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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Gazette d'Agora 2015년 학술제 특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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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Gazette d'Agora 2015년 학술제 특별호

  1. 1. 분열을 거듭하는 프랑크 왕국, 그 운명은? 서유럽을 통일했던 故샤를마뉴(742~814)가 사망하기 1년 전, 프랑크 왕국은 두 형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왕국의 유일한 상속자가 된 루트비히 1세와 공동으로 통치되었다. 프랑 크족의 상속법에 의해 국가가 하나의 국가로 써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황 제로 즉위된 지 3년 만인 817년, 루트비히 1세 는 프랑크족의 상속법을 무시한 채 자신의 큰 아들인로타르를공동황제로임명하였다. 상속권 문제가 불거진 것은 두 번째 부인의 아들에게도 국가를 나누어 주려 한 루트비히 ◀ 분열된 프랑크 왕국 1세의 변덕 때문이었다. 결국 아버지의 결 정에 반발한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켜 836년 루트비히를 폐위시키고 수도원에 감금하 였으나, 로타르가 국가를 독점하려는 것에 반발한 다른 아들들이 루트비히와 연합 하여 대항함으로써 그는 다시 복위되었다. 이윽고 큰아들 로타르 1세의 영토는 중프 랑크 왕국으로 한정되었다. 이러한 아들들 사이의 영토 분쟁은 843년 베르됭 조약에 의해 일단락되었다. 베르됭 조약을 통해 로타르 1세는 황제의 지위와 중프랑크 왕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셋째 아들인 ‘독일인’ 루트비히 2세는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고, 가장 어린‘대머리’카 를은 서프랑크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의 분할은 여기에서 그 치지 않았다. 로마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은 로타르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정상이 아니 었기 때문에, 자신의 왕국을 세 아들에게 물 려주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으 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사후 중프랑크 왕국은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은 맏아들 루트비히 2세의 이탈리아 왕국과 둘째 아들인 로타르 2세의 아우스트 라시아(로렌 지방), 막내아들인 카를의 왕국 (부르군트와프로방스지역)으로분할되었다. 3페이지에서 계속... 재미로 보는 프랑스 역사 신문 발행일 : 2015. 11. 13 La Gazette d’Agora는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학과 내 프랑스학술학회 아고라에서 발행하는 소식지입니다. 바쁜 일상 중에 접하기 쉽지 않은 프랑스어권의 시사 및 생활문화 소식을 한국어와 프랑스어로 정리하여 학과 내 구성원들이 간편하게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발행 목적입니다. 2015년 국제지역대학 로컬리티 학술제를 맞이하여 재미로 보는 프랑스 역사 신문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프랑크 왕국부터 제 5공화국까지 프랑스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거나 단순히 재미로 고른 주제들을 모았습니다. 읽는 동안 마치 오늘 일어난 기사를 읽는 느낌이 들 수 있도록 최대한 생동감 있게 쓰려고 노력했으니 조금 부족하더라도 재밌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사 내용 중에는 실제 역사 98%와 재미를 위한 2%의 상상력이 들어가 있습니다. 참여한 사람들 13 배준영 10 강현정 10 류정현 12 김소연 13 정미선 14 박소희 14 이미지 14 이지영 14 최은정 15 윤이지
  2. 2. 이렇게 세분할이 되어버린 중프랑크 왕국은 로타르 2세와 카를의 이른 죽 음으로 다시 한 번 분할과 통합의 과 정을 겪어야만 했다. 870년, 로타르 1세의 유일한 상속자로 남게된 루트 비히 2세가 삼촌인‘독일인’루트비히 2세, 그리고 ‘대머리’ 카를과 메르센 조약을 맺으면서 로트링겐 지방이 동 프랑크와 서프랑크 왕국의 영토에 속 하게 되었다. 불행히도 상속에 따른 영토 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은 루트비히 2세가 875년에 자신의 왕국을 물려줄 아들이 없이 사망하자,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 카를이 이탈리아를 차지하고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형제간의 오랜 영토 분쟁은‘독일인’루트비히의 사후 그의 영토가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 고, 877년에‘대머리’카를마저 사망하 자 그의 아들인 ‘말더듬이’ 루트비히 2세가 왕국을 상속함으로써 잦아드는 듯하였다. 그러나 왕국의 국경선은 ‘말더듬이’루트비히의 사망을 계기로 다시 한 번 분쟁 속에 휘말리게 되고, 이러한 분쟁은 2차 베르됭 조약과 리 베몽 조약으로 일단락된다. 이로써 샤를마뉴에 의해 완성된 거 대한 프랑크 왕국은 동 · 서프랑크 왕 국과 중부의 이탈리아 왕국, 그리고 상 · 하부르군트의 다섯 개 왕국으로 나뉘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은 '독일 인' 루트비히의 막내아들인 '뚱보' 카 를 3세에 의해 하부르군트를 제외한 전 지역이 재통합되었으나, 이도 오래 가지는 못한다. 카를 3세가 노르만 족과 사라센, 슬라브족과 같은 이민 족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 하자 조카인 아르눌프가 동프랑크 왕국의 통치권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샤를마뉴의피를이어받은카롤링거 왕조는 여섯 살에 즉위한 루트비히 4세가 18세의 어린 나이로 죽으면서 대가 끊기고 만다. 샤를마뉴의 대가 끊기고 북쪽의 노르만족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동프랑크 왕국의 왕위는 바 이에른, 프랑켄, 작센, 슈바벤, 로렌, 프리젠의통치자들이모여게르만족의 전통에 따라 선출한 프랑켄 공 콘라 트가 계승하게 되었다. 동프랑크 왕국 에서 제후들이 왕을 선출하고 이러한 전통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동안, 서프랑크왕국에서는카롤링거왕조의 마지막후계자인루이5세의사후에도 왕조적 정통성에 따라 왕위가 계승되 었다. 이와 같이, 911년에 프랑켄 공 콘라트 1세가 동프랑크의 왕으로 즉 위하면서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는 다 른 역사적 발전 단계를 밟게 된다. 911년 바이킹족에게 땅을 빼앗겼던 과거는 이제 지나갔다. 샤를 3세가 접전 끝에 바이킹 과의 조약 체결을 이끌어내었다. 900년대부터 바이킹족들에게 끝없이 서프 랑크 대국을 침략할 때마다 샤를 3세는 말을 이끌고 대부분의 전투에 참가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롤로의 지휘 아래 들어오는 무시무시한 군대에게 루앙과 파리, 샤르트르를 잇따라 빼앗겼다. 이런상황에서사상자가속출하면서농민들이 크게 반발하며 여론이 점점 악화되는 상황이 었다. 그러다 지난 8월 26일, 샤를 대군이 이끄는 군대가 샤르트르를 수복하기 위해 나섰다. 치열한 접전 끝에 값진 승리를 이끌어 내었고, 샤를 3세는 생 클레르-쉬르-레프트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을 통해 바이킹족의 노르 망디 지역을 얻어내었다. 또한, 바이킹족의 종교를 로마 가톨릭으로 바꾸고 봉신으로 만드는 쾌거를 이루었다. 값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면서, 수많은 전 투로 황폐해진 영토를 다시 복구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샤를 3세, 바이킹 격퇴! 샤르트르 지역에서 격퇴... 생 클레르-쉬르-레프트 조약 체결 충격, 루이 5세 사냥 중 사망 루이 5세가 오늘 오후 피카르디 지방 콩피에뉴 숲에서 사냥을 하던 도중 낙마 사고로 사망해 프랑스 사회가 충격에 빠졌다. 지난해 986년 왕위 에 오른 그는 겨우 1년만에 왕위를 놓게 되었다. 루이 5세는 부왕에게 반항했던 랭스(Reims) 대주교 아달베롱(Adalberon)에 대한 재판을 시행하기 위해 귀족회의를 소집한 바 있으나 회의를 하루 앞둔 오늘 변을 당해 왕의 죽음이 사고가 아닐수도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한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왕위를 계승할 후손조차 남기지 못하여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 링거 왕조 대가 끊길 위기에 처했다. 왕위 계승의 문제로 돌아오는 6월 1일, 대의회가 열릴 예정인데 가장 유력한 후보로는 샤를마뉴 대제의 모계 후손인 위그 카페(Hugues Capet)가 거론 되고 있다. 위그 카페의 최측근인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이 세습보다는 선출을 지속적 으로 주장하고 있는 만큼 이 주장이 받아 들여지면 서프랑크 왕국의 시대는 막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위그 카페가 새로운 카페(Capet) 왕조의 초대 왕으 로 등극할지는 아직까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성인(聖人) 왕 루이 9세 승하 … 숭고했던 그의 삶 이국땅 튀니지에서 숨져 안타까움 더해 그의 생애 업적이 뒤늦게 조명 받고 있어... 마지막 유언은 “예루살렘, 예루살렘.” ‘성 프란체스코가 왕관을 쓴 듯한 왕이라고도 불리는 루이 9세가 승하했다. 형 샤를의 조언에 따라 튀니지의 태수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마지막 십자군을 일으켰으나 개종 에도 실패하고 그 곳에서 열병까지 얻어 숨지고 말았다. 한편 그의 생애 업적이 알려지면서 이 죽음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12살에 왕위에 오른 루이 9세는 귀족의 반란을 진압해 왕권 을 강화하고 어수선했던 행정 조직을 확립하였다. 또한 그는 검소하게 생활하려고 노력했으며,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펼 쳤다. 또한 교황과 친밀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황과 신 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분쟁에서는 공정하게 중립을 지켜 일처리에 있어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한다는 평가를 받 기도 했다. 이는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한 조정자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가 성인(聖人) 왕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모든 일은 도덕적이 고 신앙적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1248년 그는 이집트로 십자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이집 트의 다미에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카이로 진격 작전을 수행 하던 중 고립되어 몸이 쇠약해졌다. 거짓 왕명이 작성 되어 무조 건항복을하게되었지만예루살렘을포기할수없었던루이9세는 왕비와 함께 시리아의 아크레에서 십자군을 다시 일으킬 준비를 했다. 결국 1270년 튀니지에 다시 진격하지만 무더위로 열병에 걸려 무기조차 들지 못하고 그렇게 그의 꿈은 막을 내렸다. 성지 회복이라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신을 위해 끝없이 진격 했던 왕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 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초라했다. 백성을 너무나 사랑한 나 머지, 십자군 전쟁 중 끌려간 포로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의 허리는 굽었고 머리는 모두 빠졌다. 그의 외모는 이렇게 볼품없 어진 채로 세상을 떠났으나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루이14세, 태양과 같은 권위와 황금보다 빛나는 문화를 구축하다 루이 14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흔적은 그를 오래토록 기억하게 한다. 그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 재상 마자랭과 어머니의 도움으로 정치 기반을 다 졌으나 귀족들이 부르봉 왕조에 반항하여 난을 일으켜 왕실이 피난을 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반란을 3개월 만에 진압하며 그는 오히려 부르봉 왕조의 절대왕권 확립의 길을 터놓게 되었다. 루이 14세는 콜베르 재 상과 함께 프랑스의 경제력을 강화하고 프랑스를 유럽 최대의 강국으로 만 들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 정치, 경제 뿐 아니라 문화에도 관심이 상당했던 루이 14세는 라신, 코르네 이유, 몰리에르 등 당대의 뛰어난 시인과 예술가들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 록 후원한 바 있으며 낡은 궁전 수리와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병 원 신축 등 건축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생전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 건축 과정에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해 구 설수에 올랐으나 화려한 궁전에서의 삶을 일반 귀족들에게도 공개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되었다. 금으로 덮인 아름다운 궁전 외형 뿐 아니라 궁전 내 에서 즐기는 오페라, 발레, 무도회 등 왕의 고품격 취미를 궁금해 한 국내 귀족들과 외국 귀빈들은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난 지금도 베르사유 궁전과 그의 생활을 동경한다.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한 귀족들은 후에 베르사유 궁전이 유럽의 그 어떤 건물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후대에도 루이 14세를 상징하는 건물이 될 것이라고 극찬을 남겼다고 한다. 죄를 많이 지으셨나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구요? 천만에요! 단돈 900프랑에 면죄부를 만나보세요! 당신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분실시 재발급은 불가합니다. 구입 문의는 가까운 성당을 이용하세요.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비의 땅 인도로 떠나는 여행 132박 133일 동안의 크루즈 여행! 누보몽드 여행사와 함께 떠나세요! - 크루즈 내 호화 객실 제공 (오션 뷰 300프랑 추가) - 갑판 위 체험 행사 (악천후 시 실내 행사로 대체) - 응급 상비약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3. 3. 백여년 전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고 간 후, 역병의 원인이 목욕을 할 때 발생하 는 뜨거운 수증기를 통해 병균이 쉽게 몸에 침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져 많은 사람들은 조금 불편하지만 목욕을 꺼려한다. 이로인해로마 시대부터 사랑받아왔던 대중탕이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 전역 에서 자취를 감췄고 이웃나라 영국은 최근 개인 목욕까지도 금지시켰다. 목욕을 하지 않는 대신 사람들은 흰색 아마포 옷을 매일 갈아입고 향수를 뿌리 는 등 몸의 청결을 유지하기 위한 다른 방법들을 찾아냈다. 그러나 아마도 루이 14세는 다른 사람 “인간은 불행에 처해서야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제 동생이 쓴 편지에 이렇게 써있더군요.”라고 前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 아네트의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는 입을 뗐다. 언젠가부터 불어온 혁명의 바람에 자신의 동생을 비롯한 애꿎은 왕족들이 희생되고 있다고 그녀는 한 탄한다. 오스트리아의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태어나 호화스러운 쇤브 룬 궁에서 세상물정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프랑스, 오스트리아 간의 동맹을 위한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프랑스로 시집을 갔다는 그녀의 동생. 타국 프랑스에서는 어떻게 지냈고, 우아한 왕비에서 왜 한순간에 프랑스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는 악덕한 여인으로 전락했을까? 카롤리나는 회상한다. “기억나요... 그 애가 15살 때, 프랑스 왕세자와 결 혼을 하게 됐죠. 그리고 4년 후, 스무살도 채 되기전에 남편이 왕위에 올라 그 애는 왕비가 되었어요.” 베르사유 궁이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여느 왕실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패션과 화장, 사교를 즐기며 지냈다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였지만 여자로 서 정치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그저 하루하루 즐겁게 보내는 일 외에 그녀 에게 주어진 유일한 사회적, 역사적 의무는 왕위를 계승할 왕자를 낳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언니 카롤리나는 결혼 후 몇 년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태양왕’루이 14세의 비밀 …‘악취왕’? 보다 조금 덜 부지런했나 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궁정 관리인은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난 지금에야 비로소 그의 비 밀을 말할 수 있게 됐다며 루이 14세의 악취를 폭로했다. 옷을 매일 갈아입을 형편이 되지 못 하는 백성들은 땀을 최소한으로 내기 위해 움직임을 조심히 하지만 원하면 언제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는 왕 족들과 귀족들은 땀을 흘릴 위험이 있음 에도 불구하고 펜싱과 같은 운동을 즐 겼다고 궁정 관리인은 말했다. “루이 14세는 펜싱이나 무용 등 격렬 한 움직임 이후에 온몸이 땀으로 흥건 해도 옷을 재빨리 갈아입지 않고 향수 뿌리기도 게을리 했다” 고 그는 밝 히며 왕의 악취가 지독해 참기 힘들 었다고 전했다. 특히 루이 14세는 주치의로부터 발치를 권유받아 거의 치아가 없었 으며 입에는 늘 피고름이 흐르고 고 약한 입냄새가 났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는 체취(體臭) 뿐만 아니라 구취(口臭)로도 궁정 관리인들과 귀 족들 사이에서는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루이 14세가 풍기는 고약한 냄새를 참아야만 했던 그의 주변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향수를 잔뜩 뿌려 왕의 냄새 ‘공격’을 방어했다고 한다. 이 달의 칼럼 : 내 동생 앙투아네트는 억울하다 막중한 의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남편인 루이 16세의 성기능에 문제가 있어 번번이 합궁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그녀에게 끊임없이 ‘왕비로서의 의무’를 강조했지만 루이 16세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임신시키는데 성공하기까지는 무려 7년 반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첫 아이를 낳은 후 결국에는 총 네 명의 아이를 낳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동생을 생각하면 카롤리나는 마음이 아프다. 타지에 시집 가서 이제 겨우 프랑스 생활에 적응했나 싶었는데 비보가 들려왔다.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켜 왕실을 끌어 내렸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기요틴’이라는 괴상한 기계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다. 죽은 이후에도 동생은 계속 욕을 먹고 있다고 카롤리나는 말한다. “다른 왕비에 비해 특별히 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것도 아닌데, 평범한 제 동생이 어느 날 졸지에 민중의 적이 되어 버렸어요.” 실제로 민중들 사이에서 ‘나라를 말아 먹은 여자’, ‘오스트리아의 창녀’, ‘빚투성이 왕비’ 등의 비방이 공공연 하게 나돌았다. 빵을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해요”라고 했다는 소문 역시 근거 없는 것이었지만 증오의 대상이 필요했던 민중들에게 그녀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녀의 언니 말대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정말 잘못이 없을지 모른다. 황제의 딸로 태어나 평생 궁 밖의 생활을 몰랐던 그녀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그녀가 재수 없게도 인류 역사의 기나긴 계급 사회 흐름 속에서 하필 인간의 평등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 바로 그 시기에 태어났다는 것뿐일 것이다. 지난 1853년 3월 8일에 공포된 나폴레옹 3세 황제의 칙령에 의해 오늘 1855년 5월 15일, 파리 샹젤리제 거리 에서 만국 박람회가 개최되었다. 개최 행사는 오늘 오후 1시 경 샹젤리제 거리에 위치한 산업관(Palais de l'industrie)에서, 나폴레옹 3세 황제와 4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개최식에서는 나폴레옹 왕자와 나폴레옹 황제의 연설이 이어졌다. 만국 박람회는 1851년 런던에서 처음으로 시 작된 것으로, 이번 파리 만국 박람회는 세계에서 두 번째,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처음으로 진행되는 행사이다. 이 박 람회는 크게 두 섹터로 분류되는데 하나는 예술 분야, 다 른 하나는 산업, 농업 분야이다. 예술 분야에서는 유진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와 같은 화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각, 세공, 석판술, 건축, 회화 등 예술의 모든 것을 접할 수 있다. 1855 파리 만국 박람회 개최 그리고 산업, 농업 분야에서는 그 분야에서 생산되는 제 품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으며 특히 농업 분야에서 는 배수법, 관개법, 개량법 등을 소개할 예정이여서 농민 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박람회에서 주 목해야할 점은 바로 황제가 무역, 산업, 농업 등 각 산업 에서 뛰어난 실적이나 발전을 이룩한 사람들에게 메달을 수여한다는 것이다. 비록 발트해에서는 프랑스 해군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고 크림 전쟁 또한 진행 중이지만 이번 박람회는 국가들 간의 경제적인 협력을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파리가 이번 박람회를 통해 세계적인 관광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 을지가 프랑스 국민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박람회는 11월 15일까지 총 6개월 동안 진행될 예 정이다. ▼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 모습
  4. 4. 국부(國父) 페탱, 종신형 선고 받다 한 때 국민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앙리 필리프 페탱(Henri Philippe Pétain)이 어제인 15일, 3주 동안의 재판 끝에 형법 제 75조, 적과의 내통 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지난 5월 7일과 8일, 양일 동안 독일이 미국과 서유럽, 그리고 소련에 차례로 항 복을 선언한 후, 임시정부를 수립한 샤를 드 골을 수반으로 하는 프랑스 정부는 전쟁 중 나치에 협력하는 등 국가 배반 행위를 일삼은 부역자들을 색출, 숙청 작업에 착수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국가 원수였던 페탱 장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피고페탱을처벌하기위해7월 23일 시작된 재판은 레지스탕스 출신자 들과 국회의원들이 절반씩 배심원을 맡고, 앙드레 모르네가 검사, 쟈크 이조르니가 변호인, 폴 몬지보가 주재 판사를 맡았다. 검사 측은 1940년 6월의 항복(독일 과 휴전)과 7월의 비시정부 수립이 모두 불법이었다고 공격했고, 변호인 측은 모두가 기존 헌법과 법률 절차에 따른 것이었다고 반박했다. 모르네 검사는 페탱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권력 장악을 위해 전쟁 전부터 이미 공화정에 반대하는극우조직과긴밀한 관계를 가졌고 휴정협정 체결과 전권 위임 투표 모두 페탱이 벌인 음모의 결과이며 페탱은 오랜 기간 반역을 준비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페탱은 1940년 7월에 자신의 권력이 국회의 동의를받아 합법적으 로 부여된 것임을 강조했다. 이 논쟁 은 확인하기가 어려워 결국 주된 쟁 점은 비시정부가 점령 시기에 어떤 역 할을 했는지로 옮겨졌다. 페탱 측은 독일과 휴전함으로써 수많은 젊은 프 랑스인들의 생명을 낭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프랑스 국토와 북아프리카 식민지가 보전되었다고 주장했으나 검사 측은 비시정부가 레지스탕스 대 원들을 공격하고 히틀러에 넘긴 사실 을 지적했다. 8월 14일, 50여 명의 증언과 검사의 논고, 변호인의 변론에 이어 피고인 페탱의 최후 진술이 있었고 배심원단 과 재판부는 무려 7시간이 넘는 열띤 토의 끝에 1945년 8월 15일 찬성 14표 와 반대 13표, 단 1표 차로 사형선고를 결정 했다. 그러나 피고의 고령(89세)을 참작하여 재판부는 사형 집행을 유예하고 피고가 되 섬 (l’île d’Yeu)에서 종신형을 복역하는 것으로 최종 판결을 내렸다. 1945년 7월~8월 진행된 ‘페탱 재판’ 알제리, 132년의 투쟁 끝에 마침내 독립 쟁취 1830년, 당시 프랑스 황제 샤를 10세가 알제리를 병합한지 꼭 132년만의 일이다. 지난 3일 오전 10시 38분, 파리에서 샤를 드 골 대통령이 알제리의 독립을 선언하는 순간 알제리 전역에서 청백색의 알제리기가 시민들의 환호성 속에 게양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유럽 열강들이 잇달아 식민지들을 독립시키는 분위기에서, 프랑스도 모로코와 튀니지 등 식민 지의 독립을 선언했으나 알제리의 독립에 대해서는 유독 의 견이 팽팽히 대립했다. 알제리는 자원이 풍부한 요충지였고 그 어느 식민지보다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국가 1945. 08. 16. 木 1962. 07. 05. 木 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우파 세력들은 알제리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반면 사회당과 공산당은 알제리민족해방전선 (FLN)을 지지하며 알제리 독립을 주장했다. 식민 통치가 시작된 1830년 이래로 알제리 영토 내에는 프 랑스인보다 알제리인이 절대 다수였지만 알제리 사람들에 게는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또 통치 과정에서 알제리 사람들에 대한 핍박과 부조리가 계속 되었다. 따라서 식민 통치가강화되면될수록프랑스에대한알제리인들의저항도 그만큼 거세졌다. 특히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아랍권에 불어 온 민족주의 바람은 알제리 국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더욱 강하게 했다. 그렇다면 프랑스가 끝까지 놓지 않고 있었던 알제리를 포기 하게된이유는무엇일까?최근정세를살펴보면,주요원인은 본국 내 정치 대립과 알제리 전쟁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54년 11월 1일,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이 최초로 봉기를 일으킨 이후 8년 동안 프랑스는 알제리 내부 안정을 위해 싸 웠지만 본국 내 의견이 첨예하게 맞붙으면서 오히려 프랑스 내부의 안정을 위협하는 꼴이 되었다. 또 1954년 일어난 무장 봉기가 알제리 전역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이를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는 군대를 파병해야 했으며 8년 동안 1만 2천 명 가량의 프랑스인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의 여파로 제 4공화국도 무너져 이와 같은 이유로 프랑스정부는결국알제리를식민지로갖고있음으로서 얻는 이득보다는 손실이 크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4년 전인 1958년, 은퇴했던 샤를 드 골은 알제리 사태를 해 결하고 프랑스 정세를 진정시키기 위해 정계로 복귀했다. 새로운 헌법과 함께 등장한 제 5공화국의 수반이 된 드 골 대통령은 3월 19일 에비앙-레-뱅(Évian-les-Bains)에서 알제리 측과 ‘에비앙 합의’를 체결하여 알제리와의 전쟁을 멈추고 알제리에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드 골 대통령은 특히 지난 협정을 통해 세 가지‘실상’이 충족 되었다고 밝혔다. 알제리인들의 자치에 대한 열망, 알제리 내 프랑스인과 프랑스 내 알제리인의 존재 사실, 그리고 양국 간의 끊을 수 없는 깊은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 1일 알제리는 약 6백만 명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국민투표를 시행했고 찬성 597만 5,581표, 반대 1만 6,534표, 무효표 2만 5,565표로 독립이 결정되었다. 이는 99.72%가 독립에찬성한것으로,100년이넘는시간동안알제리국민이 얼마나 독립을 갈구해왔는지 확인하게 하는 대목이다. 투표 결과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이틀 뒤인 3일, 알제리의 독립을 공식 선언하였다. 실제 독립일은 1962년 7월 3일이지만 알제리 정부는 프랑스의 지배가 시작된 1830년 7월 5일을 기점으로 132주년이 되는 오늘을 공식 독립기념일로 채택했다. 강한 민족정신과 이를 지키기 위한 많은 희생으로 얻어진 알제리의 독립은 향후 아프리카 대륙 내 민족 주의가 발흥하는 역사적 계기로 평가될 것이다. 독립을 기뻐하는 알제리 시민들 올랑드 대통령, 동거녀 두고 외도 ? 現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가 9년 동안 만난 동거녀를 두고 유명 여배 우와 밀회를 가진 것으로 드러나 화제다. 연예 전문 주간지 클로저는 작년 1월 올랑드 대통령이 여배우 줄리 가예와 잦 은 밀회를 즐기고 있다고 보도했다. 클로 저는 올랑드 대통령으로 추정되는 헬멧을 쓴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파리 시내를 가로질러 이 여성의 집을 찾았다며 올랑 드 대통령이 한 명의 경호원만 데리고 가예의 집으로 이동하는 사진들을 제시 했다. 이에 올랑드와 결혼하지는 않았으나 대 내외적으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는 올랑드의 기존 애인 발레리 트리에르 바일레는 올랑드의 외도 소식에 격분해 그의 집무실에 있던 화병과 시계, 가구 등 44억 원 상당의 골동품을 내던져 파손시 키는 등 거센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졌다. 이후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아 한동안 병 원에 입원했고 올랑드는 그녀가 입원한 지 6일만에 병문안을 해 눈길을 끌었다. 올랑드 대통령은 염문설과 관련해 이렇다 할 입장을 내보이지는 않았지 만 줄리 가예와 저녁 식사를 하는 등 두 사람이 계속 만나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올랑드와 그의 새 여자친구가 다소 조용히 기다리는 반면 기존의 여자친 구 트리에르 바일레는 올랑드 대통령 의 본모습을 폭로하겠다며 인터뷰에 응하고 이 사건과 관련해 회고록을 쓰 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편 여론조사기관 IFOP가 대통령의 염문설이 제기 된 직후 프랑스 성인 1천 25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 프랑스 국민의 77%가 "사생활은 사생활일 뿐" 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또 다른 여론조사기관은 대통령의 염 문설 제기 후 오히려 지지율이 더 올랐 다고 주장했다. 현재 올랑드 대통령은 트리에르바일레 와 공식적으로 결별한 상태이다. 왼쪽부터 발레리 트리에르바일레, 프랑수아 올랑드, 줄리 가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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