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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기리하이리지음│권남희 옮김
나의
핀란드
여행
M u n M a t k a
카 모 메 식 당 뒷 이 야 기
8 9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 여행을 간 곳은 홍콩이었다.
긴자의 영화관 아르바이트 동료와 극단 친구들이 뒤섞여서
아마 특가 투어로 3박 4일인가 다녀왔을 거다.
침사추이 번화가 뒤의 싸구려 호텔에 도착해서 어두컴컴
한 방의 창문을 열었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바로 맞은편 아파트에 널린 빨래, 맹렬한 거리의
소음.불어오는뜨거운바람전부가마늘냄새였다.“마늘창고
혀 위의 핀란드
혀 위의 핀란드
가 불난 거 아냐?” 하고 친구들과 하하 호호 했던 귀여운 20대
초반.그것이아시아와의첫만남이었다.
그 무렵의 홍콩은 시급 450엔의 영화관 아르바이트로도
마음껏 먹고 마시고 사고 놀러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물가가
쌌다. 500엔만 있으면 점심때 딤섬을 질릴 정도로 먹을 수 있
었다.왜건으로날라오는딤섬을주저없이고를수있는행복!
아침에는 죽으로 시작해서 술집에서, 포장마차에서, 야시
장에서, 노점에서, 시내 한복판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전부
먹었다. 한 끼도 허투루 먹지 말자는 마음가짐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더 이상 중화요리는 싫어” 하는 탈락자도 나왔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지치지 않고 계속 먹었다.
홍콩을 떠나기 전날 밤 가방이 한 개 더 불어난 짐을 다 싸
놓고, 나는 ‘아, 이제 미련 없다’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
데 그날 밤늦게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겼다. 위와 장이 경련
을 일으켰다. 그리고 3박 4일 동안 먹고 모은 홍콩의 아름다
운 음식들을 전부 위와 아래로 방출해 버렸다.
친구들에게 안기듯이 해서 일본에 돌아와 집에 도착하니,
외국 여행 갔다가 홀쭉해서 돌아온 딸을 보고 어머니는 얼굴
을 찡그렸다. 평소 스무 살이 넘어도 줄어들 줄 모르는 딸의
식욕에 속을 태웠던 것이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끝나자, 초췌할 대로 초췌해진 내게 아
버지가 넌지시 말했다.
“토할 때까지 먹었구나. 훌륭하다. 그게 식통食通이지.”
아버지는 전후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에 몸을 바친 위대한
샐러리맨이다. 위대한 식통이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석유를 팔러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다
니고, 가는 곳마다 지역 특산품을 선물로 사 왔다.
지금도 내가 지방에 갈 때 맛있다고 소문난 가게를 찾아서
가면 이따금 “옛날에 아버님이 자주 오셨었지요” 하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런 아버지에 길들어서 나는 어릴 때부터 산해진미를 즐
기는 아이였다. 생일에는 케이크 대신 해삼 초무침을 차려 주
어서, 이날만큼은 해삼 창자
4 44 4 4
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해삼 창자를 먹는 딸을 바라보면서 아버지는 분명히 이 아
이는 크면 희대의 술 잘 먹는 식통이 될 거라고 은근히 기대
했을 것이다.
10 11
혀 위의 핀란드
유감스럽게도 어른이 되어 보니 나는 단순한 먹보에 지
나지 않았다. 술도 아버지만큼 세지 않고, 식통이라고 할 만
큼 요리나 식재료에 대해 아는 것도 없다. 미각도 취각도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할 수 없고, 가게나 요리사에 관
한 지식도 거의 없다. 그저 먹을 걸 보면 환장하는 인간일
뿐이었다.
그러니 닥치는 대로 먹었다. 명물이라고 하면 어떤 것이든
먹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설령 먹기 좀 그런 것이어도 꼭
먹었다. 안내 책자에 실려 있는 가게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절대로 간다. 한 번은 가 본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모든 책과 인터넷을 동원하여 사전
조사를 한다. 아울러 현지에 가서는 빈틈없이 물어본다. 그
고장에 관해서는 그 고장에 사는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그래
서 간 가게나 산 물건이 대박이었건 실망이었건 나는 그것에
쓴 시간에 만족한다.
여행 중에만 그런 게 아니다. 도쿄에서 일할 때도 항상 일
이 끝난 뒤 어디서 식사를 할지 남몰래 생각하며 집을 나선
다. 현장 근처에 맛있는 것이나 가 보고 싶은 가게가 있으면
12 13
힘든 일도 즐겁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내 머릿속은 언제나 ‘이후에 먹을 것’ 생각으로 가득
했다.
그런데 핀란드로 떠나기 전에는 드물게 내 머릿속이 새하
얬다. 이번 여행은 관광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철
저한 준비를 하기 위한 시간이 너무 없었다.
북유럽 하면 연어? 이 정도의 이미지만 갖고 핀에어를 탔
다. 영화 준비를 위해 몇 년 전부터 여러 차례 헬싱키에 다녔
던 감독과 스태프가 “무조건 감자죠”라든가 “크림 맛이요”라
든가 “매번 여드름이 생겨요” 식으로 단편으로밖에 얘기하지
않아서, 아마 이것은 음식에는 기대하지 마라는 말일 거라고
예상했다.
기내지를 넘기다 보니 제일 먼저 음식 정보가 눈에 들어왔
다. ‘이 계절에 핀란드 시장에는 꼬투리완두가 잔뜩 널려 있
으니 그걸 생으로 먹으면서 시내를 걸어 보세요’라고 쓰여
있다. 꼬투리완두를 생으로? 체험하지 못한 영역이다.
여행 준비로 쓰키지의 차 가게에 맛있는 녹차를 사러 갔을
때도, 점원이 “요즘 헬싱키라면 시장의 베리 종류와 딸기가
혀 위의 핀란드
최고예요”라고 가르쳐 주었다. 특히 “딸기는 잊지 말고 꼭 먹
어야 해요” 하고 몇 번이나 당부를 해서 내 마음은 비행기보
다 빨리 헬싱키 시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기내식은 무엇보다 빵이 맛있었다. 곡물 덩어리 맛이 났다.
내가 빵을 몰래 냅킨에 싸는 것을 본 모양이다.
“더 좋은 게 있어요.”
키가 큰 묘령의 승무원이 또 다른 빵 바구니를 갖고 왔다.
그리고 내 앞에 내밀며 아주 밝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이게 핀란드의 어머니 맛이랍니다.”
시나몬롤.영화에서도대활약했고,물론헬싱키시내에서도
대대적인활약을하고있을이빵을나는이때처음만났다.
중요한 공연자와의 이른 만남에 감동하면서 시나몬 롤을
맛보고 있으니, 예의 객실 승무원이 또 밝은 얼굴로 다가왔
다. 핀란드 맛에 흥미진진한 일본인을 또 기쁘게 해 주려는
건지, 이번에 내미는 것은 검은색과 흰색 체크무늬의 작은
상자였다.
트럼프? 순간 생각했지만, 흔드니까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났다. 열어 보니 안에는 새끼손톱 크기의 아주 새까만 덩어
혀 위의 핀란드
리가 들어 있었다. 사탕으로 추측됐다. 생김새가 도저히 먹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입에 넣었다.
미각기관이 뇌에 무슨 맛이라고 전하기 전에 내 몸에 소
름이 먼저 돋았다. 짜다. 사탕일 텐데 짜다. 상자에 잘못 넣어
둔 고무 조각을 빤 걸까? 포기하지 않고 빨고 있으니 허브 맛
도 난다. 이것은 아마 감초 향일 것이다.
연극 무대에서 목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모든 종류의 사탕
을 먹고 있어서, 이런 유의 성분은 바로 안다. 아시아 각지에
서 공연할 때는 그 나라의 목캔디에 신세를 많이 진다. 깜짝
놀랄 맛이 나는 것도 많이 있었지만, 하나같이 한방약이 들
어간, 아시아인이라면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의 맛
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것은 상상을 초월했다. 내 속의 컴퓨터가
잠시 혼란을 일으켰다가 지금까지의 모든 데이터를 바탕으
로 필사적으로 검색했다. 뇌가 상자 무늬와 같은 흑백 체크무
늬가 된다. 너무 지독해서 입에 넣은 것을 뱉어야 할지 삼켜
야 할지를 판단할 능력조차 잃었다.
타이어나 고무호스에 소금과 설탕을 뿌려서 씹으면 혹시
16 17
이런 맛이 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먹어 본 적 없을 정도로
최악의 맛이었다.
너무나 정체 모를 것을 만나니 기쁨마저 끓어올랐다. 좁게
생각한 지구가 한없이 넓게 느껴졌다. 이 세상에는 아직 내가
모르는 맛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가슴이 설렜다.
이렇게 기쁨과 구토에 떨면서 입속의 이문화와 대결하는
일본인에게 승무원이 장난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어떠세요?”
확신범의 미소다.
‘이것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겁니까?’ 묻고 싶었지만, 실
례이니 “이건 목에 좋은 사탕인가요?” 하고 물었다.
승무원은 “목에 좋으냐고요?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
습니다. 이것은 ‘살미아키’라고 핀란드인이 가장 좋아하는 과
자랍니다. 소금이 들어가서 혈압 높은 분이나 임신한 분은 드
시지 않는 게 좋답니다”라는 뜻의 말을 참으로 기쁜 듯이 영
어로 이야기했다.
시나몬 롤과 살미아키. 일본으로 말하자면 주먹밥과 낫토
에 해당할까. 가는 비행기에서 나는 이미 핀란드의 ‘영혼의
혀 위의 핀란드
맛’을 만났다.
다음 날부터 내 옆에 시나몬 롤과 살미아키가 있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느 카페, 핀란드어로 하면 어느 ‘카흐빌라’에 가도 시나
몬 롤은 커피 옆에서 왕비처럼 군림하고 있었고, 핀란드 편의
점이나 역내 매점에서는 과자 선반 대부분을 살미아키의 음
산한 검은색이 차지하고 있었다.
듣자 하니 살미아키란 목캔디 전문가인 내가 생각한 대로
감초 등의 허브가 원재료로, 그걸 소금에 절여 만든다고 한
다. 그 소금이 상자 옆의 성분 표에도 쓰여 있는 염화암모늄
인 걸까? 대체 염화암모늄이란 건 뭐람. 조사해 보니 전지電池
재료라고 나와 있다.
전지 재료를 사용해서 타이어 고무 같은 맛이 나는 과자를
만드는 사람들…….
나는 그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 역내 매점에서 구미젤리 스
타일과 막대기 모양 등 각종 살미아키 제품을 사 모아, 몰래
촬영 현장의 티타임에 내놓아 보았다.
곁눈으로 지켜보니 핀란드인 스태프들은 어떤 과자보다
18 19
먼저 수수께끼의 구미젤리에 덤벼들었다. 잠시 눈을 뗀 사이
에 봉지는 바로 비었다.
그걸 본 뒤로 나의 살미아키 극복 수행은 시작되었다. 티
타임에 내놓을 실험용 과자를 사서는 나 자신도 시험했다. 익
숙해진 뒤에는 살미아키 아이스크림에 도전해 보았다. 시커
먼 색의 아이스크림을 먹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지만, 토핑된
캐러멜의 도움으로 간신히 다 먹었다.
이렇게 조금씩 난이도를 높여 가다 첫 주말에는 살미아키
맛이 강한 술에 도전했다.
그날은 일주일 동안의 외국 생활과 일을 해냈다는 기쁨으
로 조금 취했다. 바텐더에게 트집을 잡으면서 술을 고르고 있
는데, 검은 모자를 쓴 세련된 신사가 다가왔다. 신사는 뒤에
서 느닷없이 어깨를 덥석 잡더니, 움찔하는 내 귓가에다 달콤
하게 속삭였다.
“살미아키 보드카를 마셔 봐요.”
신사의 속삭임에 따라 숏 글라스에 따른 검고 진하고 독한
술을 마셨다.
달콤한 상황에서 마셔도 절대 맛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혀 위의 핀란드
맛이없는데다알코올이강하다.‘못생긴데다거칠어’라고말
하는것같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독일에서 즐겨 마셨던 예거마이스
터와 비슷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예거마이스터는 약용주
로 위에 좋다고 해서 나는 그것을 섞은 칵테일을 자주 마셨
다. 맛이 센 데 비해 무엇에나 잘 어울린다. ‘못생겼지만 성격
은 좋아’ 같은 술이다. 살미아키는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하
지만 만약 못생긴 주제에 거친 여자와 친밀하게 지내다가 오
히려 그 깊이에 빠질지도 모른다.
모자 쓴 신사가 멀리서 잔을 들었다. 나도 전혀 줄지 않은
숏 글라스를 높이 들어 건배 신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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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핀란드 여행

  • 1. 가타기리하이리지음│권남희 옮김 나의 핀란드 여행 M u n M a t k a 카 모 메 식 당 뒷 이 야 기
  • 2. 8 9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 여행을 간 곳은 홍콩이었다. 긴자의 영화관 아르바이트 동료와 극단 친구들이 뒤섞여서 아마 특가 투어로 3박 4일인가 다녀왔을 거다. 침사추이 번화가 뒤의 싸구려 호텔에 도착해서 어두컴컴 한 방의 창문을 열었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바로 맞은편 아파트에 널린 빨래, 맹렬한 거리의 소음.불어오는뜨거운바람전부가마늘냄새였다.“마늘창고 혀 위의 핀란드
  • 3. 혀 위의 핀란드 가 불난 거 아냐?” 하고 친구들과 하하 호호 했던 귀여운 20대 초반.그것이아시아와의첫만남이었다. 그 무렵의 홍콩은 시급 450엔의 영화관 아르바이트로도 마음껏 먹고 마시고 사고 놀러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물가가 쌌다. 500엔만 있으면 점심때 딤섬을 질릴 정도로 먹을 수 있 었다.왜건으로날라오는딤섬을주저없이고를수있는행복! 아침에는 죽으로 시작해서 술집에서, 포장마차에서, 야시 장에서, 노점에서, 시내 한복판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전부 먹었다. 한 끼도 허투루 먹지 말자는 마음가짐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더 이상 중화요리는 싫어” 하는 탈락자도 나왔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지치지 않고 계속 먹었다. 홍콩을 떠나기 전날 밤 가방이 한 개 더 불어난 짐을 다 싸 놓고, 나는 ‘아, 이제 미련 없다’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 데 그날 밤늦게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겼다. 위와 장이 경련 을 일으켰다. 그리고 3박 4일 동안 먹고 모은 홍콩의 아름다 운 음식들을 전부 위와 아래로 방출해 버렸다. 친구들에게 안기듯이 해서 일본에 돌아와 집에 도착하니, 외국 여행 갔다가 홀쭉해서 돌아온 딸을 보고 어머니는 얼굴
  • 4. 을 찡그렸다. 평소 스무 살이 넘어도 줄어들 줄 모르는 딸의 식욕에 속을 태웠던 것이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끝나자, 초췌할 대로 초췌해진 내게 아 버지가 넌지시 말했다. “토할 때까지 먹었구나. 훌륭하다. 그게 식통食通이지.” 아버지는 전후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에 몸을 바친 위대한 샐러리맨이다. 위대한 식통이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석유를 팔러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다 니고, 가는 곳마다 지역 특산품을 선물로 사 왔다. 지금도 내가 지방에 갈 때 맛있다고 소문난 가게를 찾아서 가면 이따금 “옛날에 아버님이 자주 오셨었지요” 하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런 아버지에 길들어서 나는 어릴 때부터 산해진미를 즐 기는 아이였다. 생일에는 케이크 대신 해삼 초무침을 차려 주 어서, 이날만큼은 해삼 창자 4 44 4 4 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해삼 창자를 먹는 딸을 바라보면서 아버지는 분명히 이 아 이는 크면 희대의 술 잘 먹는 식통이 될 거라고 은근히 기대 했을 것이다. 10 11
  • 5. 혀 위의 핀란드 유감스럽게도 어른이 되어 보니 나는 단순한 먹보에 지 나지 않았다. 술도 아버지만큼 세지 않고, 식통이라고 할 만 큼 요리나 식재료에 대해 아는 것도 없다. 미각도 취각도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할 수 없고, 가게나 요리사에 관 한 지식도 거의 없다. 그저 먹을 걸 보면 환장하는 인간일 뿐이었다. 그러니 닥치는 대로 먹었다. 명물이라고 하면 어떤 것이든 먹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설령 먹기 좀 그런 것이어도 꼭 먹었다. 안내 책자에 실려 있는 가게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절대로 간다. 한 번은 가 본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모든 책과 인터넷을 동원하여 사전 조사를 한다. 아울러 현지에 가서는 빈틈없이 물어본다. 그 고장에 관해서는 그 고장에 사는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그래 서 간 가게나 산 물건이 대박이었건 실망이었건 나는 그것에 쓴 시간에 만족한다. 여행 중에만 그런 게 아니다. 도쿄에서 일할 때도 항상 일 이 끝난 뒤 어디서 식사를 할지 남몰래 생각하며 집을 나선 다. 현장 근처에 맛있는 것이나 가 보고 싶은 가게가 있으면
  • 6. 12 13 힘든 일도 즐겁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내 머릿속은 언제나 ‘이후에 먹을 것’ 생각으로 가득 했다. 그런데 핀란드로 떠나기 전에는 드물게 내 머릿속이 새하 얬다. 이번 여행은 관광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철 저한 준비를 하기 위한 시간이 너무 없었다. 북유럽 하면 연어? 이 정도의 이미지만 갖고 핀에어를 탔 다. 영화 준비를 위해 몇 년 전부터 여러 차례 헬싱키에 다녔 던 감독과 스태프가 “무조건 감자죠”라든가 “크림 맛이요”라 든가 “매번 여드름이 생겨요” 식으로 단편으로밖에 얘기하지 않아서, 아마 이것은 음식에는 기대하지 마라는 말일 거라고 예상했다. 기내지를 넘기다 보니 제일 먼저 음식 정보가 눈에 들어왔 다. ‘이 계절에 핀란드 시장에는 꼬투리완두가 잔뜩 널려 있 으니 그걸 생으로 먹으면서 시내를 걸어 보세요’라고 쓰여 있다. 꼬투리완두를 생으로? 체험하지 못한 영역이다. 여행 준비로 쓰키지의 차 가게에 맛있는 녹차를 사러 갔을 때도, 점원이 “요즘 헬싱키라면 시장의 베리 종류와 딸기가
  • 7. 혀 위의 핀란드 최고예요”라고 가르쳐 주었다. 특히 “딸기는 잊지 말고 꼭 먹 어야 해요” 하고 몇 번이나 당부를 해서 내 마음은 비행기보 다 빨리 헬싱키 시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기내식은 무엇보다 빵이 맛있었다. 곡물 덩어리 맛이 났다. 내가 빵을 몰래 냅킨에 싸는 것을 본 모양이다. “더 좋은 게 있어요.” 키가 큰 묘령의 승무원이 또 다른 빵 바구니를 갖고 왔다. 그리고 내 앞에 내밀며 아주 밝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이게 핀란드의 어머니 맛이랍니다.” 시나몬롤.영화에서도대활약했고,물론헬싱키시내에서도 대대적인활약을하고있을이빵을나는이때처음만났다. 중요한 공연자와의 이른 만남에 감동하면서 시나몬 롤을 맛보고 있으니, 예의 객실 승무원이 또 밝은 얼굴로 다가왔 다. 핀란드 맛에 흥미진진한 일본인을 또 기쁘게 해 주려는 건지, 이번에 내미는 것은 검은색과 흰색 체크무늬의 작은 상자였다. 트럼프? 순간 생각했지만, 흔드니까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났다. 열어 보니 안에는 새끼손톱 크기의 아주 새까만 덩어
  • 8.
  • 9. 혀 위의 핀란드 리가 들어 있었다. 사탕으로 추측됐다. 생김새가 도저히 먹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입에 넣었다. 미각기관이 뇌에 무슨 맛이라고 전하기 전에 내 몸에 소 름이 먼저 돋았다. 짜다. 사탕일 텐데 짜다. 상자에 잘못 넣어 둔 고무 조각을 빤 걸까? 포기하지 않고 빨고 있으니 허브 맛 도 난다. 이것은 아마 감초 향일 것이다. 연극 무대에서 목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모든 종류의 사탕 을 먹고 있어서, 이런 유의 성분은 바로 안다. 아시아 각지에 서 공연할 때는 그 나라의 목캔디에 신세를 많이 진다. 깜짝 놀랄 맛이 나는 것도 많이 있었지만, 하나같이 한방약이 들 어간, 아시아인이라면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의 맛 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것은 상상을 초월했다. 내 속의 컴퓨터가 잠시 혼란을 일으켰다가 지금까지의 모든 데이터를 바탕으 로 필사적으로 검색했다. 뇌가 상자 무늬와 같은 흑백 체크무 늬가 된다. 너무 지독해서 입에 넣은 것을 뱉어야 할지 삼켜 야 할지를 판단할 능력조차 잃었다. 타이어나 고무호스에 소금과 설탕을 뿌려서 씹으면 혹시
  • 10. 16 17 이런 맛이 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먹어 본 적 없을 정도로 최악의 맛이었다. 너무나 정체 모를 것을 만나니 기쁨마저 끓어올랐다. 좁게 생각한 지구가 한없이 넓게 느껴졌다. 이 세상에는 아직 내가 모르는 맛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가슴이 설렜다. 이렇게 기쁨과 구토에 떨면서 입속의 이문화와 대결하는 일본인에게 승무원이 장난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어떠세요?” 확신범의 미소다. ‘이것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겁니까?’ 묻고 싶었지만, 실 례이니 “이건 목에 좋은 사탕인가요?” 하고 물었다. 승무원은 “목에 좋으냐고요?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 습니다. 이것은 ‘살미아키’라고 핀란드인이 가장 좋아하는 과 자랍니다. 소금이 들어가서 혈압 높은 분이나 임신한 분은 드 시지 않는 게 좋답니다”라는 뜻의 말을 참으로 기쁜 듯이 영 어로 이야기했다. 시나몬 롤과 살미아키. 일본으로 말하자면 주먹밥과 낫토 에 해당할까. 가는 비행기에서 나는 이미 핀란드의 ‘영혼의
  • 11. 혀 위의 핀란드 맛’을 만났다. 다음 날부터 내 옆에 시나몬 롤과 살미아키가 있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느 카페, 핀란드어로 하면 어느 ‘카흐빌라’에 가도 시나 몬 롤은 커피 옆에서 왕비처럼 군림하고 있었고, 핀란드 편의 점이나 역내 매점에서는 과자 선반 대부분을 살미아키의 음 산한 검은색이 차지하고 있었다. 듣자 하니 살미아키란 목캔디 전문가인 내가 생각한 대로 감초 등의 허브가 원재료로, 그걸 소금에 절여 만든다고 한 다. 그 소금이 상자 옆의 성분 표에도 쓰여 있는 염화암모늄 인 걸까? 대체 염화암모늄이란 건 뭐람. 조사해 보니 전지電池 재료라고 나와 있다. 전지 재료를 사용해서 타이어 고무 같은 맛이 나는 과자를 만드는 사람들……. 나는 그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 역내 매점에서 구미젤리 스 타일과 막대기 모양 등 각종 살미아키 제품을 사 모아, 몰래 촬영 현장의 티타임에 내놓아 보았다. 곁눈으로 지켜보니 핀란드인 스태프들은 어떤 과자보다
  • 12. 18 19 먼저 수수께끼의 구미젤리에 덤벼들었다. 잠시 눈을 뗀 사이 에 봉지는 바로 비었다. 그걸 본 뒤로 나의 살미아키 극복 수행은 시작되었다. 티 타임에 내놓을 실험용 과자를 사서는 나 자신도 시험했다. 익 숙해진 뒤에는 살미아키 아이스크림에 도전해 보았다. 시커 먼 색의 아이스크림을 먹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지만, 토핑된 캐러멜의 도움으로 간신히 다 먹었다. 이렇게 조금씩 난이도를 높여 가다 첫 주말에는 살미아키 맛이 강한 술에 도전했다. 그날은 일주일 동안의 외국 생활과 일을 해냈다는 기쁨으 로 조금 취했다. 바텐더에게 트집을 잡으면서 술을 고르고 있 는데, 검은 모자를 쓴 세련된 신사가 다가왔다. 신사는 뒤에 서 느닷없이 어깨를 덥석 잡더니, 움찔하는 내 귓가에다 달콤 하게 속삭였다. “살미아키 보드카를 마셔 봐요.” 신사의 속삭임에 따라 숏 글라스에 따른 검고 진하고 독한 술을 마셨다. 달콤한 상황에서 마셔도 절대 맛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 13. 혀 위의 핀란드 맛이없는데다알코올이강하다.‘못생긴데다거칠어’라고말 하는것같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독일에서 즐겨 마셨던 예거마이스 터와 비슷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예거마이스터는 약용주 로 위에 좋다고 해서 나는 그것을 섞은 칵테일을 자주 마셨 다. 맛이 센 데 비해 무엇에나 잘 어울린다. ‘못생겼지만 성격 은 좋아’ 같은 술이다. 살미아키는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하 지만 만약 못생긴 주제에 거친 여자와 친밀하게 지내다가 오 히려 그 깊이에 빠질지도 모른다. 모자 쓴 신사가 멀리서 잔을 들었다. 나도 전혀 줄지 않은 숏 글라스를 높이 들어 건배 신호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