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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신학캠프2010 자료집-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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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자료집-완성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자료집-완성 Document Transcript

    • 느헤미야신학캠프 2010 시즌 2무소유 vs 긍정의 힘?
    • 미리보기PROGRAM. 09:00-09:30 등록 및 교제 사회 : 조석민 교수 09:30-10:20 기조 강의 강사 : 오세택 목사 (두레교회) 광고 : 고상환 사무처장 10:20-10:30 Tea Time 김근주(1층) 전성민(본당) 10:30-12:10 Session 1 조석민(3층) 권연경(3층) 12:10-13:10 점심식사 13:10-13:40 연구원 및 과정 소개 전성민 연구위원 김근주(본당) 조석민(1층) 13:40-15:20 Session 2 김동춘(3층) 배덕만(3층) 15:20-15:40 Tea Time 전성민(3층) 권연경(1층) 15:40-17:20 Session 3 김동춘(본당) 배덕만(3층)SECTION 주 제 강 사“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김근주 교수 :느헤미야 개혁 찬찬히 보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전성민 교수구약성경이 말하는 소유권과 사용권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헌금, 축복의 통로인가? 조석민 교수:고후 8-9장을 중심으로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권연경 교수바울이 들려주는 십자가의 긍정 이야기 (안양대학교) 배덕만 교수돈과 교회의 역사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김동춘 교수‘긍정의 힘’에 대한 신학적 비판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 광고하기●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에 오신 여러분을 마음을 다해 환영합니다.●본 신학캠프는 총 3개의 Session으로 진행되며, 각 Session당 4 Section으로 나누어 진행합니다. 먼저 신청서에 체크하신 대로 강의를 들으시고 변동이 있을 경우에는 진행본부에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양해를 구할 것은 사정에 의해 Session 1과 Session 2의 강의가 순거를 서로 바뀌어 진행되게 되었으니 참고하셔서 들으시면 좋겠습니다.●장소는 1층과 2층, 3층에 있으며, 강의장 앞에 표찰을 부착하였습니다. 또한 강의장 사용시에는 청결과 정숙을 부탁드리겠습니다.●오늘 점심식사는 식당에서 도시락으로 합니다. 또한 본당에 간단한 다과를 준비하였습니다.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즐거운 교제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오늘 강의는 추후 단행본으로 출간한 예정입니다. 출간 소식은 느헤미야 홈페이지 등을 통해 신속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www.nics.or.kr).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오늘 강의는 <한병선 영상만들기>에서 녹화합니다. 영상에 대한 제공은 추후 홈페이지를 통해 알려드리겠습니다. 1회 캠프 동영상 판매와 신청을 받습니다.●나눠드린 명찰은 돌아가실 때 등록처에 반납하여주시기 바랍니다.●그 밖의 문의 사항은 등록데스크 및 진행요원에서 해주시면 됩니다.
    • 기조 강의 두레교회/기독청년아카데미오세택 목사4
    •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 Seoson 2 5
    • 구약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느 5:15-16) :느헤미야 개혁 찬찬히 보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김근주 교수1. 느헤미야의 기도(1:5-11)예루살렘의 참상을 들은 느헤미야는 곧바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그의 기도의 핵심은 이스라엘 자손의 지은 죄에 대한 자복이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가리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였다고 고백한다(1:6). 민족이 겪고 있는 참상을 다른 데에서 그 원인을 찾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느헤미야 기도의 특징일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스라엘 자손이 범한 죄의 근본은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한 것이었다(1:7). 느헤미야의 사역을 시작하는 이 기도에서깨닫게 되는 것이 몇 가지 있다.1. 현실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은 죄에 대한 깨달음과 고백이다. 느헤미야 스스로의 삶은 그러한 참담함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지만,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의 참상이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의 죄악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자신의 안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자신의 죄악으로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느헤미야 개혁의 출발점이다.2. 그에게 있어 이스라엘 자손의 죄악의 핵심은 모세를 통해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법을 지키지않은 것이다. 그로 인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방에 흩으신 것이 오늘의 참상의 현실이라는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망하고 흩어져 있는 것은 결코 국력이 약해서나, 불운해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명하신 계명을 지키지 않은 때문이다. 그렇다면 느헤미야의 개혁은 당연히 이스라엘이 떠났던 계명과 율법, 규례로 돌아가는 것을 지향할 것이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개혁의 양상은 다름아닌 1장에서의 고백한 대로 여호와의 계명과 율법으로 돌아간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3. 그는 자신을 가리켜 ‘당신의 종’(1:6,11)이라 부르고,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켜 ‘당신의 종들’(1:6,10,11)이라고 부른다. 또한 모세역시 ‘당신의 종’(1:7)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느헤미야에게있어서 모세이건 자신이건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건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다. 참담한 현실을 살며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이스라엘이건, 페르시아 왕실에서 술관원이 되어 있는6
    • 자신이건, 그리고 그 옛날 여호와의 명하시는 대로 계명과 규례를 전하던 모세이건 모두 여호와의 종들이다. 그들 모두 여호와께서 부르신 자들이며, 여호와의 뜻을 세상 가운데서 행하는 이들이며, 여호와께 순종해야 하는 이들이다. 스스로가 여호와의 종임을 고백할 때에, 어디에 있건 그 계명대로 그 뜻대로 순종할 수 있다. 이제 예루살렘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지만, 그는여전히 여호와의 종일뿐이다.2. 성벽 재건허물어진 성벽과 불타버린 성문을 돌아본 느헤미야는 최우선의 과제가 성벽의 재건이라 여겼다.성벽이 없음으로 인해 이방인들이 자유롭게 출입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제대로 준행하지도 않으며, 그저 무원칙하게 예루살렘 인근의 필요와 처지를 따라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벽을 쌓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예루살렘을 외부로부터 지킬 뿐 아니라, 내부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결속하기 위한 과제였을 것이다. 이 일의 가장 큰 장애가 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제국에 대한 반역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이다. 페르시아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지역에서 성벽을 견고하게 쌓는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불순한 의도를 가진 행동으로 여겨질 수있었을 것이다. 느헤미야의 공동체를 찾아온 산발랏과 도비야 역시 이러한 행동을 “왕을 배반”하는 것으로 여겼다(2:19). 에스라서의 성전 건축에 관한 본문에 등장하는 성벽 건축 관련 본문(스 4:11-22)은 아마 느헤미야 시대의 성벽 건축을 둘러싼 논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르면 성벽 건축은 반역의 상징이었다. 느헤미야서는 그가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기 전에 이미건축에 대한 왕실의 허가를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2:5-6), 자칫 이 일은 큰 화를 불러올수 있는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느헤미야때에도 그랬듯이, 예수께서 이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선포한 것 역시 로마 정부에게는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사건으로 비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예수를 핍박하고 제거하려는 이들은 이러한 정치적 틀을 이용하여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느헤미야를 제거하려는 이들 역시 동일한 논리로 그의 시도를 무산시키고자 애쓴다. 느헤미야가 진행하는 성벽은 페르시아에 대한 저항과 무관하되,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결단과 직결된다. 성벽을 지은 공동체는 곧바로 여호와의 율법에 따라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는 데에서(8-10장) 그 점을 볼 수 있다. 페르시아의 식민지에 살고 있지만, 이미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으며, 주님은 무력으로 나라를 회복하지 않으셨으되, 주님의 선포를 따른제자들의 삶은 더 이상 세상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이었다. 이러한 유비를 생각할 때,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재건을 상징한다. 실제로 이 성벽이 재건된 이후, 안식일의 올바른 준수를 위해 성문을 닫는 사건과 연관하여 다시 언급된다(13:16-22). 즉 이 성벽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이방 풍습과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삶을가르는 경계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이 성벽은 전쟁을 위한 것이나 유대인 공동체의 세력 과시를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따르는 삶, 그 율법을 따라 순종하는 공동체를 상징한다. 성벽은전쟁과 힘, 군대와 연관된 소재이지만, 느헤미야서에서 이 성벽은 구별된 공동체를 상징한다.이 점은 성벽 재건의 과정에서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3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성벽 중건을 보면, 양문, 함메아 망대부터 하나넬망대까지 ➜ 어문 ➜옛문 ➜ 예루살렘 넓은 성벽 ➜ 화덕 망대 ➜ 골짜기문 ➜ 분문 ➜ 샘문 ➜ 다윗 성에서 내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 Seoson 2 7
    • 려오는 층계 ➜ 성 굽이 군기고 ➜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문 ➜ 내민 망대 ➜ 마문 ➜ 성모퉁이 성루 ➜ 양문의 순서와 방향으로 성벽이 재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형제 제사장들, 그리고 평지에 사는 다른 제사장들도 성벽 건축에 중요한 역할들을 하였다(3:1,22,28). 므레못 벤 우리야의 경우, 어문 다음 부분과 엘리아십 집 문 다음 부분 등 두 부분의 성벽 재건에 참여하였으며, 드고아 사람들 역시 어문과 옛문 사이의 성벽의 한 부분과 내민망대부터 오벨 성벽까지 두 부분의 성벽 재건에 참여하였다. 므술람 벤 베레갸도 어문과 옛문사이 한 부분과 마문과 성모퉁이 성루 사이 한 부분을 중수하였다. 금장색들의 경우 웃시엘 벤할해야는 옛문과 골짜기 문 사이 성벽재건에, 말기야는 함밉갓문에서 성모퉁이 성루 사이 성벽에 기여하였고, 또 다른 금장색들과 상인들이 성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의 성벽을 중수하였다. 이 성벽 재건 공사에 참여한 이들을 보면,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칭해지기도 하고,어떤 이들은 그들이 사는 지역의 이름으로 칭해 지기도 한다(드고아 사람, 여리고 사람, 기브온사람, 메로놋 사람, 미스바 사람, 사노아 주민, 느디님 사람). 또 어떤 이들은 그 직업과 함께불려지며(금장색, 향품 장사, 동문 지기, 상인), 다른 이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지역의 통치자로 언급되기도 한다(예루살렘, 벧학게렘, 미스바, 그일라).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언급되지만, 어떤 이들은 아버지의 이름이 없이 소개되거나 직업만 덜렁 소개되기도 한다(향품장사 하나냐, 베냐민, 핫숩, 금장색 말기야). 아예 이름이 전혀 소개되지 않은 채 그들이 속한집단만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여리고 사람들, 하스나아의 자손들, 드고아 사람들, 평지에 사는제사장들, 금장색과 상인들). 가문이 유력하면 유력한 대로, 형편이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혹은가문과는 상관 없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에 그저 속한 채로 이 성벽 재건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런 점에서 성벽 재건 공사는 단지 일부에 의해 진행된 일이 아니라, 당시유대 인근 지역에 살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유다 사람들에 의해 진행된 역사였음을 짐작하게된다. 유력한 몇 사람에 의해 성벽 공사의 거의 대부분이 진행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여러 사람과 집단이 참여하여 공사가 진행되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지 않는 이들도 대거 이공사에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이 공사가 단지 예루살렘의 지역 이기주의를 위한 공사가 아니라,돌아온 귀환 공동체 전체를 위한 상징적인 공사였음을 깨닫게 한다. 이렇게 다른 지역에 사는이들뿐 아니라, 당연히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공사에 참여하였으며, 이들의 경우 참여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자기 집과 가까운 곳을 중수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참여하는 이들도많고 그러다 보니 참여의 규모도 소규모인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성벽 재건은 그야말로 당시 예루살렘 인근에 형성된 모든 유대인 공동체의 참여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임을 알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주변 이방민족들의 눈에는 지극히 한심스럽고 하염없게 이 재건작업이 보였을 것이다: “…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흑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 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느 4:2-3)이러한 조롱과 비웃음들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바라보는 실제적인 객관적인 시각이라고 말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에 의해 성벽 재건이 주도되었다지만, 이 성벽 재건은 당시 모든 이스라엘에 의해 함께 마음과 힘을 모아 진행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단지성을 둘러싸는 성벽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함께 여호와를 섬기고 각자의 형편과 처지를 따라 참8
    • 여하는 공동체를 세운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단지 성벽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참되고 새로운 공동체가 관건이었다는 점은 5장에서의 토지 개혁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며, 재건이 완성된후 곧바로 수문 앞 광장에서의 율법책 낭독과 갱신 운동이 잇따른다는 점에서도 확실히 볼 수있다.3. 토지 개혁: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5:16)느헤미야 5장은 성벽 재건의 와중에서 일어났던 재건 공동체의 현실적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다.유다를 둘러싼 주변 이방 민족들의 위협에 대해 돌아온 이들이 똘똘 뭉쳐서 한 손으로 일을 하고 한 손으로 병기를 잡은 채 성벽 공사를 진행하였음을 보여주는 4장에 따르면, 이 귀환 공동체가 같은 마음으로 단단히 연합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5장은 이렇게 연합한공동체내부에 경제적 갈등 상황이 심각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그 점에서 느헤미야의개혁은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모두가 힘을 모아 성벽을 재건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귀환 공동체내부의 경제적인 형편은 서로 달랐다. 더욱이 이들에게 흉년이 임하다보니 공동체 내부의 가난한 이들의 곤궁은 극심해졌다. 자신들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 처지인데다, 페르시아 제국 정부에 납부해야 하는 세금까지더하여져서, 가난한 이들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포도원이나 땅을 가진 이들은 그것을저당잡혀서 얼마의 돈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이미 진작에 이 땅들을 저당잡혔거나 그 기간이오래되어 남에게 땅이 넘어가 버린 이들은 이 흉년을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결국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이 남의 집에 종살이로 흩어지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는 이들이 많았고, 마침내이들로부터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왔다. 이제껏 이방 땅에서 종살이하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자유의 땅으로 돌아왔지만, 경제적인 곤경은 다시금 그들을 종살이하는 처지로 몰아갔으되, 이제는 이방인이 아니라 동족에게 종이 되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경작할 수 있는 땅이 없고 함께 살아가는 자유로운 가족이 없는 한, 자유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구약 성경이말하는 자유는 단순히 의사결정의 자유라든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행하는 자유이지 않다. 구약의 자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 위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레위기 25장은 이를 위해 모든 땅이 하나님의 것이며 모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임을 천명하고 있다(25:23,55). 땅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에게 공평하게 땅의사용권을 기업으로 주셨으며, 이스라엘의 몸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몸으로 누구에게도 종이 되지 않게 하셨다.한 번 나라를 잃었고 그 땅을 잃었던 백성들이기에 땅에 대해 그들이 가지는 생각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귀환공동체에서 다른 사람의 땅을 담보로 해서 돈이나 곡식을 빌려주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을 것이다. 공동체의 일이나 온전한 회복의 일보다 자신의 일과자신의 성취와 자신의 안위에만 힘쓰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이었고, 그러한 이기적인모습의 절정이 형제에게 이식을 취하기와 땅을 매입하기였을 것이다.개혁과 재건의 와중에서 일어난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느헤미야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 것?사실 이러한 경제적인 문제는 뿌리가 깊은 것인지라 함부로 다루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여기에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 Seoson 2 9
    • 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일을 처리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역사와 문화에서 이러한 경제적 관계는 건드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의 부르짖음과 고통을 내버려둘 경우, 이제 세워질 성벽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재건 공동체의 회복이 아니라, 재산과 소유를 충분히 지닌 사람들을 보호하는성벽이 될 뿐이다. 공동체를 지키는 성벽이 아니라, 지킬 것이 많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가 될 뿐인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말하지만 실상은 권력과 재물을가진 사람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것이 알맹이였던 적은 구약의 역사안에서도 곧잘 볼 수 있다.남왕국 말엽 시드기야 시대를 장식했던 거짓 선지자들의 구원예언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렘 28장; 34장).가난한 백성들의 울부짖음과 형편을 들은 느헤미야는 “크게 노하였”다(5:6). 하나님을 함께 섬기며 함께 재건해 가는 공동체내부의 빈부격차와 그로 인한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은 하나님의사람들에게는 당연히 큰 진노와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아쉽게도 오늘의 우리 교회는 이러한 현실앞에서 진노하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의 경제적 곤경을 보고도 심상히 여기며 그저 정신적인 위로를 전하며 그것을 영적인 축복이라고 치장하기에 분주할 따름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이 현실에 대한 분노이다.크게 분노한 느헤미야는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5:7). 이에 대한 히브리어 표현은 인상적이며,느헤미야가 자문자답하며 심사숙고하였음을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깊은 생각후에 그는 어떻게일을 처리하는가? 곧바로 그는 “귀족들과 민장들”을 불러 그들을 꾸짖는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을 ‘치기 위한 대회’를 열기까지 한다. 느헤미야의 조치는 얼마나 일방적인가? 가난한 사람들이왜 가난해졌는지를 따지지 않고, 그들의 책임이나 게으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오직상류층의 지도자들을 불러 책망하고는 그것도 모자라 공개적인 큰 집회을 열어서 그들을 ‘치고있다’. 그들에 대한 느헤미야의 책망은 한 가지이다: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5:8). 느헤미야가 보기에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5:9)하는 것이 아니었다.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하나님 경외는 가난한 이웃과의 경제적 관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그래서 느헤미야는 당장에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사들인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을 돌려줄 것을 명령한다(느 5:11). 부유한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매입하는 것은 그들이 빌려준 돈에대한 대가일 텐데도 느헤미야는 당장 돌려줄 것을 명한다. 아마도 오늘날에 이러한 것을 명령한다면, 사유재산에 대한 침해라는 이유로 반발이 극심하였을 것이며, 느헤미야는 더 이상 자신의개혁을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느헤미야 시대의 사람들은 이에 순종하기로 결단하고,회중들은 함께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 그 말한 대로 행하였다"(느 5:13). 이러한 결단과 순종이 있을 때에 함께 부르는 찬양이 의미가 있다. 하나의 신앙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은이러한 아멘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신앙을 가장한 또다른 착취와 억압의 지속일 가능성이 많다.이러한 상황을 생각할 때에 다음과 같은 느헤미야의 고백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10
    •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느 5:15-16)사람들이 땅에 집착하게 되고 땅을 소유하기에 몰두하게 될 때에, 느헤미야는 귀환공동체와 또하나님이 다시 거하게 하신 이 땅을 위해 성곽을 쌓기에 온 힘을 다하였다. 그의 힘은 소유에있지 않고 관리와 섬김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 돌아왔는데, 여전히 각자 자신의 땅을 구입하고 땅을 늘려가는 데에만 혈안이 되고 형제의 고통과 눈물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귀환한 것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을 경외”(느 5:9)하는 삶과는거리가 먼 것이다. 여기에 나온 ‘하나님께 대한 경외’는 땅과 몸이 하나님의 것임을 선언하며 희년을 선포하는 레위기 25장에서도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다. 근본적으로 땅에 대한 자세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에서 비롯된다.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하나님 경외는 이웃을 압제하지 않고 착취하지 않는 것, 그리고 땅을 사지 않는 것을 의미하였다. 개개의 규정을 엄밀하게 지키는 것보다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 대한 경외의 원칙 위에서 주어진 상황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4. 수문 앞 광장 집회(8장)느헤미야 8장은 7월에 이루어진 집회를 소개하고 있다. 8장1절은 에스라 3장1절과 거의 동일하며, 초막절이 지켜졌다는 점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전개를 지니고 있다. 또한 에스라 2장의 내용과 느헤미야 7장의 내용이 동일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귀환 공동체의 계수와 파악이 이어지는 집회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지닌 대로의 본문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 모두 이 귀환 공동체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가리키는 틀로 7월에이루어진 집회와 초막절을 소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느헤미야8장은 이 7월 집회의 중심에 “모세의 율법책”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책을 읽으면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배치되어 있던 레위인들이 그 말씀의의미를 풀어서 백성들에게 전달하였다. 당시의 공용어는 아람어였기에 레위인들의 역할은 히브리어로 읽고 있는 에스라를 따라 그 의미를 아람어로 번역하여 풀이해주는 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표준새번역개정판; NASB; NJB; Tanakh).율법의 말씀을 들은 공동체는 모두 울었다. 그리고 이 눈물은 에스라와 레위 사람들의 격려와더불어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뀌었다(느 8:10-12).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눈물과 여기에서나온 기쁨을 경험한 공동체는 이제 더더욱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심과 진지함으로 가득차게된다.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개혁적 조치들의 근본에는 하나님의 법을 듣고 깨달은 이들의 눈물과 기쁨이 있다.에스라를 찾아와 율법의 말씀을 더욱 알고자 할 때, 에스라는 초막절 절기 준수에 대해 백성들에게 일러준다. 초막절이라는 이름은 신명기 16장13절에도 나오지만, 이 절기에 초막을 짓고 생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 Seoson 2 11
    • 활하는 것은 오직 레위기 23장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규례라는 점에서, 당시에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읽어준 본문은 레위기임을 알 수 있다.4.1. 초막절 준수레위기 23장은 절기를 다루고 있다. 레위기의 내용은 크게 보아 1-16장과 17-26장의 두 덩어리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여호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에 지켜야 하는 규례들로 주로 제사와 정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는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삶에 대해 다루고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23장은 여호와 앞에서의 거룩한 삶이라는 큰 주제아래 절기를 지키는삶을 보여준다. 오경에 절기 관련 본문들이 여러 곳에 있다(출 23:12-19; 34:17-26; 민 28-29장;신 16:1-17). 민수기의 본문은 이 절기들에 드려지는 제사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나머지 절기 본문들은 모두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으로 나아와야 하는 순례 절기라는 점을 핵심적으로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레위기 23장의 절기 본문은 이들과 강조점이 확연히 다르다. 우선, 레위기의 절기 본문은 모든 절기를 이해하는 기본 틀로 안식일을 제시하고 있다. 비록 안식일에관한 내용이 단 한 절로 표현되어 있지만(23:3), 이 한 절에 담긴 세 가지 내용(7일, “아무 일도하지 말라”,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은 그 다음부터 소개되는 거의 모든 절기들에 반복되어사용되고 있다. 또한 23장은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를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23:9-22). 칠칠절 혹은 맥추절로 불리는 이 절기는 다른 절기본문들에서도 간략히 언급되지만, 레위기는 이 절기를 아주 상세하게 표현한다. 그 뿐 아니라 밀수확에서 절정에 이르는 맥추절이, 사실은 그로부터 오십일 전인 보리의 첫 수확을 거두는 날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유일하게 강조하는 본문이 레위기이기도 하다(23:9-14). 보리 첫수확을 드리는 날과 밀의 첫열매 드리는 맥추절의 간격이 일곱 번의 안식일 즉, 49일이라는 점도 의미깊다. 일곱 안식일은 기계적인 숫자 49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일곱이라는 상징적인 숫자가 두 번 반복된다는 점에서 신학적 상징성을 지니고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지으시고 7일째에 쉬시므로 그 날을 특별하게 하셨고,맥추절은 보리 첫수확으로부터 일곱 번의 안식이 경과한 후이기에 특별하다. 농사의 결실과 그결실을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과 연관된 숫자인 7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레위기가 제시하는맥추절은 농사와 결부된 일상의 삶 속에서 그 열매를 드리는 제사가 여호와 앞에서의 거룩한삶임을 강조한다. 이 단락에서 두 번이나 쓰인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23:14,21) 표현은 일상에대한 강조를 더 한층 두드러지게 한다. 레위기에 있어서 거룩은 단지 성소를 통해서가 아니라이같이 일상,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각처에서 드러나게 된다.23장이 강조하는 또 다른 강조점은 초막절에 대한 기술이다(23:33-36,39-43). 초막절은 일곱째달 15일부터 7일 동안 지킨다. 신명기 16장13-17절에 따르면 곡식 타작과 포도 소출을 모두 저장하여 들인 후에 이를 감사하며 지킨 절기가 초막절이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절기본문에서도확인된다(출 23:16). 레위기에서 초막절 본문은 33-36절과 39-43절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첫 단락은 다른 절기 설명과 거의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날짜, 이름, 기간, 성회, 노동 금지, 화제등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에 비해 두 번째 단락인 39절 이하는 다른 절기 설명과는확연히 구분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레위기 초막절 이해의 독자적인 면을 보여준다. 민수기 29장의 초막절 규례 설명에 이어 29장39절에서 절기 전체를 마무리하는 구절이 들어 있듯이, 23장의 절기 설명도 38절로 마무리되고 있으며, 이 구절은 민수기 29장39절과 거의 동일한12
    •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보아도 39절 이하의 초막절 규례 부연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39절 첫머리는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초막절 이해 즉, 토지 소산을 모두 저장한 후에 드리는 절기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초막절 기간 동안에 모든 이스라엘이 초막에 거주할 것을 명령하는내용으로 이어진다. “초막(“수코트/숙곳 tKoSu”)”이라는 단어에서 이 절기의 이름이 나왔다. 그렇지만, 정작 이 단락에서는 “초막절”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이름이 예상되는 자리에 “여호와의 절기(“하그 아도나이 hw"hy>-gx;”)”라는 명칭을 적고 있다는 점(23:39)에서 인상적이다1).레위기에 따르면 이렇게 초막에 거주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때 초막에서 지낸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언제 “초막”에 거주하였던가? 광야 시절 내내 천막에 거하였던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나(전정진: 246), 이것은 레위기에서 보듯 나뭇가지로이루어진 “초막”과는 거리가 멀다. 천막 생활을 기념하려면 얼마든지 가나안 정착이후에도 천막을 만들어 그 시절을 기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유력한 것은 출애굽기 12장37-42절이라고할 수 있다. 애굽의 종으로 살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놀라운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430년간의애굽 체제를 마침내 끝내고 라암셋을 떠나 처음으로 도달한 곳이 바로 “숙곳”이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초막’으로 인도하여 거하게 하신 것이다! 출애굽기의 진술은 이스라엘이 숙곳에 도착하였음을 알린 후, 다시 그들이 그 장소를 떠나기까지(13:19-20)의 기간동안에 여러 규례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을 전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 동안 “숙곳”에, ‘초막’에 머무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도착하여 머무른 “숙곳”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 새로운 여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길고 긴 세월 동안 머무르던 애굽 생활, 영원히 끝나지않을 것 같던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하심을 따라 새출발을한 공동체에 가득했을 흥분과 열정이 숙곳에 있었을 것이며, 비록 약속을 받았다지만, 그들에게닥쳐올 앞날에 대한 두려움도 숙곳에 머무른 이스라엘에게 가득하였을 것이다. 새로운 삶에 대한 흥분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이들의 두려움이야말로 하나님 백성 공동체의 필수적인요소가 아닐까.초막과 연관하여 한 가지 더 덧붙일 것은 초막 생활의 평등함이다. 그들이 사는 곳이 어떤 곳이든 모든 이스라엘이 초막절을 지킬 때에 그들은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초막에 거한다. 초막에거하는 동안 모든 이스라엘은 서로간에 구별도 차이도 없으며, 오직 여호와의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땅과 민족을 향해 나선 여정의 동반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함께 초막절을 지키는 것은 그들이 형제요 하나임을 실질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들어간 후 어떤 이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고 어떤 이들은 부유하게 되고, 또 어떤 이들은 가난해진다 하여도, 매년 바다 일주일간 지키는 이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뿌리와 출발점을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이 “이레”는 참으로 상징적이다. 기계적으로 딱 7일을 머무르지만, 7이라는 숫자의상징성을 생각할 때, 이 “이레”는 이스라엘의 삶 전체, 인생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그리 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평등한 공동체이며, 아무 것도 지니지 못하였던 이들이되, 그들의 평생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소유한 것이 없던 이들이었다! 여호와의1) “여호와의 절기”라는 표현이 2절과 4절, 37절, 44절에도 쓰였지만, 이들은 모두 “모아데 아도나이”이며, 39 절의 표현과는 다르다.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 Seoson 2 13
    • 인도하심만 있으면 비록 몸은 초막에 머물지나 흥분과 두려움으로 가득찬 공동체였던 것이다.그리고 오직 레위기에만 나타나는 이 초막절 규례는 초막을 짓고 일주일간 거하는 삶이 여호와앞에서의 거룩한 삶의 한 부분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초막절을 지키는 것은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공동체를 재확인시킨다.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공동체는 에스라의 지도를 따라 초막절을 지켰다(느 8:13-18). 산에 가서 그들이 구할 수 있는 대로 감람나무와 들감람나무, 화석류나무, 종려나무 가지를 구하였고그것들로 기록된 대로 초막을 만들어 그 안에 거하였다. 이에 대한 17절의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이에 따르면 초막을 짓고 초막절을 지킨 것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착 이래 지금이 처음 시행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여러 본문들은 초막절이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에서 지켜졌음을 증거하고 있다: “또 이르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1)이 있도다 하고”(삿 21:19; 또한 삼상 1:3)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에다님월 곧 일곱째 달 절기에 솔로몬 왕에게 모이고”; “그 때에 솔로몬이 칠 일과 칠 일 도합 십사 일 간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로 지켰는데…”(왕상 8:2,65)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스 3:4)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 막절을 지킬 것이라”(슥 14:16; 또한 슥 14:18-19)특히 에스라 3장4절에서도 초막절을 “기록된 규례대로” 지켰다고 서술하면서 느헤미야 8장15절의 표현과 비슷하지만, 에스라서에서 기록된 규례대로 지킴은 정해진 번제를 매일 드리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 구절은 민수기 29장의 초막절 규례가 염두에 두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존의 초막절 준수와 느헤미야 8장의 초막절 준수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초막을 짓고 그 안에 머물기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초막절 절기를 지키며 준행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사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과 연관된 초막절 역시 대대적인 제사 거행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느헤미야 시대 귀환 공동체는 초막을 짓는 것을 초막절 준수의 핵심으로 행하였다2). 여기서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라는 표현은 첫번째 출애굽과 현재의 사건을 비교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1) 여기서 “여호와의 명절”로 번역된 히브리말은 “하그 아도나이”로써, 레위기 23장39절에서 초막절의 또 다른 이름으로 쓰인다.2) 윌리암슨(H.G.M. Williamson)의 지적처럼, 설령 초막 만들어 거하기가 포로 이전 시기에 지켜졌다 하더라도, 단지 초막절 절차의 한 부분으로 거행되었을 뿐이지, 그 의미를 충분히 살려서 거행된 것은 아니었다고 이 해할 수도 있다. Williamson, Ezra,Nehemiah(WBC;Waco:WordBooks,1985),296.느헤미야서의 단호한 언급은 귀환 공동체야말로 율법에 규정된 대로 초막절을 거행한 첫 집단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14
    • 다1).처음 출애굽을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숙곳에 머물게 하셨듯이, 이제 돌아온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숙곳에 머무른다. 출애굽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미래가 있듯이, 이제 돌아와 초막에 거하는 귀환 공동체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과 미래가존재하고 있음을 이러한 비교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비록 돌아온 지 수 십년의세월이 지나면서 귀환 공동체 사이에 빈부 격차도 다시 생겨나면서 사회적인 갈등도 있었지만,느헤미야의 지도를 따라 모든 빚을 탕감함으로 이 갈등이 해결되었다. 이제 에스라의 율법 강독에 따라, 돌아온 이스라엘이 모두 초막에 거하면서 다시 그들의 출발점에 함께 선 것이다. 함께초막에 거하였던 공동체는 이후 오직 율법의 말씀에만 따라 근본적이고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다(느 9-10장).그러므로 초막절은 단지 어떤 기념일이나 경축일에서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의 근본을 되돌아보게 하는 날이다. 그리고 그 근본은 이스라엘을 애굽땅에서 인도해 내신 여호와께 대한 기념이며, 이러한 이스라엘의 상징은 초막이다. 이제껏 그들의 조상들은 초막절을 성소와 연관된 제사를 통해 지켜왔다면, 이제 느헤미야 시대 귀환 공동체는 출애굽 공동체와 더불어 초막을 짓고거기 7일간 거주하는 것으로 초막절을 기념한다. 하나님과 함께 길을 떠난 하나님 백성의 상징이요, 돌아갈 지점, 매년 마다 기념해야 할 지점은 바로 숙곳, 초막이다.4.2. 갱신 운동10장29-39절에서는 8장의 수문앞 광장 집회를 기점으로 해서 귀환 공동체의 백성들이 회개하며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따라 살기로 결단한 내용이 소개된다. 느헤미야 첫머리의 회개가 그의 개혁으로 구체화되었듯이, 9장에 담긴 긴 회개 기도는 10장29절 이하의 개혁으로 구체화된다. 여기에는 이방혼인 금지와 안식일 준수를 비롯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드려야 하는몫에 대한 내용까지 고루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31절에 있는 대로, 칠 년 안식년을 지키겠다는 부분이다. 이와 더불어 모든 빚의 탕감도 결단의 한부분으로 선포되었다. 칠 년마다 빚을 면제하는 것은 신명기 15장의 면제년과 연관된 것으로볼 수 있다(신 15:1-11). 그러나 땅을 쉬게 하는 것과 빚의 면제가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신명기 규례와는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신명기 규례의 칠 년 면제년은 각 사람마다 그 기점이 다르지만, 느헤미야의 칠 년은 모든 공동체에 공통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빚의 면제가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은 희년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안식년을 다루고 있는레위기의 법은 안식년 정신의 확장으로 희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식년 준수 선언은 희년 준수와도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레위기 23장과 25장에 담긴 절기 규정은 23장3절의 안식일 규정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안식일의 확장이 25장의 안식년이며, 가장 큰 안식년이 희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생각하면 안식년과 희년은 기계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앞에서 살펴1) Williamson, 296. 여기에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끈 여호수아의 이름을 예수아로 적고 있는 점도 특이하 다. 스룹바벨과 더불어 성전을 재건하고 귀환 공동체를 이끈 사람의 이름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서 “예수아” 로 표기되고 있다는 점에서, 여호수아의 이름을 “예수아”로 표기하는 17절의 표기 역시 첫 번째 출애굽 혹 은 정착과 두 번째 출애굽 혹은 정착을 평행시키려는 의도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해 P.A. Noss and K.J. Thomas, AHandbookonEzraandNehemiah(NewYork:UnitedBibleSocieties,2005),414.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15
    • 보았던 대로, 땅을 원래 맡은 이에게 돌려 주기로 한 조치라든지, 느헤미야가 땅을 사지 아니하였다는 언급 역시 느헤미야의 개혁의 이면에 희년법이 놓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희년 규정은 실상 안식년 규정의 확장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여호와께 구별된 백성이므로 거룩하다. 여호와께 구별된 이들은 여호와께서 구별하신 안식일을 지키며 여호와께서 구별하신 안식년을 지킨다. 그러므로 안식년과 희년은 단지 사회적인 규례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는 거룩을 이루는 규례이다. 그런 점에서 이에 대한 규정들이 레위기의 “성결 법전”(17-26장)에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고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얻는 주의 계명”을 따라 살기로 언약한 느헤미야 공동체의 개혁에 이러한 안식년의 준수가 포함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16
    • 구약 구약성경이 말하는 소유권과 사용권1)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전성민 교수1. 서론1.1. 참고 자료김병하, 희년 사상의 영성화: 오경에서 누가복음까지; 중간기 문헌을 중심으로 (대한기독교서회,2005); 이학재, 에스겔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 2002); 전성민, “땅의 신학을 재정립하라,”복음과상황 2005년 9월 1일호: 20-21; 전성민, “성전 너머의 세상: 에스겔 47-48장의 주해와 적용,” 그말씀 2006년 0월호: 52-61; 전성민, “주전 8세기 유다 부자들의 자업자득: 이사야 5장 8절에서 10절의주해,” 복음과상황 2007년 1월호: 79-82;월터 부르그만, 성서로 본 땅 (나눔사, 1991);이안 두굿, 에스겔 (성서유니온, 2003); 스탠리 그렌츠,기독교 윤리학의 토대와 흐름 (IVP, 2001); Daniel Hawk, Joshua (Liturgical Press, 2000); Tod Linafeltand Timothy Beal, Ruth and Esther (Liturgical Press, 1999); Norbert Lohfink, S.J., “Poverty in theLaws of the Ancient Near East and of the Bible,” Theological Studies 52 (1991): 34-50; 캐서린 두웁자켄펠드, 룻기 (현대성서주석;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G. von Rad, “The Promised Land andYahwehs Land in Hexateuch,” in The Problem of the Hexateuch and Other Essays (Oliver andBoyd Ltd., 1966): 79-93; Gordon Wenham, The Book of Leviticus (Eerdmans, 1979); H.G.M.Williamson, Isaiah 1-5 (ICC; T & T Clark, 2006); 크리스토퍼 라이트, 에스겔 강해 (IVP, 2004); 크리스토퍼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 윤리, 개정판 (IVP, 2006);안진호, “팔레스타인의 경제적 배경과 야고보서의 연대 추정,”(http://iktinos.org/bbs/view.php?id=seminar&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7);1) 이 글은 2008년 11월 8일 동안교회에서 열린 2008 동안포럼 “크리스챤, 하나님의 경제를 말하다”에서 “경 제: 성서에서 길을 찾다 - 구약의 경제윤리적 비전”으로 발표된 글을 조금 수정한 것으로 그 글과 본질적으 로 같은 것임을 밝힙니다.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17
    • 1.2. 핵심 논지1.2.1. “‘내가(혹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은 결코 경제 윤리의 주장에서 최종적인 대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시며, 나(혹은 우리)는 단지 위탁을 받아서 차지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에 속한 어떤 것을 더욱 필요로 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게 하신다. 땅과 자원의 소유권이 절대적인 처분권을 수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영과 분배에 대한 책임을 수반한다. 지구의 자원들을 사용할 수 있는 만인의 권리는, 오직 독점적으로 그 자원을 누리기 위해 소유하고 있는 어떠한사람의 권리보다 도덕적으로 선행되는 것 같다.”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 윤리, 개정판, 203, 저자의강조)“The right of all to use the resources of the earth seems to be morally prior to the right of any toown them for exclusive enjoyment.”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148, 저자의 강조)1.2.2. “지구의 자원에 대한 접근권과 사용권이 자원들에 대한 사유 재산권에 도덕적 제약을 설정해 주는 공동의 권리이듯이, 경제 과정의 최종 생산물을 소비하고 향유할 권리 역시 모든 사람의 필요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 그것은 “내 것은 내 것이며, 거기에서 내가 얻어낼 수 있는 무엇이든지 내가 갖고 소비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라이트, 205-206)“Just as the right of access to, the use of, the resources of the earth is a shared right that sets morallimitations to the right of private ownership of resources, so too the right to consume or enjoy theend product of the economic process is limited by the needs of all. ... which cuts across the ideathat ‘what’s mine is mine and I am entitled to keep and consume whatever I can get out of it‘.”(Wright, 149)1.2.3.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이 두 권리가 왜 분리가 되며, 그 분리가 고대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행해졌는가 혹은 행해지도록 요구되었는가를 논하는 것이 글의 목표이다.1.3. 글의 구성이 글은 먼저 땅에 대한 구약의 두 가지 접근을 살핀다. 역사적 접근과 제의적 접근이 그 두 가지 접근인데, 전자는 땅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선물임을, 후자는 땅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임을확인할 것이다. 땅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은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라는 개념을 통해 통합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두 번째로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를 보여주는 구약의 예들을 살펴볼 것이다(레위기 19장; 여호수아 21장; 신명기 15, 24장;레위기 25장). 세 번째 주제는 이러한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를 요구하는 구약의 윤리적 기준은 종종법이 요구하는 수준 이상임을 확인하는 것이다(룻기 4장). 마지막으로 “땅” 분배와 “노동”에 대한 구약의 궁극적 비전을 논할 것이다(에스겔 47-48장).18
    • 2. 본론2.1. 땅에 대한 두 가지 접근토지 신유라는 이상적이고 궁극적인 원리만을 주장할 때,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경제 윤리적 이상과우리의 현실의 괴리를 느끼고, 그 괴리가 너무 커질 경우, 이상을 무시하고자 하는 경향을 가질 수 있다. 이에 구약 성경 또한 실제적 소유를 인정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토지신유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논함으로 구약 성경의 도전을 좀 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2.1.1. 신적 소유권 아래의 땅(레위기 25: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2.1.2. 신적 선물로서의 땅- 토지의 실제적 소유권은 이스라엘 각 지파들과 그 지파 내에서 대가족 단위에게 있었다. (민수기 26장, 특히 52-56절; 민수기 34장; 여호수아 13-19장)- 또한 “지계표를 옮기는 죄악”도 (신명기 27:17 참고) 토지의 신적 소유와 더불어 사적 소유 (개인적소유는 아니어도)를 동시에 인정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2.1.3. 폰 라트의 “The Promised Land and Yahwehs Land in the Hexateuch”: 땅에 대한 두 가지 개념(역사적 개념; 제의적 개념)을 구별2.1.3.1. 역사적 개념- 족장들에게 약속된 땅과 그 약속의 성취로서 선물 받는 땅- 이러한 두가지 중심 주제를 처음과 마지막에 두고, 이집트에서의 노예 살이, 출애굽, 광야에서의 방황에 관한 기록들이 역사적 흐름의 틀을 이룬다.2.1.3.2. 제의적 개념- “여호와가 땅을 소유하신다”라는 믿음이 기본- 레위기 25:23- 이 개념에는 첫 열매에 관한 규정, 십일조에 관한 규정, 추수와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방법에 관한 규정, 그리고 앞에 언급한 구절의 맥락인 안식일 규정 등과 같은 토지의 사용과, 토지의 소산물 등에 관한 모든 제의적 규정들이 포함된다.2.1.4. 결론: “약속의 땅” (증여자 giver로서의 여호와) 과 “여호와의 땅” (소유자 owner 로서의 여호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19
    • 와) 이라는 두 주제;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의 신학적 근원2.2.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를 보여주는 구약의 예들단편적인 예 (레위기 19:9-10); 소유권과 사용권의 실제적 분리 (여호수아 21장); 빈곤 방지 시스템 (신명기 15장, 24장); 강제적 주기성을 중심으로 본 희년 제도 (레위기 25장)2.2.1. 단편적인 예(레위기 19:9-10) 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2.2.2. 여호수아 21장2.2.2.1. “기업”(“나할라”; 수 13:6, 7, 8, 14, 15, 23, 24, 28, 29, 32, 33)- 유산(inheritance)? 소유권의 이전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 “나할라”의 근원적 의미를 오해하게 할 수 있다.- “나할라”에 대한 적절한 이해: 여호와의 권위를 통해 주어진 정당한 소유로, 땅에 적용된자면 “정당한소유지”정도가 될 것이다.- “정당한 몫이나 받을 권리에 해당하는 것이면 무엇에든지 사용된다. 즉, 법적으로 그리고 고유하게한 사람이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 것을 의미한다.”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 윤리, 120)- 이러한 정당한 소유권이 세대를 이어 주장될 수 있었으며, 이런 경우, “대를 이어서 소유하는 세습되는 재산”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2.2.2. 그런데 레위지파에게는 가나안 땅이 기업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수 13:14)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 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음이더라 (수 13:33)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 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수 14:3-4) 이는 두 지 파와 반 지파의 기업은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주었음이요 레위 자손에 게는 그들 가운데에 서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요셉의 자 손이 므낫세와 에브 라임의 두 지파가 되었음이라 이 땅에서 레위 사람에게 아무 분깃도 주지 아니하고 다만 거주할 성읍들과 가축과 재산을 위한 목초지만 주었으니.2.2.2.3. 여호수아 21장의 구조1-42절: 레위자손에게 주어진 성읍과 목초지 1-3절: 전체의 도입20
    • 4-7절: 레위를 네 그룹으로 나눔 8-40절: 네 그룹에게 주어진 목초지가 딸린 성읍들의 이름을 지파별로 기록: 8-40절은 4-7절 의 상세 해설43-45절: 여호수아 13-21장의 전체 결론(수 21:2-3) 가나안 땅 실로에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우리가 거주할 성읍들과 우리 가축을 위해 그 목초지들을 우리에게 주라 하셨나이다 하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 이 성읍들과 그 목초지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참고) 현대의 제사장: (롬 15:16; 벧전 2:5, 9; 계 1:6; 5:10; 약 5:16 참고; 엡 4:11-12 참고):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2.2.2.4: 레위 지파에게 땅이 “기업”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 성읍들과 목초지를 사용했다. 다른 지파들이 땅을 정당하게 소유했었으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물로서, 레위지파의 사용을 위해 내어 놓아야 했다.2.2.3. 이 원리의 시스템화 1: 빈곤 방지 시스 템 신명기 15장, 24장 (Lohfink, 45)- 팔레스틴의 소규모 농부가 흉년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고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여기서 신명기 15:7-11은 그 이웃에게 그에게 돈을 빌려주기를 명한다.- 그 빚을 갚기 위해 그 농부는 일용 노동자가 되어야만 할 수도 있다. 신명기 24:14-15은 매일의 임금을 확실히 하도록 한다.- 만일 돈을 빌려준 사람이 담보를 잡는다면 신명기 24:10-13은 담보권을 어떻게 행사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알려준다.- 빚 때문에 노예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 되었는데, 마침 안식년이었으면 신명기 15:1-6에 의해 돈을 빌려준 사람은 지불을 요구하지 말아야 하며 빚은 면제된다.- 만일 안식년이 아닌 해에 빚 때문에 노예가 되면 신명기 15:12-18에 의해 그 노역은 안식년에 끝나야하며 주인은 그 채무자에게 새로운 경제적 기반이 될 수 있는 필요한 자원을 제공해야 주어야 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어떤 재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누군가의 정당한 소유를 제공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2.2.4. 이 원리의 시스템화 2: 강제적 주기성을 중심으로 본 희년 제도 (레위기 25장)2.2.4.1. 레위기 25장의 구조와 내용 (전반적 명령과 단계별로 주어진 구체적 규례들 신학적 근거 [38, 42, 55절])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21
    • - 안식년과 희년 (전반적 명령 1-22절)- 토지 무르기, 노예 속량, 희년이 되었을 때의 회복 (단계별 규례들 23-55절)2.2.4.2. 역사 속에서의 희년 (김병하)- 구약 성경은 안식년의 실행에 관해서는 그 가능성을 증거한다. 하지만 희년 자체의 실행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언급이 없다.- 외경 마카베오상 6장 49, 53절은 안식년 실행을 언급한다. (기원전 164-163년 김병하, 93. Grabbe,VanderKam 재인용) “49 한편 벳술 사람들은 마침 그 해가 그 고장의 안식년이어서 농사를 짓지 못했으므로 양식이 떨어져 더 이상 버 틸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도시를 버리고 물러나왔다. 왕은 벳술 사람들에게 화평을 제의했다. …52 유다인 들도 성을 공략하는 기구를 만들어, 그들을 대항하여 오랫동안 싸웠다. 53 그런데 그해는 안식년인데다가 이방인들 사 이에서 살다가 유다로 돌아온 동포들이 남은 식량을 다 먹어버렸기 때문에 식량이 떨어졌다. 54 그 기근을 참을 길 이 없어 모두가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갔고 성소에 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공동번역)-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Ant. 12.378)에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음: “But then theirprovisions failed them; what fruits of the ground they had laid up were spent, and the land beingnot ploughed that year, continued unsowed, because it was the seventh year, on which, by ourlaws, we are obliged to let it lie uncultivated.”2.2.4.3. 희년의 역사적 실행 여부의 중요한 기준: 희년의 급진적인 특이성 - 주기성- 비정기적인 약자 층에 대한 배려는 “일종의 통치 이데올로기”일 수 있으며 “정치적 라이벌을 견제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김병하, 86); “정치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 부정기적으로 선포되었던 고대근동 왕들의 각종 칙령들” (김병 하, 92);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선의 개념으로 희년 규례를 정의한다면 성서를 비롯한 많은 문헌들의 구절들이 희년 규례로 간주되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희년 규례 정신 중의 하나인 나눔이나 자선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구절들을 희년 규례라고 규정하는 것은 많은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 (김병하, 87)- 즉, 희년의 정신은 부정기적이거나 시기가 계획되어진 자선이나 나눔을 넘어 시혜자의 의도나 계획을 초월하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다. 시혜자의 다른 의도가 들어갈 가능성을 극소화 시키는 것이다: “신명기와 레위기에서의 희년 규례들은 부자들로 하여금 매 안식년과 희년 때마다 그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정기적으로 그들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명하는 급진적인 사회개혁 법안이 된것이다.” (김병하, 126).- 주기성의 현대적 개념: 개인의 의지를 초월하는 시스템화2.3. 법과 윤리의 간극 - 윤리적 기준은 법의 기준 이상이다 (룻기 4장)22
    • 2.3.1. 핵심 개념: 법적 권리와 도덕적 의무2.3.2. (룻 4:1-2; 개역개정)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 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아무개여” (히브리어: “플로니 알모니”)- 열 명이나 증인으로 서는 경우는 구약 다른 곳에 또 나오지 않는다. 아마 거부할 수 없는 증인의 수를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증인의 수는 상대방에게만 부담이 될 뿐 아니라 보아스에게도 부담이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보아스의 모습을 볼 수 있다.2.3.3. (룻 4:3-4; 개역개정)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밭의 일부를/우리형제 엘리멜렉에게 속한/판다/나오미가/모압 평지에서 돌아온-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하라/너 외에는 무를자가 없다/네 다음은 나다- 이러한 보아스의 제안에 대해 고엘은 간략히 “내가 무르리라”라고 대답한다. 그는 아마도 땅을 무르는 문제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른다는 의미는 그 땅을 다시 살 권리를 산다는 것이고 그권리를 행사하여 엘리멜렉의 땅을 가지게 되면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법적인 권리를 십분 사용하고 있다.2.3.4. (룻 4:5; 개역 개정)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개역(개정)은 땅을 사는 것과 기업을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세우는 것을 동일시 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번역들은 약간 다른 상황을 보여준다. (공동번역) 보아즈가 다짐하였다. “나오미에게서 밭은 넘겨 받는 날 당신은 고인의 아내 모압 여자 룻도 떠맡아야 하오. 그리하여 고인의 이름을 이어 그의 유산을 차지할 사람을 낳아 주어야 하오.” (표준새번역) 보아스가 다시 말하였다. “그렇다면, a나오미의 손 에서 그 밭을 사는 날로, 고인의 아내인 모압 여인 룻도 아내로 맞아들여야 하오. 그렇게 하여야만, 그가 물려받은 그 유산이 고인의 이름으로 남게 될 것이오.” (a. 고대 라 틴어역과 불가타와 시리아어역을 따름. 히, 나오미와 고인의 아내인 모압 여인 룻의 손에서 그 밭 을 사는 날에, 고인의 이름으로 그 유산이 이어지도록 하시 오) (룻 4:9-10 비교) 4: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23
    •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 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2.3.5. 보아스의 제안의 핵심: 법적 권리를 행사할 때 도덕적 의무도 더해져야 한다- 법적으로는 땅의 문제와 결혼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로, 땅만 무르는 것으로 고엘의 법적 권리는 끝이난다. 그런데 여기서 보아스가 룻과의 결혼을 도덕적 의무로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고엘은 룻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나중에 다른 사람에 의해 아들이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여전 히 미래의 가능성으로만 남을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과의 결혼은 그러한 아들의 탄생을 명확히 해주는 것이었고, 또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고 보아스가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태어난 아들은 엘리멜렉의 이름을 이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땅을 사는 것과 동시에 희년이라도 되면 그것을 돌려줘야 하는 상황도 동시에 만드는 것으로, 자신이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면서까지 밭을사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기 기업에 손해가 될 것이라고 나름의 이유를대고 있다. 드러내 놓고 결국 금전적인 손해가 날 것이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다.2.3.6. 보아스와 “아무개”의 차이“아무개”는 법적인 권리는 누리기를 원했다. 아주 명료하게 “내가 무르겠노라”고 대답했다. 왜냐하면그 권리는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나오미는 집안을 이을 자식도 친척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도덕적 의무”가 부과되자 고엘은 발을 뺀다. 이것이 그를 이름 없는 “아무개”로 남게 한 것이다.2.3.7. 보통 사람 “아무개”2.3.8. 기독인의 윤리 수준2.3.9. 보아스가 “도덕적 의무”를 감당한 이유: 사랑2.4. “땅” 분배와 “노동”에 대한 구약의 궁극적 비전 (에스겔 47-48장)2.4.1. 핵심 개념: 평등과 보편성2.4.2. 분배에 대한 원칙들(47:13-14; 21-23)- 47:13-23의 구조: 땅 분배에 대한 서론(13-14); 땅의 사방 경계(15-20); 타국인에게도 기업을 주라는지시(21-23)- 이상적인 시대의 원칙: 평등(14절)과 보편성(22-23절).24
    • (겔 47:14) 내가 옛적에 내 손을 들어 맹세하여 이 땅을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하였나니 너희는 공평하게 나누 어 기업을 삼으라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 (겔 47:22-23) 너희는 이 땅을 나누되 제비 뽑아 너희와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타국인 곧 너희 가운데에서 자 녀를 낳은 자의 기업이 되게 할지니 너희는 그 타국인을 본토에서 난 이스라엘 족속 같이 여기고 그들도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너희와 함께 기업을 얻게 하되 23 타국인이 머물러 사는 그 지파에서 그 기업을 줄지니라 주 여 호와 의 말씀이니라- 지파들의 체제에 타국인("게르")들도 포함될 것이다. 즉, 지파간의 평등의 범위가 이스라엘 이라는민족의 한 계를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22절). 이스라엘 속에서 여러 계층으로 살아가던 타국인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어느 정도는 유사한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할례를 받으면 유월절 식사에도 참여할 수 있었으며(출 12:48), 원한다면 제사와 같은 종교 행위에도 온전히 참여 할 수있었다(레위기 22:18 참고).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권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땅에 관한 것이었다. 타국인은 땅을 차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한계는 그들을 "이등 시민"으로 만들었다. 그런데에스겔의 마지막 환상에서 그러한 제한마저 철폐된다. 이러한 보편성의 원칙이 이상적인 기업 분배의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점이다.2.4.3. 땅의 사방 경계(47:15-20)2.4.4. 예물로 드릴 땅 (48:8-22; 45:1-7 참고)- 성읍의 기지 (48:15-19; 45:6): 이 성읍의 기지는 그 중앙에 위치한 성읍(거주지와 전원으로 이루어짐,15-16절)과 그 둘레의 땅(성읍 사방의 남은 둘레와 성읍 양쪽에 남아있는 땅, 17-18a절)으로 이루어져있다. 주목할 부분은 이 남아있는 땅의 용도이다. 지파를 막론하고 성읍의 일하는 자들이 이 땅을 경작할 것이고 그 산물이 그들의 양식이 된다(18b-19절). 즉, 이 땅은 일상적인 노동의 터전인 것이다. (겔 48:15) 이 이만 오천 척 다음으로 너비 오천 척은 속된 땅으로 구분하여 성읍을 세우며 거주하는 곳과 전원을 삼되 성읍이 그 중앙에 있게 할지니 (겔 48:15; NIV) The remaining area, 5,000 cubits wide and 25,000 cubits long, will be for the common use of the city, for houses and for pastureland. The city will be in the center of it. (삼상 21: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 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5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 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 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일상적인 노동의 터전이 비록 “거룩하게 구별할 땅”(“트루마트 하코데쉬”, 10, 18, 21절)과는 구별되지만 “예물로 드릴 땅”(“하트루마 아쉐르 트리무”, 8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여호와삼마: 성읍(성전이 아니라)의 이름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25
    • 3. 결론: 다시 원점으로 그러나 더욱 강력하게경제적 자원과 산물의 궁극적 소유주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경제적 자원과산물의 신적 소유만 강조할 경우, 우리는 성경의 요구를 이상적인 것만으로 치부하며, 성경의도전을 저버릴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경제적 자원과 산물이 궁극적으로 신적 소유 아래 있을뿐 아니라, 그것들의 정당한 실제적 소유권이 현실의 적절한 경제 단위에 “사적”으로도 주어져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한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여러본문들은 그 권리가 어떤 필요에 처한 사람의 “사용권”에 우선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구약 본문에서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제도화해 놓은 모습들을 찾을 수 있다. 더불어 기독인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윤리적 수준”은 법을 잘 지키는 정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은도덕의 최소 기준을 정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서 법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보통”의 모습일 수는 있겠지만, 룻기는 그러한 “보통”사람의 “이름”을 우리에게 전해주지 않는다. 성경은 이웃 사랑의 근원적 동기를 가지고 법적 권리와 함께 도덕적 의무를 행했던 사람의 이름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에 “그것은 내 것이다”라는 소유권과 관련된 선언은어떤 자원과 산물을 누가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최종적 대답이 결코 될 수 없다. “합법”의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더 근원적인 가치인 정의와 공평을 행하며 우리의 소유를 필요로 하는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내어 놓는 것이 기독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요구되어지는 경제 윤리적 삶이며, 어떤 기독인들은 이러한 원리를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 사회 가운데 제도화시키는 일에 부름을 받았을 것이다. 이런 작업들을 포함한 일상의 노동은, 에스겔의 환상이 보여주듯,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께 드려질 예물이 될 것이다.26
    • 신약 헌금, 축복의 통로인가? :고린도후서 8-9장을 중심으로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조석민 교수들어가며헌금, 과연 축복의 통로인가? 이 질문은 이 논의의 핵심이 무엇인지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이드리는 헌금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이 헌금을 드리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헌금을 드리면 정말 복을 받는가? 이 때 그 복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과연 어떻게 헌금을드려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하여 바울의 서신, 고린도후서 8-9을 중심으로 그 대답을 찾아 볼 것이다.첫째, 헌금과 관련된 현재의 문제가 무엇인지 개괄적으로 간략하게 살펴 볼 것이다. 둘째, 헌금의 성경적 의미를 고린도후서 8-9장을 중심으로 고찰할 것이다. 셋째, 성경이 말하는 복의 의미를 살펴보고, 헌금과의 관계를 확인할 것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올바른 헌금을 드리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재물 사용에 관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고 실제적인 제안을 할 것이다.1. 한국 교회의 헌금 문제한국 교회의 헌금 행위는 현세 구복적인 한국의 토속 종교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복의 개념이 물질적인 것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한국 교회의헌금 행위는 토속 종교와 세속적인 복의 개념과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어서 문제가 발생한다.헌금의 의도나 목적이 성경적이지 않고 토속 종교의 세속적 개념의 복들과 관련되어 있다.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분류하고 있는 헌금의 종류는 교회 마다 다르며, 교회의 형편과 목적에 따라서 그 숫자가 늘어나거나 줄어든다.개인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목적 헌금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헌금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특히복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헌금을 드리는 경우, 그런 행위는 무속 신앙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27
    • 교회 헌금이 늘고 개인의 수입이 오르고 사업이 잘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관련하여 복을 저울질 한다.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기복 사상의 영향아래 바알을 섬겼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가나안 종교의 바알 신을 섬기면 풍성한 농산물을 공급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신이 참 신이라고 믿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는 신이 참 신이라고 믿는 것이다.2. 헌금의 성경적 의미바울이 가르치는 헌금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은 헌금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가르치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그 의미를 알게 한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바울이 격려한 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모금이었다. 바울은 이 모금에대하여 가르치면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모금 운동(연보)에 대한 근본적인 근거를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라고 말한다.바울은 모금 행위에 대하여 “은혜”, “섬기는 일”, “참여함”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모두 헌금과관계된 말들로 이해할 수 있다.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본받아 행하는 인간의 은혜로운 행위를 의미하며(고후 8:1), “섬기는 일”은 가난한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는 것이다. “참여함”은 사람들과의 친교만이 아니라, 교제를 가능하게 하고 원활하게 하는 어떤 구체적인 일을 의미한다.1)2.1. 고린도후서 8장 해석 요약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를 위한 모금을 호소하고 있다. 이 모금을 위하여 마케도냐 교회들의 모범을 제시한다. 마케도냐 교회들은 빌립보,베뢰아, 데살로니가 등이 있다(행 16, 17장). 끝으로 모금한 것을 전달할 사람을 추천하고 있다.2.1.1. 마케도니아 교회의 모범(8:1-6)바울이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모금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마케도냐 교회의 구제를 위한 모금에 관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알리고 있다. 마케도냐 교회들이란 사도행전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베뢰아, 빌립보 교회들이다(행16:11-17:14, 참조. 롬 15:26).2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마케도냐 교회의 구제를 위한 모금 운동을 언급한다. 마케도냐 교회가 환난 중에서 그리고 간난함 속에서도 기쁨으로 풍성한 헌금을 드렸다. 마케도냐 교회의 환난1) 바울의 모금에 대해서는 갈 2:10, 고전 16:1-4, 고후 8, 9장, 롬 15:25-27에도 언급되어 있다.28
    • 은 빌 1:29-20과 살전 1:6, 2:14; 3:3-4에 언급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부유해야 남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마케도냐 교회는 어려운 가운데 예루살렘의 궁핍한 자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모금을 하였다.3-4절은 2절에 설명한 내용의 부연 설명이다. 바울은 마케도냐 교회의 성도들이 어떻게 헌금했는지를 증언한다. 즉, 힘대로 할 뿐 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풍성한 헌금을 드렸다.이 일을 바울은 성도 섬기는 일이라고 한다. 즉, 봉사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으로 표현한다.5절에 의하면 마케도냐 사람들의 태도는 바울의 기대를 넘어섰다. 즉, 그들은 헌금만 한 것이아니라 자신을 드렸다. 헌금의 기본자세와 태도를 가르친다. 6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향하여 그가 말하고자 하는 본론으로 들어간다. 바울은 디도에게 고린도에 가도록 권고한다. 디도의 임무는 예루살렘을 위한 모금 운동의 결실이다. 이 모금 운동은 이미 그 이전에 시작된것 같다(고전 16:1-4). 이제 그것을 마감해 줄 것을 부탁한다.2.1.2.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의 완성을 권고(8:7-15)바울은 모금에 앞서 고린도 교인들이 풍부함에 관하여 언급한다(고전 1:5).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칭찬하면서 모금 운동을 권면하고 있다. 8절은 모금 운동이 강요되어서는 안될 것을 분명히 보여주며, 자신의 말이 명령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그들의 사랑과 신앙에 호소하고 있다. 8절에서 ‘다른 사람들’이란 마케도냐 사람들을 의미한다. 바울은 헌금과 관련해서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9절은 헌금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근거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자기희생을 본받아 헌금해야 함을 가리킨다(참조. 빌 2:6-8). 10절은 8절과 같은 내용이다. 모금을 위해 명령해서는 안 되고 각 사람이 기꺼이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바울이이 일에 뜻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10절의 ‘뜻만 보인다’는 ‘조언하다, 의견을 주다’라는 의미가 있다. ‘일 년전’은 아마도 고전 16:1-4과 연결되는 것 같다.11-12절에서 헌금의 자발성의 원리를 다시금 언급한다. 즉, 헌금은 얼마를 내든지 자발적으로내는 것이 환영을 받을 만한 것이고, 아무 것도 없는 자들에게는 강요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것이라도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표시일 수 있다. 13절은 모금의 목적에 대해 해명을 하는 것으로 모금 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오해를 내포하고 있다. 즉 바울을 비난하던 자들이 바울의 모금운동에 대하여 모금을 빙자로 바울이 그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14절에서 바울은 모금의목적이 평균에 있다고 주장하며, 평균의 구체적인 의미를 가르친다. 즉, 평균케하는 하는 헌금의 역할을 설명한다. 15절은 헌금의 원리로서 공평성의 원리를 구약성경에서 찾고 있다. 출애굽기 16:8의 만나 기적을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필요를 아시고 그 필요에맞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다.2.1.3. 모금 전달자를 추천함(8:16-24)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29
    • 바울은 7-15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미 시작한 모금을 완수해 줄 것을 부탁한다. 이 단락에서는 모금 전달을 위한 사람, 즉, 바울의 동역자인 디도와 두 명의 형제를 언급한다. 디도는 바울의 요청을 받아들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갔다. 18-19절에서 디도 외에 두 사람의 형제를 함께보낸 것은 유대교의 증인에 관한 법이 고려되고 있는 것 같다. 18절에서 동반자에 대하여 묘사한다. 그가 누구인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모든 교회를 통해 칭찬을 받는 사람이다. 19절은 계속 이 형제를 말한다. 바울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릴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 같다. 20-21절은 디도 외에 신용할 만한 두 사람을 보내는 의도와이유를 알게 한다. 즉, 거액의 헌금을 운반할 때 생기는 어려움을 피하고자 한다. 헌금을 운반할 때 위험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전달할 두 사람을 함께 보낸 것이다. 23절에서 두 사람의 신용에 대하여 말한다. 23절에서 디도 및 두 사람의 형제들에 관하여 소개한 이유가 24절에 명시되고 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들에게 친절과 정성을 베풀라고 권면한다.2.2. 고린도후서 9장 해석 요약고린도후서 9장에서 바울은 아가야 지역의 교회들을 향한 모금을 호소하고 있다. 아가야 지방이란 고린도를 포함한 그 주변의 모든 교회를 포함한다. 바울은 이 지역의 교회들에게 모금을 준비할 것을 권고하면서 헌금하는 자의 자세와 헌금의 효용성을 언급하면서 모금에 너그러울 것을 호소한다.2.2.1. 모금 준비를 권고함(9:1-5)고린도후서 8:4과 같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성도를 섬가는 일’ 곧, ‘봉사의 일’이라고부른다. 바울은 헌금의 주제에 관하여 편지를 쓰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2절에서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일에 이미 열성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바울은 마케도냐교회들에게 고린도 교회를 자랑하였다. 즉 아가야 지방은 일 년 전부터 준비되었다는 자랑인데아가야의중심은 고린도이다. 칭찬의 결과 마케도냐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자극을 받았다는것이다. 고린도후서 8:1-2에서는 마케도냐 교회의 열심을 칭찬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자극시켜서헌금에 참여케 하였다. 3-4절에서 바울은 디도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형제들을 고린도교회에 파송한 것을 언급한다. 이 형제들을 보내는 이유는 바울이 마케도냐 교회에 고린도교회를 위시한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을 칭찬해 놓고 걱정 반, 소망 반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과연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이 바울이 언급한대로 모금 운동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걱정스러운것이다. 바울의 불안은 4절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5절에서 바울은 디도와형제들을 보내는 목적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즉,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여서 억지가 되지않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운동과 관련해서 오해를 많이받았다(고후 12:16-17).3.2. 헌금의 자세와 효용성(9:6-15)30
    • 본문 6절은 잠언 11:24과 19:17의 의미를 재현한 것이다(참조. 갈 6:7-9). 바울은 헌금을 하는데있어서도 자유로운 판단을 소중하게 여긴다. 7절에서 잠언 22:8을 자유롭게 인용하면서 기쁨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하는 헌금을 칭찬한다. 바울은 8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성도들을 섬기는일 때문에 가난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도록 능력으로 모든 은사를 풍성하게 내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가르친다. 이것을 위하여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즉 시편 112: 9을 인용한다. 즉, 가난한 사람들을 볼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 뜻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다. 10절은 8절에서 바울이 언급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다시 강조한다. 이 부분은 이사야 55:10을 연상시킨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헌금에 참여하는 것이 의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이일은 헌금을 하는 고린도 성도들과 가난한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모두 유익한 일임을 밝힌다.바울은 11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풍성히 입었다고 단정한다. 이은혜의 행위의 목적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12절부터 15절까지 감사의 동기가 계속된다.바울은 헌금의 효용성을 두 가지 차원에서 다룬다. 첫째는 원래 의도했던 것과 같이 예루살렘의궁핍한 성도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요, 둘째는 이 물질을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되는 일이다. 여기서 헌금의 신학적 이해가 확인된다.13절은 12절의 내용을 부연 설명한다. 이 부분에서 다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하여헌금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이해를 엿볼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 없이 헌금은 모아지지 않는다. 즉 헌금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고백의 차원이며, 그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다. 둘째, 헌금은 지역을 초월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한 형제자매임을확인하는 진정한 교제라고 할 수 있다. 14절에서 고린도 교회의 헌금을 받고 예루살렘 교회의성도들이 기도한다는 것은 감사의 뜻을 지닌 일종의 중보기도라고 할 수 있다. 15절에서 바울은 다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2.3. 바울의 모금 행위의 역사적 의미1) 구제금 모금 운동은 바울의 선교활동 전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돕는 일은 예루살렘 사도회의 때 바울이 결심한 일이다.2) 구제금 모금 운동은 바울이 세운 모든 교회들 안에서 이루어졌다. 고린도전서 16:1에 의하면갈라디아교회에도 이 모금 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으며, 마케도냐와 아가야 지역의교회들의 모범적인 사례를 얘기함으로써 갈라디아, 고린도, 빌립보, 데살로니가 교회 등 바울이세운 모든 교회들 안에서 시행되었다.3) 구제금 모금 운동은 일회적인 사건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6:1에서 모금 방식(매주 첫날)을얘기하는데 이를 예루살렘에 전달하는 것은 단 한 번으로 예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31
    • 4) 구제금 모금 운동은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조심스럽게 실행되었다. 본문에서는 고린도 교회에서의 모금운동을 마감하도록 디도와 함께 거액의 모금액을 운반하기 위해 두 사람을 동행시킨다. 이는 오해와 위험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2.4. 바울의 모금 행위의 신학적 의미1) 구제금 모금 운동은 디아코니아 운동이다. 디아코니아는 섬김, 봉사 등으로 번역되는데, 바울은 예루살렘을 위한 모금운동에 이 말을 사용한다. 이로써 단순히 물질적으로 궁핍함을 덜어주는 구제 사업이란 뜻을 넘어서 성도들 상호간에 서로 돕고 섬기는 봉사의 행위라는 것으로 이해된다.2) 구제금 모금 운동은 받은 은혜의 나눔 행위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를 위한 모금은 종종 은혜로 표현되는데 마케도냐 교회들이 가난한 중에도 기쁜 마음으로 풍성하게 모금하는 헌신적인 태도를 가리키며 하나님이 그 교회에 베푸신 은혜로 표시된다.3) 구제금 모금 운동은 지역을 초월하여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바울이세운 모든 이방인 교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표시로서 모금운동에 기쁜 마음으로참여하고, 이 헌금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이 베푼 은혜를 받음으로 자신들의 부족을 보충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은혜를 베푼 자들을 위해간구하고 그들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이런 행위로써 헌금을 드리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연대감이 형성된다. 이것은 개개의 교회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는 역사를 이루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3. 성경이 가르치는 복의 의미현재의 실용주의적 가치관에서 고려할 때, 시련과 시험, 고난, 등이 없는 상태가 복이다. 이런복의 개념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널리 퍼져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잘되기만을 위하여 기도한다.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성경이 가르치는 복의 의미를 깨닫기 전에 이미 형성된 토속 종교의 복 개념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통제하는 가치관으로 남아있어서 기복 신앙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물질이 많아 진 것이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복의 결과나 경건한 삶의 보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정반대일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에서 배불리 먹고 욕심껏 받았지만 그들은 욕심을 버리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참조. 시 78:29-31). 이런 경우에기도 응답이 항상 복은 아니다. 하나님의 복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으로 공동체의 복으로전해져야 한다. 어떤 특정한 지체 곧 개개인의 성도를 위한 복이라고 할지라도 그 개인이 소속된 공동체가 함께 누리는 것이어야 진정한 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인의 복지와 안녕만을 위32
    • 한 극히 제한적인 복의 간구나 추구는 지양되어야 한다.구약 성서에게 가르치는 복의 개념과 약속들은 신약의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예를들면 영적 복의 중심 내용이 되는 영생에 관한 가르침은 예수 부활 사건 이전에 충분히 설명할수 없는 제한적인 성격이 있다. 이런 점에서 구약 성서는 지상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안에서 누리게 될 영적인 복을 간접적으로 예시할 필요가 있었다(참조, 시 133:3).4. 헌금을 위한 재물 사용의 실제한국 교회의 실정에서 어떻게 헌금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실제적인 제안은 교회의 형편에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기본적인 사상과 개념은 다를 수 없다. 교회의 성도라면 물질적인 책임이 분명히 있다. 이런 관점에서 헌금을 실제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얼마나, 어떻게 헌금하느냐는 개인의 믿음과 생활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서 획일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헌금의 의무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는 사실이다.나가며헌금을 드리는 것은 그 사람의 신앙 행위의 단면으로 신앙 고백적 성격을 지닌다. 바울이 가르치는 헌금 행위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이다.[헌금 및 재물 사용을 위한 권장 독서]•김영봉, 『바늘 귀를 통과한 부자』서울: IVP, 2003.•박철수, 『축복의 혁명』서울: 뉴스앤조이, 개정판, 2007.•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 공진호 역, 『돈을 다시 생각한다』서울: 민음사, 2010.•래리 버켓(Larry Burkett), 조성표 역, 『돈 걱정없는 가정』대구: CUP, 1992.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33
    • 신약 바울이 들려주는 십자가의 긍정 이야기 안양대학교 신학과권연경 교수대박과 축복저의 책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 에는 “대박과 축복”이라는 꼭지의 글이 있다. 거기서 필자가했던 말의 핵심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축복”이 세상이 말하는 “대박”과 너무 닮았다는 것이다.물론 복이나 축복은 모두 지극히 성경적인 개념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단어들을 성경 자체의문법을 따라 사용하지 않고 세상이 말하는 “대박”의 문법을 따라 사용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사용했던 비유를 다시 사용해 보자면, 우리가 부르는 축복의 노래는 사실상 세상이 지어준 곡조를표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다. 얼핏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 실상은 세상이추구하는 대박을 따라간다. 다소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실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같은 욕심을추구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종교적 언어로 위장한다는 것이다.긍정의 힘긍정적 태도에 힘이 있다는 생각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분명한 확신을 갖고, 흔들리지 않는태도로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이 그것을 이룰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에서 쉽게 확인되는 사실이다. 무언가에 대한 의심이나 두려움은 우리의 태도를 어정쩡하게 하고 모호하게한다. 그러다 보면 무엇이든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우리의 행동이 한 가지 일관된 신념에이끌릴 때, 우리의 행동은 매우 효과적이 될 것이다. 그만큼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야기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우리의 격언이 말하는 바도 그와 같다.하지만 이런 긍정적 신념의 효력을 재확인하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무엇을 긍정하고 무엇에 마음을 모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결혼하기 전 결혼 상대를 신중하게 고르는 것처럼,우리의 마음을 바치기 전에 무엇에 마음을 바칠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이 중요하다. 내 삶이 잘못된 가치를 긍정하고, 거기로부터 힘을 이끌어 낸다면, 그것은 생명을 향한 능력이 아닌, 죽음을 향한 파괴력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무엇을 긍정하고, 또 무엇을 부정할 것인가?34
    •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집착”바울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믿음으로 그와하나가 된 우리들의 죽음과 부활로 이어진다.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과는 달리, 우리의 부활은아직 “신음하며” 기다려야 할 미래의 소망으로 남아 있다(롬 6:5, 8; 8:11; 고후 4:14; 고전 15).따라서 미래의 부활을 바라보는 오늘 우리의 삶은 많은 경우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그리스도의죽음을 통해 조명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부활로 이어졌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부활에 이르는 과정, 혹은 부활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사유화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바울의 복음에서 십자가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십자가, 새 창조, 새 인식바울의 복음이 십자가에서 시작한다면, 우리는 바울이 왜 십자가에 그토록 집착하는지를 알아야한다. 물론 예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죽음이다. 하지만 보다 구체적인 물음이 필요하다. 그의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위한 것이 되는가? 그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유익 중 한 가지는우리가 잘 알고 있다. 곧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적 죽음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십자가는 우리들 편에서도 중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5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사랑을 발견하는 일은 근본적인 인식론적변화를 동반한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는 “육신적인” 관점으로부터 하나님을 위한 관점에로의 변화다. 회심 이전 바울은 모든 사람들을 “육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5:16a). 물론 그는 그리스도 역시 “육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었다(5:16b). 따라서 그에게 예수란 나무에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전 1:18, 24; 갈 3:13). 하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스도를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은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들을 위한” 삶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임을 알게 된 자들은 더 이상 그런삶을 지속할 수 없다. 그들의 “육신적” 관점은 그리스도 중심의 관점으로 바뀌고, 자기 자신을위한 삶은 이제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을 위한” 삶으로 변화한다(고후5:15). 이러한 변화를 겪은 존재는 더 이상 이전의 존재와 같을 수 없다. 바울은 이를 새로운창조로 설명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5:17).육신적 관점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점에로의 변화를 달리 말하면 “외모”에 대한 자랑을 버린다는 것이다(고후 5:12). 물론 바울이 말하는 “외모”란 얼굴이나 몸의 생김새가 아니라, 사람들이 가진 온갖 “외적” 조건들, 혹은 갖기도 하고 혹은 갖지 못하기도 한 차이들을 가리킨다. 인간의 삶에서 이러한 차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작용하며 남과 나를 구분하는 정체성의 재료들을 제공하며, 더 나아가 이런 정체성의 요소들은 “나는 너와 다르다”는 자부심의 근거로 작용한다. 물론 이런 자부심은 자기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이 될 수도 있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35
    • 고, 자기보다 못 가진 사람들에 대한 경멸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가치관 속에서 우리의 삶은 많은 부분 이런 “외적” 가치들을 확보하고 축적하려는 노력,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앞에서 나를 증명하고 인정받으려는 땀흘림으로 드러난다. 바울은 이런 삶의 방식을 “외모를 자랑하는” 삶이라 부른다. 십자가는 이런 삶의 죽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런 헛된 가치들로부터자유한 새로운 삶을 불러들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생명과 무관한 헛된 인간적 가치들에 대한 단호한 부정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과 닿아있는 새로운 가치들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다.고린도교회와 십자가의 복음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자신이 선포하는 복음을 “십자가의 말씀”으로 요약한다(1:18). 바울이 고린도에서 선포한 메시지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였다(1:23; 2:2). 물론 이는 표적을 추구하는 유대인들에게나 지혜를 뒤쫓았던 헬라인들 모두에게 “바보 같은”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1:18, 21, 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십자가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말의 지혜”(1:17) 혹은 “아름다운 말과 지혜”(2:1)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전도의 어리석음”을 통해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으며(1:21), 따라서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말씀을 있는그대로 선포하였다. 물론 “멸망하는 자들,” 곧 세상의 지혜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이 “바보 같은”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실제로는 사람의 지혜보다더 지혜롭다(1:25). 그래서 이 복음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 곧 구원의 길 위에 있는 자들에게는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로 다가온다(1:18, 24). 이렇게 하여 십자가의 복음은 세상의지혜와 세상의 강함을 폐기하고 새로운 가치체계를 조성하는 결과를 낳는다(1:27-28).십자가의 어리석음, 십자가의 능력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선포했고 또 고린도인들이 수용했던 복음을 “십자가의 말씀”으로 요약함으로써, 지혜 혹은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적인” 혹은 “육신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던 고린도 신자들의 이율배반적 영성을 비판한다(3:1-3). 인간이 의지하고 자랑할 만한 일체의 가치를폐기처분하고(3:1-3; 4:18-23), 오직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도록” 함으로써,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인간적인 것들을 두고 자랑하지못하도록 하셨던 것이다(1:29-31).하지만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세속적 의미의 지혜나 강함에 대한 효과적인 대안이 되는 것은 십자가 자체에 내재한 어떤 신학적, 혹은 철학적 논리 때문이 아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어리석음이라 부르지만,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세속적 지혜에 대한 고린도인들의 집착을 폭로하기위한 하나의 역설적 수사이지 복음에 대한 실질적 평가는 아니다. 멸망해 가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분명 십자가가 어리석어 보이겠지만, 구원을 얻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는 오히려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어리석은 것으로 드러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능력이요 지혜다(1:18,24). 물론 십자가 상에서의 수치스런 죽음이 구원의 사건이라는 선포는 믿기 어렵다. 그런 점에36
    • 서 복음은 분명 역설이다. 여기에는 유대인이 추구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표적”도, 헬라인들이추구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지혜”도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표적과 지혜의 부재 자체가 십자가를 구원의 말씀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효력을 갖는 것은 이런 표면적 미약함과 어리석음 배후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18). [우리가 전하는 십자가의 말씀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부르 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1:23-24).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어리석고 약한 죽음이 모든 가치들을 역전시키고, 그러기에 “복음의상징적 세계 속에 들어가는 것은 발상의 전환을 통과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전환은 우리로하여금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지혜”와 “능력”을 발견하는 것이지, 벌거벗은 임금님을 향해 멋진옷을 입었다고 박수치는 위선은 아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최종적 논점은 일견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드러내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그 어떤 인간적 지혜나 힘보다 더 강하고 더지혜롭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1:25). 바로 여기에 십자가의 우위가 존재한다. 하나님의 약함과 어리석음이 실제로 사람의 강함이나 지혜보다 더 강하고 지혜롭기에, 세상의 힘과 지혜는 하나님의 어리석음보다 더 어리석은 것으로 폐기처분되는 것이다.이처럼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관심 배후에는 바로 이 능력에 대한 관심이 자리하고 있다. 바울이 십자가에 집중한 것은 십자가 자체의 어떤 철학적 혹은 신학적 의미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매개하는 메시지로서의 실질적 효력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말의 지혜”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1:17). 십자가가 헛되지 않다는 것은, NIV에서 잘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십자가의 능력이 헛되지 않다는 의미이다. 처음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는 “거창한 말과 지혜” 혹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에 의존하지 않았다(2:1, 4). 이 진술의 핵심은 자기과시다. 바울의 선포에는 당대의 웅변가들에게서 의례 기대할 법한 카리스마나 자기 과시의 몸짓이 아주 결여되어 있었다(2:3; 고후10:10). 이는 자신의 존재감이 십자가의 복음 자체를 가리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바울은자신의 존재로 인해 복음이 상대화될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복음 자체,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 집중하였다(2:2). 십자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말이 그런 의미다. 물론 그의 이런 선택 배후에는 십자가 자체가 어떤 인간적 그럴듯함을 넘어서는 실질적 효력을 드러낸다는 신념이 자리하고 있다. 제가 이렇게 했던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조성되도 록 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이 진술은 바울이 오로지 십자가의 메시지에만 관심을 기울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선명히보여준다. 십자가가 “헛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십자가 속에 담긴 목적이 좌절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다(1:17). 바울은 이 십자가의 목적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푼다. 바울은 고린도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37
    • 성도들의 믿음이 선포하는 사람의 수사적 설득력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생겨나고 유지되는 것이기를 바랐다. 이것이 십자가에 집중한 바울의 실질적 의도다.그러니까 그가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메시지를 수사적 꾸밈없이 선포한 것은 어리석음 자체에무슨 내재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 수사적 지혜에 대한세속적 집착을 버리고,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나타나는 실질적 구원의 능력을 매개하기 위함이었다.십자가를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매개했던 초기 고린도 사역에 대한 회고는 세속적 가치들에 현혹되는 고린도인들의 현 태도에 대한 질책의 성격을 띤다. 바울이 보기에 현재 고린도인들의 문제는 공동체가 생겨날 당시의 역동적 능력, 곧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참된 능력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물론 그들은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며”(1:5), 그들은 이런 지혜를자랑하였다(3:18-23).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과시하는 “말”의 화려함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그들의 “능력”이다(4:19). 그래서 바울은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여러분들에게 속히 가서, 우쭐해진 자들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확인해 보겠다”고 말한다(4:19). 바울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능력을 통해서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4:20. 필자 의 해석을 더한 번역).십자가와 가치의 역전하나님 나라, 곧 구원에는 말이 아니라 능력이 필요하다(6:9-10 참고). 혈과 육에 속한 삶의 방식으로는 하나님나라를 상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15:50). 물론 이 능력은 십자가에 근거하는 것으로, 그 구체적 드러남 역시 십자가의 형상을 닮는다. 바울이 제시하는 자신의 사도적 행보는이런 십자가적 능력의 구체적 면모를 생생히 보여준다(4:9-13). 분명 이런 식의 삶은 세속적이며승리주의적인 관점에 탐닉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고 연약한 것으로 비칠 것이다(4:10). 하지만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그런 삶의 행보야말로 복음의 능력이요 구원의 능력임을 안다.바울은 성도들의 삶 또한 이런 십자가의 능력을 보여주기 바랐고(4:16), 그래서 그는 이 능력의유일한 원천인 십자가를 상기시키는 것이다.이처럼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전폭적 긍정은 십자가의 메시지가 매개하는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 때문이었다. 얼핏 “어리석음”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 새 생명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복음이었다(15:45). 바로 그런 이유로 십자가는또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치 있지는 것으로 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수여라는 측면에서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온갖 인간적 가치들에 대한 부정으로 작용한다. 십자가라는 어리석음이 참된 생명의 열쇠로 드러나고, 세상에서 인정받던 온갖 가치들이 무가치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십자가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뒤집는 가치관의 역전을 야기한다.십자가의 메시지로 부르심 받은 고린도교회에는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나, 권력을 가진 자38
    • 나, 배경이 좋은 자들이 거의 없었다(1:26). 이 세상이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이 배후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깔려 있다.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 복음으로사람들을 구원함으로써, 그리하여 세상에서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당하는 것들을 택함으로써, 세상에서 “잘 나가는” 자들, 사람들 보기에 지혜롭고, 강하고, 존재감 있는 자들을 가치를 폐기처분하셨다(1:27-28). 바울은 이런 불가해한 구원의 방식, 곧 일체의 인간적 조건을 무시하는 이런 부르심을 은혜라는 말로 요약한다.십자가의 부정과 긍정, 그리고 고린도교회따라서 십자가로 부르심을 받은 십자가 공동체는 은혜의 원리에 의해 세상의 가치관이 뒤집히는, 그러기에 세상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이 작용하는 은혜의 공간이 된다. 아니, 그런 은혜의공간이 되었어야 했다. 여기에 바울의 답답함이 있다.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초대받은사람들, 이를 통해 은혜의 선택을 경험한 자들은 새 생명의 원천이 십자가의 복음임을 알기에생명과 무관한 세상의 가치들로부터는 자유로워야 했다. 돈이건, 세속적 지혜건, 권력이건, 혹은사회경제적 영향력이건, 그 어떤 것들도 우리를 살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세력들에아첨하는 삶을 그만두어야 했다. 하지만 고린도의 신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교회바깥에서 먹히는 그런 인간적 가치들에 집착했고, 그런 가치들을 의존하며 서로 구별하며 서로분열하였다. 바울은 세속적 가치들을 빌미로 서로 “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고린도의 신자들을향해 “육적인” 존재들이라 부른다(3:1, 3).그들은 “사람” 곧 사람들 사이에서 통하는 가치들을 자랑했다. 그런 헛된 가치들을 내세우며 서로를 차별하였다. 이런 가치들에 의존하여 고린도의 “힘 있는” 신자들은 “이미 배부르며, 이미풍성하며, 바울 없이도 왕이 된” 것처럼 행세하였다(4:8). 이런 비교와 경쟁과 자랑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이 넉넉히 주신 다양한 영적 은사들조차도 이런 세속적 키재기에 동원되었던 것처럼보인다. 이런 신자들에게 바울은 묻는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그들이 받은 십자가의 복음은 오히려 그런 인간적 차별을 철폐하며 모두를 은혜의 공간으로 이끌지 않는가? 물론 그들 나름으로 가진 것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두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아닌가? 그렇다면 마치 그것이 자신의 업적인 양 우쭐해 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4:7)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의 이런 행태에 십자가의 복음을 따라 사는 자신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그리스도로 인해 바울은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하며, 지금 이 시간까지도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정처도 없는 삶을 지속하고 있다(4:10-11). 십자가를 선포하는 바울에게 하나님이내리신 삶의 행보는 마치 개선행렬의 제일 마지막에 끌려가는 자들, 곧 원형경기장에서 사람들의 잔인한 여흥을 위해 피를 흘리다 결국 죽어갈 전쟁포로들의 처지와 방불하다(4:9). 비유를바꾸자면,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지꺼기”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4:13).하지만 이런 비천한 행보는 그저 무의미한 궁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토록 힘겨운 삶의 상황 속에서도 바울의 행보는 선명했다. 복음 선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려고 손수 일을 하며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39
    • 복음을 전했고, 모욕을 당하면 도리어 축복하고, 박해를 받으면 인내하고, 비방을 받으면 그 사람을 권면하였다(4;12-13). 이런 새 생명의 흔적들은 인간적인 가치들을 자랑하며, 이미 다 된것처럼 우쭐해 하던 고린도인들의 삶에서는 찾을 수 없는 자태였다. 말하자면 고린도인들은 주장은 화려했지만, 그들의 삶 속에 생명의 흔적은 없는 상황이었다. 말을 잘 했지만, 그 속에 십자가의 능력을 확인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성도들에게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호소한다(4:16). 무익하기 짝이 없는 인간적 가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런 것들로 서로를 구별하며 “시기와 분쟁”을 일삼지 말고, 새로운 삶으로 드러나는 십자가의 능력을 보이라는 권고다(4:19).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긍정은 십자가를 통해 매개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긍정이었다. 돈이나, 학벌이나, 영향력이나, 사회적 배경과 같은, 세상에서는 소중한 온갖 가치들에 대한 바울의무관심은 하나님의 능력을 매개하거나 그 능력을 반영하지 못하는 헛된 가치들에 대한 무관심이었다. 세상적 가치들에 대한 무관심은 그로 하여금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와 방불한 삶을살게 했지만, 그런 삶 속에서 그는 세상의 어떤 것들로도 조작할 수 없는 십자가의 생명력을드러내었다. 얼핏 극단적인 부정의 삶인 듯 하지만, 실상 하늘의 생명에 대한 주저 없는 긍정의결과로 나타난 삶의 자태였다.부정 속의 긍정일견 바울의 삶은 통상적 의미에서 “삶의 긍정”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세속적 관점에서 볼때 바울이 그려내는 신자들의 삶은 “세상에 가장 불쌍한 자들”의 삶에 가깝다(고전 15:**).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이런 행보는 무작정 삶을 부정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결코 염세주의자도,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삶을 긍정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무엇이 긍정할 만한 “삶”인지를 보다 선명한 시선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 보기에그의 삶은 분명 삶보다 죽음에 가까웠지만, 그의 이런 죽음의 행보는 실상 참된 생명을 얻고,그 생명을 드러내려는 가장 지혜로운 선택의 결과였다. 바울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그가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지고 다니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후 3:10).그가 하루하루의 삶에서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겨지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육체에나타나게 하려는” 의도의 표현이었다(3:11). 삶을 부정하는 죽음의 행보가 아니라, 궁극적 삶을긍정하기 위한 잠정적 부정, 혹은 참된 삶을 긍정하기 위한 거짓된 삶의 부정이었던 것이다.Cf. 빌립보서 3장.40
    • 교회사 돈과 교회의 역사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교회사배덕만 교수강의를 시작하며교회에서 다루기 가장 거북한 주제가 돈일 것이다. 가장 관심이 많은 주제이면서, 동시에 가장예민하고 난해한 주제이기 때문에, 차라리 피해가는 것이 상책처럼 되었다. 하지만 그런 소극적태도 속에, 이로 인한 문제는 교회를 거의 붕괴 직전의 위기로까지 몰고 갔다. 현재 한국교회를향해 제기되는 교회 안팎의 가장 혹독한 비판들이 대부분 돈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교회가 돈에 집착하는 차원을 넘어, 돈에 대한 집착이 영성의 부패로 이어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이번 강의를 통해, 교회사에 나타난 “돈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간략히 검토하고,현재 한국교회의 현실을 정직히 반성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돈 때문에 수렁에 빠진 교회가정말 “정금같이”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1. 성경은 돈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는가?성경을 살펴보면, 우리는 돈에 대한 근본적 모호성을 발견한다. 어떤 문맥에서는, 특별히 구약에서는, 돈이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아브라함은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했던 것으로 서술된다(창13:2). 욥은 대단한 부자였고, 솔로몬은 당대의 왕들 중에서 비교할 자가 없을 정도로 많은 부와 명예를 소유했다(왕상3:13). 잠언은 우리에게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한다”고 말하며(10:22), 간단한 노동윤리를 제시한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10:4).물론, 구약에 부에 대한 경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부의 원천에 대해 잊지 말아야 한다.“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8:18). 우리는 재물에 궁극적 신뢰를 두어선 안 된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한 자”를 궁극적으로 멸망시킬 것이라고 말한다(시52:7). 더욱이, 부의 소유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의무와 함께 간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41
    •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잠19:17). 십일조, 안식일, 그리고 희년이라는 구약의 제도들은 부분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의 부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며,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했다.돈에 대한 그림이 신약에서는 약간 변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침투를 강조한다. 여기서 돈의 부정적 측면이 더욱 강조된다. 예수는 돈에 대해 자주 말했다.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에서(눅12:19), 그는 물질적으로는 부자였으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선가난했던 사람의 어리석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돈을 신성시하는(맘몬) 우상숭배적 태도를 정죄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 예수는 우리에게 돈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우리 생명의 주관자인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해야 하며, 그결과 물질적인 것들도 우리에게 공급될 것이다(눅12:31). 부의 소유는 너무 쉽게 우리를 유혹하여, 이 세상의 것에 헌신하도록 만들고,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씨 뿌리는자의 비유에선, 부는 말씀의 숨통을 막을 수 있으며,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게 할 수 있다(마13:22). 이런 이유로, 부자가 믿음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마19:23-24). 가난한 자들에게유리한 점이 있다. 단지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자신을 의지할 수 없고,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에 더 잘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는 가난한 자들을축복했다(마5:3).예수의 이런 가르침은 신약의 다른 곳에도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 신약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본문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경고를 받는다(딤전6:10). 바울에게, 탐욕의 반대는 만족이며, 이것은 기독교적 삶의 근본이다(빌4:12).끝으로, 참된 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 속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성경에서 자주 경제적 용어로 기술된다.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나님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했다(야2:5).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많은 것을 가진 자”로 묘사한다(고후6:10). 제로섬 논리를 사용하며, 그는 예수가 가난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부자라고 말한다(고후8:9).돈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그러므로 이중적이다. 즉, 돈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축복의 징표다.하지만 돈은 그 자체로 신이 아니다. 성경은 금욕적이지 않으며, 가난이 본질적으로 선한 것도아니며, 부가 악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참된 부는 물질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친다.2. 초대교회는 돈을 어떻게 보았는가돈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이 교회사에서 어떻게 해석되었는가? 대체로, 초대교회 자체가 가난했다. 교회는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 스토아적 무관심을 가르쳤다. 부분적으로, 임박한 하나님 나42
    • 라의 도래에 대한 자신의 종말론적 기대감 때문에 말이다. 점차로, 초대교회는 부에 대한 불신과 가난에 대한 찬미를 발전시켰다.하지만 초대교회가 공산주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교부들은 성경에서 사유재산에 대한 긍정과기독교적 사랑에 대한 급진적 요구 사이의 긴장을 감지했다. 그들은 사유재산과 상업활동을 인정했다. 비록 그들이 그 두 가지 모두 타락의 산물이며, 인간의 죄성에 대한 적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가지가 성직자에게는 금지되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부자들에게 자선활동을 통해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라고 가르치면서, 부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사유재산은 타자들의 선을 위해 사용되어야 했다. 스미르나의 폴리캅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선을 행할 능력을지녔다면, 주저하지 말라. 자선은 죽음에서 [생명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들은 성경이 부를 완전히 반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성경이 정죄하는 것은 부의양이 아니라, 부에 대한 잘못된 태도였다. 어거스틴은 시편 72편에 대한 주석에서, 어떻게 탐욕이 부자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도 죄가 되는지에 대해 썼다. “그것은 수입의 문제가 아니라, 탐욕의 문제다. 당신 옆에 서 있는 부자를 보라. 아마도 그는 몸에 돈을 지니고 있지만, 탐욕은 없다. 하지만 돈이 없는 당신에게는 탐욕이 가득하다.” 이런 생각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설교에서도 메아리치고 있다. “구원 받아야 할 부자는 누구인가?” 예수의 비유에서 생계를 걱정하지 않는 그 부자는 아마도 욕심이 별로 없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보다 구원에 더 가까울 수 있다.” 우리는 돈에 대한 사랑을 경고하는 성경적 가르침이 가난한 자와 부자 모두에게적용된다고 주장하는 그의 주석에 꼭 동의할 필요는 없다.일반적으로, 교부들은 개인의 돈 문제에 집중했고, 경제정의라는 보다 큰 문제들은 다루지 않았다. 이것에 대한 주목할 만한 예외는 고리대업에 대한 그들의 광범위한 정죄다. 교부들은 보편적으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취하는 것에 반대했다. 구약성경의 금지조항들(신23:19)은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은 고리대업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이해되었다(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눅6:35]). 아타나시우스는 고리대업이 막중한 죄로서, 이 죄를 범하면 구원을 상실한다고 가르쳤다. 암브로시우스도 같은 생각을 하며 이렇게 썼다. “누군가 고리대업의 죄를 범한다면, 그는 강도 짓을 한 것이며, 더 이상 생명을 소유하지못한다.”고리대업을 금지할 때, 교부들은 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특별히 가난한 자들은 돈을 빌리는 경향이 있고, 탐욕스런 채권자들은 빈번히 그들을 노예로 삼거나 자살로 유도했다. 하지만 교부들은 채무자들이 대출을 통해 이익을 얻은 경우, 이자의 도덕성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중세교회는 돈에 대한 기독교적 사고를 더욱 발전시키고 제도화했다. 고대교회의 금욕운동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은총 이원론 속에서 지지를 발견했다. 돈은 영적이지 않은 것으로, 타락한 세계의 산물로 간주되었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양을 넘어선 재산은 참된 (비 물질적) 영성에 매우 해로우며, 물질적 빈곤은 영적 완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 아퀴나스는 상업활동에 대한 교부들의 반감을 반영했다. 그는 상업활동 내에서, 특히 고리대업에서 “뭔가 야비한 것”을 발견했다.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43
    • 중세에, 우리는 빈곤문제를 완화하려는 교회의 합법적 시도들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중세교회위원회는 자선행위를 일종의 수입세로 확대했다. 교회회원들은 자신들의 수입의 1/10을, 특별히가난한 자들에게 구제를 베풀기 위해, 주교에게 지불해야 했다.3. 개혁자들은 돈을 어떻게 보았는가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종교개혁의 재발견은 경제문제에 대한 개혁자들의 해석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개혁자들을 빈곤에 대한 찬양을 거부했다. 사랑의 행위로 시작했던 수도원 운동은구원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신칭의는 구원이 기독교적 삶의 목적이 아니라 기초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청빈이나 자선행위 속에 구원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개혁자들은 부에 대한 성서적 경고들을 부인하지 않았다(루터는 신자에게 세가지 회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즉,마음의 회심, 정신의 회심, 그리고 지갑의 회심). 하지만 그들은 물질적 빈곤을 추천하지도 않았다. 칼빈은 빈곤이 부만큼 영성에 위험하다고 썼다. “예를 들면, 오른쪽에 부, 권력, 명예가 있다. 이것들은 흔히 이것들이 보여주는 눈부신 표면적 화려함으로 우리 시력을 둔화시키고, 감언이설로 유혹한다. 그 결과, 그런 유혹에 빠지고, 그런 달콤함에 취해, 사람들은 자신의 하나님을망각한다. 한편, 왼쪽에는 빈곤, 수치, 경멸, 고통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의 고통과 고난에 방해 받아, 그들은 소심해지고, 확신과 소망을 던져버리며, 마침내,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소외된다.”개혁자들은 부에 대한 중세적 거부 뒤에 놓여 있던 토마스주의적 반(反) 물질주의도 거절했다.아퀴나스는 돈이 타락 이후에 발생한 제도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칼빈은 돈을 보다 긍정적으로창조의 산물이라고 이해했다. 돈은 “자연질서”의 일부로서, 인간적 의사소통을 고양시키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러므로, 돈을 잘못 사용하는 것은 자연질서의 변질이었다.칼빈은 고리대업에 대한 스콜라적 가르침에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그는 이자에 대한 절대적 금지가 성경적 증거를 갖고 있기 보다, 돈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돈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듯이) 정적인 교환단위가 아니라, 부의 창출을 위한 역동적 수단이다. 대출자들도 대출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고리대업을 반대하는 이유가 약화되었다. 그는 합법적 고리대업과 비합법적 고리대업을 구분했다. 언제나 가난한 자들을 억압했던 전문적 고리대금업자의 행위는 불법이었다. 그런 것은 교회에서 금지되어야 한다고 칼빈은 주장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재산에 해를 입히면서 부를 축적해선안 된다.” 하지만 고리대업은 상업적 맥락에선 합법적이며, 정말 필요했다. 개혁자들은 상업활동과 기독교적 삶 사이에 어떤 양립불가능성도 보지 못했다. 칼빈은 단지 황금률이 그런 활동을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능한 한 많이 벌어라, 가능한 한 많이 저축하라,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이 주어라.”4. 재세례파의 반대44
    • 비록 돈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개혁자들의 일반적 합의가 있었지만, 재세례파들은 중요한 반대목소리였다. 다른 문제에서처럼 경제에서도, 재세례파들은 개혁자들이 충분한 개혁을 이루지 못했다고 느꼈다. 메노 시몬스는 개혁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결과, 그들의 복음을 안이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성례전을 “허무한 떡 떼기”(barrenbreadbreaking)으로 만들었다. 이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참된 기독교의 징표를 완전히 상실했음을 기억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 을 가졌다고, 참된 기독교 교회가 되었다고 자랑하는 것은 슬프고 참을 수 없는 위선이 아닌가?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없는 것이 없고, 실크와 벨벳, 금과 은으로 몸을 치장하고, 온갖 멋을 부리고, 집을 온갖 값비싼 가구들로 장식하고, 금고를 가득 채우고, 사치와 향락 속에 살지만, 그들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교 우들은 도움을 청하고 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고통 받으며 늙고 절룩거리고 눈멀고 병든 사람들이 그들 의 문 앞에서 구걸을 한다.시몬스에게,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돌봐야 한다는 급진적 의무를 담고 있다. “누가 이 세상의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거하겠느냐.”(요일3:17).대부분의 재세례파들은 사적 소유를 인정했으나, 일부 재세례 분파들은 너무 멀리 나가서 사유재산을 부정했다. 일종의 기독교 공산주의가 후터파들에 의해 제도화되었다. 그들은 “재산공동체”를 실천했다. 울리히 스태들러(Ulrich Stadler)의 말은 이들 기독교인들의 관점에, 소유가 기독교적 삶에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보여준다. “하나, 공통의 것은 주의 집을 세우고 순수하다. 하지만 나의 것, 너의 것, 그의 것, 우리 자신의 것은 주의 집을 분열시키고, 불결하다. 그러므로,소유권이 있고, 사람이 그것을 소유하며, 그것이 그의 것이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길원치 않으며, 삶과 죽음에서 그의 것이 되길 원치 않는 곳에서,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공동체밖에 있고, 천국에서 아버지를 갖지 못한다.”5. 청교도 윤리재세례파들은 박해 받는 소수자였고, 그들의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그 동안, 종교개혁의 경제적유산은 청교도들에 의해 신세계로 이전되었다. 청교도들은 성실, 절제, 그리고 소박한 삶의 윤리를 추구했다. 역설적으로, 이 윤리는 큰 부를 낳는 경향이 있었다. 청교도 노동윤리와 자본주의의 사업윤리 간의 유사점들은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로 하여금 종교개혁의 신학,특히 칼빈주의가 자본주의를 발생시켰다는 주제를 증진시키게 했다. 그의 유명한 책, <개신교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그는 절약, 정직, 그리고 근검이란 칼빈주의 덕성이 “세속적 금욕주의”를 양산했으며, 부의 축적을 가능케 했다고 주장했다.베버의 논제는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칼빈 자신이 부를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자동적 징표로간주하는 것을 경고했다. 우리는 하나님 섭리의 신비들을 파헤치려 해선 안된다. 결국, 그의 일반은총에 의해, 하나님은 이교도들에게도 부를 허락한다. 청교도들은 부 안에 어떤 유전적 가치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45
    • 를 발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대단히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리차드 박스터(Richard Boxter)는 “세상이 가슴 속에 재산을 소유하는 곳에선,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을저지르게 하고,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하고, 우리의 소명에 불충실하게 하고, 신앙 자체게 잘못을범하게 한다.” 청교도들은 재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당대의 물질주의에 대해 논평하면서, 코튼 매더(Cotton Mather)는 이렇게썼다. “신앙은 부를 낳았고, 딸이 어머니를 삼켰다.”베버의 비평가들은 칼빈주의 내에서 자본주의의 합리화를 찾는 것에 대해 마음이 불편했다.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 발흥과 칼빈주의의 쇠퇴 사이에서 정반대의 상관관계를 발견한다. 종교개혁이후 시대에, 자본주의가 칼빈주의 윤리를 세속화시켰다. 개신교주의는 중산층의 존경과 일치하게 되었고, 기독교적 덕성은 부르주아 가치와 연결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시대는 개혁자들의 사회혁명적 사고를 포기했다. 개신교주의는 개인적 자비의 초대교회 모델로 회귀했다. 산업화의 경제적 희생자들을 개선하려는 개신교의 선교적 노력은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목표하지는 않았다.6. 미국의 기독교 경제학미국 복음주의자들에게, 빈곤의 문제는 복음전도와 사회활동을 연결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19세기에, 미국에서 복음주의 자선제국는 교회가 두 가지 활동 모두에 관여하는 일에 대해 아무런 갈등도 목격하지 않았다. 역사가 티모시 스미스(Timothy Smith)는 개혁적 성향의 복음주의자들이 영적 관심과 사회적 관심을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고 주장한다. “영혼을 구하려는 충동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도시 빈민의 비극을 완화하려는 조직적 노력을 전개했다.” 하지만 세기 전환기에, 염세적 전천년설주의는 사회개혁을 패배한 명분으로 취급했다. 자선은 다시 사적인 문제가 되었고, 교회의 강조점은 복음전도로 돌아갔다. 예를 들어, 드와이트 무디(Dwight L.Moody)는 개인적 회심을 사회변화의 가장 위대한 희망으로 간주했다. 20세기 중반이후,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의 특징인 사회적 활동에 대한 관심을 억제해 왔다. 하지만 교회가 빈곤과 다른사회적 문제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경제문제에 대한 당대의 기독교적 토론에서, 부와 빈곤의 구조적 뿌리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었다. 당대의 어떤 작가들은 부에 대한 전통적 입장을 비판하면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간격이 점차 확대되는 세상에서 단순한 부의 축적을 죄로 간주한다. 산업화의 부정적 영향, 제3세계의 빈곤화, 서구 상업주의의 추악한 쾌락주의 때문에, 그들은 재분배 속에서 빈곤에 대한 해법을 찾고자 했다.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와 그의 사회복음운동은 경제구조를 “맘몬의법칙” 아래 보다는 그리스도의 법칙 아래 둠으로써, 19세기 미국 자본주의를 개혁하고자 했다.그의 비전은 공정한 임금, 낮은 실업률, 그리고 재분배된 부를 특징으로 하는 경제적 정의 시대를 안내하는 것이었다.보다 최근에, 그리고 보다 급진적으로, 해방신학은 제3세계 빈곤의 원천을 서구의 풍요 속에 위치시켰다. 해방신학은 돈을 중림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것은 돈이 악마적 특성을 지닌다며, 하나님 나라와 전쟁 중인 어둠의 공중 권세 잡은 자들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46
    • 부자는 세상의 억압자요, 출애급과 성육신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들은 혁명적 행동을 위한 모델을 제공한다. 즉, 권세자들을 쫓아내고, 가난한 자들을 해방시킬 때 하나님은 결정적으로 행동한다. 많은 해방신학자들은 사유재산을 정죄한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적 비전 면에서 대체로 유토피아적다.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가 인간적 이기주의를 극복한다.사회복음과 해방신학이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추천하지만, 현대의 또 다른 신학조류는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내에서 “대안적 해방신학”을 주창한다. 이 신학은 돈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재분배주의의 가정(부자들이 잘 살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은 계속 가난하다) 내에서 오류를 감지한다. 이 신학은 생산성의 미덕과 삶의 기준을 향상시키는데 자본주의 사회가 거둔 성공을 인용하고, 새로운 부의 창출 속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희망을 발견한다. 그래서 이 사상학파는 해방보다 발전모델을 선호한다. 그리고 그것은 해방신학의 비전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한다.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들이 희망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이기심의 제거가 아니라, 이기심의 통제이다.해석의 역사에서 현재 진행중인 논쟁과 긴장들은 우리에게 돈에 대한 성경적 증거의 이중적 특성을 상기시켜 준다. 돈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이지만 돈에 대한 사랑은 악한 것이다. 부에 대한 개인적 태도에서, 이 두 가지 사상은 청지기직이라는 성경적 개념 속에서 조화를 이룬다. 청지기직은 돈을 하나님의 선물로 환영한다. 하지만 우리의 재산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 잠시 동안 그 재산이 우리에게 위탁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사용한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남장로교회 신학자인 로버트 댑니(Robert Dabney)는 청지기직이 기독교인들에게 부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요구한다고 썼다.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가장 잘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우리가 우리 돈을 더 많은 선을 행하고,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않은 것이다. 우리는 죄를 지은 것이다.” 뎁니는 우리가 하나님의 돈을 제대로 사용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제시한다. 즉,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보다 유능한 종이 되었는가?7. 한국교회와 돈한국교회는 미국의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강력한 영향 속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돈에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는 묵시적 종말론의 영향과 청빈을 높이 평가하는 유교적 전통 등이 결합하여, 소위 청빈론이 교회의 일반적 입장으로통용되었다. 이런 태도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겪고, 세계1,2차 대전을 통과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현실이 대단히 고단했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상실된 시대에, 물질에 대한 탐욕 자체가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런 청빈론적 태도는 한국전쟁을 통과하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목원대 김흥수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전쟁 직후, 해외의 원조물자가 교회와 목회자를 통해 배분되는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47
    • 과정에서 목회자와 돈의 직접적 접촉이 시작되었고, 이처럼 물질적 절대결핍 시대에 역설적으로오순절적 부흥운동과 기도원운동이 현세적 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한국교회가 기복신앙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이런 한국교회 내의 새로운 흐름은 1960년대에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근대화 정책에 의해 더욱가속화되었다. 근대화는 산업화를 통해 구체화되었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이동현상과 도시화를초래했다. 결국, 한국사회가 산업자본주의 체제에 진입하면서, 경제성장은 한국사회의 에토스로확고한 자리를 확보했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교회 내에서 강력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런 맥락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폭발적 성장을 거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용기 목사는 피난민과 호남출신들로 구성된 빈민촌에서 목회하며, 이들에게 적극적 사고와 물질적 축복을 결합한열정적 설교와 목회를 통해, 대형교회를 이룰 수 있었다. 서울신대 박명수 교수에 따르면, 조용기 목사 덕택에 한국교인들이 부/ 물질적 축복에 대한 죄의식을 벗어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1980년대 강남개발과 함께 교회성장, 교회건축, 교회 대형화 현상을 초래했고, 한국사회의자본주의 체제가 완성되면서, “부자=축복” “가난=저주”의 등식이 자본주의적 설교의 핵심 내용으로 확고히 뿌리를 내렸다.반면, 2000년대에 들어와,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비판, 특히 교회의 대형화와 맘몬주의에 대한비판이 거세지면서, 맹목적 축복론에 대한 반성적 목소리가 다양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예를들면, 높은뜻숭의교회의 김동호 목사가 2001년에 <깨끗한 부자>를 출판하면서 소위 청부론을주창하자, 김영봉 목사가 2003년에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를 출판하면서 청빈론을 제시함으로, 교계에서 뜨거운 논쟁이 발생한 것이다. 즉, 김동호 목사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부자들에게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책임 있는 존재가 되길 주문한 반면, 김영봉 목사는 부 자체의 독성을지적하고, 현재의 왜곡된 경제/사회 구조 속에서 자칫 청빈론이 현실에 대한 무비판적 승인으로경도될 위험이 있음을 지적하며, 우려를 표명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교회도 자본주의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및 수용의 태도에서 한 발짝 벗어나, 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돈에대한 신학적 신앙적 태도에 대해 보다 심도 있는 논의가 가능해 졌다. 물론, 아직도 이런 논쟁은 명확한 합의 없이 팽팽한 긴장 속에 진행되고 있지만 말이다.강의를 마치며경제학자들은 인간을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정의한다. 이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경제적 존재라는 뜻이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한 이래, 경제는 인류문화의 토대를 구성하며,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성경에서도 경제와 관련된 수많은 가르침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경제가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또한 종교와 경제가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맺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하지만 시대와 문화의 변화와 함께, 교회에서 경제, 즉 돈에 대한 태도와 입장에 중요한 변화가있었다. 기본적으로 교회는 돈의 현실적 필요를 인정하지만, 동시에 돈과 관련된 위험도 날카롭게 인식하였기 때문에, 돈에 대해 매우 모호하고 이중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다. 이론적으로는48
    • 금욕적 태도를 권장하고, 물질보다 영적 삶에 집중하도록 요구했으나, 정작 삶 자체는 돈, 부,탐욕의 영향을 벗어난 적이 없다. 이런 경향은 자본주의 출현 이후, 더욱 가열되어, 자본이 신의 자리를 차지한 현재, 교회는 자본주의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부를 거룩한 축복의 증거로제시하며, 교회 스스로 부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따라서 자본과 부의 위험에 대한 예언적 경고 대신, 자본주의의 혜택을 정당화하는 타락한 제사장적 태도가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하지만 다행히도 이런 현실에서 교회와 부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등장하고 있다. 현실을 무시하는 낭만적 청빈론이나 현실에 대한 무비판적 축복론, 혹은 양자 사이의 현실적 접점을찾으려는 청빈론 등이 교회 내에 공존하며, 선택의 폭이 확장된 것이다. 아직, 이 문제에 대한전능한 해법은 출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논의의 다양성과 서로 간 대화의 확대는 앞으로이 문제에 대해 한국교회가 좀더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라는 긍정적 징조로 보인다. 이에 대한보다 진지하고 깊이 있는 연구와 다양한 입장들의 뜨거운 논쟁을 통해, 더 나은 대안이 제시될것이라고 기대한다. 오늘 강의가 그런 희망의 한 이유가 되길 바란다.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49
    • 기독교윤리 ‘긍정의 힘’에 대한 신학적 비판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김동춘 교수50
    •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51
    •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 Season 2펴낸날 2010년 7월 3일펴낸곳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엮은이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주소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3가 55-3 청아빌딩 2층연락처 (전화)070-8260-0208 (전송)02) 734-0209홈페이지 www.nics.or.kr이메일 nics@nics.or.kr이 책의 저작권은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 있습니다. 본 연구원의 동의 없이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