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LOVE ARAB ARAB VIEW 아라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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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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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로서 나는 하나의 상황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 미디어는 그 중 하나만 고를 수 있는데 , 주로 통념을 확인
해주는 이야기가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 중동 지역을 보도하는 미디어의 문제점들을 낱낱이 파헤친 전직 중동 특파원인 요리스
루옌데이크는 웰컴투 뉴스 비즈니스에서 그 동안 중동에 대한 보도가 얼마나 편파적일 수밖에 없었는지 이야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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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 중동 건설에 종사하는 비즈니스맨 혹은 중동 전문가가 아닌 대한민국 일반 국민인 우리는 그 동안 중동을 제대로 들여다
볼 기회가 없었다 . 우리가 중동을 바라보는 프레임은 TV 나 미디어를 통해 전달받은 자극적이고 편향적인 정보를 통해 만들어
진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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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들었던 새내기 시절 “이슬람 사상의 이해” , “ 중동의 정치” 수업은 한마디로 문화 충격이었다 . 우리
가 흔히 무슬림하면 떠올렸던 알카에다와 같은 무장 테러 집단들은 사실 이슬람 세계에서도 내놓은 자식들이었다 . 일부의 극단
적 무슬림들이 그들의 특정한 목적 달성을 위하여 행하는 테러를 지하드 ( 성스러운 전쟁 ) 라는 이슬람 용어로 칭하였지만 , 이
슬람 세계에서 테러 행위를 지하드로 보는 경우는 없었다 . 오히려 그들은 이슬람 법인 샤리아법을 토대로 보면 범죄자라고 한
다 . 무슬림들의 경전인 코란 속에는 “종교에는 강제가 없다” , “ 하나님은 침략하는 자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 “ 이 세상에 혼란
을 일으키지 말지니라” , “ 우리는 다만 옳은 일을 도모하나이다” 는 구절들을 포함해 여느 세계 종교처럼 평화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가르침들을 담고 있다 . 이 수업을 통해 새내기 시절부터 “알면 이해하는 것이고 모르면 오해한다”는 말처럼 그 동안 우리의
무지로 인해 얼마나 중동을 오해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고 , 중동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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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은 9 세기에서 13 세기 , 유럽이 중세의 암흑기이던 시절 연금술 , 의학 등을 비롯 세계 최고의 문명을 이룩하였고 , 이
집트 , 메소포타미아 , 오리엔트 등 고대 인류 문명의 발상지이자 유대교 , 기독교 , 이슬람교라는 일신교가 탄생한 곳이다 .
다양한 문화와 문명들이 태동되었고 , 아직도 이러한 문화가 공존하고 다양한 민족들이 공생하는 중동 . 우리는 왜 그 동안 이
러한 중동에 대한 기초적 배경 지식이 없이 폭력적이고 , 폐쇄적인 지역이라는 이미지 아래에 그들과의 소통을 중단 , 아니 시
도조차 해보지 않고 살아왔던 것일까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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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지역은 역사적으로 주요 강대국 사이에서 오랜 각축전장이 되어 왔다 . 그리스 ,
로마 , 페르시아 , 아랍 , 포르투갈 , 터키 , 영국 , 미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가
와 문화권이 이곳에서 첨예한 대립을 하기도 했었다 . 특히 중동의 페르시아만은 아시아 ,
아프리카 , 유럽 3 대륙과 대서양 , 인도양 , 태평양 등 3 대양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해왔다 . 제국주의 시대에는 무역 및 교통의 중심지로 , 1-2 차 세계 대전시에는 전쟁물자
보급로와 같은 전략적 요충지로 , 그리고 오늘날은 세계 경제의 대동맥이라 할 수 있는 석
유 수송로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 따라서 페르시아만은 강국들의 이해 관심 지역으로 전
략적 가치가 높은 위험지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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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은행에 올려진 2009 년 pewforum 전 세계 무슬림 인구 조사 데이터에 따르면 2009
년 전세계 무슬림 인구는 15 억 7 천만 명으로 전 세계 200 여 국가에 퍼져있으며 전 세계
인구의 23% 를 차지하고 있다 .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무슬림 인구의 60% 는 아시아에
거주하고 있고 , 20% 가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거주하고 있다 . 2011 년엔 향후 20 년 동안
무슬림의 인구가 비무슬림에 비해 두배 정도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 CIA
factbook 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성장률은 연간 1.12% 인 것에 반해 무슬림이 대다수인 국
가들의 인구 성장률은 1.8% 이다 . 따라서 2030 년엔 전 세계 인구의 26.4% 이 무슬림이
된다는 전망이다 . 최근 중앙 및 동부 유럽으로의 무슬림 이민 인구 증가 및 유럽 내에 정
착한 무슬림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고 , 프랑스 내 무슬림 여성의 히잡 착용 논란 같이
무슬림과 비무슬림간의 상이한 문화 차이로 인해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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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폐쇄적인 문화와 정권을 유지해 왔던 중동에도 아랍의 봄을 비롯한 변화의 붐이
일기 시작했다 . 여성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한 움직임 , 스마트몹 같은 대중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 그와 동시에 중동 시장이 급부상하면서 앞으로 카페베네를 비롯한 더 많
은 국내 기업이 이곳에 진출하고 있고 , 외국의 관심 또한 증대되고 있다 . 알면 이해하는
것이고 , 모르면 오해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중동에 대한 이해의 결여는 앞으로 수많은 오
해와 갈등을 낳을 것이다 . 2030 년 사회의 주역이 될 우리 모두 중동에 더욱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야할 것이다 .
중동의 가치
및 중요성
중동 여성 인권 향상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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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단지 우리의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 그 동안 한국 사람들은 다양한 이해관계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중동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유대 - 미국 중심의 언론과 정보를 통해서 아랍과 중동을 인식해 왔다 . 현재는 거의 폐기 된 이론이지만 우리나라 교과서에도 인용되었
던 새뮤얼 헌팅턴 (Samuel P. Huntington) 의「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 」엔 이슬람과 전투성간의 연관성 , 이슬람권
과 비이슬람권의 분쟁비화 가능성 등 ‘이슬람의 호전성’이 그려져 있었고 그로 인해 이슬람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기도 했다 . 12 명의 이슬
람 전문 한국 학자들은 공저한 “이슬람”이라는 책을 통해 “ ( 한국은 ) 건국 이후 오늘날까지 한 번도 우리의 입장에서 제대로 이슬람과 이슬람
사회를 들여다볼 기회의 창을 가져보지 못했다”고 기술하였다 . 한국의 언론들은 전혀 다른 아랍 , 이슬람 , 중동의 개념을 혼용하여 사람들
의 그릇된 인식을 만들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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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학기 , 우리 팀원 중 두 명은 2 억 5 천명의 무슬림이 거주하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돌아
왔다 . 인도네시아에 대한 접근성과 거리감은 그리 크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교적인 차원에서 체계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비교적 쉽게 그곳에
서 생활하며 문화적 상대주의를 몸소 배울 수 있었다 . 새내기 시절부터 이슬람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해왔던 덕분에 우리는 현지
무슬림들과도 금방 친구가 되었다 . 그들과 함께 30 도를 웃도는 인도네시아 곳곳을 27 시간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허름한 버스를 타고 여행
도 해보고 , 7 시간 기차를 타고 오지도 방문해보고 , 강경 무슬림들이 많다는 수마트라의 잠비도 방문하여 그들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직접
체험해 보았다 . 그리고 “알지 못하면 사랑하지 못한다 .” 는 인도네시아 속담처럼 그곳에서 인도네시아를 알게 되고 , 그곳의 숨은 매력들을
발견하며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 그 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비슷하고 , 우리가 상대방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 어디든 우리가 가보지 못할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렇게 우리는 중동 방문의 꿈
을 가슴에 품기 시작했다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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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를 선도하고 있는 대한민국 . 하지만 여전히
한국인에게 중동의 진입 장벽은 높기만 하다 . 대
형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중동 , 아랍 관련 책을 살
펴보아도 보통 학술적인 서적들이 대부분이다 . 그
러한 연구도 연구 대상 국가가 특정 국가에 한정되
어 있고 , 연구 분야가 경제적인 분야에 편중되어
있다 . 경제 연구 또한 서구 경제학에 의존하여 통
계 수치를 비교 , 분석하는 방법에 중심을 두고 있
다 . 일본의 경우 , 인문학을 중심으로 학자 , 여
행가 , 요리사 , 방송극 해설위원 , 신문기자 ,
기업가 , 의사 등의 중동지역 전문가들도 각종 학
회에 참석하며 통합적인 중동 지역 연구를 해나가고
있다고 한다 . 이에 반해 한국의 중동 연구는 언어
나 사회과학 , 특히 정치학 위주의 학술적 성격이
강하다고 한다 . 보통 테러와 중동 건설 , 오일 관5
일정
2 인천국제공항 출발
3 터키 경유
4 이란 시라즈 : Hamed, Akbar, Masummeh, Sara, Saeed, Terme, Kiyan,
5 Asal, Marjan, Nazanin 등 시라즈 친구들과의 여행 및 홈스테이
6 이스파한 : Mahdy, Amin, Eike, Abiyana, Nayan, Kom, Asiye, Min,
7 Shadi 등 이스파한 친구들과 여행 , 토론 및 홈스테이
8 터키 경유
9 요르단 마다바 : 이 지역 터줏대감이자 기독교 신자인
Fadi 아저씨 가족과의 만남
10 페트라
11 와디럼 : 베두인들과 유목민 체험
12 암만 : Yazan 가족과의 만남 및 홈스테이
13
14 터키 경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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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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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양섭 교수님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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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뷰팀이 대학 새내기 때 중동 세계에 눈을 뜨게 만들어 주신 중동 지역의 대가 신양섭 교수님 . 아라뷰팀은 동원 글로벌 익스플
로러 계획서를 작성하기 전부터 교수님과의 면담을 통해 일정 및 현지 실생활에 대한 정보와 대학생 눈높이에 맞는 유익한 경험들이
무엇이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출국 전에도 여러 번 교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사전 준비를 하였다 . 6 월 1 일부터 시작
된 터키 반정부 시위 문제를 비롯해 이집트의 시위 격화 , 중동 지역 외국인 관광객의 납치 및 사망 소식이 들려오면서 치안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 우리가 방문하고자 하는 지역들의 치안 상태 및 상황들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면서 그쪽 문화권에
서 주의해야 할 상황들을 다시금 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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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 단장님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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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 글로벌 익스플로러 오리엔테이션 당일 우리 팀에게 단비 같은 소식이 있었다 . 최지은 응원 단장님께서 중동 지역을 오랫동안
여행하셨기에 우리 팀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으시다는 것이었다 . 전달받은 이메일 주소로 연락을 드리고 , 약속을 잡고 최지은
응원 단장님을 뵐 수 있었다 . 단장님께서는 1 개월 동안 여행할 수 있는 국가 단 하나를 고르라고 물어본다면 , 주저 없이 이란을
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 세계 여행을 마치신 단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최지은 단장님과 이야기하던 중 우리 팀의 일정이 너무 빡빡하고 , 소기의 목적인 현지 사람들과의 일상을 공유하면서 중동에 대한
편견을 깨기는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고 느꼈다 . 그래서 가능하면 비행기의 일정을 바꾸고 , 이란에서 대부분의 일정을 보내려고
시도하였지만 , 비행기 일정 변경의 수수료가 개인당 70 만원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무리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 대신 이란에서
최대한 많은 ,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하여 사전 연락을 취해 하루 평균 3 개의 약속을 잡아 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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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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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치서핑 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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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에 보면 카우치 서핑은 여행하고자 하는 곳의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무료 숙박 및 운이 좋다면 가이드까지 받을 수 있는 여행자들을 위한 비영리
커뮤니티라고 나온다 . 현지 카우치서핑 회원은 231 개국 6 만 4 천여 개 도시의 133 만 명에 달한다 . 우리 팀원도 기존에 카우치서핑에 대해 알고 있긴
했다 . 하지만 언론을 통해 카우치서핑에 대한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기사를 봤던 인상이 너무 깊었던 탓인지 실제로 이것을 활용해볼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다 . 하지만 최지은 응원단장님의 경험담들을 들으며 카우치서핑의 참 가치를 알 수 있었다 . 이란은 외부인이나 손님을 매우 귀하게 여기는 풍습이
있기에 , 단순히 현지인의 집에 숙박하는 차원을 넘는 경험들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셨다 . 더욱이 10 개월 가까이 이란에 계시면서 거의 한
달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지인의 집에서 머물며 이란의 생활과 멋에 흠뻑 젖어 생활하실 수 있으셨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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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치서핑에는 가입한 온 세계 사람들의 프로필 , 삶의 철학 , 사진 , 인상 깊었던 경험 , 그리고 그 현지인의 집에서 카우치서핑을 했던 사람들의 생
생한 후기들도 남아 있었다 . 우리의 일정이 너무도 짧고 , 일분 일초도 소중했기에 그곳에 올려진 많은 사람들의 정보를 세심히 읽어보고 , 우리가 궁금
해 하는 부분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볼 수 있을 법한 다양한 연령대 , 다양한 배경의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 처음 활용해 보는 카우치서
핑이라 답장이 얼마나 올 지 궁금했었는데 , 카우치서핑 이용 팀 기사들을 참고하여 연락해서인지 연락한 거의 모든 곳뿐만 아니라 연락하지 않은 곳에서
도 우리와 함께 양국의 문화를 교류하고 싶다는 연락이 빗발쳤다 . 수십명의 중동 친구들과 일주일동안 스케줄을 조율하고 , 수십통의 메시지를 주고 받
으며 그들과의 교류를 준비하였다 . 이로 인해 단순히 낯선 지역을 간다는 기대를 넘어 , 멋진 경험과 배경을 가진 새로운 친구들을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여정을 준비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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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 선물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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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여정의 목적은 민간 차원에서 현지인들과 직접 양국의 문화를 교류하며 , 활자로 접하지 못했던 , 자극적인 뉴스와 언론을 통해서는 전달되지 못한
그들이 사는 세상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 따라서 양국 전통 의상 입고 생활해보기 , 전통 음식 공유하기 등을 비롯한 여러 활동을 계획해 놓았었기에 한
복 , 한식 등을 구입하였다 . 그리고 우리를 초대해준 현지 호스트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할 수 있는 한국 선물들을 구입하였다 . 접이식 한국 전통 부채
와 한국 전통 금 도금 책갈피가 현지에서 인기가 많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두 선물을 중심으로 차 문화가 발달한 중동에 적합한 한국 전통 문양의 차 받침 세
트 , 공예품 등을 인사동에서 구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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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 닿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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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우리가 탐방할 중동 국가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외교부 안보 등급을 살펴보고 ,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어 올라오는
중동 지역 내의 테러 및 납치 사건들을 보면서 , 탐방 국가를 선정하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
그런데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기 직전에 우리는 예기치 못한 변수와 마주치게 됐다 . 6 월 1 일부터 시작된 터키의 반정부 시위
사태 . 한국 언론은 시위 초반부에 터키 시위에 대한 기사들을 다루지 않았다 . 우리는 터키에 거주하는 한국인 블로그 , 해
외 통신 등을 통해 현지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 따라서 동서양의 문명이 상생하는 무슬림 국가
터키를 탐방하려고 했던 초기의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 탐방국을 이란과 요르단으로 압축한 것이다 . 하지만 중동행 한국발
비행기의 수가 매우 적고 , 더욱이 이란과 요르단으로 직항하는 비행기는 찾을 수 없었다 . 터키나 카타르 , 아랍에미리트를
경유하는 것이 필수였기에 가격 , 위치 등을 고려하여 터키에서 경유하는 것을 택하기로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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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문제는 출국 일주일 전 신양섭 교수님과의 만남에서 떠올랐다 . 이란 비자 문제 . 우리 팀은 중동의 가
장 최근의 정보들을 엿볼 수 있는 블로그들을 중심으로 많은 정보들을 모았었다 . 최근 한국인의 이란 비자 발급이 시라즈의 경
우 도착 비자로 쉽게 발급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상태였기에 우리는 시라즈로 입국하기로 결정했었다 . 테헤란의 경우 이
란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 한국인의 입국 비자가 거절당하는 사례들도 발견하였다 . 최근 한국과 이란의 관계가 경색되면
서 주한 이란 대사관에서는 이란으로부터의 초청장이 있다 하더라도 비자를 쉽게 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 또한
우리는 기업인 자격도 아니었기에 이란 대사관을 통해 비자를 발급받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 그래서
시라즈 도착 비자를 발급받기로 한 것이다 .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작년에 지인분들을 데리고 이란을 방문하실 때 비자로 인해
고생하셨던 사례들을 말씀해주시면서 비자 없이 이란을 입국하는 것은 굉장히 무모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 다른 교수님께서
는 이란행 비자가 없는 경우 터키 항공측에서 우리의 이란행 비행기 탑승을 거부하더라도 법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다고 하셨
다 . 이미 주한 이란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는 것을 시도하기엔 시간이 너무 늦어져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 결국 우리는 이란
비자로 인해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출국을 강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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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의 시라즈 입국
이란은 초청장이 있을 경우에만 비
자가 나오고 , 그럴 여건이 안된다
면 브로커 등을 이용해야 한다 .
우리팀은 네이버 블로그의 후기만
믿고 입국비자가 비교적 쉽게 나온
다는 시라즈 공항으로 입국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
그러나 출국 이틀 전 , 주한 이란 대
사관의 차디찬 답변과 신양섭 한국
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님으로
부터 “이란에 비자없이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를 듣고 충격과
공포에 빠지게 되는데 ..
“ 괜찮을거야”라고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입국 거부와 구류 , 만
약에 일어날 수 있는 초유의 사태에
대비해 가슴을 졸였다 .
새벽 2 시 30 분에 우리는 이란에 도착했다 .
우리 옆좌석에 앉아 웃고 떠들던 사우디 아라
비아 무리들도 국경에 도착하자 긴장한 표정
으로 빨리 긴 옷으로 갈아입었다 .
이란에서는 이란인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남자는 긴 바지에 여자는 히잡을 써야 한다 .
나는 발목까지 오는 긴 옷이 없었기에 터키항
공 담요를 허리에 두르는 창피한 짓을 해서
안 그래도 동양인이라곤 우리 넷 밖에 없는
비행기에서 탑승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
과연 이란은 우리를 받아 줄 것인가 !
새벽의 시라즈 공항은 한적하고 조용했다 .
떨리는 마음으로 비자를 신청하고 기다리자
우리 앞에 와 있던 서양인 남자가 눈에 띄었
다 . 그는 무언가를 항의하고 있었지만 그의
보증인이 없었기에 비자를 받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 우리는 점점 긴장되었다 .
긴장 , 감동으로 바뀌다
우리를 구해준 천사 하메드와 시라즈 공항에서 한 컷
그나저나 우리 옆에 있던 서양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지 ..
공항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니 벌써 새벽 4 시
가 되었다 . 아직까지 비자가 나올지 불투명
한 상황 .
그런데 갑자기 어떤 남자가 건너편에서 오더
니 우리를 찾는다고 한다 .
맙소사 , 그는 우리의 두 번째 시라즈 카우치
서퍼 하메드였다 . 터키에 있는 동안 배터리
가 떨어져 그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고 몇 시
에 도착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 ‘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와 본 것이란다 . 하메드 덕분
에 우리는 무사히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
입국심사를 받는데 CNN 자료화면이나 헐리
우드 영화에 등장할 거 같이 생긴 아저씨들이
나를 위 아래로 훝어보았다 . “ 코리아 ?” 또
긴장 . 그런데 활짝 웃더니 “두유 노우 주
몽 ?” 한류의 인기를 그때 실감했다 . 그들은
무척 친절하게 우리를 통과시켜 주었다 .
이렇게 우리는 최고의 첫인상을 받으며 시라
즈에 무사히 도착했다 !
사이드네 집
한복을 입고 좋아하는 사이드
그렇게 우리는 하메드의 ‘삼성’차를
타고 ( 하메드의 아버지가 삼성에 근
무하신다 ) 첫 번째 카우치 서퍼 사
이드의 집에 도착했다 .
그 때가 새벽 5 시였는데 , 사이드
는 그때까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
다 . 우리가 새벽 2 시 30 분에 입
국이라고 했으니 기약없이 밤을 샌
것이다 .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우리를 따뜻
하게 맞아준 사이드는 우리에게 직
접 만든 장미 차에 수박 주스를 섞은
달콤하고 시원한 음료를 건네주었
는데 , 그게 우리가 이란에서 먹은
첫 음식이자 친절한 이란의 첫 느낌
이었다 .
시라즈
사이드네 집에서 딱 두 시간 자고 , 사이드가
만들어준 맛있는 아침밥을 먹고 우리는 시라
즈를 만나러 떠났다 .
이란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4 일
뿐 , 시라즈에 체류한 기간은 단 이틀 뿐이기
에 몸이 고되어도 쉴 수 없었다 . 그리고 친절
한 이란 사람들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그 피로
를 싹 잊게 해주었다 .
시라즈가 테헤란처럼 대도시가 아니어서 그
런가 , 여행객들은 드물었다 . 동양인들은 더
희귀해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호기심어린 눈
길을 받을 수 있었다 . 그 눈길들은 우리를 노
골적으로 주시했지만 차갑거나 부정적이지
않고 따뜻했다 .
길거리에서 사진을 찍자거나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많았다 . 우리가 생각하는 배척하는
분위기는 커녕 다들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
쳐 주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 14 일을 여행하
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시라즈 사람
들이 최고로 착하고 친절했다 .
하메드와 친구들
우리는 전날 우리를 구해주었던 하메드와 하
메드가 데려온 친구들과 함께 하루종일 시라
즈를 구석구석 쏘다녔다 .
고대 페르시아의 수도답게 시라즈에는 아름
다운 궁전이나 사원이 무척 많았다 . 세계의
유명한 문화재들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화려
하고 아름다운 문화재가 많았는데 다른 나라
와 외교를 안한다는 이유로 문화까지 알려지
지 않는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
궁전 구경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 우리에
게 남은 것은 하메드와 친구들이다 . 우리가
생각하는 이란의 전통적인 남녀상들과는 전
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
흔히 우리는 중동 사람들은 남자는 호색한 ,
공격적에 가부장적이고 여자는 검은 차도르
로 온 몸을 가리고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남
자는 일하고 여자는 집에서 애를 키우는 전통
적이고 가부장적인 삶의 방식을 가진다고 생
각한다 . 그러나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전혀
달랐다 .
우리의 친구들과 그 이력을 소개하자면 ,
하메드 : 말레이시아에서 박사 학위를 밟고 있
는 젠틀맨 . 깔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와 딱 달라
붙는 초록색 스키니진 , 웃을 때마다 하얗게 빛
나는 치아가 인상적 .
키안 : 시라즈 카우치서핑계의 대부이자 항상
우리를 웃게 해줬던 남자 .
마르잔 : 남편이 있지만 혼자 카우치서핑 모임
에 나오는 것은 물론 , 전 세계를 여행한 용감한
여행가 . 직업은 엔지니어이며 , 답답한 이란이
싫어 캐나다로의 이민을 꿈꾸는 담대한 여성 .
아살 : 비서 시험을 보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예쁜 여성 . 꾸미는 데 관심이 많다 .
이렇게 면면을 훝어 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 세계 여느 사람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
아가고 있었다 .
우리 팀원 네 명의 모습이 전혀 다르듯이 그들도 그
럴 텐데 , 왜 우리는 이란 사람들을 어떤 카테고
리에 넣고 생각한 걸까 ?
아크바르씨네 집
밤 , 우리는 하메드와 친구들과 작별하고 세 번
째 카우치 서퍼 아크바르 (Akbar) 씨네 집으로
향했다 . 몸은 부서질 것 같지만 이란 사람들의
친절과 환대는 피로를 잊게 해주었다 .
적십자회에서 일하는 아크바르씨는 신혼이다 .
부인인 마숙메 (Masukme) 씨는 인테리어 디자
이너로 일한다 .
아크바르씨네 집에서 우리는 하메드와 친구들
과 한 얘기와는 다른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
이란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남자들은 2 년동안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 . 아크바르씨의 아버지
가 걸프전에 참전했다고 한다 . 그는 진지하게
이란 정부와 정치에 대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었
다 .
아크바르씨는 상남자지만 부인과 아기에겐 약
한 남자였다 . 결혼식 때 찍은 뮤직비디오를 보
여주거나 친구의 아기에게 거침없는 사랑표현
을 하기도 했다 . 부인을 도와 음식준비나 설거
지를 하기도 했다 . 이렇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부장적인 중동 남성상에 대한 이미지는 자연
스럽게 우리 안에서 벗겨지고 있었다 .
페르세폴리스
페르세폴리스 , 세계문화유산이자 페르시아 문화
의 집대성인 거대한 왕궁을 이까지 왔는데 안 보고
갈 수는 없었다 . 그러나 전날의 피로로 너무 늦게
일어난 것이 문제였다 . 9 시에 일어난 우리들은 40
도를 가뿐히 넘기는 가장 더운 시간에 구름 한 점 ,
나무 한 그루 없는 산을 올랐다 .
‘ 페르시아의 도시’라는 말 그대로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간직하고 있는 페르세폴리스는 알렉산더 대
왕의 정복으로 파괴되었는데 , 왕궁에 불을 질러
녹아내리는 황금과 창고의 보물을 모두 가져갔는데
그걸 실어나르는 노새가 2 만 마리 낙타가 5 천 마
리였다 는 기록이 남아 있다 . 대부분 파괴되었지
만 남아 있는 황궁 정문의 황소 상만 봐도 페르시아
제국의 위엄을 짐작할 수 있었고 , 이런 황홀한 문
화의 후손인 이란인들이 가진 자부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
그런데 기원전에 세워진 왕궁의 기둥들은 아무렇게
나 뒹굴고 있었다 . 심지어는 그 유명한 사자상도
우리가 얼마든지 만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 사
이드가 말하길 “이란 정부는 페르세폴리스를 내버
려 두고 부정한다 . 그들은 이란이 이슬람 이후부
터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
종교와 정치와 문화는 분리되어야 하고 , 이란 사
람들도 그걸 잘 인식하고 있는데 이란 정부만 그걸
모른다 .
아크바르씨네 처가 방문
아크바르씨의 부인 마숙메씨에게는 한국을
좋아하는 언니와 동생이 있다 . 이란에서는
한국 드라마가 더빙으로 방송되는 채널이 있
고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아주 높다 . 사극은
물론이고 트렌디 드라마 , 심지어는 인기가
요까지 나온다 .
마숙메씨의 언니와 동생은 한국인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데도 한국어를 엄청나게 잘
했다 . 그래서 아크바르씨는 다음날 우리를
처가 , 즉 마숙메씨가 결혼하기 전 살던 집에
초대해 주었다 . 우리는 즐겁게 한국 드라마
나 문화에 대해서 얘기했다 .
동생은 추노 팬이고 언니는 엄태웅의 팬이
다 . 엄태웅이 1 박 2 일에 나온다는 것도 알
고 최근 윤아가 나오는 편까지 봤단다 .
동생과 언니 뿐만 아니라 마숙메씨의 아버
지 , 어머니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
중동 풍습 , 이슬람 계율에서는 무조건 손님
을 환대하라고 한단다 . 우리는 안그래도 입
에 맞지 않는 이란 음식을 웃으면서 듬뿍 듬
뿍 먹어야 했다 .
아크바르씨네 처가 방문
더 놀고 싶었지만 우리는 가야 했다 . 새
벽 1 시에 이스파한 행 버스를 예약했기
때문이다 . 몇 시간 놀지도 못했는데 ..
아쉬움이 터진다 .
그 때 , 마숙메씨가 우리에게 어떤 비닐
봉지를 준다 . 열어보니 아까 강심언니
가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다 . 가는 길에
먹으라고 어머니께서 싸 주신 것이다 .
강심언니가 눈물을 흘렸다 .
이렇게 시라즈 사람들은 고작 이틀 머물
었을 뿐인데도 우리에게 친절함을 넘어
감동 그 자체다 .
밥을 먹은 후 마숙메의 언니와 동생이 쓰는
방을 구경하는 도중에 동생이 게임판을 꺼냈
다 . 이란 전통 보드게임을 가르쳐주겠단다 .
그런데 오빠들도 부른다 .
“ 어 ?? 여자방에 남자가 들어와도 되니 ?”
“ 응 , 뭐가 문제야 ?”
이렇게 또 하나의 편견을 깬다 ..
시라즈에서 이스파한 가는 길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스파한 가는
버스에 탔는데 , 내가 핸드폰을 잃
어버렸다 . 아마 아크바르씨네 집에
두고 온 것 같다 . 20 분 뒤에 차는
출발해서 발만 동동 구르는데 우리
의 첫번째 카우치 서퍼 , 우리의 보
호자사이드가 택시로 찾아다 주었
다 . 마지막까지 시라즈는 감동이었
다 .
시라즈에서 이스파한은 4 시간 정
도 걸렸다 . 잘 자고 있는데 갑자기
버스가 서서 승객들을 모두 내리게
한다 . 제복을 입은 경찰들과 경찰
견이 버스 안으로 들어가서 검문을
했다 .
우리가 더이상 비교적 자유로운 시
라즈에 있지 않고 , 대도시 이스파
한에 왔다는 게 느껴졌다 .
이스파한 - 마흐디네 집
마흐디는 이스파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는 29 세 늦
깎이 (?) 대학생이며 , 부모님과 한 집에 살고 있으며 ,
개인 소유의 푸조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다 .
마흐디에 대한 첫 인상은 이거다 . 아니 마흐디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난 모든 이란 남성에게 해당되는 인상이지만 ,
‘ 친절함’ 이다 .
거의 모든 행동에 친절함이 배어 있다고 보면 된다 . 물론
여성 한정이긴 하지만 .
사진은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마흐디 이다 .
우리가 마흐디에게 해주었던 그 어떤 것보다 이 한복을 가장
좋아했다 .
사실 다음 일정을 생각하면 여기서 마흐디에게 한복을 주고
갈 순 없었는데 , 마흐디의 간절한 눈빛이 우리로 하여금
한복을 내려놓게 했다 . 비싼 돈 주고 산 한복인데 ...
지금까지 살아온 짧은 인생 중 , 부모님을 제외하고 우
리에게 있어 가장 큰 감동을 선사해준 우리의 사이드 (20
세 , 무직 ) 을 뒤로하고 , 난생 처음 버스 검문 (?) 을 받
아보기도 한 끝에 , 오전 7 시쯤 새로운 도시인 ‘이스파
한’에 도착했다 .
마흐디
앞서 소개했지만 , 마흐디는 29 세의 영문학을 전공
하는 대학생이다 .
그는 우리에게 자신은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자신
을 소개했지만 , 우리가 보기에 그는 ‘한량’이라
는 단어가 정말 딱 들어맞는 그런 남자였다 .
첫 만남부터 그랬다 . 우리에게 9 시까지 수업을 들으
러 간다고 하면서도 , 계속 소녀시대 동영상을 보
느라 바빴던 그는 , 오후에 ‘실크로드’에서 재회
했을 때 ,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손바닥
을 보여줬다 . 시험을 봤는데 공부를 하나도 안해
서 컨닝을 했다고 자랑하는데 , 우리는 그저 웃기
만 했다 .
그리고 혼자 계속 지루해 하다가 아르메니아인 여자친
구 ( 지금 돌이켜보면 그의 수많은 여자친구 중
하나였다 .) 를 만날 때 다시 한껏 폼을 잡으며 우
리를 가운데에 두고 말이 많아졌다 .
마흐디의 집에 있었던 기간은 겨우 이틀이지만
만난 마흐디의 여자친구는 엄청나게 많았다 .
마흐디
그는 사이드와 달리 우리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 성격은 아니었
다 . 그러나 상남자중의 상남자였다 .
사실 우리가 아민 일행과 공원에서 문화에 대해 토론을 벌였던
날 , 마흐디는 같이 있긴 있었지만 , 완전히 찬밥 신세나
다름 없었다 .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 마흐디는 그들과 친분은커녕 일면
식도 없는 상태였는데 , 우리가 아민과 연락을 했기 때문
에 , 책임감 하나만으로 그 자리를 꿋꿋이 지켜 주었던 것
이었다 . 의리남이라는 수식어 말고는 더 떠오르는 수식
어가 없다 .
가장 오른쪽에 모자를 쓴 남자가 마흐디인데 , 그는 이 사진을
찍은 순간 뿐 아니라 , 이 토론 내내 이 자세를 하고 있었
다 . 토론을 마치고 난 뒤 , 우리가 정말 미안하다고 몇
번을 얘기했지만 , 마흐디는 표정이 좋지 않다가도 , 우
리가 말을 걸면 계속 자신은 괜찮다고 했다 .
그러나 후에 마흐디의 데이트에 우리가 이용되었던 것을 생각하
면 , 이 상황은 지금은 그렇게까지 미안한 상황은 아니었
다 .
앞서 만난 사이드와 달리 , 만날 때마다 옆에 있는 파트너
가 바뀌어 있는 마흐디의 능력 . 솔직히 우리 아라뷰 팀은
그를 매우 부러워했다 .
사실 이 토론은 전혀 마흐디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
마흐디의 컨닝 페이퍼를 보여주자
토론 모임의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렸다 !
수상한 카펫가게 - 실크로드
이맘 호메이니 광장의 한 구석에 위치한 카펫가게 ‘실크로드’ 는 단
순한 카펫가게가 아니다 .
전 세계의 카우치서퍼들과 소통을 할 수 있으며 , 페이스북 등 외
부 인터넷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 수많은 여행객이 들러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일종의 아지트이기도 하다 .
이란의 국내 인터넷 통제는 페이스북 접속 금지와 유투브 등의 사이
트 접속 금지를 넘어서 , 2013 년 7 월에는 자국민 통제를 위
한 국민전용 이메일 계정을 모든 이란인에게 보급중인데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30710017010
참조 )
이렇게 통제가 심한 나라임에도 , 소통에 목마른 이란인들은
이러한 비밀 아지트를 통하거나 , 프록시 서버 우회 등의
방법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외국을 접하고 있다 .
‘ 실크로드’의 주인장인 OO 는 단순한 아지트를 넘어서 더 많은 카펫
판매를 위한 주춧돌로써 위험을 무릅쓰고 가게를 운영하고 있
다 . OO 는 이렇게 생각한다 .‘ 더 많은 관광객들이 우리 가게
를 쉼터로 이용하고 , 페이스북을 쓰면서 한번이라도 자기네
가게가 언급될 수 있다면 , 그게 바로 세계에 광고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실로 대단한 포부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
우리 아라뷰 팀도 여기에 들러서야 겨우 인터넷을 쓸 수 있었다 .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 이란이라는 국가는 와이파이존도 찾
기 힘들뿐더러 설령 찾는다고 해도 , 웬만한 사이트 , 하다
못해 한국의 네이버 블로그도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놓아서 마
치 눈과 귀가 막힌 듯 한 느낌이었는데 , 여기에 들러서 겨우
다음에 만날 현지인과 약속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서 ...
그러나 위에서 한 설명만으로 실크로드를 마무리 짓기에는 뭔가 부
족하다 .
이 부족함을 채워줄 사람이 바로 사진의 청년이다 .
사진의 청년은 이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인데 , 손님이 와도 시큰둥
할뿐 아니라 , 뒤치다꺼리는 사장이 전부 다 하고 , 이 친구
는 사장에게 반말을 할 뿐 아니라 , 우리와 얘기하느라 정신
이 없다 .
우리의 시라즈 친구 사이드에 대해 얘기할 때 언급하겠지만 , 우리
의 편견과는 달리 이란은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사이가 아주 유
연하다 . 서로 대등한 입장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용주가 고압적인 경우도 거의 없고 , 피고용자의 경우도 마
찬가지라고 한다 .
그러나 이를 몰랐던 우리는 , 이 친구가 아르바이트생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 사장은 아래층에서 영업하느라 진땀 흘리
고 있는데 , 이 친구는 그저 먼산 바라보듯 손님들을 2 층에
앉아서 쳐다보기만 할 뿐 , 하루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각설탕
자르는 일 뿐이었다 .
우리가 하도 신기해서 질문했더니 , 이 친구는 변함없이 웃는
표정으로 "It is very very important thing" 이라고 한
다 .
설탕 자르는 일이 카펫 하나 파는 것 보다 중요하다고 하는 이 친
구 . 우리는 이 친구에게서 진짜 여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배
울 수 있었다 . 아래 사진은 아라뷰의 리더인 라일라가 아지트
에서 페이스북을 사용하는 모습이다 .
수상한 카펫가게 - 실크로드
couch surfing gathering 과 함께한
문화 토론
이스파한에는 카우치 서퍼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 이 모임을 주도하
는 친구가 바로 아민 (20 세 , 무직 ) 이었다 .
이스파한에 도착한 첫날 , 마흐디 덕분에 제 시간에 분위기 좋은 공
원에서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다 .
가장 오른쪽에 초록색과 흰색이 섞인 옷을 입은 친구가 카우치서퍼
개더링을 주도하는 ‘아민’이라는 친구다 . 이 친구는 스무살이
라는 아주 믿기지 않는 나이를 가진 친구인데 , 한국 문화에 대
한 관심이 우리 아라뷰 보다 훨씬 더 많았다 .
단순히 문화 뿐만 아니라 ,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까지 , 비록 인터
넷으로 습득한 지식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 모르는 것이 전혀
없었다 . 게다가 한국어도 수준급으로 한다 .
이란에 도착하기 전 , 아민과 미리 컨택을 취해서 , 이스파한에 도
착한 첫날 , 이렇게나 많은 이란의 젊은 대학생들과 만날 수 있
었는데 , 사람이 많은 만큼 토론도 정말 수준급이었다 .
우리는 우리의 프로젝트 성격에 맞는 질문을 준비해갔고 , 이들은
대한민국 내에서의 이란인들의 이미지와 기타 문화에 대한 질문
을 준비해 와서 토론을 시작했는데 , 앞에서 설명한 내용으로
는 토론이 아닌 토의가 걸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 굳이 토론이
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거다 .
한국인들의 편견에 대한 말을 듣고 갑론을박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
이들은 아랍인들의 대외 인식에 대해 불쾌함의 감정이 아닌 , 안타
까움의 감정으로 답을 대신했다 .
서구 언론에 의해 왜곡된 이미지가 이들에게 있어 정말 큰 타격과 마
찬가지라는 점을 다시 한번 당부하고 싶다 .
특히 같이 토론하던 친구들은 미래에 한국 또는 일본 등의 아시아 국
가에 유학하는 것이 꿈인 친구가 많았는데 , 우리의 얘기를 듣
고 화를 먼저 내기보다 , 이란 정부를 탓하는 경향이 있었다 .
이란 사람들은 개방을 원하고 , 누가 보더라도 현대 사회에서는 폐
쇄가 아닌 개방만이 이란이라는 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인데 ,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슬람
원리주의 등의 폐쇄 정책을 펼치고 있는게 1 차적인 문제라고
주장했다 .
단순히 서구 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말을 듣고 ,
우리 아라뷰도 느끼는 점이 상당히 많았다 .
자유를 항상 누리고 있는 우리로서 , 자유가 제한된 이란 사람들과
공감하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지만 , 이 시간을 통해서 조금이
나마 감정을 공유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서
다시 한번 동원 글로벌 익스플로러에 감사를 표한다 .
couch surfing gathering 과 함께한
문화 토론
아르메니아인 마을 방문
이란에는 순수 이란인만 살지 않는다 . 물론 지금도 대부분을 차지하
고 있는 사람들은 순수 이란인이긴 하지만 , 전쟁으로 인해 아프
가니스탄인이 많이 유입되고 , 내전으로 인해 시리아인들이 정말
많이 이란으로 피난와서 정착중이라고 한다 . 그리고 옛날 터키에
의해 학살당했던 기독계 아르메니아인으로 이루어진 마을도 이란
이스파한에 있다 .
그러나 우리가 애초에 이곳에 방문할 예정은 전혀 아니었다 .
우리의 호스트인 마흐디가 자신의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갔던 곳인
데 , 도착한 후에야 마흐디가 이곳이 바로 아르메니아인 마을이라
고 소개해줘서 짤막하게나마 설명을 들었던 곳이다 . 사실 아르메
니아인 마을이라고 해서 별다를 건 없다 .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
니아인이라고는 하지만 모스크도 있고 그냥 보통 마을과 다름없었
다 .
단지 특별했던 건 , 마흐디의 아르메니아인 여자친구였다 .
이곳은 짝퉁 Nescafe 이다 . 그러나 짝퉁 브랜드였음에도 불구하고 상
당히 준수한 커피 맛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
그러나 우리는 마흐디의 데이트에 이용되었던 것이었다 . 토론할때까
지만 해도 표정이 그렇게 좋지 않았던 마흐디가 , 이날 여자친구
앞에서는 토론에서 자신이 중심이었다 , 외국인 친구들도 많다 ,
이런 식으로 자랑을 시작하니 , 우리는 그저 부러움 반 , 어이없
음 반으로 마흐디를 쳐다볼 뿐이었다 .
다행히 커피가 맛있어서 이 카페에서 버틸 수 있었지 , 그렇지도 않았
다면 , 이 사랑의 줄다리기 속에서 우리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
자메 (Jameh) 모스크
우리가 방문했던 자메 모스크는 이스파한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 도시가 세워질 때는 모스크가
먼저 세워지고 그 주위에 바자르가 형성된다 . 즉
이란인의 삶은 모스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
자메 모스크의 자메는 영어로 Congregational 이라는
뜻으로 회중이 모이는 모스크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
자메 모스크는 우리가 그 전에 방문했었던 모스크
와 느낌이 색달랐다 . 화려한 타일이나 장식은 없
지만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그 분위기가 우리를 압
도했다 . 그리고 모스크 내부의 건물 하나하나 심
지어 기둥 하나하나 마저 역사적 의미를 갖고 우리
에게 이슬람 문화의 진수를 맛보게 해 주었다 .
그러나 자메 모스크를 방문했을 때 손님은 우리 말
고 거의 없었다 . 터키에서 본 블루모스크와 비교
해 봐도 전혀 뒤지지 않을 것 같은 이 웅장하고 화
려한 모스크에 관광객이 우리밖에 없다니 ..
정치상황 때문에 전 세계의 다른 사람들이 이런 훌
륭하고 아름다운 문화 유산을 알지 못한다는 게 너
무 안타까웠다 .
모스크에서 우리를 가이드해 준 아저씨가 있었다 .
옥스포드 영어사전을 옆에 낀 아저씨는 유창한 영
어로 한참을 모스크에 대해 설명해주다가 끝날 때
가 되니까 우리에게 돈이 있냐고 물었다 .
우리는 여행지에 빈번한 사기 가이드가 아닐까 의
심했지만 그 아저씨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그 나라
의 돈을 받아 조금씩 수집하고 있었다 . 우리도 한
국 돈을 조금 드렸다 . 세계와 소통하고 싶어하는
이란 사람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
체헬소툰 궁전과 이희수 교수님과의 만남
자메 모스크를 나와 이란인 친구들과의 약속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
아 우연히 들리게 된 체헬소툰 궁전 .
거기서 만난 이들은 이란 청소년 대회 ( 무슨 대회인지는 모르겠다 )
에서 뽑힌 여학생들의 무리였다 . 학생들은 우리를 둘러싸더니
한국과 이란에 대해 엄청난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 주로 이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많이 물었는데 , 이런 걸 보면 이란
사람들은 참 순수하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이란에
대한 인식이 안타깝게 느껴지면서 꼭 이란에 대해 똑바로 알려야
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
그리고 체헬소툰 궁전에서 아라뷰 팀은 엄청난 인연을 만나게 된다 .
바로 한국이슬람학회 학회장이시자 자타공인 국내최고의 이슬람
전문가이신 이희수 교수님과 체헬소툰 궁전에서 아주 우연히 마
주치게 된다 . 교수님께서는 다른 일행 분들과 이란 여행을 즐기
시던 중이었는데 , 우리가 그 동안 동원 글로벌 익스플로러를
준비하며 중동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이희수 교수님의 책과 글을
많이 읽고 큰 도움을 받았었다 .
그래서인지 교수님과의 만남은 탐험으로 인해 지쳐있던 우리들에게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 주셨다 . 우리들에게 격려의 말씀과 약간
의 용돈 (!) 그리고 한국음식들을 주셨고 이것이 우리가 무사히
중동 여행을 마칠 수 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
교수님 , 감사합니다 !
아민과 그의 친구들과의 두번째 만남
- 전통 음식 교류 -
이희수 교수님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우리는 어제
만났던 아민과 그의 친구들과의 한 - 이란 문화 교
류를 위해 다시 만나게 되었다 . 이날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많은 이란인 친구들이 우리들과의 소
통을 위해 와주었다 .
이날 모임은 전날 과는 달리 아주 자유로운 분위기 속
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진행되었다 . 서로에
대해 평소 궁금했던 것들에 대해 질문하며 서로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서 조금은 벗어 날 수 있었다 .
특히 이란인 친구들은 한국의 문화에 대해 많은 관
심을 보였는데 한국 드라마와 한국 가수들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
특히 이날 모임의 하이라이트는 한국음식 체험이었
다 . 여름이라 한국음식을 많이 준비해 가지도 못
했고 이슬람을 믿는 그들이기에 먹을 수 있는 음식
에 제약이 많았지만 채소로만 만들어진 깻잎절임
에 다들 많은 관심을 보였고 여러 친구들이 직접
깻잎절임을 먹어보았다 . 물론 그들의 반응은 우
리가 이란 전통 음식을 먹었을때의 반응과 매우 비
슷했지만 그래도 서로의 음식을 체험하고 서로의
문화에 대해 교류 할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다
.
자얀데 강 다리
우리가 여행 중이었던 7 월의 이란은 정말 덥다 . 이란의 산
에는 나무가 거의 없을 정도로 이란은 뜨거운 태양과 건
조한 기후를 가진 나라이다 .
그럼에도 우리는 이스파한에서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
바로 이스프한을 가로지르는 자얀데강을 통해서이다 .
페르시아어로 ‘자얀데 루드’라고 불리는 이 강은 저이단
( 생명을 주다 ) 이란 동사에서 온 자얀데 ( 생명을 주
는 ) 라는 형용사와 강을 뜻하는 루드가 합성된 말이다 .
다리는 두 개가 있는데 모두 몇 백년 전에 지어진 것이다 . 그
옛날에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다리를 건설하다니 .. 페
르시아인들의 건축 기술에 다시금 놀랐다 .
그 이름에 걸맞게 자얀데 강은 이스파한 사람들에게 생명력을
공급해 주고 있었다 . 이른 시간부터 자얀데 강 주변에
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 우리나라의 청계천 (?)
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 가족끼리 , 친구들끼
리 혹은 연인들끼리 함께 모여 이란의 살인적인 무더위를
피하고 자얀데강의 시원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 우리도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란 친구들과 함께 강에서 놀며
무더위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
자얀데 강 다리를 마지막으로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과 아쉬
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요르단으로 떠났다 .
이스파한 공항
작고 , 약간 낡았고 , 우리에게 ‘주몽’을 얘기
하며 웃어주던 시라즈 공항의 직원들은 없었
다 . 이스파한공항은 에어컨이 아주 강해서
춥고 엄청나게 넓었다 .
우리 말고도 다른 사람들의 표정에서 긴장을
읽을 수 있었다 .
그러나 .. 긴장에도 불구하고 졸음은 왔다 .
일정상 공항에서 밤을 새야 했던 우리는 번갈
아가면서 씻고 먼저 나온 사람들은 골아떨어
지고 말았다 . 때문에 제일 마지막에 씻은 정
욱오빠가 우리를 지켜야 했다 . 나중에 오빠
말을 들으니 한국에서 챙겨온 고추장을 먹으
면서 버텼다고 한다 . 오빠 , 미안 !
출국 심사도 여자와 남자 따로 받아야 했는
데 , ‘ 히잡을 다시 써라’는 요구를 받았다 . 게
다가 온 몸 검색을 당했는데 아주 무섭게 생
긴 차도르를 쓴 할머니들이 내 몸 구석구석을
손으로 만지면서 훝었다 .
비자걱정을 했을때 신양섭 교수님의 경고가
떠올랐다 . 만약 우리가 이스파한으로 들어
왔으면 ? 100 퍼센트 입국비자는 커녕 구류
됐을수도 있다 . 우리가 운이 좋았다는 생각
과 함께 ‘이란은 아직 어려운 나라구나’는 생
각이 들었다 .
마다바
우리가 요르단에서 숙소를 잡았던 마다바라는 도시는 매
우 특이한 곳이었다 .
이슬람국가인 요르단 내에서 마다바는 기독교를 믿는 사
람들만의 공간으로서 존재해왔다 . 마다바에는 예
전부터 기독교인들이 살아왔는데 로마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기도 했다 . 그리고 이후 많은 교회
들이 마다바 내에 세워졌고 이러한 교회들과 유적들
이 중동이 아닌 색다른 곳으로서의 느낌이 들게 만들
었다 .
마다바는 성경에도 나올 정도로 기독교에서 갖는 의미가
매우 큰 도시이고 도시 전체가 교회들과 기독교 유적
들로 가득하다
마다바에는 아직까지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아가고 있다 .
기독교 신자와 이슬람 신자간의 갈등은 적은 편이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평화롭게 살아간다고 한다 .
그러나 요르단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그 비율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지금은 20% 정도밖에 안된다고 한
다 .
마다바에는 초기 기독교 , 로마 제국 , 비잔틴 , 이슬
람 시대 유적들이 한 장소에 함께 섞여 있다 . 이처
럼 현재의 요르단도 다양성을 인정하는 모습이 되었
으면 좋겠다 .
Fadi 아저씨 집
우리를 마다바로 초대했던 분이 바로
Fadi 아저씨이다 . 이분은 예전에 요
르단 국방성에서 일하셨고 지금은 은퇴
하셔서 우리와 같은 여행객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취미로 하는 분이셨다 .
Fadi 아저씨 덕분에 마다바에 대한 역
사적 설명과 숨겨진 유적들까지 제대로
볼 수 있었다 .
특히 아저씨께서는 하루종일 걸어다녀 지
친 우리를 직접 집으로 초대해주셔서
쉴 공간을 마련해 주셨다 . Fadi 의 집
은 정말 크진 않지만 아늑했고 옥상에
는 베두인 전통 텐트가 있어 그늘 속에
서 쉴 수 있었다 .
지브릴의 아픔
마다바에 도착한 다음날 , 그러니까 전날 새벽에 굳게 닫혀있던 호텔 문
을 두드리고 체크인을 한 다음날 , 우리는 계획대로 미리 컨택했던
기독교인 요르단 Fadi 를 만났다 .
예전에 요르단 국방부에서 일하시다가 은퇴하신 ,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셨는데 , 정말 열정적이셨다 . 우리의 프로젝트에 대해 정
말 궁금증을 많이 가지고 계셔서 , 밖에 나가기 전에 호텔에서도 열
띤 토론을 펼치느라 힘이 들었다 . 그러나 이분이 짰던 하루 계획은
지브릴의 몸살로 인해 모두 백지로 돌아가버렸다 .
맨 처음 우리는 할아버지와 함께 성 조지 교회에 들러서 요르단에서의 기
독교의 위상과 현실에 대해 설명을 듣는 중이었는데 , 지브릴의 안
색이 점점 나빠지더니 , 전혀 추운 날씨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춥다고 하여 먼저 호텔에 보낼 수 밖에 없었다 .
지브릴은 자신의 강철체력을 강조하며 , 조금만 쉬다 오면 된다고 거의
으름장 (?) 을 놓고 호텔로 돌아갔으나 , 우리는 전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기에 , 할아버지께 양해를 구하고 지브릴의 방으로 향했
다 .
결과는 위 사진과 같다 .
이 더운 날에 이불을 목까지 덮고 에어컨까지 끄고 혼자 끙끙대며 잠
을 자고 있던 그는 , 당장 탈수 증세에 시달린다 하더라도 의심치
않을 상태였다 . 결국 이날 하루는 지릴의 병간호를 위해 모든 활동
을 중지할 수 밖에 없었다 .
다행히 열이 오르거나 하는 상태는 아니어서 , 인터내셔널 SOS 에 연락
은 하지 않았으나 , 몇시간이면 된다고 했던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
고 도통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서 , 덕분에 아라뷰 팀도 본
의 아니게 힘든 일정 중 푹 쉴 수 있었던 하루가 되었다 .
페트라
•
요르단에서 가장 유명하며 세계 7 대 불가사의중 하나인
페트라 , 우리는 비록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시간을 쪼개
페트라에 갈 수 있었다 .
•
페트라의 입장 요금은 일인당 50JD, 한화로 80000 원 정
도였다 .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유적이며 요르단 세수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
•
페트라는 정말 넓다 . 그리고 현재 발굴된 부분이 전체의
극히 일부분이라고 한다 .
•
페트라에 대한 감상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 보는 순간
이걸 인간이 만들었을까 라는 느낌이 들고 보는 내내 감탄
을 금치 못했다 .
•
페트라 내부 깊숙히에는 아직도 베두인족들이 산다 . 그
들은 페트라 안에서 직접 먹을 것을 구하며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살아간다 . 우리 일행이 페트라 안에
서 길을 잃어 헤메고 있을때 베두인족들의 도움을 통해 무
사히 빠져나왔다 . 관광객들은 상대로 하는 장사꾼들이
아닌 순수한 모습 그대로의 베두인족들을 만날 수 있어 참
좋았다 .
와디럼
•
와디란 아랍어로서 겨울에는 강이 되지만 비가 내리지 않
는 우기에는 마른 계곡이나 땅이 되어버리는 곳을말한다 .
즉 와디럼은 말그대로 사막이다 . 중동의 가장 큰 지형적
특징은 바로 사막이 많다는 것이다 . 그리고 우리 팀은 이
러한 중동의 사막을 직접 체험해보고자 와디럼에가게 되었
다 .
•
사막은 사람이 매우 살기 힘든 환경이다 .
그러나 이곳에서는 많은 베두인족들이 살아왔고 지금까지
도 살아가고 있다 . 그들은 사막이라는 인간이 살기 힘든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
•
그리고 이곳 와디럼에서 우리는 사막과 베두인족 문화 모
두를 체험 할 수 있었다 . 베두인족 텐트에서 그들과 함께
먹고 , 춤도추고 차도 마시며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살
아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이해 할 수 있었다 .
•
그들은 사막이라는 환경을 즐기며 손님들을 매우 중요시
여겼다 . 비록 하룻밤 동안의 짧은 체험이었지만 사막에
서 사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 할 수 있었다 .
씨타델
•
야잔이 우리를 데려가준 씨타델은 암만 시내에 있
는 유적지로서 요르단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 이 곳은 과거 로마 - 오스만투르크 -
현재 요르단으로 이어지는 유적들이 함께 어우러
져 있는 곳이었다 .
•
암만 시내 곳곳에는 이탈리아에서만 볼 수 있을거
같은 로마시대 유적들이 많았다 . 또한 과거 찬란
했던 오스만 투르크들의 유적들도 찾아 볼 수 있었
다 . 상반대는 성격을 가진 두 거대 제국들의 흔
적들이 공존하는 도시라는 느낌을 받았다 .
•
암만은 그렇게 유명하거나 화려한 도시는 아니
다 . 하지만 모든 서양의 역사가 이곳에 있었다 .
순수 요르단 청년 야잔
•
우리를 암만으로 초대해준 야잔은 요르단에 있는
한국 남부발전소에서 일하며 올해 8 월이면 한국
에서 공부를 하게 될 청년이었다 . 그래서인지 그
는 우리에게 그 누구보다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
주었다 .
야잔 덕분에 우리는 복잡한 암만의 시내를 쉽고 안
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
•
야잔은 순수 요르단 혈통으로 보통 우리가 생각하
는 중동사람들과는 달리 영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
사했다 . 그의 어머니는 현재 요르단 국세청에서
일하시는 분이셨는데 이분 역시 매우 유창한 영어
실력과 지식들을 가지신 분이셨다 .
•
야잔에게는 우리 말고도 현지의 한국인 친구들이
많았고 우리는 야잔을 통해 요르단에서 일하고 있
는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 요르단에서 일하
는 한국인들이 매우 힘든 환경에서도 열심히 살아
가는 모습을 보며 그들이 존경스러워 졌다 .
이란사람들의 차도르에 대한 생각
계율이 엄격하다고 알려져 있는 이란 . 그러나 차
도르를 쓴 사람은 대부분 중년 이상의 여성들이고
대부분의 젊은 여성들은 알록달록한 히잡을 자신
의 취향 대로 쓰고 다녔다 . 이슬람 계율에 따르면 ‘
머리카락이 보여서는 안된다’고 했는데 , 대부분은
정수리 저 넘어서 히잡을 걸치고 선글라스를 쓰는
게 이란의 유행인 것 같았다 .
이란 여성들에게 차도르나 히잡에 대한 의견을 물
어보자 , 이들은 거침없이 ‘싫다’며 부정적인 의견
을 토해냈다 . 마숙메씨는 수영을 하거나 등산 할
때도 히잡을 써야 한다고 했다 . 마흐디의 두 번째
여자친구는 취미가 보디빌딩인데 보디빌딩을 할
때에도 히잡을 쓰는 것이 너무 불편하고 힘들다고
했다 . 마르잔은 해외 여행만 가면 히잡을 벗는단
다 .
우리 생각에는 종교적인 이유이고 , 어렸을 때부터
쓰는 거니까 별 거부감이 없는 줄 알았다 . 그러나
여성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정부만 아니면 이 히
잡을 벗어던질 것”이라고 말했다 .
남자들도 여자들의 히잡에 부정적이었다 . 아름다
움은 보여져야 하고 , 여자들이 히잡을 벗는다면
남자들은 환영할 것이란다 .
무슬림 안으로
알록달록한 히잡을 느슨하게 착용한 여성들 .
이들에게 히잡은 하나의 패션 도구다 .
하지만 이란에는 곳곳에 사복경찰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밖에서 히잡을 안 썼다가는 큰일이 날 수 있
다 .
1960 년대 이란 여성들은 이미 미니스커트를 입은
전 세계에서 가장 멋쟁이 중의 하나였다 . 언제까
지 정부는 이런 톡톡 튀는 사람들을 가둬둘 수 있을
까 ?
하지만 이란에는 곳곳에 사복경찰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밖에서 히잡을 안 썼다가는 큰일이 날 수 있
다 .
1960 년대 이란 여성들은 이미 미니스커트를 입은
전 세계에서 가장 멋쟁이 중의 하나였다 . 언제까
지 정부는 이런 톡톡 튀는 사람들을 가둬둘 수 있을
까 ?
무슬림 여성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도르를 쓰고 다
니며 ,
차도르를 벗으면 남자들이 싫어한다 ?
무슬림 안으로
차도르 체험
재미있는 것은 차도르를 쓴 우리를 본 이란 사람들
의 반응이었다 .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나중에는 우
리가 재밌는지 우리 사진을 찍고 막 웃었다 .
그런데 많은 여성들이 하는 말이 “이거 왜 썼니 ? 이거
별로야 .. 벗어 ! 딴 거 예쁜 거 많아”우리가 잘 몰라
서 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여성들이 차도르
를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차도르를 벗을 때 시원했지만 뭔가 아쉽기도 했다 .
이틀 쓴 내가 그럴진대 지금 불평하는 여성들도 자
유의 시대가 온다면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바로 히
잡을 벗어버릴 수 있을까 ? 아니면 그냥 익숙하게
살아갈까 ?
무슬림을 알고 싶어 중동으로 떠난 나조차도 터키
에서 차도르를 쓴 여인들을 봤을 때 느낀 감정은 위
압적이다 , 폭력적이다 , 답답하다 등이었다 .
그러나 내가 직접 써보고 다른 사람들을 보니 그렇
게 무섭지 않았다 . 역시 뭐든지 그 입장이 되어 봐
야 아는 것 같다 .
무슬림 여성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도르를 쓰고 다
니며 , 차도르를 벗으면 남자들이 싫어한다 ?
무슬림 안으로
우리의 기도 체험이 실패한 까닭
우리는 무슬림 하면 생각나는 것이 , 하루에 5 번
메카를 향해 기도드리는 것이다 . 우리 팀도 그들
과 함께 기도를 하려고 마음의 준비를 해갔다 .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우리의 카우
치서퍼 사이드와 하메드들은 기도를 할 생각이 없
어보였다 . 시라즈보다 엄격하다는 이스파한에 가
도 마찬가지였다 .
자메 모스크에 갔을 때 , 남자들이 엎드려 있는 걸
보았다 . “ 아 ,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 구나” 가까이
가보니 그들은 모스크 그늘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
다 .
또한 이스파한 토론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 중 이슬
람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 이란에도 교
회가 꽤 있고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한다 .
이렇듯 의외로 이란을 비롯한 중동 국가에서 종교
가 삶에 차지하는 비율이 높지 않다는 점이 우리를
놀라게 했다 . 오히려 매주 꼬박꼬박 교회에 가고
십일조를 드리고 성가대나 봉사활동을 다니는 우
리나라 기독교인들이 중동 사람들보다 훨씬 신실
하고 삶과 종교를 연관시키는 것 같다 .
중동에서는 운전중이라도 기도소리가 들리면
차에서 내려서 모두들 기도한다 ?
우리 생각보다 훨씬 세속적이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중동의 무슬림들
무슬림 안으로
라마단 , 금식하기 ?
우리가 요르단으로 들어갔을 때 , 막 이슬람 최고의 명
절 라마단이 시작되었다 . 라마단 때에는 이슬람 규율
에 따라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해가 떠 있는 동안 식사를 금지된다 .
우리도 요르단 친구 야잔과 함께 다니면서 해가 지기 전
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 그러나 더운 날씨로 떨어
진 입맛 그리고 끔찍했던 이란의 음식을 거부하면서 작
아진 위장 덕에 우리는 배가 많이 고프지도 , 힘들지도
않았다 . 다만 목이 마를 때에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
안 보는 곳에서 조심스럽게 마셨다 .
문제는 해가 지고 난 후였다 . 마침내 먹은 요르단 전통
음식 만사프는 정욱 오빠와 강심 언니의 속을 뒤집어 놓
았고 마지막 날 터키에서 두 사람은 끙끙 앓아야 했다 .
그리고 우리는 야잔의 집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밤을
새야 했는데 , 무슨 라마단 음식을 이렇게 많이 주는
지 .. 자정을 넘겨가며 기름지고 단 음식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 야잔 말에 의하면 밤에 많이 먹기 때문에 라마
단 때 살이 찌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
밖에서 라마단을 축하하는 폭죽이 터지고 우리는 그렇
게 배고픔은 커녕 배가 터질 듯한 기분으로 다음날을 맞
았다 .
라마단 때 모든 무슬림들은 강제로 굶어야
한다 ?
윗사진은 빨리 7 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야잔의 안타까운 표
정 . 우리를 데리고 하루종일 암만 관광을 다녔는데 물 한모
금 마시지 못했다 .
밑의 사진에서 마침내 마실 수 있는 시간이 되어 생수를 두
통째 비우고 행복해하고 있다
중동 사람들 속으로
에미넴 , 축구 , 군대 , 페이스북
‘ 한국 드라마’ 열풍 외에 이란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은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이란
과 한국 간의 축구 경기였다 . 사실 한국과 이란은 아주 오
래 전부터 아시아의 라이벌이다 . 남자들이 축구에 열광하
는 것은 우리나라나 이란이나 똑같았다 .
사실 중동 사람들은 서양 문화 , 특히 미국 헐리우드 문화
를 싫어할 거라는 편견이 있었다 . 그러나 젊은이들은 미국
영화와 음악에 열광했다 . 사이드는 에미넴과 리한나를 즐
겨 들었다 .
이란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남자는 군대를 의무적으로
2 년 다녀와야 한다 . 군대 가기 싫어하는 건 우리나라와 똑
같았다 . 군대 안 가고 버틸 거라는 친구도 있었고 , 대학원
생이라 군대를 미룬 친구 , 그리고 집에 돈이 많아서 군대
를 뺀 남자친구가 있는 친구까지 ..!
“ 실크로드”에서도 언급했지만 , 이란에서는 페이스북이 금
지다 . 그러나 실제로 아라뷰 팀이 여행을 다니면서 만난
이란인들 중 페이스북이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페이스북은 기본이고 왓츠앱에 트위터까지 .. 세계와 소통
하고 트렌드를 좇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의 특성은 우리나라
와 똑같았다 . 다를 게 전혀 없다 !
중동사람들은 서구 문화를 덮어놓고 싫어한
다 ?
중동 젊은이들은 과격하다 ?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중동의 젊은이들
중동 사람들 속으로
중동여성들은 철저하게 억압 받는
다 ?
이혼한 여자도 잘 살 수 있다
요르단에서 만난 야잔의 어머니는 오래전 야잔의
아버지와 이혼하셨다 . 흔히 우리는 중동 사람들은
이혼이 어렵고 특히 이혼한 여자는 가난하거나 힘
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하지만 야잔의 어머니는 내가 만난 그 어떤 중년 여
성보다 품위 있고 유식하신 분이셨고 , 훌륭한 아
티스트셨다 . 아버지를 제외한 야잔의 가족은 고급
아파트에서 잘 살고 있었다 .
이란엔 ‘공대 아름이’가 없다
마숙메에겐 세명의 여자 형제와 한 명의 남자 형제
가 있었다 . 여자 형제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큰언니
는 변호사 , 둘째 마숙메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 셋
째 동생은 엔지니어 , 넷째 동생은 광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 시라즈에서 만난 마르잔의 직업도
엔지니어였다 .
테헤란 대학교 정치학과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라
고 한다 . 이렇듯 이란에서 여자라고 못 가지는 직업
은 없다 .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이공계에 대해 여성
들이 느끼는 거부감이 적다 .
가정적인 중동 남자들
옛날 우리나라 남자들보다 더 가부장적이고 여자
를 억압할 거 같은 중동 남자들 . 우리는 이 편견을
깨기 위해 중동에 갔지만 중동 남자들의 다정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
우리의 세번째 서퍼 아크바르씨는 직접 차를 타오
거나 , 부엌에 들어가서 식사 후 뒷정리를 했다 .
또 처가에도 아주 잘하고 처형 , 그러니까 마숙메
의 언니와 동생들에게도 친근하게 대했다 . 이스파
한의 마흐디의 집에서도 우리에게 차를 가져다 주
시는 건 늘 마흐디의 아버지셨다 .
중동을 여행하면서 항상 보는 것이 아버지가 아이
를 안거나 데리고 있는 장면이다 . 아이들은 아버
지를 어려워하지도 아버지에게 혼나지 않는다 .
이런 면들을 봤을 때 중동 남자가 가부장적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편견이다 . 사우디 아라비아 같은
나라는 모르겠다 . 하지만 우리가 여행한 이란 , 요
르단 , 터키의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친절하고 , 아
이에게 다정하며 , 가정일도 하고 남자다울 땐 남
자다운 멋진 ‘상남자’였다 .
중동 사람들 속으로
중동 남자들은 다 가부장적이
다 ?
중동 사람들 속으로
중동여성들은 철저하게 억압 받는
다 ?
4 명의 부인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중동에 간다고 했을 때 친구들이 나를 이렇게 놀
렸다 . “ 너 중동사람의 100 번째 부인 되는 거 아니
냐 ?”
그러나 이란에서 두 번째 부인을 둔다는 것은 도덕적
으로 잘못되고 타락한 행동이라는 관념이 이란 사람들
에게 깊이 박혀 있다 .
게다가 가정에서 여성의 힘이란 상상 이상으로 강하
다 . 요르단에서 만난 파디 아저씨는 국방부 요직에서
근무하셨음에도 불구하고 , 아내에게 차를 빼앗겨 가
끔씩 딸을 학원에 데려다주러 아내에게 차를 ‘빌리는’
수준이니 ..
적극적인 중동 여성들
중동 여행 책 가이드에 보면 “남성들은 중동 여성에게 말
걸지 마세요 . 여성들이 당혹스러워 하고 , 괜히 중동 남
성들과 시비가 붙을 수도 있습니다 .” 라고 나와 있다 .
확실히 오빠들은 중동 여성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 왜냐
면 그쪽에서 먼저 걸어왔기 때문이다 !
중동 여성들은 상상 이상으로 적극적이었다 . 우리를 보
자마자 달려와서 ‘어느 나라에서 왔냐’ , ‘ 이란을 어떻게
생각하냐’ , ‘ 이란 여자 어떠냐’라고 물었다 .
이런 일이 여행하는 내내 있었다 .
중동 사람들 속으로
친절한 중동 사람들
앞에서 몇번이나 강조했지만 사람들이 정말 친
절하다 .
길을 물어보면 택시까지 꼭 태워서 보내준다 .
때로는 우리가 묻지 않아도 먼저 와서 가르쳐주
려고 하고 우리와 가까워지려 했다 .
오기 전에 사기를 당하거나 안좋은 상황에 몰릴
까봐 걱정한 것이 미안하거나 무색해질 만큼 중
동 사람들은 순수하고 다정했다 .
중동 사람들은 배타적이
다 ?
중동에 부는 한류바람
사실 아라뷰팀도 철저한 조사를 거치고 예상도 했지만 , 이
렇게 심할 (?) 줄은 몰랐다 . 바로 중동에서의 한국 인기
다 .
빅 히트를 친 ‘대장금’ ,’ 주몽’은 물론 그냥 한국 드라마 채널
자체가 자막만 입혀져 그대로 이란 / 요르단의 채널에 방
송되고 있었다 . 아예 MBC 가 그대로 자막을 달고 나오
는 채널도 있었다 . 중동 사람들은 그야말로 안방에서
한국 문화를 접하는 셈이다 .
요르단에서 만난 카우치서퍼 야잔의 여동생은 우리나라
에서 저조한 시청률로 급하게 막을 내렸던 “아가씨를 부
탁해”의 팬이었다 .
앞에서 언급한 아크바르씨네 두 처제들은 말할 것도 없
다 .
마흐디는 소녀시대의 Gee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즐거워했
고 , 마흐디의 여자친구 ( 중 하나 ) 는 동방신기의 엄청
난 팬으로 우리에게 동방신기에게 전해달라고 선물을
주었다 . 그녀는 한국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지만 유튜
브에 가면 페르시아어 자막이 입혀진 동영상을 전부 구
할 수 있다고 한다 .
이렇듯 중동에 부는 한류바람을 경험한 우리는 한류 컨텐츠
가 전 세계에서 통한다는 사실을 느끼며 뿌듯함을 느끼
는 한편 , 이게 단지 우리나라의 연예 컨텐츠 수출이 아
니라 이란과 대한민국의 쌍방향 문화 교류의 활성화 그
리고 나아가 두 양국간 사이를 앞당겼으면 하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
동방신기 (TVXQ) 를 가방에
수놓은 마흐디의 여자친구
동방신기의 이란 포스터
날개가 인상적이다
중동에 부는 한류바람
우리나라 기업 브랜드의 힘도 실감했다 . 아무리 구석진
곳엘 가도 <SAMSUNG> 의 파란 로고가 붙여져 있
었다 .
그리고 이란 사람들이 우리 생각보다 한국에 대한 관심
이 지대하고 한국에 대한 이해가 다른 나라들 보다
깊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랐다 . 많은 나라를 여행했
지만 보통 일본인이거나 중국인인줄 알고 , 한국이
라는 나라를 잘 모른다 .
하지만 이란인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다음에 나오
는 말은 “ North or South?” 였다 . 그리고 우리나라
브랜드나 역사에 대한 것도 굉장히 잘 알고 있었다 .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 서구가 주입한 왜곡되
고 편향된 시선으로 이란을 북한과 같이 “악의 축”으
로 보고 있을 뿐이다 .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란
인들에게 무한한 친절을 받은 사람으로서 꼭 돌아가
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을 바로잡을 것이라고
다짐해 본다 .
이란 사람들에게
카우치 서핑이 가지는 의미
1970 년대에 찍혀진 이란 사진 . 미니스커트에 세련된 스타일을 뽐내는 여자들이 보인다 . 하지만 현재의 이란은 모든 여성과 심지어는
외국인까지도 히잡의 사용이 의무화 되어 있다 . 1979 년 이맘 호메이니 혁명 이후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이란 국민들의 일상 생활이 얼마
나 급격하게 변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
하지만 정치와 제도가 변한다고 해서 사람들의 의식까지 같은 속도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 그래서인지 중년 이상의 어른들의 경우 생각
이 매우 열려있고 , 자유주의 시대를 살던 당시의 영향 탓인지 지금 세대의 젊은이들보다 다양한 문화에 더욱 친근감을 표현한다고 한
다 . 그런데 그런 부모님의 영향 아래에 자라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더욱 다양한 세상을 만나고 소통할 기회가 없
는 상황이라고 한다 . 우리의 호스트였던 93 년생의 사이드 친구는 젊은 남성의 경우에 돈이 매우 많지 않은 이상 병역을 마치기 전에는
해외를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했다 .
페이스북 사용도 정부가 금지한 상황이고 , 언론이나 일상 생활이 검열 당하는 이란 사람들에게 카우치 서핑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
먼저 그들이 직접 해외를 나가지 않고도 넓은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게이트였고 , 내부적으로는 " 더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 " 이라는
공통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의 동호회 역할을 하고 있었다 . 그래서인지 우리가 팀 소개를 하고 , 우리의 이란 방문 목적을 카우치 서핑 사
이트에 업로드했을 때 , 수많은 이란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연락을 받았었다 .
더욱이 한류에 힘입어 다들 한국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 우리가 공항 이미그래이션을 지날 때 조차 직원분들은 환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주몽 , 소서노를 외치곤 하셨다 . 그렇게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공항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 그래서일까 우리들은 환한 마음으로 이란에서의
일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
이란에서 4 일 동안 함께 토론을 하고 여행을 하며 만난 Hamed, Saeed, Marjan, Kiyan, Terme, Asal, Nazanin, Amin, Mahdy 등의 친구들은
카우치 서핑을 통해 오래 전부터 이미 독일 , 미국 , 중국 , 영국 등 다양한 세계를 만나고 있었다 . 그래서인지 식견이 매우 넓고 , 다른 문화
도 관대하게 수용하는 바다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 서로의 삶에 대한 질문을 나누며 우리는 양국의 정치 , 제도적인 측면이 극적이다 싶으
리만큼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네의 삶은 매우 닮았다는 것을 깨달으며 더욱더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었다 . 이방인과 손님을 귀하고 반갑게 여
기는 관습 때문인지 , Hamed 같은 경우는 우리가 그를 방문하겠다고 했을 때 , 많은 이란 친구들이 우리를 함께 보고 , 놀고 싶다고 말했었고
그래서 우리는 이란에서 일종의 갱처럼 늘 10 여명의 무리와 함께 시끌벅적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 같은 지역 카우치 서핑 회원들이 여럿 모
여 우리를 반겨주고 , 함께 식사하고 , 여행하면서 우리와 그들뿐만 아니라 , 그들도 서로 소통하며 소소한 즐거움들을 누려가고 있었다 . 10
대 학생 , 60 세 할아버지 , 엔지니어 , 박사 , 대학생 , 인공지능 연구원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서로의 나이 , 배경을 초월하여 함께 떠
들고 웃는 모습이 ,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훈훈하게 만들었다 . 게다가 자연스럽게 남녀간의 교류도 오갈 수 있기에 사교의 장
노릇도 하고 있었다 .
이란 사람들에게
카우치 서핑이 가지는 의미
•
중동 지역은 역사적으로 주요 강대국 사이에서 오랜 각축전장이 되어 왔다 . 그리스 ,
로마 , 페르시아 , 아랍 , 포르투갈 , 터키 , 영국 , 미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가
와 문화권이 이곳에서 첨예한 대립을 하기도 했었다 . 특히 중동의 페르시아만은 아시아 ,
아프리카 , 유럽 3 대륙과 대서양 , 인도양 , 태평양 등 3 대양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해왔다 . 제국주의 시대에는 무역 및 교통의 중심지로 , 1-2 차 세계 대전시에는 전쟁물자
보급로와 같은 전략적 요충지로 , 그리고 오늘날은 세계 경제의 대동맥이라 할 수 있는 석
유 수송로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 따라서 페르시아만은 강국들의 이해 관심 지역으로 전
략적 가치가 높은 위험지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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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은행에 올려진 2009 년 pewforum 전 세계 무슬림 인구 조사 데이터에 따르면 2009
년 전세계 무슬림 인구는 15 억 7 천만 명으로 전 세계 200 여 국가에 퍼져있으며 전 세계
인구의 23% 를 차지하고 있다 .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무슬림 인구의 60% 는 아시아에
거주하고 있고 , 20% 가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거주하고 있다 . 2011 년엔 향후 20 년 동안
무슬림의 인구가 비무슬림에 비해 두배 정도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 CIA
factbook 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성장률은 연간 1.12% 인 것에 반해 무슬림이 대다수인 국
가들의 인구 성장률은 1.8% 이다 . 따라서 2030 년엔 전 세계 인구의 26.4% 이 무슬림이
된다는 전망이다 . 최근 중앙 및 동부 유럽으로의 무슬림 이민 인구 증가 및 유럽 내에 정
착한 무슬림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고 , 프랑스 내 무슬림 여성의 히잡 착용 논란 같이
무슬림과 비무슬림간의 상이한 문화 차이로 인해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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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폐쇄적인 문화와 정권을 유지해 왔던 중동에도 아랍의 봄을 비롯한 변화의 붐이
일기 시작했다 . 여성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한 움직임 , 스마트몹 같은 대중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 그와 동시에 중동 시장이 급부상하면서 앞으로 카페베네를 비롯한 더 많
은 국내 기업이 이곳에 진출하고 있고 , 외국의 관심 또한 증대되고 있다 . 알면 이해하는
것이고 , 모르면 오해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중동에 대한 이해의 결여는 앞으로 수많은 오
해와 갈등을 낳을 것이다 . 2030 년 사회의 주역이 될 우리 모두 중동에 더욱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야할 것이다 .
중동의 가치
및 중요성
중동 여성 인권 향상 움직임
지브릴의 중간보고
지금 이 시점에서는 ‘아쉽다’라는 감정밖에 들지 않는다 .
돌이켜보면 , 하나도 쉽게 풀린 일이 없었다 . 우리가 준비했던 활동을 위해서도 , 이란 입국이 가장 중요한 문
제였는데 , 일이 잘 풀렸기에 망정이지 , 이란의 시라즈 공항에서 무턱대고 앉아있던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떨린다 . 어디 그뿐이랴 , 택시기사들은 어찌나 운전을 험하게 하고 , 중동 남성들은 왜 이렇게 무서운지 , 생
명의 위협을 느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한 데다가 , 우리 팀원 4 명이 땀 뻘뻘 흘
리고 나서 좁디 좁은 방에서 부대껴서 잘 땐 , 정말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밖엔 없었다 . 열악한 환
경에서 벗어나서 겨우 숨 돌릴 만 하면 , 몸이 아팠고 , 내가 괜찮아지면 친구들 상태가 나빠지고 , 정말 어려
웠다 .
그러나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아쉬움’이라는 것은 , 그곳에서 우리가 했던 모든 일들이 가치가 있었음을 반증
하지 않나 싶다 .
게다가 사람에 대한 그리움…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건만 , 이젠 외국인 친구들
의 웃음짓는 표정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 사이드 , 마흐디 , 무함마드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아쉬움’이라는 감
정의 제공자라고 생각한다 .
그리고 함께한 아라뷰 팀원 , 정욱 , 강심 , 소현 모두 최고의 팀원이었다 . 친한 친구와 짧게 여행을 다녀와
도 한 번은 싸우게 되는데 , 우리 아라뷰 팀은 13 박 14 일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동안 단 한번도 싸
우지 않고 서로를 보조하면서 활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 가장 좋았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
1 년 전에는 다들 얼굴도 모른 채 각자 갈 길을 걸었을 사람들이 , 동원 글로벌 익스플로러라는 기회를 통해 의기
투합하여 이렇게 무사히 활동을 끝마쳤다는 것이 , 정말 신기하다 .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에 , 소감이 아닌 ‘중간보고’ 정도로 해 두겠다 .
라일라의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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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친구를 사귀는 일은 하나의 세계가 걸어들어 오는 일이라고 한다 . 13 박 14 일이라는 짧은 여정 동안 우리는 3 개국을 돌았지
만 , 우리가 만난 세계는 20 여개가 넘는다 . 그 세계들이 모두 각양각색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 그 환한 빛 덕분에 우리는 더
욱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 공간은 사람이 만들어 나가는 것인데 유구한 역사와 대국의 기질을 가지
고 있던 페르시아의 후예들이 만든 이란이라는 공간은 우리에게도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 생동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느긋하게 앉아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 기다려주고 , 배려해주는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예뻐보였는지 모른다 . 어디를 가지 않더라도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소통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다 . 성경에서 다양한 위인들이 거쳐간 발자취를 비롯해 로마인 , 오스만 투르
크족 등의 흔적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요르단은 , 여전히 다양한 문화의 교차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 암만에서 홈스테이했던 Yazan
네 어머니께서는 요르단이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분쟁 국가의 피난민들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고 그로인한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고 하셨다 . 하지만 피난민들을 외면할 수 없기에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
르겠다며 고뇌하고 계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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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 곳 땅을 밟기 전에 요르단은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을 비롯한 중동 갈등에 있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국가였고 , 이
란의 경우 시아파 및 정교 일치 사회로 인해 때로 극단적인 행보로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는 국가에 불과했다 . 우리는 더 넓은 세계를
만나기 위해 뉴스와 미디어를 접하지만 , 미디어라는 프레임은 이해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 특정한 사건을 전달하는 현지 특파원
조차도 사건의 윤곽을 알지 못하더라도 기존의 틀에 맞춰 사건을 재구성해 보도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 그 동안 우리는 코끼리의 가장
못난 부분만을 돋보기 안경을 쓰고 보는 것처럼 중동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입국 전까지도 이란과 터키에서 발생한 사
건 , 사고 보도 등으로 인해 걱정을 많이 했었지다 . 그러나 우리가 몸소 느껴본 중동은 여유가 넘치고 , 따뜻한 정과 배려가 오가는 휴
머니스트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 어쩌면 내가 종종 한국에서 꿈꿨던 유토피아가 그 곳에 숨어있진 않을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 동원
글로벌 익스플로러가 없었다면 , 용기를 내서 분쟁과 테러로 점철된 것처럼 보이는 중동이란 나라에 덥썩 뛰어들 수 없었을 것이다 .
이제 중동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내가 중동이란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준 동원육영재단에 진심으로 감사드린
다 . 이 꽃을 잘 가꾸기 위해 나의 열정과 재능을 쏟고 ,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 2030 년 무슬림이 전 세계의
26.4% 가 되는 그날 나는 중동과 한국의 교량 역할을 하면서 , 중동과의 첫 만남 , 뜨거웠던 지난 7 월을 그리고 동원 글로벌 익스플로
러를 기억할 것이다 .
여행을 마치며 by 무함마드
여행을 마치며 ..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 주간의 여행이 막을 내렸다 . 짧은 준비 과정 속에서 여러 시행 착오를 겪었고 출발하는 그 순간까지 걱정
을 많이 했던 여행이었지만 , 우리 팀원들 모두의 운이 좋았던 덕분인지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여행을 끝마칠 수 있었다 .
우리가 선택했고 여행했던 중동은 아직 우리나라의 많은 여행가들에게는 낯선 곳이다 . 특히 여행을 준비하면서 이 점을 절실하게
체감 할 수 있었다 . 중동에 제대로 된 여행 책 하나 없는 상황이었고 정보는 오직 인터넷을 통해서 , 그것도 매우 제한적으로만 얻
을 수 있었다 . 또한 중동을 간다고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말할 때 마다 중동이 절대 위험한 곳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해야만 했다 .
하지만 중동이 절대 위험하지 않은 곳이라고 설명 하면서도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
에서 2 주 동안 버티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
그러나 이 모든 걱정과 불안을 뒤로하고 시작한 여행은 우리들에게 잊지 못 할 기억들을 선물해 주었다 . 우리의 여행은 결코 편한
여행은 아니었다 . 시작부터 비자 문제 때문에 여러 문제가 생겼고 , 이란의 살인적인 더위와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들 때문에 음식
조차 마음껏 먹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 또한 무리한 스케줄로 인해 체력적으로도 많이 힘들었고 , 제대로 씻지도 못했고 잠도
제대로 된 장소에서 잔 것이 손에 꼽을 정도로 강행군을 펼쳤다 .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즐거웠던 여행이었다 . 우리가 만났던 한 사람 한사람 모두 우리에게 잊지 못할 추억들을 남겨주었다 . 우
리는 그들에게 낯선 이방인이었지만 그들은 우리를 가족처럼 대해주었다 . 우리가 그들에 대해 관심도 별로 없고 잘 모르는 만큼 그
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 그들은 우리에 대해 과분할 만큼 많은 관심과 호의를 배풀어 주었다 . 우리의 여행은 사람들
로 가득 차 있었다 .
여행은 항상 무언가를 남긴다 . 그리고 이번 중동 여행 역시 나에게 많은 것들을 남겨 주었다 .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 그리고 만
남을 통해 얻은 추억들과 새로운 생각들은 나를 한 단계 성장하게 만들어 주었다 .
비록 우리의 짧았던 여행은 끝이 났지만 , 2 주 동안의 좋았던 기억들과 깨달음을 통해 앞으로 내가 나아갈 길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간
것 같다 . 이제부터가 진짜 여행의 시작이란 마음가짐으로 한국에서 내가 여행을 통해 얻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중동에 대한 편견이 가득한 우리나라를 변화시키는 그 시작점이 바로 이번 여행이었다고 생각한다 . 앞으로 더 많은 사람
들이 중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서로가 서로를 올바른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
파티마의 여행노트
내가 히잡쓰는 걸 어려워하는 걸 지나가다 보고 도와준 여성 .
중동 사람들의 인정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
사실 가기 전까지 많은 고민과 걱정이 있었다 .
피랍 당하면 어쩌지 (?) 하는 무거운 고민부터 피부가 엄청 탈텐데
어떻게 되돌려야 하나는 고민까지 ..
그리고 내가 안전하다고 부모님 , 친구들 , 그리고 동원 사람들까
지 설득했지만 과연 자신이 없었다 . 나 또한 책이나 블로그에서
읽은 것이 다였으니까 . 사실 나 또한 피상적인 정보만을 접한 채
‘ 중동은 안전하다니까 ? 그리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거 다 편견
이에요’ 라고 외치면서 비행기를 탔지만 , 나 자신도 편견과 두려
움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 중동은 ‘정말 안전
하고’ , ‘ 정말 생각과는 달랐다 .’
짧다면 짧은 내 22 년 인생은 이 13 박 14 일 전과 후로 나뉜다 .
이 기간 동안 나는 많이 받았다 . 세상을 넓게 보는 눈과 , 남들이
가지 않은 곳을 간 담대함 , 중동 사람들로 부터 전해 받은 따뜻한
마음 , 앞으로 더 많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결심까지 ..
오기 전까지 미래에 대해서 많이 방황한 나지만 이 여행을 통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는 생각이 든다 .
이 자리를 빌어
나에게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준 동원 글로벌 익스플로러
그리고 못난 동생을 데리고 여행하느라 너무너무 고생한
민규오빠 , 정욱오빠 , 강심언니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전한
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