든요.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피로감을 느끼는 게 사실 이런
부분이잖아요?
이슬아: 어차피 안 바뀐다는 것.
장혜영: 바로 그거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문제를
제기하고 변화를 촉구하면 변화는 반드시 일어나요.
어떤 문제들은 이번 현충원 경사로처럼 상대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바뀌지만 다른 어떤 문제는 훨씬 시간이
46–47
많이 걸리기도 해요. 하지만 시간의 문제는 시간의
문제고, 변화는 반드시 온다. 행동하면 언젠가 반드시
바뀐다는 것을 얘기할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이라 이
사진을 꼭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이슬아: 이건 작고 단순하지만, 동시에 확실한 변화잖아요. 이
사진 보니까, 정치라는 게 시대에 따라 뭔가를 개선하는
일이라는 게 확실하게 와닿는 것 같아요. 개선됐네요.
장혜영: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갈까요?
48–49
두 번째 약속: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존엄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정치를 하겠다.
01. 차별금지법을 발의하다
장혜영: 제가 정치를 통해 확립하고 싶은 가치는 결국 평등과
존엄이에요. 이런 어마어마한 불평등의 시대에 자유는
너무 수직화되어버렸어요. 수직선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지만 가장
아래 쪽에 있는 이들은 너무나 속박된 삶을 살아가고
있죠. 자유와 존엄은 능력에 따라 차등배분되는
가치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응당 누려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인데 지금은 자유의 불평등, 존엄의 불평등이 너무
심각해요. 그래서 저는 자유의 평등, 존엄의 평등을
실현하는 데 기여하는 정치를 하고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그야말로 제 정치의
심장부에 있는 법률이라고 할 수 있죠.
이슬아: 장혜영 의원님 정치의 심장부라니.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또한 임기 후 가장 많은 품을 들이신
법률이기도 하지 않나요?
장혜영: 21대 국회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의원들끼리
모여 앉아서 차별금지법을 비롯해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나 비동의 강간죄 개정 등 당
차원에서 공약했던 대표적인 법들을 어떻게 나누어
책임지고 대표로 발의할지를 의논했어요. 저는 일찌감치
차별금지법을 제 대표발의 법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차별금지법 얘기가 나오니 다른
의원님들이 다 저를 쳐다보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긴말 없이 그랬죠. “네, 제가 하겠습니다.” (웃음)
이슬아: 자신 있으셨나요?
장혜영: 자신이 있다기보다 숙명이라고 생각했어요.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기 위해 정치에 뛰어든
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이 법이 참
긴 싸움의 역사가 있는 법이잖아요. 차별금지법이
정치권에서 제일 처음에 얘기가 된 건 사실 2002년까지
올라가요.
이슬아: 생각보다 오래됐네요.
장혜영: 그렇죠. 고 노무현 대통령의 후보 당시 공약이었어요.
당시 노무현 대통령께서 당선되신 후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금지법의 내용을 만드는
위원회를 발족시켰고, 그 위원회가 활동한 결과
인권위가 2006년에 차별금지법 권고안이라는 것을
발표하죠. 그 취지와 내용은 사실 제가 이번에 발의한
법안과 크게 다르지 않고요.
이슬아: 저는 시간이 지나서 새로 발의한 거라서 내용이 많이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로 안 다르다고 말씀하셔서
놀랍네요. 그럼 그 권고안에도 동성애 이런 것들이 다
포함이 된 거예요?
장혜영: 그럼요. 그 권고안에는 성별, 장애, 나이, 성적 지향
등을 포함해 20개의 차별금지사유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번에 제가 발의한 차별금지법에는 거기서 3개가 더
추가되었을 뿐이에요. 차별금지사유 외에 법을 통해서
인권위가 차별을 다루어나가는 방법에 대한 내용도
일맥상통하고요. 무엇보다 우리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50–51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평등권을 구체화하고
시민들의 일상에 존엄을 현실화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법이라는 점이 같아요. 2007년부터 지금까지
이 법이 국회에 발의된 횟수가 제가 발의한 것을
포함하면 무려 8번인데요. 8개의 각 법안마다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큰 틀에서는 역시 비슷해요.
차별금지법안 (장혜영 의원 대표발의)
2020년 6월 29일 발의.
제1조(목적)
이 법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차별로 인한 피해를 효과적으로
구제함으로써 헌법상의 평등권을 보호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3조(금지대상 차별의 범위)
① 이 법에서 차별이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 또는 경우를 말한다.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學歷), 고용형태, 병력 또는
건강상태, 사회적신분 등(이하 “성별 등”이라 한다)을 이유로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의 영역에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
가. 고용(모집, 채용, 교육, 배치, 승진・승급, 임금 및
임금 외의 금품 지급, 자금의 융자, 정년, 퇴직, 해고 등을
포함한다)
나. 재화・용역・시설 등의 공급이나 이용
다. 교육기관 및 직업훈련기관에서의 교육・훈련이나 이용
라. 행정서비스 등의 제공이나 이용
2020년 11월 23일.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종교계 릴레이 기자회견: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나눔의집협의회52–53
02.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
이슬아: 그런데 그런 법이 왜 아직까지 통과가 되지 않은
거예요?
장혜영: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많은 사람들은 차별금지법이
무언가 내용에 문제가 있어서 통과가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제 생각에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차별금지법은 그 내용이 아니라 세 가지 층위의 다른
걸림돌 때문에 아직도 통과가 안 된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첫 번째 걸림돌은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에요. 두 번째 걸림돌은 그런 무지와
편견을 이용해서 자기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시키거나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의 존재고요. 마지막 걸림돌은
그런 무지와 편견, 그리고 잇속을 돌파해내는 것을
두려워하며 ‘사회적 합의’라는 허울 좋은 말 뒤에 숨어
표 계산만 하는 기득권 정치라고 생각해요.
이 세 가지 조건이 맞물리면서 2020년이 되도록
차별을 사회적으로 논의하고 근절하자는 상식적인
법안 하나가 통과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거죠.
2020년 11월 5일.
조계종 기도행진 기자회견 발언.54–55
이슬아: 지금 진행하고 계신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
캠페인은 그런 무지와 편견에 조용히 말을 거는
캠페인이지요.
장혜영: 그런 셈이죠.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쪽에서 열심히
캠페인을 해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차별금지법’ 하면
당장 동성애, 뭔가 갈등하는 상황, 원색적인 비난 같은
것들을 연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물론 맞서
싸우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평범한 시민들에게 차별금지법이 가진
소중한 가치가 잔잔하지만 또렷하게 스며들 수 있는
새로운 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 캠페인 같은 것을 고민하게 됐어요.
후원회장님께서도 소중한 글을 보내주셨죠.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려요.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에 관해.
2020년 11월 17일, 오마이뉴스 기고글.
우리는 차별이 문제라고 말하면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가 더 문제라고 되받아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일상의 차별을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면 어김없이
‘프로불편러’, ‘진지충’, ‘PC충’이라는 비난이 돌아온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좋게좋게 넘어가면 될 것을 남들
앞에서 콕 집어 민망하게 만든다고, 유난스럽고 민감하고
까탈스러운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는다.
누군가의 부적절한 언행에 대한 지적을 통해 그의 변화와
개선을 이끌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을 일방적으로 과시하고 타인을 망신 주는
즐거움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은 새겨들을
가치가 있다. 조너선 하이트와 그레그 루키아노프가
2020년 11월 23일.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 캠페인 시작.56–57
〈나쁜교육〉에서 정확히 짚었듯 면역이 아닌 무균실을
지향하는 안전주의에 대한 경각심은 중요한 화두다.
다만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상황은 사회 곳곳에 정치적
올바름이 과도하게 흘러넘쳐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이라기
보다, 정확히 그 반대다. 누구보다 공적인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정치인들은 밥 먹듯이 장애를 비하하고 여성을
비하하고 비수도권을 비하하고 노인을 비하한다. 방송이나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어디 언어뿐인가. 실제 고용에 있어서, 교육에 있어서,
생활에 있어서 여성이라는 이유, 이주민이라는 이유,
비수도권 지역의 학교를 다녔다는 이유, 가난하다는 이유,
그 밖의 무수한 소수자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행위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내가 21대 국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대표 발의하고 이 법의 제정을 위해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캠페인을 시작하는 이유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인한 변화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골자는 고용과 교육, 재화와 용역의
제공과 이용, 그리고 행정 서비스라는 일상의 필수적인 네
가지 영역에 있어서 성별이나 연령, 장애, 학력, 출신 국가나
민족,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부당하게 차별이 발생할 경우
국가인권위원회가 시정을 권고하거나 명령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 정부와 지자체가 차별을 예방하기 위한 정책과
계획을 주기적으로 수립하고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일부 보수 기독교계에서 원색적으로 강변하는 것과
달리 이 법은 국가인권위원회법의 평등권 침해에 대한
차별행위규제 조항을 보다 시의적절하게 확장하고 다듬어
깔끔하게 기본법으로 정리한 평범하고 상식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얌전하기까지 한 법이다. (심지어 일부
보수 기독교계에서 듣기만 해도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성적
지향’이라는 차별금지 사유는 이미 국가인권위법 안에
포함되어 있다.)
58–59
우리가 관습과 도덕만으로 충분히 서로가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존중하는 사회를 자발적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입법할 필요성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2020년 현재
우리는 아직 그런 사회를 만들지 못했다. 인식이 제도의
자리를 충분히 채우지 못하는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차별로 고통을 받았다. 제도가 인식을 견인해낼 수
있도록 지금 당장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둥, 역차별을 조장한다는 둥, 이
법의 통과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적극 퍼뜨리는 거짓말과
달리 이 법이 조장하는 것은 ‘차별에 대한 일상적인 성찰과
토론’이다. 지금까지는 관성적으로 반복해왔던 우리의 말과
행동이 혹시 다른 시민의 존엄을 해치는 차별이지는 않은지
일상적으로 함께 성찰하고, 구체적으로 토론하고, 토론의
결과 어떤 행위가 부당한 차별이라고 결론 내려진다면 그
차별을 중단하는 시스템을 갖자는 것이다.
더 나은 언어, 더 나은 태도
차별금지법이 가진 이런 가치를 시민들에게 어떻게 더욱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 떠오른 한 가지
아이디어는 더 나은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탐구를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작가들의 태도야말로 차별금지법이
시민들에게 요청하는 태도와 닮아있다는 것이었다. 시대와
호흡하며 동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작가들에게
마음을 담아 조심스레 요청했다.
여러분께서 한때는 썼고, 지금도 쓸 수 있지만 윤리적인
이유로 더 이상 쓰지 않는 말들에 대한 글을 써주실 수
있겠느냐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마음을 담아
그렇게 해주실 수 있겠느냐고 정중한 요청의 메일을 보냈다.
그렇게 김나율, 김민철, 김세희, 김윤리, 김하나, 김혼비,
미깡, 박연준, 봉현, 수신지, 이진송, 이슬아, 장류진, 황선우
열네 분의 작가분께 참여하겠다는 답장을 받았다. 이 가운데
봉현 작가님은 이 프로젝트의 시각적인 아이덴티티 작업을
자발적으로 도맡아 해주시기도 했다.
60–61
03. 평등을 입법한 나라들을 만나다
장혜영: 부끄러운 얘기를 하나 하자면, 저 역시도 차별금지법을
준비하던 초반에는 마음속에 편견이 있었어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편견이요.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토론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정확히 반대 쪽에서 찬성의 목소리를 스피커 볼륨으로
눌러버리듯이 찬성의 목소리를 증폭할 방법만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차별금지법이 가진 정신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차별을 색출해서 처벌하자!’가 아니라
‘우리 한번 차별에 대해 진지하게 사회적인 대화를
나눠볼까요?’에 가깝거든요. 그런데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많은 분들께서는 이유야 어쨌든 정말로 이
법이 무서운 법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계세요. 제가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장혜영하고는 말이 안
통한다’ ‘차별금지법을 만들려고 하는 쪽은 대화가 안
된다’ ‘어차피 답정너’라고도 생각하죠.
아차 싶었어요. 정말로 차별금지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싸움과 팩트체크를 넘어 제대로 된
토론의 장이 필요하다는 걸 깊이 깨달았어요. 대화
없이 밀어붙일거라는 두려움 없이 터질 듯한 긴장을
내려놓은 채 충분히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경청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해요.
이슬아: 정말 그럴 것 같아요. 차별금지법에 대한 오해를 푸는
작업이 중요하지요.
장혜영: 그런 의미에서 차별금지법과 비슷한 법이 이미
만들어져 시행되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듣고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난 9월 22일에는 인권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그리고 제가 책임연구위원으로 있는 국회
여성아동인권포럼과 함께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나라는
지금?’이라는 이름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호주의 대사님들을 모시고 주한 외국 대사관 초청
컨퍼런스를 열기도 했죠.
그 자리에서 참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어요.
그 자리에 오신 분들이 입을 모아 하신 얘기가 있어요.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다.’ 차별금지법이 도입된다고
해서 그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이 일거에 해소되는
일은 없겠지만, 차별을 근절하려는 노력은 사회를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명 사회를 안정시키고 더욱
강인하게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는 점을 강조하셨어요.
감동적인 순간이었죠.
이런 내용들을 더욱 잘 알리기 위해서 컨퍼런스
이후에도 영국, 뉴질랜드, 네덜란드, 핀란드의 대사님
들을 모시고 KBS와 함께 대담 콘텐츠를 기획해서 이미
비슷한 법이 입법된 나라들의 경험을 여러 시민들게 더
소상히 알려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이슬아: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다른 나라의 사례를 적극적으로
참고한 뒤 쉬운 언어로 소개하시는 일이지요?
2020년 9월 22일.
주한 외국 대사관 초청 인권 컨퍼런스.62–63
장혜영: 지금까지 영국의 닉 메타 부대사님, 그리고 뉴질랜드의
필립 터너 대사님과 대담을 나누었어요. 각각의
대담에서 인상적인 부분이 아주 많았는데, 그 중에 한
가지씩만 말씀을 드릴게요.
영국에는 이미 2010년에 평등법이 도입되었
는데요. 주한 영국 대사관의 닉 메타 부대사님은 거듭
차별금지법이라는 것이 머릿속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차별당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어요. 실제적으로
현실에서 사람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차별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는 아무 곳에도 없고, 바로 그 지점에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거죠. 그러면서 우간다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유색 인종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겪어야 했던 차별의 경험들을 나누어주셨어요. 심지어
지금도 본인의 피부색 때문에 한국에서 종종 택시에서
승차거부를 당한다는 말씀을 하셔서 저를 너무
부끄럽게 하셨죠.
이슬아: 아, 그런일이 있었군요. 많은 것이 변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어요.
2020년 11월 24일.
평등을 입법한 나라들 연속 대담:
① 주한 영국 닉 메타 부대사.64–65
장혜영: 뉴질랜드에는 무려 1993년부터 인권법이 도입되어
지금껏 시행되고 있어요. 주한 뉴질랜드 대사이신 필립
터너 대사님은 동성 배우자이신 이케다 히로시 님과
26년째 결혼생활을 이어오고 계신 분이신데요. 작년에
청와대에서 열린 만찬에 한국 주재 외교관으로서는
최초로 동성 배우자와 함께 공식 초청된 소중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셨죠.
필립 터너 대사님이 강조하시는 부분은 뉴질랜드
인권법의 목표는 누군가에게 제약을 가하고 처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자신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라는 점이었어요. “위원회는 사람들을
모아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문제가 있어요. 한 사람은
차별을 받았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아니라고
말하는군요. 여기 갈등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뉴질랜드에서 인권법에 관련된 대부분의
문제들은 법적인 절차가 아닌 이런 종류의 토론과
논의를 통해서 해결된다고 해요. 인권법의 도입은
이런 논의를 시작할 수 있도록 차별에 관한 명확한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기에 중요하고요.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결국 교육과 토론을 통해 차별에
대한 사람들의 근본적인 인식이 변화하는 것임을
강조하셨어요.
2020년 11월 25일.
평등을 입법한 나라들 연속 대담:
② 주한 뉴질랜드 필립 터너 대사.66–67
04. 법사위원들께 경청을 요청하다
이슬아: 모두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말을 자꾸
곰곰이 생각하게 돼요. 현재 차별금지법의 진척상황은
어디까지 왔나요?
장혜영: 차별금지법은 상임위들 가운데 법제사법위원회
소관으로 배정이 되었어요. 지난 9월 21일에 법사위에
차별금지법이 상정될 때, 직접 가서 이 법에 대한
제안설명을 드렸죠.
이슬아: 아, 그 영상 본 것 같아요. ‘경청’에 대해 말씀하셨죠?
장혜영: 맞아요. 그 자리에 앉아계신 여러 의원님들께서 이
제안설명을 통해 조금이라도 다시 차별금지법을 새롭게
느끼고 돌아보실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한 자 한 자 정말
열심히 썼어요.
「차별금지법안」 제안설명
2020년 9월 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 회의록 중.
존경하는 윤호중 위원장님! 그리고 법제사법위원회 선배・
동료 위원님 여러분!
정의당 장혜영 의원입니다. ‘코로나19’ 판데믹이 어서 종식
되기를 바라는 우리 모두의 희망과 달리 지역감염이 계속
이어지는 엄중한 시국에 여러분께 제가 지난 6월 29일에
다른 9분 의원님들과 함께 발의한 ‘차별금지법’에 대해
설명드릴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난 목요일, 여야의 다른 초선 여성의원님들과 함께
68–69
영국대사관에 초청되어 개인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테레사 메이 영국 전 총리님과 만찬을 가졌습니다. 메이
전 총리는 코로나 이후 처음 맞이하는 외빈입니다. 또한
메이 전 총리는 남성 중심의 정치세계에 뛰어든 여성
정치인들이 겪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치인
가운데 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날 만찬은 메이 전 총리께서
대한민국 의회에 새롭게 등장한 여성 정치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한 소중한 자리였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메이 전
총리께 한 가지 질문을 드렸습니다.
메이 전 총리께서 평등장관으로 재임 중이던 2010년, 영국의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 할 수 있는 평등법이 영국에서
제정되었습니다. 당시 집권세력은 보수당이었고, 메이
장관은 “영국 역사상 최악의 법”이라는 혹평과 함께 표결에
기권하였습니다. 그러나 4년 후인 2014년, 동성결혼이
영국에서 법제화될 때, 메이 전 총리는 “내 가치관이
변했다. 과거의 동성애 관련 표결을 오늘 다시 할 수 있다면
찬성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생각이 다른 타인을
설득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보다 어려운 것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메이 전 총리께서 스스로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 무엇이었는지를 저는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메이 전 총리의 대답은 간명했습니다. 본인께서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존경하는 위원장님, 그리고 선배・동료 위원님 여러분!
제가 대표발의한 「차별금지법안」에 대한 왜곡된 정보들로
인한 일부의 오해와 우려의 목소리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간곡하게 호소드립니다.
단 한 명의 시민이라도 차별받을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차별받을 수 있기에, 모든 시민들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고자 하는 이 차별금지법 안에 담겨있는 간절한
목소리를 경청해주십시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수많은 국민들의 노력으로 눈부신
발전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압축적인 성장의
그늘에서 불평등은 심화되었고 차별은 방치되었습니다.
오늘날 어떤 시민들은 여전히 그들이 가진 특정한 물리적・
사회적・문화적 특성을 이유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필수적 영역에서 그 특성을 갖지 않은 시민들은 상상할 수
없는 부당한 차별을 받습니다. 그러한 차별 피해가 발생했을
때 피해를 입은 시민들을 제대로 보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정법과 구제 수단은 아직 미비한 상황입니다.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을 예방하고 차별피해자를 보호
및 구제하며, 개인에게 발생하는 복합적 차별을 효과적으로
다룰 ‘포괄적’이고 실효성 있는 법안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또한 차별의 의미와 판단기준을 명확히 하고 직접적
차별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이뤄지는 차별 역시 명확히
함으로써 우리 헌법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와 평등의 가치,
그리고 기본권 실현의 토대를 마련해야 합니다.
이에 「차별금지법안」을 제정하여 ‘코로나19’ 시대 우리사회
인권의 가이드라인을 확립하고, 바이러스 감염으로부터
우리 모두의 삶을 지키는 ‘마스크’와 같이 모두의 안전과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존경하는 선배, 동료 위원 여러분!
헌법재판소는 “평등의 원칙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관한 우리 헌법의 최고 원리”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은 이러한 헌법의 이념을 실현하고 존엄과
평등이 시민들의 삶에서 꽃피는 대한민국을 만들어가기
위해 발의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이 법안의 취지를 깊이
헤아려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시고 지지해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11월 26일.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종교계 릴레이 기자회견: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장혜영: 제가 차별금지법을 발의하자마자 인권위에서는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평등법 시안’이라는 것을
발표하며 정부 여당에 법 제정을 촉구했어요. 평등법은
차별금지법을 보다 긍정적인 방식으로 ‘브랜딩’한
거라고 생각해요. 평등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 행동은
결국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니까요. 마치 정의의 실현이
부정의를 타파하는 것으로 가능해지듯이요.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내에 5선 중진 의원인
이상민 의원이라는 분이 대표발의를 준비하고 계신데요.
저는 민주당에 올해 안에 평등법을 당론으로 채택해서
강력히 추진할 것을 계속 소리높여 압박하고 있어요.
그래야 개별 의원들이 조금 더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는 여지가 생기니까요. 민주당이
평등법을 발의하고 나면 제가 발의한 차별금지법과
내용이 비슷하기 때문에 합쳐서 심사를 진행하게 될
거예요. 놀랍게도 차별금지법은 아직까지 단 한번도
국회에서 제대로 심사된 적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일단 당면한 목표는 실제로 토론이 시작되게 만드는
것이죠.
이슬아: 보다 긍정적인 방식으로 브랜딩하셨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에요. 의원 장혜영이 작가이자 감독이었던
장혜영에게 꾸준히 도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72–73
05. 음악이 정치가 되는 순간
장혜영: 차별금지법 외에도 존엄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 중요한
법안을 이번에 정의당에서 여러 가지 발의했어요.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는 법안도 그렇고, 비동의강간죄를
개정하는 것도 그렇지요. 또 시민들의 일상과 일터의
안전을 위협하는 온갖 부주의와 무책임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기업의 경영자와
관리 책임이 있는 담당 공무원들이 안전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경우 무거운 처벌을 내릴 수 있게 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올해 안에 제정해내는 일에도
열과 성을 다하고 있어요.
이슬아: 국회에서 〈그 쇳물 쓰지마라〉라는 노래를 부르시는
것을 보았어요. 정말 강렬한 노래예요. 아주 슬픈
노래고요.
장혜영: 맞아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노래죠.
노래를 불러서 세상이 바뀌냐고 힐난하는 분들도 종종
계셨는데, 노래가 그 자체로 세상을 바꾸지는 않지만
노래를 부르고 듣는 사람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요. 현충원 계단을 경사로로 만들어낸 것처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서
반드시 이 문제도 바꾸어내고 말 거예요. 그나저나
TMI인데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기타치며 노래부른
의원은 제가 최초라고 해요.
이슬아: 너무 좋아요. 더 자주 부르면 좋겠어요.
장혜영: 자주 부르면 국회에서 하지 말라고 엄숙한 내규가
만들어질지도요. (웃음)
〈그 쇳물 쓰지 마라〉
제페토 작사, 하림 작곡
광염(狂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마라.
가로등도 만들지 말것이며
못을 만들지도 말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적 얼굴 찰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 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새끼 얼굴 한번 만져 보게.
2020년 9월 14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촉구 릴레이 1인시위
〈그 쇳물 쓰지 마라〉74–75
76–77
세 번째 약속: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정치를 하겠다.
01. 정치는 불가능의 예술
이슬아: 이제 세 번째 약속에 대해 들을 차례네요. ‘정치를
하겠다’는 약속이죠.
장혜영: 그렇죠. 혹시 후원회장님은 혹시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정치의 정의에 대해 기억나는 문장이
있으신가요?
이슬아: 글쎄요. 지금 딱 생각나는 것은 없네요.
장혜영: 제가 예전에 대학 다닐 때 정치학개론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수업 첫 시간에 교수님이 말씀하신
문장이 있었어요. 나중에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는
문장이더라고요. “정치는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다.”
데이비드 이스턴이라는 정치학자의 정의예요.
이슬아: 자원의 권위적 배분?
장혜영: 네. 사회에 존재하는 자원을 어떤 ‘권위’를 가지고
배분하는 문제라고 규정하는 거죠. 그 때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제 와서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반만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그건
정치의 행정적인 면모를 설명하기 적절한 정의죠.
예를 들면 정책을 수립하고 예산을 집행하고 인사를
하는 등 실제로 자원을 배분하는 일들을 잘 설명하는
정의라고는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더 사랑하는 정의는 체코의 하벨
대통령이 말한 정의예요. “정치는 불가능의 예술이다.”
무언가를 나눠 갖는 일에만 골몰하다보면 주어진
정치적 혹은 사회경제적 조건을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여기게 되는 경향이 생겨요. 하지만 세상이 굴러온
역사는 단순히 분배의 역사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역동적인 가치와 가치 사이의 투쟁, 생각과 생각
사이의 투쟁이었죠. 제가 하고 싶은 정치는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끝없이 불가능에
도전하는 예술로서의 정치예요.
이슬아: 불가능에 도전하는 예술…!
장혜영: 제가 정치를 시작하며 소수정당인 정의당을 선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요. 후원회장님 혹시 ‘거대양당’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이슬아: 그 말 너무 웃긴 것 같아요. ‘적대적 공생관계.’
장혜영: 맞아요. 모순적이죠. 그런데 그 말만큼 지금 국회가
처한 딜레마를 잘 표현하는 말도 따로 없는 것 같아요.
두 개의 오래되고 거대한 기득권 정당이 서로를 욕하는
것으로 서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상황이요.
앞서 얘기했던 저에게는 필사적으로 해결하고 싶은
문제들이 이 거대 양당에게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문제들로 치부되고 있어요. 이런 거대 기득권 양당의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정치의 판이 깨지지 않는 한 제가
이야기하는 미래들은 언제까지나 ‘지나치게 이상적인
얘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이야기되겠죠.
하지만 저는 단순히 이상적인 얘기를 늘어놓고 여기에
공감하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듣기 위해 정치를
시작한 것이 아니에요.
78–79
정책을 실현하는 힘은 결국 정치에서 나오죠.
그래서 저는 매일 매일 힘에 대해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정치적인 힘을 가질 수 있을까. 그 시작은
자기 정치의 원칙을 바로 세우는 것에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그때그때 진영논리에 휩쓸리고 관계에
영향받으며 이리 눈치보고 저리 눈치보는 정치가
아니라 어떤 원칙을 가지고 누구를 대변하며 어떤
미래를 꿈꾸고 노력하는지 당당하고 진솔하게 시민들
앞에 나서서 보여드리는 것이 그 어떤 정치를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될 거라고 믿어요.
이슬아: 그래서 지난번 국회에서 하셨던 연설에 많은 사람들이
울림을 느꼈던 것 같아요.
장혜영: 지난 대정부질문을 말씀하시는 거죠. 대정부질문은
국회 의사일정 가운데 하나이고, 말 그대로 국회의원이
정부 측에 정치분야, 경제분야 등 각 분야에 맞는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듣는 형식으로 진행돼요. 당시에 저는
기재위 소속 의원이고 하니 경제 분야의 대정부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당장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정기국회였기 때문에 산적해있는 현안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하지만 대정부질문 첫날은 종일 진짜 민생에
관련된 시급한 현안들보다는 당장 눈앞의 정쟁거리를
둔 지루하고 원색적인 공방으로 귀한 시간들을 다
허비했어요. 너무나 속이 상했죠. 차라리 그 시간을 다
나를 주지. 그 시간이 어떤 시간인데.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정부여당이 마음만 먹으면 정말 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데, 변화를 위해 내달려도 모자랄 시간에
정쟁이 그 모든 자원을 허비하고 있다니.
대정부질문은 정말 하루 종일 하는데, 그러다보니
중간에 의원님들이 다 듣지 않고 자리를 많이 비우세요.
그 자리를 보면서 생각했죠. 만일 코로나 때문에, 올해
기후위기로 닥쳐온 장마 때문에 피해를 입고 건강을
잃고 가족을 잃은 시민들이 이 자리에 와서 이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 그래서 고민 끝에 제
대정부질문 바로 전날 저녁에 그때까지 미리 준비해둔
질문들 일부를 커트하고 한 5분 정도 되는 짧은 연설을
준비했어요. 무척 긴장했는데 끝나고나서 많은 분들이
좋게 보아주셨더라고요.
80–81
대정부질문 연설:
87년생 청년 정치인이 87년의 청년들께
2020년 9월 16일. 2020년 정기국회 경제분야 대정부질문 중.
저는 초선 비례대표 국회의원입니다. 작년에 정치를
시작했고, 이번 국회는 저의 첫 정기국회입니다. 코로나19
판데믹에 기후재난이 겹치는 엄중한 상황에 무거운
책임감과 동시에 국민을 대표하는 자긍심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대정부질문을
바라보며 제 마음에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정말로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요?
꿋꿋이 민생과 국정운영에 관해 정책질의하시는 의원님들도
계셨지만, 코로나19 민생대책을 비롯해 중요한 민생 이슈를
다뤄야 했던 소중한 시간의 대부분은 추미애 법무부장관
아들의 휴가 문제를 둘러싼 정쟁에 허비되었습니다.
저는 1987년생입니다. 제가 태어난 해에 87년 민주화가
이루어졌습니다. 21대 국회에는 그 87년 민주화의 주역들
께서 많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때 독재 타도를 외치며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여러 의원님들을
포함한 모든 분들 덕분에 우리는 대통령 직선제라는
소중한 제도적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탄생시켰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자신의 젊음을 내던졌던 87년의 모든
청년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그 거대하고 두려운 독재의 벽을
마주하면서도, 그에 맞서 싸우는 것이 옳기 때문에,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에 그 시대적인 도전과 사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안아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젊음을 아낌없이 불태우셨을 것입니다.
82–83
2020년 9월 16일. 정기국회 경제분야 대정부질문.
87년생인 저는 독재의 두려움을 피부로 알지 못합니다.
그 두려움은 그 시대를 온몸으로 살았던 여러분만이 아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책과 영상을 본다 해도, 그
두려움을 제가 감히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두려움을 압니다. 무한한 경쟁 속에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나날이 변화하고
복잡해지는 세상 속에 내 자리는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온갖 재난과 불평등으로부터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지켜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누구를 타도해야 이 두려움이
사라지는지, 알 수 없는 두려움입니다.
87년의 정의가 독재에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정의는 불평등과 기후위기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청년 시절의 젊음을 바쳐 독재에 맞섰듯,
한때 우리를 번영하게 했지만 지금은 지구상 모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탄소경제에 맞서, 청년들에게 꿈을 빼앗고
인간성을 나락으로 빠뜨리는 지긋지긋한 불평등에 맞서,
우리를 덮쳐오는 온갖 불확실한 위기들에 맞서 모두의
평등하고 존엄한 삶을 지키기 위해 저 또한 저의 젊음을
걸고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지난 2017년,‘이게 나라냐’를 외치며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을
때, 많은 시민들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저 또한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민주화의 주인공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잡을 때, 그 권력이 지금껏 우리 사회의 케케묵은
과제들을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에 우리가 마주한
도전들에 용감히 부딪쳐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한때 변화의
가장 큰 동력이었던 사람들이 어느새 시대의 도전자가
아닌 기득권자로 변해 말로만 변화를 이야기할 뿐 사실은
그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존재가 되어버린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84–85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서라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싸우겠다던 그 뜨거운
심장이 어째서 이렇게 차갑게 식어버린 것입니까.
더 나쁜 놈들도 있다고, 나 정도면 양반이라고, 손쉬운
자기합리화 뒤에 숨어서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는 것을
멈추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온몸을 내던졌던 그 젊은
시절의 뜨거움을 과거의 무용담이 아닌 이 시대의 벽을
부수는 노련한 힘으로 되살려주실 것을 간곡히 호소하며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87년생 청년 정치인으로서 지금 이 자리에 앉아계신
87년의 청년들께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지금, 2020년에
태어난 아기들이 20년, 30년 후의 청년이 되어 우리는 알 수
없는 그 시대의 정의로움을 위한 싸움을 지속할 수 있도록
먼저 이 세상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일에 동참해주십시오.
여러분께서 독재와 싸웠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가 아닙니까? 우리가 불평등에 저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우리가
기후위기에 저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미래를 갖고 싶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민들이
인간답게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만드는 정치,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이슬아: 이 연설문은 다시 읽어도 인상적이에요. 앞선 세대의
두려움을 존중하면서도, 현재 젊은 세대들이 어떤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설득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정치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글이잖아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그 영상을 보며 글을 쓰는 사람이
의원이 돼서 너무 좋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장혜영
의원님의 말하기 방식에 대해 개인적으로 되게 흥미가
많아요. 엄청 부드럽지만 또렷하고 선명하고. 소리를
지르는 다른 누구보다도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이런 질감의 목소리가 없었다는 느낌도
들고요. 그래서 저는 효과적인 퍼포머로서도 관심이
많아요.
장혜영: 제가 아무리 봐도 화려한 타입은 아니잖아요. 가끔은
저도 뭔가를 화려하게 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역시 자기답게 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제 책상 앞에 써서 붙여놓고 매일 보는
메모 중 하나가 ‘차분하면서도 급진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문장이에요.
이슬아: 너무 의원님다운 이야기네요. 다듬어진 기품있는
언어를 쓰신다고 생각해요. 제 일은 정치는 아니지만
의원님의 말하기 방식에서 많이 배우기도 해요. 특히
일할 때 필요 이상으로 감사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
필요 이상으로 죄송하다 말하지 않는 것. 참고가 많이
돼요.
장혜영: 감사합니다. 이건 백 퍼센트의 감사예요. (웃음)
86–87
02. 의정보고를 마치며
이슬아: 오늘 내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장혜영 의원의 그간의
행보를 쭉 들으면서 저의 글쓰기 스승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어요. 어떤 작가의 글쓰기가 확장되려면,
한 작가가 남의 슬픔을 자기 슬픔처럼 느끼는 경험들이
필요하다고. 남의 슬픔이 내 슬픔처럼 느껴질 때 이
작가의 글쓰기가 겨우겨우 확장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의원님의 세계도 비슷한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얼마나 다양한 문제로 슬플 수
있는지가 이 사람의 정치 세계의 반경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 들은 모든 이야기들이 마치 이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슬펐느냐에 대한 보고서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그래서 중간중간 찡한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너무나 일하는 사람이라는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계속
우는 사람은 일을 못 하기 때문에. 그래서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은 시를 쓰지 않는다고 말하잖아요.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글을 쓴다고 생각해요. 우느라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정치를 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의원님은 첫 번째로 슬픈 사람 대신에 일할 수 있는,
그런 점에서 엄청 미더운 일꾼이라고 생각합니다.
장혜영: 마음에 오래오래 담아두고 꺼내보고 싶은 싶은 말씀을
해 주셨어요. 정말 감사해요.
이슬아: 슬픔을 분노로 바꿀 수도 있겠네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화낼 수 있는가로요.
20210104_m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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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차분하고 급진적인 국회의원 장혜영 2020 의정보고서 장혜영1 이 말하고 이슬아2 가 듣다 1 제21대 국회의원: 정의당, 비례대표 2 작가, 〈국회의원장혜영후원회〉 회장
  • 2. 장혜영 1987년생. 21대 국회에서 정의당 소속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다. 바꿔달라고 요청하는 정치에 지쳐 직접 하는 정치에 뛰어들었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변화를 만드는 정치, 모든 시민의 존엄과 평등을 지키는 정치를 꿈꾼다. 21대 국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대표발의했다. 소속 상임위원회는 기획재정위원회이다. 이슬아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다. 작가이자 글쓰기 교사다. ‘일간 이슬아’를 발행하고 헤엄 출판사를 운영한다. 〈심신단련〉, 〈깨끗한 존경〉, 〈부지런한 사랑〉 등을 썼다. 비건 지향인이다. 현재 국회의원 장혜영 후원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 3. 2020년 12월 2일. 장혜영-이슬아 만남. 국회의원회관 516호 장혜영 의원실에서 진행.
  • 4. 인사와 소개 04 첫 번째 약속: 지금 당장 변화를 일으키는 12 정치를 하겠다. 두 번째 약속: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48 존엄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정치를 하겠다. 세 번째 약속: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정치를 하겠다. 76
  • 6. 01. 의정보고를 시작하며 장혜영: 이슬아 후원회장님 안녕하세요. 지난 9월에 처음 의원실 오신 후에 오랜만에 다시 뵙네요. 이슬아: 그러게요.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많이 바쁘시죠. 장혜영: 늘 그렇죠. 후원회장님도 많이 바쁘시잖아요. 여러 일정 있으신 와중에 시간 쪼개서 이렇게 제안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슬아: 하하하. 살면서 이런 대담은 처음 해봅니다. 혹시 제가 정말 기본적인 것을 되물어도 괜찮나요? 장혜영: 너무 좋아요. 후원회장님이 모르시는 것은 아마 이 보고서를 보시는 다른 분들도 잘 모르실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 부분을 대의해서 물어보는 것이라 생각해 주시면 조금 더 편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슬아: 네. 좋아요. 장혜영: 그럼 먼저 제가 왜 이렇게 후원회장님을 모시고 이야기의 형식으로 의정보고를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드리면 좋을 것 같아요. 국회의원들이 의정보고라고 하는 것을 연말이 되면 정말 열심히 하는데요. 사실 꼭 연말에만 하는 것은 아니고 수시로 문자나 카톡, 이메일 같은 것들을 보내기도 해요. 어떤 국회의원이 자기가 뭐를 따냈다, 무슨 법률을 만들어냈다, 그런 내용이 가득한 문서랄까
  • 7. 편집물이랄까. 그런데 저는 그런 것을 받아도 의외로 그걸 끝까지 읽은 기억이 별로 없어요. 그냥 주욱 훑어보고 끝나는 거죠. 제 의정보고서를 그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슬아: 쉽게 말해 의정보고라는 것은 ‘한 의원이 당선 후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를 말하는 것 아닌가요? 장혜영: 그렇죠. ‘올 한 해 저는 국회의원으로서 뭐뭐뭐를 했습니다’를 전하고 싶은 거죠. 그런데 말하는 쪽에서 하고 싶은 말만 잔뜩 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에서도 궁금하고 소화 가능한 방법이 무엇일지가 고민이었죠. 그런데 아무리 어려운 것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야기로 풀면 그래도 사람들이 끝까지 들을 수 있잖아요? 이슬아: 맞아요. 장혜영: 결국 의정보고라는 건 시민들에게 말을 거는 일이니까, 후원회장님을 모시고 제가 한 해동안 한 정치를 말로 가만가만 설명을 드리고, 그 내용을 글로 풀어서 다른 분들께 보여드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슬아: 그러고보면 지난번에 대담 형식으로 진행하신 황선우 작가님과의 인터뷰*도 너무 좋았잖아요. 정치에 대해 아주 잘 알지 못하는 분들도 끝까지 읽으신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대화가 기다려졌습니다. 잘 들어보겠습니다. *황선우의 스압 인터뷰: 카카오페이지 ‘멋있으면 다 언니’ 06–07
  • 8. 장혜영: 감사합니다. 의정보고라는 말을 단어 그대로 풀면 ‘의회’의 ‘정치’를 ‘보고’하는 것인데요. 결국 정치란 약속에 관한 것이잖아요. 어떤 정치인이 시민들에게 자기가 어떤 정치를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것이 구체적인 공약이든 선언적인 가치이든 그 약속을 지켜가는 과정을 소상히 알려나가고, 그것을 접한 시민들이 ‘아 저 사람은 약속을 지키고 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다면 그것은 참 좋은 정치겠죠. 그런 의미에서 의정보고란 제가 정치를 통해 시민들께 드린 약속이 무엇인지, 그 약속을 어떻게 지켜가고 있는지를 알려드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오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앞서, 제가 정치인으로서 처음으로 쓴 글인 ‘공개정치 선언문’을 가져왔어요. 이 글 안에는 제가 정치인으로서 한 약속들이 아주 압축적으로 들어있거든요. 이것을 먼저 보여드리고 그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면 좋겠어요. 〈공개정치선언문〉, 2019년 10월 29일. 안녕하세요. 장혜영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정치를 시작하려 합니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넘어, 더 많은 책임과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모두를 위한 공동체를 만드는 길을 가보려 합니다. 지쳤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반드시 필요한 변화를 만드는 일을 주저하는 지금의 정치에 지쳤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나 신문고만 두드릴 뿐 결정에는 참여할 수 없는 정치에 지쳤기 때문입니다. 호소하고 외치고 기다리고 실망하는 정치, 약자에게 ‘나중에’를 말하는 정치, 약속을 어기고도 사과는 커녕 모른척만 하는 정치에 지쳤기 때문입니다.
  • 9. 변화는 미룰 수 있을지 모릅니다. 법과 제도는 미룰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아마 누군가에게는 변화를 미뤄야 할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은 미룰 수가 없습니다. 지금 벼랑 끝에 서서 하루하루를 견디다 못해 떨어져나가는 사람들의 삶은 미룰 수가 없습니다. 무참한 불평등 앞에 꺼질듯이 흔들리는 곳곳의 촛불같은 삶에는 ‘나중’이 없습니다. 갖고 싶은 게 있습니다. 미래를 갖고 싶습니다. 죽어라 노력해서 나만 겨우 살아남는 미래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무사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가는 미래를 갖고 싶습니다. 장애인이니까, 가난하니까, 못 배웠으니까, 부모를 잘못 만났으니까, 운이 없으니까 불행해져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 미래를 갖고 싶습니다. 평범한 일상과 존엄한 삶이 건강하고 똑똑하며 부유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고, 장애가 있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평등하게 보장되는 미래를 갖고 싶습니다. 그런 미래를 가질 수만 있다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겠습니다. 시간도, 마음도, 하고싶었던 다른 일들도 전부 내려놓을 것입니다. 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 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 두렵습니다. 고독 속에 남겨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이제 막 손에 쥔 동생과의 평범한 행복을 잃어버리는 것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에게 미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의 불평등을 만든 것은 탐욕을 통제하지 못한 우리 사회입니다. 우리는 가진 사람들이 끝없이 더 가지려 할 때 그 탐욕을 막지 못했고 갖지 못한 사람들이 끝없이 자기 몫을 빼앗길 때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가진 자들이 규칙을 정하는 사회에서 공정은 힘없는 외침입니다. 공정한 차별이 하루가 다르게 우리 사회를 08–09
  • 10. 잠식하는 지금, 우리는 공정이 아니라 불평등을 외쳐야 합니다. 불평등을 똑바로 직시하지 않고서 평등의 미래로 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누구나 평등하게 존엄한 삶을 누리는 미래를 만드는 사람이 오직 저여야만 할 이유는 없지만 제가 아니어야 할 이유도 없기에 내가 아닌 누구라도 응당 그렇게 해야 할 일들을 시작하기 위해 시민으로서의 자부심과 동료 시민에 대한 신뢰와 애정, 미래에 대한 낙관을 마음에 품고 저는 오늘부터 정의당에서 정치를 시작합니다. 이슬아: 오랜만에 이 글을 다시 읽으니 찡하네요.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죠? 시작하신 다음부터 너무 많은 일을 하셔서 그런 것 같아요. 장혜영: 이 글을 쓴 것이 작년 10월 19일이에요. 지금이 12월 초니까 약 1년하고 한 달 정도가 지났네요. 이슬아: 이때 예상한 정치 생활은 지금과 비슷하세요? 장혜영: 비슷한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는데, 예전에는 그냥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생각을 했다면 이제 그 추상을 채우는 경험들이 생긴 셈이죠.
  • 11. 02. 세 가지 약속 장혜영: 이 글에 들어있는 약속은 크게 세 가지예요. 첫 번째 약속은 지금 당장 변화를 만들겠다는 약속이에요. 기존의 정치가 계속 ‘나중에’로 미루는 것들을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필요한 변화를 곧장 만들겠다는 약속이죠. 두 번째 약속은 그 누구라도 평등하게 존엄을 누릴 수 있는 미래를 만드는 정치를 하겠다는 약속이에요. 마지막은 어쩜 동어반복일 수도 있지만 ‘정치’를 하겠다는 약속이에요. 대의 정치를 시작하기 전에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정치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책임과 권력을 가지고 변화를 일으키는 일을 하겠다는 의미로 ‘정치’를 하겠다는 약속을 드렸어요. 이슬아: 맞아요. 정치는 사실 저도 하고 있고 저희 어머니도 하고 있지만, 더 많은 권한과 책임을 가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죠. 근데 되게 재미있네요, 예전에 대학을 그만두시면서 쓰신 ‘공개이별선언문’은 커다란 제도적인 집단에서 나오는 선언이고, 이 ‘공개정치선언문’은 그곳에 다시 들어가는 선언이네요. 장혜영: (웃음) 정말 그러네요. 이슬아: 의원님께서는 나오는 것도 화끈하게 나오시고, 들어가는 것도 화끈하게 들어가시네요. 대학에서 나오셔서 국회에 다시 들어가기까지 몇 년이 흐른거죠? 장혜영: 학교 그만둔 게 2011년이었으니까 9년이네요. 10–11
  • 12. 이슬아: 그 세월 동안 뭔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이런저런 성취를 하셨잖아요? 영화도 만드시고, 책도 내시고.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신 거군요. 장혜영: 네, 어떤 종류의 한계를 느꼈던 것 같아요. 이슬아: 정치를 막 너무 하고 싶어서 하신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이대로 더 지칠 수는 없어서 시작하신 것이죠. 장혜영: 맞아요. 시민 개인으로서 노력하는 것에 지쳐서 이젠 대의권력이라는 더 큰 힘을 갖고 변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작년 10월부터 지금까지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숨가쁘게 보내왔어요. 국회의원 임기는 5월 30일부터 시작이니 약 6개월 정도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1년, 혹은 임기 시작 후 약 6개월간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다 빼곡하게 적어 사전으로 만들어서 보내드릴 수도 있지만, 사전보다는 이야기로 남는 정치를 하고 싶으니까, 오늘은 그 중에서 후원회장님과 시민 여러분께서 꼭 기억해주셨으면 하는 몇 가지 내용을 ‘공개정치선언문’에 담아둔 세 가지 약속에 비추어 말씀을 드리려고 해요.
  • 13. 12–13 첫 번째 약속: 지금 당장 변화를 일으키는 정치를 하겠다.
  • 14. 01. “그래서 언제 하실 건데요?” 장혜영: 제가 정치를 시작하며 드린 첫 번째 약속은 지금 당장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사진을 먼저 한 장 보여드릴게요. 정의당 국회의원들에게는 전통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임기 시작 첫 번째 점심은 국회의 청소노동자 분들과 함께 나누는 전통이에요. 국회는 의원들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분명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이잖아요. 이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먼저 출근해서 쓸고 닦고 돌보는 분들이 계신 거죠. 이슬아: 어쨌거나 누군가는 계속 치우고 있으니까. 장혜영: 맞아요. 새벽 4시에 나오셔서 청소를 하시고, 요즘엔 코로나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이 많아져서 더 일찍 나오신다고 하더라고요. 여튼 그날 식사를 하면서 여쭤봤어요. 어떻게 하면 하시는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는지를요. 그랬더니 전혀 생각도 못한 말씀을 하셨어요. 국회 의원회관에는 토론회 같은 것을 열 수 있는 회의실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행사를 열면
  • 15.
  • 16. 사람들에게 물이라도 줘야 하니까 생수 500ml를 사서 많이들 비치하나봐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물을 다 마시는 게 아니라 적당히 몇 모금 마시고 두고 간다는 거죠. 그럼 그것들을 일일이 수거해서 물 따로 플라스틱 따로 버리는 것이 꽤 번거로운 작업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쭤보니 500ml가 아니라 350ml 짜리 작은 병으로 준비해서 깨끗이 다 마시고 갈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슬아: 그렇군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요. 장혜영: 식사자리가 끝난 후에 제가 페이스북에 이 대화를 적으면서 국회에서 토론회 할 때는 쓰레기는 나가면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물 준비하실 때는 이렇게 하시는 게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써서 올렸어요. 법을 만든다든가 행정부를 견제한다든가 하는 국회의원 고유의 역할도 있지만, 그 이전에 눈앞의 생활공간에서부터 변화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고민의 표현이었죠. 그런데 게시물에 달린 댓글 중에 ‘일회용 생수병을 쓰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피드백이 있어서, 과연 그 또한 옳으신 말씀이라고 생각했어요. 2020년 6월 1일. 개원 첫 오찬: 국회 청소노동자와 함께.
  • 17. 이슬아: 여러 종류의 옳으신 말씀 속에 계실 것 같아요. 장혜영: (웃음) 그렇죠. 이것 말고도 당장 국회라는 공간 안에서 계속 눈에 띄는 부분들이 많았어요. 국회에는 브리핑이나 기자회견을 할 수 있는 소통관이라는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 수어통역사가 상주해있지 않았어요.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쪽에서 따로 섭외하지 않는 한 수어통역이 제공되지 않는 상황이었던 거죠. 그런데 국회라는 곳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적 공간이고, 국회에서 나오는 메시지는 곧 대국민 메시지인데, 그 메시지가 발신되는 장소에 수어통역이 없다는 것은 수어를 사용하는 국민들이 배제되고 있다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국회의장님을 찾아가 소통관에 수어통역을 상주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드렸어요. 국회에는 국회 전반의 운영과 회의를 관장하는 국회의원 전체의 대표 격인 국회의장님이 계시거든요. 그 의장실을 찾아가서 소통관 수어통역 문제 뿐만 아니라 국회 자체의 장애접근성을 높이는 여러 아이디어를 말씀드렸는데 기본적으로 공감을 많이 해주셨어요. 그날 소통관 수어통역사 상시 배치에 대한 확답을 받았고, 실제로 한 달 정도가 지나서 8월 10일부터 정식으로 소통관에 수어통역사가 상주하게 되었죠. 2020년 7월 2일. 국회의장 비서실장 면담: 국회 기자회견장 수어 통역 배치 확답.16–17
  • 18.
  • 19. 장혜영: 그리고 소통관 수어통역 상시배치의 첫 기자회견으로 제가 국회방송이나 국회에서 인터넷으로 중계하는 의사일정에 대한 수어통역, 폐쇄자막, 화면해설 등을 제공하게 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어요. 제가 장애접근권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점을 국회의장님께서 각별하게 고려해주신 것 같아요. 이슬아: 제 느낌엔 그 정도면 상당히 빨리 반영되었다고 느껴져요. 장혜영: 그렇죠. 사실 기자회견장 수어통역 문제는 제가 처음으로 지적한 문제는 아니고, 20대 국회부터 정의당에서 반복적으로 요청했던 문제이기도 해요. 다만 문제를 알고도 개선하기까지 미적거리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번에는 반드시 하게 만든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마치 마감을 재촉하는 편집자처럼 ‘언제 하실거예요?’ ‘그래서 언제 하실 건데요?’ 하고 계속 쪼고 쪼고 쪼아서, 귀찮아서라도 하게 만드는 거죠. 2020년 12월 9일 장혜영 의원이 발의한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 되었다. 아래는 통과 직후 트위터에 올린 게시글. 제가 대표발의한, 국회방송을 운용하거나 인터넷으로 의사일정을 중계하는 경우 한국수어, 폐쇄자막, 화면해설을 제공케하는 국회법 개정안이 대안반영되어 어제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장애가 있든 없든 모든 시민들께서 국회를 더 가까이 느끼실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2020년 8월 20일. 국회 기자회견장 수어 통역 상시 배치 첫날, 장애포괄적 국회법 발의 기자회견.18–19
  • 20.
  • 21. 02. ‘고마움’ 대신 ‘반갑다’ 이슬아: 그러네요. 분명 첫 요청이 아니었을 텐데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의원님이 하셨기 때문에 뭔가 다른 부분이 있었던 걸까요? 장혜영: 일단 같은 말을 하더라도 청년이며 여성인 국회의원이 할 때의 긴장감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이슬아: 역시 눈에 띌까요? 중년 남성 중심의 집단이니까, 장혜영: 낯선 존재가 주는 어떤 생경함, 그 생경함이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잖아요. 그런 포인트를 잘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죠. 이슬아: 의회 안에서 성별을 자주 실감하시나요? 장혜영: 엄청, 늘, 매일요. 막 친해진 의원님들은 어떤 이야기까지 하시냐면요, 30대 여성인데 더 늦으면 안 된다고 혼처 알아봐 주겠다는 말씀까지 하기도 하세요. ‘관심 감사합니다. 그런데 요샌 어디서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돼요.’를 입에 달고 살죠. 어디 노란 종이에 써서 그런 말씀 들을 때마다 옐로카드 들고 싶어요. 사실 의원들의 언어라는 것이 누구보다 공적이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잖아요. 되게 관용적으로 굳어졌지만 의미를 따져보면 분명 장애를 비하한다든가 성별을 비하한다든가 하는 표현들이 많고, 그런 말들을 쓰는 의원들에 대한 비판이 지속적으로 있어왔죠. 20–21
  • 22. 제가 속해있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초반 회의 중에 더불어민주당의 중진 의원인 이광재 의원이라는 분이 정책의 하자를 우려하면서 이렇게 되면 ‘절름발이 정책’이 된다는 표현을 하신 적이 있어요. 이슬아: 그 순간 어딘가에서 눈초리를 느끼셨겠어요. 장혜영 의원님의 눈초리… (웃음) 장혜영: (웃음) 그러니까요. 심지어 자리도 바로 앞자리라 그 분을 제가 빤히 보면서 생각을 했어요. 저도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보는지 알잖아요. ‘까탈스러운 페미니스트’ 혹은 ‘프로불편러’로 이미 정평이 나 있죠. 저 표현을 짚으면 분명 사람들이 또 프로불편러 나오셨다며 비아냥거리는 것을 감수해야 할텐데. 하지만 저는 공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부분을 짚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의정활동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질의 시간이 돌아왔을 때 먼저 앞부분 질의를 다 하고나서 남는 시간에 정중하게 의원님이 쓰신 표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소셜미디어에서는 예전에 정의당 정치인들이 사용했던 부적절한 표현들까지 끌어올리며 아주 난리가 났는데, (물론 정의당 내의 누군가가 부적절한 표현을 썼다면 당연히 그 또한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작 이광재 의원님께서는 제가 지적한 부분을 겸허히 수용하고 공개적으로 사과문을 올려주셨어요. 이슬아: 되게 보람차셨겠어요. 장혜영: 맞아요. 지적을 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지적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도
  • 23. 용기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이광재 의원님의 그런 모습이 참 좋았는데, 이제 제가 답을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감사합니다’라고 쓰려고 했는데, 뭔가 ‘감사’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지적을 수용해준 것이 고맙기는 하지만, 잘못을 시정한 것에 대해 ‘고마움’은 좀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고민 끝에 ‘반갑다’는 표현을 썼어요. 이슬아: 그 워딩 선택에 되게 감탄했어요. 감사할 것까지 없다.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되게 긍정적으로 잘 받아넘기고 싶잖아요. 그럴 때 ‘반갑습니다’는 정말 적절한 선택인 것 같아요. 서로 존중하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낮아지지 않는 워딩이었던 것 같아요. 너무 좋다. 글을 쓰는 사람이 정치를 하면 이런 부분이 참 좋네요. 장혜영: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종종 계시더라고요. 이슬아: ‘반갑습니다’의 적절함을 말이죠. 장혜영: 맞아요. 다만 그걸 긍정적으로 보시는 분들과 더불어 그냥 ‘감사하다’고 써도 될 텐데 굳이 ‘반갑다’라고까지 써야 하느냐고 뭐라 하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관점은 다르지만 어쨌든 민감하게 알아봐주신다는 점은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22–23
  • 24. 03. 법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장혜영: 어쨌든. 이런 식의 국회라는 공간 안에서 일상적인 변화들을 지금 당장 일으켜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국회의원의 중요한 역할은 입법, 법을 만드는 데에 있잖아요. 이번에는 입법을 통해서 ‘지금 당장의 변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그러기에 앞서서 입법 과정에 대해 혹시 궁금한 부분이 있으신가요? 이슬아: 하나의 법안이 발의가 되서 통과가 되기까지 대략적인 과정이 궁금해요. 우선 발의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거죠? 장혜영: 네. 일단 법안을 발의하는 데는 최소 국회의원 10명의 동의가 필요해요. 최소한 대표발의 의원이 한 명, 그리고 9명의 공동발의 의원이 필요한 셈이죠. 의원들끼리 ‘공발’해달라고 줄여서 쓰기도 해요. 일단 도장 10개 이상을 모아서 법안이 발의가 되면 그 법안은 내용에 맞는 상임위원회에 배정이 돼요. 국회의원 정원이 300명이잖아요. 그런데 300명이 늘 한데 모여서 모든 것을 다 같이 의논하는 건 굉장히 비현실적이고 비효율적이니까 국회에는 정부 부처와 기관들의 구성을 염두에 두고서 주제별로 17개의 상임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져 있어요. 예를 들면 보건복지위원회, 교육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기획재정위원회 등등 이렇게 위원회가 있고 의원들은 각각의 상임위에 소속되어서 활동을 해요. 상임위마다 특성들이 달라서, 사람이 많은 상임위는 30명까지 하나의 상임위 안에서 활동을 하고, 제일 적은
  • 25. 교육위원회는 총 16명의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일단 법안이 발의되고 적절한 상임위에 배정이 되면 그것을 상임위 전체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을 해요. 상정을 하고 나면 30명에서 16명까지 되는 사람들이 다 같이 그 법을 논의하는 게 아니라, 또 그보다 작은 ‘소위원회’라는 단위를 구성해서 심사를 해요. 예를 들면 저는 26명으로 구성된 기획재정 위원회의 경제재정소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어요. 경제재정소위 위원은 총 11명이고요. 정리하자면, 상임위에 안건이 상정되고, 그 안건이 다시 관련 소위에 회부되어야 비로소 논의가 시작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의 법안이 통과가 되려면 이 소위를 통과하고, 상임위 전체회의를 통과하고, 그 다음에는 법제사법위원회라는 상임위의 ‘체계자구심사’라는 것을 거쳐야 해요. 이 법안이 기존 법들과 충돌하지 않도록 체계에 맞는지, 또 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문장으로 쓰느냐에 따라 명확성과 아름다움이 달라지니까 그런 자구를 수정하는 단계를 모든 법률들이 거쳐야 해요. 이슬아: 법사위에 계신 분들이 윤문을 하신다는 말씀이세요? 장혜영: 어떤 의미에서 윤문이라고 할 수도 있죠. 문장 구조가 안 맞거나 전혀 다른 해석의 여지를 주는 법안들도 의외로 올라오거든요. 그런 것들을 바로잡고 다듬는 과정을 법사위에서 거쳐야 비로소 우리가 국회 하면 상상하는 그 300명이 모여있는 본회의로 올라오게 돼요. 그 본회의에 출석한 의원들 중 과반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비로소 법안이 법률로 재탄생하는 거죠. 24–25
  • 26. 이슬아: 모든 법은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통과가 되는 건가요. 장혜영: 그렇죠. 출석한 의원들의 과반을 넘겨야 해요. 04. ‘현대판 고려장’을 없애다 장혜영: 사실 2020년에 지금 당장 필요한 변화를 말할 때 코로나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죠. 올 초에 코로나19가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를 덮치면서 여러 불편한 사실들을 드러냈는데, 그 중 하나가 이미 취약한 사람들이 재난 상황에서 더욱 취약해진다는 점이죠. 장애인들은 가장 취약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 중 대표적인 집단이고요. 후원회장님은 혹시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이슬아: 어렴풋이 알고 있어요. 장혜영: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는 장애당사자의 곁에서 그 사람의 활동과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활동지원사’라는 일자리를 만들고, 그 활동지원사 급여의 대부분을 국가가 지원하는 제도예요. 이 제도가 ‘장애인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에 도입되기 전까지 장애인을 돌보는 것은 당연히 본인과 그 가족의 일이라고만 여겨져 왔죠. 그러나 치열한 장애인권운동의 싸움을 통해서 제도가 만들어진 후에는 가족이 아니라 사회가 사회의 자원으로 장애인을 함께 돌볼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어요. 다만 제도적으로 보완할 부분들이 많이 남아
  • 27. 있어요. 가장 단적으로 이 서비스는 필요한 사람들이 필요한 만큼 지원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국가가 정한 기준에 따라 장애인을 평가해서 서비스 대상인지, 서비스 제공 시간은 얼마나 배정할지를 정하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다양한 사각지대가 존재합니다. 코로나19는 이런 돌봄공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요. 당장 기존에 서비스를 받지 않던 장애인이 자가격리에 들어가서 갑자기 활동지원서비스가 필요해졌을 때,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아서 많은 장애인들이 그야말로 방치와 다름없는 상황을 견뎌내야 했어요. 이슬아: 세상에, 그랬겠군요. 장혜영: 사실 코로나19 이전에도 이 제도에 대해 다양한 개선점들이 제기되어왔어요. 대표적으로 만 65세 연령제한 문제와 24시간 지원의 근거가 없는 문제가 있죠. 법적으로 만 65세를 넘긴 장애인들은 행정체계상 장애인복지체계가 아니라 노인복지체계에서 지원을 받게 되어 있어요. 아주 불합리하죠. 그래서 만 65세 생일이 지나면 어제까지는 하루에 16시간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지만 오늘부터는 서너시간밖에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거예요. 이슬아: 치명적으로 위험한 상황이네요. 장혜영: 그야말로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죠. 이 조항을 노령 장애인들에 대한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부르는 이유예요. 당장 개선되어야 하는 문제죠. 26–27
  • 28. 뿐만 아니라 장애라는 것이 24시간 지속되는 특성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혼자 사는 최중증 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활동지원서비스를 24시간 제공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필요한 시간보다 적은 시간을 배정받게 되어 활동지원사가 없는 시간에 불의의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는 일들도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 의원실에서 1호 법안, 가장 처음 발의한 법안이 바로 이 장애인활동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에요.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 문제를 개선하는 내용을 골자로 임기 시작 전부터 준비해서 공식 임기가 시작된 지 거의 2주만인 6월 15일에 발의했어요. 많이들 알고 계신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그 2주 후인 6월 29일에 두 번째로 발의를 했고요. 이슬아: 정말 부지런하게 하셨네요. 그럼 그 법안은 이제 어떤 상황인가요? 장혜영: 발의 이후에 보건복지위에 배정이 되었고, 지난 11월 24일에 소위 의결이 되었고, 이틀 후에 상임위 전체회의에서도 의결이 되었어요. 그리고 바로 오늘 (12월 2일) 법사위와 본회의에서 의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물론 그렇게 상임위원회 논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제가 법안에 꾹꾹 눌러담아놓은 내용들이 다 통과되지는 않고, 많은 부분들이 깎여나갔죠. 하지만 최소한 만 65세 이상 연령 제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게 되었어요.
  • 29. 이슬아: 정말 오늘 통과될 예정인가요? 장혜영: 오늘 예정된 본회의에 이 안건이 올라오면, 통과될 가능성이 높죠. 이슬아: 그렇군요. 인터뷰 당일인 2020년 12월 2일 오후 11시, 장혜영 의원의 1호 법안이 통과 되었다. 아래는 통과 직후 장혜영 의원의 페이스북 게시글. 이렇게 또 한 걸음 나아갑니다. 조금 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제가 21대 국회 1호 대표발의법안으로 발의한 장애인활동지원법 일부개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장애인들에 대한 ‘현대판 고려장’이라 불리던 장애인활동지원법의 만 65세 연령제한 독소조항을 개정하여 기존 장애인 활동지원급여 수급자 중 혼자서 사회활동을 하기 어려운 중증장애인의 경우 만65세 이후에도 급여 신청이 가능하도록 변경한 것입니다. “65세가 되는 내년 저는 거의 모든 지원이 중단돼요.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죠. 현대판 고려장입니다. 지금 그냥 내다 버리는 건가요? 65세가 된다고 장애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껏 활동지원서비스의 부당한 연령제한 조항으로 삶을 위협받아온 당사자 시민들의 절박한 외침에 비하면 오늘의 이 소식은 여전히 너무나 작은 변화입니다. 하지만 한번 시작된 변화는 더 큰 변화로 이어질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그렇게 만들어갈 것입니다. 오늘의 법안 통과를 기념하며 다시금 다짐합니다. 제가 처음 정치를 시작했을 때 여러분께 드렸던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를 만들어가겠다는 약속을 앞으로도 소중히 지켜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8–29
  • 30. 05. 행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국회 장혜영: 지금까지 6개월간 입법을 통해 만들려고 한 ‘지금 당장의 변화’에 관한 말씀을 드렸다면 이번에는 행정부를 견제하고 움직여서 변화를 만들어낸 얘기들을 들려드리고 싶어요. 이슬아: 행정부 견제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 궁금해요. 장혜영: 삼권분립이라는 단어에서 설명을 시작하고 싶은데요. 국가 권력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큰 힘이잖아요. 그 힘이 좋은 데에만 쓰이면 좋겠지만, 악용되거나 남용될 수도 있으니 그 권력이란 것을 분산하고 분산된 권력이 서로를 견제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 지금 우리 민주주의가 권력을 작동시키는 방법의 핵심이죠. 국가권력을 입법, 행정, 사법의 세 가지로 나누어 서로를 견제할 수 있게 했으니까요. 국민에 의해 직접 선출된 입법부인 국회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행정, 즉 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에요. 정부는 집행을 위한 거대한 공무원 조직이죠. 그 가운데 대통령은 선출을 통해 뽑히지만 대부분의 정부 인력들은 그렇지 않고요. 국회는 정부가 국민의 뜻과 정해진 법률에 따라 제대로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지 감시해야 할 책무가 있어요. 그래서 국회의 각 상임위는 각기 담당하는 소관 부처들이 정해져 있어요. 제가 있는 기획재정위원회, 줄여서 기재위는 정부 부처 가운데서도 아주 큰 입김을 행사하는 기획재정부를 시작으로 한국은행, 수출입은행, 조달청, 통계청 같은 정부 부처와 기관들을 담당해요.
  • 31. 이슬아: 그런데 의원님은 왜 기획재정위원회에 들어가게 되셨나요? 선택할 수 있는 건가요? 장혜영: 일단 지망을 할 수는 있지만 원한다고 다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저는 장애인 정책에 관심이 많으니 처음에는 보건복지위원회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수많은 장애인 복지 정책들의 핵심은 결국 예산이거든요, 이슬아: 돈의 흐름에 관련된 위원회로 가야겠다고 생각하셨군요. 장혜영: 맞아요. 예산 없는 복지는 빛 좋은 개살구죠. 돈 없이 무슨 일을 하겠어요. 그래서 돈을 다루는 곳을 가야 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리고 돈이 흐르는 것을 보면 뭐랄까 전체를 조망하기 좋다고 할까요. 정치를 한번 시작한 이상 정말 3점 슛 쏘듯이 내가 제일 하고 싶은 정책만 딱 만들고 끝내고 이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국정운영의 전반을 진지하게 대하고 싶었고, 순서를 정한다면 전체를 먼저 보고 각론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로 정했죠. 이슬아: 말하자면 기재위는 정말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네요. 장혜영: 네. 공부할 게 정말 너무 많아요. 그래서 초선 비례 의원들에게 추천을 잘 안 하죠. 이슬아: 우리 의원님 원대하신 분이잖아요. (웃음) 열공하는 장혜영 의원. (사진 제공: 뉴시스)30–31
  • 32.
  • 33. 06. 지금 당장의 변화를 만들어낸 국정감사 장혜영: 꿈은 크게 꾸는 게 좋으니까요. (웃음) 기재위가 아무래도 예산과 세금을 다루는 상임위다보니 늘 돈 이야기만 할 것 같지만 사실은 경제 전반의 문제를 포함해 의외로 여러가지 사회 문제를 입체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곳이에요. 예를 들면, 후원회장님 지금 출판사를 운영하고 계시잖아요. 혹시 세금을 홈택스에 접속해서 직접 내고 계신가요? 이슬아: 초반에는 직접 하다가 너무 어려워서 현재는 정직원 웅이 님과 세무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가며 홈택스 업무를 하고 있어요. 하나 하나 물어봐가면서요. 장혜영: 그러시군요. 저도 의원이 되기 전,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매년 홈택스에서 직접 종합소득세를 신고했었는데, 역시 너무 어려워서 나중에는 결국 세무대행업체를 이용하게 되었는데요. 이렇게 홈택스가 비장애인들에게도 사용이 어렵게 느껴지지만, 장애인들에게는 사실상 이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기본적인 웹접근성조차 보장하고 있지 못해요. 이런 부분은 아주 대단한 정치적인 쟁점이라기 보다는 그야말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방치되는 고약한 문제들이죠. 이런 부분들을 제대로 짚고 개선할 수 있는 국회의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국정감사예요. 32–33
  • 34. 이슬아: 국정감사라고 하면 몹시 살벌한 분위기, 혹은 소리 지르며 싸우는 사람들의 이미지부터 생각 났던 것 같아요. 장혜영 의원님의 국정감사 방식은 그렇지 않지만요. 장혜영: 국정감사는 정기적으로 매년 10월쯤에 약 30여일간 국회의원들이 각 상임위의 소관 정부 부처와 기관들을 대상으로 제대로 국정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질문하고 감사하는 일정이에요. 방대한 자료를 요구할 수 있고, 부처의 수장들을 대상으로 직접 여러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죠. 줄여서 ‘국감’이라고들 많이 해요. 정의당은 매년 국감 때마다 그 국감의 컨셉을 잡아서 현판식을 하는데, 올해의 국감 키워드는 ‘위기탈출 국감’이었어요. 저는 여러 위기 가운데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불평등과 기후위기를 탈출하는 데 조금이라도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국감을 하겠다는 목표를 잡았고요. 이슬아: 아주 중요한 권한이 있는 자리네요. 임기 후 첫 국감을 진행하면서 어떠셨는지 듣고 싶어요. 장혜영: 말로 설명드리는 것보다 영상으로 보시는 것이 제일 실감나게 전달되실 것 같아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국세청 홈택스 서비스의 장애접근성 문제에 대해 제가 국세청장님께 질의한 영상을 보여드릴게요.
  • 35. 지금 당장의 변화를 만들어낸 국정감사 ⑴: 국세청 홈택스 웹 접근성 미비 관련 질의 2020년 10월 12일, 국세청 국정감사. → 질의 전체 영상 이슬아: 너무 천박한 표현밖에 안 떠오르는데, 족치셨네요. 우아하게 족치셨네요. 장혜영: 끝나고 해당 업무를 담당하시는 공무원 분께서 직접 저를 찾아오셨어요. 실무선에서 정확하게 해결하겠다고 몇 번을 약속하셨고, 실제로 해당 작업을 수행하는 중이세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이번 국감에는 제대로 못 하시는 부분을 지적했지만, 잘 해결하시면 지적한 것 이상으로 다른 부처들에 ‘국세청 홈택스만큼만 하시라’고 동네방네 칭찬할 테니까 확실하게 개선하시라고요. 34–35
  • 36. 이슬아: 실무 하시는 분들이 실제로 장애인 당사자 분들에게 계속 모니터링을 받고 피드백을 받으면서 다시 개발하시면 좋을 텐데요. 장혜영: 그럼요. 그걸 일상적으로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데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을 굉장히 대단한 일을 하는 양 생색내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예요. 이슬아: 그런데 이렇게 영상으로 보니까 정말 실감이 나네요. 만약 의정활동 보고가 웹에도 정리된다면 영상이랑 같이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장혜영: 좋은 의견 감사해요. 책에도 QR코드라든지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해 영상을 쉽게 보실 수 있는 방법을 편집 과정에서 고민해 넣으려고 해요. 이슬아: 방금 보여주신 영상 말고도 다른 국감 영상들도 많이 있나요? 몇 개는 저도 온라인에서 본 기억이 있어요. 장혜영: 네. 최대한 활동 내용을 있는 그대로 시민들께서 보실 수 있도록 제 유튜브 채널에 자막과 함께 편집해서 공개하고 있어요. 국감이 한 달이나 진행되다보니 꽤 여러 주제를 다룰 수 있는데요, 오늘은 실제로 유의미한 성과로 이어진 몇 가지 질의를 후원회장님께 자랑하고 싶어요. (웃음)
  • 37. 이슬아: 오늘은 자랑 타임이니까. 장혜영: 이번에는 속기록을 하나 보여드릴게요. 올해 실시하는 인구주택총조사에 대해 질의드린 내용이에요. 지금 당장의 변화를 만들어낸 국정감사 ⑵: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배우자 성별 표기 문제 2020년 10월 14일, 기획재정위원회 통계청 국정감사 속기록 중 장혜영 의원: 통계청장님께 질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청장님 혹시 주한 뉴질랜드 대사님이 누구신지 아세요? 필립 터너 대사님이신데요. 그분이 올해로 배우자분하고 결혼 26주년이시고, 두 분은 동성커플이세요. 작년 이맘때쯤 대사 부부로 주한 외교단 추청 리셉션으로 청와대도 다녀오셨거든요, 물론 이 분들이 공무로 인해 체류 중인 국내 거주 외국인이셔서 그 조사 대상은 아니시지만 우리 인구주택 총 조사 기준으로 뉴질랜드 대사분의 배우자분의 가구주와의 관계는 어디에 해당될까요? 강신욱 청장: 배우자로 해당될 것 같습니다. 장혜영 의원: 그렇죠, 당연히 배우자이지요. 그러면 다른 케이스 여쭤 볼께요.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라는 책이고요, 저자 소개를 보면 한국 국적 유부녀 레즈비언이라고 합니다. 김규진 작가님 책인데요, “변화하는 세상에 남은 마지막 혼외수호자들은 바로 동성애자들이다.” 이 책은 이분이 결혼하신 내용에 대한 이야기에요. 뉴욕에 가서 혼인신고 하시고 한국에 와서 한국에서 결혼식을 성대하게 하시고 한국에서도 혼인신고 접수를 하셨다가 물론 수리가 36–37
  • 38.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결혼을 하신 거죠. 만일 김규진 씨 댁이 우리 표본 가구로 선정이 된다면 이 분하고 이 분의 배우자는 이 23번에 있는 혼인 상태 항목을 어떻게 하셔야 되죠? 강신욱 청장: 법적인 혼인 관계만을 혼인으로 체크하는 것을 물어보시는 것 같은데. 장혜영 의원: 아니요, 여기서 어떻게 체크해야 하는 거죠? 결혼을 하셨잖아요. 강신욱 청장: 결혼을 하셨으면 배우자 있음으로 체크 하시는 게. 장혜영 의원: 그렇죠, 배우자 있음으로 체크하는 게 너무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겠지요. 근데 우리 현실을 보면 우리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때 온라인 서베이 화면이거든요, 배우자 성별은 가구주의 성별과 같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변경하시겠습니까? 변경을 할 경우에 데이터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통계청에 여쭤봤어요, 그 데이터가 취합은 되는데 걸러내는 작업을 통해서 배우자를 기타 동거인으로 뺀다는 거예요, 임의로, 동의를 구하지 않고, 근데 기타 동거인은 잘 아시겠지만 고용인이나 하숙인이나 그런 사람들을 상정하고 만든 항목이잖아요, 멀쩡한 배우자를 고용인으로 어떤 종류의 조작을 하는 거죠, 통계라고 하는 것은 정책의 근거가 되는 것이고, 통계가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면 정책은 잘못 될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미국 같은 경우에는 뭐 동성법제화 이전부터 통계에서는 unmarried partner 라는 항목을 가지고 그런 근거를 가지고 파악했기 때문에. 내일부터 시작하는 조사에다가 이런 결혼하지 않은 파트너 항목을 넣을 수는 없지만 이런 조사에서 배우자의 성별과 가구주의 성별이 같은 데이터도
  • 39. 기타 동거인이 아니라 배우자로 있는 그대로의 통계를 작성하고 그것을 결과에 반영해주실 것을 제안 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강신욱 청장: 지금 이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있을 텐데 변경 가능한지 검토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슬아: 장혜영 의원님은 굉장히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요청하시네요. 장혜영: 그래야 회피하기 어려우니까요. 정치는 말로 집을 짓는 일이에요.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나중에 하는 말을 구속하기 때문에 쌓이면 쌓일수록 회피하기 어렵죠. 그러니까 말 한마디를 하거나 반대로 이끌어낼 때는 이 말이 단순히 그냥 공기중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회의 국정감사 속기록에 영원히 남아서 이 다음에 이어질 수많은 정치활동의 토대가 된다는 점을 늘 의식해요. 벽돌을 쌓는 기분으로 말한다고나 할까요. 이슬아: 의원님 영상을 볼 때마다 느끼지만 별로 호통을 치지 않으세요. 호통치지 않아도 선명하게 귀에 꽂히는 말소리죠. 아주 힘있는 말소리라고 느끼는데요. 의원님은 원래 이렇게 말할 줄 아셨나요? 아니면 꾸준히 연습하신 건가요? 장혜영: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사석에서 만나면 아무 얘기나 두서없이 하는 거 잘 아시잖아요. 다만 저도 모르게 말하기 방식에 ‘국회의원 모드’를 추가한 것 같아요. 38–39
  • 40. 이슬아: 국회의원은 약간 연극인 모드라는 생각이 들어요. 발성을 바꾸고 화법도 바꾸잖아요. 장혜영: 맞아요. 연극으로서의 정치는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슬아: 의원님은 좋은 연극인이세요. 장혜영: 감사합니다. 제겐 엄청난 칭찬이네요. 지금 당장의 변화를 만들어낸 국정감사 ⑶: 한국은행의 성별 다양성 미흡 관련 질의 2020년 10월 16일, 한국은행 국정감사. → 질의 전체 영상
  • 41. 지금 당장의 변화를 만들어낸 국정감사 ⑷: 수출입은행 석탄화력발전 지원 중단 관련 질의 2020년 10월 19일, 수출입은행 국정감사. → 질의 전체 영상 지금 당장의 변화를 만들어낸 국정감사 ⑸: 탄소세 연구용역 요청 질의 2020년 10월 7일, 기획재정부 국정감사. → 질의 전체 영상 40–41
  • 42. 07. ‘소수자 문제’는 모두의 문제 이슬아: 영상을 보면서 스치는 생각들 중 하나는, 보통의 일반적인 국민들이 정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따라가기 어려운 이유가 되게 많은 한자어들, 낯선 단어들 탓도 있는 것 같아요. 법이 발의되고 진행되는 과정, 여러 일정과 절차들이 진행되는 과정에 너무 생소한 단어들이 많네요. 의원님은 이런 정치의 언어에 어떻게 적응하셨어요? 장혜영: 그냥 닥치는 대로 공부하고 있죠. (웃음) 저는 일본어를 공부했으니까 한자 조합으로 된 단어들은 어느 정도 그 뜻을 짐작할 수 있기는 해요. 하지만 역시 되게 생소하고 어려워요. 이슬아: 국감 영상들을 쭉 보니까 장혜영 의원이라는 사람이 절박하게 느끼는 주제들을 순서대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그런데 이것들이 많은 의원들이 목소리를 내는 이슈들은 아니잖아요. 장혜영: 아직은 그렇죠. 이슬아: 제가 정치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의 순서와도 거의 비슷해서 반갑고 감사한 마음이에요.
  • 43. 장혜영: 감사합니다. 국회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많은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소수자 문제는 ‘소수자 문제’이지 모두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적 소수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을 촉구하는 이유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당사자들의 침해당한 권리를 회복함과 동시에 그것이 사회 전체의 복리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이 지점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저에겐 굉장히 중요한 미션이에요. 앞서 보여드린 통계청의 배우자 성별 표기 질의는 단순히 통계가 성소수자 국민들을 배제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취약성을 다루는 데 아주 서툴다는 점을 지적하는 내용이에요. 한국은행의 성별다양성 문제를 짚은 것은 여성들이 받는 차별을 드러냄과 동시에 한국은행이 빠질 수 있는 집단적 사고의 위험을 경고하려 했던 것이고요. 이슬아: 그런데 답변들을 보면, 분명 반영을 하겠다는 맥락이지만 ‘고려해보겠다’는 대답이 되게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고려라는 것은 약속이 아니잖아요? 장혜영: 그렇죠. 이슬아: 고려해보고 나서 안 할 수도 있으니까요. 대체로 답변들이 소극적이고, 뭔가를 최대한 내어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42–43
  • 44. 장혜영: 맞아요. 국정감사에서 정부 쪽은 기본적으로 방어적인 스탠스가 무척 강해요. 그래도 고려해보겠다고 대답을 받으면, 그 다음에 다시 만나서 고려해봤냐고 재차 물을 수 있잖아요. 고려의 결론이 뭐냐. 이렇게 한 발 한 발, 앞에 해 놓은 말들 위에 그 다음 말들이 쌓여서 점차 그 무게감이 달라지는 거죠. 이슬아: 의원님의 화법을 보면 처음에 이야기의 초입에서는 진짜 보편적인 가치를 언급하며 ‘당신들, 상식적인 사람이면 이건 다 동의할 수 있죠?’ 라고 하면서 갈수록 점점 뾰족하게 상대를 몰아가는 느낌으로 말씀하시는 듯해요. (웃음) 장혜영: 네, 그런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웃음)
  • 45. 08. 행동하면 변화는 반드시 일어난다 장혜영: 지금까지 계속 제가 정치를 하면서 약속한 첫 번째 약속, 변화를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일으키는 정치를 하겠다는 약속을 어떻게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를 말씀드렸는데요. 이 주제에 관해서는 또 한 장의 사진을 보여드리며 마무리를 지으면 어떨까 해요. 이슬아: 어떤 사진이죠? 장혜영: 이 사진이에요. 2020년 10월 11일. 정의당 대표단 현충원 참배.44–45
  • 46.
  • 47. 장혜영: 정의당에서는 지도부가 교체된다거나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기념일들에 국립 현충원의 무명 용사탑에 참배를 하러 가요. 지난 10월 11일에 새롭게 당내 선거를 통해 탄생한 당대표 및 신임 지도부와 의원단이 현충원에 참배를 하러 갔어요. 그런데 계단으로 된 단차가 있어서 배복주 부대표님의 휠체어가 자연스럽게 단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죠. 물론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휠체어를 들어서 올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 때 배복주 부대표님과 저, 그리고 함께 있던 류호정 의원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그 계단 밑에 그냥 멈춰섰어요. 말없이 문제를 제기한 거죠. 그때 저희 모습을 당에 계신 분이 사진을 찍어주셨죠. 참배가 끝난 후 현충원에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했고, 한달여만에 계단은 깔끔한 경사로로 바뀌었어요. 이슬아: 되게 빨리 바뀌었네요. (웃음) 장혜영: 그렇죠. 어떤 분들은 이렇게 작은 것을 가지고 대단한 정치를 해낸 양 유세를 떤다고 비웃기도 하셨는데요. 저는 그렇게 폄하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게 작은 변화일 수는 있지만 분명한 변화거든요.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피로감을 느끼는 게 사실 이런 부분이잖아요? 이슬아: 어차피 안 바뀐다는 것. 장혜영: 바로 그거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문제를 제기하고 변화를 촉구하면 변화는 반드시 일어나요. 어떤 문제들은 이번 현충원 경사로처럼 상대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바뀌지만 다른 어떤 문제는 훨씬 시간이 46–47
  • 48. 많이 걸리기도 해요. 하지만 시간의 문제는 시간의 문제고, 변화는 반드시 온다. 행동하면 언젠가 반드시 바뀐다는 것을 얘기할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이라 이 사진을 꼭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이슬아: 이건 작고 단순하지만, 동시에 확실한 변화잖아요. 이 사진 보니까, 정치라는 게 시대에 따라 뭔가를 개선하는 일이라는 게 확실하게 와닿는 것 같아요. 개선됐네요. 장혜영: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갈까요?
  • 49. 48–49 두 번째 약속: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존엄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정치를 하겠다.
  • 50. 01. 차별금지법을 발의하다 장혜영: 제가 정치를 통해 확립하고 싶은 가치는 결국 평등과 존엄이에요. 이런 어마어마한 불평등의 시대에 자유는 너무 수직화되어버렸어요. 수직선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지만 가장 아래 쪽에 있는 이들은 너무나 속박된 삶을 살아가고 있죠. 자유와 존엄은 능력에 따라 차등배분되는 가치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응당 누려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인데 지금은 자유의 불평등, 존엄의 불평등이 너무 심각해요. 그래서 저는 자유의 평등, 존엄의 평등을 실현하는 데 기여하는 정치를 하고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그야말로 제 정치의 심장부에 있는 법률이라고 할 수 있죠. 이슬아: 장혜영 의원님 정치의 심장부라니.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또한 임기 후 가장 많은 품을 들이신 법률이기도 하지 않나요? 장혜영: 21대 국회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의원들끼리 모여 앉아서 차별금지법을 비롯해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나 비동의 강간죄 개정 등 당 차원에서 공약했던 대표적인 법들을 어떻게 나누어 책임지고 대표로 발의할지를 의논했어요. 저는 일찌감치 차별금지법을 제 대표발의 법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차별금지법 얘기가 나오니 다른 의원님들이 다 저를 쳐다보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긴말 없이 그랬죠. “네, 제가 하겠습니다.” (웃음)
  • 51. 이슬아: 자신 있으셨나요? 장혜영: 자신이 있다기보다 숙명이라고 생각했어요.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기 위해 정치에 뛰어든 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이 법이 참 긴 싸움의 역사가 있는 법이잖아요. 차별금지법이 정치권에서 제일 처음에 얘기가 된 건 사실 2002년까지 올라가요. 이슬아: 생각보다 오래됐네요. 장혜영: 그렇죠. 고 노무현 대통령의 후보 당시 공약이었어요. 당시 노무현 대통령께서 당선되신 후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금지법의 내용을 만드는 위원회를 발족시켰고, 그 위원회가 활동한 결과 인권위가 2006년에 차별금지법 권고안이라는 것을 발표하죠. 그 취지와 내용은 사실 제가 이번에 발의한 법안과 크게 다르지 않고요. 이슬아: 저는 시간이 지나서 새로 발의한 거라서 내용이 많이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로 안 다르다고 말씀하셔서 놀랍네요. 그럼 그 권고안에도 동성애 이런 것들이 다 포함이 된 거예요? 장혜영: 그럼요. 그 권고안에는 성별, 장애, 나이, 성적 지향 등을 포함해 20개의 차별금지사유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번에 제가 발의한 차별금지법에는 거기서 3개가 더 추가되었을 뿐이에요. 차별금지사유 외에 법을 통해서 인권위가 차별을 다루어나가는 방법에 대한 내용도 일맥상통하고요. 무엇보다 우리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50–51
  • 52.
  • 53.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평등권을 구체화하고 시민들의 일상에 존엄을 현실화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법이라는 점이 같아요. 2007년부터 지금까지 이 법이 국회에 발의된 횟수가 제가 발의한 것을 포함하면 무려 8번인데요. 8개의 각 법안마다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큰 틀에서는 역시 비슷해요. 차별금지법안 (장혜영 의원 대표발의) 2020년 6월 29일 발의. 제1조(목적) 이 법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차별로 인한 피해를 효과적으로 구제함으로써 헌법상의 평등권을 보호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3조(금지대상 차별의 범위) ① 이 법에서 차별이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 또는 경우를 말한다.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學歷), 고용형태, 병력 또는 건강상태, 사회적신분 등(이하 “성별 등”이라 한다)을 이유로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의 영역에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 가. 고용(모집, 채용, 교육, 배치, 승진・승급, 임금 및 임금 외의 금품 지급, 자금의 융자, 정년, 퇴직, 해고 등을 포함한다) 나. 재화・용역・시설 등의 공급이나 이용 다. 교육기관 및 직업훈련기관에서의 교육・훈련이나 이용 라. 행정서비스 등의 제공이나 이용 2020년 11월 23일.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종교계 릴레이 기자회견: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나눔의집협의회52–53
  • 54.
  • 55. 02.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 이슬아: 그런데 그런 법이 왜 아직까지 통과가 되지 않은 거예요? 장혜영: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많은 사람들은 차별금지법이 무언가 내용에 문제가 있어서 통과가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제 생각에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차별금지법은 그 내용이 아니라 세 가지 층위의 다른 걸림돌 때문에 아직도 통과가 안 된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첫 번째 걸림돌은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에요. 두 번째 걸림돌은 그런 무지와 편견을 이용해서 자기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시키거나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의 존재고요. 마지막 걸림돌은 그런 무지와 편견, 그리고 잇속을 돌파해내는 것을 두려워하며 ‘사회적 합의’라는 허울 좋은 말 뒤에 숨어 표 계산만 하는 기득권 정치라고 생각해요. 이 세 가지 조건이 맞물리면서 2020년이 되도록 차별을 사회적으로 논의하고 근절하자는 상식적인 법안 하나가 통과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거죠. 2020년 11월 5일. 조계종 기도행진 기자회견 발언.54–55
  • 56.
  • 57. 이슬아: 지금 진행하고 계신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 캠페인은 그런 무지와 편견에 조용히 말을 거는 캠페인이지요. 장혜영: 그런 셈이죠.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쪽에서 열심히 캠페인을 해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차별금지법’ 하면 당장 동성애, 뭔가 갈등하는 상황, 원색적인 비난 같은 것들을 연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물론 맞서 싸우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평범한 시민들에게 차별금지법이 가진 소중한 가치가 잔잔하지만 또렷하게 스며들 수 있는 새로운 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 캠페인 같은 것을 고민하게 됐어요. 후원회장님께서도 소중한 글을 보내주셨죠.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려요.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에 관해. 2020년 11월 17일, 오마이뉴스 기고글. 우리는 차별이 문제라고 말하면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가 더 문제라고 되받아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일상의 차별을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면 어김없이 ‘프로불편러’, ‘진지충’, ‘PC충’이라는 비난이 돌아온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좋게좋게 넘어가면 될 것을 남들 앞에서 콕 집어 민망하게 만든다고, 유난스럽고 민감하고 까탈스러운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는다. 누군가의 부적절한 언행에 대한 지적을 통해 그의 변화와 개선을 이끌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을 일방적으로 과시하고 타인을 망신 주는 즐거움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은 새겨들을 가치가 있다. 조너선 하이트와 그레그 루키아노프가 2020년 11월 23일.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 캠페인 시작.56–57
  • 58.
  • 59. 〈나쁜교육〉에서 정확히 짚었듯 면역이 아닌 무균실을 지향하는 안전주의에 대한 경각심은 중요한 화두다. 다만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상황은 사회 곳곳에 정치적 올바름이 과도하게 흘러넘쳐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이라기 보다, 정확히 그 반대다. 누구보다 공적인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정치인들은 밥 먹듯이 장애를 비하하고 여성을 비하하고 비수도권을 비하하고 노인을 비하한다. 방송이나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어디 언어뿐인가. 실제 고용에 있어서, 교육에 있어서, 생활에 있어서 여성이라는 이유, 이주민이라는 이유, 비수도권 지역의 학교를 다녔다는 이유, 가난하다는 이유, 그 밖의 무수한 소수자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행위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내가 21대 국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대표 발의하고 이 법의 제정을 위해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캠페인을 시작하는 이유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인한 변화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골자는 고용과 교육, 재화와 용역의 제공과 이용, 그리고 행정 서비스라는 일상의 필수적인 네 가지 영역에 있어서 성별이나 연령, 장애, 학력, 출신 국가나 민족,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부당하게 차별이 발생할 경우 국가인권위원회가 시정을 권고하거나 명령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 정부와 지자체가 차별을 예방하기 위한 정책과 계획을 주기적으로 수립하고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일부 보수 기독교계에서 원색적으로 강변하는 것과 달리 이 법은 국가인권위원회법의 평등권 침해에 대한 차별행위규제 조항을 보다 시의적절하게 확장하고 다듬어 깔끔하게 기본법으로 정리한 평범하고 상식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얌전하기까지 한 법이다. (심지어 일부 보수 기독교계에서 듣기만 해도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성적 지향’이라는 차별금지 사유는 이미 국가인권위법 안에 포함되어 있다.) 58–59
  • 60. 우리가 관습과 도덕만으로 충분히 서로가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존중하는 사회를 자발적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입법할 필요성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2020년 현재 우리는 아직 그런 사회를 만들지 못했다. 인식이 제도의 자리를 충분히 채우지 못하는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차별로 고통을 받았다. 제도가 인식을 견인해낼 수 있도록 지금 당장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둥, 역차별을 조장한다는 둥, 이 법의 통과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적극 퍼뜨리는 거짓말과 달리 이 법이 조장하는 것은 ‘차별에 대한 일상적인 성찰과 토론’이다. 지금까지는 관성적으로 반복해왔던 우리의 말과 행동이 혹시 다른 시민의 존엄을 해치는 차별이지는 않은지 일상적으로 함께 성찰하고, 구체적으로 토론하고, 토론의 결과 어떤 행위가 부당한 차별이라고 결론 내려진다면 그 차별을 중단하는 시스템을 갖자는 것이다.
  • 61. 더 나은 언어, 더 나은 태도 차별금지법이 가진 이런 가치를 시민들에게 어떻게 더욱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 떠오른 한 가지 아이디어는 더 나은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탐구를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작가들의 태도야말로 차별금지법이 시민들에게 요청하는 태도와 닮아있다는 것이었다. 시대와 호흡하며 동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작가들에게 마음을 담아 조심스레 요청했다. 여러분께서 한때는 썼고, 지금도 쓸 수 있지만 윤리적인 이유로 더 이상 쓰지 않는 말들에 대한 글을 써주실 수 있겠느냐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마음을 담아 그렇게 해주실 수 있겠느냐고 정중한 요청의 메일을 보냈다. 그렇게 김나율, 김민철, 김세희, 김윤리, 김하나, 김혼비, 미깡, 박연준, 봉현, 수신지, 이진송, 이슬아, 장류진, 황선우 열네 분의 작가분께 참여하겠다는 답장을 받았다. 이 가운데 봉현 작가님은 이 프로젝트의 시각적인 아이덴티티 작업을 자발적으로 도맡아 해주시기도 했다. 60–61
  • 62. 03. 평등을 입법한 나라들을 만나다 장혜영: 부끄러운 얘기를 하나 하자면, 저 역시도 차별금지법을 준비하던 초반에는 마음속에 편견이 있었어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편견이요.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토론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정확히 반대 쪽에서 찬성의 목소리를 스피커 볼륨으로 눌러버리듯이 찬성의 목소리를 증폭할 방법만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차별금지법이 가진 정신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차별을 색출해서 처벌하자!’가 아니라 ‘우리 한번 차별에 대해 진지하게 사회적인 대화를 나눠볼까요?’에 가깝거든요. 그런데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많은 분들께서는 이유야 어쨌든 정말로 이 법이 무서운 법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계세요. 제가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장혜영하고는 말이 안 통한다’ ‘차별금지법을 만들려고 하는 쪽은 대화가 안 된다’ ‘어차피 답정너’라고도 생각하죠. 아차 싶었어요. 정말로 차별금지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싸움과 팩트체크를 넘어 제대로 된 토론의 장이 필요하다는 걸 깊이 깨달았어요. 대화 없이 밀어붙일거라는 두려움 없이 터질 듯한 긴장을 내려놓은 채 충분히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경청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해요. 이슬아: 정말 그럴 것 같아요. 차별금지법에 대한 오해를 푸는 작업이 중요하지요.
  • 63. 장혜영: 그런 의미에서 차별금지법과 비슷한 법이 이미 만들어져 시행되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듣고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난 9월 22일에는 인권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그리고 제가 책임연구위원으로 있는 국회 여성아동인권포럼과 함께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나라는 지금?’이라는 이름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호주의 대사님들을 모시고 주한 외국 대사관 초청 컨퍼런스를 열기도 했죠. 그 자리에서 참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어요. 그 자리에 오신 분들이 입을 모아 하신 얘기가 있어요.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다.’ 차별금지법이 도입된다고 해서 그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이 일거에 해소되는 일은 없겠지만, 차별을 근절하려는 노력은 사회를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명 사회를 안정시키고 더욱 강인하게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는 점을 강조하셨어요. 감동적인 순간이었죠. 이런 내용들을 더욱 잘 알리기 위해서 컨퍼런스 이후에도 영국, 뉴질랜드, 네덜란드, 핀란드의 대사님 들을 모시고 KBS와 함께 대담 콘텐츠를 기획해서 이미 비슷한 법이 입법된 나라들의 경험을 여러 시민들게 더 소상히 알려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이슬아: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다른 나라의 사례를 적극적으로 참고한 뒤 쉬운 언어로 소개하시는 일이지요? 2020년 9월 22일. 주한 외국 대사관 초청 인권 컨퍼런스.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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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5. 장혜영: 지금까지 영국의 닉 메타 부대사님, 그리고 뉴질랜드의 필립 터너 대사님과 대담을 나누었어요. 각각의 대담에서 인상적인 부분이 아주 많았는데, 그 중에 한 가지씩만 말씀을 드릴게요. 영국에는 이미 2010년에 평등법이 도입되었 는데요. 주한 영국 대사관의 닉 메타 부대사님은 거듭 차별금지법이라는 것이 머릿속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차별당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어요. 실제적으로 현실에서 사람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차별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는 아무 곳에도 없고, 바로 그 지점에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거죠. 그러면서 우간다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유색 인종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겪어야 했던 차별의 경험들을 나누어주셨어요. 심지어 지금도 본인의 피부색 때문에 한국에서 종종 택시에서 승차거부를 당한다는 말씀을 하셔서 저를 너무 부끄럽게 하셨죠. 이슬아: 아, 그런일이 있었군요. 많은 것이 변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어요. 2020년 11월 24일. 평등을 입법한 나라들 연속 대담: ① 주한 영국 닉 메타 부대사.64–65
  • 66.
  • 67. 장혜영: 뉴질랜드에는 무려 1993년부터 인권법이 도입되어 지금껏 시행되고 있어요. 주한 뉴질랜드 대사이신 필립 터너 대사님은 동성 배우자이신 이케다 히로시 님과 26년째 결혼생활을 이어오고 계신 분이신데요. 작년에 청와대에서 열린 만찬에 한국 주재 외교관으로서는 최초로 동성 배우자와 함께 공식 초청된 소중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셨죠. 필립 터너 대사님이 강조하시는 부분은 뉴질랜드 인권법의 목표는 누군가에게 제약을 가하고 처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자신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라는 점이었어요. “위원회는 사람들을 모아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문제가 있어요. 한 사람은 차별을 받았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아니라고 말하는군요. 여기 갈등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뉴질랜드에서 인권법에 관련된 대부분의 문제들은 법적인 절차가 아닌 이런 종류의 토론과 논의를 통해서 해결된다고 해요. 인권법의 도입은 이런 논의를 시작할 수 있도록 차별에 관한 명확한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기에 중요하고요.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결국 교육과 토론을 통해 차별에 대한 사람들의 근본적인 인식이 변화하는 것임을 강조하셨어요. 2020년 11월 25일. 평등을 입법한 나라들 연속 대담: ② 주한 뉴질랜드 필립 터너 대사.66–67
  • 68.
  • 69. 04. 법사위원들께 경청을 요청하다 이슬아: 모두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말을 자꾸 곰곰이 생각하게 돼요. 현재 차별금지법의 진척상황은 어디까지 왔나요? 장혜영: 차별금지법은 상임위들 가운데 법제사법위원회 소관으로 배정이 되었어요. 지난 9월 21일에 법사위에 차별금지법이 상정될 때, 직접 가서 이 법에 대한 제안설명을 드렸죠. 이슬아: 아, 그 영상 본 것 같아요. ‘경청’에 대해 말씀하셨죠? 장혜영: 맞아요. 그 자리에 앉아계신 여러 의원님들께서 이 제안설명을 통해 조금이라도 다시 차별금지법을 새롭게 느끼고 돌아보실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한 자 한 자 정말 열심히 썼어요. 「차별금지법안」 제안설명 2020년 9월 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 회의록 중. 존경하는 윤호중 위원장님! 그리고 법제사법위원회 선배・ 동료 위원님 여러분! 정의당 장혜영 의원입니다. ‘코로나19’ 판데믹이 어서 종식 되기를 바라는 우리 모두의 희망과 달리 지역감염이 계속 이어지는 엄중한 시국에 여러분께 제가 지난 6월 29일에 다른 9분 의원님들과 함께 발의한 ‘차별금지법’에 대해 설명드릴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난 목요일, 여야의 다른 초선 여성의원님들과 함께 68–69
  • 70. 영국대사관에 초청되어 개인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테레사 메이 영국 전 총리님과 만찬을 가졌습니다. 메이 전 총리는 코로나 이후 처음 맞이하는 외빈입니다. 또한 메이 전 총리는 남성 중심의 정치세계에 뛰어든 여성 정치인들이 겪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치인 가운데 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날 만찬은 메이 전 총리께서 대한민국 의회에 새롭게 등장한 여성 정치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한 소중한 자리였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메이 전 총리께 한 가지 질문을 드렸습니다. 메이 전 총리께서 평등장관으로 재임 중이던 2010년, 영국의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 할 수 있는 평등법이 영국에서 제정되었습니다. 당시 집권세력은 보수당이었고, 메이 장관은 “영국 역사상 최악의 법”이라는 혹평과 함께 표결에 기권하였습니다. 그러나 4년 후인 2014년, 동성결혼이 영국에서 법제화될 때, 메이 전 총리는 “내 가치관이 변했다. 과거의 동성애 관련 표결을 오늘 다시 할 수 있다면 찬성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생각이 다른 타인을 설득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보다 어려운 것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메이 전 총리께서 스스로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 무엇이었는지를 저는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메이 전 총리의 대답은 간명했습니다. 본인께서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존경하는 위원장님, 그리고 선배・동료 위원님 여러분! 제가 대표발의한 「차별금지법안」에 대한 왜곡된 정보들로 인한 일부의 오해와 우려의 목소리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간곡하게 호소드립니다. 단 한 명의 시민이라도 차별받을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차별받을 수 있기에, 모든 시민들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고자 하는 이 차별금지법 안에 담겨있는 간절한 목소리를 경청해주십시오.
  • 71.
  • 72. 우리 사회는 그동안 수많은 국민들의 노력으로 눈부신 발전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압축적인 성장의 그늘에서 불평등은 심화되었고 차별은 방치되었습니다. 오늘날 어떤 시민들은 여전히 그들이 가진 특정한 물리적・ 사회적・문화적 특성을 이유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필수적 영역에서 그 특성을 갖지 않은 시민들은 상상할 수 없는 부당한 차별을 받습니다. 그러한 차별 피해가 발생했을 때 피해를 입은 시민들을 제대로 보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정법과 구제 수단은 아직 미비한 상황입니다.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을 예방하고 차별피해자를 보호 및 구제하며, 개인에게 발생하는 복합적 차별을 효과적으로 다룰 ‘포괄적’이고 실효성 있는 법안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또한 차별의 의미와 판단기준을 명확히 하고 직접적 차별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이뤄지는 차별 역시 명확히 함으로써 우리 헌법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와 평등의 가치, 그리고 기본권 실현의 토대를 마련해야 합니다. 이에 「차별금지법안」을 제정하여 ‘코로나19’ 시대 우리사회 인권의 가이드라인을 확립하고, 바이러스 감염으로부터 우리 모두의 삶을 지키는 ‘마스크’와 같이 모두의 안전과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존경하는 선배, 동료 위원 여러분! 헌법재판소는 “평등의 원칙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관한 우리 헌법의 최고 원리”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은 이러한 헌법의 이념을 실현하고 존엄과 평등이 시민들의 삶에서 꽃피는 대한민국을 만들어가기 위해 발의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이 법안의 취지를 깊이 헤아려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시고 지지해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11월 26일.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종교계 릴레이 기자회견: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 73. 장혜영: 제가 차별금지법을 발의하자마자 인권위에서는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평등법 시안’이라는 것을 발표하며 정부 여당에 법 제정을 촉구했어요. 평등법은 차별금지법을 보다 긍정적인 방식으로 ‘브랜딩’한 거라고 생각해요. 평등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 행동은 결국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니까요. 마치 정의의 실현이 부정의를 타파하는 것으로 가능해지듯이요.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내에 5선 중진 의원인 이상민 의원이라는 분이 대표발의를 준비하고 계신데요. 저는 민주당에 올해 안에 평등법을 당론으로 채택해서 강력히 추진할 것을 계속 소리높여 압박하고 있어요. 그래야 개별 의원들이 조금 더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는 여지가 생기니까요. 민주당이 평등법을 발의하고 나면 제가 발의한 차별금지법과 내용이 비슷하기 때문에 합쳐서 심사를 진행하게 될 거예요. 놀랍게도 차별금지법은 아직까지 단 한번도 국회에서 제대로 심사된 적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일단 당면한 목표는 실제로 토론이 시작되게 만드는 것이죠. 이슬아: 보다 긍정적인 방식으로 브랜딩하셨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에요. 의원 장혜영이 작가이자 감독이었던 장혜영에게 꾸준히 도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72–73
  • 74. 05. 음악이 정치가 되는 순간 장혜영: 차별금지법 외에도 존엄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 중요한 법안을 이번에 정의당에서 여러 가지 발의했어요.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는 법안도 그렇고, 비동의강간죄를 개정하는 것도 그렇지요. 또 시민들의 일상과 일터의 안전을 위협하는 온갖 부주의와 무책임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기업의 경영자와 관리 책임이 있는 담당 공무원들이 안전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경우 무거운 처벌을 내릴 수 있게 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올해 안에 제정해내는 일에도 열과 성을 다하고 있어요. 이슬아: 국회에서 〈그 쇳물 쓰지마라〉라는 노래를 부르시는 것을 보았어요. 정말 강렬한 노래예요. 아주 슬픈 노래고요. 장혜영: 맞아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노래죠. 노래를 불러서 세상이 바뀌냐고 힐난하는 분들도 종종 계셨는데, 노래가 그 자체로 세상을 바꾸지는 않지만 노래를 부르고 듣는 사람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요. 현충원 계단을 경사로로 만들어낸 것처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서 반드시 이 문제도 바꾸어내고 말 거예요. 그나저나 TMI인데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기타치며 노래부른 의원은 제가 최초라고 해요.
  • 75. 이슬아: 너무 좋아요. 더 자주 부르면 좋겠어요. 장혜영: 자주 부르면 국회에서 하지 말라고 엄숙한 내규가 만들어질지도요. (웃음) 〈그 쇳물 쓰지 마라〉 제페토 작사, 하림 작곡 광염(狂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마라. 가로등도 만들지 말것이며 못을 만들지도 말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적 얼굴 찰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 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새끼 얼굴 한번 만져 보게. 2020년 9월 14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촉구 릴레이 1인시위 〈그 쇳물 쓰지 마라〉74–75
  • 76.
  • 77. 76–77 세 번째 약속: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정치를 하겠다.
  • 78. 01. 정치는 불가능의 예술 이슬아: 이제 세 번째 약속에 대해 들을 차례네요. ‘정치를 하겠다’는 약속이죠. 장혜영: 그렇죠. 혹시 후원회장님은 혹시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정치의 정의에 대해 기억나는 문장이 있으신가요? 이슬아: 글쎄요. 지금 딱 생각나는 것은 없네요. 장혜영: 제가 예전에 대학 다닐 때 정치학개론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수업 첫 시간에 교수님이 말씀하신 문장이 있었어요. 나중에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는 문장이더라고요. “정치는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다.” 데이비드 이스턴이라는 정치학자의 정의예요. 이슬아: 자원의 권위적 배분? 장혜영: 네. 사회에 존재하는 자원을 어떤 ‘권위’를 가지고 배분하는 문제라고 규정하는 거죠. 그 때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제 와서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반만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그건 정치의 행정적인 면모를 설명하기 적절한 정의죠. 예를 들면 정책을 수립하고 예산을 집행하고 인사를 하는 등 실제로 자원을 배분하는 일들을 잘 설명하는 정의라고는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더 사랑하는 정의는 체코의 하벨 대통령이 말한 정의예요. “정치는 불가능의 예술이다.” 무언가를 나눠 갖는 일에만 골몰하다보면 주어진
  • 79. 정치적 혹은 사회경제적 조건을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여기게 되는 경향이 생겨요. 하지만 세상이 굴러온 역사는 단순히 분배의 역사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역동적인 가치와 가치 사이의 투쟁, 생각과 생각 사이의 투쟁이었죠. 제가 하고 싶은 정치는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끝없이 불가능에 도전하는 예술로서의 정치예요. 이슬아: 불가능에 도전하는 예술…! 장혜영: 제가 정치를 시작하며 소수정당인 정의당을 선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요. 후원회장님 혹시 ‘거대양당’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이슬아: 그 말 너무 웃긴 것 같아요. ‘적대적 공생관계.’ 장혜영: 맞아요. 모순적이죠. 그런데 그 말만큼 지금 국회가 처한 딜레마를 잘 표현하는 말도 따로 없는 것 같아요. 두 개의 오래되고 거대한 기득권 정당이 서로를 욕하는 것으로 서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상황이요. 앞서 얘기했던 저에게는 필사적으로 해결하고 싶은 문제들이 이 거대 양당에게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문제들로 치부되고 있어요. 이런 거대 기득권 양당의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정치의 판이 깨지지 않는 한 제가 이야기하는 미래들은 언제까지나 ‘지나치게 이상적인 얘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이야기되겠죠. 하지만 저는 단순히 이상적인 얘기를 늘어놓고 여기에 공감하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듣기 위해 정치를 시작한 것이 아니에요. 78–79
  • 80. 정책을 실현하는 힘은 결국 정치에서 나오죠. 그래서 저는 매일 매일 힘에 대해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정치적인 힘을 가질 수 있을까. 그 시작은 자기 정치의 원칙을 바로 세우는 것에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그때그때 진영논리에 휩쓸리고 관계에 영향받으며 이리 눈치보고 저리 눈치보는 정치가 아니라 어떤 원칙을 가지고 누구를 대변하며 어떤 미래를 꿈꾸고 노력하는지 당당하고 진솔하게 시민들 앞에 나서서 보여드리는 것이 그 어떤 정치를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될 거라고 믿어요. 이슬아: 그래서 지난번 국회에서 하셨던 연설에 많은 사람들이 울림을 느꼈던 것 같아요. 장혜영: 지난 대정부질문을 말씀하시는 거죠. 대정부질문은 국회 의사일정 가운데 하나이고, 말 그대로 국회의원이 정부 측에 정치분야, 경제분야 등 각 분야에 맞는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듣는 형식으로 진행돼요. 당시에 저는 기재위 소속 의원이고 하니 경제 분야의 대정부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당장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정기국회였기 때문에 산적해있는 현안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하지만 대정부질문 첫날은 종일 진짜 민생에 관련된 시급한 현안들보다는 당장 눈앞의 정쟁거리를 둔 지루하고 원색적인 공방으로 귀한 시간들을 다 허비했어요. 너무나 속이 상했죠. 차라리 그 시간을 다 나를 주지. 그 시간이 어떤 시간인데.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정부여당이 마음만 먹으면 정말 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데, 변화를 위해 내달려도 모자랄 시간에 정쟁이 그 모든 자원을 허비하고 있다니.
  • 81. 대정부질문은 정말 하루 종일 하는데, 그러다보니 중간에 의원님들이 다 듣지 않고 자리를 많이 비우세요. 그 자리를 보면서 생각했죠. 만일 코로나 때문에, 올해 기후위기로 닥쳐온 장마 때문에 피해를 입고 건강을 잃고 가족을 잃은 시민들이 이 자리에 와서 이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 그래서 고민 끝에 제 대정부질문 바로 전날 저녁에 그때까지 미리 준비해둔 질문들 일부를 커트하고 한 5분 정도 되는 짧은 연설을 준비했어요. 무척 긴장했는데 끝나고나서 많은 분들이 좋게 보아주셨더라고요. 80–81
  • 82. 대정부질문 연설: 87년생 청년 정치인이 87년의 청년들께 2020년 9월 16일. 2020년 정기국회 경제분야 대정부질문 중. 저는 초선 비례대표 국회의원입니다. 작년에 정치를 시작했고, 이번 국회는 저의 첫 정기국회입니다. 코로나19 판데믹에 기후재난이 겹치는 엄중한 상황에 무거운 책임감과 동시에 국민을 대표하는 자긍심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대정부질문을 바라보며 제 마음에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정말로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요? 꿋꿋이 민생과 국정운영에 관해 정책질의하시는 의원님들도 계셨지만, 코로나19 민생대책을 비롯해 중요한 민생 이슈를 다뤄야 했던 소중한 시간의 대부분은 추미애 법무부장관 아들의 휴가 문제를 둘러싼 정쟁에 허비되었습니다. 저는 1987년생입니다. 제가 태어난 해에 87년 민주화가 이루어졌습니다. 21대 국회에는 그 87년 민주화의 주역들 께서 많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때 독재 타도를 외치며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여러 의원님들을 포함한 모든 분들 덕분에 우리는 대통령 직선제라는 소중한 제도적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탄생시켰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자신의 젊음을 내던졌던 87년의 모든 청년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그 거대하고 두려운 독재의 벽을 마주하면서도, 그에 맞서 싸우는 것이 옳기 때문에,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에 그 시대적인 도전과 사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안아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젊음을 아낌없이 불태우셨을 것입니다.
  • 84. 2020년 9월 16일. 정기국회 경제분야 대정부질문.
  • 85. 87년생인 저는 독재의 두려움을 피부로 알지 못합니다. 그 두려움은 그 시대를 온몸으로 살았던 여러분만이 아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책과 영상을 본다 해도, 그 두려움을 제가 감히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두려움을 압니다. 무한한 경쟁 속에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나날이 변화하고 복잡해지는 세상 속에 내 자리는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온갖 재난과 불평등으로부터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지켜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누구를 타도해야 이 두려움이 사라지는지, 알 수 없는 두려움입니다. 87년의 정의가 독재에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정의는 불평등과 기후위기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청년 시절의 젊음을 바쳐 독재에 맞섰듯, 한때 우리를 번영하게 했지만 지금은 지구상 모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탄소경제에 맞서, 청년들에게 꿈을 빼앗고 인간성을 나락으로 빠뜨리는 지긋지긋한 불평등에 맞서, 우리를 덮쳐오는 온갖 불확실한 위기들에 맞서 모두의 평등하고 존엄한 삶을 지키기 위해 저 또한 저의 젊음을 걸고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지난 2017년,‘이게 나라냐’를 외치며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을 때, 많은 시민들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저 또한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민주화의 주인공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잡을 때, 그 권력이 지금껏 우리 사회의 케케묵은 과제들을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에 우리가 마주한 도전들에 용감히 부딪쳐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한때 변화의 가장 큰 동력이었던 사람들이 어느새 시대의 도전자가 아닌 기득권자로 변해 말로만 변화를 이야기할 뿐 사실은 그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존재가 되어버린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84–85
  • 86.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서라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싸우겠다던 그 뜨거운 심장이 어째서 이렇게 차갑게 식어버린 것입니까. 더 나쁜 놈들도 있다고, 나 정도면 양반이라고, 손쉬운 자기합리화 뒤에 숨어서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는 것을 멈추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온몸을 내던졌던 그 젊은 시절의 뜨거움을 과거의 무용담이 아닌 이 시대의 벽을 부수는 노련한 힘으로 되살려주실 것을 간곡히 호소하며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87년생 청년 정치인으로서 지금 이 자리에 앉아계신 87년의 청년들께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지금, 2020년에 태어난 아기들이 20년, 30년 후의 청년이 되어 우리는 알 수 없는 그 시대의 정의로움을 위한 싸움을 지속할 수 있도록 먼저 이 세상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일에 동참해주십시오. 여러분께서 독재와 싸웠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가 아닙니까? 우리가 불평등에 저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우리가 기후위기에 저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미래를 갖고 싶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민들이 인간답게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만드는 정치,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이슬아: 이 연설문은 다시 읽어도 인상적이에요. 앞선 세대의 두려움을 존중하면서도, 현재 젊은 세대들이 어떤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설득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정치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글이잖아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그 영상을 보며 글을 쓰는 사람이 의원이 돼서 너무 좋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장혜영 의원님의 말하기 방식에 대해 개인적으로 되게 흥미가 많아요. 엄청 부드럽지만 또렷하고 선명하고. 소리를 지르는 다른 누구보다도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요.
  • 87. 지금까지 이런 질감의 목소리가 없었다는 느낌도 들고요. 그래서 저는 효과적인 퍼포머로서도 관심이 많아요. 장혜영: 제가 아무리 봐도 화려한 타입은 아니잖아요. 가끔은 저도 뭔가를 화려하게 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역시 자기답게 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제 책상 앞에 써서 붙여놓고 매일 보는 메모 중 하나가 ‘차분하면서도 급진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문장이에요. 이슬아: 너무 의원님다운 이야기네요. 다듬어진 기품있는 언어를 쓰신다고 생각해요. 제 일은 정치는 아니지만 의원님의 말하기 방식에서 많이 배우기도 해요. 특히 일할 때 필요 이상으로 감사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 필요 이상으로 죄송하다 말하지 않는 것. 참고가 많이 돼요. 장혜영: 감사합니다. 이건 백 퍼센트의 감사예요. (웃음) 86–87
  • 88. 02. 의정보고를 마치며 이슬아: 오늘 내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장혜영 의원의 그간의 행보를 쭉 들으면서 저의 글쓰기 스승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어요. 어떤 작가의 글쓰기가 확장되려면, 한 작가가 남의 슬픔을 자기 슬픔처럼 느끼는 경험들이 필요하다고. 남의 슬픔이 내 슬픔처럼 느껴질 때 이 작가의 글쓰기가 겨우겨우 확장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의원님의 세계도 비슷한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얼마나 다양한 문제로 슬플 수 있는지가 이 사람의 정치 세계의 반경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 들은 모든 이야기들이 마치 이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슬펐느냐에 대한 보고서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그래서 중간중간 찡한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너무나 일하는 사람이라는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계속 우는 사람은 일을 못 하기 때문에. 그래서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은 시를 쓰지 않는다고 말하잖아요.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글을 쓴다고 생각해요. 우느라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정치를 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의원님은 첫 번째로 슬픈 사람 대신에 일할 수 있는, 그런 점에서 엄청 미더운 일꾼이라고 생각합니다. 장혜영: 마음에 오래오래 담아두고 꺼내보고 싶은 싶은 말씀을 해 주셨어요. 정말 감사해요. 이슬아: 슬픔을 분노로 바꿀 수도 있겠네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화낼 수 있는가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