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creative leade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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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reative leadership

  1. 1.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CreativeLeadership[ 5 Ⅴ
  2. 2. 지난 50년간 우리 경제는 산업화를 통하여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비약적 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선진국의 성공사례를 철저히 벤치마킹하여 우리의 실정에 맞도록 적용한 Fast Follower 전략을 통하여 큰 성과를 거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 분야에 따 라서는 더 이상 벤치마킹을 하기 어렵거나 기존의 방법으로는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어렵기 때문 에 First Mover로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가 도래했다는데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기술인문융합창작소(Atleier Techno-Humanities)에서는 우리산업이 First Mover로 도약하기 위 한 사고의 전환과 아울러 이를 뒷받침할 “문제해결형 R&D”로의 전환에 필요한 창조적 리더십과 다양한 접근방식을 제시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이제 그간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R&D분야의 실무자나 관리자 들에게 필요한 매뉴얼을 내어놓 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R&D에 참여m하는 연구자나 관리자들이 미래를 향한 꿈과 비전을 펼 칠 수 있는 환경의 조성과 창조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창조 경제를 만들어가 는 지름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의 삶과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Insight)과 미래를 내다보는 예 지력(Foresight)이 창조경제를 이끌어가는 리더가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역량으로 대두되는 이 시점에서 기술인문융합창작소의 다양한 접근방법들이 활용되기를 기대합니다. 다시 한 번 본 매 뉴얼이 창조경제를 염원하는 모든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2013년 7월 이 남 식 기술인문융합창작소 소장 Expect the Unexpected 기술인문융합 가치창출을 위한 Future Discovery Research 2020 인사말 Greeting
  3. 3.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Creative Leadership 역사속에서 기술인문융합을 시도하였던 •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종대왕” • 르네상스 과학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 융합과 독창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 대한민국의 기술인문융합을 선도하는 • 모바일 시대, 커뮤니케이션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카카오톡 김범수” • 새로운 가상국가, 대한민국 영토를 넓히는 “SM 이수만” • 여러 사람의 Wonder한 생각을 모아 꿈과 희망에 도전하는 “네오플 강신철” • 과학은 소통과 설득의 연속이다 “서울대 임지순 물리학자” • ‘된다’보다 ‘될까’의 연구에 투자하는 “하버드대 박홍근 분자전자과학 권위자” • 미래 인터넷 기술의 새 지평을 열고 있는 “ KAIST 문수복 전산학 교수” • 3D 가상입력장치의 선두주자 “셀루온 차래명 대표” • 소통으로 ‘창의’ 바람을 몰고오는 “포스코 정준양 회장” • 한국 영화의 신 르네상스를 열고 있는 “CJ E&M 이미경 부회장” • 1%를 채우기 위한 ‘도전’의 연속 “한경희생활과학 한경희 대표” • 국내 문화 마케팅의 역사를 새로 쓴 “현대카드 정태영 대표” C O N T E N T S
  4. 4. 기술인문융합 가치창출을 위한 Future Discovery Research 2020 역사속에서 기술인문융합을 시도하였던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종대왕 르네상스 과학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융합과 독창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
  5. 5. tech + 형 융합인재의 사례를 통해 이시대에 필요한 미래 융합 리더십을 재해석하고자 한다. 융합의 시대에 상호간의 지식과 역량을 융합하여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 조하는 것이 tech + 형 융합인재의 핵심이며, 이러한 tech + 형 인재는 창의성 중심의 융합 자질, 태도를 가지고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통섭하는 특징을 보이면서 기본적으로 도전, 소통, 창조의 기업가 정신을 보유하고 있다. tech + 형 융합인재를 선정하여 창조적 리더의 DNA가 어떠한 것인지를 심 층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인물 선정 가이드라인을 활용코자 한다. 첫째,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세종대왕)와 우리시대를 대변하 는 업적과 성과를 창출하고 미래지향적인 창의성 중심의 인문·과학기술 융합문화를 주도한 이상적인 역사인물(레오나르도 다빈치, 스티브 잡스) 둘째, 우리나라 현존인물 중에서 노벨상 후보 그룹(임지순, 박홍근), 글로 벌IT CEO상 수상자(차래명), 젊은 공학인상 수상자(문수복), 벤처 1位 기 업 CEO(강신철), 기타 인물(김범수, 이미경, 이수만, 정준양, 한경희)등 10인을 대상으로 하였다. 세종대왕 조선 제 4대 왕 / 창조경영 리더십 발휘 • 과학 기술의 발전 : 발명 과정과 활용, 기술자 양성 및 보호법 • 훈민정음 창제 : 창제 동기와 원리, 장애물 극복 방식, 창제 후 활용방법 • 악보 창제 : 아악 정비, 향악 작곡, 정간보 창안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탈리아 대표 예술가 / 과학의 예술가 • 최초의 과학자,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 인류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인물 • 다방면에서 재능 발휘 :미술, 음악, 건축, 군사공학, 도 시계획, 비행 기계의 고안, 해부, 요리, 식물학, 의상 및 무대 디자인 등 예술가로서의 업적은 물론이거니 와 과학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시대에 여러 자연 과학 분야에 걸친 다양한 관찰과 실험 스티브 잡스 애플 CEO / 최초의 DENT Leader • 새로운 시장 창조, 양보다는 질, 고객 기술을 끌어들 인 창의기법, S/W와 Application 중시, 혁신의 동력은 내부가 아닌 외부라는 시각, 스마트 리더, 직원에게 기회를 주는 최고경청자(CLO)로서 애플의 DNA 기술 은 인문학과 결합된 기술의 결과물로 세상을 선도한 현시대의 창조리더 * DENT Leadership : 우주에 흔적을 남기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조직을 이끄는 창조 리더십 조사 인물 융합인물(3명) 10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11
  6. 6. 조사대상 후보인물 현존인물(3명) 김/범/수/ 카카오 의장 플랫폼 비즈니스의 성공신화 • 소셜 모바일 메신저 문화를 확산시키며 새로운 신화창조를 일구는 승부사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CEO 문화기술 이론의 선구자 • 국가별 문화에 대응하기 위한 현지화와 K-POP 문화 선도 강/신/철/ 네오플 CEO 게임의 한류열풍 주역 • 끝없는 혁신과 글로벌화를 통해 초고속 성장을 이끈 게임계 의 '한류열풍' 주역 조사대상 후보인물 기타(8명) ●글로벌IT CEO 차래명 ●일반 CEO 한경희, 이미경, 정준양, 정태영 ●젊은 공학인상 문수복 ●노벨상 후보 임지순, 박홍근 주) 현존인물은 알앤디비즈 선정 : tech + 형 융합인재의 공통적인 사례 요소를 발굴 하자는 취지로서 국내를 대표하는 리더 선정 개념이 아님을 밝힘 12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13
  7. 7.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종대왕 1397(태조 6)~1450(세종 32). 조선 제 4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418~1450년이며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도(祹), 자는 원 정(元正). 태종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이 며, 비는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08년(태 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進 封)되었으며,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개와 매에 관련된 사건을 비롯해, 세자로 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일련의 행동과 사건들이 일어나자, 조 선 왕조의 정치적 안정과 융성을 바라던 태종은 왕위를 이을 후계자로서 양녕대군이 적합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태종의 진의를 파악한 신료들이 왕세자 폐위를 요구하는 소( 疏)를 올려, 끝내 양녕대군을 왕세자에서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1418년 6월 태종은 “충녕대군이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면서, 택현(擇賢 :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의 명분으로 세워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 하였다. 이처럼 세자책봉은 태종의 뜻에 따라 극적으로 이루 어졌다.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선위를 이어받아 세자 충녕 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세종이다. 다양한 인재들을 용광로처럼 잘 녹여 내어 새로운 융합을 창조해 낸 전형적인 컨버전스(Convergence) 리더이자, 뜻하 는 바를 마음에 사무치게 전달한(사마하다) 소통의 리더십 발휘 시대배경 조선 4대 세종대왕 임금은 누구인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융합적 관점에서의 리더십 재해석 14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15
  8. 8. 세종대는 유교정치의 기틀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에서 문화가 가장 융성한 시대였다. 무엇보 다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에 걸쳐 조선 왕조의 기반을 마련한 시 기였다. 이는 단순히 수성(守成)의 의미를 넘어, 역성혁명 (易姓革命)을 통한 조선 왕조의 정 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세종은 수성의 군주를 뛰어 넘어 창업을 완성한 군 주였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훌륭한 인재들을 양성하였고, 유교정치의 기반으로서 의례·제도를 정 비하였다.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 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貢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해 기틀 을 확고히 하였다. 태종이 이룩한 왕권의 정치적 강화를 바탕으로, 세종은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갔다. 개국공신 세력이 정계를 장악하던 태종대 와 달리, 세종은 과거를 통해 선발한 유교적 소양의 관료 및 학자들을 중용하면서, 유교이념 에 근거한 왕도정치를 펼쳤다. 세종은 집권 초기 새로운 정치와 문화 창달을 위해 국가 경영의 씽크탱크(think tank)로서, 집 현전을 설치하였다. 인재를 중용하고, 소통을 존중하던 세종의 배려로 무한대의 학문과 자유 를 보장받았던 집현전의 신진 학자들은 새문화 창조의 주축이 되었다. 집현전의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 등과 같은 학자들이 우리 민족의 문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바탕에서 비롯된 것 이었다. 뿐 아니라 과학과 기술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루며, 태평성대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 었다. 세종대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인재를 아끼고, 소통을 통 한 세종의 융합과 창의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세종은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와 역사 문화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력을 지닌 리더였다. 때문에 당시 선진국인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경도(傾倒)되지 않고, 조선의 주체성과 독창성 을 지닌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세종대에 중국문화의 모방이 아닌 조선 특유의 민족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창의적 리더십에서 발휘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 성명효대 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고, 묘호는 세종(世宗)이며, 능호는 영릉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이명 : 자 원정(元正), 이름 도(祹) 본관 : 전주(全州) 시호 :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시대 : 조선시대 활동분야 : 정치 가족관계 : 아버지 태종(太宗), 어머니 원경왕후 (元敬王后),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 1397.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아들로 한양에서 출생 1413(태종13). 대군이 됨 1418. 왕세자에 책봉 (22세 나이로 왕위에 즉위) 1450. 2. 17. 영응대군 집 별채에서 승하 재위기간 : 1418년 ~ 1450년(조성왕조 제 4대 왕) 인물소개 세종 가계도 >> 제5대 문종 수양대군(제7대 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정소공주 정의공주 화의군 계양군 의창군 밀성군 익현군 영해군 담양군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 정안옹주 정현옹주 소현왕후 심씨 영빈 강씨 신빈 김씨 혜빈 양씨 숙원 이씨 상침 송씨 태종 제4대 세종 부인 : 6명 자녀 : 18남 4녀 능 : 영릉 원경왕후 민씨 16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17
  9. 9. 1419(세종 원, 23세)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征伐)를 정벌 대마도 원정은 일반적으로 1419년(세종 1) 6월에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체찰사( 三軍都體察使)로 임명하여 정벌한 것을 말하지만, 이보다 앞서 고려 창왕(昌王) 때 와 조선 태조(太祖) 때 정벌한 일 까지도 포함된다. 왜구는 약 70년간 우리나라 연 안 각지에 침입하였으며, 특히 고려 말의 약 40년간은 왜구의 창궐로 인해 그 피 해가 극심하였다. 1420(세종 2, 24세) 학문연구기관인 집현전(集賢殿) 설치 집현전은 학문연구기관으로서 제도적으로는 도 서 수장 및 이용, 학문 활동 등의 역할을 담당하였 다. 또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여 조선왕조 문화 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 하였으며, 세조 ~성종 대에 정치적으로 크게 활약한 학자들 가운 데는 대부분이 집현전 출신이었다. 비록 37년이 라는 짧은 기간 동안 존속하였지만,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그러나 단종(端宗) 폐위에 반대하여 집현전 출신의 사육신(死六臣)을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1456년(세 조 2) 다종 복위를 꾀하 자, 세조(世祖)는 집현전을 폐지하는 한편 소장된 서적 등을 예문관(藝文館)으로 이관시켰다. 세종은 신중하고 인내심과 끈기가 강하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며 너그럽고 인 자하였다. 화를 내는 경우도 사신 접대, 여진족의 침입 등 국가 대사에 관해서였 고 신하들의 불순종 등에 화를 낸 적은 별로 없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말솜씨도 뛰어났다. 세종의 화법은 신하들의 말을 일단 수긍 하되 곧이어 자신의 뜻을 주장하는 방식이었다. 신하들이 아무리 자신의 뜻에 반 대하는 말을 한다 할지라도 “경의 말이 매우 옳다.”라고 수긍한 뒤 “경의 말이 비 록 옳다고는 하나......”라고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날카로운 논변으로 상대방의 허점을 정확하게 찔러서 대응할 수 없게도 말들었다. 특히 기억력이 비상했다. 책을 읽으면 잊어버리지 않고 신하들의 이름이나 가계 를 모두 기억하였다. 또한 모호한 것을 싫어하고 구체적이고 명백한 것, 현실적 이고 실리적인 것을 좋아했다. 일을 추진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하고자 하는 일 은 결단을 내려 끝까지 밀고 나가는 과단성과 추진력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공부벌레였다. 어린 시설부터 낮밤을 가리지 않고 학문에 열 중하였고, 지나친 독서로 몸을 상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심지어 태종이 병석에 누운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책을 모두 빼앗아도 기어코 책을 찾 아내는 책벌레였다. 올바른 정치는 올바르게 아는 데서 비롯된다고 보았고, 올바른 앎은 곧 학문에 심 취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임금이 된 뒤에도 책 읽기를 단 하루 도 등한시하지 않았고 매일같이 경연장에 나가 학자들의 강연을 즐겨 들었고 편 전에서도 재상들과 학문적인 논쟁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원에 조(粟)를 심 어 그 실리를 시험하였다. 세종의 실리주의적인 면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삶을 통해 철저하게 자신의 학 문을 검증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실천적인 이론가였으며,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 여 성공적으로 실현시킨 행동주의적 학자였다. 세종의 성품 세종의 주요 업적 ◀ 1860년 영국인 오르 코크가 그린 지도에는 대마도가 대한해협에 속해있다. 18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19
  10. 10. 1421(세종 3, 25세) 주자를 만들어 인쇄술 개량 세종은 문화 창달을 위해 다양한 서적 편찬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이로 인해 과학 과 기술을 중시한 활자 인쇄술과 제자술이 발달하였고,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법은 종전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 능률을 올리게 되어 당시 하루에 만드는 활자 주조 수 량은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수량의 약 10배에 달하는 3500자 정도에 이르렀다. 세종대왕과 구텐베르크는 친구? 유럽인들은 최소한 100여 년 앞선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기술을 알고 있는 것 같 지만, 한편으로는 구텐베르크를 여전히 ‘최초의 활자 개발자’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10여 년 전 ‘구텐베르크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라는 이름의 국제 공모전이 열렸을 때, 독일에 유학 중이던 우리나라 학생이 공모에 참가해 대상을 받은 일이 있다. 구 텐베르크가 조선에서 얻어간 지식을 이용해 인쇄기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을 치하 하고 격려하는 우정 어린 내용이었다. 1423(세종 5, 27세) 세종과 인조대에 법화(法貨)로 주조·유통시킨 금속화폐, 조선통보(朝鮮通寶) 조선 왕조는 초기부터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화폐제 도를 도입·실시 하고자 하여 1423년 (세종 5)에 이르러 저화의 유통이 사실상 중 단되자 조선은 동전을 주조하여 유통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동전원료의 부족, 동 전주조시설의 미비, 동전주조기술의 미숙 및 기술자의 부족 등 여러 문제로 인해 4년만인 1427년 40만 냥을 주조하는데 그쳤다. 1426(세종 8, 30세) 방화업무(防火業務) 관장을 위한 한성부 소속의 관서 금화도감(禁火都監) 조선 초기 한양 건설 후 화재가 빈발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가옥 사 이에 방화 장을 쌓고, 요소에 우물을 파서 방화기구를 설치하였는 데, 이를 총괄하는 관청이 금화도감이다. 관원은 제조(提調) 7인, 사(使) 5인, 부사(副使)·판관(判官) 각각 6인을 두었으며, 1426년 (세종 8) 6월에는 성문도감(城門都監)과 합쳐 수성금화도감(修城 禁火都監)이라 하여 업무 또하 소방·금화와 더불어 도성의 수금 화도감리와 도로·교량의 수리까지 담당하게 하였다. 1429(세종 11 , 33세) 왕명에 의하여 문신인 정초(鄭招)·변효문(卞孝文) 등이 편찬한 농서 농사직설(農事直說) 우리는 중국의 옛 농서에 의존하여 농사를 지었으므로 우리나라 풍토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 각 지방의 경험이 많은 농군들에게 땅에 따라 경험한 바를 수집·편찬한 것이 농사 직설이다. 농사직 설은 중요한 중요 곡식류에 국한되고 기술이 간단하나,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농법으로 편찬된 책으로는 효시가 되며 그 후 여러 가지 농서 출판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1430(세종 12 , 34세) 전국의 관리와 일반 백성 17만 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 공법(貢法) 본래 중국 하(夏)나라 때 시행된 것으로 농민 한 사람에게 토지를 50무(畝)씩 지급하고 그 중 10분의 1에 해당하는 5무의 수확량을 세금으로 거준 정액세제를 말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전기 세 20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21
  11. 11. 종이 처음으로 토지의 세금을 일정하게 고정시키는 정액세법의 원리를 작용하였다. 이것은 농사의 상황을 10분(10등급)으로 나누 어 손실이 한분(한 등급)이 내려갈 때마다 세금을 감하고, 8분이면 세금을 감면하는 제도를 말한다. 하지만 지방 향리들이 이를 제대 로 측정하지 않아 부자가 세금을 덜 내고 가나한 자는 더 내는 등 의 폐단이 일어나자 세법 개혁의 필요성 증대로 인해 세종은 새로 운 세법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공법(貢法)이다. 세종은 ‘공법’이라는 새로운 세법 시안을 백성들에게 찬반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3월 5일 ~ 8월 10일까지 무려 5개월간 실시하였 고, 그 결과 당시 인구를 고려하면 노비나 여성을 제외한 17만 명 이 국민투표에 참여하였고, 9만 657명의 찬성과 7만 4148명의 반 대가 집게 되었는데, 이 결과를 지역별로 실록에 기록할 정도로 국가의 역량이 집중된 사업이었다. 1430(세종 12, 34세) 세종실록 악보 아악보 아악보는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 136~147권에 들어 있는 율보(律譜)로 된 악보를 말하며, 조회(朝會)와 제례(祭禮)의 아악보(雅樂譜)·정대업(定大業)·보태평(保太平)·발상(發祥)등 이 실려 있으며 32정간(井間)으로 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악보 이다. 시가(時價)를 표시한 유량악보(有量樂譜)의 효시가 되며 세 종실록 악보는 중국에 남아있고 고악보(古樂譜)들과 비교해 보아 도 상당히 발전된 악보임을 알 수 있다. 1431(세종 13, 35세) 조선 제3대 왕 태종의 재위기간을 기록한 태종실록(太宗實錄) 태종실록은 1422년(세종 4) 5월 태종이 죽자 이듬해 12월 춘추관 지관사 변계량(卞季良)과 동지관사 윤회(尹淮)의 건의를 받아들 여 공정왕(정종)과 태종의 실록을 수찬하도록 명하였고, 동부(東 部) 연희방(燕喜坊)에 있는 덕흥사(德興寺)에 사국(실록편찬사무 소)을 개설하여 1424년 3월부터 변계량·윤회·신장(申檣)의 책임 하에 양조(兩朝) 실록 편찬에 착수하였다. 2년 뒤인 1426년 8월에 공정왕실록(정조실록)을 완성하였 고, 태종실록을 편찬하던 중 변계량이 사망하자 편찬 사무소를 의정부 건물로 옮겨 좌의정 황희(黃喜)와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이 그 뒤를 이어 윤회·신장 등과 함께 편찬책임을 맡아 1년 후인 1431년 3월에 완성하였다. 정식이름은 ‘태종공정대왕실록太宗恭定大王實錄)'이며 1418년 8월까지 있었던 17 년 8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이 연월일순에 의해 편년체(編年體)로 서술되어 36권 16 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선시대 다른 왕의 실록과 함께 일괄해 국보 제 51호로 지 정되었다. 1431(세종 13, 35세) 왕명으로 유효통 (兪孝通)·노중례(盧重禮)·박윤덕( 朴允德) 등이 간행한 의약서 향약채 취월령(鄕藥採取月令) 세종 때 전국적으로 향약의 분포를 조사하고 채취·수납 체제를 정비하 는 과정에서 편찬한 책으로 향약채취 ▼ 향약채취월령 본문 22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23
  12. 12. 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며, 발문에 따르면 토산약재 수백 종을 검토·연구하여 그 향명을 기입하고 맛과 약성, 춘추 채취의 조만(早晩), 음양건폭(陰陽乾暴) 선악 등을 밝혀 편찬한 것 이라 한다. 향약채취월령은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 앞서 편찬한 책으로 이후 독자적인 향약본초 학 수립의 토대가 되었지만, 향약채취월령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일본에 전래된 필사본만 전해지 며 현재 일본 소장본을 필사한 책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432(세종 14, 36세) 조선왕조 최초의 지리서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 1424년(세종 6)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이 공적자료(公的資料)의 조사에 착수한 데서 비롯하여 편찬 하게 되었다. 조정에서 정해준 양식에 따라 각 도의 주부군현(州府郡縣)의 연혁과 변천, 도내(道內) 의 인구 및 호구 수 등에 걸쳐 상당히 자세한 12개 항목에 이르는 내용으로 1426년에는 각 도에서 자 료의 편찬을 끝내어 춘추관에 보낸 후 춘추관에서는 받은 자료를 토대로 맹사성(孟思誠)·권진(權 軫)·윤회(尹淮) 등이 검토하여 ‘신찬 팔도지리지’를 편찬하였다. 1433(세종15, 37세) 압록강 중류 지대의 여진족 정벌 파저강 야인정벌(婆猪江野人征伐) 파저강(동가강) 일대에 걸쳐 사는 야인(여진인)들은 원말명초(元末明初)의 혼란기를 이용해 조선의 강계·여연 등지를 자주 침입하여 인구·우마·재산 등을 살상 약탈하였기 때문에 세종은 정벌군 의 총사령관에 최윤덕(崔閏德)을 임명하고 평안도의 마보정군(馬步正軍) 1만 명과 황해도 군마5,000 필을 징발해 총 2만 명의 군대를 1433년 4월 10일 강계 부에서 7대로 분군(分軍)해 정벌을 단행하였 다. 이 정벌에서 생포된 여진인은 모두 480명, 찬수된 자는 모두 178명에 달하였으며 그밖에 우마 177필을 노획함으로써 조선은 태종 이래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하였던 압록강유역을 개척하고 여연·자성·무창·우예 등 4군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1433(세종15, 37세) 해와 달·오행성의 위치 측정 천문관측기 혼천의(渾天儀) 혼천의는 다른 말로 선기옥형, 혼의, 혼의기라고도 하며, 고대 중국의 우주관이던 혼천설에 기초 를 두어 BC 2세기경 중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후기에서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에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추론된다. 기록상으로 는 1433년(세종 15) 정초(鄭招)·정인지 (鄭麟趾)등이 고전을 조 사하고 이천(李蕆)·장영실(蔣英實) 등이 제작을 감독하여 천문 학의 기본적인 기구로서 조선시대 천문역법(天文曆法)의 표준시 계와 같은 구실을 하게 되어 1657년(효종 8)에는 최유지(崔攸之), 1669년(현종10)에는 이민철(李敏哲)과 송이영(宋以穎)이 각각 만 들었다. 이중 송이영의 것은 서양식 자명종의 원리와 특징을 잘 살펴 추(錘)를 시계장치의 동력으로 이용한 것으로 일종의 천문 시계 기능을 하고 있다. 1433(세종15, 37세) 향약에 관한 의약서(醫藥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세종이 우리나라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우리나라 풍토 에 적합하고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가 더 효과적일 것이라 는 병과 약에 대한 의토성(宜土性)을 강조하여 의약제민(濟民)에 대한 자주적 방책을 세우고자 향약 방을 종합 수집한 ‘향약집성 방’을 편집하게 한 것이 향약집성방이다. 향약집성방에 의해 우리 의 의약적 지식이 어느 정도 학술적 체계를 가지게 되었을 뿐 아 니라 향약 아래에 고유의 향명을 뭍인 것은 우리 고전 언어 연구 에도 중요한 가치가 있으며 향약 집성방은 대한민국 보물 제 1178 호로 지정되었다. 1434(세종16, 38세) 자동시보장치를 장착한 물시계 자격루(自擊漏) 다른 말로는 가격궁루(自擊宮漏)라고도 하며 자동으로 시간 마다 종이 울리도록 한 국가 표준시계이다. 장영실(蔣英實)·이천(李 蕆)·김조(金銚) 등이 처음으로 물시계를 만들었는데 시(時)·경 (更)·점(點)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북·징을 쳐서 시보를 알 리도록 되어 있으며 하루 종일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 장 치였다. 24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25
  13. 13. 1434(세종16, 38세) 삼강(忠-孝-烈)에 뛰어난 사람의 행적을 모아 간행한 책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1428년 진주(晉州)에 사는 김화(金禾)가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에 대하여 강상죄(綱常罪 :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난 죄)로 엄 벌하자는 주장이 논의되었는데, 세종의 엄벌에 앞서 세상에 효행 (孝行)의 풍습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간행하자는 왕명에 따 라 집현전 부제학(副提學) 설순(偰循) 등이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 서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 등 3강(三綱)의 모범이 될 만한 충신·효자·열녀를 각각 35명씩 모두 105명을 뽑아 그 행 적을 그림과 글로 칭송하였는데 내용은 삼강행실효자도(三綱行 實孝子圖)·삼강행실충신도(三綱行實忠臣圖)·삼강행실열녀도( 三綱行實烈女圖)의 3부작으로 이루어져있다. 1434(세종16, 38세) 여진족을 막기 위해 두만강 하류에 설치한 국방상의 요충지 6개의 진, 육진(六鎭) 대륙에서 원·명 교체기 당시 고려 공민왕이 북진정책을 추진한 바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뜻을 이어받아 세종이 6진 개척이라 는 위업을 달성하여 비로서 우리 영토가 두만강으로 확장되었다. 1434(세종16, 38세) 갑인년에 주자소(鑄字所)에서 만든 동활자, 갑인자(甲寅字) 갑인자는 경자자(庚子字)의 자체가 가늘고 빽빽하여 보기 어려워 지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왕명으로 주조된 활자를 말하며 중추원 지사 이천(李蕆)·직제학 김돈(金墩)·직전 김빈(金鑌)·호군 장 영실(蔣英實) 등이 주조하였다. 갑인자는 자체가 해정(楷正:글씨체가 바르고 똑똑함)하여 진( 晉)나라의 위부인자체(衛夫人字體)와 비슷하여 ‘위부인자’라고도 일컬으며, 갑인자에 이르러 처음으로 한글 활자가 마들어져 사용 되었다고 한다. 세종의 갑인자는 처음 만들어진 ‘초주갑인자’라고 하며 조선시대 활자의 기본이 되었다. 1434(세종16, 38세) 한국 최초의 공중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초기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앙부일구는 반구형의 대접 모양에 네 발이 발려 있으며, 동쪽에서 뜬 해가 서 쪽으로 질 때 생기는 그림자가 시각선에 비춘 것을 보아 시간을 알 수 있고, 연중 해의 고도고 달라지기 때문에 계절선에 비추는 그림자 길이를 보고 절기를 확인할 수 있다. 앙부일구는 과학· 역사·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보물(제 845호, 제 852 호)로 지정되었다. 1438(세종20, 42세) 낮과 밤의 시간을 재는 의기(儀器),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장영실 등이 원경의 의기를 세 겹의 원으로 갈라, 맨 가의 원에는 주천분도환, 가운데 원에는 일구백각환, 맨 안쪽에는 성구백각환 을 배치하여 만든 지름 68cm, 구리소재의 4개의 일시정시를 만춘 전, 서운관, 평안도와 함경도의 병영에 두었다. 주천분도환은 매도를 4분으로 나누어 주천도를 새겨 전체의 공전 을 쟀으며, 그 안의 일구와 성구의 백각환은 매각을 6분으로 하여 백각을 새겨 일구는 낮, 성구는 밤의 시간을 재도록 하였다. 이 밖 에 ‘소정시의’라는 휴대용 일성정시의도 만들었다. 1441(세종23, 45세) 역대의 사적 중 귀감이 될 사실을 엮은 책 치평요람(治平要覽) 세종은 정치에 있어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우리나라와 중 26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27
  14. 14. 국의 역대 사적 중에서 후대의 정치인들이 쉽게 볼 수 있도 록 ‘치평요람’편찬 을 명하여 정인지 등 집현전 학자들이 중국 주(周편)나라에서부터 원나라까지 의 역사와 우리나라 기자조선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간략하게 150권으로 편찬하였다. 1441(세종23, 45세) 우량 측정용 관측 장비 측우기(測雨器) 세종은 홍수에 의한 피해를 막기 위해 우량 측정에 의한 기상현상 파악을 기도 하여 비가 온 뒤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젖은 흙의 깊이, 우택을 재어보도록 하였지만 비가 오기 전의 건조한 토지 또는 습한지에 따라 같은 정도의 비가 왔 는데도 우택은 같지 않았으며, 실제로 측정하는 일에도 어려움이 있어 우택의 제도가 폐지되면서 측우기를 발명하였다. 측우기를 발명하여 관상감(觀象監) 과 각 도의 감영(監營)에 비치하고 우량을 측정하도록 하였으며, 측우기는 갈릴 레오(Galileo,G.)의 온도계 발명(1592)이나 토리첼리(Torricelli,E.)의 수은기압계 발명(1643)보다 훨씬 앞선 세계 최초의 기상관측 장비였다. 1442(세종24, 46세) 조선 초기 세종의 교지를 받아 김종서, 정인지 등이 만든 고려시대의 역사책 고려사(高麗史) 고려의 역사를 편찬하기 위한 시도는 고려 말부터 있었으나 완성하지 못하 고,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원년(1392)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정총(鄭 摠) 등 의해 시작되었다. 1395년 편년체(編年體)로 서술된 37권의 ;고려국사‘, 1438~1442년 사이 신개(申槩)·권제(權踶) 등에 의하여 ’고려사전문(高麗史全 文)‘이 완성되어 148년 주자소에서 인출하였지만 교정과정에서 역사기술이 공 정하지 못하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어 반포가 중지되었다. 그 후 세종은 149년 우찬성 김종서(金宗瑞), 이조판서 정인지(鄭麟趾), 호조참판 이선제(李先齊) 등 에게 개찬을 명하여 1451년(문종 1)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 2권, 열 전 50권, 목록 2권 등 총 139권의 ‘고려사’가 완성되었지만 바로 인쇄되지 못하 고 1454년(단종2) 10월 정인지의 이름으로 인쇄, 반포되었다. 1443(세종25, 47세)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訓民正音) 세종대왕이 1443년 창제한 훈민정음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로 정인지·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 현전의 8학자가 집필하여 1446년 9월 발간일을 명시하고 있어, 후일 한글날 제정의 바탕이 되었다. 훈민정음을 다른 이름으로 해례(解例)가 붙은‘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하며 1962년 12월 23일 국보 제 70호로 지정되었다. 1445(세종27, 49세) 목조(穆祖)에서 태종(太宗)에 이르는 6대의 선조들의 행적을 노래한 서사시·문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445년 4월에 권제(權制)·정인지(鄭麟趾)·안지(安止) 등 총 10권 5책 125장으로 만들었으며, 현존 하는 판본으로는 모두 목판본이나 초간본은 활자본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고판본 인 가람문고본·일사문고본과 규장각본이 있으며, 용비어천가는 한글 창제에 의해 이루어진 우리 문화사상 최초의 국문시가로서 신화를 노래한 숭고성을 이어 제왕운기(帝王韻紀)나 역대세년가(歷 代世年歌)등 영사시(詠史詩)의 전통을 이은 것이며 악장의 독자적 형식을 개척한 첫 작품으로 중요 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28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29
  15. 15. 年 1397.4.10 /1세 (양력 5.7) 1408. /12세 1412. /16세 1418. /22세 1419. /23세 1420. /24세 1421. /25세 1423. /27세 1426. /30세 1429. /33세 1430. /34세 1431. /35세 1432. /36세 1433. /37세 1434. /38세 1435. /39세 1438. /42세 1441. /45세 1442. /46세 1443. /47세 1445. /49세 1446. /50세 1447. /51세 1448. /52세 1449. /53세 1450.2.17 /54세 (양력3.16) 세종의 일대기 및 업적의 정리 태종의 셋째 아들로 한양에서 출생 충녕군에 책봉, 소헌왕후와 혼인 충년대군에 진봉 왕세자로 책봉 왕위에 오름 대마도 정벌 집현전의 기구 확장, 궁중에 설치 주자를 만들어 인쇄술을 개량 조선통보 화폐제를 창설 금화도감 설치 ‘농사직설’을 지어 전국에 배포 세법을 개혁하기 위한 공법을 만듦 아악보 이룩 ‘태종실록’ 편찬 광화문 설립 ‘향약채취월령‘ 편찬 ‘신찬팔도지리지’ 편찬 서북방면의 4군 설치(최윤덕) 혼천의 제작 의약서 ‘향약집성방’편찬 물시계 ‘자격루’ 만듦 ‘삼강행실도’ 편찬 동북방면의 6진 설치(김종서) 동활자 갑인자 만듦 앙부일구 제작 경복궁 안에 주자소 설치 ‘일성정시의’ 제작 ‘치평요람’ 편찬 우량 측정 관측 장비 ‘측우기’ 설치 ‘고려사’ 편찬 공법의 제정과 실시를 위해 설치한 전제상정소 ‘훈민정음’ 창제 ‘용비어천가’ 지음 훈민정음 반포, 정음청(언문청) 설치 ‘석보상절’ 편찬 ‘월인천강지곡’ 편찬 숭례문 개축 ‘동국정운’ 편찬 궁안에 불당 건립 동북방면의 6진 완성(김종서) 승하 1447(세종29, 51세) 조선 초기 세종이 지은 악장 체의 찬불가(讚佛歌)를 엮어 만든 책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왕명에 따라 수양대군이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보 상절(釋譜詳節) 을 지어 올리자 세종이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여 지은 노래로 지은이가 세종 으로 되어 있기는 하나 석보상절의 편찬을 도운 김수온(金守溫)등이 참여했 을 것으로 보이며, 1447년 또는 1450년경 강행 된 것으로 추정된다. 권상에 실린 노래가 모두 194곡으로 전체 590여 곡의 노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 며, 월인천강지곡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아울러 훈민정음으로 표기 된 한국 초고(最高)의 가사로 종교성과 문학성을 조화·통일시킨 장편 서사 시라 할 수 있다. 1447(세종29, 51세)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4가에 위치한 조선 초기 한양의 성문 국보 제 1호 숭례문(崇禮門) 1396년(태조 5)에 축조된 서울 도성의 정문으로 1398년 2월에 준공된 후 1447 년(세종 29)에 개수 공사하여 1443년(세종 30)에 개축 되었으며, 1961년부터 1962년 사이 실시된 해체 수리 당시 발견된 상량문에서 1479년에도 대대적 인 주수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0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31
  16. 16. 자격루의 비밀 이론적 배경 낮에는 해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시간을 추측했을 것이고, 밤에는 달이나 별이 움직이는 것 을 보고 시간을 가늠했을 것이다. 구름이 잔뜩 끼어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해와 별 의 움직임을 이용해서 시간을 알았다.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은 날씨에 매우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해와 별이나 달 등을 이용해서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을 사용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물이 계속 흐르면서 밤이나 낮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시간을 항상 알려줄 수 있는 물시계와 같은 국가 표준 시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옛날에는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주로 해시계와 물시계를 이용하였는데, 해시계는 해 그림자 로 태양의 위치를 파악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것으로 낮에만 사용할 수 있었고, 물시계는 물 의 증가량 또는 감소량으로 시간을 측정하기 때문에 24시간 작동이 가능 하였다. 또한, 조선 시대 왕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각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왕은 백성들에게 일어날 시각과 일할 시간, 쉬는 시간 등을 알려주어 일상생활의 리듬을 규제하 고 통제함으로써 사회생활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시계는 권위와 질서의 상 징이었고 통치의 수단이었다. 자격루의 탄생배경 세종대왕 시대 최고의 과학자라 할 수 있는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는 수압을 조절하는 3단의 수위 조절용 항아리, 낮과 밤을 번갈아 이용하는 두 개의 물받이 통 그리고 종과 북, 징과 같 은 자동 시보장치를 갖춘 물시계로서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자 격루가 발명되기 전, 세종대왕은 장영실에게 경점지기(更點之器)라는 물시계를 만들게 하 였는데, 그 구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장 아래에 있는 항아리에 일정하게 물이 공급되도록 한 다음 그 안에 눈금을 매긴 잣대(자 의 종류)를 띄우면 항아리 안의 물이 늘어나는 대로 잣 대가 떠오르는데, 이 잣대의 눈금을 읽어 시각을 알아낸 것이다. 하지만, 밤낮으로 사람이 지키고 있다가 눈금을 읽어야 하는 수정적인 물시계 이므로 매우 불편하였다. 세종은 사람이 눈금을 일일이 읽지 않고도 때가 되면 저절로 시각을 알려주는 물시계를 만들라고 지시하였고, 세종 16년(1434) 장영실은 ‘자동 시보장치’가 달린 물시계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자격루’다. 자격루를 탄생시킨 결정적 이유 자격루 이전에도 물시계는 많았다. 물시계는 유입식과 흡입식이 있는데 유입식은 물이 흘러 가는 양으로 시간을 아는 것이고, 흡입식은 물이 흘러들어오는 양으로 시간을 측정하게 된 다. 자격루는 이러한 흡입식과 유입식 기술이 모두 사용되었고 여기에다 자동적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까지 더해진 것이다. 이렇게 정확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궁궐에서 호위병들이 업무교대를 하거나 성문을 여닫 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즉 규칙적인 일상생활과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매우 중요 했기 때문이다. 국가적 필요로 인해 정확한 시계를 만들어 활용하였으며 많은 시간과 비용 을 들여 보다 정확한 시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자격루의 용도 이 시계는 도성의 성문을 열고 닫는 인정人定(통행금지 시각, 밤 10시경)과 파루罷漏(통금해 제 시각, 새벽4시경), 오정午正(낮 12시)을 알려 주는 데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울 사람 들에게 아침·점심·저녁때를 알려 주어 생활의 리듬을 잡아 주는 등 조선시대 사람들의 표 준 시계가 되었다. 자격루의 시각을 알려 주는 인형이 치는 종소리와 북소리를 듣고 이를 신 호로 광화문과 종루에서 북과 종을 쳐서 시각을 알렸으며, 이에 따라 궁궐의 문과 서울의 도 성문인 숭례문`崇禮門, 흥인문興仁門, 돈의문`敦義門이열리고닫혔다. 32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33
  17. 17. 자격루의 작동 원리 세종실록 65권 ‘보루각기‘편을 보면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던 잣대가 위로 올라가 정해진 눈금에 닿으면, 그곳에 있는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에 있는 쇠구슬을 구 멍 속에 굴려 넣어 주는데, 이 쇠구슬은 다른 쇠구슬을 굴려주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 러 공이를 건드려 종, 징, 북을 울린다.’라고 적혀있다. 자격루는 시간을 측정하는 물시계(물 항아리 부분), 물시계로 측정한 시간을 종, 북, 징소리로 바꿔주는 시보장치(종, 북, 징을 치 는 인형 부분), 물시계와 시보장치를 연결해주는 방목(方木)이라는 신호발생장치(2개의 네 모기둥/잣대)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큰 항아리의 물을 일정속도로 배수관과 작은 항아리를 거쳐 긴 원통형 항아리 안으로 흘려보낸다. 둘째, 원통형 항아리 속의 잣대가 위로 떠오르면서 항아리 벽에 놓인 작은 구슬을 건드리면 오른쪽 시보장치 상자로 굴러가 큰 구슬을 건드린다. 셋째, 큰 구슬이 상자내부에서 움직이면서 상자 위쪽의 인형이 종, 북, 징을 울린다. 2시간마다 울리는 종소리는 자시, 축시, 인시 등의 12지시를 알리고 북소리는 밤 시간 인 1경, 2경 등 의 5경을 알린다. 자격루의 핵심원리 자격루 작동 원리의 핵심은 물의 흐름을 동력원으로 사용하여 이 힘이 시간이 지나도 줄어 들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즉 물의 낙차를 이용해 생긴 부력으로 구슬이 움직이면서 계속적 으로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전환시켜 시간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손길 이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 잣대에서 떨어진 구슬을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는 일, 그리고 물 을 갈아주는 일은 모두 사람이 해야 했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물이 일정하게 흐르는 이유 자격루는 물 항아리의 크기에 따라 대파수호와 중파수호, 소파수호로 구분되는데, 이 세 곳 의 파수호를 거쳐서 나온 물이 수수호(긴 원통형으로 생긴 2개의 물받이통)에 일정하게 채 워지면서 수수호에 있는 잣대가 위로 떠오르는 구조로 되어 있다. 바로 부력의 원리를 이용 한 것이다. 자격루가 시계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수수호에 일정한 물이 채워지게 하 는 핵심 역할은 소파수호이다. 대파수호에서 물이 직접 수수호로 들어가게 되면 통에 채워 지는 물의 높이가 일정하게 변하지 않는다. 이는 수압이 물의 높이에 따라 다르기 때문인 것 이다. 대파수호와 수수호 사이에 소파수호를 두어 소파수호에 늘 물이 가득 차게 하여 물의 높이를 일정하게 만드는데, 이렇게 해서 수수호에 물이 일정한 간격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사람의 손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든 자격루지만 잣대에서 떨어진 구슬을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는 일과 물을 갈아주는 일은 모두 사람이 해야 했다. 하지만, 자격루는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발명품이며 조선의 물시계를 기계시계로 발전하게 하는 기술적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자동 시보장치의 비밀 파수호에서 떨어진 물이 수수호로 흘러들어 가면서 수수호에 꽂힌 잣대가 점점 올라가게 되 는데 잣대가 어느 정도 높이에 이르게 되면 잣대 안에 있는 구리판 구멍의 여닫이 기구가 뒤 로 젖혀지게 된다. 그 구멍으로 잣대의 작은 구슬이 자동 시보장치와 연결된 구리통으로 굴 러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 구리통으로 굴러 들어온 작은 구슬이 밑으로 떨어지면 그 아 래에 있던 숟가락 받침 모양의 기구가 이 구슬을 받게 된다. 즉 작은 구슬이 숟가락에 떨어 34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35
  18. 18.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 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신비로운 문자 라고 알려져 있다. 지면 그 구슬이 떨어질 때의 에너지 때문에 숟가락 손잡이 부분이 뒤로 젖혀지게 되고 차례 로 큰 구슬이 굴러 떨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반복하면서 큰 구 슬은 2층에 세워져 있는 3개의 인형의 팔뚝을 건드리게 되고 자동적으로 3개의 인형의 팔이 움직이면서 종, 북, 징을 치게 된다. 쉽게 말해 우리 주변에 있는 뻐꾸기시계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격루의 가치-자격루의 과학성 1. 뛰어난 금속 주조술 자격루는 오래 쓸 수 없는 나무나 가마에서 구울 때 변형이 올 수 있는 도자기, 옹기 등으로 는 만들 수 없다. 때문에 자격루를 구성하는 물통, 쇠구슬, 시패, 부전, 등은 모두 쇠이다. 자 격루의 여러 부품들은 표면이 매끈하고 정확한 치수로 만들어야 했는데, 이것은 당시 우리 나라의 금속 주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준다. 2. 시대를 앞선 정밀 기술 자격루는 불어나는 물의 높이를 측정하여 하루 12시간과 밤 시간인 오경(五更)을 자동으로 알려 주는 자동화 시스템이다. 물시계와 자동 시보 장치(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장치)를 하나로 합친 기술이 오늘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밀하다. 자격루의 기술적 가치 자격루의 시간을 천체를 관측하여 얻은 시간과 비교해 보면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 다. 이것은 나무사람이 종, 북, 징을 쳐서 각각 시(時), 경(更), 점(鮎)을 알리고 시를 알리는 팻말을 들고 시의 경과를 알려주는 자동보시장치가 붙은 시계였다. 궁궐과 도성에서의 정사 (政事)와 일상생활은 모두 이 시계가 알려주는 시각에 따랐으며, 시각을 분(分)단위까지 잘 게 쪼개어 정확성을 기하고 천문역구에도 활용했다. 자격루의 역사적 가치 보루각자격루는 창경궁에서 조선 말기까지 쓰였으며 유물은 1938년에 현재 보관중인 덕수 궁 광명문안으로 옮겨 왔으며 1985년 8월 3일 국보 229호로 지정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 유물은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만 원권 지폐의 도안으로 올라 있으며 우리의 과학 문화재 이자 세계적으로도 몇 개 남지 않은 귀중한 유물이다. 한글창제의 비밀 훈민정음의 창제동기와 목적 말과 글이 달랐던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한자를 문자로 사용해 왔다. 입으로는 ‘어머니’, ‘엄 마’라고 하면서 글로는 ‘母’라 쓰고, ‘모’라 읽었다. 이런 불편함을 덜기 위해 이두 문자를 사 용하기도 했지만, 이것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문자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는 없었다. 더 욱이 농민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사회의식이 성장함에 따라 지배층은 그들과 직접적이 고 공식적인 문자를 통해 의사를 소통할 필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일반 백성들에 게 어려운 한자를 익히고 사용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또한, 주위의 민족들은 저마다 사용하는 자기 나라 글자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한문글 자를 빌려 사용하였음에도 우리말을 적는 것은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정인지의 표현 을 빌리면 “우리말을 적는 방법이었던 ‘이두글(吏讀文)’은 잘 통하지 않고, 품위와 체계가 없 어 상고할 길이 없다.”라는 것을 보아 일반백성의 글자 생활은 극도로 빈곤상태에 있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36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37
  19. 19. 훈민정음의 과학성 한글의 가장 큰 특징은 소리와 글자의 상관관계를 생각해 만든 글자라는 것이다. 즉, 영어 의 'City'는 ‘시티’보다는 ‘시리[Siri]'라고 발음이 되며 ’gentleman'은 통상 '제느먼[ʤénmən]‘으 로 발음된다. 이것은 t라든가 r, n은 같은 어군이라 서로 음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영어 글자들은 그 생김새에 아무 유사성이 없어 다 따로 외워야 한다는 단점이 있 다. 그러나 세종께서는 이 글자들이 모두 혓소리(설음, 舌音)에 속한다는 것을 아시고 같은 군에 모아두었다. 즉, ‘ㄴ·ㄷ·ㅌ·ㄸ(ㄹ은 반혓소리)’이 글자의 형태들을 유사하게 만든 것 이다.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한글에 경탄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런 과학적 원리에 따라 한글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ㄱ’은 ‘기역’ 혹은 ‘그’라고 발음할 때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이다. 이것은 다른 글자도 마찬가지다. ‘ㅇ'같은 경우는 목구멍의 모습을 본 뜬 것으로 외울 필요가 없으며, 한 시간 안에 자기 이름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아 배우기 쉽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첫소리 글자를 만든 원리 한글이 어째서 이런 모양으로 만들어졌는가에 대하여는 많은 논란이 있어왔으나 해례가 나 타남으로써 그 원리가 밝혀졌다. 그때의 언어학자들은 닿소리(초성)를 내는 자리에 따라 다 섯 가지로 나누었으니, 혓바닥의 뒤쪽을 여린입천장에 붙여 내는 소리를 ‘어금닛소리’라 하 고, 혀끝을 잇몸에 붙여 내는 소리를 ‘혓소리’, 입술에서 나는 소리를 ‘입술소리’, 공기가 이 끝에 닿아 부스러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소리는 ‘잇소리’, 목 안에서 나는 소리는 ‘목소리’ 라 하였다. 이 다섯 가지 소리 가운데서 한 소리씩을 가려, 그 소리를 적는 글자 다섯을 만 들었다. 1. 어금닛소리 - ㄱ, ㅋ, ㆁ 음소들인데, 그 가운데서 / ㄱ 음소를 적는 글자를, 그 소리 낼 때 의 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2. 혓소리 - ㄴ, ㄷ, ㅌ 음소들인데, 이 가운데서 / ㄴ 소리를 적는 글자를, 역시 같은 원리를 따라 만들었다. 3. 입술소리 - ㅁ, ㅂ, ㅍ 인데, 그 가운데서 / ㅁ 소리를 적는 글자를, 입술 모양을 본떠 만 들었다. 4. 잇소리 - ㅅ, ㅈ, ㅊ 음소들인데, 그 가운데서 / ㅅ 소리 적는 글자를, 이의 줄을 본떠 만 들었다. 5. 목소리 - ㅇ, ㆆ , ㅎ 음소들인데, ‘ㅇ’은 소리 없는 글자이나 목구멍에서 나는 어떠한 소리 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ㄱ ㄴ ㅁ ㅅ ㅇ ‘의 다섯 글자를 만들어내고, 다음으로 는 소리가 세어짐에 따라, 이 다섯 글자에 다가 획을 하나씩 더하여 아홉 글자를 만들었다. 가운뎃소리 글자를 만든 원리 닿소리는 모두 입안의 어떠한 자리에서 특별한 막음이 있으므로, 그 막음의 방법과 자리를 지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러한 음성기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서 닿 소리(첫소리) 글자를 만들었다. 홀소리(가운뎃소리, 중성)는 입안에 아무런 막음이 없고, 혀 의 모양에 따라 여러 가지 홀소리가 나누어지는데, 이것을 그려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 니었다. 현대음성학에서 혀의 이러한 모양을 잡을 수 있는 것은 x-선 사진에 의해서이므로 한글을 만듦에 있어서 닿소리 글자보다 홀소리 글자를 만드는 것에 더 큰 힘이 들었다는 것 을 짐작 할 수 있다. 소리의 높낮이 지금 우리말의 표준발음은 소리의 길이만 있고, 높낮이는 없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각 낱말 의 각 음절은 높은·낮음·높아감의 세 가지 높낮이를 일정하게 가지고 있었는데, 낮은 소 리는 평성(平聲)으로 점을 찍지 않고, 높은 소리는 거성(去聲)으로 글자의 왼쪽에 점을 하나 ▲글의 자음과 모음을 쓰는 법 38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39
  20. 20. 찍고, 또 낮다가 높아지는 소리는 상성(上聲)으로 점을 둘 찍도록 하였다. [예: 활(平),·갈(거), : 돌(상)] 글자와 소리의 형이상학 한글을 만든 이들은 사람의 소리나 글자까지도 단순한 물질적인 현상으로 보지 않고, 그 뒤 에 보이지 않는 원리가 있다고 보았다. 그 원리는 음양과 오행(五行)을 말한다. 그리하여 사 람의 말소리가 음양과 오행에 ‘근본을 두고 있고, 우주의 모든 현상이 또한 그 원리에 따라 운행되는 것이므로, 소리와 계절의 운행, 소리와 음악의 사이에 일치점이 있음은 당연한 일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소리를 오행에다 결부시킨 이유 중 하나를 설명하면, 한 방 면으로는 그 소리가 나는 자리, 곧 목구멍·어금니·혀·이·입술 자체의 성질이 각각 물· 나무·불·쇠·흙과 비슷하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목구멍은 깊고 윤택하고, 어금니는 착 찹 하고 길고, 혀는 날카롭고 잘 움직이고, 이는 단단하고 부러지고, 입술은 모나고 합해져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발성 기관의 모습을 본 따 만든 자음 한글의 자음에서 기본 되는 것은 ‘ㄱ·ㄴ·ㅁ·ㅅ·ㅇ’인데 국어 교육이 잘못되어서 그런 지 이것을 아는 한국인은 별로 없다. 자음은 이 다섯 글자를 기본으로 획을 하나 더하거나 글자를 포개는 것으로 다른 글자를 만들었는데, ‘ㄱ·ㅋ·ㄲ’이다. 그래서 앞 글자 다섯 개 만 알면 다음 글자는 그냥 따라온다. 이것은 다른 글자도 마찬가지이며, 그런 까닭에 배우 기가 아주 쉬운 것이다. 훈민정음의 역사적 의의 역사적 의의 인류의 역사는 언어의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 전의 우리나라에도 언어의 기록이 없지 않았다. <삼국지>나 <삼국유사>는 말할 것도 없으며, 많은 비석문들과 개인의 문집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록들이 있다. 한 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어놓은 기록들도 있지만, 이러한 기록은 우리 한아버지(할아버지)들의 살아온 모습을 전해주기에는 부족하 였다. 언어는 그것을 모국말로 하여 자라는 겨레의 생각하는 방식을 좌우하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 그런데 한문은 그 어휘체계나 문법체계에 있어서 중국말이지 우리말은 아니다. 그 러므로 우리 한아버지들에 대한 한문으로 된 기록은 바로 우리들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 이 아니라, 중국 사람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말을 한자로 적은 기록들은 그 양이 아주 적을 뿐 아니라, 그것마저 기록 당시의 언어를 복원하기는 무척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므로 훈민정음 창제 이후부터 우리 할아버지들의 기 록이 우리 눈에 비치게 된다. 한글날 일본침략자들이 이 땅을 짓밟고 있었을 때 우리말과 우리글을 쓰는 것을 총칼로 누르는 ‘어 문말살정책’을 썼다. 그러므로 그때의 우리 겨레는 우리말 쓰는 것이 민족정신을 가다듬는 한 방편이었고, 우리글을 쓰는 것을 일종의 독립운동으로 여겼던 것이다. ▼훈민정음 어제 서문, 백성을 위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의 뜻 40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41
  21. 21. 창업을 완성한 리더 세종대왕 조선 왕조의 창업을 완성한 임금은 누구인가? 세종 시대는 흔히 조선왕조 수성(守成)의 시기’라 일컫는다. 그것은 태조·태종 대의 혁명과 건국이 라는 시기를 거쳐 세종대에 이르러 정치나 사회운영이 안정화되었던 점을 두고 해석하는 관점이다. 그렇지만 창업의 개념을 혁명과 건국이라는 정치적 틀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고려와의 차별성을 강 조하였던 조선 왕조의 정체성 정립이라는 폭넓은 관점에서 살피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 반에 걸쳐 조선 왕조 성립의 창업은 비로소 세종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세종 스스 로가 자신을 ‘수성’의 임금으로 자처하고, 그것을 소명으로 삼았던 것은 조상에 대한 겸손과 예의에 의한 것이었다. 선대가 이루어 놓은 일을 이어 지키는 ‘수성’의 군주에 머물지 않은 조선 왕조 창업 의 진정한 완성자였다고 할 수 있다. 세종의 성공 리더십의 2가지 비밀? ① 현능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인재경영’ ②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국사(나랏일)를 기획하는 ‘지식경영’ 『어진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재능 있는 이를 부리며, 나랏일을 도모할 때는 반드시 옛 것을 스승 삼 았으며, 제도를 밝게 구비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물을 들면 그물눈이 저절로 열렸습니다.』세종 실록 32/2/22. 이와 같이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 리더십의 2가지 비밀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어진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재능 있는 이를 부리며’ 부분에서는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에 게 일을 맡기는 ‘인재경영’을 하였다는 것과, ‘나랏일을 도모할 때는 반드시 옛것을 스승 삼았으며, 제도를 밝게 구비해 놓았습니다.’ 부분을 통해서는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나랏일을 기획하는 ‘지식경영’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능한 인재들이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화야 말로, ‘그물을 들 면 그물눈이 저절로 열리는’ 국가 경영의 핵심임을 말해주고 있는 부분이다. 인재경영의 대표적인 일화로 ‘박연’을 들 수 있다. 세종이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조부와 부친의 영향으로 문과시험을 준비하던 박연과 대화하던 중, ‘조선의 음악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 올 리고 싶은’ 그의 비전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에게 오로지 음악을 맡아 주관하게 하였다. 또한 세종은 장영실의 비전을 발견하고, 그 비전에 힘을 실어주곤 했다. 노비신분의 장영실이 자신 의 탁월한 손재주로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후손에게도 널리 전달될 발명품)”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을 알게 된 세종은, 그에게 오로지 “그 일을 하라”라고 지시하여, 역사에 길이 빛나는 성과를 내 게 하였다. 1434년(세종16)에 자격루가 완성되었을 때도,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만, 만 약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 이라며 장영실에게 그 공을 돌렸다. 세종 은 이처럼 인재들의 비전을 발견해주고, 그를 실현시키도록 도와준 진정한 리더였다. 지식경영의 대표적인 사례로 까다로운 문제가 생길 때면 세종은 늘 집현전 학사를 부르곤 했다. 세 종에게 있어서 집현전은 일종의 ‘인터넷 지식검색’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집현전의 기능은 ‘지식검 색’에 그치지 않았다. 화폐, 소금 제도의 연구, 외교용 문장짓기와 특정 정책의 근거 제시, 그리고 국가에 필요한 서적 간행 등의 일을 하는 세종 정책의 ‘브레인 역할’까지 한 것이다. 세종은 정책결정을 신중히 하려면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늘날 사람들이 고민 하고 있는 문제들과, 구상하고 있는 정책들은 대부분 역사 속에 들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제 때 적절한 사례를 찾기만 하면 훨씬 더 지혜롭게 판단하고 효과적으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고 생각 하였다. 따라서 ‘세종실록(15/02/06)’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즉시 거행할 일을 사람들이 혹 기억하지 못하여 시기를 잃는 경우가 있다. 저번에 내가 집현 전으로 하여금 날마다 행할 일을 뽑아 적게 하였으니,그대들은 옛 문헌을 자세히 참고하여 빨리 발 췌하여 아뢰라.』 42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43
  22. 22. 세종이 보기엔, 역사란 ‘정치적 임상실험의 축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잘잘못을 알지 못하 면 현재의 문제에 관하여 현명한 판단이나 지혜로운 결정은 어렵다고 생각하였고, 중요한 결정을 내 릴 때 마다, 집현전 학사들에게 “옛 제도를 상고하여 아뢰라” 라고 지시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세종 리더십의 2가지 비밀인 인재경영, 지식경영 덕분에 세종 시대에 많은 성과들이 탄생하였다. 이는 세종이 황희·허조 등의 충신들과 충분한 의논을 거쳐의사결정을 내린 다음, 김종서·박연· 장영실·최윤덕 등의 인재들에게 일을 믿고 맡겼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가의 일을 자기의 책임으 로 여기며’ 헌신적으로 일하였고, 그 결과 북방영토개척, 한글창제와 같은 굵직굵직한 업적들을 이 뤄낼 수 있었다. 제도화와 관련해서는, ‘오례의’(가례, 빈례, 군례, 흉례, 길례)라는 국가의식의 틀을 정립하였으며, 세제를 개혁하여 ‘전분6등 연분9등의 공법’으로 자리 잡게 한 것도 높게 평가 받고 있 다. 후에 율곡 이이가 ‘우리나라 만년의 운(運)이 세종에게서 처음 그 기틀이 잡혔다.’ 라고 평가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이다. 세종의 창의적 리더십은? 창의적 리더십을 가진 세종대왕 세종의 창의적 리더십은 실질과 실용을 숭상한 바탕에서 발휘되었다. 독서와 지적역량 세종은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여러 제도를 연구하고 세부사항을 규정하기에도 사서를 뒤져 확립해 나갔다. 세종의 개인적인 지적능력 역량은 대단하였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책을 읽어대던 호학의 군주였다. 세종의 독서는 유학의 경전에 그치 지 않고 역사, 법학, 천문, 음악, 의학의 다방면에서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쌓았다. 경서를 100번씩 이나 읽었으며, 역사서와 기타 다른 책들도 30번씩 읽었다고 한다. 세종은 작은 법규를 만들 때도 그 제도에 대한 역사를 깊게 고찰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분석한 뒤 그 단점을 보완하는 방안, 다른 제도 와의 관련성, 현재의 상황을 고려했다. 세종은 뛰어난 기억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사리를 명확히 분별하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음(音)에 대 해서도 놀라운 역량을 타고났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종은 자기절제와 인내가 몸에 배어 자신을 다스림에 뛰어났다. 평생학습, 평생수양을 실천하고 실용을 위한 학습보다 먼저 긴요한 것이 바로 마음을 공부하는 것 이다. ‘마음공부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하며 당시 젊은 사대부들에게 ‘어떻게 하면 선비들의 부화한 버릇을 버리게 할까’를 묻기도 했다. 세종은 스스로 엄청난 분량의 공부를 하고, 집현전을 통해 통 합적 지식을 축적해 냈다. 이러한 그의 천재성은 한글의 창제, 아악정비, 역법개정과 과학적 발명의 과정 등에 직접적으로 영 항을 미쳤다. 애민정신 세종이 왕위에 오른 15세기는 창업을 마무리하는 시기였고 국가 경영을 맡은 세종의 경영은 현대적 용어로 해석하자면 경영을 창조의 과정으로 격상시켰다고 할 수 있다. 글을 몰라 답답한 백성들을 위해 애민정책을 펼치고, 자신의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소통과 논쟁과 연구를 했던 통 치자이다. 그가 했던 ‘임금은 백성을 위하여 존재하며 백성의 하늘은 밥이다. 한명의 백성이라도 하 늘처럼 섬기고 받들어라’라는 말은 헌신적인 세종의 정치 핵심이었다. 또한 그의 의견을 관철시키려 반대자들과 토론 속에 설득과 협상, 투쟁의 와중에 합의와 결정으로 이끌어내는 리더십을 가졌다. 문예감성 세종은 공부를 좋아하며 그림, 글씨, 음악, 원예등을 두루 경험하였다. 남다른 문예감성을 지녀 그간 의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리더십의 근간이 되었다. 또한 세종의 연회는 외교사신을 위한 자리로 이 어짐에 따라 문화외교의 격을 높이는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세종이 연회 자리에서 효와 우애를 실천하는‘본’을 보이고, 군신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마음을 얻었으며, 신하들을 격려하여 임금과 나라를 위해 일하는 보람을 누리게 함으로써 ‘열정’과 ‘창조’를 이끌어 냈다. 세종은 ‘연회’를 감성 경영의 방법으로 활용한 것이다. 소통과 인재경영 세종은 신하들과 더불어 토론을 즐기고, 이를 통해 소통의 길을 열어 나갔다. 경연(經筵)이라는 공 식적인 토론의 장을 통해서도 신하들과 많은 의견을 나눴지만, 평소에도 문제가 있을 때마다 관련 44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45
  23. 23. 된 신하들에게 주제를 주어 자료를 조사하고 다른 여러 사람들의 의견도 널리 묻도록 하였다. 수많 은 사안들에 대한 의견을 구하고 신하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의견을 채택해 힘을 실어주었 다. 지적 권위를 가진 사람이 빠지기 쉬운 오만과 독선이 없었다. 세종의 소통은 전체의 지혜가 더 훌륭한 것이라는 판단을 가지고 있었고 특별히 세종의 경청능력은 경이로운 수준이며, 소통의 출발이 된다는것을 세종께서 몸소 보여주셨다. 세종은 느리더라도 끝까 지 해내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일관된 추진력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특징은 신하들의 반대를 극복해내는 설득과 타협, 소통을 통해 결국 자신의 일로 받아들 이고 스스로 참여하게 만드는 포용적인 실천력을 갖추었다. 세종때에 이루어진 성과들이 어느 하나 단기간에 쉬이 해치울수 없는 것들이었는데도 그 많은 것들을 이룬 배경에는 이러한 설득력과 실 천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해 우리의 말과 글을 정립했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북방경계를 넓혔 으며 정간보를 만들어 우리의 노래를 기록하게 했으며, 중국도 부러워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아악 을 정비해서 15세기 동아시아 최고의 문명국으로 격상시켰다. 여러 명의 국왕들의 업적을 다 합쳐도 모자랄 만큼의 큰 공적은 세종시대에 모두 이룰 수 있었던 핵 심역량이 바로 ‘인재경영’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은 인재를 얻기 위해 신분, 절차를 초월하고 착한 마 음가짐을 중시 여겼다. 세종은 집현전의 연구기능을 확대해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등 당대의 수재 들에게 연구 분담시켰다. 이렇게 해서 윤리, 농업, 지리, 측량, 수학, 약재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편 찬하고 관료, 조세, 재정, 형법, 군수, 교통 등에 대한 제도들을 새로 정비했다. 전문가들과 어우러져 같이 연구하고 토론하며 답을 찾고 시행착오를 바로잡아 가는 것이 세종의 인 재활용 방식이었다. 창조의 방향을 설정하고 과제를 내리는 것은 항상 세종의 몫이었다. 어떤 사안을 시작하거나 그 결과를 보고 받을때면 ‘이것이 백성에게 유용한가’를 물었다. ‘지킬 수 없는 법은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고 하며 실용적 법제정과 실행에 초점을 두었다. 또한 전문가를 적 극적으로 활용하여 창조의 본성이 흐르도록 하기 위해서 세종은 귀천을 따지지 않고 적절한 보상을 제공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는 바로 장영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이끌어 감에 있어 성취한 만 큼의 보상을 제공하는 것은 창조 리더의 가장 기본적인 소임이라 할 수 있다. 핵/심/가/치/ 1. 세종대왕은 조선 왕조 500년을 통해 가장 뛰어난 임금으로서 재위31년 동안 학문의 전당인 집현전을 열어 나라의 지식경영 을 장려하였으며 집현전에 학식이 깊은 학자들을 많이 등용해 그들의 도움으로 훈민정음을 창제, 반포하여 수많은 백성들에 게 글을 깨우치게 하였다. 2. 인재경영으로서 박연으로 하여금 음률을 새롭게 단장하는 아 악의 정리를 함으로써 오늘날의 국악의 시초를 만들었다. 3. 다른 나라에 비해 미흡했던 천문 기상에 관한 많은 발명 및 창안을 하게 함으로써 군주로서 백성들의 애민에 우선가치 를 두었다. 4. 세종대왕은 측은지심을 가지고 백성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으며 백성들을 위한 정치와 리더십을 펼쳤다. 5. 세종대왕의 타고난 인품과 더불어 남다른 다방면의 학습을 통 하여 독자성, 자주성을 추구하였다. 46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47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47
  24. 24. Q. 세종대왕은 어떤 스타일의 리더였나요? A. 세종이 지향한 리더십의 특징은 조선의 독자성, 그리고 독 창성이었습니다. 즉, 중국의 제도와 문화를 그저 따르는 조선 이 아니라 우리의 것을 창출하려는 독창성, 독자성을 세울 수 있는 그런 리더십이었으며, 중국에서 벗어나 조선의 것을 찾으 려고 했던면에서 창업형의 스타일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 다. 바로 한글이 이러한 특징에서 나온 결과물이죠. 또한 세종 시대에 중국의 어떤 음악을 가져와 우리의 형태로 재창조하는 모습들을 보면, 세종은 어디 것을 받아와서 일방적 으로 모방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와서 우리 것 으로 만들어내는 창조적 스타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세종대왕에게서 한국의 세계화의 실마리를 찾다 그런데 세종의 이러한 리더십이 오늘날 아주 중 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20세기 후반 개발도상국이던 한국은 외국의 기술과 문화를 모방하거나 로 얄티를 주면서 받아들이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와, 그것도 아날로그시대에서 디 지털시대로 바뀌는 시대적 전환기에 우리의 기술과 문화를 창조해 나가고 있습니다. 삼성이 처 음엔 소니에게서 배웠지만, 소니를 능가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이처럼 21세기에는 우리 의 것을 창출하여 세계화를 시켜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조선 문화의 창달’을 이룩한 세종의 리 더십은 한국의 미래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다시금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종에게서 ‘한국 의 세계화’라는 실마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죠. Q. 세종이 이런 리더십을 갖게 된 특별한 노력이나 계기가 있었나요? A. 세종은 중국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세종이 글을 좋아한다 해서 학문을 열심히 갈고닦은 군주로 알려져 있지만, 세종은 단순히 학문을 좋아하는 군주가 아니라 학문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자 노력한 군주였습니다. 그에 게 학문은 리더십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문적인 틀도 다른 사람들과 달 랐습니다. 그 무렵 조선시대를 이끌던 지식인들은 경전만을 강조하였는데, 세종 은 신하들이 꺼려하고 경계하던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며 다양한 분야를 접 하려 노력했던 것입니다. 세종은 신하들보다 더 뛰어나기 위해 학문에 매진했으며, 그러한 정신력과 지력 으로 신하들을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공부뿐만이 아니라 경세와 치론도 세종에게 굉장히 중요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세종의 학문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당시대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개척적인 모습이었 습니다. 기존의 틀에 얽매이는 것은 한 분야에 전문가는 될 수 있어도 전체를 아 우를 수는 없다는 것을 세종은 알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방면에 관심 을 가지고, 또 연구했기에 새로운 영역의 창조도 가능했을 것이며, 이것이 ‘세종 대왕 리더십’을 만든 것이 아닐까요. Q. 그렇다면 세종이 특별히 기존분야 외에 관심을 가졌던 분야가 있나요? A. 네. 바로 불교였습니다. 유교사회에서 권력의 가장 핵심에 있던 세종이 불교 에 강한 신념을 보였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죠. 하지만 왜 그렇게 불교에 신념을 보였는가에 대한 해석이 정작 심도있게 다루고 있지 않으며 단순히 그냥 개인적 인 구원, 그런 차원에서 접근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유교 왕조의 군주가 심취한 불교 우리의 역사를 크게 구분한다면,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넘어오는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삼국시대 이래 고려에 이 르는 동안 1천년 이상을 불교국가로 유지해 오다가 조선시대가 열리면서 유교국 가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왕조 교체에 그치지 않는 것이었습니 다. 역사에서는 일반적으로 고대·중세·근대로 시대를 구분하지만, 고려에서 세종대왕에 대한 전문가 재평가 전문가 재평가 (인터뷰) 장석흥 국민대 교수 48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49
  25. 25. 조선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그와 같은 대변화는 분명 시대구분의 획을 긋는 것이 었습니다. 조선은 고려를 부정하고 역성혁명을 통해 일으킨 나라였습니다. 때문 에 새로운 명분과 가치를 세우고 일으켜야만 했습니다. 조선은 지배이념은 물론 사회·문화 분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일신시켰습 니다. 그 바탕에 는 유교적 이념이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당연히 배불정책도 추 구되었습니다. 유교적 이념에 의해 의례가 정립되면서 사회 관습도 달라지고, 심 지어 옷차림과 생활 풍습 등도 조선시대에 와서 크게 바뀌어졌습니다. 유교적 이 념에 의해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고려 때만 해도 복색(服色)이 잡색이었으나, 조선에 와서는 무명이 일반화 되면서 ‘백의민족’이라는 말도 나오 고, 모든 의식 자체가 불교적 사고에서 유교적 사고로 전환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을 흠모하는 중화주의까지 나타나게 되 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시대적 전환기에서 세종이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 신 앙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길에서라 도, 가능하다면 구래의 것도 아우르려는 세종 특유의 철학과 리더십 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즉 소통과 융합의 리더십이 무엇인가를 그대로 보 여주고 있는 것이다. Q. 그런데 왜 한글이 창조된 후 바로 널리 사용되지 못했을까요? A. 제가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했던 많은 고민들 중, 풀지 못하는 고민 하나있 습니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 문자를 그렇게 오래도록 빌어서 썼는가.” 사실 우리가 우리 문자를 쓴 건 100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전까지 말은 중국 말이 아닌 우리 말을 사용하지만, 말의 표기는 중국 문자를 빌어 쓰고 있었던 것 이죠. 중국 말과 우리 말은 어순도 다르고 문법도 다른데, 우리 생각과 말을 중국 문자로 글을 쓰려고 하니, 잘 쓸 수가 있었겠습니까. 마치 우리 말을 영문자로 표 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생각이나 표현을 어쩔 수 없이 말보다 문자에 의존하게 되고, 문자에 의존하다보니 중화의식을 가지게 되고, 결 국 이것이 ‘조선의 정체성’까지 잃어버리게 만든 것이죠. ‘문명국가인데 왜 문자를 중국문자를 빌어다 썼는가?’ 라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 답해야 할까요? 세종대왕은 그 해답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문자는 있었지만 우리는 사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세종이 500년을 살았으면 반드시 쓰게 했을 텐데 말이죠. 세종이 죽은 뒤 다시 반동적인 모습으로 돌아갔고, 유교중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세종이 그런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글 창제 를 하기 위해 신하들과의 권력 싸움에서 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그 뒤 에 임금들은 신하들의 권력싸움에 밀리고 말았고, 결국 한글 사용은 뒤처지게 되었 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밀렸을까요? 바로 신하들이 갖고 있던 강력한 파워, ‘ 중국을 빌어다가 임금의 권위’를 눌렀기 때문입니다. Q. 세종이 추구했던 융합에 대해 오늘날의 관점으로 재평가 해보자면? A. 오늘날 화두가 되는 융합의 관점에서 볼 때, 세종은 한국의 역사적 리더가운데 가장 다양하게 융합을 추구하였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세종은 문명과 문화의 발명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세종대에 쏟아져 나왔던 다양한 창조물은 바로 융합의 산 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물들은 지금까지도 또 앞으로도 우리의 자랑과 보물이 되고, 미래 지향적 지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랑스러운 세종대왕의 후손, 싸이(PSY) 우스개소리로, 저는 싸이(PSY)가 세종의 융합적인 역량을 물려받은 대표적인 후 손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싸이가 더 떴 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싸이가 이 렇게 세계적인 인물이 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한류가 뜨고 있 는 것을 좋아하고 있는데, 한류의 역사적 50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51
  26. 26. 인 근원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을까요? 싸이 개인이 잘나서? 아니면 SM이나 JYP 들이 먼저 깔아놓은 멍석이 있어서 그 위에서 싸이가 꽃 핀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SM이나 JYP는 그판에 점입하는 길을 만들 어줬을지는 모르나 싸이가 세계를 사로잡은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는 ‘ 흥, 서양의 리듬과 다른 한국적인 리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것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결국에 싸이 같은 인물은 ‘한국적인 정서 그리고 서양문화가 결합’ 되어 나온 것이며, 자연스럽게 문화가 창조된 것입니다. 1960~70년대는 기타를 치며 비틀즈를 흉내 내는 ‘흉내문화’에 익숙했었지만, 30년 ~40년 흐른 지금, 우리는 받아들인 他문화에 ‘우리 것’을 접목시켜 세계화를 이루 어낸 것입니다. 그런 한류의 역사적 원류가 세종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세종은 중 국 문화를 수용하는 가운데 그것에 함몰하지 않고, 조선의 고유와 독창성을 이룩 해 낸 인물이었습니다. 세종이 중국을 열심히 공부한 것은 중국문화를 체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것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유구한 우리 역사에서 세종 은 누구보다 창의성이 왕성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 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으며, 세종의 리더십을 ‘한국의 세계화’를 여는데 뿌리로 삼아야 할 것입니 다. 세종은 한국 뿐아니라 세계적 지도자로서도 충분히 자랑할 만한 인물입니다. Q. 그럼 마지막으로 세종대왕의 리더십은 무슨 ‘유형’이라고 평가할 수 있나요? A. 세종은 소통을 통해 융합을 이루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창의를 이끌어낸 ‘융 합 창의적’ 리더였습니다. 세종은 기존의 틀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문화를 창조해 나갔습니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뛰어 넘어 신하들의 학문을 권면하고, 대화를 통해 가치를 창출해 나갔습니다. 때론 신하들과 격론을 벌이는 일도 있었지만, 세종은 그것마저 소통의 길로 이끄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습 니다. 세종의 창의는 그와같은 소통을 융합하여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즉 소통을 통한 ‘합의’가 아니라, 융합 차원으로 발전시켜 창의에 도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Q. 융합적 관점에서 세종대왕의 리더십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신다면? A. 우선 최근 화두되는 융합이란 무엇인가? 저는 융합이 란 물리적 변화가 아닌 화학적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수 소(H)와 산소가(O2)가 만나 전혀 새로운 물(H2O)이 탄 생하듯이, 융합적 관점은 종래의 것이 일정한 과정을 거 치면 새로운, 꼭 필요한 것을 만드는 창조의 요소인 것이죠. 그렇게 만든 사람들을 융합적 리더십이라고 해석해 본다면, 세종은 이질적인 인재를 데리고 화학적 변화 를 일으켜 그 시대에 요구하는 것들을 만들어 낸 전형적인 융합적 리더였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시대가 조선이 건국된 지 30~40년 밖에 안 지난 시점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 도적인 문제점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도량형·무기 제조·한글창제’와 같 은 문제점들이었는데요,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요소를 엮으 려고 만든 것이 바로 집현전이었습니다. 집현전과 같은 대표적인 ‘씽크 탱크(Think Tank)’의 인문학자들과 자연과학자들을 모아 각각의 특성을 완전히 변화시켜 새 로운 성과를 내게 하였기 때문에 저는 세종이 융합적 역사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Q. 세종대왕은 소통형, 창조형, 도전형 중 어떤 유형의 리더인가요? A. 세종은 창조형 리더입니다. 창의(Imagination)와 창조(Creation)는 다른 것인데 요,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상상(Imagination)한 다음, 리더의 기질을 발휘하여 만들 어 내면 창조(Creation)가 되는 것이죠. 소통의 미덕을 갖춘 창조형 리더 또한 세종은 단순히 창조형 리더였을 뿐만 아니라 ‘소통’하는 리더이기도 하였습니다. 장영실(측우기, 혼천의, 자격루 제작)이나 정인 지(훈민정음 창제 협찬), 이순지(달력 제작)와 같은 인재들의 의견을 듣고 공감하 여 힘을 실어 준 것이 창조적 성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종 때 ‘소통’이라 함은 조금 특별했습니다. 박현모 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 52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53
  27. 27.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그 당시 말로 ‘사마하다’가 소통이란 의미로 통했으며, 리더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제시 한 후 그 것이 왜 옳은지, 왜 필요한지를 마음에 사무치게 전달하는 뜻을 가 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세종의 밑에 있던 인재들이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듣고 정진하여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헌신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한 사례로 조선시대 문신이자 천문학자였던 이순지의 일화를 들 수 있는데요, 이순지는 달력 제작을 할 당시 어머니가 상을 당하여 3년 상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3년 상을 다 치루기도 전에 다시 나와 달력 제작에 매진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3년 상이 의미하는 것은 사대부들의 특권이자 의무였기 때문에 주변의 시선은 따가웠 지만, 이순지는 ‘나를 알아주는 임금이 계실 때 이것을 완성 하여야한다.’ 는 사무 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세종은 전형적인 창조형 리더이면서 동시에 소통의 미덕을 갖춘 리더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Q. 그렇다면 세종이 이렇게 위대한 리더가 될 수 있었던 본인만의 소양과 주위환경의 요소들이 있었나요? A. 네. 그렇습니다. 우선 환경적인 요인으로는, 아버지인 태조 임금이 다져놓은 정 치적인 기반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반 덕분에 세종은 별다른 정쟁 없이 오로지 창조적인 성과만을 낼 수 있었죠. 다음은 본인의 소양이자 주위의 환경요소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바로 세종이 ‘굉 장한 독서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종은 우리나라 전국은 물론 중국, 아랍지역 서적까지 수집하여 첨단지식정보를 집대성 하였고, 따라서 세종 시대에 의학, 약 학, 천문, 지리, 농업 등 22개 분야에서 350여 종의 책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도 22개의 분야 별로 책을 편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고려해 보면, 이는 대단한 성과인 것이죠. 또한 세종은 다른 나라의 문화를 수용하는 경향도 보였습니다. 세종 시대 당시 원 나라는 동서양의 과학기술을 집대성한 나라였는데요, 세종이 이를 받아 들여 해 시계 등을 발명하게 한 것이죠. 이미 있는 것을 잘 집대성(Accumulation)하는 것, 그것이 융합의 전제 조건이었고, 여기에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에게 실험을 더하 게 하였습니다. 세종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요. 세종이 온양온천에 행차를 할 당시 였습니다. 세종은 행차 당시 수레 뒤에 나무 인형을 매달아 나무가 한 바퀴 돌 때 마 다 부딪히는 소리를 나게 하며, 거리를 측정하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지도 제작에 활용하기 위해서였죠. 이 같이 주위의 환경적 요소와 지도자의 강력한 의 지 및 실천이 더하여졌기에, 그 시대의 위대한 성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Q. 세종 시대의 리더십과 현대 리더십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A. 리더십에는 시대를 뛰어 넘어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지도자의 ‘진 정성 (Authenticity)’입니다. 아무리 리더십의 스킬이 뛰어나다 하더라고 신뢰를 잃 어버리면 안 되는 것 입니다. 언행이 일치해야 한다든가, 리더십의 목적이 대다수 국민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든가 등의 기본적인 원칙은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진정성(Authenticity) 물론 시대적 요구와 관심이 다르기 때문에 리더십에도 변화는 있어야 합니다. 세종 시대의 정치 주체는 임금과 사대부에 한정되었었는데, 지금 은 국민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죠. 따라서 보다 많은 국민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 고 뜻을 받드는 것이 현대에는 매우 중요해 졌습니다. 결론적으로, 시대를 뛰어 넘어 진정성과 신뢰는 변치 않는 리더십의 원칙이며, 최 근 사회적 변화와 시대적 요구에 따라 ‘소통’ 덕목도 리더십의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Q. 세종의 리더십을 현대적 관점에서 한 마디로 표현하신다면? A. 컨버젼스(Convergence)입니다. 기존의 인재들을 용광로로 잘 녹여 새로운 성과 를 낼 수 있게한 전형적인 리더십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과적인 측 면에서 바라 본 것이지만, 그렇게 하기 위하여 소통하고 헌신한 것이 세종의 중요 한 리더십 덕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54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55
  28. 28. 세종 시대에는 분명히 어떠한 창조를 가져와야 할 시기였고, 세종 본인도 그것을 천명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종의 취임사가 ‘강소국(작지만 강한 나라)’ 였는데요, 작지만 풍요로운 나라 를 만들기 위하여 여러 인재들을 참여하게 한 리 더십을 발휘했습니다. Q. 융합 인재 양성을 위하여 세종대왕으로부터 벤치마킹해야할 것은? A. 우리나라가 300년 단위로 도약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12세기 고려 때는 팔만 대장경, 금속활자 등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으로 우뚝 섰고, 15세기 세종대왕 때는 과학기술성과가 세계 최고라는 기록이 있으며, 18세기 영·정조 시대에는 실학의 융성과 문예의 부흥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신기한 점 은, 이 중요한 시기마다 ‘씽크 탱크(Think Tank)'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21 세기 또 한 번의 도약을 위하여 씽크탱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다 고 생각합니다.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국책 연구기관들을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할 것 입니다. 현재는 인문학자들과 자연과학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데, 이들을 한데 모아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게 하여야 하는 것이죠.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바로 이 렇게 운영하였습니다. 따라서 저는 융합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세종대왕으로부 터 ‘집현전’을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구체적으로 융합 인재 양성을 위한 정책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신다면? A. 앞에서 제가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씽크 탱크’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전공을 가진 학자 및 엔지니어들이 주 기적으로 모여 교류할 수 있는 ‘컨버젼스 포럼(Convergence Forum)과 같은 기회들 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종 때 ‘원리’라고 하여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후 문을 닫아 걸고, 만장일치를 이끌어 낼 때 까지 문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컨버젼스 포럼 역시, 참가자들이 의무상으로 몇시간 잠깐 얼굴을 비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 니라, 대 토론을 통해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실질적인 워크숍(Workshop)형태가 되 어야 할 것입니다. 56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실용적인 창조를 추구한 창조적 리더/ 세/ 종/ 대/ 왕/ 57
  29. 29. 르네상스의 의미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살았던 르네상스는 ‘부활’ 또는 ‘재생’ 이라는 뜻이다. 르네상스란 말에는 ‘로마 문화를 재생 또는 부 활한다.’라는 뜻이 있는데 특히 인간성의 부활이라는 큰 의미 가 들어 있다. 다른 말로 르네상스를 인간 중심의 문화 또는 인본주의 사상이라고도 한다. 르네상스의 문화는 이탈리아 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는데 교회 중심 의 미술을 비롯하여 문학, 학문, 과학 등 전반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르네상스의 특징 르네상스의 미술 양식은 서양 미술사에 나타난 한 시대의 특 징에 지나지 않으나 근대 미술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르 네상스 미술은 교회 건축뿐만 아니라 일반 공공건물도 포함 하게 되었고, 교회의 건축에서 조각과 회화가 독립되어 하나 의 미술 영역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과학적인 발달로 회화에 서는 원근법이 발달하였고, 조각은 사물로서 입체가 아니라 공간감을 나타내는 미술로 발달하였다. 3대 혁명 서구 사회가 암흑의 중세시대를 접고 과감하게 근대라는 신 세계로 들어설 수 있었던 데는 크게 3가지 혁명이 있었기 때 시대배경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누구인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융합적 관점에서의 리더십 재해석 레오나르도 다 빈치 시대를 100년 이상 앞서 살았던 역사상 최고의 천재 르네상스 과학 예술가 58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르네상스 과학 예술가/ 레/ 오/ 나/ 르/ 도/ 다/ 빈/ 치/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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