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P4Peace_Final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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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

<korean>
The Field Interview on Reunified 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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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2011.8.12 - 8.20청년,독일통일을 인터뷰했다
  • 2. HELLO~옛동독 시절 신호등,암펠만(AMPELMANN)
  • 3. C a tr1 독일의 분단과 통일과정 h pe . £ 독일의 통일과정 개괄 £ 베를린 장벽 50주년 기념식 £ 동독시민혁명 : 시민운동기록보관소, 슈타지 박물관, 시민위원회 홀리처 여사 인터뷰 £ 동서통합과 새로운 희망 : 프라우엔 교회 <쉬어가기> 길거리 100인 인터뷰C a tr2 독일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h pe . _ 과거사 인식과 성찰 £ 독일의 과거사 개괄 £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 £ 테러의 토포그래피, 유대인 학살기념공원C a tr3 8.15 광복절 기념행사 h pe . £ 영상 제작 의미 £ 8.15 기념 마라톤 스케치깨알같은..Ifr ainnom t . o£ <독일 둘러보기> "여기는 꼭 가보세요~!!"£ 맥주맛 쫌 아는 재현군이 소개하는 독일의 맥주£ 독일에서 식비 아끼는 법£ 값싸고 질좋은 숙소를 소개합니다Y 4 e c 마무리 한마디 PPae
  • 4. C a tr1 h pe . 독일의 분단과 통일과정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문 4
  • 5. £ 독일의 통일과정(개괄)1. 동독 공산정권의 자체 붕괴○ 1989년 5월 2일 헝가리 개혁정부가 개혁의지의 표시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철거한 것을 계기로 동독 주민의 대량 탈출이 시작.○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 행사에 참석한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동독의 개혁을 공개적 으로 촉구하고 동독 정치국원들과의 비밀회합에서 소련군의 동독시위 불개입 방침을 천명한데 이어 주 동독 소련대사가 시위의 유혈진압은 안된다고 경고.○ 1989년 9월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성당에서 소규모로 시작된 촛불집회가 서독 TV의 영향으로 급속히 확산, 10월 6일에는 베를린에서 100만 명이 참가하는 등 대규모 시위가 전국 규모로 확산되고 1989년 중 46만 명이 서독으로 탈출.○ 동독 공산잔당들과 개혁세력들은 동독의 멸망을 막기 위해 원탁회의를 구성하여 국정을 운영 하는 한편, 3월 18일 인민의회 선거를 실시했으나 예상과는 달리 신속한 통일을 약속한 서독 기민당의 제휴정당인 「독일연맹」이 승리.2. 동독주민의 서독편입 결정○ 4월 12일 로타 드메지어 연립정부가 수립되고 4월 19일 드메지어 총리가 서독 기본법 23조 (기본법 적용지역 규정)에 의한 신속한 통일을 약속함.○ 통일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5월 18일 사회경제화폐통합조약을 체결되고 8월 30일 통일 조약 체결, 9월 20일 동ㆍ서독 의회의 통일조약 비준, 10월 2일 동독의회의 “독일민주공화국” 동독) 소멸 의결 등을 거처 10월 3일 통일을 달성함.3.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확보○ 베를린 장벽 붕괴 후 11월 28일 서독정부는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 통일의지를 확고히 천명한 후 통일독일의 NATO 잔류를 약속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통일외교에 착수했음.○ 소련에 대해서는 오더–나이세 국경선의 인정, 통일독일 병력의 대폭축소(66만 5천→37만), 대 규모 경제원조(철수비 지원 90억 달러, 매년 34억 달러의 소련군 주둔비용 부담) 등을 약속하 는 한편, 미국과 협조하여 소련을 압박하면서 2+4 회담을 통해 2차 대전 전승 4대국이 동의 를 확보함.4. 체제통합 과정○ 서독체제를 동독지역에 이식하되 동독인들의 적응을 위해 일부 법규정의 적용은 1~3년간 유 예하고 동독의 행정체제를 서독 체제로 개편함.○ 화폐통합, 동독 국유재산의 매각(2,564억 마르크 적자), 서독 사회보장 제도의 동독으로의 확 산, 반 법치국가적 행위자에 대한 처벌, 공산치하에서의 피박해자에 대한 보상 등을 통해 경제 ㆍ사회 통합을 추진했음. 5
  • 6. 5. 독일통일의 성공 배경○ 직접적 요인 –고르바초프의 개혁ㆍ개방 정책, 소련의 동구포기, 동독의 개혁 촉구. –동구권의 개혁 및 민주화 혁명 열풍. –공산정권에 대한 동독주민의 염증 확산. –동독의 경제 파탄. –동독 지도부의 체제수호 의지 결여. –미국의 적극적 지원.○ 간접적 요인 –서독이 동독주민의 동경대상이 되었다는 점. –원칙을 고수한 서독정부의 정책 –동독주민의 「삶의 질」개선에 중점을 두었던 서독의 대동독 정책. –동독주민의 서독 TV 시청. –주변국의 신뢰 확보.£ 통일 이후 동․서 통합 과정에서 독일 사회의 주요쟁점1. 정치경제○ 통일 방식 -정치적 의미에서 통일은 ① 한 국가가 어느 한쪽의 헌법을 받아드리거나, ②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것. 서독 기본법 23조 ①의 방식, 서독 기본법 제146조는 ②의 방식이다. -제23조에 따른 통일은 ‘통일을 위한 빠른 길이나 흡수통일의 길’ 제146조에 따른 통일은 느린 길이지만 동서독이 대등한 관계에서 새롭게 출범하는 국가의 정체성을 함께 만들며 나아갈 수 있는 방법○ 화폐통합 -동독시민들을 위한 통일열기 조장, 동독주민의 이주 억제, 동독 정부의 요구 등의 이유들로 동서독 화폐 1:1 교환. 동독 경제가 순식간에 300% 평가 절상된 화폐가치로 세계시장경쟁에 내던져지면서 동독 경제 순식간에 붕괴.○ 신탁청에 의한 국유재산 매각 -「인민 소유 재산의 사영화 및 재조직에 관한 법률」 을 바탕로 신탁청이 민영화 추진 기관 화 됨. 재정이 고갈된 동독정부의 재정마련 방안. -1994년 까지 1만5000개 이상 기업, 4만5600건 이상, 6만 7000헥타르의 토지와 산림이 매 각됨. 대부분 서독인들이 구입 6
  • 7. ○ 재산권 방환청구 : 반환이 배상에 우선한다. -서독인들이 과거 동독지역에 갖고 있다 몰수당한 재산에 대한 권리회복을 인정한 재산권 반 환 청구권은 통일독일 정책의 실책으로 꼽힘. -220만권의 소송이 진행됨. 동독 총 면적보다 많은 면적이 소송에 걸림.2. 사회문화○ 동독엘리트 숙청 -‘인권 및 법치국가의 기본원리’를 훼손시킨 경우 비정상적인 해고가 가능하도록 규정 슈타지 등 동독정치체제에 물든 사람들 숙정가능. 인적 재편의 과정에서 동독 엘리트들의 심 각한 반발.○ 과거청산 -슈타지는 동독 질서를 유지하는 기간 조직으로 민중들의 원성을 사게 되면서 체제의 붕괴를 가져옴. 슈타지 희생자들이 그동안의 억압과정을 확인하고 복권과 보상을 요구함. -그러나 동독의 거의 모든 국민들이 감시자가 되고 또 감시의 대상이 되는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 놓여있다는 복잡성이 존재.○ 동서독 주민간의 이질감 -차이의 핵심은 서독인들의 개인주의적 사고방식과 동독인들의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의 차이. 이러한 사고방식의 차이로 인한 갈등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것들부터 가치를 둘러싼 지식인에 이르기 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남. 7
  • 8. £ 베를린 장벽 50주년 기념식 (8.13, Berlin) ‣ 왼쪽 위, 기념식중 장벽관련 증인들의 증언을 듣는 행사 ‣ 왼쪽 아래, 분단과 관련한 퍼포먼스1. 베를린장벽의 역사 <설치> - 독일 역사상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는 베를린 장벽 구축은 1961년 8월 12일과 13일 사이 의 새벽에 발생 - 사회주의 통일당 지도층이 동베를린과 동독으로부터 서베를린을 차단하기 위해 장벽 구축 지시 -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오려다 숨진 이들은 1961년 8월 24일 구엔테 리트핀을 시작으로 1989년 2월 6일 크리스 구에프로이까지 적어도 136명으로 추정 (정확한 수는 논란중, 희생 자 가족단체들은 700명이 넘는다고 주장하는 상황) <철거> 베를린 장벽 구축으로부터 28년이 지난 1989년 11월 평화혁명으로 장벽 철거.2. 관련기사‘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 베를린 장벽- 연합뉴스 박창욱 특파원 2011-08-13 23:1613일(현지시간) 정오 독일 수도 베를린시 도심이 일순간 정지했다.버스, 기차 등 대중교통 시스템은 1분간 운행을 멈췄고, 거리의 시민들은 희생자를 추모하는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때맞춰 곳곳에서 울리는 교회의 종소리는 평소보다 명징하게 들렸다. 자정부터베를린시 `화해의 교회에서는 베를린 장벽을 넘어 탈출하려다 발각돼 숨진 이들 중 136명의 전기가 낭독됐다. 베를린시는 또 야외 영화제를 열고 베를린 장벽을 따라 소재한 역사적 장소를 찾 8
  • 9. 는 관람객들을 안내했다.베르나우어 거리에서 열린 베를린 장벽 건설 50주년 기념식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베를린 장벽은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3주 휴가를 마치고 첫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메르켈 총리는 "장벽 건설이라는 부당성은 오늘의 우리에게 국내외에서 자유, 민주주의, 인권 등에 대한 지지를 상기시킨다"고 말했다. 목사의 딸로 서독에서 태어난 메르켈총리는 가족이 동독으로 이사하면서 어린 시절을 동독에서 보냈다. 그녀는 "그때 나는 7살이었는데 장벽 건설이 우리 가족에 가한 테러를 기억한다. (장벽으로 인해) 우리 가족은 사촌, 조부모와만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1989년 이 끔찍한 장벽의 붕괴에 우리 독일인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더욱더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크리스티안 불프 독일 대통령은 이민자들이 사회 통합할 수 있도록 돕고 시민들이 자신의 잠재력에 완전히 이를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독일 내 자유를 더 신장해야 한다고 말했다.클라우스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은 "50년 전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것은 세계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것을 회고해주는 상징물"이라며 "베를린 장벽으로 인한 인권침해와 죽음은 어떤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했다.동독 정권은 주민들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1961년 8월 전장 155㎞의 베를린장벽을 쌓았다. 앞서 동독 주민 1천900만명 중 250만명이 서독으로 이주하는 것에 찬성표를 던졌고, 매일 3천명이 매일 서독으로 넘어갔다.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9일 갑작스런 붕괴를 맞을 때까지 28년간 동서 냉전과 독일 분단의 상징이었다. 장벽 일부가 남아 관광객들을 맞고 있으며, 베를린시는 역사적인 보존을 위해 장벽 해체 20년 만에 복원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베를린 장벽 50주년 냉전 최전선서 철거 뒤엔 ‘양극화 상징’-한겨레 정의길 기자 20110814 20:32동서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지 13일로 50주년을 맞았다. 베를린 장벽은 1989년 붕괴되며 독일 통일과 사회주의권 붕괴의 봇물이 됐으나, 그 전 28년 동안 동서냉전의 최전선으로 존재했다.베를린시는 이날 장벽이 세워졌던 베르나우어가에서 기념식 등 여러 행사를 열었다.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은 “베를린은 이날을 최근 역사에서 가장 슬픈 날로 기억하고 있다”며 “장벽은 역사가 됐으나, 우리는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기념식에 참석한 크리스티안 불프 독일 대통령은 “장벽은 이를 만든 사람들의 공포의 표현이었다”며 “이 장벽이 상징하던 당시의 세계상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유는 정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떤 장벽도 결국 자유의 의지 앞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베를린 장벽은 1961년 8월13일 동독 당국에 의해 철조망으로 처음 만들어진 뒤 나중에 160㎞ 장 9
  • 10. 벽으로 진화됐다. 탈출자들을 막으려는 300개의 감시탑도 세워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지뢰도 심어졌다. 동독 당국은 장벽을 ‘반파시스트방어 성벽’이라고 부르며, 파시스트 서방을 막기 위한 장벽으로 묘사하기도 했다.장벽은 이제 철거돼 일부 지역에서 역사적 기념물로만 남아있으나, 부유한 서쪽과 가난한 동쪽을가르는 상징으로 여전히 남아있기도 하다고 <비비시>(BBC)는 전했다. 동독 교사 출신으로 여전히 동베를린에 살고 있는 브리기타 하인리히는 통일 이후에도 “내가 지금까지 사귄 서독 사람들의 이름을 한 사람도 댈 수 없다. 정말로 그들과 사귈 수 없다”며 통일 이후 상황에 아직도 적응할 수 없음을 고백했다.3. 느낀 점 by 이준호‘장벽 설치를 기념한다고?’ 처음 베를린 장벽 50주년 기념행사 일정을 계획할 때 이 행사에 대해선뜻 마음이 나지 않았다. 장벽을 철거한 것이 아닌 설치한 것을 기념한다는 것이 의아했다. 기념식에 직접 참여했을 때야 비로소 이 행사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비극적인 역사의 아픔을 기억함으로써 정치계 인사들과 시민들의 책임의식을 고취시켜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되풀이되지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 행사를 기획한 인사들의 가장 핵심적인 고민이 아니었을까 싶다. 15일방문 예정인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의 설립 취지와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후에 자세히 다룰 예정~)메르켈 총리를 비롯한 불프 대통령, 보베라이트 시장 등 각종 정치 인사들의 기념인사와 함께 행사에 참여한 독일인들은 모두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증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는 시간이 짧지 않았음에도 기념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가장 감명 깊었던 장면은 온 몸으로 분단의 아픔을 우리에게 느끼게 해 준 바로 이 장면!한 편의 오페라를 보는 듯 했던 이 이벤트는 남한의 한 여성 청년의 멘트로 마무리 되었다.“베를린 장벽으로 인해 독일 시민들이 겪었던 분단의 아픔이 아직 우리나라(Korea)에 남아 있다.”우리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 무엇을 배우고 느껴야 하는지 다시금 가슴에 새길 수 있었던 소중한첫째 날, 첫 행사였다. by 준호 10
  • 11. £ 라이프치히 시민운동기록보관소, 시민들의 통일운동의 기억저장소 (8.18, Leipzig)라이프치히에서의 아침, 우리는 숙소에서 나와 라이프치히에서 제일번화한 지역을 향했다. 번역을 맡아주기로 한 최선화씨와의 만남, 그리고구 동독지역의 통일 시민운동의 자료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는시민운동기록보관소의 체어맨과의 인터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일반다세대 주택의 한 건물로 들어선 우리는 나선형의 폭 좁은 나무 계단을총총히 밟고 2층, 3층을 올랐다. 곧 시민운동기록보관소의 작은 간판이걸린 흰색 현관문이 보였다. 초인종을 누르니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곧 환한 얼굴의 중년 여성이 우리를 반긴다.이곳은 라이프치히 시민운동 기록보관소.체어맨인 Uwe Schwabe 씨와의 만남,짧은 소개 후에 질의응답 시간을 갖게 되었다.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싣는다.Schwabe 씨: 이 건물이 대해서 소개하겠습니다. 시민운동기록보관소는 정치적, 문화적 통일이 이루어지고 난 1991년에 만들어졌습니다. 동독 시절에는 구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이 여기서 신문,기사들을 썼지요. 공산주의 때 이런 활동들은 금지되었기에 공개적으로 하기 어려웠고, 그 시기에만들어진 모든 자료들이 여기에 보관되었습니다. 다른 곳에도 기록 보관소가 있지만 그 시기의 자료는 이곳에만 있습니다. 시민운동을 한 사람들이 다른 곳에 자료를 넘기는 것을 두려워해서 이곳에만 자료를 맡겼습니다. 당시 동독정부는 자료를 다 없애버리는 상황이었기에 다른 곳에는 보관을 할 수 없었지요.이곳은 정치적인 분위기와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자료는 무엇이던지 확인이 가능하고 최근 5~8년 간 자료만이 아니라 DDR시절에 유대인과 외국인에 관련한 전시회도 하고 있습니다. 1989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통일과 공산주의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학생들을 상대로 한 방문교육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 시민운동기록보관소 체어맨, Uwe Schwabe 씨 11
  • 12. Q. 기록운동보관소가 언제 생겼는지요?A.(Schwabe씨) 1990년도 가을에 기획하여 1991년 5월에 생겼습니다. ‣ 인터뷰중인 독통참가자들(오른쪽에서 2번째가 통 역해주신 최선화씨)Q. 이곳은 통일 이후에 설립되었는데요. 통일 이전에 동독의 활동과 시민운동 내용을 보관하는 이유와 기록을 보관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씀해주세요.A. 공산주의 서기장이 어떻게 살았는지, 공산주의는 어떻게 작용했는지, 어떻게 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었는지, 데모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알아야 지금의 정치에도 도움이 되고 시민들의 운 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이곳에 대한 책도 쓰고, 역사가들도 많이 와서 동독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는지를 연구하고 있지요. 영국, 오스트리아 등에서 도 연구자들이 와서 공산주의가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연구합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도 이 곳의 자료를 제공합니다. 지금 전시되어 있는 사진들도 그 시절(구 동독)에는 찍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지요. 이것은 1989년에 일어난 800명이 모인 시민운동 사진입니다. 12명이 저 운동을 이끌었는데 그 사람 들은 다 감옥에 갔지요. 500미터를 걸어가는데 사람들은 다 처벌받고 끌려갔습니다. ‣ 1989년 1월 15일 평화시위 12
  • 13. Q. 기록보관소 중에서 라이프치히에서 유독 자료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요?A. 막데부르크, 드레스덴, 폴란드 인접 도시, 베를린, 핸더스부르크에도 기록보관소가 있습니다. 주요 주마다 각자 자료를 가지고 있는데 각 지역의 하이라이트 자료는 해당 지역에서 보관하 고 있지요. 기록보관소에 대해서 정부가 하는 것은 없었고, 각 주에 흩어져 있는 자료를 한 곳 으로 통합할 수 없어서 시민들이 각 주마다 여기 저기 만들었지요.(*독일은 연방제 국가라서 중앙정부보다 주정부의 역할이 크다) 동독지역의 사람들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지, Neues Forum(노이스 포럼)에서 시민들끼 리 논의했습니다. 평화시위 후 3개의 단체라 결성됐는데, 민주주의 하려는 사람들, 노이스포럼, 평화와 인권 관련 단체 등이 그것이지요. 이러한 3개의 그룹이 90년도에 하나로 합쳐졌고 하 나의 당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데 이것이 녹색당입니다. 동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서독에서는 방송이 되고 있었고, 동독에서도 몰래 티비를 설치 해서 서독의 방송들을 같이 봤고 그런 정보들이 시민운동에 힘이 되었습니다. 동독 내에서는 라이프치히, 베를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어려웠지만, 서독 방송을 몰래 보고 정보 를 얻어서 동독 내의 다른 지역에서도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동독 사람들이 몰래 서독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있었고 서독에 넘어간 사람들이 동독에 대한 자로들을 작성했습니다. 처음 공산당을 반대한 사람들이 운동한 것은 통일을 위해 했다기보다 자기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었지요.Q. 시민운동 기록보관소인데 구 동독시절 위주의 자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현재도 시민들이 시위를 하 거나 할 텐데 그것도 이곳에서 보관을 하시는지요?A. 이제는 정부에서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보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전에는 비공개 로 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보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곳은 역사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동독에서 시위에 사용되었던 인쇄물 13
  • 14. Q. 동독의 시위가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됐다고 알고 있는데 라이프치히는 동독 내 어떤 위치였나요?A. 박람회가 1년에 2회 봄, 가을에 일주일동안 열려서 세계적으로 오픈된 곳이었습니다. 동독인 들도 박람회에 참가할 수 있었지요. 이곳에선 공업에 관한 행사가 많아 세계 여러 나라와 도 시에서 무엇을 하는지 어떤 좋은 것들이 있는지 알 수 있었지요. 특히 우리가 지지지 못한 것 들을요. 라이프치히에는 특별히 공업품이 많아서 다른 도시에는 무엇이 있는지 볼 기회가 많 았거든요. 또한 라이프치히에서는 에너지를 많이 생산했어요. 공업 화학 공장들이 아주 많거든 요. 그래서 여기 사는 사람들은 불만이 많았지요. 채굴을 너무 많이 해야 해서 힘든 노동의 연 속이었고 삶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거리로 나왔습니다. DDR(구 동독정부)의 반 대 세력과 국민들이 합세해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위할 때 나눠준 종이에 모임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어요. 좀 전에 사진에서 본 12명이 만 들어서 나눠주고 그들은 감옥에 갔지요. 남은 한 명이 설명하고 시민운동을 주도했고요. 종이 를 받은 시민들이 그 모임을 해냈습니다. 슈타지에서 발견해서 가지고 온 자료에는 12명을 석방시키기 위한 서명운동을 서독에서 했다 고 합니다. 자매도시인 하노버에는 1월 15일 동독이 시위했다는 내용이 나오지요. 신문에서는 사람들이 유치하게 방해했다고 말합니다. 당시 시위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는 전단지 종이와 현수막을 보관하고 있습니다.자리를 이동하여 체어맨은 우리를 기록보관실로 안내했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앵글로 쌓아 올린기록 보관 책장들, 그 사이에 가득 쌓인 기록상자들이 인상 깊었다. 그 상자들에 가까이 다가가니상자마다 날짜와 장소가 꼼꼼히 타이핑된 라벨지가 붙어 있었다. ‣ 기록보관소(1) ‣ 기록보관소(2)Schwabe 씨: 베른린 벽이 무너졌을 때, 구동독의 정치인들은 동독제도가 좋다는 내용으로 새로운당을 세웠지요. 그 당의 이름에 똥이라는 글자를 써서 반대 운동을 한 깃발이 있지요.(*체어맨은자랑스럽게 그 현수막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22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현수막이 내 눈앞에펼쳐졌다) 14
  • 15. ‣ 1989년 1월 시위에 등장한 현수막과 피켓시민들이 Neues Forum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고 그 편지들은 파일로 보관되어 있어요. 이 포럼은동독에서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1998년 도시 폐허에 대한 사진전도 했지요.슈타지 자료도 조금 보관하고 있습니다. 슈타지는 라이프치히에 어떤 단체가 있는지 조사하여 이를 기록했어요. 종이 전단지 배부를 한 시위자 2명 중 한 명에 대한 슈타지 기록이 파일 한권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통일 후에 그 시위자 본인이 이곳 기록보관소에 기증했지요. 이 분은 1989년5월에 서독 쾰른으로 서류를 작성하여 동독을 떠났습니다.‣ 슈타지가 작성한 기록들.Q. 이 곳의 운영비는?A. 작센주에서 50000유로, 라이프치히에서 10000유로(이는 집세로 사용)를 지원합니다. 기획서 를 작성하여 여러 단체에서 프로젝트를 받지요. 매년 프로젝트를 신청하고 있으며, 국가기관이 아니므로 후원이나 프로젝트비가 고정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15
  • 16. 22년 전 라이프치히 거리에 휘날렸을 현수막을 보여주며, 그 때의 추억에 잠겨 자랑스럽게 설명해주던Schwabe 씨의 즐거운 표정이 생생하다. 더 나은 삶 그리고 자유와 개방된 삶을 원했던 시민들의 힘.그것은 라이프치히라는 도시에 꼭 닮아있었다. 세계 박람회의 개최로 세계에 열려있던 개방도시라이프치히. 이곳의 시민들은 다양한 국가와 도시에 대한 정보를 많이 접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시민들은개방에 대한 싹을 튀우고 있었다. ‣ 기념품 전달 ‣ YP4Peace 방명록 작성Schwabe 씨에게 한국에서 미리 포장해 간 선물(해태모양이 그려진 나전칠기 명함집)을 전달하고단체사진을 찍으면서 라이프치히 기록보관소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참! 선물을 전달하면서 벌어진 작은 에피소드, 해태모양을 설명하면서 한국의 전통문양 중 “악마”라고 소개를 한 것.. 급안색이 나빠진 Schwabe 씨...ㅋ 급히 정정해서 마귀를 쫓아주고 복을 불러주는 동물이라고 다시 수정했다는 후문...^^ by 지영 16
  • 17. £ 라이프치히 슈타지 박물관 (8.18, Leipzig)1. 슈타지 박물관 내력1)과거 라이프치히 주변 구역의 슈타지 비상통제본부였던 슈타지 박물관은 라이프치히에서 동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마셰른(Machern)이라는곳에 자리 잡고 있다. 슈타지가 활동할 당시에 이건물은 라이프치히의 생활용수 공급과 상하수도관리를 담당했던 VEB라는 국영기업이 소유한 레크레이션 시설로 위장되었다. 건물의 핵심은1968년에서 1972년 사이에 지어진 벙커이다. 동독 사회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슈타지 본부의 ‘기동성’이 요구되면서 120명의 직원과 2명의 KGB(소비에트 비밀요원) 연락담당요원이 라이프치히 ‘룬데 에케(Runde Ecke) 건물에서 마셰른으로이동했다. 비상통제본부는 비밀리에 지어져 어떤 예외적인 상황에서도 슈타지의 권력을 유지하기위해 고안되었다.마셰른의 벙커는 구(District) 단위의 슈타지 비상통제본부 중 거의 유일하게 보존되어있는 곳이다. 이 특화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시민위원회 문서들은 슈타지의 군사활동과 ‘긴장과 기동성’케이스에서의 기능을 알려주고 있다.전체 대지면적은 5.2헥타르이고 현재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모든 내부장식을 포함한 건물과설치물들은 방문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가이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다른 것들 중에서도 특히어떻게 공급 시스템이 작동했는지, 어떻게 뉴스들이 동독에서 생산되었는지, 핵무기 공격에 대비해 슈타지가 작성한 생존전략 등을 알려준다. 전시회는 라이프치히 구역 내의 ‘이동’계획과 이 계획들에 비상통제본부가 개입한 사실을 보여준다.2. 슈타지 박물관 가이드현재 슈타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최초1906년 유대인 보험회사(라이프찌히 보험회사)에서 세운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도 파괴되지 않았으니꽤 운이 좋았다고 하겠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이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간 1945년까지 미국인이 소유하고 관리했다. 소련은 이 건물을 동독 내 중앙본부로 1950년까지 사용했고 1950년에 슈타지가 창설된 이후 1989년까지 슈타지가 사용하게 되었다. 1985년부터 슈타지와 경찰이 함께 상주하게 되면서 이 건물 옆에 새로 건물을 지 ‣ 슈타지 박물관 설명듣는 YP4peace었는데 지금은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1) http://www.runde-ecke-leipzig.de/index.php?id=253&L=1 17
  • 18. 슈타지는 동독의 사실상의 일당독재 체제를 이끌던SED(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사회주의통일당)2)가 관리했다.베를린에 슈타지 본부가 있었으며 라이프치히 지부 역시 베를린의 관리 아래에 있었다. 1989년에슈타지 요원은 총 9만1천명으로 창설 당시 600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로 조직이 커진 셈이다. 특히 라이프치히에는 2401명의 요원과 1만 명의 보조요원이 활동했다. 당시 구동독의인구가 1,600만 명, 라이프치히의 인구가 53만 명이었음을 볼 때 상당한 수준의 조직력을 갖추고있었다고 볼 수 있다.슈타지의 상징은 방패 위에 총이 놓인 그림이다. 총은소련이 개발한 칼라슈니코프이다. 총의 상징처럼 슈타지 요원들은 유사시 군인처럼 무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유를 향한 시민들의 열기가 한창이던1980년대 후반, 슈타지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시절이었고 동독지역보다는서유럽 쪽에 신경을 집중하느라 별다른 지침 등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슈타지에 일하는 요원들은 군인과 비슷하여 자유의사로 그만둘 수 없었다. 정년까지 일하든지 군대로 가든지 둘 중 하나였다. 당시 동독의 학생들은 7학년이 되면 슈타지 요원으로 활동할지 결정할 수 있었는데 학생 본인과 부모, 선생님과 논의한 뒤 부모가 동의하고 서류에 서명하면 나중에 슈타지에 배치되어 활동했다. 이 때 슈타지에서는 생계보조, 지위보장 등의 당근을 던지며 지원자를 모집했다.2) 1946년 10월에 독일의 소련 점령지구로 독일 공산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이 합병하여 성립했다. 그리고, 서쪽 점령지 구의 독일 사회민주당은, 그대로 존속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베를린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찬반를 결정하는 투표를 했다. 그러나, 동베를린에서는 소련군에 의해서 투표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실제 투표를 할 수 있던 것은 서베 를린의 당원뿐이었다. 그 결과, 공산당과의 통일에 찬성한 표는 불과 12%였기 때문에 통일사회당 성립 후에도 일정 기간 사회민주당이 존속했다.(서베를린의 사회민주당이 동 베를린에서도 활동이 허용되고 있었다. 한편으로 서베를린 에는 서베를린 통일사회당도 존재했다)통합 후, 최초에는 지도부의 반씩이 구 공산당과 구 사민당이었지만, 구 독일 사회민주당계의 당원은 서서히 제명되어 실체는 공산당 이었다. 단지 1946년 당시 존재하고 있던 정당으로서는 독일 최고인 독일 사회민주당은, 전국에 강력 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 하는데 있어서의 이용가치는 매우 높았다고 여겨진 다.(통합 당시, 공산당원이 60만명에 비해, 사회민주당은 68만명이었다. 사회민주당 쪽이 우세하였다.)1949년 소련 점령지구가 독일 민주 공화국이 되면서, 국가를 지도하는 당으로서 사실상의 일당 독재체제를 시행해, 동독을 지배하였다.1989년의 민주화와 통일로 정권을 잃어, 통일사회당/민주사회당(SED/PDS)을 거쳐 민주사회당(PDS)으로 개 명했다. 후에 독일 사회민주당을 탈당한 오스카어 라퐁텐 등과 함께 연합해 공산주의 계열의 좌파당으로 통합되어 연방 의회 제 4당으로서 일정한 세력을 유지해, 특히 구 동독에서는 뿌리 깊은 지지를 받고 있 는 것 외에 구 서독 지역에서도 지지를 얻고 있다.http://ko.wikipedia.org/wiki/%EB%8F%85%EC%9D%BC_%ED%86%B5%EC%9D%BC%EC%82 %AC%ED%9A%8C%EB%8B%B9 18
  • 19. 슈타지 조직 내에는 여러 하위부서가 있었는데 각각 도청, 도촬, 우편물 검색, 환경단체나 교회목사 감시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 우편물 검색을 하며 귀중품을 발견할 경우 몰래 갈취하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우편물 내 금품 갈취가 있었던 데에는 기계의 도움이 컸다. 편지봉투 뜯은흔적을 없애는 기계와 편지봉투를 다시 붙이는 기계가 발명됨에 따라 우편물을 감시하는 효율이급격히 늘었다. 매일 2,000여 개의 편지를 검사했으며 특히 서방 쪽으로 가는 편지는 영원히 보내지지 않았다. 시민들 역시 꾀가 늘어 일단 동독 주소로 편지를 발송한 뒤 그곳에서 다시 목적지로 편지를 발송하는 등 여러 대응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편지봉투 흔적 없이 뜨는 기계. ‣ 편지봉투를 다시 붙이는 기계.슈타지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체제를 위협할 만한 요소를 세세하게 감시했다. 이를 위해 첨단감시물품이 발달했다. 소련의 스파이요원이 사용하는 장신구 혹은 단추에 부착하는 카메라 등을들여오고 서독에서 도청장치를 사와 동독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기계를 활용하는 방법 외에도 개의 후각을 활용하여 냄새를 이용해 요주의 인물을 추적했다. 이를 위해 경찰서에서 ‘의심스러운’ 개인을 미리 소환한 뒤 옷의 조각이라든지 머리카락 등 냄새를 채취해 보관한다. 이를 개에게 기억하게 한 뒤 차후에 감시하는 데 활용한 것이다. 다행히(?) 법정에서는 불법적으로 취득한증거라 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이 외에도 주목하는 인물과 가까운 사람들을 괴롭혀 당사자를 정신적으로 힘들게 만들곤 했다. 이런 상황을 조장하여 평정심을 잃게 한 뒤 경찰서에 불러 조사를 하면 슈타지에 유리한 결과를 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심지가 굳은 사람이 있어서 주위 사람들에 대한 회유나 협박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럴 때는 제2, 제3의 대책이있어서 잠을 못 자게 한다든지, 외부와 통하는 모든 연락을 끊어버린다든지 하는 방법을 써서 어떻게든 괴롭게 만들었다. 특이한 점은 일단 혐의가 있어 갇힌 사람들을 절대 물리적인 고문을 가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는데 집중했다는 것이다. ‣ 단추에 부착하는 카메라. ‣ 감시를 위해 냄새를 채취해 놓음. 19
  • 20. ‣ 슈타지 분장에 쓰인 도구. ‣ 두 번째 단추에 녹음기가 연결되어있음.1989년, 라이프치히에서 평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일부 시민이 슈타지 건물 안으로 진입하여 자료를확보했다. 30여 명 중 1명은 이제 시민이 슈타지를 통제할 수 있다며 발코니로 올라가 마이크를 들고 도시곳곳에 방송을 하기도 했다. 당시 건물에서 근무하던사람들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이미 기울어진분위기에 눌려 별 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이 30여명은 슈타지가 보유하던 자료를 확보했다. 이 때 분노에 휩싸인 일부 시민은 자신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기록된 자료에 혐오감을 느껴 파쇄기를 설치하고 자료를없애기도 했다.1992년 이후에 슈타지가 갖고 있던 문서에 대한 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령은 첫째, 누구나 이 문서를 볼 권리가 있다. 둘째, 그 당시 정치범들의 복권에 관한 내용(정치범들에게 부당했다는 확인서), 셋째,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물질적 보상 등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 당시 감옥에 갔던 사람들에게 확인서를 줬다. 과거 구동독시절 감옥에서 나오면 석방된 카드를 받는데 그것은 일종의 낙인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동독시절 공적기구에 근무한 사람들 경력을 전부 조사하고 검증하는절차를 거쳤는데, 현 공직선거에서 이 검증을 전제로 했다. 만약 슈타지에 부역한 것이 드러나면그 지위를 박탈했다. 슈타지 밀정을 했던 기록이 발견되면 현직 선생을 해직시키는 방식이다. 슈타지에서 시민들은 감시한 사람의 이름은 대부분 가명이었는데 실명을 추적해서 밝혀냈을 경우동일한 방식으로 해고를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일들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사실 통일 직후에는 슈타지 문서 공개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전면적인 공개는 되레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갈등만 일으키고 사회 통합에 역행한다는 판단 아래 ‘제한 공개’로 최종결정됐다. 문서 공개 때 가장 큰 문제는 요청하는 문서가 존재하는지를 찾는 일과 문서 공개 요청자가 과연 ‘피해자’에 해당하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경우에 따라 이 사건의 가해자가 다른 사건에서는 피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문서 공개 요청부터 실제 공개까지 무려 2년이 걸리기도 한다.구동독에서는 1987년까지 사형제가 존속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슈타지 내에서 총 64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되었다. 사형선고의 사유는 1) 동독에서 서방의 스파이 노릇을 하고 20
  • 21. 탈출하려다 발각, 2) 어린이 살해 등 사상적, 정치적인 이유가 주를 이뤘다. 잘 알려진 단두대(기요틴)도 있었는데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1968년까지만 사용되었다. 이후에는 뒤에서 머리를 총으로 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건물 내에는 사형당한 이들의 유골, 재를 모아 둔 장소가 있다. 당시사형당한 이들의 가족에게는 사망사실만 통보될 뿐 사망의 원인이나 이유 등이 일체 알려지지 않았다.3. 관련자료“처벌보다 화해”… 동독 슈타지 비밀문서 공개제한250만명 감시기록 보관… ‘피해자’ 확인돼야 열람“처벌보다 화해와 통합에 더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17일 기자가 방문한 독일 연방 슈타지(동독의 국가공안국) 문서관리청의 요아힘 푀르스터 청장은“문서 공개는 피해자가 요구할 때와 공익성이 인정될 때만 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슈타지는 동독의 비밀첩보기관으로 나치보다 더 지독한 1800만 동독 주민의 감시망이었다. 푀르스터 청장에 따르면 슈타지엔 공식 직원 9만5000명과 ‘민간인 끄나풀’ 18만9000명이 있었다. 슈타지 문서는 약 30만 명에 이르는 정보원이 동독 시절 내내 수집한 국민 감시기록인 셈이다.통일 당시 동독 주민이 가장 먼저 탈취하고 보존하려 했던 것도 바로 이 문서다. 베를린 장벽의붕괴를 촉발한 동독 라이프치히 시의 ‘월요 평화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이름트라우트 홀리처 여사(67·여)는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라이프치히의 슈타지 건물을 보여주며 “당시 시위대가감시문서 확보를 위해 가장 먼저 점령했던 건물이 바로 이곳”이라고 설명했다.슈타지 문서관리청이 보관 중인 기록물은 인쇄 문서만 옆으로 늘어놓으면 114km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이다. 사진 140만 장, 녹음파일 3만1000개, 필름과 비디오 2705개도 함께 보관돼 있다.전체 250만 명에 대한 감시기록물로 보관 선반만 1만5500개다.슈타지 문서 공개를 둘러싸고 통일 직후엔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전면적인 공개는 되레 가해자와피해자 사이의 갈등만 일으키고 사회 통합에 역행한다는 판단 아래 ‘제한 공개’로 최종 결정됐다.문서 공개 때 가장 큰 문제는 요청하는 문서가 존재하는지를 찾는 일과 문서 공개 요청자가 과연‘피해자’에 해당하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경우에 따라 이 사건의 가해자가 다른 사건에서는 피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문서 공개 요청부터 실제 공개까지 무려 2년이 걸리기도 한다고 푀르스터 청장은 덧붙였다.통일 독일 정부는 또 사회 통합을 위해 통일 직전 서독에만 슈타지 정보원이 4만5000명 있는 것으로 파악했지만 통일 이후 적발된 간첩행위 3000여 건 중 82명만 기소하고 실제 처벌은 23명만했다.베를린·브란덴부르크·라이프치히=하종대 기자 orionha@donga.com출처 : http://news.donga.com/Inter/3/02/20100923/31363500/1 21
  • 22. £ 라이프치히 시민위원회 홀리처 여사 인터뷰 (8.18, Leipzig)1. 라이프치히 시민위원회3)시민위원회는 평화혁명 중 설립되어 현재 룬데 에케 기념박물관과 슈타지박물관을 관리하고 있다.시민위원회의 주요 목표는 사회주의 독재시절의 기억을 보존하고 정치교육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는 전체주의 이념의 위험뿐만 아니라 자유와 자기결정권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데 목적이 있다.시민위원회는 과거사 재평가와 공공의 의견을 전개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는 슈타지와 그 후신의 실제, 구조, 관계 등의 개인적, 정치적, 법적, 역사학술적 재평가를 알리는 것을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룬데 에케 기념박물관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소장하고 있는 내용에 영향을 받고 흥미를 느끼는장소가 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열린 대화의 장으로 발전해왔다. 협회는 사회주의 독재체제의 희생자에게 조언하는 역할과 함께 학자, 학생, 기자, 영화제작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요청하는 연구자료를 제공하며 지원하고 있다.2. 인터뷰이 : 트라우트 홀리처 여사나는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자라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이곳 슈타지 박물관에서 20년 간 일했다. 슈타지 박물관은 사립단체로서독립재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재정은 빠듯하지만 시민운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이 원활하게 운영되었으면 바란다.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거쳐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동독지역에서 첫 시위가 일어난 곳은1953년의 라이프치히였다. 이후 각지로 번져 베를린에서는 더욱 큰 규모로 일어났다. 처음에는경찰이 시위를 진압했으나 이후 소련군이 개입하여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시위 이후 슈타지가주모자를 색출하는 작업을 맡았고 이때를 계기로 슈타지의 규모가 증가하게 되었다.1961년 장벽이 세워진 이후 동독은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항의하는 사람들은 총과 칼 대신 비폭력과 평화를 상징하는 농기구를 중심으로 한 마크를 만들었는데 가방 등소지품에 부착하거나 지니고 다녔다. 학생 중 일부는 농기구 마크를 들켜 체벌을 받기도 했다.1980년대 후반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자 동독 당국 역시 집요해졌다. 시위정보를캐내기 위해 핀셋으로 쓰레기통을 뒤지며 우편물이나 종이를 일일이 검사하기도 했다3) http://www.runde-ecke-leipzig.de/index.php?id=202&L=1 22
  • 23. ‣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은 총과 칼 대신 비폭력과 평화를 상징하는 농기구를중심으로 한 마크를 만들어 소지품에 부착하거나지니고 다님.1985년 여름, 헝가리를 통해 서독 지방으로 탈출을 시도한 움직임이 있었다. 시민들이 직접 행동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89년 3월,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위를 하며 동독을 나가고 싶다고 공식적으로 청원했다. 그러나 어떤 정부기관도 청원을 받아주지 않았고 청원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모두 국가에 의해 직장을 잃게 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곧바로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는 것이다. 다행히 당시 세계 여러 국가들이 참가하는 행사가 개최중이어서 다른 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이들을 체포하거나 구속하지는 않았다.이러한 분위기 속에 1989년 5월, 선거가 치러졌다. 그러나 투표하지 않으면 집에 찾아와 압력을넣거나 협박하는 등 부정선거의 양상을 띠자 시민들은 개표장에 몰려가 항의했고 두려움이 점차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민들은 인식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1989년 6월에서 7월, 한 환경단체에서 항의데모를 준비했다.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인쇄할 필요가 있었는데 종이를 구하기 어려워 지방에 가서 종이를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교회에서 많이 도와주었다. 그러나 준비하던 중 83명이 잡혀갔다. 여러 가지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던 와중 중국의천안문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에 큰 영향을 받아 동독 시민들의 의식이 고양되기 시작했다.당시 동독 정부는 젊은이들이 기타를 들고 노래하며 시위에 참석하는 것조차 경계했다.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를 통해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묶이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 89년도 시위에 젊은이들이 기타를 가지고 노래하며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23
  • 24. 1989년 9월, 시민 5,000여명이 시위 후 행진했다. 이 행렬은 1주일 후 20,000명으로 늘어났다.시민들의 참여가 점점 조직화되고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자 슈타지는 적극적으로 나서 시민들을탄압했다. 그냥 길을 걷던 시민들을 강제 연행하여 이들의 눈을 가리고 밤에 차로 이동하여 알 수없는 곳으로 끌고 갔다. 이들은 마구간과 같이 외진 곳에 갇혀 맞거나 협박을 당했다. 슈타지는위의 마구간처럼 사람들을 잡아와 협박하고 어르며 통제할 목적을 가진 외진 곳들은 이미 1967년부터 물색했다.1989년 10월 9일, 모든 주요도시에서 평화시위가 일어났다. 정부는 즉각 한 번만 더 시위를 할때 무력진압을 예고했으나 시민들은 20,000명이 모이는 것으로 대응했다. 경찰이 시위 현장에 도달했을 때 ‘90,000명이나 모였어!’라고 생각할 정도로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모였고 경찰들은 진압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슈타지 역시 진압 여부에 대해 베를린의 지시를 기다렸으나 연락은 오지 않았다. 게다가 시민이 먼저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경찰은 진압할 명분도 없었다. 수만 명의사람들 중 흥분하여 경찰을 건드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다. ‣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 평화시위에 참여한 시민들.대규모 시위 이후 정부는 언론과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여행관련 법을 개정하겠다고 했고 샤보프스키 공보비서는 그 효력이 언제부터인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지금 당장’이라고 대답하며 장벽 붕괴의 단초를 제공했다. 24
  • 25. <질의응답>청년평화기획단(청년): 본격적으로 시위 등 시민운동을 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했나?트라우트 홀리처 여사(홀리처): 나는 목사의 딸이다. 부모님은 동독에 대해 한 번도 좋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나라에서 하는 일은 어떤 것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도 10학년까지 학교에 서 공부했다. 이후 대학에는 가지 못했고 책을 제작하는 일을 하고 성악을 공부했다. 현 재 4명의 자녀가 있으며 내가 부모님에게 교육받은 것처럼 나도 자녀들에게 동독을 비판 하고 반대하는 교육을 했다. 시민운동을 시작한 이후 슈타지에 잡혀 들어가기도 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자유를 위 해 싸우는 일은 잠시만 손을 놓아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밤새도록 일을 했다. 현재 과거 시민운동의 과정과 역사를 알리는 전시를 열고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역사의 현장에서 직접 보 고 느낀 것들을 빨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첫 전시 때 1,000명 넘게 방문했고 이 반응에 힘입어 행사를 더 크게 해야겠다고 느꼈다. 일어난 일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지속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989년 이후로 내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89라는 숫 자는 내게 너무나 소중하다. ‣ 진행중인 전시회를 직접 소개해주고 있 는 홀리처 여사님.청년: 처음 시위를 기획할 때 어느 정도까지 진행될 것으로 기대했는가? 그리고 이후 통일을 경험 한 20년간 어땠는지 궁금하다.홀리처: 시위를 기획하며 작은 일과 사건들을 겪으며 재미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법의 테두 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끌려가는 건 두려웠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두려 워서 ‘아니오’라고 할 것을 ‘예’라고 하지 않는 것은 내게 너무나 중요했다. 장벽이 없어져 야 한다는 바람을 항상 갖고 있었고 통일 이후에는 계속 행복하다. 그러나 개중에는 더 어려워진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은 “동독 시절이 훨씬 더 나았어.”라고 한다. 나는 통일 이후에 학교교육이 달라진 것이 너무 좋다. 여행, 소비, 건강의 자유를 얻어서 좋다. 옷 입는 자유, 책 읽는 자유, 사상의 자유, 자유의 세상이 온 게 너무 좋다.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핵무기가 사라지는 것이다. 또 인터넷에 모든 정보가 있는 것은 위 험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보존해야 한다.홀리처: 여기에 덧붙여 남북관계에 대해 조언을 하고 싶다. 교류가 무척 중요하다. 감옥에서만 살 면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북한 사람들이 ‘자유’를 갈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라이 프치히처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25
  • 26. £ 성 니콜라이교회 (8.18, Leipzig)1. 성 니콜라이 교회성 니콜라이 교회는 1165년에 창설되었다. 동서유럽과 남북유럽을 연결하는 2개의 주요한 통상로의 교차점에 건설됐으며, 중세에 있어서 상인들의 수호신인 니콜라이에게 봉헌됐다.지금도 이 교회는 시내 중심의 상가에 놓여 있으며, 전 세계에서 오는 보행자들에게 개방돼 있다.원래 니콜라이 교회는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이었으며, 서편의 외관은 지금도 그 모습을 남기고 있다. 16세기 초에는 후기 고딕양식의 홀식교회로 증축이 됐으며, 현재에도 교회 외관에서 그것을볼 수 있다. 교회의 3개의 탑은 173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바뀌었다. 특히 내부는 아주 매력적이며, 그것은 건축사도트에 의해서 프랑스 양식을 모방한 의고주의4)적 양식으로 1784년에서 1797년에 걸쳐서 완전히 개장됐다. 라이프치히의 시민들은 자신의 문화의 고귀성을 세계에 보여주기를원했다. 특히 종려나 양으로 만들어진 기둥은 아주 인상적이며, 천정과 2층 의자에 마련된 풍부한장식이 주의할 만하다.당시의 화가 외서(A.F Oeser)는 교회를 위해 30점의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들은 교회의 현관과제단에 있다. 제단 위에 있는 평화의 천사 모티브는 대단히 진귀하다.1539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종교개혁이 행해진 이후 이 교회는 개혁교회로 변해 예배를 보게 됐다.1723년~1750년에 걸쳐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이 교회에서 지휘자로서 교회음악의 활동을 한때가 절정기를 이루었으며 바흐의 주요한 작품들이 여기서 초연이 됐다. 1858년~1862년에 걸쳐서 바이센펠스 출신의 라데가스트가 오르간을 제작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오르간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며 20세기에 공기순환의 전통화로 현대화됐다.2. 1989년 가을의 경험, Pfarre C. Fuhrer(휘러 목사) (출처 : 니콜라이 교회 내 인쇄물)"니콜라이 교회-모든 사람에게 문을 연다"는 1989년 가을에 우리 모두를놀라게 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마침내 구동독 전 지역의 사람들을 하나로 통일시켰던 것이었습니다. 외국에 출국을 요청하는 사람,호기심을 가진 사람, 반정부 분자, 비밀경찰들, 교회관계자, 공산 당원들,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 이들 모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벌려진 팔 아래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1949년~1989년 사이에 정치적 현실을 감안한다면 상상도 못했던 것이 이제 현실이 되었던 것 만나고 싶었으나, 목사님 사입니다. 정으로 못 만난 휘러목사님.라이프치히에 종교개혁이 행해진 바로 450년, 라이프치히 회전에서 176년 후 다시 이 도시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1989년 이후 니콜라이 교회에 통하는 거리는 경찰에 의해서규제되고 봉쇄됐습니다. 이 후에는 라이프치히에 통하는 간선도로와 고속도로의 출구는 광범위하게 경찰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또한 평화의 기도 시간에도 통행이 금지되었습니다. 동독 정부 관4) 예술 작품의 표현에서, 고전적 작품의 양식을 본뜨려는 주의. 고전주의(古典主義). 상고주의(尙古主義) 26
  • 27. 리들은 평화의 기도를 중지시키기 위해 적어도 니콜라이 교회에서 교외로 옮기도록 우리들에게압력을 강화했습니다. 매주 월요일에 평회 기도회와 관련된 체포 또는 임의동행이 행해졌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2000석이 꽉 차도록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운명의 10월 9일이 다가왔습니다. 잊을 수 없는 날이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폭력에 의한 진압이군대, 전투요원, 경찰 그리고 사복경찰들에 의해서 획책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0월 7일, 동독의 건국 40주년 기념의 날, 동독 역사에서 국민 애도의 날로 모든 행사가 벌써 시작이 된 것을알리고 있었습니다.이 날에 10시간 동안 유니폼을 입은 경찰들이 무저항,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트럭으로 이들을 날랐습니다. 이 중에 수백 명은 마르크클레베르크의 마굿간에 감금했습니다.바로 이때에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됐습니다. -만약 필요하면 무력을 갖고, 결국은 이 ”반동 혁명”을 끝내야 하며, 진압해야 한다- 그래서 10월 9일은 험악했습니다. 약 1000여 명의공산당원이 니콜라이 교회에 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벌써 오후 2시경에는 교회의 중간에 약 600명이 교회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규칙적으로 기도에 수 없이 참석한 비밀경찰의 임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아무 것도 계획되지않았으며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이들도 동시에 교회의 이야기, 복음의 말씀과그 영향권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나는 수많은 비밀경찰들이 월요일마다 와서 산상수훈에 행복론을 듣는데 대해 항상 긍정적으로보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어느 곳에서 이것을 들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전혀 관련이 없는 모르는 교회에서 예수의 복음을 공산당원을 포함해 모두가 듣게 됐습니다.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예수님은 말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했지 "돈을 가진 자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았고,그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말했지 "적대자를 말살하라"고 하지 않았으며,그는 "첫째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지 "모든 오래된 것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하지않았습니다.그는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지, 조심 걱정하라고 하지 않았고,그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하셨지, "너희는 크림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이렇게 평화의 기도는 믿지 못할 정도의 정숙과 집중적인 분위기로 진행되어 나갔습니다. 예배가끝나기 전에 즉 주교의 축도가 있기 전에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 마스어 교수의 호소문을 낭독했습니다. 즉 비폭력을 위해 우리들의 호소를 지지한 것입니다.이러한 긴박한 상황 중에서 쌍방의 공통점, 교회와 예술, 음악과 복음간의 연대는 대단히 중요시되었습니다. 이렇게 평화의 기도회는 주교의 축도와 인상 깊은 비폭력의 요구로 끝이 났습니다.예배 후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교회 밖으로 나오자(나는 이 광경을 일생 잊을 수가 없는) 광장에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손과 손에 촛불을 들고 있었습 27
  • 28. 니다.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있을 때는 두 손이 필요했습니다. 촛불이 꺼지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두 손이 필요합니다. 촛불을 들고 동시에 돌과 몽둥이를 손에 쥘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적은 일어났습니다.비폭력주의의 예수님 정신은 대중을 사로잡아 실재적이고 평화적인 힘으로 변했습니다. 군인, 전투부대, 경찰들은 군중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철수하였습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는 승자와 패자가 없었으며, 아무도 상대편에 대해서 우월감을 갖지 않았으며 아무도 자존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단지 거대한 기부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이 비폭력의 운동은 단지 몇 주 밖에 유지되지만, 당의 독재와 지배적인 세계관을 붕괴시켰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자를 왕좌에서 넘어뜨리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높이십니다. "군대와 권력으로 아니고 주의 영으로 이루어지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시의 중심부와 거리에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어도 진열장의 유리 한 장도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비폭력의 안에서 우리들은 믿을 수 없는 멋진 경험을 하였습니다. 동독정부 중앙위원회에 속한 진더만은 죽음 직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우리들은 모든 것을 계획했다. 우리들은 모든 것에 대해 준비했다. 단지 촛불과 기도 외에는."평화를 위한 기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니콜라이 교회에 실업문제 대책 이니셔티브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니콜라이 교회는 전에 있었던 것과 같이 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집, 희망의 집, 피난처와 출발의 장소로 - 퓌러 목사(Pfarre C. Fuhrer)3. 관련자료(중략)그런데 이 도시의 한복판에 세워진 유서 깊은 성 니콜라이 교회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1980년부터 당시 해마다 증강되는 서독의 군비증강에 항의하기 위해 매주 월요일 오후 5시마다 ‘평화의 기도회’가 열리면서 부터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1989년 10월9일에는 기도회를 끝마친 2000여명의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일통일을 외치면서 결국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그 후로도 ‘평화의 기도회’는 계속 열려 전 세계의 가난과 질병, 파괴되는 환경, 그리고 전쟁과 핵무기로부터 인류를 구해내자는 간절한 기도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교회의 입구에는 여기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기도제목을 적어 놓은 노란색 종이와 촛불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28
  • 29. 그런데 라이프치히에는 이처럼 교회의 사회 참여를 보여준 성 니콜라이 교회가 있는가 하면 영성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유명한 성 토마스 교회도 있었다. 두 교회는 봉사와 영성, 이웃 사랑과하나님 사랑, ‘세상 속으로’ 와 ‘하늘을 향하여’로 기독교 복음의 양축을 대변하며 신앙의 균형을보여주는 것이 이채로웠다.(후략)출처 : http://www.e-radiokorea.com/board/bbs/board.php?bo_table=column_kim&wr_id=24&page=3무엇이 독일의 무혈통일을 가능케 했나-김기석 목사분주한 일정을 쪼개어 라이프찌히를 찾은 것은 괴테나 실러,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발자취를 더듬으려던 것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음에 들어앉은 성 니콜라이 교회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가 흔들리고 있던 1980년대, 그곳은 평화를 갈망하는 동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 교회에 들어가 그곳에서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토론하던 이들의 숨결을 느끼고, 수많은 군중들이 집결했던 광장에 서서 그날의 함성을 새겨듣고 싶었던 것이다.이 땅 곳곳에서 공권력과 시민들이 충돌하는 현실이 없다면 그 먼 곳까지 찾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머물고 있던 베를린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도시였지만 멀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22년 전 바로 그곳에서 일어났던 비폭력적인 저항운동의 성공 사례를 눈으로 보고 또 그곳에머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앙역을 지나 상가건물이 즐비한 거리를 걸어가는데 문득니콜라이 교회로 통하는 모든 길을 차단했던 경찰들과 시민들의 긴장된 모습을 머리에 그려졌다.동과 서 그리고 남과 북의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성 니콜라이 교회가 서 있었다. 중세부터 상인들의 수호자로 숭앙되었던 성 니콜라이를 기념하기 위해 1165년에 세워진 이 교회는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시작되어 후기 고딕 양식이 가미되었고, 3개의 탑은 바로크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교회 정문에 서는 순간 ‘모두에게 열린 교회’(Kirche offen für Alle)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독일의 많은 교회가 사용하는 문구이긴 하지만 성 니콜라이 교회이기에 이 말은 강렬하게 다가왔다.지치고 상한 영혼, 두려움에 떠는 이들을 두 팔 벌려 환대하는 주님의 품이 절로 느껴졌다. 이 문구는 냉전 시대에 니콜라이 교회가 감당했던 역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성 니콜라이 교회는 1982년 9월부터 "칼을 쳐서 쟁기로"라는 슬로건 하에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평화 기도회를 개최했다. 이 연약한 기도의 촛불이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되리라는 사실을 당시에는 누구도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서독의 군비경쟁이 심화되고 있던 그 때 크리스치안 퓌러(ChristianFührer) 목사는 평화 기도회를 시작했다. 그 자리에는 평화를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참할 수있었다.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공산주의자와 반체제인사 등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았다. ‘모두에게 열린 교회’라는 입간판은 한국에서 찾아간 내게 교회가 과연 무엇인지, 사람들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언중유골로 들려주고 있었다. 고난받는 이들의 피난처 구실을 포기한지 이미 오래인 한국교회의 현실이 떠올라 둔중한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29
  • 30. 초대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종려나무 모양의 기둥들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 회중석을 지나 제단앞에 이르렀을 때 나는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을 제단 위로 초대합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충격이었다. 가장 거룩한 자리라 해서 사람들의 접근을 허락하지않는 여타의 교회와는 분명히 구별되었다. 제단 좌우측 벽면에 그려진 외저(A.F. Oeser,1717-1799)의 성화와 예수의 수난을 주제로 삼은 펠릭스 파이퍼(Felix Pfeifer, 1871-1945)의부조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젠체하는 내색 없이 마치 안방을 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제단에 오르기 전 회중석에서 보아 제단 우측면에 놓인 나무 십자가를 유심히 보았다. 그것은 1980년대 초반 중거리 미사일 배치에 항거하기 위해 조직된 "평화를위한 열흘" 기도 모임을 위해 만든 것이라 한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십자가, 다만 한복판에 촛농이 흐른 자국만 남아 있는 십자가는 암울한 현실에서 빛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보여주고 있었다. 그 십자가는 반대편 벽면에 부착된 16세기의 십자가 고상과 더불어 전통과 현대의 아름다운 대화를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전통을 계승하되 시대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창조적으로 응답할 때 교회는 비로소 살아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제단 바로 위 천장 가장 높은 곳에는 평화의 천사가 무지개를 손에 쥐고 있는 외서의 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외서는 어떤 영감을 받았길래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성 니콜라이 교회의평화 사역은 이렇게 운명적으로 예비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초를 구입해 불을 밝힌 후 회중석 한 가운데 놓인 촛대에 올려 놓느라니 저절로 경건한 기분이 들었다. 촛불을 밝히고 몇몇 사람들을 떠올리며 기도를 올렸다. 어둠이 짙었던 시기, 복음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던 크리스치안 퓌러 목사와 1989년의 시위를 목도하며 천안문 사태와 같은 유혈 참극은 막아야한다는 생각에 민중들 편에 서서 비폭력적인 저항을 이끌었던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의 세계적인 지휘자 쿠어트 마주르(Kurt Masur), 그리고 신학자 침머만(Zimmermann)박사가 그들이다. 그들은 동료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안락한 삶의 자리를 박차고 나간 참다운 의미의 지성인들이다.역사의 변곡점에서 세속적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그들이야말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증인들이었다.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기도회가 순조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의 몰락이 가시화되고있을 때, 수많은 이들이 운집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당국은 성 니콜라이 교회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어떠한 방해도 평화를 향한 갈망을 이길 수는 없었다. 치안담당자는조직에 속한 700여 명의 사람들을 성 니콜라이 교회에 보내 미리 자리를 차지하게 했다. 하지만그들의 의도는 뜻하지 않게 좌절되고 말았다. 특수한 임무를 띠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은 목사를 통해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세속사회의 가르침을 뒤집는 그 가르침은 그들의 가슴에도 어떤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필연은 언제나 우연의 옷을 입고 등장하게 마련이다.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어리석음보다 못하다는 바울의 말은 얼마나 적확한가.1989년 10월 9일은 정말 역사적인 날이다. 평화와 시민의 권리 그리고 인권 신장을 요구하는3000여 명의 군중들이 몰려들어 성 니콜라이 교회, 성 토마스 교회, 성 요한네스 교회를 가득 채웠다. 민주화의 수확기가 도래한 것이다.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는 평화 기도회가 열렸고, 개혁 교회에서는 한스 유르겐 지버스(Hans-Jürgen Sievers) 목사가 좋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이르는 길이 옳아야 하고 사용하는 수단도 정당해야 한다며 비폭력을 호소했다.성 토마스 교회는 처음으로 평화 기도회를 위해 교회를 개방했고, 몰려든 이들을 향해 리히터 30
  • 31. (Johannes Richter) 목사는 잠언 25장 8-9절("너는 서둘러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서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아라")을 본문으로 삼아 인내의 용기와 격분을 거절하는슬기를 발휘하자고 설교했다.성 미카엘리스 교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 날 처음으로 평화 기도회를 위해 교회를 개방한게르트 크룸프홀쯔(Gerd Krumbholz) 목사는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수 없다면서, 지금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용기의 결여와 두려움에 대한 죽음이라고 말했다.무혈혁명은 이렇게 마련되고 있었다. 광장과 길거리에는 이미 70,000여 명의 시위대가 운집해 있었다. 그들은 유리 창 하나 깨지 않았다. 1989년 10월 9일은 비폭력 저항운동 역사에 도 하나의이정표가 놓이는 날이 되었다.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경찰은 결국철수하지 않을 수없었다. 당시 라이프찌히 중앙 위원회의 치안 책임자였던 밀케(Mielke)는 죽기 직전에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있었으나 기도와 촛불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고 증언했다.그날의 무혈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교회 광장 곁에 세워놓은 대리석으로 만든 종려나무 기둥 조각은 어떤 경우이든 비폭력적인 저항과 평화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그 광장을 오랫동안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1723년부터 1750년까지 이 교회의 오르간 연주와 지휘를 맡았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요한 수난곡’이 들려오는 듯 했다.‘주여, 이 땅의 영예로운 통치자여!당신의 수난에 의해 참된 하느님의 아들이신당신이 어느 때에도 최적의 시기에도찬미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시옵소서’라이프찌히 거리를 걸으며 나는 새삼스럽게 길을 묻고 있다. 마땅히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 길을 걷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출처 : http://well.hani.co.kr/52704 by 청춘개미 31
  • 32. £ 독일 화합과 희망의 상징, 드레스덴 프라우엔 교회독일통일기행 5일째날,세계 2차 대전 당시 도시의 90%이상이파괴되었던 드레스덴을 가보았다. 드레스덴은 "독일의 피렌체"라는 명성에 걸맞게아름다운 궁전과 고전양식의 건물들이많았고, 강가를 따라 이어진 테라스에서여유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드레스덴을 방문한 목적은 이러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것은 프라우엔교회(Frauenkirche)를 방문하여 교회 목사님과 동서독 통일 후교회 재건을 주도했던 시민을 만나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프라우엔교회는 세계 2차 대전 후 통일 전까지 독일인들에게 전쟁의 상처로남아있었다. 하지만 89년 통일 후에는시민들이 주도한 교회 재건으로 인해 독일의 화합과 희망을 상징하게 되었다. 32
  • 33. ‣ 세계2차대전 후 파괴된 프라우엔교회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 프라우엔교회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마을사람들은 부서진 건물 잔해를 주 워 번호를 매겨 각자의 집에 보관해 두었다는 것은 꽤 알려 진 이야기다. ‣ 추모의 십자가 전쟁으로 교회 건물이 불탄 후 무너진 잔해 속에 남아있던 꼭대기 십자가. 불에 녹아 모양이 일그러졌지만, 이 십자가는 현재 전쟁에 대한 반대와 용서의 의미를 담아 프라우엔교회 내부 한켠에 보존 및 전시 중이다.프라우엔교회가 지금과 같이 온전한 모습을 하게 된 데에는 드레스덴 시민들의 힘이 컸다. 독일통일기행을 준비하던 중 프라우엔교회 복원이 정부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 아닌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구 동독지역의 드레스덴을 방문해 전쟁 후 분단 당시의 상처와 분위기를 보고자 했던 우리는 프라우엔 교회를 방문하여 인터뷰하기로 결정하였다.우리를 맞이해주신 분들은 1990년부터 현재까지 프라우엔 목사로 계시는 Holger Treutmann목사님과 Citizen Action Group의 멤버로 통일 후 "Appeal from Dresden"을 만드신 Köckeritz 박사님이 였다. 33
  • 34. ‣ 설명중이신 Köckeritz 박사님Köckeritz 박사님은 구 동독 시절부터 건축가로 일하셨는데 특히 역사적 건물 재건에 주로 관여하셨다고 한다. DDR시절부터 프라우엔교회는 무너진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고, 당시 건축가들사이에서는 15년 넘게 프라우엔 교회를 비롯한 주변 건물 복원에 대한 토론과 회의는 계속되어왔었다. 80년대 동독은 프라우엔 교회와 주변 건물을 드레스덴을 대표하는 것이자 상징하는 것임에 합의 발표하고 복원이 언제 진행될지 모르지만, 주변 지역의 개발을 제한했다. 프라우엔교회는드레스덴을 가로지르는 엘베강의 곡선을 따라 마을 광장과 함께 지어진 것으로 교회를 중심으로모든 거리가 연결되고, 강 건너 뿐 아니라 마을 어디에서나 교회를 볼 수 있도록 설계된 중요한곳이었다. 교회는 도시 건축적 관점에서도 중요할 뿐 아니라, 작센주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큰 교회 건물 중 하나라는 상징성도 있었다. 교회가 지어진 직후 당시 제후의 폴란드 출신 부인이 카톨릭이라 성당을 지어줬는데 그 성당과 경쟁관계였고 그런 관계를 통해 지역 경제를 상승시킬 수있었다.재건을 위한 시민단체 모임은 독일 통일 1년 전인 1988년도에 결성되었는데 큰 조명을 받지 못하다가, 1990년에는 통일이 되면서 통합의 물결 속에 관심이 커지고 시 차원으로 사안이 확장된다. 1989년 11월 첫 공식발표가 있은 후 1990년 2월에 재건에 관한 구체적인 발표가 이루어진다. 그 동안 지속되어왔던 연구들을 합하여 언론에 모델, 사진등과 함께 공개하였다. 당시 대변인이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는데 그로 인해 더 많은 조명을 받게 된다.1989년까지는 프라우엔교회에 관한 법률상 조항이 전혀 없었으나, 90년대 초 사업차원에서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논의의 급선무는 복원 자체에 관한 합의를 찾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건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잔해 사진들을 보며 가능성이 없다고 하였기때문이다. 하지만 목사님들과 교회 대표들은 프라우엔교회가 드레스덴의 유일한 개신교 교회라며재건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34
  • 35. 당시 지지자들은 교회의 잔해들을 전쟁의 기억으로 남기고자 하였는데, 폐허 상태로 남기기보다는복원을 할 때 잔해를 이용하면 상징성이 더 커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후에 사람들이 복원된건물에 박힌 검은 잔해를 보고 그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 전쟁과 과거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을것이라 하였다.‣ 목사님과 박사님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YP4Peace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당연히 재정문제가 논의되었다. Citizen Action Group의 의지는 교회 건축을 모두 기부금으로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한국으로 따지면) 도지사가 총 비용의 80%를 도에서 부담을 하고, 20%만을 기부금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모금 결과 독일 전역에서 건축 비용의 3분의 2에 달하는 현재 금액으로 175억 유로가 모금되었다. 이는 교회가 50년 넘게 비참하게 무너져 있었던 것이 모든 독일인들에게 전쟁의 상처로 남았고, 또 사람들이 그만큼 교회 복원에 관심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이렇게 된 데에는 시민단체 멤버들의 공헌이 컸는데, 한 예로 단체의 대변인은 트럼펫 연주자였다. 그는 앙상블을 3개나 하면서 라이프치히, 베를린 등 전국을 돌면서 모금을 위한 공연을 1500회나 하였다. 콘서트 자체로는 큰 액수가 모금되지는 않았지만, 공연에 참여한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고, 콘서트가 끝난 후에는 전보다 훨씬 많은 기부금이 모였다.그 다음으로 기부금 조성에 큰 도움이 된 것은 드레스덴 은행의 노력이다. 은행원들은 기부금 편 35
  • 36. 지를 만들어 판매하여 돈을 모았고, 은행은 보유하고 있는 금, 은, 동 등을 기부하였다. 1~2년 안에 재건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시의회는 이를 강력히 밀어주었고, 드레스덴 시도 비용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공공자금 조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공사는 어느 정도 비용을 모은 후 시작했지만 공사속도가 너무 빨라 예산이 부족하게 된 적도 있었다. 공사가 진행되면서 교회가 점점 형상을 갖추자 점차 프라우엔교회에 대한 대중들의 긍정적인 관심이 높아져 1993년부터는 주립교회, 드레스덴시, 자유작센도시에서도 복원에 참여하였다.드레스덴 시의 주된 역할은 프라우엔교회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공공자금을 마련하는 것이고,주립교회는 토지 재정비와 기부금 조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일어나서 설명하시는 부분]노란색으로 표시된 것(오른쪽 사진 참고)이공사 진행 정도이다. 건물 아래 부분이 지어진후 위 부분의 공사를 진행하면서 예배를 시작하였는데, 예배 기부금만 200만 유로 가량이모금되었다.현재 교회의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와 작은 돔은 교회 재건에 관심을 가진 영국이 우리도 돕겠다고 하여 직접 제작하여 보내준 것이다. 우연찮게도 십자가를 주조한 사람의 아버지가 2차 대전당시 공군이었는데, 그 때 폭탄을 떨어뜨린 사람이었다. 그 아들이 제작에 참여한 것이다.공사는 2005년에 완료되었다. 1993년부터 공사가 시작된 이후 13년간 사고가 한 번도 없었고 관심도 높았으며 예산도 부족하지 않아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공사를 하면서 이를 경우는독일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고, 책임자들은 이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있다고 한다. 36
  • 37. Holger Treutmann 목사님 말씀‣ Holger Treutmann 목사님프라우엔 교회 자체만 보면 유럽의 작은 점에 하나에 불과하지만 왜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샀는지 철학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의미는 분단과 냉전시기에 도시 자체가 경계도시를 상징하는 곳 중의 하나였다. 폴란드 체코 등과 접경하여 서구와 동구가 부딪히고 대립되는 곳이었다. 50년 넘게진행된 냉전시기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통일을 통해 이념과 갈들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여러차이가 발견되었는데, 교회 재건을 통해 양 체제의 이질성을 좁혀가고자 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교회의 재건이 아니라 유럽의 통합과 세계의 평화를 상징한다. 정부차원의 갈등이나 개인간의 갈등이 있을 수 있는데, 그 갈등에서 파생되는 것은 적개심밖에 없다. 그 적개심을치유하고 줄여가기 위한 길을 찾는 사람들은 늘 있었고, 그 결과가 재건 사업으로 드러났다고 할수 있다. ‣ 교회 구석구석을 안내해주시는 모습 ‣ 교회 투어 중인 YP4Peace목사님 Q: 한국에서도 그런 적개심, 갈등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분단된 현실에서 하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 또는 적개심이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들이 사회 전반적으로 있는 지 궁금하다. 37
  • 38. YP4Peace: 한국 사회에서는 통일이 점점 잊혀지고 분단이 고착화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독일에 와서 보려는 것은 우리가 좀 더 분단에 대해 알고 독일은 어떻게 통일하고 통합해 갔 는지 눈으로 보기 위해서이다. 들으면서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구나 해서 기 뻤다. 한국은 통일을 사회 이슈로 만들어가야 하는 수준인 것 같다.박사님 : 분단시절 동·서독은 적어도 편지나 전화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행은 힘들긴 했지만 가능하기는 했다. 남·북한의 관계와 비교했을 때 독일이 더 상황아 나았고, 통일도 더 쉬웠을 것 같다.‣ 한국에서 준비해온 선물 증정 ‣ 감사한 마음을 담아 교회 헌금목사님 : 최근 독일에서 여자 축구 월드컵이 있었는데, 미국과 북한의 경기가 드레스덴에서 있었 다. 목사님과 몇몇분이 경기 후 콘서트를 마련하였다. 콘서트는 편안한 만남과 대화의 장을 만들고자 한 것이었고, 차도 마시며 우리가 준비한 글을 읽으며 서로에 대한 불편 함을 해소하고자 하는 그런 자리였다. 글을 보낸 후 미국팀 대표들은 참석하겠다고 답했 고 실제로 참석하였다. 하지만 북한은 결국 오지 않았다. 정말 아쉬웠다. 내년 5월에 세계의 젊은 청년들을 초대하여 평화와 이해라는 주제로 컨퍼런스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전세계의 갈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해소하며 화 합하려는지에 대한 것이다. 한국이 멀긴 하지만 오면 좋겠다. by 영현 38
  • 39. 한국에 돌아와서 프라우엔교회 트루먼 목사께 작은 선물과 사진을 보내드렸더니감사하다며 메일을 보내주셨다.Dear Yunghyun,it was a great pleasure for me to have you here as interestedvisitors in Frauenkirche Dresden. Thank you very much for all kindnessduring your stay here with me and Dr. K=F6ckeritz.(?) I also want tothank you very much for the gift that reached me from Korea withthe good wishes for us.I hope we have the chance to meet again in the future.God bless your work for peace an reconciliation.Sincerely YoursHolger Holger Treutmann Pfarrer der Frauenkirche Dresden 39
  • 40. <쉬어가기>100인+@거리인터뷰 이야기이곳은 베를린2011년 8월 15일 날씨 맑음. 이 날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사실 한국에 있으면 단순히 휴일로 생각하고 넘어가버릴 수 있는 날이었지만, 독일에서 보낼 815는 특별해야 했다. 독일로출발하기 전부터 우리는 독일, 베를린에서의 광복절을 어떻게 보낼지 수많은 고민과 토론을 했다.그래서 결정된 815 마라톤과 거리인터뷰. 전 날 밤늦게까지 인터뷰 준비를 하고 새벽부터 부지런히 일어나 마라톤과 인터뷰 준비를 했다.오전에 마라톤을 마치고 숙소에서 노란 단체티로 갈아입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오는 발걸음이가볍지만은 않았다.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독일인들이 낯선 이방인들의 인터뷰에 응해주겠느냐는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그래서 최대한 설문을 간단하고 재밌게 할 수 있도록 커다란 판에 O/X로할 수 있는 질문을 만들고 색도 알록달록 눈에 띄게 만들었다. 그렇게 재미난 설문으로 다가온 사람들에게 좀 더 세부적인 질문을 하기로 나름의 전략을 짜고 역할을 나눴다. 40
  • 41. 우리의 인터뷰 전략지는 분단의 상징에서 독일통일의 상징이 된, 늘 사람으로 붐비는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광장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놓친 것이 있었는데 그곳엔 관광객이 굉장히 많이 온다는 것이었다. 이러다 독일인보다 관광 온 외국인만 인터뷰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막상 도착하고 나서야 그런 걱정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외국인인 주제에 (그들이 독일인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들에게 “Where are you from?"을 반복해 많은 현지인들을 황당하게 했다. (그들이우리에게 물어도 시원찮을 물음을...흐흐)우선 O/X 인터뷰의 질문은 이렇게 4가지였다. <질문1> ‘분단’, ‘통일’ 주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나요? Do you have any interest in the topics of "divided nation" and "reunification"? <질문2> 통일이 독일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생각하나요? Do you think unification changed the German society positively? <질문3> 독일이 완전히 통일되었다고 생각하나요? Do you think Germany is reunified "completely"? <질문4> 한국은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요? Do you think the unification of two Koreans is possible? 41
  • 42. 우리와 동행해준 독일 유학생 ‘조선희’샘의 도움으로 영어를 못하는 독일인들을 위해 영어와 함께독일어도 적어두었다. 실제로 영어에 서툰 10대나 50대 이상의 어르신들의 설문을 받는데 많은도움이 됐다.대상은 브란덴부르크문 광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고,독일인과 비독일인으로 나누었다. 거기에 4가지 색깔의 스티커로10대, 20~30대, 40~50대, 60대 이상으로 세대별 답변도 비교할수 있도록 했다.우려와 달리 사람들이 굉장히 밝게 우리의 설문에 응해주었다. 노란 단체티와 화려한 머리띠로 시선을 끌고 색색 스티커로 재미를유발하게 한 전략이 먹혔던 것 같다.외국인들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가와 자신의 나이에 맞는 스티커를 고르고 고민해가며(재밌어하며) 설문을 하는 모습에 우리는 흥이 나서 더 열심히 사람을 모으고 설명을 했다. 스티커 설문자 중 독일인을 대상으로 깊이 있는 세부 인터뷰도 진행했다.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이 많았고 독일 내에서 관광을 온 사람들도 생각보다 아주 많았다. 전 세계인들과 직접 부대끼며 소통한다는것이 더욱 좋았다. 42
  • 43. 2시간에 걸친 인터뷰에서 우리는 약 130명가량의 설문을 받았다. 시간이 언제 흘렀는지 모르게목표했던 100명의 설문을 훌쩍 넘었다. 사실 O/X 스티커 붙이기는 답변이 너무 편중되어 답변 자체로 보면 흥미진진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베를린 거리설문 분석표>   1번 질문 2번 질문 3번 질문 4번 질문 10대 34 33 30 30 20~30대 20~30대 52 49 42 51 40~50대 32 26 28 29 60대 이상 14 14 14 14 합 계 132 122 114 124 1번 질문. ‘분단’, ‘통일’ 주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나요? 1번 질문 독일인 비독일인 소계 10대 16 14 30 20~30 10 37 47 O 40~50 8 22 30 60 이상 8 5 13 소계 42 78 120 10대 2 1 3 20~30 1 3 4 X 40~50 0 1 1 60 이상 0 1 1 소계 3 6 9 10대   1 1 20~30   1 1 ? 40~50 1   1 60 이상     0 소계 1 2 3 합 계 132 43
  • 44. 2번 질문.통일이 독일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고생각하나요? 2번 질문 독일인 비독일인 소계 10대 17 16 33 20~30 8 40 48 O 40~50 7 19 26 60 이상 7 6 13 소계 39 81 120 10대     0 20~30     0 X 40~50     0 60 이상   1 1 소계 0 1 1 10대     0 20~30   1 1 ? 40~50     0 60 이상     0 소계 0 1 1 합 계 122 44
  • 45. 3번 질문.독일이 완전히 통일되었다고 생각하나요? 3번 질문 독일인 비독일인 소계 10대 6 2 8 20~30 2 5 7 O 40~50 3 2 5 60 이상 1 3 4 소계 12 12 24 10대 14 7 21 20~30 4 30 34 X 40~50 10 12 22 60 이상 6 4 10 소계 34 53 87 10대   1 1 20~30   1 1 ? 40~50 1   1 60 이상     0 소계 1 2 3 합 계 114 45
  • 46. 4번 질문.한국은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요? 4번 질문 독일인 비독일인 소계 10대 12 14 26 20~30 9 37 46 O 40~50 11 15 26 60 이상 8 5 13 소계 40 71 111 10대 0 1 1 20~30 1 3 4 X 40~50 1 0 1 60 이상 1 0 1 소계 3 4 7 10대 3 0 3 20~30 0 1 1 ? 40~50 2 0 2 60 이상     0 소계 5 1 6 합 계 124 46
  • 47. 1), 2), 4)의 질문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O를 선택했다. 깊이 생각해서 나온 고민이라기보다는가벼운 설문의 특성상 긍정적인 답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판단이 됐다. 특히 질문 4) 한국의통일에 대한 질문은 “I hope”와 함께한 O의 답변이 많았다. 그나마 질문 3)인 독일이 완전히 통일이 되었다고 생각하느냐의 질문에서 X의 답변이 상당히 나왔다.물론 O와 X로만 답할 수 있는 질문 자체에서 한계가 많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설문자 중)독일인들을 대상으로 한 세부인터뷰에서, 설문 스티커를 붙이는 사람들이 조금씩 던지는 이야기를들으며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거리의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직접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O/X 스티커 설문은 충분히 재밌고 의미 있는 것이었다.한마디도 놓칠 수 없는 그들의 인터뷰 속 인터뷰! 1. 독일의 통일이 독일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바꾸었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답변 긍정- (구소련 지역에서 사셨던 60대 이상 여성) 역사를 회고해보았을 때 분단의 역사를 가졌던 나라들 이 통일되어서 더 나은 사회를 확립하지 않았는가, 경제적인 요소를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다 함께 사는 사회가 좋지 아니한가. 긍정- (10대 여성) 통일이 된 지금은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보다도 이산가족 문제가 해결되어서 좋다. 또 같은 언어를 쓸 수 있어서 좋다. 분단의 시절을 직접 겪지 못한 나로서는 그 시절을 상상하기 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부모님께서 가끔 이야기를 해주셨다. 어머니께서 서독출신으로 당시 택시 운전기사를 하셨었는데 당시 일을 말씀해주신 적이 있다. 한번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한 번은 어떤 승객을 태웠는데 그 승객이 목적지를 말하는데 동독의 어느 지역이었는데 그곳이 어느 곳인지 잘 몰라서 당황한 적이 있었다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다. 긍정- (20대 여성) 현재는 동독과 서독 사이에 경계가 안 보이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서독에서 와서 어 떤 차별들이 있고 문제가 있는지 잘 못 느끼겠다. 긍정- (50대 남성) 통일 이후 같은 법 아래서, 사회제도 아래에서 모든 국민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서 잘 통합된 것 같다. 원래 독일은 하나였기 때문에 더욱 이것이 자연스럽고 좋다고 생각한다. 연방 제의 개념에서 단지 하나의 또 다른 체제 하에 있었던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을 서독 출신, 동독출신으로 나누어서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부정- (10대 남학생) 나이가 많으신 구 동독 출신의 분들은 아직도 옛날을 그리워 하는 말씀이나 통일 이후의 동독 출신 사람들의 고충들을 많이 이야기하셔서 아직도 완전한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 다고 느꼈다. 부정- (남부독일 출신 50대 남성)소련, 공산주의, 공산국가가 70년간 지속이 되었는데 이 기간에 3세대 가 걸쳐져 있다. 이 3세대들은 모두 위의 3개의 요소에 의해서 시대에 뒤떨어진 사상과 의견들을 세뇌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그런 의견들이 남아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 세대들이 지나가기 전까지는 완전한 통합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부정- (남부독일 출신 20대 남성) 아직 독일은 사회적, 문화적으로 분리되어있다. 예를 들면 동독지역 노 동자들의 시급이 낮은 실정이다. 구동독지역의 젊은층들이 서독지역으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에 현 47
  • 48. 재는 동독지역이 사람이 별로 없다.2.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가능성과 자유로운 의견<대다수의 불특정다수>한반도의 통일은 가능성을 따질 문제가 아니라 무조건 이뤄내야 할 일이다.<남부독일 출신 50대 남성>누구도 분단된 한국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독일 같은 경우에는 세계평화를 깨는 잘못을 범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응징으로 나뉘어졌어야 했지만, 한국은 그러한 잘못을 범한 적도 없는데 분단되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다만 북한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 시절부터 어떤 이들은 현재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교육을 받아오고 있을 것이기에 통일을 시도할 때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는것을 유념해야 한다. 개인의 의견을 가질 수 있는 남한은 경제적 부국이고 상대적으로 민주주의 하에서잘 형성된 사회이기에 얼마나 북한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지에 대해 책임의식을 갖고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필요하다.<남부출신 50대 남성>한반도의 통합에 조언을 하자면, 우리 독일이 통일할 때는 서독에 동독이 흡수되는 방식으로 동독에도충분히 좋았던 제도도 어떤 사회적 문화적인 자산들이 있었는데도 모두 무시되었었다. 한국은 통일할때 독일 통일 모습을 참고로 해서 북한이 경제적으로 사회제도적으로 덜 발전했다고 판단해서 모두 무시하지 않고 서로의 좋은 점을 찾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쳤으면 좋겠다. 한국의 경우 한민족이기에 더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구조와 같은 부분들이 통합을 어렵게 하겠지만 한민족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 아래에서서로의차이점들을감싸안으면서이루어나가는것이중요하다고생각한다.<20대 여성>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통일이 매우 힘들 것 같다. 북한은 동독보다 훨씬 극심한 문제들을 안고 있기 때문에 통일이 되어서도 매우 힘들 것 같다. 구동독에서도 부정적인 현상들이 많았는데 북한은 더욱 폐쇄된 사회이기 때문에 한국은 통일을 도모할 시에 더욱 심혈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3. 독일 내의 통일 교육 실정 & 기타 의견(10대 자녀를 둔 40대 여성) 일상생활 속에서 매일 자녀에게 통일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내가 사는 동네에 구동독 출신 사람이 있고, 또 그들과 자녀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을 꽤 갖는데 동독 사람들은 그들의 자녀를 유치원에 어렸을 때부터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아마 구동독시절의 사회 전반의 흐름에 관련해서 생긴 당위적인 행동양식이었겠지만 서독출신이 나에게는 굉장히의아하고 꽤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굉장히 다른 것 같고, 구동독 시절의 시스템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항상 너무 안일하게 국가에 의지하고 국가가 모든 걸 해결해주길 바라는 모습이 보일 때마음이 좀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10대 여학생) 독일의 역사에 관해서는 학교 정규 커리큘럼에 있어서 어느 정도 잘 아는 편이지만 한국의 분단현실에 대해서는 학교에서는 굉장히 단편적인 것만을 알고 미디어를 통해서 배우고 있다.(청소년 베를린 투어 가이드 40대 여성) 학교에서 그룹으로 오는 청소년들이 굉장히 많고 또 아이들도관심은 높다. 하지만 분단과 통일에 관해서 워낙 공감이 힘들기 때문에 이해를 하는데 어려움을 겪더라.통일교육에 대해서는 어린 사람들이나 나이든 사람들이나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48
  • 49. 왜 통일을 해야 하는가, 통일이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이것은 독일인이아닌 우리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질문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곳 통일의 땅, 독일에서 우리는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기사에서, 책에서, 자료집에서, 누군가의 강의에서 이야기하는 독일의 통일이 아니라 이곳 독일에서 독일인들을 만나 직접 듣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했다. 그리고 들을 수있었다. 그것은 표현할 수 없는 아주 색다른 경험이었다. 한국의 분단 상황과 통일에 대해 알리고또 의견을 들은 것도 거리인터뷰의 또 다른 수확이었다. 통일을 일궈낸 독일인들의 한국의 통일에대한 의견들이 특히나 가슴을 많이 울렸다. 49
  • 50. 번외 인터뷰 @Bonn이곳은 본8월 19일 서독의 수도였던 본에서의 인터뷰는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베를린에서의 인터뷰가 성공적이어서 사기가 충만해진 이유도 있었고, 동독과 서독이 함께 있었고 현재는 관광지인 그곳의특성상 다른 지역에서의 인터뷰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야간기차로 아침 일찍 도착한 본은 설상가상으로 비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는 강행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기차역의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인터뷰 준비를 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비가 그치고 날이 조금 개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고 날이 여전히 흐렸지만 문제는 되지 않았다.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 어디일까 고민하다 ‘본 대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 또래 청년들의의견을 많이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지만, 현실은... 독일 역시 방학이었다! 어쩐지 휑~한대학에서 날씨도 흐린데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한번 제대로 해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데려오는 등의 갖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이 조금씩 붐비기 시작했다. 유학생들을 제외하고는 관광지인 베를린과 달리 대부분이 독일인들이었다.질문은 베를린과의 비교를 위해 같은 것으로 했다. 50
  • 51. <질문1> ‘분단’, ‘통일’ 주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나요? <질문2> 통일이 독일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생각하나요? <질문3> 독일이 완전히 통일되었다고 생각하나요? <질문4> 한국은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요?베를린에서와 마찬가지로 10대, 20~30대, 40~50대, 60대 이상 이렇게 4파트로 세대를 나누어스티커 붙이기를 했다. 독일인과 비독일인도 별도로 표시했다.본에서는 1시간동안 약 50명의 설문과 몇 몇 설문자들의 세부 인터뷰를 진행했다.설문 O/X를 하면서 모두가 깜짝 놀랐던 부분이 있다. 베를린과 본에서의 ‘지역차’를 확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베를린에서는 사람들이 O/X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가볍게 스티커를 붙이는분위기였다면, 본에서는 가벼운 스티커 O/X에도 한참동안 고민해서 답변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결과 자체도 베를린에서처럼 한쪽 답변(주로 O)에 편중되지 않고 X의 답변이 많았고, 심지어 선택하지 못하겠다며 중간지점(!!)에 스티커를 붙인 사람들도 여러 명이었다! 질문4) 경우에도 어느시점을 묻는 것이냐는 질문을 많이 했다. (한국의 통일이) 조만간은 어렵겠지만 나중에는 되지 않겠냐부터,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느냐는 답변까지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51
  • 52. <본 거리설문 분석표>   1번 질문 2번 질문 3번 질문 4번 질문 10대 4 4 6 6 20~30대 20~30대 12 6 34 31 40~50대 12 6 11 11 60대 이상 6 11 5 6 합 계 55 55 56 541번 질문.‘분단’, ‘통일’ 주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나요? 1번 질문 독일인 비독일인 소계 10대 1 2 3 20~30 24 5 29O 40~50 9 3 12 60 이상 4 2 6 소계 38 12 50 10대 0 20~30 2 2X 40~50 0 60 이상 0 소계 0 2 2 10대 1 1 20~30 1 1 2 ? 40~50   0 60 이상   0 소계 2 1 3 합 계 55 52
  • 53. 2번 질문.통일이 독일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고생각하나요? 2번 질문 독일인 비독일인 소계 10대 1 2 3 20~30 18 7 25 O 40~50 3 1 4 60 이상 8 3 11 소계 30 13 43 10대 0 20~30 2 2 X 40~50 0 60 이상 0 소계 2 0 2 10대 1 1 20~30 6 1 7 ? 40~50 1 1 2 60 이상 0 소계 7 3 10 합 계 55 53
  • 54. 3번 질문.독일이 완전히 통일되었다고 생각하나요? 3번 질문 독일인 비독일인 소계 10대 4 4 20~30 3 2 5 O 40~50 4 2 6 60 이상 2 2 소계 13 4 17 10대 1 1 20~30 22 5 27 X 40~50 4 4 60 이상 2 2 소계 27 7 34 10대 1 1 20~30 2 2 ? 40~50 1 1 60 이상 1 1 소계 3 2 5 합 계 56 54
  • 55. 4번 질문.한국은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요? 4번 질문 독일인 비독일인 소계 10대 2 2 20~30 13 5 18 O 40~50 10 10 60 이상 4 2 6 소계 29 7 36 10대 1 3 4 20~30 8 2 10 X 40~50 1 1 60 이상 0 소계 10 5 15 10대 0 20~30 2 1 3 ? 40~50 0 60 이상 0 소계 2 1 3 합 계 54 55
  • 56. 베를린과 본의 지역성향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확실한 분석은 어렵지만, 직접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서는 본의 사람들이 조금 더 ‘현실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서독의 수도였던 본에서 (그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전형적인 독일인의 느낌을 받았다면 설명이될까? 확실하지 않으면 스티커를 붙이지 않거나 O/X의 가운데에 붙이고, 질문의 의미를 정확히묻던 사람들. “그렇게 돼야지”라며 한국의 통일에 대해 O를 마음껏 붙여주던 베를린과 달리 본에서는 “현실적으로” 혹은 “당분간은” 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본에서는 아쉽게도 독일어를 통역해줄 사람이 없어 영어가 가능한 사람을 대상으로 세부 인터뷰를 진행했다.본에서의 인터뷰 속 인터뷰! <서독 출신 40대 남성>Q: 일부 독일 사람들, 특히 동독지역 출신 사람들 중에서 통일 이전이 더 나았다는 의견을 이야기해주었 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A: 통일은 매우 성공적이다. 불만은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일본 유학생들>Q1: 남한과 북한의 통일이 어려울 것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A 일본인1: 남북한의 정치체제는 정말로, 매우 다르다. 통일은 어렵지 않을까.Q2: 일본은 북한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남북한이 만약 통일이 된다면 일본은 어 떤 영향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는가?A 일본인1: 통일이 물론 한국에는 좋은 일이겠지만 일본에 완전히 좋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나 라가 강해지는 것이니까.A 일본인2: 사실 남북한 통일은 시대가 지난 이야기(old-fashioned story)이다. 남북한은 이제 완전히 다른 나라일 뿐이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원한다면 가능하다. 그러나 주변국 입장에서는 통일을 이 룬 뒤 과거 독일과 같은 제국을 건설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서독출신 20대 여성>Q1: 독일이 완전히 통일되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No라고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A1: 라이프치히에 아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동독에 대한 정책방향이나 경제수준이 과거 와 비교해 달라지지 않았다. 나 자신이 서독 출신이지만 서독 출신 사람들은 자기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역질문)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게 있다. 현실적으로 볼 때 10년 안에 남북한 통일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개미(재현)) 어려운 질문이다. 사실 통일이 언제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독일에 와서 깨달은 게 있다면 통 일은 평화로 가는 수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구축이 우선이고 통일은 그 다음 문제다. 56
  • 57. <네덜란드에서 온 부부>Q1: 독일이 완전히 통일되었다고 묻는 질문에 No라고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A1: 우선 경제적으로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또한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다. 동독인들은 더 내향적이고 일 을 천천히 진행한다. 서독인들은 다소 거만한 편이다.Q2: 주변국의 국민으로서 독일의 통일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A2: 독일 통일은 이루어졌어야 했다. 네덜란드를 비롯해 다른 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상황을 두려워했다. 전쟁의 기억은 끔찍하다. 유럽에서는 평화에 대한 요구가 매우 크다.<노모를 모시고 나온 서독출신 남성-당시동서독 접경지역에 거주했음>Q: 동독과 서독의 통일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에 No라고 답했다. 이유는?A: 동독과 서독 출신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매우 다르다. 지난 20년 간 많은 접촉이 있었지만 여전히 그 차이는 존재한다. 그러나 세대가 지나면 이 차이는 좁혀질 것이고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20대 영국 청년>Q: 독일이 완전히 통일되었다고 묻는 질문에 No라고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A: 동서독 정치적 차원에서는 통일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이 나뉘어져 있는 것 같다. 특히 젊 은층 보다 나이 많은 어른 세대에서 서로에 대한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30대 독일 여성>Q1: 동독과 서독의 통일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에 No라고 답했다. 이유는?A1: 구동독 지역은 여전히 가난하다. 앞으로 더 발전해야하는데, 특히 산업부분에서의 발전이 필요하다. 통일은 20년 전에 이루어졌지만 50세 이상 어르신들은 여전히 다른 점이 있을 수 있다.Q2: 독일은 20년이 지나도 동서독지역 사람들 간의 다른 점이 있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한국이 통일을 해 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A2: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같은 민족이 함께 사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20대 독일 남성>Q1: 독일이 완전히 통일되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No라고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A1: 왜냐하면 여전히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소득에 있어 서독인의 월급과 동독인의 그것과는 차 이가 있다.Q2: 그렇다면 통일의 긍정적인 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A2: 통일로 인한 이익은 많다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이다. 사람들이 보다 자유롭게 살 수 있 게 되었다. 그리고 정치적인 긴장감이 사라졌으며, 서로에 대한 경계와 적개심을 창의적인 에너지로 사용하게 되었다. 57
  • 58. <40대 독일 여성>Q: 설문응답에서 동서독 간의 통일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A: 사회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화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심지어 여성들의 인식조차 다른 것 같다. 예를 들면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서 분단 당시 하루 종일 일했던 동독여성들은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나 산업시설들이 충분치 않아 아이를 하루 종일 맡겼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이다. 일 을 하러 갈 때는 아이를 종일 다른 이가 돌보게 한다. 하지만 서독의 엄마들은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 지 못한다. 왜냐하면 서독 여성들은 아이는 자신이 직접 길러야 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아이를 반 나절 이상 맡기지 않는다. 내 이웃에도 동독 지역 사람이 이사를 왔는데 아이를 하루 종일 맡기는 것 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역 아줌마들끼리 모일 때 이러한 동독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20대 독일 청년>Q1: 독일이 완전히 통일되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No라고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A1: 아직도 구서독이 구동독에게 재정 지원을 많이 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임금이 다르다. 서독인들은 더 높은 임금을, 동독인들은 더 낮은 임금을 받는다.Q2: 평소에 친구들과 통일이나 역사에 대하여 종종 이야기 하는가?A2: 글쎄... 독일의 전쟁... 역사적으로 복잡한 문제이다. 책이나 정보가 많아 이야기하기도 힘들다. 어른들 과는 통일이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친구들과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50대 독일 부부>Q1: 독일이 완전히 통일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유는?A1: (남편) 완전한 통합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생각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말이다. 20 년이 지났지만 완벽한 하나가 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Q2: 그렇다면 특히 어떤 점이 여전히 다르다고 생각하는가?A2: (남편) 모든 것이 다르다. 하지만 이 다른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Q3: 세부적으로 구체적인 예를 들어 달라.A3: 분단된 시간이 짧다면 문제가 심각하지 않을 것이다. 살았던 체제가 완전히 다른 만큼 동독인들은 민 주주의를 배우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50년 동안이나 큰 감옥에서 살았었다.Q4: 한국은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A4: 두 나라가 하나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하지만 남한이 북한에게 엄청난 돈을 들여야 할 것이다. 20 년간 서독인들이 동독인들에게 세금 등을 통해 아무런 대가 없이 많은 돈을 주었다. 그리고 아마 향 후 20년 동안에도 많은 돈을 주어야 할 것이다. 엄청난 돈을 주고 있지만 나는 괜찮다. 왜냐하면 하 나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58
  • 59. 대학 내에서 진행한 인터뷰의 특성상, 그리고 50명이라는 많지 않은 인원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변별력 있는 내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통일국가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 개인 개인의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분명 통일에 한 걸음 더 다가섰음을 느낄 수 있었다. 통일은 국가 대국가의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들의 삶과 목소리가 있다는 것. 어느 유명한 정당, 재단, 기관의 관계자가 아닌 통일독일,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어느 때보다 설레고 벅찬,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청년, 통일독일을 인터뷰했다. 만쉐이~ by 민지 59
  • 60. 독일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C a tr2 h pe . _ 과거사 인식과 성찰 60
  • 61. £ 독일의 과거사 개괄독일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_ 과거사 인식과 성찰1. 독일의 전쟁범죄관독일은 나치 정권이 붕괴, 패전한 뒤 미국·영국·프랑스·소비에트 연방에 분할 점령되어, 냉전 시대에는 소련 점령 지구에 공산주의 국가인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이, 나머지 지구에 자유주의·자본주의 국가인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이 들어서며 동서 분열의 시대를 겪게 되었다.동독에서는 전 나치스 관계자의 추방이 대대적으로 행해지기는 했으나, 전쟁 피해나 유대인 박해에 관해 동독 정부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이 드러난 것이라며 자국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취했다.서독에서는 당초 점령군의 손으로 나치스의 추궁이 행해졌지만, 점령기 후기에 독일인의 손에 맡겨진 결과, "이미 탈나치화는 관계된 많은 사람들을 되도록 빨리 명예 회복시켜 복직시키기 위한것에 지나지 않게 됐다"(롤프 슈타이닝거 著 <독일사 1945~1961>)라고 평가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문에 비(非)나치 증명서는 나치스 시대의 오점을 씻어내리는 증명서란 뜻에서, 세제 브랜드명에서 딴 페르질(Persil) 증명서라는 비아냥을 샀다.그리고 독일 연방 정부 발족 후 고작 1년 정도 지난 1950년에는 아데나워 정권 하에서 탈나치화종료 선언이 행해져, 점령군에 의해 공직 추방됐던 전 나치 관계자 15만 명 중 99% 이상이 복귀했다. 1951년에 발족한 서독 외무부는 공무원 2/3가 전 나치 당원으로 채워져 있었다.나아가 재군비가 이루어짐에 따라 ‘독일군의 전쟁 범죄’와 ‘나치스의 유대인 박해’는 의도적으로분리되어, 전쟁 범죄와는 무관한 깨끗한 국방군이라는국방군 신화가 성립함에 따라 약탈이나 학살 등의 전쟁 범죄 추궁은 흐지부지하게 되었다.아래는 1952년 12월 3일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군 명예 회복 연설. 나는 오늘 본 회의장에서, 연방 정부의 이름 하에 선언하려 합니다. 우리는 모두 고귀한 군인 전통의 이 름 하에, 육·해·공에서 명예로운 전투를 펼쳐 온 우리 민족 전 병사들의 공적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근 몇 년간의 온갖 비방 중상에도 불구하고, 독일 군인의 명성과 위대한 공적이 지금도 우리 민족 사이에서 명맥을 유지해 왔으며, 앞으로도 유지될 것임을 확신합니다.위에서 상징되는 바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독일에서의 군에 대한 인식의 기초가 되어 왔다.그러는 한편, 나치스의 유대인 박해에 관해서는 특별시하며 사죄를 거듭하고 있다.2. 나치 범죄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에서는 당연히 자국의 역사로서 나치스의 민족 말살 계획을 중대한 범죄로 인지하고 교육에서도 다루고 있다. 아래에서는 주로 서독 시절 나치스의 홀로코스트 범죄나 독일 국민으로서의 전쟁 범죄와 재판에 대한 대처에 관해 소개하겠다.독일에서는 패전 후 일찌감치, 나치스를 전승국이 심판하기보다는 독일인 스스로가 나치스의 행위를 범죄로 다루어 독일의 법원에서 심판하는 것이야말로 독일 민주주의의 재생에 있어서 대단히 61
  • 62. 중요하며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고 여겨져 왔다.국제 군사 재판소 조례 제6조 c항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스의 범죄를 처벌하는 것을 전제로 당초 기초(起草)되었다는 경위로부터, 전시 이외의 나치스에 의한 독일인 박해나 학살 행위를심판하기 위한 효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1945년 나치스 정권의 민족 재판소 등 특별 재판소가 폐지되고, 간이법원, 지방법원, 고등법원 등의 통상 법원이 부활해 독일의 사법 기관이 재건된 뒤, 1946년에 뉘른베르크 재판과는 별도로 독일인 스스로의 손으로 반 나치스 재판을 하자는 탄원서가 제출됐다.나치스 정권 하에 있던 1933년에서 1945년 사이, 독일의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은 300만명에 달했다. 탄원서에는 제외국과 비 독일인에 대한 행위는 물론, 그러한 전쟁 이전부터 정치적적대자를 학살하거나 강제 수용소에 보내는 등, 나치스가 자신들에게 적대했다고 여긴 민간인을박해, 억압, 학살하는 정책을 편 것을 독일 민족 전체에 대해, 또 무수한 독일 국민 한 사람 한사람에 대해 자행된 가공할 범죄로 다루어 독일인의 법원에서 심판해야만 한다는 탄원이 적혀 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1945년 나치스 당 해산 시 당원은 약 850만 명, 협력자는 300만 명을 넘었으며(그 합계는 당시 독일 총인구의 약 2할을 차지함), 또한 관료나 정치가, 기업 경영자 등 사회의중핵을 이루는 층에도 침투해 있던 탓에, 나치스 추궁은 패전으로 황폐해진 독일의 전후 복구를우선한 결과 유야무야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직접적인 관계자는 애당초 친족 등이 추궁을반대하는 등, 나치스 추궁은 인기가 없는 정책이었다.그 밖에도 1950년대 말에 행해진 피의 재판관이라 불린 비난 운동에서는, 전 나치스 관계자(당원이나 협력자)였던 재판관이나 검사 등의 사법 관료가 1,118명에 달할 지경이라고 비난을 받았으며, 이런 나치스 출신 사법 관료들이 큰 걸림돌이 되어 최종적으로 유죄가 된 나치스 관계자는벌금형 같은 가벼운 죄를 포함해도 6000여 명, 관계자 전체의 0.06%에 지나지 않았다.또한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치스의 범죄는 오로지 종래의 형법전(모살죄, 고살죄, 모살 방조죄 등)에만 의거해 재판되어 왔다. 나치스 전범이라 불리는 일도 있지만, 독일 법률상으로는 어디까지나 통상의 형법범에 불과하고, 전범으로 취급되지는 않는다.게다가 독일 정계에서는 전범 재판이 전승국에 의한 부당한 심판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예컨대1950년 11월 8일 서독 연방 의회에서 한스 요아힘 폰 메르카츠(독일당) "독일 병사들이 입은 명예 훼손은 보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독일 병사들의 명예는 침해할 수 없는 확고한 것입니다.","명예로운 사람들을 품위 없는 환경에 구속하려는 시도는 반대해야만 합니다. 독일인의 혼에 지워진 부담을 해소하기 위한 강력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만슈타인 장군이나 케셀링 장군과 같은 사람들, 즉 현재 란츠베르크와 베를린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우리 대신 그들에게 떠넘겨진 짐을 함께 짊어져야만 합니다.", 또 1952년 9월 17일 서독 연방 의회 뉘른베르크 재판에 관해 폰 메르카츠(기독교 민주연합) "법적 근거, 재판 방법, 판결 이유 그리고 집행의 관점에서도 부당합니다.", 메르텐(독일 사회민주당) "이 재판은 정의에 공헌한 것이 아니라,그야말로 이를 위해 만들어진 법률을 따르기 위한 정치적 재판이었음은, 법률 문외한에게도 분명 62
  • 63. 하다", 에반스(독일당) "전쟁 범죄자라는 단어는 원칙적으로 피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유죄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등의 발언이 있다.때문에 나치스의 범죄와 전쟁 범죄의 혼동이 나치스 범죄자 추궁의 걸림돌이 되었다. 이에 대해독일 사회민주당의 아돌프 아른트가 1965년에 전쟁 범죄는 전쟁법 일탈로부터 발생한 범죄이지만 "나치의 범죄는 전쟁 범죄와는 무관하며, 전 국가 기능을 동원해 계획한, 숙고 끝에, 냉혹 비열하게 실행된 살인 행위이다"라며 모살죄의 시효 정지를 요구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나치스의 범죄자는 전쟁 범죄자와는 별개의 존재이다"라는 것이 독일에 있어서 나치 범죄 추궁의 전제가 되어있다.3. 독일국민의 역사의식극우나 역사수정주의의 입장에서,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나치즘 범죄를 없던 것으로 하거나, 혹은 다른 정치 체제 하에서 일어난 범죄라며 상대화를 시도하는 움직임이 존재하지만, 홀로코스트를 나치스의 범죄로 보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다.19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폴란드를 방문해 바르샤바 게토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치스의 범죄에 대해 깊은 사죄의 자세를 표했지만, 한편으로는 귀국 후 "전후 독일인을 구 동부 독일령으로부터 추방하는 부정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라고 TV 연설하여, 폴란드측의 가해 행위 또한 비판하였다. 브란트는 어디까지나 유대인 박해에 대해 사죄한 것이지, 2차대전이나 폴란드 침공을 사죄한 것이 아니다. 브란트가 폴란드를 대한 태도는, 나치스가 폴란드에피해를 끼친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동부 독일령의 병합과 독일인에 대한 박해에 의해 상쇄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무릎 꿇고 한 헌화에 대해 공산당 정권 하의 폴란드에서는 공표된 바가없고, 일반 폴란드인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이 폴란드의 대독 여론을 바꾼것은 아니었다.나치스가 주변국에 준 피해를 전후에 독일이 받은 피해로 상쇄시키려 한 브란트의 입장은, 당시동부 독일령의 회복을 바라며 추방자의 재산 반환 청구를 후원하던 독일의 보수파로부터 비난받았지만, 브란트는 그 책임은 나치스에 있으며 연방 정부에는 없다며 비판을 피했다. 이러한 인식은 현재의 독일에 있어서 일반적인 것이다.1985년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의 독일 종전 40주년 기념식 연설이다. 죄의 유무, 나이를 불문하고, 우리들 전원이 과거를 이어받아야만 합니다. 전원이 과거로부터의 귀결에 관계되어 있으며, 과거에 대한 책임이 지워져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발언은 단순히 일반론이며, 연설 중에는 히틀러의폴란드 진주라는 표현을 쓰며 독일의 침략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슈피겔> 지의 외르텔 편집장은 "그 연설에서는 죄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책임이나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 고백하고 있을 뿐입니다. 히틀러의 휘하에서 행한 일과 그 결과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뿐입니다. 죄에 관해서는 논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사죄도 아니었습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63
  • 64. 2005년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에 이르기까지 역대 총리나 대통령이 거의 매년 폴란드나 이스라엘, 발트 3국 등을 방문해 희생자의 비석 앞에서 나치스 범죄를 사죄하는 모습을 계속 보이고있지만, 동시에 동·중유럽에서의 독일인 추방 피해에 대해서도 추가로 언급하고 있다. 이렇듯 현재의 독일에서는 나치스 범죄에 대한 반성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독일인을 타국과 마찬가지로나치스에 억압된 피해자의 입장에 놓고, 범죄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치스이며, 독일 국가·국민과는 별개로 보며 더불어 주변국이 독일인을 박해한 과거도 다루는 것이 기본적인 입장이다.2009년 9월 1일에 열린 2차대전 개전 70주년 기념식전에서도 메르켈 총리는 독일의 행위에 의한개전이 끝나지 않을 고통을 초래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종전 후에 구 독일령에서 독일인이 추방된것은 부당하다고 단언하며 이러한 사실은 인식되어야만 한다라고 밝혀 독일 측의 입장에 변함이없음을 드러냈다.교육 면에서는, (구) 동독 지역에서는 과거에 홀로코스트보다도 나치스의 공산주의자 탄압이 주안점이었던 탓에, 그 편향성이 (구) 동독 지역에 네오나치가 침투한 요인 중 하나로도 여겨져, (구)동독 지역의 교사 또한 홀로코스트 관련 지도에 필요한 충반한 지식을 갖지 못한 점에서, 그 미비함을 보완해야 하며, 나라로서 중대한 범죄인 홀로코스트를 배워라라는 대책를 추진하여, (구)서독의 교사가 동독 지역에서의 역사 교육에 해나가고 있다.4. 독일의 전쟁범죄 보상독일에서는 1956년, 나치스 박해 희생자 보상에 대해 연방법 차원에서 연방 보상법이 제정됐다.이것은 국가 배상과는 달리 나치스 범죄 피해자에 대한 이른바 개인 보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단, 대상의 대부분은 독일 국민이거나 당시 독일 국민이었다가 나중에 독일 국적을 잃은 사람들이다. 또한 보상을 받은 희생자는 사회보장액이 감액되는 등[7], 실제로는 나치스 관계자보다도 희생자들 쪽이 낮은 대우를 받았다.또 제정 당초의 법은 오로지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나 그로부터 상징되는 박해를 보상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50만 명이 희생됐다고 하는 신티 족의 경우, 1956년 집시에 대한 보상 요구를 독일 연방 대법원은 경위로 보아 그들은 범죄 행위, 특히 절도나 사기를 쉽게 저지르는 경향이 인정된다라며 거부. 결국 1963년에 새로운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독일 사법은 나치스 시절의 집시박해를 사실상 추인하고 있었다.또 나치스에 의한 강제노동 문제는 노예노동으로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도 군수장관이었던 슈페어나 노동고용전권총감 자우켈의 판결에서 죄상의 일부로 다뤄진 한편, 이후 포괄 보상 협정이나 가혹 완화 최종 규정, 혹은 독일 통일 후의 화해 기금 설립 등 보상 문제가 재조명됐을 때에도 팽개쳐져 있었다.1998년 미국에서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보상 소송이 일어났다. 재판 자체는 시효가 지났지만, 강제노동에 연관됐다는 명목으로 여러 독일 기업들이 고소당했고 제품 불매 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고소당한 독일 기업단은 나치스의 강제 노동 정책에 참가함으로써 지게 된 역사적 책임을, 연방하원은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인정해, 2000년 나치스 강제노동 피해자 보상을 위한 기억·책임그리고 미래 기금의 설치가 독일 연방하원에서 가결됐다. 이 기금은 총액 100억 마르크에 달하는방대한 것으로, 독일 기업단과 나라에서 반반씩 부담하고 있다. 이 기금에 참가함으로써 독일 기 64
  • 65. 업은 미국으로부터 나치스 범죄와 무관하다는 법적 안정성 보장을 대가로 획득해, 미국에서 경제활동의 자유를 얻었다.다만 독일 정부는 일관하여 청구권 문제는 다 해결됐다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어, 이러한 기금이법적인 의미에서의 보상은 아니다라는 점은 독일과 기금을 받은 폴란드·체코 측 쌍방에 공통된인식이다. 나치스의 불법 행위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졌다.『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지의 2000년 7월 6일 기사에 따르면, 96년까지 독일이 행한전쟁 보상은 1. 부상, 공습, 전쟁 포로 등으로 희생된 독일 병사, 민간인에 대한 보상(28조 엔),2. 나치스의 불법 행위에 대한 보상(7조 엔), 3. 전쟁 행위로 피해를 받은 타국민에 대한 보상(아직 없음)이라고 되어 있다. 또 2003년 6월 26일, 독일 대법원은 1944년 6월에 그리스 디스토모마을에서 벌어진 나치스 친위대의 학살에 대한 배상 청구를 개인적인 청구는 인정되지 않는다며거부. 또 2003년 12월 10일, 독일의 본 지방법원은 코소보 분쟁 시인 1999년에 NATO군의 폭격으로 사상한 구 유고슬라비아인 희생자의 유족들이 독일 정부에 100만 유로(당시 환율로 약 1억3천만 엔)의 배상을 요구한 소송에서, 개인이 전쟁으로 입은 패해에 대한 배상을 자국 이외의 나라에 요구할 수는 없다라며 청구를 기각(2005년 7월 28일 쾰른 고등법원도 이 판결을 지지.2006년 11월 2일 독일 연방 대법원이 원고의 상고를 기각해 판결이 확정됨)했고, 21세기에 들어서도 독일인 이외에는 전쟁 피해를 배상하지 않는다란 입장에 변화는 없다. [위키피디아 참조] 65
  • 66. £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 (8.15, Berlin) ERINNERUNG•VERANTWORTUNG•ZUKUNFT1. 설립 배경1998년 미국에서 나치에 의한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보상 소송5)이 일어났다. 재판 자체는 시효가 지났지만, 강제노동에 연관된 여러 독일 기업들이 고소를 당했고 제품 불매 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이로 인해 독일 국내에서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사회적인 대토론이 진행되었다. 토론의 핵심논점은 60년 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현재의 독일에게 책임이 있는 것인가, 그리고 금전적 보상을 해야 하는 것인가 등이었다. 이런 사회적인 대토론 속에서 고소당한 독일 기업단은 나치스의강제 노동 정책에 참가함으로써 지게 된 역사적 책임을, 연방하원은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인정해 2000년 독일정부, 독일 정부와 당시 강제노동과 관련된 독일의 기업들, 강제노동의 피해자와변호사들, 그리고 피해자들이 속한 각국의 정부가 함께 모여서 보상과 관련된 논의가 진행되었다.논의들 속에서 경제적 보상 뿐 아니라, 이후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를 기록하고, 교육하는 작업들까지도 해나갈 수 있도록 합의 되었고 보상을 비롯한 이런 일들을 진행하기 위한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설립을 합의하였고 독일연방하원에서도 가결되었다. 기억, 책임 그리고미래 재단은 독일의 전범 기업들이 소송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법적인 평화와 서로에 대한용서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2. 재단의 역할독일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크게 4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1. 1998년 현재 160만 명의 생존해있는 강제노동 피해자들에 대한 노동비용의 지불의 진행-생존해있는 160만 명을 대상으로 강제노동의 보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보상은 피해에 대 한 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전쟁 과정에서 정당한 대가인 임금을 보 상받는 것이었다. 약 4.86억 유로 정도의 비용이 필요했다. 재단의 기금은 국가 주도로 총 5조 원 정도의 비용을 조성하였다. 정부가 반을 부담하고, 천 여 개의 연관 기업들, 그리고 재벌기업 들의 기부들로 기금의 반을 마련하였다. 2007년 까지 보상을 완료하는 것을 목표로 보상작업이 진행되었다. 보상과정은 2001년부터 생존자들의 숫자 즉, 보상대상을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강제노동 사실 의 확인은 복잡하지 않았다. 본인의 증언만을 바탕으로 전문가들이 듣고 역사적 사실들과 일치 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보상의 액은 노동 환경, 노동 기간 등을 고려해서 단계별로 책정 되었다. 개인별 보상비용은 2500유로에서부터 최고 7500유로 까지 지불되었다. 우선 협력기관 들을 통해서 50%가 선지급 되었고, 이후 나머지 50%를 지불하였다.5) 특별수용소에 강제수감․징역 되었던 유대인에 대한 보상은 1956년 제정된 연방보상법에 의해서 보상이 진행되었음. 그러나 일반수용소에서 강제 노역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이뤄지지 않음. 66
  • 67. 2. 전쟁의 기억을 의무화해야한다.-전쟁, 강제노동 등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39년부터 45년까지 강 제노동 희생자들을 개별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인터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현재 약 500명 정도의 인터뷰 필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과정은 각국의 언어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녹취본을 바탕으로 번역과 자막을 만들어서 완성된 필름으로 편집하는 과정을 진행하였다. 다양한 언어와 각국으로 흩어져있는 희생자들을 찾아내어 진행되는 과정이라 많은 시간이 소요된 작업이라고 한다. 이런 기록들을 바탕으로 과거의 역사들을 잊지 않고,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3. 강제노동 희생자들의 사회참여의 기회를 지속적으로 열어간다.-같은 경험을 공유한 강제노동 희생자들끼리의 모임을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서로 위로하 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들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진행해가고 있다. 또한 전쟁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현재의 세대(청소년)들에게 역사의 기억을 전할 수 있도록 학교 등의 공간에서 증언 하고 강의할 수 있는 기회들을 열어가고 있다. 에를 들어 고등학교 역사수업시간에 2차 대전에 대해 공부를 위해서 폴란드에 살고 있는 강제노동의 희생자인 할머니를 모셔 와서 수업을 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해주고, 재정적인 지원도 진행해가고 있다.4. 다시는 이런 일을 일어나지 않도록 지속적인 사업(프로젝트 등 행사)을 진행한다. (teaching human right _인권운동진행)-1년에 약 재단에서 지원하는 사업까지 포함하여 200-500개 정도의 사업이 진행된다. 전쟁 범 죄와 비인도적인 일들이 독일 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세 계 각국의 인권 교육과 인권 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재단 자체적인 청소년 프로그램들도 마련하여 국제교류, 프로젝트, 캠프 등의 사업을 해나가고 있다.재단의 운영비용은 5조원의 기금에서 보상이 이뤄지고 남은 비용의 이자로 진행되고 있다. 67
  • 68. 3.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에서의 인터뷰 ‣ 기억․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 프로그램 책임자 Dr. Ralf PossekelQ : 이런 역사적 경험 속에서 얻은 교훈은 무엇인가?A : 이러한 기억들을 통해서 얻은 교훈이라고 하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 이다. 알아야한다. 침묵하지 않고 계속 말한다면 사람들이 알게 되고, 알면 몸에 배게 되고 몸에 배 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희생자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사적으로, 가족 들끼리 하는 이야기가 아닌, 공적인 자리에서 증언될 땐, 파워가 다르다. 우리가 진행하는 프 로그램에 참여한 청소년들을 보면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접하게 되고 알게 된 친구들은 관 심이 커지고, 반드시 피드백이 있다. 침묵하지 않고 말하는 것!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희생자들이 끊임없이 증언할 수 있도록 해가는 것. 이런 것을 공식화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 서 이다.Q : 누가 기억하고, 책임지고, 무엇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인가?A : 역사에 대한 기억과 반성은 독일 사회가 주체가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는다면 책임을 져야하는 개인은 없다. ‘독일사회’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렇게 기억하고 책임지는 사회가 있다면 앞으로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테러 등의 안 좋은 일들을 넘어서 다양한 사 람들과 다양한 세계가 있다. 이런 다양함 속에서 다문화사회를 지향하고 인정해갈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Q : 왜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나 더 지난 1998년~2000년이 되어서야 전쟁의 강제노동에 대한 보상 문제가 얘기된 것일까?A : 46년 전후 뉘른베른 프로세스(전범재판)이 1년 간 진행되었다. 그 후 1990년대까지 전쟁 희 생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90년대 초반 들어서면서 전쟁 강제부역자들 이 독일에 배상을 요구해오기 시작했다. 많은 수가 미국에 살고 있었고 미국에 빌클린턴 정 부가 들어서면서 정부차원에서 보상요청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1998년 독일 내에도 새 정부 (사민당+녹색당)6)가 당선되면서 미국 정부와 교섭을 시작하였다. 68
  • 69. 1945년부터 1980년 대 까지는 재건시기로서 연합국에 대한 전쟁배상금과 전쟁재건비용으로 허덕이던 시기였다. 동서 냉전의 프레임 속에서 전쟁관련 테마는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었던 시 기였다. 또한 당시에는 아직 전쟁세대가 남아있었던 시기였기에 전쟁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될 수 없었다. 이후 1990년 동서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 이러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Q : 재단에서 목적으로 이야기 되는 ‘용서’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A : 여기에서 용서라는 것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의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보상 을 통해서 역사를 청산하고 역사를 잊어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자는 것이다. 그 중에 서 서로의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보상 이외에 다른 사업들을 지속적으 로 펼쳐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4. 인터뷰를 정리하면서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을 방문하려 계획을 세울 때도 독일의 통일과의 관련성에 대해서 고민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재단에서의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를 하면서 독일사회가 자신들의 사회와역사를 성찰적으로 돌아보고 제기된 문제에 대해서 받아 안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은 통일을 기점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통일의 과정 속에서 동서 분단의 이념의 프레임을 넘어선 사회와 역사의 문제들이 부각되고 해결해갈 수 있는 시작점이 되는 구나라는 생각을하게 되었다.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 독재정권의 역사, 통일 이후 북한의 인권 문제 등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해가고 해결점들을 찾아야하겠지만 온전히 해결할 수 있는 시작점은 역시남북한의 통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한 국가가 둘로 분리된, 개인의 면에서 바라보면 자아가 분리된 상황에선 제 사회문제들의 귀결점과 해결점이 모두 한 지점에 모여 있음을 바라보게 된 좋은 계기였다. by 흥미6) 사민당, 녹색당 연합정부는 당선 전인 90년대 초반부터 전쟁보상 요구에 대해서 정책을 마련하고 준비되어있었다. 69
  • 70. 참고자료Ⅰ_ [ 독일의회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 설립 결의문 (2000.7.4) ]독일의회는 다음을 결의하고자 한다.독일의회는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라는 재단을 설립하는 법안을 통해, 그 동안 방기해오던독일 역사에 대한 책임을 이제나마 다하게 되었다. 곧 우리 현대사의 가장 치욕스러운 한 부분인 노예 및 강제 노동자에 대한 불법행위, 징용, 학대 그리고 착취를 반성하게 된 것이다. 이법으로 인해 뒤늦게나마 그 희생자들에게 인간적이고 경제적인 의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독일의회는 독일인이 노예 및 강제 노동자들에게 가한 행위에 대해 그들의 용서를 구한다.독일의회와 독일연방정부는 올해 이 재단에 5십억 마르크를 출연(出捐)할 것이다. 우리는 독일기업들이 이 재단의 설립과정에서 약속했던 출연금 5십억 마르크 역시 곧바로 기부해줄 것을요청하는 바이다. 특히 노예 및 강제 노동자를 고용했던 기업이나 그 기업의 법적 상속자들은그러한 기부금 모금에 곧바로 빠짐없이 동참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밝혀둔다.이와 관련하여 독일의회는 이 보상금이 아직 생존하고 있는 희생자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분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독일의회가 또한 필수적인 일로 간주하고 있는 바는, 보상금 수혜자는 이 법에 따라 그가 현재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상관없이 동일한 금액을 보상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독일의회는 이 법에규정된 여섯 번째 협력단체, 곧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희생자들을 돌보는 협력단체에 밀려 각개인들에게 분배되는 보상금액이 적어질 경우를 우려하고 있다. 이로 인해 비용이 얼마나 더필요하게 될 것인가는 희생자들로부터 신청을 받고 난 후에서나 비로소 최종적으로 가늠할 수있을 것이다. 만약 이 여섯 번째 협력단체의 업무를 위한 비용이 부족할 경우, 독일의회와 이에 참여한 당국이 그 부족분을 보충해야 할 것이다.독일의회는 나치시대 노예 및 강제 노동자들을 고용한 적이 있는 기업들이나 그 기업의 법적상속자들은 그 해당 기업의 문서고를 개방하여 희생자들의 보상청구권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관한 서류들은 과거의 강제노동자에게 보상액이 지불된 적이 있으면그 내용과 함께 복사하여 위의 법에 적시된 협력단체에 보내져야 한다.독일의회는 독일연방정부가 조직적, 재정적, 혹은 인적인 조치를 추가로 강구하여 아롤젠(Arolsen)에 있는 국제검색문서고(Archiv des Internationalen Suchdienstes)의 기능을 강화하여 각 희생자들과 협력단체가 보상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한다.독일의회는 또한 동법 제18조(정보문의)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각 지방정부 및 지방자치단체들이 그 산하의 문서고를 개방하고, 질의응답 시스템을 향상시켜 희생자 및 협력단체가 보상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한다.독일의회는 이 재단 금액 가운데 일부가 미래기금으로 조성됨으로써 국가, 사회 그리고 사기업이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고 여긴다. 이를 통해 다음 세대도 계속해서 나치범 70
  • 71. 죄를 생생히 기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이 미래기금의 재원은 향후 몇 년간 반드시 일차적으로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프로젝트에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당대의 증언을 남기는 일도 중요하다. 그 다음에는 젊은이들의교환, 화해, 민족 간의 이해, 인권존중, 그리고 사회정의를 위한 프로그램에 중점이 두어져야할 것이다.이 미래기금의 재원은 연방정부와 독일기업이 출연하는 비용이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이들 공공기관이 지원한 조치들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이 재단이사회는 미래기금의 사업을 위해 독자적인 위원회의 구성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검토해주기 바란다. 참고자료Ⅱ_ 시사저널[562호] 50억 달러로 끝내는 나치 강제노동 보상독일 정부와 반씩 부담키로 한 전범 기업들 ‘희색’[562호] 2000년 08월 03일 (목) 프랑크푸르트·허 광 편집위원1998년에 시작된 나치 치하 강제노동 보상 협상이 마침내 막을 내렸다. 미국·러시아와 동유럽정부들의 대표단을 비롯하여 유태인 조직과 변호사까지 참가한 국제 협상단은 7월17일 베를린에서 열린 협상에서 최종 합의를 보았다. 이미 알려진 대로 보상 총액은 100억 마르크(약 50억 달러). 독일 정부와 기업이 각각 절반씩 부담한다. 또 독일측의 제안에 따라 이 기금을 관리하는 재단을 두게 된다. 이 재단은 강제 동원된 노동자들의 신원을 확인하거나 보상 액수를정하는 문제를 맡게 되며, 국제 협상단도 이 재단의 운영에 참여하게 된다.슈뢰더 독일 총리는 7월17일을 역사적 순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독일의 유력 일간지들은, 전후 55년 만에 나치 범죄 보상에 길을 연 이번 합의를 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쥬드도이체 차이퉁>의 주필은 독일이 과거 역사에 책임을 지기는커녕 그 기억조차 완강히거부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역사 거부증’이라고나 불러야 할 이런 심각한 증세가 독일 기업과정부뿐만 아니라 독일 시민 사회까지 잠식하고 있다고 경고했다.보상금, 기업 한해 수익의 1000분의 1도 안돼이렇게 분석하고 비판하는 근거로는 먼저 독일 기업들이 최근에 보여준 행태가 꼽힌다. 이들은전후 보상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줄곧 비난을 받아왔다. 베를린 합의 직전까지 기업측이 내놓은 보상액은 목표액 25억 달러의 절반도 못된다. 강제 노동을 ‘사용’한 기업의 태반이 이런저런구실을 대고 보상을 거부하고 있는데, 이들은 최근에 민영화한 국영 기업(철도청이나 우체국)이 이미 내놓은 보상액을 민간 기업 쪽의 보상액으로 돌려야 한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이런 기업 행태를 보다 못한 독일 정부는 9월30일을 입금 마감일로 못박았다. 최근에는 독일의노벨상 작가 귄터 그라스가 주동해 독일 시민들에게 20 마르크씩 성금을 내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20 마르크면 1년에 극장 구경 두 번인데, 이 정도는 희생해도 되지 않겠는가. 그라스는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71
  • 72. 따지고 보면 기업 쪽의 보상액은 한 해 수익의 1000분의 1도 안된다. 이 돈으로 강제 노동 생존자 한 사람이 받는 보상액은 적으면 2백50만원, 많으면 7백50만원이다.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통계를 보면 독일군 병력은 약 8백80만명, 강제 노동자는 8백40만명이었다. 다시말해 독일의 전시 경제는 한때 1천4백만명까지 달했던 강제 노동자 없이는 굴러가지 못했다.이 중 생존자는 10명 중에 1명인데, 독일 기업이 이들에게 돌아가는 보상을 미루고 있는 것이다. 독일 기업이 보상을 거부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강제 노동자를 ‘사용’한 것은 나치가 전시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강요한 탓이므로 보상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어차피 이윤을 목적으로 삼는 기업에게 도덕성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라면 기업에 최소한의 도덕을 강제하는 힘은 정치 권력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7월 초, 독일 정부의 보상 법안을 심의하는 자리에서 일부 야당 의원들이 엉뚱한 주장을 폈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인들이 연합국에 끌려가 강제 노동에 동원된 사례를 들며, 강제 노동이 독일만의 범죄가 아니라고 말했다. 이것은 스탈린도 히틀러만큼 잔혹했다는 논리로 나치 범죄를 옹호하는, 독일에서1980년대 중반부터 공개적으로 등장한 신우익의 역사수정론과 다름없다. 물론 슈뢰더의 적·녹연정은 이런 시대 착오적 역사관을 갖고 있지는 않다. 슈뢰더는 이미 1998년 ‘강제노동 보상’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고, 녹색당 또한 어느 당보다 앞서 보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그러나 슈뢰더 정부는 지난해 6월 금속 기업 데구 사에 나치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이 미국에서 벌어졌을 때, 이 소송을 재판부가 기각해야 한다는 공식 입장을 미국 법원에 보냈다.데구 사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살충제 생산업체였던 데구쉬의 모기업이며, 데구쉬는 유태인 독살에 사용된 독가스(치클론 B)를 납품해 떼돈을 번 기업이다. 이때 독가스 희생자들의 이에서 금을 수집해 금괴를 만든 기업이 바로 데구 사였다.나치의 전쟁 범죄 배후에 독일 대기업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국제적인 판결을 통해 확인되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는 도이체 방크와 드레스덴 방크를 비롯해서 주요 콘체른을 전범으로 판결했고, 미군정은 이들이 독일에서 더 이상 힘을 못쓰도록 뿌리 뽑는다는 정책을 세웠다.그러나 그 후 힘이 빠진 쪽은 오히려 미군정이었다. 당시의 정세는 초대 독일 정부에서 수석경제 고문에 발탁된 압스가 도이체 방크의 최고 중역 출신이었다는 사실 하나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시설 납품업체에 자금 지원을 하던 도이체 방크에서, 또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고 있던 염료 콘체른 ‘이게 파르베’에서 경력을 쌓은 인물이며, 1952∼1953년 독일의 전쟁 채무를 연기하는 런던회의에 독일 대표로 나서기도 했다.독일의 대표적인 전범인 그를 독일 정계에 다시 등장시킨 것은 물론 동서 냉전이다. 미국은 서독을 반소 전략의 교두보로 삼는다는 냉전 전략에 따라 서독의 전시 경제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고, 서독의 경제를 약화시킬 수 있는 모든 조처를 거부했다. 런던회의에서 서독의 전후 배상이나 강제 노동 보상을 통일 이후로 연기한 것도 이같은 냉전 전략에 따른 것이다.당시 미국이 서유럽에 도입한 마셜 플랜은 서독의 배상이 지연된 데 반발하는 서유럽 연합국,특히 프랑스를 무마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 때 동독에서 일어난 폭동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치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본 소련은 동서독이 분할되자 전후 배상 물자를 동독에서 뜯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대한 동독 주민의 불만이 폭동으로 폭발한 것이다. 소련은동독의 폭동 이후 전후 배상을 끝낸다고 선언했다.냉전 전략에 따라 연기된 독일의 배상은 통일 후에도 계속 지연되었다. 콜 정부는 전쟁이 끝난지 50년 만에 전후 배상은 있을 수 없다고 밀어붙였고, 여기에 어느 나라 정부도 맞서지 못했다. 또 독일 법정은 강제 노동이라는 개념 자체를 전쟁 범죄로 인정하지 않았다. 강제 노동은전시에 흔히 있는 부수 현상이라는 것이 사법부의 시각이었다. 독일 헌법재판소는 1996년에 72
  • 73. 강제 노동 소송도 판결 대상이 된다고 해석했지만, 이 해석도 기업 쪽에는 위협이 되지 못했다. 소송 비용을 강제 노동 생존자 개인이 감당할 수 없었고, 보상을 받아도 변호사 비용과 차이가 없어 재판에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미국과 이스라엘 정부가 타협 강요”이 때 독일 기업을 공포에 빠뜨린 것이 바로 미국 변호사들이다. 이들은 미국의 집단소송제를이용해 한 사람의 소송 비용으로 대기업을 상대하는 소송에서 화려한 전과를 거두기 시작했다.유태인 학살자들의 예금 계좌를 숨기고 있던 스위스 은행이 거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사례는 독일 기업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독일 기업들은 보상을 계속 거부하면 같은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타협을 택했다.그러나 이 타협의 승자는 단연 독일 기업이다. 무엇보다 독일 기업들은 보상 총액을 최소치로유지하고 더 이상의 보상이나 미국 법원을 통한 소송은 없다는 합의를 받아냈다. 또 보상 대상을 강제 노동과 그 생존자들에 대한 재산 피해로 제한함으로써 얻은 성과도 크다. 예를 들어2000년까지 유태인 학살 범죄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 1998년도 워싱턴 국제회의는 이제 무색해졌다. 미국 변호사들은 미국과 이스라엘 정부가 독일측과 타협하기를 강요했으며, 강제 노동생존자들이 남아 있을 때 보상을 받아야 했기에 이같은 합의를 받아들였다고 말한다.유태인의 재산을 감추어 왔다는 이유로 스위스 은행 하나가 내놓은 보상액은 약 12억 달러, 이에 비해 한때 천만 명이 넘는 강제 노동자를 부렸던 독일 기업들의 보상액은 25억 달러. 이것으로 전후 배상 문제까지 깨끗이 해결되었다. 독일의 전범(戰犯) 기업들이 면죄부를 얻은 이날을, 슈뢰더 총리는 ‘역사적 순간’이라고 반겼다. 73
  • 74. £ 테러의 토포그라피(opogrphy of Terror) (8.14, Berlin) http://www.topographil.de/1. 테러의 토포그라피테러의 토포그라피는 독일 나치스 정권 시절의 참상을 기억하고 나치스의 만행을 철저히 규명하기 위한 자료들을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스의비밀경찰 게슈타포 사령부 건물과 히틀러 친위대였던 SS의 본부로 사용됐던 건물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크게 파괴되었다가 전쟁 이후 철거되었다.테러의 토포그라피를 둘러보면 바이마르 공화국부터 나치가 지배하던 시절까지 주위 건물 배치도를 비롯하여 당시SS나 게슈타포의 핵심 인물들 사진과 활동하던 모습이 나와 있다. 특히 유대인을 비롯하여 많은 학살 장면들이 가감 없이 전시되어 있는데, 같은 인물이 한 쪽에선 사람을죽이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평화롭게 피크닉을 즐기는모습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사람의 양면성과 무서움에대해서 다시 알게 되는 사진이었다.2. 느낀점 by 김태선유대인학살추모기념공원과 테러의 토포그라피를 돌아보면서 든 생각은 독일의 유대인학살, 그리고일본의 아시아인을 학살하고 난 후의 대처 방식이 다르다는 점이다.독일의 경우는 늬른베르크 전범재판을 통해서 나치에 협력했던 인물들이 재판을 통해 처벌을 받고 공원과 박물관 건립을 통해 자신들의 잘못을 기억하고 반성을 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독일이 통일로 나가는 길에 있어서도 통일독일을 두려워하는 주변 국가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통일독일이 평화를 지향하고 유럽통합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변 국가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그에 반해 일본은 그와는 반대되는 행보로 피해국가의 국민들은 아직까지 일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그들에게 진정한 사과를 받고 싶어 한다.똑같이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패망 후 다른 걸음걸이를 보이는 두 나라.이 두 나라의 행보가 어떻게 진행될지 자못 궁금하다. 74
  • 75. £ 유대인학살추모공원(Holocaust-Mahnmal) (8.14, Berlin)1. 유대인학살추모공원유대인학살추모공원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된 유대인들을추모하기 위해 설립된 공원으로 베를린 중심가에 위치해 있다.약 6천평 정도인 이 공원은 정방형으로 밖에서 보면 납작하고네모 길쭉한 형태의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일렁이는 물결모양으로 배치해 놓았을 뿐이지만 그 안으로 걸어들어 갈수록 수직기둥으로 변하게 되어있다.공원 내부에는 학살당한 유대인들의 이름과 개인기록이 전시되어 있고 또한 박물관에는 전시장, 회의실, 서점 등이 위치해 있다.2. 느낀점 by 김태선이 추모공원은 미국계 유대인인 피터아이제만이 설계하였는데 공원 안에 들어가면 콘크리트 기둥들이 거대한 벽과 미로로 느껴져 당시 유대인들의 공포와 긴장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피터아이제만의 다른 작품과 비슷한 점이 많아 이 추모공원만의 비판적 시각이 담겨져있지 않은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이러한 추모기념공원 건립은 독일인들이 과거의 잘못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생각이 엿보인다. 독일인들은 과거행위에 대한 죄책감으로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행하고있는 잘못에 대해서 당당하게 이야기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유대인학살추모공원설립은 마땅히 기억해야할 과거의 역사이라는 점에서 크게 박수받아야 할 일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이러한 학살기념물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과거의 아픔을 부각시키려하는행동은 좋게 보이지 않는다. 일예로 아르메니아에서 일어난 150만 인종학살에 관련하여 미국의회가 추모기념물을 세우려하자 유대인들이 건립을 반대하여 막는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일들은 여러 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유대인들의 이기적인 사건과 더불어 반유대인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다.독일인 뿐 아니라 유대인들도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통해 현재,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는 평화를위한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by 태선 75
  • 76. C a tr3 h pe . 8.15 광복절 기념 행사 76
  • 77. 1936 베를린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 기 정 1936년 8월 9일.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선수는 1등으로 스타디움을 들어왔다. 2시간 29분 19초 2. 신기록이었다. 그러나 손기정 선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탈의실로 퇴장했다.시상대에선 손기정 선수와 3위로 들어온 남승룡 선수의 표정은 우울했다. 스타디움에서 일장기가 오르고 ‘기마가요’가 흘러나올 때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는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조국을 빼앗은 나라를 위해 고통스럽게 달렸던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2011.8.15 광복절. 2011년의 청년이 손기정 선수의 빼앗긴 국적을 찾고, 나아가 남북이 하나가 된 한반도를 꿈꿔 본다. “청년, 통일독일에서 만나다” 77
  • 78. 촬영 sketch 주인공 손기정 선수역, 박재현. 또 다른 주인공 2011년의 청년, 이준호.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딸 당시 나이와 같은 24세 청년. 78
  • 79. 큐!!! 계속 달리는 손기정선수 어설픈 결승전 통과장면~ NG가 많았던 장면. 휴~ 아빠미소 연기 중. 고개숙인 금메달리스트 청년에게 한반도기를 전해줍니다. 어색어색~ The End 달려라~ 청년아~ ㅋㅋㅋㅋㅋㅋㅋㅋ목소리/손 출연 촬영보조 감독 79
  • 80. 마라톤 sketch 독일통일기행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걸 뽑으라면 단연 8.15 기념 마라톤이 아닐까? 2011년 8월 15일. 조금 특별한 광복절. 조금 특별한 마라톤. 80
  • 81. ‣ 현지인들 보기 약간 부끄러웠지만... 준비운동부터 철저히! ‣ 누군가 우리 트윗을 보고 올 거라고 기대 반 걱정반이었는데 아무도 안 왔네요. 우리끼리 파이팅!!! 아자아자!! ‣ 마라톤 하기 위해 독일 온 따봉 준호~!81
  • 82. 조금은 색다른 마라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황당시츄에이숀~ 빨간불 앞에서 stop! 그래서 더 즐거움 마라톤. ‣ 남는건 사진 밖에 없으니 마라톤 중에 ‣ 공원을 달릴땐 경치가 좋으니 또 한 컷~ 단체사진도 한 컷~+_+/ 82
  • 83. ‣ 달려라, 왕언니~! ‣ 끝이 보입니다. 달려~내년 내후년 광복절엔더 많은 사람들과 달리고 싶습니다.만세~! 83
  • 84. 깨알같은...ifr ainnom toQ 독일둘러보기 YP4Peace의 일정만 따라가도 본전을 뽑을 수 있는 갈 만한 곳을 알려드려요.Q 독일 맥주맛을 알어? 맥주맛 쫌 아는 청춘개미(재현)가 말하는 독일 맥주 품평.Q 독일에서 식비아끼기 무조건 아낀다고 되나? 아끼면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법.Q 호스텔을 소개합니다. 가격, 접근성, 청결도 여러 요인을 고려하여 엄선한 숙소를 소개합니다. 84
  • 85. Q 독일둘러보기 by YP4PeaceDDR 박물관(DDR Museum Berlin) by (막내)준호* 8월 16일 베를린 / 전체 일정 중 넷째 날[사실 관계]-독일 분단 시절 동독의 문화와 생활에 관한 자료 전시-분단, 베를린, 교통, 동독 비밀경찰, 상품, 건축, 주거, 가족 등 17가지 주제로 나뉨-관람객 직접 체험 가능 (개인적으로 가장 참신하고 흥미로웠던 점)-동독 자동차 (Trabant) 시승 가능-베를린을 여행하던 중 동독에 관한 흥미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박물관이 없다는 점에 착안해 이 박물관 계획/ 2006년 7월 개관[느낀 점]-통일이 된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동독이라는 나라의 문화를 보존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특징적이고 인상적이다. 서독이라는 나라의 체제와 문화가 통일독일의 지배적인 가치관으로 확 립된 것이 역사적 사실임에도 (서독으로의 흡수 통일) 통일 이전 동독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 고 포용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느낌을 준다.-또한 영화 ‘박물관이 살아 있다’를 연상케 하는 체험적인 요소가 많다는 점이 흥미롭다. 동독 주민들의 옷을 입어보고, 동독의 도로를 달리던 Trabant에 앉아보고, 타자기를 직접 사용 해 보기도 하고, 영화 <굿바이 레닌>에 나온 피클을 구매할 수도 있다. 이곳은 ‘관람형’ 이미지 를 가지고 있는 다른 박물관들과는 다르게 ‘참여형’ 박물관으로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 동독시절 옷, 패숀리더들~ ‣ 동독 차 ‣ 동독 집-(마무리, 물음을 던지며) 한반도가 통일이 된 이후 서울 한 복판에 과연 ‘북한 박물관’이 들어설 수 있을까? 85
  • 86. 드레스덴 by 영현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책에서 배우지 않아도,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아도, 이 도시에서 지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에리히 캐스트너드레스덴은 크게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나뉜다. 하지만 도시 자체는 그리 크지 않고, 프라우엔교회, 츠빙거궁전, 중앙역 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관광지는 구시가지에 위치해 있다. 우리는 도보로20여분 떨어져 있는 신시가지의 숙소에서 구시가지까지 걸어가기로 했다.아우구스투스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걸어가다빠듯한 여비를 아끼려는 뜻도 있었지만 드레스덴의 거리를 걸어 목적지로 가는 것은 행복한 선택이었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는 도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엘베강을 중심으로 나뉘고, 그 둘을아우구스투스 다리가 이어주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다리에 이르면 신시가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구시가지를 만나게 되는데, 마치 현재에서 중세시대로 시간이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 ‣ 신시가의 알베르트 광장에서 구시가로 가는 아우구스투 ‣ 황금빛 아우구스투스 동상. 스다리까지 이어진 녹음이 만발한 하우프트거리.신시가지와 구시가지는 도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엘베강을 중심으로 나뉘고, 그 둘을 아우구스투스 다리가 이어주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다리에 이르면 신시가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구시가지를 만나게 되는데, 마치 현재에서 중세시대로 시간이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엘베강을 따라 길게 테라스가 조성되어 있는데,여기에는 멋진 레스토랑이 많다고 한다.하지만 우리는 일정을 소화하기에도 시간이넉넉하지 않아 테라스에는 가지 못했다. ‣ 엘베강을 따라 아름다움을 뽐내는 드레스덴 구시가지. 86
  • 87. 드레스덴의 주요 건물에서는 크고 작은 얼룩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이는 폭격으로 불에 타 버린검은색 벽돌을 찾아 최대한 원형에 맞게 복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드레스덴 시민들은 깨끗하게건물을 다시 세우는 것보다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의미가 있다해도 오래되고, 상처가 있는 건물일수록 헐어버리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우리가 본받아야 되는 시민의식이 아닌가 한다.구시가지에 접어들자마자 ‘독일 동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명성에 맞게 어딜 가나 사람이 많았다. 여기에서는 건물 안을 구경하는 것도중요하지만, 길거리 악사, 조각 퍼포먼서들도 놓치면 아까운 드레스덴의구경거리이다. ‣ 길거리에서 조각상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들. ‣ 길거리 악사. 허름한 옷차림, 관객없는 길거리.. 하지만 그의 연주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목적지 를 향해가는 우리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엄마가 아기에게 자장가를 부르듯, 엄마가 아기에게 자장가 를 부르듯, 바다의 파도소리가 들리듯, 편안하고 깊이 빠져들게 하는 아름다운 연주였다. 87
  • 88. 드레스덴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츠빙거궁전(Zwinger Palace) 궁전입구 궁전의 십자형 뜰과 분수연못작센과 폴란드의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1세의 여름궁전으로 1710-1732년에 지어진츠빙거궁전은 독일 작센주에 있는 바로크 건축의 대표적인 궁전이다. 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던 궁전은 전후에 재건되었다. 왕의 아이디어와 건축가 페페르만의 타고난 재능이 어우러져 이 바로크 건물이 탄생했다고 한다. 건물은 크로넨문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균형미를 살렸으며, 십자형의 넓은 뜰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조각된 분수가 있는 연못이 있다. 특히 요정의 샘이 유명하며, 광장에서는 매년 여름 드레스덴 음악제가 열린다. ‣ 요정의 샘 정말 작고 빛나는 요정이 금방이라도 나타나 말 을 걸 것 같은, 약간은 신비스러운 곳. ‣ 요정의 샘으로 가는 계단건물 내부에는 요정의 욕탕, 고전 거장 미술관, 도자기 수집관, 역사 박물관, 수학 물리학 살롱,동물학 박물관 등이 있다. 유명한 곳은 고전 거장 미술관(Gemaeldegallerie Alter Meister)으로그곳에는 15~18세기에 이르는 라파엘로, 보디첼리, 티티안 등의 이탈리아 화가들과 독일의 뒤러,크라나흐의 유년작품 등이 있고, 반 아익, 루벤스, 램브란트 등의 플란더스 및 로레인, 푸셍 등의프랑스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입장하지 못했다.건축물은 1945년 2차대전 말기에 연합군의 공격으로 파괴되었으나 그 후 오랜 시간에 걸쳐 복원되어졌다. 통독이후 제일 먼저 독일인들이 손을 댄 복구작업이 바로 이 건물이었을 정도로 이 건물은 독일인들이 아끼는 건물이자 그들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88
  • 89. 사실적인 묘사, 신비로운 분위기의 군주들의 행진 벽화 ‣ 25,000여 개의 타일로 만들어진 길이 101m, 높이 8m의 군주들의 행진 벽화.이 벽화는 아우구스투스 거리 옆의 슈탈호프벽에 있는 것으로 길이 101m, 높이 8m의 마이센 자기 타일로 만들어진 군주들의 행진이라는 벽화이다. 무려 25,000여 개의 타일로 만들어졌다고하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공습으로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나, 슈탈호프벽만은 기적적으로 전화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림들은 아주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데, 설사 사전조사 없이 모르고이 거리를 지나간다 하더라도 위엄 있고, 웅장한 이 벽화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매력적인장소이다.국립오페라 극장 젬퍼오퍼 (Semper Oper) 이 곳은 옛 작센의 국립 오페라극장으로 1841년 처음으로 세워진 네오르네상스 양 식의 건물이다. 건물의 이름은 설계를 맡았 던 독일 절충주의 건축의 거장인 고트프리 트 젬퍼(Gottfried Semper)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드레스덴의 오페라 전통은 35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지는데, 카를 마리아 폰 베버(CarlMaria von Weber)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가 이곳에서 지휘를 했으며, 《방황하는화란인(Der Fliegende Holländer)》과 《탄호이저》를 비롯한 유명한 오페라들이 초연되었다고한다.제2차 세계대전 때 건물이 많이 파괴되어 1985년까지 복구작업을 했고, 주변에 있는 츠빙거 궁전의 무기 박물관이 있는 쪽 문을 통해 극장 광장에 있는 기마상이 보이는데, 이 동상의 주인공은작센 왕 요한이다. 89
  • 90. 또한 이곳은 지난 2010년 2월 14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제1회 드레스덴 상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의미있는 장소이다. 드레스덴 상은 독일 드레스덴 우호협회가 분쟁 및 폭력을해결을 위해 노력한 인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했으며, 고르바초프는 1980년대 말~90년대초 개혁정책을 통해 동유럽의 민주화를 이끌어낸 공로를 인정받아 상을 수상하였다.드레스덴에서 맛본 럭셔리 런치~마지막으로 어딜가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먹을거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드레스덴의 아름다움도 배가 불러야 내 것이 되는 법~!!!^^드레스덴은 도시의 아름다움 때문에 관광객이 많고, 약간은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테라스가 있는레스토랑과 카페가 많았다. 빠듯한 예산으로 항상 샌드위치를 사먹었었지만, 드레스덴에서 만큼은우리도 푸짐하게 먹기로 결정! 가장 있어보이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식사를 하였다. 이 곳은 성이 아니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식당이다.식사는 음료부터 시작한다. 음료를 시키지 않으면 직원이 와서 어떤 것을 마실 것인지 계속 물어봄으로 식당에 가면 음료부터 주문하는 것이 에티켓! 각자 취향에 맞게 오렌지쥬스, 키위쥬스, 카푸치노, 물 선택^^ 특이한 점은 물이 웬만한 음료보다 더 비싸다. 90
  • 91. 다음은 우리가 주문한 음식들이다. 가격이 비싼 만큼 보기에는 그릇부터 무척 럭셔리해 보인다.하지만 맛을 보면 약간은 실망, 대체적으로 짠맛이 강했다. 그래도 우린 남김없이 빈그릇 실천^^ ‣ 발사믹과 올리브 오일 드레싱을 곁들인 시즌 샐러드 ‣ 훈제베이컨과 치즈를 올린 토르텔리니 파스타‣ 치킨 포테이토 그라탕 ‣ 돼지고기, 신선한 버섯, 레드양파, 드라이토마토 로 어우러진 허브크림소스 그린스파게티.마지막으로 빼 놓을 수 없는 디저트! 동독포비아를 겪고 있던 지영언니가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 온 기념으로 디저트를 쏘기로 했다. 우리는 핫 라즈베리 아이스크림과 초코파르페, 케잌 등 각자 취향에 맞게 달콤한 디저트를 맛보았다.현재와 과거, 동과 서 모두의 모습을 간직한 드레스덴은 독일에 가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해 주고싶은 곳이다. 그 곳을 방문하게 된다면 눈으로 보이는 아름다움뿐 아니라,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과 보존의식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는 성숙한 드레스덴 시민들의 마음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을것이다. 91
  • 92. 쾰른 대성당 by 흥미(진진) 신을 향한 갈망으로 쌓아올린 높은 탑, 신을 향한 존경을 표하는 커다란 성당, 중세 최고 장인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예술작품, 13세기에 짓기 시작해서 19세기에 완공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매년 500만 명 방문. 역사책 속에서 배우던 위대한 건축물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큰 감동 과 기쁨을 준다. 중세 미술의 위대한 걸작이 라고 일컬어지는 쾰른 대성당을 본다는 것은 큰 기대와 설렘을 나에게 주었다.이런 기대와 설렘을 안고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 반정도 달려서 쾰른에 도착했다. 여행책자를 펴고 대성당을 찾아가기위해 기차역을 나섰다. 그런데 기차역을 나서서 처음 본 쾰른의 첫느낌은 ‘당혹감’이었다. 꼼꼼하고 계획적이란 선입견을 가졌던 독일인들에 대한 편견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커다란 중세의 걸작품이기차역 바로 앞에 큰 덩어리처럼 놓여있었다. 감흥을 느낄 준비가되어있지 않은데 너무 커다란 존재와 마주하게 된 느낌. 빌 브라이슨이 얘기한 실망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역에서 성당으로 연결된 계단을 올라 성당의 뒤로 돌아 걸어가면서 마음을 다시 정리 한 후 전형적인 유럽의 분위기를 내품는 성당의 뒷면을 볼 수 있다. 따뜻한 햇빛과 거리의 악사들의 연주, 레 ‣ 쾰른기차역에 있는 재미있는 사물스토랑들의 야외 테이블 등과 함께 바라본 쾰른 성당은 다시금 그 함. 우리 가방을 담은 승강기가 지하동안의 찬사가 무색할 만큼의 감동으로 다가온다. 로 내려간다.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벽면마다 새겨진 조각들, 조각상 계속 진행되는 보수 작업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스며있을지 상상할 수 없는 작품을 마주하면서 어떻게 이 성당과 마주하고받아 드려야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밖에서 성당을 둘러보고 안으로 들어가면 유럽 어느 동시에나있는 성당들처럼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 규모가 훨씬 커진 모습으로. 멋진 스테인드글 92
  • 93. 라스, 종교화가 그려진 재단 장식 그림들(Altar Piece) 등 을살펴볼 수 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부활까지의 이야기들이 벽면 곳곳에 기록되어있었고, 많은 성인들이 조각되어있었다. 역사적인 현장에서 미사를 함께 하고 싶어서 미사 시간에 맞춰서성당을 방문하였지만, 미사를 보는 성당의 구역은 지역의 신도들에게만 출입이 가능하여서 함께 하지 못하였다.그리고 또 하나 재미난 사실은 1960년대 터키 이주민들이 독일로 이주하기 시작한 후 이슬람 모스크가 없던 시절 쾰른 대성당을 터키 이주민들의 기도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라마단 마지막 날엔 성당 바닥에 카펫을깔고 기도를 올리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쾰른광장에서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들정말 벽돌하나, 창문의 유리하나, 바닥의 타일하나도 그냥 만들어진 것은 없었다. 모두 이야기와 종교적 배경을 가진 것들이었다. 카톨릭 신도이거나, 성경 등종교에 대한 지식이 좀 더 있다면 더 많이 들여다 볼 수 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남았다.그 외, 쾰른은 식민지의 의미를 가진 ‘콜로니아’에서 도시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고대 로마인들의도시였고, 쾰른 시내 곳곳에 로마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아주 오래된 고대도시이다. 쾰른에서 발굴된 로마 유물들이 ‘로마-게르만 박물관’에 잘 전시되어 있다. 지하, 1층, 2층으로 구성되어있다. 1층은 특별전을 열고 있고, 2층은 구석기시대의 쾰른에서부터 로마시대까지의 쾰른의 모습을 정리하고 있다. 각종 건축물의 부재들, 조각상들, 도자기, 유리제품, 무기, 마차 등등 로마인의 삶의 수준과 문화를 잘 들여다볼 수 있다. 또한 지하의 유물들은 부엌, 여성용품, 남성용품, 어린이 장난감, 무덤, 부장품 등 주제별로 정리되어 있어서 당시 로마인들의 생활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성당 가까운 곳에 빌라드-리하르트 미술관과 루드비히 미술관도 함께 있는데, 쾰른을 비롯한 서유럽의 미술사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현대 미술을 살펴보기 위해 들러도 좋을 것 같다. 특히루드비히 박물관 지하에는 백남준 씨의 ‘브란덴부르크문’이 전시되어있다.‣ 쾰른대성당을 마주하고 우리는 기행을 정리하는 나누기를 했다. 93
  • 94. Q 독일 맥주맛을 알어? by 재현이번 독일통일기행의 개인적인 주요 목표 중 하나는 각 지역의 맥주를 마셔보는 것이었다. 평소에 술을 즐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독일에 갔는데 맥주를 마시지 않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해서 가는 곳마다 대표적인 맥주를 마셔보려고 노력했으나 각 도시, 지역마다 양조장이 있고 양조장마다 고유의맛을 내는 수 천종의 맥주가 있는 독일에서 불과 몇 병 마신걸로 노력했다고 하기에 좀 민망한 것도 없지 않다. 다만 내가 마셨던 맥주에 대해 최소한의 조사를 곁들여 간단한 소감을 나누고자 한다.개인적으로 맥주는 크게 4가지 요소가 있다고 본다. 맛, 목넘김, 외형(색, 디자인), 알콜농도 이 4가지다. ‣ 맥주 마시고 흐뭇해하는 청춘개미.맛은 보통 맥주가 갖고 있는 쓴맛 외에 단맛, 신맛, 짠맛 등 기본적인 미각과 감칠맛, 첫맛, 중간맛, 뒷맛, 거품맛 등 확장된 미각까지 포함한다.목넘김은 맥주를 입술에 대었다가 입 안에 흘려 넣고 잠시 머물렀다가 꿀꺽 하는 약간의 운동을통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일련의 과정과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 거침, 톡 쏘는 느낌,거품이 입술과 입 안에 닿는 질감, 혀와 입 안쪽을 덮는 것 같은 텁텁함 혹은 깔끔함, 식도를 통해 전해지는 느낌, 포만감 등을 말한다.외형은 맥주를 잔에 따라놓았을 경우, 바라봤을 때의 색, 거품의 비율과 모양, 탄산이 올라오는속도와 기세 등이고 병으로 마실 경우 병의 색, 디자인, 이름이 주는 느낌 등이다.알콜농도는 술을 마시고 살짝 취하거나 얼얼하다 싶을 정도로 취하거나 얼큰하게 취하거나 아니면 그냥 음료수나 다름없다거나 등 내 몸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는 척도 혹은 실제 내 몸에 취기가 얼마나 빨리, 잘 오는지 등을 말한다. 숙취 등 후유증이 온 적은 없어 제외하겠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인 리뷰! 94
  • 95. Diebels Altbier 뒤이스부르크 거사님 댁에 머물러 저녁 만찬을 즐길 때 마셨던 맥주다. 아무래도 처음 마신다는 생각에 잔뜩 기대를 품고 마셨으며 그 맛 또 한 훌륭했다. 단맛과 쓴맛이 적절히 조합되었으며 으레 맥주를 마신 뒤 내뱉게 되는 ‘크아~’를 유발하지 않는 부드러운 목넘김이 인상적인 맥 주다. 한 병을 다 마셔도 입 안이 텁텁하지 않고 깔끔하다. 첫맛부터 끝맛까지 완벽하다. 알콜농도도 4.9%로 부담스럽지 않다. 내 기억 속 에 최고의 맥주!Berliner Kindl Weiss(Wald Meister)베를린의 유명한 칵테일 맥주다. 맥주 색은 녹색이며 Wald Meister는 ‘숲의 장인’이란뜻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Himbeere라 해서 산딸기 맛이 나는 빨간색 종류도 있다.첫 맛은 느끼기 어렵고 혀에 닿으면 어렸을 때 잘 살던 친구네 놀러가면 먹을 수 있었던 외국 사탕 맛이 입 안에 퍼진다. 단맛이 쓴맛을 누르는 느낌이고 언뜻언뜻 신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반병 정도 마시면 처음느낀 이국적인 느낌이 입 안에 정착하며 이후로는 개인의 선호에따라 더 마시든지 그만 마시든지 결정을 내리게 된다. 탄산이 약간 강한 편이고 색소 혹은 다른 첨가물이 있어서 그런지 뒷맛은텁텁하다. 빨대를 꽂아 먹으면 녹색의 맥주가 보여 신기하다. 병에 그려진 꼬마가 귀엽긴 하다. 음료수 같지만 나름 알콜농도는3%로 가볍다고 마구 마시다가 훅 가는 수가 있겠다.Weizen독일 남부 바이에른에서 나는 밀맥주이다. 베를린의 티어가르텐(Tiergarten, 동물원) 안에 있는 비어가르텐(Biergarten, 호프집)에서 마셨다. 브랜드가 무척 다양하게 있으나 잔에 따라 나와서 정확한 브랜드는 파악하지 못했다. 잔에 담겼을 때 거의 노란색에 가까운 무척 밝은 주황색으로 맛있게 보인다. 첫맛은 쓴맛이 살짝 풍기다가 입에 넣으면 신맛이 올라오며 본격적인 쓴맛과 뒤섞인다. 적당한 탄산이 가미되어 맹렬히 탄산이 솟구치는 걸 볼 수 있으며탄산의 세기를 의성어로 표현하자면 ‘크~’ 정도이다. 전형적인 독일맥주라고 생각되는 좋은 맥주이다. 브랜드에 따라 다른데5~5.5% 사이의 알콜농도를 보인다. 95
  • 96. 티어가르텐TierGarten Tier는 동물, Garten은 정원, 뜰이다. 직역하면 ‘동물의 뜰’ 정도 되겠다. 이곳은 16세기 프로 이센 왕국의 여러 황제들과 귀족들을 위한 사냥터로 만들어졌다가 18세기 공원으로 바뀌어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베를린 동물원 북쪽에서부터 브란덴부르크 문에 이르는 약 4km, 폭 1km에 걸친 방대한 규모의 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 중인 벨뷔성이나 구 제국의회 의사당, 램프 박물관 등의 볼 거리가 있으며 날씨가 좋은 날이면 일광욕장으로 사용될 만큼 독일 시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휴식공간이다. 이 넓은 공원 안에 비어가르텐BierGarten이라는 곳이 있다. Bier는 말 그대로 맥주다. 그러니 비 어가르텐은 ‘맥주의 뜰’ 정도 되겠다. 티어가르텐 안의 비어가르텐이라! 생각만 해도 신나는 장소 다. 본래 이곳의 이름은 카페 암 노이엔 제(Cafe am Neuen See)라고 한다. 즉 티어가르텐이란 이 름의 숲 한 가운데 있는 작은 호수 중 하나인 노 이엔 제 옆에 있는 까페라는 뜻이다.PilsPils도 베를린의 비어가르텐에서 마신 맥주이다. 나는 바이젠(Weizen)을 시켰기 때문에 다른 친구의 것을 한 모금 마셔보았다. 바이젠보다는가볍다. 바이젠이 약간 둔중한 느낌을 입 안에 남긴다면 필스는 가볍게스치듯 입 안을 채운다. 특징적인 맛을 골라내기 어려웠고 ‘내 바이젠이 더 맛있어!’라고 친구에게 자신있게 말했다. 단 이미 바이젠을 마시고 있는 상태에서 필스를 마신 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긴다고 한다. 필스 역시 브랜드에 따라 4.5~5%의 알콜농도를 가진다.Radler개인적으로 맥주에 포함하기 싫은 종류의 음료다. 밀맥주에 사이다 같은 음료를 반반씩 섞은 것으로 애매한 맛이 난다. 맥주에 물 탄 느낌이랄까 첫맛도 애매하고 중간맛도 애매한데 끝맛은 불쾌하다. 이런 걸 마시러 독일에 온 게 아니야! 일견 상큼하고 도수가 낮아 여성들이 선호할 것 같다는 의견이 있으나 맥주는 맥주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이젠→필스→라들러 순으로 마셨는데 갈수록 내 바이젠을 찬양하게 되었다. 짐작했겠지만 2.5%로 도수도 낮다. 96
  • 97. Früh Kölsch 쾰른의 대표적인 전통맥주이다. 사전조사가 된 유일한 맥주이며 현진 이가 합류하고 흥미, 지영 누나가 먼저 떠나기 전 카페에 앉아 한낮에 아이스크림을 안주삼아 마셨다. 전반적으로 맛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으며 쓴맛도 살짝, 신맛도 살짝 난다. 탄산도 살짝 있고 2병째를 마 실까 싶은 마음도 살짝 난다. 목넘김은 부드러운 편이고 넘긴 후 목구 멍 안쪽으로 묵직한 기운을 남긴다. 도수 4.8%로 만만치 않다. "쾰시 한잔 하실래요?"Rapps Apfelwein아펠바인은 사실 맥주가 아니라 사과주이다. 그렇지만 일단 술이니까 같이 껴줬다. 일정의 마지막 날 프랑크푸르트에서 갈 곳 없이 헤매고 있을 때 비를 피해 들어간 카페에서 마셨다. 전날 프랑크푸르트 법당에서 거사님이 한 잔씩 주시긴 했는데 그 때 미처 브랜드를 봐두지 못했다. 첫 모금은 ‘에~ 이게 뭐야!’할 정도로 술 맛도 나지 않고 어설프게 씁쓰레한 사과향이 났으나 두 번째 모금부터 사과향이 입 안에 착 감기며 감칠맛이 나기 시작했다. 입 안에 감긴 맛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마실수록 진해져갔는데 일정 정도 진해지자 더 이상진해지지 않았다. 묘한 매력이 있어 계속 홀짝거리게 만드는 술이다. 도수는확인하지 못했지만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약간 음료수 같기도 하다. 끝! 97
  • 98. Q 독일에서 식비 아끼기 by 지봉그냥 아낀다고 되나? Nono~소세지와 맥주의 나라 독일까지 와서 잘 안 먹는다면 위에대한 예의가 아니지~ ^^YP4Peace와 베를린에서 합류하기 전까지 난 말자와 일주일정도 여행을 했다. 북유럽의 엄청난물가에 엄청 쫄아 있어서 그런지 독일에 오니 물가가 어찌나 착한지 감동이었다. 그럼에도 재정상태가 넉넉지 않고, 후원까지 받아서 온 마당에 맛집이나 찾아다니면서 돈을 펑펑 쓸 순 없었다.그래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방법은 많았으니...1. 길거리 음식한국에서도 독일이 소세지가 유명하다고 하더니 길거리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첫날 저녁 메뉴도 길거리 소세지. 아래 사진처럼 큰 기계를 허리에 차고 빠른 손놀림으로 소세지를 뒤집고 빵에 넣고 소스를 뿌려서 주는 데 9개 받는데 10분도 안 기다린 것 같다. 사진으로 보기에 볼품없어 보이지만 가격대비 맛도 좋다.또 다른 음식은 되너케밥. 베를린하면 되너라고 한다고 한다. 되너는 독일에서 사는 터키인들이케밥을 독일에서 먹기 편하게 만들어서 생긴 거라고 한다. 처음 먹은 되너에 반해서 본에서 유명한 되너케밥집을 찾아서 먹었다. 통역을 담당해주신 조선희 쌤께서 그냥 길거리에서 파는 되너는맛이 없고, 터키인들이 많이 있는 곳에 가야 맛있다고 해주셨다. 우리가 먹은 되너는 조선희 쌤말로는 관광객이라 그런지 고기도 조금 넣은 편이라고 했지만 나는 정말 반했다. 매운맛과 안 매운 맛이 있는데 매운맛을 먹어도 아주 맵다는 생각을 안 들 정도였다.또 베를린에서 유명한 것이 커리부어스트이다. 소세지를 카레가 묻은 소스에 찍어 먹는 것 같은데특이한 점은 생각이 안 난다. 조쌤 말로는 소세지만 먹다보면 빵을 꼭 먹고 싶어지니 소세지를 주문할 때 빵을 같이 주문하라고 했다. 98
  • 99. ‣ 속이 꽉 찬 되너 케밥. ‣ 커리부어스트2. Aldi 와 dm을 항상 주목!많은 돈 없는 여행자들의 여행기를 읽어보면 알디와 디엠이 많이 등장한다.(기념품도 여기서 산다.) aldi와 dm은 가격이 싼 마트다. 어디를 가나 aldi와 dm의 위치를 확인해두면 편리하다. 우리는 저녁을 주로 호스텔에서 만들어 먹었는데, 그때마다 장을 이곳에서 봤고 한국에서는 비싼수제 소세지와 연어와 모짜렐라 치즈도 싼 가격에 사서 완전 푸짐하게저녁을 먹었다. 다양한 맥주까지~무엇보다 adli와 dm에서는 먹고 난 패트병들을 모아서 팔 수 있어서 생수값 정도는 벌 수 있다. 만만히 볼게 아니라 실제로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은 전문적(?)으로 길거리에서 빈병을 수집하고 다니시는 분들을 종종볼 수 있다. 99
  • 100. 3. 호스텔 free food 이용하기호스텔에 도착해서 짐 풀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부엌에서 free food를 확인 하는 것이다. 여행자가 남기고 간 각종 음식들이 있는데 정말 요긴하게 쓰인다. 우리도 여행 중에 쌀, 파스타, 스파게티면, 케찹, 양파, 콘프로스트 등을 득템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착한 마음씨를 믿고‘내일도 남아있겠지’하는 생각은 절대 안 통한다. 탐나는 음식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름을 써놔야 한다. +_+4. 추천 저녁 메뉴1/ 연어샐러드연어 와 샐러드, 드레싱으로는 요플레2/ 파스타를 이용한 수제비 or 칼국수수제비 소스를 한국에서 챙겨가면 매우 요긴하다. 여행 중에만난 여행자분이 우리 먹으라고 주셨는데 덕분에 한끼 매우배부르게 먹었다. 파스타가 쫄깃쫄깃 하니 정말 수제비나 칼국수를 먹는 기분이다.3/ 스파게티프리푸드에 스파게티 면이 많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이것과 케찹만 어디서 구할 수 있다면끝~ 그 다음은 태선오빠를 부르면 된다. 정체는 모르지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준다.4/ 수제 소세지삶고 후라이팬에 몇 번 뒹굴어주면 끝~! 개인적으로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냥도 먹기도 하지만 쏘야를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100
  • 101. Q 호스텔을 소개합니다 by 태선시티호스텔 베를린 (베를린)시티호스텔 베를린은 U6반에서 Alt Mariendorf역에서 내리면 도보로 5분 걸리는 위치에 있다. 이호스텔은 북한대사관의 소유로 재정위기로 임대를 내준 것이라고 한다.(바로 옆에 북한 대사관이위치해 있다.) 지하철과도 매우 가깝고 도심에 위치했기 때문에 주요 관광지 어디든지 쉽지 않게갈 수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 간판 ‣ 호스텔 안에서 북한 대사관 뒤편이 보인다.방은 깔끔하며 내부 샤워실 외에 공동 샤워실도 있어 사용하기가 편리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침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인데, 빵, 콘프로스트, 소시지, 치즈, 계란, 과일, 주스, 각종 잼, 요구르트 등 간단한아침식사를 할 수 있어 배고픈 여행자에게는 더더욱 유용한 호스텔이다. 로비나 식당에서는 무료와이파이가 되며, 늦은 저녁시간에 식당에서 우리처럼 모임을 가질 수도 있다.주소 : EGI GMBH CITYHOSTEL-BERLIN Glinkastr. 5-7 D-10117 Berlin사이트 : www.cityhostel-berlin.com전화 : +49 (0)30 23 88 66 850 101
  • 102. 캉가루스탑 호스텔 (드레스덴)처음으로 도착한 동독지역이어서 많이 긴장했던 드레스덴!!밤 늦게 도착하여 거리는 깜깜 왠지 모를 두려움에 떨었지만 캉가루 호스텔은 그런 불안감을 날려줄만큼 친절하고 깔끔한 시설을 갖췄다.아침은 제공이 안 되었지만 부엌이 넓고 주방기구도 많아서 요리를 하고 싶은 욕구가 마구 샘솟는다!! (마트는 드레스덴 역 안에 있다) 또한 넓고 편한 소파와 해먹이 있어서 쉬기도 좋다.‣ 넓직한 부엌에서 요리중인 YP4Peace ‣ 거실에 있는 스타일리쉬한 해먹.기차역에서 가깝고 구 시가지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캉가루 스탑!!일정만 허락한다면 3~4일 더 머무르고 싶었던 아름다운 드레스덴에 위치한 멋진 호스텔이었다.주소 : Erna-Berger-str. 8-10, Dresden, 01097, Germany 102
  • 103. central globetrotter hostel (라이프치히)라이프치히 중앙역에서 나와서 침착하게 잘 찾아야 했던 호스텔이다.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가며갔지만 초행길로는 찾기가 약간 힘든 곳에 위치해 있었다.(뒷골목 느낌?) 찾고 나서 둘러보니 중앙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해 있던 곳을 우리는 30분간 헤매고 다녔다.시트를 새로 사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식당도 넓고 많은 외국인들이 드나들어서 서로의 친목을 다지기에도 좋다. 모든 호스텔에는 프리푸드라는 여행자들이 놓고 간 음식들이 있어서 요리 하기도 좋다. 중앙역에 알디라는 싼 마트가 있어서 시장보기에도 편리한 위치에 있다.체크아웃을 하고나서도 짐을 맡길 수 있는 점이 장점이고, 라이프치히에서 야간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넘어가야 했는데 체크아웃을 했는데 양해를 구하고 기차시간이 되기 전까지 씻고 저녁까지차려먹게 해줬다.주소: Kurt-Schumacher-Str. 41 • D-04105 Leipzig홈페이지 :http://www.globetrotter-leipzig.de/#q=anreise%2Fen%2F 103
  • 104. Y 4ec PPae마무리 한마디! 백흥미 잘 다녀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즐거운 여행이었고, 나의 모습을 잘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었 습니다. 또한 통일된 독일에서 우리의 통일을 바라보고자 한 바람에도 만 족스런 여행이었습니다. 한반도의 통일을 간절히 바라고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지만, 정말 통일이 가능한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와 같은 우리들이 할 일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보다 앞 선 경험을 가진 독일에 가면 더 잘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나선 길이었 습니다. 똑같진 않지만 내게 막혀있던 부분들에 해답의 실마리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독일 사람들, 독일 역사, 독일 사회, 독일의 통 일, 한반도의 분단, 한반도의 통일, 그리고 각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어갔습니다. 그들의 삶으로, 그들의 역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들을 통해서 독일을, 그리고 멀리 떨어져있던 내가 살아가고 있는 한반도 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지금, 변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또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저희가 다녀온 시간은 짧지만 우리가 어느 지점에 서있는지 더 잘 알게 된 것 같습니다. 통일로 가기 위해서 우리에겐 아직 많은 단계들이 남아있습니다. 통일이 쉽지 않은 이유는 김 정일의 잘못도, 이명박의 잘못도, 정치인들의 잘못도 사실은 아니었습니 다. 내가 살아가는 ‘사회’가 어떤 가치를 얘기하고 있는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고민 속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가의 문제였습니다. 다시 그 지점에 서서 시작합니다. 내가 서있는 지점을 알게 되어 참 좋습니다. 아직 방법은 모르지만 가야할 방향을 얻은 느낌입니다. 갈 길은 멀지만.. 마지막으로 우리의 기행이 가능할 수 있도록 지켜봐준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104
  • 105. 박재현왜 독일을 가냐고 물으면 답이 궁색했다. 실은 가기 전에도 알고 있었다.내게 통일, 평화가 간절하지 않다는 것을. 간절하지 않다는 것을 독일에가서 다시 확인하고 왔다. 나는 아직 이 정도이다.왜 독일에 왔냐고 물으면 대답했다. 당신들 사회가 통일 전후로 어떻게변했는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그래서 행복한지 알고 싶었다고.개인의 깊은 사연, 사회의 작동원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경향은 볼 수있었다. 좋은 시간이었다.왜 독일에 갔다왔는지 누가 묻지 않아도 스스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 가지 확실한 것, 불과 내일이면 빈 껍데기 같은 말일지라도 나는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나의 삶으로 답하겠습니다.이준호독일을 다녀온 지 2개월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소감문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또 그만큼 많은 분들이여러모로 도와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하니 다시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이미 기행은 끝났고, 함께 준비한 다른 분들 모두 일상으로 돌아갔지만마음의 중심에는 이 기행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저는 한국에 돌아와서 감흥을 잊고 개인적인 고민에 빠지기도 했지만 이소감문을 계기로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싶습니다.그렇게 계속 돌이키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내가 가진 재능을 통해 평화와 통일에 기여할 수 있다면우리의 이번 기행은 3개월, 4개월이 지나도 과거가 아닐 수 있을 것 같습니다.올해 가장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105
  • 106. 김태선처음 독일을 가기 전 다짐했던 것은 새로운 세상을 내 눈으로 보고 내발로 서겠다 였습니다.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도착한 독일에서 때로는 피곤하고 지쳤다며 귀찮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에서 만나 여러 단체와 사람 사람들..그들을 만나며 멀게만 느껴졌던 통일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통일의 방법에 대해 알아 나갈 수 있었습니다.지금의 시대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정신과 공감성은 무엇이 있는지 다시살펴보며 우리가 나갈 방향성을 엿보았습니다. 처음 숟가락을 얻는 약간은 불편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통일독일기행이저에겐 인생에서 잊을 수없는 커다란 경험을 주었습니다.청년통일독일을 인터뷰하다가 청년통일한국을 인터뷰하다로 바뀌길 믿습니다!김민지한창 약사고시를 준비하는 지금, 도서관에 앉아 올 여름의 독일을 떠올리면 약간의 괴리감은 있지만, 즐겁고 충만했던 그때의 그 느낌이 먼저 떠오릅니다. 전범국가이자 분단국가에서 통일을 이루고, 유럽의 중심이 된통일국가. 독일에 직접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을 먹던 순간이 생각납니다.막연한 우리나라의 통일을 꿈꾸고, 막연히 활동을 시작하고 ‘원’이 없음에힘들어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그것. 통일이라는 단어가 늘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분명 나만은 아닐거라고 생각하지만그래서 더 슬펐던...‘통일’이라는 말.그렇게 무겁고 어렵기만 했던 통일이 독일을 준비하고 여행하면서는 좀더 활기차고 발랄한, 신나는 주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함께 한 사람들과 생각 없이 신나기만 했던 것도 영향이 있지 싶어요(히히) 물론 미리섭외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설명을 듣는 과정에서는 쉽지 않음을 느낄 때도 많았습니다. 밤에 나누기를 할 때면 ‘아직 잘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쉽지 않음 속에 드러난그들의 자부심과 안정감, 동서독 ‘통합’의 과정을 통해 성숙해진 그들과그들의 나라를 짧지만 직접 보고 겪으며 저에게 생긴 확신은 부담보다는 106
  • 107. 오히려 희망이었습니다. 그들이 부러웠고, 통일이라는 단어 전에 오는 ‘평화’ 혹은 ‘통합’을 통해 법륜스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비전’이 무엇인지,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거창한 말들을 제외하더라도 저는 그냥 좋았습니다. 그곳에 있는 내가 좋았고 내 옆의 팀원들이 좋았고, 독일에서 만난 그들이 참 좋았습니다. 통일국가에서의 십여일은 저에게 더 나은 통일에 대한 상상력과 책임감을남겨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지식이 아닌 체험과 경험의 중요성을느끼게 해주었습니다.그래서, (여러모로 어려움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녀오길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함께 한 사람들, 우리와 눈빛을 교환을 해준 많은 나라의 친구들, 그리고 한국에서 묵묵히 지켜봐주고 도움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한,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비어가르텐의 독일맥주와 소세지가 생각나는 오늘입니다.김지영사실, 프랑크푸르트로 향할 때만 하더라도 통일독일에 대한 공부보다는휴식의 목적이 컸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직장에서의 생활에서 좀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컸었지요. 함께 기행에 참가한친구들이 열심히 통일 독일에 대해 공부할 때, 그다지 크게 통일과 독일을 공부해야겠다는 의욕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유럽 여행이 아니라 분단된 독일, 통일을 이뤄낸 독일, 통일된 사회를 살아가는 독일을 경험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인터뷰하고 부딪혀보면서 통일에 대하여 내가 흑백논리로 단편적으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통일에 대해서는 당위성이나 구닥다리 이슈정도로만 생각했던나 자신에게 다채로운 시각을 가질 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통일보다우선인 것은 전쟁을 끝내기 위한 평화협정이라는 점, 단순히 남북한의 땅을 합치게 되는 물리적 통일보다 남북한 사람들 간의 심리적인 통일이우선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독일인들을 만나면서 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프라우엔 교회에서 통일과 평화운동을 실천하고 계시는 목사님을 만나뵙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목사님께서는 먼 한국에서 온 청년들에게 짧지만 강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한국의 청년들은 남북한 간의적개심을 없애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이 질문을 받은 순간,머릿속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적개심?... 그래, 바로 적개심이었구나. 우리는 서로 적이었고, 지금도 적이구나! 왜 우리가 통일이 먼 곳의 이야기인지 처음으로 확연해졌습니다. ‘우리는 이념이 다른 적이었으므로 그토록치열하게 싸웠고 미워했고, 지금 갈라져 있구나. 정치가들이 선거철마다이용하는 레드컴플렉스의 본연은 사실 적개심, 분노, 화였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107
  • 108. 그리고 나도 아직은 그들과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알게되었습니다. ‘적개심이라는 거, 나와 다른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때, 비로소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될텐데, 나는 얼마나 이질감을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왜냐면, 그런 질문을 문제의식을 처음으로 가져보았으니까요.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시작한 통일독일 기행. 그러나 분단 한국에서 내가당면한 문제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나 자신은 통일에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이렇게 내 안에서의 통일을 위한 준비는 한 걸음 시작되었으니까요.물리적통일은 아직 멀게만 느껴지지만, 오히려 마음의 통일을 위한 상큼한 첫발은 내디딘 자신을 봅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마음은 충만해지고있습니다. 함께 이 소중한 10일을 보낸 통일독일기행 친구들과 우리가공유한 시간과 호흡한 공간을 포함한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게 좋은 인연 주심을 감사드립니다.민지원독일로 통일 기행을 간다고 설레었던 게 두달 전. 꽤 오래전 일이 되어버렸다. 갈 때 무엇을 배우고자 했던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무언가 얻으려고 갔었는데 독일에 간다고 될 일은 아니었던 거 같다.얼마 전까지 또 다른 분단국가였던 독일. 독일의 통일과정을 공부하고 실제로 독일에 갔고, 근데 통일이란 게 와닿지 않았다. 그 만큼 우리나라의분단이 와닿지 않은 것 같다. 독일의 분단과 통일 과정이 우리와 너무도다른 상황이라 독일 처럼 우리도 이렇게 하면 되겠다라는 생각보다 우리는 어쩌지.. 이런 생각도 많이 들었다. 그리고 통일과정과 그 이후가 참쉽지 않겠다 힘들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결코 우울하진 않았다. 통일기행을 갈 때 다짐으로 부러움을 잔뜩얻어오고 싶다고 했는데, 이 마음을 잔뜩 챙겨왔다. 아직 독일도 통일이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런 독일을 보면서통일된 우리모습도 막연히 생각해본다. 현실에 돌아온 지금, 내가 무엇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나눴던 나누기 중에 특별히 무엇을 하기 보다 묵묵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 같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독일 이후로 변한 게 있다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 아닐까. 통일에 대한 막연한 꿈과 내 삶 속에서 묵묵히 무언가를 하는 것.야심차게 준비했던 통일독일기행과 그 이후, 다들 바쁜 일정으로 점점 잊히겠지만 여덜명이서 함께한 시간이 매우 즐거웠고 소중했다. 108
  • 109. 서영현어느 덧 기행을 마치고, 우리가 다녀온 이야기를 정리하는 시간입니다.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아름다웠던 고향의 파괴된 교회를 복원하기 위해 마음을 뭉쳤던 드레스덴 사람들, ‘자유’ 그 하나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매일 월요집회에 참석한 홀리쳐 여사님, 그리고 길거리 인터뷰를 하며 만났던 저마다의 분단과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책이나 다른 매체를 통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은 그 자체로 큰 감동이었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순간들이었습니다.평화와 통일, 이 말들은 저에게 여전히 풀기 힘든 수수께끼 같은 말입니다.그리고 독일과 우리나라의 상황이 처음부터 다른 점이 많음을 발견하고더욱 어렵다고 느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번 기행을 통해 이 어려운 문제도 답이 있다는 왠지 모를 확신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숙제를 해결한 그들을 보며 큰 힘을 얻었고, 우리도 할 수있다, 꼭 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앞으로에 대한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제 마음속에 ‘평화’의 씨앗이 심어진것 같아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저희에게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109